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7화
마치 소나기와 같았다.
허나, 그냥 빗방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비처럼 쏟아지는 트레이너의 연격은 내게 상처를 입히고 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가속화된다는 점에 있었다.
총 62회.
내가 트레이너의 연격을 눈앞에 두고서 두 발을 땅에 딛고 버틴 수였다.
어째서 회피했다가 아니고 ‘버틴’ 것이라 말하느냐면,
30연격을 넘긴 순간부터는 현재의 나로써는 예측 경로를 보고도 피할 수 없는 속도의 공격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 파격적인 공격을 맞고도 버틸 수 있던 까닭은 어제 맞이했던 3연속 레벨업이라는 경이와 그간의 격통을 싸워 이겨낸 근육 즉, 나의 노력이 합산된 결과물이었다.
‘나쁘지 않군.’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섯 개의 팔에 각기 다른 무기를 들고 있는 트레이너를 정지시켰다.
현재 ‘제어력’은 회귀 직후의 두 배 이상.
허나, 트레이너의 공격을 버텨낸 횟수는 이전의 열 배를 넘겼다.
이는 모두, 이번 기회로 크게 늘어난 ‘제어력’ 덕분이었다.
그저 방출하고 흡수하는 것을 넘어서,
퍼트리고,
감지하고,
마치 나의 연장된 손과 발처럼 다룰 수 있는 전기의 절대적인 양이 증가했다는 건 이만큼의 효율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생에도 ‘생체전기량’의 비밀은 찾았던 반면, 끝끝내 ‘제어력’의 성장 알고리즘은 찾지 못했었다.
그 때문에 작정하고 성장을 위해 반년을 갈아 넣었으나 제어력을 고작 100Wh밖에 상승시키지 못했던 일을 떠올려보면···.
이번 레벨업이 나에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생각해보면,
‘그저 전기를 내뿜고, 전류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그 많은 빌런들을 다 이겨낼 수 없지.’
그래서 내가 전생에 가장 먼저 터득한 활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치익!
짧은 스파크의 소음과 함께 내 발치에 있던 덤벨 하나가 허공으로 떠올라 자연스럽게 내 손에 쥐어졌다.
-텁!
내 손과 이 덤벨에 ‘자기력’을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제어력이 120Wh를 넘어가면서 나에게는 이 같은 활용이 가능해졌다.
‘이 시점에 자기력을 얻었으니, 곧 일어날 일은 좀 더 쉽게 풀어낼 수 있을 거다.’
***
헌터 사회는 D급 헌터들에게 너무나 잔혹하다.
몬스터를 사냥해 경험치를 얻고, 경험치를 얻어야 레벨의 상승을 경험할 텐데···.
D급의 역할은 언제나 ‘후방지원조’였다.
즉, 버려진 것이다.
경험치를 얻을 기회는 잃고, 강제 징병 되어 2년이란 세월을 낭비한다.
그리고 군 복무 시절 동안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D급 헌터는 결국 재대 후에도 ‘협회’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럼 결론은 뻔하다.
결국에는 중견급 혹은 하급 용병대에 들어가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짐꾼’으로 평생을 허드렛일과 모욕을 당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각성자이기에 가져야 하는 책임감에 짓눌려 살아가는 이들.
그게, 이건우 이병의 맞선임인 김장훈 일병과 대부분의 D급 헌터들이 점치는 자신의 미래였다.
엿 같은 현실과 절대 변하지 않는 처지.
거기에 매번 받는 차별까지 더하니 세상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나,
이는 각성 전, 세상을 탓하며 자신은 무고하다 말하는 이들을 머저리라 불러왔던 김장훈에게는 특히 가혹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아니었어.’
D급에 대한 편견을 뚫고 당당히 레벨업이라는 위업을 이뤄낸 건우.
그는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냉철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다했다.
‘그렇게 피범벅이 되면서까지···.’
목숨을 걸고 악으로 상황을 타파해낸 자신의 후임.
으스러진 뒤에도 파지직거리는 스파크를 튀겨대던 ‘자이언트 엔트’의 알, 그리고 그 앞에 고고하게 홀로 서 있던 한 헌터 병사.
장훈은 아직도 그 광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난······. 그만큼 피범벅이 되면서까지 뭔가를 위해 노력해본 적이 있었던가.’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는 답은 곧장 나왔다.
마치 폭죽이라도 터트리는 것처럼.
화려하게 허공에 수 놓이던 보상 메시지와 레벨업 알림.
그 충격적인 광경을 직접 목격한 일은, 오랫동안 고여있던 헌터 사회의 고정관념을 깨부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장훈에게 변화라는 건,
사람이 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것처럼 한번 죽었다 살아나야만 일어나는 현상이라 여겨왔는데, 건우는 아주 분명하게 변했다.
‘...할 수 있는 건가. D급에 불과한 나 같은 놈도···?’
다른 사람은 이 순간에 와서 금방 고개를 내저었을지라도,
건우의 맞선임이자 함께 체단실에 내려와 운동해본 적이 있는 장훈은 알 수 있었다.
건우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툭, 하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걸.
그의 변화는 D급이 노력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비웃는 숱한 모멸감을 이겨낸 결과물이었다.
흥미가 생기면 잡고 또 금방 놓아버렸던 운동기구들도,
기초 운동을 위해 준비된 매트리스들도, 마음이 변하니 새롭게만 보였다.
주먹을 꽉 움켜쥐며 장훈은 다짐했다.
‘아니지······. 뭔가 변할 때까지, 그냥 계속하는 거야. 건우처럼.’
간부는 물론이고 병사 대부분은 이번 건우가 일으킨 대사건을 믿지 않았다.
적당한 임무를 수행했을지라도 이병이기에, D급 헌터이기에 과장을 하고 있을 거라고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장면을 직접 본 4소대의 인원들은 달랐다.
평소 체단실에는 관심조차 없던 소대 본부의 통신병도, 정말 보급계원으로 선출되어 1년 넘게 전투를 치러본 적이 없는 3분대의 상병도,
건우의 영향인지 체단실에서 기초 체력 훈련을 시작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D급.
숱한 모멸과 조롱이 잇따라 헤일처럼 밀어닥칠지라도 장훈을 포함한 이 D급 인원들은 노력을 멈추지 않을 준비가 되었다.
***
“건우야. 이 운동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을까.”
“아, 김 일병님. 그건 생각보다 다리 힘이 더 중요합니다.”
정식으로 5대기가 끝난 그 다음주,
최근 나를 따라 체단실에 오는 인원이 늘었다.
“엉덩이는 더 뒤로 빼시고 몸의 균형을 맞춘다는 느낌으로, 예. 그겁니다.”
“후우. 쉽지 않네. 이걸 몇 번쯤 하면 좋을까?”
“으음. 대략 100번쯤 하시면 효과를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백···!”
움찔,
백번이라는 언급에 몸을 흠칫 떠는 김장훈 일병.
허나, 일전에는 조금만 힘들어져도 덤벨을 내려놓고 생활관으로 향했던 것과 달리,
요새는 정말로 내가 추천해준 횟수를 모두 채울 때까지 운동을 쉬지 않았다.
역시, 그런 광경을 직접 본 것에 적잖은 자극을 받은 거겠지.
-어차피 헌터에게는 스킬이 전부다.
-스킬이 별 볼 일 없다면 차라리 죽어라. 노력해서 몸을 키워도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 평화의 시대를 멸망으로 인도하게 되는 아주 좋지 않은 두 개의 상식.
예상대로 다른 중대 인원들은 물론이고 같은 중대의 인원들도 나의 레벨업을 믿질 않았다.
마공학 관측기로 실제 내 레벨이 상승했음을 확인한 중대장마저, 의심의 눈초리 따위를 보냈으니 말 다 했다.
“그러고 보면 건우. 요즘은 땀 안 흘리네. 살이 빠져서 그런가?”
혼자 상념에 잠긴 상태로 벤치 프레스를 하고 있던 내게 김장훈이 그런 말을 건넸다.
“힘 좀 써봤는데 티가 많이 났다면 다행입니다.”
나는 그에게 적당히 너스레를 떨며 답했지만, 실제로 내 평소 모습이 변한대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단번에 중급까지 상승한 전기 내성의 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최하’에서는 실제로 감전된 것만 같은 고통을 끝없이 체감하며 간신히 버텨왔던 반면,
‘하급’을 초월해 ‘중급’에 달하니 생살을 찢는 고통 같은 것은 아예 사라졌고 좀 저릿한 감각만이 남았다.
매일, 매시 느껴야 했던 ‘오버 클럭’의 고통이 사라지니 남은 것은 오직 ‘생체전기’를 보충할 수 없다는 페널티 하나와 <업적>의 힘으로 얻은 엄청난 메리트뿐.
‘그리고 고통이 없으니 운동량은 더 늘었다. 그리고 이 늘어난 운동량이 다시 3배로 돌아오는 거지.’
긍정적인 효능들이 순환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헌터에게 근력은 육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하더라도 그 노력에 따라 스텟이 덩달아 상승하니······. 앞으로도 무한한 발전이 가능했다.
역시 <업적>.
전생에 천마가 어떻게 그 레벨에, 그 정도의 힘을 가졌었는지 지금은 예전보다 더 명확하게 알겠다.
-삐비비빅!
그렇게 운동에 매진하던 중, 내 손목시계가 울렸다.
“어? 건우야 오늘은 좀 많이 일찍 가네?”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
“예. 아주 중요한 약속이라서 말입니다.”
기구를 놓고 일어나자 바로 관심을 보이는 김장훈 일병. 나는 슬쩍 웃으며 적당한 대답을 해준 뒤, 조용히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향했다.
그곳은 우리 대대가 소속되어 있는 여단 본부 건물.
형식상으로는 내가 2분대 분대장인 박태진에게 불러나가는 것처럼 이야기해 두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왔··· 왔냐.”
여단 PX에서 홀로 앉아있던 박태진이 나를 보자 그리 말했고, 그 떨떠름한 반응에 내가 미간에 힘을 주자.
“오, 오셨습니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리 다시 인사를 건네왔다.
사실 미간에 힘을 준 것은 나를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내질 말라는 의미였는데, 박태진은 잔뜩 겁을 먹었다.
그날 이후, 박태진은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극도로 꺼렸다.
그동안 자신이 믿어왔던 권위를 정말 대놓고 짓밟아버린 데다가 보스를 단독 격파하고도 멀쩡히 서 있던 것이 아무래도 큰 역할을 한 것 같았다.
“돈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작게 내가 말하자. 박태진은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새카만 봉투를 올려놓았고, 그 안에는 종이통장과 도장이 있었다.
“초, 총 7800만이고···. 비밀번호는 안에 쪽지에 있습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잠깐,”
“부, 부족한 200만은 다음 겜블 때 생길 테니까······.”
“아니 돈 말고, 박태진 병장님이 좀 도와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도, 도움···?”
서서히 주변에 군인들이 늘어났기에 내가 목소리를 키우고 존칭으로 그리 말하자. 박태진은 믿기지 않는 것을 들었다는 얼굴을 하며 그리 답했다.
“그렇습니다. 박 병장님. 다음 주 월요일부터 장마가 시작될 텐데. 월요일 당직 때 일이병만 모아서 배수로 작업 좀 시켜주시겠습니까?”
“....예? 아, 아니. 크흠! 그러니까 너한테 일을 시켜 달라 그런 거냐? 내, 내가?”
“예. 그렇습니다.”
무척이나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이 되는 박태진.
분명 눈치가 어느 정도 있는 편인 만큼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름의 분석을 시도하는 듯했다.
그러다 맹점을 눈치챘는지 그는 갑자기 말했다.
“근데···. 늦가을에 웬 장마······.”
“올 겁니다. 그것도 억수같이.”
“그···. 그렇구나.”
내가 확신을 담아 말하자 박태진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나 월요일 당직 아닌데···.”
“알아서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애들한테 뭘 시키는 것도 당직 사관님이 하는 거지······.”
뭔가 일을 맡기자마자 바로 어떻게든 핑계를 대려는 박태진.
-파직!
나는 잠시 손끝에 스파크를 튀겨 놈의 시선을 끌고는 다시 힘을 주어 말했다.
“알아서. 해주시길. 바랍니다.”
전생에도 나는 부하를 풀어주는 장교가 아니었다.
하물며 부하에게 그랬는데, 내가 과연 이 교육이 필요한 쓰레기를 그리 쉽게 놔줄 리 있겠는가.
이놈은 앞으로도 계속, 일은 일대로 하고, 욕은 욕대로 다 먹는 나의 총알받이가 될 예정이었다.
“아 그리고, 다음 달까지 천만 원 더 이 통장으로 보내시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지금껏 겜블러 박태진이 남에게 해왔을 그 독촉 멘트를 내가 던지자. 그의 두 눈이 마치 위아래로 찢어질 듯 커졌다.
“전재산만 드리면···. 끝나는 게”
“육군 교도소가 더 좋으십니까?”
그렇게 말하며 내가 일전에 2분대 앞에서 보여줬던 녹음기를 슬쩍 꺼내자, 그는 입만 벌리고는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벙어리가 되었다.
1세대 헌터들이 이룩한 선량한 신화가 있다 보니 헌터에게도 범죄 이력은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돈에 목을 매는 박태진에게, 자신의 이력서에 빨간 줄이 그어지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주, 준비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죽을상이 되는 박태진을 보며 나는 빙긋 웃으며 그리 말했다.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태진아.
***
주말을 보낸 뒤,
소대장 남궁연은 나를 불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대장이 직접 호출한 회의에서 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
이에 남궁연은 열심히 내가 성과에 걸맞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건의했지만,
다수의 간부가 이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으며 또 일부는 D급 헌터가 성과를 냈다는 사실 자체가 탐탁지 않아 보였다고 했다.
주로 우리 1중대의 중대장이 말이다.
“하아, 박동협 그 인간 진짜···. 아, 방금 건 못들은 걸로 해줄래?”
박동협 대위는 육사 출신의 지독한 엘리트주의자인지라 그 정도가 더 심했을 것이다.
남궁연은 과한 업무에 지친 셀러리맨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가 실언을 하고는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웃음이 날 뻔했다가 지금은 장교 대 장교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전생에 나보다 먼저 홍진웅 상병과 함께 ‘대항군’에 들어갔던 그녀.
“그보다 소대장님이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오늘 어차피 비만 와서 작업도 없을 텐데, 좀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비? 하늘이 저렇게 맑은데···. 아 근데,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니. 건우 너, 일은 네가 다하고 상은 나랑 홍 상병이 받게 생겼다니까?”
“저는 휴가 3박 4일 받은 걸로 만족합니다.”
“에엥? 안 된다니까. 상은 일을 한 사람이 받아야지!”
애초에 부하의 성과로 자신이 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 자체를 당연하게 여기는 간부도 많다.
허나, 그런 일로 이렇게 찾아와 어떻게 할지를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따스한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전생에도 신세를 진 것이 많으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싶기도 했고.
“진짜 괜찮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하자. 남궁연은 잠시 눈만 깜빡이며 놀란 얼굴이 되더니 실없는 소리를 했다.
“근데, 건우 살 빼고 나니까 얼굴 장난 아니네. 학창 시절에 여자애들 많이 울리고 다녔겠어~”
“그런 말 처음 듣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짜? 아 혹시 지금까지 다이어트한 적이 한번도 없어서 긁지 않은 복권이었다거나 그런 거였어?”
“어, 그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여자애들하고는 친해져 본 적이 잘 없어서요.”
내가 그리 말하자 잠시 놀란 얼굴이 되더니 말을 잇는 남궁연.
“나, 나도 여잔데?”
“그랬습니까? 소대장님은 그냥 소대장님이라 잘 몰랐었습니다.”
“뭐어···?”
내 장난에 곧장 장난스럽게 삐졌다는 티를 팍팍 내는 남궁연.
이렇게 착하고 좋은 사람이, 전생에는 그렇게 죽어야만 했다니···.
그런 상념에 잠깐 빠져 있으니. 내 머릿속 깊숙한 어딘가에서부터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살아, 살아서···. 꼭 네 손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해줘······.
끝까지.
그녀는 최후의 순간에 내뱉을 수 있는 마지막 한마디마저, 함께 등을 맡기고 싸웠던 전우를 걱정했다.
피로 물든 외침이자 유언.
아직도 내 어깨에는 남궁연의 죽음이 짊어져 있다.
“...건우야 왜 갑자기 그렇게 조용해지고 그래. 사람 멋쩍게···.”
“아, 죄송합니다. 잠깐 졸았습니다.”
나는 실실 웃어 보였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남궁연의 따스한 온정에 녹아내리던 긴장감이 확, 내 목을 조여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숨이 막히고,
구역질이 올라오고,
어떻게든 그 미래를 바꿔야 한다는 강박이 내 양손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이건, 모두가 나를 위해 죽어 나가는 꼴을 나 자신이 죽는 그 날까지 지켜봐야 했던···.
지독한, 죄악감이었다.
***
대외적으로는,
정말 우연히 아직 부화하지 않은 보스의 숨겨진 알을 발견한 이병 이건우가 참 기가 막힌 우연이 맞물려 그걸 처리했고,
그 때문에 단독 공략이 가능했다는 식으로 보고가 올라갔다고 한다.
뭐,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기에, 큰 실망감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남궁연이 전하기로 대대장은 상당히 나를 눈여겨볼 것처럼 말했다고 한다.
‘한 달 만에 그에게 내 이름을 각인시켰으니, 그래도 반은 성공이다.’
이윽고 역시나라고 해야 할지, 당일 오후에는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내렸다.
-치익, 아아. 4소대 각 분대 이병, 일병 행정반 앞으로 집합.
알아서 잘, 일정에 없던 당직 부사관을 서게 된 박태진은 내가 말해뒀던 데로 각 분대의 일이병을 호출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일은 대대 뒤편 순찰로의 배수로 작업이었다.
모든 게 전생과 엇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하, 씨바. 배수로는 뭔 배수로. 빨리 끝내고 들어가자. 알겠······. 냐?”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의 불만을 큰 소리로 쫑알거리던 문현철.
녀석은 그 말을 하며 버릇 적으로 뒤를 돌아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곧바로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어, 얼른 하고 가자.”
“예. 알겠습니다. 문현철 일병님.”
“아, 그, 그래.”
그래서 내가 친절하게 대답까지 해주니 제삼자가 봐도 이상할 만큼 말을 더듬으며 얌전히 앞으로 고개를 돌렸고 더는 뒤를 돌아보지도 떠들지도 않았다.
교육이 효과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도착한 순찰로,
순찰로는 1대대 뒤편 야산 중간을 지나기에 지금처럼 비가 오거나 하늘이 어둑해지면 상당히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소였다.
허나, 이젠 익숙해졌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삽질을 이어가는 4소대 인원들.
-탁! 스윽, 탁! 스윽,
-파아아아아아.
이럴 때면 항상 잡담을 쉬지 않던 문현철이 조용해지니 귓가를 때리는 소리는 거센 비와 삽질 소리뿐이었다.
그렇게 5분쯤 흘렀을까.
-절걱.
-철걱.
철과 철이 부자연스럽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변을 맨 먼저 눈치챈 것은 내 맞선임 김장훈이었다.
이윽고 그의 목소리에 반응한 다른 분대원들이 다 함께 고개를 돌리자.
마공학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야생동물 한 마리도 들어올 수 없는 이 순찰로에서, 정확히 이쪽을 향해 내려오는 한 무리의 괴한을 목격하게 되었다.
“저, 저게 뭐야!”
“문현철 일병님 저기 이상한 게 있습니다!”
“시, 시발? 저건 대체···.”
사람보다 작은 체구에 느릿한 움직임을 보이는 무언가는 전신에 철갑주를 둘둘 두르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철걱, 철걱,
-절걱, 철걱, 절걱!
“저, 저건 리빙 아머다···! 모두 도망쳐!”
“리, 리빙 아머라고?!”
“준상급 언데드가 저렇게 많이?!”
“아니, 부대 내에서 무슨 몬스터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살고 싶으면 뛰어!”
그 음산한 장소의 특성과 비가 오는 상황, 거기에 전투능력이 낮은 4소대에서 일, 이병만 모아놓으니 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던 나는, 다른 인원들과 달리 끝까지 내 옆을 지키던 김장훈 일병에게 말했다.
“김장훈 일병님. 혹시 저랑 좀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잔뜩 긴장한 표정과는 달리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장훈.
나는 점차 발전해가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보고는 지금 뛰어 내려간 인원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그러니 남은 건,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도 전에 두 번째 ‘히든 피스’를 차지하는 것뿐.
-파직, 파지지직!
완벽한 ‘제어’와 허공에 수 놓인 빗방울을 타고 날아가는 나의 푸른 섬광.
이윽고 그 리빙 아머처럼 생긴 그것과 내 섬광이 닿은 그 순간,
-지지직!
-턱!
-으즉!
묵직한 소음과 함께 낡은 철갑주처럼 생겼던 그것들은, 내가 강한 ‘자기력’을 부여한 중심 갑주에 들러붙어 얽히고설켰다.
“허, 허어어어.”
준상급의 마물을 손짓 하나로 정리해버린 나를 보며 감탄을 흘리는 김장훈.
허나, 장훈이 아까부터 착각하는 것이 한가지 있었다.
“김장훈 일병님 저거, 리빙 아머 아닙니다.”
“뭐? 그, 그럼 저건 대체···.”
내 확신에 놀라, 말을 더듬은 장훈. 나는 그에게 대놓고 보여줄 심산으로 갑옷 중 하나의 투구를 뒤집었고,
“헉!”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장훈의 예측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새로운 물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