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55화 (55/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55화.

-딸각.

걸쇠를 잠그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리고, 룬 문자가 새겨진 그 자물쇠가 위치에 맞게 고정되자 보랏빛의 마법진이 떠올라 허공에 수 놓였다.

만찬회가 끝난 당일 밤.

모든 회담의 참가자가 자릴 비우고, 불사왕 측에서도 나를 호위해줄 S급의 헌터, ‘사령술사’만을 두고 모두 돌아간 야심한 시각.

나는 흑태자 칼레드와 단둘이 방음, 방탄, 방호설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소규모 회의장에 자리를 잡았고, 심상치 않은 얼굴의 흑태자를 마주 보며 말했다.

“우선, 흑태자님의 귀중한 시간을 제게 양도해주셔서 진심 어린 감사를······.”

“겉치레는 그만하면 됐다. 곧바로 본론으로 가지.”

주위의 시선이 완전히 사라지자, 흑태자는 바짝 마른 생선처럼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불사왕과 저스티스 가디언즈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게냐.”

흑태자 칼레드는 드물게 자신의 급한 성미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서까지 그리 말했다.

“최소한 흑태자님보다 더 많은 것을 더 자세히 알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기까지 와서 간을 보자는 게냐. 그것도 이 흑태자와?”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화난 기색을 풍겼지만, 나는 더 진지하게 했던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분명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을 뿐이죠.”

“정말 믿기 힘들지만, 아무래도 너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저스티스 가디언즈가 실은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언데드 집단이라는 것도,

그 언데드들을 창조하고 권속으로서 무릎 꿇린 장본인이 불사왕이라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인의 리더이자 선망받는 지도자인 ‘불사왕’이 하루아침에 서유럽 전역을 집어삼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도.

흑태자와 나 사이에는 구구절절한 대화가 필요없는 정보들이었다.

그와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아직 ‘불사왕’이 권속화 시키지 못한 S급 헌터들의 행방을 물었고,

“바네사는 살아있다. 영국 왕의 사생아인 레이첼은 아직까진 그의 관심 밖의 존재이며, 그레이스, 슬리먼, 무라그 이 셋은 2달 전까진 확실히 인간이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모른다’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 자체를 끔찍이 싫어하는 흑태자.

그는 내게 ‘휴거교’와 불사왕의 관계성을 물었다.

“휴거교는 불사왕을 메시아라 부르며 칭송합니다. 그들이 숭배하는 피 군주가 신이라면 불사왕은 반신반인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줄곧 휴거교와 합을 맞춰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던 불사왕의 종복들.

전생에도, 현생에도 그들의 행보는 변하지 않았다.

나와 나를 믿고 신뢰해준 랭커들의 활약으로 결과만이 변했을 뿐이지.

본래라면 이번 ‘황금 게이트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붕괴의 서막은 그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견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이준학 준장만이 유일무이한 그들의 대적자였고 말이다···.

그래도, 아직 ‘불사왕’에게 권속화되지 않은 S급 헌터가 꽤 남아 있다는 건 호재였다.

바네사, 레이첼, 그레이스, 슬리먼, 무라그.

그 다섯의 S급 헌터만 불사 군단에 합류되는 걸 막아도 불사왕이 본색을 드러내는 시기는 상당히 늦어질 것이기니까.

시간을 번다는 건, 그만큼 언데드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할 기회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언데드와 재앙신앙은 상호보완적인 관계. 필요한 것은 순은으로 준비된 무장들인가.”

그때, 턱을 괴고 생각에 깊이 빠져있던 흑태자는 돌연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막대한 자금력을 통해 ‘은’의 확보를 부탁할 심산이었는데, 그는 혼자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도 그냥 은으로는 안됩니다. 그걸로는 권속들의 강한 마력을 뚫을 수 없을 테니까요.”

내가 말을 걸자 흑태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던전내부에서 채광된 마력 감응도가 아주 높은 은이 필요한 거겠지.”

“정확하십니다.”

평범한 지구의 광물과 달리, 던전 내부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광물들은 그 강도와 마력 감응도가 다르다.

더 단단하고, 더 쉽게 마력에 반응하는 광물.

대표적으로 철혈검희 이서영이 사용하는 백룡도는 고강도에 순도 높은 마나 강철로 벼려낸 검.

그런 명검과 이서영이 만나니 차원이 다른 성능을 발현하는 것이다.

“이몸의 본국에 존재하는 모든 ‘던전 은’을 모으려면 대략 1조에서 2조 정도가 들어가겠군.”

“필요하다면 조금 보태겠습니다.”

“하! 네놈이 무슨 자본이 있다고, 고작해야 천억쯤으로 생색낼 생각이라면 그냥 가만히 있거라.”

“아니요. 사실 지난번에 우연히 파울라스 총리의 주머니를 정당하게 털 기회가 생겨서, 지금은 수중에 가용 가능한 돈이 7천억쯤 있습니다.”

“호오? 불사왕의 주머니를 털었다라?”

그리 묻는 흑태자에게 나는 지난번 ‘경매’와 보상이 ‘흑마법’과 관련되었을 거라는 가짜 뉴스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해주었다.

“뭐라? 푸하하하핫! 네놈의 요청으로 한국에 발을 들인 흑마도들을 역 이용해 프랑스의 국고를 털어? 하하하하하하! 기발하구나. 정말 참신한 방법이야!”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만을 짓고 있던 그는, 그 이야기 한 번에 아예 배를 움켜쥐고 웃기 시작했다.

“또 없느냐? 그 절대 군주를 엿먹인 이야기 말이다.”

그다지 잡담으로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런 ‘작전 성공’의 일화들은 늘어놓는 것 자체로 내 평가가 오르기에 나는 차근차근 그간의 이야기를 꺼냈다.

불사왕에게 직접 ‘계시’의 내용을 알려주겠다는 것을 빌미로 나의 안전을 확보해달라 한 것.

그러면서도 그들이 찾는 ‘타락의 성물’을 이미 국외로 빼돌려둔 것.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성녀의 위치를 공개하는 그날, 성녀의 안전은 이미 확보해둔 상황일 거라는 것까지.

‘어떻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었지만, 흑태자는 구태여 그런 것을 묻지 않았고 그런 그의 스페셜리스트 다운 태도에 나는 더 안심한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윽고 한참을 웃고 떠든 뒤, 그제야 흑태자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한마디.

“그래서? 네가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토록 순순히 그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는 건, 필시 원하는 바를 더욱 순탄히 이루어내기 위해서겠지?”

역시 내가 믿음을 준 만큼 곧바로 핵심을 파고들며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흑태자 칼레드.

“어서 말해보라. 네가 원하는 건 대체 무엇인지.”

그는 응당 자신의 실력에 걸맞은 오만한 태도를 선보이며 그리 말했고, 나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저는 레벨을 올려야 합니다.”

“...영약을 원한다?”

고작 그걸 위해 이렇게까지?

다소 허탈하다는 반응의 흑태자.

하지만, 내가 원하는 물건은 그가 생각하는 영약과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아니요. 제가 목표로 하는 건 단순한 영약이 아닙니다.”

이 헌터 시대, 재앙이라 불리던 게이트를 막아내고 중국 전역에 소림 무술을 전파한 이전 정권, ‘무림맹’의 초대 맹주.

“달마의 환생이라고도 불리는 소림 무술의 창시자. 리우 첸의 내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소림사의 대환단이 필요합니다.”

대환단.

그건 소림사의 대불승이 대대로 자신의 진득한 내공과 영험하게 보관된 리우 첸의 정기를 녹여 빚어내는 영약계의 끝판왕급인 물건이었다.

“...허나, 대환단은 대대로 다음 정권의 정점에 선 우두머리에게만 바쳐진다. ‘부’의 규모와는 관계없이 애초에 얻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흑태자가 한 말마따나 그 대환단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쳐다볼 수도 없는 영물.

허나,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정보를 활용하면 그 불가능은 가능으로 변한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이제 막 정권이 세워진 마천신교의 맹주, 천마는 그 대환단을 받고도 섭취하지 못했습니다.”

“섭취를···. 못했다?”

“예.”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아마 <업적>을 세 개씩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그에게는 일반 헌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제약 따위가 존재하는 거겠지.

그는 전생에도 그 대환단을 먹지 못했다.

그런데 그 ‘대환단’은 함부로 남에게 넘겨서는 안 되는 지상 최고의 영약.

그는 현시점, 대환단을 먹을 수도, 그렇다고 몰래 처리할 수도 없어 곤란한 상황일 것이다.

애당초 자기가 못 먹는다면 믿을 수 있는 자에게 주면 될 것을···. 천마의 머릿속에 깊게 뿌리박힌 ‘인간불신’은 그런 간단한 결단조차 내릴 수 없게 막았다.

“그런데 중국과 연이 없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그 대환단을 흑태자에게 진상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구매하겠다고 제안한다면?”

흑태자는 세계적인 투자가이지 강함으로 선망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즉, 대환단을 먹고도 천마의 좌를 위협할 수 없는 인물.

그런 결론에 도달한 천마는 분명,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절에게 그 대환단을 판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대환단은 긴 우회로를 거쳐,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오겠지···.

“...네놈. 중국에서 내기에 내걸었던 빙설화 대신 천마와의 독대권을 얻어냈다고 들었다. 설마···. 정상회담에서 얼토당토않은 내기 제안했던 것부터가 대환단을 위한 밑 작업이었단 말이냐?!”

그제야 내 계획을 완벽하게 눈치채고 그답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는 흑태자.

이것으로 그의 머릿속에서 나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책사 정도로 중요도가 더 올랐을 것이다.

이렇게 점점 더 흑태자가 알아서 내게 다가오게끔 유도하고···. 나는 앞으로도 쭉, 그에게서 수많은 내단, 영약 그리고 환단 따위를 얻어낸다.

지난번 나는, 나 자신의 레벨을 올려야 한다는 목표를 바로 세웠었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수많은 마수가 지금도 숨가쁘게 그늘 밑에서 움직이는 현재, 내가 언제 열릴지도 모를 게이트를 기다리며 손가락만 빨고 있어서 되겠는가.

훗날 무슨 말을 듣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치트와도 같은 흑태자를 쥐어짤 수 있을 만큼 쥐어짜, 지금까지보다 더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이룩할 계획이었다.

아직도 막대한 당혹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는 흑태자.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내게 더더욱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

“여자를 꼬시는데 도가 튼 게 아니라, 남녀를 가리지 않고 꼬시는 거였니? 이 난봉꾼.”

그런 당돌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와 흑태자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줄곧 프랑스측의 ‘사령술사’와 함께 문 앞을 지켜준 여자, 백귀야행 이초희였다.

그녀는 조금 전부터 계속 나를 도끼눈으로 쳐다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간신히 입을 떼자마자 꺼낸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누가 들으면 이상한 오해를 하겠습니다.”

“오해? 나는 칼레드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잖니. 대체 어떻게 그걸 구워삶았으면 흑태자가 순한 양이 되는 거니?”

어딜 봐도 명백하게 화난 눈치.

하지만 그 느낌 퍽 묘한 게, 마치 그녀가 내게 질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칼레드랑 내가 뭐 어쩌고 저째?

우에엑.

제발 망상이라도 그런 끔찍한 장면을 상상하지는 말아줬으면 한다.

“저는 여자 좋아합니다. 부협회장님.”

“그런 애가 3시간이나 기다려준 사람한테는 감사하다는 한마디가 없니?”

“아···.”

대환단에다가 다른 내기의 결과물들의 청산, 그리고 칼레드에게 특별히 부탁한 내 새로운 무기에 관한 것으로 머리가 꽉 차, 잊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흥! 참 빨리도 말한다.”

하, 이건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초희는 나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고자, 예고도 없이 소규모 회의장으로 향한 나를 기다려주었는데 나는 정작 그런 그녀를 당연하다는 취급해버린 것이다.

더는 나와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걸 표현하려는 것인지 이초희는 계속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부협회장님.”

“...”

“부협회장님?”

“흥!”

도무지 대화가 통용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전생에 검제 이서영과 함께 살던 때를 떠올리며 두 눈 딱 감고 과감한 일을 행했다.

-텁.

“어?”

그건 바로, 토라진 이초희의 양어깨를 잡고 강제로 몸을 돌리는 것.

“정말 죄송해요.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부협회장님을 신경 써드리질 못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제가 정말 나빴습니다.”

보통 이렇게 훅 다가가 강제로 몸을 움직이면, 검제 이서영의 경우 명치에 주먹을 날리고는 적어도 입을 열어주긴 했거든.

그러니 이번에도 이초희의 잿빛 마력에 날아갈 각오로 그녀의 양어깨를 잡고 몸을 돌린 것이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공격다운 공격은 돌아오질 않았다.

이에 내가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들자 내가 잡아당긴 바람에 코앞까지 다가온 이초희의 작은 얼굴이 큼지막하게 보였다.

그녀는 드물게 토끼눈을 뜨고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상태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마저도 내가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눈을 피하는데···.

아무래도 내 예상보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어···.”

“아···.”

그때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나오려던 말이 서로의 목소리에 묻혔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어색한 그녀에게서 다시금 거리를 벌리고는 사옥으로 향하는 자동차의 뒷좌석 창문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괜한 짓을 했다가 상황이 악화된 듯했다.

현재 시각은 새벽 4시 반.

저 화를 어떻게 풀어준담···.

그래도 오랜 기간을 들여 준비한 ‘대환단’ 입수 계획의 그 포문을 제대로 열게 되었으니. 우선 그것만으로도 두 다리 쭉 뻗고 잘 이유는 충분했다.

“후우우우.”

길고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 짓고 긴 한숨과 함께 들어온 협회 사옥.

나는 그중에서도 푹신한 침대가 특히나 마음에 드는, 내게 할당된 방으로 들어와 국방색 가방을 옆에다 내려두었다.

-딸깍.

그 직후, 불 켜진 방은 텅······. 비어있어야 했으나, 눈앞의 소파에는 ‘내’가 앉아 있었다.

“기다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와 똑같은 생김새에 완벽하게 같은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

‘천의 얼굴, 베르디르···!’

일순간에 ‘그’의 정체를 직감한 나는 반사적으로 생체전기를 끌어올렸지만, 내 몸속의 마력은 반응이 없었다.

‘이런 젠장! 패널티가!’

순간적으로 자세를 갖추는 데까지 소요된 시간은 단 1초.

다만, 나의 굳은 의지에도 마력은 패널티로 인해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며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검토했고, 내 고유마력인 ‘생체전기’가 아닌 상당히 이질적인 힘. ‘오브-성혈’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그걸!’

허나, 내가 정신을 단전에 집중해내기도 전에, 내 발밑에서 돋아나는 여섯 겹의 마법진.

그것은 마치 급속성장하는 식물처럼 뻗어 올라와 나를 완전히 구속했다.

“얌전히 있어라. 이건우. 너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지만···. 네놈이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우린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그의 느긋한 말과 함께 점차 수정 형태로 그 모습을 바꾸는 여섯 겹의 마법진.

서서히 굳어가는 나를 바라보는 붉은 안광이 유독 눈에 띈다.

“무능한 광신도들의 거사가 마무리 지어질 때까지만, 그곳에 들어가 있도록.”

귓가를 스치는 내 목소리.

하지만 그건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나의 얼굴’로 굳어가는 나를 바라보는 베르디르.

이윽고 의식만 깨어있을 뿐, 옴짝달싹할 수 없이 거대한 수정 속에 갇힌 나는 그가 내뱉은 단어들을 곱씹어 보았다.

무능한 광신도···.

거사···.

그리고 나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는 그 말까지.

‘베르디르가 체구와 체취, 심지어 미세한 인체구조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변신 스킬의 보유자라는 건, 불사왕의 입장에서도 극비 중의 극비다.’

일반적인 경우, 한 달에서 길게는 반년까지 대상을 관찰한 후에야 행하는 베르디르의 정치공작인 ‘대역 연기’.

그런 그가 이렇게 갑자기 나를 납치하고 내 대역을 서기 위해 이렇게 나타났다?

이런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행동은 그 철두철미한 불사왕의 머리에서 나올 만한 계획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지금의 베르디르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불사왕이 아닌 ‘휴거교’.

‘개벽의 장로와 노을의 전도사를 어떻게 해서라도 빼낼 셈이로군. 이렇게까지 나오다니···.’

나의 예측보다 그 두 휴거교도가 ‘계시’ 속에서 맡은 역할은 큰 모양이었다.

언제나 계시를 비트는 존재였던 나.

허나, 휴거교가 작정하고 일을 벌이려고 하는 이번 ‘사태’에서 나는 납치를 당해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심지어 나의 부재를 숨길 배우, 천의 얼굴 베르디르가 눈앞에 있다.

즉, 나는 납치를 당했으나, 그 누구도 나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칼을 갈고 왔군.’

이건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너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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