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47화 (47/62)

눈물을 마시는 새.

13. 혈루(血淚) - 1

극연왕 6년, 칼리도에 한 어르신이 출현했다. 자신의  이름을 수

수깨비라 칭한 이 어르신은 칼리도 사람들을 상대로  한 수수께끼

를 내었다. 그리고 수수께끼를 맞추는 자에게는 막대한 보상을 하

겠다고 약속했다. 수수께끼의 내용은 단순했다. '신을  잃은 종족

은 누구인가.' 대답은  분명했다. 사람들은 모두  '두억시니'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수수깨비는 그 대답이 틀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수께끼에 응했다가 틀린 사람들을 괴롭혔다. 어르신은 사람들에

게 실질적인 피해를 줄 수는 없지만, 한밤중에 잠을 깬 사람이 천

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4 미터 크기의  얼굴을 보게 되면

그것도 대단한 피해라고 할  수 있다. 수수깨비는 그렇듯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장난으로  칼리도 사람들을 괴롭혔다.  지쳐버린

사람들은 수수깨비에게 인간, 도깨비, 레콘, 나가  등 닥치는대로

선민종족의 이름을 주워섬겼다. 하지만 수수깨비는 설명을 요구했

고 아무렇게나 대답한 말에 설명을  덧붙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

다. 수수깨비의 장난은 점점  심각해졌고 그 대상은 모든  칼리도

사람들에게로 확대되었다. 더 견딜  수 없게 된 칼리도  사람들은

수수깨비를 쫓아낼 방도를 고려했다.  하지만 어떤 접촉도 할  수

없는 어르신을 쫓아내는 방법은 근처의 도깨비를 모두 쫓아버리는

방법 뿐인데, 당시 칼리도에는 꽤 많은 수의  도깨비가 살고 있었

고 그들 모두를 쫓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기는

아직 대확장 전쟁의 초기였고 훗날의 모습과는 달리  많은 도깨비

들이 세상에 흩어져 살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괴로워하던 칼리도  사람들에게 극연왕이 왕의  특사를

파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칼리도 사람들은 황송해하면서도 당

황했다. 그들은 전쟁이나 반역 같은 국가적 재난도 아닌 상황에서

왕의 특사가 온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경기를 일으키는 아이들의 어머니들과 사흘에 한 번  꼴로 기절해

야 했던 처녀들은 왕의 결정을 크게 반겼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왕의 특사는 칼리도 사람들을 또다시 당황하

게 만들었다. 도착한 것은 레콘이었다. 레누카라는 이름의  그 레

콘은 극연왕이 훗날 4대 경이라 불리워진 건설을  하던 도중 왕의

친구가 된 자였다. 사람들은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왜 레콘이 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제아무리 레콘의 용맹이 출중하다

하더라도 물질적인 피해를 줄 수 없는 어르신에게 그것이 무슨 소

용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칼리도에 도착한 레누카는 별다른

설명없이 곧장 수수깨비를 찾아갔다. 수수깨비는 레누카에게도 같

은 수수께끼를 내었다.  레누카는 지긋이 수수깨비를  바라보다가

벽력처럼 외쳤다.

"꺼-져-라-!"

수수깨비는 사라졌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레누카는 어처구

니없어하는 칼리도 사람들을 내버려둔 채 왕에게로  돌아갔다. 레

누카가 돌아가고나서 얼마 후 기이한 풍문이  나타났다. 수수깨비

가 사라진 직후 레누카가  혼잣말로 '그래. 두억시니는  아니지.'

라고 중얼거린 것을 들은  사람이 있다는 풍문이었다. 하지만  그

소문은 사실로 확인되진 않았다. 그리고 칼리도  사람들에겐 다른

고민거리가 남겨졌다.

아무도 그 정답을 말하지 못했기에 칼리도  사람들은 수수깨비가

어떤 보상을 할 작정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칼리도  지방의

오래된 민담 中

키준 산맥의 바이소 계곡, 박명조차  요원한 꼭두새벽이었지만 계곡 바

닥에선 몇 개의 횃불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꽤나 바빠 보이는 횃

불들은 이리 뛰고 저리  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을 때마저 까딱거려

뭔가 상당히 분주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커다란 횃불을 움켜쥔 채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한 사내가

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정신없이 달리는 꼴은 도깨비요, 사람

들에게 뭔가를 을러대는 형상은 영락없이 레콘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나가의 침착함일 듯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미덕은 함양하지 못한 듯하다.

사내는 지금도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흥분하여 한 동료를 다그치고

있었다.

"날이 벌써 밝아오고 있잖아! 도대체 왜 안 나타나는 거냐?"

질문을 받은 사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

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이 묽어지는  징조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기다려 보쇼, 롭스. 그리고 날이 밝는  문제에 관해서라면, 좀 여유를

가지고 이야기해도 될 것 같은데. 아직 별이 새파랗소."

동쪽 하늘을 돌아본 롭스는 사내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초조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제기랄, 그 빌어도 못 먹고 뱉어야할  도르래가 제때에 도착하지 않으

면 만사휴의란 말이다. 다음 하늘치는 몇  개월이나 기다려야 해. 그 때

도 나가들이 없을 거라고 누가 보장하냐?"

사내는 '빌어도 못 먹고 뱉어야할' 물건은 '빌어먹을' 물건보다 얼마나

나쁜 것인지 생각하며 대답했다.

"때 되면 도착할 거요.  그 놈도 바이소 계곡으로  오라고 말하니 정말

좋아했소. 꼭 가지고 올 거요."

롭스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초조함은 특출한 것

은 아니다. 그곳에 모인 사내들 모두 내심 초조함과 긴장을 짙게 맛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치 유적 발굴대였다. 하늘로 오르는 그 형태에서부터 땅 속

으로 파들어가는 보통의 발굴과는 상이한 하늘치  발굴은, 오늘 그 속도

에서도 전무후무함을 강조해 보일 예정이었다. 롭스의 계획에 따르면 발

굴은 겨우 여섯 시간만에 완료될 것이다.  계획은 대충 이러하다. 먼저,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던 발굴자들이 각자의 장비를 챙겨들고 새벽에 바

이소 계곡에 모인다. 그리고 일출 전까지  장비 설치를 마칠 것이다. 롭

스는 일출 후 한 시간 쯤에 하늘치가  나타날 것이라 예견했다. 미리 준

비하고 있던 발굴대는 하늘치가 나타나자마자  벼락같이 그 등에 오르는

것이다. 그 속도만 놓고 본다면 발굴이  아닌 도굴의 속도다. 하지만 발

굴 대상이 고정된 것이 아닌 움직이는 것이며, 나가의 준동 때문에 북부

를 오가는 것이 위험해진 상황에서 롭스는 쓸데없는 시간의 낭비는 완전

히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유적 발굴자들은 모두 해당 작업의  경험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기에 작업은 신속했다. 롭스가 짜증을 부리고 안달을 내는 것도

그들에게 별로 지시할 것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롭스는

곧 자신의 짜증이 그들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르래 도착하면 알려줘. 좀 쉬어야겠다."

"엇저녁에 왔죠? 쉬는 게 아니라 눈 좀 붙이는 편이 좋지 않겠소?"

어젯밤 발굴자들 중 가장 먼저 바이소 계곡에  도달했던, 그리고 그 때

부터 도착하는 동료들에게 반가움의 인사를  건네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

라 초조감에 짜증을 부리고 있던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이 오냐?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은 피식 웃어버렸다.

나가들의 진격은 키준 산맥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발

굴자들이 고향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유적들처럼 한 자리

에 가만히 있는 것이 대상이라면 그것을 꾸준히 파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하늘치 유적 발굴은 하늘치가 바이소 계곡을 통과하는 짧은 시간 동안만

가능하기에 무턱대고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롭스는 상황을 인정

하고 발굴대의 해산을 명령했다.

군령자인 롭스에게 특별히 돌아가고 싶은 고향 같은 것은 없었다. 충분

한 고민 끝에 롭스는 규리하 지방으로  방향을 정했다. 규리하는 차가운

북쪽 땅이고 그 땅의 사람들은 강맹하다.  규리하에 도달한 롭스는 손수

오두막을 지은 다음 사냥과 채집으로 먹거리를 장만했다. 군령자는 당연

히 팔방미인일 수밖에 없고 그들 대부분은 아침에 알몸으로 세상에 던져

져도 저녁엔 옷가지와 잠자리와  다음날 아침에 먹을  것을 준비해둘 수

있는 수완 좋은 자들이다. 롭스는 어려움 없이 규리하에 정착했다. 그리

고 자신의 기록을 검토하고 군령들과  노닥거리며 전쟁이 끝나기를 참을

성 있게 기다렸다.

보름 쯤 전, 나가들이 전선 전체에서 물러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

을 때 기뻐하는, 혹은 의문스러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롭스는 두 번 생

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기록들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롭스는 당장 쓸 몇

가지 물건 이외에 나머지 재산을 모조리 알고 지내던 나뭇꾼에게 넘겨주

었다. 잘 만들어진 오두막과 막대한 저장식량, 그리고 질 좋은 모피들을

얻게 된 나뭇꾼은 롭스의 작은 부탁을  쾌히 들어주었다. 전 발굴대원에

게 보내는 서한들을 발송하는 일을  나뭇꾼에게 떠맡긴 롭스는 규리하에

도착했을 때처럼 간편한 차림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긴 시간을 걸

어 바이소 계곡에 도달했다.

모든 기록을 검토하여 하늘치가 오늘 바이소  계곡을 지나칠 것을 예견

하고 발굴대원들에게 소환 명령을 보낸  사람은 롭스였지만 당장 그에겐

할 일이 없었다. 대원들은 익숙한 과정들을 밟아나가고 있었고 그들에겐

어떤 종류의 참견도 필요없었다. 다행히 그곳에는  롭스 이외에 당장 할

일이 없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롭스는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스님. 추우시지 않으십니까?"

화톳불 곁에 앉아있던 오레놀 대덕이 고개를 들었다. 대덕은 롭스를 보

자마자 눈을 비볐는데, 아무래도 졸고  있었던 기색이다. 하지만 오레놀

은 곧 정신을 차렸다.

"아직 날이 밝진 않았군요.  일출 후 한 시간  쯤에 시작된다고 하셨지

요?"

롭스는 그렇다고 대답한 다음 횃불을 땅에 거꾸로  꽂아 불을 껐다. 오

레놀의 곁에 앉은 롭스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입니다. 도르래를 가져와야 할 녀석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연은 조립을 다 끝냈고  말들도 준비되었는데, 도르래가  없어서 연결을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시험 비행을 해  볼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겠습

니다."

오레놀은 당신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꼼꼼하고  계획성 있었던 사람들이

었냐고 말해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옛날에 여러 번 연습해보았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연에 탈 녀석들이야 여러 번 이  짓을 해봤으니 상관없습니다만, 문제

는 연입니다. 조립이 제대로 되었는지 알아보려면 가볍게 날려봐야 합니

다. 하늘치 배 아래에서 연이 부서지기라도 하면 저는 실망 때문에 두억

시니가 되고 말 겁니다."

오레놀은 빙긋 웃었다.

"사실 저는 놀랐습니다."

"놀라다니오?"

"참관하러 오라는 서한을 받고 오긴 했습니다만, 보나마나 당신에게 위

로나 건네고 돌아가는 것이 고작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안 올 거

라고 믿었지요. 세상이 이렇게 각박하고 무서운데  하늘치 등 위에 올라

가 본다는 목적 때문에 위험한 길을 찾아오실 분이 몇 명이나 있을지 의

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보고 있으니 제 예상이 완

전히 틀렸더군요."

"나가들이 남쪽으로 물러갔잖습니까. 모르십니까?"

"그건 알고 있습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레놀은 생존 자체가 최우선의 목적이 되고 있는 이 험악한 북부 땅에

서 꿈을 이루려고 모여드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것이 아무리 반나절 동안의 전격적인  발굴이라 하더라도 이곳에 모여들

기 위해 사람들이 소비해야  되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또한 그들이

포기하거나 잠시 방기해두었어야 할 일들 또한  작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는  롭스 같은 자가  예외적인 경우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하루를 버티는 것이 힘든 시기일 것이다. 오레

놀은 그런 생각을 어떻게 표현할지 잠시 고민했다.

오레놀이 간신히 괜찮은 말을 떠올렸을 때  어둠 저편이 갑작스레 소란

스러워졌다.

롭스는 벌떡 일어나 달려갔고 오레놀 또한 몸을 일으켰다. 롭스를 향해

걸어가던 오레놀은 잠시 후 그의 환호를 듣게 되었다. 횃불이 모여든 곳

에 도착한 오레놀은 큼직한 달구지를 보게 되었다. 그 옆에는 한 남자가

흥분한 투로 외치고 있었다.

"그 썩을 주인놈이 때려죽여도  달구지 못 주겠다잖아.  저 도르래들을

들고 가라는 말이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보고 미쳤대. 정

작 미친 놈이 누군데? 나 떠나고 나면 어차피 이 달구지 쓸모도 없단 말

씀이야. 그 녀석 달구지가 두 개거든. 4년  동안 일해준 세경 대신에 이

걸 받겠다고 말한 내가 은인인데 도대체 무슨 미친 지랄을 부리는 건지.

결국 내 돈 주고 사왔어."

"세경도 안 주고 거기에  달구지 값을 받았다고? 그  자식 완전히 나가

같은 놈일세."

"흥. 그래도 염치는 있는지 반값만 받더라."

"그런데 세경도 안 받았는데 반값이나 줄 돈은 어디서 난 거냐?"

"같이 머슴살이 하던 친구들이 상당히 협조적이었지."

"노름했구나. 그런데 너 떠날 땐 달구지 가지고 있었잖아. 도르래 싣고

떠났으니까. 그건 어떻게 됐는데?"

"말 마라. 그거 사라진 것이 4년 전이다.  주막에 밥값 대신 줘버렸다.

그러고나니 그냥 그 마을에 죽치고 있는  수밖에 없더라고. 저 도르래들

을 어떻게 움직일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그 짜증나는 주인놈 집에서 4

년 동안 머슴살이 해야 했지. 야야, 말하면 가슴 아프니 이거 내리는 거

나 도와다오."

사내들은 사납게 웃으며  도르래를 끌어내렸다. 거대한  연을 지탱하기

위한 도르래들인지라 여간 우악스러운 물건이  아니었다. 사내들은 낑낑

거리며 그것을 옮겼다. 놓일 자리는 미리 다져져 있었고 사내들은 곧 말

뚝을 가져와 그것들을 고정시켰다.

그 과정을 바라보며 오레놀은 조금 전 느꼈던  기분을 다시 느꼈다. 오

레놀은 그저 도르래 하나를 간수하기 위해  4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돌아와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이가 적다면 모를까,  마흔은 되어 보이는 사내가 그런

다는 것은 오레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하늘치의 등 위에서 믿을 수 없는 보물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저

그 높은 곳의 전경이나 구경한 다음  빈손으로 내려와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 올라가 본 자가 아무도 없기에, 게다가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도 없기에 하늘치 유적에서 그들이 맞닥뜨리게 될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

도 짐작할 수 없다. 오레놀은 문득 이들에게 주의를 주어야 한다는 충동

을 느꼈다. 이들이 혹 성공하더라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면 엄청나게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적당히 말을 건넬 기회를 기다리던  오레놀 대덕은 아무도 보물

이나 재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이소 계곡

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하늘치 등에 올라간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관심

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레놀이 뭔가 말을 붙여보기도 전에 어느새 도

르래와 연, 말들, 그리고  밧줄들이 연결되었다. 그들은  밧줄이 엉키지

않도록 늘어놓느라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고 근처에 다가갔다가는 조

언자는커녕 훼방꾼 취급을 당하기 십상인지라 오레놀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이루어지자  롭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레놀은  그가 하는 말을 들었

다.

"어떻게 한 번 쯤 시험 비행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만, 그건

그냥 포기하자. 지금부터 밥  지어먹는 쪽이 낫겠다.  배가 고파서는 큰

일 못하지."

열심히 일하던 사내들은 군말없이 삭정이를 모으러 떠났다. 몇 명은 음

식을 꺼내어 조리할 준비를 갖추었다. 롭스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오레

놀에게 다가왔다.

"스님. 시장하시죠? 식사 준비가  될 동안 곡차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

까? 그걸 들고온 녀석이 있군요."

오레놀은 도저히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 모든 일을 팽개치고  온 분도 있는 겁니

까?"

"예? 어, 그런 셈이지요."

"롭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어쩌면  북부의 멸망으로 끝나게 될

지도 모르는 거대하고 위험한 것이라는 걸 당신들에게 말해준 사람이 아

무도 없는 겁니까?"

롭스는 히죽 웃었다. 곡차  동이를 찾아내자 그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

다. 사발을 집어들며, 롭스는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러니 북부가 끝장나기 전에 발굴에 성공해야지요."

딱히 대답할 말이 없는 오레놀은 입을 다물었다.  롭스는 곡차를 떠 대

덕에게 내밀었고 오레놀은 그것을 받아마셨다.

발굴대의 태도에 대해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오레놀은 그들

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다.  참관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위험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그밖에 없었기에 하인샤  대사원은 대덕을 파견했

다. 하지만 이곳에 있어도 오레놀은 하늘치 유적보다는 남쪽에서 벌어지

고 있는 전쟁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했다.

물론 사람은 변화하게 마련이다. 한 시간  후, 오레놀은 전쟁에 대해서

는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되었다.

차가운 밤하늘을 향해 열기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곁눈으로 보았을 때 사모는  그것을 바위산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후,

사모는 그것이 아마도 화산일 거라 여겼다. 그러나 사모는 그 결론에 만

족할 수 없었다. 결국 사모는 그것이 산더미 같은 크기로 치솟아 오르고

있는 뜨거운 공기라는 판단을 내려야 했고, 그 판단에 놀랐다.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밀림에서 하늘을 향해  치뻗은 열기는 차가운 암

흑과 뒤섞이며 희미해졌지만 터무니없이 높은 곳에서도 미약하나마 열기

를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하게 꿈틀거리는  열류의 가느다란 가지마저 몇

백 미터는 넘을 듯하다.

잠깐 고민하던 사모는 마루나래의 목을 살짝  두드리며 몇 마디 단어를

중얼거렸다. 마루나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길 비슷한 것을 찾아내었다.

대호는 그곳으로 접어들었고 그 뒤를 따라 스물두 명의 두억시니가 쿵쾅

거리며 걸었다.

사모는 숲 속을 흐르는 열기를 보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열기는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사모는 그 열이 불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

웠다. 어쩌면 시우쇠에게 가까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점점 가

능성을 잃었다. 하지만 사모는 시우쇠 이외에  무엇이 그토록 놀라운 열

기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가의 시력을 가지지 못한 자라도 피부로 그  열기를 느낄 수 있게 되

었을 때 사모는 누군가가 등을 툭 치는  것을 느꼈다. 사모는 뒤를 돌아

보았다.

"갈바마리?"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모는 갈바마리가

왜 등을 쳤는지 깨달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갈바마리는 왕에게 청

력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사모는 그렇게 했다.

"뜨겁다."

"안 좋다."

"잘 모르겠어. 한 번 더 말해봐."

갈바마리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 고민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양

팔의 길다란 뿔이 돋아나와  각자 양쪽의 턱을  긁적거렸다. 갈바마리는

잠시 후 자신있게 말했다.

"뜨겁다. 안 좋다."

"안 좋다. 좋게 하다."

"미안하지만 이게 내 최선이야. 뜨거우니 접근하지 말자는 거야?"

그녀의 해석은 틀린 듯했다. 갈바마리는 두 팔의  뿔을 모두 꺼내어 진

행 방향을 다급하게 가리켜보였다. 사모는 다시 해석했다.

"뜨거운 것은 좋지 않으니 저기로 가서 좋게, 그러니까 뜨겁지 않게 만

들자?"

갈바마리는 만족했다. 사모는  마루나래에게 걸음을 재촉하게  하며 왜

뜨거운 것이 좋지 않은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녀의 머리 속에 어떤 해답

이 떠오를 무렵, 숲이 사라지며 후끈한 열기가 그들을 엄습했다.

사모가 말하기도 전에 마루나래는 걸음을 멈췄다.

사모가 느낀 첫 번째 인상은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뜨

거운' 건물을 본 적이 없었다. 온돌이  설치된 북부의 건물들의 경우 방

안에서는 그 열을 볼  수 있었지만 건물 밖에서  열기를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녀의 눈 앞에는  불타는 직선과 뜨거운  면들이 건물을 이루고

있었다. 먼 곳에서도 하늘까지  치솟는 열기를 볼  수 있었지만, 정면에

나타난 그 건물은 어둠 속에서 찬란할  정도였다. 건물 전체에서 아지랑

이처럼, 혹은 번민처럼 피어오르는  열기는 그것을 마치  알려지지 않은

심해의 괴수처럼 보이게 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모는 그것의  인상이 눈에 익다는 것을 깨

달을 수 있었다. 사모는 다시금 당황했다. 그것은 유해의 폭포가 흐르던

피라미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사모는 니르던 것을 도중에  말로 바꿨다. 두억시니들 역시  당황한 듯

규칙 없이 놀라움을 표시했다. 놀라움 속에서 사모는 왜 갈바마리가 '뜨

거우니 좋지 않다'고 한 것인지  이해했다. 갈바마리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고 피라미드가 그토록  뜨겁다는 사실에 걱정을  하고 있었다.

사모는 손을 가볍게 들어올린 다음  피라미드를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했

다.

강렬한 첫인상 때문에 깨닫지 못했지만 피라미드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

다. 거리가 줄어들수록 사모의  불안은 커졌다. 사모는  그 열기가 건물

내부에서부터 전해져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거대한  피라미드 전체가 뜨

겁게 달구어져 있다면 그 내부의 온도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준일 것

이다. 사모는 유해의 폭포가 무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사모는 두억시니들과 함께  체념한 심정으로 피라미드  앞에 섰

다. 더 이상 다가가기도 어려웠다.  고통을 각오한다면 피라미드 내부까

지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무의미한 고통일  뿐이었다. 사모는 열을 보지

못하는 두억시니들에게 말했다.

"햇빛이나 외부의 열로 달궈진 것이 아냐. 열은 내부에서 나오고 있어.

두려운 상상이지만, 저 안쪽 가장 깊은  곳에서는 돌이 녹아내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어."

갈바마리는 신중한 태도로  사모의 말을 경청했다.  다른 두억시니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난처함을 표시하기 위해  각종 부속지들을 기웃거렸다.

사모는 갈바마리를 도와주었다.

"유해의 폭포는 죽었을 거야."

"죽을 수 없다."

"살아있지 않으니."

갈바마리의 대답에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하긴 그렇구나. 그런데 너는 슬프지 않은 거야?"

갈바마리는 다시 한참 동안 고민했다.

"슬픈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상하다."

"좋지 않다."

사모 또한 갈바마리의 기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

머니라고 불러야 할까, 그렇지 않으면 본체라고 해야 할까? 그녀가 기억

하던 유해의 폭포는 다른 두억시니들을  항상 1인칭으로 지칭했다. 사모

는 자신이 유해의 폭포와 여전히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갈바마리는 두 개의 머리로 피라미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

다.

"시우쇠님은"

"가르쳐주었을까?"

"두억시니가 왜"

"신을 잃었는지."

사모는 놀란 표정으로 갈바마리를 바라보았다. 갈바마리는 그녀가 알면

서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피라미드가 통째로

달궈질 정도의 고온은 시우쇠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시우쇠는 이곳에,

피라미드에 왔던 것이다.

"그래. 시우쇠님이 저렇게 하셨겠지. 하지만 왜 그러셨을까? 그리고 저

런 일을 하시기 전에 시우쇠님은 두억시니가 신을 잃은 이유를 가르쳐주

셨을까? 아무 것도 짐작되지 않는군."

갈바마리는 뿔 달린 두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다른 두억시니들이 모두

돌아보았다. 갈바마리는 크게 외쳤다.

"물어보자."

"물어보자."

두억시니들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사모는 고개를  갸웃한 채 그들의 모

습을 보았다. 두억시니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둔 채 원진을 형성했다. 그

리고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사모는 그들이  유해의 폭포와 연결할 때의

자세를 취한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무사하기 힘들 텐데.' 사

모는 두억시니들을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

지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녀  또한 혹시나 하는 마음을 떨쳐

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모는 마루나래에게서 내려왔다.

"마루나래. 좀 기다려야겠구나. 배 고프지?  사냥하고 와. 그리고 기회

가 되면 내 것도 좀 가져다줘."

마루나래는 빙글빙글 돌고 있는 두억시니들을 바라보다가 몸을 훌쩍 날

렸다. 단숨에 두억시니들을 뛰어넘은 마루나래는 어두운 밀림 속으로 뛰

어 들어갔다.

사모는 쉬크톨을 뽑아들고는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왼팔 위에 쉬크톨

을 얹었다.

소임을 다하지 못한 쉬크톨은 여전히 예리했다. 암살자로서, 그리고 왕

으로서 사모는 수도 없이 쉬크톨을  휘둘러야 했지만 완전무결한 칼날은

그녀가 처음 그것을 쥐었을 때와 똑같았다.  칼을 잡아당겼을 때 사모는

거의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칼날에 피가 묻은 것을 확인한 사모는 그것

을 들어 한 방향을 겨냥했다. 곧 손잡이가 따스해졌다.

사모는 칼날 위에 시선을 얹어  손잡이가 따스해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사모는 쉬크톨을 닦아낸 다음  다시 칼집에 꽂아넣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두억시니의 원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단순한 사고는 때로 매우 복잡하고  엉뚱한 모습으로 발전하는데, 바이

소 계곡에서 국냄비가 쏟아진 사소한 사고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그 단순한 사고는 한 유적 발굴자로  하여금 약간의 임기응변 능력을 발

휘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한 대덕을 자포자기 상태

로 몰아넣는 매우 특이한 발전 양상을 보였다.

롭스의 제안은 오레놀을 파랗게 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롭스는 무조

건적으로 거부하는 대덕을 끈덕지게 설득했다.

"스님. 스님 이외엔 적임자가 없습니다. 툭 터놓고 말해서, 연에 탈 사

람은 좀 멍청해도 된단 말입니다."

"지금 저더러 연에 타라고 설득하는 것 맞습니까?"

"맞습니다. 사실만 말할 거라는 뜻도 되고요. 저 망할 국냄비가 쏟아지

지 않았다면 쉬허츠가 손을 데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쉬허츠는 손을

데었고, 연에 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연에 타지 않

으면 않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타면 되잖습니까. 사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요."

"물론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 연을

타고 저 위에 올라갈 자격이 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연에 타는 것보다는

연을 조종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짐작되시겠지만, 연에  매달려 있는

것보다는 아래쪽에서 말을 달리고 도르래를  조종하는 쪽이 훨씬 중요합

니다. 저 위에 올라갈  자격이 되는 사람 중에서  연을 조종하는 것보다

연에 타는 것이 나은 사람은 스님 뿐입니다."

"그 자격이라는 것이 도대체 뭡니까? 설마  멍청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

겠지요?"

롭스는 낄낄 웃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격은  첫째, 글을 읽을 줄  알 것. 둘

째, 고소공포증이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자격은 이해가 되는데, 첫 번째는 뭡니까?"

"우리는 유적 발굴자입니다. 저 위에 도착한 다음 대문짝만하게 쓰여져

있는 간단한 경고문을 읽을 줄 몰라서  위험에 빠지게 되고 싶지는 않습

니다. 물론 저 유적에 우리가 아는  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지요."

오레놀은 다급하게 연들을 가리켰다

"혹 연 하나가 날아가지 못하더라도 다른 연이 세 개나 있잖습니까?"

오레놀의 지적대로 연은 모두 네 개였다. 하지만 롭스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세 개뿐이라고 해야 합니다.  최소한 네 사람은 올라가야  합니다. 네

사람이 아니면 소용이 없습니다."

"네? 왜 그렇다는 겁니까? 무슨 미신입니까?"

"천만에요. 미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저 위에 도착한 다

음 도로 내려오려면 길이가  거의 1 킬로미터에 가까운  밧줄을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잖으면 저 위에서  굶어죽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런데, 저 밧줄이 연줄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어서 가볍고 질긴 것이

긴 하지만 그래도 길이가 1 킬로미터라면 그 무게는 엄청납니다. 게다가

하늘치 자체도 움직이고 바람도 방해하기 때문에 세 사람의 힘으로는 다

루기 어렵습니다. 티나한 대장이  있다면 그 대책 없는  힘이 있으니 세

명으로 충분했을 테지만, 지금  우리의 경애하는 대장은  이곳에 없습니

다. 그러니 네 사람이 올라가야 합니다."

"잠깐만요. 그렇다면 제가 거절하면 시도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말인 겁

니까?"

"정확하게 요점을 집어내셨습니다. 스님."

오레놀은 난처하다는 얼굴로 롭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새 주위가 제법 밝아졌기에 오레놀은 다른 발굴대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전부는 대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라는 것이 실로 기막힌 것이었는데, 날이 밝아온다는 것이 그들의

초조감을 증대시키고 있음이 분명했다. 말없는  압박감에 대덕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안된 일이지만 대덕에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늘치 등에 오르기

위해 달려온 자들을 실망시킬  배짱이 없었다. 주위에서  갑자기 환호가

터져나왔을 때 오레놀은 자신이  무의식 중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 것을

깨달았다. 기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오레놀은  자신이 이렇게 황당하게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다는 생각만 되풀이했다.

계곡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그를 연에 묶어 죽음의 하늘로 추방하려 안

달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오레놀이  '잠깐만'이나 '그러니까', 혹은 '생

각해 보니' 등의 말을 할 겨를은  없었다. 오레놀은 전격적으로 옷을 갈

아입을 것을 요구받았고 그러자마자 연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거기서 롭

스로부터 연에 매달릴 때의  주의사항에 대한 쾌속강의를  들어야 했다.

오레놀은 롭스의 이야기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단 한 마디만은 충격

적으로 다가왔다.

"엉뚱한 밧줄을 자르면 티나한 대장처럼 추락합니다."

오레놀은 벌벌 떨며 자신이 잘라야 할  밧줄에 표시를 해달라고 애원했

다. 롭스는 '칼자국을 내드릴까요'라고 말해서  오레놀을 폭력적인 충동

에 빠져들게 한 다음 낄낄거리며 밧줄 하나에 천조각을 묶어놓았다.

"이 밧줄을 자르십시오."

오레놀은 자신이 기필코 천이 묶이지 않은  밧줄을 자르고야 말 거라는

확신을 느꼈다. '표시를 한다는  것은 보통 중요하다는  의미지. 혼란에

빠진 나는 중요하지 않은  밧줄을 자르려고 할 거야.  그런데 그 밧줄을

자르면 나는 죽는 것이잖아.' 오레놀이 그런 자기 의심에 빠져있는 동안

사람들은 밧줄과 연, 그리고 말들을 정해진 위치로 끌고가 버렸다. 그리

고 롭스는 오레놀의 연을 지탱하는 사내들과 함께 남아서 말했다.

"스님이 정말 부럽습니다. 전 지휘해야 하기  때문에 올라갈 수가 없지

요. 꼭 성공하셔서 저를 끌어올려주십시오."

입을 열면 승려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쏟아져나올 것 같았기

에 오레놀은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오레놀은 지금껏 굼벵이처럼 흘러

가던 시간이 왜 갑자기  빨라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동쪽 하늘은 화가 치밀어 오를 만큼 밝아져 있었다. 오레놀

은 아직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려  했지만 롭스는 그런

희망마저도 날려보냈다.

"여기는 계곡이라서 해가 늦게 뜨지요. 벌써 해는 떴습니다. 곧 하늘치

가 나타날 겁니다."

오레놀은 경악했다.

"곧? 곧이라고요? 한 시간 뒤가 아니고?"

"곧 나타납니다."

"다, 당신 일부러 그 사실을-"

"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쓸데없이 고민할 시간이 길어서 뭣하겠습

니까? 아, 옵니다!"

오레놀은 고개를 돌렸고,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주위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저편 계곡에서 하늘치의 거대한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치의 출

현 아래 장엄함을 뽐내고  있던 키준 산맥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다가오던 아침은 갑자기  실종되었고 하늘치의 배  아래에서부터 저녁이

되돌아왔다. 그 충격적인 광경을 바라보며,  오레놀은 모든 것을 포기하

고서라도 저 위에 올라가려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

했다.

오레놀은 그런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롭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롭스

는 조금 전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본 오레놀은 롭

스가 저만치 떨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롭스는 두  손을 입 앞에 모아 외

쳤다.

"티나한 대장은 스님을 정말 부러워할 겁니다! 준비하십시오!"

'준비? 준비라니, 뭘? 무엇을? 잠깐. 이거  아무래도 내가 잘못 결정한

것 같아. 내게 이런 일을 시킬 수는 없어.'

갑자기 다가왔던 이해의 감정은 갑자기 떠나갔다. 오레놀은 뭔가 큰 실

수가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레놀은 그의  연을 지탱하고 있던 사

내들을 다급하게 바라보았지만  사내들은 모두 롭스만을  바라보고 있었

다. 입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오레놀이  가까스로 비명을 내지를 수

있게 되었을 때 롭스는 무자비하게 신호를 보냈다.

"달려!"

"에-하!" 말들이 출발했다. 갑자기 몸이 당겨진 오레놀은 숨이 턱 막히

는 느낌에 비명을 도로 삼켰다. 연을  지탱하던 사내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렸지만 말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곧 연은 그들의 손을 벗어

났고 사내들은 우당탕 쓰러졌다. 연이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것을 피하

기 위한 동작이기도 하다. 그 순간 오레놀은  땅이 발 아래로 쑥 내려가

는 것을 보았다.

몸이 떠오르고 있었다.

'가지마!' 땅을 향해 외친, 오레놀의 소리 없는 비명이었다. 헛되이 꿈

틀거리는 두 발은 허공을 찰 뿐이었고  땅은 가차없이 낮아졌다. 오레놀

이 고정장치를 풀고 연에서 뛰어내리려고 마음  먹었을 때 이미 연은 뛰

어내렸다간 뼈가 박살이 날 속도로 치솟았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볼

이 아파왔고 꽉 깨문  어금니에서는 열이 치솟았다.  사람들이, 계곡이,

마침내 산이 그의 발  아래로 내려갔다. 오레놀은 더  이상 당혹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 때 저  아래에서 다급한 신호가 왔다.  롭스가 두 팔을

휘젓고 있었다. 밧줄을 끊으라는 신호가  분명했다. 오레놀은 바람의 압

력에 힘겹게 저항하며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대덕은 무서운 고민을 직

시하게 되었다.

'어느 밧줄이더라?'

그의 연에서부터 시작되어 저  아래로 까마득하게 사라지는  밧줄은 두

개였고 그 중 하나에는 천조각이 묶여  있었다. 정신없이 펄럭거리는 천

을 보며 오레놀은 멀미가 일어날 것 같았다.

'이걸 자르라는 표시인가? 아니면, 이걸 자르지 말라는 표시인가? 어느

거였더라? 이런! 천에 글을  적어두는 건데!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제

발! 분명히 말해줬는데. 들었는데. 칼자국? 칼자국이 무슨 말이더라? 그

게 어쨌다는 거지? 아, 그래. 칼자국을  내면 어떻겠냐고 했지. 망할 자

식! 아, 이런. 내 죄가 크구나.  용서하십시오. 롭스. 그런데, 젠장! 어

느 걸 잘라야 하지? 어느 거야! 어, 너무  늦으면 안돼! 내가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야? 자르자! 빨리 잘라야 해! 잠깐. 그런데, 이게

도르래와 연결된 밧줄이라면?'

오레놀은 밧줄 하나에 단검을 가져갔다.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는 밧줄

이었지만 질긴 것이라 단번에 잘려지지는 않았다. 조금씩 밧줄을 썰어내

며 오레놀은 자신의 목을 조심스럽게 베어내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

러나 어느 순간, 밧줄에 가해지는 장력이  한계를 넘었고 단검 아랫부분

의 밧줄이 갑자기 사라졌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당겨졌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이다. 그리고 남은 부분은 거세게 튕겨져 오레놀의 뺨을 때렸다.

이 어처구니 없는 모욕에 오레놀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네가 정확한 밧줄이라면, 뺨 때린 것은 용서해주겠다. 천조각 묶여 있

는 밧줄! 그걸 자르는 것이 맞는 거지?"

그것이 맞는 밧줄이었다.

연이 갑자기 뒤로 불쑥 치솟았다.  갑자기 치솟아오른 오레놀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은  격심하게 요동쳤고 영원히  솟아오를 것

같았다. 오레놀은 자신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죽으리라 생각했다. 하

지만 연은 곧 자세를 회복했다.

겁에 잔뜩 질린 채 눈을 뜬 오레놀은 환희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연을 잡아당기던 말 대신 이제 도르래가 연을  떠맡고 있었다. 계곡 아

래에 있는 사람들이 개미 만하게 보였지만 오레놀은 그들이 박수를 보내

어오는 모습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도르래에 메달린 사내들은 주의

깊게 밧줄을 늦췄다 풀었다 하며  연이 안정적으로 상승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오레놀은 가슴이 벅찼다.

"날고 있다!"

펄럭거리는 옷이 살갗을 아프게 했다.  귀는 얼얼해지고 눈꺼풀이 무거

웠다. 하지만 오레놀은 바람에 의지하여 날고 있었다. 풍경은 기가 막혔

다. 키준 산맥 전체가 그의 눈에  들어왔고 아스라한 지평선이 내려앉은

자리로 하늘이 새파랗게 불타올랐다. 때는 아침인지라 태양은 옆에서 비

춰오고 있었고 그것마저 오레놀을 행복하게 했다.  어쩌면 그는 조금 더

그 광경을 즐길 권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연에 타고  줄 하나에 의지한

채 산마루 위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승낙했으니. 하지만 함께 날고 있을

동료들을 돌아보기 위해 시선을 옮긴  오레놀은 하늘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다. 하늘치의 눈은  수천 개였고 오레놀을 직시하

는 것은 그 중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레놀이 전무후무한 사

건의 피해자로 전락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기엔 충분했다. '하늘치와 정

면 충돌해서 죽은 승려에 대한  이야기는 행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까?' 사회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서사학적으로, 어쨌든 대단히 흥미로

운 질문이었지만, 오레놀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구해볼 시간이 없

었다. 시야의 모든 부분을 가려버리며 박력있게 다가오는 하늘치는 지나

치게 위협적이었다. 산이 갑자기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발 앞의 도시로

산책을 시작한다면 그 시민들은 지금 오레놀이 느끼는 기분과 비슷한 기

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레놀은 고함쳤다.

"어떻게 좀 해 줘요!"

오레놀의 외침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승려를  하늘치와 충돌시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롭스는 주의깊게 바람을 살폈다. 물론 바람을 볼 수야 없

으니 롭스가 본 것은 밧줄과 연의  움직임이었다. 마침내 적당한 순간이

왔다. 롭스는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도르래에 붙어있던 사

내들이 한꺼번에 손을 놓았다. 도르래들은  불꽃을 튀기며 회전했다. 도

르래와 줄다리기를 하던 바람은 갑작스러운  승리에 당황한 것이 틀림없

다. 줄이 풀려나며 연이 맹렬하게 치솟았다.

오레놀은 연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래에 있는 자들이 자신을 하늘

치의 위쪽으로 올라가게 하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었지만 오레놀은 그

결심이 늦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더럭 느꼈다.  분명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었지만 하늘치는 너무도 거대했다.  한참을 상승했음에도 불

구하고 오레놀은 여전히 하늘치와의  충돌 궤도 안에  있었다. 오레놀이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을 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나타났다.

오레놀은 비로소 거리가 충분히 남아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하늘치보

다 더 높은 하늘에 있었고 하늘치의 등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푸르렀다. 그리고 오레놀은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각도에서 하늘

치 유적을 보았다. 거리는 멀었지만 그것은  마치 지평선에 있는 고대의

유적 같았다. 물론 그 지평선은 지상 천 미터 이상에 있는 좀 특별한 지

평선이긴 하지만.

광활한 하늘치의 등을 내려다보던 오레놀은 차츰 착륙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늘치의 등에 내려서는 방법에  대해 들었던 것인지 듣

지 않았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고, 특별히  떠오르는 계획도 없었다.

어쨌든 그는 지상 천 미터 위치에  외롭게 매달려 버둥거리고 있을 뿐이

었다. '설마 고정장치를 풀고 아래로 뛰어내려야 하나?'

다행히도 롭스는 그보다 나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롭스는,

그리고 그의 지상 동료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밧줄을 정확한 순간

에 풀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키준 산맥의 상공에서는  매우 거대하며

극적인 곡예가 펼쳐졌다.

풀려나고 있던 밧줄에 하늘치의 거대한 지느러미가 걸렸다. 그 순간 상

승하던 연들은 갑자기 방향이 바꿨다. 급격한  충격에 오레놀은 토할 뻔

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오레놀은 하늘치의 등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연줄이 하늘치에게 걸리는 바람에 연은 하늘치의 등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 속도가 살인적이지 않은 까닭은 아래쪽에서 도르

래를 놔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은 계속 풀려나면서 서서히 하늘치의

등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오레놀은 발  앞으로 미지의 땅(?)이 다가오는

것을 볼 배짱이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연은, 마침내 하늘치

의 등 위에 내려앉았다.

깃털처럼 내려앉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착륙이었다.

충격 때문에 오레놀은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거대한 연에 깔린 채 낑

낑거리는 것이 고작일 뿐, 오레놀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계속 밧줄에 매달려 있다면

그는 다시 하늘치의 등에서 끌어내려져  무시무시한 속도로 추락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오레놀은 일어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고정장치를

풀어내려다가 손가락을 부러뜨릴 뻔했지만 오레놀은 간신히 그것을 풀어

내고 연 아래에서 기어나왔다. 그 때 오레놀은 다른 세 사람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세 사람은 연을 내버려둔 채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달려오면서 고함

을 질렀지만 오레놀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오레놀은 멍

하니 그들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연은 서서히 미끄러지고 있

었다. 밧줄이 아래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레놀은 문득 밧줄이 없

으면 아래로 내려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연으로 돌아보

았을 때 오레놀은 겨우 사내들의 외침을 이해했다.

"그걸 잡아요! 제기랄!"

연은 이미 오레놀의 발 근처까지 미끄러지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레놀은 몸을 던졌다.  연 위에 엎드린 오레놀

은 그것을 꽉 붙잡았다. 하지만 미끄러지는 속도가 느려졌을 뿐 연은 오

레놀을 태운 채 끌려갔다. 함께 끌려가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

레놀은 연을 놓을 수 없었다. 그 때 세 사람이 간신히 당도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오레놀처럼 연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

은 밧줄을 움켜쥐었다. 각자  밧줄을 손목에 감은 두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밧줄은 연과  네 사람을 한꺼번에 끌어

당겼다. 미끄러지는 연 때문에 복부가 쓸리는  고통 속에서 오레놀은 도

대체 이들에게 무슨 계획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스러워졌다.

그 때 앞쪽에 있던 두 남자가 갑자기 우당탕 쓰러졌다.

오레놀은 끌려가던 것이 멈춰진  것을 깨달았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오레놀을 내버려둔 채 연 위에 올라탔던  남자가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앞쪽에 있던 두 사람과 함께 밧줄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힘껏 끌

어당기며 외쳤다.

"스님! 정신 차렸으면 와서 좀 도와주쇼! 밧줄을 감아올려야 하오!"

"밧줄을 감아올려요? 도르래가…"

"젠장, 당연히 끊었지! 롭스가 제 때 끊었을 거요. 이걸 놓치면 우리는

끝장이란 말이오! 와서 도와요!"

조금 전 도끼로 밧줄을 후려쳤던 롭스는  도르래에 도끼를 가져다댄 자

세 그대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줄이 끊어지지 않은 다른  세 개의 연은 하늘치의  등에서 미끄러졌다.

소임을 다한 연들은 불우한 모습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발굴대는 하늘치

만을 바라보았다. 롭스가 끊은 줄은 하늘치의 등에서 길게 늘어진 채 끌

려가고 있었다. 그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고작 네 사람의

힘이다. 롭스는 눈을 부릅뜬 채 밧줄이 짧아지는 징후를 찾았다.

마침내 밧줄이 서서히 움직였다. 하늘치가 계곡 끝에 도달했을 때 밧줄

끝은 이미 숲의 머리 위로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롭스는 안심하지 않았

다. 최소한 밧줄의 절반 이상이 하늘치의 등 위에 올라가지 않는다면 밧

줄은 언제고 아래로 풀려내릴 수 있다. 롭스는 도끼를 어떻게 하지도 못

한 채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롭스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환호를 올렸다.

밧줄의 절반 이상이 하늘치의 등 위로 올라간  것이다. 이제 네 사람이

밧줄을 놓는다 하더라도 이미 끌어올려진 무게가 밧줄이 풀리는 것을 저

지할 것이다. 롭스는 고함을 질렀다.

"성공이다!"

다른 자들도 모두 비슷한 말들을 외쳤다. 서로 얼싸안고 팔짝팔짝 뛰는

자들도 있었고 한바탕 춤을 추는 자들도 있었다. 롭스 또한 기쁨에 목이

메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고래고래  외치며 그들 가운데 끼여들었다.

눈 앞이 부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지만 롭스는 눈을 닦지 않았다.

밧줄의 절반을 끌어올린 시점에서  세 남자는 오레놀에게  쉬라고 말했

다. 흥분과 충격, 그리고 격심한 노동의  후유증 때문에 오레놀은 그 권

유를 무시할 수 없었다. 오레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연 위에 걸터앉았

다. 다른 세 사람은 그런 오레놀을 보며 빙긋 웃으며 일을 나누었다. 두

사람이 밧줄을 끌어당겼고 한 사람은 끌어올려진 밧줄을 둥글게 사렸다.

사려진 밧줄 무더기의 크기는 대단했다. 밧줄이 아래로 끌려내려갈 일은

절대로 없어 보였다. 내려갈 방도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에 오레놀은 안심

하며 체면 불구하고 드러누웠다.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지는 하늘이 그의

눈을 부시게 했다.

그리고 오레놀은 펄쩍 뛰듯이  일어나 섰다. 그는 감격에  겨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피곤하다고 그냥  드러누워 씩씩거려도 되는

장소가 아니었다. 오레놀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하늘치 등이야!"

오레놀의 외침에 고개를 돌린 세 남자는 다시  씩 웃었다. 오레놀은 벅

찬 감동을 어쩌지 못해 또다시 외쳤다.

"그렇죠? 예? 우리는 하늘치 등에 올라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스님. 마침내 올라왔습니다."

사내들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 중 특히 마음이 여려보이는 남자

는 밧줄 사리 위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다가 마침내 눈물을 터뜨렸다.

오레놀은 떨리는 손을 손목으로 가져가 염주를 꺼내어 들었다.

오레놀은  하늘치의 등 위에 무릎을 꿇고 염주를 헤아렸다.  손이 떨려

자꾸만 염주알이 미끄러졌지만  대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감사의 말들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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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3. '혈루(血淚)' 편 시작합니다.

웹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추억 어린 팬터지 이름 하나를 듣게 되었

습니다. 흐음. 정확하게 말하면 이름은 아니군요. 주인공이 하프 엘프이

며 엘프 마법사와 치료술사, 도둑, 노움 등이 파티를 이루는 팬터지인데

제목이 뭐지요?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예. 아는 분은 아실 만한 '검, 마

법 이야기'지요. 제목이 예술입니다. 흐음. 저 작품 연재되던 그 옛날에

는 저 정도면 팬터스틱한 제목이었습니다만 지금 저런 제목의 글이 나온

다면 사람들이 당황하지 않을까 생각되는군요. 아아, 잡담. 잡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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