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62화 (62/62)

눈물을 마시는 새.

17. 천지척사(天地擲柶)

대지를 윷판 삼아 하늘로 윷가락을 던진다. 네 개의 윷가락은 날

고, 까불거리고, 부딪치고, 구른다. 도,  개, 걸, 윷, 모의  다섯

조합 중 하나가 나올 터인데, 그것은 어느 순간에 정해지는가? 물

론 하늘로 던져진 순간이다. 그 순간 다섯 조합은 모두 긍정된다.

대지에 떨어졌을 때 나온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미 긍정된 우연

중 하나다. 그리고 윷놀이는 계속된다. - 작자 미상 <천지척사>

활짝 열린 창문의 초대에 응한 햇살이  중요한 손님임을 자각하는 듯한

느린 발걸음으로 회담장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다.

라수 규리하는 조금 전 탁자 끝에 머물렀던 햇살이 이제 탁자 중간쯤에

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제법 흐른 것이고,  라수는 그 사실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다. 시간이 지연된다  해서 그에게 해될 것은 없다.

반대로 라수가 기다리는 회담 상대에게는 막심한 도덕적 위기가 될 것이

다. 지각은 간혹 사회적 지위의 과시가 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전

혀 그렇지 않다. 상대방은 라수가 그런  조그마한 사실로도 상대의 지위

를 무시한 채 불명예의 수렁 속으로 밀어넣을 - 그리고, 황급히 내민 머

리 위로 모욕의 진흙을 뒤집어씌울 -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지금 도착이 지연되는 것에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아직 이

곳에 도달하지 못한 회담  상대 쪽일 것이다. 라수는  그 사실에 행복했

다.

라수는 자신의 도덕적 승리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장을 잠

시 살폈다. 약간 비틀어진 소매 주위를 만지작거리던 라수는, 갑자기 울

화통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사도(司徒)님."

라수는 약간 놀랐다. 말을 건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등이며, 따

라서 그의 어깨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면 상대방은 한숨 소리

를 들은 것이다. 라수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시모그라

쥬인들은 이제 웬만한 북부인들만큼이나 소리에  민감하다. 라수는 준비

해두지 않았던 해명을 빨리 가다듬었다.

"이 복장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그리고 이런 복장을 하고 있어

야 하는 신세 또한."

그리고 라수는 고개를 돌렸다. 나가는  어쩔까 하다가 웃음을 머금기로

했다. 별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언제나 무난한 표정이다.

"제가 보기에도 이 땅에서 그 옷은 좀  더울 것 같군요. 그런데 신세라

하심은 무슨 뜻인지요?"

라수는 그 말을 나가들이  땀 흘리는 자들에게  얼마나 익숙해졌는지에

대한 표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생각하며 말했

다.

"괄하이드 태위(太尉)가 들으면 배를 잡고 웃겠지만 나는 노병이 된 것

같습니다. 가끔 내가 거친 식사와 불편한 잠자리, 그리고 지저분한 옷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놀라곤 하지요."

끔찍했던 지난 전쟁을 상기시키는 말이었지만 나가는 조용히 웃었다.

"우리 모두 그 때를 쉽게 잊을 수는 없겠지요."

"예. 그런데 의장님이 많이 늦으시는군요. 마케로우."

"소메로입니다."

라수는 약간 당혹한 표정으로 소메로 마케로우를 바라보았다. 소메로는

라수의 시선을 외면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것을 원하기에 제 주위 사람들은 저를 소메로라고

부릅니다."

"알겠습니다. 소메로."

라수는 마케로우 집안의 마지막 여인을 바라보며 키타타 자보로를 떠올

리지 않을 수 없었다. 괄하이드의 대도에  목숨을 잃었던 키타타는 자보

로로 불려지길 원했다. 라수는 소메로와 키타타의 차이가 성격의 차이인

지, 그렇지 않으면 혈육을 잃은 방식의  차이인지 고민했다. 아마 둘 다

일 것이다. 소메로는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늦으실 분이 아닌데  이상하군요. 다시 사람을  보내볼까 합니

다."

라수는 가볍게 목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메로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지만 라수는 그녀가 누군가에게 닐렀을 거라 추측했다. 나가들은 소

리에 익숙해졌지만 라수는 그들의  니름을 들을 수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날이 올지 의심스러웠다.

라수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곳에 서있던  세미쿼와 무핀토는 라수를 위

해 옆으로 조금씩 비켰다. 창가에 선 라수는 시모그라쥬를 바라보았다.

시모그라쥬는 매혹적인 튀기였다.

고집스러운 형식주의자나 순수주의자가  아니라면 - 물론  고집은 그런

자들에게 세끼 식사보다 중요하다. - 튀기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물론 혼혈에는 안정적인 아름다움이 없다. 그 모든 부분은 불안

하며 애써 형성된 균형은 다음 순간  언제나 무너진다. 하지만 그렇기에

혼혈은 어떤 순혈보다 동적인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다. 북부의 사도가

바라보는 시모그라쥬는 거의 춤추고 있었다. 라수는 코끼리가 백곰 가죽

을 잔뜩 실은 채 대로 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는 도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모그라쥬는 건설과 파괴, 환호와 욕설, 고귀함과 비루함을 나누는 어

떤 경계선도 허용치 않았다. 그 모든 것은 뒤섞여 끓어오르고 있었고 품

위를 지키려는 어떤 시도도 이곳에서는  애처로운 몸부림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햇빛 찬란한 지붕 위에서는  나가 인부들이 비늘을  번득이며 망치질을

하고 있다. 그들은 훌륭한 장례식을 치른 목재들을 다룬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었고 따라서 지붕 아래를 지나치다가  먼지 벼락을 맞게 된 레

콘 행인의 투덜거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그들에게는 자부심 이

외에 '듣지 못했다'는 핑계도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시장 한 편에서는

두 명의 인간과 나가 한 명이 그야말로 불꽃 튀기는 대치를 벌이고 있었

다. '늙은 노모와 굶주린 자식들'에만 익숙해 있던 두 인간은 나가 상인

이 내놓는 넋두리에 꽤나  당혹한 눈치였다. 나가  상인은 말라죽어가는

나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인간은 '그깟 나무가 말라죽

든 말든'이라고 말해도 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듯했다. 무지는 경

외의 시작이며, 그들은 어울리지 않게도 '심려가 크시겠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가격은  상인을 만족시키는 수준으로  결정될 것이

다. 그러나 나가들의 도시에서 나가들을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노는

장삿꾼들도 있었는데, 꽤나 넓은 장소를 차지한 채 그릇을 팔고 있는 레

콘 보부상 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목기가 아닌 유기를  팔고 있으니 그

정도면 괜찮은 수완이다. 나가들은 적절한  장례식을 치렀음을 증명하는

제조자의 낙인이 없는 목기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격을

깎자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풀어오르는  레콘의 모습은 나가 손님들로

하여금 비늘을 세우며 도망치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레콘의 곁에 있

던, 아마도 동업자인 것으로 보이는 도깨비는 간단한 도깨비불로 도망치

는 손님들의 발을 붙잡고 있었다. 묘하게 능률적인 동업자 관계다. 아마

도 숙원 사업을 위한 자금 조달이 목적일  테지만, 만약 그 레콘의 평생

숙원이 당대 최고의 거상이 되는 것이라면  그 동업자 관계는 꽤 괜찮은

시작임이 분명하다. 자꾸 부풀어오르는 레콘에게 겁 먹고 도깨비가 허공

에 만들어내는 기화요초에 넋이 나간 나가들은 미친 듯이 돈주머니를 풀

고 있었다.

찢어지는 고함, 걸죽한 욕설, 우마차 굴러가는  소리와 코끼리 짐 부리

는 소리, 수상쩍기 짝이 없는 중개업자가 내놓은 검을 보며 그것이 정말

자신이 요구한 진품 쉬크톨인지, 그렇잖으면 다른 사기꾼들이 내놓은 것

과 같은 사이커인지 고심하는 레콘의 신음이 뒤범벅되어 흐른다. 그곳에

서 협잡꾼과 목청 좋은 상인, 번뇌에  빠진 구매자와 무뢰배, 내일 망해

버릴 도매업자와 건달들이 번영의 합창을  부르고 있었다. 시모그라쥬는

그 위에 쏟아지는 태양 만큼이나 절절 끓고 있었다.

라수의 곁에 서있던 세미쿼  역시 시모그라쥬의 모습에서  느끼는 바가

많은 듯했다. 그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말했다.

"시모그라쥬에서 하루에 움직이는 돈이 얼마나 될지 짐작하시겠습니까?

제가 어제 들러본 주점에서  듣기로 이곳에서 금편  십만 닢짜리 부자는

부자 축에도 못 들어간다더군요."

라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

가들이 소리에 익숙해졌지만 역시 낮은 소리는 들을 수 없을 거라는 것,

(나가들의 니름처럼 소리를 사용하는 자들끼리도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

눌 방도가 있다.) 시모그라쥬에 주점도 있다는 것, (나가들이 술을 마실

까? 그렇잖으면 그 주점은 북부인 전용일까?) 시모그라쥬의 부는 짐작키

도 어려울 정도라는 것, (역시 본격적인  관영 사업을 준비할 것.) 세미

쿼가 어제 주점에 들렀다는 것 (빌어먹을  자식. 정보 수집을 핑계로 또

술 마셨나?) 등이 라수의  머리 속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들이었다.

세미쿼에게 확인해볼 것은 마지막 생각뿐이었다.

"자네 술 마셨나?"

"아시잖습니까? 저 술 끊었습니다."

세미쿼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옆에서 무핀토가 낄낄거리며 거들었다.

"예. 탁자에 가위  꽂아놓고는 한  모금도 안  마셨습니다. 지독하더군

요."

라수는 세미쿼에게 미소로 감사 표시를  했다. 그리고 이제 세미쿼에게

내린 금주령을 철회해달라고  대호왕에게 요청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호왕은 세미쿼가 취한 채 하늘누리에 오르다가 낙상한 이후로 그런 명

령을 내렸다. 그 때 세미쿼가 말했다.

"사도님. 저기 좀 보십시오."

라수는 세미쿼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지만 그곳에는 지나치게 많은 사람

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구경거리가 되지 못할 정도로 '평범

한'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발  앞을 지나가는 강아지에 놀라 요란

하게 넘어지는 사람조차도 인파에게 정도 이상의 시선을 받지는 못했다.

라수는 세미쿼를 바라보았다.

"뭘 보라는 건가?"

"제가 보고 있는 동안 저게 세 번째로 넘어진 겁니다."

라수는 조금 전에 보았던 사람을 다시 보았다.  땅에 쓰러졌던 그 사람

은 씩씩하게 일어나 또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라수는 신음을 흘렸다.

잠시 후, 데오늬 달비 대사가 회담장에 들어섰다.

라수는 자신도 모르게 대사의 무릎을 살폈다. 그 무릎은 꽤나 지저분했

지만 용케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데오늬의 불가사의가

바로 그것이다. 소메로 마케로우에게 인사를 건넨 데오늬는 곧장 라수에

게 걸어왔다. 라수는 묻는 시선을 보내었다.

"사도님! 급하게 알려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대수호자님께서 이곳

에 오십니다."

라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탁자 저편에 있던 소메로도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이라니, 회담장 말인가?"

"그렇습니다. 대수호자님께서는 회담 전에 사도님을  잠시 뵙고 싶어하

십니다. 고소리 의장님께서는 대수호자님을 수행하여 오시느라 늦으시는

겁니다."

라수는 낭패라고 생각했다. 지난 1 년 동안 라수는 대수호자의 방문 요

청을 네 번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대수호자는 라수가 시모그라쥬를

방문하는 틈을 타서 전격적으로 찾아온 것이다. 걱정에 잠겨들던 라수는

문득 데오늬가 왜 사람을 보내지 않고 직접 찾아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대사관에 아무도 없나? 왜 직접 온 거지?"

"이 회담장의 위치는 비밀이잖습니까? 사도님?"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키보렌의 대수호자가 직접  온다면 비밀이고

뭐고 없을 텐데. 사람들이 다 알아볼 것 아닌가."

"대수호자님께서는 변복을 하고 오실 겁니다. 사도님."

"그런가? 으흠. 알았어."

데오늬는 다시 인사한 다음  대사관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 때

누군가가 회담장 안으로 빠르게 걸어들어왔다. 들어온 나가의 모습은 회

담장에 있던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머리에는 두건을  깊이 눌러쓰고

있었고 상하의는 북부인의 것이었다. 들어온 나가는 데오늬에게 말했다.

"어디 안 다치셨습니까, 달비 대사?"

데오늬 달비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건 아래에서 키보렌

의 대수호자의 얼굴이 나타났을 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키보렌의 대수호자 키베인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그렇게까지 시선을

끄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곳 시모그라쥬에서 북부인의 옷은 더위

때문에 오히려 북부인들이 입기  힘들다. 하지만 나가들은  별 무리없이

입을 수 있으며, 이국적인 것에 대한 취미를 가진 자나 북부인들에게 편

안하게 다가갈 목적을 가진 자들은 즐겨 그런 옷을 입는다. 하지만 나가

들은 그들의 대수호자가 나가의 옷도  아닌 북부인의 옷을 입었으리라고

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변복이 되지요."

키베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여준

것은 떠날 때를 놓치고 그 자리에 붙잡히게 된 데오늬 달비뿐이었다. 키

베인을 뒤따라온 칸비야 고소리 의장은 지각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했고

라수 또한 뜻하지 않은  대수호자의 등장에 긴장하고  있었다. 키베인은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듯 빠르게 말했다.

"도무지 만나주질 않으니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올 수밖에 없군요. 라수

규리하.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는 않겠습니다.  회담을 한 시간만 늦춰주

시겠습니까?"

키베인의 말은 청유형이었지만 라수나 칸비야  모두 그것을 명령형으로

이해했다. 라수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내보낼까요?"

"그러면 좋겠군요."

칸비야 고소리는 목례한 다음  소메로 마케로우와 함께  회담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세미쿼와 무핀토,  데오늬도 그들의 뒤를  따라 나갔다.

회담장에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키베인은 말했다.

"오래간만입니다. 미안합니다만 건강과  날씨 이야기는  대충 넘어가지

요."

"지도그라쥬에서는 대수호자님의 소재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습

니까?"

"시모그라쥬로 신(新) 아라짓 사도 라수 규리하를 만나러 간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그들은  몰랐다고 말하겠지

요."

키베인의 솔직성은 라수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라수는 말

했다.

"대수호자님. 지금 당신은  신 아라짓과 접촉이  없을수록 유리합니다.

키보렌의 대수호자가 신 아라짓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질

수록 화를 내는 자들이 많아질 겁니다."

대수호자 키베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라수의 말

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라수는 한 동안 침묵한 채 대수호자를 바라보았다. 가까스로 그의 입이

다시 열렸을 때 그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전입니까? 지도그라쥬와 시모그라쥬의?"

"내전은 내전입니다만 형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칸비야 고소리 의장은 영민한 사람입니다.  의장은 시모그라쥬의 중립

성을 시모그라쥬의 무기로 바꿔놓았습니다. 아마도 향후 3대까지의 의장

이 모두 금과옥조로 삼을  것이 뻔한 그녀의  방침 덕분에 지도그라쥬가

시모그라쥬를 향해 돌멩이 하나라도 던진다면 무시무시한 반향이 일어날

겁니다. 하지만 시모그라쥬를 곤경에 빠트리는  방법이 직접적인 공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라수는 이해했다. 한계선 이남과 이북의 유일한 소통 장소가 된 시모그

라쥬는 그 중개 이익만으로도 감당키 어려울  정도의 치부를 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한계선 이북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시모그라쥬는 분명히 곤

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공격 목표는 신 아라짓이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라수는 분노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도그라쥬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그들은 키보렌의 대수호

자를 데리고 있습니다. 하텐그라쥬가 사라진 지금 그들의 권위는 누구에

게도 도전받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시모그라쥬의  머리를 눌러야 할 이

유가 있습니까?"

"황금은 만능의 사다리입니다. 시모그라쥬는 너무 많은 황금을 쌓고 있

습니다. 정복보다는 상업이 훨씬 확실한 돈벌이지요."

"세금을 거두십시오. 세금이라는 명목이 곤란하다면 대수호자에게 바치

는 선물이나 공물이라고 하면 됩니다.  명목이야 아무래도 좋습니다. 시

모그라쥬의 부를 지도그라쥬로 나눠주십시오. 시모그라쥬는 안전 보장을

위해 어느 정도의 지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키베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내가 시모그라쥬로부터 금편 한 닢만  받는다면 나도 당장 시

모그라쥬와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겁니다. 대수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

는 거야 상관이 없지만  당신들을 위해선 내가 있는  편이 좋을 텐데요.

만약 내가 물러나고 강성 대수호자가 대두하게 된다면 전쟁은 반드시 일

어날 겁니다. 그들은 하텐그라쥬의 몰락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페

로그라쥬와 악타그라쥬의 일 또한 있지요."

라수는 분에 못 이겨 말했다.

"그들이 그 세 도시를 이야기한다면 저는 북부에서 사라진 도시를 서른

개라도 댈 수 있습니다."

"사도 라수. 마음의 천칭은 언제나 천칭  주인을 향해 기울게 마련입니

다. 그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북부의 완전 정복 직전에 하텐

그라쥬에 일격을 당해 전쟁을 끝내야 했으니 그들에겐 분한 기억만이 남

아있을 겁니다. 대수호자라는 지위가 종신직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은 암

묵적인 합의 때문입니다. 수호자의 지위가 종신직이니 대수호자 또한 그

러하다는 식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것이 종신직

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타협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렇습니다."

라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기어코 시모그라쥬를 약올리기 위해, 단지 그런 이유

로 우리를 도륙할 거란 말씀입니까?"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만나려고 했던 겁니다.  제안할 것이 하나 있습니

다."

"그게 뭡니까?"

키베인은 모호하게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제는 그들이 아직도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지는 분명하

잖습니까?"

라수는 방어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하는 대신, 라수는

다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키베인은 약간 초조한 기색을 띄며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날, 하텐그라쥬에서의 그  끔찍했던 날

이후로 5 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수호자들은 여신의 힘을

자유로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카린돌  마케로우의 몸을 가지고

있지요. 그 몸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리고 거기에 깃들어 있던

여신은?"

라수는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거리의 소음이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대호의 발이 힘차게 바위를 박찼다. 무너진 계곡의 틈을 이리저리 달리

던 대호는 다시 힘껏 발을 굴러 낭떠러지 위로 뛰어올랐다. 계곡과 숲은

대호의 배 아래로 쑥  내려갔고 잠깐 동안 대호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굉장한 소리와 함께 땅에 발을 디딘 대호는 다시 숲을 가로질러 달렸다.

시모그라쥬를 떠난 지 다섯 시간, 대호는 날짐승들이나 어림할 수 있는

거리를 맹렬하게 주파하고 있었다. 마루나래라는  이름의 대호는 지난 1

년 가까이 땅을 제대로 밟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마루나래의 질주는 마

치 분풀이처럼 보였다. 키보렌의 짐승들은 이  경이적인 광경에 거의 기

절할 지경이었다. 마루나래가 달리는 방향을 따라 온갖 새들이 날아오르

고 원숭이들이 끔찍한 불협화음을  내질렀다. 제각기 가진  재주에 따라

나무 위로, 굴 속으로, 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으니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다.

거대한 나비 무리를 만난 마루나래는  주저없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수십만 마리의 나비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광경은 눈(雪)을 모

르는 이 땅이 상상만으로 만들어낸 폭설 같다.

거꾸로 내리는 휘황한 빛깔의 눈 속을 헤치며, 마루나래는 비행이라 표

현하는 것이 어울리는 속도로 질주했다.

마루나래의 등 위에는 두 명의 나가가 앉아있다. 한 명은 매우 어린 나

가였고 마루나래의 털을 꼭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가가 나가떨

어지지 않는 이유는 더 큰 나가가 등  뒤에 앉아있기 때문이다. 큰 쪽은

한 손만으로 대호의 털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어린 나가를 감싸안고

있었다. 그 동작은 매우 능숙해보였다.

나가답게 그들은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구애되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더 큰 쪽이 닐렀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괜찮니?]

[괜찮아.]

[그렇게 보이지 않아. 그리미. 며칠만 기다렸으면 편안히 올 수 있었을

텐데.]

[며칠 후에 내가 뭘 원할지는 몰라. 하지만  오늘 나는 거기에 가길 원

해. 사모.]

사모 페이는 아이답지 않은  그리미 마케로우의 대답에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 다른 니름을  떠올리기도 전에 목적지의 모

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앞쪽으로 경이적인 장관이 떠올랐다.

그것은 일견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보였다. 무서운 속도로 움

직이고 가공할 위력으로 꿈틀대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든든한 기둥 같은

안정감이 있었다. 200 미터를 훌쩍 넘는  거대한 회오리 바람. 5년 전에

발생한 이후로 그 바람은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

지도 않았다. 눈에 익은 모습이었지만 사모는 다시 가슴 한 구석에 밀어

닥치는 청량함을 느꼈다.

사모는 그리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미는 아무런 니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생  처음 보는 그 모습

에 그리미가 놀란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그리미가 가진 것 같은 지성에

게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장관이었다. 그리미가 한참 후에야 관심 없

다는 투로 니른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저게 그건가 보군. 못알아볼 리는 없겠는데.]

사모는 속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다른 것과 착각할 일은 없지.]

그리미는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는 다섯 살이다.

[저기부터 가봐.]

[그럴까.]

사모는 마루나래에게 개념을 전달했다. 마루나래는 탐탁치 않다는 반응

을 보내어왔지만 그녀의 의도를 따라 움직였다. 회오리를 바라보느라 여

념이 없었던 그리미는 서서히 느려진 마루나래의 속도를 느끼지 못했다.

회오리의 모습이 거대해질수록 그리미의 작은  몸에서 비늘이 일어났다.

마침내 마루나래가 걸음을 멈추었다. 사모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미가 마루나래의 정지를 깨달은 것은 그  일이 일어나고도 한참 후

였다. 그리미는 고개를 돌려 사모를 바라보았다.

[더 가까이 안 가?]

[더 가면 위험해.]

그리미는 바닥의 풀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좀 더 가까이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저길  봐. 거의 몇백 미터 앞까

지 풀들이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 여기서는 마루나래의 판단을  따라야 해. 그리미.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몇 걸음  더 걸어가면 갑자기 몸이  휙 끌려갈 수도

있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바람의 미세한 흐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야.

저 풀들은 오래 전부터 균형을 이루었기에  저렇게 평온하게 있을 수 있

는 거야.]

[내려줘.]

마루나래는 바닥에 엎드렸다. 먼저 내려선  사모는 그리미가 땅을 디딜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미는 니름 없이 회오리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어쩔 수 없이 스며드는 애수를 피하기 위해 주위로 시선을 돌렸

다. 5년이 지난 지금 하텐그라쥬를 이루고 있던 대부분의 물체들은 기묘

한 모양으로 변해 있었고 번식력 강한  식물들이 그 위를 그물처럼 뒤덮

어 하텐그라쥬의 모습은 초록의  구릉지대처럼 보였다. 부러진  채 땅에

거꾸로 꽂혀 있는 조각품, 죽은 야수의  치열 같은 열주들, 넝쿨을 휘감

은 채 고고하게 서있는 기념탑. 하텐그라쥬의  마지막 모습은 묘하게 두

억시니를 닮아 있었다. 그것은,  바꿔 니르면 아무  것도 닮지 않았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두억시니에게는 규칙이  없으므로. 하텐그라쥬는 그저

단순한 폐허가 아니었다.

그리미가 닐렀다.

[소리 들어?]

[말했니?]

[아니. 소리 들어봐.]

사모는 그렇게 했다. 끊이지 않는 웅웅거림이 들려왔다.

대폭포의 굉음이나 우레의 포효조차 비교되기 어려울 강력한 소리가 들

려왔다. 회오리에서 흘러나오는 그 엄청난 소리는 내재된 파괴적인 힘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시모그라쥬에 주재하고 있는 데오늬 달비 대

사의 중요 임무 중 하나는 그  회오리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모는 그 회오리가 조금도 약화되지 않은 채 다가오는 정신나간 동물들

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있다는 보고를 줄기차게 받을 수 있었다.

그리미가 닐렀다.

[저 안에 부서진 심장탑이 있다고?]

[그래. 아마 지금도 남아있을 거야.]

[사모가 살아있으니까?]

사모는 어쩔 수 없이 회오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살아있으니까.]

[아무도 저긴 들어갈 수 없겠군.]

[티나한이 몸에 쇠사슬을 스무 개 연결하고 도전했지만 거의 죽을 뻔한

다음 가까스로 빠져나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 그 엄청난 무게에도

불구하고 티나한은 위로 떠올랐고 스무  가닥의 쇠사슬은 당장이라도 끊

어질 것처럼 불꽃을 튀기며 팽팽하게  잡아당겨졌지. 티나한이 쇠사슬을

팔뚝과 발목에 감으며 땅으로 도로 내려온 직후 쇠사슬들은 박살나며 부

서졌어. 그래. 아무도 저기에 다가갈 수 없어.]

[그렇다면, 그 누구도 심장 파괴를 사용해서 사모를 죽일 수는 없는 것

이군.]

사모는 누가 그리미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준 것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미는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케이건 드라카는 언제나 아라짓 전사였지.]

회오리가 3개월 동안이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직후,

그 보고를 들은 라수 규리하는 자신의  환상벽과 대화를 나눈 다음 결론

을 내렸다. 최후의 아라짓 전사 케이건 드라카는 그의 왕이 가진 유일한

약점을 봉인해버린 것이다.

[그 케이건 드라카라는 아저씨,  한 번 만나보고 싶어.  모든 사람들이

그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언제나 그 사람들이  평소에 보여주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야기한단 니름이야.]

[다른 모습?]

[그 점잖은 괄하이드는 케이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젊은  망나니가 된

것처럼 기운차게 이야기하지.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르는 라수는 케이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잘 모르겠다는 투로 이야기하고. 그 정도만 해도 놀랍

지만, 우수에 젖은 눈으로 이야기하던 티나한의  모습은 비늘이 빠질 정

도로 충격적이었어.]

사모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감상적이라는 평가에 격분해버릴 티나

한이지만 케이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그는 그런  혐의를 벗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리미가 닐렀다.

[이제, 거기로 가봐.]

[가까우니 걸어가도록 하지.]

그리미는 동의했다. 사모는 마루나래에게 뒤를  따라오도록 한 다음 그

리미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어갔다.

탁자 위에 뿌려진 한줌 햇살이 꾸준히 나뭇결을 적셨다. 키베인은 탁자

위에 올려둔 자신의 팔뚝까지 번져오는 햇살을 보며 말했다.

"분명히 네 신은 다시 윷가락을 던지기로 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발자국  없는 여신께서  확인해주셨습니다. 시모그라쥬의

번영 또한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키베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변화지요. 북부와 남부

가 이런 식으로 만나  서로의 가능성을 탐구해보는  것은.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지금 일어나려 하고 있는 전쟁 또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쟁

또한 변화지요."

라수는 슬픔 속에서 동의했다. 변화가 가져오는 것이 언제나 사람을 행

복하게 하지는 않는다. 키베인이 말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은  보수주의자와 전통주의자들의 괴로움이

될 만한 시대겠지요. 저는 변화 그  자체에는 찬성합니다. 결국 모든 것

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일이 오늘의 단순한  확장에 불과할 뿐이라면 삶

은 의미를 잃습니다. 그런  큰 찬성 속에서  저는 전쟁에도 찬성합니다.

그것은 분명 변화니까요. 하지만 그 찬성은  상대적인 것이며 저는 정체

보다는 전쟁이 낫다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좋은 변화들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고결함을 가꿀  수 있습니다. 사도.

도대체 여신의 힘은 어떻게 된 겁니까?"

"여신은 힘을 해방시켰습니다. 그  힘을 다시 거둬들이는  것은 앞으로

17 년 후입니다."

키베인은 깜짝 놀랐다.

"17 년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앞으로 17 년 동안 수호자들은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

습니다."

"너무 깁니다! 그건 지난 전쟁과 같은 전쟁을  네 번이라도 치를 수 있

는 기간이군요. 왜 17 년 후인 겁니까?"

"용서하십시오. 저는 그것에 대해 말씀드릴  권한이 없습니다. 지금 말

씀드린 것도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로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키베인은 손가락을 세워 탁자를 딱딱 두드렸다. 햇빛 속에서 그의 손가

락을 덮은 비늘들이 반짝였다. 하지만 그늘  속에 있는 대수호자의 얼굴

은 어두웠다.

"저는 17년 동안 지도그라쥬를 억제할 자신이 없습니다. 라수. 17 년은

커녕 17 개월 후에도 지도그라쥬가 전사의 영광이 아닌 평화의 따사로움

을 니르고 있는다면 그것은 정녕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라수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렇게 다급합니까?"

"그들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곧 여신의 힘이 자신들

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말입니다. 나는  차라리 당신의 말을 그들

에게 닐러주고 싶군요. 17년 후라고 니르면  그들의 다급성이 좀 수그러

들지도 모르니까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건 안됩니다. 이 회담장을 나선 후에는 대수호자님께서도 그 사실을

잊어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제안할 것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간신히 되살아나고 있는 북부에는  나가의 또 한 번의  공세를 막아낼

힘이 없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다시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대수호

자님. 평등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안다고 믿습니다만 당신의 말을 듣고 싶군요."

"평등은 자신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가 공평하다는 뜻입

니다. 그리고 그런 증명에 성공하지 못한 자까지 살려주는 것은 이미 불

평등한 일입니다. 대수호자님. 신 아라짓은 자신을 증명할 것입니다. 증

명하지 못한다면 사라질 뿐입니다. 그들에게 살짝 전달하십시오. 지나가

는 니름처럼, 혹은 암시적으로, 그러나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게 전하십

시오. 5년 전, 그들이 완전히 이겼다고 생각했을 때 라수 규리하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상기하라고. 나, 라수  규리하는 키보렌의 심장에 작살검

을 겨누었고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키베인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전쟁을 피할 생각이 없는 것이군요."

"아니오. 나는 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가망성이 없는 일이라고

판명될 경우 미련을 갖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나는 작살

검을 준비할 겁니다."

키베인은 좌절이 묻어나는 동작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 동안 그렇

게 앉아있던 키베인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제발 그들이 이성을 가지고 당신을 평가하기를 바랍니

다. 고소리 의장님과의 회담시간을 더  뺏어서는 안되겠지요. 떠나기 전

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대호왕에 대한 암살 계

획이 있는 것 같습니다."

라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대호왕을 시해할 수는 없습니다. 최후의 아라짓 전사는 무엇보

다도 강력한 방법으로 왕의 심장을 수호했습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이고 난폭한 방법을 동원

하면 심장을 적출한 나가 또한 죽일  수 있습니다. 하늘누리가 시모그라

쥬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지도그라쥬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몇 명 있습니다. 어쩌면 거칠고 조악한 방법이 동원될지도 모릅니다. 때

론 정교한 계획보다 그런 임기응변 같은 계획이 더 저지하기 힘들지요."

"감사합니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수호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라수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일

어났다. 하지만 문쪽으로 걸어가는  대신 대수호자는 잠시  제자리에 선

채 멍하니 라수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피로해보였다. 라수는 뭐라 위

로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 전 대수호자는 가볍

게 말했다.

"우리는 과도기에 있고, 변화라는 것은 너무 끔찍합니다. 변화가 더 낫

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을 모두 포용하기는  어렵군요. 17 년만 버텨보도

록 합시다. 그 후에도 변화는 계속되겠지만 우리 세대가 책임져야 할 부

분은 그 때까지인 듯하군요."

"동감입니다. 대수호자님. 17 년 후에  대수호자님을 다시 뵙고 싶습니

다."

키베인은 대답없이 미소를 보냈다. 그는  옷차림을 만지작거린 다음 주

저없는 걸음으로 회담장을 나갔다.

대수호자가 밖으로 나간 다음 라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말하기도 싫

을 만큼 기운이 빠진  상태였고 고소리 의장과의  회담을 내일로 미루는

대안은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별  대단한 회담 내용이 있

는 것도 아니다. 고소리 의장은 개량형  도깨비 감투가 시모그라쥬 내에

서 사용되지 않기를 원했고 라수는 거기에 얼마든지 동의할 작정이었다.

도깨비 감투가 최고의 첩자를 위한 도구이리라는 것은 단견에 불과하다.

라수는 좀 서툴더라도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첩자를  더 높이 칠

것이며, 그런 맥락에서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도깨비 감투 착용자는

라수에게는 별로 매력적인 첩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온통 니름으로 이루

어지는 나가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도깨비  감투를 썼건 쓰지 않았건 불

가능하다. 라수는 고소리 의장에게 얼마든지 동의해줄 작정이었다. 물론

그것은 라수만 아는 생각일  뿐이며, 회담은 아마도  건네주어도 무방한

대가를 이용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내는  라수의 정치적 기술이 펼쳐

지는 향연장이 될 것이다. 라수는 벌써부터  진절머리가 나는 것을 느꼈

다.

결국 회담은 세 시간 후에 끝났다. 라수는  막심한 피로를 느꼈지만 얻

기로 작정했던 것을 거의 다 얻었기에  만족감을 느꼈다. 라수의 피로감

은 얼굴에 드러날 정도였고, 그래서 세미쿼와 무핀토는 라수가 시모그라

쥬 대사관에 머물지 않고 곧장  하늘누리로 돌아갈 작정이라고 말했음에

도 불구하고 투덜거림을 자제했다. 세 사람은 일몰이 내리는 시모그라쥬

의 외곽으로 빠져나가 정박 중인 하늘누리로 향했다.

시모그라쥬 교외에는 거대한 하늘치가 조용히  떠있었다. 그것은 신 아

라짓의 이동수도(移動首都)였으며 도깨비들의 온갖  기발한 발명품이 더

해진 공중요새이기도 한 하늘누리였다. 하늘치의  등 위에서는 상상력만

으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은  상상한 자 본인에게만 유효

하다.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노포를 상상하더라도  그 노포가 발사한 화

살은 적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도깨비들이 만들

어내어 하늘치 등 위에 부착한 물건들은 -  비록 그 작동 원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며 그  외형만 보고는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 유감없이 효과를 발휘했다. 라수 규리하처럼 움직

이는 계단을 상상할 능력이  없는 세미쿼와 무핀토는,  그래서 승강기에

오르며 그것을 만든 도깨비들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그들은 라수처럼 근

사한 풍광을 보며 올라갈 수는 없었다.

하늘치 유적을 사용하는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라수는 상상력

의 일부만으로도 간단히 자동계단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계단에 몸을 실은  채 발 아래로 서서히 낮아지는

시모그라쥬와 도시를 둘러싼 숲과 늪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땅에서

는 일몰이 완료되었지만 하늘로 올라감에 따라 라수는 다시 떠오르는 태

양을 볼 수 있었다. 햇빛 속에서 어두운 땅을 내려다보는 것은 라수에게

묘한 슬픔을 느끼게 했다.

키베인의 고발은, 라수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의 확인에 불과했다.

환상벽과 나눈 대화에 의해 라수는 이미  지도그라쥬의 동향을 어느 정

도 파악하고 있었다. 전쟁 재발 시점까지  명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

능했지만 라수는 그것이 머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키베인이 내

어놓은 17 개월이라는 말은 그를 좀 놀라게 했지만 그 놀람도 예상치 못

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미 1년 전부터  라수의 명령을 받은 자들이 북부

곳곳의 비밀 장소에 하늘누리의 보급소를  건설하고 있었고 또한 티나한

의 하늘치 유적 발굴단은 라수의 요청에 따라  두 번째, 세 번째 하늘누

리가 될 수 있는 후보 하늘치를  고르고 다녔다. 시모그라쥬에 도착하기

직전 라수는 티나한으로부터  괜찮은 하늘치를  발견했음을 보고받았다.

그가 그토록 키베인을 피했던 것은 키베인에게 행동할 기회를 주기 위해

서였다. 라수는 한계선 이남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 아라짓에 호의를 가

지고 있는 유력자가 생각하는 협조자가  아닌 행동하는 협조자로 바뀌길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은 라수를 슬프게 했다. 라수는 자신을 추슬렀다.

'17 년만 버티자. 그 때까지도 살아있다면, 웃으며 하인샤 대사원에 들

어가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말자. 견디기 힘든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앞으로 17 년만 버티면 된다.'

그리고 하늘치의 등 위에 도달한 라수는 첫 번째 고난이 기다리고 있음

을 알게 되었다. 라수의 질문을 받고 대호왕의 위치를 보고한 병사는 라

수의 얼굴이 확 바뀌는 모습에 겁을 먹었다. 라수는 자신을 억누르려 애

쓰면서 다시 확인했다.

"폐하께서 어디로 가셨다고?"

"그리미가 뇌룡공을 보고 싶다고 졸라서…  직접 마루나래에 태우고 그

곳으로 가셨습니다. 사도님."

라수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천경유수(天京留守)에게 달려

갔다. 천경유수는 하늘누리를 안전 속도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라는 라수

의 명령에 당황했다. 정도 이상의 속도를  내더라도 하늘치에게는 별 무

리가 없지만 그 위에 건설된 각종  구조물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

도 있다. 현명한 사람이었던 천경유수는 하늘누리를 안전 속도로 움직이

는 대신 딱정벌레들을 출동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라수는 자신

이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워 하며 그 제안을 수락했

다.

하늘누리로부터 서른 마리의 딱정벌레가 도깨비와  아라짓 전사들을 싣

고 날아올랐다. 그들의 목표는 하텐그라쥬였다.

그리미 마케로우는 아스화리탈과 륜 페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리고 관찰력이 부족한 자에게 그것은

크고 작은 두 그루의 나무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미가 처음 받은 인상도

그런 것이었다. 세상에 짝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나무와, 거목의 발

치에서 보호를 받듯 조용히 피어있는 어린  나무. 하지만 아무리 관찰력

이 부족한 자라도 10초 이상 바라본다면  그 나무들의 모습이 정말로 희

한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모는 거대한 나무 쪽을 바라보며 닐렀다.

[그 날, 그 회오리 속에서 아스화리탈이  정확하게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어. 라수 규리하도 짐작하지  못해. 하지만 우리가 돌아왔을 때

아스화리탈은 거의 부서진 조각 같은 모습이 된 채 서있었어. 그리고 그

발 아래에는 륜이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은 모습으로 누워있었지. 그리

고 1년이 지났을 때 데오늬 달비는 상당히 어려워하는 투로 그들이 나무

로 변하고 있다고 보고해왔지.]

아스화리탈의 모습은 나무로 변한 용 그 자체였다.

번개를 흩뿌리며 하늘을 불사르던 세 장의  날개는 위로 펼쳐져 거대한

나뭇가지가 되었다. 함수초  잎사귀처럼 하늘거리던  날개 가닥들에서는

가지가 돋아나와 잎사귀가 맺혔고, 그래서 그  모습은 잎에서 가지가 돋

아나온 양 신비하게 보였다. 가슴과 머리 부분은 그 가지들에 가려 제대

로 보이지 않았다. 하체는 그럭저럭 볼 수 있었지만 그 부분에 집중해서

는 그것이 용의 하체임을 짐작할 방도는 거의 없었다. 무성한 잎과 넝쿨

들이 뒤엉켜 하체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떨어져서 보았을 때만

이 그 전체적인 형태에서 어떤 상상이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떨

어져서 보더라도 거목의 주위에 돋아있는 관목 같은 나무들이 원래 아스

화리탈의 다섯 꼬리였음을 짐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스화리탈의 모

습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모 페이도 그 나무들이 원래 아스화리탈의 일부

분이었음을 깨닫기는 어려웠다.

아스화리탈의 본체였던 거목과 그 꼬리였던  관목들은 초승달처럼 둥그

스름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초승달의  가운데 부분은 잔디 같

은 풀이 빈틈없이 돋아있는 공터였다. 그  공터 한가운데 조그마한 나무

가 돋아 있었다.

[가까이 가면 안된다고?]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저 원 안쪽에 들어서면 당

장 타죽고 말아.]

[아스화리탈이 뇌룡공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군.]

사모는 목이 메이는 느낌에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륜 페이의

모습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공터 가운데 고요히 피어있는 어린 나무는, 자세히 바라보면 도저히 나

무라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꼿꼿하고 가느다란 줄기는 쇠

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원래 작살검이었다. 하지만 그 쇠칼날과 손

잡에서는 분명히 식물의 것인  가지들이 조심스럽게 돋아  있었다. 가지

끝에 매달린 잎사귀들은 묘하게 금속의 질감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그 뿌리 부분에는 륜 페이가 누워있었다.

빈틈없이 돋아난 잔디와 굵은 뿌리들이 뒤덮고  있었기에 륜 페이의 모

습은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풀과 뿌리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비늘들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그저 나가  크기의 둔덕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모는

이곳에 올 때마다 느꼈던 충동을 또다시  느꼈다. 그녀는 공터에 뛰어들

어 륜을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스화리탈은  어떤 접근도 허용치 않았

다.

그 때 해가 졌다. 빠르게 다가오는 저녁  어둠을 바라보던 사모는 다시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그리미  역시 말로만, 혹은  니름으로만 듣던

일을 기다리며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거목이 빛나기 시작했다.

햇빛도, 달빛도, 촛불이나 횃불의 빛도 아닌  기이한 빛들이 잎사귀 사

이에서 아롱졌다. 그 빛깔의 다양함은 이루  니를 수 없을 정도였고, 따

라서 그 모습을 보며 무수히 많은  보석들이 과일처럼 매달린 광경을 연

상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눈이 좋은 레콘이 확인한 사

실에 의하면 그곳에는 보석이 아닌 빛만 존재했다. 사모는 그 빛들이 안

개 속에서 보는 등롱과 비슷하며 어두워질수록 점점 더 밝아지지만 결코

눈이 아플 정도로 밝아지는 일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밤이 깊어

지면 그 빛들이 낙엽처럼  부드럽게 떨어져 공터에  쌓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새벽이 찾아올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륜을 바라본  어느 날 밤

사모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등에 실었던 모피를 내리고는 닐렀다.

[마루나래. 가서 더 달리고 사냥이라도 하렴. 하늘누리는 며칠 뒤에 이

곳에 우리를 데리러 올 거야. 그 때까지만 돌아오면 돼.]

마루나래는 지체없이 숲속으로 달려갔다. 사모는  모피를 허리에 낀 채

그리미에게 다가갔다.

[좋은 장소를 알고 있어. 그리미. 따라오렴.]

그리미는 대호왕을 따라 걸어갔다. 사모는  이곳에서 밤을 보낼 때마다

사용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밤바람을 별로 타지  않으며 이슬도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바닥에 모피를 깐 사모는  그리미를 그 위에 앉혔다. 그

리미는 모피 위에 엎드려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사모는 그리미의 곁에

앉아 쉬크톨을 풀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아무런  니름도 나누지 않은 채

아스화리탈과 륜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갔다.

아스화리탈에서 빛들이 소르륵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사모는 그 모습

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그리미를 바라보았다. 그리미는 이

미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사모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잠들어 있을 때는 그리미도 여신의 딸이 아닌 나가의 평범한 딸처럼 보

인다.

그리미 마케로우는 카린돌 마케로우와 스바치의 딸이다. 하지만 그리미

마케로우가 알에서 나와서 만난 어머니는 발자국 없는 여신이었다. 시우

쇠는 어르신이 되었고 아기는 평범한 레콘의  어린 소녀로 자라났다. 하

지만 발자국 없는 여신은 화신으로 남아 한 소녀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

리미가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여신은  그리미를 보호하기로 했다. 평범

한 어머니가 되기 위해 여신은 자신의  힘을 회수하지 않았고 그래서 수

호자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여전히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런 무단 도용은 앞으로 17 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여신의 결정에 대해 의아해했지만  왜 그런 결정을 내렸

는지에 대해 여신이 대답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언젠가 그녀는 지나

가는 니름처럼 대호왕에게 닐렀다.

[스물두 살이 되면, 물론 열두 살만 되어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리

미에겐 더 이상 어머니가 필요없겠지. 혹은 그 때가 되면 카린돌이 제정

신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사모가 들을 수 있던 설명은 그것뿐이었고 그 외에 여신이 다른 설명을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리미가 그토록 긴 보호를 필요로 하

는 소녀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별로 없었다. 그 어머니가 화신이었기에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그리미는 어릴  때부터 초능력에 가까운 현명함을

보였다. 다른 모든 천재성과 마찬가지로 그리미의 그것은 바라보는 이들

로 하여금 안쓰러움을 느끼게 하는 천재성이었다. 너무나 조숙하고 현명

하지만, 경험의 뒷받침을 받지 못했기에 그리미는 언제나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사모가 그리미를 가질 수 없었던  자식으로 여기고 있는 자신을

깨달은 것은 그리미가 두 살 되던 해였다.  그 해에 그리미는 완벽한 니

름과 말을 구사할 수 있었고 사람들을  가장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두

살짜리에게 어떤 경험이 있겠는가? 그리미의 복장이나 모습은 세심한 관

심에 의해 언제나 완벽했지만 그 정신  세계는 나이차가 너무 큰 손윗형

제의 옷을 물려받아 소매와 바짓단을 끌고 다니는 소녀 같았다. 다섯 살

이 된 지금 이제는 그런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사모는 여전히 안쓰러

움을 느끼지 않고서는 그리미를 보기 힘들었다. 사모는 자신이 그리미를

의존적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끼며  애써 공터로 시선을 옮겼

다.

아스화리탈에서 떨어지는 광점들이 공터를 다채로운 빛깔로 물들였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광점 때문에 공터에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가 움직

이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 사모는 륜이  일어나려는 것인 줄 착각하고는

수도 없이 공터에 뛰어들려 했다. 그  때마다 열성적인 저지가 있었기에

사모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사모  페이가 홀로 공터를  방문하는 것을

사람들이 허락하게 된 것은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많이 냉정해졌다고 믿는 지금도 사모는 당장이라도 륜이

고개를 들어 미소를 보내어올 것 같은 느낌을 떨쳐내지 못했다.

새벽이 다가올 때 사모는 마침내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 없다는 느

낌을 받았다. 사모는 발자국 없는 여신께  맹세코 분명히 무엇인가가 움

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냉철한 이성에  의해 사모는 자신이 환상

을 보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그 느낌은  너무도 뚜렷했다. 사모는

억지로 잠든 그리미를 내려다보며 자신을 억눌렀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샌가 사모는 공터 쪽을 멍하니 바라보며 엉거주춤 일어나 있었

다. 사모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륜의  이름을 니르고 싶었다. 그리고

사모는 그런 일을 저지르면 자신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

았다.

발 앞에 화살이 박혔을 때 사모는 공터를 향해 세 걸음째 걷고 있었다.

사모는 흠칫하며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뒤를 돌아본 사모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모피를 떠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사모는 뒤로 돌아 몸을 날렸다. 쉬크톨을 움켜쥔 사모는 긴장과

공포 속에서 조금 전 자신이 서있던 땅을 바라보았다. 그 땅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화살에는 도깨비지가 묶여 있었다.

사모는 혼란 속에서 그 화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그 화살은 거

의 초현실적인 물체처럼 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물건이기 때문이

다. 간신히 그것이 보통의 화살이며 그 도깨비지에는 아마도 읽을 수 있

는 내용이 적혀있을 거라는 사실을 사모가 깨달은 것은 한참 후였다. 사

모는 그리미를 다시 한 번 돌아본  다음 조심스럽게 화살을 향해 움직였

다. 갑자기 자신이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이 그녀를 엄습했다.

사모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지만 모피가  깔려있는 자리보다 더 좋은

피신처는 없었다. 사모는 화살을 움켜쥐자마자 다시 황급히 잠자리로 돌

아왔다.

서두르던 사모는 화살촉에 손을 다칠 뻔하면서 겨우 도깨비지를 풀어내

었다. 사모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쳤다. 물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

다. 그녀에겐 불이 없었고  아무리 나가의 눈이라도  밤중에 도깨비지에

쓰여있는 글을 읽을 능력은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사모는 그것이 도깨

비지라는 사실에서 해결책을 떠올렸다. 사모는  도깨비지를 펼쳐 눈높이

로 들어올린 다음 공터쪽을 향했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양피지라면 거의  불가능했겠지만 도깨비지는 공

터의 빛을 투과시켰다. 하지만  글자가 적힌 부분에서는  빛이 투과되지

못했다. 사모는 글자가 뒤집힌  것을 깨닫고는 도깨비지를  다시 뒤집어

들었다. 그러자 그럭저럭 읽을 수 있는 글이 떠올랐다.

대호왕 사모 페이. 지도그라쥬의  얼간이들은 실로 얼간이  같은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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