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16. 독수(毒水) - 5
그 눈 속에서 빛이 번득였다고 생각한 순간 케이건은 모든 것이 바뀌었
음을 알게 되었다. 케이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신질환자를 미치게 할 수 있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광선으로 구성된 세계였다. 질량은커녕 면적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직
선, 곡선, 꺾인 선, 꿈틀거리는 선, 진저리치는 선, 유쾌한 선, 우울한
선, 가인의 고요한 한숨에 흔들리는 난초 같은 선. 보이는 것은 오로지
선밖에 없었다. 가없는 암흑을 배경으로 선으로 만들어진 면적과 선으로
만들어진 질량이 그곳에 있었다.
케이건은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며 그 선들을 하텐그라쥬와 연관지었다.
응축되었다가 위쪽으로 거대하게 폭발하는 저 선의 무더기는 시우쇠인
듯하다. 선은 시우쇠의 분노인지 시우쇠의 몸에서 뿜어져 상승하는 열기
인지 뚜렷이 구분지을 수 없는 것을 시우쇠의 머리 위에 구현하고 있었
다. 그리고 저편에 덩어리진 선들은 티나한인지 마루나래인지 뚜렷하지
않았다. 아마도 두억시니들일 거라 생각되는 선의 기괴함은 똑바로 바라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케이건은 시선을 보다 먼 곳에 던졌다. 선들이
미쳐 날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억시니들의 선과 달리 그 선들은,
정신없이 춤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담백함을 담고 있었다. 간단
한 목적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주위를 죽 둘러본 케이
건은 그 광분한 선들이 하텐그라쥬를 삼키기 위해 몰려드는 회오리라고
판단했다.
먼 곳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시선을 가까이 끌어당겨 품 속을 내려다보
았다.
나가의 아이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선으로 구성된 다른
모든 사물과 달리 케이건처럼 면적과 질량을 제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몇 살이나 되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아이의 비늘은 아직 유연했고
케이건은 팔뚝을 통해 아이의 작은 심장이 그 몸 속에서 통탕거리고 있
음을 느낄 수 있었다. 케이건을 바라보던 아이가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
케이건은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어린
생물 특유의 불안하면서도 용케 쓰러지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되는 동작
으로 잠시 자신의 균형을 회복하려 애썼다. 겨우 똑바로 서게 된 나가의
아이는 케이건을 올려다보았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들어올렸다. 아이는
감식하는 듯한 눈으로 그 동작을 바라볼 뿐 두려움이나 증오는 보이지
않았다. 케이건은 어쩐지 그 얼굴이 낯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건
조차도 그 긴 사냥의 세월 동안 어린 나가를 잡아먹은 적은 단 두 번 뿐
이었다. 나가 아이의 얼굴이 낯익을 리가 없었다. 케이건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아이의 목을 뎅겅 잘랐다.
아이의 목에서 분리된 머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바닥에 부딪힌 다음 데
굴데굴 굴러갔다. 케이건은 무관심한 시선으로 그 머리를 잠시 바라보았
다.
먼 곳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시선을 가까이 끌어당겨 품 속을 내려다보
았다.
나가의 아이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선으로 구성된 다른
모든 사물과 달리 케이건처럼 면적과 질량을 제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몇 살이나 되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아이의 비늘은 아직 유연했고
케이건은 팔뚝을 통해 아이의 작은 심장이 그 몸 속에서 통탕거리고 있
음을 느낄 수 있었다. 케이건을 바라보던 아이가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
케이건은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어린
생물 특유의 불안하면서도 용케 쓰러지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되는 동작
으로 잠시 자신의 균형을 회복하려 애썼다. 겨우 똑바로 서게 된 나가의
아이는 케이건을 올려다보았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들어올렸다. 아이는
감식하는 듯한 눈으로 그 동작을 바라볼 뿐 두려움이나 증오는 보이지
않았다. 케이건은 어쩐지 그 얼굴이 낯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건
조차도 그 긴 사냥의 세월 동안 어린 나가를 잡아먹은 적은 단 두 번 뿐
이었다. 나가 아이의 얼굴이 낯익을 리가 없었다. 케이건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아이의 목을 뎅겅 잘랐다.
아이의 목에서 분리된 머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바닥에 부딪힌 다음 데
굴데굴 굴러갔다. 케이건은 무관심한 시선으로 그 머리를 잠시 바라보았
다.
먼 곳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시선을 가까이 끌어당겨 품 속을 내려다보
았다.
나가의 아이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케이건은 이제 이 짓을 그만두
기로, 최소한 보류해두기로 결정했다. 아이는 아이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생각했어."
"영원히 다시 시작할 건가."
"그래. 그러니 목을 자르는 짓은 이제 그만두지. 아이고 어른이고 상관
하지 않는군."
"상관해본 적은 없어. 너는 도대체 누구지?"
아이는 커다란 웃음을 대답 삼아 케이건에게 보내주었다. 그리고 아이
는 두 팔을 기이하게 흔들며 뛰어갔다. 케이건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
라보았다. 달려가던 아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린
애가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반응을 탓하기라도 하듯 쳐다보는, 그런 눈
빛이었다. 어떤 선 위에 멈춰선 아이가 말했다.
"뭐해?"
"아무 것도."
"바보야, 아저씨?"
"취미는 아니지만."
"바보가 되는 취미를 가진 사람은 없어. 필요해서 그러기는 하지만."
케이건은 모호한 기분 속에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이가 말하
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케이건은 다시 아이의 얼굴을 들여보았다. 기시
감이 더욱 짙어졌고 그것은 케이건에게 알 수 없는 불안을 선사했다. 결
국 케이건은 질문했다.
"너는 누구지?"
"그건 아직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그러면 중요 사항부터 논의해보지."
"몇 개나?"
"식후에 처리하기 적당한 만큼."
"아저씨 식후? 내 식후?"
"별 차이는 없겠군."
아이는 의표를 찔렸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나가의 식사 간격은 인간의
그것보다 월등히 길어질 수 있다. 아이는 그것을 자랑하려 했지만 케이
건은 아이가 어른처럼 큰 생물을 삼키지는 못할 거라고 지적했다. 나가
아이는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러면 두어 개만 시험해볼까?"
"거기에 어떻게 하면 너를 죽일 수 있는가 하는 것도 포함되나?"
"원한다면 그것도 포함시킬게."
"좋아. 그럼 동의해."
"이리와."
케이건은 바라기를 등 뒤의 고리에 걸고는 아이에게 걸어갔다. 바닥은
없었고 선들 뿐이었지만 케이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갔다. 케이건은
자신의 발 아래에서 선들이 파문처럼 번져가는 모습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케이건은 아이의 옆에 섰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걸었다. 케이
건은 어쩔까 하다가, 아이의 보조를 맞추며 걸었다. 주위를 흐르는 선에
손을 집어넣어 선들의 흐름에 동요를 만들던 아이가 말했다.
"용의 수호는 했어?"
"아니. 사모가 거부했어."
대답을 완전히 끝낸 후에야 케이건은 멈칫했다. 케이건은 충격과 격분
에 싸인 눈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선들을 흔들리게 하는데 정신이
팔려있던 아이는 조금 후에야 걸음을 멈추고는 케이건을 이상하다는 눈
으로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요스비?"
"요스비는 죽었어. 알고 있잖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죽은 자가 보내는 사어를 보았어."
"그럼 그 사어의 반대편에 누가 있었는지 몰랐던 거야?"
"모호해."
아이는 손을 위로 쭉 뻗고는 그것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바람에 흔들리
는 나뭇가지 같은 모습의 팔 위에 손이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광선들이
아이의 손을 흔드는 바람을 대신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는 그렇게 나무
놀이를 하며 말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면, 사람이 할 수 있
는 일은 뭐가 남을까?"
아이의 말은 케이건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케이건은 불만스러운 듯
이 말했다.
"내일을 계속 오늘로 만들면 돼."
"오늘이 솟아나오는 샘은 내일이야. 키다리 아저씨. 샘물이 샘으로 환
유될 수 있는 건가? 논점을 회피하지마."
"가능성이 있다고 자신을 속이는 방법도 있지."
"나쁘진 않군. 실제로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도 많지. 하지만 아저씨는 그보다는 더 똑똑할 텐데?"
"케이건 드라카라고 불러."
"무뚝뚝하기는. 그런 말은 세수할 때 물 속에 비친 사람에게나 해줘.
'안녕하시오. 나는 케이건 드라카요. 그렇게 인상 쓰는 이유가 뭐요? 내
게 불만 있으면 말해보시지.'라고. 그러고 있으면 정말 어울릴 것 같
아."
"너 계집아이니?"
"흐응."
아이는 신음인지 긍정의 대답인지 구분짓기 어려운 소리를 내며 계속
팔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이에 대한 관심을 잃은 케이건은 광란하는 광
선들을 바라보았다. 광선으로만 표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
진 끔찍한 파괴력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키베인은 자신에게 있지도 않은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으며 등 뒤
를 바라보았다.
치명적인 회오리가 숲을 불태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그곳에는 화
염이 없었다. 하지만 나무들은 바스라지고 갈라지고 조각나며 타들어갔
다. 키베인의 눈에 하텐그라쥬를 구성하는 물질적, 정신적 유산들이 직
경 10 킬로미터짜리 맷돌에 부어넣어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 맷돌을
빠져나온 것에서는 어떤 하텐그라쥬도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공포에 질린 대수호자는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
의 어깨를 두드렸을 때에야 대수호자는 고개를 돌렸다. 데오늬 달비가
말하고 있었다. 키베인은 청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대수호자님!"
"예, 달비 부위?"
"다리가 아픈 것이 낫습니다. 대수호자님!"
데오늬가 명랑하게 외쳤다. 키베인은 조금도 화내지 않으며 대답했다.
"내 생각도 그래요. 9할 이상 동의합니다. 그리고 다리가 왜 아파야 하
는 건지 알게 되면 나머지 1할의 동의도 기쁨 속에서 당신에게 바치겠습
니다. 다리가 왜 아파야 하지요?"
"저 탑을 올라가야 하니까요! 대수호자님!"
키베인은 데오늬가 말하는 저 탑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두리번거리
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키베인은 곧장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키베인은 데오늬의 말을 이해했다.
회오리는 지독하게 거대해서 한눈에 그 규모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하
지만 키베인은 좁혀드는 회오리의 중심에 심장탑이 있음을 주저없이 인
정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어떤 회의도 품지 않기로 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해보는 것은 그 시점에서 도무지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
문이다.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이 좁혀드는 회오리의 중심점이라면, 그곳
은 회오리에서 가장 먼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 죽음의 회오리가 다가
오는 것을 앉아서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는 심장탑을 향해 달리는 편이
옳았다. 게다가 그 시점에서 심장탑이 가진 가치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심장탑의 꼭대기로 거대한 하늘치가 접근하고 있었다.
키베인은 자신의 머리 속에 떠오른 니름도 되지 않는 상상에 잠시 압도
되었다. 키보렌의 대수호자는 묻기 싫다는 느낌이 분명한 어조로 데오늬
에게 질문했다.
"저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심장탑은 그 윗부분에 상당한 타격을 입고 부러져 있었지만 아직도 웅
장한 위용을 자랑하기에 충분한 높이로 솟아 있었다. 해일처럼 덮쳐오는
회오리 앞에서 그 부러진 꼿꼿함은 오히려 자랑스럽다. 그리고 심장탑을
향해 다가드는 하늘치의 높이는 남아있는 심장탑의 꼭대기에서 몇십 미
터 위였다. 심장탑 꼭대기는 비정상적으로 낮게 날고 있는 하늘치에게
가장 가까워지는 장소였다. 하지만 남은 거리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여전
히 레콘의 능력이나 자기 기만이 필요했다.
그러나 데오늬는 그 사실에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다는 듯 힘차게 고
개를 끄덕였다.
"해야 합니다! 대수호자님!"
키베인은 그보다 나은 대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침착을 되찾았
다.
"안된 일인지 잘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최초의 등정자는 아
니게 될 겁니다. 이미 북부군이 저 위로 올라갔습니다. 허공을 밟고서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허공을 밟아서 하늘치의 등에 오를 수 있을지
도 모르지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해야 합니다."
키베인은 모든 정신을 집중시켜 강력하게 닐렀다.
[갈로텍 대장군!]
갈로텍이 저편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말 위에 올라타 있는 갈로텍의 모
습은 병사들을 사이에 두고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대장군! 북부군이 하늘치의 등 위로 올라갔다고 했지요? 우리도 어쩌
면 그 흉내를 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치와 심장탑, 그리고 다가오는 회오리를 빠르게 둘러본 갈로텍은
대수호자의 니름을 이해했다. 하지만 갈로텍은 그 의견에 찬성하지 않았
다.
[혹 하늘치의 등 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해도 심장탑이 파괴되
면 하텐그라쥬 출신의 심장을 적출한 나가는 다 죽을 겁니다. 우리는 심
장탑과 함께 살아나야 합니다.]
갈로텍의 지적은 정확했다. 대수호자는 신음을 흘렸다. 갈로텍의 니름
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일단 저곳으로 가야 한다는 데는 대수호자님께 동의합니다.
어차피 이곳에 있을 수는 없고, 아무래도 저곳이 중심점인 듯하군요. 그
리고 심장탑을 지킨다는 이유에서도 저곳에 있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갈로텍은 지체없이 명령했다.
[모두들 소드락을 복용하라! 심장탑으로 간다!]
병사들은 각자의 소드락을 꺼내어 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가공할 가
속 속에서 심장탑을 향해 달려갔다. 가지고 있던 소드락을 꺼내어들던
키베인은 데오늬를 떠올리고는 비늘이 서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나 누구보다 앞장서서 달려가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녀를 뒤쫓아다니게 만드는 그녀는 나가가 아닌 인간이다. 소드락의 효과
를 얻을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주력으로 다가오는
회오리보다 더 빠르게 뛴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한 모험이었다. 키베인
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주위의 병사들이 하나둘씩 소드락을 복용
하고 번갯불로 바뀌어 사라지는 것을 보던 데오늬는 자신의 몸이 갑자기
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린 데오늬는 키보렌의 대수호자가
자신을 안아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한테 물어봐야 해요! 대수호자님!"
키베인은 데오늬가 도대체 어떤 중간 과정을 생략했는지 묻는 것조차
두려워졌다.
"…일단 살고 나서 자당께 여쭤봅시다!"
데오늬는 그 말에 키베인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높이로 치솟
은 바람의 장막이 형체 없는 야수처럼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데
오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오늬를 안고 달리는 대수호자를 본 다른 나가 병사들은, 주춤하면서
도 인간 포로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르사 돌 교위는 깜짝 놀란 표정으
로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나가는 성마른 어조로 말했다.
"업히시오."
바르사는 뭔가 제대로 된 감사의 말을 할 여유도 없이 나가에게 업혔
다. 소드락의 힘에 의해 나가는 무거운 그를 업고서도 놀랄 만큼 민첩하
게 달려갔다. 하지만 회오리의 맹포한 기세는 그들의 속도마저도 느린
것으로 여겨지게 하기 충분했다. 나가의 등에 업힌 채 바르사는 두 가
지 생각만을 계속했다. 자신이 나가의 조력을 받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과, 그리고 그 나가가 제발 달리기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는 것. 회오리는 그들의 발을 잡아챌 듯 으르릉거
리며 다가왔다.
나가 소녀는 아이 특유의 감성으로 케이건이 자신에 대한 관심을 잃었
음을 깨달았다. 아이는 케이건의 곁으로 다가가 그 바지를 잡아당겼다.
광선의 회오리를 보던 케이건은 고개를 숙여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새삼 케이건의 키에 놀란 것처럼 정신없이 올려다보다가 뒤로
두어 발짝 통통 튀듯이 물러났다. 그 덕분에 아이는 턱이 뒤로 젖혀질
듯한 상태에서 벗어나 케이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요스비는 죽었어. 그건 요스비가 아니야."
"그럼 누구지."
"보트린이라는 수호자가 있었어. 냉동 장치 안에 갇혀계신 여신을 사랑
했지. 하지만 적극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물론 그를 위해 변호하자면
나가 사회에서 한 여성을 사랑하는 남성이라는 것이 좀 기괴한 관념이었
다는 것을 말해줄 수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소심했던 그는 간혹 냉동
장치를 열어 신체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써 자신과 타협했어. 그리고 그
덕분에 여신은 간혹 외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
"여신이 요스비를 알고 있었나?"
"요스비는 저번 신체였어."
"그랬나. 그러면 여신은 간혹 요스비의 기억과 능력을 이용할 수도 있
었겠군."
"맞아."
"그 사어를 보낸 건 발자국 없는 여신이었군."
"선물 하나 할게."
아이는 주위를 흐르는 광선을 두서없이 끌어모아 뭉쳤다. 그리고 그것
을 꽃다발이라도 되는 양 케이건에게 내밀었다. 케이건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광선은 그의 손에 닿자 소리 없이 폭발하여 사방
으로 날아갔다. 아이는 까르륵 웃었다. 케이건은 손을 끌어당겨 허리에
얹고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건 가짜였어."
케이건은 아이가 광선의 속임수를 말하는 건지 요스비가 가짜였다고 말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중의적인 의미일 것이다.
"그런 장난을 통해 발자국 없는 여신은 나로 하여금 다른 두 화신을 찾
아내게 했군. 이해했어. 그런데 용의 수호는 무슨 의미지."
아이는 방글방글 웃을 뿐 케이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답
을 찾아내는 일이 자신에게 맡겨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생각했다.
"조금 전 사모는 내 눈물을 마시고 죽기를 원했지. 내가 사모에게 용의
수호를 맹세했다면, 나는 사모를 죽이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끊어야 하
지."
케이건은 이해했다.
"여벌 화살이군."
"여벌 화살? 으음. 그래. 최악의 경우 너 자신이 죽으면 어디에도 없는
신은 어딘가로 전령할 수 있을 테니까. 다시 윷가락이 네 개가 되는 거
지. 하지만 나는 그 여벌 화살이 시위에 얹히지 않기를 바랐어."
"너는 발자국 없는 여신이냐?"
"아니."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누구지?"
"네가 아는대로 말해봐."
"나가 계집아이처럼 보이지만, 그 겉모습이 본질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 어렵군. 이런 독특한 장소에서는."
"그거 말고. 이렇게 하면 돼? 이런 표정을 지을까?"
아이는 갑자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이가 어른의 표정을 억지로
흉내내는 듯한 얼굴이었고, 당연히 꽤 우스꽝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조금
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케이건은 말했다.
"그만둬. 꼴사나우니까. 그래.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했
어."
아이는 꼴 사납다는 말에 비늘을 부딪쳤다. 그녀는 약간 쌀쌀맞게 말했
다.
"누구랑 닮았지?"
"몰라."
"바보."
아이는 조그마한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말했다.
"나는 그리미 마케로우. 카린돌 마케로우와 스바치의 딸이야. 내 어머
니는 아까 아저씨 품에 쓰러진 그 신체였어. 내력이 참 대단하지? 아저
씨의 시간에서 나는 아직 어머니의 배 속에 있는 알이야."
"내 시간? 그러면 네가 미래에서 왔다는 거냐?"
그리미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손을 들어올렸다.
"내가 누구와 닮았는지 모르겠다면, 가르쳐주지. 저쪽에 있잖아."
케이건은 그리미가 바라보는 곳을 쳐다보았다.
티나한은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그 동작을 통해 그가 원했던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티나한은 여전히 조금 전과 똑같은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나한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는 그들 또한 그 만큼 놀랐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코네도 빌파가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로 간 거야?"
시우쇠 또한 격노한 목소리로 비슷한 내용을 외쳤다. 티나한은 고개를
홰홰 내저었고 그러자 수염볏이 출렁거렸다. 티나한은 보고 싶지 않다는
시선으로 냉동 장치를 바라보았다.
냉동 장치는 조금 전과 그대로였다. 그 앞에는 물과 함께 한 명의 나가
여인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안고 있던
케이건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심장탑 51층의 바닥을 둘러보았지만 그곳에는 어차피 사람이 숨을 만한
장소도 없었다. 사모가 힘겹게 말했다.
"갈바마리. 다시 해 봐. 저 여인에게로 가 보자."
갈바마리는 다시 사람들을 양쪽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케이건이 만들어
놓은 맴돌이 지대를 빠져나왔다. 시우쇠가 고함을 버럭 질렀고 그래서
사모는 갈바마리에게 상세한 지시를 내린 다음 시우쇠에게 걸어가게끔
했다. 갈바마리가 시우쇠에게로 걸어가는 동안 사람들은 당혹한 표정으
로 카린돌 마케로우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티나한은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뒤편에 서있었다. 카린돌 마케로우 주변의 바닥은 온통 물바다였
다. 티나한은 그쪽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티나한은 비형을 가장 먼저 발견했다.
"비형!"
사람들은 레콘이 내지르는 비명에 깜짝 놀랐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
것은 분명히 공포에 질린 비명이었다. 사람들은 무엇이 레콘을 겁나게
한 것인지 알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다음 순간 그곳에 있는 각 종
족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경악을 표시했다.
전대미문의 광경이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딱정벌레 나늬가 비틀거리며 힘겹게 날아오고 있었다. 딱정벌레는 자꾸
만 아래로 떨어지려 했고 그 때마다 안간힘을 다해 자신의 고도를 회복
했다. 나늬가 그토록 힘겨워 하는 것은 당연했는데, 지금 그 등에는 일
반적인 탑승인원을 초과한 인원이 타고 있었다. 그들 중 두 명은 조금
전 아래로 떨어졌던 스바치와 보트린이었다. 카루는 그들의 모습에 환호
를 올리지도 못했다. 그들의 앞쪽에는 피에 흠뻑 젖은 비형이 타고 있었
다. 그리고 누구의 눈에도 비형의 모습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비형
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그 눈은 서서히 뒤집히고 있었다.
갈바마리의 인도를 받아 그들에게 걸어오던 시우쇠가 난폭하게 외쳤다.
"빌어먹을! 하텐그라쥬가 박살나게 생겼군."
티나한의 등에 업혀 있던 아기는 시우쇠의 목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하
지만 그녀는 시우쇠가 느끼고 있는 우려를 정확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비형이 자기 통제를 잃고 아킨스로우 협곡에서 벌어진 일을
하텐그라쥬에서 재현한다면, 시우쇠는 견딜 수 있겠지만 아기가 깃들고
있는 육이나 발자국 없는 여신이 깃들고 있는 신체는 그 불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가까스로 한 자리에 모이게 된 세 명의 화신은 다
시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 케이건이 사라진 마당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
면 그들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다. 시우쇠는 당장 결심했다. 그
의 손에서 불길이 일렁거렸다. 티나한이 야수적인 감각으로 위험을 깨닫
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몸을 부풀리며 외쳤다.
"뭐 하는 겁니까!"
"저대로 태워야 해! 너무 위험해! 저 녀석이 미쳐버리면 너희들은 물론
이거니와 신체들도 다 죽는다. 가까스로 한 자리에 모인 신들이 다시 흩
어지게 돼!"
다음 순간 시우쇠는 그곳에 행동파가 자신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
실을 알게 되었다.
티나한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조금이라도 생각을
했다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티나한을 인
도한 것은 레콘의 오만함뿐이었다. 레콘은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한 방
해를 용서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자기 자신이라도.
그래서 티나한은 나늬의 등 위까지 뛰어올랐다.
그룸 빌파와 토카리 빌파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티나한은 공중에
서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딱정벌레의 가공할 날개를 피하면서도 정확한
순간에 비형의 몸에 손을 뻗었다. 실로 묘기라 할 만한 광경이었다. 비
형의 몸은 티나한의 품에 안겼다. 시우쇠는 두 손으로 일으키고 있던 불
을 황급히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분노에 찬 포효를 내뿜었다. 제
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우쇠는 티나한의 등 뒤에 아기가 업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기를 불태울 수 없었다.
나늬는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끼고는 자신도 모르게 상승했다.
티나한은 다리를 구부려 간신히 나늬의 날개를 피하며 다시 51층의 바닥
에 내려섰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착지한 티나한은 오로지 시우쇠를
한 번 노려보기 위해 지체했다.
"누가 그러게 내버려둔대!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철의 대화다!"
시우쇠는 이 무례에 기가 막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티나한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갑자기 사람들을 헤치며 달려갔다. 그의 품 속
에서 비형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깨비의 입에서 말도 아니
고 신음도 아닌 기괴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티나한은 비형의 몸이 서서
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열기는 지나칠 정도였다. 티나한은 깃털
이 타는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레콘의 달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 앞에서 또다시 전대미문의 광경이 펼쳐졌다.
티나한은 냉동 장치 앞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비형을 바닥에 내려놓았
다. 이미 뜨거워진 비형의 몸이 물웅덩이에 닿자 수증기가 거세게 피어
올랐다. 그 수증기는 그대로 티나한의 얼굴을 뒤덮었지만, 티나한은 아
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두 손으로 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물로 비형의 몸에 묻은 피를 정신없이 닦아내었다.
사람들, 그리고 신들과 두억시니와 대호는 충격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찰박거리는 물소리 뿐이었다. 티
나한은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비형의 몸을 닦았다. 그런 동작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티나한은 비형의 눈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음을 깨
달았다. 아직까지 몸의 떨림이 멎지 않았지만, 비형은 웃고 있었다.
"비형."
"티나한. 우리는 케이건과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것 같죠?"
"제기랄, 괜찮아?"
"괜찮습니다. 그런데 케이건은 어디에 있지요?"
티나한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모호하게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
다. 그의 눈이 한쪽 방향에 고정되었다. 비형은 그 눈길을 따라갔고 다
른 사람들 또한 그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있지 않았던 사람이 서있었다.
거대한 양날 도끼를 든 레콘이 온몸을 부풀린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
고 있었다. 빌파 삼부자와 사모 페이는 그가 레콘 즈라더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즈라더는 격심한 혼란을 뚜렷이 드러내는 얼굴로 티나한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의 심정도 이해할 만하다. 물로 누군가의 몸을 씻어주는
레콘이라니, 도깨비 선지국 만든다는 이야기 만큼이나 황당한 장면이었
다. 즈라더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
다. 혐오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즈라더는 경의 어린 동작으로 목례했다.
"수탐자 티나한. 나는 즈라더요. 그리고 내 아내는 당신의 아내요."
그것은 레콘이 다른 레콘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경의였다. 그것은
물론 말 그대로 아내를 내어주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혹 티나한이 신부
탐색 도중 그의 아내를 뺏기 위해 싸움을 건다면 즈라더는 그의 창에 찔
려죽을지언정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티나한은 해야 할 대답을 알
고 있었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조금 늦게 말하고 말았다.
"즈라더. 내 철은 절대로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을 거요."
티나한은 무슨 일이 있어도 즈라더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훌륭하
게 해내었다. 즈라더와 티나한 모두 자신들이 평생 할 일이 없다고 생각
했던 말을 꺼낸 직후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조금 후에야 즈라더가
약간 갈라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엄숙하게 말했다.
"티나한. 당신의 평생 숙원이 이루어졌다는 말을 전하는 사람이 나인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하오. 고개를 들어 위를 보시오."
티나한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는 환희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도시 외곽에 도달했을 때 키베인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하텐그라쥬
수비군을 괴롭히고 있던 문제는 이제 대나무 군단의 병사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거의 포기한 채 주저앉아 있던 하텐그라쥬 수비군들 또한 다가
오는 회오리에 놀라 다시 달리고 있었기에 그 지점에서는 끔찍할 정도의
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든 자들이 제멋대로의 방향으로 달렸기 때문
에 서로 부딪히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들은 화를 내다가 다시 공포에
휩싸여 달렸지만,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의 머리를 들이
받는 꼴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희극의 광경이라 보기에는 너무 끔찍한
그 광경에 키베인은 비늘을 세웠다. 그 때 저편에서 누군가가 그를 향해
닐렀다.
[대수호자님 아니십니까?]
키베인은 데오늬를 내려놓고는 니름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수호장
군의 모습을 한 누군가가 그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 하지만 키베인이
다가가려 하자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더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어디가 어딘지 모르
게 되실 겁니다.]
키베인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수호장군은 안도하며 닐렀다.
[저는 수호장군 인실롭입니다. 하텐그라쥬 수비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만, 지금은 도저히 제 책무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맴돌이입니다. 밤의 숲에서 벌어지는 그런 일입니다. 그런 일이 왜 백
주대낮에 일어나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화신들 중 누군가가 우
리들을 이곳에 묶어놓기 위해 벌인 일 같습니다. 어쨌든 몇 발자국만 더
달려오시면 똑같은 처지가 되실 겁니다. 아, 대장군님!]
말에 탄 갈로텍이 키베인의 옆에 도달했다. 갈로텍은 달려오면서 인실
롭의 니름을 들은 듯 설명을 요구하지 않은 채 맴돌이 현상이 일어나는
지대를 살폈다. 하지만 그 또한 그런 괴이한 사태를 설명하거나 호전시
킬 방법 같은 것은 떠올릴 수 없었다. 갈로텍은 등 뒤에서 다가오는 회
오리를 돌아보고는 비늘을 부딪쳤다. 니름을 듣지 못하는 데오늬는 놀란
표정으로 나가들이 벌이고 있는 기괴한 소동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누군가가 격한 충격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케이건은 무릎을 꿇었다. 턱이 덜덜 떨렸고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케이건은 저 편에 있는 광선들 사이로 보이는 한 여자를 보며 미칠 것
같은 격분과 고통, 애정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케이건은 자신이 느끼
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여인은 평범한 인간 여인이었다. 아마도 북부군에
속한 병사인 듯했지만 무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투구 대신 머리에 쓰
고 있는 것은 황당하게도 화관이었다. 케이건은 그 화관을 이루고 있는
꽃을 알고 있었다. 원추리였다.
케이건은 신음을 흘렸다.
"여름…"
불과 몇십 미터 앞쪽의, 분명히 시야에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여인은
그를 보지 못하는 듯했다. 케이건은 그 사실에 사무치는 억울함을 느끼
며 그리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케이건은 그리미가 누구를 닮았
는지, 그리고 냉동 장치에서 떨어진 신체의 얼굴이 왜 낯익었는지를 알
게 되었다. 종족의 차이는 뚜렸했지만 그 얼굴에는 과거 그의 아내였던
여인의 얼굴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리미는 빙긋 웃었다.
"나늬들이 특별한 거야 전통이지만 이번 나늬는 정말 특이해."
"이번… 나늬?"
"그래. 저 나늬의 이름은 데오늬 달비야. 그리고 저 나늬는 미모가 아
니라 달리기로 모든 종족들을 따라오게 만들어. 정말 인상적인 특징이
야."
케이건은 그리미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그는 다른
질문을 꺼내었다.
"네가 어떻게 그녀를 닮은 거지?"
"나? 나는 보늬야. 보늬와 나늬가 닮은 거야 당연하지. 자매잖아. 그리
고 내가 보늬인 것도 이상할 것이 없지. 보늬는 모든 종족에게 다 태어
나니까. 우리 어머니도 보늬였어. 유료도로당의 당주는 이름도 보늬였다
지? 하지만 나늬는 인간에게서만 태어나지. 그리고 데오늬 달비는 이 시
간의 나늬야."
그리미는 마침내 케이건이 두려워하며 꺼내지 못했던 말을 꺼내었다.
케이건은 떨리는 눈으로 그리미를 바라보았다. 그리미는 빙긋 웃었다.
"그래.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은 나늬지."
케이건은 갑자기 알게 된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는 혼란과 두
려움 속에서 그리미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말은 계속 그에게 되돌
아왔다.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케이건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이었다. 그렇다. 케이건은 알고 있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태어나는 한 사람, 나늬였다.
그 때 데오늬가 갑자기 그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케이건은 전율하
는 두 팔을 앞으로 힘껏 내밀었다. 그리미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
다.
데오늬 달비가 갑자기 달리는 것을 본 키베인은 비늘이 서게 놀랐다.
그런데 조금 후 키베인은 더욱 놀랐다. 데오늬는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나가들 사이를 똑바로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모든 나가들을 혼란으
로 몰아가는 현상은 그녀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듯했다. 키
베인이 그 상황을 해석하려 했을 때 갈로텍은 이미 그 상황을 이용하기
로 결심했다.
[모두들 저 인간을 따라가라! 공격하지마! 따라가라! 그녀는 맴돌지 않
는다! 심장탑으로 가! 모두들 심장탑으로 가!]
나가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데오늬를 따라갔다.
심장탑에 도달해서 하늘치의 등 위에 올라갈 생각을 하고 있던 데오늬
는 갑자기 누군가에게 부딪치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누군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데오늬는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어떤 인간 남자가 그녀를 안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오늬는 그 눈
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눈은 그녀를 잘 안다고, 그리고 그 사실
을 다시 없는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한없이 슬프기도 했다. 데오늬는 그 슬픔을 걷어내어 주고 싶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동시에 데오늬는 그런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기이한
확신을 느꼈다.
그 남자가 갑자기 옆을 돌아보았다. 데오늬 또한 그렇게 했다. 그들의
곁으로 나가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나가 병사들은 그들을 한번씩 돌아보
았지만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다. 갈로텍이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
문이다. 그들은 그대로 케이건과 데오늬의 곁을 지나쳐 심장탑으로 달려
갔다.
케이건이 보고 있던 것은 데오늬가 보고 있던 것과 달랐다.
케이건은 광선의 세계가 희미해지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의 눈에는 광
선들과 하텐그라쥬의 모습이 서로 뒤섞여보였다. 그 가운데서 그리미 마
케로우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미 마케로우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
다.
"이제 떠나야겠군요. 마지막으로 말씀드린다면, 저는 그리미 마케로우
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예. 하지만 조금 전 보셨던 것은 그녀의 모습과 언동이 맞습니다. 그
녀는 대단한 천재지요. 저는 그녀를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녀는 저의
존재를 깨닫고는 제게 자신의 모습을 하고서 당신을 찾아가달라는 부탁
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도 미래에서 왔다는 거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잘 아는 사람입니
다."
"내가 잘 아는 사람?"
그리미 마케로우, 아니 그녀의 모습을 가지고 있던 자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광선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주위를 빠르게 둘러
보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뚜렷한 형태와 정상적인 질감으로 가
득찬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 안겨있는 여인의 느낌은 더 이상 느
껴지지 않았다. 케이건은 데오늬를 찾았다.
데오늬는 케이건의 품에서 빠져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데오늬는 다시 다가올 것처럼
발을 꿈틀했지만, 다음 순간 냉막한 예의로 그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가로저은 데오늬는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데오늬 달비입니다. 누구십니까?"
케이건은 입술을 깨물었다. 꽉 움켜쥔 그의 두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원추리 화관을 쓴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여름이었다.
케이건은 그녀를 안아야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케이건의 눈에 다가오는 회오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케이건은 처참한 여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입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가라."
"네?"
케이건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가라. 회오리가 오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키베인이 퍼뜩 정신을 차려 뒤를 돌아보았다.
회오리는 이미 도시의 상당 부분을 잠식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키베인은
잠시 케이건의 눈치를 살폈지만 케이건은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떨구
고 있었다. 키베인은 데오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데오늬는 한 번 휘청
하다가 키베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고개를 갸
웃거리며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키베인과 데오늬가 한없이 멀어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서있었다. 가없는 슬픔이 그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인간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나늬를 주었다.'
"그 쌍신검, 나가살육자의 검이지?"
케이건은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대로 한가운데 말에
탄 나가가 서있었다. 나가는 한량없는 증오로 비늘을 부딪치며 그를 노
려보고 있었다. 여느 때라면 그 분노에 공명하여 함께 분노했을 테지만,
케이건은 말없이 나가를 바라보았다. 나가가 말했다.
"나는 갈로텍이다. 세페린의 오라비지."
갈로텍은 그 사실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
지만 케이건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케이건의 반응을 기다리
던 갈로텍은 케이건이 세페린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쳐버릴 것
같은 분노가 그를 휘감았다. 갈로텍은 말에서 내려섰다. 그의 내면에서
주퀘도가 입을 제어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갈로텍은 입을 내어주지 않았
다. 갈로텍은 입을 내어줄 수 없었다. 그는 격분하여 외쳤다.
"머리를 재생시킨 나가를 기억하나!"
"기억해. 네가 그녀의 오라비라는 거냐?"
"그렇다! 내가 세페린을 부활시켰다. 그런데 네놈은 내 누이를 두 번
죽였어!"
갈로텍은 사이커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케이건을 똑바로 겨냥
했다.
"너를 찾아 이 전쟁을 일으켰다. 북부의 저 비늘 서는 땅을 방랑하며
오로지 너만을 찾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곳 하텐그라쥬에서 너를 만나
는군."
케이건은 천천히 세페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다시 나타난 그녀는 두
억시니만도 못한 존재였다. 케이건은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저 나가가
그녀를 재생시켰다고? 자신의 누이를 복수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괴물로
만들었다고?
케이건은 부드럽게 말했다.
"어쩐지 우리는 서로 닮은 것 같군."
갈로텍은 케이건의 말에 기가 막혔다. 그는 격분하여 닐렀다.
[그 검을 뽑아!]
너무도 분노한 갈로텍은 그만 말 대신 니름을 사용했다. 그 순간 주퀘
도는 입을 빼앗았다. 갈로텍의 입에서 절망에 찬 외침이 튀어나왔다.
"멍청아, 카린돌이 오고 있다!"
다음 순간 갈로텍은 온몸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늘치의 등 위에서, 티나한은 벅찬 감동을 가누지 못했고, 그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했다. 그는 자신이 하늘치의 등을 밟고 있다는 사실에 기
쁨을 억누르지 못했다. 자신이 최초의 등정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티나한
에게 괴로움이 되지 않았다. 레콘은 자신이 원하기에 숙원에 매달리며,
다른 사람보다 먼저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티나한의
기쁨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걱정과 번민이 지
나치게 많았기에 티나한은 자신의 기쁨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티나한은 차라리 즈라더를 돕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고는 아래
로 내려갔다.
심장탑 꼭대기에서 즈라더는 나가들에게 계단을 만드는 법을 설명해주
며 간혹 자신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가들을 직접 옮겼다. 티나한
과 다른 레콘들 몇 명이 가담하자 점점 자신의 발보다는 레콘에 의해 올
라가게 되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심장탑
꼭대기에서 계속 올라오는 나가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호왕
이 올라오는 자를 모두 받아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나가들은 경계심
을 감추지 못한 채 올라섰지만 북부군은 말없이 회오리를 한번 가리켜보
였다. 나가들은 비늘을 부딪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늬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하늘치가 그토록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스바치, 보트린을
구해내었던 나늬는 이제 하늘치의 등 위에서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비
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간단한 수화를 보내었다. '너 미쳤니?'
나늬의 대답은 간단했다. '빛이 탄로났다.' 비형은 그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허리에 기댄 채 힘없이 앉아 있었다. 갈바마리와 금
군들이 그녀의 주위를 삼엄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금군들은 카루
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용납했다. 사모는 슬픔이
가득한 표정으로 아무 곳도 바라보지 않은 채 앉아있었다. 카루는 어떻
게든 그녀에게 니름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
다. 그래서 카루는 스바치를 돌아보았다.
스바치는 카린돌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린돌의 몸은 시체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스바치는 가슴이 저며오는 느낌에 비늘을 세웠
다. 그곳에는 카린돌의 영이 없었다. 스바치는 자신이 그녀가 깨어나지
않는 것을 무서워하는지 깨어나는 것을 더 무서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스바치는 본능적인 경계심으로 다가오
는 자를 바라보았다.
시우쇠가 그곳에 서있었다. 그리고 아기를 안은 괄하이드 규리하가 함
께 서있었다. 아기가 말했다.
"스바치. 그녀를 죽여야 해."
"뭐라고요?"
스바치의 몸에서 비늘이 부딪쳤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들 모두가 우려
의 표정을 지었고 카루의 경우에는 스바치를 돕겠다는 듯이 걸어왔다.
아기는 차분하게 말했다.
"다가오는 회오리가 보이나? 나는 저 회오리를 멈추려 했고 시우쇠도
그렇게 했다는군. 하지만 둘은 막을 수 없어. 세 번째가 필요해. 그 몸
이 아직까지도 여신을 구속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 어쩔 도리
가 없어. 그 몸을 파괴해서 발자국 없는 여신이 다른 자에게 전령되도록
해야 해. 셋이 하나를 상대하지. 셋이 된다면 저 회오리를 멈출 수 있
어. 저대로 놔두면 심장탑은 파괴되고 말아. 그러면 하텐그라쥬 출신의
나가들도 다 죽게 돼."
스바치는 비늘을 부딪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우쇠는 스바
치의 눈에서 거부를 읽었다. 그는 괄하이드를 한 번 돌아보았다. 아기가
그를 볼 수도, 그 또한 아기를 볼 수 없었지만 시우쇠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시우쇠는 두 손을 모았다. 공을 감싸쥐듯 모인 두 손 가운데서
불길이 일렁거렸다. 스바치는 이를 악물며 사이커를 찾았지만 그 사이커
는 냉동 장치에 꽂혀 있었다. 스바치는 카린돌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시우쇠가 화염으로 그를 꾸짖으려 했을 때였다.
모든 이를 놀라게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륜!"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사모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에서 다시 상처에서 피가 스며나왔다. 사모는 몇 번 비틀거
렸고 두억시니들이 황급하게 그녀를 부축했다. 사모는 그들의 부축을 거
의 깨닫지 못한 채 정신없이 걸어갔다. 그녀는 하텐그라쥬를 둘러싸고
있는 회오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또다시 비통한 외침이 들려왔
다. 그녀는 니르면서 동시에 외치고 있었다.
"[륜!]"
괄하이드는 그제야 깨달은 사실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황급
히 하텐그라쥬를 둘러싼 숲의 한 지점을 보려 했다. 하지만 륜과 아스화
리탈이 있던 지점은 이미 회오리 저편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북부
군은 멍한 표정으로 회오리를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몸의 관절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곧게 서있는 자세
였지만 그 자세는 가장 참혹한 고문으로 그의 몸을 파괴했다. 몸 전체가
바깥을 향해 폭발하려는 것 같았다. 갈로텍은 자신의 니름이면서도 자신
의 니름이 아닌 니름을 들었다.
[갈로텍! 갈로텍!]
그것은 카린돌의 니름이었다. 갈로텍은 마침내 카린돌이 자신에게 이르
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거대하게 부푼 카린돌은 그의 몸을 그대로
파괴하고 있었다. 갈로텍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서서히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갈로텍
을 겨냥하고 있었다.
갈로텍은 어떻게든 카린돌을 설득해보려 애썼다. 지금 도와주지 않는다
면 케이건에게 먹혀버릴 것이라고. 하지만 갈로텍은 니를 수 없었다. 게
다가 갈로텍은 카린돌에게 그렇게 니르는 것이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
다. 카린돌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갈로텍은
세페린의 이름을 마음 속으로 부르며 죽음을 각오했다.
그 때 케이건이 바라기를 휘둘렀다.
갈로텍의 몸에 닿지도 않을 거리였다. 하지만 갈로텍은 무엇인가가 자
신의 몸을 휩쓸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 순간 갈로텍은 더 이상 몸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까지 고통의 앙금은 남아있었지
만 지속적으로 가해지던 통증은 사라졌다. 갈로텍은 후들거리는 무릎으
로 간신히 몸을 지탱한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복수를 원하나?"
갈로텍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조
용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갈로텍은 케이건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소드락을 하나 꺼내었다. 케이건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갈로
텍은 그것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조금 후 갈로텍은 겨우 대답할 수 있
게 되었다.
"네가 한 건가?"
"그래."
갈로텍은 재빨리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려 했다. 그리고 곧 그것이 불
가능함을 깨달았다. 그의 내부에는 그 자신뿐이었다. 갈로텍은 더 이상
군령자가 아니었다. 갈로텍은 마음 속으로 주퀘도의 이름을 불렀다. 대
답이 없었다. 갈로텍은 그라쉐를, 노기를, 그리고 화리트를 불렀다. 그
러나 그들 중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갈로텍은 케이건을 다시 바라보
았다.
"어떻게?"
"왜라고 질문해봐."
"왜?"
"내겐 물이 필요하거든."
"물이라니?"
"물이 가장 날카롭지. 이제, 그 물에 독을 풀어 온 세상을 중독시켜야
해."
갈로텍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한없이 왜소
해진 것처럼 느꼈다. 언제나 그의 내부에 있던 든든한 지지대가 깡그리
사라졌다. 그것은 견디기 힘든 상실감이었다. 갈로텍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소리 높이 울고 싶었다. 그는 원했다. 무엇보다도 간절히 원했다.
한 가지 이유를.
케이건이 그를 도와주었다. 그는 거의 밀어로 들릴 만큼 부드럽게 말했
다.
"복수를 원하나?"
갈로텍의 손아귀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갈로텍은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사이커를 들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힘있게 쥐어들었다. 굉음이 모든 곳을 지배했고 땅
은 흐느끼듯 경련했다.
회오리가 포효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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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6. '독수(毒水)' 편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7. 관련자료:없음 [57988]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8-26 02:12 조회:2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