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36화 (36/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37화

-딩, 딩.

종소리가 들렸다.

들려오는 소리는 가까웠지만, 결코 귀를 자극하지는 않았고 딱 듣기 좋은 소리였다.

슬며시 눈을 뜨자, 따스한 볕이 하늘을 노랗게 물들인 저녁이었다.

바람이 쓰다듬는 연둣빛의 초원은 아름다웠고, 나는 자신이 높은 언덕 위 높은 나무에 기대어 뉘어 있음을 자각했다.

‘...여긴?’

말을 하려고 했지만, 기이하게도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도 이질적인 광경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참 신비롭게도 마음은 평온했다.

나무의 그늘이, 노을의 따스함이, 노랫말처럼 들려오는 종소리의 연주가 뼛속 깊이 서려있던 긴장감마저 사르르 녹이는 것 같았다.

후우.

숨을 쉬는 것만으로 그저 기분이 좋았다.

서서히 지어지는 미소.

나는 왜인지 이곳이 너무나도 좋았다.

새근새근,

그때, 지금껏 내 어깨에 기대어 있던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본 그곳에는, 물빛의 긴 머리카락에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웬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다.

누구지?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허나, 참으로 기이하게도 나는 영문도 모를 존재가 바로 옆이 있었지만, 그것을 참으로 당연하게 느꼈다.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그 아이를 보는 건, 그 자체로 꽤나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를···. 참으로 고생시켰더구나. 두 번째 생을 살아가는 자여.”

이번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너무도 가까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새하얀 빛에 둘러싸여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뭐지···!’

놀란 내가 속으로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며 없던 경계심을 끌어올리자, 눈앞의 존재는 허허허, 인자한 웃음소리를 냈다.

“경계할 것 없다. 수신의 길을 걷는 자여.”

나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른인지, 노인인지, 어린아이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내 앞에 있고, 그가 내게 적의가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 이상으로 어떠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그의 말, ‘수신의 길’을 걷는 자라는 말을 통해 나는, 내가 두 번째 생을 살아가며 받게 된 엑스트라 퀘스트, ‘수신의 길’에 대해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두 번째 생···.

휴거교와 빌런, 성전사들과 거대 게이트.

생각이 난다.

나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본디오 빌라도’를 휘둘렀고, 인형술사 케일른의 머리에 혈검을 박아넣는 바로 그 순간, 의식을 잃었었다.

“아니···. 그대는 그때 정신을 잃었던 것이 아니라 확실히 죽었었다. 육체는 붕괴해 일흔두 조각으로 찢어져야 마땅했으며···. 또한 그대의 혼은 아주 먼 곳으로 향할 예정이었지.”

‘지금 내 생각을 읽은 건가?!’

나는 놀라 눈을 부릅떴지만, 눈앞의 존재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놀랄 것 없다. 이곳에서는 목소리도, 생각도, 의지도, 마음도 구분되지 않으니.”

...

“경계심이 많은 아이로구나···. 허나, 그만큼 이타적이며 정의로운 마음씨도 가졌지. 그러니 저 아이가 그토록 사력을 다해 그대를 지킨 것이겠지만.”

지켰다?

문득 든 의문에 그리 생각하자, 그마저도 읽어낸 것인지 눈앞의 존재는 말했다.

“일흔두 조각으로 찢어졌을 육체도, 머나먼 곳으로 떠나갔어야 할 혼도, 모두 그녀가 막아냈지. 그대는 좀 더 그대의 주신에게 감사해야 할 필요가 있어.”

주신···?

내가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눈앞의 존재와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든 이 소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신적인 존재.

-신은 정말로 없는 걸까요.

언젠가 최후의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있던 시절, 뇌제인 내게 검제인 이서영은 그런 질문을 했었다.

당연히 없다고, 존재할 리가 없다고 여겨왔던 존재가···. 지금 나의 눈앞에 있다.

갖은 욕지거리와 분노가 단숨에 턱밑까지 차올랐다.

만일 몸이 말을 듣는다면, 당장이라도 허리춤에 꽂혀있는 혈검을 뽑아 눈앞의 존재를 날려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어오른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눈앞의 존재는 허허허, 그저 미소를 지었다.

“좀 걷지.”

그 존재가 그리 말하자, 어느새 나는 물빛 머리카락의 소녀를 업고 어느 강변을 걷는 중이었다.

‘...?!’

나는 놀랐지만, 마치 꿈을 꿀 때와 같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대체···.

이곳은 어디고, 나는 왜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뒤늦게 처음부터 가졌어야 할 의문이 내 머리를 채웠고, 어느새 내 옆을 나란히 걷고 있던 그 존재는 나긋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당신은 뭡니까.

입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후광에 휩싸인 존재를 그리 생각했다.

이에 존재는 답했다.

“...나는, 지금 그대가 등에 업은 그 아이의 오랜 벗이지.”

...

“하하하!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이군. 그렇지? 그렇다면 그대에게 가장 친숙한 단어로 설명을 하면 좋을까. 그래···. 나는 현재의 세상에서 바티칸의 어린 양들에게 권능을 나누어주는··· 그뿐인 자라네.”

신성 바티칸와 성전사.

세계에서 단 한 명뿐인 성녀와 교단을 이끄는 성황.

그들에게 권능을 나누어주고 있다는 말은 자연히, 단 하나의 존재를 떠올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숱한 의문과 분노가 일순간에 내 머리를 가득 채웠지만, 이어지는 그 존재의 말에 나는 숨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순리에 따라 자네의 혼을 거두기 위해 찾아온 사신이라고 볼 수도 있어.”

사신,

갑작스러운 발언에 흠칫 놀라 강변의 산책로에 멈춰서는 나.

허나, 눈부신 후광에 휩싸여 제대로 바라보는 것조차 힘든 그 존재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당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뭘 그리 놀라는 게지? 그대는 육체에 걸맞지 않은 그 혈검을 휘둘러 불가능한 일을 이루어냈고, 그 대가로 육체의 붕괴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럼 그대의 혼이 본래 향해야 할 곳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그 존재의 어조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계절이 변화하고, 시간이 흐르고, 바다에 파도가 치고, 때때로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일처럼 아주 당연하고, 자연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였다.

허나, 이 존재가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죽어가는 나를, 등에 업힌 이 소녀가 구해주었다고···.

“그래. 그대의 죽음은 현재 내 벗의 힘으로 멈추었지.”

멈추었다?

영문 모를 말에 그 존재가 고개를 돌리자, 나는 그 존재의 시선을 따라갔고, 단순한 강처럼 보이던 곳에는 어떠한 형상이 비치고 있었다.

[하이 포션을 더 가지고 와!]

[어, 어떻게 이 상태로 살아 있는 거지?]

[분명 심장이 갈라졌는데···. 피가 한 방울도 세지 않고 흐르고 있어!]

새하얀 빛으로 둘러싸인 상태로, 수술대 같은 것 위에 눕혀져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이상한 마나가 조각난 몸이 흩어지는 걸 잡아주고 있잖아?! 이게 대체···!]

[몰라! 이게 성전사들이 말하던 그 기적인가 뭔가 하는 건가 보지. 떠들 시간 있으면 수혈팩이나 더 가지고 와!]

[아, 아니···. 이건 신성력이 아닌데···?]

7여단의 군의관들, 그리고 언젠가 지금보다 더 먼 미래에서 만난 적이 있던 국내 최고의 ‘의술’ 스킬을 보유한 닥터, 곽재신도 보였다.

현재의 그는 ‘수도방위사령부’와 ‘협회’의 사람 중에서도 최상위 권력자들만을 위해 수술을 집도하는 인간일 텐데···.

아무래도 닥터, 곽재신과도 안면이 있는 여단장 최중철이 그를 부른 모양이었다.

나를 위해서 말이다.

“앞으로 정확히 5시간, 저 치유사의 수술이 시작되고 딱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그대는 명을 이어가게 될 거다. 그리고 정확히 다시 60시간 뒤, 정신을 차리게 되겠지.”

그러면···. 뭐가 문제인 걸까.

“문제는 없지, 다만···. 나는 그대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뿐이다.”

선택의 기회···?

“그래···. 그대여. 두 번째 생을 살아가며, 만생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평생 고역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내내 고통과 고난과 역경과 시련을 마주해야 할 그대여···.”

보이지는 않았다.

허나, 느낄 수는 있었다.

누군가 어째서라도 묻는다면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눈앞의 이 존재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존재는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가 가엽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하는 생을 살아갈 그대는, 매시간 가시밭길을 걸으며 매순간 격통을 견디기 위한 몸부림을 치며 살 운명인 게다. 그래서···. 그대에게 어깨에 짐을 내려놓을 기회를 주고자 나는 이곳에 왔다.”

울먹임 따위는 없었지만, 그 존재의 눈물은 이미 땅에 닿아 저 강을 향해 흐르는 물길이 되었다.

초월적이며, 이질적인 존재.

그리고 그런 그가 말한다.

나의 남은 생은 앞으로도 고통과 고난의 연속일 거라고···.

그런 나를 가엽게 여겨 그는 내게 ‘살아나길 포기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살아나길 포기할 기회라···.

“그대는 노력했다. 그대는 힘냈어, 그대는 보상받아 마땅하고 또한 그대는 숭고했다. 난 그런 그대에게···. 마땅한 안식을 주고자 할 뿐인 게다. 지금 나의 손을 잡는다면 그대를 꼭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하겠다. 약속하지.”

마땅한 안식, 아버지의 나라.

눈앞의 존재가 어떤 말을 하건, 참 신비롭게도 나는 그것이 그 존재의 진심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가엽게 여겼고, 내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해 주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을 두고 구원이라 말하겠지.

삶의 고통을 모두 내려놓고 저기 어딘지 모를 ‘아버지의 나라’로 가서 평생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사는, 그런 미래를 꿈꾸면서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든 당장 내 문제는 어떻게 해결이 될지라도···.

나를 위해 죽어간,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라도 나를 살리고자 했던 내 동료들의 죽음에는 어떤 의미가 남는 걸까.

날 위해,

인류의 생존을 위해 희생한 그들의 죽음에 내가 응하지 못하면···. 그들의 죽음은 그저 개죽음이며, 세상은 결국 인류 절멸의 미래로 향할 것 아닌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살아나지 않을 기회’라니, 솔직히 웃긴다는 생각까지 든다.

내게 두 번째 생을 준 존재가 대체 얼마나 잘나신 분이고 어찌나 전지전능하신 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 번째 생을 얻은 내가 그 자리에서 자결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싸울 각오를 다지고,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디셔 성장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모두 나를 위해 죽어간 ‘동료’들의 죽음에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아니던가···!

그런 내가 가엽다고?

고통과 고역과 고난과 시련을 평생 함께할 내게 안식을 주겠다고?

이제 쉬라고!?

내가 지금껏 뭘 했다고 안식을 취하겠는가.

내가 뭐가 잘났다고 벌써 약한 소리를 늘어놓겠는가.

날 위해, 유일하게 재앙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공격력을 지녔다는 이유로 나를 대신해 죽어간 ‘동료’들이 아직 내 어깨 위에 있는데!

내가 어찌 벌써 죽을 수 있느냔 말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낄지는 몰라도, 내게 있어 그 말은 그저 모독이었다.

“나의 삶을···. 아니! 내 동료들의 의지를 모독할 생각이라면 당장 관둬!”

기이하게도 나는 처음으로 이 이질적인 장소에서 입을 열 수 있었다.

“난, 내 의지로 이곳에 서 있다! 나의 선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이렇게 서 있는 거란 말이다! 어쭙잖은 동정으로 날 구원한다 만다 떠들 생각이라면, 당장 그만둬! 네가 무엇이건, 어떤 존재건, 나는 계속 나아갈 거다. 인류 절멸의 미래를 막는 그 날까지···!”

어째서 지금껏 닫혀 있던 입이 열린 것인지,

어째서 나의 거친 거절을 듣는 눈앞의 존재가 이렇게나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건지.

당장에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일말의 거짓이 섞이지 않은 진심을 가슴에 담았을 때 비로소, 내 입이 열렸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어째서인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미소를 짓던 그 존재는 내게 물었다.

“그 길이 영원토록, 고통에 찬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그래.”

“언제 끝날지 모를 모래 폭풍이 너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을 막고 때로는 그대의 육체마저 집어삼키려 들지라도?”

“그래···. 내 동료들의 죽음, 그 가치를 증명해낼 그 날까지.”

그 존재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단, 나 자신과 나누는 맹세에 가까운 말이었다.

내 딴에는 숭고하지도,

고결하지도 않은 분노의 표현이었건만,

눈앞의 존재는 그저 내 대답에 이전보다 더 밝고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 같은 신자를 두다니, 나의 벗, 수신은 정말로 행복하겠구나. 어째서 그녀의 막대한 신위를 불태우면서까지 그대를 지키려 한 것인지 이젠 이해할 수 있다.”

수신, 그건 아무래도 내 등에 업혀 잠을 자는 이 소녀를 가리키는 말인 듯했다.

“고결한 순례자여, 수신의 마지막 신자여.”

확고한 대답을 내놓은 순간부터, 서서히 흐려지는 나의 시야와 정신.

허나, 그런 나의 어지럼증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존재는 계속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그대가 걷는 그 길에 아버지의 축복이 함께하길 빌어주겠다.”

쭈우욱,

테이프가 늘어지듯, 점점 이상하게 늘어나고 줄어드는 그 존재의 목소리.

이내, 분명 강변을 걷고 있던 나의 다리가 땅을 파고들고, 점차 멀어져가는 정신이 강으로 흐르자···.

내 머릿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은 선물을 보내두었으니 꼭 보아라, 그리고···. 앞으로도 나의 벗을 잘 부탁하마.

이윽고 나는 단숨에 밀려오는 잠에 몸을 맡겼다.

***

뒤늦게 내가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실제로 거대 게이트가 닫힌 그 날로부터 3일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

불이 꺼진 퍽 호화로운 병실.

여러 가지 의료기기들이 내 몸 곳곳에 연결되어 있고, 나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려 했지만, 무언가 입을 막고 있음을 눈치챘다.

‘산소마스크···. 전신에 감긴 붕대와 진한 소독약 냄새···.’

누가 봐도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서 회복을 기다리는 그런 환자의 모습이었다.

‘...꿈, 이었나.’

흐릿한 기억이 있었다.

양지바른 언덕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듣던 종소리, 그리고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던 물빛 머리의 소녀.

그리고 분명 나와 대화를 나누던···. 아니, 말싸움이었던가.

아무튼, 나는 그곳에서 누군가와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었다.

‘무슨 대화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대화를 나누었던 상대도 희한한 빛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고, 그 목소리도 정말 특이했다.

다만, 갑작스럽게 기억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마디가 있었다.

-작은 선물을 보내두었으니 꼭 보아라, 그리고···. 앞으로도 나의 벗을 잘 부탁하마.

그 존재가 말한 ‘벗’이란, 그 물빛 머리카락의 소녀였던 것은 기억한다.

‘그런데 선물이라니···.’

영문모를 소리에 머릿속에 물음표 수십 개를 띄우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바로 그 순간,

-띵!

갑작스러운 알림음이 들려왔다.

이윽고 내 눈앞에 나타나는 두 개의 메시지.

하나는, 내게 퍽 친숙한 메시지.

<적정 보상 집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것을 보자마자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9레벨의 헌터가 40레벨 이상의 ‘데스나이트’를 반쯤 죽여놓은 것이다.

이번 보상은 정말, 지금까지의 보상과는 그 양도, 질도 차원이 다를 것이 분명했다.

허나, 문제는 ‘보상 메시지’가 아닌 다른 쪽에 있었다.

<선물>

허공에 부유해있는 단조로운 하나의 단어.

허나, 참으로 신비로운 점은 그 메시지에는 마치 새하얀 빛을 조각해 만들어낸 것 같은 아름다운 문양이 수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들어본 적은 있다.

선행을 이다지도 많이 행한 성직자나 신의 선택을 받은 성자, 성녀 그리고 교황에 경우 이 세상의 법칙을 바꿔놓은 ‘메시지’가 다른 형태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른 형태, 바티칸의 성직자들과 연관된 존재···.

꿈에서 보았던 그 존재는, 바티칸이 믿고 숭배하는 그 존재와 같은 인물이었던 걸까.

명확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없었다.

-딩.

새하얀 메시지에 손을 가져가자, 큰 종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며 메시지는 잘 말려있던 파피루스처럼 펼쳐졌다.

이윽고 허공을 유영하는 빛은 글씨가 되었고, 그것은 마치 성경의 한 구절 같은 글귀를 형상화했다.

「주께서 가로되 신실한 자야 두려워 말라. 주의 왼손에 못 박힌 자국을 가진 자를 찾으라. 그는 주의 사자이니, 주가 그와 함께하며 너를 지키리라.」

이 글귀가 그 존재가 말했던 선물인 걸까.

그래, 알겠다.

이건 휴거도나 바티칸의 교황이 말하는 계시의 일종인 듯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점지해주는 일종의 이정표 같은 것 말이다.

무신론자인 나를 배려해준 것인지, 다행히 이 계시를 해석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왼손에 못 박힌 자국을 가진 자.

그건 ‘성흔’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게이트가 나타나 세상의 규칙을 바꾸고, 메시지가 나타나 수많은 이들이 각성하던 시절, 실제로 세상에는 극소수이지만, ‘성흔’을 가진 자들이 나타났다.

‘성흔’을 가진 존재···.

현재의 세상에서 공식적으로 ‘성흔’을 가진 존재는 딱 셋뿐이다.

신과 소통하고, 계시를 받으며 미래를 엿보는 권능을 하사받은 성녀.

신의 창이라고도 불리며 ‘징벌’이라 이름 붙여진 모든 위력적 권능을 휘두르는 성자.

마지막으로 세상 모든 성당과 교회의 정점에서 교인을 양육하고 성전사를 길러내는 교황.

‘기껏, 초월적인 존재에게 받은 미래를 바꿀 카드다···. 어떻게든 활용할 방법을 생각해봐야겠지.’

셋 중 누가 되었건, 그들을 직접 대면할 이유이자 기회가 생겼다는 건 그 자체로 큰 이득이다.

아직은 괜찮지만, 훗날 ‘불사왕’이 유럽 전역을 하루아침에 집어삼키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바티칸의 내부 분열로 인한 자멸이 가장 큰 요인이었으니까.

‘교황파와 성자파로 완전히 나뉜 현재의 바티칸은 사실, 겉만 번지르르한 황실 마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본디 그들의 싸움을 중재하고, 더 옳은 결론을 끌어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성녀’께서 너무 노쇠하신 것이 그 원인이었다.

‘성녀’께서는 무려 세계 최초의 각성자인 1세대 헌터 중 한 명이시기에···. 아무리 노화가 늦어진다는 최상급의 헌터라 할지라도 이젠,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현재의 바티칸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전설의 헌터이시자, 최초의 ‘성녀’이신 그분의 후계를 찾기 위해 지금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미숙한 지휘관인 마르쿠스와 막내 성전사 메리가 한국에 파견되었던 것이고···.

흠,

만난다면 누굴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전생에 결국 실권을 잡았던 성자파?

아니, 성자는 결국 ‘불사왕’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남는 교황파?

‘...’

잠시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며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어차피 지금 당장 결정한다고 행할 수 있는 일도 아니기에 우선 결론은 나중에 내는 것으로 했다.

그렇게 나는 이제 슬슬 버튼 하나만 누르면 얻게 될 ‘보상 메시지’를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려 했는데,

-털썩.

근처에서 무언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이는 간호사 복장의 한 여성분.

“깨··· 깨···. VVIP가 깨어나셨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모두 떨어뜨릴 정도로 놀라셨던 그분은, 이내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크게 외치며 중환자 침대 옆에 있는 호출 버튼을 눌렀다.

미친 상승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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