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52화 (52/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52화.

“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이건우 공···.”

쓰러져있던 흑검대를 편한 자세로 앉혀 포션을 먹여주자, 간신히 몸을 움직일 만큼은 회복한 흑검대 대원은 연신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그런 말을 해댔다.

“괜찮습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한 분이라도 더 살리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흑검대원은 별것 아닌 내 말 하나하나에도 크게 감동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다소 과장된 반응을 보였는데···.

그들은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지, 일본뿐만이 아니라 나까지 괄시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었으니까.

아마도 그 셋을 홀로 압도한 나를 뒤늦게 경계하기 시작한 듯했다.

다만, 그다지 경계할 것도 없는 게.

나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결코 무턱대고 죽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내가 5000Wh짜리 자기력으로 제압해뒀던 일본계 헌터는 아직 살아있기도 하고 말이다.

“가, 감사합니다.”

그에게는 특별히 포션을 먹여주거나 도움을 주지 않았음에도 그 헌터는 온몸을 덜덜 떨며 내게서 거리를 두면서도 끝까지 감사를 표했는다.

아마 목숨을 끊지 않았단 사실 자체를 고마워하는 듯했다.

“고마워할 것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무고함과 뇌왕의 쓰레기성을 입증할 산증인으로서 살려드리는 것뿐이니까요.”

“그, 그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 정말, 정말로···.”

“하. 그러십니까.”

움찔.

나의 입에서 한숨이 튀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일본의 헌터는 몸을 경직시키며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만큼 겁을 먹었다면 이번 타르타로스 내부에서 별문제를 일으키진 못하겠지.

“자.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은 못 움직이는 분들을 챙겨서 따라오세요. 따라오지 못하시면 두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꿀꺽.

딱히 경고할 마음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살아남은 세 흑검대원과 한 일본 헌터는 나의 말에 각오를 다지는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지금부터 나아가야 할 길이 몬스터와 사이비 종교쟁이들로 넘쳐나는 곳이지만, 자신들의 상태는 최악에 가까우니 앞으로가 걱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이 걱정할 만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파직! 파지지지직!

지하 22층.

-피이이이이!

지하 25층.

이윽고, 약 두 시간 만에 검을 들어야 했던 지하 28층까지.

나는 혈혈단신으로 진형을 갖추고 저주를 준비해둔 그린 오크와 휴거교도의 연합을 모조리 쓸어버렸으니까.

“허어어···.”

“두 시간이 넘도록 그것도 혼자서···.”

“우, 우리 흑검대 넷보다 더 빠르고 강하잖아······.”

그런 중얼거림과 탄식 그리고 경이롭다는 듯한 감탄은 중간중간 끝도 없이 들려왔다.

사실 이 정도의 힘은 ‘오브-성혈’의 도움이 컸다.

근력이건 마력이건 종류의 상관없이 오브를 통해 끌어 오르는 신성한 피의 마력은 그 출력을 배 이상으로 만들어주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이 같은 단독전투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는데, 나는 레벨이 15로 상승한 후, 단 한 번도 내 본연의 힘만으로 싸운 적이 없었다.

개벽의 장로는 함정에 빠뜨려 잡았고,

알프레드 아들러는 ‘토르의 투지’라는 신화급 스킬에 부착된 특별한 힘으로 잡았지 않았던가.

물론 그것들 전부가 나의 힘이고, 나의 최고의 자산인 지식을 활용한 결과물이긴 했다만, 그래도 순수한 전투는 필요하다.

레벨은 차곡차곡 쌓여나가는데 그에 걸맞게 몸을 움직여주지 않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니 말이다.

실제 스펙과 자신에 대한 이해에서 괴리가 발생하면 중요한 순간에 치명적인 미스를 범할 수도 있다.

“휴우우”

그리고, 그렇기에 이렇게 자유롭게 ‘목사’급의 신도에게 통제되지도 않는 일반 휴거교도와 그린 오크를 사냥하는 건, 도움이 된다.

‘거기에다···. 전부터 계속 생각했던 거지만, <업적>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과거에는 D급이 C급과의 힘 싸움에서 밀리지 않게 만들어주는 수준이었다면,

내 능력치를 구성하는 숫자의 단위 수가 변하니 이젠 신체 강화계 A급 헌터를 힘 대 힘으로 이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힘이 받혀주니 전생보다 검이 가볍다.’

이를 통한 유검, 발검, 난검의 형(形)을 구사하는데도 큰 도움을 준다.

‘그런데···. 마천신교를 이끄는 천마는 이런 업적을 세 개나 가지고 있다고 했었지······.’

나는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려 그 마천신교의 칠각인 흑검대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나의 돌발행동에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나는 다시금 무심하게 앞을 바라보며 검을 고쳐쥘 뿐이었다.

지하 30층.

나는 구석으로 도주하던 그린 오크를 향해 전격을 쏘아 마무리를 짓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체전기의 고갈로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나온 한숨.

“이제 그만 쉬시지요. 이건우 공.”

“앞으로는 저희 흑검대에서 전위를 지키겠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저, 저희가 돕겠습니다.”

하지만 흑검대원들은 내 짧은 한숨 한 번에 눈을 번뜩이며 그런 말을 큰 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내게 도움이 되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마천신교라는 집단은 쓸모있는 자에게 기묘할 정도로 후하고 불필요한 자에게 끔찍할 만큼 박한 단체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포션까지 나눠주고도 그들에게 아무런 일을 시키지 않으니 흑검대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는 듯했다.

허나, 내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안 됩니다.”

어딜 공짜 경험치까지 주는 내 훈련장을 빼앗으려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부상병을 싸우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생의 장교 시절에는 부상병도 곧잘 전쟁에 내보냈으니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그런 듣기 좋은 말을 내뱉자 마천신교의 흑검대원들은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기까지 했다.

“이, 이건우 공···.”

“어찌 이런 분이, 한국에 계셨다는 말인가.”

“정말, 정말 감사하오.”

다 큰 남자들이 이러니 상당히 징그러웠지만, 뇌왕이 워낙 A급에서도 최상급의 헌터라 힘을 못 썼을 뿐, 흑검대는 전생에도 아주 강한 무력집단으로 명망이 높았었다.

천마와 우호적인 관계로 있고 싶은 마음도 있고, 훗날 강인해질 이들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으니 나는 그냥 더, 더 그들이 감동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실제로 백귀야행의 이초희와도 이러다 보니 지금처럼 막역한 친구 사이가 되지 않았던가.

그렇게, 잠깐의 잡담으로 마나를 회복하고 이어서 지하 32층을 공략, 그 너머 층으로 향하려던 그 순간 흑검대원 중 하나가 질문을 건네왔다.

“그런데, 이건우 공···. 정말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자존감이 높은 흑검대치고는 퍽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이에 나는 마음속으로 작게 웃고는 말했다.

“예. 뭐든 물어보세요.”

“...그대의 동료들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이건우 공에게만 이런 중대사를 맡기고 머리카락 한 올 내비치지 않을 사정이 어디 있는 겁니까?”

아, 그 건에 대해서인가.

마침 시간도 얼추 지났다.

아마 ‘밑’으로 향했던 철혈검희와 성전사 그리고 섬광 스킬의 보유자인 장교, 그 셋과 슬슬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슬슬 올 때가 됐네요.”

“오, 올 때가 되었다니. 이제야 내려온다는 말입니까. 위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의 흑검대원.

대체 공략대원 한 명에게 모든 걸 맡긴 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까지 따지고 들 기세였다.

그러나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요.”

“아래···? 이 밑은 휴거교와 그린 오크의 영역이···.”

“예. 맞아요. 이 밑으로는 ‘적광의 게이트’까지 계속 그린 오크와 휴거교의 신도들밖에 없죠.”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흑검대원들.

그래서 나는 보다 직접적인 표현으로 작전을 설명해주었다.

“이 타르타로스에는 지하 40층까지 긴급 탈출 포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단 1분 만에 400M를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탈출 포트.

이미 간수들이 탈출한 시점에서 그 탈출 포트는 사용되었을 것이고, 그럼 당연히 텅빈 공간이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제 동료들은 이미 한참 전에 그 길로 내려갔습니다. 지하 40층으로요.”

“에···”

“아···?”

“예에?!”

“그, 그랬다간 밑으로 내려올수록 더 복잡하고 강력해지는 ‘저주’에 정신을 잃고···.”

당연히 전멸하는 것 아니냐 묻는 흑검대원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어차피 개벽의 장로와 노을의 전도사를 구조하기 위해 급조된 게이트다.

소환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린 오크 레벨의 몬스터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반 시민’으로 삶을 영위하던 신도급뿐.

물론 밑으로 갈수록 짙어지는 ‘저주’가 유일한 위험요소이자 경계 대상이었지만···.

‘저주’는 이번 우리 한국 공략대의 발목을 잡지 못한다.

섬광과 신성력은 모든 저주를 몰아내고 남은 것은 철혈검희 이서영의 독무대.

나는 처음부터 이럴 심산으로 그녀들을 데리고 왔던 것이다.

-쿵!

그때, 지하 33층에서부터 들려오는 큰 소음이 있었다.

타르타로스의 지하 장벽이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충격음.

-쿵! 쿵!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소리에 흑검대의 셋과 일본측 헌터는 급히 긴장한 얼굴로 각자의 무기를 꼬나쥐었지만, 나는 철제문에 ‘자기력’을 입혀 오히려 잠금쇠를 제거해주었다.

“지금···. 무슨?!”

문 너머의 무언가를 흉악한 휴거교도 혹은 거대한 그린 오크라 생각했는지 흑검대원은 놀란 눈을 뜨며 내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텅!

짙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문 너머에서 나타난 건···.

아주 작은 키의 여자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뭐야. 사람이 왜 이렇게 줄었어.”

한껏 긴장했던 이들이 허망해질 정도로 태평한 목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철혈검희 이서영. 그리고 그런 그녀를 따라 힘든 기색을 풀풀 풍기며 걸어오는 두 사람.

“건우야! 다행이야. 아무 일도 없었구나?”

사람이 줄었는데도 나의 무사를 확인하자 곧장 그리 말하는 남궁연 소위와 무심하게 타워 쉴드에 묻는 몬스터의 피를 닦는 성전사 메리.

솔직히, 이 셋을 보내면서 나도 인간인지라 걱정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무사태평한 모습을 보니 한시름 놓인다.

“아무 일도 없던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건우야. 건우야. 들어봐봐. 40층에 퉁, 하고 떨어지니까 말이야. 주변에 무슨 하이 오크들이 막 널려 있었는데···!”

무슨 모험을 즐기고 돌아온 아이처럼 흥분한 눈으로 자신들의 일대기에 대해 조잘조잘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남궁연.

그녀는 나와 곧잘 함께 다니다 보니 전보다 성격이 좀 많이 밝아져 있었다.

성요한 성당 게이트 때만 해도, 벌벌 떨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이는 나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이들도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드디어 다시 모인 타르타로스 공략대를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

실질적 위협이라 볼 수 있는 지하 41층부터 50층. 그리고 그 내부에 자리한 ‘적광의 게이트’.

생존한 1차 공략대의 여덟 명은 40층에 모여 앉아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했고,

-삑.

남궁연의 손목시계에서부터 짧고 단조로운 소음이 울리는 것으로 꿀같이 달콤했던 5분간의 휴식은 끝을 알렸다.

“후우우우. 우선, 제가 협회의 부협회장에게 제안했던 첫 번째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첫 번째 작전이란, 일반적인 마력의 운용으로는 결코 튕겨낼 수도, 버텨낼 수도 없는 휴거교의 지독한 저주를 실제로 타국의 헌터들이 체험하도록 유도하려던 것을 말했다.

“쯧, 아깝네. 놈들도 그 맛을 좀 봐야 하는 건데.”

내 한마디에 정말로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건 실전파 무인 이서영이었다.

“아깝다니, 전 솔직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무지한 자들이 자기 발로 사지에 들어가는 꼴을 지켜보는 건 성전사의 규율에 어긋나는 행위였으니까요.”

그리고 이서영과 정반대의 목소리를 낸 것은 메리였다.

뭐, 작전을 논할 때부터 그리 좋은 얼굴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 알았다.

“뭐, 그런 감상은 차차 하고요. 중요한 건 지금부터입니다. 크흠, 첫 번째 작전이 실패한 것과 달리 그리고 두 번째 작전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건우야. 두 번째라면 우리 한국 공략대가 그 개벽의 장로를 생포하는 거, 였지?”

“잘 진행되고 있다고 보기에는, 시간이 좀 부족하지 않냐. 방금 55분 지났어. 5분 뒤면 후발대가 들어올 텐데?”

내 말에 드물게 무작정 동조하지 않고 우려를 표하는 남궁연과 현 상황을 정확히 짚어주는 이서영.

그러나 나는 그 우려의 목소리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아니요. 시간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55분 동안 40층을 뚫고, 남은 5분 안에 나머지 10층과 그 밑에 게이트까지 쓸겠다? 거기에 그 개벽의 장로라던 녀석, 만만치 않던데? 50명이 넘는 헌터들의 협공에서도 10분이나 버텼어.”

곧바로 다시금 나의 주장에 반박을 내놓는 이서영.

그녀의 주장은 자신이 경험한 명백한 사실과 객관적인 정보를 토대로 하고 있었기에 나를 제외한 일곱은 그녀의 말에 동감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5분 후면, 후발대가 올 것이오. 그들과 합류하는 것은 어떠하오. 이건우 공.”

심지어 지금껏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흑검대마저 한술 거들며 그런 조언을 던지는 상황.

그들의 주장은 정론이었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냐하면,

“방법은 있습니다.”

나에게는 실제로 이 모든 상황을 5분 만에 돌파해낼 비책이 있었으니까.

이번 타르타로스 게이트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앞서 말했듯 타국의 헌터들에게 휴거교의 매운맛을 맛보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휴거교도들을 간접적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좋은 인질, 개벽의 장로와 노을의 전도사를 다시금 생포하는 것.

뇌왕의 멍청한 트롤링으로 인해 이 같은 작전은 솔직히 무산되어 버린 듯했지만···. 사실 언제나 플랜 C까지 구상해두는 내게, 이런 건 문제가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벌떡,

나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서 바로 옆에 있던 이서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부터 이 순간부터 적광의 게이트까지는 저희 둘에서 향할 겁니다. 준비되셨죠 대대장님?”

곧 후발대도 도착할 것이다.

하물며 이 앞은 지금껏 공략해낸 40층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저주와 함정이 즐비할 사지.

그런 곳을 공략대 인원들 늘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줄여서 가겠다니.

이 자리에서 나를 제외한 일곱 명의 얼굴이 동시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건,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상식이란 건 깨졌을 때가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 된다.

다른 사람이라면 불가능했을, 나와 이서영만이 가능한 묘기.

“유검(流劍) 제5형. 버들잎의 바람.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으시죠?”

나는 모든 것을 흘려내며 질주하는 검술을 논했고, 이서영의 눈에는 이채가 서렸다.

***

-스으으으.

거대한 나무들로 우거진 삼림.

균일한 간격으로 떨어져 누워 거대한 원을 형상한 사람들의 몸에서부터 붉디붉은 핏방울들은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언젠가 서울역에서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그러한 풍경.

섬뜩하게도 자기 손으로 자신의 가슴에 단검을 박아넣은 이들의 표정은 한없이 기뻐 보였고, 허공으로 떠오른 핏방울들은 이내 둥그런 원을 형성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곳은 사람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포도나무 한그루가 심어져 있는 성역,

피의 성역을 베이스로 한 적광의 게이트 내부였다.

“하아···. 내가······. 나로 말미암아 수천의 신도를 피흘리게 한 것도 모자라, 웃기지도 않은 추적대로부터 도망을 쳐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 원의 중심에서 길다란 창을 손에 쥐고 있는 여자는 연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 씨바 장로! 기도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거면 원에서 나가 있어요! 집중에 방해되잖아!”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정결하게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기도문을 외던, 입이 더러운 남자가 하나.

그와 그녀는 참 어처구니가 없게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뼈가면을 뒤집어쓴 상태였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냐···.”

“아 씨발 몇 번을 말해요. 죽기 싫어서 기도하는 거잖아. 차원 문이 열려야 도망가든지 할 거 아냐! 게이트에서 평생 나랑 살래?”

“...너는 너무 못생겨서 싫다.”

“아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 하아아. 진짜!”

답답해 죽겠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린 남자. 그는 휴거교의 전도사.

그것도 훗날 목사직을 받아 노을의 목사가 될 예정인 전도사 김총준이었다.

마찬가지로 도통 대화가 안 통하는 근육 뇌의 여자는 그와 함께 철혈검희 이서영에게 사로잡힌 개벽의 장로. 박유진.

두 사람은 이전 이건우의 함정에 빠졌던 그때부터 이젠 우스꽝스럽게밖에 여겨지지 않는 ‘뼈가면’을 벗지 못하고 있었지만,

‘주교’의 도움과 타르타로스라는 휴거교도가 가득한 이 환경 덕에 탈출에 성공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었다.

“후우우···. 장로. 뭐가 어찌 됐건 차원문은 5분 내로 열릴 겁니다.”

“놈들은?”

“머저리 같은 감옥의 시스템 덕분에 아마 원군을 기다리는 모양입니다. 40층의 그림자는 돌아왔는데, 41층의 그림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거든요.”

“그런가···.”

하지만 무사히 타르타로스를 탈출할 수 있다는 말에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보이질 않는 개벽의 장로.

전도사 김총준은 그런 반응에 치를 떨었지만, 까놓고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Lv. 21이라는 나약한 스펙으로도 그 배 이상의 괴물들을 아무렇지 않게 썰어버린 철혈검희 이서영의 대항마였으니까.

정작 이서영에게 무참히 패배해 사로잡히고, 심지어 이번에도 다가오는 이서영을 두고 도망이나 쳐야 한다는 게 싫은 거겠지.

그러나 김총준은 그저 그런 비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장로에 더 싫었다.

‘어차피 살아서 나가야 복수를 하든 하는 거지. 뭘 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자빠졌어. 하여간···. 무인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이미 보름 가까이 강제로 붙어 다니게 되었음에도 전혀 친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 두 사람.

노을의 전도사 김총준은 드디어 저 근육 뇌 여자에게서 멀어질 수 있음에 기뻐할 뿐이었다.

41층은 아직도 공략되지 않았다.

45층부터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휴거교의 비술, ‘감각 소실의 저주’마저 쭉 설치해둔 현재···.

붉은 차원문이 열리는 건 시간문제인 것이다.

‘드디어···. 드디어 이 망할 인질 생활에서 탈출을···!’

그렇게 노을의 전도사가 고요히 희열 가득한 주먹을 쥐는 바로 그 순간, 갑작스러운 이변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투웅!

거대한 소음과 함께 유리창이 깨지듯 갈라지는 허공.

이내 그 두 개의 인영(人影)은 공간을 찢고 적광의 게이트 내부에 발을 디뎠다.

“너··· 너는?!”

아무리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인물의 등장으로 말을 더듬는 전도사.

그런데 사뿐한 걸음으로 게이트에 발을 들인 그는 시퍼런 전류를 번뜩이며 여유롭게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여. 잘 지냈어? 총준이 그리고 박유진.”

“어, 어떻게! 41층의 저주는 아직 그대로일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당황한 노을의 전도사는 큰 목소리로 그리 외쳤지만, 시퍼런 전류의 남자, 이건우의 대답은 너무나 허탈했다.

“어떻게 왔긴, 그냥 다 뚫고 달렸지.”

휴거교의 저주 앞에,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노을의 전도사가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있자···.

이건우의 손에 쥐어진 아주 강한 신위가 느껴지는 망치.

그리고 철혈검희 이서영의 목에 걸린 성전사들의 로자리오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신력이라고?”

그 어떤 저주와도 상극의 상성을 자랑하는 힘.

‘신력’과 ‘신성력’은 각각 망치와 그 십자가 목걸이에 아주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

“...그게 황금 게이트의 보상인가.”

“알아보는구나 총준아.”

“그딴 식으로 날 부르지 마라······. 그런데, 네놈들 둘이 전부인가.”

“그렇지, 신성력이랑 신력이 어디 흔한 힘은 아니잖아?”

노을의 전도사는 태평한 이건우의 한 마디에 멍하니 눈을 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뭐라? 둘? 네놈들 둘이서 이 몸과 개벽의 장로님을 막고자 왔단 말이냐? 고작 둘이서? 하핫, 하하하!”

비웃음.

그건 자신감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이었다.

실제로 저번 황금 게이트 내부에서도, 이건우는 전도사와 장로를 감당할 수 없으니 자질구레한 사전작업을 통해 그들을 함정에 빠뜨려 제압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황금 게이트 밖에서 만난 이서영은, 헌터 50여명의 협공이 있지 않았다면 충분히 싸울만한 상대였다.

하지만, 전도사 김총준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둘? 아니다 총준아. 너희 두 연놈들을 다시 감방에 처넣는 데는, 나 하나로 충분하지.”

“뭐? 푸하하핫! 말이 되는 소리를···. 응?”

이건우의 여유로운 말투에 다시 한번 조소를 터트리려던 전도사.

허나, 그 순간 이건우가 쥐고 있던 망치에서부터 황금빛의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줄곧 여유롭고 태연할 뿐이었던 이건우의 인상이 확 어두워지고, 그의 전신에 믿을 수 없는 아우라가 깃든다.

이내 여유롭게 감았다 뜬 이건우의 눈은 어떻게 된 일인지 진한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감옥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무덤덤하고 무미건조하게 튀어나온 이건우의 목소리.

황금의 섬광이 전도사의 코끝까지 다가온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다.

-파지지지직!

금빛 뇌격은 붉은 게이트를 일순간에 황색으로 물들였다.

대항군의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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