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14. 셋은 부족하다 - 1
바라기의 실종이 정확히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는 알기 어렵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 물건을 찾으려 했을 때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는 사실을 알게 되는 흔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라기의 실종에 관련된 상황을 거의 정확하게 아는 셈이다. 바라
기의 실종이 실제로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은 추풍왕 2년의 일이
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이나 문헌학자들은 그 이전 시기의 사료들
에서 이미 '거대한 슬픔'이나 '돌이킬 수 없는 손실', '우리 모두
가 아는 저 끔찍한 손해' 등의 은유적인 표현들을 찾아낼 수 있었
다. 따라서 추풍왕 2년의 저 유명한 고발은 고발이 아니라 이미
공공연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이전 시기의 왕들에게, 바라기는 그렇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도로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지는 경우가 더 많은 극연왕은 역대
최장기간의 집권 기간을 통해 열성적으로 도로를 건설했으며, 아
라짓 전사들은 어쨌든 훌륭한 건축가는 아니다. 따라서 극연왕의
기나긴 집권 기간 동안 아라짓 전사들을 통솔하기 위해 바라기가
등장해야 하는 일은 없었다. 또한 그 뒤를 이은 독서왕의 경우 극
연왕이 건설한 도로를 고서적 수집에 이용할 수 있게 된 자신의
행운에 즐거워하며 집권 기간의 대부분을 소비했다. 그리고 슬픔
과 분노를 느끼지 않고서는 거론하기 힘든 저 탐미왕의 경우도 전
쟁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할 것이다. 극연왕이 전쟁을 장악해놓은
상태에서 자신의 사업을 벌였던 것에 반해 독서왕과 탐미왕은 자
신의 사업에 바빠 전쟁을 무시해버렸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
쨌든 대확장 전쟁의 모든 시기를 통틀어 추풍왕 이전의 150 여년
만큼 전쟁과 무관했던 시절도 드물다. 바라기는 바로 그런 시기에
사라진 것이다. 독서왕과 탐미왕이 방치해둔 나가 문제에 정면으
로 대응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던 추풍왕에게 그것은 실
로 커다란 재난의 발견이었다. - 라수의 <왕국의 몰락>
자욱한 안개가 숲의 발치를 더듬는다. 번지고 흩어지지만 엷어지지 않
는 흰 얼룩.
기이하리만큼 짙은 안개에 즈라더는 벼슬을 뻣뻣하게 세웠다. 차가운
양날도끼에 묻어나는 이슬은 즈라더를 더욱 기분 나쁘게 했다. 즈라더는
배낭에서 노획물인 옷을 꺼내어 도끼를 닦았다. 그리고 다 쓴 옷가지는
그냥 버렸다.
어떤 병사는 근사한 단추를 잔뜩 모았다. 옷에 모조리 바느질해서 붙여
놓아 그 꼴이 광대 같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
다. 단추가 떨어진 동료가 있으면 별 생각 없이 뜯어서 건네주곤 했으니
까. 또 어떤 병사는 륜이 서판이라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무엇인지도 몰
랐던 나무판을 모으기도 했다. 그 자는 그것을 도마로 쓰거나 겹쳐쌓아
베개로 쓰거나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그저 그 나뭇결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북부군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즈라더 또
한 나가들의 도시에서 뭔가를 모아들였고, 그가 주로 모아들인 것은 수
건이나 걸레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옷가지들이었다. 즈라더 역시 그것
을 도끼 닦는 데 사용하긴 했지만, 그런 용도로 모은 것이라면 질긴 것
대신 예쁘게 보이는 것을 모아들인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번쩍거리는 도낏날에 자신의 근사한 수염볏이 잘 비치는지 관찰하던 즈
라더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짤깍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즈라더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즈라더는 고개를 돌려 세미
쿼 장군을 바라보았다. 세미쿼 장군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개를 직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왼손에 쥐어진 가위는 마치 불규칙한 맥박처럼 짤
깍거렸다. 날을 얼마나 세웠는지 가윗날이 부딪힐 때마다 서컹, 서컹 하
며 가슴을 에는 소리가 난다. 누군가의 손가락 쯤은 어렵잖게 잘라낼 듯
하다. 즈라더가 그 짓 좀 그만두라고 말하기 전, 누군가가 그를 대신하
여 말했다.
"가위질은 포목점에서나 해라."
세미쿼는 무핀토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너무 조용해서 그런다. 지독하게 조용한데."
무핀토는 불쾌한 신음을 흘리며 안개 너머를 바라보았다. 유혹하는 듯
도 하고 배격하는 듯도 한 기이한 안개다. 무핀토 장군은 몸을 떨었다.
세미쿼 장군이 다시 말했다.
"그 녀석도 이 고요를 견디기 어려웠던 걸 꺼야."
세미쿼가 말하는 '그 녀석'이 누군지 아는 무핀토는 욕짓거리를 늘어놓
았다. 험한 말을 늘어놓던 무핀토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닿는 곳에 키타타 자보로 장군이 차분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자보로 장군은 방패를 팔에 끼운 채 동상마냥 꼿꼿하게 서 있었다. 안
개를 바라보는 북부군들의 모습은 다양했지만 자보로 장군만큼 특이한
자는 없었다. 거의 모든 북부군은 안개의 모습에서 불길함과, 그리고 인
정하지는 않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부동 자세로 서서 안개
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키타타 자보로에게선 그런 감정의 흔적을 읽을 수
없다. 도도한 분노와 정숙한 증오. 혈족의 마지막 생존자의 모습은 안개
속에 서있는 바위 기둥 같다. 그 당당한 모습 앞에선 젖빛 안개 너머로
보이는 시모그라쥬의 장려한 석조 건물들조차 왜곡되기 쉬운 환상처럼
보인다.
침묵의 도시로 향하는 길의 마지막에 버티어 선 시모그라쥬는 키보렌의
모든 힘으로 북부군을 저지할 태세였다. 모여든 군단은 다섯. 하지만 수
호장군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북부군의 원수부에서, 라수는 그 숫
자에 대한 보고를 받고 우울증에 빠지려는 자신을 느꼈다.
"쉰 네 명?"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장군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그 정도입니다."
"수준이 어떻습니까? 시우쇠님과 공작님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
숫자입니까, 그건?"
"이 안개만 봐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들은 습기
를 닥치는대로 모아왔습니다. 이 습기를 실제로 운용하기 시작한다면 그
힘은 엄청날 겁니다. 왜 도시 안에 틀어박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페로그라쥬와 악타그라쥬의 심장탑을 파괴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심장탑을 최우선 방어 거점으로 정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저쪽
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인데…"
라수는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곁에 있던 괄하이드 규리하가 나
직하게 말했다.
"나라면 최우선 방어 거점을 하텐그라쥬로 정했을 거다. 발자국 없는
여신이 계신 곳이 그곳이니까. 발자국 없는 여신이 풀려나면 수호장군들
은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는 거잖아. 시모그라쥬를 우회하
자."
라수는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뒤에서 공격당할 수 있어. 뱀단지 때문에 저 녀석들의 작전수행에는
시간차가 없지."
"그렇다면 뱀부리미를 잡는 것은 어떠냐? 군단병들은 모두 수호장군들
을 보호하고 있을 거다. 빌파 삼부자를 침입시켜 뱀부리미들을 잡는다면
적들의 의사 교환을 방해할 수 있을 거다."
"다섯 개 군단이면 최소한 뱀부리미가 다섯은 있을 테지. 쉽지 않아.
그런데 내가 정말 신경쓰이는 부분은 따로 있어."
"그게 뭐지?"
"저 친구들은 왜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거지? 수호장군들이 쉰 네 명이
라면 비를 오게 하는 것 정도는 방어력의 손실 없이 시도할 수 있을 거
야. 그 정도만 시도해도 아군의 레콘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는 있어.
아무리 겁을 먹고 있다 해도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
해."
"심장탑 근처를 떠나기가 싫은 건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
습니까?"
륜의 지적에 라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뭘 말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
륜은 입을 다물었다. 라수는 부유하는 안개를 노려보며 다시 생각에 잠
겼다. 괄하이드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 녀석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수."
라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마음대로 해. 형이 대장군이잖아."
괄하이드는 그대로 몸을 돌리며 륜에게 눈길을 한 번 보냈다. 묻지 않
아도 알 수 있는 의미였기에 륜은 걸어가는 괄하이드의 뒤를 따라갔다.
안개를 가로지르며 괄하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륜은
걷는 사람이 셋임을 깨달았다. 어느새 베미온이 그의 곁에 따라붙어 함
께 걷고 있었다. 베미온은 안개 때문에 기절할 것 같은 상태였다. 륜은
약간의 힘을 가해 그들의 주위에서 안개가 물러나도록 했다. 괄하이드는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걸어가며 말했다.
"나보다 훨씬 예민하실 테니 라수의 심리에 대해서는 잘 아시겠지요."
의지가 목소리로 바뀌기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륜은 당황하지 않고 괄
하이드의 말에 대답했다.
"나가를 사람으로 인정하기 싫은 겁니다."
괄하이드 규리하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대장군이 설명을 원한다는 것을 아는 륜은 그의 등을 향
해 말했다.
"열을 보지도 못하고 니르지도 못하지만, 이기기 위해 상장군은 나가처
럼 생각하고 나가처럼 행동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나가를 이해하는 것은
거절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잘 알게 되면 증오하기 어려워지니까요. 그
래서, 나가인 저와 동료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거절하
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가를 알려면 역시 저를 관찰해야 하지요. 그것이
상장군의 갈등입니다."
베미온은 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륜의 말을 이해하는 것
은 아니다. 베미온은 그저 그 음색을 좋아했다. 괄하이드가 말했다.
"나는 공작만큼 예민하진 못하지만 라수와는 한 가족인지라 그의 과거
를 잘 아오. 라수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행동해왔소. 동료 이상으로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지요. 다가갈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부드
러워지지. 가족 중에 나를 그나마 가까이하는 것도 그 때문이오."
괄하이드의 말을 듣던 륜은 무의식 중에 말했다.
"먹힐까봐 두려운가 보죠."
말을 끝낸 륜은 곧 괄하이드의 당황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으로 뒤돌아보는 괄하이드를 향해 륜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별 말 아닙니다."
"알겠소. 언짢으신 건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를 잘 알면 증오하기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
다."
용인은 물론 누구보다도 상대를 잘 안다. 괄하이드는 탄복한 듯이 고개
를 끄덕거렸다.
"기우였군. 나보다 훨씬 라수를 잘 이해하시겠군."
"아니오. 예민함과 이해력은, 물론 상호보완적인 것들입니다만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당신을 압니다만 당신을 이해할 수는 없습
니다."
괄하이드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 말이오? 북부군에서 나처럼 단순한 자를 찾아보기도 힘들 텐데."
[그 단순함이 저를 때론 놀라게 합니다.] "저는 당신이 대호왕의 영광
과 그 분의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즐겁게 포기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
습니다. 왜냐 하면, 당신은 생명이 귀중한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맞소. 생명은 귀중하오."
"그 믿음이 어떻게 기쁜 살인과 즐거운 자살의 이유가 되는지 모르겠습
니다."
괄하이드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미소로 륜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륜을 불편하게 했다. 괄하이드는 시선을 옮겨 자신의 손에 들
린 대도를 바라보았다.
"케이건 드라카가 내 대도를 가리켜 과부와 고아를 생산해내는 것에 탁
월하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오. 내게서 내 지위와 내 처지를 제거하고 단
순히 내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만 센다면, 나는 상종할 수 없는 살인마일
거요. 하지만, 공작. 살인이 기뻤던 적은 없소."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잖습니
까?]
세 사람 사이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베
미온이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다시 괄하이드가 말했다.
"내가 생각이 부족했군. 당신은 죄책감을 느끼는 거요?"
"죽어가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느낍니다."
륜의 목소리에 배어든 스산함은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소름끼칠 만큼
관능적인 것으로 바꿨다. 산에게 부동심을 가르칠 수 있다는 노장군도
잠깐 동안 덥수룩한 수염이 올올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렇겠군. 생각했어야 하는 문제인데. 공작. 죽어가는 자의 슬픔과 분
노와 고통을 모두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짐작할 수 없구려."
문득 괄하이드는 륜 페이가 아직 소년임을 떠올렸다. 륜은 청년이 되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럴 기회가 오자마자 륜은 키보렌을 떠났고, 완전히
낯선 땅 북부에서 그는 다시 소년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북
부에서 시작된 륜의 두 번째 성장기는 유혈로 얼룩진 것이다. 그러나 그
런 잔학한 경험들이 사람들을 상처 입히면서 동시에 선물하곤 하는 단단
한 껍질을, 륜은 받지 못했다. 용인이기 때문이다. 상처 입기 쉬운 여린
살을 노출시키고 있는 어린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은 북부군 최고의 병기
이며, 동족들을 학살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괄하이드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장군이 자신의 놀람
을 표현하기 전, 륜이 앞서 말했다.
"예상치 못했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그것을 받으려 결심하고
온 것이니까요."
"그것?"
"나가들이 대호왕 대신 뇌룡공을 증오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단
말마가 클수록, 저는 누님에게 돌아갈 것이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하
지만, 그렇다 해서 제 손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 가벼워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장군의 평정심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할 일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지 아는구려?"
"압니다. 제가 왜 필요한지도."
괄하이드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숲속의 공터에 도달했다. 공터 저편의 나무에는 한 남자가 밧줄
에 묶여 있었고 세 명의 병사들이 앉아서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병사
들은 괄하이드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모습은 특이했다. 지저분한 옷이야 북부군들 거의 대부분의 모
습과 마찬가지였지만 귀골로 태어난 잘 생긴 얼굴은 덮수룩한 머리카락
가운데서도 묘하게 창백한 빛을 띄고 있었다. 남자는 대장군을 한 번 바
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괄하이드는 병사들의 이름을 물었다. 병사들이 이름을 대자 괄하이드는
대도를 뽑아들며 말했다.
"그대들이 입회인이다."
병사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괄하이드는 그들에게 복장을 단정하
게 하도록 명령한 다음 남자에게 걸어갔다.
"칼리도의 성주, 북부군 상장군 지코마 펠독스. 고개를 들어라."
지코마 상장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괄하이드는 잠깐 기다렸다가 내
버려둔 채 말했다.
"자네의 범죄에 대해 처벌을 내리기 전,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기회를
주겠다. 할 말 있으면 해보게. 하텐그라쥬 공작께서 자네의 진의를 보증
하고 허위를 가려낼 걸세."
륜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괄하이드가 그것을 별로 원하지 않기 때문이
다. 하지만 세 명의 병사들은 더없이 공정한 판결이 내려질 거라 확신하
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자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지코마는 고개를 숙인 채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은 명령불복종을 저질렀습니다."
"상장군. 정확하게 말하게. 그 녀석이 누구지?"
"그 하전사… 이름이 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전사 고윌텐 유크라우다."
"그 하전사 고윌텐 유크라우는 내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자네가 또다시 안개를 향해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했을 때 고윌텐 유크
라우는 이미 네 시간 동안 노래를 부른 후였다. 상식을 무시하는 명령
아닌가? 게다가 그 명령불복종이라는 것에 대해 자네가 내린 처벌은 도
대체 뭐란 말인가. 자네는 목이 잠겨서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애원하는 고윌텐에게 목이 트이게 해주겠다고 말하고는 그의 목을 단검
으로 찔렀다. 그리고 자네를 말리려는 부하들도 가차없이 벴다. 그것은
도저히 상식을 가진 명령권자의 행동으로 볼 수 없다."
지코마는 한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괄하이드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 후, 지코마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명령불복종입니다."
"명령불복종은 우선 명령이 명령답다는 전제가 있은 연후에나 따져볼
수 있는 문제다. 지코마 펠독스. 자네의 명령은 도저히 명령이라 볼 수
없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나는 자네의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겠다.
그리고 그 처벌로 사형을 언도한다."
지코마가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괄하이드는 자신의 대도를 끌어올려 그 덮개를 풀었다. 륜은 병사들의
얼굴에 분명한 동요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괄하이드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상장군을 풀어 저기 있는 나무 등걸에 엎드리게 하라."
병사들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다가 역할을 나누었다. 한 사람이 작살검
을 뽑아 지코마 상장군을 겨누고 있는 동안 다른 두 사람이 그의 결박을
풀었다. 오랫동안 묶여있던 상장군은 제대로 걷지 못했다. 병사들은 상
장군의 두 팔을 허리 뒤로 묶은 다음 제대로 걷지 못하는 그를 들어올리
다시피 하여 나무 등걸로 데려갔다. 지코마는 곧 나무 등걸에 턱을 댄
채 엎드리게 되었다.
두 명의 병사들이 그의 등을 눌렀다. 뭔가 짧은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
고 병사 한 명이 괄하이드를 돌아보았다. 괄하이드는 필요한 지시를 내
렸다. 그러자 남아있던 한 명의 병사가 팔뚝에 감아둔 끈을 풀어내었다.
그는 지코마의 긴 머리를 쓸어모아 끈으로 묶었다. 동작이 익숙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륜은 사형의 경험이 있는 자는 괄하이드 뿐임을 알 수
있었다. 노장군은 대도를 늘어뜨린 채 병사들의 일하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지코마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살려주십시오."
'주십시오'부분은 심하게 갈라져 알아듣기 어려웠다. 괄하이드는 꿈쩍
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던 지코마는 실망하며 말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키보렌에 들어온 이
후 계속 그랬습니다. 이 저주 받은 밀림은 북부인이 들어와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머리카락을 묶은 병사가 괄하이드를 바라보았다. 괄하이드는 억압적인
눈짓을 보내었다. 병사는 지코마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단검으로 나무
등걸에 고정시켰다. 지코마의 목이 드러나며 머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
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병사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어 단검의 칼자
루를 내려쳤다. 쾅쾅 하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지코마의 몸이 분명한 울
림을 보였다. 지코마가 다시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미친 자는 벌하지 않습니다!"
칼리도의 강대한 지배자였던 남자가 스스로에게 금치산 판정을 내리고
있었다. 괄하이드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미치지 않았네. 지코마. 만일 그렇다면 하텐그라쥬 공작께서
말해주셨을 걸세."
지코마는 머리카락이 우두둑 빠져나가는 것을 감수하며 고개를 돌렸다.
등을 누르던 병사들이 황급히 힘을 가했다. 지코마는 숨 막히는 소리를
내고는 괄하이드를 향해 외쳤다.
"어차피 우리는 하텐그라쥬에서 다 죽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죽게 해주
십시오!"
괄하이드의 흰 눈썹이 찌푸려졌다. 지코마는 절규했다.
"제 처벌을 그 때까지 연기해주십시오! 죽은 상장군보다는 산 상장군이
더 쓸모있지 않습니까? 나가 한 놈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죽여야 된다면, 그곳에서 폐하를 위해 싸우다 죽게 해주십시오!"
단검을 고정시킨 병사가 뒤로 물러났다. 괄하이드는 대도를 움켜쥐고
위로 서서히 들어올렸다. 지코마의 등을 누르고 있던 병사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륜이 자신도 모르게 통제력을 잃은 덕분에 안개가 다시
넘실거리며 몰려왔다.
그 때 지코마가 륜을 바라보며 외쳤다.
"뇌룡공! 거기서 그렇게 보고 있을 거요? 나는 당신들 때문에 여기에
왔소!"
륜의 몸에서 비늘이 곤두섰다. 그 때 륜은 괄하이드가 대도를 내려칠
것을 깨달았다. 륜이 자신도 모르게 베미온의 눈을 가린 순간 괄하이드
가 대도를 휘둘렀다.
병사들의 뺨에 선혈이 흩뿌려졌다.
괄하이드가 나무 등걸까지 파고든 대도를 잡아당기자 지코마의 머리가
목에서 분리되었다. 조금 전까지 고함을 지르고 애원하던 머리는, 이제
돌멩이만큼도 그럴 능력이 없는 무정물이 되어 데굴 굴렀다. 머리카락이
고정되어 있어 지코마의 머리는 한두 번 흔들리다가 나무 등걸 허리에
기이한 모습으로 멈췄다. 머리카락을 묶었던 병사가 뺨에 튄 피를 닦아
내며 질문했다.
"매장할까요?"
"적전 대치 상태다. 그럴 여유가 없군. 돌과 나뭇가지로 대충 덮도록
해라. 햇빛과 이슬, 바람에 그를 맡긴다."
병사들은 묵묵히 지코마의 머리를 옮겨 그 몸에 맞추어놓았다. 그리고
작살검을 뽑아 나뭇잎이 무성한 가지들을 후려쳤다. 륜은 베미온을 돌아
서게 한 다음 그 자신도 몸을 돌렸다. 괄하이드는 대도에 묻은 피를 닦
아낸 다음 그것을 나무에 기대어 놓고는 지코마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작살검이 나뭇가지를 때리는 소리가 음산했다.
륜은 대장군이 중얼거리듯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추도사 같은 것에 소질이 없다. 그리고 지코마 펠독스라는 남자
의 가장 친한 친구도 아니다."
병사들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괄하이드를 바라보았다. 괄하이드는
엄숙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칼리도의 위대한 성주였으며 그 지혜로움
으로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들은 지코마 펠독스라는 남자의 가장 작은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함께 보낸 4년의 세월의 무게 때문에, 그리고 내 손으로 그
의 목숨을 끊었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감히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
송한다."
스멀거리는 안개 때문인지 의외로 피비린내는 적었다. 륜은 베미온을
잠시 돌아보았다. 베미온은 륜이 돌려세워둔 채로 얌전히 서 있었다.
"지코마 펠독스는 전우들 곁에서 위대한 스승이자 지혜로운 조언자였으
며, 적 앞에서는 토염(吐炎)하는 용과도 같았다. 그가 내게 준 것의 일
부분도 돌려주지 못한 내 무관심과 사려 없음으로 인하여, 지코마는 가
혹한 긴장 속에 홀로 버려졌다. 그런 긴장은 가장 강대한 영웅조차 무릎
꿇게 하는 바, 결국 그는 혼란에 빠졌다."
괄하이드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병사들이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후회한다. 내 모든 것으로 후회한다. 애초에 그를 돕지 못했기에
그의 목을 잘라야 했던 것을 후회한다. 무서운 적과 끝없는 전투는 내
무관심의 핑계가 될 수 없다. 그는 그런 무관심 속에 버려져도 무방한
자가 아니었다."
그 순간, 베미온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전투와 전투의 사이에서, 승리와 승리의 갈피에서, 나는 그를
잃고 말았다."
륜은 깜짝 놀라 베미온을 돌아보았다. 베미온은 여전히 지코마에게 등
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괄하이드가 주춤하는 사이, 베미온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육친의 마음보다 적의 마음을 더 알고 싶어했고 친우에게 줄 것
보다 적에게 줄 것을 고민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 행동에 대해 보
여주는 반응보다 적들이 내 공격에 대해 보여줄 반응이 더 궁금했다. 사
람들이 나를 가리켜 위대한 전사라 말할 때, 그들은 내가 적을 더 사랑
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구원자라는 찬란한 이름을 선물할
때, 나는 복수심에 찬 약자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상실했다. 나 또한 약자였기 때문이다."
괄하이드와 병사들이 놀란 눈으로 베미온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서있던 륜은 베미온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은 묘했다. 먼 과거
를 바라보는 눈길이었고 즐거웠던 날을 회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약자로 남지 않겠다. 내가 가진 순간들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강자가 되리라. 나는 잃지 않아야 했던 것을 찾
을 것이다. 내 잃어버린 극을 되찾을 것이다. 이 넓은 세상 어디에 그가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나는 세상의 모든 곳을 잇겠다. 그가 나에게 돌아
올 수 있도록. 내가 그를 찾아 달려갈 수 있도록. 이곳, 판사이의 탑,
왕의 방에 남겨두는 이 말은 내 과거에 대한 유언장이다. 이것은 어리석
음 때문에 오라비를 잃어야 했던 누이동생의 마지막 말이다."
고대에 북부를 지배했던 왕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는 륜 페이였
지만 그 놀라운 예민함 때문에 륜은 괄하이드의, 그리고 세 병사들의 정
신에서 흘러나오는 극연왕이라는 이름을 깨달았다. 말을 끝낸 베미온은
환한 얼굴로 륜을 바라보았다.
"제 말이 맞죠? 외울 수 있다고 했잖아요."
륜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원한다면 륜은 상대방이 원
하는 대답을 가장 정확하게 들려줄 수 있다.
그래서, 륜은 잠시 베미온의 어린 시절 스승이 되었다.
"그건 분명히 아라짓어로 적혀 있을 텐데. 네가 그걸 어떻게 읽었느
냐?"
"그 탑에 요즘 글로 된 해석본도 있다는 것은 모르셨죠?"
"그러냐? 하지만 그건 왕들의 비밀 기록이다. 마립간도 아닌 네가 감히
그 탑에 들어간 것, 그리고 왕들의 비밀 기록을 내게 들려준 것으로 벌
을 받아야겠구나."
베미온은 웃으며 도망쳤다. 안개가 그를 휘감아 감추는 것을 보며 륜은
짧은 순간 상실감 같은 것을 느꼈다. 추도사를 마무리한 괄하이드가 그
의 곁으로 다가왔다.
"공작. 그것은 뭐였소?"
"대장군의 추도사에 의해 유발된 퇴행이었습니다. 조금 전의 그것은 어
린 시절의 베미온 굴도하였습니다. 마립간이었던 큰아버지의 열쇠를 훔
쳐낸 베미온은 여섯 탑 중 하나에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왕들의 망
령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만 그런 것은 발견하지 못했
고, 다만 읽을 수 있는 글이 있는 곳을 찾아내었습니다. 그곳이 왕의 방
이었습니다. 왕들의 기록을 현대어로 바꿔 적은 이는…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권능왕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읽을 수 없다는 것에 화가 치
밀어서 그렇게 한 듯합니다."
괄하이드는 질리는 기분을 느꼈다.
"공작의 능력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을 정도로 무량하군. 베미온의
말을 듣자마자 그걸 다 '느낀' 거요?"
"그리고 대화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라비를 잃은 누이가
극연왕입니까?"
"그렇소. 내 개인적인 감상을 말한다면 케나린 규리하의 좋은 전범이
되었을 여인이오. 그런데 그 분께서 잃어버린 오라비를 찾기 위해 그 많
은 도로를 놓았다는 것은… 글쎄. 아무래도 공공의 복리와 개인적 이유
를 합친 것으로 생각해야 할 듯하오."
"그 오라버니는 왜 사라진 겁니까? 예. 기회가 되면 라수 상장군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륜이 자신의 대답을 듣지 않고 들었다는 것을 괄하이드가 이해했을 때,
륜은 이미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괄하이드를 돌아보던 륜의 눈길이 잠
깐 흔들렸다. 괄하이드는 그가 지코마의 시체를 덮고 있는 나뭇가지 더
미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괄하이드는 용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륜 페이가 시체를 덮고 있는 잘린
나뭇가지에서 인간과 다른 감정을 느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이라면 소름끼치는 시체의 모습이 감춰졌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무를 사랑하는 나가라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 륜은 말했다.
"베미온 마립간을 데려오겠습니다. 아직까지 퇴행 중인 것 같습니다."
"알겠소."
륜은 안개 속으로 떠나갔다. 괄하이드는 입회한 병사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한 다음 라수에게 돌아갔다.
시모그라쥬에서 일어난 소동은, 절대로 북부군의 지략가를 의심으로 몰
아넣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소동은 결과적으로 라수 규리하
를 의심에 빠지게 만들었다. 소동의 한가운데 있어야 했던 수호장군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작은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했다.
피나무 군단의 군단장이자 시모그라쥬 방어 작전의 입안자 및 그 주관
자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수호장군 인실롭은, 자신의 거창한
이름들이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되는 상황 앞에서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인실롭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모그라쥬 평의회 의장
칸비야 고소리는 딱딱하게 닐렀다.
[퇴거를 더 종용해야 하겠습니까? 내 니름은 농담이 아닙니다. 인실롭
군단장.]
[정말 이러실 겁니까? 시모그라쥬가 발을 빼면 그 다음은 하텐그라쥬입
니다! 북부군이 성지에 발을 들여놓게 하고 싶은 겁니까?]
[당신은 나에게 시모그라쥬를 저들로부터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고 자
신있게 닐렀습니다. 그렇다면 똑같은 일을 하텐그라쥬에서는 할 수 없다
는 겁니까?]
[상황이 다릅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급박한 상황이라면 기선
은 저쪽에 있습니다. 적들의 가장 큰 무기는 다름아닌 혼란과 기만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정함입니다.]
[나는 시모그라쥬가 희생할 수 있는 발판으로 여겨지는 사실이 달갑지
않군요.]
[그런 니름이 아니잖습니까!]
[아니, 그런 니름입니다. 물러날 곳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반드시 물러
나게 됩니다. 상황이 곤란해지면 당신들은 적들에게 최대의 피해를 강요
한 다음 하텐그라쥬로 물러가겠지요. 그리고 하텐그라쥬에서 쇠약해진
적을 분쇄하려 하겠지요.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시모그라쥬의 모든 시민
들이 죽은 후겠지요.]
인실롭은 비늘을 난폭하게 부딪쳤다. 쉰 네 명이나 되는 수호장군을 모
아왔건만 칸비야 의장은 환호를 보내는 대신 어떤 종류의 전투 행위도
거절함으로써 그를 당황시켰다. 그리고는 마침내 시모그라쥬를 떠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인실롭은 분노를 억누르며 그와 칸비야 의장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을 무
시해보기로 했다.
[저희들이 물러나면 북부군이 시모그라쥬를 얌전히 지나칠 거라 생각하
십니까?]
[그러기를 바랍니다.]
인실롭은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고백하지는 않았다. 대
신 준비한 니름을 풀어놓았다.
[아마도 의장님께서는 북부군이 하텐그라쥬 공격에 사용할 병력을 보존
하기 위해 시모그라쥬를 무시할 거라 믿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괄하이드
는 등 뒤에 적을 남겨둘 사람이 아닙니다. 배후에서 기습당하는 일을 피
하기 위해서 시모그라쥬를 파괴할 겁니다. 저희가 물러나면 시모그라쥬
는 더욱 파괴하기 쉬운 상대가 될 터인데, 왜 그 자가 그런 이점을 무시
하겠습니까?]
[그에겐 용인이 있습니다. 그 용인은 이곳에 숨은 병력이 있는지 없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심장을 적출한 나가는 모두 병력입니다!]
[그 옛날의 전쟁이라면 모르겠지만 이 전쟁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인실
롭 군단장. 이 전쟁에서는 수호자가 병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 또
한 그 많은 수호장군들을 데려온 것 아닙니까?]
[시모그라쥬에도 수호자는 있잖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들도 데리고 떠나십시오. 당신에게 도움이 되겠지요.]
인실롭은 꽤 긴 시간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칸비야 의장을
노려보았다. 칸비야 의장은 경멸 섞인 미소를 지은 채 닐렀다.
[당신이 짐작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니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계속 자명한 사실을 무시하는 해괴한 니름을 계속하니 어쩔 수 없군요.
시모그라쥬의 모든 수호자와 함께 이곳을 떠나십시오.]
[당신들은 수호자 없이… 살겠다는 겁니까? 그게 나가의 삶입니까?]
[이긴 다음에 돌려보내주시면 됩니다. 당신은 이길 테지요?]
인실롭은 차가운 격노 속에서 닐렀다.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끼워맞추시는군요. 여신의 적 앞에서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난 당신들을 다른 나가들이 용서할 것 같습니까? 눈 앞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동족을 적으로 돌릴 생각입니까?]
이번에는 칸비야 의장이 화를 낼 차례였다. 그녀는 인실롭을 똑바로 노
려보며 닐렀다.
[인실롭 군단장! 아무래도 당신은 불신자들과 너무 많이 싸웠나 봅니
다. 마치 불신자 같은 논리를 사용하는군요. 도와주지 않으면 적이라는
니름입니까? 우리는 전쟁터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우리의 수호자
를 당신들에게 내어주면서 우리는 무방비를 선택했습니다. 그 때문에 불
신자에게 짓밟히게 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만약, 물론 나도 그렇게 되
길 바라지만, 당신이 하텐그라쥬에서 불신자들을 물리친다면 그 후에 전
쟁터를 제공하지 않았던 나에게 원망을 니를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을 당신들의 살육장으로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를 살육할
겁니까?]
인실롭은 잠시 주춤했다.
[이 전쟁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칸비야 의장님.]
[아직은 없었지요. 하지만 앞으로도 없을지는 두고봐야겠습니다. 나는
궁금하군요.]
인실롭은 자신도 그것이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전향적으로 고려하게 되
었다고 표현할 사람도 있을 테고 꼬리를 말았다고 표현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인실롭은 갈로텍 대장군도 그것에 대해 궁금해할지 알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칸비야 의장으로서는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인실롭 군단장이 칸비야
의장의 뜻을 전달했을 때 갈로텍은 악타그라쥬의 폐허를 벗어난지 이틀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시구리아트 산맥에서부터 계속된 무리한 강
행군의 여파로 대나무 군단의 남진 속도는 꽤 떨어져 있었다.
페로그라쥬와 악타그라쥬의 끔찍한 잔존물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새로
운 상황에서, 갈로텍은 두 도시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은 칸비야 의장의
뜻에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를 거절하는 것에 대한 분노는
별개였다. 갈로텍은 자신의 선택 폭이 그토록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실망
하며 주퀘도를 불렀다.
주퀘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갈로텍은 누군가 다른 영을 앞에 내세워놓
고 찾으러 내려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저 아래에서 도사리고 있을 카린
돌을 떠올린 갈로텍은 쉽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주퀘도를
거듭 불렀다.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된 집요한 소환에 결국 주퀘도가 대답
했다.
"뭐지?"
"갈로텍입니다. 나가 남자지요. 그리고 대장군입니다."
"용건이 뭐지?"
"의논 좀 하고 싶습니다만, 주퀘도. 계속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거라면
먼저 그 말투부터 어떻게 해야겠군요."
"귀찮으면 무례하게 쫓아내고 필요하면 예의를 지키라고 말하는군. 개
자식."
"주퀘도!"
"고함지르지 마라, 꼬마야. 아파지는 것은 네 귀니까."
"예의를 말하고 싶다면, 좋습니다! 누가 목숨을 바쳐 무가치한 관문요
새를 공격했습니까?"
"무가치하다고? 대수호자를 구출하기 위한 것 아니었냐?"
"이유가 어쨌건 당신의 구원을 풀어준 것은 우리잖습니까? 당신은 그
사실에 대해 감사의 말 한 마디 말한 적이 없습니다."
주퀘도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감사할 수가 없다. 그건 잘못된 일이었으니까. 유료도로당
을 공격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당신이 기뻐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줬다면 이
렇게 화나지는 않을 겁니다. 도대체 왜 그래서는 안된다는 겁니까? 나가
들의 도움을 받아 동족을 죽였기 때문입니까?"
"갈로텍. 군령자의 동족은 없다. 다른 군령자조차도 군령자의 동족은
아니야. 그리고 동족이 어쩌니 하는 감상적인 말과 나를 결부시키는 것
도 곤란해."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 겁니까? 200년 전에는 모든 것을 바쳐 그러고
싶어했으면서, 마침내 그것에 성공한 지금에 와서는 그래서는 안된다니,
어린아이 투정입니까?"
주퀘도는 또다시 침묵했다. 갈로텍은 들끓는 분노를 억누르려 애쓰며
기다렸다. 그의 입이 갑자기 움직여지며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스스로를 망쳐버렸다. 갈로텍."
"아니오. 당신은 누구도 넘보기 힘든 집념으로 자신을 완성했습니다.
주퀘도. 당신은 이제 시구리아트의 정복자입니다."
"그건 완성이 아냐. 빌어먹을 가필이지."
"가필이라고요?"
"염병할 붓질은 한 번에 끝내야 한다. 일필휘지야, 갈로텍. 나는 괜찮
은 삶을 살았다. 주퀘도 사르마크의 삶은 찬란했다. 그래. 나는 죽음의
거장이었다. 내 최고의 순간이 언제인지 아나? 그것은 내 존재의 모든
시간이었다. 나는 항상 최고였다. 내 마지막 실패는, 그것이 내 실패이
기에 이미 소중한 것, 최고의 것이었다. 그것은 완전무결함에 난 흠집
같은 것이 아니었어. 그것까지도 포함해서 완전무결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소중한 실패를 망쳐버렸다. 스스로 구축한 작품을 망쳐버렸지."
"주퀘도."
"갈로텍. 갈로텍."
주퀘도는 회한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갈로텍은 자신의 목소리에서 느
껴지는 이질감에 동요했다.
"고집이라면 너도 나만큼 부릴 줄 아는 녀석이지. 마음껏 고집을 부려
라. 집념을 발휘해라. 도덕을 요구하는 나약한 것들의 천박한 투정 따위
는 무시해. 그것들은 도구인 도덕을 삶의 목적으로 만들어버려. 그리고
목적인 삶을 도덕의 도구로 바꾸지. 그런 것들은 무시해. 생사를 무시하
고 누이를 괴물로 만들었다고 힐난하는 것들은 아가리 닥치라고 말해줘.
신을 감히 감금했다고 파랗게 질린 것들의 얼굴에 오줌을 갈겨줘. 죽음
의 거장은 그런 너를 축복하겠다. 하지만, 제발 죽을 때까지만 그렇게
해라. 이제 나는 언젠가 네가 천명했던 소망을 간절함 속에서 기다리겠
다. 전령하지 말고 죽어라. 부탁이다. 이후로 내가 스스로의 말을 번복
하더라도, 너는 그 말을 따르지 말아라. 지금의 내 말을 기억해."
그리고 주퀘도는 침묵했다. 갈로텍은 긴 시간 동안 주퀘도의 말을 생각
했다. 그런 고요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주퀘도는 완전히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이제, 용건을 말해라."
갈로텍은 시모그라쥬에서 일어난 일을 띄엄띄엄 말했다. 그 말투에는
해석이 거의 동반되지 않았다. 갈로텍은 주퀘도의 해석을 듣고 싶었다.
주퀘도는 대답했다.
"중립 선언이군. 마음대로 하라고 해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 전쟁은 침묵의 도시에서 시작되었고, 당연히 그곳에서 끝나야 한
다. 그리고 대수호자를 키보렌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비아스 마케
로우 및 그 여자의 선동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가주들을 저지하기 위해서
도 너는 하텐그라쥬로 가야 한다. 그리고 군대도. 두 가지는 동시에 하
텐그라쥬에 도착해야 하지. 인실롭 군단장에게 전해라. 당장 하텐그라쥬
로 이동하라고."
"시모그라쥬가 괜찮을까요?"
"그건 시모그라쥬가 선택한 길이다. 네가 그것까지 신경쓸 필요는 없
어. 하지만, 아마도 북부군은 시모그라쥬를 우회할 거다."
전쟁 시작 후 처음으로, 라수는 정말 놀랐다. 시우쇠의 등장과 륜이 용
인으로 각성한 사건도 북부군의 두뇌를 이토록 놀라게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경악은 그렇게 두드러진 것이 되지 못했다. 주위의 모든 장
수들이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미쿼 장군과 무핀토 장군은 당장이라도 앞으로 돌진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들의 존경받을 만한 자제력 때문은 아니다. 그들은 키타타
자보로 장군을 예의주시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열을 볼 수 있는 나가
들의 능력 같은 것을 가지지 못한 그들이었지만, 두 사람은 키타타 자보
로에게서 풍겨나오는 열기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한편 발케
네에서 온 그룸 빌파는 선실행 후평가의 고매한 법칙을 시험해보면 어떻
겠냐고 동생에게 의사를 타진했다. 도깨비 감투를 쓰고 찾아온 손님을
쥐도새도 모르게 해치우자는 형의 제안에 대해 토카리 빌파는 야유를 보
내었다. 뇌룡공의 능력으로 간단히 들통날 거라는 것이 토카리의 설명이
었다. 그리고 토카리는 찔끔한 얼굴의 아버지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
았다.
극도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장수들 가운데서 다행히도 괄하이드 규리
하만은 세평에 어울리는 처신을 보여주었다. 그는 점잖게 말했다.
"그렇다면, 시모그라쥬는 중립을 선언하는 겁니까. 칸비야 의장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호자들을 그들과 함께 보내겠습니다. 늦어
도 모레까지는 완료될 겁니다."
북부군의 장수들은 륜의 목소리에 익숙한 자신들을 까맣게 망각한 채
그 나가의 목소리에 대해 수근거렸다. 괄하이드는 탁자 한편에 있는 라
수를 슬쩍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라수 곁에 있는 륜에게로 향
해 있었다. 그 때문에 륜은 약간은 흥미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괄
하이드가 그에게 시선을 보낸 순간 칸비야 의장은 니름을 보냈다.
[저 인간이 나를 믿어도 되는지 알고 싶어하는 거지? 너는 용인이니 내
진심을 알 것이다.]
륜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괄하이드는 칸비야 의장을 바라보며 말했
다.
"당신들의 도시를 구원하는 위험한 방법이군요. 내가 참견할 바는 아니
겠지만, 당신들이 다른 나가들에게 백안시 당할 거라 생각되오."
"백안시?"
"음. 미안하오. 우리는 흰자위, 당신들도 이걸 흰자위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흰자위를 보이며 바라보는 것을 백안시라고 하오.
눈을 뒤집은 채 바라보는, 그러니까 무례하게 바라본다는 뜻이오."
칸비야는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군요. 대장군님. 나는 이곳으로 오면서 온갖 것을 각오했지만,
양 종족의 문화적 차이에 관한 학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세평과 달리, 자상한 분이시군요."
괄하이드는 이런 칭찬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나도 나가의 여인에게 경어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소."
"상호 존중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니까. 어쨌든 당신이 우려하는 바는 알
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감당할 문제입니다. 시모그라쥬는 다른
나가들의, 옛날에도 별로 받은 기억이 없는 호의 대신 우리의 심장탑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수호장군들을 보내는 것은 우리의 적을 이롭게 하는 겁니다
만."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나는 당신들의 배후에 수호장군을 두는
것이 더 당신들을 곤란하게 할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 말씀이 옳군요. 의장님. 의장님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괄하이드는 다시 라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라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짧게 고민하던 괄하이드는 그 침묵을 동의로 판단하고는 말했다.
"기쁜 마음으로 귀하의 선언을 수용하겠습니다. 말씀하신 조건들, 그러
니까 시모그라쥬 내의 모든 수호자들의 퇴거와 나가 군대에 대한 원조를
하지 않겠다는 조건들이 어김없이 실행된다면, 우리는 시모그라쥬에 대
한 어떤 적대적 행위도 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겠습니다. 문서로 남기
기를 바라십니까?"
"의미 없습니다. 약속이면 충분합니다."
화통한 여자라 생각하며 괄하이드는 미소지었다.
==================================================================
챕터 14. '셋은 부족하다.'편 시작합니다.
애국심이란, 당신이 이 나라에 태어났기에 이 나라가 다른 어떤 나라보
다 고귀하고 우월하다고 믿는 당신의 신앙 - 버나드 쇼.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4-2. 관련자료:없음 [57020]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8-03 01:24 조회:6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