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15. 춤추는 자 - 4
나가 병사들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아기를 쳐다보았
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비형과 티나한은 황급히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케이건이 병사들
의 모습에서 어떤 의문의 소지를 발견했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것을 찾
아보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두 화신과 수탐자들, 그리고 나늬는 언덕 위에 엎드린 채 나가들을 내
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언덕은 노출된 땅이었고 비형은 케이건의
지시를 따라 주위를 뜨거운 도깨비불로 감싸 그들의 모습 전부를 언덕
위에 있는 뜨거운 바위 정도로 보이게 했다. 근방의 지리에 익숙한 자가
알아볼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들 모두가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비형
이 만들어낸 가짜 바위의 모습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리고 시우쇠가
일으킨 불과 수호장군들이 끌어들인 홍수에 의해 지형이 꽤 바뀌어 있었
기 때문에 언덕 위에 갑자기 드러난 바위는 주의 깊은 사람이 아니면 깨
닫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티나한은 도깨비불의 뜨거움을 감수할 만
한 것으로 여기며 눈을 부릅 뜬 채 도깨비불 너머로 하텐그라쥬를 내려
다보았다.
나가 군단의 모습은 분주했다. 그들은 시우쇠가 일으킨 불에 의해 타버
린 나무들을 이용하여 목책과 방벽을 건설하고 있었다.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수비전을 계획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
견 합리적이다. 북부군은 장기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
만 자연력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정면으로 격돌하는 이런 전쟁에서 그
런 노력은 쓸모없는 짓으로 보이기도 했다. 티나한과 비형은 케이건이
나가들의 그런 태도를 이상하게 여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건
의 질문은 나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어떻게 이곳에 온 겁니까?"
비형이 당황하여 말했다.
"케이건. 무슨 말이에요? 우리는 여신님의 능력으로 바람 같이 이곳에
온 것 아닙니까?"
"나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을 말하는 거요. 아무래도 내가 길잡이 맞나
보군. 나는 어떻게 우리가 시우쇠님에게 온 것이냐고 질문했소."
비형은 어리둥절하여 티나한을 바라보았고 티나한은 그 시선을 어깨 너
머로 돌려보냈다. 티나한의 등 뒤에 있었기 때문에 아기 또한 엎드린 모
습을 하고 있어야 했다. 아기는 부리를 닫은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이 말했다.
"조금 전에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왔잖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케이건은 목소리를 조금도 낮추지 않았다. 그는 나가들이 자신의 목소
리를 들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한 티나한의
깃털이 부풀어오르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케이건은 그에게 주의
어린 눈빛을 준 다음 다시 아기에게 말했다.
"카시다 암각문 앞에서 저는 당신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시우쇠님을 찾
아내려면 즈믄누리로 가야 한다고. 그 때 당신은 시우쇠님이 땅을 딛고
있을 테니 즈믄누리로 가지 않아도 그 분을 찾아내실 수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했어."
"그런데, 조금 전 당신은 시우쇠님과 당신이 서로를 느낄 수 없다고 하
셨습니다. 느낄 수 없는 상대를 어떻게 찾아낸다는 겁니까? 모순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카시다에서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거나, 혹은 두 분이
서로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전자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아기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카시다에서 한 말은 거짓말이었어. 나는 시우쇠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티나한은 볏을 뻣뻣하게 세웠다. 비형은 당황하여 시우쇠를 바라보았
다. 하지만 시우쇠는 엎드린 모습 그대로 아래쪽만 바라볼 뿐 그들의 이
야기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케이건은 다시 아기에게 질문했
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시우쇠님을 찾아올 수 있었던 겁니까?"
"나는 북부군을 찾아왔어. 북부군이 있는 곳에 시우쇠가 있을 테니."
아기의 설명에 비형과 티나한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케이건
은 의심 어린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신을 향하는 사람의 눈빛으
로는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여신님.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신 건지 여쭤보
고 싶습니다."
"상관없는 문제 아니야? 시우쇠가 있는 곳이 곧 북부군이 있는 곳이니
까."
"불필요한 설명을 생략하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케이건은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이해한 다
른 수탐자들은 걱정스러운 낯빛을 떠올렸다. 케이건은 고개를 돌리며 낮
게 말했다.
"여신이여.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 말씀드립니다. 지금부터 어쩌
면 저는 당신을 경계하는 언동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당신을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군요."
"케이건!"
티나한이 분노한 어조로 속삭였다. 물론 말로 끝내는 것은 티나한에게
드문 경우였고 그는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러나
아기는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티나한. 됐다. 진정하거라. 너희들의 길잡이를 믿거라."
"여신님. 저는 제 길잡이를 믿습니다. 하지만 케이건의 말은 너무…"
"괜찮다. 어쨌든 길잡이야. 뭔가 떠오르느냐? 북부군이 안전하게 퇴각
할 시간을 벌려면 저들을 분주하게 만들어줘야 할 텐데."
"저곳에 지진을 일으키실 수 있으십니까?"
아기는 케이건의 과격함에 미소를 지었다.
"글쎄. 이 주위의 땅은 매우 안정되어 있다. 저 고대의 도시는 그 역사
동안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지진의 여파는 북부군
도 덮칠 텐데.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심장탑 또한 위험하다는 점이지.
심장탑에는 사모 페이의 심장도 보관되어 있어. 네 왕이 위험하지 않은
가?"
"여신님의 능력으로 이동하면서 제가 저 자들의 목을 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해. 그런 이동 도중에는 저 자들이 너를 건드릴 수 없는 것처럼
너 또한 저 자들을 건드릴 수 없어. 그리고 네가 자꾸 무시하는 것 같은
데, 비형을 좀 생각해보지?"
비형의 얼굴을 슬쩍 본 케이건은 피비린내 풍기는 계획을 전부 포기했
다. 보다 온건한 계획을 떠올린 케이건은 그것을 아기에게 말했다. 케이
건의 상상력은 비형을 감탄하게 했고 티나한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아기
는 케이건의 제안이 실현가능함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아기는 단서를
달았다.
"그런데 그건 시우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군. 시우쇠에게 도움이 필요
하다고 말하면 무슨 뜻인지 알 거야. 그렇게 말해줘."
케이건은 자신이 세계 제일의 단거리 전령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손
닿는 거리에 있는 시우쇠에게 아기의 말을 전달해주는 좀 우스꽝스러운
역할을 수행했다. 시우쇠는 이해했다.
"재미있는 생각이군. 시작 신호는 네가 해라. 나와 아기는 서로 이야기
할 수 없으니까."
케이건은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시우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안 하십니까?"
"했다. 가자."
수탐자들은 아기를 쳐다보았다. 아기는 미묘한 미소를 지은 채 케이건
을 바라보며 말했다.
"끝났으니까 일어나거라. 다음에 주위를 살펴볼 수 있게 되면 그곳은
심장탑일 거다."
수탐자들은 약간 어이 없는 기분을 느끼며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의 모습이 언덕 위에서 사라졌다.
숲을 빠져나왔을 때 륜은 갑자기 쏟아져들어오는 엄청난 감정에 비틀거
렸다.
그곳에 오레놀이 있었다. 오레놀은 흥분해 있었다. 용인이 아닌 자라
하더라도 대덕의 새된 목소리, 복잡하게 움직이는 두 손, 빠르게 움직이
는 눈동자 등을 보면 그가 흥분해 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쉽게 흥분하는 사람의 몸동작과 정말 흥분하여 평소라면 상상도 하기 힘
든 모습까지 보여주는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륜에게는
오레놀의 흥분이 압도적으로 분명했다. 륜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사모의 손이 재빨리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륜?]
[아니오. 괜찮습니다. 가보시죠.]
사모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륜을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니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반대쪽으로 다가온 베미온 또한 한껏 걱정스
러운 표정을 지으며 륜을 부축하려 했다. 륜은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짐짓 기운차게 걸었다. 하지만 잠깐 동안 륜은 오레놀 대신 다른 사람들
을 보려 애썼다. 대덕의 흥분은 그들에게도 전염되고 있었고 륜은 한 번
걸러진 흥분에 먼저 익숙해지기로 했다. 마침내 오레놀을 보아도 좋겠다
고 판단한 륜은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 주의를 돌렸다.
"케이건 드라카님 말입니다!"
라수 규리하가 대답할 것이다. 륜이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라수 규리하
가 약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스님께서는 케이건 드라카님이 오셨냐고 질문하신 것이군
요?"
물론이지요! 오셨습니까?
"물론이지요! 오셨습니까?"
예. 조금 전에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화신을 모시고 이곳에 오셨습
니다.
"예. 조금 전에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화신을 모시고 이곳에 오셨습
니다."
조금 전? 그러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조금 전? 그러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륜은 자신이 '먼저 듣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가 듣고나서 두 사
람이 말했다. 륜이 가진 용인의 예민함은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해져 있었
다. 상대방이 하려는 말을 미리 짐작할 수 있는 그의 예민함은 이제 날
카로워질대로 날카로워져서 그 억양과 어조마저도 미리 알아버리고 있었
다. 그 결과로 륜은 말이 두 사람의 입밖으로 나오기 전부터 그것을 '듣
고' 있었다. 그래서 륜에게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메아리가 치는 것처
럼 들렸다. 라수가 말했다.
"그 전에 제가 질문 좀 하겠습니다. 스님은 도대체 어떻게 저 위에서
내려오신 겁니까? 저는 조금 전 스님께서 어디에도 없는 신의 신체였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오레놀은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웃기기 때문이 아니라
강렬한 흥분과 실망감 때문에 뛰쳐나오는 것임을 깨닫는 데는 보통의 감
각으로도 충분했고, 그래서 라수는 불쾌해하는 대신 미심쩍은 표정으로
오레놀을 바라보았다. 오레놀은 괴로워하며 말했다.
"저도 그랬으면 정말 좋겠군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치 유적
탐사가 마침내 성공했습니다. 저는 참관인 자격으로 바이소 계곡에 갔다
가 엉겁결에 하늘치 등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섯 번째 종족
이 남긴 유산을 이용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산을
통해 우리가 끔찍한 재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황급히 이곳으로 왔습니다. 이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의 설명이고,
더 긴 설명을 요구하면 당신의 목을 조르는 제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릅
니다. 그러니 대답하십시오. 케이건 드라카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오레놀의 눈을 들여다본 라수는 대덕이 절대로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라수는 오레놀의 말에 의해 발생하
는 무수한 질문들을 잠시 억눌러둔 채 대답했다.
"케이건은 두 분의 화신을 모시고 다른 수탐자들과 함께 하텐그라쥬로
들어가셨습니다. 공작?"
라수의 시선을 받은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라수의 말이 아직
까지 메아리처럼 들렸다.
"지금 심장탑에 들어가셨습니다. 여신께서는 약속하신대로 뭔가 조치를
취하셨습니다만 저는 그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륜은 뒤늦게 도달한 다른 장수들이 자신들이 듣지 못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위해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느꼈다.
라수는 오레놀을 돌아보았다.
"들으셨… 괜찮으십니까?"
라수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올렸다. 오레놀은 핏기가 가신 얼굴
로 라수를 멍하니 마주보고 있었다. 그렇게 상장군을 바라보던 대덕은
갑자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꽤나 평범한 말이지
만 언제나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그 유명한 말이 흘러나왔다.
"늦었군요."
대덕의 말에서 배어나오는 좌절감은 그들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사모는 자신도 모르게 륜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고 마루나래 또한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낀 듯 낮게 으르릉거렸다. 라수가 마치 도망칠 길 없는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은 사람처럼 거칠게 말했다.
"도대체 뭐가 늦었다는 겁니까, 스님?"
오레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의 손 사이로 공포의 예언이
흘러나왔다. 어울리지 않을 만큼의 명징성을 담고서.
"나가는 멸망할 겁니다."
주위를 둘러본 케이건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난생 처음 보는 광
경이었지만 그곳은 심장탑 안쪽이었다. 비형은 나늬의 뿔을 만지작거렸
다. 상황이 워낙 다급하게 진행되고 일행이 순식간에 휙휙 움직이고 있
었기에 비형은 나늬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늬는 독
특한 경력을 얻게 되었다.
"넌 세계 최초로 심장탑에 들어와본 딱정벌레가 된 거야. 물론 네 주인
은 세계 최초로 심장탑에 들어온 도깨비가 되었고. 기분이 어때?"
나늬는 수화로 몇 마디 대답했고 비형은 그 수화를 보며 빙긋 웃었다.
나늬는 덥다고 대답했다. 딱정벌레의 수화처럼 그곳의 기온은 끔찍하게
더웠다. 티나한 또한 더위를 느끼며 비형이 아직 도깨비불을 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비형의 질문은 티나한의 추측이 잘
못된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더운 거죠?"
티나한은 의아해하며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대답은 그의 등 뒤에
서 나왔다.
"이곳에서 나가들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 그래서 한 수호자가 이 탑의
꼭대기에서 더운 공기를 계속 아래로 내려보내며 농성을 하고 있다. 정
도 이상의 더위도 추위 만큼이나 나가들에게 치명적이니까."
아기의 대답에 케이건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쇠가 흥분하여 말
했다.
"그런데 발자국 없는 여신은 어디에 있는 거야?"
케이건은 아기가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을 기다리다가, 아기가 아무런 반
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시우쇠의 말을 반복했다.
"여신님.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신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몰라."
비형은 턱이 쑥 빠진 얼굴로 아기를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듣지 못하는
시우쇠는 초조한 표정으로 수탐자들을 둘러보았다. 케이건은 미간을 찡
그리며 말했다.
"모르신다고요? 시우쇠님의 경우와 같은 겁니까?"
"그래. 시우쇠의 경우처럼 나는 그 신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
다."
"곤란하군요. 진작 말씀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 탑은 대단히 높습
니다."
아기는 빙긋 웃었다.
"우리에겐 길잡이가 있잖아? 케이건. 네가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 말해
주겠어. 이곳 하텐그라쥬에서 일어난 일들 중 네가 궁금해하는 것이 있
다면 뭐든 질문해. 대답할 테니까. 그러면 너는 내가 알려준 것들을 통
해 신체가 어디에 감금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케이건은 아기의 말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깨달았다.
"당신이 스스로 짐작하실 수는 없는 겁니까?"
"그래. 신체나 화신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그럴 수 없어. 우회해서 생
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그러니까 네가 질문해야 해. 나는 알 수 없
어."
케이건은 대화의 절반만 들으며 분노하고 있는 시우쇠를 잠깐 돌아보고
는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아기가 시우쇠를 곧장 보지는 못하더라도
시우쇠 주위에 있는 수탐자들은 시우쇠를 보고 있다. 아기가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안다면, 그녀는 시우쇠를 보고 있는 수탐자들의 시
각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아기는 시우쇠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
다. 케이건은 자신의 생각을 시험해보았다.
"아까 여신께서는 풀이 타고 있는 걸 보니 저기에 시우쇠가 있을 거라
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시우쇠가 그곳에 있다고 말해줬기에 짐작할 수 있게 된 거야."
"생각한 대로군요. 알겠습니다."
케이건은 이해했다. 그가 약간의 암시가 될 수 있는 것을 찾아낸다면
아기는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신체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케이건은 어떤 것이 암시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티나
한과 비형은 케이건에게 대화를 맡겨두고는 주위를 경계했다. 케이건이
말했다.
"4년 전, 발자국 없는 여신의 감금이 발생한 시점을 전후하여, 이곳에
어떤 대규모의 장치가 운반된 적이 있습니까?"
"4년 전 하텐그라쥬의 유명한 대장장이 페니나 시에도가 제작한 커다란
금속 입방체가 이곳으로 옮겨온 적이 있었지. 그것은 51 층으로 운반되
어 설치되었어. 꽤 거대한 물건이라 옮기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 그런
데?"
케이건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문제가 풀렸음을, 그리고 아기의 말
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신체나 화신에 대한 것이라면 아기는 우회하
여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신체는, 아마도 어떤 구속력이 있는 장치에 의해
구속되어 있을 겁니다. 그것이 말씀하신 그 금속 입방체일 겁니다. 여신
의 신체는 51 층에 있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이해했어. 그러면 51 층으로 올라가야겠군."
"꽤 다리가 아프겠군요."
"괜찮아. 곧 도착할 거야."
아기의 말대로 되었다.
수탐자들과 두 화신이 계단을 오른 순간 그들은 51 층에 도착했다. 마
치 즈믄누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에 비형은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에 기묘한 것이 들어왔다. 비형은 깜짝 놀라 케
이건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기 나가가 누워 있는데요?"
케이건은 바라기를 움켜쥐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어떤 여자 나가가 바
닥에 엎드려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케이건은 낮게 속삭였다.
"비형. 만약을 대비해야 하니까 고개를 돌리시오."
비형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케이건은 티나한에게도 아기를
지키라는 식의 손짓을 보낸 다음 여자 나가에게 다가갔다. 여인의 모습
을 살핀 케이건은 그 여자가 군인이며 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 거라
고 생각했다. 바짝 다가간 케이건이 바라기를 뻗어 여인의 몸을 툭 건드
렸지만 여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티나한의 등 뒤에서 아기가
말했다.
"그 여인은 이곳의 열기 때문에 기절한 거다. 당장은 못 일어날 거야."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기를 위로 들어올렸다. 시우쇠가 말했
다.
"뭐 하는 거냐?"
"목을 자를 생각입니다만."
"관둬! 여신을 구출하는 것이 급하다. 한가하게 그런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케이건은 그 말을 거부할까 하다가 비형을 떠올리고는 바라기를 다시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들 앞쪽에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케이건은 바라
기를 다시 움켜쥐며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그는 곧 문이 잠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우쇠가 분노를 억지로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는 거냐?"
"문이 잠겨 있습니다."
시우쇠는 두말없이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주먹을 잔뜩 끌어
당겼다가 문을 후려쳤다. 케이건은 놀라며 몸을 돌렸다.
문은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졌다. 하마터면 나뭇조각에 온몸이 찢어질
뻔한 케이건은 화를 내며 시우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우쇠는 그에겐
시선도 보내지 않은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케이건은 시우쇠를 가리켜
성격이 불 같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며 그 뒤를 따
라걸었다. 그 뒤를 이어 티나한과 아기, 비형과 나늬가 걸어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간 케이건은 시우쇠가 방 가운데서 몸의 불길을 피워올
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앞쪽에 있는 금속
입방체 또한 발견했다. 그것은 꽤 거대한 물건이었고 그 안쪽은 나가나
인간 크기의 사람 한 명은 무리 없이 집어넣을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
는 듯했다. 케이건은 그토록 큰 물건을 이 높이까지 잘도 옮겼다고 생각
했다. 그 때 시우쇠가 격노하여 말했다.
"제기랄, 도대체 어디 있어!"
케이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있잖습니까?"
"여기라니, 그게 어디인데?"
케이건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시우쇠를 보다가 손을 들어 말 없이 입
방체를 가리켰다. 시우쇠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분노를 참지 못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금속 상자야? 젠장, 이제 보이는군."
이제 보인다고? 케이건은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시우쇠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은 채 앞으로 달려갔다. 시우쇠는 금속 입방체 앞쪽의
두 개의 문을 보다가 그것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활짝 열어젖혔
다.
수탐자들은 입방체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 움찔했다. 케이건은 놀
라워하며 말했다.
"그렇군. 냉기였어. 냉기로 신체를 얼려놓은 거야. 그런데 이건 도대체
어떤 기술이지?"
케이건은 눈을 가늘게 떠서 냉동 장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젊
은 여자 나가가 얼어붙은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녀의 몸은 금속벽에 기
대어져 있었고 두터운 얼음들이 그녀의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허리 옆
으로 늘어뜨려져 있는 두 팔 또한 두터운 고드름덩이에 의해 결박되어
있었고 위쪽에서 흘러내리다가 얼어붙은 것 같은 얼음들은 그녀의 머리
를 벽에 고정시켜놓았다.
빙하에 사로잡힌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비형은 동정심에 신음을 흘렸
다. 티나한 또한 그 끔찍한 모습에 볏을 꼿꼿이 세웠다.
시우쇠는 절망적인 몸짓으로 냉동 장치 안을 들여다보다가 케이건에게
로 고개를 홱 돌렸다. 눈동자 없는 그의 두 눈은 활활 불타며 케이건을
노려보았다.
"이 안에 있냐?"
'맙소사. 그것도 가르쳐줘야 하나.' 케이건은 다시 손을 들어 얼어붙은
나가의 얼굴을 가리켰다. 하지만 시우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신의
목소리가 좌절감 때문에 흔들렸다.
"안 보여."
케이건은 '풀이 타는 것'과 '금속 상자'가 이들의 한계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주위에서 암시를 주고 가르쳐준다 해도, 그럼으로써 신체의 주위
까지 다가가게 할 수는 있어도, 신체를 직접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케
이건은 신들이 왜 이런 기묘한 구속에 놓여있는지 의문스러워했다.
시우쇠가 몸을 돌려 케이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너는 보이지?"
"예."
"너는 보이지. 그래. 너는 다 볼 수 있지."
케이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화염의 화신을 바라보았다. 시우쇠의 코와
입으로 새파란 불길이 들락거렸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고 그러자
원래도 친근함을 느끼기 힘든 그 모습이 더욱 소름끼치게 바뀌었다.
"너는 다 볼 수 있다고… 너만이!"
갑자기 시우쇠가 두 팔을 높이 쳐들었다.
오레놀의 기이한 예언이 불러온 경직 상태에 놓여있던 라수는 먼 곳에
들려온 굉음에 간신히 그 경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라수는 고개를 돌
렸고, 그리고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심장탑의 윗부분이 통째로 폭발하고 있었다.
200 미터나 되는 심장탑의 위쪽 30 미터 정도가 가루가 되며 폭발했다.
흙먼지와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그 때문에 짧은 순간 심장탑은 기
묘하게 생긴 버섯처럼 보였다. 하텐그라쥬의 상공에서 일어난 이 소름끼
치는 재난에 륜은 육성과 니름 양쪽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사모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는 사모의 심장병이 당장 부서질 거라 믿었고 과거의 기
억에 비늘을 세웠다. 그의 눈 앞에서 요스비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도 선
명하게 펼쳐졌다. 그러나 사모는 죽지 않았다. 륜은 믿을 수 없다는 표
정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질린 표정으로 심장탑을 바라보던 사모는 동
생의 걱정을 이해하고는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사모. 저는 누님이 죽는 줄로만…]
[나는 괜찮아.]
경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섬뜩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레놀은 심장탑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작되었군요."
하텐그라쥬의 시민들과 수비군은 굉음을 듣지는 않았다. 하지만 심장탑
은 도시 어느 곳에서나 눈에 들어오는 높이였고 몇 사람은 때마침 그곳
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터뜨린 절규 같은 니름이 번져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광대한 하텐그라쥬 내에 있는 모든 나가들이 그 공포스러운 광경을
보며 비늘을 세웠다.
대략 50층에 해당하는 높이 아래의 심장탑은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었
다. 하지만 그 윗부분은 흙먼지로 변해 구름처럼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마지막 나가가 그곳을 바라보았을 때 흙먼지의 구름은 아래를 향하고 있
었고 그래서 마지막 나가가 받은 인상은 압도적인 크기의 야자수라는 것
이었다. 묘하게도 야자수와 닮은 모습으로 흙먼지는 원추형의 삐죽삐죽
한 가지들을 그리며 아래로 늘어뜨려졌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로 파편과 잔해들이 쏟아졌다.
나가들은 정신적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모든 나가들이 내뿜는
니름 때문에 그곳은 나가들에겐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소란스러운 곳
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다른 나가들과 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 있었다. 수호장군들, 특히 하텐그라쥬 출신의 수호장군들은 비늘
을 뻣뻣하게 세운 채 심장탑을 바라보았다. 그 광경에 의아해하던 인실
롭은 문득 그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가까이 있던 넋
이 나간 듯한 표정의 수호장군에게 닐렀다.
[괜찮소! 당신 심장병은 안전한 모양이군.]
그는 인실롭을 돌아보았다. 그의 몸에 있는 비늘들이 너무 곤두서서 그
는 나가가 아닌 존재처럼 보였다.
[심장병은 모두 저 높이 아래에 있습니다. 나는 심장병이 깨질까봐 걱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다른 이유가… 설마! 여신은 몇 층에 계십니까?]
[51층입니다. 저 정도 높이일 것 같은데요.]
인실롭은 상대방과 똑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경악에 사로잡혀 있던
그가 간신히 니름을 꺼내놓은 것은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였다.
[도, 돌격! 심장탑으로 돌격!]
인실롭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계획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리고 그 시점에서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인
실롭은 심장탑에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다른 나가들 또한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에게 설명을 요구하
거나 대책을 질문하는 자는 없었다. 다섯 개 군단의 나가들이 동시에 심
장탑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은 분노와 당혹에 휩
싸였다. 당황한 그들 사이에서 평범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전통적이
기는 한 대화가 오갔다.
[여기는 아까 지나갔던 곳 아냐?]
[그런 것 같은데?]
수호장군들과 병사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그들은 밤의
숲속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상황에 자신들이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흔히들 '빙빙 돈다'고 니르는 바로 그 상황이었다. 심장탑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렸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같은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은 밤도 아니었고 그들이 있는 곳은 숲속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 정신적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하텐그라쥬에 있는 나가들 중 심장탑의 폭발에 놀라지 않은 나가는 극
히 드물었다. 그들은 대개 기절해버린 비아스 마케로우처럼 주위의 상황
을 느낄 수 없거나 심장탑을 볼 수 없는 곳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하
지만 완전한 인식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심장탑의 폭발을 목격할 수 있
는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놀라지 않은 나가가 한 명 있었다. 수호자 세리
스마는 불쌍하게도 놀랄 겨를도 없었다.
갑자기 건물이 폭발했을 때 세리스마는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겪으며 위로 치솟아올랐다. 눈에 보이는 것은 거의 없었고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세리스마는 악몽 같은 시간들 속에
서 고문당했다. 자신이 떨어지고 있는지 치솟아오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그에게는 수만년 정도의 시간처럼 여겨지는 시간이 지난 후, 세
리스마는 겨우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세리스마는 주위의 풍경에 놀랐다. 그는 엄청난 시간이 흘렀다
고 믿었지만, 폭발은 이제 겨우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리고 세리스마는
심장탑 51 층에 쓰러져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 세리스
마는 주위의 모습에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의 주위에는 아무 것
도 없었다. 벽도, 천장도, 계단도. 존재하는 것은 바닥과 몇몇 사람의
모습, 그리고 냉동 장치 뿐이었다. 세리스마는 그 냉동 장치에 의해 이
곳이 51 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은 51 층 이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하텐그라쥬의 높은 상공을 지나는 거센 바람이 먼지 구름을 흩어놓았
다. 드러난 바닥에는 놀랍게도 별다른 잔해가 없었다. 폭발의 힘이 시작
된 곳이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리스마는 그 폭발의 원인이 무
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불덩이에 도깨비의 피부를 대충 씌워놓은 것 같
은 저 앞의 존재가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일으켰겠는가?
'시우쇠다. 저 놈이 어떻게 여길?'
세리스마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 간단한 행동은 세리스마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세리스마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보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움직일 수 없었다. 세리스마는 그 사실에 당황했
다. 그는 눈을 한껏 굴려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팔 하나는 어깨에서부터, 그리고 다른 팔은 팔꿈치에서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몸 곳곳에서는 기묘한 형태로 튀어나온 뼈들이 번득이고 있었고
다리쪽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쪽 또한 그다지 고무적이지 못한 광경일
것이 분명했다. 세리스마는 자신이 심장탑보다 더 심한 손상을 입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통이 없다는 사실은 그에게 기묘하게 느껴졌다. 신경의
어딘가가 잘못되었거나 세리스마의 두뇌가 엄청난 고통을 제대로 처리하
지 못할 정도의 혼란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세리스마는 자신이 완전히
무력한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 때 그의 눈에 저편에 쓰러져 있는 어
떤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여인은 그보다는 훨씬 양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폭발의 안쪽, 이곳
51 층에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졌다. 세리스마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
보려 했지만 뒤통수를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알아볼 수 없었다. 머
리를 움직일 수 없기에 더 이상의 시야는 제대로 확보할 수 없었고, 그
래서 세리스마는 공포 속에서 청력에 주의를 기울여 보았다.
아기가 탐탁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과격한 짓은 시우쇠의 소행인가 보군."
티나한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있던 모든 것이 사
라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지만 서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시야를 가질
수 있었던 티나한은 저 멀리 숲과 도시의 머리부분들을 볼 수 있었다.
비형은 나늬의 등을 덮듯이 엎드린 채 몸을 떨고 있었고 케이건은 어처
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시우쇠를 바라보았다.
"왜 이러신 겁니까?"
"냉동장치를 부술 수는 없으니까! 너를 부술 걸 그랬나?"
"그러지 않아주셔서 고맙군요."
"고마워할 것 없어! 그럴 수 없어서 안 그러는 것뿐이지, 나는 네녀석
을 박살내고 싶으니까!"
시우쇠의 포효는 그대로 화염이 되어 그의 입가에서 출렁였다. 케이건
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때 티나한의 등 뒤에서 아기가 말했다.
"마침내 셋이 모였다."
케이건과 티나한, 그리고 비형은 아기를 돌아보았다. 아기가 다시 우렁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를 상대하기 위한 셋이 마침내 이 자리에 모였다. 이제 우리는 너
를 일깨울 것이다."
케이건은 어리둥절했다. 아기의 말대로 그들이 여신을 구출하기 위해
온 것이 확실했지만, 셋은 아니었다. 이곳에 도달한 화신은 둘 뿐이었
다. 비형이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여신님. 말씀하신대로 발자국 없는 여신을 일깨워야겠지만, 셋은 아니
잖습니까?"
"나는 발자국 없는 여신을 일깨우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수탐자들은 다시 당혹에 빠졌다. 그 때 아기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시우쇠가 고함을 내질렀다.
"셋이 다 모였어! 이제 하나를 상대하겠다!"
케이건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하나가 누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너지!"
비형과 티나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앞으로 내뻗은 시우쇠의 손가락은 케이건을 겨냥하고 있었다.
사모가 륜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당황한 륜이 허공을 붙잡으려 애쓰는
동안 사모는 오레놀의 곁에 순식간에 다가섰다. 그녀는 오레놀의 어깨를
붙잡아서는 친절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를 돌려세웠다.
"뭐가 시작되었다는 거야?"
오레놀은 멍하니 사모를 바라보았다. 대덕의 얼굴은 침착해 보였지만
그것은 침착성이 아니었다. 사모는 대덕이 감정적 공황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다시 오레놀의 어깨를 흔들고나서야 오레놀은 입을 열
었다. 그의 말투는 마치 잠꼬대 같았다.
"셋이 하나를 일깨울 겁니다."
"여신을 구출한다고?"
"오랫동안 갇혀있던 신이 풀려날 겁니다."
"그러니까, 여신을 구출한다는 말이야?"
오레놀의 얼굴에 문득 조소 같은 것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희미했던 조소는 오레놀에게 활력을 돌려주었다. 오레놀은 훨씬 명확한
어투로 말했다.
"아니오. 어디에도 없는 신입니다."
사모의 몸에서 비늘이 요란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낮
았다.
"설명해봐."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경악을 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오레놀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오레놀은 차분하게 말했다.
"갇혀있었던 것은 어디에도 없는 신입니다. 지금 저곳에 발자국 없는
여신이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과 자신을 죽이는 신도
계십니다. 세 분이 모인 거죠. 셋이 하나를 상대합니다. 그 분들은 갇혀
있던 어디에도 없는 신을 해방할 겁니다. 그리고 변화를 재생산할 겁니
다."
사모는 변화를 재생산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라
수가 말했다.
"스님. 어디에도 없는 신이 어디에 갇혀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오레놀은 천천히 라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라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인간이 80년을 살면 장수한다고 말합니다. 100년을 살면 놀라운 일이
라고 말합니다. 120년을 살면 아낌없는 축복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천년 이상을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괴물이 됩니다. 사람들 사이
에서 살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라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오레놀의 말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오레놀의 태도는 확고부동했다. 오레놀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전부 다 말
할 것이며 방해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
다.
"그런데 바로 그런 괴물이 우리들 곁에 있습니다. 이토록 슬픈 괴물이
있을까요. 헤아리기도 어려운 그 옛날, 그는 품었던 모든 희망에 배신을
당하고 가졌던 모든 것을 뺏긴 끝에 복수만 아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그
래서 그는 적을 사냥하여 먹어치웁니다. 괴물에게 어울리는 일이겠지
요."
오레놀이 말하기 전부터 그 말을 들었던 륜은 경악에 호흡을 멈췄다.
사모 또한 입을 감싸쥔 채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오레놀은, 동정심
이 가득하지만 비난의 눈초리도 채 숨기지 못한 시선으로 사모와 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가가 그를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들 속에 숨은 채 나가들을 사냥해왔습니다. 이것이 하인샤 대사원이 그
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며, 대사원이 숨겨온 사실이기도 합니다. 사람
이 천 년을 살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겠지요. 물론 사람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괴물의 몸 속에는 그 외에 다른 자도 있었습니다. 춤추는 자.
진정코 춤을 아는 자. 그 자가 괴물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는
괴물과 함께 갇혀버렸습니다. 춤이 멈췄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모든
것이 멈춰버렸습니다."
오레놀은 심장탑의 부러진 윗부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롭
게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해 전율하며 대덕의 행동을 따라했다.
"그듸 저즈런 므흔 지잘 알외노라!"
시우쇠가 외친 아라짓어는 케이건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내가 무슨 끔
찍한 짓을 했다는 건가? 나가를 잡아먹은 것을 말하는 건가? 시우쇠는
다시 현대어로 바꿔 외쳤다.
"이 쳐죽일 놈의 자식아! 내가 지금 했던 말 기억나냐? 그래. 아라짓어
다! 천오백 년 전의 말이다. 지금 이 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지. 오래된 말이니까. 하지만, 권능왕 시대에도 이미 그런 사람은
없었어! 이 말은 천 년 전에는 이미 사라졌던 말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는 어떠냐? 사람들은 천 년 전의 말을 그대로 쓰고 있다! 제기랄, 너희
들과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 나가들마저 너희들과 말을 나누는 것
에 문제가 없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언어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면 말이다! 한계선 남쪽에 있던 나가들도 너희들과 똑같은 말을 쓴단 말
이다!"
케이건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언어가 바뀌는 것
이던가? 케이건은 간신히 그랬던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때 말
은 바뀌고 바뀌었다. 그가 살던 시절 이미 고대 아라짓어는 상당한 학식
을 쌓은 자들이나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
가 태어났던 시절의 말을 지금껏 무리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무려 천 년
이 넘는 세월 동안. 케이건은 그것이 상식적이지 않은 사실임을 이해했
다.
'그래. 북부와 교류가 없던 나가들마저 북부와 똑같은 말을 쓰고 있어.
그 둘의 마지막 교류가 있었던 것은, 남부와 북부가 뒤섞여서 같은 말을
썼던 것은 대확장 전쟁이 마지막이었군. 그렇다면 대확장 전쟁 이후로
언어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군.'
"대확장 전쟁 이후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어! 나가들은 남부에. 북부
인들은 북부에! 나가들은 항상 심장 뽑고 쥐 잡아먹으며, 그러다가 죽어
가. 북부인들은 항상 왕을 찾아다니지만, 결국 왕 없이 죽어가! 더 이상
하늘에 용이 날지 않고 빌어먹을 왕은 항상 없었어! 이토록 엄청난 정체
(停滯)를 모르겠냐! 우주가 숨막힐 정도로 멈춰져 있다는 것을 못 느끼
겠냐고!"
케이건은 무의식 중에 그 말에 대해 반대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모든 것이 바뀌고 있잖아?'
"그게 네가 저지른 짓이다! 이 끔찍한 정체를 바꾸기 위해 모진 일이
일어나야 했다. 간신히 나가들은 전쟁을 알게 되었어! 북부인들은 왕을
찾았고 하늘에는 용이 날아다녀! 남부와 북부가 서로를 쳐죽이고 있지
만, 그것은 동시에 생성이다! 변화의 생성이란 말이다! 이 세계에 변화
가 일어나고 있다고! 이런 엄청난 규칙 파괴를 일으키기 위해 발자국 없
는 여신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가혹한 것이다. 빌어먹을, 나는 규칙
파괴라고 했다. 원래 규칙은 그게 아냐!"
케이건은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래 규칙이 뭔데?"
"이 썩을 자식아. 좋은 질문이다. 윷놀이는 윷가락 네 개로 하는 거
다!"
비형은 웃음을 터뜨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저히 웃음이 나오
지 않았다.
"그게 규칙이야! 윷가락 네 개가 던져져야만 말들이 움직여! 변화가 계
속 일어난단 말이다! 윷가락 세 개로는 아무 것도 못해. 그래서 발자국
없는 여신은 엉터리 윷가락을 만들어내야 했어. 너를 대신할 윷가락 말
이다!"
케이건은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나를 대신할?"
"그래. 네 번째 윷가락. 자기 속에 갇힌 윷가락. 그 엄청난 시간 동안
전령하지 않고 한 사람의 몸 속에 숨어있던 윷가락! 도대체 네가 지금까
지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 뭣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냐?"
"나는… 나는 나가 체내의 소드락 때문에… 소드락 중독으로…"
"헛소리 하지마! 소드락은 더운 피 동물에게는 소용이 없어. 식물과 나
가에게만 작용해! 그건 네가 만들어낸 기만적인 환상일 뿐이야. 만약 그
게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작용했던 거라면, 그건 네가 그 효과를 바꿔버
렸기 때문이겠지!"
케이건은 뒤로 물러났다. 시우쇠는 그를 따라가며 외쳤다.
"그 웃기는 접시는 속임수고 미끼일 뿐이야. 나의 도깨비들이 흔히 만
들어내는 도깨비불처럼. 너만이 모든 화신을 찾아낼 수 있다. 깨지고 다
시 붙는 접시야 눈속임일 뿐이지. 네가 나를, 아기를, 그리고 발자국 없
는 여신이 있는 이곳을 찾아내었다. 우리는 서로를 찾지 못해. 아기는
시우쇠를 찾을 수 없었어! 시우쇠는 아기를 볼 수 없고! 너만이 모든 자
를 찾아낼 수 있어. 바로 네가 자신을 죽이는 자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
내며, 모든 이보다 낮은 자를 위로 떠오르게 하며, 발자국 없는 자의 발
자국을 추적할 수 있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나? 오직 바람만이 그렇
게 할 수 있어."
파괴된 탑의 끄트머리에 몰린 케이건은 더 이상 물러나지 못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듯이 선 시우쇠는 온몸에서 불길을 일으키며 노호했다.
"얼간아! 이제 기억을 떠올려라. 네 힘을 훔쳐쓰던 녀석은 내가 태웠
다. 이제 네 힘과 함께 앞으로 나와라!"
"내 힘을… 훔쳐쓰던?"
"유해의 폭포! 그 녀석이 어떻게 멀리 떨어져 있는 두억시니를 통해 의
사 소통을 할 수 있었겠나? 그 녀석은 네가 한 눈 파는 사이에 네 힘을
훔쳐쓰고 있었다. 바로 너의 힘이지. 너는 조금 전에도 그 힘을 썼어!
나가들을 빙글빙글 돌게 만든 건 우리 둘이 아니라 너다. 너는 바람이
다. 네가 어디에도 없는 신이다!"
시우쇠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의 눈은 허공을 보는 듯이 방황했고
시우쇠는 그런 방황에 분개했다. 그는 다시 케이건을 쏘아보며 외쳤다.
"이제 내게 그들을 돌려줘! 나는 두 여신과 너무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
다. 다시 윷놀이에 참가해!"
"케이건 드라카는 극연왕의 오라버니입니다. 나가들을 쳐죽이는 일밖에
몰랐던 누이에게 염증을 내다가 결국 누이를 떠나버린 그 왕자 말입니
다."
라수를 비롯한 역사에 해박한 사람들 몇 명이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극연왕이나 그 오라버니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모도 갑작스럽게
오래된 의문 하나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왕자! 그래서…"
"예?"
사모는 언젠가 티나한도 품었던 의문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다고 말하더군. 그런
데 아라짓 전사는 왕의 허락 없이는 아내를 얻을 수 없잖아. 나 이전에
는 북부에 왕이 없었는데 케이건이 어떻게 아내를 얻을 수 있었는지 이
상하다고 생각했어."
"예. 그 분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아라짓 전사는 물론 왕의 허락 없
이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외가 있는데, 왕족일 경우는 허락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왕족의 혈통은 번성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
입니다. 아라짓의 왕족들은 보통 가장 용감한 아라짓 전사이기를 요구받
았고 그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기에 전쟁터에서 많이들 죽었습니다. 그래
서 더욱 그런 규칙의 예외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 분은 아라짓 전사의
규칙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한 번도 자신이 지켜야할 것을 어긴
적이 없었지요. 우리에게도 그러셨습니다."
"우리라니, 하인샤 대사원을 말하는 거야?"
오레놀은 계속 설명했다. 그의 말투는 이제 설법하는 것처럼 들렸다.
"고대 아라짓의 왕가는 대사원의 수호자이기도 했습니다. 케이건 드라
카는 아라짓의 마지막 왕족이고, 그래서 왕가의 일원으로서 우리들의 요
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우리는 대대에 걸쳐 그 분을 참 많이도 이용했지
요. 물론 우리의 궁극적인 요구는 그 분을 다시 왕좌에 복권시키는 것이
었습니다. 아마도 그 분은 우리들의 다른 요구를 들어주심으로써 그 요
구를 피하려 하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분은 왕좌에 앉으면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시는 분은 아
닙니다만 그 경우, 죄송합니다. 폐하. 나가들을 더 이상 사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키탈저 사냥꾼이기도 하니까요."
사모는 질문했다.
"어떻게 아라짓의 왕자가 키탈저 사냥꾼이기도 한 거지?"
"누이에게서 도망친 다음 그 분이 자신의 몸을 의탁한 곳이 바로 키탈
저 사냥꾼들의 품이기 때문입니다. 키탈저 사냥꾼들은 도망쳐온 흑사자
의 자손을 용의 자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분이 아내를 만난 곳도 그
곳이었습니다. 아, 용의 자손이라는 것은 키탈저 사냥꾼들이 자신을 지
칭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모순의 힘을 믿었던 것도 모순이 용의 힘이라
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륜은 나가답게 식물로 태어나 식물의 가장 큰 적이 되는 용의 모순을
곧장 떠올릴 수 있었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왕의 자격이 없군. 케이건이야말로 진실로…"
오레놀은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 당신은 누구도 정당성을 의심할 수 없는 북부의 왕입니다. 아라
짓 왕가의 마지막 후손인 케이건 드라카님이 당신을 지명했으니까요. 아
라짓의 왕가는 혈족 계승에 대해 그렇게까지 까다롭지는 않았으며 오히
려 유연한 편에 가깝습니다. 영웅왕은 레콘이었지요. 폐하의 정당성은
세상의 누구보다도 완벽합니다."
"잘 모르겠군. 그리고 지금 당장 궁금한 것은 그것이 아니야. 나가들이
멸망할 거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지? 갇혀 있던 신이 드디어 풀려
나는 것이라면, 그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오레놀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말씀드렸듯이 케이건 드라카는 어디에도 없는 신의 신체입니다. 천년
이 넘는 세월 동안 함께 있어온 두 분은 이제 더 이상 둘이 아닙니다.
저는 하늘치 위에서 모두 읽었습니다. 복잡한 설명은 관두겠습니다만 이
미 알고 있는 정보들과 희망이 구현되는 능력을 잘 조합시키면 정보 자
체에서 다른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는 정도로만 말하겠습니다. 어쨌든,
그 분들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케이
건 드라카에게서 어디에도 없는 신을 일깨운다는 것은, 케이건 드라카라
는 나가살육자에게 신의 힘을 부여하는 행위가 됩니다. 세상의 그 누구
보다도 나가를 증오하는 신이 세상에 발을 딛게 되는 겁니다. 나가살육
신이지요."
사모는 눈 앞이 아득하게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 암흑 속을 방황하던
사모의 시야에 갑작스럽게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하텐그라쥬의 심장탑, 혹은 심장탑의 잔해 위에 우뚝 선 채, 케이건은
극연왕을 떠올렸다.
재위 전반기에는 나가들에게 맹공을 퍼부어 대확장 전쟁에서 나가들이
거둔 성과의 대부분을 무효화시켰고, 후반기에는 그런 자신을 까맣게 잊
은 채 북부의 모든 극을 잇는 것에 평생을 바쳤던 왕.
케이건은 그의 누이를 생각했다.
케이건이 떠난 이후 극연왕은 세상의 모든 극을 이으려 했다. 그녀는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의 격언을 듣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길은 방랑자
가 흘렸던 눈물을 기억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방랑자를 따라갈 수는 없
다. 모든 길이 누이에게로 통했지만 케이건은 누이에게 돌아가지 않았
다.
그가 지은 죄가 너무도 가증스러웠기에.
케이건이 갑자기 말했다.
"내가 어디에도 없는 신의 신체라는 것이군."
"그렇다! 네 녀석이 죽기를 거부했기에 그 긴 시간 동안 전령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이제 발자국 없는 여신이 깨어나면 우리는 네 속에 있는
그를 꺼낼 것이다!"
"그냥 죽여도 되는데."
케이건의 말에 시우쇠는 움찔했다. 케이건은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죽이면 내 속에 있던 어디에도 없는 신은 다른 인간에게로 전령
할 거야. 그냥 나를 죽이기만 하면 돼. 그런데 왜 셋이 모인 거지? 셋만
이 하나를 상대하지. 그렇다면, 이곳에 셋이 모였다는 것은 이미 내가
하나라는 말이군."
시우쇠의 몸 곳곳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시우쇠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아기는 케이건의 말에 집중했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나는 신체가 아니야. 이미 화신이야. 그런 것이지?"
시우쇠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아냐!"
"그렇지 않아. 나는 화신이야.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너희
셋을 찾아낸 것도 그 때문이야. 내가 느끼는 나는 극연왕의 오라비가 아
니라 어디에도 없는 신이야. 하지만 나는 나를 극연왕의 오라비였던 어
떤 얼간이로도 느껴. 어떻게 된 걸까."
케이건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턱을 받쳤다. 그 동작은 한가로워보이기
까지 했다. 문득 케이건의 손이 등 뒤로 옮겨갔다. 그의 손이 바라기에
닿는 것을 보며 아기는 여린 깃털을 부풀렸다. 케이건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둘이 하나로 합쳐졌군."
비형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때 아기가 솜털을 떨며 말했다.
"비형. 티나한. 발자국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