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12화 (12/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12화

그렇게 내 휴가는 사라졌다.

본래부터 술을 마시거나 친구를 만나러 다닐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그래도 5일 치의 시간을 통째로 영약 마시고, 기절하기를 반복하는 데 사용하다 보니 휴가자 복귀 버스를 기다리는 지금에 이르러선 작은 아쉬움이 남았다.

“으으으`”

입만 열면 앓는 소리가 나온다.

식음을 전폐한 상태로, 한 병만 마셔도 위장을 뒤트는 약물을 다섯 번이나 들이킨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혈색이 나빠졌고, 헌터 특유의 재생력이 있음에도 이 뱃속의 상태가 원상 복구되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도 분명한 수확은 있었다.

[생체전기량]: 3800Wh

[제어력]: 141Wh

단순히 ‘오버 클럭’ 훈련을 매일 반복했다면, 이제 간신히 2000Wh를 넘겼을 이 시점에, 나의 ‘생체전기량’은 무려 4000Wh를 바라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상승 폭은 가히 ‘압도적’이라는 수식언이 아깝지 않은 수치 1800Wh.

역시 이모님의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

단순히 계산해봐도, ‘오버 클럭’만으로 이 같은 생체전기량을 늘리기 위해선 60일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60일이라니···.

내가 시간을 거슬러온지 이제 2달이 막 지났으니.

말 그대로 지금껏 해왔던 일을 통째로 한 번 더 행해야 비로소 이루어낼 수치를,

나는 ‘휴거교’의 물건을 강탈하는 것으로 얻어냈다.

적의 귀물을 훔쳤으니 우선 좋고,

그걸로 내 성장을 도모했으니 두 배로 좋다.

일전에 ‘전기 내성’의 단계가 향상되며 <업적>의 효능을 제대로 보게 되었을 때와 똑같다.

좋은 일이 좋은 일을 부르는 선순환이 된 것이다.

“으으······.”

그래도 배가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평소부터 ‘오버 클럭’으로 단련을 해두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걷지도 못할 뻔했다.

“하! 신병 새끼가 빠져서, 복귀 날까지 술을 처먹어?”

그때, 복귀 버스 대기 구역에 들어오며 숨쉬듯 내게 시비를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휴가 잘 다녀오셨습니까. 김동건 일병님.”

“오냐 씨발아. 난 미래의 전망과 국가의 안위를 위해 운동을 조지고 왔지. 어떤 신병 새끼처럼 술 처먹고 돌아다니지 않고 말이다.”

대체, 문현철이나 박태진도 그렇지만, 왜 부조리를 달고 사는 놈들은 하나같이 속이 배배 꼬여선 말을 이렇게 밉게 하는 걸까.

그리고, 국가의 안위나 미래를 걱정하기 이전에 우선 눈앞에 ‘머맨’이 나타나도 숨지 않을 담력부터 키워야 하는 것 아닐까?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내 이런 꼬맹이에게 열을 내는 것이 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별말 없이 입을 닫았다.

“건우씨?”

그때, 복귀 버스 대기 구역 입구에서 또다시 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우연히 휴가 일정이 똑같았던 2대대의 여군. 윤지아 상병이었다.

“유···. 윤지아 상병님. 휴, 휴가는 잘···.”

“건우씨 혈색이 왜 그래요?”

순간 자신에게 말을 거는 김동건 일병을 쓱 지나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는 윤지아 상병.

그녀는 상당히 가까이 몸을 붙이더니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기 시작했다.

“아···. 건우씨 설마?”

역시 뛰어난 연금술사의 조수이자 딸이라 그런지. 윤지아 상병은 내가 왜 이런 상태가 된 것인지 한눈에 알아본 듯했다.

곧바로 정말 심각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

“그걸 다 먹었어요? 아니 하루 한 병 이상 마시면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정말 진지하게 화난 얼굴이었다.

“하하하.”

나는 웃음으로 흘려 넘기려 했으나 명색이 연금술사의 조수인 그녀는 순순히 넘어가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마셔? 유, 윤 상병님 설마 이놈하고 같이 술이라도 마시신 건 아니죠···?”

“윤지아 상병님? 혹시 휴가 기간 이놈하고 같이 계셨던 건지······.”

“유, 윤지아 상병님? 저 안 보이시나요.”

“저, 저기요? 윤 상병님?”

아까부터 내게 꾸중을 늘어놓는 윤지아를 바라보며, 옆에서 김동건 일병은 주저리주저리 그런 말을 늘어놓았지만···.

윤지아는 마치 놈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지는 김동건,

속이 시원하시도 하면서 대놓고 저러니 좀 불쌍하기도 했다.

...뭐 힘내라.

젊을 땐 원래 실연도 하고 그러는 거야.

***

헌터군과 쌍벽을 이루며 대한민국의 안보와 규율을 지키는 집단, 헌터 협회.

그 협회에서도 정보국에 소속된 경력 있는 정보원. 조보영은, 최근 업무적으로 엮이는 일이 잦은 한 군인에게서 기묘한 의뢰를 받았다.

-‘이건우’라는 친구의 과거 이력이 궁금하다네. 자네는 정보국이니 그 친구의 출생부터 오늘까지의 족적을 모두 찾아줄 수 있겠지?

의뢰자의 이름은 김용운.

‘대 게이트전담부대’에 7여단 2연대 1대대의 대대장직을 역임하고 있는 바로 그 김용운 중령이었다.

“그런데···.”

아주 조금만 뒤져보니 조보영은 중령이 의뢰한 대상이 바로 같은 대대에 소속된 이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기 대대 병사의 뒤를 캐게 한다고···?”

심지어 굳이 보수까지 지급해야 하는 ‘의뢰’ 형태로 말이다.

우선 대대장 김용운이 굳이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니, 적대적인 생각으로 이 의뢰를 하진 않았음은 알 수 있다.

그래서 비교적 느슨한 태도로 이건우라는 인간의 뒤를 조사해봤는데······.

고아원 출신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 아무런 특이사항이 없는 평범한 인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조보영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김용운 중령에게 알렸지만, 괴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음, 그래. 그러니까, 협회의 정보원이 뒤를 캘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모든 흔적을 지우고 입대했다는 말이군? 그 친구, 생각보다 거물 밑에서 일을 했었나 보군.

네?

평소 프로페셔널하기로 유명한 조보영의 입에서 그런 맹한 소리가 나올 정도로 중령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보영은 말했다.

-아니요. 중령님. 보통 이런 식의 흔적과 기록은 뭔가 뒤가 수상한 친구에게 나오는 특징이 아닙니다.

-하하하. 그래. 그래. 자네 같은 베테랑의 눈까지 속일 만큼 완벽하게 흔적을 지웠다는 그런 말이지 않나.

-아, 그런 말씀이 아니고요···. 그 이건우라는 친구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친구라는 의미였습니다.

아무리 정보국의 요원이 사회적 계급이 높아도 헌터군의 대대장에게는 미치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무례를 범하더라도 오해를 바로잡고자 조보영은 그리 말했고,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김용운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

-아니. 그에게는 뭔가 있다. 자네가 직접 이건우를 보게 될 날이 온다면, 그땐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을 걸세.

너무나 확신에 찬 어조.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도 느껴지는 강인한 기세.

김용운 중령의 말에는 진한 진심이 묻어나왔다.

-그래. 자네. 보안 조회 등급이 어떻게 되었지?

-예? 아. 정확히 5급 보안자료까지 조회할 수 있습니다.

5급.

1급부터 19급의 보안 단계가 존재하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5급 보안자료까지 조회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특권이었다.

숱한 정치인들의 비리 혹은 몬스터나 메시지에 대한 실험기록들처럼 세상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자료들이 바로 1급에서 5급에 해당하는 보안자료였기 때문에.

그것도 조보영이 협회 정보국에서 10년간 일한 요원이었기에 받는 특혜로 간신히 도달한 등급이 5급 조회 권한이었다.

헌데, 이어지는 김용운 중령의 말은 다시금 조보영을 놀라게 했다.

-5급이라. 알았네. 그렇다면, 더 윗선에 의뢰할 수밖에 없겠군.

-...더 윗선, 말입니까···? 중령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이건우라는 군인에게 뭔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정보국의 에이스. 전투형 스킬이 아예 없음에도 언제나 협회의 살아있는 정보력이라 불리는 조보영의 정보망을 가볍게 빠져나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니.

그건 조보영에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중 하나였다.

이어지는 중령의 대답은 더 기가 찼다.

-나도 그랬네만, 자네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백날 말해도 모를 걸세.

빠직.

조보영의 속에 천불이 나건 말건. 김용운 중령은 그런 불씨를 던져놓고는 태연하게 전화를 끊었고, 조보영은 그제야 이 꽉 깨물고 있던 입을 열고는 중얼거렸다.

“이건우, 그래. 이건우라는 거지? 하! 얼마나 잘난 놈인지 꼭 내가 밝혀내고 만다.”

그렇게 영원히 파도 흙밖에 나오지 않을 협회 정보국 에이스의 삽질이 시작되었다.

***

하늘에서 쓰레기가 내렸다.

아니, 더 사회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금일은 올해의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늦가을의 싸늘함이 물러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차디찬 한기가 이 지역을 휘감는 시기.

우리 중대는 간만에 중대 인원 전체가 모여 부대 시설을 정비하고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를 정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야! 이병 새끼들 똑바로 안하냐?”

이걸 기회로 날을 잡은 건지.

1소대의 A급 병사 김동건은 굳이 이병, 그중에서도 정확히는 나를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었다.

휴가 복귀로부터 벌써 8일이 지났는데도, 윤지아 상병에게 대놓고 개무시를 당했던 분이 안 풀린 모양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나에게는 대놓고 한마디도 못 하고, 이병을 싸잡아 갈구는 모습에서 그 졸렬함과 치졸함이 유독 잘 드러났지만, 놈은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후우우.”

슬슬,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던전 고립 사태와 머맨 공습 사태처럼 내가 최초부터 짜두었던 계획에서 두 번째로 큰 사건···.

처음으로 빌런을 직접 조우할 수 있는 대사건이었다.

‘곧 병사들을 모두 집합시킬 거다.’

-치익, 아아. 1대대, 1대대 전원 일과를 중단하고 각 행정반 앞으로 집합. 대대장님 지시입니다. 서둘러주시길 바랍니다. 이상.

생활관 건물 내부 회선이 아니라 연병장이나 작업장에 있는 확성기에서 동시에 들려온 행정반 소리.

“와아아아.”

“어휴. 춥다 얼른 들어가자.”

“감기 걸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드디어 하늘에서 무한히 내리는 흰 쓰레기 처리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는지. 다수의 인원은 기뻐하는 눈치였다.

허나, 막상 행정반 앞의 분위기는 범상치 않았다.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중대장과 소대장들 그리고 여타 간부들 역시 입도 뻥끗하지 않고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전원 집합 완료했습니다.”

“후우우우.”

우리 4소대의 남궁연이 그리 말하자. 그제야 중대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운을 뗐다.

“어젯밤, 여단 본부로부터 긴급지시사항이 내려왔다.”

중대장의 전달사항은 담백했다.

서울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부터, 경복궁 입구까지. 대규모 마나 이상이 관측되었다는 것.

“에···. 광장에서 경복궁까지면······. 적어도 300m 아닙니까?”

엄중한 분위기에서도 자신의 당혹스러움을 그대로 입에 담는 남자.

그는 중대장이 특히 아끼는 병사인 1소대의 병장. A급 헌터 병사 남준서였다.

다른 병사였으면 도끼눈으로 노려보며 금방 호통을 내질렀을 중대장이지만, 남준서에게만큼은 달랐다.

“정확히 420m짜리 게이트의 발생 조짐이 보인다 하더군.”

“거, 거대 게이트···. 아호. 말년에 무슨······.”

일반적인 게이트가 잘해봐야 100m를 넘지 못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세 배 이상의 게이트들은 거대 게이트로 분류되었고 그 파급력은 가공할만한 레벨이었다.

그런데 이번 거대 게이트의 크기는 세 배는 물론이고 네 배를 넘겼다.

당연히 그 안에서 출현할 몬스터들의 양과 질은 상상을 초월하리라.

상황이 이러니 모든 간부들이 조용해지고, 중대장마저 숙연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비상사태를 사전에 눈치챈 수도 방위 사령부가 지원요청을 보내왔고 수도권 인근의 부대에서 유능한 병사를 모아 지원을 보내게 되었다.”

혹시, 자원할 병사가 있나.

중대장은 무겁게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리 덧붙였고 당연하지만, 손을 드는 인원은 없었다.

다른 지원 혹은 출동과 달리, 이번 거대 게이트 사태는 정말로 생환할 가능성보다 죽을 확률이 높은 일이었기에 공감하지 못할 행동은 아니었다.

“그래. 너희들의 마음은 잘 안다. 하지만, 이미 여단 지침을 받으신 대대장님께서는 이 같은 비상사태를 위해 출동할 인원들을 선출해두셨다. 안타깝지만, 명령이다.”

중대장은 실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우리 1중대의 에이스라 불리는 남준서 병장을 바라보며 인원들을 호명했다.

“병장 남준서. 상병 홍진웅······.”

중대장의 입을 통해 줄줄이 언급되는 대부분의 상병장들.

실제 레벨이 더 높은 일이병보단 군생활이 긴 이들을 데려가려는 모양이었다.

‘역시 김용운 중령, 좋은 판단이다.’

아직 출현하지도 않은 거대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스킬 위력, 개인의 전투력보다는 체계적인 움직임과 돌발적 사태에 어느 정도 임기응변이 가능한 경력 있는 병사들을 모으려는 것이다.

‘허나, 이번 사태에 한하여 김용운 중령의 이러한 판단은 드물게 틀렸다.’

이번 거대 게이트에서 필요한 건, 다름 아닌 단순 화력이었으니 말이다.

전생,

이 거대 게이트는 무려 일주일이나 닫히지 않았다.

거대 게이트, 그리고 해일처럼 밀려드는 몬스터 웨이브에 시선이 끌린 군인들은 이를 막기 위해 총력을 한곳에 집중시켰고,

바로 이것이 빌런들이 노리던 바였다.

“...이상. 인원들은 모두 작전 투입을 준비하도록.”

일부 인원들이라고 말했었으나 사실상 우리 1중대의 상병장들 중 D급 병사 넷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장, 제대로 된 부대 전투력이라고 지칭할만한 대부분의 병사가 차출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사관들과 장교 역시 절반 이상이 이번 작전에 투입되게 되었다.

“이곳 부대 통솔은······ 이 중사랑 남궁연 소위. 부탁하지.”

“예!”

비교적 힘찬 남궁연의 대답과 상반되게, 부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두웠다.

평소에도 생사를 오가는 전선에서 활동하는 건 ‘헌터군’의 숙명이지만, 이 평화의 시대에는 이가 익숙지 않은 것이다.

수도 방위 사령부와 수도권에 위치한 7여단 휘하 수많은 대대들도 다 비슷한 상황이리라.

다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정말로 위험한 존재를 맞닥뜨리게 되는 쪽은 거대 게이트 쪽이 아니라 반대로 남겨진 부대라는 것을.

‘놈들은, 올 거다.’

빌런들의 능력을 수십 배는 끌어 올려 줄 영웅급 이상의 무기들이 모여있는, ‘제 7여단 무기고’를 털어가기 위해······.

***

여단 지침으로 움직이는 군부대는 정말 신속했다.

평소의 어벙함과 게으름은 다 어디로 갔는지 순식간에 짐을 싸고 움직이는 대대급 병력.

평소에는 지긋지긋할 만큼의 인기척으로 가득했던 부대가 비상사태 선포 바로 다음 날부터 휑하게 비어버린 것이다.

“건우야. 오늘은 체단실 안 내려가니?”

“예. 김 일병님. 왠지 낌새가 묘해서 우선 대기하고 있으려 합니다.”

“...그래.”

텅텅 비어버린 행정반, 을씨년스럽게 휑한 부대 밖의 풍경.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는 만큼 빠르게 저문 태양과 새카만 밤.

어둑하고, 메마른 그 싸늘함이 내 피부를 자극해왔다.

“오늘 열렸대. 게이트.”

“그렇습니까.”

“홍 상병님은 괜찮으실까···.”

“괜찮으실 겁니다. 누가 뭐래도 홍진웅 상병님만큼은 분명히요.”

게이트가 열린 것이 오늘이라면, 놈들이 들이닥치는 것도 오늘 새벽이 되리라.

‘휴거교’는 재앙의 종복이 되어 몬스터를 사역하거나 공간이동을 시켜 테러를 자행하는 반면,

‘빌런’은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존재들이었다.

내가 굳이 큰 부작용이 일어날 것을 알고도 그 촉박한 휴가 기간에 서른 병이나 되는 영약을 모두 마셨던 것도, 곧 맞닥뜨릴 적이 몬스터가 아닌 빌런이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이번 여단 무기고 도난 사건은 정말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터라.

아무리 나라도 여단 내부에 침투하는 빌런이 누구인지 만큼은 모른다.

‘만일, 정말로 거물이 나타난다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는 수밖에······.’

나는 적잖은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빌런을 꼭 불태워버리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윽고, 밤은 깊어갔다.

모두가 취침에 들어가고도 4시간이 경과한 새벽.

나는 일부러 야간 근무 초번초라는 가장 좋은 자리를 다른 병사에게 주고 새벽 2시에 위병소 근무를 서고 있었다.

죽상인 일병과 바짝 겁먹은 이병.

근무 교대를 마치고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야 씨바. 너 왜 근무시간 바꿨냐? 나한테 뭐 할 말 있냐?”

이번 야간 근무의 사수로 배치된 1소대의 김동건이 그리 헛소리를 내뱉었지만, 나는 이전과 달리 낮게 읊조렸다.

“입 닥치고 전방을 주시해라 김동건. 이제 곧이니까.”

“무, 뭐? 입을 다, 닥쳐? 이 새끼가 돌았나.”

순식간에 열이 뻗힌 듯 김동건은 곧바로 자신이 지켜야 할 위병소를 벗어나 내게 다가오려 했는데, 그때였다.

-팟!

갑작스럽게 경종을 울리는 ‘위험 감지’.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는 하늘을 향해 손을 내질렀다.

-파지지지지지지직!

처음부터 가감 없는 방출.

그 출력은 무려 단숨에 500Wh.

곧 세상은 내가 내뿜은 전기의 빛으로 희게 물들었고,

정확히 초소를 나온 김동건의 머리 위에서 날아들던 회백색의 날카로운 갈고리 같은 것이 툭, 하고 힘없이 떨어졌다.

“뭐, 뭐야?!”

너무 놀라 목소리를 키우는 김동건.

위병소장으로 있던 인원도 그 소리에 놀라 불을 밝혔고, 나무 위에 고고히 서 있는 금발의 남자를 목격하게 되었다.

본래. 이 시간에 위병소에서 근무했던 모든 인원은 다음날.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었다.

그 말인즉, 바로 이 시간대에 빌런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말이었다.

“하. 최대한 조용히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말입니다.”

턱.

금발의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렇지 않게 높은 나무에서 땅으로 낙하했다.

그리고는 다시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여는데,

“당신들도, 고통 없이 죽는 게 더 좋지 않습니까?”

...나는 그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제라르 베르트랑······.”

-파직! 파지직!

짧게 읊조리는 것만으로 격하게 반응하는 나의 ‘생체전기’.

숱한 목숨을 앗아가고,

죽은 전우의 시체를 일으켜 병졸로 삼아 인간의 존엄을 짓밟던 놈은···.

서유럽을 침공한 ‘죽음 군단’의 노예이자 충실한 사냥견,

그리고 무엇보다,

놈은 전생의 남궁연을 욕보이고 모욕하며 무참히 살해했던 네임드 빌런이었다.

휘이~

“이 변방 국가에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대뜸 놈의 본명을 부르자 놈은 적잖게 놀란 듯 그리 물어왔지만, 나의 머릿속은 오리지 한 생각으로 가득 차 대답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놈만큼은 절대로 살려 보내선 안 된다!’

내가 굳은 얼굴로 그대로 있자.

놈은 금세 흥미가 식은 듯 태평한 목소리를 냈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시간이 없습니다.”

스르르르르르르.

뭔가가 땅 밑에서부터 움직이는 느낌.

놈의 발밑에서부터 무언가가 생성된 것이다.

“어···. 어?!”

뒤늦게 반응한 김동건이 당혹감에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미 늦었다.

-투우웅!!

마치 물처럼 땅속을 헤엄쳐 발밑까지 도달한 거대 스켈레톤들이 일순간에 몸을 일으킨 것이다.

사람의 두배.

거기에 번쩍이는 갑주까지 고루 갖춘 최정예 오크 스켈레톤.

이는 ‘죽음 군단’의 사냥견, 제라르 베르트랑이 자랑하는 놈의 송곳니 부대였다.

“놀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네요. 제가 시간이 없어서요.”

태평한 놈의 말과 동시에, 흙먼지를 휘날리는 오크 스컬레톤들은 살벌한 광택의 할버드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 날붙이의 종착점은 김동건의 머리와 나의 등.

할버드는 빨랐고,

나와 김동건은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죽어야만 했다···.

허나,

“아니.”

-피이이이이이이익!

드높은 창공을 거니는 독수리의 울부짖음은 바로 그 순간 터져 나왔다.

솟구치는 전류.

흔들리는 대지.

“네놈은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파직!

“호오······.”

이 와중에도 감탄이나 터트리고 자빠진 제라르를 보며 나는 허공으로 내뻗은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텅!

-타다다다닥!

-우당탕!

나를 중심으로 일어난 ‘척력의 폭풍’은 강철 갑주를 입고 있던 스켈레톤들을 사방으로 날려버렸다.

이윽고, 나는 시퍼렇게 번갯불을 튀기는 홍체로 놈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은······. 여기서 죽을 것이다.”

-피이이이이이이!

시퍼런 뇌광이 놈을 덮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혼을 집어삼키는 푸른 안광의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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