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16. 독수(毒水) - 2
키보렌 가운데를 걸어가는 세 명의 나가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풍경
은 나가에게 한없는 만족감을 주는 것이었지만, 그래서 좌우의 두 나가
는 마음 편한 산책이라도 나서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가운
데서 걸어가는 나가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 더군다나 가운데 있는 나가는 꽤나 나가답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
다. 그는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입 주위를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좌우
에 있는 두 나가들이 멍하니 바라보는 것을 무시하며 입을 열어 고함을
질렀다.
"달비 부위! 달비 부위이이이!"
좀 처절하기까지 하다.
키보렌의 대수호자 키베인은 갑자기 달려가버린 데오늬 달비를 찾아 대
나무 군단을 잠시 떠난 상황이었다. 대장군 갈로텍이 안전하게 허물벗기
를 마치고 대나무 군단에 복귀한 이후, 원래부터 데오늬에 대한 특별한
경계심을 품고 있지 않았던 대나무 군단의 군단병들은 이제 데오늬가 무
슨 짓을 하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키베인은 데오늬가 또
어딘가로 달려가버렸다는 니름을 좀 늦게 전해들었다. 키베인은 걱정 때
문에 그녀를 찾아나서려 했고 그러자 군단병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때
되면 돌아올 것이다'라는 둥의, 도무지 포로를 대상으로 하는 니름이라
고 생각되기 어려운 니름들로 키베인을 만류했다. 키베인은 그 상황이
꽤나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장수들은 고집을 부리며 데오늬를 찾아나서
는 그에게 두 명의 호위를 붙여야 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
은 대수호자에 대한 예우의 표현이었지만 키베인은 키보렌에서 호위가
필요한 것은 오히려 불신자 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호위 중 한 명이 대수호자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니름을 꺼내었다.
[대수호자님. 그냥 군단으로 돌아가셔서 기다리시면 돌아올 텐데요. 지
금 쯤 이미 돌아왔을지도 모르지요.]
키베인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보기로 했다.
[코노리. 어쩐지 당신은 나보다 데오늬에 대해 덜 걱정하는 것 같군
요?]
[네? 그야 대수호자님께서는…]
[아니, 아니. 그런 니름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
런 것 같은데, 모두들 내가 더 중요한 인물이라서 나를 더 걱정하는 것
이 아니라 내가 더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맞습니까?]
코노리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키베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닐
렀을 때 그 니름은 정직했다.
[어, 솔직히 그런 느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키베인은 그녀를 위해 미소를 지으며 닐렀다.
[예. 나도 그렇습니다.]
대수호자의 니름에 코노리와 또 한 명의 병사 가이쥬도 미소 지으며 훨
씬 정직한 태도로 닐렀다.
[이상하다고 생각됩니다만, 저희들은 대수호자님이 길을 잃거나 물에
빠지거나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됩니다만 데오늬 달비가 그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데오늬 달비는…]
[기다리고 있으면 뛰어올 것 같지요?]
코노리와 가이쥬는 정신적 웃음을 터뜨렸다. 키베인은 부드럽게 닐렀
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키보렌에서 더 위험한 쪽은 불신자여야 하지 않겠
습니까. 음. 나는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무슨 니름이신지 알겠습니다.]
코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이쥬는 먼 곳을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닐렀다.
[하지만 정말 그녀가 위험에 처해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대
수호자님.]
[가이쥬. 이곳에는 그녀가 북부에서 보지 못한 위험한 동식물들이 많습
니다. 그녀가 자신의 무지 때문에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니르기 어렵습니다.]
[하긴 위험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녀 때문에 키보렌이 위험할지도 모르
겠습니다.]
[예?]
가이쥬는 말 없이 손을 들어 바라보고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린 키베인은 신음을 흘렸다.
저편에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데오늬
달비였다. 그녀는 꽃을 한 무더기 무릎에 얹어둔 채 그것을 주물럭거리
고 있었다. 민첩하게 움직이는 데오늬의 손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있
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은 나가의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었기
에 키베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키베인은 그것이
데오늬의 머리 위에 있는 물건과 같은 것이리라 짐작했다.
그 때 꽃줄기를 휘던 데오늬가 그들의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반가운 표정을 떠올리던 데오늬는 갑자기 자신의 손에 든 것을 떠올리고
는 그것을 등 뒤로 와락 숨겼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제야 그
들을 발견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대수호자님?"
가이쥬와 코노리는 데오늬가 듣지 못하는 폭소를 터뜨렸다. 키베인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데오늬에게 다가갔다.
"예. 달비 부위. 뭐하고 있는 겁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수호자님."
"등 뒤에 뭔가를 감추는 일만 제외하고 말이죠."
데오늬는 어떻게 그토록 부당한 의심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 등 뒤에 뭔가가 있다고 의심하십니까, 대수호자님?"
"예. 아마도 당신 머리 위에 있는 것과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머리 위를 만져본 데오늬는 한숨을 내쉬고는 순순히 등 뒤에 숨
긴 것을 내놓았다. 그것은 데오늬의 머리 위에 있는 것, 그러니까 '가지
가 달린 꽃들을 서로 얽어매어 만들어진 둥그스름한 고리'의 만들다 만
물건이었다. 키베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뭡니까?"
"아스화리탈은 무겁습니다. 대수호자님."
키베인은 놀라거나 당황하는 대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데오늬의 말을 되짚어갔고 두 병사는 숙련가의 솜씨가 펼
쳐지는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 결과로 그들은 아스화리탈이 무
겁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알게 되었다. 데오늬의 말이 '이것은 화
관이다. - 꽃으로 만드는 머리장식이다. -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당신들
을 약올리려고 일부러 꺾은 것은 아니다. - 내가 그렇게 무신경한 사람
으로 보이나? - 꽃은 원래 꺾여있던 것들이다. - 이렇게 많은 꽃이 한꺼
번에 꺾인 것은 무거운 것이 짓밟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 코끼리보다도
훨씬 큰 것. - 나는 그것이 아스화리탈이라고 생각한다. - 아스화리탈은
크고 무겁다.'는 의미임을 알게 된 두 병사는 긴장하여 서로를 쳐다보았
다. 그들 중 가이쥬가 재빨리 닐렀다.
[대수호자님. 아마 정찰병들이 확인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일단은 빨
리 군단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달비 부위. 빨리 군단으로 돌아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스화리탈이 근처에 있다면 곧 전투가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대수호자님. 그런데…"
"예?"
데오늬는 미완성의 화관을 들어올렸다.
"아직 완성하지 않았는데요. 대수호자님."
"당신에겐 머리가 하나잖습니까. 달비 부위. 두 번째 것도 필요한가
요?"
"이건 허물벗기를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드리는 의미로 대장군께 드릴
것입니다. 대수호자님."
키베인은 그 생각이 대단히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키보렌의
대수호자는 갈로텍을 곤경의 늪으로 빠트리는 것이 그다지 점잖지 못하
다는 것을 되새길 수 있었다.
대나무 군단으로 돌아온 키베인은 데오늬를 만류한 것이 옳은 결정이었
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갈로텍은 대단히 분노한 상태였고 화관 같은 -
나가에게는 모욕이 될 수도 있는 - 물건을 점잖게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기대할만한 상태는 분명 아니었다. 갈로텍은 대수호자를 보자마자 닐렀
다.
[대수호자님. 지금 하텐그라쥬와 북부군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
는지 아십니까?]
키베인은 걱정스럽게 닐렀다.
[전투가 벌써 시작되었습니까?]
[그건 분명히 아닙니다. 그걸 전투라고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갈로텍의 니름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키베인은 대장군의 설명을
기다렸다. 대장군은 무의식 중에 비늘을 부딪치며 닐렀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텐그라쥬
외곽에는 하늘치가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부군은, 그걸 어떻게 이
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허공을 밟으며 차근차근 하늘치의 등 위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예? 하늘치의 등 위라고요? 허공을 밟으며?]
[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정찰병들은 그들이 귀하다고 생각
하는 모든 것에 걸고 그 보고가 사실이라고 맹세하더군요. 저는 뇌룡공
이 하늘치를 정신억압한 것이 아닌가 하는 황당한 생각마저 해보았습니
다. 그리고 하텐그라쥬에서도 뭔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
습니다. 정찰병들은 하텐그라쥬 방향에서 이해할 수 없는 열폭풍을 보았
다고 닐렀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기에 그쪽
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뇌룡공 륜 페이의 가공할 감지 능력 때문에 정찰병들은 어느 정도 이상
북부군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오래 전에 깨달은 상태였다. 키베
인은 갈로텍의 니름을 이해했다. 그는 무서운 기분을 느끼며 닐렀다.
[그들이 설마 하텐그라쥬에 하늘치를 떨어뜨리려는…]
[그렇다면 그 등 위에 타지는 않을 겁니다.]
대답이 빨랐기 때문에 키베인은 갈로텍 또한 그런 가설을 생각해보았음
을 알 수 있었다. 키베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들은 하늘치의 높이를 이용할 생각인 걸까
요?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는?]
갈로텍은 무슨 황당한 니름이냐고 되물으려다가 겨우 키베인이 전쟁 초
기부터 참전한 자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떠올렸다.
[대수호자님. 북부군은 투사무기를 별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소드락
을 복용한 우리가 눈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히는 것을 목격한 북부군은
이 전쟁 초기에 투사무기를 이미 포기했습니다. 따라서 그들 자신의 몸
을 던질 작정이 아닌 바에야 그들이 높이를 이용할 생각인 것 같지는 않
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렇다면, 글쎄요. 왜 올라가는 걸까요?]
갈로텍은 관자놀이 주변의 비늘을 조금 세우며 닐렀다.
[정말 이상한 생각입니다만, 저는 그들이 북부로 돌아갈 아주 기이한
귀환 수단을 얻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북부로 돌아간다고요? 그렇다면 그들이 벌써 여신을…]
[아니오. 저는 아직 수력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여신은 그대로 계십니
다.]
[그렇다면 그들이 전쟁을 포기하고 돌아간다는 니름입니까? 여기까지
와서?]
갈로텍은 잠시 니름을 멈춘 채 키베인을 마주보았다. 그는 내키지 않는
투로 닐렀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갈로텍의 침중한 니름에 키베인은 덩달아 침중해졌다. 그 때 키베인은
이 대화가 좀 이상한 것임을 깨달았다. 갈로텍에게는 주퀘도 사르마크라
는 짝을 찾기 어려운 참모도 있거니와 대나무 군단의 다른 수호장군들
또한 갈로텍의 고민에 동참해줄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어쨌든 갈
로텍은 신명을 봉인당한 수호장군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지 않아도
무방하다. 키베인은 갈로텍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장군님. 그런데 왜 제게 그런 니름을 하는 겁니까? 니르신 내용에
관심이 없다는 니름은 아닙니다만, 사르마크 상장군이나 다른 수호장군
들과 의논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갈로텍은 침울하게 닐렀다.
[대수호자님. 당신은 제 제안에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대
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나가들의 목숨을 통제하는 절대 지도자
가 될 용의가 있습니까?]
[그 질문을 지금 하시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기 두렵군요.]
[예. 짐작하시는대로입니다. 만약 그럴 용의가 있으시다면 대나무 군단
의 하텐그라쥬 입성은 당신의 지휘 하에 일어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
즉시 대수호자님께서는 지도그라쥬와의 인연을 잃게 될 겁니다. 대신 하
텐그라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겠지요. 그럴 용의가 없으시다면 하텐그
라쥬 입성은 제 지휘 하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 경우 다음 번의 기
회를 얻기는 어려울 겁니다. 제 생각대로 북부군이 귀환하는 거라면 그
들은 다시는 똑같은 일을 재현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그들이 하늘치를
완전히 통제한 것이라면 두 번째 키보렌 침략을 시도할 수 있을지 모르
겠습니다만, 그들은 더 이상 병력을 모을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조심스
럽게 군대에 의한 하텐그라쥬 공격은 재현되지 않을 거라 판단합니다.
따라서 하텐그라쥬의 구원자가 될 기회는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어쩌시
겠습니까?]
키베인은 거부감이 자신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감정에 의
해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키베인은 갈로텍의 니름을 다시 곱씹어보
았다. 그 때 키베인은 갈로텍의 니름에서 한 사람의 처신이 축소되거나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베인은 갈로텍을 바라보며 자신의
귀를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대수호자는 육성으로 말했다.
"만약 제가 대나무 군단을 이끌고 위기에 빠진 하텐그라쥬를 구하러 가
는 것이라면, 저 뇌룡공에 맞먹는 위대한 수호자 갈로텍은 그 때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갈로텍은 약간 지체한 다음에 대답했다.
"보다 훌륭한 지도자를 인정하고 따르는, 보다 못한 자에겐 쓸모있는
것임이 분명한 미덕을 발휘하고 있을 겁니다. 아마도 대수호자를 잘 보
필하는 것이겠지요."
"그 다음에는? 당신은 전쟁이 이곳에서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
양이군요. 당신의 입장은 뭐지요? 이것이 제가 하텐그라쥬의 구원자가
될 마지막 기회라면, 동시에 당신이 발을 뺄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것이 전후의 영웅이 되는 것을 모면할 마지막 기회라
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갈로텍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키베인을 바라보았다. 키베인은 그의 판
단과는 좀 다른 인물이었다. 갈로텍은 새로운 존경심과 새로운 경계심을
동시에 느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오늘 이 전쟁이 끝난다면, 전쟁 동안 형성된 나가 사회
의 권력 구조는 그대로 고정되겠지요. 그것을 변화시킬 기회는 오늘이
마지막일 겁니다. 예. 영웅은 몹시 바쁜 존재지요."
그 자신이 다른 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영웅이기에 키베인은 갈로텍의 말
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전쟁이 갈로텍의 지휘 하에 오늘 끝난다면
또다른 눈부신 전과를 올려 갈로텍의 위치에 도전할 만한 경쟁자 같은
것은 등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갈로텍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자들의 이용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야심가들이 전후의 나가
사회 재편에서 자신의 유용한 도구로 갈로텍을 노릴 테니까. 키베인은
갈로텍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계획을,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군요."
"무슨 말씀입니까?"
"이 전쟁 때문에 당신 자신의 계획을 방해받고 있지만, 이왕 맡은 전쟁
은 다른 사람을 앞에 내세워서라도 훌륭히 끝낼 생각인 것이군요."
"저는 대장군입니다."
"당신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다만, 대수호자님. 제 제
안을 받아들이실 경우를 가정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경우 저를 북부
의 총독으로 임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총독?"
"점령지 사령관, 식민지 총독, 뺏은 땅 지키는 사람입니다. 북부를 제
관할 하에 둘 수 있도록 해주십사 부탁드리는 겁니다. 저는 북부에서 찾
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분명 당신은 이 모든 일을 시작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지요. 당신은
혹시 북부에서 뭔가를 찾기 위해 이 전쟁을 일으킨 겁니까?"
갈로텍은 키베인을 외면하며 말했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제 질문에 대해 대답해주시는 것에 그것이 필요하
십니까?"
키베인은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별로 고민할 필요는 없는 문
제였다. 그의 입장은 극단적인 선택밖에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갈로
텍이 자신의 계획 때문에 전후에 벌어질 권력 경쟁에 참가할 뜻이 별로
없다면 키베인으로서는 갈로텍의 지지를 받는 편이 잔여 수명을 보존하
는 것에 도움이 된다. 그런 지지를 거부할 경우 그는 야심가들의 사냥감
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나가 전체의 입장을 보더라도 대답은 마찬
가지였다. 전후의 권력공백 사태는 무서운 내전을 부를지도 모른다. 나
가들에게는 지금 너무도 강력한 힘이 허락되어 있다. 물론 갈로텍은 그
런 내전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키베인의 경
우도 그에 못지 않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하텐그라쥬와 지
도그라쥬 양자의 지지를 받는 대수호자이므로. 키베인은 결정했다.
"제안을 따르겠습니다."
그것은 미묘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갈로텍은 그 미묘함을 깨달을 수 있
었다. 키베인은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대신 '따르겠다'고 말했
다. 갈로텍은 적절한 대답을 고를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아니오. 별말씀을. 제가 당장 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돌아가서 쉬십시오."
키베인은 갈로텍에게 인사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
던 보라크 군단장과 수호장군들이 갈로텍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갈로텍이 그들을 어떻게 하여 대수호자의 군대로 만들지 상상해보는 것
은 나름대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맛이 있기는 했지만 커다란 흥미는 느껴
지지 않았다. 키베인은 그보다는 데오늬에 대한 걱정을 느꼈다. 머리에
화관을 쓰고 있는 데오늬는 주위의 어떤 자제력 부족한 나가를 자극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키베인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무수한 나가
의 도시들과 강력한 군대와 유사 이래 어떤 지도자들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는 완벽한 지배력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북부군 부위 대나무 군단
포로'인 한 소녀를 걱정하며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갈로텍은 그다지 많은 니름을 소비하지 않고서도 의도했던 바를 성취할
수 있었다. 보라크 군단장과 대나무 군단의 수호장군들은 대수호자의 체
면을 생각하여 하텐그라쥬 해방 전투를 대수호자 키베인에게 바치자는
갈로텍의 제안에 쉽게 찬성했다. 그들은 오히려 갈로텍이 대수호자에게
좋은 예의를 보여준다고 찬사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몇 가지 지
시를 내린 갈로텍은 군단 전체를 서서히 움직이도록 명령했다. 뇌룡공의
경이적인 감각 때문에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이 갈로텍의 판단이었고, 그래서 대나무 군단은 지금까지 이동해왔던 것
처럼 한데 뭉쳐 하텐그라쥬로 향했다. 급격하게 전투 상황이 발생하더라
도 소드락 복용 시간만 있으면 수호장군들은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
이다. 갈로텍은 대충 그 정도로 생각한 다음 자신의 고민 속으로 빠져들
었다. 그러자 주퀘도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갈로텍."
"주퀘도. 대금을 듣고 싶은 겁니까?"
"그렇게 해주면 좋겠지. 하지만 용건은 그게 아니야. 네 속에 있는 것
의 문제를 좀 이야기하고 싶은데."
갈로텍은 비늘을 부딪쳤다. 주퀘도는 갈로텍의 입을 이용해 한숨을 내
쉬었다.
"어떻게 표현해도 좀 웃기는 일이 되겠지만 적당한 단어가 없으니 그냥
되는대로 말하겠어. 난 지금 강변에 서서 홍수에 떠내려온 오래된 익사
체들을 보는 기분을 느끼고 있어. 난생 처음 보는 것 같은 친구들이 카
린돌이라는 홍수 때문에 꾸역꾸역 몰려나오고 있군. 보통의 경우 스스로
도 자신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잠만 자고 있던 친구들이야. 지금 그
런 해묵은 군령들이 위로 올라오고 있어. 네가 조금만 아래로 내려온다
면 그 자들을 볼 수 있을 거야."
갈로텍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밀려나온다고요?"
"그래. 밀려나와.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표현하기가 어렵군. 내려와
서 카린돌과 이야기 좀 나눠보지 않겠나?"
"저를 죽일 겁니다. 지금 그 여자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습니다." [도대
체 화리트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음. 너는 그렇게 쉽게 말하지만, 이 아래의 북새통을 보고나서도 그렇
게 말하긴 어려울걸."
"이 위까지 올라올 것 같습니까?"
"이 기세가 꺾이지 않는다면, 조만간 그렇게 될 거야. 한 가지 고무적
인 사실이 있긴 하지만."
"그게 뭐죠?"
주퀘도는 손을 움직여 턱을 긁었다. 하지만 비늘의 감촉은 주퀘도를 별
로 만족시키지 못했고 그래서 주퀘도는 손을 도로 내려놓았다.
"이미 말했지? 해묵은 군령들이 위로 올라오고 있다고. 그런 영들조차
도 별 어려움없이 위로 올라오고 있어. 그런데 카린돌은 올라오는 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어. 네 말대로 화리트가 그녀를 억제하고 있나봐. 그
렇다면 그것은 이미 말했듯이 고무적인 사실이지. 하지만 바꿔말한다면
화리트의 억제조차도 이제 거의 효력이 다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해."
"언제쯤이면 앞으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몇 달 뒤? 며칠 뒤? 그렇지 않으면 몇 분 후? 이봐. 나는 이런 것 들
어본 적도 없어.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군."
"혹 화리트는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아, 그래. 화리트는 올라오지 않았어. 카린돌을 억제하려면 저 아래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군. 쳇. 끼워맞추는 식의 가설들뿐이로군."
갈로텍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이 분노인지 우울인지 공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카린돌은 그를 죽이겠다고 선언했고 갈로텍은 그 선언의 진
실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화리트의 표현처럼 거대한 증오나 거대
한 분노처럼 결국 카린돌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그녀는 기필코 갈로
텍을 죽일 것이다.
문득 갈로텍은 피로감을 느꼈다.
전쟁은 분명히 그 끝을 보이고 있었고 그를 대신하여 전후의 나가들을
이끌 사람 또한 정해둔 상태에서, 이제야말로 완전히 병탄된 북부에서
세페린의 살해자를 찾아나설 수 있게 된 상황에서 갈로텍은 내면의 문제
에 시름하고 있는 자신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내 속에 너를 담고 싶었다. 그래서 그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래 전, 샤나가가 달 뒤로 숨는 날, 적출식을 끝내고 허탈감에 괴로워
하다가 다른 대부분의 청년들이 취하는 행동을 그대로 모방했던 한 수련
자가 있었다. 고향을 떠나 방랑을 시작하는 것은 적출식을 끝낸 나가 청
년들의 의식 같은 것이다. 비록 그 방랑이 그대로 인생이 되어버리는 다
른 청년들과 달리 고향으로 돌아와 수호자의 길을 걷게 된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수련자들 또한 그 의식에 동참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화리
트 마케로우 또한 그런 방랑을 떠나는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 갈로텍은
그렇게 다른 청년들과 함께 하텐그라쥬를 떠났다. 하지만 그의 상실감은
단순히 자신의 몸 속에 있다가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된 어떤 장기에 국
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이와의 연결을 완전히 잃었음을 알게 되었
다. 지나치게 오래된 방랑 끝에 마침내 한계선 근처까지 도달하게 된 갈
로텍은 그곳에서 얼어죽어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무계획하게 방
랑했다. 하지만 동사의 운명 대신 그는 한 늙은 군령자를 만났다. 그 군
령자는 한계선 지대를 이용하는 무뢰배의 일원이었고, 어떻게 보더라도
변변찮은 인물이었다. 그를 뒤쫓는 자를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지나치게
많이 내려올 만큼. 하지만 추적자들을 완전히 따돌리는 것에 정신이 팔
려 있던 그 늙은 군령자가 내놓은 제안은 갈로텍에게 너무나 매혹적이었
다.
'그래. 나는 나 자신을 너의 신전으로 꾸미고 너를 모시고 싶었다. 그
러나 지금 그 신전은 어중이떠중이들의 굴혈이 되었고,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무서운 괴물이 몸부림치고 있구나. 그것이 나 갈로텍이다. 이
보다 근사한 희극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갈로텍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갈로텍은 나가살
육자를 떠올렸다. 그것은 언제나 그의 가슴 속에서 분노의 불길을 지필
수 있는 마법의 이름이었다. 갈로텍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일단은 화리트를 믿고 내버려둡시다. 적당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군
요."
"그러면 너는 뜻밖의 순간에 죽을지도 몰라."
갈로텍은 난폭하게 말했다.
"그러면 당신들에게는 곤란하겠군요.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전령도 못할
테니."
"전령하지 마."
"예?"
"이 짓은 이제 그만둬야해. 다른 녀석들이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상관
없어. 나는 더 이상의 전령에 찬성하지 않아. 만일 네가 위험에 처하면,
너를 도우려고 애쓰겠지만 전령하려고 애쓰지는 않을 거야."
"유료도로당에게 복수했기 때문입니까?"
"천만에! 네녀석은 나를 다시 유료도로당에게 데려다줘야 해. 나는 그
들에게 사과해야 하니까. 이미 말했지 않나?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어.
그리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지금 사과하고 싶다. 다시
그들에게 사과하기 위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떠돌며 수백 년을 보내지
는 않겠어. 그건 이중의 기만이야."
"주퀘도."
"함께 북부로 가자."
"예?"
주퀘도는 활기차게 말했다.
"카린돌이 너를 장악하려 한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어. 우리 둘이
서 그 여자를 눌러버리자구! 그리고 함께 북부로 돌아가자. 전쟁도 곧
끝날 것 같으니 이제 우리 일이나 하자. 너는 네 목적을 위해, 그리고
나는 유료도로당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북부로 가자. 두 사람이 있어도
식사는 한끼만 해도 되니 우린 싸울 일이 없는 길동무가 될 거야."
"길동무요?"
"많이 격상시켜준 거다. 원래는 그냥 전속 악사라고 말하려고 했다. 대
금은 꼭 챙겨라!"
갈로텍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신의 웃음에 놀라 더 크게 웃었
다. 주위의 병사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갈로텍은 신경쓰지
않은 채 말했다.
"예. 주퀘도. 북부로 갑시다."
카루는 믿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하텐그라쥬 외곽을 바라보았다. 하텐
그라쥬 수비군의 모습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희극적이었다.
[저 친구들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왜 자꾸 빙글빙글 도는 거지?
이봐, 스바치. 저걸 좀 봐.]
스바치는 낑낑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등에는 찢어진 나가의 육
신이 붙들어매어져 있었고 그래서 스바치는 힘들어하고 있었다. 창가로
다가오는 스바치를 보며 카루는 닐렀다.
[교대할까?]
[아직은 괜찮아. 조금 더 가서.]
카루는 스바치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수호자 보트린. 당신은 어떻습니까?]
스바치의 등 뒤에 묶여있던 처참한 모습이 나가가 닐렀다.
[나는 괜찮아요. 스바치가 힘들겠군요.]
카루는 심장탑으로 들어서기 전에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보
트린을 내버려둔 채 그들 둘 만 올라오는 편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
지만 그들이 하텐그라쥬 전역에 걸쳐 혼란이 일어난 틈을 타 마케로우
저택에서 보트린을 빼내어왔을 때 보트린은 다른 어느 곳보다 여신이 감
금되어 있는 냉동 장치로 가길 원했다. 그리고 카루와 스바치는 지금부
터 그곳으로 갈 작정이라는 니름을 한다는 실수를 저질렀다. 보트린은
그들에게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애원했다. 그들은 그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창가에 도달한 스바치는 창밖을 보며 카루 만큼 당황했다. 심장탑의 그
높이에서 그는 하텐그라쥬 수비군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그
리고 그 모습은 그가 보았던 그 어떤 광경보다도 황당한 것이었다. 하텐
그라쥬 수비군들은 필사적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때 보트린이
그들의 모습을 묘사해달라고 요구했다. 카루는 눈에 보이는 대로 닐렀고
그러자 보트린이 대답했다.
[그건 아마도 어디에도 없는 신이 획책한 일일 겁니다. 지금 저 위에는
세 분의 화신이 모두 모여 계신 모양입니다. 아마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한 것이겠지요.]
[북부군이 발자국 없는 여신을 구출하기 위해 그 분들을 데려온 것이겠
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올라갈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요?]
보트린은 부정했다.
[아니오. 그렇다면 이상합니다. 지금 밖에서는 끔찍한 재난이 펼쳐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보이지 않는 번개가 수십 개씩 땅을 때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
주들은 모두 자기 집에 틀어박혀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습니다. 그녀
들의 문제가 그거지요. 언제나 위기가 닥치면 자기 집밖에 생각할 수 없
다는 것.]
[그 분들은 책임감이 강해서 그럴 겁니다.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
는 남자들이 그 분들을 비웃을 권한은 없을 겁니다. 어쨌든, 하텐그라쥬
를 대상으로 그런 재난이 펼쳐질 이유가 없습니다. 발자국 없는 여신을
감금한 것에 대해 그 분들이 여신을 대신하여 분노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면.]
스바치는 비늘 서는 기분을 맛보며 닐렀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 분들의 징벌을 받는 것입니까?]
[우리의 죄는 분명히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 징벌을 왜
여신이 직접 내리도록 하지 않는 걸까요. 그 분들은 여신을 구출해내어
그 분께 우리들을 넘겨줄 수 있습니다.]
[그 니름이 옳은 것 같군요.] 카루는 보트린을 데려온 것이 역시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하며 닐렀다. [왜 그 분들은 아직 여신을 해방시키지
않는 걸까요?]
[저로서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 위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어서 빨리 여신께 가고 싶군
요.]
스바치는 그 니름에 동의했다. 그는 다시 기운을 끌어모아 계단을 밟았
다.
티나한은 비형의 목덜미를 붙잡아 나늬의 등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무
턱대고 고함을 질렀다. "나늬! 날아올라!" 마지막 순간까지도 티나한은
나늬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것인지 걱정했다. 하지만 나늬는 기다렸다
는 듯이 날아올랐다. 그 겉날개가 펴지는 것을 확인한 순간 티나한은 펄
쩍 뛰어 계단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티나한이 50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에 뛰어들자마자 등 뒤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티나한의 대처는 그렇게까지 절실한 것은 아니었다. 시우쇠가 만들어낸
산더미 같은 불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시우쇠는 그것을 냉
동장치 쪽을 어림하여 집어던졌다. 하지만 그 불덩이는 허공에서 느닷없
이 불어온 돌풍에 부딪쳐 튕겨올랐다. 불덩이는 길게 늘어나며 심장탑에
서 하늘로 치솟는 불기둥을 형성했다. 시우쇠는 불의 으르릉거림으로 자
신의 실망감을 토해내며 자신의 몸 전체에서 불을 일으켰다. 케이건은
시우쇠가 냉동 장치에 달려들 작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재빨
리 말했다.
"그만둬. 시우쇠."
시우쇠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케이건을 향해 포효했다.
"셋이 너를 상대할 거다!"
"그래. 그렇게 해. 얼마든지 그러라구. 하지만 먼저 나가들이 다 죽고
나서."
"절대로 안돼!"
케이건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하텐그라쥬 수비군을 빙글빙글 돌게 만든 것이 내 능력이라고 했었
지?"
시우쇠는 말이나 글로 표현될 수 없는 포효를 내지르며 달렸다. 하지만
냉동 장치를 향해 달린 시우쇠는 갑자기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는 가장자리로 달리고 있었다. 시우쇠는 격분하여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군."
시우쇠는 분노를 참지 못한 채 두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의 몸 전체
에서 불길이 피어오르며 몸을 따라 위로 치솟았다. 손바닥에 이른 불길
은 허공으로 치솟아 구를 형성했다. 케이건은 허리를 낮추며 바라기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시우쇠는 불덩이를 집어던지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계속하여 부풀렸다. 케이건은 시우쇠가 무엇을 할 작정인지 깨닫고는 눈
살을 찌푸렸다.
하텐그라쥬의 하늘에 두 번째 태양이 영글기 시작했다.
나늬에 탄 채 심장탑 주위를 선회하던 비형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시우쇠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열을 한 순간에 개방시켜 심장
탑을 통째로 부술 작정이었다. 그 때 한 바퀴를 돈 비형의 눈에 하텐그
라쥬의 외곽이 눈에 들어왔다. 비형은 또다시 경악했다. 하텐그라쥬 외
곽에서 거대한 대호가 용맹한 모습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 비형은
이곳에 사모의 심장병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우쇠님! 그만둬요! 이곳에는 심장병들이 있잖습니까? 케이건! 당신
은 아라짓 전사이지 않습니까! 왕을 보호해야 하잖습니까?"
비형의 외침은 나늬의 날개 소리를 통과하지 못했다. 비형은 목숨을 걸
고 그 바닥에 다시 착륙할 준비를 갖추었다.
언덕을 뛰어오른 순간 마루나래가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사모는 하마
터면 그 등에서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마루나래의 털을 움켜잡은 사모
는 당황하여 닐렀다.
[왜 그러는 거야, 마루나래?]
마루나래는 물론 입을 열어 대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몸으로 대답했
다. 마루나래는 온몸의 털을 빳빳하게 세운 채 경계심 가득한 시선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사모는 마루나래를 따라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도시의 모습과 나가 군단의 모습이 한꺼번에 사모의 눈에 들어왔다. 사
모는 군단의 모습에 놀라 쉬크톨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마루나래가 병사
들의 모습에 긴장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후, 사모는 아무래
도 자신의 추측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사들의 모습은, 그 상황에 포함되어 있는 절실함과 긴박감을 제외하
고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웃기는 모습이었다.
사모는 도무지 그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호장군들과 병사들
은 계속해서 심장탑을 향해 달려가려 애썼다. 사모는 그들의 니름도 들
을 수 있었다. [심장탑으로 가야해!]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원래의 위
치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 자신도 스스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있는 듯
했고 그래서 격분에 찬 니름들이 두서없이 들려왔다. 그들의 난처한 상
황을 이해하기 위해 사모는 먼저 웃음을 억눌러야 했다. 간신히 자신을
진정시킨 사모는 그제야 아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것이 북부군의 안전한 퇴각을 위해 여신께서 취하신 조처인가?]
사모는 그것 외에 다른 대답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조처에 우
선 감사했다. 하지만 사모는 자신 또한 그곳에 뛰어들었다가는 비슷한
꼴이 될 거라는 강력한 예감을 느꼈다. 사모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
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뒤를 따라온 금군들도 이런
희한한 구경거리는 처음 본다는 듯이 황당해 했다. 갈바마리는 아예 두
입을 쩍 벌린 채 말했다.
"간다."
"온다."
사모가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다. 갈바마리의 두 머리가 서로를 어처구
니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간다!"
"온다!"
사모에게는 갈바마리의 싸움을 말릴 여유는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
던 그녀의 눈에 심장탑 상층부가 들어왔고 다음 순간 사모는 헛바람을
삼켰다. 그 위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열기가 집중되고
있었다. 사모는 그것이 시우쇠가 일으키는 일임을 당장 깨달았다. 그리
고 그 의도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심장탑을 파괴할 작정인가?]
사모는 빙글빙글 돌고 있는 수비군들을 바라보며 비늘을 세웠다. 심장
탑이 파괴된다면 그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하텐그라쥬의 모든 시민들도
다 죽게 될 것이다. 사모는 페로그라쥬와 악타그라쥬의 처참한 모습을
떠올렸다.
[안돼!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들에게 알려줘야 해!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사모는 무턱대고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마루나래가 거부했다.
마루나래는 언덕 위에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모는 대호를 채근했
지만 대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모는 간곡하게 니르다가 육성으로 바
꿔 말했다.
"저곳에 들어가면 우리도 저렇게 된다는 거지? 하지만 가야 해!"
마루나래는 그 소리에 반응을 보이긴 했다. 귀를 움직인 것이다. 하지
만 그 뿐, 더 이상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좌절하는 사모에게 갈바
마리의 고함이 들려왔다.
"간다!"
"온다!"
왈칵 화가 치밀어오른 사모는 고개를 홱 돌려 갈바마리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고함을 지르기 전, 사모의 머리 속에 아주 기이한 상상이 떠올랐
다. 사모는 그것이 니름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싸울 수 있는 존재의 의미는 분명히 각별했다. 사모는 결국 손해될 것이
없다는 심정에서 갈바마리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신뢰하는
금군에게 보통 사람이라면 웃어버릴 명령을 전달했다.
갈바마리는 웃지 않았다. 대신 사모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갈바
마리가 언덕 아래로 걸어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사모는 조심스럽게 마루
나래에게 개념을 전달했다.
'마루나래. 따라갈까?'
마루나래의 앞발이 움직였다.
사모는 환호를 내질렀다. 그녀의 거의 황당하기까지 한 계획에 마루나
래가 동의했다. 그리고 사모는 마루나래의 판단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
녀와 마루나래, 그리고 금군들은 갈바마리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그들은 하텐그라쥬 외곽을 '똑바로' 가로질렀다.
빙글빙글 돌고 있던 나가들은 거의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충격 속에
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사모 페이와 두억시니들의 모습 자체도 경악스러
운 것이었지만 그들이 심장탑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는 것은 그들을 황
당한 기분에 빠져들게 하였다. 사모는 군단병들을 구출할 것인지를 잠깐
고민했지만 곧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서 사모는 갈바마리의 등만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갈바마리는 계속 그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었
다. 세상의 그 어떤 길잡이에게도 없는 독특한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오른쪽으로 간다!"
"왼쪽으로 간다!"
사모는 갈바마리의 뒤를 따라가며 쾌활하게 외쳤다.
"그래! 그렇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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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두드리는 말입니다만, 또 두드립니다. 하하. 주신 질문 메일에 대
해 타자가 대답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대부분 독자분들의 상상에 맡겨진
부분들입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6-3. 관련자료:없음 [57693]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8-19 01:36 조회:6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