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56화.
-스으으으!
무취 무광.
거기에 큰 소음도 없이 대상자를 정해진 위치로 ‘전이’시키는 휴거교의 제사 도구는 베르디르의 손에서 마력을 공급받아 거칠게 떨림을 일읔켰다.
‘이런 간단한 일 때문에 괜한 시간만 빼앗겼군.’
흑색 마탑의 원로교수이자 천의 얼굴이라는 이명을 가진 노구, 베르디르.
그는 정말 아무도 모르게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훌쩍 본국으로 돌아갈 심산이었기에 내심 노심초사했다.
‘머리를 굴릴 줄도 알고, 몸도 꽤 쓸 줄은 아는 것 같았지만···. 결국 흔한 태생적 천재, 경험이 많은 자는 반응은 보이지 못하는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자에게 공격을 받는다는 상황은 아무리 S급 헌터의 자질을 가진 자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실은 묠니르의 패널티가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지만, 베르디르는 이건우의 반응을 자기 나름대로 분석하여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했다.
‘앞으로 이틀, 제발 얌전히만 있거라.’
의외로, 베르디르는 진심 어린 얼굴로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왜냐하면 베르디르에게 있어서 최악의 사태는 진짜 이건우의 부재가 알려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러한 독단이 ‘불사왕’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왕의 허락 없이 이 같은 독단을 벌이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다···. 그건 나도 당연히 알고 있지만···!’
감히 불사왕의 허락 없이 움직인 일로 엄벌을 받게 될지라도, 베르디르는 이번 의뢰를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며칠 전, 휴거교와의 교섭과 알프레드 아들러에 대한 책임 소지를 묻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던 노구.
허나, ‘주교’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던 포도원에서 그는 믿을 수 없는 의뢰를 받게 되었다.
조건은 간단했다.
고작 이틀간, 이건우를 ‘휴거교’의 거사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고립시켜 달라는 의뢰.
그런데 고작 이틀간의 대역 연기를 통해 얻게 될 보상은 노구의 상상을 초월했다.
-B급 이상의 마력등급을 가진 헌터 스물.
심지어 베르디르가 직접 확인해본바, 오늘내일 죽을 날만 기다리는 미라 같은 헌터도 아니고 마력을 운용할 여력까지 남은 싱싱한 헌터 노예들이었다.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고작 이틀간의 노동으로 흑마법 연구에는 필수적인 ‘인체실험’의 재료를 무려 스물이나 얻게 되는 것이다.
이만큼의 재료만 갖춰진다면, 베르디르가 연구하는 ‘역병학’은 보다 큰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
그 공을 불사왕께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베르디르라는 오랜 충견은 독단으로 인한 엄벌도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고작 이틀, 이건우의 부재를 숨기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대역.’
쉽다.
어딜 어떻게 봐도 이번 의뢰는 베르디르에게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거리였다.
그가 불사왕에게 거둬진 건 이미 50년도 더 된 일.
그간 원로교수 베르디르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대역’을 연기해왔는지는 아마도, 그 소명을 직접 내려준 불사왕조차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흔하디 흔한 20대 남자 헌터의 대역을 맡긴다?
‘하, 이건 한 달간의 ‘대상자 관찰’ 과정이 없이도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을 일이지‘
어린 헌터들의 행동방식이나 사고패턴 따위는 단순한 법이니까 말이다.
본디 대역에 앞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보통 대상자의 ’가족‘이다.
그러나 이건우가 전쟁고아라는 건, 베르디르가 이번 의뢰를 받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요주의 대상은 이건우의 연인 혹은 이 녀석에게 적잖은 호감을 품은 여인들쯤 되겠군.’
하지만 사실 이 역시 불필요한 걱정이라는 것은 베르디르 스스로도 아주 잘 아는 바였다.
왜냐하면, 이건우에게는 현재 연인이 없으니까 말이다.
애초에 이건우의 관계를 보면, ‘남궁연’이라는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인 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딱 봐도 비즈니스적인 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즉, 걱정거리는 없다.
그런 결론을 내리고 이건우의 모습을 한 베르디르가 마음을 놓던 바로 그 순간,
-똑똑.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어떠한 존재가 이건우의 방문을 두드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마탑의 원로교수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니!
베르디르는 이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지만, 그는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이다.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베르디르 자신의 마력을 완벽히 갈무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베르디르의 두 눈을 상하로 크게 찢어지게 할 만큼의 인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 이초희. 백귀야행의 이초희가 왜 갑자기···!’
비상사태였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그 누가 와도 아무렇지 않게 대응했을 베르디르였지만···.
‘마나감응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초희에게서 만큼은 정체를 완전히 숨길 수 없다.
‘이런···! 설마 이변을 눈치챘단 말인가!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야심한 시각에 외간놈의 방문 앞까지 찾아오겠어!’
경악을 금치 못하는 베르디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프랑스와 연관된 존재라는 사실 만큼은 기필코 숨기고자 도망칠 준비를 하는 바로 그 순간···!
-슥,
이초희의 새하얀 손이 다가와 이건우의 소매를 수줍게 움켜쥐었다.
.
.
.
수줍게?
기이한 느낌을 감지한 베르디르가 고개를 들고 정면의 이초희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째서인지 ‘이건우’의 눈을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아까는···. 조금 놀랐던 것뿐이니까···. 삐졌거나 화난 건 아니니까! 알겠지? 그냥, 그것만은 확실하게 말하려고 온 거야! 오늘 고생했고, 잘자렴.”
이초희는 다짜고짜 그런 영문모를 말을 남기더니, 민망하다는 티를 풀풀 풍기며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응?”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에 잠시 사고회로가 정지한 베르디르.
허나, 그는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
눈앞에서 펼쳐진 일과 이건우가 새벽 4시가 되도록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던 정보를 규합해 금세 또다른 결론을 도출해냈다.
‘이 늦은 시간까지 어디서 뭘 하고 왔나 했더니···. 노처녀 히스테리로 유명한 그 백귀야행과 밀회를 가졌던 건가···!’
물론 정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결론이었지만 말이다.
‘그랬군. 어쩐지 이초희와 이건우는 비즈니스적인 일에서도 유독 단둘이서 만나는 일이 잦다고 들었다···. 그런 것이었어.’
그런 생각을 하며 홀로 고개를 끄덕이는 베르디르.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든 이초희와의 접촉을 피하면 된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위험인물, 오히려 잘된 일이지.’
그는 스스로의 연기에 자부심마저 가진 프로 중의 프로이므로 이번 위기를 기회 삼자고 다짐했다.
‘그래···. 고작 이틀이다. 이건 간단한 의뢰야. 보상을 생각하자. 보상을···.’
대역 연기의 대상자, 이건우가 최고 위험인물인 이초희와 연인 관계였을 줄이야.
내심 베르디르는 이런 말도 안되는 반전에 당장 의뢰도 버리고 도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만, 그의 프로 의식과 막대한 보상은 결단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명상에 빠져있던 베르디르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그는 또다른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웬일이야. 네가 이렇게 방을 다 어지럽히고 그냥 자고?”
창 틈새로 내리쬐는 밝은 볕.
문을 열어준 적도 없건만 여분의 방 열쇠라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멋대로 방에 들어와 베르디르가 어젯밤 널브러뜨린 이건우의 옷을 주워 정돈하는 작은 체구의 여자.
그녀는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고, 목소리에는 은근히 장난스러우면서도 따듯한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들어 있었다.
“어제 많이 피곤했나 봐?”
하물며 마지막으로 날리는 배려심 깊은 한마디까지.
‘처, 철혈검희 이서영···?’
베르디르의 기억 속, 철혈검희 이서영은 피도, 눈물도 없이 누구든 베어버릴 수 있는 벼려진 검 같은 존재였거늘.
눈앞의 이서영에게서는 어째서인지 행동 하나, 하나가 신혼집 새색시의 부드럽고 따스한 연심이 풀풀 풍겨왔다.
잠에서 깨어난 베르디르.
뒤늦게 완전히 잠을 쫓아내고 정신을 차린 이 마탑의 노구는···. 일순간에 자신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르디르는 눈앞의 이서영을 잠깐 본 것만으로도 이미 확신을 한 것이다.
그녀의 사소한 몸짓과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연분홍빛 연심을···.
‘이건우 이 미친 놈은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백귀야행과 철혈검희를 상대로······. 양다리를?!’
아무래도 베르디르는 그의 연기 인생을 통틀어, 최흉 최악의 대역을 떠맡게 된 것 같았다.
***
예고 없이 눈이 뜨였다.
긴 잠에 빠져있다가 드디어 깨어난 느낌.
머리는 술을 진탕 마신 다음 날처럼 어지러웠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붙들었다.
“음.”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전신을 점검했다.
전생의 ‘대항군’ 시절 몸에 밴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몸의 이상은 없다.’
납치를 당한 이상, 어딘가 한곳이 잘려나갔더라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이건우 너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다.
아무래도 베르디르가 내게 했던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흑색 마탑의 노교수인 그가 내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 이유는 금방 짐작해낼 수 있다.
베르디르는 빌런이고, 마법사이기 이전에 불사왕의 둘도 없는 충견이니까.
현재의 나는 대대적으로 프랑스의 비호 아래 있다는 것을 널리 알려진 상태, 나에게 일어난 피해는 곧 ‘불사왕’의 명예에 흠으로 이어지게 된다.
충견 베르디르에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나를 납치하고 내 대역을 선다는, 다소 과감하고 우발적인 짓을 실행에 옮긴 데에는 분명, 빌런들끼리의 더럽고 추한 무슨 이유가 있던 거겠지.
‘뭐, 그건 관심 없고···.’
그래도 결과적으로 내가 느닷없이 비명횡사하는 최악의 사태는 피했으니 다행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각국의 정상들이 한국을 뜨기 직전인 이 시점, 굳이 나를 납치해 이렇게 무력화시켜두었다는 건···.
협회와 군,
그리고 돈을 받고 움직이는 국내의 수많은 용병대가 각국 정상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현재, 인천과 김포로 모든 신경을 집중한 그 틈에 일을 벌일 거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아마 그들의 목표로 하는 대상은, 이제야 제기능을 되찾아가는 지하 감옥 타르타로스가 아닐까.
이건 다시 생각해봐도 확실히 ‘휴거교’가 수면 아래에서 제대로 칼을 갈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치밀함이었다.
이미 한번 계략이 실패로 돌아가 금방 움직이진 않으리라 예상하던 이 시점,
또한 각국 정상들의 보호에 모든 이목과 인력이 쏠린 이 시점,
그들은 다시 한번 타르타로스를 노리는 것이니. 그야말로 완벽한 빈집털이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이처럼 단번에 뒷사정을 파악하고 놈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나를 납치하고 대역까지 세워두지 않았던가.
“하···. 완전히 당했군.”
이번만큼은 정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우? 다, 당신 이건우 맞나요?”
그때 내가 갇혀 있던 쇠창살의 건너편, 또다른 허름한 쇠창살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 갈색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헤집어져 있고 옷과 로브가 거의 다 찢어져 넝마가 되어있는 한 여자.
방금 정신을 차린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 여자의 얼굴을 난 알고 있었다.
“...멜?”
흑색 마탑의 유능한 조교수, 다비드 호베흐의 수석 제자.
선한 흑마도들 중에서 탑 반열의 실력자이자 흑색 마탑의 마법사인 멜 다그나였다.
그녀는 지난번 ‘성전사 고립 사태’ 때도, 별동대로서 함께 게이트에 들어와 성공적인 수성전에 이바지한 우수한 마법사였다.
“이건우! 당신 맞죠? 여, 여기는 대체 어딘가요. 저는 왜 갑자기···. 읏?!”
혼란에 휩싸여 무턱대고 몸을 일으켜 세우던 멜 다그나는, 돌연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넝마가 된 옷가지의 곳곳이 붉게 젖는다.
그녀의 몸은 전신에 걸쳐 상처투성이였다.
“으읏···! 윽?!”
정신이 온전해지자 뒤늦게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는지 멜은 끔찍한 신음을 흘렸다.
당장 목숨이 위험해 보이는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은 마치 허튼짓을 벌였다간 나도 저렇게 될 거라는 베르디르의 경고 같았다.
“진정하고 심호흡을 하세요. 마력을 체내에 빠르게 순환시켜서 재생력을 높이는 겁니다.”
이에 나는 침착하게 그런 조언을 해주었다.
“...난 모, 못해요. 그런 건 몸 쓰는 헌터들이나 하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호흡부터 정돈하세요. 못하면 과다출혈로 죽을 겁니다.”
실없는 투정에 내가 냉담하게 반응하자 몸을 움찔하고 떠는 멜 다그나.
그녀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이내 느리고 정돈된 호흡을 시작했다.
“...하아아. 후우우. 하아아.”
그러자 흥건하게 흘러나오던 피가 서서히 멎기 시작한다.
이젠 피 대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최선을 다해 체내 마나를 순환시키는 그녀.
다만, 조금 이상한 것은···.
그녀 정도의 우수한 마법사가 마나를 재생력을 끌어올리는 데 소모하고 있음에도 상처가 아물지는 않는단 점이었다.
이에 나는 시선을 돌려 그녀와 내가 각각 갇혀 있는, 똑같은 구조의 감옥 구석구석을 쭉 훑자 기이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옅은 보랏빛의 마법진.
내가 마법사들 만큼 마법식에 박식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척 보기에도 마나의 응집과 조절을 방해하는 역할의 마법진으로 보였다.
‘저걸 믿고 내 손발을 묶어두지도 않고 그냥 방치를 해뒀던 건가.’
단순 마나량으로는 A+급, 잘하면 S급에 측정결과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멜 다그나가 저 상황이다.
아마 나의 전격은 저 마법진이 새겨진 이 감옥에서는 간단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그나저나, 어째서 천의 얼굴, 베르디르는 아무런 맥락도 없이 나와 함께 멜 다그나가지 이 감옥에 ‘전이’시킨 걸까.
그러한 의문은 다소 느릿하게 떠올랐지만, 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보험인가···.’
휴거교 놈들이 벌이려는 일이 이상하게 틀어지더라도 최소한 이번 사태가 프랑스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보험 말이다.
놈들은 고작 그런 것을 위해 한 사람의 무고한 흑마도를 납치해 저 모양으로 만들어 둔 것이 분명했다.
“하···.”
현재 사태를 쭉 정리해 보았을 뿐인데도, 나는 훅, 하고 머리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꼈다.
‘하여간 쓰레기 같은 위선자놈들···.’
어떻게 동료를 대하는 태도가 뇌왕이나, 놈들이나 이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허나, 단 두 가지.
천의 얼굴 베르디르가 너무도 급하게 일을 진행하느라 그런 것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후우우우우.”
하나는, 나는 애초에 묠니르의 패널티로 인해 마나를 다룰 수 없던 상황인지라 저 자색 마법진의 영향을 아예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나에게는 ‘생체전기’라는 본질적 마나 외에도 좀 많이 이질적인 성질의 마력을 다룰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후우우.”
큰 호흡을 거듭하며, 잘 움직이지도 않고,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약소한 규모의 마력으로 아랫배를 자극한다.
‘오브의 활성화’는 일종의 엔진과도 같은 알고리즘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극을 주어, 한번 켜기만 하면 큰 무리 없이 계속해서 활용할 수 있다는 소리다.
자색 마법진에 방해를 받으면서도 나는 수차례, 이미 바닥난 마나를 어떻게든 단전으로 운용했고 그 한 줌의 마나는 다행히도 반가운 메시지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알림>
ㅡㅡㅡㅡㅡㅡㅡㅡ
*‘오브-성혈’은 각성자, 이건우의 ‘간곡함’에 응합니다.
*오브 활성도(12%)에 따라 사용자의 모든 능력치를 증폭시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드디어 나타난 활성화 메시지.
거기에 <업적>의 영향으로 무식하게 강화된 나의 근력으로 쇠창살을 움켜쥐자.
-지익! 지이이이익!
긴 쇠창살은 플라스틱 막대기마냥 구부러졌다.
“엣?!”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멜 다그나.
나는 찬 바닥에 누워 아득바득 재생력을 끌어올리던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같이 가실 거죠?”
“살려, 살려주세요. 이러다 정말 죽겠어요···.”
“조금 아플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는 멜 다그나의 쇠창살 역시 순수한 힘으로 구부러뜨렸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으읏!?”
전신에 난도질 된 상흔 탓에 그저 들어올리는 것만으로도 비명을 지르는 멜 다그나.
그녀는 사실 나라는 놈만 없었다면 한국에 발을 들일 일도 없었고, 이런 봉변을 당할 일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내 품에 축 늘어져 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내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조금만 참아요.”
이 감옥만 나간다면, 그녀의 몸은 마나의 운용으로 금방 회복될 테니까.
나는 서둘러 터벅, 터벅 걸음을 옮겼고, 다행히도 베르디르가 우리 두 사람을 ‘전이’ 시킨 감옥에는, 그 최고등급의 항마력 마법진 외 그 어떤 방호설비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애초에 마법사와 마력 방출계 헌터의 조합이다.
아마 놈은 내가 탈옥할 수 있으리란 발상 자체를 하지 않은 듯했다.
놈이 나의 허를 찔렀듯, 나도 이것으로 놈의 허를 찌를 기회를 얻었다.
‘그나저나 걱정이군······.’
천의 얼굴, 베르디르는 그 연기력만큼이나 엄청난 달변가다.
만일, 이젠 나름의 발언권을 인정받게 된 나의 입으로 놈이 작정하고 그 세치혀를 놀린다면···.
이번 일은 단순히 ‘휴거교’의 기습을 넘어, 돌이킬 수 없는 대사건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전생에도, 변신한 베르디르의 정체를 간파해낸 사례는, 오랜 가족이나 연인뿐이었으니 말이다.
허나, 나 자신도 너무나 잘 아는 섭섭한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가족도, 연인도 존재하질 않는다.
즉, 나 자신이 바꿔치기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봐 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질 않는 것이다.
‘큰일이야···.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겠어···!’
그런 불안을 떠올리자 내 마음은 서서히 더 조급해져만 갔다.
마음만 앞서서는 안 된다는 건 알지만, 베르디르의 무서움을 잘 아는 나로서는 도저히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연기는, 정말 엄청나니까···!
***
그러나 건우의 근심·걱정 그리고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너 누구야?”
한 여인의 등장과 함께 보기 좋게 빗나간다.
태연한 듯 미소를 지으면서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이건우’의 모습을 한 베르디르.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휠체어에 앉아 환자복을 입고 있는, ‘남궁연’이 있었다.
평소의 헤실헤실한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도끼눈으로 ‘이건우’를 노려보며 명명백백한 적의를 드러내는 남궁연.
이윽고 그녀는, 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다시금 피가 새어 나올 만큼 악에 받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우리 건우는 어디 있어!”
이에 베르디르는 생에 처음으로 입을 떡 벌릴 만큼 경악한다.
‘이 여자는 또 뭐야?!’
왜냐하면, 남궁연은 마주친 지 단, 10분만에 베르디르의 연기를 꿰뚫어 봤으니까···!
나비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