[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65화.
-휙! 휘휙!
-휘이이익!
쇄도하는 화살의 비.
허나,
“흡!”
나는 수수께끼의 마나를 손에 틀어쥐고 크게 휘둘러, 전방위로 ‘자기력’을 피워올렸다.
아무리 몬스터의 도구라 할지라도, 화살의 화살촉은 단단한 메탈의 속성을 띄고 있을 수밖에 없다.
여섯 갈래로 굽이치는 갈래 번개는 그 화살을 일순간에 저지해냄과 동시에 그것을 매개체로 타고 흘러 은신한 궁사들을 향해 휘몰아쳤다.
-콰지지직!
무식한 굉음을 일으키며 붉게 번뜩이는 전격.
직후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무에서 투두둑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역시나 흰 피부의 블러드 엘프들이었다.
“?”
스스로 마나를 휘두르면서도 사실 잘 이해가 가진 않았다.
어째서 묠니르의 패널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것인가.
내가 자신의 손을 응시하며 그런 의문을 가지는 사이, 눈을 붉게 물들인 엘프 다수가 낙하하며 날 향해 쾌속의 단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눈앞을, 허벅지를, 어깻죽지를 아슬아슬하게 빗겨가는 날카로운 검광.
하지만 마력을 되찾고, 본디 검사로서 자신을 갈고닦은 내게, 궁사인 그들이 근접전을 시도한 것은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파지지지직!
또다시 굽이치는 파도,
나는 날아드는 단검을 쥔 손목을 틀어쥐고는 번쩍이는 진홍의 전격을 그대로 방출했다.
일순간에 숯덩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구는 블러드 엘프들.
-휙!
-휘이익!
그러나, 자신들의 동료가 어찌 되건 신경도 쓰지 않는 블러드 엘프들의 화살 비는 또다시 돌풍을 일으키며 발사되었다.
-두근!
나는 또다시 자기력을 부여해 이를 밀어낼 참이었는데,
그런 나의 사고보다 빠르게 내 심장에 공명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찰나,
세상이 느려지고, 심장은 더 거세게 뛴다.
무엇이 나를 자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부름에 응하듯 팔을 쭉 내밀었고···.
-파아아아악!
압도적인 폭음과 함께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붉은 색의 무언가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이윽고 손에 잡히는 것은 묵직한 무게의 검 한 자루.
날아오는 기세만으로 화살의 비를 걷어낸 그 검의 정체를, 나는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본디오 빌라도···?”
그것은 쥐고 휘두르는 것만으로 사용자의 생을 앗아가는 최강이자 최악의 마검, 본디오 빌라도였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언제나 장미 가시와 같이 격하고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던 본디오 빌라도의 오러가 한없이 따스하고 온화하다.
-Heeee!
-Huuuuu!?
이젠 아예 은폐물에서 튀어나와 원군을 소환하고 군세을 갖추던 블러드 엘프들 사이로 의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마 ‘본디어 빌라도’의 짙은 핏빛 오러를 녀석들도 느낀 것이겠지.
이윽고, 나는 드디어 지금껏 있던 기현상을 모두 설명해주는 두 개의 메시지를 목도할 수 있었다.
<알림>
ㅡㅡㅡㅡㅡㅡㅡㅡ
*각성자, 이건우는 ‘혈속성 오브’를 보유한 흡혈종입니다.
*‘성역’의 마나는 당신을 보좌합니다.
<흡혈종은 ‘성역’의 힘으로 모든 능력치가 300% 상승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그것은 이 ‘성역’에게 내가 흡혈종의 한 개체로 인정받아 디버프가 아닌 버프를 받고 있다는 메시지였고, 또다른 하나는···.
<알림!>
ㅡㅡㅡㅡㅡㅡㅡㅡ
*혈검, ‘본디오 빌라도’는 각성자 이건우의 생명 에너지가 아닌, ‘혈속성’ 마력으로 가득 찬 성역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각성자, 이건우의 자격 미달인 육체는 붕괴하지 않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리스크 없이 본디오 빌라도를 휘두를 수 있다는 충격적인 정보를 담고 있었다.
‘...이건 대박인데?’
***
사용자의 생명 에너지를 빨아먹는 저주받은 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있었던 종교와의 전쟁에서 ‘태고의 흡혈귀’를 따르는 열두 번째 사도이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휴거교의 주교급 신자, ‘바오로’를 처단하고 여단장 최중철이 직접 가지고 돌아온 무장.
그것이 바로 혈검. 본디오 빌라도였다.
전생에, 이 혈검을 사용하던 목사는 ‘무한한 생명의 단지’를 거머쥐고 몇십, 몇백 번씩이나 육체를 갈아타며 그 막대한 혈검의 힘을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허나, 하늘을 가르고, 대지를 물처럼 녹여 버리던 그 어마어마한 권능도 실은 ‘본디오 빌라도’의 최고 출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데스나이트 케일른과 싸우며,
나 자신의 생을 포기하면서까지 끌어낸 이 신화급 혈검의 진짜 힘은 바로,
불가능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었다.
일검,
그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는 홍색의 유성.
오검.
그것은 대지에서 사선으로 치솟는 용암 같은 오러의 파도.
이윽고 숨을 집어삼키며 이어가는 검의 연쇄가 십검에 달하자.
가볍게 내디딘 발을 축으로 형성된 짙은 핏빛의 오러는 한 점에 모인다.
-착!
시원한 쇠소리와 함께 검집과 검신에 모여든 오러는 이내, 공간 그 자체를 뒤틀어버리는 지평선이 된다.
발검(拔劒) 제1형.
황무지의 꽃.
검제 이서영의 환영과 내가 겹쳐지는 그 순간, 수평으로 양단되는 모든 것.
-촤아아악!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테라포밍 진압대가 쓰기 위해 마련했던 지휘소나 휴식용 텐트와 같은 진지들도,
원군을 불러 전위를 확보하고 무차별적인 사격을 시작하려 했던 블러드 엘프 궁사부대도,
그 엘프들이 ‘나’라는 한 인간을 막기 위해 쉼 없이 소환하던 이계의 나무 정령과 뿔 달린 코끼리 형태의 괴수도,
그 모든 것들은 형체를 잃었다.
탐욕스럽고, 치열하게 기세를 확장하는 핏빛 오러에 휘감겨 녹아 사라진 것이다.
으스러지는 것도, 재가 되는 것도 아닌···.
직접적인 의미에서의 ‘소멸’.
그건,
‘오브-성혈’과 공명하며 그 힘이 증폭된 본디오 빌라도를 휘두를 수 있게 된 내가 그것을 단, 열 번 휘두른 결과였다.
“후우우우우우.”
긴 한숨이 나왔다.
생명에 지장이 생기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저 시선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뒤덮을 만큼의 거대한 오러를 휘두르는 것이 힘들어 반사적으로 나온 한숨이었다.
허나, 그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다시금 눈에 힘을 주자, 곧바로 내 앞에 나타나는 메시지.
*‘성역’의 마나는 당신을 보좌합니다.
몇 번을 봐도 믿기지 않지만, 이 ‘성역’은 나를 흡혈종으로 받아들였다.
‘성역 선포는 전생에서부터 정말 답이 없다고 여겼을 만큼 절대적인 경계 대상이었다. 그런데···.’
휴거교의 신물인, ‘오브’를 몸에서 활성화하는 것으로 디버프를 회피하는 것은 물론, 도리어 버프를 받을 수가 있었다니······.
“젠장···.”
이런 놀라운 정보를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전생의 수많은 전장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게 무엇이라도 베어버릴 권능을 쥐게 된 나였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속의 공허함은 더욱 커지기만 하는 듯했다.
그렇게 멈춰있기를 3분.
나는 다시금 제정신을 차리고는 ‘본디오 빌라도’를 고쳐 쥐며 걸음을 서둘렀다.
후회는 언제나 너무 늦는 법이니, 지금부터라도 더 후회할 일을 늘리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
갑작스러운 ‘전이’ 직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의외로 남궁연 소위였다.
하늘이 붉게 변하고,
세상이 뒤집히며,
정신을 잃은 사람들이 후두둑 허공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돌발적인 사태에 본능적으로 스킬, ‘섬광’을 발현한 남궁연 소위는 일순간에 드넓은 지형의 저주를 걷어냈고, 그녀의 눈부신 반사신경 덕분에 다수 지휘관은 ‘전이’ 직후 빠르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모두 정신 차려!”
가장 먼저 키를 잡은 것은 역시나 가장 광범위한 공간을 동시다발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백귀야행의 주인, 이초희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시작된 돌발 사태였음에도 이초희는 빠르게 하늘 고래 ‘알데이란’을 소환했고,
그 거구의 날갯짓은 그 자체로 이 전이 장소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던 코끼리 형태의 괴수들을 날려버리기에 성공했다.
독을 뱉는 손바닥만 한 페어리.
아파트 3층 높이에 거체를 움직이며 다가오는 나무 정령과 ‘알데이란’의 힘으로 날아갔지만, 금세 고개를 들도 다시 맹렬한 돌진을 반복하는 뿔 달린 코끼리 괴수까지.
그 모든 맹공은, 마치 ‘전이’에 휘말린 모든 이들을 단숨에 죽이기 위해 계획이었던 것처럼 철두철미했다.
기습을 시작으로 빠른 연계로 이어지는 몬스터들의 공세.
그래도 이곳에 모인 호걸들은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숙련자들이었고, 일어서는 1군단, 24연대, 7여단의 대마력 포병대는 순식간에 전위와 후위를 구축해 전쟁에 임했다.
허나, 그럼에도 전이 직후에 있었던 1차 교전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까놓고 순전히 운이 좋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곳에는 신성한 프로텍트와 힐을 사용할 수 있는 성전사도 있었고,
일순만 노출되어도, 눈을 뒤집고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게 되는 무서운 저주를 해체하는 능력자, ‘남궁연 소위’도 있었다.
비상사태를 인지하고, 곧바로 자신의 고유 스킬인 ‘야수화’를 발현한 여단장 최중철.
그리고 가장 먼저 사태를 파악하고 아비규환에 휩싸인 병사들을 보호했던 이초희.
정말, 그중 한 사람이라도 그 자리에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기적의 전투였다.
교전은 짧았지만, 백귀야행 이초희가 느낀 바는 많았다.
‘전이’되기 전에는, 쇄도하는 화살의 비를 고유의 ‘마기’로 모두 튕겨내던 그녀의 요괴들이 지금은 시퍼런 피를 흘리며 신음을 힐려댔기 때문이었다.
“타르타로스로! 내부에 있는 검사대와 협회 요원들과 합류하면서 방어라인을 구축해!”
10분 남짓했던 교전 끝에 내려진 빠른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은, 정말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남궁연 소위가 이건우의 부재를 확인하자 길길이 날뛰었던 것만 제외하면, 이 테라포밍 진압대는 큰 문제 없이 이미 타르타로스에 들어가 있던 선발대와 만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타르타로스 진압대는 지하 10층과 11층에 멈춰 지독한 수성전을 반복하고 있었다.
“탄···! 탄이 다 떨어져 갑니다!”
“포격조의 마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와 아래.
이초희가 ‘알데이란’을 수직 하강시켜 뚫어낸 어마어마한 크기의 구멍을 좌측에 두고, 마공학 바리케이드를 펼쳐 일종의 기지를 건설해낸 진압대.
1군단의 공병대가 긴급 차출 병력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조차 불가능했으리라.
그래. 그건 정말 좋은 일임이 분명했지만,
“부협회장님! 이젠 결단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당장 들려오는 24연대 부사관의 간곡한 호소처럼, 벌써 2시간이 넘게 이어온 이 비루한 수성전도 이젠 한계에 다다랐다.
*테라포밍 ‘4단계’ 달성까지 남은 시간: 18시간 11분.
저 하늘에 떠 있는 메시지의 시간도, 비정상적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당장 표기된 시간은 여유로워 보일지 몰라도, 정작 최하층의 입구를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 적들과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 ‘혈창’의 소유자까지 고려해보면···.
최하층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5시간은 족히 걸릴 거란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현실의 5시간은, 메시지 속의 15시간을 흐르게 만들겠지······.’
이미 테라포밍의 가속화 배율 따위, 진즉에 파악하고 있던 이초희다.
부족한 시간,
점차 떨어져 가는 보급품과 병사들의 기력.
하물며 무한히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은 전보다 강해진 상태였고,
그에 비해 이곳 헌터들의 눈앞에는 말도 안 되는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흡혈종을 제외한 생물체는 모두 ‘성역’의 힘으로 모든 능력치가 반으로 격감합니다.>
적은 강하게, 아군은 약하게 만드는 스킬이라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 신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이초희도 알고 있다.
눈앞에서 그녀를 독촉하는 세 군인들이 절박한 이유를 말이다.
이곳에서 이렇게 마냥 기다려도, 문제 상황은 해결되지 않는다.
역으로 가면 갈수록 더 최악, 마지막 발버둥을 칠 기력마저 잃고 말겠지.
이초희는 알고 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데 모르겠는가. 현 협회장에게 받은 가르침으로 국내 그 누구보다 명석한 분석력을 가지고 비상한 판단력을 가진 것이 그녀다.
허나, 어찌 쉽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함께 죽자고···.
그녀의 명석한 두뇌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이곳의 모든 각성자의 힘을 다 합해 ‘동귀여진’의 기세로 총공세를 시작하는 것뿐이었단 말이다.
대체 어찌 이 ‘절망’적인 상황을 전해야 는 걸까.
골머리를 싸매던 이초희.
그런데 한참 동안 말이 없던 24연대의 김우찬 중사는 문득, 아주 점잖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부협회장님··· 만일 제가 죽는다면···. 저는 그곳이 전장이었으면 합니다.”
그건 다들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으나, 누구도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이었다.
‘죽음’을 대범하게 입에 담자 자연스레 그 일대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어림잡아도 이백 명이 족히 넘는 그들의 주목을 받고도 초연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중사.
“제 딸아이가 많이 아픕니다. 이미 2년 넘게 병원 신세를 지고 있죠. 그런데 제가 한 달 만에 간신히 병원에 얼굴을 비추니 딸이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김우찬 중사의 어조는 꽤나 담백했고, 그의 목소리에 끝없이 이초희의 결단을 갈구하던 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올해 생일에는 꼭 딸기 케이크를 먹고 싶다더군요. 향을 피워 아내도 부르고, 그렇게 온 가족이 다 함께 생일을 보내보는 게 자기 소원이라고···. 딸은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생일,
그 희망찬 단어와 대비되는 저 하늘의 붉은, 잔혹한 메시지.
“그리고 그 딸아이의 생일이 바로 내일이군요···. 저는 아내의 기일도, 딸의 생일도 기억 못 하는 못난 아비지만······.”
이내 살짝 무릎을 굽혀 시선을 낮추고, 앉아있는 이초희의 눈을 마주 보는 김우찬 중사.
그의 눈은, 그리고 그런 그를 마주 보는 이초희의 눈은 더없이 애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적어도 딸아이의 생일을 지키는 군인으로 죽고 싶습니다. 제가 의미 있게 죽을 수 있도록,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이초희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또르르 흘릴 것처럼, 젖은 눈동자로 결연한 얼굴의 군인을 바라보았고···.
“...의미 있는 죽음.”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인사라도 드리고 오는 건데···.”
“......어머니.”
그런 그녀의 뒤에는 진지한 눈빛으로 김우찬 중사의 말을 듣던 많은 군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갑작스럽게 천지개벽의 혼돈에 휩싸이고 이 비루한 수성전을 이어나가길 2시간.
이 상황에 ‘생환’을 바라는 갈구하는 것이 어찌나 허망한 것인지를 말이다.
“다···. 죽을 거야. 살아남아도, 극소수···. 그것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헌터가 아니면···.”
이에 이초희는 어렵사리 마지막으로 경고 아닌 경고를 입에 담았는데, 그 초조하고 조심스러운 경고에 비해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나도 초연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에 하나 부협회장님이 살아남으신다면···. 그냥 제 딸아이에게 아빠는 멋진 군인이었다고, 그렇게만 전해주십시오.”
굳센 의지도, 긍지 높은 맹세도 아닌 단순한 유언 한 줌.
허나, 그는 고작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그대로 몸을 일으켜 옆에 널브러뜨려뒀던 자신의 장구류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퍼져나가는 죽음의 준비.
일대의 군인들 모두가 그를 따라 각자의 무장을 손에 쥐기 시작했다.
“이 앞은 마경이야.”
아직 굳어있는 이초희를 제외한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참지 못한 이초희가 다시 한번 단호하고 무섭게 경고를 했지만, 이미 장구류를 모두 착용한 김우찬 중사는 담담하게 답할 뿐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
“충분히 각오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는 건, 살아남은 자들의 업. 그리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건, 우리의 죽음입니다···.”
굳건한 눈빛.
확고한 신념.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길 택한 이들을 막을 수단 따위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껏 수많은 이들의 희생 끝에 살아남아 끝내 백귀야행이란 이명을 가지게 되었던 S급 헌터, 이초희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고······.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소매로 젖은 눈가를 쓱쓱 문질러 닦은 이초희는 고한다.
“...그래. 가자. 가서 싸우자. 가서 죽자. 우리의 시체가 쌓이고 쌓여, 우리의 무덤이 파이고 파여, 그 위에 선 인류가 끝내 승리할 수 있도록!”
““충성!””
유성과도 같은 하늘 고래 ‘요괴’가 하늘로 튀어 올라 다시금 대지로 추락하는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죽음을 다짐한 총력전의 시작이었다.
한 겨울에 내리는 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