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53화.
-네놈이 하는 짓을, 내가 따라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나······. 타테미츠 코타로.
이를 악물고, 힘을 꽉 준 미간에는 주름이 깊게 패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그 분노의 크기를 짐작케 하는 얼굴로 ‘뇌왕 방송’ 속의 이건우는 그런 말을 씹어 뱉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다시 켜진 ‘뇌왕 방송’과 너무나도 분명하게 뇌왕의 목소리로 들려온 자백의 가까운 한마디.
-그년도 나름 한 끝발 하던 A급 헌턴데, 그렇게 깔끔하게 처리할 만한 놈이 여기 나 말고 누가 있겠어? 하하하하!
뇌왕 방송의 유일한 여 헌터, 호리미야 미노리가 피를 흘리며 등장했을 때만 해도 길길이 날뛰던 일본측의 외교관은 일순간에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 이건 무슨 착오가! 조작이 있을 겁니다! 분명히!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분명 중국과 한국이 이상한 짓을···!”
이건우가 남긴 조언으로 ‘뇌왕 방송’을 주목하고 있던 백귀야행 이초희는 안색이 어두워졌음에도 헛소릴 내뱉는 스즈키 외교관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스즈키 히로히사······.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다물어.”
-후웅!
이번에는 주위의 기온만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완전히 형태를 갖춘 냉기를 방출하는 이초희.
그녀는 끝까지 치졸한 말을 지껄이던 스즈키 외교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마치 도깨비와 같았다.
“3초 준다. 할 말 있으면 지금 다 해.”
분노로 점철된 이초희의 얼굴을 보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스즈키는 곧바로 행동을 멈췄고, 2초 후 입을 열었다.
“...저건 뇌왕과 뇌왕 방송팀의 독단이오. 나는 모르는 일이오. 진심이오.”
고민의 시간이 짧았다곤 하나, 그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 고작 자신의 무고를 호소하는 것이라니···.
이초희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그 아구창을 날려버리고자 꽉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까지 풀리고 말았다.
-퍽!
그렇다고 그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시원하게 어딘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지는 스즈키 히로히사.
곧바로 이번 게이트 공략대에 선발되지 않은 일본의 헌터들은 그를 보호하듯 섰지만, 이초희는 그저 냉랭한 기운이 가득한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다 툭, 말할 뿐이었다.
“이것들 전부 구속해둬.”
““예!””
시선을 주고받지도 않았으나 이초희의 한마디에 빠르게 움직이는 협회의 요원들.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그들이 다가가자 일본계 헌터들은 당연히 마력을 끌어모았지만, 그런 그들을 향해 이초희는 경고를 날렸다.
“저항하지 않는 자는 무고가 확인되자마자 본국으로 송환, 저항하는 자는 국제 헌터법에 따라 본국의 재판으로 엄히 다스릴 겁니다. 니들이 뇌왕과 한통속이 아니라면 얌전히 굴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단순 무력으로도 이 자리의 모든 일본 헌터들을 제압할 수 있는 이초희다.
일본계 헌터들이 순한 양으로 변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들 준비해! 다시 타르타로스가 열리는 순간에 다 같이 들어갈 거니까!”
그리 외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상회담당을 뛰쳐나가는 이초희.
정상회담 중 주최자가 자리를 비운다는 건 역사상 전례가 일이었지만, 그 자리에선 누구도 그녀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 정상회담장의 모든 이들이 눈에도 이건우의 생명은 ‘풍전등화’나 다름없어 보였으니까 말이다.
***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최고의 수직 마공학 감옥.
타르타로스의 간수장은 미친 듯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간수장, 정말로 열 방법이 없니? 그냥 문 부수고 들어가면 안 되는 거니?”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방금까지 여의도 정상회담장에 있었다던 부협회장 이초희가 눈 깜짝할 사이에 가평 타르타로스에 나타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폭풍우처럼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 강제로 문이 열리면 지하 50층까지 전부 폭발하게 설계된 감옥인지라···!”
“그럼 시스템을 다운시켜서라도 열어!”
“그···. 방비 시설의 시스템에 접속하려면 24시간이 걸리도록···.”
“그딴 미친 발상은 누가 떠올린 건데! 설계자 누구야! 너니?”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신경질적인 이초희의 반응에 쩔쩔매는 간수장.
단순 겉보기에도 이초희는 보기 드물게 초조해 보였다.
허나, 그녀의 마음을 추측하지 못할 것은 또 아닌 게 후발대로서 타르타로스의 입구에 먼저 도착해있던 러시아의 헌터들이 이미 ‘뇌왕 방송’을 시청자였던 터라,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이미 내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후우우···.”
잔뜩 조바심을 내며 자신의 검정 가죽 장갑을 강하게 물고 있는 이초희.
그 얼굴은 어떻게 해서라도 위험에 처한 이건우를 구하고 싶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보일 정도였지만, 솔직히 간수장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에잉···! 내가 C급 헌터 놈이 내기가 어쩌고 설쳐댈 때부터 알아봤지!’
그는 까놓고 이건우가 마음에 들질 않았다.
2년, 5년 길면 10년.
인망 있는 헌터로 자리를 잡기 위해 착실하게 게이트를 공략하는 다른 헌터들과 달리, 이건우의 행보는 너무나도 독자적이었다.
아직 헌터군이라는 비루한 신세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으면서, 마치 이 세상에 모든 순리를 다 깨우치고 있다는 듯 짓거리는 모습이란···.
‘뇌왕도 뇌왕이지만, 놈도 놈이란 말이지.’
나름 타르타로스 내부에서는 인자하다는 평가를 듣는 간수장이 고개를 젓게 만든다.
상급자가 바로 옆에 있으니 걱정하는 척이야 하겠다만, 솔직히 간수장은 이건우가 뇌왕의 손에 이미 죽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계열 헌터의 전투다.
한쪽은 C급 신입, 다른 한쪽은 A급에 이제 경력 20년을 넘긴 베테랑 헌터.
마력이나, 무장, 오러와 세력 모든 것이 이건우는 뇌왕 코타로에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솔직히 3분이라도 버티면 다행이겠지.
‘쯧, 만에 하나라도 그놈이 살아있을 거라고 이렇게 간절하게 생각하시는 우리 부협회장님만 불쌍하시지···.’
발을 동동 구르는 이초희를 그저 안타깝게 바라보는 간수장.
허나 어딜 어떻게 보아도 이건우는 이미 죽었다.
그건 설사 천지가 뒤집혀도, 절대 변하지 않을 진리와도 사실이었다.
“곧 열립니다!”
제어실에서 들려온 외침,
그때, 드디어 이 비루한 기다림의 끝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이윽고 타르타로스의 거대한 여섯 겹 강철문은 철컥, 철컥 소음을 토해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휘이익!
입구가 완전히 개방되는 동시에 이초희에게서 터져 나오는 묵빛의 마력.
그 마력은 대체 얼마나 밀봉 압축되어 있던 것인지 그저 뿜어내는 것으로 고음의 굉음을 터트릴 지경이었다.
곧이어 탄성 있는 스프링처럼 튀어나가는 이초희의 몸.
대체 이건우라는 그 철없는 헌터를 얼마나 걱정하는 것인지.
다리를 강화하는 각성자인 간수장조차 제대로 쫓아가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이초희는 지하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뒤에서 쫓으면서도, 간수장은 계속해서 상심이 클 부협회장을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지만 고민할 뿐이었다.
‘이건우는 협회와 군 그리고 상위 용병대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S급 헌터.’
그건 비단 간수장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닌, 각종 인터넷에서 꽤나 많은 지지를 받는 음모론이었다.
아니 음모론이라 해도 되는 걸까.
애초에 인간이 어떻게 각성한 지 1년 만에 그 많은 업적을 다 이룩해낸단 말인가.
‘뭐, 데스나이트 슬레이어? 한 번에 레벨을 6연속으로 올려?’
정말 해도 너무하다고 간수장은 생각했다.
대체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누가 믿느냐는 말이다.
조작을 하려면 좀 설득력이 있는 조작을 하면 어떻겠냐고 솔직히 간수장은 인터뷰라도 잡아서 한번은 그렇게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음모론’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 간수장의 눈에 부협회장 이초희가 저렇게나 초조해 보이는 까닭은···.
‘...얼마나 오랫동안 공을 들여 만들어낸 헌터 신화일 텐데, 뭣도 모르는 꼬맹이가 설치다 갑자기 캑, 죽어버리면······. 그야 맘고생을 하시겠지.’
조용히 간수장은 부협회장의 뒤를 쫓으면서도, 이건우라는 헌터의 한심함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만일 이건우의 그 신화 같은 일화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건우라는 헌터는 이런 곳에서 죽을 리가 없다.’
죽지 않는 걸로 끝이겠는가.
신화급 무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했으니 딱,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오라가 흘러넘치고 있어야 하며,
탈출을 강행하려 했던 그 간악한 휴거교의 종자들은 단순히 죽이는 것보다 난이도가 높은, 생포도 아무렇지 않게 해냈어야 함이 마땅하다.
‘아니면 아예 뭐, 다른 건 다 불가능했다 할지라도, 그 자존심 강한 철혈검희를 업고 나타나기라도 해보시던가. 참나, 내가 생각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이건우의 업적들은 정말 말이 안 되는 것들 투성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간수장이 그런 생각을 하며 헛웃음을 터트린 직후, 예상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우!”
이젠 저 멀리 점처럼 작아지던 이초희가 돌연 멈춰 서서는 그리 외친 것이다.
‘이건우? 살아있다고?’
너무 심란한 나머지 부협회장이 헛것이라도 보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간수장은 다리에 마력을 더 실었고,
“...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간수장과 이초희가 도달한 곳은 지하 40층.
그곳에는 흑검대 셋, 일본 헌터 하나 그리고 한국을 대표해 타르타로스에 들어갔던 네 사람이 있었다. 다만···.
뭔가 좀 이상했는데,
황금빛 눈동자로, 자신을 걱정하며 달려온 이초희를 그저 초연하게 관망할 뿐인 이건우.
그에게서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묘한 오라가 느껴졌으며,
그의 등에는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여자···. 철혈검희가 업혀 있었고,
무엇보다 이번 타르타로스 공략대의 근본적인 목표···. 이명을 가진 ‘휴거교도’들이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상태로 흑검대의 어깨에 짊어져 있었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제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마치, 간수장이 스스로 말하면서도 헛웃음이 터져 나오던, 그 기이한 전제들이 모두 맞아떨어진 것만 같은 괴상한 모습···.
‘아니, 무슨··· 이건 불가능한 일···. 아니었냐고···.’
그는 그만 사람의 말을 잃고 말았다.
***
타르타로스 게이트가 닫히고 하루가 흘렀다.
나는 금일 밤 재개되는 ‘정당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하룻밤 하고도 반나절을 누워만 있다가 일어나 옷을 입었는데, 방문 너머에서 돌연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들면 쉬어도 돼. 바보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백귀야행의 이초희.
아직 ‘토르의 투지’ 스킬의 영향이 사라지기 전에 타르나로스 내부까지 마중을 나와 내 고생을 한껏 덜어준 장본인이었다.
“지난번에도 쉬었는데, 이번에도 쉬면 묠니르 사용에 페널티가 있다는 걸 들킬지도 모릅니다.”
페널티의 존재는 숨길수록 유리하다.
어떤 멍청이가 자신이 나흘하고 반나절 동안이나 무력화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겠는가.
심지어 나는 현재 전 세계와 휴거교의 관심을 동시에 받는 입장이 아니던가.
위험은 최대한 줄여야만 한다.
“회담장에 네가 그 상태로 들어가는 게 더 위험한 건 아니고? 바보야.”
“그때는, 부협회장님만 믿고 있습니다.”
“말 안 듣는 애는 안 지켜줄 거야. 바보야.”
“타르타로스 지하 40층까지 마중을 나와주신 분이···. 그런 말을 해도 신뢰성이 떨어지네요.”
나를 지켜주지 않으리라는 말에 신뢰성이 떨어진 다라···.
내 입으로 말해놓고도 다소 민망한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듣자 하니 이초희는 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여의도에서 평택까지 날아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이 정도는 객관적인 정보에 기반한 합리적 주장일 것이다.
물론 이초희의 변덕으로 완전히 뒤바뀔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했지만,
“...약속해 앞으로는 네 목숨으로 배팅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그럼 지켜줄게.”
뭐···. 본인이 이런 식으로 귀여운 말이나 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실제로는 나는 아직까지도 불사왕의 비호를 받는 존재이기에, 애초에 걱정거리 자체가 없는 상태이긴 했다.
그래도 우선은 이초희가 날 진심으로 걱정해준 것도 있으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흥! 진작 그럴 것이지. 바보야.”
그제야 만족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이초희의 목소리.
음, 보기보다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다는 건 전생에도 건너 건너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 직접 보니 뭔가 감회가 새롭다.
그녀가 아까부터 어미에 ‘바보야’라는 말을 덧붙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초희는 내가 ‘토르의 투지’를 발동한 순간을 뇌왕과의 전투가 벌어진 시점일 거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뭐, 정말로 나는 위험에 처했었고 이번에 우연히 손에 쥐게 된 신화급 무기가 없었다면 정말 죽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사실대로 설명을 해도 그저 걱정을 덜기 위한 변명이라 여기는 것인지, 일전의 경고를 무시했던 나를 ‘바보’라 부르며 혼을 내겠다는 것이다.
바보라는 말도 말끝마다 반복하니 벌써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처럼 느껴질 뿐이었지만, 그런 걸로 본인의 화가 풀린다면 뭐···. 남는 장사겠지.
“있잖니. 건우야···.”
그때, 조금 전과는 달리 이초희는 퍽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예.”
“나···. 어제 그 뇌왕 방송인가 뭔가하는 게 터질 때부터 계속 생각했었다?”
“...어떤 생각을요?”
내 질문에 그녀는 다리의 힘이라도 풀린 것인지, 얇은 문 너머에서는 허탈하게 주저앉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진짜 뜬금없이 죽어버리고···. 네가 지켜주겠다고 했던 나도 죽은 이후의, 대한민국······.”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훅, 내려앉는 공기.
나와 이초희가 둘 다 죽은 미래라···.
그렇게 되면 자연히 현재까지는 그 막대한 존재감을 스스로 감추고 있는 이준학 준장이 대한민국의 키를 잡게 되겠지만, 그녀는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으니.
꽤나 어두운 미래를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창립 당시, 중국의 원조를 받아 급성장한 ‘황해’는 그 태생 탓에 대한민국을 독립적으로 이끌기 힘들다.
또한, 그 무엇보다 ‘무’의 경지 추구를 우선시하는 ‘만검’은 논할 가치도 없다.
그렇다고 ‘군’이 집권하면? 당장 떠올려봐도 막대한 부정부패로 뒤집히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그려진다.
그만큼 이초희의 눈에 이 시대는, 진정한 의미의 리더가 부재한 위태로운 시기.
아마 그녀만큼의 비범한 인물이 ‘나’라는 개인에게 집착하는 건, 이 같은 상황이 뒷받침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있잖니. 건우야. 너···. 협회장이 될 생각 없니?”
전쟁고아였던 이초희.
그녀는 가진 능력과 비상한 자질에 비해 굉장히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갑작스러운 질문.
나는 자연히 숨을 삼켰다.
협회장이라.
차기 협회장은 그녀 본인이 아니던가.
그런 이초희가 이제는 가만히 숨만 쉬어도 곧 앉게 될 그 자리를, 내게 양도하려고 한다.
‘그녀가 이런 비약적인 결론에 도달한 까닭은 아마도, 낮은 그녀의 자존감이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이초희가 낮은 자존감을 가지게 된 원인은 또한···.
현재는 그 연세가 무려 100세를 넘겨, 이젠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전설의 헌터, 협회장 때문일 것이고.
10년간의 전쟁 끝에 국고도 바닥나고, 일반 시민의 삶마저도 붕괴한 그 시기에, 오로지 사비로 전쟁고아를 거두고 키워준 건 현 협회장의 일생 최대의 업적이니까.
그녀가 협회장의 손에 길러졌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 대한민국에 없다.
협회장은, 멸망하는 세계를 구원한 진짜배기 영웅이다.
그는 불가능한 일을 셀 수 없이 많이 이루어낸 영웅. 동시에,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리더쉽을 겸비한 대한민국의 전설이다.
너무도 유능한 인물.
이초희는 지금 현재로서도 정말 유능한 헌터지만, 굳은 의지와 결의 그리고 신념으로 만인을 감화시킨 현 협회장과는 그 근간부터가 다르다.
갑작스러운 협회장 제의.
그건 아마도, 지금의 내가 젊은 시절의 협회장과 퍽 닮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어떤 뜨거운 감정이 있었다.
-끼익!
나는 꽤나 격앙된 그 감정을 일절 거스르지 않고 따라 예고도 없이 닫혀 있던 문을 열었고,
그 앞에서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두고 어딘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던 이초희와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슬픈, 그러면서도 문을 열고 나온 나에게 어떠한 결정을 기대한다는 듯이,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긴 고민을 거듭한 것 치고는 퍽 시원한 한마디였다.
“싫은데요.”
“...어?”
내 당돌한 거절에 슬픈 얼굴에서 맹한 얼굴이 되는 그녀.
하지만 나는 이초희가 생각을 정리할 틈 따위는 주지 않고 고민과 고심의 결과를 입에 담았다.
“제가 아는, 협회장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이초희, 당신뿐입니다.”
“나, 나는···.”
나의 거침없는 확언에도 이초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내며 시선을 내렸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생존으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생명은 배가 되고, 당신의 안정은 대한민국의 안위와 직결되니까요.”
단순한 아부가 아니었다.
실제로 전생에 이초희가 죽은 후의 대한민국은 ‘대항군’의 설립 직전까지 쭉 엉망진창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실제로 겪었다.
그러니 안다.
세계 랭킹 9위의 헌터는 그 존재 자체로 수많은 빌런 세력들을 통제하는 힘이라는 것을.
“정 부협회장님이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내가 믿고 신뢰하는 이초희라는 사람을 믿어봐요. 나 미래시 비슷한 거, 할 줄 아는 거 아시죠? 오케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니······. 순 제멋대로야. 어떨 때는 그냥 농담이었다면서 이럴 때는 또 믿어달라니···.”
“원래 그런 거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대한민국에는 협회장 이초희가 필요하다. 요점만 기억하자고요.”
“......하. 하하. 그런 거니?”
축 처지는 모습에 일부러 더 밝게 이야기를 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초희는 느릿느릿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던 건가.”
그리 중얼거리며 맹한 눈으로 나를 계속 응시하는 이초희.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는 게 버릇되어 있고, 또 그 무거운 중압감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그 모습은 전생의 나와 정말 많이 닮아있었다.
나도 전생에는 그 중압감이라는 녀석을 그저 피하려고 했던 시기가 있었기에 지금 그녀가 가진 고민이 무엇인지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마, 지난번 무기력하게 축 늘어지던 이초희에게서 내가 나를 겹쳐보았던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거겠지.
전생의 나와 같은 고통을 공유하는 이초희.
다행히도, 두 번째 생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본래라면 불가능했을,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 퍽 많았다.
“부협회장님.”
나는 어딘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이초희를 불렀고 전생의 내가, 현생의 그녀가 느끼고 있을 고충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풀어주고자 이런저런 대화를 시작했다.
참 다행히, 저번부터 줄곧 어딘가 무기력해 보이던 이초희는 다시금 미소를 되찾았고, 나와 그녀는 ‘정상회담’에 대한 시간도 깜빡 잊어버릴 정도로 긴 대화를 나누었다.
***
어두운 통로.
어째서인지 헌터군의 강화전투복을 착용한 사람들이 길게 도열해 있는 그 새카만 통로의 끝에서, 불 꺼진 조명 아래 그 얼굴을 숨긴 남자는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7여단의 급부상하는 에이스이자 새로운 S급 헌터···. 이건우가 자네에게 이곳의 위치와 정보를 알려주었다? 내가 이해한 게 맞나? 김용운 중령.”
그리고 그 수수께끼의 인물에게 이름을 불린 남자, 김용운 중령은 바짝 긴장한 걸음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더니 각이 잡힌 자세로 팔을 올려 완벽한 경례를 하더니 말한다.
“그렇습니다. 헌터군 소속 기밀 특수부대, ‘암행’의 최고 지휘관이신······. 이준학 준장님.”
그것은 그저 각 잡힌 경례이자 단순히 예의바른 인사말이었을 지도 모를 한마디였다.
허나, 그 대상이 아직 세상에 그 존재 자체가 알려진 바가 없던 헌터군의 기밀 특수부대 ‘암행’과 그 ‘암행’의 지휘관이 되면 그 의미는 남달라지는 것이다.
“갑자기 ‘암행’의 주둔지를 찾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삿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에 대한 정보까지 알고 있다는 건 확실히 유니크한 일이로구나.”
그런 말을 읊으며 천천히 조명 아래로 걸음을 옮긴 그는···.
딱딱한 말투와 험상궂은 얼굴.
자칫 대화도 안 통하는 꽉 막힌 열혈 마초와 같은 사람으로 쉽게 오해를 받는 거한.
“그래. 김용운 중령. 다시 말해보게. 그 이건우가 뭘 부탁했다고?”
‘대항군’의 설립자이자 총수였던 이준학 준장이었다.
등을 비추는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