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35화
아로새겨진 핏빛의 밀도는 아주 짙었다.
그것을 과연 ‘오러’라 불러도 좋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아주 강력한 에너지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나를 수직으로 갈라버리기 위해 뼈로 된 창을 휘두른 케일른.
놈의 창은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내게 엄습해왔지만, ‘본디오 빌라도’가 세상에 남긴 핏빛 오러와 접하자 그것은 얇고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진다.
허나, 그럼에도 ‘본디오 빌라도’가 발산한 기세는 멈출 줄을 몰랐고,
놈의 견고한 흑철 흉갑과 고위 언데드 특유의 강대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놈의 신체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칼에 닿은 두부처럼, 자신의 신체가 그대로 갈라지자 경악하는 케일른.
놈은 경각에 달하는 그 아주 잠깐의 틈에서 상체를 크게 틀었고, 심장의 바로 위에서부터 왼쪽 어깨와 팔을 포기하는 것으로 그 진한 ‘오러’를 흘려냈다.
-후우우웅!
뒤늦게 찾아온 소음은, 그것이 날카롭게 벼려진 검을 휘두른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웅대했다.
놈은 ‘본디오 빌라도’의 힘을 경계하던 중이었다.
허나, 그런데도 입게 된 치명타.
“...”
완전히 언데드화 된 놈의 얼굴은 귀신을 보는 것마냥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일검을 휘두른 나 역시 놀라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본디오 빌라도’는 분명, 전생에도 나의 무장이었을진대···.
‘이정도의 출력이라고···?’
레벨도, 육체의 격도 전생의 나와 비교하면 한없이 부족할 뿐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전생의 나 이상으로 ‘본디오 빌라도’의 힘을 완벽히 끌어내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 막대한 에너지의 반동 역시 내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는 점이었다.
검술도 뭣도 아닌, 그저 휘둘렀을 뿐인 나의 일검에 상체가 거의 반 토막 난 케일른도, 케일른이지만···.
나는 이미 양팔과 양다리에서 감각을 잃었다.
‘그 일격에 부러진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도를 너무 넘었다.
적어도 열 번은 휘두를 수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이래서는 각성한 성전사들이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당 구청으로부터 이곳까지의 거리는 대략 5km.
상황과 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이야기이지만, 이 게이트에 주둔한 천 단위의 몬스터 무리와 수백의 휴거교도를 그대로 뚫고 늦지 않게 도착할 확률은 매우 낮았다.
“...놀랍군.”
언데드이기에, 목이 잘리고, 상체의 반이 넝마가 된 상태로도 차분히 목소리를 내는 케일른.
허나, 그건 단순한 감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극도의 생존본능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려댈 만큼의 위험신호.
왜냐하면 방금 들여온 놈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장난끼도 실려있지 않았으니까.
40레벨 이상의 괴물이 나를 진지하게 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슥,
놈이 허공에서 아주 조금 손을 휘적거리는 순간,
땅이 움직였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대응할 테냐.”
아니, 정확히는 이 일대의 모든 흙을 뒤엎으며 새빨간 피부에 블러디 구울이 소환된 것이었다.
-구아아아악!
-구아아악!
소환된 망자들은 세상을 비추는 새하얀 빛줄기에 비명을 지른다.
허나, 그럼에도 일어서는 구울의 수는 많았고, 심지어 내 발밑에서까지 땅이 들썩이며 팔이 솟아올라 나를 위협했다.
이젠 다른 방도가 없다.
블러디 구울들을 막겠다고 ‘본디오 빌라도’를 놓았다간, 번개같이 날아드는 놈의 손에 내 목이 날아갈 것이다.
퇴로는 없다.
맞서야 한다!
-피이이이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 나는 아직까지 내 강화 전투복 곳곳에 박혀 있는 쇳조각에 강한 자성을 실었다.
군화를 서로 밀어 자세를 취한다.
그러면서 양팔과 양다리 사이 사이에 적용하는 아주 세밀한 인력과 척력.
0.1초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져야 맞춰낼 수 있는 컨트롤을 나는 해냈고, 움직이는 혈검은 다시금 그 빛을 발했다.
-후우웅!!
또 한 번, ‘본디오 빌라도’는 세계를 양단했다.
터져 나오는 피.
그것은 신체에 뚫린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조리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금세 머리가 핑 돌았다.
지난 시간이 격통으로 점철된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순간 ‘쇼크사’ 했을 만큼의 말도 안 되는 통증이었다.
허나,
그런데도,
모든 블러디 구울을 일격에 말소시켰음에도 내 검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또 손을 뻗는 케일른.
방금 일어난 것과 정확히 똑같은 일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설마, 했는데 역시···. 그 검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군.”
놈은 그리 말하며 참으로 영악하게도, 도리어 내게서 더 거리를 벌렸다.
직접 교전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점점 죽어가고 있기에, 놈은 가장 효율적인 전략을 택했을 뿐이었다.
놈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자유 용병이니까.
이를 꽉 깨문다.
이번에야말로 죽은 동료들을 떠올릴 때였다.
조롱당한 동료, 고문당한 동료, 가장 믿고 있던 연인의 얼굴로 다가온 ‘인형’에게 심장을 찔린 동료의 절규가 귓가에 스쳤다.
“으아아아아아악!”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것이 나의 입에서 터져 나왔고···.
그토록 절박하고 절실하게 심을 실어낸 나는 간신히 세 번째의 검격을 휘두를 수 있었다.
아로새겨지는 붉은 광택.
뜨겁게 흘러넘치는 나의 붉은 피.
마치 부겐빌라의 붉은 꽃잎이 만개해 세상을 적색으로 물들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치솟은 짙은 밀도의 ‘오러’는 이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 기세로 세계를 양단했다.
이젠, 머리가 돌지 않는다.
내가 숨을 쉬는 건지, 아니면 이미 죽은 건지도 구분이 되지 않는 현재.
눈을 뜨자, 어느새 대지를 찢고 일어선 블러디 구울은 나의 안면을 씹어버릴 것처럼 입을 쩍하고 벌린 모습이었다.
죽음은 눈앞에 있었다.
허나, 나는 결코 이런 곳에서 죽을 수가 없는 인간이란 말이다···!
-파지지지지지직!
심장의 고동이 너무도 빠르게 뛴다.
이젠 마나가 아닌 나의 생명을 깎으며 치솟아 오르는 푸른 뇌광.
전방위적으로 달려들던 블러디 구울은 또 한 번 한계를 딛고 끌어낸 스킬, ‘전격 지대’에 불타올랐다.
“...그 날은 재웅이 형의 딸이 태어난 날이었다.”
문득 움직이는 나의 입.
어떠한 사고를 거쳐 나오는 말이 아니었다.
“민수는 할머니를 내게 부탁했고···. 진하는 어린 동생을, 예지는 약혼자에게 유언을 전해 달라 내게 부탁했지···.”
그저 숨을 쉬듯,
입을 통해 나오는 나의 무의식.
“그들은 담담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나라는 나약한 인간을 믿고 스스로 죽기를 택했던 거다···.”
죽어가던 이들이 내게 맡긴, 유언과 유품과 공포를 잊기 위해 짓던 한 줌의 미소.
“하등한 것이 지금 뭐라 떠들어대는 거냐.”
당연히, 케일른은 무슨 소리냐는 듯 목소리를 내며 다시금 블러디 구울을 소환한다.
어디까지나 사냥꾼.
사냥감을 몰아넣고, 회심의 일격을 꽂아 넣을 타이밍을 그저 기다릴 뿐인 노련한 사냥꾼의 모습이었다.
다만, 내게는 그 중얼거림이 다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떠오르는 얼굴,
죽어가는 얼굴,
그들이 남긴 유품, 그것을 손에 쥐고 손을 부르르 떨며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며 이를 악문 유가족의 얼굴이···. 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내게 하고 싶어 했던 그 말을.
‘그런데···. 당신은 왜 살아 있는 건가요?’
공허한 눈동자 속에서, 격렬한 절규와 한탄 속에서, 매시, 매분, 매초, 나의 역린은 울부짖는다.
부르르 떨리는 손을, 잡아줄 수 없었다.
목놓아 우는 동료의 어린 동생을, 차마 안아줄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나 역시, 그대로 주저앉아 기나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기에···.
“앞서 죽어간 이들의 희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는 언제나 나였다.”
언제나, 언제나, 살아남는 것은 나였기에.
그들의 죽음이 대체 어떠한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를 증명해내야 하는 것도 나였다.
그렇기에 굽힐 수가 없다.
이젠 그만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난··· 그 수많은 죽음에 응해야 하는 인간이니까···!”
눈을 부릅뜬다.
흐려져 가는 의식을 바로잡는다.
내딛는다.
발을, 땅을, 대지를, 부러진 나의 팔과 검을 잡은 손을.
고통 따위 이젠 알 바가 아니었다.
기절하면 그 즉시 나 자신을 감전시켜 깨어나면 된다.
팔이 잘리면, 입으로 물어서라도 나아가겠다.
그게 내게 허락된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비명검(悲銘劍) 제1형.
망자의 절규.
슬픔이 새겨진 검은 비명을 토해내고, 핏빛의 ‘오러’가 구슬픈 절규를 씹어뱉었다.
***
이미 100년하고도 12년의 생을 더 살아왔던 자, 케일른은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그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죽어도 골백번은 더 죽었을 약자가,
스스로 검의 힘을 감당하지도 못해 으스러져 가는 이건우가,
갑작스럽게 폭발적인 기세로 검형을 만들어내더니, 막대한 오러의 검격을 계속해서 휘둘러오는 것이다.
아주 먼 과거, 긴 생을 살아온 케일른은 이 같은 일을 딱 한 번, 본적이 있었다.
‘분명 회광반조(回光返照)라 불렀지···.’
죽기 직전, 가장 밝게 타오르던 시기로 돌아가 마지막 빛을 발하는 바로 그 순간.
케일른은 눈앞의 이건우가 바로 그 천금 같은 시간 속에서 숨 쉬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건 위험하다···!’
케일른의 판단은 아주 빨랐다.
분명 이건우는 자신의 무장하나 견뎌내지 못하는 약자가 분명했지만,
그가 ‘본디오 빌라도’를 쥔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형(形)을 취하고 휘두른 검술은···.
100년을 살아온 데스나이트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준의 귀기를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크게, 뒤로 도약하며 오른팔을 크게 휘젓는 케일른.
그러자, 지금껏 땅이 울렸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규모의 언데드가 그들이 딛고 선 ‘산’을 뒤엎을 기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키이이이익!
이윽고 터져 나오는 거대한 절규.
엄청나게 짙은 핏빛의 ‘오러’는 도주하는 케일른을 향해 정확히 무시무시한 검기를 쏘아댄다.
이에 케일른은 시체를 기워 만든 누더기 골램 다섯 체로 그 검기를 받아 흘리려 했지만,
-쿠우우아아아아악!
소름끼치는 비명소리와 함께 골램들은 그대로 갈라져 내렸다.
숭덩숭덩 갈라져가는 골램만으로는 검기의 궤도를 바꾸는 일조차 해낼 수 없었다.
“윽!”
만일. 케일른의 머리가 목에 붙어 있던 상황이었다면, 그대로 목이 날아가며 죽음을 맞이했을 것만 같은 기세의 ‘오러’가 그에게 쇄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건우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다시금 검을 고쳐잡고, 이미 부서져 으스러진 다리로 땅을 박차며 케일른을 향해 달려오기까지 했다.
“이런···!”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위해 준비해두었던 ‘거룡의 송곳니’를 꺼내 드는 케일른.
-챙!
맞부딪힌 신창과 혈검의 검기 사이에서는 뭐라 형언하기 힘들 정도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허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빠르게 회전하며 케일른의 심장을 노리고 들어오는 시뻘건 검날, 노련한 케일른은 창날을 비틀어 그것의 궤도를 바꾸는 것으로 응했다.
초점이 없는 눈, 표정이 없는 얼굴.
하지만 그럼에도, 연속적으로 날아드는 ‘본디오 빌라도’의 묵직한 오러와 이건우의 기형적인 검술.
-탕! 타탕!
-퍽, 투다닥! 챙!
서로가 서로를 코앞에 둔, 고속의 접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허나, 자신과 비등 아니···. 자신의 100년된 창술을 압도하는 이건우의 기형적인 검에 케일른은 진심으로 경악했다.
‘내가···. 이 내가?!’
밀리고 있다?
그 어떤 역전의 용사들도, 세계 랭킹 톱에 들어가는 그 어떤 랭커들도 아닌,
조금 기이할 뿐인, 단 한 명의 군인에게···!
방심으로 내준 왼팔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긴 했다만, 그래도 케일른과 이건우의 사이에는 최소 30레벨 이상의 절대적 격차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당당히 데스나이트를 압도하는 건 이건우.
그 ‘불사왕’의 오른 날개가 될 데스나이트 본인조차 대놓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속으로 주고받는 합이 거대한 울림을 일으킬 때마다, 케일른의 다리는 쉼 없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되느으은!!’
한눈을 팔았다간 심장이 반 토막 날 것이다.
당장 대책을 강구해내지 못하면 케일른은 죽는다.
공포, 공포, 불사왕에게 거둬진 후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압도적인 공포의 대상은 지금도 시퍼런 눈동자를 부릅뜨고 케일른을 바라보고 있다.
“아아아아악!”
어느새 입에서는 생전의 나약한 인간이던 시절처럼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곳곳이 베이고 찢기고 터져나가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는 이건우의 비명검(悲銘劍).
이윽고, 그 시뻘건 핏빛 오러가 케일른의 눈앞에 당도한 바로 그 순간···.
혈검은 케일른의 머리를 그대로 파고드는가 싶더니 얕은 지점에서 멈춰버렸다.
‘엇?!’
극도의 혼란에 케일른은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을 떴다.
당장 지금도 ‘본디오 빌라도’가 파고든 미간에서는 언데드로서 느낄래야 느낄 수 없는 ‘고통’이란 것이 요동쳤지만,
갑작스럽게 행동을 멈춘 이건우에 대한 의문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2초, 3초. 5초.
가만히 서 있던 케일른은 그제야 자신의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뒤로 주저앉았다.
“하···? 아아?”
이윽고 고개를 돌려다본 케일른은 보았다.
검을 뻗은 그 자세 그대로 죽어있는 이건우를 말이다.
이 무슨 허무한 결말이란 말인가.
장장 100년만에 느껴본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공포의 원천은, 그저 시간 초과로 그 명을 다하고 말았다.
“하···.”
허나, 아직도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
아니, 케일른은 언데드이기에 심장이 뛰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은 심리적인 충격의 잔해.
“그래···. 네놈이 이겼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만일 이건우가 지금보다 딱 한 달만 더 시간을 들여 레벨을 올렸더라면, 케일른은 결국 놈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대체 정신력이 어찌나 강했으면, 이토록 오래 회광반조 상태를 유지하느냔 말이다.
정말 1세기 이상을 살아가는 케일른으로서도 이정도의 인간을 보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쉽게 되었군···.”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을 거듭하다, 케일른은 서둘러 이건우가 챙긴 타락의 성물, ‘뒤집힌 십자가의 성배’를 손에 쥐려 했다.
허나,
일순간에 날아드는 샛노란 검광.
그 검광은 다름 아닌 철혈검희의 ‘오러’였다.
“그, 손, 치워! 이 버러지가!”
격노로 일그러진 이서영의 얼굴이 케일른의 앞에 나타났고,
역수로 추어올린 검날은 이건우와의 교전 중 충격을 받아 약해져 있던 케일른의 손목을 완전히 부러뜨려 버렸다.
“이건우 상병!”
이윽고, 차례로 도착하는 이건우의 지원군들.
케일른은 눈앞에 나타난 두 군인 보다 더, 이젠 등 뒤까지 다가온 빛의 기둥에 더욱 놀랐다.
‘대체 어느새···!’
경악하는 케일른,
허나, 시간 감각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자신이 이건우에게 압도당했다는 사실에 뒤늦게 울분이 차올랐다.
“다 꺼져어!”
이윽고 케일른이 손을 휘젓자.
흑색 갑주를 입은 블러디 구울도,
보통 인간의 네다섯 배는 거대한 기워 붙인 누더기 골램도, 일순간에 지하에서 지상으로 손을 뻗어 올렸다.
‘성배···! 성배를 어서!’
그것들로 주의를 돌리고, 케일른은 어서 빨리 ‘타락의 성물’을 손에 쥐려 했지만,
-텅!
묵직한 소음과 함께 케일른의 등을 불태우던 그 빛의 기둥은 방금 그 명을 다한, 이건우를 중심으로 쏟아져 내렸다.
당연히, 이건우의 허리춤에 달린 ‘뒤집힌 십자가의 성배’를 쥐려던 케일른은 그 압도적인 ‘기적’에 휩싸이고 만 것이다.
‘이런···?!’
당혹감에 멈칫하는 바로 그 순간, 이건우의 허리춤에 걸린 ‘뒤집힌 십자가의 성배’를 잡아채고 저 멀리 도주하는 김용운 중령.
동시에 케일른에게 날아드는 개나리꽃의 섬광.
지금은 ‘기적’의 힘에 짓눌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던 케일른은 그대로 자신의 남은 오른쪽 팔마저 잃고 말았다.
-풀썩.
쓰러진 케일른은 문득, 묘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만일, 자신의 육체를 뒤덮은 이 빛이 언데드를 말소시키기 위한 ‘천벌의 기적’이었다면 자신은 이미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어야 함이 옳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빛은···.’
하,
녹아내린 입으로부터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빛은 죄인을 응징하고 언데드를 소멸시키기 위한 그런 빛이 아니었다.
언데드인 그마저도, 따스함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온화하고 순수한 치유의 기적.
스무 명의 성전사가 일으킬 수 있는 최대 규모의 치유 술식이 분명했다.
따스하게, 녹아내린다.
그 따스함이 어찌나 마음을 녹이는지, 불사왕에게 육신을 하사받은 후로는 100년간 느낀 적이 없든 따스함에 케일른은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정도의 치유 술식은···.’
스무 명의 성전사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다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수준의 기적이 분명했다.
그렇게, 막대한 빛은 죽음을 삼켜버렸고, 이는 길고 길었던 전투의 종언을 고했다.
왼손에 못 박힌 자국을 가진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