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57화 (57/62)

눈물을 마시는 새.

16. 독수(毒水) - 1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다. 그  희망은, 당

연하기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생

에는 의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 어떤 지혜로운 자에 의해 그

의문이 풀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 자는 그 때부터  의문

없는 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전제와 정면

으로 대치되는 생이다. 의문 없는 생이 생일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설명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 혹은 그 지혜로운 자가 사깃꾼이라는 것.  - 가이너 카쉬냅의

<생각하는 동물들> 서문.

티나한은 바람에 깃털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거세고 거침없는 바람

이었다.

심장탑 51층의 면적이 작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위에서 바라보는

하텐그라쥬와 키보렌의 넓이는  광대했고 그에 대비되는  51층의 면적은

티나한에게 세워놓은 막대기 위에 서있는  듯한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물론 그 위에 지나치게 거대한 존재들이 한데 모여있다는 것 또

한 그런 불안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일찍이  지상의 어떤 구조물도 세

명의 화신을 한꺼번에 영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티나한은 위안을 얻기

위해 철창을 꽉 움켜쥐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뢰할 수 있는 길잡이, 능숙한 여행가, 좀 특별한 친절함을 가

진 그의 동료는, 사람이 아니었다. 티나한은 그 개념을 받아들이기 어려

웠다. 케이건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호인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티나한은

어떤 경우에도 케이건이 자신의 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문

득 티나한은 그것이 기묘한 일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대부분의 경우

케이건의 언동은 잘 단련되고 충분히 안정된 인격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었지만, 때론 성난 하늘치보다 더 끔찍한 것을 직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

을 주기에 충분한 모습들을 보이기도 했다.  티나한은 파름 평원에서 하

늘치를 불러내려 삼천이나  되는 두억시니를 학살했던  케이건을 떠올렸

다.

'왜 나는 케이건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지?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 위험해질 수 있는 녀석인데.'

심지어 티나한은 지금도 케이건이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을 상대하는 것처럼 긴장하고 있는 아기

의 반응은 티나한에겐 쉽게 납득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기는 다시 소리

죽여 외쳤다.

"티나한!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빨리 전령시켜!"

"여신님.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잘 이야기하면…"

"레콘이 대화를 이야기하는 건 거기에 물이  있다는 뜻이지. 저까짓 물

몇 방울이 너를 죽이지는 않아!"

티나한은 창피함에 볏을 붉게 부풀리며 냉동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흘깃 바라보았다. 아기의 말대로 그런 물에 빠져죽을 리야 없지만, 심리

적인 공포는 현상을 무시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티나한은 깃

털을 부풀리며 그곳에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케이건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케이건의 두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채 그를 향해 고정되어 있

었다. 마치 어린애가 나무작대기로 그린 낙서의  눈 같은 무의미하고 생

기 없는 눈이었다. 티나한은 자신도 모르게 그 눈에서 호의와 이해를 찾

아보려 애쓰며 미소지었다.

그 때 시우쇠가 갑자기 움직였다.  시우쇠는 케이건이 티나한을 바라보

는 틈을 노려 팔을 들어올렸다.

케이건의 팔이 잊혀진 전설의 도래처럼 움직였다.

눈길은 여전히 티나한에게 둔 채 케이건의 오른팔이 독자적으로 움직였

다. 바라기를 문 그 오른손은 옆으로 내뻗어졌다. 티나한은 자신도 모르

게 '쥐었다'가 아닌 '물었다'고 표현했음을 깨달았다. 그 오른손은 케이

건의 어깨에 달려있을 뿐인, 케이건과는  독자적인 뱀처럼 움직였다. 그

리고 그 뱀은 입에 문 바라기를 시우쇠의 가슴에 겨냥했다.

시우쇠의 몸에서 거칠게 불티가 튀어오름과 동시에 화염의 화신은 뒤로

튕겨지듯 날아갔다.

시우쇠의 몸에서 돌개바람에 휘말린  꽃잎들 같은 불티가  튕겨져 날았

다. 불똥과 함께 날아간 시우쇠의 몸은 51층의 바닥을 거의 가로질러 반

대편 가장자리까지 도달한 후에야  겨우 땅에 떨어졌다.  시우쇠는 한쪽

무릎을 세우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은

볏을 뻣뻣하게 세운 채 자신도 모르게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티나한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케이건은 먼저 시

우쇠를, 그리고 바라기를 바라보았다. 시우쇠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온

몸에서 불티를 날려올리고  있었다. 케이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고, 시험삼아 취해보는 듯한 동작으로  바라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저 아래쪽의 하텐그라쥬를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낮은 궤도로 힘껏 휘둘렀다.

티나한과 비형은 숨이 멎는 공포를 느꼈다.

케이건이 바라기를 휘두른 순간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과 함께 하텐그

라쥬의 한 구역이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의 형태는 기묘했다. 도시의 건

물과 대로, 광장 위로 길이가 수백 미터는  족히 될 호선이 번개처럼 치

달으며 잔해의 장막이 비스듬히 뛰쳐올랐다.  하텐그라쥬라는 얇은 도깨

비지가 바라기에 의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비형이 신음을 흘리며 주저

앉았다. 그런 상황에서 입을 열 수 있는  종족은 아마도 도깨비 뿐일 것

이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케이건이 고개를 돌려 비형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묘하게 비형과

비슷했다. 케이건 또한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불가해함을 느끼고 있었

다. 케이건은 특유의 친절한 태도를 발휘하여 비형과 자신 둘 다를 만족

시키기로 했다.

"한 번 더 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 둘 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지 알게 될 것 같소."

비형이 거부의 외침을 외칠 틈은 없었다. 케이건은 다시 바라기를 움켜

쥐고 허공을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톱이 한량 없는 적의로  땅을 할퀴는 듯했다. 건

물은 무너진다기보다 터져버렸고 포석과 돌기둥, 건물의 처마 등이 폭풍

을 일으키며 치솟았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잔해와  흙먼지들이 지상에

내려선 구름인 양 꿈틀거리며 압도적인 힘을  가진 것 특유의 무겁고 느

린 모습으로 서서히 번져나갔다. 비형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

다.

"그만두세요! 예?"

케이건은 비형을 흘깃 바라보고는 바라기를  얼굴 앞에 세워들었다. 그

리고 그곳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라기의 두 개의 칼날에

는 각자 얼굴의 반이 비치고 있었고, 그래서 그곳에는 세로로 쪼개진 케

이건의 얼굴이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더없이 참담한 심정으로 키타타 자보로의  사체를 내려다보던 괄하이드

는 폭음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하텐그라쥬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돌아보곤 다시 경악했다.

도깨비 감투를 쓴 태고의 야수가 산더미  같은 앞발로 하텐그라쥬를 할

퀴는 것 같았다. 대지를 강타하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하텐그

라쥬는 잔혹하게 찢겨져 너덜거렸다. 건물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을 육중

한 돌들이 먼지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허공을 수놓았고 흙먼지는 심장탑

을 뒤덮을 만한 기세로 피어올랐다. 초월적인  재난에 사람들은 입을 다

물지 못했다.

라수는 전쟁 동안 몸에 익은 습관대로  거의 반사적으로 뇌룡공을 돌아

보았다. 특별한 질문을 꺼내지 않은 것  또한 몸에 익은 습관이다. 필요

할 경우 륜은 언제나 라수의 질문을 듣기도 전에 대답했다. 하지만 사모

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린 뇌룡공의 모습을 본 라수는 그가 자신

의 의문을 해결해줄 상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수는 다른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레놀이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저건 나가살육신의 강림을 알리는 신호인가 보군요."

"그가 나가를 다 죽일까요?"

"그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흥분 속에서도 라수는 오레놀의 대답이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오레놀은

신의 전능함을 말하는 대신  신의 무능함을 말했다. 한  가지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신이라는 것은 라수에겐 당혹스러운 개념이었다. 라수는 주먹

을 쥐었다 폈다 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 북부군에겐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는 겁니까?

스님. 저… 소름끼치는 폭력은 우리와는 상관 없는 겁니까?"

"아마도 그럴 거라 생각됩니다."

라수는 키타타 자보로의 시체를 흘깃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북부군의 안전한 퇴각을 위해 매진하고 싶군요."

괄하이드 규리하가 당혹한 표정으로 동생을 돌아보았다. 라수는 침착하

게 말했다.

"북부군은 저를 따라 이  사지로 왔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의 행군이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동시에 그 거대함만큼이나 무의미한 행군이었음이

밝혀진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한계선 너머로 안전하게 돌

려보내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하텐그라쥬의 사람들이…"

라수는 고개를 가로저어 대덕의 말을 중간에 가로막으며 말했다.

"저 하늘치에 우리도 올라갈 수 있습니까?"

대덕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놀라운 사실을 공유

할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저곳에 계단이 있습니다. 제가 타고 내려온 계

단입니다. 당신도, 다른 누구도 그곳에 계단이 있기를 원하면 그 계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딛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라수는 시험 삼아 대덕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수는 욕

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눌렀다. 대덕의 말대로 그곳에는 계단이 있었

다. 오레놀의 말은 계속되었다.

"처음 저 위에 올라갔을 때 우리는 유적을 만질 수 없었습니다. 지상에

서 하늘치 유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만 있고 만질 수는 없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저 하늘치를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겠지요?"

"예? 아, 예.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라수는 대호왕을 바라보았다. 사모는  무릎에 놓인 륜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쥔 채 라수를 마주보았다.  라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표정은 내부의 긴장과 흥분을  감추고 있었지만, 바로 그 때

문에 긴장과 흥분을 드러내고 있기도 했다. 감출 것이 없다면 감추지 않

을 테니까.

"폐하. 회군을 윤허해주십시오."

사모는 배신감과 동정심을 거의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라수의 요구에

는 부당함이 없었다. 그녀는 북부의 왕이었고  북부군은 나가를 도울 의

무가 조금도 없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

사모는 라수의 눈빛 속에서 기이한 의미를  발견했다. 사모는 그 의미에

놀랐지만, 이미 그녀의 고개는 위아래로 움직였다.

라수 규리하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상장군의 지시는 레콘의 목소리

에 의해 증폭되어 북부군들 전체에 퍼졌다.  라수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

어넘긴 다음 대호왕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이제 나가살육신의  강림을 저지할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요?"

사모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본 것은  정확했다. 라수 규리하는 북

부군을 안전하게 퇴각시킬 의무를 다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에 대

해서는 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괄하이드 대장군은 놀란 표정으

로 사촌 동생을 향해 말했다.

"무슨 말이냐. 너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냐?"

라수는 대호왕을 향해 말했다.

"만일 폐하께서 돌아가라 하시면 폐하께서는  재위 이후 처음으로 반란

을 경험하실 겁니다. 제가 이곳을 놓칠 것 같습니까?"

사모는 어찌할 수 없는 미소로 얼굴을 물들인 채 라수 규리하를 바라보

았다. 그곳에는 4년 동안 방황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학자

가 역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의 목격자가 되려는 희망에 가득 차 눈을 빛

내고 있었다. 사모는 고개를 조금 내저으며 다시 륜을 내려다보았다. 그

녀의 얼굴에 다시 수심이 떠올랐다.

그녀와 륜 곁에서는 베미온이 손등을 물어뜯으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

으로 륜을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륜의 팔을 붙잡았다. 베

미온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사모는 의아한 표정으로 베미온을 바

라보았다.

"베미온 마립간?"

베미온은 끙끙거리며 말했다.

"움직이지 않아요."

사모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베미온은 륜의 팔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잇소리를 내며 그것을 끌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 팔

은 땅에 고정된 것인  양 움직이지 않았다. 사모는  당황하여 륜의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사모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무릎에 올

려놓은 륜의 머리는 쉽게 움직였지만, 그  외 다른 부분들, 땅에 닿아있

는 부분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라수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사모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륜의 머리에 대고 닐렀다.

[륜. 륜?]

대답은 없었다.

사모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륜은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용인들의 흔

적을 읽었다.

그들 중에는 선한 자도, 악한 자도 있었고 어리석은 자도, 지혜로운 자

들도 있었다. 태어났고 살아갔던 그들은 세계의 모퉁이마다 도저히 지워

질 수 없는 흔적들을 남겨두었고 그  흔적들은 모두 륜이 품어안아야 할

것들이었다.

세계가 그를 향해 니르고 있었다.

지층의 비좁은 틈을 힘차게 흐르는 지하수의 맥류. 나무 우듬지를 기어

올라가는 사마귀의 작디 작은 허파가 내뿜은  바람. 창공의 바람은 자유

롭다. 타버린 동물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침전수. 역동적인  암반의 춤.

다음 동작은 아마도 2만년 후.  아니, 1만 7천년 후.  저 나뭇잎의 추락

때문에.

륜이 가진 날카로움은 본능의 수준에서  발휘되고 있었다. 심장을 뛰게

하고 허파를 부풀리는 것처럼 륜은 자신의 상처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개입했다. 륜의 피가 상처 부위를 우회하면서  더 이상 실혈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흘린 피 또한 보충되었다. 륜의 몸은 눈을 깜빡이는 데 필

요한 힘보다 더 적은 노력으로 흘려버린 피를 보충했다. 몸을 누인 땅으

로부터 륜의 몸은 거침없이 물기를 흡수했고  물에 용해될 수 있는 모든

성분들 또한 물과 함께 흡수되었다. 식물이  그 뿌리로 양분을 빨아들이

는 것과 유사한 작용이었다. 그리고 땅으로부터 흡수한 물질들을 육체에

더하기 위해 체내의 조성비가 눈 깜빡할 사이에 수십 번 이상 바뀌었다.

그 변화는 번갯불 같았다. 그 때문에 륜의  몸은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

을 '소화' 없이 얻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상처 자체에 대한

죽음과 유리, 그리고 재생과 부활로 돌려졌다.

그 순간, 륜은 지상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생명체가 되어 있었

다.

생물은 자신이 무생물로 바뀌는 것을 막는 기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 능

력이 다한 순간 무생물로 바뀐다. 그러나  몸에 꽂힌 작살검으로 바람을

느끼고 땅에 닿은 몸으로 양분을 흡수하며  흡수한 물을 태워 체내의 불

로 변화시키는 륜은 그 순간 경계에 걸쳐 있었다.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존재. 하늘이 열린 이래 처음 꽃을 피운 나무. 그의 몸은 생명의 빠르고

긴박한 박자와 무기물의 장대하고 느린 호흡 양자를 모두 경험하고 있었

다.

륜은 자신의 몸이 자신을 구제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극도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누구나 알 듯 세상에는 놀라서 죽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죽었다고 믿는 순간 사람은 자신의 몸 상태

가 어떠하건 죽어버릴 수 있다. 그리고 륜이 처해있는 위험은 자신의 생

존성을 의심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었다.  륜은 스스로를 둘러싼 자

연의 흐름, 무기물의 흐름에 자신을 투사하고 싶은 견딜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 그것은 아름다웠고 심오했다.

죽음은 순박한 탈출이었다.

아스화리탈만이 륜을 이해했다.

작살검이 륜을 찌를 때 아스화리탈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아스

화리탈은 날개를 접은 채 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스화리탈을 성장

시킨 그 존재는 지금 경계에 걸쳐져  있었고 무엇으로든 성장할 수 있는

용은 륜이 무엇으로 바뀐다 해도 괘념치 않았다. 용은 륜이 그대로 멈춰

버릴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형태 없는 뿌리로 대지와 직접 대

화하고 영원성 속에 자신을 고정시키는 미래가 륜의 앞길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아스화리탈은 그에 대해 아무런 유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용은 어떤 부름을 느꼈다. 용은 고개를 좌우로 돌려

자신을 부른 존재를 찾으려 했다. 수직  날개 뿌리부분에 돋아난 가벼운

털들이 용의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하지만 아스화리탈의 시야

어디에서도 그런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문득  용은 자신이 착각하고 있

음을 깨달았다. 용을 부르고 있는 것은  지금-이곳이 아니었다. 용은 난

처하다는 기분을 느꼈고 그에 따라 그의 분화공들이 가볍게 벌름거렸다.

그 때 또다시 부름이 들려왔다.

용은 그 부름을 거절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스화리탈은 날개를 펴 지금이 아닌-이곳이 아닌 곳을 향해 날아갔다.

용이 처음 도달한 곳은 6천 8백년 전의 라호친이었다.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쓸쓸한 풍경을 둘러보던  용은 그것이

쓸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이하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은 선

혈처럼 붉은 빛이었고 거대한  설원은 보랏빛의 퇴적이었다.  색채 외에

다른 것들도 혼돈되어 있었다.  설원에서 기대하기 힘든  향기들이 용의

주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썰물이 빠진  모래밭에서 풍겨나오는 내음, 막

껍질을 벗긴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방향 등이 풍경을 무시하며 사방을 적

셨다. 그러나 용은 크게 괘념치 않은 채 자신을 불러낸 자를 찾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스화리탈은 다섯 가닥의 꼬리를 설원에 뿌려둔  채 주위를 휙휙 둘러

보았다. 어디에도 무정물들  뿐이었다. 설원은 완만한  구릉들로 뒤덮인

채 한없이 멀어지고 있었고 하늘은 무거워 보였다.

아스화리탈은 잠시 주의력을  잃었다. 그런 방심  상태에 빠져있었기에

용은 자신의 배 부분에서 갑자기 걸어나온 사람의 모습에 기겁했다.

아스화리탈은 세 장의 날개를 모두  펼쳤다. 번개가 튀어오르며 순식간

에 아스화리탈의 날개들은 수백  미터의 벼락 줄기로  바뀌었다. 하지만

아스화리탈의 배에서 나온 사람은 태평하게  걸어갔다. 아스화리탈은 의

아한 기분으로 자신의 앞쪽으로 걸어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문득,

아스화리탈은 그 사람이 자신을 '관통'해야만 그런 자세로 걸어갈 수 있

음을 깨달았다. 용은 긴 목을 구부려 그 사람의 얼굴을 옆에서 바라보았

다.

주위의 풍경처럼 남자의 모습 또한  기괴했다. 아스화리탈은 그런 색깔

의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분명히 인간으로 보였지만 그 얼굴은 초록빛

이었다. 덥수룩한 남색 수염이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어 용모는 알아보

기 힘들었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두터운  옷은 조악하다 할 정도

였지만 그 아래에는 땅딸막하지만 강인한  몸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

다. 발에는 커다란 눈신을 신어 눈밭에 발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

고 내딛는 규칙적인 걸음은 남자가 눈신과 설원에 익숙함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용의 존재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걸어갔다. 용은

시험삼아 앞발로 남자의 어깨를 건드렸다.

아스화리탈의 발은 남자의 어깨를 지나쳤다. 어르신이 된 것 같다고 생

각하며 용은 그 사실에 대해 숙고했다. 그 때 규칙적으로 걸어가던 남자

의 걸음이 멈췄다. 남자는 의아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입이 열

렸고, 매우 탁하지만 가까스로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퀴도부리타?"

순간 아스화리탈은 남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남자는 주위에 무관

심한 기질 때문에 부족민들에게 하늘치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의 부족은

'하늘치'를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태평하게도 용근을 먹지  않고 용으로

키워버린 그 무심함에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이 시절에도 용근은 잡초

처럼 흔하지는 않았지만 6천 8백년 후처럼 희귀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하늘치의 부족은 모두 용근을  먹음으로써 완전 동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완전 동화는 라호친의 살인적인  환경에서 부족을 보호하는 지혜였

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한없이 예민했고 그 때문에  서로에 대한 어떤

종류의 분쟁도 일으키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통해 부족

은 군생체를 이루고 있었고 바로 그  군생체의 힘으로 발톱과 이빨을 곤

두세운 채 달려드는 라호친의 소름끼치는 환경에 대항하고 있었다. 하지

만 하늘치는 자신에게 주어진 용근을 내버려두어 용으로 만들었고 그 용

에게 퀴도부리타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족민들은 그런 사태에 대해 적절

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상상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족민들은 의혹과 불안 속에서 하늘치와 그의 용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부족민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성벽, 그리고

그가 용근을 먹지 않아서 부족민들에 대해  무심함을 유지할 수 있기 때

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늘치는 용근을 먹었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크게 싸운 퀴도부리타가 어딘가로  도망쳤고 그래서 하늘치는 넌더

리를 내며 그 어린 용을 찾아나선 길이었다. 용근을 먹었더라면 용이 어

디에 있는지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하늘치는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스화리탈은 그가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하늘치는 문득 자신이 설

원 한가운데 서서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내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스화리탈은 그에게

퀴도부리타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고 싶었다.  아스화리탈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다시 부름이 들려왔다.

'미안. 아직 익숙하지가 않군. 네가 들었던  것은 메아리야. 6천 8백년

전의 과거에 부딪쳐서 돌아온 반향이지. 자, 다시 날아라.'

아스화리탈은 날개를 폈다. 다시 날아오르기 전 아스화리탈은 '하늘치'

를 흘끔 바라보았다. 6천 8백년 후  남자의 이름은 퀴도부리타에 관련된

흥미로운 헛소문을 만들어낼  것이다. 아스화리탈은  그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비행하던 아스화리탈이 날개를 접었을 때 어디선가 쾌활한 목소리

가 들려왔다.

"키탈저 사냥꾼들의 사냥기호야. 흑사자와 용."

"흑사자와 용이오?"

"둘 다 나가에 의해 멸종한 것들이지.  키탈저 사냥어로 읽으면 케이건

드라카가 되네. 그 친구가 사용하는 이름은 거기서 따온 걸세."

아스화리탈은 주위를 관찰했다.  그리고 용은 자신이  즈믄누리의 성주

서재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라 하기 어려

웠는데, 성주의 서재는 용의 거체가 들어갈  만큼 크지 않았다. 그 때문

에 아스화리탈의 몸 상당  부분은 서재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고 따라서

서재에 있는 것은 아스화리탈의 머리와 목 일부분이었다. 라호친의 풍경

과 달리 서재의 풍경은 훨씬 정상적이었지만, 아스화리탈은 사물들의 윤

곽이 조금 기묘하게 번득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스화리탈은 그

사실에 대해 다시 숙고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만족시킬 만한 대답을 얻

을 수 없었고 그래서 아스화리탈은 도깨비들을 바라보았다.

용의 앞쪽에서, 두 명의 도깨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용은 그 중

한 명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즈믄누리의 성주 바우 머리돌이었다. 즈믄

누리의 11대 성주이며,  살아있는 성주다. 즈믄누리의  장대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성주가 11명 뿐이었던 것은 성주들 대부분이 어르신의 형태

로 남아서 - 자신의 불운을 슬퍼하며 - 긴 세월을 다스리곤 했기 때문이

다. 바우 머리돌은 아직 죽지 않았고 그 또한 다른 열 명의 성주들과 마

찬가지로 죽은 직후에 성주 자리를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어르신들이 할

법한 재미있는 일에 전념할 야망을 품고 있었지만, 아마도 그 야망은 실

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아스화리탈은  바우 성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도깨비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스화리탈은  그 도깨비를 알고 있었

다. 즈믄누리의 무사장 사빈 하수언이었다. 그 직함은 만약의 경우 피를

볼 일이 도깨비에게 발생했을 때 그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무서운 의미

였지만, 사빈은 크게 괘념치 않았다. 도깨비의 역사에서 그런 불운한 처

지에 빠져야 했던 무사장은 한 명  뿐이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즈믄누리

의 무사장이 나설지도 모른다는 풍문만으로도  저 페시론 섬의 악당들이

맞이해야 했던 최후를 떠올리며 스스로 사태를 해결해버렸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만족스러워하지는 않지만  도깨비답게 거기서 불운

의 소지를 발견하지도 않는 두 도깨비를 보며 아스화리탈은 흥미로운 기

분을 느꼈다. 아스화리탈은 그들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저라면 그런  위험한 곳에 들어갈  때의 동료가

제정신이라는 확증이 있는 편이 좋겠습니다. 혹 그 킴이 늘상 먹던 나가

에 질린 나머지 별식으로 도깨비를 먹고 싶어하면 실로 곤혹스러운 일이

지 않겠습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  케이건의 분노는 모조리  나가들에게 돌려져

있어. 그리고 그에게 다른 분노를 살 수도 없어."

"분노를 살 수 없다고요?"

"그래. 서신에서 본 것처럼 그에겐 더 뺏을 수 있는 것도 없어. 나가들

이 모조리 다 빼앗아갔으니까. 좀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

가를 제외한 자들에게 있어서 케이건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이라

고 할 수 있지. 분노하게 할 수 없으니까."

사빈은 성주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스화리탈은 이해했다.

케이건은 안전하다. 나가를 제외한 자들에  대해서만. 그런데, 케이건이

자신의 위험성을 드러내는 상대는 종족으로서의  나가다. 개인인 나가에

게, 케이건은 때론 충성을  바치고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사모 페이와

요스비가 그런 일탈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문득 아스화

리탈은 6천 8백년 전에 보았던 '하늘치'를 떠올렸다.

그는 요스비를 닮았다.

아스화리탈은 그것이 기묘한 생각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해주면서

도 그 생각에 매료되었다. 요스비는  '하늘치'와 비슷하다. 문득 아스화

리탈은 요스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다

시 부름이 다가왔다.

'저 곳으로, 그 때로.'

아스화리탈은 날아올랐다.

아스화리탈은 밤의 하텐그라쥬에 도달했다. 그리고 앞에는 심장탑이 우

뚝 솟아있었다. 하마터면 심장탑을 들이받을  뻔했던 아스화리탈은 수직

날개를 곧추세우며 동시에 두 장의 수평  날개를 비틀었다. 공중에서 멈

춘 아스화리탈은 눈 앞에 한 나가의 얼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창문을 통해 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갈로텍이었다. 그러나 용은 갈로

텍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로텍은 용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스화리탈은  허공에 뜬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떤 폭력적인 기분이 아스화리탈을 휘감았고 용은 갈로텍의 머리를 짓

눌러주고 싶다는 욕망을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용은 이 모험이 허

락하는 것이 오직 관찰 뿐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스화리탈은 홧김에 앞

발을 휘둘렀지만 갈로텍의 상반신을 으깨고  심장탑에 심대한 타격을 주

었을 그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아스화리탈은  포기한 채 갈로텍을 바라

보았다.

갈로텍이 갑자기 비늘을 조금 세우며 닐렀다.

[용이라도 한 마리 날아올 것 같은 으스스한 밤이군요.]

아스화리탈은 경이감을 느꼈다. 갈로텍은 비어있는 공간을 바라보고 있

었지만 그것이 그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는 아니었다. 아스화리탈은 갈

로텍과 자신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그 유사성은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

에 속한 두 사람 사이에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스화리탈은 문득 자

신을 사람으로 표현했음을 깨달았다. 아스화리탈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구지?'

아스화리탈의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 한 구석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러자, 다음 순간 아스화리탈은 파름산에 있게 되었다.

용은 눈앞에서 쥬타기 대선사와 오레놀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던  대선사가 말을 했다. 아스화

리탈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내 꿈에 어디에도 없는 신이 현몽하셨다. 신께서는 내게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조만간  용의 모습으로 세상에 화신(化身)하실

거라고 알리셨다."

순간 아스화리탈은 깨달았다.

공포 때문에 용의 모습으로 지금이 아닌-이곳이 아닌 곳을 떠돌고 있지

만 그는 용이 아니었다.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나는 륜 페이다.'

륜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벼락이 번득이는 세 장의 날개와 다섯 가닥

의 꼬리 대신 나가의 팔다리가 그곳에 있었다.

륜은 몸을 돌렸다.

저편에서 아스화리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륜 자

신이 등에 작살검을 꽂은 채 쓰러져 있었다. 순간적인 감정의 동요가 일

어났지만 륜은 곧 자신을 진정시켰다. 아스화리탈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륜은 이해했다.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이 무서운 여행에서 륜은

자신도 모르게 강력한 친구의 모습을 빌렸다. 아니, 그것은 여행도 아니

었다. 진흙탕에 남겨진 발자국을 읽으며 지나간 동물의 모습을 추측하는

사냥꾼처럼 륜은 세계에 남겨진 자국을 읽으며 과거를 보고 있었다.

'네 모습을 빌려줘서 고마워.'

용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용에게는 입이 없었다. 그리고 눈 주위의 근

육들 또한 미소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형태였다. 하지만 륜은 아스화

리탈이 미소를 지었음을 깨달았다. 그 미소는  그 이름의 원래 소유자의

미소와 닮아 있었다. 륜은 웃으며  다시 주의를 기울였고,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을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세리스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세리스마와 갈로텍은 요스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륜 페이도 요스비

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세상이 나에게 니르고 있어.'

륜은 요스비를 직시했다.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미 짐

작하고 있었던 것처럼,  요스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요스비의 강력한

정신억압 능력은 그 자신의 정신 구조에도 지속적이고 심대한 영향을 끼

쳤고 어떤 의미에서도 그는 돌았다는 판정을 피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병리적 정신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스비는 폭력적인 성격

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이들에게 그저 유쾌하게 보이는 성격이었

고 어떤 자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인식되었다. 케이건이 바

로 그러했다. 그랬기에 흑사자와 용의 자손은 그 나가를 받아들였다.

그 순간, 륜은 다시 날아올랐다. 오로지 편의를 위해 륜은 당분간 그것

이 어떤 여행이라는 착각을 유지하기로 했다.

륜이 도달한 곳은 거대한 강을 낀 키보렌의  어떤 지점이었다. 강을 바

라본 륜은 그것이 무룬강임을 깨달았다.  륜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륜은 고개를 돌렸다.

구출대의 모습이 강변을 따라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륜은 반가움에

두 팔을 펼쳤지만, 곧 자신이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륜은 그 사실을 인정하며  구출대를 바라보았다. 티나한은 무룬강쪽

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으려 했고 케이건은 머리를 그다지 움직이지 않으

면서도 주위의 모든 것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

긴 것처럼 보이는 비형과 나늬가 그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비형이 갑자

기 말했다.

"흑사자와 용… 흑사자와 용… 알았다! 나가들에 의해 멸종당한 것들이

군요!"

'흑사자와 용. 케이건 드라카.' 륜은  생각했다. 뒤이어 티나한이 말했

다.

"키탈저 사냥꾼 식이야! 그래, 이제  생각났어! 전에 들어봤어. 키탈저

사냥꾼들 방식이야. 그 자들은 원수를 죽이고  그 간을 꺼내어 씹어먹었

다고 했어. 맞지?"

륜은 케이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비형이 두려워하는 표정

으로 말했다.

"나가들이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케이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요?"

"당연한 거잖습니까? 당신 이름이 나가에  의해 멸종당한 두 생물이고,

그리고 그걸 나가에 의해 멸망한 자들의  언어로 표현했고, 그러면서 나

가에 의해 멸망한 자들의 방식으로 나가를  대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들

을… 사냥해서 삶아먹는다고 했죠. 도대체 나가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거의 경건하기까지 한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는 겁니

까?"

'모든 것을 다 앗아갔지.' 륜은 케이건을 바라보며 동정심에 숨이 끊어

질 것 같았다. 륜은 케이건이 당한 일을 알  수 있었다. 세계가 그를 향

해 니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때 륜은 부정의 의미를 들었다. 륜은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아니라고?'

륜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세계는 인내심을 가지고 차

근차근 설명했다. 륜은 그 설명을 들으며 서서히 이해했다.

'잠깐. 케이건과 어디에도 없는 신은 현재 하나다. 케이건은 모두 뺏겼

지만, 어디에도  없는 신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둘은 하나.  그렇다

면…?'

륜은 깨달았다. 그 순간 아스화리탈이  고개를 치켜들어 화염을 내뿜었

다. 천공을 향해 치솟는 그 불기둥은  륜에게 길잡이가 되었다. 륜은 자

신의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륜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

고 그 불기둥을 향해, 지금-이곳을 향해 날아갔다.

라수는 깜짝 놀라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스화리탈이 갑자기 모든 힘

을 다 해 불을 뿜어올렸다. 용이 뿜어올린  그 불기둥은 하늘치가 떠 있

는 높이보다 더 높게 치솟아올랐다. 모든  사람들이 이 갑작스러운 행동

에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한 사람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륜을 내려다

보고 있던 사모는 동생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조용! 조용히 해 봐!"

왕의 명령에 사람들이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스화리탈 또한 그

들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사모는 륜의 입을 가리켰고 사람들은 입을 다

물었다. 륜에게 주의를 기울인  그들의 귀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

다.

"그에게… 보여줘요."

"륜? 륜, 뭐라고 했니?"

"케이건에게… 보여줘요. 그는 다 뺏겼지만, 모조리 뺏겼지만… 인간들

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 있어요. 그건  우리 나가들에게… 뺏기지 않았습

니다. 그에게… 그걸 보여줘요. 그가 모든 것을… 다 뺏기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

"인간들이 보관하고 있던 것?"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던 사모는  문득 자신이 그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추락감 같은  것을 느끼며 사모는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륜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가져간 사모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륜의 호흡을 살폈다.

사모는 안도했다. 륜의 호흡은 미약하지만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

었다. 사모는 조심스럽게 동생의 볼을  쓸어만졌다. 그리고 북부의 왕은

고개를 들어 베미온을 바라보았다.  베미온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륜과 사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베미온 마립간. 걱정하지마. 륜은 살아있다."

베미온은 그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륜의 몸을

움직여보려 애썼다. 사모는 그에게 뭔가 설명을 하려다가 포기하고는 오

레놀을 바라보았다.

"대덕?"

오레놀은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

"글쎄요.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하텐그라쥬공께서

는 케이건 드라카님의 상실감이 어디에도 없는 신의 선물을 통해 치유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가에 대한 케이건 드라카님의 증오

심은 그의 모든 것이 나가에 의해  상실되었다는 것에 기반하니까요. 만

약 케이건 드라카님께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그 증오심은 약화될지도 모

릅니다. 하텐그라쥬공의 말씀은 나가에 대한 증오가 인간에 대한 관심으

로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 같습니다."

"그 선물이 뭐지?"

"모릅니다."

대호왕은 깜짝 놀랐다.

"모른다고?"

"신들이 그들의 선민  종족들에게 무엇인가를 줬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합니다만. 예. 그런 것이 있을 거라는 가설이 있지요. 자신을 죽이는 신

은 도깨비에게, 발자국 없는 여신은 나가에게, 그리고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은 레콘에게 무엇인가를 준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걸 아무도 모른단 말인가?"

오레놀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황하던 그의

시선이 문득 부러진 심장탑에 이르렀다. 심장탑을 바라보던 오레놀은 자

신도 모르게 말했다.

"어쩌면 수탐자들은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신들을 찾아다닌 그들이라

면…"

사모는 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륜의 얼굴이 땅에 닿지 않

도록 사모는 그 머리를 옆으로 살짝 돌려놓았다. 그리고 사모는 벌떡 일

어나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에게 묻고 오겠다."

괄하이드가 경악하여 외쳤다.

"위험합니다! 폐하. 제가 묻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라수 규리하도 끼여들며 말했다.

"잠깐만. 스님. 스님께서는 아까 알던  사실들을 조합해서 모르는 사실

을 알게 되는 방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방법이  하늘치의 등 위에

있다고요?"

오레놀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어, 그 방법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정리해보는 것

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추론의  시작이 될 정보가 하

나도 없습니다. 아마 쓸모가 없을 거예요."

사모는 마루나래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루나래가 성큼 달려왔고 사모는

그 목의 갈기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시도해 보라! 그리고 짐은 수탐자들에게 물어보겠다. 그만, 말

하지마. 대장군. 하텐그라쥬를 짐보다 더 잘 아는 자는 여기에 없다. 그

대는 북부군을 책임져야 한다. 대장군은 책임지고 북부군을 안전하게 하

늘치의 등 위로 옮기도록."

괄하이드는 땅바닥에 있는 륜을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하텐그라쥬공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데요. 공작은 어떻게 하

실 생각입니까?"

사모는 주춤하며 륜을 내려다보았다. 그  때 아스화리탈이 가볍게 앞발

을 움직였다. 사모와 사람들은 놀랐지만 아스화리탈은 왼쪽 앞발을 부드

럽게 륜의 등 위에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사모는  그 뜻을 이해했

다.

"하텐그라쥬공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  아스화리탈이 그를

지킬 것이다."

괄하이드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사모의 눈은 까마득한 곳에 있는 아스화

리탈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화리탈은  조금 전 보여준 행

동 이외에 더 이상의  다른 다짐을 보여주지 않았다.  뭔가 안심될 만한

행동이나 눈짓을 기대하던 사모는 아쉬움을 느끼며 말했다.

"그리고, 괄하이드 규리하. 그대는 인간이다.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

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건 짐에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나 다른 인간들에겐 있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

것이 짐이 그대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짐이 아직 그대의 왕이고, 그대가

충성의 서약을 귀히 여기는 변경백이라면,  괄하이드 규리하. 짐의 말을

따르라."

왕을 바라보던 괄하이드는 갑자기  손을 비틀어 자신의  대도를 거꾸로

쥐어 올렸다. 칼자루를 위로 향하게 들어올린  대장군은 그 주먹을 앞으

로 내밀어 왕을 향했다.

"이 대도는 폐하의 것입니다. 저는 폐하를 따릅니다."

"고맙다. 짐의 변경백이여."

그리고 사모는 라수 규리하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부탁이 정말 기묘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간곡하게 부탁하겠

다. 그대는…"

"저는 학자입니다. 폐하. 저도 폐하만큼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스님과 함께 고민해보겠습니다."

"고맙다. 라수. 나가를 살려줘서… 고마워."

"그건 제 호기심의 문제입니다."

사모는 라수에게 미소를 지어준 다음  마루나래의 등에 올랐다. 마루나

래는 곧장 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갈바마리와 다른 두억시니들이 으

르릉거리며 왕의 뒤를 따라 바람처럼 달렸다.  라수는 왕과 금군이 사라

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왕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 사람이 세 명 더

있었다. 도깨비 감투를 쓴 그들의 모습은  그들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았

다.

바닥 끄트머리에 있던 시우쇠는 몸을  일으켰다. 화염의 화신은 케이건

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케이건은 여전히 바라기의 두 칼날을  바라보았다. 화신은 분노하여 외

쳤다.

"그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케이건은 바라기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는 냉동 장치와 수탐자들,

아기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케이건은 시우쇠를 향해 말했다.

"나는 최후의 아라짓 전사이며 마지막 키탈저 사냥꾼이다. 그다지 사교

적이지 못하다는 사실 이외에 그들의 공통점을  하나 더 들어본다면, 양

자 모두가 나가들에 대해 받아낼 것이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케이건은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보내는 듯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가들의 절멸이다. 그것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발자국 없는 여신의 아이들이다! 네가 어떻게 우리를 이곳으로

모이게 한 그녀를 실망시킬 생각인가! 그것이 그녀의 은혜에 대한 네 보

답인가?"

"나가의 보답은 무엇이었나!"

케이건의 목에서 핏대가 부풀어올랐다. 케이건은 끓어오르는 격분을 가

눌 수 없다는 듯 광포하게 외쳤다.

"내 희망에 대한 나가의 보답은 무엇이었나!  그들은 내 조국을 멸망시

켰다. 그들은 내 아내를 찢어 죽였다. 그들은 내 희망을 가장 잔인한 형

태로 짓밟았다! 이 몸! 이  추한 몸뚱이를 제외한 내  모든 것을 파괴했

다! 나는 이 몸을 나가의 제삿날에 올릴 번제물로 바쳐도 좋아. 몸을 불

사르는 그 불꽃 속에서 나는 웃을 것이다!  입술을 놀릴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가의 죽음에 대해 기쁨의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케이건의 무자비한 분노는  화염의 화신마저 주춤하게  했다. 시우쇠는

낮게 으르릉거리며 말했다.

"그것은 지금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너의 일도 아니다. 너는 어디에도

없는 신이지 복수심에 미친 케이건 드라카가 아니…"

"내가 곧 케이건 드라카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이상 어떤 나가도 그

것이 옛날 일이었다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

어! 그들이 나라는 것을 만들어내었으니까!"

맞불이 부딪치는 것처럼 시우쇠 또한  분노했다. 시우쇠는 냉동 장치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래서 모든 나가를 죽이겠다고?  그녀를 종족 잃은  신으로 만들겠다

고?"

케이건은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다시 바라기를

높이 들어올렸다. 비형이 비명을 질렀지만 케이건은  억제할 수 없는 분

노를 담아 하텐그라쥬를 또다시 도륙했다.  그 모습을 본 시우쇠는 노호

하며 두 팔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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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6. '독수(毒水)' 편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6-2.                        관련자료:없음  [57654]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8-18 00:49  조회:5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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