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14. 셋은 부족하다 - 3
륜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시모그라쥬의 시민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어떤 뚜렷한 목
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며, 그들을 조직화하는 사람도 느껴지지 않았
다. 하지만 륜은 몰려나온 군중들에게서 위험한 감정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칸비야 고소리의 중립 선언은 그 도시의 모든
시민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다. 적지 않은 숫자의 나가들이 그녀에게
찬성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은 비참함을 맛보고 있
었다. 그들은 겁쟁이 의장 때문에 자신들이 나가의 위대한 전진에서 탈
락한 낙오자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한 밤, 그들의
도시 한가운데서 목격하게 된 불길한 대치를 보며 시모그라쥬의 많은 시
민들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만은 자신이 지나치게 한적한 길에서 우연히 반
가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열을 볼 능력도 없고 조명
상태도 열악한 그곳에서, 데오늬 달비는 몰려드는 나가를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외쳤다.
"공작님! 접니다! 북부군 부위 대나무 군단 포로 데오늬 달비입니다!"
"예. 반갑습니다. 달비 부위. 직함이 길어지셨군요."
다행히도 데오늬의 육성이 나가들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륜은 다시 말
했다.
"당신과 그 수호자는 대호왕 폐하와 함께 있어야 하는데, 잠깐만요. 아
니, 말하지 말아주시겠습니까? 그냥 옛날 생각을 해주십시오."
데오늬는 쾌히 그렇게 했다. 데오늬의 심상은 깨끗했고 륜은 어렵잖게
북부군에서 일어난 일을 알 수 있었다. 륜은 사모가 키보렌에 들어왔다
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거의 자제력을 잃을 것 같은 기분 속에서 그
녀가 아직 안전하다는 사실을 통해 간신히 자신을 억누른 륜은, 데오늬
가 아직도 충실하게 옛이야기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잠시
내버려두기로 했다. 륜은 키베인을 향해 닐렀다.
[당신이 키보렌의 대수호자였습니까.]
[그래. 륜 페이.]
대답하던 키베인은 문득 륜이 그저 확인하기 위해 그런 니름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륜은 몰려드는 군중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명징
하게 닐렀다. 그럼으로써 그 군중들이 돌발 행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단
속한 것이다. 키베인은 감탄했다. 륜은 말 위의 나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장군 갈로텍.]
갈로텍은 쇠약해진 몸을 무시하며 닐렀다.
[용인 륜 페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군중들은 더욱 긴장했다. 칸비야는 갈로텍이 륜
을 배신자로 지목하여 군중들을 선동하려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상대
방은 용인이니 조심하라고 경계시키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륜은
담담하게 닐렀다.
[허물벗기군요. 많이 편찮으신 듯하군요.]
[즐거운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군.]
륜은 칸비야를 슬쩍 돌아보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볼 수 있으므로, 그
것은 순전히 의장을 위한 동작이며 니름으로 바꿔본다면 '안심하세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륜은 갈로텍을 향해 닐렀다.
[먼저, 이 도시는 중립지대임을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나도 알아. 인실롭이 내게 확인 요청을 했으니까.]
칸비야는 안도했다. 하지만 갈로텍은 날카롭게 닐렀다.
[우리 서로는 그런 관계가 아니지.]
[그런가요.]
대답하던 륜은 문득 그의 눈 앞의 수증기들이 기묘하게 움직인다는 것
을 깨달았다. 그는 그 사실에 감탄했다. 갈로텍은 대기 중의 습기를 움
직여 글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륜 같은 용인만이 읽어낼 수 있는 미약
한 움직임이고, 고도의 집중력이 엿보이는 훌륭한 기술이었다. '몰려든
자들에게 여신의 감금자 따위의 니름을 한다면 등 뒤의 여자를 죽이겠
다.' 기술에 대한 순수한 감탄을 표시한 다음, 륜은 닐렀다.
[그냥 생각만 하셔도 됩니다. 힘드시겠군요.]
이번에는 갈로텍이 감탄할 차례였다. 여신의 두 신랑은 서로에 대한 순
수한 놀라움을 느꼈다. 그들 모두 같은 힘을 다루고 있었지만 그 방식은
달랐다. 한 명은 예민함에 의해, 한 명은 자기화에 의해 그들은 발자국
없는 여신의 힘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구현해내고 있었다.
갈로텍이 공격을 시작했다.
갈로텍은 륜의 심장을 노렸다. 단순하면서 직접적인 수단이었다. 그는
륜의 심장으로 통하는 혈관을 끓어오르게 하려 했다. 그러나 륜은 예민
했다. 갈로텍이 채 시도도 하기 전에 륜은 그 의도를 읽었다. 륜은 용인
의 방식으로 반격에 나섰다.
륜과 달리, 예민함을 가지지 못한 갈로텍은 다가오는 륜의 정신을 느끼
지 못했다. 그의 장기는 외부에 대한 민감함이 아니었다. 그러나 군령자
의 방어는 륜을 놀라게 했다. 륜은 갈로텍의 신명을 포착하여 묶으려 했
다. 하지만 그것을 예견하고 있던 갈로텍의 뒤에서 그라쉐가 야수적 본
능으로 위험을 깨달았다. 갈로텍은 륜의 심장을 공격하려던 것을 재빨리
포기하고 대신 자신의 내부에 있던 군령들을 무차별적으로 끌어내어 전
면을 빠르게 지나가게 했다. 호흡 한 번 하기도 힘든 짧은 시간 동안,
륜은 눈앞의 상대에게서 수십 명의 인격을 느꼈다. 용인은 그 중에서 군
령자의 신명을 읽어낼 수 없었다.
용인의 물 같은 날카로움은 무엇이든 꿰뚫는다. 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은 꿰뚫을 수 없다.
무서운 공방이었지만, 그들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그것은 한
순간의 시선의 엇갈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실 륜 이외엔 아무도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여럿이 되어버
렸던 갈로텍 또한 그 전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로텍은 륜의 니름을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
[화리트? 당신, 화리트를 데리고 있군요!]
'내가 화리트의 영도 내보냈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를 아는 영이 잠시 지나갔습니다. 어떻게 그를 데리고 있는 겁니
까?]
무의식 중에 화리트에 대해 생각하려던 갈로텍은 순간 그라쉐의 감각을
통해 위험을 직감했다. 갈로텍은 그것이 어떤 위험인지 생각했고, 곧 뇌
리에서 모든 생각을 지웠다. 륜은 갈로텍에게서 화리트에 대한 것을 더
이상 읽어낼 수 없었다.
대신 륜은 다른 것을 읽었다.
[많이 아프시군요.]
[동정할 필요 없어.]
륜은 갈등을 느꼈다. 그것은 다시 없는 기회였다. 그곳에서 갈로텍의
신명을 묶을 수 있다면 북부군은 하텐그라쥬 공격에 절반 이상 성공했다
고 니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륜은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두 명의
갈로텍이 있었다. 오기에 가까운 의지로 륜에게 맞서오는 갈로텍과 무서
운 고통을 호소하는 갈로텍이 있었다. 갈로텍 자신마저도 그 중 전자밖
에 알지 못했지만 륜은 둘 다 볼 수 있었다.
다 보인다는 것은 너무 괴로워. 지그림 자보로. 이런 걸 얻지 못한 당
신은 행운아야.
[화리트에 대해 닐러주십시오. 강제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갈로텍은 잠깐 고민했다. 그에겐 잠깐 동안 자신을 쉬게 할 필요가 있
었다. 하지만 화리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군중들 때문에 불가능했
다. 영의 납치자라는 악평은 두렵지 않았지만, 갈로텍은 악평이 가져다
줄 손실이 두려웠다.
[강제로 해봐. 기대가 되는데.]
[당신은 더 아파할 겁니다.]
[그건 내가 신경쓸 문제인 것 같군. 네 문제가 아니야.]
그런데, 내 문제이기도 해. 보이니까.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일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 니름들을
들은 키베인은 그가 알 수 없는 수준에서 두 초인이 뭔가 첨예한 대립을
벌이고 벌이고 있음을 짐작했다. 키베인은 닐렀다.
[륜 페이. 지금 대장군은 불편한 상태야. 아량을 베풀어줄 수 없나?]
[똑같은 니름을, 판사이를 수장시키기 직전의 갈로텍에게 닐렀다면 그
가 뭐라고 대답했을지 궁금하군요.]
[나는 갈로텍 대장군이 아니라 륜 페이에게 물었어.]
[제게요?]
[그래.]
[제게… 갈로텍은 제 적입니다.]
[이곳은 중립지대야. 그렇잖나?]
[그렇게 니른 것은 접니다. 하지만 대장군이 받아들이지 않으시는군
요.]
키베인은 공격을 시작한 것이 누구인지 짐작했다. 그는 갈로텍의 비늘
이 일어난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장군. 관두십시오.]
[대수호자. 륜 페이가 없다면 북부군은 오합지졸입니다.]
[당신은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 허물이 벗겨지고 있는 것은 륜이 아니
라 당신입니다. 포기하세요. 륜! 대장군이 포기한다면, 칸비야 의장의
중립 선언을 존중하겠다면 당신도 그렇게 할 텐가?]
잠깐 망설이던 륜은 갈로텍을 주시하며 닐렀다.
[화리트에 대한 이야기를 닐러준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화리트를 앞
으로 내보내십시오.]
키베인은 다시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고통에 까무러치고 싶은 기분 속
에서 갈로텍은 힘들게 닐렀다.
[저 아래에 틀어박혀서 나오려고 하지 않아.]
[설득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려가서? 미안하지만 그것도 어렵군. 내 속에는 괴물이 하나 있거
든.]
[괴물?]
갈로텍은 필사적으로 카린돌에 대한 생각을 쫓아내며 무미건조하게 닐
렀다.
[나를 잡아먹으려드는 괴물이야. 그래서 아래로 내려갈 수가 없어.]
[그러면 다른 영을 내려보내십시오.]
갈로텍의 몸에서 비늘이 부딪혔다. 키베인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대장
군을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한참 후에야 말했다.
"주퀘도. 내려가서 화리트를 좀 데려다주시겠습니까?"
주퀘도는 대답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갈로텍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알
았던 륜은 질문하지 않았다.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며 륜은 조심
스럽게 닐렀다.
[고소리 의장님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누구와도
싸우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공격당하지 않습니다. 이 전쟁을 끝내는 문
제에 대해 토의해보고 싶습니다.]
[너희들이 발자국 없는 여신을 방면하기 전까지는 그런 문제에 대해 생
각할 수 없다.]
륜은 고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륜은 정의감 때문에 사실을 니르려 하는
칸비야에게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칸비야는 정신을 닫으며 왜 그러느
냐는 표정으로 륜을 바라보았다. 군중들 때문에 니름을 이용할 수 없었
던 륜은, 그래서 간단한 방법을 이용했다. 륜은 칸비야의 귀에 입을 가
져갔다. 의미가 분명했기에 칸비야는 청력에 주의를 기울였다. 륜은 속
삭였다.
"사실을 니르면 데오늬 달비가 죽을 겁니다. 갈로텍의 등 뒤에 있는 여
자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다른 자들은 믿지도 않을 겁니다."
칸비야는 비늘을 부딪쳤다. 륜은 그녀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
시 갈로텍을 향해 닐렀다.
[북부인들은 여신을 감금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그랬는지는 그들도 모
릅니다.]
[거짓니름 하지마라.]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북부인들은 누가 그랬는지 모릅니다.
북부인들은 스스로를 지켜야 했습니다. 끝까지 북부인들을 핍박한다면,
북부군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하텐그라쥬를 공격할 겁니다. 그러니,
전쟁을 그만두고 여신을 감금한 범인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파멸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이해하지만, 거짓으로 모든
사실을 덮어버리려 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텐그라쥬는 파괴될 겁니다. 갈로텍.]
[너희들이 파멸할 것이다! 감히 이 땅에 발을 들여놓고 살아남기를 바
라느냐? 페로그라쥬와 악타그라쥬의 보복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륜은 넘을 수 없는 평행선 같은 것을 보았다. 언젠가 그들 자신들에게
서 발견한 만연한 허위를, 륜은 상대방에게서도 느꼈다. 그것은 륜을 슬
프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용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또다른 용인
같은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 주퀘도가 되돌아왔다.
"갈로텍. 문제가 있군."
"문제?"
"화리트는 어떤 괴물을 막고 있어서 나올 수 없다고 하더군. 그가 지금
있는 자리를 비우면 괴물이 위로 올라올 거라고 하더군."
눈치있게 말을 얼버무리는 주퀘도에게 갈로텍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다시 륜에게 닐렀다.
[들었나?]
[듣지는 않았지만, 알았습니다.]
륜의 공포스럽기까지 한 능력에 갈로텍은 비늘을 세웠다. 그 때문에 허
물이 살갗에서 떨어지며 온몸에 무시무시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갈로텍
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륜을 노려보았다.
륜은 우울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인은 아니지만 갈로텍
은 그 시선에서 고통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자신이 고통을 느끼고 있
기 때문이다. 륜은 차분하게 닐렀다.
[모든 것은 결국 하텐그라쥬에서 해결되겠군요.]
[그리고, 나는 그것이 어떻게 해결될지 알아.]
[저도 압니다.]
륜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화리트에게 전해주십시오.]
다음 순간 갈로텍은 정신이 타버릴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륜은 갈로
텍의 정신을 파고들어 그 본능에 각인시켜둘 듯이 닐렀다.
[나를 위해 죄책감을 묶어준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나
는 상실감까지 함께 느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
그 가차없는 난입을 저지하기 위해 헛된 시도를 하면서, 갈로텍은 무서
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리트가 륜의 죄책감을 묶어놓은 것처럼 륜은
갈로텍에게 자신의 전언을 묶어놓았다. 갈로텍은 이제 죽을 때까지 륜의
니름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다. 모욕감과 패배감 속에서 두 눈을 불태우며
갈로텍은 륜을 노려보았다. 륜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외면했다.
[고소리 의장님. 사정이 여의치 못해 댁까지 바래다드릴 수 없게 되었
습니다. 대신 키보렌의 대수호자와 대장군 갈로텍이 저를 대신하여 의장
님을 모실 겁니다.]
칸비야 고소리가 뭐라 대답할 틈은 없었다. 륜은 곧장 눈을 돌려 데오
늬 달비를 바라보았다.
"달비 부위. 아직도 옛생각을 하고 있도록 내버려두었군요. 미안합니
다. 이제 그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은 당신을 구출할 수 없
지만, 언젠가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 윷놀이도 윷가락 셋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공작님."
키베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륜은 이해할 수 있었다. 데오늬는 모든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는데 억지로 시도하면, 즉 윷가락 세 개로 윷놀이를 시작
하면 재미도 없고 놀이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었다. 륜은 빙긋 웃으
며 그녀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을 했다.
"예. 셋으로는 부족하지요."
데오늬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 광경을 본 모든 사
람들은 세상 없어도 그녀가 구출될 거라고 믿게 되었다. 륜은 키베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대수호자님. 제가 묶었던 것을 풀어드리고 싶습니다만 시모그
라쥬와 북부군의 약속에 따른다면 이곳에는 수호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
다. 갈로텍을 위해 좀 더 참아주십시오.]
갈로텍이 독 오른 뱀 같은 기세로 닐렀다.
[그 따위 동정을 닐러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짓은, 너 자신을 위
해 그만두는 것이 좋을 거다. 하텐그라쥬에서 네가 돌려받아야 할 것만
불어날 뿐이니까!]
륜은 부드럽게 웃으며 닐렀다.
[예. 다음에 만날 때는 분명히 하텐그라쥬겠군요.]
륜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닐렀다.
[그 다음에는, 아마도 더 이상 서로를 볼 일이 없을 겁니다.]
[동의한다.]
[하텐그라쥬에서.]
[하텐그라쥬에서.]
륜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를 바라보는 군중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시모그라쥬를 떠났다.
륜이 떠난 다음, 칸비야는 대수호자와 대장군, 그리고 데오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자신의 쥐 사육사에게 손님에 대한 몇 가지 주의를 한
다음 - 데오늬 달비는 특별 요리가 아니라 방문자라고 설명해주는 - 칸
비야는 못들을 니름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사육사를 내버려둔 채
응접실로 돌아왔다. 응접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키베인과 데
오늬 뿐이었다. 그들에게 이야기를 건네기 전 칸비야는 사용인들의 부주
의를 저주하며 불을 가져오라고 닐러야 했다. 응접실은 데오늬에게 도저
히 적절한 밝기가 아니었다. 사용인들이 당황하며 밤에 책을 읽을 때 사
용하곤 하는 불을 가져오자 칸비야는 그들을 모두 쫓아낸 다음 응접실에
앉았다.
[대수호자님. 누옥을 방문해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소리. 저는 대수호자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허물벗
기를 해야 하는 어떤 남자의 동료 자격으로 시모그라쥬를 방문 중입니
다. 이곳에는 수호자가 있어서는 안되지요?]
[예. 그렇긴 합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키베인은 빙그레 웃었다.
[예. 그리고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을 하나 더 드리자면, 제 또다른 동료
를 위해 육성으로 대화했으면 하는군요. 그녀가 대화에서 배제되고 있다
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요.]
칸비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데오늬를 바라보았다. 데오늬는 나가 저택
안의 모습에 감탄을 금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데오늬 달비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북부군 부위 대나무 군단 포로 데오늬 달비입니다."
그리고 데오늬는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키베인은 눈치빠르게
말했다.
"의장님입니다."
"아, 예! 의장님!"
칸비야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비록 육성 대화
의 요구라든가 데오늬의 말을 거든다거나 하는 대수호자의 태도를 이해
하기 어려웠지만, 칸비야는 대수호자를 위해 경의를 가지고 데오늬를 대
하기로 결정했다.
"아니, 내 집 안이니 가주라고 부르면 됩니다. 속박당하고 있는 몸이니
상심이 크겠군요."
데오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주님. 공작님께서 구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가주
님."
하마터면 꼭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말할 뻔했던 칸비야는 아무리
중립 도시의 평의회 의장이라도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이상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칸비야는 말을 바꿔 얼버무렸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데오늬. 미안하지만 잠시
우리끼리 니름으로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말은 좀 어려워서 그럽니
다."
"그러십시오, 가주님! 그런데 그 동안 이 방을 구경해봐도 될까요?"
"예. 얼마든지."
데오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달려갔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
라보던 키베인은 데오늬가 넘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도착한 것을 확인하
고는 칸비야를 바라보았다.
[무슨 긴한 니름이라도 있으십니까, 고소리?]
[대수호자님. 이 도시의 중립 선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그
륜 페이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약간 놀라던 키베인은 곧 체념하는 얼굴로 닐렀다.
[여신이 어디에 감금되어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겠군요.]
[예. 그것이 사실입니까?]
[제가 그것이 사실이라고 고백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어려운 질문이시군요. 일반론을 니른다면, 모든 나가들을 상대로 그
사실을 공표하고 사건 관계자 전부가 처벌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 생
각에 그 사건 관계자가 거의 모든 수호자들인 것 같군요. 이 사기극의
거대함에 할 니름을 잃게 되는군요.]
[계속 가정에 입각해 니르겠습니다. 만일 그것이 기왕의 사실인 경우,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호자들도 영
원히 여신을 가둬둘 수는 없을 겁니다. 그 때문에 새로운 수호자가 나타
나지 않는다는 간단한 문제부터 보다 복잡한 문제까지, 그 감금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는 산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척하고 계신 겁니까?]
[어떤 수호자들은 수중에 들어온 힘의 강대함에 매료되기도 할 테고 어
떤 수호자들은 심장탑 밖에서, 한계선 너머에서 만나게 된 모험에 만족
하기도 할 겁니다. 그리고 어떤 수호자들은 언젠가는 여신이 다시 풀려
날 것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기도 할 겁니다.]
[북부군이 성공한다면 그 시기는 앞당겨지는 겁니까?]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럴 경우 힘과 모험을 잃게 된 수호자들은 화를
내겠지요.]
[대수호자님. 그런 것에 만족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제 경험상 애초에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모르되 이미 손에 들어온 것을 다시 포기하는 것
은 니름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니르시는 그 힘과 모험을 동경하는
수호자들은 모든 북부인들을 궤멸시킨 후에도 그 힘을 포기할 것 같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그것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물론 동족들을 상대로 쓰겠지요. 당신이 대수호자가 되기 전에 발생했
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잖습니까.]
키베인은 침울하게 긍정했다. 칸비야는 닐렀다.
[이미 중립을 선언한 시모그라쥬는 키보렌 전체에 대해 설득력 있는 주
장을 개진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키
보렌의 대수호자입니다. 수호자들이 저지른 일을 고백하고 모든 것을 원
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괴로운 지적이군요. 차라리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대수호자의
자리를 물려주는 역할을 맡고 싶습니다만.]
키베인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던 칸비야는 조심스럽게 닐렀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
[도대체 이 전쟁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수호자 이외의 사람들에게 그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여신의 구출이지요. 하지만 여신을 감금한 것은
사실은 수호자였습니다. 그러면, 수호자들은 왜 전쟁을 일으킨 겁니까?
우리에겐 북부의 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에겐 필요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수호자들에겐 필요했습니
다.]
[무슨 니름입니까? 수호자들이 무엇 때문에 땅이 필요합니까?]
키베인은 창가 쪽을 돌아보았다. 데오늬는 그곳에 없었다. 그녀를 찾던
키베인은 데오늬가 방 한쪽에 있는 화로와 춤채들을 흥미진진하다는 듯
이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가설 속에서,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하텐그라쥬의 수호
자들일 겁니다. 그들이 모든 일을 시작했을 테니까요.]
[모두 가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니 그 가정형은 제외하셔도 됩니
다.]
[알겠습니다. 이 모든 일을 시작한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만이 의장님
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짐작해 본다면, 그들이 그렇
게 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그럴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칸비야는 비늘을 부딪쳤다.
[다른 이유가 없다고요! 그토록 많은 나가와 불신자들이 죽었는데!]
[능숙한 춤꾼이 춤채를 휘두르는 것에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 이유는
없습니다. 춤꾼이 오른팔이나 왼팔을 들어올리는 것, 혹은 도약하거나
회전하는 것에 이유는 없습니다.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물론 춤꾼에게 물어본다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혹은 예술적
고취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등으로 대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의
대답이라면 저도 해드릴 수 있습니다.]
키베인은 옷자락을 어루만졌다.
[여자들을 위한 세상에 태어나 실질적, 물질적, 현실적 권력은 가지지
못한 채 가식적인 존경만을 받은 끝에 모든 나가들을 증오하게 된 수호
자들은, 그러나 차마 나가 전체를 공격할 수 없어 그 증오를 돌릴 상대
가 필요해졌습니다. 그것이 불신자들입니다. 그들을 증오할 이유는 사실
없습니다. 서로 얼굴 볼 일도 없는 자들을 증오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수호자들이 찾아낼 수 있는 이유는 까마득한 옛날의 대확장 전쟁 뿐입니
다. 하지만, 그것은 불신자 공격에 대한 역사적 당위성이 될 수 있습니
다. 그래서 그들은 여자를 공격하는 대신 불신자들을 공격했습니다. 또
한 그들은 그런 공격을 통해 자신의 공격성을 해소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설명이 더
그럴 듯합니까?]
칸비야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키베인은 희미한 미
소를 지었다.
[아니오.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사
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막는 것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입니다. 오직 할 수 없는 일만 무시됩니다. 왜 아무도
하늘치에 올라가지 않으려 하는지 아십니까? 아무도 하늘치에 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시도됩니다. 그것은 누구도 막
을 수 없습니다. 어떤 춤꾼은 닐렀지요. 춤꾼이 춤을 추는 까닭은 그곳
에 춤채가 있기 때문이라고. 살아있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할 수 있는 것은 한다는 겁니까?]
[예. 먹을 수 있는 것은 먹고요.]
무슨 니름인지 몰라 당황하던 칸비야는 곧 정신적 웃음을 터뜨렸다. 그
리고 하인들에게 먹을 만한 것을 가져오라고 닐렀다. 꽤나 시장했던 대
수호자는 칸비야의 배려에 감사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만다면, 수호자들의 죄상을 고발할 수 있는 당
신은 그렇게 해야하지 않습니까?]
[아니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재미를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저는 일단 하텐그라쥬에 대한 북부군의 공격의
결과를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때쯤 되
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사람도 더 많아지리라 생각됩
니다. 의장님이 니르시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데 있어 호응을 얻기도
쉽겠지요.]
칸비야는 그 대답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렇군요. 저도 일단 대수호자님의 모범을 따르겠습니다. 중립 선언을
지켜야 하니까요. 하지만 북부군의 공격이 실패한다면, 저는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니르겠습니다.]
[그건 의장님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의장님의 뜻대로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키베인은 오래간만에 만찬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키베
인은 데오늬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칸비야는 하인들에게 약술사의 도구
들을 얻어오라는, 그들을 꽤 당황시키는 명령을 해야 했다. 다행히도 데
오늬는 약술사의 도구들이 요리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곧 깨달았고, 그
래서 칸비야에게 감사한 다음 그 도구들로 요리를 했다. 자신이 우수한
요리사임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데오늬의 요청을 거부하지 못한 키베인은
그 요리를 먹고 말았다. 그리고 밤새도록 배탈에 시달려야 했다. 칸비야
는 그것이 그녀가 겪어야 했던 온갖 놀라운 일의 웃기는 결말이라고 생
각했다.
그녀의 생각은 옳지 않았다.
"나가의 도시에 들-어-간-다-고-요-!"
티나한은 절규하듯 외쳤다. 두억시니들은 긴장하여 티나한을 바라보았
고 마루나래도 어깨털을 빳빳하게 세웠다. 사모 페이는 마루나래의 다리
를 쓰다듬어주며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기의, 역시
만만치 않게 커다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래. 티나한. 우리는 저 도시에 들어간다."
"왜 그래야 합니까! 저기에 어디에도 없는 신의 신체가 있습니까?"
티나한의 상상에 동요하는 사람은 비형 뿐이었다. 케이건은 우울한 눈
으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기는 말했다.
"아니.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저 도시에 들어가면 시체가 되어 나올 텐데요?"
"걱정마. 저 도시는 중립을 선언했다."
케이건은 흠칫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놀란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
보았고 그냥 분위기를 맞춰보려는 것에 불과했지만 갈바마리도 놀란 표
정을 지었다. 아기는 웃었다.
"시모그라쥬는 이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했다. 그래서 시모그라쥬를 지
키던 나가의 군대는 모두 하텐그라쥬로 이동했어. 그리고 북부군 또한
저곳을 우회하여 남진했다. 그러니 우리는 저기에 들어가도 돼."
모두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서로를 관찰하는 가운데 케이건이 억양 없
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나가를 믿지 않습니다. 여신이여."
"너는 그렇지. 하지만 이번에는 믿어봐."
"아니오. 그들이 약한 척, 아픈 척, 죽은 척한다고 해서 칼을 칼집에
꽂아넣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저는 그런 속임수에 너무 많이 당했습
니다."
사모는 팔짱을 낀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분명히 알아차렸
지만 케이건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모는 결국 입을 열어 말했다.
"케이건 드라카. 네 왕도 나가인데."
"폐하. 저는 당신에게 충성합니다만,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이상한 말이군."
"나가들이 저를 이상하게 만듭니다."
케이건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사모는 다시 대꾸하려 했다. 하지만 아
기가 끼여들 듯이 말했다.
"그만. 둘 다 그만해. 그래서 케이건. 어쩔 테야? 들어가지 않을 건가?
미안하지만 나는 저기에 들어가야 해."
케이건은 한참 동안 말없이 아기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왜 그런지 설명해주십시오."
"조금 전 북부군이 저곳을 통과했다고 말했지. 그들이 저곳을 통과할
때, 시우쇠는 내게 남기는 말을 나가 중 하나에게 전했다. 나는 그 나가
를 만나서 시우쇠의 말을 들어야 해."
티나한과 비형, 사모는 이해했다는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
개를 가로저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하실 말씀이 있다면, 시우쇠님은 그냥 그 자리
에서 고개를 숙이고 땅에 대고 말씀하셔도 될 겁니다. 그러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왜 나가를 통해 말씀을 전한다는
겁니까?"
케이건의 지적에 다른 세 사람은 또다시 당황하여 아기를 바라보았다.
마루나래와 두억시니들만은 더 이상 긴장하지 않은 채 한가로운 대호나
두억시니들이 할 법한 일을 하고 있었다. 아기는 고개를 숙이고 땅을 향
해 외치는 화신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빙긋 웃었다.
"케이건. 미안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할 수 없어. 생각해봐. 너희들은
나를 찾아서 긴 시간 동안 수탐을 했어. 왜 그래야 했을까? 너희들도 그
냥 고개를 숙이고 나를 불렀어도 될 텐데. 아니, 그러지 않았더라도 나
는 너희들이 나를 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러면 왜 내가 너희들을
찾아오지 않았을까?"
케이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신은 최후의 대장장이의 태내에 있었으니까… 아니, 그렇지 않군요.
우리가 수탐을 시작한 것은 4년 전이니까. 그 때는 다른 레콘의 안에 계
셨겠군요."
"정확해."
"그렇다면 왜 저희들이 수탐하도록 내버려두신 겁니까?"
"그렇게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시우쇠 또한 그런 방법 뿐이
기 때문에 어떤 나가를 통해 나에게 말을 전하는 것이고. 자, 이제 내게
신들의 모든 일을 고백하라고 강요할 거니? 그렇잖으면 내 말대로 저곳
으로 들어가겠어?"
케이건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티나한과 비형은 걱
정스러운 듯이 아기와 케이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결국 케이건은 등에
맨 바라기를 꺼내었다. 그것을 손에 쥔 케이건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 칼은 무슨 의미지?"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저는 나가를 믿지 않습니다. 제 판단에 의해 위험
하다고 생각되면 영웅왕의 검은 휘둘러질 겁니다."
아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들고 다니면 무거울 텐데. 좋을대로."
아기가 허락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케이건은 비형에게 수백 개의 도깨
비불을 만들라고 요구했지만 아기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신음을 흘린 다음 티나한에게 아기가 시우쇠의 말을 전달받을 동안 심장
탑을 점거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했지만 아기는 그것도 거부했다. 케
이건은 굽히지 않고 새로운 제안들을 꺼내어놓았고 그 동안 티나한은 비
형과 케이건이 바뀐 것 같다는 착각에 계속 시달려야 했다. 결국 모든
제안을 거부당한 케이건은 얼음장 같은 얼굴로 주위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들며 말없이 걸어갔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평온한 심정은 아니었다. 열대의 태양이 습지를 비
치는 오후를 걸어가며, 그들의 심정은 점점 시각적으로 드러났다. 시모
그라쥬가 가까워질수록 티나한은 점점 부풀어올라 아기를 거북하게 만들
었고 비형의 등 뒤에는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도깨비불 비형들이 행진
을 하고 있었다. 사모 페이 또한 긴장을 완전히 억누르지는 못했다. 나
가의 도시로 돌아가는 보통의 나가가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은 사모 페이
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북부의 왕이었다. 그래서 시모그
라쥬의 지척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정신적인 피로감에 탈진해버렸고, 그
들의 모습에 당황한 나가들이 왔던 길로 되돌아 뛰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될대로 되라는 식의 무덤덤한 반응만 보였다. 다만 케이건은 도망치는
나가들을 뒤쫓아갈 듯 험악하게 바라기를 들어올렸지만 아기가 제 때에
그를 제지했다.
"케이건. 그만둬. 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나는 너희들과
함께 이 도시를 순식간에 떠날 수 있어. 이제 안심할 수 있겠나?"
케이건은 여신에게 사과했다. 누구에게도 그건 진심어린 사과로 보이지
않았지만 아기는 화를 내지 않았다. 케이건은 주위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냥 걸어가자."
케이건은 울부짖듯이 반문했다.
"그냥 걸어갑니까?"
"응."
케이건은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건물들에서 나가들이 몰려나올 때까
지만 그렇게 했다. 나가들의 모습을 본 순간 케이건은 발작적으로 바라
기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건물 밖으로 나온 나가들은 바라보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시모그라쥬의 시민들이 그 도시가 생긴 이래 가장 놀라운 방문자들의 모
습에 경악한 것은 분명했다. 자꾸만 서로를 쳐다보고 눈을 비비고 비늘
을 부딪치는 그 모습은 다른 감정으로 해석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
뿐, 모두들 제자리에 선 채 아무도 감히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그들에
게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비형은 반갑게 외쳤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좋은 꿈들 꾸셨습니까?"
도깨비의 호의 어린 인사는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다만 사모가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격하지 말라는 니름들이 들리는군."
수탐자들은 왕을 돌아보았다. 사모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보았
다.
"너희들에겐 고요한 군중으로 보이겠지만, 나가에게 이곳은 엄청난 소
란의 한가운데야."
수탐자들은 왕의 설명과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 풍경에 난처해 했다. 그
들에게 그곳은 산사에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요한 도시였다. 하
지만 사모는 정신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소란스럽군. 니름을 알아듣기 힘들 정도야. 하지만 몇 마디는 알
아들을 수 있어. 공격하지마. 중립이야. 누가 올 거야. 기다려. 대충 그
런 니름들이야. 여신의 말씀처럼, 누군가가 그 분께 들려줄 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의장이 올 거라는 니름이 들리는군."
주위의 모든 나가들을 향해 거리낌 없이 공격 의사를 표현하고 있던 케
이건이 사모를 휙 돌아보았다.
"병사도 옵니까?"
"아냐. 그런 니름은 없어. 니름을 걸어보고 싶은데, 이 자들은 그걸 원
하지 않는 것 같군. 일단 기다려보자."
그들은 제법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 동안 비형은 나가들과 친해
지려 애썼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에게서 환호를 받고야 말겠다는 별
가치 없는 소망을 품게 된 비형은, 도깨비불로 온갖 형체를 만들어 그들
의 하늘 위를 날게 했다. 하지만 사모는 곧 다급하게 비형을 제지했다.
그들을 화나게 하고 있음을 전해들은 비형은 의기소침하여 나가들에게
목례했다. 그 때 케이건은 기다리던 자가 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대로 반대편에서 한 명의 늙은 나가가 달려왔다. 그녀의 뒤편으로 몇몇
젊은 나가들이 사이커를 든 채 달려오는 것을 발견한 케이건은 이를 부
드득 갈며 바라기를 높이 들어올렸다. 아기와 사모가 동시에 외쳤다.
"의장의 호위자야!" 케이건은 아기를, 그리고 사모를 쳐다본 다음, 서서
히 바라기를 내렸다. 하지만 그의 근육들은 잔뜩 긴장하여 옷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여전히 잔뜩 부풀어 있던 티나한 역시 철창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보통 육성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에겐 거북함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걸음을 멈춘 늙은 나가는 일행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인간과 도깨비,
그리고 스물두 명의 두억시니와 대호를 본 그녀는 비늘을 마구 부딪쳤
다. 대호의 등 위에서 익숙한 나가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가까스
로 평상심을 되찾은 듯이 닐렀다.
[그 대호를 보니 당신은 정신억압자군요. 그런데 이 이상한 일행은…
아니, 관두지요. 아무 설명도 듣지 않겠습니다.]
자신이 대호왕이라는 것을 밝힐 필요가 없게 된 사모는 안도했다. 여인
은 입을 열어 육성으로 말했다.
"시모그라쥬 평의회 의장 칸비야 고소리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게 자신
을 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다리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이제 저는 이
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소망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칸비야는 티나한을 향해 말했다.
"시우쇠님의 전갈을 전해드리겠습니다."
티나한은 당황하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칸비야는 거의 기절할 뻔했고
그녀를 호위하던 나가들은 사이커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케이건 또한 야
수 같은 함성을 지르며 바라기를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티나한은 황급
하게 말했다.
"잠깐, 잠깐! 모두들 잠깐만 참아. 이봐, 늙은 나가. 전할 말이 있다
고?"
"그, 그, 그렇습니다."
"전할 대상을 착각한 것 같다. 잠깐만."
그리고 티나한은 몸을 돌려 칸비야에게 등을 보였다. 칸비야는 티나한
의 등에 있는 안장과 그 속에 있는 털뭉치 같은 머리에 놀랐다. 아기가
부리를 열었다.
"내게 전할 말이 있겠지?"
'아기라고!'
칸비야는 실수를 저지르게 한 시우쇠를 원망하고 싶었다. 시우쇠가 어
떤 모습일지 알 수 없다고 말한 사실을 떠올린 칸비야는 간신히 부끄러
움에서 벗어났다. 칸비야는 자신의 당황과 공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비
록 눈앞에 있는 일행들의 모습이 형언키 어려우리만큼 괴이하긴 했지만,
그녀는 불과 얼마 전 북부군의 진지에 단신으로 찾아갔던 자신을 떠올리
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리둥절해 하던 그녀는 문득 케이건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순간 그녀는 꽤나 비이성적인 결론을 내렸다.
케이건은 칸비야의 시선에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칸비야는 비늘을 세
우며 황급히 아기를 돌아보았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십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시우쇠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빛이 탄로났다."
아기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칸비야는, 다른 사람
들이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짓눌릴
것 같은 압박감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두려워하며 말했다.
"제가 올바로 한 것입니까?"
"그렇다. 칸비야. 수고에 감사한다."
"제 무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그 말씀도 감사합니다만, 이곳에서
떠나주셔서 저희들을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제발 저 남자를 데리고' 라는 의사는 말로도, 니름으로도 표현되지 않
았다. 비형을 제외한 사람들 모두가 그 말에 찬성했다. 비형은 끝내 환
호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만 제외하고 모든 핑계를 댔다. 그리고 그 핑계
들은 무시되었다. 아기는 웃으며 칸비야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그
들은 왔던 길을 통해 조심스럽게 시모그라쥬를 빠져나갔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다른 시민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칸비야 의장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살기등등한 북부군들에 둘러싸여 있
을 때도, 그리고 화염의 화신과 직면했을 때도 그녀는 자신의 침착을 유
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그녀는 긴 시간 동안 갈고 닦은 모든
침착을 잃고 본능적 두려움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녀는 조금전 얻었던
비이성적인 결론을 다시 반추하며 혼란을 느꼈다.
'맙소사. 한 인간의 눈이 나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다니! 이해할 수 없
어.'
설명을 요구하는 무수한 시선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계속해서 그 눈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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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4. '셋은 부족하다' 편 끝났습니다.
날이 더우니 키보드 두드리는 일도 끔찍하군요. 무진장 지칩니다. 모두
들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5-1. 관련자료:없음 [57309]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8-09 00:53 조회:6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