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59화 (59/62)

눈물을 마시는 새.

16. 독수(毒水) - 3

오레놀은 먼저 똑똑한  교위들과 장수들에게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잠시 후 그들 중 대덕의 말을 완전히 이해한 자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하

늘치의 등까지 이르는 거대한 계단을 보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본 계단

의 모습이 똑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들은 하늘치의  등으로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오레놀은 그 자들에게  다른 자들을 가르치도록 지시했다.

그럼으로써 하늘치의 등에 오르는 방법을 전달하는 시간을 단축시켰다.

모든 북부군이 하나의 계단에서 병목 효과를 일으키는 일 같은 것은 발

생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

자 자신만의 계단을 밟고 올라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부군은 날아오르

는 새떼와 같은 모습으로 하늘치의 등  위로 걸어올라갔다. 따라서 그들

을 지체시킨 것은 정체가 아니라 다른  문제 때문이었다. 북부군의 시간

을 소모시키는 것은 도통 소망할 줄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

의 소망을 무가치한 공상으로 치부해버리는  일에 지나치게 익숙한 자들

이었고, 그래서 하늘치의 등에 이르는 계단을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

이 함께 계단을 올라가주며 그들을 이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한 사

람은 하나의 계단만 밟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계

단을 만들어내어야 했다. 어느샌가 북부군의 퇴각은  소망할 수 있는 능

력의 시험이 되고 있었다.

가장 끈질긴 교위와 가장 입이 험악한 부위들이 소망할 줄 모르는 자들

을 다그치는 모습을 보며 오레놀은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을 얻었다. 그러

자 그 곁에 서서 모든 북부군이  각자의 계단을 따라 하늘로 걸어올라가

는 장대한 모습을 바라보던 괄하이드가 말했다.

"그런데 이제 올라가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왕께서 부탁하신 일을 하

시려면."

"예. 이제 그래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높은 계단을 밟아 올라가

는 것은 힘이 너무 들 것 같군요. 저는 조금 전 즈라더라는 분께 부탁을

해두었습니다. 함께 올라가시겠습니까?"

"아니오. 라수를 데려가십시오. 그가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병사

들을 다 올려보내고 마지막에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레콘 즈라더는 자신의 도끼를 등에 맨 다음 오레놀과 라수 규리하를 양

쪽 겨드랑이에 끼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자신이 올라갈 계단을 그렸

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즈라더가 보게 된 계단은 한 단의

높이가 이십 미터 가까운 거대한 것이었다.  다른 종족에게는 도무지 계

단으로 보이지 않을 거대한 물건을 만들어낸  즈라더는 씩 웃은 다음 위

로 뛰어올랐다. 허공을 밟고  올라가던 인간 병사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즈라더는 단숨에 하늘치의 등 위에 올랐다.  라수 규리하는 먼저 올라와

있던 병사들이 손으로 다리를 주무르면서도  자신들이 있는 곳에 경외감

을 느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라수 규리하는 위화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하늘치의 등  위는 사람들의

역사에서 가장 신비로운, 절대로  다가설 수 없는  비경으로 인식되어온

장소였다. 그리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그리고 살아있는 평

야의 모습은 그런 비경의 느낌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는 키보렌에 들어온 이후로는 몸단장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지저

분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다 높은  계단을 올라오느라 지쳐버린 병사들이

주저앉아 두런거리고 있었다. 라수는 그것이 마침내  품에 안게 된 꿈의

여인에게서 현실의 악취를 맡는  것 같은 불쾌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수는 곧 그런 생각을 떨쳐내었다. 땅바닥에 앉아있는 병사들은

단순히 지친 병사들이 아니라 승리자들이었다. 그들은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낼 수 없었던, 아니 그런 일을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행군을 끝까지

따라온 자들이었다. 그리고 하늘치 또한 사람들의 단순한 부주의에 의해

그 신비를 훼손당할 가냘픈  존재도 아니었다. 라수는  반드시 그러리라

확신하며 오레놀을 바라보았다. 오레놀은 즈라더에게 말하고 있었다.

"올라오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즈라더. 피곤하지 않다면 내려

가서 계단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저희들처럼 데려와줄 수 있겠습니

까? 다른 레콘들과 함께 말입니다."

"알았어."

즈라더는 곧장 몸을 돌려 뛰어내려갔다. 그 때 저편에서 병사의 모습으

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스님! 올라오셨군요. 그런데 우리 대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아, 롭스. 티나한은 다른 수탐자들과 함께 하텐그라쥬로 들어갔습니

다. 만약 제 생각이 맞다면 지금 그 분은 심장탑에 계실 겁니다."

"음. 그러면 모두들  태운 다음에 심장탑으로  다가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래에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제 곧 다 올라올 겁니다. 하지만 심장탑으로 다가가는 것은 좀 걱정

되는군요. 지금 거기서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롭스는 피식 웃었다.

"스님. 이곳에서는 물론 발 아래의 광경이 잘  안 보이긴 합니다만, 심

장탑의 경우는 예외입니다. 심장탑은 우리들이 있는 높이보다 몇십 미터

쯤 낮을 뿐이니까요. 이곳에서는 그쪽이 아주 잘 보입니다."

오레놀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심장탑 쪽을 바라보았다. 라수 또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깜짝 놀랐다. 오레놀은 자신도 모르게 말

했다.

"저게 뭡니까?"

부러진 심장탑 상공에서는 기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견

구멍처럼 보였다. 허공에 뚫린 경계 없고 형체 없는 구멍이었다. 경계를

뚜렷이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것의 크기는 무지무지했다. 그리고 그 구멍

내부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불길과 번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무

엇이 흐릿하게 번득였다. 오레놀은 그 구멍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 아래

는 심장탑이 있었고 그곳에는 이 먼곳에서도  뚜렷이 알아볼 수 있는 시

우쇠가 두 팔을 하늘로 들어올린 채 서있었다. 롭스가 턱을 긁적이며 말

했다.

"음. 스님. 저는 스님이 올라와서 설명해주길  바랐습니다. 저는 그 기

둥 읽는 일에 도통 소질이 없어서요."

라수가 말했다.

"저 모습은 악타그라쥬에서 시우쇠님이 가짜  태양을 만들어낼 때의 모

습을 연상시키는군요. 하지만 저건 도무지  불덩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데요."

오레놀이 바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기둥을 읽어야겠습니다. 라수.  당신도 좀 도와주

십시오."

라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어갈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라수는 뭔가

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레놀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오레놀은 곧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어디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기둥을  가져오면 되니까요. 당신의 앞

쪽에 다섯 개의 기둥이… 아니, 꼭  기둥일 필요도 없군요. 그냥 벽이어

도 상관없겠습니다. 당신이 읽을 수 있는  글이 새겨진 구조물이 나타나

길 원하십시오. 일단은 당신이 잘 아는 책의 내용으로 시작해보지요."

라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생각대로, 하늘치 등  위에서 만나게

될 신비는 충분히 풍요로운 것이었다.

"익숙해질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습니다만,  지금 가장 부족한 것

도 시간이겠지요. 알겠습니다."

라수는 적당한 크기의 벽을  시험 삼아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훌륭한

부조로 장식된 벽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벽에는 음각으로 정교하게 글

이 새겨져 있었다. 라수는 그 글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고, 읽어본 다음

자신이 제대로 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가장 소름끼치는 작품으로 자평

하는 <왕국의 몰락> 서문이 황공하리만큼 훌륭한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라수는 그 훌륭한 글씨가 혹 자신의  허영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

하며 조심스럽게 오레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오레놀은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성공하셨습니까?"

라수는 오레놀이 자신의 벽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레놀은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시간이 없으니 한 번만  말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단어를

몇 개씩 바꿔보십시오. 구조물도 만들었으니 단어를 바꾸는 것쯤은 간단

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잘 알

고 있는 글의 일부가 바뀌면 그것을 오류라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라수는 자신의 글을 사용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글

을 바꾸는 것은 어렵겠지만 자신의 글을  바꾸는 것은 간단할 거라고 여

겼기 때문이다. 오레놀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전체 문장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되면  그 다음은 행간의 의

미들을 보다 뚜렷하게 하고 그 의미들을 이용하여 전체 논리를 체계화하

십시오. 예. 아마도 책을  정독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터

득한 것은 이 방법뿐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을 그대로 암기하

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이용하여 자신의 머리 속에  또 한 권의 책을 만들

어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당신이 만들어낸 구조물은 그

머리 속의 책을 현실로 시각화시켜줍니다. 그러다가 당신이 예상치 못한

문장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신의 직

관력이 찾아낸 문장이거나 결론일 겁니다. 그렇잖으면 문장들 자체가 스

스로 이끌어낸 결론일 수도 있지요. 그런  문장들을 이용하여 다시 전체

의 일을 반복하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완벽하게 체계

화할 수 있을 겁니다."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던 라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황급히 말했다.

"그걸로 끝입니까?"

"끝입니다. 간단한 일처럼 들리겠지만 그  효과에는 놀라실 겁니다. 익

숙해지면, 당면 과제에 부합하는, 혹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되는 글이나

문장을 새겨놓고 해보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하늘치는 도대체

뭡니까? 스님은 이미  그것을 알게 된  것 같으니  설명해주시면 좋겠군

요."

오레놀은 다급한 심사를 드러내며 빠르게 말했다.

"이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버린  우리의 장형(長兄)이 우리들을 위해

남겨둔 유산입니다. 우리는 이제야  그들에 대해 알게  되었기에 그들을

다섯 번째 종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지만,  사실 그들은  첫 번째입니

다."

그리고 오레놀은 곧 허공을 응시했다. 라수는 대덕이 자신의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이상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래서 라수는 자신이 만들어낸 왕국의 몰락을 다시 바라보았다.

얼마 있지 않아 라수는 자신이 완전히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

의 글을 바꾸는 것보다 자신의 글을 바꾸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라수는 오기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논리를 스스로 공격하

기 시작했다.

지평선 안쪽에 있는 모든 자들은 하텐그라쥬의 부러진 심장탑 꼭대기에

영그는 불덩이를 볼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것은 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불 이상의  불이 되었다. 심장탑 주위를  날던 비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심장탑  상공의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구멍처럼

보였다. 불은 빛과 열을 방사한다. 하지만 시우쇠가 극도로 집중된 불은

이제 빛과 열을 탐욕스럽게 삼키고 있었고, 그  빛과 열을 연료 삼아 검

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검은  구멍이 거대해질수록 심장탑 위

는 오히려 싸늘해졌다. 케이건은  그 공포스러운 구멍을  바라보며 말했

다.

"저것은-"

알고 있었던 사실. 혹은 방금 알게 된 사실. 케이건은 말했다.

"네가 두억시니들의 신을 죽일 때 사용했던 그 불이군. 그걸로 나를 죽

이려고?"

"너도 죽기를 바라는가!"

"아니. 나는 원하지 않아. 할 일이  있으니까. 그리고 인간들이 자신의

신보다 더 우월해진 것 같지도 않군.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너는 저 무

서운 불로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어. 두억시니들의 신은 원했기 때문에

죽을 수 있었지. 그런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시우쇠는 잠시 노기를 억누른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의 얼굴

에는 농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말에 시우쇠보다도 더 혼란

스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우쇠는 슬픔 속에서 말했다.

"너는 자신들의 신보다 더 위대해진 첫 번째  종족과 그들의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들의 신보다 더 위대해진 그 첫 번째 종족은 다른

종족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오만하게 보였다.  열등한 것은 우월한 것을

이해하기 힘드니까. 하지만 그들이 정말 오만한 자들이었다면 어느새 자

신의 완전성을 구속하는 족쇄가 되어버린  자신들의 신을 그토록 세심하

게 보살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네 명의 도

움을 얻어 영원히 소멸했고, 그것으로서 자신이  보살피던 첫 번째 종족

을 완전에 이르게 했다. 너는 자신을 보지 못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신?"

케이건은 그 말을 난생 처음 들어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또다른

부분은 그 말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그리고 다른 감정들도. 케이건은 유

래를 알 수 없는 자신의 감정에 당황했다. 시우쇠가 말했다.

"그래. 우리의 도움을 받아 그는 영원히 사라졌고 첫 번째 종족은 완전

한 빛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이 지상에 남겨둔 불완전성의 찌꺼기들은

서로 뭉쳐 두억시니가 되었다. 그들이 지상에 흘린 눈물이지. 유해의 폭

포는, 비록 자신이 찌꺼기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의 다른 부분들이 정녕

신보다 위대해졌음을, 그리고 결코 두억시니가 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기쁘게 죽음을 맞이했다."

케이건은 갑작스러운 기억의 요동을 느꼈다. 그가 전혀 알지 못하고 그

긴 세월 동안에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에  관한 기억들이 갑자기 그의 정

신 속에서 부상했다. 케이건은 어떤 신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비통한 기쁨과 처절한 환희의 순간이었다.

한 명의 신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우주적 슬픔의 순간에서, 신

은 다가오는 소멸을 두려워하는 대신 자신이 가르치고 보살핀 종족이 이

루어낸 것을 보며 기뻐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주위에 있는 다른 신들이

죽어가는 신을 부러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케이건은 그  기억의 거대함에 질려 뒷걸음

질치고 싶었다. 거기에는 너무도 큰 기쁨과 너무도 큰 슬픔이 혼재했다.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이 한 종족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그것이잖겠는가?"

케이건은 고개를 돌렸다. 티나한이 계단에서 머리를 내민 채 그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아기가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우쇠가 너에게 자신을 보지 못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겠지. 그

래. 케이건. 그것이 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의 일, 최선의 일이다. 자신

이 보살피던 종족들이 마침내 기쁨의 목소리로 '신은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 환희의 순간을 생각해봐. 케이건. 너의 인간을 떠올

려! 네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나의 인간?"

"그래! 너의 인간 말이다!"

"…나의 인간이라는 것은 없다."

"케이건!"

케이건은 아기에게서 시선을 옮겨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 내게 남은 것이 있다면 나가뿐이다. 잡아먹어야

할 나가들. 너무 많다. 너무. 그토록 많이 잡아먹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많다."

케이건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많다."

케이건의 눈에서 갑자기 광채가 번득였다.  케이건은 고개를 들어 하늘

에서 형성되는 구멍을 바라보며 빠르게 말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저 불로도 나를 죽일  수는 없다. 너는 저 끔찍한

불로 이 심장탑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생각이겠지. 발자국  없는 여신의

영이 깃든 몸을 파괴해서 그녀를 어딘가의 다른 나가에게 전령시킬 생각

이겠지. 관둬. 심장탑을 박살내면 네 생각대로 발자국 없는 여신은 어딘

가로 전령하겠지. 하지만 심장탑이 파괴되는 순간 하텐그라쥬의 모든 나

가들도 죽고 말아. 그녀는 이곳에서 훨씬  떨어진 도시의 나가에게로 전

령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그녀는 너희 둘을 찾아낼 수 없어. 너희들

또한 그녀를 찾아낼 수 없고. 모든  자를 찾아내는 것은 나뿐이야. 셋이

모일 수 없어. 너희들은 다시 헤어지게 될 거야."

시우쇠는 폭소를 터뜨렸다.

"멍청아! 이 도시에는 심장 적출을 아직 하지  않은 나가도 있다. 그리

고 저기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녀석들  중에는 다른 도시 출신의 나가들

도 있고! 이곳에도 여신이 전령할 나가는 무궁무진…"

순간 시우쇠는 멈칫하며 케이건을 살펴보았다. 케이건이 그토록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시우쇠는 의혹을 느꼈다. 결코 반갑지

는 않은 어떤 깨달음이  찾아들었을 때 시우쇠는  분노의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검은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시우쇠는  격분을 참지 못하여 닥치는대로

몸의 불을 피워올렸다. 시우쇠는 그곳에 자신이  만든 불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케이건이 그것을 소멸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것을 잠시 감출 수는 있었다. 시우쇠의 시선을

빙빙 돌게 만들면 간단한 일이었다. 케이건은  입으로 아무 말이나 중얼

거리며 그런 일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티나한과 비형에게는  시우쇠가

자꾸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들어 시우쇠를 겨냥했다.

"원하는대로 다 해주겠어. 나가들을 다 죽인  다음에 나를 너희들 마음

대로 해. 그 때까지는, 나를 방해하지마.  너희들과는 상관없는 문제 아

냐? 나는 레콘이나 도깨비들을 다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냐. 내 식

성은 단조롭지. 비늘 덮인 것들만이 내 목표야."

카루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질문을 하는 편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질문했다.

"죄송합니다. 도대체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덕분에 카루는 목이 끊어질 뻔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티나한은 갑자

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엄청난 속도로  철창을 휘둘렀다. 만약 궤도가

적절했다면 그 철창은 날카로움이 아닌 순수한 힘에 의해 카루의 목이나

허리 쯤은 쉽게 절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루는 계단 아래쪽에 있었고

티나한은 약간 높게 휘둘렀다. 자신의 머리  위를 벼락처럼 지나가는 파

국에 카루는 기겁하며 사이커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급박한 순간, 카루

는 레콘을 상대로 철의 대화 따위나  신청하는 얼간이 짓은 현명하지 못

하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다행히도 카루는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티나한

은 그를 쪼개버릴 생각이 없었다.

"망할, 기척 좀 내고 말할 것이지! 놀랐잖냐!"

"저는 헛기침도 내고 발소리도 내고 그 외 생각나는 모든 짓을 다 해본

다음에 말한 겁니다."

티나한은 머쓱한 표정으로 좀 더 자세히 카루를  바라보았다. 그 때 계

단 아래쪽의 어둠에 조금 익숙해진 티나한은  카루의 등 뒤에 있는 스바

치의 모습을 발견했다. 티나한은 그 또한  자신처럼 누군가를 업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스바치의 등 뒤에 업혀있는 것은 실로 무시무

시한 것이었다. 티나한은 어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희들은 도대체 뭐냐?"

"카루라고 합니다. 저 친구는 스바치,  그리고 업혀있는 사람은 수호자

보트린입니다."

"수호자라고!"

티나한은 새로운 경계심을 느꼈다. 하지만  카루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

다.

"아니, 잠깐. 적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북부군이며 여신을 구

출하기 위해 온 사람이라면."

티나한은 눈앞에 있는 나가가 자신과 같은  목적을 가졌다는 식으로 말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티나한은 잠시 폭력을 유보

해둔 채 말했다.

"나는 티나한이다. 발자국 없는 여신을  구출하고 너희들의 수호자들로

부터 여신의 힘을 박탈하기 위해 화신들을 찾아서 이곳으로 모셔온 사람

들 중 하나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것이 그리 틀리지는 않는군."

카루는 잠시 스바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티나한

에게 말했다.

"그러면 수탐자입니까?"

"우리를 아나?"

"보트린이 닐러줬습니다. 그는 들을 수는 있지만  지금 상태가 좋지 못

해 말할 능력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우리들 또

한 여신의 구출을 바랍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

니까?"

티나한은 그만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사태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레콘의  대답이 늦어지자 카루는 용감하게

도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카루는 티나한처럼  계단에 엎드린 채 살금살

금 기어올라간 다음 계단 끝에서 고개를 내밀어 51층을 바라보았다.

얼마 동안 카루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계단 위의 광경은 초자연

적이었다. 하늘에는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구멍이 불타오르고 있

었다. 그리고 그 구멍 아래에서 한 인간과 시우쇠일 것으로 생각되는 불

덩어리 도깨비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우쇠와 케이건의 모습 사이

로 카루는 냉동 장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  어린 차가움 때문에

카루는 카린돌의 모습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카루가 다시 아래

쪽으로 몇 계단을 내려왔을 때 티나한의  등 뒤에 있던 아기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지 않아. 간단하게 말해준다면  어디에도 없는 신의  화신이 너희

나가들을 모두 죽이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는  발자국 없는 여신이 풀려

나는 것을 저지하고 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하기 때문이야."

카루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스바치와  보트린 또한 경악했다. 카

루는 여러 가지 놀라움 중에서 가장 간단한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그

는 아기를 유심히 바라보며 질문했다.

"혹 당신이…"

"나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다."

"아! 그렇군요. 여신을 뵙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

런데 왜 어디에도 없는 신의 화신이  나가를 다 죽이고 싶어하시는 겁니

까? 나가들이 여신의 힘으로 인간들을 죽였기 때문입니까?"

"일단 질문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라. 카루. 냉동  장치가 어느 쪽에

있는지 정확하게 말해다오. 방향과 거리를 상세하게."

카루는 의아해하다가 아기가 전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말한다는 것

을 깨달았다. 카루는 아기가 장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화

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진 카

루는 질문을 포기하고는 다시 고개를 내밀어  확인했다. 냉동 장치의 위

치를 확인한 카루는 아래로 내려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 방향으로 20 미터 쯤 떨어져 있습니다."

"정확하게 20 미터냐? 중요한  일이다. 너는 정확하게 냉동  장치 앞에

설 수 있는 거리를 말해야 한다."

카루는 다시 고민한 다음 말했다.

"그 거리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알았다. 이곳에 있는 티나한은 사정 때문에 저곳에  갈 수 없다. 너를

그곳으로 빠르게 이동시켜줄 테니 냉동 장치  안에 있는 나가를 죽일 수

있겠나?"

계단 아래쪽에 있던 스바치가 고개를 홱 쳐들었다.  그는 경악에 찬 표

정으로 아기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스바치의 등  뒤에 있던 보트린 또한

놀라움에 찬 니름을 토해내었다.

[도대체 저 화신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카루 또한 그것이 궁금했고 그래서 아기에게 질문했다. 아기는 말했다.

"저 몸이 죽으면 발자국 없는 여신은 그  몸에서 빠져나와 다른 나가의

몸으로 옮겨갈 수 있다. 그러면 그 다른  나가가 발자국 없는 여신의 화

신이 되어 우리 둘과 함께 어디에도 없는  신의 화신을 저지할 수 있다.

둘은 하나를 상대할 수 없다. 셋이 되어야 한다. 지금 네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디에도 없는 신의 화신은 너희들을 다 죽일 거다."

카루는 아기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스바치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모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카루는 스바치를 돌아보았다.

[스바치.]

[내가 말하겠어! 잠깐 기다려.]

스바치는 아기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하지만 심장

을 적출한 나가를 빠르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쨌든 도깨비

의 불이나 레콘의 힘이 없다면 말입니다.  카루는 시간을 꽤 잡아먹어야

할 텐데, 어디에도 없는 신이 그가 그녀를 죽일 때까지 가만히 구경하고

있겠습니까?"

"그녀? 여자인가 보군. 그리고 심장을 적출한  나가라면, 네 말대로 어

렵겠군."

아기는 불만에 찬 신음을 흘렸다. 스바치는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안되겠습니까? 얼음은 곧 다 녹을 겁니다. 그리고 그

녀의 체온도 올라갈 테고요."

"어디에도 없는 신이 시간을 줄지 모르겠다."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군요."

다시 계단 위를 살피던 카루가 말했다. 아기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

었다. 케이건이 이끌어주지 않는 이상 그녀는 냉동 장치나 그 안의 신체

를 정확하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티나한은 카루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

했다. 그는 좌절감 속에서 말했다.

"케이건이 냉동 장치의 문을 다시 닫았습니다."

냉동 장치의 문을 다시 닫은  케이건은 시우쇠를 쳐다보았다. 시우쇠는

노기충천한 모습이었지만 시각이  왜곡되어 있기에 그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문득 시우쇠를 그대로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화염의 화신이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혹 죽는다 하더라도 이곳에는 시

우쇠가 전령할 도깨비가 하나 있었다. 케이건은 비형을 찾아보았다.

비형은 나늬와 함께 아래로 내려서려  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단조롭게

손짓했다. '내려오지 마시오.' 비형은 거부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케

이건은 잠깐 고민하다가 바라기를 천천히 들어올려 자신의 왼팔 위에 얹

었다. 그 뜻은 명백했다. 나늬가 크게  후퇴했다. 비형을 쫓아버린 케이

건은 이제 티나한이 남았음을 상기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닥을

본 케이건은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순진했다.  케이건은 오른발을 한

번 굴러 바닥에 고여있던 물을 찰박거리게 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물

방울이 튀어올랐다. 케이건은 티나한이 절대로  다가오지 않으리라는 것

을 확신했다.

그를 방해할 자는 없었다. 케이건은 천천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하텐

그라쥬의 전경을 죽 둘러본 케이건은 한  지점을 선택했다. 그는 바라기

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 동작에는 물감을  잔뜩 묻힌 붓을 들어올리는

거장의 손길 같은 충만함이 있었다.

'나가는, 모두 죽을 것이다.'

파괴적인 붓질을 하려던 케이건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그의 눈에 심장탑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일군의 무리가 들어왔다. 케이

건은 바라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손끝이

떨렸다. 거기에는 나가가 있었다. 케이건은  난폭한 동작으로 다시 바라

기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끝내 바라기를 휘두르지는 못했다.

케이건은 아래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사

모의 귀에 들리도록 바람에 그것을 실어 보냈다.

"돌아가십시오. 폐하."

마루나래의 등 위에 있던 사모는 깜짝 놀라서 위를 쳐다보았다. 사모는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있는  케이건을 보고는 또다시  놀랐다. 케이건은

보통 말하는 정도의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 목소리가 들릴 거리가

아니었다. 사모는 이해할 수 없는 기분 속에서 대답했다.

"케이건 드라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사모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건의

대답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려왔다.

"저는 나가를 죽일 겁니다. 폐하께서는 돌아가십시오."

사모는 더 이상 고민할 여유 없이 다급하게 말했다.

"허락하지 않는다."

"너까짓 나가가 감히 나에게 허락하느니 마느니 한단 말이냐!"

케이건은 폭발적인 괴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하늘을 울리게 하는 대갈

이었다. 갈바마리와 금군들은 켁켁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마루나래는 털

을 꼿꼿하게 세운 채  으르릉거렸다. 사모는 그  음성에 놀랐다. 그것은

그녀가 아는 케이건의 목소리였지만 너무도 생경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이

기도 했다. 그녀가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케이건이 다시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제발 이곳을 떠나주십시오."

사모는 케이건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케이

건의 일부는 분명히 아라짓 전사로서 사모를  왕으로 여기고 있었다. 사

모는 그 사실에 매달리기로 했다.

"케이건 드라카. 짐의 아라짓 전사여. 너의 왕이 하는 말을 들어라. 짐

에게 설명하라."

"설명이라고요?"

"설명하라. 너는 내가 적으로 규정한 자와  싸우고 내가 친구로 규정한

자를 보호해야 하지 않느냐? 네가 어찌하여 내 명령도 없이 적을 규정하

는 것인지 설명하라."

케이건은 입술을 떨었다. 그의 왕이 요구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왼손을

아래로 뻗었다.

사모는 마루나래가 갑자기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래를 내려다본 사

모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몸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마루나래는 등

뒤의 무게가 갑자기  사라지자 어리둥절하여 위를  쳐다보다가 기겁하여

펄쩍 뛰어올랐다. 놀라운 도약력에 의해 마루나래는 사모와 같은 높이까

지 이르렀지만, 대호에게는 안전하게 사모의  몸을 붙잡을 손이 없었다.

성급하게 발을 뻗으려던 마루나래는 그 동작이 사모를 파괴하고 말 것임

을 깨닫고는 다시 발을 잡아당겼다. 땅에  내려선 마루나래는 무서운 포

효를 뿜어올렸다. 그 동안에도 사모의  몸은 계속 떠올랐다. 갈바마리가

갑자기 비명처럼 외쳤다.

"계단을!"

"올라간다!"

갈바마리는 심장탑 안으로 뛰어들었다. 입을  열어 말할 수는 없었기에

마루나래는 포효로써 갈바마리를 축복한 다음 그  뒤를 따라 달렸다. 그

리고 그들 뒤로 다른 두억시니들이 달렸다.

사모는 곧 불안감을 버리기로 했다.  케이건이 그녀를 죽일 작정이라고

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것을  원했다면 조금 전  하텐그라쥬를 상대로

저지른 폭력을 그녀에게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모

는 추락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사모는 케이건의 얼굴을 똑

바로 노려보려 애썼다. 케이건은 그녀의 시선을 조심스럽게 받아내었다.

나늬에 탄 비형이 한 번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

보았다. 사모는 비형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날개 소리 때문에 이

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모는 비형에게  미소를 지어 준 다음 다

시 케이건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녀의 발이 심장탑 51 층에 내려서게 되

었을 때도 사모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을 수 있었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다시 등 뒤에 걸었다. 그리고  사모 앞에 무릎을 꿇

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를 내려다볼 수는 없었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의 힘으로 자신을 끌어올린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사

모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눈 앞에 있는  자를 자신의 전사인 한 인간

으로만 취급하기로 결심했다.

"알았다. 설명하라."

계단에 엎드려 있던 카루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가면을 쓴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카루는 그 가면을

보고 그녀가 대호왕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루는 그 이

상의 느낌을 받았다. 카루는 자신이 그녀를  알고 있다는 강력한 느낌을

받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불안 속에서  카루는 조금 전 케이건이 그녀

를 나가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그 때 보트린의 니름이 들려왔다.

[카루. 스바치. 냉동 장치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카루는 뒤를 돌아보았다. 보트린이 계속 닐렀다.

[그 방법이 카린돌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바치가 다급하게 닐렀다.

[어서 닐러주십시오!]

[금속 상자의 왼쪽에 있는 돌출물을 유의해서 보면  항아리가 세 개 들

어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항아리를  파괴하면 됩니다. 그러면 냉동 장

치는 쓸모가 없어지게 됩니다.]

스바치는 그 사실을 육성으로 바꿔 속삭였다. 아기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다. 내가 너희들 중 누군가를 이동시켜주겠다. 그 항아리

를 파괴해라. 누가 그렇게 하겠느냐?"

"제가 하겠습니다."

스바치가 대답했다. 그는 보트린을 묶고 있던  줄을 풀기 시작했다. 아

기가 다시 말했다.

"어쩌면 어디에도 없는 신에 의해 죽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라. 지금 사모 페이가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쩌면 그녀도

위험해질지 모르거니와…"

아기의 말은 숨죽인 비명에 의해  중단되었다. 티나한과 스바치, 아기,

보트린은 놀란 표정으로 카루를 바라보았다. 카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 말했다.

"정말 사모 페이입니까?"

"대호왕 말이냐? 그렇다."

카루는 고개를 홱 돌려 대호왕과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자

들 또한 기회를 엿보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케이건을 오로지 아라짓 전사처럼  대하는 사모의 태도는  효과가 있었

다. 케이건은 아라짓 전사로서 말했다.

"폐하. 나가들은 폐하의 전사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그들은

제 희망을 이용하여 저를 철저히 배신했습니다."

"네 희망이 무엇이냐?"

"제가 원한 것 말씀이십니까?"

"그래. 네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냐? 짐에게 말하라."

케이건은 고개를 들어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희미한 의혹이

피어올랐다. 사모는 자신을 억누른 채 차분하게 그를 마주보았다.

"네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냐?"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삶."

사모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

건의 목소리는 단조로웠고 그 말에는 뚜렷한 인상을 남기려는 어떤 기교

도 내포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모는 그  말이 귀 속에 쾅쾅 울린다

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삶?' 사모는 그런 말이 어떻게

나가를 다 죽이려는 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말했다.

"설명하라."

케이건은 갑자기 과거를 바라보는 눈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

소리에는 시간의 무게가 덧씌워졌고 사모는 태고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를 듣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세 놈을 잡았지. 마지막 새끼의 아가

리를 찢어놓고 그 입에 오줌을 눠줬지. 말도 못하는 입에 뭐라도 쓸모가

있어야 할 것 아냐.  제 누이의 전사들. 저는  그것들이 싫었습니다. 제

누이를 살육의 여왕으로 이끄는  광전사들이 싫었습니다. 그  자들 가운

데, 유혈로 자신을 둘러 스스로를 파괴의 여왕으로 선언한 제 누이가 있

었습니다. 그 손에 이 혐오스러운 검을 움켜쥔 채."

사모는 그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 속으로 정신없이 생

각해 본 후에야 사모는 케이건이 아라짓 전사와 극연왕에 대해 이야기하

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그녀가 이해했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케이건은 부드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했다.

"저는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사랑할 수 없을까?"

사모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왜 이해할 수 없을까? 입장을 바꿀 수는  없을까? 길지 않은 생, 가슴

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의 서로 다른 겉

모습은 광적인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다시  없이 커다란 축복이 아닐까?

사람은 새로움 속에 살아간다. 모든 것은  항상 바뀌어 사람들에게 다가

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늘이 덮인 저 남부의 이방인들을 우리의 의식

과 지혜를 발전시킬 새로운 자극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우

리의 적이 아니라 가장  고마운 선물이 아닐까? 대상이  없는 사랑은 없

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은 새로운 사랑을  약속한다. 남쪽에서 온, 비늘

덮인 그들은 나의 또다른 형제며 혈육이다. 그리고 축복이다. 나는 그들

을 사랑하고 싶다. 그들은  얼마나 고마운 자들인가.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하나 더 얻었다."

케이건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조소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

사모는 이런 거대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르다는  것이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거대한 축복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혹은 그러했던

사람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사모는 말할 수 없는 감동 속에서 케이건

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의  얼굴이 갑자기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무서운 추억을 바라보는 자의 눈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미

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그런 제게 어떤 나가가 다가왔습니다."

케이건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사모는  감히 그를 다그칠 엄두

를 내지 못했다. 케이건의 침묵은 건드릴 수 없는,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받을 것 같은 비탄을 담고 있었다.

갑자기 케이건의 입이 열렸다.

"그 나가의 말은 정말 친절하게 들렸습니다. 제가 들었던 그 어떤 목소

리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 나가는 말했습니다.  '이해합니다.' 정말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뜻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 슬픈 사태를 해결할 방도는 하나 뿐이라는 것을.' 그 나가

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매한 침묵으로 저를 설득했을 뿐

입니다. 하지만, 그 침묵과 더불어 제시된 손짓의 의미는 분명했습니다.

왕국 아라짓에서 손가락 두 개를 이용한  그 손짓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빌어먹을! 그 놈들은  인간처럼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가 너무 분명합니다!  예. 간단한, 너무도 직설적인 손짓

이었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살육밖에  모르는 누이를 비난하고  그녀의 검을 훔쳐 그녀

를 떠났습니다. 제 누이를 떠나는 길에서  제가 생각했던 것은 누이와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득의만만하여 생각했습니다.

이제 나가들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저 저주받을 아라짓 전사들은 정체

성의 수수께끼를 느껴야 할 것이다."

사모는 바라기의 실종이 어떻게 해서 일어난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

고 그 일에서 나가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 이루 니르기 어려운 혐오감을

느꼈다. 그 나가는 북부에서 나가들을 사랑하고 이해하기를 원하는 유일

한 사람을 가증스럽게 속였다.  죄책감에 고개를 가로젓던  그녀의 눈이

문득 시우쇠에게 머물렀다. 시우쇠는 저편에 가만히  선 채 그녀와 케이

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건의 말이 계속되었다.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라짓 전사들의  혼란을 틈타 나가들의 반격

이 아라짓을 거세게 강타했습니다.  바라기를 잃은 제  나라는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케이건은 다시 침묵했다. 그는 이제  아라짓의 무력한 몰락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영웅왕의 검 아래에 이룩되었던 강력한 왕국은 그 검을 잃

고 초라하게 시들어갔다.

"믿기 어려웠습니다. 살육귀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이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국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

었습니다. 저는 증오의 기억이 너무  깊었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

지만 가장 깊은 마음  속으로는 제가 나가에게  속았음을 알고 있었습니

다.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쓰러져

가는 조국의 이름은 제 머리 속을  불태우는 악몽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저는 나가를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사랑하는 조국이

멸망했습니다. 아라짓의 가장 가증스러운 배신자. 왕국을 훔친 도둑. 그

것이 저였습니다. 결코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조국이 죽

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전사의 죽음도 아니었

습니다. 영웅왕의 나라는 병자처럼  볼품없이 말라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케이건의 얼굴에 갑자기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손은 떨림을 멈춘 채

서서히 가슴으로 올라왔다. 사모는  그 움직임을 불안  속에서 바라보았

다. 케이건은 어깨 뒤로 손을 넘겨 바라기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나가들을 잡아먹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를 받아들인 키

탈저 사냥꾼들의 방식이었습니다. 용의 자손인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바라기를 움켜쥔 케이건의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사모는 불현듯 케이

건이 첫 번째 나가 살육과 그 고기를 먹은 일을 회상하고 있음을 깨달았

다. 그녀의 몸에서 비늘이 일어났다. 하지만 몸이 느끼는 공포와 무관하

게 그녀의 마음은 한없는 동정심으로 가득차 흔들렸다.

"예. 저는 한계선  근처에서 힘없이 어슬렁거리는  나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삶았습니다. 그것으로서 저는 제  두 번째 장례식을 스스

로 주관했습니다. 사랑했던 것을 잃었고,  사랑하고 싶었던 것도 잃었습

니다. 나가의 고기가 제 목을 넘어갈 때  저는 제 속에서 울려퍼지는 단

말마를 들었습니다. 처음 몇 번 동안은 그  소리 때문에 미칠 것 같았습

니다. 하지만 곧 그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속의 무엇

이 완전히 죽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모의 눈에 은루가 고였다. 고통스러운  추억에 이르른 케이건은 빠르

게 말했다.

"제 고통을 아는 자는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제 아내,  왕국의 도둑을

받아들인 그녀는,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별비의 가슴을

헤치고 그 간을 꺼내어 씹었던 그 여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라

기의 완전한 회수와 골칫덩어리가 된  배신자를 제거하길 원했던 나가들

은 저를 추적하는 대신 제 아내를  추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아내는

그 비늘 덮인 차가운 동물들을 사랑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제가 한

때 그것을 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갔습니다. 제가 죽어간다는 것

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를 옛날의 케이건으로 돌려놓으려 했습

니다. 나가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자로. 기다리던 나가들은 제 아내를 붙

잡아 찢어 죽였습니다."

사모는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그녀의 목에서 흘러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모는 니를 수도 없었다. 케이건은 처연한 표정

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이 나가들이 제게 한 일입니다. 폐하. 저는 그들을 죽일 겁니다."

사모는 가슴이 올올이 찢겨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케이건을 바라보았

다. 어떤 말도, 어떤 니름도 흘러나오지 않았기에 사모는 주먹을 움켜쥐

었다.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한 채 가면을  붙잡았다. 시우쇠가 흠칫했고

계단에 있던 자들의 상당수가 신음을 흘렸지만 사모는 그것을 깨닫지 못

했다.

사모는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나가의 얼굴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가면은 필요 없어. 이곳에는 왕과  아라짓 전사는 필요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사과와 내가 할 수 있는 속죄만이 있을 뿐이야. 케이건

드라카. 고개를 들어 나를 봐."

케이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동요 없는 시선으로 사모를 바라

보았다. 사모는 은빛 눈물로 볼을 적신 채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케이건. 나는 너에게 사과하고 싶어."

케이건은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

간, 케이건의 얼굴에 또다른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눈물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사모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케이건은 고개를 갸웃

했다. 그는 시선을 낮추어 사모의 손에 들린 가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사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의  얼굴에 또다시 다른 얼

굴이 나타났다. 케이건은 죽어가는 자의 목소리처럼 희미하게 속삭였다.

"나가."

케이건의 몸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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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6-4.                        관련자료:없음  [57743]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8-20 01:38  조회:5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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