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60화 (60/62)

눈물을 마시는 새.

16. 독수(毒水) - 4

사모는 자신의 목이 찢어지리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

다.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뜬 채  케이건을 바라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

야를 가리는 은루 때문에 그녀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많지 않았다. 그래

서 사모가 들었던 것은 끔찍한 소음뿐이었다.

사모는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비볐다.

시야가 회복되자 사모는 케이건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

다. 그것은 '알게 된' 것이지 본  것이 아니었다. 사모는 케이건과 싸우

고 있는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자는 아무

도 없을 것이다. 시우쇠나 아기, 그리고 맞서 싸우고 있는 케이건조차도

그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기는 티나한의 등 뒤에서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계단에서 뛰쳐나가는 나가를 본 순간 아기는  그와 사모를 구하기 위해

그들을 급속하게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사모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방향으로든 한 걸음만 움직였다면 그녀는 안전하게 아기에게로 끌려왔을

테지만 사모는 바라기의 공격에  자신을 내맡기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은 주어졌으되 방향이 주어지지 않은 셈이다.  그래서 아기가 행한 일

의 영향을 받은 것은 계단에서 뛰쳐나간 나가, 즉 카루뿐이었다. 그런데

카루는 아기의 의도대로 계단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카루는 아기의 힘을

받으며 방향은 자신이 결정했다. 그리고 카루는  번갯불 같은 속도로 움

직이며 케이건을 공격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계단에서 뛰쳐나갔을 때 그

가 삼킨 소드락 덕분이었다.

카루는 '볼' 수 있었다.

지독하게 왜곡되어 백일몽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카루는 케이건과 사

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소드락의 급가속 상태에서 항진된 신체 능력

이 그런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기적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카루의

공격은 번번히 엉뚱한 곳으로 빗나갔다.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주위에 호전적인 사이커가 춤추고 있다는 사실은

케이건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케이건은  노호하며 바라기를 휘둘렀다.

카루가 아기의 의도대로 움직였다면 케이건 또한 카루를 볼 수 없었겠지

만, 카루는 아기의 의도를  무시하며 움직이고 있었고  그래서 케이건은

흐릿한 환상 같은 모습의 카루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공격 또한

엉뚱한 허공을 갈랐다. 카루의 속도는  지나치게 빨랐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빗나가는 공격을 교환했다.

카루가 자신의 의도를 무시하며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아기는

카루를 움직이는 짓을 그만두려 했다. 카루에게  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

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기는 그럴 수  없었다. 케이건과 카루는 이미 싸

움에 빠져들었고 만약 아기가 카루에게  가하고 있는 빠르기를 제거한다

면 카루는 당장 목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아기는 어쩔 수 없이 카루에

게 계속 힘을 가했다. 그 결과로 벼락의 경주 같은 싸움이 펼쳐졌다. 스

바치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저를 냉동 장치로 보내주십시오!"

그 소리에 놀란 케이건이 계단을 돌아보았다. 아기는 퍼뜩 스바치를 돌

아보았다. 스바치 또한 소드락을 삼키려 하고 있었다. 아기는 외쳤다.

"안돼! 못 본다!"

스바치는 입에 넣었던 소드락을 재빨리  뱉어내었다. 그는 놀란 표정으

로 아기를 바라보았다가, 곧 헛손질을 하고 있는 카루를 보았다. 스바치

는 이해했다는 듯이 빠르게 고개를 움직였다. 아기는 조금 전 카루가 가

르쳐준 방향으로 주의깊게 스바치를 움직였다.

스바치는 눈깜짝할 사이에 냉동 장치  앞으로 이동했다. 시야가 순식간

에 바뀌는 바람에 스바치는 잠깐 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

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  냉동 장치가 들어온  순간 스바치는 이해했다.

그는 황급히 냉동 장치의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 때 그의 등에 업혀있던

보트린이 닐렀다.

[스바치! 조심하십시오!]

스바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순간 엄청난  힘을 지닌 손아귀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머리 속이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케이건이 타오르는 눈으로  스바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바라기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무수한  나가의 생을 종결시킨  그 공포의

검이 곧 스바치의 두개골을 향해 내려쳐질 판국이었다.

"죽어라!"

"그만둬!"

허공에서 카루의 비명이 들려왔다. 동시에 케이건의 왼발 조금 옆의 바

닥이 폭발하듯이 부서졌다. 허공에서 다시 카루의 분개한 비명이 들려왔

다. 케이건은 으르릉거리며 스바치의 몸을 확  밀어젖히고 그 자리를 피

했다. 곧 그가 서있던  바닥이 보이지도 않는  사이커에 의해 찢어졌다.

스바치는 짧은 순간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꼈다. 그의 발 아래에 더 이상

바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스바치는 심장탑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보트린을 업고 있었기에 스바치의 무게 중심은 뒤쪽에 있었다. 몸이 완

전히 뒤집어지기  직전, 스바치는  사이커를 들어올렸다.  '성급하면 안

돼.' 아래로 추락하는 그  짧은 순간 스바치는  나가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극도의 냉정  속에서 세심하게  사이커를 겨냥했다.  '성급하면 안

돼.' 시야에서 냉동 장치가 사라지기 직전,  스바치는 자신의 발을 겨냥

하듯이 그것을 집어던졌다. 다음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넓은 하

늘과 하텐그라쥬의 뒤집힌 모습이었다. 스바치는  사이커가 제발 제대로

날아갔기를 바라며 그 뒤집힌  세상을 바라보았다. 무서운  속도로 그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제발, 카린돌을 구해주세요!]

그 순간 스바치는 자신의 발쪽에서 놀라운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 뒤집

힌 딱정벌레를 보았다. 스바치는 눈을 부릅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

지만 스바치는 하텐그라쥬의 하늘에서 도깨비가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

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다행히 보트린이 그를 도와주었다. [수탐자

입니다!] 스바치는 허우적거리며 손을 내뻗었다. 희망에 찬 그의 부릅뜬

눈에 도깨비의 얼굴이 크게 들어왔다. 다음  순간 스바치는 극한 좌절감

을 느꼈다. 마지막 구원이라고  믿었다가 느낀 좌절이었기에  그 좌절은

더욱 컸다.

도깨비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  공포의 의미는 자명했다. 도

깨비는 스바치의 등에 업힌 보트린의 피투성이 몸을 보고 있었다.

카루는 스바치가 떨어지는 것, 그리고 그의 손에서 뭔가가 날아와 냉동

장치에 부딪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시야는 여전히  왜곡되어 있었고

그래서 카루는 스바치가 냉동  장치를 파괴했는지 알지  못했다. 카루는

분개하며 다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 때  카루는 케이건이 자신의 목

소리를 들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왜  이야기를 못한다고 생각했지?' 카

루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하며 사모에게 닐렀다.

[페이! 도망가십시오!]

눈물을 닦아내던 사모는 케이건과  싸우는 상대가 자신을  향해 니르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카루? 너인가?]

[그렇습니다! 도망치십시오!]

사모는 다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안돼! 나는 그에게 사과해야 한다. 나는…]

"케이건 드라카."

케이건은 사모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바라보던 충성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적을 발견한 아라짓  전사의 격노와 사냥감을 향

한 키탈저 사냥꾼의 집중력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사모를 향해

덤비려 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 헛손질이긴 하지만  - 카루의 공격이

그의 궤도를 바꿔놓았다. 케이건은 피를 토하듯 외쳤다.

"죽일 테다!"

"케이건 드라카. 내가 너의 눈물을 마시도록 허락해줘."

케이건은 갑자기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은루에 젖은 볼에 웃음을 띄워올리며 말했다.

"부탁이야. 나는 나가 한 명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동시에 나는

너의 왕이잖아? 내가 너의 눈물을 다 마시고 죽으면, 나가를 용서해주지

않겠어?"

어디로든 달려가려 했지만 그 때마다 아래로 추락하는 방향으로 움직이

게 되는 자신의 처지에 격분하고 있던 시우쇠는 사모의 말에 놀랐다. 시

우쇠는 사모를 돌아보며 화염의 신음을 흘렸다.

"네가 신의 눈물을 마시겠다고?"

티나한의 등뒤에서 아기 또한 부리를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사모를 바

라보았다. 사모는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은루를 훔치며 웃었다.

"륜은 말했어.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을 너에게 보여주라

고."

"내가 준 것?"

케이건이 멈춰섰다. 카루는 그를 공격하려다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주의깊게 케이건의 주위를 달리며 사태를 관찰했다. 그리고 그제야

카루는 자신의 몸을 점령한  고통을 인지했다. 그의  옷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몸 곳곳의 비늘이 시커멓게 타버렸다.  아기의 힘에 의해 움직이

면서도 자기의 의도대로 방향을 바꿔버린 카루는 급격한 마찰에 의해 험

한 꼴을 당한 상태였다. 카루는 고통을 억누르려 애쓰며 사모의 말에 귀

를 기울였다.

"그래. 네가 준 것. 다른 신들도 그들의  선민 종족에게 무엇인가를 준

다고 하던데."

케이건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자신을 죽이는 신은 도깨비들에게 불을 주었다. 도깨비들은 그들의 신

만큼이나 불을 자유로이 쓸 수 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은 레콘에게

무기를 준다. 성년이 된 레콘은 최후의  대장간에서 자신의 무기를 받는

다. 발자국 없는 여신은 수호자들의 신명, 즉 이름을 주었다."

"그런 것이군. 알았어. 그렇다면 너, 아니,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당

신 또한 당신의 인간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었을 겁니다."

"나의 인간 같은 것은 없다."

사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나는 왕으로서 내 전사 케이건 드라카에게 말해주겠다. 케이

건 드라카. 어디에도 없는 신이 그의 인간에게 준 것은 왕이다."

"왕이라고?"

케이건의 고개가 갸웃했다. 사모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렇다. 너는 인간들의 눈물을 마시게끔  왕을 선물했다. 그리고 최후

의 아라짓 전사이자 아라짓의 마지막 왕족인  네가 지명한 나는 너의 적

법한 왕이다. 나는 너의 눈물을 마시겠다.  그리고 나가에 대한 너의 증

오와 함께 죽겠다. 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아직도 나가를 사랑

하고 싶었던 거다."

"모욕적일 정도의 헛소리군."

"그렇지 않아. 오레놀 대덕은 신들이  변화를 재생산할 거라고 말했지.

지금까지는 변화가 없었어. 우리는 아직도 대확장  전쟁 당시의 말을 사

용하고, 대확장 전쟁 당시의 생활방식 그대로  살고 있어. 아무 것도 바

뀌지 않았어. 그렇다면 너 또한 그  옛날의 너 그대로일 거야. 다르다는

것을 기쁨과 감사의 대상으로 여길 줄 아는 너. 나가를 사랑하고 싶었던

너. 네가 살육한 그 많은 나가들에도 네 속 가장 깊은 곳의 너는 그대로

일 거야. 너는 요스비를 사랑했다."

케이건이 숨막힌 사람처럼 말했다.

"요스비."

"그래. 너는 요스비를 사랑했어. 그걸 부정하지는 않을 거야."

케이건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눈에서 의심과 불안이 흘러나

왔다. 사모는 말했다.

"그래서 너는 나를 준비했어."

"준비했다고!" 거의 비명이었다.

"그래. 너는 나를 준비했어. 너는 위기에 처한  북부를 위해 나를 왕으

로 만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시 나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준비

한 거야. 왜 나가일까?  북부의 왕으로 나가라니?  나가일 수밖에 없지.

나가가 아닌 다른 자는 불가능해. 너는 나를 희생하여 네 눈물을 지우고

다시 나가들을 사랑해야 하니까."

"내가… 내 눈물을 마실 왕을… 준비했다는 것이군."

"바뀐 것은 없어. 너는 나가를 사랑해."

사모는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조건 없는 수용의 자세였다. 거

기에는 자신의 죽음조차 수용하는 당당함이 있었다.

"나를 준비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겠어. 이제 내가 네 눈물을 마시고 죽

겠어."

티나한은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륜을  위해 죽으려

했던 사모는 이제 모든 나가들을 위해 죽으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정

코 왕이었다.

카루에게는 사모의 말이 기이하게 들렸다.  너무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

에 소리가 그를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알 수 있었고,

카루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케이건을 겨냥했

다. 하지만 그 순간 사모의 말이 그를 주춤하게 했다.

"그 대신, 나가들을 살려줘. 그들을 사랑해줘."

카루는 충격 속에서 비늘을 세웠다.  타버린 비늘들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카루는 사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든 나가가 살아나

게 된다고? 카루는 격심한  번민을 느꼈다. 계속되는  사모의 말은 그의

번민을 더욱 부채질했다.

"나가라는 나무에 삭풍을 불게 하지마. 이  영원한 여름의 땅 키보렌에

겨울의 폭풍을 가져오지마. 내가  단풍이 되겠어. 내가  낙엽이 되겠어.

케이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지?"

티나한은 눈앞이 부옇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거칠게 볏을 흔들었다. 그

렇게 내버려둬도 되는 것인가? 이것은 모든  나가들을 살려내기 위해 지

불되어야 하는 대가인가? 티나한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사모의 죽음은 평생을 따라다닐 아

픔이 될 거라는 무서운 예감. 티나한은 그것이 싫었다.

지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카루 또한 같은 생각에 빠

져들었다. 나가들의 생존이라는 거대한 요구 앞에서도 카루는 그것을 허

용할 수 없는 이유를 찾기 위해 번민했다.  그는 그런 이유를 정말 찾아

내고 싶었다. 카루는 다시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 때 카루는 사모의 근

처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왜곡된 시각을 저주하며 카루

는 그것을 똑바로 보기 위해 애썼다.

티나한이 폭풍처럼 외쳤다.

"안-돼-!"

사모는 놀라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은  철창을 움켜쥔 채 계단

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격통이 사모의 가슴을 관통했다. 사모

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려  애쓰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가슴

가운데서 피에 젖은 사이커의 칼날이 음습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사모

는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둔  채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 한 나가가

서있었다. 은빛에 물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모는 그 이름을 닐렀

다.

[비아스 마케로우.]

티나한이 계명성을 내질렀다.

격노에 찬 레콘이 내지를  수 있는 가장 거대한  계명성이 심장탑 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외침일 뿐이었지만 동시에 무궁한

의미를 담고 있기도 했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던 카루는 하마터면 날려

갈 뻔했다. 케이건과 사모, 그리고 비아스 마케로우도 몇 발자국씩 물러

났다. 거대한 계명성을 내뿜은  티나한은 그대로 깃털을  빳빳하게 세운

채 비아스를 노려보았다. 비아스는 그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거의 태

고까지 소급될 수 있는 공포를 느꼈다. 그  눈은 한 가지 의미만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남은 생명은 티나한이 철창이 닿는 거리까지 오는 데 걸

리는 시간과 똑같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매우 짧았다.

비아스는 주저없이 왼팔로  사모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에서 사이커를 뽑아들었다. 사모의 몸이 크게 꿈틀거렸다. 비아스는

뽑아든 사이커를 옆으로 돌렸다. 사이커의 칼날  끝이 사모의 목에 겨누

어졌다. 티나한이 처절하게 외쳤다.

"그-만-둬-!"

"다가오지마!"

비아스는 고함을 지르면서 동시에 사모의  목을 찔렀다. 사모는 온몸의

비늘을 부딪치며 입을 벌렸다. 비아스는 사모의  목을 거의 관통할 정도

로 사이커를 찔러넣은 채 외쳤다.

"누구라도 움직이면 목을 끊어버리겠다!"

티나한은 주춤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온몸의 깃털이 부풀어있

었지만 티나한은 차마 달려들지 못했다. 비아스는 자신이 상황을 통제한

다는 느낌에 희열을 느꼈다. 그 때  비아스는 누군가가 그녀를 바라본다

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돌린 비아스는 희열이 싹  가시는 것을 느꼈

다. 그곳에서는 온몸의 불을  활활 일으키며 시우쇠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도 마주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비아스는 비늘을 세우며 고

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녀가 느껴야 하는 공포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셈이었다.

"쿠루루루룽!"

티나한은 고개를 돌렸다. 계단을 뛰어올라온 마루나래가 산노인의 격분

을 담은 포효를 뿜어내고 있었다. 땅을 딛고 사는 생물이라면 하나 예외

없이 장송곡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죽음의 노래였다. 심지어 나가에

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산노인이 뿜어내는  포효에는 계명성에나 견줄

만한 진동이 있었고 그것은 나가의 몸을  휩쓴다. 비아스는 의도와 상관

없이 몸의 비늘들이 서로 부딪치는 것을 느꼈다. 그 뒤를 이어 갈바마리

가, 그리고 두억시니들이 뛰어올랐다. 이  까마득한 높이까지 단숨에 달

려오느라 지쳐있었지만 그들은 눈앞의 모습에 격분을 참지 못했다. 그들

앞쪽에서 갈바마리는 양팔을 긴장시켜 뿔을  발사하듯 뽑아내었다. 그것

은 그대로 바닥을 뚫어버렸다. 갈바마리는 창  같은 두 개의 뿔, 그리고

머리 사이의 손과 다리 사이의 손 모두를 비아스에게로 향하며 외쳤다.

"사모 페이!"

"놔줘!"

그러나 비아스는 더 이상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화염의  화신과 화가

볏끝까지 치민 레콘, 그리고 대호와 스물  둘의 두억시니. 그 어떤 담대

한 자라도, 심지어 영웅왕이라 하더라도 두려움  없이는 마주볼 수 없는

적수들이 그녀에 대한 증오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지만 비아스는 어떤 공

포도 느끼지 않았다. 비아스 마케로우의 정신은  그런 경우 그녀 고유의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비아스는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비아스는 사모의 볼에 얼굴을 파묻듯이 한 채 닐렀다.

[친구가 많군, 그래?]

[비아스… 비아스. 제발… 왜 이러는 거야?]

[여기 있을 때도 온갖 남자들을, 데리고 자지도 않을 남자들을 죄 끌어

들이더니, 제 버릇은 어쩔 수 없군. 별의별 괴물들을 다 끌어모았군.]

카루는 그 니름을 들으며 니르기 힘든  혐오와 적개심이 몸을 불태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고통 또한 느꼈다. 카루는 자신이 언제라도 비아스

의 목을 찢어버릴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아스와 사모는 바짝

붙어있었고 카루의 왜곡된 시야로는  그 둘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

다. 카루는 자신의 서툰 손놀림이 비아스가 아닌 사모를 찌르게 될 것을

두려워 했다.

사모가 닐렀다.

[비아스. 이러지마. 이건…  이건 나가  전체의 쇼자인-테-쉬크톨이야.

나는 하나의 가문이 아닌  나가 전체의 핏값을 씻어야  해. 나는 그에게

죽어야 해.]

[쇼자인-테-쉬크톨? 미친 년. 그건 내가 꾸민 일이야!]

사모는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의 니름으로 듣는 것은

그녀를 한없는 슬픔으로 몰아갔다. 비아스는 난폭하게 닐렀다.

[화리트는 내가 죽였어. 그리고 덤으로  네년도 하텐그라쥬에서 쫓아버

렸지. 모든 나가들이 내게  감사했어! 나 비아스  마케로우에게! 알기나

해? 그건 내가 한 일이라고!]

[비아스.]

[이제 그년들이 나를 죽이려고 해. 감히 나를…  내게 왜? 나는 그들을

위해 너를 쫓아보냈어. 얼간이 수호자들의 압제에서 그들을 해방했고 심

장파괴의 비밀도 가르쳐줬어. 나는 그들을 위해 뭐든 다했어. 그런데 어

떻게 나를? 배덕한 년들. 내가 어떻게  해줬는데. 은혜도 모르는 비에나

가들!]

사모는 아무 니름도 나오지 않았다. 비아스 또한  더 이상 그녀에게 니

를 생각이 없었다. 비아스는 고개를 들어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나가를 다 죽일 건가?"

케이건은 대답 없이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이 년이 걸림돌이지? 내가 죽여주겠어. 나가를 다 죽여!"

티나한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비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이건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를 다 죽이라고 했나. 그 이유는?"

"당신 또한 당해봤잖아! 다  들었어. 나가들이 어떤 것들인지  잘 알고

있겠지! 이젠 나도 알아.  은혜도 모르는 것들. 나에게  보냈던 그 많은

선물과 환호를 쉽게도 망각한 채 나를  힐난하고 희생하려 했어. 얼간이

를 가주로 내세워 나를 잡아먹으려고 했어.  용서할 수 없어! 싸구려 종

족들, 죽여버려!"

케이건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게 더 이상 사랑을 보내지 않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죽이겠다

는 것이군."

비아스는 목의 비늘을 부딪쳤다.

"그래! 불만 있나!"

케이건은 대답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아스는 기세 있게 외쳤다.

"이제 할 말은 다 했어. 이 년을 죽일 테니, 신인지 뭔지인지 하는 너.

나가를 멸절시켜!"

티나한은 비명을 내질렀고 카루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사이커를 잡

아당겼다. 그 때 비아스가 곤혹스러운 니름을 내뿜었다.

[이게 뭐야?]

카루는 멈칫했다. 비아스는 팔을 계속 움직이려 애썼다. 하지만 사모의

목에 꽂힌 사이커는 마치 돌에 꽂힌 것 마냥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허

공에서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

"됐다! 붙잡았다. 그룸! 토카리!"

비아스는 어깨가 찢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비아스는 사이커를 놓으며 뒤로 휘청 물러났다. 고개를 한껏 좌우로 돌

린 비아스는 두 자루의 작살검이 자신의  좌우 어깨를 꿰뚫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보이지  않는 무엇이 그녀의  허리에 부딪쳤다. 비아스는

뒤로 벌렁 쓰러졌고 그  순간 작살검이 그녀의  어깨를 완전히 관통하며

살을 찢어발겼다. 비아스는 니름과  육성 양쪽으로 끔찍한  비명을 질렀

다. 비아스의 온몸에서 비늘이 부딪치는 모습은  그녀를 마치 수천만 마

리의 곤충떼로 이루어진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비아스는 공포에 휩

싸인 눈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기이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두 팔을 뒤로  축 늘어뜨린 채 상당

히 기울어 있는 그녀의 모습은 당장 쓰러지는 것이 마땅해 보였다. 하지

만 사모는 쓰러지지 않았다.  비아스는 상황을 깨달았다.  그 때 사모의

주위에서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코네도 빌파가 사모의 몸을 안은 채 서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4번 의

수인 집게가 붙어있었고 그 집게는  비아스의 사이커를 강력하게 움켜쥐

고 있었다. 허공에서 또다른 두 사내가 나타났을 때 티나한은 비로소 환

희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그룸 빌파와  토카리 빌파가 그의 아버지에게

서 사모를 받아 부축했다.

"발케네 도둑놈들!"

티나한의 외침에 코네도는 씩 웃었다. 그는 사이커를 움켜쥔 자신의 오

른손을 통째로 분리해버리고는 그곳에 다른 의수를 끼워넣으며 말했다.

"도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그래, 잘했다!"

아버지가 의수를 갈아끼우는 동안 그룸과  토카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

로 사모의 몸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들은  사이커를 뽑아도 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코네도는 잠깐 고민하다가 어

차피 뽑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룸 빌파는 그

것을 붙잡고 단숨에 뽑았다. 사모의  몸이 급격하게 경련했다. 토카리는

황급히 옷을 찢어 사모의 상처를 감쌌다.

땅에 쓰러진 채 무서운 저주를 토해내던  비아스는 안간힘을 다해 일어

나려 했다. 하지만 두 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비아스는 일어날

수 없었다. 비아스는 다시 저주를 토해내었다. 사모의 상처를 싸매던 토

카리가 짜증이 섞인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토카리의 얼굴이

기이하게 바뀌었다. 비아스는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

다. 그 때 무엇인가가 그녀의 어깨에서 튀어나온 작살검을 붙잡았다.

비아스는 엄청난 통증에 미친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은 티나한

마저 깃털을 눕히게 만들었다. 작살검을 붙잡은  것은 그대로 그것을 끌

어당겼고 비아스는 산 채로 불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비아스는 황

급히 고개를 돌렸다.

[세리스마!]

엉망으로 부서진 세리스마가 땅에 쓰러진 채 작살검을 잡아당기고 있었

다. 그의 두 다리는 그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팔꿈치까지밖에 남지 않은 한쪽 팔 뿐이었다. 세리스마는

그 반토막 팔로 땅을 할퀴며 기어갔다.  그리고 입으로는 비아스의 몸을

관통한 작살검을 물고 있었다. 그 끔찍한  모습에 티나한과 빌파 삼부자

는 공포를 느꼈다. 뱀이 상처 입은 동물을 질질 끌고가는 듯한 모습이었

다. 비아스는 처절하게 닐렀다.

[세리스마! 무슨 짓이야, 이거 놔!]

세리스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다시  끌어당겼다. 반밖에 남지 않은

팔로는 그 자신의 몸조차 끌어당기기  힘들 터이지만 세리스마는 기적적

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비아스가 작살

검이 당겨지는대로 다리를 구르며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기도 했다. 세

리스마는 바닥에 그 자신과 비아스의  핏자국을 길게 남기며 가장자리를

향해 기어갔다.

[세리스마! 이 짓 멈춰!]

[비아스. 나와 함께 가자.]

[미친 놈! 이거 놔!]

세리스마는 비아스의 니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닐렀다.

[카루. 그곳에 있다면, 너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카루는 그 니름을 전해들었다.

[세리스마.]

[그리고, 카루. 부탁이 있다. 내 니름을 말로  전해다오. 나는 말할 수

없다.]

카루는 그 니름을 따랐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

리에 의해 세리스마의 의지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자신을  죽이는 신이여. 그리고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저는 세리스마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신 감금을 계획한 자

입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예. 이

제 저는 제신(諸神)께서 저희들의 계획을 이용하신 것을 압니다. 발자국

없는 여신께서는 제 계획을  이용하여 다른 신들을  이곳에 모이게 하신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제 계획이 여신께 도움이 되었다는 이유로 용서

를 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

다."

티나한이나 빌파 삼부자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시우쇠는 당연하다는 표

정을 지었다. 카루를 통해서 세리스마는 계속 말했다.

"토끼가 표범에게 불살(不殺)의 도덕을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

니까? 토끼도 그 말에는 웃을 겁니다. 저는  태어난 대로, 생긴 대로 살

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죄입니다. 자기는 약하

니까 표범에게 먹혀야 된다고  믿는 토끼입니다. 토끼는  자신을 부정의

대상이 아닌 긍정의 대상으로 바꿉니다. 표범보다 약한 부정적이고 수동

적인 자신을 선택하는 대신 표범보다 작아서 잽싸게 토끼굴로 뛰어들 수

있는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자신을 선택합니다.  도망치는 토끼는 아름답

기까지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어떤 제한도 두지 않습니

다.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을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자기 자

신이라는, 세상에서 완전히 긍정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상에게 제한과

족쇄를 두는 것이 죄입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제신들과 제 계획 때문에 죽어간 북부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용서를 구

하지 않습니다."

티나한은 더 참지 못하고 외쳤다.

"빌어먹을, 네 말은 헛소리다! 그렇다면 능력만 되면 누구든 다른 사람

들을 닥치는대로 죽여도 된다는 거냐!"

"그것이 제 죄입니다."

"뭐라고?"

"그것이 제 죄입니다. 저 자신의 마지막 한 부분에 끝까지 제한을 두었

다는 것이 제 죄입니다. 저는 저의 마지막 한 부분을 긍정하지 못했습니

다. 저는 그것을 죄로 생각합니다."

티나한은 그것이 뭐냐고 묻지 않았다. 어쩐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

기 때문이다. 카루가 다시 말했다.

"다름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 저는 그것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제한에 빠져있는 비아스의 모습을 견딜  수 없습니다. 자기와 다

른 세상 따위 부정해버리고 없애버리려는 그  모습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여인과 함께 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케이건 드라카. 부탁하겠

습니다."

케이건은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세리스마를 바라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

이지 않았다. 카루는 최대한  세리스마의 니름을 정확하게  말로 바꾸려

애쓰며 말했다.

"제가 듣고 이해한 것이 맞다면, 당신은 한  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

다. 다르다는 것을 긍정과  기쁨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렇게 하십시오. 저처럼 되지 마십시오."

세리스마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니름으로 저주와 폭언,

애원을 토하던 비아스가 그것을 육성으로 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

아스는 두 팔이 파괴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힘이 다 부서진 세리스마의

힘보다 앞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깨를 쥐어뜯는 통증은 계

속해서 그녀를 배신했고  세리스마에게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비아스는

거꾸로 그에게 협력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믿을 수 없어했다. 그녀는

발로 땅을 밀며 계속 가장자리로 향하고 있었다.

"세리스마, 그만둬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리고 세리스마가 끄트머리를 넘어갔다.

비아스의 두 다리가 허공을 긁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세리스마와 비아스

는 심장탑 아래로 사라졌다. 티나한은 저  아래로 떨어지며 들려오는 비

아스의 비명을 들었다. 그 비명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끔찍하면서도

묘하게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을 때 티나한은 고개를 돌렸다.

사모 주위에는 많은 자들이 몰려섰다.  그들은 사모와 케이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기를 업은 티나한, 마루나래, 그리고  두억시니들과 빌파 삼부자. 처

음부터 모든 상황을 본 자들뿐만 아니라 뒤늦게 합류한 자들도 기묘하게

긴장된 분위기를 느끼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다만 토카리는 정신없이

사모의 상처를 싸맸다. 자신의 아버지와 형들과 마찬가지로 토카리 역시

나가를 치료하는 것보다는 죽이는 쪽의 기술에 더 익숙해 있었고 그래서

상처 입은 나가를 치료한다는 일에 대해  낯설음을 느꼈다. 다행히도 카

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신님! 저를 멈춰주십시오!"

아기는 카루에게 가하던 힘을 없앴다.  빌파 삼부자처럼 카루가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 모습은 처참했다. 옷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몸

전체가 상당 부분 검게 타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카루는 고통을 억누르

며 토카리에게 다가섰다. 토카리는 잠깐 경계했지만 티나한이 말했다.

"괜찮아. 우리 편이다."

토카리는 알았다는 눈짓을 한 다음 카루에게 호의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카루는 타버린 손가락을 힘들게  놀리려다가 포기하고는 토카리

에게 말했다.

"제 허리에 있는 주머니에서 소드락을  꺼내주십시오. 주머니도 타버렸

지만 안에는 괜찮은 것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페이에게…"

토카리는 잿더미가 되다시피한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타버리지 않은 소드락을 꺼냈다. 토카리는 한 알을 사모의 입

에 밀어넣은 다음 또  한 알을 들어 카루를  바라보았다. 카루는 고개를

끄덕였고 토카리는 그것을 카루의 입에 넣어주었다.

사모가 진저리를 치며 눈을 떴다. 마치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케이

건이 말했다.

"사모 페이."

사모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토카리와  그룸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앉

힌 다음 부축했다. 사모는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

"그게 아니다."

"뭐?"

케이건은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실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인간들과 레

콘, 나가, 그리고 대호와  두억시니들. 그들이 앉아있는  사모의 주위를

둘러싼 채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너는 진실로 왕이다. 너는 인간의 왕이고  레콘의 왕이고 도깨비의 왕

이다. 그리고 대호의 왕이며 두억시니들의 왕이다. 그리고 조금 전 너는

나가의 왕이 되려 했다."

사모는 목을 쓰다듬으며 희미하게 말했다.

"아직도 그럴 의향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건 아니다."

사모는 상처의 고통에  비늘을 세우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설명하지 않았나? 수호자의 신명은  다른 종족에게 쓸모가 없다.

레콘의 무기는 다른 종족이  쓸 수도 없거니와  자신의 무기를 건드리게

하는 레콘도 없지. 도깨비의 불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왕은 모든 종

족의 왕이다. 대호왕 사모 페이."

"모든 종족의?"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은 왕이 아니다."

사모는 처연한 얼굴로 케이건을 바라보며 반복했다.

"왕이…"

"아니다. 사모."

"그렇다면 뭐지?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이 무엇이지?"

케이건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들에게서 좀 떨어진 하늘치의 등 위에서  똑같은 질문이 제기되고 있

었다. 오레놀은 라수의 진전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라수는 이미 자신

의 석벽을 사용하는 방법을 상당 부분 깨달았으며 능숙한 사용을 보여주

었다. 라수가 보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레놀은 라수가

툭툭 꺼내어놓는 말들에 의해 라수가 얼마나 빠르게 추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원래부터 라수는 강력한 의심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의

논리를 의심한다는 힘든 고비를  넘긴 라수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이

회의와 의심을 풀어내었다. 라수는 석벽의 변화가 자신의 추리를 따라잡

기 힘들어한다는 인상마저 느꼈다.  하지만 라수는 사유를  늦추지 않았

다. 오레놀은 아예 자신이  다루고 있던 다섯 개의  기둥을 내버려둔 채

경이에 찬 표정으로 라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라수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오레놀은 놀랐지만 다가가도 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초조함을 억누르며

기다렸다. 라수는 멍한 표정으로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레놀은 그

곳에 라수의 석벽이 있을 거라 짐작했다. 라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세상에…."

"상장군님?"

라수는 오레놀을 흘깃 돌아보았다. 오레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셨습니까?"

라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오레놀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석벽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다시 말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그의 입을 주시하고 있던 오레놀은 폭력적인 충동마저 느꼈다.

케이건은 다시 고개를 들어 사모를 바라보았다.

"모른다."

"모른다고!"

"모른다. 그런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모는 실망감에 찬 표정으로 티나한의 등  뒤에 있는 아기를 바라보았

다. 하지만 아기는 부리를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모는 다시

저편에 고립되어 있는 시우쇠를 바라보았지만  역시 신통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케이건 또한 사모의 시선을 따라  시우쇠를 보았고 눈길이 부딪

치자 시우쇠는 적의를 감추지도 않은 채 난폭하게 으르릉거렸다. 케이건

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런 것은 없다. 그리고 내가 알 바도 아니고."

"케이건, 제발!"

"인간에게 준 것은 모른다. 하지만 나가에게 줄 것은 있는 것 같군."

사모는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케이건은  방심한 듯한 얼굴로 시우쇠를

돌아보았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일까."

시우쇠는 흠칫하며 두  주먹을 쥐어올렸다. 하지만  케이건은 시우쇠를

보는 대신 고개를 더  들어올렸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여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광대한 하텐그라쥬의 외곽 지

대였다. 다른 사람들과 화신들의 시선도  케이건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

곳에는 눈길을 붙잡을 만한 특별함이 없었다.  그러나 케이건은 그 지점

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도시 외곽의  상공, 비어있는 허공에서  무엇인가가 출현했

다.

티나한은 그것을 '무엇인가'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것은 움직임이

었고, 어떤 모습도 갖추지 않았다. 티나한은 눈을 부릅 뜬 채 그것을 바

라보았다.

다음 순간 땅과 하늘이 폭발적으로 부풀어올랐다.

티나한은 기겁하여 깃털을 부풀렸다. 하늘의  한 지점이 아래로 빠르게

녹아내림과 동시에 땅이 위로 치솟았다. 그것은  독이 잔뜩 올라 주체할

수 없는 두 마리 뱀처럼 사납게 꿈틀거리며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곧이

어 두 뱀은 서로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하늘과 땅이 삽시간에 연결되며

시커멓게 소용돌이쳤다.

"회오리!"

티나한은 자신의 좋은 시력으로 그 회오리가 나무들을 닥치는대로 잡아

뽑아 위로 들어올리는 것을 보았다.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땅에 단단

히 뿌리를 박은 나무를 그대로 뽑아낼 수  있는 회오리는 거의 없다. 하

지만 그 회오리는 잔디밭을 파헤치는 갈퀴처럼 밀림을 파헤쳤다. 고목들

이 회오리를 타고 빙글빙글 돌았다. 땅의 잔해를 닥치는대로 휘감아올리

며 그 회오리는 기이한 모습으로 부풀었다. 마치 납작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회오리는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엄청나게 먼 곳이었기에

그 움직임을 볼 수 있을 뿐 가까이 있다면  너무나 빨라서 제대로 볼 수

도 없었을 것이다. 그 회오리는 옆으로  무한히 팽창했다. 그 성장을 따

라 그들의 얼굴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회오리는 어떤 회오리도 보

여주지 못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갈바마리가 그 광경을 간략하게 정리

했다.

"여기를"

"둘러쌌다."

회오리는 거대한 바람의 장이 되어  광대한 하텐그라쥬를 둘러쌌다. 이

제 그것은 직경이 몇 킬로미터도 넘는  거대한 회오리가 되었다. 그들의

머리 바로 위에서는 햇빛이 내려쬐고  있었지만 하텐그라쥬 외곽쪽의 하

늘은 시커멓게 몰려든 구름으로 밤이 찾아온  듯 어두웠다. 티나한은 깃

털을 부풀리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회오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산사태 같은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회오리를 다시 주의깊게 바라본 티나한은 결코 달갑

지 않은 결론을 얻었다.

회오리가 하텐그라쥬를 향해 좁혀지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있는 집들이 날아오는  나무들에 부딪쳐 파괴되었다. 건물

들이 파괴되며 바람에 휘말려 올라갔고 그 때문에 회오리는 한층 가공할

것으로 바뀌었다. 돌덩이들이 인정사정없이 서로  부딪치며 회오리 안에

서 번갯불이 쉴새 없이 으르릉거렸다. 땅이 가련하게 몸을 떨었다. 몸서

리쳐지는 소음들이 모든 곳을 가득 메웠다.  반파된 벽과 지붕이 곳곳에

서 날아다녔다. 회오리는  하텐그라쥬를 집어삼키며  심장탑을 중심으로

꾸준히 좁혀들고 있었다.

티나한은 외쳤다.

"케이건! 멈춰!"

케이건은 생기 없는 표정으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긍

정도 부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소음이 들리기에 돌아보는 정

도의 관심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시선도 오랫동안 계속되지 않았다. 갑

자기 케이건은 몸을 돌려 냉동 장치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바라보던 케

이건은 그 쪽을 향해 걸어갔다. 티나한이 다시 외쳤다.

"하텐그라쥬를 다 부술 작정인가!"

"우선은."

그 간단한 대답이 티나한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케이건은 누구도 돌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하지? 저걸 가져가야겠군."

"안돼!"

빌파 삼부자와 두억시니들이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케이건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음 순간  갈바마리는 그룸 빌파와  정면으로 부딪쳤

다. 비슷한 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냉동  장치 주변의 물 때문에 움

직일 수 없었던 티나한이 신음처럼 말했다.

"빙글빙글 돌고 있어."

코네도 빌파가 이를 갈며 갈바마리를 바라보았다.

"갈바마리! 아까 그것! 다시 해봐!"

그룸 빌파와 엉킨 채  주저앉아 있던 갈바마리가 두  얼굴 모두에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코네도를  바라보았다. 코네도는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

다.

"왼쪽! 오른쪽!"

갈바마리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일어났다.  간신히 갈바마리가 이해했

지만 코네도는 늦었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케이건은 이미 냉동 장

치 앞쪽에 서있었다. 게다가 갈바마리는  시간을 더욱 지체시켰다. 갈바

마리의 두 머리는 서로 자신이 왼쪽을  하겠다고 싸웠다. 사모가 간신히

입을 열어 두 머리가 지향해야 할  바를 가르쳐주었을 때 케이건은 냉동

장치를 살펴보고 있었다.

케이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냉동 장치 왼쪽의  금속 돌출물에 사이커가

한 자루 박혀 있었다. 사이커가 아무리 예리하다지만 금속을 도깨비지처

럼 꿰뚫을 리는 없었다. 케이건은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 그 결과 사이

커가 돌출물 속에 있는 어떤 항아리를 파괴한 채  걸려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케이건은 그 항아리가 깨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다

시 냉동 장치의 앞쪽으로 돌아와 문을 살폈다.  문은 금속의 차가움으로

그를 마주볼 뿐이었다. 케이건은 그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물이 급격하게 쏟아져나왔다.

케이건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 때 물과 함께 무엇인가가 앞으로 쓰

러졌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던 케이건은 자신의 가슴으로 쓰러지는

그것을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그것이 놀랍도록 차갑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물 또한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케이건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케이건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나가 여인을 내려다

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것은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우쇠

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고 아기는 솜털이나마 빳빳하게 부풀렸다. 갈바

마리도 잠시 싸우는 것을 멈춘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아무도 그를 재

촉하지 못했다.

케이건은 완전히 젖어있는 그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냉동 장치가 고장

났고 그 때문에 얼음이 녹아 여인이 풀려난 것임을 알았지만, 잠깐 동안

케이건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  여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냉

동 장치에서 흘러나온 물은  그의 정강이를 적신  채 바닥으로 퍼져나갔

다. 더 이상 물이 쏟아지지 않게 되었을  때 케이건은 그녀를 다시 얼려

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여인의 얼

굴에 있었고, 그래서 케이건은 다시 그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케이건이 평범한 나가 여인의 얼굴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때 여인이 갑

자기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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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챕터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6-5.                        관련자료:없음  [57771]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8-21 01:24  조회:6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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