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57화.
두 여자에게 이토록 대놓고 연정 어린 시선을 받는 남자.
부협회장 이초희까지였다면 몰라도, 이서영까지 이렇게 나온다는 것을 확인한 현재 베르디르는 마음속에서 이번 의뢰의 난이도를 상향 조정했다.
‘주교 놈···! 이런 내막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일언반구 한번 없었단 게지?’
넘겨짚기의 달인인 그답게 또 다른 오해로 생사람까지 잡아가며 말이다.
물론 두 사람에게 이렇게 대놓고 연심 가득한 눈빛을 받으며 ‘설마, 이건우는 아무하고도 사귀지 않는 상태인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준비해. 네가 부탁한 대로 준비는 다 끝내뒀으니까.”
“...부, 부탁 말입니까?”
“뭐야. 까먹었어? 네가 하루는 남궁연 소위의 병문안을 가고 싶다고 해서 내가 날짜까지 잡았잖아.”
그리 말하며 어떻게든 쿨한 티를 풀풀 풍기려 하지만, 살짝 토라진 듯 튀어나오는 입술과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삐진 얼굴로 시선을 맞춰주지 않는 이서영.
그야. 교재 중인 여성을 눈앞에 있는데도 다른 여자의 병문안을 가겠다고 하니 서운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이건 병문안 아닌가.
그러니 가지 말라고도 말할 수 없으나 단둘이 있을 시간을 확보하고 싶어 하는···.
‘이런 모습을 늘 보면서 철혈검희의 연심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건 이건우 이 녀석이 상상을 초월하는 멍청이거나 이성에 관심이 없는 특이 취향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다.’
허나, 듣기로 이건우는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꽤나 굴릴 줄 아는 놈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늘 타인의 언행에서 그 너머의 의도를 찾는 베르디르의 상식상, 이건우는 양다리라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요새 정상회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요. 하하하.”
다른 때는 몰라도 여자와 둘이 있을 땐 젠틀한 신사처럼 행동하려 하는 것. 어린 20대 남아들의 공통적인 행동방식이었다.
베르디르는 숨을 쉬듯 자연스레 너스레를 떨었고, 이서영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잠시 그런 ‘이건우’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다행히 연기는 제대로 먹혀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건우는 비록 양다리라 할지라도 이서영의 연인.
‘이렇게 담백한 반응만 보여도 과연 괜찮은 걸까?’
불현듯 베르디르의 머릿속에 울리는 경고음.
보통 연인이 아침 일찍 방까지 찾아와, 깨워주고, 방 정리도 해주고 이러는데,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니던가.
지금까지 숱하게 쌓아온 경험에 따르면, 이럴 땐 뭐라도 좋으니 닭살 돋는 멘트를 한 번쯤 던져두는 것이 좋았다.
‘허나···.’
상대는 일반 여성도 아니고 기감이 뛰어난 고등급의 헌터 이서영이다.
작은 의심을 피하겠다고 도리어 큰 의심을 떠안게 될 수도 있다.
...
베르디르는 프로의 자존심에 조금 스크래치가 생기더라도, 이번만큼은 튀는 짓을 자제하리라 다짐했다.
이래서 베르디르가 남녀 관계가 복잡한 이의 대역은 절대 맡지 않는 것이다.
남녀 사이 만큼이나 거리감을 한눈에 파악하기 힘든 관계는 없으니까.
하물며 어제 새벽, 그 백귀야행 이초희의 그 달콤쌉싸름한 언행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초희와 다시 만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게 만든다.
‘하아···.’
그래도 고작 이틀.
짧은 대역 연기로 막대한 보상을 얻을 수 있기에 참는다.
‘복잡한 여자관계? 내가 알 게 뭐냐.’
휴거교는 목표를 달성하고, 베르디르는 싱싱한 재료들을 받아가는, 그저 그뿐인 이야기인 것이다.
‘최대한 말을 아끼자. 그리고 최대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고, 들려오는 말에만 잘 대답하면 된다.’
고작 이틀 내로···. 사람의 내용물이 바뀌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인간은 없을 테니까······?
“...너 누구야?”
마주한 지 10분.
주고받은 대화는 스무 마디조차 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곳은 식당이라 굳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지 않아도 의심을 피할 수 있는··· 분명 그런 장소일 텐데?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이들보다 열렬하게, 이건우를 향한 연정을 대놓고 팍팍 드러내던 여자, 남궁연은 고작 그 잠깐 사이 베르디르의 연기를 꿰뚫어 보고는 그런 말을 했다.
“소, 소대장님? 제가 누구냐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당연히 시치미는 때보았다.
어차피 눈앞의 남궁연은 휠체어에 앉은 환자.
동행자 이서영과 주위 사람들을 잘 구슬리기만 하면 그녀가 아파서 헛소리한다는 여론쯤 쉽게···.
“우리 건우는 밥 먹을 때 무조건 국부터 마셔.”
뭐라고?
뜬금없이 이어지는 남궁연의 목소리.
어째서인지 베르디르는 객관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그 확신 어린 헛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하하. 소대장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베르디르는 이유 모를 섬뜩함에 곧바로 너스레를 떨며 남궁연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려 했지만, 도끼눈을 뜨고 ‘이건우’를 노려보는 그녀의 말은 거침이 없다.
“말 돌리지 마! 우리 건우는 젓가락 쥘 때 그렇게 안 쥐어, 밥과 반찬을 먹는 순서도 달라! 아까도 보폭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지막을 보니 확실해졌어. 건우는 대대장님을 그렇게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고!”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확언.
이에 베르디르는 솔직한 심정으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단호한 확신 아니···. 그 모습은 마치 이건우라는 존재를 그냥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일종의 광신도 같았다.
“...확실히?”
심지어 그 기이한 언행을 옆자리에서 듣던 이서영도 돌연 놀란 눈을 뜨며 작게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확실히? 확실히라니!?
그럼 연인 사이에 따듯한 말투를 사용하지 않으면 대체 어떤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단 말인가.
‘...설마, 애초에 이서영과는 연인 사이가 아니었다는 건가?!’
뒤늦게 가장 중요한 부분을 깨달은 베르디르.
자신의 상식상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상황에 베르디르의 사고회로가 일시적으로 멈춘 그 찰나, 새하얗고 날카로운 섬광은 ‘이건우’의 행세를 하는 그의 코끝을 스치고 옆으로 지나갔다.
그것도 숱한 경력을 가진 베르디르의 생존 본능이 반사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면, 머리가 반으로 쪼개어질 검광이었다.
“우리 건우는 어디 있어!”
동시에 베르디르의 귀를 때리는 남궁연의 날카로운 외침.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쏠려있던 이목이 더 집중되었다.
‘저 여자는 대체 뭐야!? 뭐 하는 여자가 남 보폭에, 밥 먹는 손에 행동 하나, 하나 신경 쓰고 사는 거냐고!’
80여 년의 긴 생이 무색해질 만큼 입을 떡 벌리고 경악하는 베르디르.
허나, 마탑의 노구가 맞닥뜨린 ‘현재’는 그의 느긋한 경악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철혈검희 이서영 만큼은 절대로.
-스릉!
방금까지만 해도 삼색만찬이 올라가 있던 테이블의 밑에서 새하얀 검기가 솟구쳐올랐다.
“이런···!”
베르디르는 반사적으로 품에 넣어둔 철제 마공학 스태프를 집어 들어, 그 눈으로 쫓기도 힘든 속도의 검을 막았지만, 압도적인 힘은 그를 뒤로 날려버렸다.
-쿠웅!
“꺄아아악!”
“무슨 소란이야!”
“도망쳐!”
“경비원 불러! 경비원!”
수도 병원의 대형 식당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들으면서도 침착한 사람이 딱 셋 있었다.
바닥에 쏟아진 음식들.
회색 먼지를 날리며 나뒹구는 테이블 조각들.
그 아수라장의 중심에서 휠체어에 탑승한 환자와 검사 그리고 철제 스태프를 손에 쥔 마법사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나만 묻자 이 처량한 계집애들아···.”
신체구조 자체를 뒤틀어 만들어진 성대에서는 이건우 본인과 같은 목소리가, 전혀 그답지 않은 말투로 튀어나왔다.
“건우가 어디 있는지나 말해!”
이에 휠체어에 탑승해 있던 남궁연은 비명 같은 목소리를 돌려주었지만, 살아있는 검이라 불리는 이서영은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샤삭!
또다시 내질러지는 새하얀 찌르기.
심지어 이번에는 개나리처럼 흩날리는 오러마저 검신을 타고 일렁이고 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라···! 광견!”
이를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회피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베르디르.
그러나 개나리 빛 오러는 매섭다.
마탑의 노구는 오랜 시간을 전장에서 보내온 실전파 마법사지만, 압도적인 능력치의 차이와 레벨의 간극으로 매울 수 없는 것이 바로 검사와 마법사의 본질적인 상성이었다.
전위도 없이, 이미 근접한 검사에게 마법사가 마법을 캐스팅할 틈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법 발현에 마나를 쏟아붓는 순간, 느리고 무뎌지는 신체 능력으로는 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휙, 휘익!
삽시간에 열십자를 그리며 파고드는 이서영의 검.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는 베르디르의 등골을 싸늘하게 만들 만한 말이 튀어나왔다.
“말은 네 팔다리를 모두 자른 뒤에 들어도, 늦지 않아.”
이서영은 한다면 정말로 하는 여자.
베르디르는 또 한 번 경악을 토해내면서도 시시각각 엄습하는 검격을 피했다.
일촉즉발.
찰나라도 한눈을 팔면 그대로 죽는다.
“내,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이건우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그 아찔한 순간, 베르디르의 머리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한 마디.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 베르디르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던 이서영의 검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정지했다.
“...쯧.”
조용히 혀를 차는 이서영.
그 순간 베르디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를 되새김질했고, 이건우의 안위가 눈앞의 검사에게 유효한 협박이란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내, 내 팔다리는 이건우 본인에게도 링크되어 있다! 산채로 팔다리가 썰려 나가는 고통에 과, 과연 그 녀석이 쇼크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는 애초에 정체가 탄로 나는 상황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움직였었으니까.
하지만 헌터 역사상 실제로 인간의 감각을 링크시키는 스킬의 보유자는 존재했었고, 급박한 상황 탓에 되는 데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베르디르의 말은 퍽 믿음직했다.
“뭐···. 하는 거냐. 이건우의 어깨에는 이것과 똑같은 상처가 생기고 있을 거란 말이다!”
뒤가 없을 때는 도리어 당당하게.
이는 긴 생을 살며 수십 번이 넘도록 궁지에 몰려본 경험이 있는 베르디르의 생존 전략이었다.
“여기다!”
“철혈검희와 S급 루키!”
“화, 환자도 휘말려 있잖아.”
하물며 이젠, 수도 병원의 상비군까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상황.
베르디르는 선택을 해야 했다.
“진짜 이건우는 관악산 지하 감옥에서 차갑게 식은 시체에 파묻혀 지금도 생사의 기로에 서 있을 것이다.”
느닷없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는 너무나도 분명한 이건우의 소재지였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된 것, 자신이 프랑스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숨겨야 한다고 베르디르는 판단한 것이다.
“관악산?”
“진짜 이건우라니?!”
“이, 이게 무슨···!”
베르디르의 말을 기점으로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당혹감의 물결.
심지어 베르디르의 코앞에 있던 철혈검희마저 미간을 좁히며 아주 잠깐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허나, 그 아주 잠깐의 틈이 있다면 A+급 마탑의 노구에게 도주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고스트 댄싱!”
입으로 시간을 벌며 모은 마력.
베르디르의 손에서 흑구름처럼 휘몰아치던 그 마력은 고순도의 에너지로 화하더니 사역자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수백 마리의 귀신으로 현현되었다.
새카만 안개로 이루어진 귀신은 이서영의 눈을 가렸고, 무색무형의 귀신은 단숨에 식당의 창문을 깨부수며 베르디르의 몸을 허공에 띄웠다.
“다 꺼져라!”
한번 마법을 발현하고 나면, 열세는 뒤집힌다.
깨진 창문으로 날아가는 베르디르.
그는 조금 전에 느꼈던 분노를 가득 담아 무형무색의 귀신들을 양손으로 크게 휘둘렀고,
그 행동 하나에 국군 수도 병원 전체의 창문은 하나도 남김없이 터졌다.
-쨍그랑!
“으아아아아악!”
이어서 흡사 거대한 해일처럼 병원을 강타하는 귀신의 춤사위.
그건 그 자체로 막대한 에너지가 되어 수도 병원 곳곳에 있는 건물의 중추 기둥을 분쇄해버렸다.
거대한 규모의 병원이 베르디르의 손에 아수라장이 되는 건, 고작 2초도 채 걸리지 않는 일이었다.
“이 새끼가···!”
그때, 도깨비보다 더 무서운 얼굴로 베르디르를 쫓아 병원 밖으로 나오는 철혈검희.
“쫓아올 테냐? 나를? 저기 무너져 가는 건물에서 죽어가는 무고한 시민들을 뒤로 하고?!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러나 베르디르는 그런 그녀를 대놓고 조롱했다.
영웅이란, 본디 빌런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네놈들에겐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으니까 말이야! 하하하하!”
대놓고 ‘이건우’의 모습으로 터트리는 조소.
하지만 그럼에도, 이서영은 가볍게 혀를 차고는 서서히 큼지막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병원 내부로 달려갔다.
추격자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무형의 귀신들을 움직여 모습을 감추는 베르디르.
동시에 인근의 야산에 내려와 흑마법, 강시 소환을 사용했다.
-그어어어.
의식이 없는 산송장은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베르디르의 눈앞에 나타났고 그는 산송장의 머리를 꽉 움켜쥐더니 금세 다시금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다.
정체가 탄로 나는 건 정말 예상외의 사태였다.
설마 천의 얼굴 베르디르가 24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정체를 들키게 될 줄이야···.
‘다시 생각해봐도 그 여자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대체 어떤 인간이 그렇게 열성적으로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냐는 말이다.
“젠장! 젠장! 젠장!”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허탈감과 배우로서의 자존심에 생긴 스크래치 때문에 야산의 나무와 흙을 발로 차고 밟던 베르디르는 천천히 이성을 되찾고 자신의 현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의뢰는···. 끝나지 않았다.’
진정하자마자 바로 떠오르는 희소식.
애초에 휴거교 주교가 그에게 제안한 의뢰는 ‘이건우의 배제’였다는 것이었다.
‘대역 연기’의 성공, 실패는 애초에 의뢰에 포함된 내용이 아니었다.
‘그래···. 어차피 놈들은 그 병원을 뒷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터.’
그렇다면, 이렇게 간신히 마련된 시간을 충분히 활용해 ‘이건우’를 되찾기 위해 정신 없이 달려올 그 계집들만 쓸어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 난 실패한 게 아니야. 조금 돌아가는 것뿐이지···!’
심지어 금일은 무려 열두 국가의 외교관들이 귀국하는 날.
한국에서 ‘정예’라 이름 붙은 대부분의 무장세력은 이건우 납치 사태를 듣고도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이 저지른 사고를 덮고자 또다른 귀신 마법을 발현해 고속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베르디르.
허나, 그는 예상치 못했다.
‘이건우 납치’라는 소식하나가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를.
***
-쿠우우웅!
시야를 가릴 만큼의 흙먼지를 일으키며 끝내 국군 수도 병원은 무너졌다.
‘이건우’의 탈을 쓴 누군가가 막대한 마력으로 병원 전체를 뒤흔든 지, 정확히 2시간 5분 후의 일이었다.
“모든 환자와 관계자들의 안전은 확보했습니다. 이서영 대령님!”
어느새 차려진 ‘간의 지휘소’에서 상비군과 수도방위사령부의 지원 장병들을 진두지휘하던 이서영.
그녀는 긴장한 태도로 자신에게 경례를 올리는 중위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복의 옷깃을 바로잡고는 말했다.
“그래. 그럼 이 시간부로, 이 지휘소의 지휘체계는 이대로 납치된 S급 헌터 이건우의 탐색대로 기능을 전환하겠다.”
지금 이 현장에는 수도 병원의 상비군,
그리고 비교적 인근에 있어 빠르게 번개조를 투입했던 수도방위사령부의 장병들.
또한, 소수지만, 몸이 거의 회복되어 활동이 가능한 상태의 환자들마저 합류를 마친 상태였다.
“각 병사, 간부들은 모두 자신의 부대에 통신을 넣어라. 어떤 미친 칼잡이 대령 하나가, 당장 부대 병력을 투입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썰어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있다고 말이야.”
“...예?”
“그게 무슨 농담이신지···?”
상대는 전쟁영웅 이서영이기에 바짝 긴장한 태도였던 지휘소의 병과 간부들.
그런데 들려온 이서영의 말은 너무나도 기이한 것이어서 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서영을 쳐다보며 그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말’이 아니었다.
-스르릉.
무표정으로 자신의 애검, 백룡도는 빼 드는 이서영.
이어서 그녀는 높낮이도, 온기도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농담 같나?”
일순간에, 성공적인 구호작전에 기뻐하던 병과 간부들이 모두 얼어붙었다.
3초간의 비루한 침묵.
이윽고, 움직이는 이들의 반응은 빨랐다.
“뭐해! 당장 움직이지들 않고! 당장 각자의 본대에 연락을 넣어! 빨리!”
“대대에 무전을 전파하겠습니다!”
“강원도 쪽에 있는 부대에도 지원 요청을 넣어두겠습니다.”
같은 시각,
환자들과 같이 대피소에 들어와 있던 ‘남궁연’은 주위 군인들이 귀를 의심하게 할 만한 말을 쏟아내며 통화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단장님!”
무슨 7여단장 본인과 소위가 직접통화를 해?
많은 장병들의 머리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결과적으로 그 통화는 7여단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같은 시각,
인천국제공항에 나와 있던 백귀야행 이초희의 측근은 그녀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방금까지 미국 측의 거대길드 ‘제이슨 스트라우스’의 부길드장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이초희.
그런데 돌연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갑작스러운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아리엘. 급한 일정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이렇게 갑자기요? 대한민국은 부협회장이 없으면 작은 사건 사고도 막아내지 못하나 봐요?”
‘제이슨 스트라우스’의 부길드장 아리엘은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비꼬는 말로 이초희를 도발했지만, 이초희는 그 말에 일말의 주저도 없이 답했다.
“예.”
그러고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부길드장 아리엘을 두고 공항을 뛰쳐 나가버렸다.
“What?!”
아리엘의 어처구니없어하는 목소리는 인천 공항 전체를 울릴 만큼 컸다.
같은 시각,
뒤늦게 소식을 접한 7여단의 이병이자, 막내 성전사인 메리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성녀의 로자리오’를 손에 쥐고는 갈등한다.
이 목걸이를 깨부수기만 하면, 그 어떤 상황이라도 본국으로 돌아갔던 성전사들은 나타나리라.
전사장 마르쿠스는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정말로 급박한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 성녀의 가호가 스민 이 로자리오를 주저 부술 것을 명했었으니까.
‘지금이 바로 그 비상시 인가, 아닌가.’
메리는 자신의 긴 금발을 올려묶고는, 그 진심 어린 고민을 이어가며 성전사의 갑주를 빠르게 착용하기 시작했다.
테라포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