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15. 춤추는 자 - 2
북부군은 요구 조건의 전달이나 전투 선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걸어온 모습 그대로 전투를 개시했다. 그리고 그 전투의 시작은
꽤나 상징적이면서 동시에 실용적인 것이었다. 바람이 하텐그라쥬 쪽으
로 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북부군 상장군 라수 규리하는 주저하지 않
고 하텐그라쥬가 일찍이 받아본 적이 없던 험악한 도전장을 제출했다.
북부군은 밀림에 불을 놓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세리스마가 그 수증기를 갈취하여 심장탑이라는 극소
지점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하텐그라쥬 근교 수십 킬로미터 지대는 대지
에서 각질층이 일어날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무기물처럼 건조해진 나무
의 뿌리들은 무심코 부딛힌 발길에도 껍질을 폭발시키며 부서져내렸고
기운없이 늘어진 나뭇잎들은 가지 끝에서부터 거멓게 타들어가고 있었
다. 시우쇠는 그런 건조한 숲에 거친 화염의 야수들을 풀어놓았다. 이
맹포한 공격에 숲은 딱딱한 비명을 내질렀고 불은 밀림을 탐식하며 순식
간에 부풀어올랐다. 불티와 나뭇잎들이 열기를 타고 치솟았고 가지들은
불의 꽃을 풍성하게 피워올렸다가 잿더미로 바뀌어 무너져내렸다. 다가
오는 석양 아래, 그것은 황혼이 대지를 불사르는 광경처럼 보였다.
화관(火冠)을 쓴 수관(樹冠)들의 모습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피어오
르는 재는 흰 꽃잎이고 불티는 이 놀라운 나무들의 꽃가루였다. 잔인무
도한 꽃가루들은 거침없는 가루받이를 통해 어미의 몸을 부수는 자손들
을 무차별적으로 재생산했다.
비는 하늘이 땅에게 건네는 대화다. 그리고 불은 땅이 하늘에 향해 발
하는 외침이다.
인실롭과 수호장군들은 절규하며 비를 끌어모았다. 하텐그라쥬를 향한
화공을 저지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모든 나가들의 애정이 모
여드는 장엄한 도시에 가해진 무도한 모욕에 대한 분노 또한 거기에 있
었다. 세리스마가 많은 습기를 수탈했기 때문에 그들은 수십 킬로미터
저편에서 습기를 모아들였다. 분노한 수호장군들의 소환에 먹구름이 사
방에서 몰려들었다.
그러나 하텐그라쥬를 향해 모여들던 먹구름은 너무도 일찍 비를 뿌렸
다. 화재가 일어난 곳에 닿으려면 수 킬로미터를 남겨둔 위치에서 구름
은 비가 되어서 무너져내렸다. 인실롭은 경악하여 수호장군들을 바라보
았다. 누군가가 절망하여 닐렀다.
[용인이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니른다면 그건 도움이 아니었다. 정면으로 저항하는 대신 힘
을 더해버리는 재치 있는 방해였다.
북부군의 진지 가운데서 륜은 아스화리탈의 두 앞발 사이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의 눈은 가볍게 감겨져 있었고 오른손은 축 늘어뜨려져 있었
다. 허리에 얹힌 왼손만이 간혹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주위에 있
는 북부군에게 륜의 모습은 산책 도중에 잠시 멈춰서 생각에라도 잠긴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편안한 자세로 서서 륜은 수호장군들의
힘에 자신의 힘을 보태고 있었다.
물, 습기, 수증기. 나무들이 토해낸. 길고 긴 키보렌의 하루가 땅에서
수확한 보이지 않는 자산. 허공을 부유하는 물들. 태양이 뿜어내는 열기
에 미쳐 낮은 곳으로 찾아드는 본성을 잠시 잊은 광기에 젖은 물들. 그
리고 일몰의 하늘에서 차갑게 식어 자신의 순수한 정수를 드러낼 준비를
갖추는, 이슬이 되어야 할 물. 그러나 모아들인다. 이 바람은 좋지 않
다. 내버려둔다. 다가오는 저 바람에 몸을 실어, 더한다. 보탠다. 결합
시킨다. 차갑고 어두운 구름이 저 앞이다. 이슬은 모레 쯤의 꿈으로 미
루어두자. 자, 겁내지 말고. 저 구름의 어두움을 두려워 말거라. 그것은
또다른 너다. 그래. 그렇게. 구름이 되어라. 대지를 흠모하는 비가 되어
라. 낮은 곳을 찾아내는 너의 귀하디 귀한 본성을 떠올려라.
수호장군들이 불러들인 구름은 용인이 얹어준 과도한 화물에 힘겨워하
다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머나먼 저편의 하늘에
드리워진 빗줄기의 휘장 때문에 그 너머의 세계는 완전히 가려졌지만 휘
장 이편에서는 여전히 맹포한 화마가 억수 같은 비를 조롱하며 춤을 췄
다.
수호장군들은 당혹에 찬 니름을 교환했다.
[저 놈들과 수도 없이 싸웠지만, 이런 재주는 본 적도 없습니다!]
[저 용인은 끝없이 발전하고 있군요. 아직까지 사람인지 의심스럽습니
다.]
[하텐그라쥬 근방에는 습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가
져와야 합니다. 하지만 계속 저런 식으로 방해하면…]
인실롭은 혼란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만! 제발 그만들 하시오! 당신들 스스로를 보시오. 지금 당신들은
공포에 질려 자신이 무슨 니름을 하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호장군들은 의혹에 찬 표정으로 인실롭을 바라보았다. 인실롭은 단호
하게 닐렀다.
[물을 끌어들입시다! 제기랄, 비가 되어 쏟아진다고 해서 저 물이 어디
로 간답니까! 강을 만드는 겁니다. 저쪽에 쏟아진 비를 하텐그라쥬로 끌
어옵시다!]
수호장군들은 정신적 탄성을 질렀다. 곧 그들의 주의력이 땅에 쏟아진
비에 집중되었다. 건조한 땅으로 스며들려던 비는 뜻밖의 방해에 움찔했
다. 나무와 풀잎들 사이에서 물이 차가운 환상처럼 일어났다. 가지에 매
달린 물방울들이 마치 누군가가 나무를 걷어찬 것처럼 억지로 떨어져내
렸다. 메마른 숲을 적시던 물은 수호장군들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작업
에 착수했다.
숲에서 소리없이 파도가 형성되었다.
륜은 눈을 뜸과 동시에 말을 쏟아내었다.
"수호장군들이 저편의 물을 여기로 끌어오고 있습니다. 저기에는 꽤 많
은 물이 쏟아졌고, 자칫하면 덮쳐오는 파도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겠습
니다."
륜의 목소리가 들리는 위치에 서 있던 라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육지
에서 파도를 만나는 것 쯤은 이제 그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라수는 차
분하게 질문했다.
"저지할 수 있겠소?"
"이건 힘을 더하는 방법으론 안되겠군요. 정면으로 저지하는 방법 뿐인
데, 그러기엔 저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시도는 해보겠습니다만 적절
한 대비를 생각해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병사들에게 나무를 붙잡도록 명
령하십시오."
륜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북부군을 향해 밀려오는 노도에 주의력
을 쏟아부었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나무들의 저항 때문에 파도의 위력은 그렇게
커지지 않았다. 북부군을 향해 몰려오는 물은 나가나 인간의 발목을 적
실 정도의 높이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것은 수십 평방킬로미터의 범위에
서 일어나는 움직임이었고 따라서 그 물의 양과 내재된 위력은 가공할
정도였다. 륜은 몇 그루의 약한 나무들이 급류에 휩쓸려 기우는 것을 느
꼈다. 륜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그 흐름의 방향
을 바꿔보려 애썼다. 하지만 수십 명의 수호장군들이 만들어내는 그 움
직임을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무에 물이 부딪치는 그
소리는 기묘하게 음악적이었다. 음악을 모르는 나가들이 그들의 여신의
힘과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나무로 만들어낸 그 소리에 라수는 뭐라 표
현하기 힘든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거대한 숲 전체가 내뱉는 신음 같은
그 소리를 주의깊게 듣던 라수가 병사들에게 나무에 매달리도록 명령했
을 때 물이 마침내 북부군의 발 아래에 도달했다.
병사들은 발목을 잠기게 하는 것이 고작인 그 물을 얕보았다. 그리고
그런 착각은 꽤 많은 수의 병사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자빠지는 결
과로 나타났다. 교위와 부위들의 쌍소리가 터져나왔고 그제야 병사들은
허겁지겁 나무에 매달렸다. 자세를 확보한 병사들은 나무를 꽉 붙잡은
채 발을 적시며 흘러가는 물을 홀린 듯이 내려다보았다. 물이 흘러가는
광경 쯤이야 생애 동안 지겹도록 보았지만 키보렌의 밀림 아래를 흘러가
는 그 흐름은 완전히 생경한 것이었다. 물은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높이
를 무시하며 흘러갔다. 언덕을 흘러올라가고 나무를 휘감아도는 그 물은
병사들을 겁먹게 만들었다. 뚜렷한 방향성을 보이며 흘러간 물이 불타는
숲과 부딪친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수증기가 거세게 폭발했다.
땅이 갑자기 입을 열어 구름을 토해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산더미
같은 수증기들이 나무를 고문하며 피어올라 숲의 머리 위로 치솟았다.
사람들의 시야에서 하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 위에
있던 하늘은 맑았고 그래서 수증기는 놀라운 변화를 보였다. 위에서 쏟
아지는 황혼의 주홍빛을 받아 수증기는 붉게 물들었다.
눈을 뜬 륜은 그 모습에 탄성을 내질렀다.
꿈의 가장 깊은 지점에서 방금 현실로 뛰쳐나온 듯한 몽환적인 안개가
숲의 모든 지점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륜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다른 자
들의 눈에 보이는 주홍빛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무수한 열류의 교환이
있었고 명멸하는 열의 번득임이 있었다. 땅을 흐르던 차가운 물이 타오
르던 불에 충돌할 때마다 삽시간에 뜨거운 증기로 바뀌어 부풀어올랐다.
그런 열의 연쇄 폭발을 배경으로 나무들은 더욱 기묘한 모습으로 바뀌었
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있었지만 나무의 윗부분에는 아직까지 불이 타
오르고 있었고, 그래서 숲의 모습은 마치 호수 가운데 돋아난 불타는 나
무 같았다.
저편에서 시우쇠가 걸어왔다.
시우쇠는 물을 저벅저벅 밟으며 걸어왔다. 그의 발이 내딛어질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 대신 달군 쇳덩이에 물을 뿌린 듯한 거칠고 급한 마찰
음이 들려왔다. 발을 적신 채 나무를 붙잡고 있던 륜은 시우쇠의 발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시우쇠는 피식 웃었다.
"녀석들이 물을 솟구치게 하지 않는 이상 이 불을 당장 꺼버리기는 어
렵겠군."
"수증기가 치솟고 있으니 불도 곧 잡힐 겁니다."
"그렇겠군. 그건 그렇고, 나무들이 기묘한 꼴을 당하고 있군. 밑둥은
흐르는 물에 젖으며 윗둥은 불타고 있으니."
"당신 모습도 참 기묘합니다. 흐르는 물 가운데 두 다리를 딛고 서있는
불덩이니까."
"그렇겠군. 라수!"
라수는 피로한 눈을 들어 시우쇠를 바라보았다. 시우쇠는 말했다.
"어쩔 건가. 오늘 내에 결판을 보려는 계획인가?"
"이 정도면 하텐그라쥬에 대한 인사는 충분한 것 같군요. 오늘 밤 동안
수호장군들에게 수증기로 불을 잡는 노고를 선물하는 것으로 만족할까
합니다… 노고 맞지요?"
마지막의 질문은 륜을 향한 것이었다.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쇠는
높은 지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적당한 위치를 발견한 화염의
화신은 다시 치익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라수는 병사들에
게 먹을 것을 찾아보러 화재 지점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
은 잠시 당황했지만 라수의 명령이 그렇게 황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불타는 숲 아래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기에 타죽을 일은
거의 없었고 불 때문에 주위 또한 환했다. 그들은 물 속에서 타버린 동
물들을 건져내며 그것이 익사인지 분사인지 토론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
었다.
륜이 예상한 것처럼 하텐그라쥬에 진을 치고 있던 일흔 한 명의 수호장
군들은 꽤 힘든 밤을 보내야 했다. 기체인 수증기와 액체인 물 중에서
다루기 어려운 것은 당연히 후자다. 수십 평방킬로미터의 범위에서 물을
끌어온 수호장군들은 격심한 피로를 느꼈다. 흥분과 분노, 그리고 공포
의 감정들은 그런 수호장군들을 더욱 괴롭혔다. 인실롭은 눈이 가물거리
는 것을 느끼며 하텐그라쥬 평의회에서 보내온 사절의 니름을 들었다.
그러나 사절은 몇 마디의 말로 인실롭의 눈이 번쩍 뜨여지게 만들었다.
[여신이 하텐그라쥬에 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사절은, 그리고 사절을 보낸 의원들은 진실이 가장 완벽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사절은 가감없는 진실을 들려
주었다. 인실롭은 비늘이 서는 기분을 맛보았다. 불행하게도 북부군의
공격에 맞서느라 오랜 시간 동안 긴장상태에 빠져있었던 인실롭은 그런
상황에 대처할 심적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여신의 소재지가 탄로
났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을 감추는 것조차 힘들었다. 사절은 차분하게
닐렀다.
[그 사실에 대한 귀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터무니없는 니름입니다. 여신은 불신자들에 의해-]
[그만. 서로에게 지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대화는
환영할 수 없습니다. 여신께서는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에 감금되어 계시
는 겁니다. 그렇잖습니까?]
인실롭은 기능 저하를 호소하는 두뇌를 채근하며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제가 그것을 인정하는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당신들이 우리에게 전쟁의 이유로 제시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드리겠습
니다. 여신은 해방되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니름입니까?]
[당장은 곤란하겠지요. 북부군이 저 앞에 와있으니.]
[그렇다면… 저들을 물리친 다음에?]
[저들을 물리친 다음에도 그 힘이 필요합니까? 우리를 공격하는데 쓸
겁니까?]
[그 힘이 없으면 한계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왜 넘어가야 합니까? 한계선 위쪽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있
는 것은 거의 다 가졌습니다. 우리가 한계선을 넘어가야 하는 이유를 닐
러보시죠.]
인실롭은 힘겹게 이유를 떠올렸다.
[제 2의 북부군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불신자들은 수백 년 동안 왕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어디선가 적당한 인물을
찾아내어 가면을 씌운 다음 대호왕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리
고 대호왕의 기치 아래에 우리와 싸울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들은 위
험한 족속들입니다.]
[수백 년 동안 자신의 위험성을 드러내어 보이지 않다가 우리가 한계선
을 넘어가자 그렇게 했지요. 그렇잖습니까? 그건 우리가 한계선을 넘어
갔기에 생긴 일이잖습니까? 왜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죠?]
인실롭은 더 할 니름이 없었다. 그를 끝까지 밀어붙인 사절은 그 쯤에
서 인실롭에게 숨을 돌릴 여유를 부여하기로 했다.
[일단 북부군을 물리친 다음에 그 힘의 소유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지
요. 하지만 나라면 행동을 조심하겠습니다. 비아스 마케로우가 우리에게
준 선물은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면 또 다른 것이 있다는 니름이십니까?]
사절은 빙그레 웃었다.
[우리는 심장 파괴를 남용하지 않은 당신들의 자제력을 높이 삽니다.]
결정타였다. 인실롭은 항복을 외치고 싶어졌다. 인실롭의 얼굴에 떠오
른 좌절을 본 사절은, 그 자리에 세리스마가 있었다면 환호를 보냈을 제
안을 꺼냈다.
[당신들의 비밀을 존중하는 뜻에서 우리는 그것을 하텐그라쥬 평의회
최고의 기밀로 남겨둘 의향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이 전투 후에 여신의
힘을 포기한다면 말입니다. 갈로텍 대장군에게 전하십시오.]
사절은 '그러지 않으면'이라는 니름을 꺼내지 않았다. 심장 파괴를 비
밀로 지켜야 할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에게 그럴 필요가 없기 때
문이다. 인실롭은 이미 사절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마
쳤다.
"케이건. 뭘 하고 있는 거지?"
케이건은 아래를 바라보았다. 사모 페이가 마루나래와 함께 나무 아래
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케이건은 거대한 나무 위의 가지들 사이에 드러누워 있었다. 수령이 얼
마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 거대한 나무 위쪽에는 웬만한 집 두어 채라도
얹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이 있었다. 케이건은 사모에게 말했다.
"올라오시겠습니까, 폐하? 제가 내려갈까요?"
"올라가지."
사모가 나무 위로 오르는 방법은 독특했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등에 올
랐고 그러자 마루나래가 훌쩍 뛰어 나무 위에 올랐다. 육중한 무게에 나
무는 잠깐 신음을 토했지만 나무는 마루나래의 무게를 어렵지 않게 견뎌
내었다. 마루나래는 꼬리를 나뭇가지에 감고는 몸을 길게 눕혔다. 사모
는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대호의 등에서 미끄러졌다. 가지
를 디딘 사모는 마루나래의 목에 몸을 기대며 앉았다.
"마루나래가 올라오니 이 위도 비좁군. 뭘 하고 있었지?"
"별을 보고 있었습니다. 별 모양이 낯설군요. 제게는 드문 일입니다."
"드물다니?"
케이건은 잠깐 침묵한 채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표현할지 생각했다.
"저는 북부의 땅 대부분을 돌아다녔고 북부의 모든 밤하늘에 익숙합니
다. 그래서 밤하늘이 낯설게 보이는 것은 꽤 오래간만에 경험하는 일입
니다."
사모는 옆으로 손을 뻗어 마루나래의 거대한 턱 아래에 팔을 파묻듯이
한 채 그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보니 남쪽은 처음이겠군."
"이렇게 남쪽으로 멀리 온 것은 처음입니다. 공작님을 데리러 왔을 때
도 이렇게 멀리까지 오지는 않았습니다."
사모는 침묵한 채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곧 륜을 다시 만날 거야.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언젠가 륜에게 해줬던 일을 다시 해줄 수 있을까."
"공작님을 한계선 북부로 데려가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요스비에게 해줬던 일을 해줘."
케이건은 말 없이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고개를 약간 들어올려 케
이건의 이마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가 되어주라고."
"왜 제게 부탁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너보다 더 적격인 자가 없으니까."
"저는 나가를 잡아먹습니다."
"알아."
"카라보라에는 제 오두막이 있습니다. 조리장이 꽤 큰 편입니다. 다루
는 재료가 토끼 같은 것보다는 훨씬 큰 것이다 보니 그렇습니다. 커다란
세 개의 무쇠솥이 있고, 가끔은 그 셋을 한꺼번에 사용할 때도 있습니
다. 그 속에 폐하의 동족을 집어넣고 삶습니다. 나가를 삶을 때 어떤 냄
새가 나는지 아십니까? 나가는 육식동물입니다. 냄새가 고약합니다."
사모는 가까스로 자제력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비늘이 부딪치는 것까
지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녀는 힘들게 말했다.
"요스비도 그걸 알고 있었나?"
케이건은 침묵했다. 사모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알고 있었군."
"예. 그래서 자신의 왼팔을 제게 잘라먹였습니다."
"왜 그렇게 했지?"
"제가 죽어가고 있었으니까요."
"죽어간다? 죽어가는데 왜 왼팔을 먹여야 하지?"
소드락을 복용하는 나가의 체내에는 소드락이 축적된다. 그리고 그런
나가를 먹는 케이건의 몸에는 더 많은 소드락이 축적된다. 그 축적이 한
계에 도달했을 때, 유사 이래 단 한 명에게만 일어난 신비한 일이 발생
했다. 육체의 영원한 재활성화. 그의 몸은 노화를 거부했다. 식물과 나
가에게만 작용하는 소드락이 어떻게 해서 인간에게 작용하는가 하는 질
문은, 이 경우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함께 하고팠던
사람들에게 나가 고기를 먹여보는 실험 끝에 케이건은 그것이 오직 자신
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질문은
'왜 케이건에게 작용하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케이건은 답을 알
수 없었다. 케이건은 그것이 작용한다는 것, 그리고 나가를 먹는 짓을
그만두면 작용이 멈춘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요스비를 알게 된 이후
케이건은 짧은 기간에 걸쳐 그 습관을 포기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케이
건은 자신의 몸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확인했다. 사태를 파악한 요스비는
소드락을 잔뜩 먹은 다음 왼팔을 잘라 거절하는 케이건에게 강제로 먹였
다. 요스비의 이유는 단순명쾌했다. '너는 말이야, 살아있는 편이 더 재
미있을 것 같다구.' 케이건은 그것을 먹었다. 그럼으로써 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처음 맞이했던 죽음의 위기를 벗어났다.
케이건은 말할 수 없었다. 사모는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군. 인간들은 빨리 굶어죽지. 굶어죽어가고 있었던 것이군."
"비슷합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우리를 미워하는 거지? 설명해주겠어?"
"제 소망을 짓밟고 제게 가장 소중했던 것들을 모조리 파괴했기 때문입
니다."
"바라기의 칼자루는 하나야."
케이건은 사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목 뒤를 잠시 더
듬었다. 바라기의 칼자루가 만져졌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겨냥하는 두 개의 칼날도,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서로의 피를
탐내는 칼날도 하나로 합쳐질 수 있지 않을까."
"재미있는 해석이군요. 하지만 영웅왕이 이 검을 하나로 합친 것은 증
오의 종말과 새로운 화합의 시작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가에게
팔 하나가 잘렸기 때문입니다. 저라면 이 검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증오의 표상으로 해석하겠습니다. 영웅왕은 팔이 없어져도 증오의 절반
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하나의 팔로도 그의 모든 증오를 감당했
습니다."
"너와 요스비는 우정이라는 하나의 칼자루 위에 모일 수 있었던 것 같
은데."
"그는 나가가 아니었습니다."
케이건의 단정적인 말에 사모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투는 기묘했다.
언성을 높인 것도 아니고 비꼬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사실을 알려주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은유나 비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사
모의 혼란스러움을 느낀 것처럼 마루나래가 귀를 쫑긋거리며 옆을 돌아
보았지만 사모는 그 볼을 밀쳐내며 케이건을 주시했다. 케이건은 여전히
가르치는 듯한 그 묘한 어투로 말했다.
"그는 아젤키버였습니다. 가장 능숙한 사냥꾼은 사냥감의 모습을 훔칩
니다. 아젤키버는 사냥감의 모습을 훔친 겁니다."
"아젤키버가 누구지?"
"예? 그토록 유명한 키탈저 사냥꾼을 모르신다는 말입니까? 모든 자들
이 그의 이름을…"
자신이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케이건은 느닷없이
입을 다물었다. 혼란에 빠진 채 케이건은 사모를 바라보았고 가까스로
자신의 앞에 있는 자가 속한 시대를 떠올렸다. 그것은 '현재'였고, 그래
서 케이건은 현재로 수렴했다. 사모가 말했다.
"그 사람, 키탈저 사냥꾼이었나? 하지만 요스비는 요스비야. 아젤키버
가 아니야."
같은 시대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알고 있는 하나의 사람. 통시적인
시점은 자신의 시대에 매인 시점과 공유되기 어렵다. 케이건은 자신의
해묵은 문젯거리를 재발견했고, 그것을 뭉개버렸다.
"제게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그 아젤키버라는 이름이 네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증거라면,
륜에게서 그를 발견해줄 수는 없어?"
케이건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명령하십시오. 폐하. 그것이 훨씬 간단합니다."
"명령하지는 않겠어. 명령은 너무도 간단하게 사람을 분리시켜. 내가
명령한다면, 너는 자신을 나가를 증오하는 너와 내 명령을 따르는 너로
나누겠지. 그리고 너는 낮에는 나가를 보호하고 밤에는 나가를 잡아먹겠
지. 그러면서 내 명령을 떠올릴 거야. 그렇게 할 수는 없어. 륜은 용인
이 되었어. 그 애는 물처럼 예리해졌어. 나가를 증오하는 북부군과 보낸
세월이 그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나는 곁에서 목격했어. 아마도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나가를 증오하는 사람일 것이 뻔한 너에게 그 애를 부
탁하면서, 나는 네 증오를 남겨두고 싶지 않아. 케이건. 나는 네 증오를
사겠어."
"사시겠다고요?"
"그래. 뭘 주면 될까? 내가 뭘 지불하면 되지?"
"구매는 불가능합니다."
"나가가 불신자들의 왕이 되는 세상이야. 쉽게 단정하지마."
케이건은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제 증오를 사시려면 폐하께서는 먼저 제 증오를 아셔야 합니다. 그런
데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제 증오를 알 수 없습니다."
"네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니?"
"질문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폐하께서는 제 대답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사과로도, 어떤 보상으로도 그 증오는 살 수 없는 거야?"
"단 한 사람은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사모는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팔을 얹었다. 케이건이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거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케이건 또한 사모가 짐작한다
는 것을 알면서 말했다.
"요스비는 제 증오를 거의 다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그가 제 곁을 떠난
후 저는 다시 증오가 저를 붙잡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스비
가 나가들에 의해 심장 파괴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저 자신도
제 증오의 크기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나가를 증오합니다. 제
가 지금 말한 문장의 주어는 '증오'입니다. 제가 없어져도 제 증오는 남
을 겁니다."
사모는 팔을 쓸어만졌다. 곤두선 비늘들이 그녀의 손바닥에 쓸리며 희
미한 소리를 냈다.
"그렇게까지 너 자신에게 가혹할 필요가 있는 거야? 증오하기 위해 사
는 것은 슬퍼."
말을 마친 사모는 깜짝 놀랐다. 케이건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
다. 그 눈은 경악과 분노, 그리고 희미한 공포에 물들어 있었다. 사모가
주춤거리는 것을 본 케이건은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눈을 몇 번 깜
빡였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평상시처럼 평온했다.
"그건 언젠가 제가 제 누이에게 했던 말과 똑같군요."
"누이가 있어?"
"있었습니다."
"아, 미안해."
"괜찮습니다. 제 누이의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닙니다."
사모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케이건의 누이가 죽었다면 그녀는 젊은
나이에 죽었을 것이다. 사모는 요절이 슬프지 않을 까닭을 짐작하기 어
려웠다. 하지만 그녀에겐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네 누이가 누군가를 증오했던 모양이군. 그래서 너는 증오하기 위해
사는 것은 슬프다고 말해줬고. 그런데 너는 왜 지금 그렇게 사는 거지?"
"그 때 저는 나가에 대해 몰랐습니다."
사모는 거의 모멸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녀의 분노는 마루나래
에게도 전해졌고 마루나래는 큼직한 머리를 들어올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게 케이건을 쏘아보던 사모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두 번째 부탁은 포기하겠어. 하지만 첫 번째 부탁은 들어줄 수 있
겠지?"
"륜을 한계선 너머로 데려가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이만 내려가겠어."
사모는 마루나래의 등에 엎드려 그 털을 움켜잡았다. 마루나래는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둔하고 낮은 소리가 울려퍼지며 마루나래는 부드럽
게 착지했다. 마루나래와 사모가 저편으로 걸어가는 것을 내려다보던 케
이건은 다시 나무 위에 드러누웠다. 이국적인 성좌가 떨어뜨리는 빛을
받으며 케이건은 자신을 과거의 시간 속에 방황하게끔 했다.
거대하고 무거운 생명체가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은 것은 조금 후였다.
케이건은 머리를 돌려 나무 아래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마루나래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위에는 사모 페이가 앉아있었다. 마루나래
를 멈추게 한 사모는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케이건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모가 말했다.
"케이건! 나는 네가 꼭 두 번째 요스비를 만나기를 기원하겠어!"
사모는 케이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마루나래를 돌아서게
한 다음 다시 걸어갔다. 케이건은 그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비아스 마케로우는 눈을 떴다. 그녀의 시계는 퍽이나 이상했고, 잠시
동안 비아스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벽과 천장이라
짐작되는 것들은 도무지 벽과 천장으로 보이지 않았다. 짧지 않은 시간
이 흐른 다음에야 비아스는 자신이 계단 중간쯤에 머리를 아래로 향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묘하게 생긴 벽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 천장이었고 벽이라 여겼던 것은 계단이었다. 아래로 주루룩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아스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조
금 후 비아스는 계단에 앉아 보다 정상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비아스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몽환의 산물 같은 풍경은 곧
그녀를 납득시키는 풍경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심장탑 안에 있었고 시간
은 밤이었다. 저편에 그녀의 사이커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비아스
는 그것을 다시 집어들었다.
머리 속은 혼란스러웠고 무차별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 중 어떤 것도
현재 상태를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비아스는 참을성 있게
생각을 되풀이했다. 기이한 자세로 쓰러져 있었던 탓인지 몸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비아스는 무거운 몸을 힘겹게 움직여 계단벽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두 다리는 계단 위에 쭉 뻗었다. 그것만으로도 통증이
상당히 가셨다. 그리고 비아스는 다시 생각했다.
다 포기하고 어디론가로 걸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때 비아스는 간
신히 자신의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는 심장탑으로 돌진했었고, 뜨거운
수증기 속에서 억지로 계단을 뛰어오르다가 기절했었다. 비아스는 자신
이 몇 층에서 기절했는지 궁금했지만 밤의 심장탑 안쪽에서 자신의 높이
를 짐작할 방법은 없었다. 비아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계단 위쪽에
창문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비아스는 벽을 짚으며 힘겹게 일어난 다
음 계단을 올라갔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본 비아스는 실망감을 느끼며 창문 아래에 주저
앉았다. 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의 지붕들은 손 닿을 듯한 높이에 있었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3층 이상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비아스는 그 사실
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분노를 느꼈다.
분노는 비아스의 자양분이었다. 한 손으로는 사이커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입을 움켜쥔 채 비아스는 자신을 다그치며 생각했다.
'평의회는 나를 배신했어. 가주 자리는 소메로 마케로우에게 뺏겼고.
내겐 평의회도,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 자리도 남아있지 않아. 마호가니
군단의 군단병들은… 소용없어. 지금쯤이면 이미 하텐그라쥬 수비군에게
포함되어 있을 테지. 망할 쥬어 녀석은 벌써 지도그라쥬 쯤으로 도망쳤
을 테고! 그렇다면 내게 남겨진 것은 한 자루 사이커와 내 현재 위치 뿐
이군.'
자신도 모르게 '현재의 위치'라는 단어를 떠올린 비아스는 곧 그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이 쓸모있는 개념을 찾아내었음을 깨닫고는 기뻐
했다. 세리스마의 적극적인 방해 때문에 비아스는 일종의 요새라고 할
수 있는 심장탑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그녀의 적이 몇 명이나 될지
짐작하기도 어려웠지만, 지금 당장은 그들 중 누구도 그녀를 잡으러 올
수 없는 것이다. 그 시간이 길지는 않을 테지만 분명히 없는 것보다는
월등히 낫다. 비아스는 그 행운에 즐거워하며 기운을 되찾았다.
그러자 오래된 기억이 그녀에게 찾아들었다. 비아스는 고개를 한번 갸
웃했다가, 다시 똑바로 세웠다. 그녀의 입매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비아스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예상보다는 통증이 크지 않았다.
비아스는 그제야 자신이 느꼈던 것이 육체적인 통증이라기보다 심리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다. 비아스는 벽을 짚지 않고도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있었다.
비아스는 잠시 계단의 위와 아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결정을 도와줄
표지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래서 비아스는 우연에 맡긴 채 위쪽을 향해
걸어올라갔다. 얼마 있지 않아 비아스는 계단에서 빠져나왔고 심장탑 3
층에 서게 되었다. 그녀가 바라던 곳이었다. 비아스는 다시 한 번 쾌감
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비아스는 커다란 문 앞에 도달했다.
그녀는 문을 밀었다. 수호자들이 모두 전선으로 떠나는 바람에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 문은 그녀의 손길에 약간 저항했다. 비
아스는 팔에 힘을 주어 문을 밀어붙였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길게 울리
며 문이 열렸다. 비아스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해묵은 먼지와 양피지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비아스는 밤 속에 잠긴
특수도서실을 죽 둘러보았다.
왜 이곳으로 온 것인지는 비아스 자신도 뚜렷하게 알 수 없었다. 그리
고 비아스는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그만뒀다. 비아스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어떤 가상의 흔적 같은 것을 찾아보려 했다. 그런 흔적이 남
아있을 리는 없지만, 비아스는 차가운 바닥 한쪽이 이상하게 시선을 끈
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종의 자기 최면에 불과한 망상일 것이다.
비아스는 그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지 않은 자를 향해 닐렀다.
[그 때도 내겐 사이커 한 자루뿐이었다. 화리트. 하지만 나는 유벡스를
조각내고 네 명줄을 끊었지.]
비아스의 머리 속에서 갑자기 하나의 문장이 형성되며 떠올랐다. 추억
어린 사냥터로 돌아온 사냥꾼. 비아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문장은 그
녀의 취향에 맞았다. 곰곰히 생각해본 비아스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이
유였다고 판단했다. 최악의 상황이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상황에서 비
아스는 자신의 통쾌한 첫 번째 사냥이 이루어졌던 자리로 돌아온 것이
다. 그 사냥을 되새기며 비아스는 활기를 되찾았다. 비아스는 가까운 책
상으로 걸어가 그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좋아. 계획을 세워보자.'
비아스는 심장탑 안에 있는 유용한 것들의 목록을 재빨리 구성했다. 가
장 먼저 떠오른 것은 카린돌이었다. 그녀 자신이 소메로에게 외쳐준 니
름이었다. 하지만 비아스는 그것이 현실성이 없는 발상임을 곧 인정했
다. 카린돌을 찾아내어 풀어준다 해도 그녀의 육에는 이미 영이 남아 있
지 않다. 그리고 소메로가 닐렀던 것처럼 영이 남아있다 해도 카린돌이
소메로에 대항하여 비아스에게 협조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비아
스는 일단 카린돌을 풀어주면 수호자들이 힘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
해둔 다음 더 이상 카린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으로 그
녀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심장병이었다. 그 생각에 비아스는 어쩔 줄
모를 정도의 기쁨을 느꼈다.
'이세리도! 아니, 소메로의 것을 먼저 깨트릴까?'
그녀는 하텐그라쥬의 모든 나가, 아니, 심장을 적출한 나가들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비아스는 그 행운을 믿기 어려웠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두 가지로 지목되었던 사이커와 그녀의 위치 중 후자는 이루 측
량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희열에 들떠 흥분하던 비아스는 문득 소메로가 자신을 저지하지 않았다
는 것을 떠올렸다. 심장탑을 향해 도주했을 때 비아스는 소메로를 한 번
돌아보았다. 소메로는 슬픈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 어리석은 년은 내가 자기 심장병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나?'
비아스는 소메로를 비웃어주었다. 하지만 내심 비아스는 그런 행동이
주의력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소메로는 비아스가 완전히 방
심하고 있을 때 가장 효과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그녀를 몰락시켰다. 그
것은 예사로운 재주가 아니었고, 비아스가 안다고 믿었던 소메로의 모습
에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비아스는 찜찜한 기분 속에서 소메로가
왜 자신을 저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답은 떠오르지 않
았고, 그래서 비아스는 책상에서 내려섰다. 다시 한 번 바닥을 흘겨본
비아스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은 채 특수도서실을 나섰다. 소메로의
심장병이나 기타 유력자의 심장병이 어디에 있는지 비아스는 알지 못했
다. 필요한 심장병의 위치를 파악하려면 지금부터 꽤 긴 시간의 탐색을
해야 할 것이다. 복도로 나선 비아스는 문득 소메로가 염두에 둔 것이
그것이 아니었을까 의심했다.
'무수히 많은 심장병 중에 하나의 심장병을 못찾아낼 거라고?'
비아스는 그것이 소메로의 생각일 거라 믿었고, 그래서 다시 난폭한 미
소를 지었다. 그녀는 언젠가 어떤 수련자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병이 수십억 개 쯤 있을 줄 알았다는 그녀의 니름에 대해 수련자는 죽은
자의 심장병은 파기한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기억대로라면 32층에 있던
갈로텍의 방에 도달할 무렵 이미 벽감에는 더 이상 심장병이 남아있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많은 나가들이 죽었지. 그렇다면 찾아보아야 할 심장병의
숫자는 더욱 줄어들겠군.'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길고 지루한 탐색이 될 것이다. 게다가 밤의 어
둠 속에서 글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비아스는 잠깐 고민한 다음 다
시 특수도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실 안을 뒤진 비아스는 조금 후 등
롱 하나와 점화통을 찾아내었다. 등롱에 불을 붙인 비아스는 유쾌함까지
느끼며 도서실을 나섰다. 벽감이 있는 곳에 도달하여 등롱을 높이 들어
올릴 때까지 그녀의 유쾌함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유쾌함은 끔찍한 경악과 분노로 바뀌었다.
그녀가 본 첫 번째 심장병에는 먹칠이 되어 있었다. 비아스는 그것이
손에 먹을 묻힌 다음 다급하게 문지른 것 같은 흔적임을 깨달았다. 그것
은 여러 가지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흥미로운 모습이었지만 비아스는 어
떤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비아스는 다급하게 다른 심장병들을 바라보았
다. 몇 개의 심장병에는 이름이 반쯤 지워져 있었고 어떤 것은 완전한
이름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심장병은 먹칠에 의해 이름이 지워
져 있었다. 비아스는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절감하며 비늘을 부딪쳤
다.
심장 파괴를 이용하여 누군가를 죽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자가 누구
인지는 알 수 없으며, 확률이 낮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이곳 어딘가에서 그녀의 이름이 온전히 남아있는 심장병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비아스는 먹칠이 되어 있는 심장병 중 어느 것도
깨트릴 수 없다.
등롱을 내팽개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느라 비아스의 팔에서 비늘이
사납게 부딪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비아스는 이름이 남아있는 심장
병들을 관찰했다. 하지만 온통 그녀가 알지 못하는 이름들 뿐이었다. 단
한 번 비아스는 아는 이름을 발견했다. 그것은 저명한 대장장이 페니나
시에도의 심장병이었다. 화풀이 삼아 페니나를 죽일 수야 있겠지만 아무
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비아스는 자신이 발견한 무서운 사실 앞에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것
을 느끼며 벽감 앞에 주저앉았다. 먹칠이 된 심장병을 노려보며 비아스
는 격노했다.
'도대체 어떤 미친 녀석이 여기에 먹칠을 한 거지?'
비아스는 이 넓은 심장탑 전체를 뒤져 단 하나의 심장병을 찾아내는 것
이 생각보다 훨씬 쉬운 일이 되었으며 동시에 쓸모없는 일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이름이 남아있는 심장병만 조사하면 되므로 탐색해야 할 숫자
자체는 대폭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자신의 심장병을 찾아내지
못할 경우 비아스의 모든 탐색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비아스는 탐색
을 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탐색을 포기하고 그 시간을 보다 가능성
높은 일에 투자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곧 그녀의 뇌리에 분명한 사실이
떠올랐다.
'이 탑 어딘가에 카린돌의 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탑의 꼭대기에는
세리스마가 있다.'
적어도 그 두 가지는 절대로 변할 리 없는 사실이었다. 비아스는 그 두
가지 중 하나를 목표로 삼아 어떤 계획을 짜낼 수 있지 않을까 고심했
다. 그녀의 생각은 곧 후자로 집중되었다. 카린돌의 육체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을 꺼내는 일뿐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수호자들은
힘을 잃을 테고 하텐그라쥬를 보호할 수 없게 된다. 비아스는 세리스마
를 목표로 정했을 경우 어떤 계획이 가능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
지만 역시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비아스는 결국 자신의 행동을 약간 모호한 상태로 남겨두었다. 그녀는
심장탑 위쪽으로 올라가며 자신의 이름이 있는 심장병이 있는지 찾아보
며 그렇게 올라가는 동안 세리스마를 이용할 적당한 방법에 대해 고심해
보기로 했다. 결정을 내린 비아스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세리스마의 방은 그냥 올라갈 경우에도 길고 힘든 목적지다. 거기에 탐
색이 더해지니 니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길고 고된 작업이 될 것이다. 자
신감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낀 비아스는 재빨리 자신 속에서 분노를 일깨
웠다. 분노가 그녀의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쉬웠다.
비아스에겐 분노할 대상이 너무 많았다.
화재와 홍수로 만신창이가 된 키보렌에 아침 햇살이 떨어졌다.
륜은 착잡한 기분 속에서 키보렌을 바라보았다. 다른 나가의 도시와 달
리 이곳은 그가 태어난 곳이었다. 물론 집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그에게 하텐그라쥬의 숲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친숙함은 없었다. 그
숲은 다른 모든 숲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 하나, 그가 기억할 수 있
는 추억이 있었다. 그 비늘 서는 탈출의 날, 륜은 이 근처 어딘가에서
가슴에 댔던 젖은 책을 팽개쳤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주위를
자세히 둘러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날 밤 도시에서 걸어
온 거리를 떠올린 륜은 그 지점에 이 근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라
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추억을 되새기는 것은 화리트의 죽음을
떠올리게 했고 륜은 또다시 죄책감을 떠올리는 것에 실패했다. 륜은 속
상하는 기분에서 멀어지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자세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륜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북부군 전체를 둘러볼 수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무기를 점검하거나 하며 소
일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더 이상 양식이 남아있지 않았고 당장 전투를
중단하고 대규모 사냥이라도 벌이지 않는 한 내일은 굶주린 채 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해 고민하는 병사들은 찾아볼 수 없었
다. 그들은 이 전투 다음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
을 받아들인지도 오래였다. 륜은 그들이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유감이
없으며 심지어 자랑스러움까지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서글픔을 느
꼈다.
그 때 그의 감각에 평범하지 않은 것이 포착되었다. 륜은 그 느낌에 집
중했다.
륜은 경악했다.
륜은 믿기 어려운 느낌에 다시 한 번 탐색했다. 하지만 그가 포착한 느
낌은 틀리지 않았다. 륜은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당황하여 쳐다보는
병사들 사이를 정신없이 달려갔다. 병사들은 잠시 후 더 당황했는데, 아
스화리탈이 륜의 뒤를 따라 달렸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더 이상 륜에 대
해 고민하지 않은 채 당면한 압사의 문제에 대해 집중했다. 그들이 실로
진지한 태도로 몸을 날렸기에 아스화리탈은 누군가의 발을 밟거나 하는
난처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륜을 따라갈 수 있었다.
아스화리탈이 쿵쾅거리는 소리는 라수 규리하를 기겁하게 했다. 라수는
고개를 돌렸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괄하이드 역시 어리둥절하여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깐 동안 두 명의 규리하 사내들은 잠깐 동
안 륜이 드디어 아스화리탈의 신뢰를 잃고 쫓겨 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
는 무서운 추측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스화리탈이 륜을 짓밟지 않도록
주의깊게 속도를 조절하며 쫓아가는 것을 본 그들은 그런 추측을 벗어버
릴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쓰러질 뻔하며 정신없이 달려간 륜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
다. 용인의 능력을 얻은 이후 처음으로 륜은 자신의 감각이 틀렸기를 애
타게 원했다. 숲 저편, 인간의 시각은커녕 나가의 시각으로도 볼 수 없
는 곳에서 다가오는 자들을 보며, 륜은 자신이 '본' 것이 잘못된 환상이
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용인의 감각은 그의 소망을 배신했다.
숲 아래에서 일군의 무리가 걸어나왔다.
인간과 레콘, 도깨비, 그리고 딱정벌레가 걸어왔다. 모두 그가 아는 얼
굴들이었지만 륜은 반가움을 표시할 겨를도 없이 처절한 심정으로 그 뒤
를 바라보았다. 그 뒤편에는 스물 두 명의 두억시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대호에 탄 나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가는 그에
게 익숙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극심한 좌절을 견딜 수 없었던 륜은 무릎을 꿇었다. 앞쪽에서 걸어오던
자들은 륜의 반응에 놀라고 의아해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뒤쪽을
바라보았다. 뒤쪽에 있던 나가는 대호에서 내려섰다. 그녀는 차분한 걸
음으로 다가왔고 그 동안 륜은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했다. 마침내 륜의
앞에 도달한 대호왕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륜. 오래간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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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5-3. 관련자료:없음 [57392]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8-11 01:20 조회:6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