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34화
인형사 케일른,
그 존재는 너무나도 명확했으나,
그의 이름, 성별, 연령, 인종 따위를 알아낼 수가 없었던 신원미상의 빌런.
놈은 때때로 몬스터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 인형을 지휘하기도 했고, 가장 신뢰하는 사람의 얼굴로 나타나 숭배자의 목을 찌르기도 했다.
본디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이 ‘케일른’을 이곳에 파견한 것은 배신을 종용하고 갈등을 격화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놈의 실존 인물과 완전히 똑같게 생긴 고기 인형을 만들어내는 스킬은, 그렇지 않아도 사이가 좋지 않은 ‘성전사’와 ‘흑마도’들을 이간질하기에 이다지도 알맞은 능력이었으니까.
성전사에게 흑마도의 모습으로 나타나 검을 휘두르고,
흑마도에게는 절체절명의 순간 성전사의 모습으로 등장해 망치를 내려찍는다.
만일 내가 이초희와의 계획을 짜두지 않고, 단 일주일만 시간을 주었다면 이 같은 일은 실제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흑마도와 성전사.
그렇지 않아도 나쁜 관계의 그들은 끝내 서로를 돕지 않게 되고 이를 통해 휴거교는 자신들에게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인, <군, 협회, 성전사, 흑마도>의 사중주를 마주할 일이 사라지는 것이다.
흩어지는 진형과 각개격파를 당하는 군세.
그게 프리드리히 파울리스가 그린, 최상의 시나리오겠지.
허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시대,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고, 알아낼 방도가 없던···.
아직까지 정식으로 빌런 활동을 한 적이 없는 이 케일른의 얼굴을 나는 알아보았다.
다른 그 어떤 빌런들 보다 더, 쓰임새가 명확한 빌런.
놈이 국내에 들어왔음을 확인한 그 순간, 나는 이미 ‘불사왕’의 머리 위에 섰다.
-챙!
냉병기의 청아안 파열음이 귓가를 때린다.
나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빛을 잃은 호접지몽의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나의 심장을 관통한 놈의 일격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 휴면에 빠져든 전설급 아티펙트.
나는 내가 휘두른 갑작스러운 일격에도 대응하는 케일른을 보며 시퍼렇게 치솟아 오르는 마력을 그대로 전격화 시켜 방출했다.
허나, 단순한 ‘방출’이 아니었다.
이제 300Wh을 넘긴 나의 막대한 제어력은 일순간에 터트려 방출한 나의 전기를 곳곳으로 응집시켰고,
둥그런 형태를 갖춘 그것은 허공에 열을 발산하며 그 핵심 에너지를 낭비하던 지금까지의 전격과는 조금 달랐다.
‘라이트닝 불릿’
아직은 아니지만, 훗날 나의 액티브 스킬인 ‘전격 지대’처럼 내 스킬창 한켠을 채우게 될 스킬을 흉내 낸 것이었다.
-피이이이이익!
독수리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소음은 거세게 울려 퍼졌고,
“무슨 힘이···! 이, 이런?!”
<업적>으로 단련된 나의 힘에 정신이 팔려 반 박자 늦게 ‘라이트닝 불릿’을 목격한 케일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직후, 그의 그림자에서부터 돋아나는 케일른과 완전히 똑같은 생김새의 인형들.
그것들은 육체가 완성되기도 전에 내가 쏘아낸 라이트닝 불릿에 맞아 바스러졌고, 그곳에 압축된 전격은 삽시간에 인근의 공기를 뒤틀며 큰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파아악!
귀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큰 소음과 함께, 케일른은 날아갔고 나는 균형을 잃고 붕떠오르는 그의 발목에 ‘이터널 패인’으로 자그마한 상처를 남겼다.
여기까지가 모두, 호접지몽의 펜턴트가 빛을 잃은 지 단 10초 사이의 일이었다.
“후우우, 후우우.”
단번에 큰 ‘생체전기’를 휘두른 나는 몰려오는 급박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뼈를 내주고 마찬가지로 뼈를 취한다는, ‘호접지몽의 펜턴트’를 이용한 기습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아주 작은 상처라도, ‘이터널 패인’에 닿은 이상 놈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격통을 매분 매초 느껴야 할 테니까.
놈은 전생에도 우리 대항군을 이간질하고, 배신을 종용했으며 신뢰를 깨부순 최악의 빌런 중 하나였다.
당연히 놈의 낯짝을 마주한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머리끝까지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느꼈지만···.
일을 망치지 않기 위해 참았다.
더 제라르 베르트랑과 싸울 때와 같은 실수는 범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군···. 이봐 훗날 그 잘난 S급이 되실 네놈께서는 대체 뭐 하는 놈이신데, 사전정보랑 일치하는 점이 하나도 없는 거냐. 앙?!”
역시나··· 훗날 ‘불사왕’의 오른 날개라 불리던 존재답게, 케일른은 나의 충격파가 불러일으킨 막대한 양의 흙먼지가 걷히자 태연한 얼굴로 나타났다.
어느새 그리도 많은 양의 ‘인형’을 양산해낸 것인지 놈의 양쪽으로 도열한 수십의 인형들.
그 중앙에 선 케일른은, 분명 ‘이터널 패인’ 저주를 받았을진대 그의 목소리는 고통으로 얼룩져 있지 않았다.
“레벨 9, 등급은 C, 각성한 지는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애송이······. 프랑스에서는 그래도 꽤 비싸게 받는 놈한테 의뢰를 맡겨 얻은 정보였는데, 전부 틀린 것 같군···?”
놈은 웃음끼를 머금은 얼굴로 내게 확인을 구하듯 그리 질문을 던져왔지만, 나는 놈이 ‘이터널 패인’의 저주를 파훼한 방법을 냉철하게 파악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내 눈에 걸리는, 놈의 허리춤에 걸린 사람 머리만 한 성배 하나. 분명 뒤집혀 있음에도 정위치로 이루어진 십자가가 보이는 걸 보면, 저건 분명···.
‘뒤집힌 십자가의 성배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물리적, 마력적, 법칙을 벗어난 그 어떤 에너지도 모조리 잔으로 빨아들여 ‘소멸’ 시키는 ‘타락의 성물’이었다.
저 ‘뒤집힌 십자가의 성배’가 있었기에 놈은 성전사들의 허를 찌를 수 있었고, 당장 ‘이터널 패인’의 격통의 저주에서도 면역이 된 듯했다.
화약과 염산으로 물리적 타격을 주는 놈과의 교전 직전, ‘패시브 스킬 – 발화내성’을 얻은 나도 운이 좋았지만,
신성력 뿐만이 아닌, 저주도 ‘소멸’시키는 타락의 성물을 가지고 있던 놈도 퍽 운이 좋았다.
나는 이터널 패인을 이용해 소모전을 유도할 속셈이었으니 말이다.
놈의 폭발에 휘말려 그을리고 나가떨어지는 ‘연기’도, 더는 먹히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놈은 자신의 주특기인 교란과 이간질을 활용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니 말이다.
서로 가지고 있던 송곳니를 하나씩 잃었다.
이윽고 남는 것은, 깔끔한 힘 싸움.
나의 검과 놈의 창은 다시금 서로를 향해 겨눠졌다.
“죽이기 전에 하나만 묻자. 이 망할 S급 후보생아.”
“그래, 유언이 질문이라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넌 어떻게 나를 아는 거냐. 난 지금껏, 이 얼굴로 현장에 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넌 공항에서부터 이미 나를 알아본 눈치였지. 그렇지?”
뭘 묻는가 했더니, 결국 자신의 안위를 위한 질문인가.
당연하지만, 놈에게 내가 미래에서 왔음을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생각한다.
놈의 이 자그마한 방심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떤 말이 놈의 정신을 최대한 좀먹고, 놈의 원초적 불안감을 자극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말이다.
잠깐의 고민 끝에 마땅한 답을 떠올린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가 존경하는···. ‘불사왕’께서 말씀해주셨지.”
“뭐, 뭣?!”
“거렁뱅이 같은 싸구려 용병 하나를 보낼 테니···. 우리의 거사를 함께하기에 적합한 인물인지 확인을 해달라고 말이다.”
놈의 눈동자는 눈에 띄게 뒤흔들렸다.
이 시기에,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의 이명을 알고 있는 존재는, 오직 그에게 직접 선택을 받은 빌런들 뿐이었을 테니 말이다.
“너 같은 게 어떻게···. 왕의 존함을 아니, 설마?!”
설마, 척결 대상인 내가 그 이름을 입에 담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으리라.
이윽고 당황한 표정으로 혼자 분당 시내 방향을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떠올리려는 듯한 행동을 취하는 케일른.
어찌나 당황한 것인지 놈의 얼굴에서는 순식간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허나, 그렇게 놈의 자세가 흐트러진 바로 그 순간···.
나의 ‘이터널 패인’은 이번 게이트 입장 직전, 이서영에게 받은 검집을 향해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들어갔다.
-착!
짧고 경쾌한 소음.
허나, 그 소음과 동시에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찰나의 순간에 합을 이룬 자세는,
검희가 아닌 검제 이서영의 흉내.
허리춤에 꽂힌 검의 검집에서부터 울부짖음은 터져 나왔다.
발검(拔劒) 제3형.
귀신의 노래.
뒤늦게 나를 바라보는 케일른.
허나, 아주 잠깐의 멈칫거림과 그 찰나의 틈만 있다면 이미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수평선을 긋는 발검.
검과 검집 사이에 흐르는 소름 끼치는 비명.
그 검날에 휘감긴 기세는 당장이라도 케일른을 찢어발길 듯 나아갔다.
-끼이이이이익!
철과 철이 맞닿아 나는 소리라고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압도적인 소음.
심지어 그 귀기 어린 기세와 귀를 찢어버릴 듯 터져 나오는 파장에 응집된 전격이 더해지자 소리는 그 배가 되었다.
-치이이이이이익!
찰나, 길게 뻗은 검은 놈의 팔을 갈랐다.
허나, 놈의 몸통을 송두리째 반으로 가르지 못한 까닭은, 놈의 창이 발검 사이에 끼어들어 흐름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아주 느릿하게, 놈의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인다.
정신을 쏙 빼놓은 뒤, 일격에 날려버릴 심산으로 내지른 검이었다.
허나, 놈은 그조차 반응해낸 것이다.
눈이 감기고, 다시 떠지는 그다음 순간.
이미 놈의 옆에 도열해 있던 인형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느릿하지만 분명하게.
불타오르듯 뜨거워지는 ‘오브’의 힘을 느끼며 폭발적인 기세로 오른 다리에 나의 생체전기를 보냈다.
인형이 붉게 변한다.
지금껏 나를 괴롭혀왔던 폭발의 전조증상이 분명했다.
당장 마나를 끌어모은 각력으로 후퇴한다면, 충분히 회피하고도 남을 정도의 폭발.
다시 말해 놈은 자신의 본체가 가까이 있기에 폭발의 힘을 조절했다는 것이었다.
-텅!
주위의 흙이 치솟아 오를 정도로 강하게 땅을 박차는 다리.
허나, 향하는 곳은 뒤가 아닌 앞이었다.
“흡!”
묵직한 기합과 함께 오로지 ‘패시브 스킬 – 발화내성’을 믿고 나는 화염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허?!”
그제야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했다는 듯, 분노가 아닌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케일른의 얼굴.
내가 이어가는 검형은, 흐르는 강물과도 같은 유검(流劍).
부드럽게 휘는 검격은 놈의 몸을 비스듬하게 타고 올라 정확히 목으로 향했다.
-촤악!
손끝을 스치는 감각은 분명 완전히 목을 가르는 감촉이었다.
허나,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케일른의 마지막 발악인지, 나를 향해 달려들던 모든 인형들이 그 자리에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벌겋게 달아오른 주전자 끓는 소리가 잠시 들렸고,
-시이이이이익!
-쿠과과과광!
미칠듯한 연쇄 폭발이 내 몸을 이리저리로 날려버릴 기세로 연신 터져 나왔다.
그 와중에 마나를 끌어모아 전신의 강도를 올려낸 것은, 내가 의식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전생에 겪고 또 겪었던 전투 감각이 빛을 발한 것이리라.
-퍽.
내 머리와 나무가 부딪혀 둔중한 소음이 울렸다.
가벼운 뇌진탕이라도 걸린 것인지, 눈앞의 시야가 몇 겹으로 겹쳐 보이고 정신을 차렸음에도 균형감각이 비정상적이었다.
“하아, 하아아, 하아아.”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급한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있었다.
무호흡으로 버텨낸 경각의 전투.
다행히, 이 정도의 공세까지 버텨내지는 못한 듯.
나는 목표한 바를 이루어냈다.
-툭.
그때, 눈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햐아, 너 대단하다?”
그건 땅에 떨어졌던 자신의 머리를 주워들고 태연하게 걸어오는, 케일른의 목소리였다.
나는 멍한 눈으로 목이 떨어지고도 움직이는 놈의 모습을 바라보았고,
케일른의 육체에서는 너덜너덜하게 찢어지고, 갈라졌음에도 피 한 방울이 나고 있질 않았다.
“네 레벨이 지금보다 딱 ‘5’ 정도만 더 높았어도, 진짜로 기절할 뻔했잖냐. 꼬맹아.”
놈의 뺨은 잔뜩 흥분한 사람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정말로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된 어린아이의 그 얼굴처럼 말이다.
그래, 애초에 난 이놈을 단독으로 이길 수가 없었다.
현재 나의 마력량은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C급 중간, 심지어 레벨도 낮아 절대적인 능력치가 밀린다.
이 시점에 이 케일른이라는 자유 용병 출신의 빌런은 이미···.
‘불사왕’의 손에 거둬져 인간이 아닌 고위 언데드, ‘데스나이트’로 거듭난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참고로 현재 놈의 정확한 레벨은 알 수 없다만, 향후 6년 뒤 성장한 나와 마주했던 이 ‘인형사’는 무레 70레벨을 넘긴 상태였다.
그러니 아무리 최소치를 예측해볼지라도 놈은 이미 40레벨 이상의 고레벨 몬스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0레벨···.
그건, 철혈검희 이서영조차 1대1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스팩이었으며 나도 ‘라이트닝 불릿’로 놈에게 잠시 마비는 부여할 수 있어도 결코, 놈을 쓰러뜨릴 순 없는 수준의 고레벨이었다.
뭔가 더 다양한 것을 준비하면 가능하다던가.
여단장이 특별히 내어준 ‘본디오 빌라도’를 뽑아 들면 가능하다던가, 그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나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스팩 차이 앞에, 놈의 숨통을 끊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짝짝짝.
그때,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케일른은 갑자기 으스러진 손으로 박수를 쳤다.
“그래, 솔직히 그분의 존함을 말해 나를 당혹게 만들고, 혼을 실은 일격으로 끝장을 보려고 했던 네 계획은 정말 대단했어. 심지어 그 소름 끼치는 검의 기세와 날카로운 검술도 정말 나쁘지 않았지.”
놈은 지금껏 일그러지던 그 얼굴들도 다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그분의 명만 아니었어도, 내가 직접 영혼을 수집해서 방금같이 재미난 싸움을 영원히 하고 싶을 정도였다니까···?”
무슨 뮤지컬 배우마냥,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며 말을 이어가는 케일른.
허나, 강한 염산과 폭발에 휘말려 전신의 피부가 녹아내린 놈의 외향은···. 이미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너무, 너무, 너무 아까워! 이 정도 장난감은 진짜 30년 만이란 말이지!”
장난감.
인간의 살가죽을 뒤집어쓰고, 놈의 생전 자유 용병이던 시절을 흉내 내며 인간 행세를 하던 그 모든 행동은 놈에게 있어, 100년이 넘도록 이어온, 삶의 지루함을 달래줄 ‘놀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놈이 이렇게 시간을 허투루 사용해주는 것은 현재의 내게 있어 큰 득이 되기에 나는 잠자코 놈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떠냐. 너, 언데드가 될 생각은 없냐? 왕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마. 뭣하면 엎드려서 싹싹 빌기까지 해줄게. 어때. 왕께 충성을 맹세하고 나와 영원히 함께할 맹약을 할 마음은 없어? 너 정도면 그래. 최소 리치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드릴 수도 있어!”
전생, 우리 ‘대항군’은 언제나 후방에서 중상모략을 짜고 치졸한 짓거리를 일삼는 이 ‘인형사’를 얕보았었다.
5km 밖의 인형마저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일삼던 놈이기에 ‘본체’는 약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허나, 이 ‘케일른’이라는 놈은 바티칸과 적대적인 ‘불사왕’이 직접, 그 바티칸을 억압할 수 있는 타락의 성물을 맡긴 자다.
그 시점에 이미 우리 ‘대항군’은 시체 수집가 알프레드, 묘지기 제라르와는 그 궤를 달리하는 괴물이라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드디어 인형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기뻐하던 동료들.
그들은 사지가 으스러지고, 얼굴이 녹아내렸음에도 창을 집어 든 데스나이트 케일른에게 몰살을 당했다.
그때 죽었던 동료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친다.
피를 토하며, 스스로의 안일함을 질책하며 그렇게 죽어간 나의 동료들···.
금세, 격노가 전신의 피를 들끓게 했지만, 나는 태연하게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미안하지만, 수염쟁이 아저씨랑 영원히 함께하느니 뭐니, 그런 대화를 나누는 취미는 없다.”
“뭐? 푸하하하핫!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한 거냐. 아니면 원래 그렇게 재미있는 성격인 거냐. 보면 볼수록 더 마음에 드는 놈이군! 흐하하하핫!”
제라르 베르트랑 때와 같은 실수를 범할 수는 없다. 격노는 끓어 넘쳐도, 머리는 차갑게. 나는 최대한 이성으로 점철된 눈빛으로 케일른을 보며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태 파악이라···. 글쎄, 지금 사태 파악을 못 하는 쪽은, 과연 누굴까.”
“뭐?”
의미심장한 나의 말에 드디어 내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살피는 케일른.
허나, 그가 주변을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보이는 것은 게이트의 역겨운 푸른 일렁임과 이 야산 곳곳에 케일른이 배치해둔 인형들 뿐이었다.
“뭐가, 아무것도 없···!”
이내 나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 케일른이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촤아아아아아아악!
드디어···.
저 멀리, 대략 5km는 떨어져 있는 지점에서부터 새하얀 빛줄기가 용솟음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 광채가 어찌나 밝은지, 이렇게 먼 곳에서 목도한 내 오금이 다 저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지경이었다.
“...시, 신성력?!”
뒤늦게 빛기둥의 정체를 눈치챈 케일른은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자신의 허리춤에 묶여 있던 ‘뒤집힌 십자가의 성배’를 잡으려 했다.
놈이 그걸 손에 쥐면, 그 힘의 영향을 받는 인형들은 단숨에 저 빛의 기둥을 갉아 먹을 것이 너무도 자명한 상황.
허나, 빠르게 손을 가져간 놈의 허리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이걸 찾나.”
이윽고 움직이는 시선,
케일른의 눈동자는 위아래로 쭉 찢어질 듯 크게 벌어졌다.
왜냐하면, 놈이 고개를 돌린 그 잠깐 사이, 몸을 일으킨 나의 손에는 놈이 찾던 것이 들려 있었으니까 말이다.
인간의 몸으로 5대 재앙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인류의 악몽.
‘불사왕’이 케일른에게 믿고 맡긴 바로 그 ‘타락의 성물’이었다.
-꽈득, 꽈드득!
이게 인간의 육체에서 나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케일른에게서 쏟아져나온다.
부릅뜬 양 눈동자에는 어찌나 힘을 준 것인지, 핏대가 이곳저곳에 곤두서 있을 정도였다.
허나, 나는 그런 놈을 향해 태평하게 어조로 말했다.
“아,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난 네놈의 폭발에 나가떨어지던 그때, 이미 목표하던 바를 이루어냈었다고 말이야.”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 케일른의 육체에서 새카만 안개가, 타오르는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어서···. 내놔라···!”
놈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이젠 본 모습을 숨길 마음도 없는지, 놈은 단순한 ‘인형’이 아닌, 수십이 넘는 블러디 구울을 맨땅에서 소환해냈다.
이것이 놈의 본래 모습.
흑철로 이루어진 갑주를 전신에 착용한 수백의 군세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고위 언데드, 데스나이트였다.
“그걸 어서 이리 내···. 하등한 것아!”
신성한 빛에 그저 쬐어지는 것만으로도 놈의 두꺼운 갑주와 죽음의 군세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만큼, 언데드에게는 바티칸의 성전사들이 일으킨 저 방대한 기적이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케일른이라는 인간의 껍데기를 내던진 죽음의 기사.
놈은 푸르스름한 한기가 서린, 새카만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인상을 찡그렸다.
이에 나는 답한다.
전생의 놈이 그러했던 것처럼 조소를 담아서.
“약은 약사에게, 병은 의사에게···. 그리고 악취 나는 언데드는 성전사에게 맡겨야 하는 법이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인형술사 케일른.”
이윽고 내가 손에 쥐는 것은, 안개의 형태로 돌아가 이미 어깨에 스며든 마검, ‘이터널 패인’이 아니었다.
지금껏, 허리춤에서 항마의 부적과 봉인의 사슬에 칭칭 감겨, 그 흉흉한 기운을 숨기고 있던 신화급의 혈검.
‘본디오 빌라도’.
봉인포를 들추는 것만으로 핏빛의 오러가 사방을 진득하게 물들였다.
<주의!>
ㅡㅡㅡㅡㅡㅡㅡㅡ
*각성자, 이건우(Lv. 9)의 육체는 신화급 무장, ‘본디오 빌라도’의 오러를 견딜 수 없습니다.
*육체의 붕괴까지 남은 시간: 3분 47초.
ㅡㅡㅡㅡㅡㅡㅡㅡ
직후, 흉흉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피로 쓴 듯한 붉은 메시지가 내 눈앞에 나타났지만, 나는 단전에 힘을 주었다.
과연, 사용자의 생명을 앗아가는 혈검.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운 문구를 출력한다.
허나, 나 역시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단전에 들어간 마나가 요동치고, 눈앞에는 다시금 메시지가 나타났다.
<알림>
ㅡㅡㅡㅡㅡㅡㅡㅡ
*각성자, 이건우의 ‘오브-성혈’은 혈검, ‘본디오 빌라도’의 힘에 저항합니다.
*육체의 붕괴까지 남은 시간이 늘어납니다.
*육체의 붕괴까지 남은 시간: 10분 02초.
ㅡㅡㅡㅡㅡㅡㅡㅡ
그 오브의 보호를 받고도 고작, 6분 몇십 초밖에 늘어나지 않는다니.
과연 신화급의 혈검이라는 이름은 폼이 아니었다.
“자. 케일른···. 2차전 시작이다.”
먼저 죽은 것은 과연 어느 쪽일까.
성전사들은 내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이곳까지 올 수 있을까.
무엇하나 확정된 것은 없었지만,
고작 ‘나’라는 인간 하나의 목숨을 걸고, 훗날 불사왕의 오른 날개라 불리는 데스나이트를 잡을 기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놈은 훗날,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가는 괴물, 그저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또 한 번, 크나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이정도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그저 쥐는 것만으로 내 전신을 격통으로 물들이는 ‘본디오 빌라도’
그리고 그 혈검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고요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 케일른.
허나, 나는 그런 케일른을 향해 주저 없이 고한다.
“그쪽에서 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가겠다.”
읊조린 목소리.
내디딘다.
반걸음 전진해 땅을 딛는 왼 다리.
이내 크게 움직여 몸의 중심을 앞으로 기울이며 오른 다리가 땅에 닿자.
오른팔은 비명을 내지르며 움직였고,
왼팔은 절규하며 이를 따랐다.
이윽고,
‘본디오 빌라도’에서 흘러넘치는 섬뜩한 광택의 핏빛 오러가 무너진 댐에서 터져 나오는 급류처럼 쏟아져나왔고···.
그저 한 번의 휘둘러진 ‘본디오 빌라도’는 세상에 핏빛을 아로새겼다.
그래···. 네놈이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