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12. 파국으로의 수렴 - 4
악타그라쥬 공방전이 또다른 하루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 날 차례를 맞
아 전선에 등장한 벚나무 군단의 군단병들은 당황했다. 전투가 쉬워졌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 있는 북부군은 비할 바를 찾기 어려운 정교함으로 여섯 개
군단의 연환공격을 물리치던 어제까지의 북부군이 아니었다. 불신자들은
허둥거렸고 당황했으며 악에 받쳐 발광했다. 그 모습은 벚나무 군단이
북부에서 싸우곤 했던 보통의 불신자들과 비슷했다. 더군다나 그들을 둘
러싸고 있는 대기의 기온마저 낯설었다. 아니, 낯익은 것이라고 해야 할
까. 키보렌의 기온은 나가들에게 익숙한 원래의 기온으로 되돌아가 있었
다. 움직이기 좋은 더운 날씨였다.
도깨비 감투를 쓴 암살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빽빽하게 밀집한 호위병들
사이에 서있던 수호장군들은 그 사태에 당황했다. 뇌룡공 륜 페이가 지
난 밤 기온을 낮추지 않았음은 분명했다. 또한 북부군의 병사들이 중구
난방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그들이 용인의 통제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
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전황은 륜 페이가 '할 일을 하지 않아서' 그
들에게 낯선 것이 되고 있었다. 수호장군들은 전쟁터 한가운데서 발악하
며 화산 같은 불길을 끌어올리고 있는 시우쇠에게 국소적 폭풍을 쏟아부
으며 짬짬이 니름을 교환했다.
[륜 페이가 어떻게 된 걸까요?]
[글쎄요.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물러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전투에 응한 것이지요?]
[꺼림칙하군요. 기온에 신경쓰도록 합시다. 좀 추워지는 느낌이 없는
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태양이 떠오름과 함께 기온은 자연스럽게
높아질 뿐이었다. 나가들은 오래간만에 뜨거워진 몸으로 기세가 흐트러
진 적을 상대로 싸울 수 있었다. 나가들의 기세는 드높아졌다. 전선 곳
곳에서 피에 젖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숲에서 기병은 무의미한 집단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기병들은 보병들과
마찬가지로 작살검을 휘두르며 나가들과 싸워야 했다. 그들의 선두에서,
괄하이드 규리하는 평생의 기술을 다 해 대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기
량의 출중함은 북부군과 벚나무 군단을 통틀어 단연 발군이다. 회전하고
돌진하고 파헤치며 쑤신다. 찍어내고 잘라내고 끊어내며 부러뜨린다. 이
미 오래 전에 몸에 꽂은 채 싸울 수 있는 작살검과 괄하이드의 대도를
똑같이 취급하면 안 된다는 것을 숙지하게 된 나가들이었지만, 그들의
육신을 탐하는 대도에게서 몸을 빼내긴 어려웠다. 분노에 찬 동작으로
사이커를 마주 대어 보건만 그 단단함 때문에 부러지지는 않을지언정 가
벼움 때문에 튕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가오는 나가의 머리를 턱 아랫부분까지 쪼개어놓은 괄하이드는 잠시
호흡을 가누기 위해 대도를 당기며 물러났다. 그의 주위에 나가는 더 이
상 존재하지 않았고 다가올 수 있는 거리의 나가들은 보다 정상적인 상
대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괄하이드는 피투성이가 된 손을 옷에 닦을
틈을 얻을 수 있었다.
갑자기 못 견딜 정도의 더위가 노장군을 짜증스럽게 했다. 괄하이드는
투구를 벗어 팽개쳤다. 투구 아래에 있던 머리카락은 피에 젖은 수염과
달리 아직 흰빛을 간직하고 있다. 노장군은 머리카락을 묶었던 끈마저
풀어버렸다. 하지만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목과 어깨에 달라붙어 괄하이
드를 괴롭혔다.
키보렌은 숨이 막히도록 더웠다.
흉악한 전투 때문에 날짐승들이 모두 도망간 밀림에서는 자연적인 소리
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들려오는 것은 병장기 부딪히는 살벌한 소리와
북부군의 비명 뿐이다. 맞부딪치는 병장기들은 섬광과 소음 뿐만 아니라
지독한 쇠비린내도 풍겼다. 피냄새와 땀냄새에 쇠비린내까지 합쳐진 그
묘한 냄새는 괄하이드에겐 낯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곳 키보렌에는
괄하이드의 신경을 자극하는 냄새가 하나 더 있었다. 짓눌러버릴 것처럼
다가오는 숲의 향기. 그것이 전투의 향취와 뒤섞이자 형언키 어려울 정
도로 불길한 냄새로 바뀌었다.
이마에 달라붙는 백발을 떼어내며 괄하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도의
넓은 날 곳곳에는 부서진 비늘들이 묻어 있었다. 그것을 닦아내려던 괄
하이드는 손을 대자마자 다시 떼었다. 무수한 사이커와 충돌했던 대도는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주위가 약간 고요해졌다. 전투의 중심이 그에게서 약간 멀어진 듯했다.
다시 그 싸움터로 복귀해야겠지만 괄하이드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나무
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괄하이드는 검게 탄 목과 팔뚝에 흐르는 구슬
땀을 계속 훔쳐내었다.
보다 젊고 자신의 삶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욕구도 강했던 시절, 괄하
이드는 왕의 변경백이라는 지위가 과연 살인 면허장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그 지위의 정당성이 언제나 불완전했기에
고민은 더욱 컸다.
그러나 몸의 터럭이 희게 변하고 혹 청춘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해도
그 모든 어리석은 짓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질려 정중히 거부
해버릴 나이가 된 지금, 괄하이드는 더 이상 그런 문제가 자신을 괴롭히
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살인의 허락을 요구하는 자는 살아가는 것의 허
락도 요구해야 할 것이다.
'죄는 내가 이고 가지.'
맹금의 날개처럼 대도를 뿌린 다음 격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며, 괄하
이드는 하늘을 흘끔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았다. 키보렌은 이글거리는 폭염 속에 흔들리고 있었다.
견디기 힘든 더위였다.
시우쇠가 불길을 거둬들였다. 수호장군들은 당황했고 그 틈을 타 시우
쇠는 뒤로 훌쩍 뛰었다. 몸을 돌린 시우쇠는 마치 도망치는 듯한 모습으
로 북부군을 헤치며 달려갔다. 통제되지 못한 모습으로 나가들에게 살육
당하던 북부군은 시우쇠의 열기에 다시 고통받았다. 시우쇠의 도주 때문
에 전열은 크게 흐트러졌다. 수호장군들 중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꼭
닐러야만 직성이 풀리는 누군가가 어이없다는 듯이 닐렀다.
[시우쇠가 물러갑니다.]
수호장군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쩌려는 거지요? 륜 페이가 사라지더니 시우쇠까지?]
[어쨌든 잘됐군요. 레콘들을 위해 비를 뿌려볼까요.]
[글쎄요. 모처럼 좋은 기온이라 병사들이 힘을 내고 있는데요. 비를 뿌
리면 체온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수호장군들은 빠르게 숙의한 다음 시우쇠, 혹은 륜 페이가 돌아올 것을
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들이 나서지 않아도
전황은 북부군에게 치명적이었다. 간혹 레콘이 용력을 발휘하여 나가들
을 밀어붙이는 장면들이 있었지만, 곳곳에서 전투는 소규모 학살로 바뀌
고 있었다. 북부군의 수뇌부가 지휘를 포기해버린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
다. 결국 수호장군들은 세키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패주할 것처럼 보입니다. 대기하고 있던 다섯 개 군단을 투
입하여 섬멸전을 펼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세키리 군단장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숲을 바라보았다. 전황은 분명 수
호장군들이 니른 대로였다. 하지만 세키리는 북부군이 궤멸해버릴 만큼
의 타격을 입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세키리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
는 륜 페이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찌는 듯이 더운 날씨는 그대로였고
어디서도 륜 페이가 기온을 하강시키고 있다는 증거는 포착되지 않았다.
설령 륜 페이가 갑작스럽게 나타나 기온을 떨어뜨리려 해도 오늘 안에
나가를 불편하게 만들기는 어려울 정도였다.
[좋습니다. 연락을 취하지요.]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다섯 개 군단은 모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
고 있었고 따라서 세키리의 명령이 전달되자 곧 전장에 나타났다. 적의
숫자가 여섯 배로 늘어나자 북부군의 전열은 순식간에 함몰되었다. 홍수
에 휘말린 것처럼 물러나는 북부군을 보며 수호장군들은 북부군의 운명
이 오늘로 마감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세키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저렇게 느린 건가!]
전선에 도착한 다섯 개 군단이 벚나무 군단과 합류하여 사정없이 북부
군을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세키리는 북부군의 붕괴가 예상만큼 빠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세키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가 병사들을
살펴보았다. 수호장군 한 명이 닐렀다.
[날씨가 오래간만에 더워지니 당황했나 봅니다.]
다른 수호장군이 맞장구쳤다.
[그렇군요. 항상 쌀쌀하다가 갑자기 더워지니 견디기 어려울 정도군요.
병사들도 더워하고 있습니다.]
수호장군들은 모두 그 니름에 동의했다. 거의 스무 날 가까이 쌀쌀한
기온에서 전투했기에 오늘의 날씨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때였
다. 어디선가 정신을 찌르는 듯한 니름이 들려왔다.
수호장군들은 놀란 표정으로 세키리를 돌아보았다. 세키리 군단장은 충
격과 고통, 그리고 경악의 니름들을 쏟아내며 하늘을 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세키리 군단장은 무서운 것을 보는 얼굴로 닐렀다.
[해, 해가!]
[예? 해가 어쨌다는 겁니까?]
[두 개입니다!]
수호장군들은 기겁하여 하늘을 쳐다보았다. 머리 위를 덮은 나뭇잎과
가지들 사이로 빈틈을 찾아낸 장군들은 눈을 부릅뜬 채 하늘을 응시했
다. 그리고 그들은 세키리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했다.
키보렌의 하늘에 뜬 두 개의 태양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북부군의 뒤편에서, 시우쇠는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두 팔을 앞으로 늘
어뜨린 채 서있었다. 움직임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먼 곳에서 화신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끝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시우쇠의 온몸에서 불길이 끝없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신의 몸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불은 모두 위쪽으로 흘렀다. 시우쇠의
배와 가슴, 그리고 목과 얼굴을 타고 흘러오른 불길은 그 정수리에 도달
하여 시우쇠와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 머리 위 쪽 하늘에서 하나로 엉기
었다. 그 불덩어리가 거대해질수록 시우쇠의 몸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
다. 시우쇠는 그의 몸 자체를 짜내어 불덩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듯했다.
지독한 열기 때문에 다가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한참 떨어진 곳에서 공
포에 질려 그것을 바라보았다.
시우쇠의 머리 위에 형성되던 불덩어리는 점점 커져 마침내 직경 수십
미터에 달하는 구가 되었다. 시우쇠 근처의 나무들은 이미 새카맣게 불
타 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시우쇠는 멈추지 않았다. 불덩어리가 커짐
에 따라 공기가 난폭하게 불탔고 시우쇠를 향해 사방의 모든 바람이 몰
려들었다. 웅왕거리던 나뭇가지들이 정신없이 떨리다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떠오른 풀잎과 나뭇잎이 시우쇠를 향해 휘몰아쳤다. 숲
은 기묘하게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바람은 창백해진 모습으로 떠돌았
다. 땅이 덜덜 떨렸고 공기는 그대로 폭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마침내
직경이 백 미터도 넘을 것 같은 불덩이를 만들어낸 시우쇠는 불의 포효
를 뿜어내며 오른손을 쳐올렸다. 순간 불덩이는 모든 구속에서 해방되어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먼저 떠올랐던 형제와 함께 키보렌의 하
늘을 불사르는 세 번째 태양이 되었다.
산더미 같은 불 두 개를 하늘에 띄워보낸 시우쇠는 땅바닥에 주저앉았
다. 불을 지나치게 뿜어내어 그의 몸이 오그라든 것처럼 보였다. 시우쇠
의 코에서는 새파란 불꽃이 빠르게 드나들었다. 시우쇠는 낮게 으르릉거
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륜 페이가 서있었다. 륜 페이는 두 손을 가볍게 맞잡은 모습
으로 서있었다. 하늘을 향하고 있는 그 두 눈은 감겨 있었다. 시우쇠가
불처럼 말했다.
"끝나가나?"
륜 페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눈을 뜬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두었던 물통을 집어든 륜은 그것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끝났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이래로 저 높은 곳의 하늘에서 태양의 열기를 머금은 습
기를 계속해서 강하시키고 있던 륜은 마침내 그 강하를 되돌이킬 수 없
는 것으로 만들었다. 륜은 물통을 머리 위부터 뒤집어썼다. 물 또한 미
지근하게 바뀌어 있어 추위에 얼어붙는 일은 없었다. 륜은 턱을 타고 흐
르는 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앞으로 세 시간 동안 열기는 계속 쏟아지고, 다른 곳으로는 이동하지
않을 겁니다."
바닥을 본 륜은 그림자가 기묘한 모습으로 흩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하
늘을 흘끔 본 륜은, 주의깊게 곁눈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느꼈
다. 세 개의 불타는 태양은 하늘의 빛깔을 바꿔버렸다. 마귀 같은 열기
가 하늘을 키보렌의 하늘을 치달아 륜이 끌어내린 습기를 광분하게 만들
었다. 두억시니 같은 하늘이었다.
"무서운 태양이군요. 열이 지나치게 집중되었습니다. 오늘 낮이나, 적
어도 내일은 육지에서 태풍이 발생하는 것을 보게될 것 같군요. 전투가
끝난 후에는 비를 만들어서 열기를 좀 줄여야겠습니다."
"내버려둬."
"내버려두라고요?"
"싹 쓸어버리도록."
멀리서 거대한 계명성이 터져나오는 것을 들으며 륜은 고개를 끄덕였
다.
"라수에게 가보겠습니다."
라수는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땀 흘릴 줄 모르는 짐승들, 다 뒈져버려라!"
라수의 곁에 있던 레콘은 그의 말을 몇 배나 부풀려서 외쳤다. 전장 전
체에 그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북부군 병사들은 이제야 반격의 기
회가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노호했다.
나가들이 한계선 이북으로 올라올 수 없는 까닭은 변온동물인 그들에게
한계선 이북의 땅이 지나치게 춥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온동물은 그 체
온을 유지할 수 없는, 혹은 유지하기 힘든 동물이지 피가 차가운 동물은
아니다. 라수는 그 점에 착안하여 발상의 전환을 이룩했다. 추위가 나가
들을 둔하게 만든다면, 정도 이상의 더위 또한 나가들에게 같은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라수는 세계에서 가장 더운 그 지방을 '더 덥
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인간들이나 레콘들이 일사병을 일으킬지도 모르
지만 라수는 그보다는 땀 흘릴 수 없는 나가들이 먼저 쓰러질 거라 믿었
다.
작열하는 세 개의 태양 아래에서 북부군 병사들은 나가를 향해 돌격했
다.
이글거리는 세 개의 태양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가들을 얼어붙게 만들
었다. 거세게 치닫는 열류의 흐름은 나가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라수의
예상과 달리 나가들을 정말 당혹하게 만든 것은 더위가 아닌 시야의 혼
란이었다. 세 개의 태양은 키보렌의 그림자를 대폭 줄여버렸고 얼마 남
지 않은 음지와 양지 사이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열교환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로, 집결한 나가의 여섯 개 군단은 시각적 회오리라 할 수 있는
상황에 빠졌다. 만약 심장이 있었다면 그들은 맥박이 무서운 속도로 높
아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나가들의 몸은, 그리고 그 피는 계속 뜨거
워졌다. 그리고 열배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로, 십만 명에 가
까운 나가들이 단체로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나가들은 좌절과 혼란, 공
포 속에서 무기력함을 느꼈다. 이성의 샘은 잔혹한 삼형제 태양 앞에 말
라붙었다. 그리하여, 나가들은 옆에 서있는 것이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나가들에게 돌격하던 북부군은 서로를 찔러대는 나가들의 모습에 경악
했다.
나가의 눈에 주위의 모든 사람이 뜨겁게 보였다. 혼미해진 정신 속에
나가들은 자신이 불신자에게 포위되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고 말았다.
나가들은 정신적 비명을 내지르며 사이커를 휘둘렀다. 예리한 칼날이 비
늘을 파고들어 피를 갈취했고 칼날에 묻어나는 피의 뜨거움은 나가에게
확신을 부여했다. '불신자다, 불신자다!' 그들은 서로를 무참하게 베고
찔렀다. 어떤 나가는 자신의 왼팔에 놀라 엉겁결에 그것을 베어내고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런 나가의 등 위로 무수한 사이커가 쏟아졌
다.
전선 뒤편에서, 륜은 다시 물을 뒤집어쓰며 그 참상을 보지 않으려 했
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감각은 지나치게 예민했다. 눈을 감아도
륜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비늘을 부딪치는 륜에게 라수가 외쳤다.
"공작!"
륜은 몸의 물기가 마르는 것을 느끼며 라수를 바라보았다. 라수의 눈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그 두뇌는 놀라운 속도로 움직였다.
"공작! 악타그라쥬로 가시오!"
"악타그라쥬? 전황을 파악하는 것이 아닙니까?"
라수의 얼굴엔 그림자가 줄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그림
자들은 지나치게 어둡게 보였다. 밝은 부분이 평소의 세 배나 되는 빛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숯으로 그린 괴이한 초상화 같은 모습으로
라수는 고함 질렀다.
"그렇소. 지금 용인의 감각은 필요없소. 필요한 것은 용의 화염이오.
악타그라쥬로 곧장 날아가시오! 그곳의 시민들 또한 더위 때문에 제정신
이 아닐 거요. 제기랄, 추위보다 더위가 훨씬 효과적이군. 그들은 당신
을 방해할 수 없을 거요. 그 틈을 타 심장탑을 부숴버리시오!"
"심장탑을… 왜?"
"그러면 악타그라쥬 시민들 뿐만 아니라 저기 있는 악타그라쥬 출신의
병사들도 다 죽을 테니까!"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륜은 라수의 사고 속도에 비늘 서는 느낌을 받았
다. 륜은 이런 더위 속에서 어떻게 차가운 생각이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륜은 거의 무의식 중에 아스화리탈을 불러들였다. 아스화리
탈이 목을 내밀었지만, 륜은 가만히 선 채 용을 바라보기만 했다. 라수
는 직접 달려가 물동이를 들고 왔다. 그리고 륜의 몸에 사정없이 끼얹었
다. 물벼락을 맞은 륜은 성난 표정으로 라수를 돌아보았다. 라수는 빈
물동이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가시오, 륜 페이!"
"알겠습니다."
륜은 아스화리탈의 등에 올랐다. 아스화리탈은 힘차게 날아올랐다. 푸
르게 녹아흐르는 듯한 숲의 머리 위로, 세 개의 태양이 작열하는 하늘을
가로질러 용은 벼락을 뿌리며 날아갔다.
세리스마는 당황하여 뱀들을 바라보았다. 사어를 익힌 이후로 세리스마
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뱀들은 마치 달군 철판 위에 오른 것처럼 배를 보이며 몸을 비틀었다.
간혹 뱀들의 움직임이 의미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세리스마는 그것이 사
어인지 고통의 몸부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늙은 수호자 세리스마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악타그라쥬에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리스마는 온힘을 기울여 강력하게 의지를 전달
했다.
'무슨 일인가, 짧게 말해!'
'덥다. 뜨겁다. 불신자다! 사방에 불신…'
뱀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세리스마는 충격에 빠져 뱀들을 바라보았다. 기나긴 고통에서 해방된
뱀들은 기운이 다 빠진 듯 꿈쩍하지 않았다. 세리스마는 그것을 다시 뱀
단지에 담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악타그라쥬의 심장탑에 불신자들이 들
어왔단 말인가? 그렇다면 악타그라쥬가 이미 정복되었다는 건가? 세리스
마는 황급히 일어나 뱀들을 집어들었다. 축 늘어진 뱀을 주워 쑤셔넣듯
이 뱀단지에 담은 세리스마는 선인장 군단과 연결된 뱀단지를 꺼내어들
었다.
하지만 세리스마의 거듭된 호출에도 선인장 군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리스마는 뱀을 다시 주워담지도 않은 채 다른 다섯 개 군단의 뱀단지
를 모조리 바닥에 쏟았다. 방 전체에 수백 마리의 뱀들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중 세리스마의 의지 이외에 다른 의지를 담아 움직이는 뱀은
한 마리도 없었다. 세리스마는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화를 내며 일어났다. 뱀 한 마리가 의자를 타고
올라와 있었다. 세리스마는 그 뱀을 집어 내동댕이치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여섯 개 군단이 모조리 격퇴되었다는 말인가?'
세리스마는 도저히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고작 한 명의 화신과 한 명
의 용인이 불사의 나가로 이루어진 여섯 개 군단을 몰살한다는 것은 상
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혹 시우쇠가 그 옛날 페시론 섬과 아킨스
로우 협곡에서 일어난 일을 재현해 보인 것일까? 하지만 그 또한 받아들
이기 어려운 추측이었다. 그런 대재난을 일으킬 경우 북부군의 안전 또
한 보장할 수 없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공포가 세리스마를 짓눌렀다.
심장탑의 55층, 하텐그라쥬 전체를 내려다보는 그 높은 곳에서, 세리스
마는 뱀단지를 통해 하텐그라쥬뿐만 아니라 키보렌 전체, 그리고 한계선
너머 하인샤 대사원까지 손아귀에 든 물건처럼 다루었다. 그 노회한 수
호자가 해온 일들은 그가 위치하고 있는 높이와 어우러져 세리스마에게
세계를 통제한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생각하기 힘든 수십 년의 시간을 주저없이 '계획'에 투자하며 마침내 목
표의 정수리를 밟고 선 그 순간에도, 세리스마는 심장탑 55층에 있었다.
그곳을 떠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뱀단지들이 불길한 사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응답을 거부하
고 있는 그 시점에서 세리스마는 갑자기 세계가 한없이 축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55층이라는 압도적인 높이는 이제 고소공포증과도 비슷한 아찔
한 불안감으로 다가왔고 지나치게 오랜 세월 동안 익숙해진 그의 방은
폐소공포증을 일으키는 협소한 감옥으로 바뀌었다.
세리스마는 일어섰다. 늙은 수호자는 바닥에 깔려 있는 뱀들을 짓밟으
며 창문으로 뛰어갔다. 빗물을 받아들이는 저수장치를 망가뜨릴 뻔하며
세리스마는 가까스로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
보며 크게 심호흡했다. 도저히 아래를 내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스마의 견고한 정신은 굴복을 쉽사리 용납하지 않았다. 세
리스마는 거칠게 부딪치는 비늘을 눕히려 애썼다. 한참 동안 스스로를
꾸짖던 세리스마는 마침내 결심했다.
'결국, 모든 것은 뜻대로 될 것이다. 결과는 그 누구도 번복할 수 없
다. 내가 그것을 원하기에!'
세리스마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실로 비늘 서는 높이였다. 세리스마는 창턱을 꽉 부여잡았다. 언제나
아무런 불안 없이 내다보던 그 높이가, 권력욕을 보채기도 하고 달래기
도 하던 그 풍경이 그를 겁나게 했다. 세리스마는 아무런 지지물도 없이
낙하한다는 느낌에 질겁했다. 그러나 결국 세리스마는 침착을 되찾았다.
세리스마는 모든 지붕과 대로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발로 걸어본 것이
수십년 전이건만 그곳은 그에겐 너무도 익숙한 거리와 지붕들이었다. 세
리스마는 안도했다.
그리고 세리스마는 기묘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일단의 병사들이 심장탑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소규모로 나뉘어 여
기저기로 흩어진 채 다가오고 있었지만 세리스마의 위치에서는 그 전체
적인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심장탑을 목표로 몰려드
는 병사들이었다.
불안 때문에 세리스마는 어처구니 없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즉, 세리
스마는 이미 북부군이 하텐그라쥬까지 도달하여 마호가니 군단이 심장탑
을 수호하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러나 곧 세리스마
는 그것이 니름도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능성이 없는 일이기도 하
거니와, 만약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병사들이 저렇게 나뉘어서 올 리가
없는 것이다.
어떤 불쾌한 단어가 세리스마의 뇌리에 떠올랐다. 세리스마는 그 또한
자신의 불안감이 조장해낸 니름도 안 되는 상상을 나타내는 단어로 치부
하려 했다. 하지만 그 단어는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문득 세리스마는
보트린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쥬어와 밤을 함께
보내고 돌아오려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트린의 미귀환은 불안하게
만 느껴졌다. 거의 대부분의 수호자들이 군단을 지휘하기 위해 떠난 지
금,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에는 여신의 힘을 다루는 수호자들의 숫자가 턱
없이 부족했다. 세리스마는 낙관적으로 생각하려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낙관적으로 보려 애써도, 세리스마에게 그 병사들의 모
습은 심장탑을 '기습점거'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몸을 돌린 세리스마는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연 세리스마는 잠시 낯선
풍경에 당황했다. 그러나 세리스마는 자신의 신명을 니르며 스스로를 다
잡았다.
수호자 세리스마는 자신의 방 밖으로 나왔다.
병사들의 모습이 하텐그라쥬 시민들을 당황하게 하지는 않을 거라는 비
아스의 생각은 맞아들어갔다. 하텐그라쥬 시민들은 몇 명씩 무리를 지어
돌아 다니는 병사들의 모습에 익숙했다. 따라서 서너 명, 혹은 예닐곱
명씩 나뉘어진 마호가니 군단과 쥬어의 의용군이 심장탑 근처에 이르는
동안 그들이 누군가의 주의를 끄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속으로 안도
하며, 쥬어는 어느 방물장수의 좌판을 구경하는 순박한 병사의 모습을
취했다. 그리고 방물장수의 니름에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으며 심장
탑을 훔쳐보았다. 심장탑의 모습에서는 아무런 이상을 찾아볼 수 없었
다. 하지만 쥬어는 자신이 저지르려는 일에 약간 질려있는 상태였다. 그
는 감히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을 공격하는 무도한 일이 저질러져도 우주
가 제대로 유지될지 의문스러웠다.
'카루와 스바치의 니름을 들을 걸 그랬나.'
생각할수록 쥬어는 스바치와 카루의 계획 쪽이 사리에 맞는 것처럼 보
였다. 그 계획을 따른다면 수많은 대가문들과 함께 당당하게 수호자들을
찾아가 여신을 풀어주라고 니를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쥬어가 감
당해야 하는 위험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신의 감금을 폭로
한 그의 공이 대가문들을 흡족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쥬어는 결국 비아스의 니름을 따르고 말았다. 만약 스바치와 카
루의 계획대로 행동한다면 심장탑으로 걸어가 당당하게 여신을 풀어주라
고 말하는 역할은 절대로 그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강대한
가문의 가주들이 - 그러니까, 그가 아닌 - 맡을 일이었다. 쥬어는 그들
가주들이 베풀어줄 호의를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과대평가하지도 않았다.
가주들은 틀림없이 자신의 공을 추켜세울 것이며 그런 과정에서 점차 근
본도 없는 전쟁터의 승냥이를 방해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비
아스의 니름을 따른다면 여신 구출의 모든 영광은 오로지 그의 것이 된
다. '여신의 감금을 폭로한다'는 것과 '여신을 구출한다'는 것의 의미차
는 막대했다. 방물장수의 설명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 같은 표정을 지으
며 쥬어는 허리 뒤에 숨겨둔 쇠망치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비아스의 신
호를 기다렸다.
소메로 마케로우는 난처한 표정으로 모든 이의 시선을 피하려 애쓰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하나도 없었다. 평의회장에 모
인 각 가문의 대표자들은 모두 소메로의 성격에 대해 알고 있었고 따라
서 그 덕 있는 여인이 그들을 모아들였다면 뭔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
는 일이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회의가 지연되는 것
은 분명히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가주들과 가주 대리
인들은 평온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평의회 의장은 소메로
마케로우와 마찬가지로 회의 시작이 지연되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의장
석에 앉아있던 드리고 아세리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소메로를 바라보
았다. 아세리도 의장은 다른 자들의 주의를 끌지 않는 무개성한 니름으
로 소메로를 불렀다.
[소메로 마케로우. 아직 멀었소?]
[정말 죄송합니다. 의장님. 잠시만 더 기다려주시면 비아스가 올 것입
니다.]
당황한 나머지 소메로는 니름을 무개성하게 바꾸는 것도 잊은 채 닐렀
다. 그래서 그녀의 니름은 대부분의 의원들에게 들렸다. 의원들은 예의
바르게 짐짓 소메로의 니름을 듣지 못한 척했다.
아세리도 의장이 한 번 더 질문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문을 바라보고 있던 소메로는 하마터면 벌떡 일어설 뻔했다. 안
으로 들어온 것이 비아스임을 깨달은 소메로는 반가움과 안도감을 느꼈
다. 그러나 아세리도 의장과 다른 의원들은 약간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비아스의 입장 선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아스의 뒤편으로 사이커를 뽑아든 병사들이 차례로 들어서자
그들의 의아함은 혼란으로 바뀌었다.
의원들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의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평의회
장의 무력 진입은 나가의 역사에 없었던 일이었기에 의장 또한 당혹에
빠졌다. 그녀들이 어찌할 줄 몰라하고 있을 때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벽쪽에 붙어섰다. 그리고 비아스는 평의회장 한가운데를 가로질
러 의장석으로 걸어갔다. 도중에 비아스는 소메로를 잠시 돌아보았다.
소메로는 당황 때문에 비늘을 세운 채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비아스
는 씩 웃어준 다음 다시 의장을 바라보았다. 의장석 앞에 선 비아스는
닐렀다.
[의장님. 마호가니 군단의 군단장인 마케로우 가문의 비아스 마케로우
입니다. 연설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세리도 의장은 겨우 한 마디를 니를 수 있었다.
[감히 남자를!]
비아스는 잠깐 동안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졌다. 그
러나 벽에 붙어선 병사들 사이에서 사나운 미소에 해당하는 감정들이 흘
러나오자 비아스는 아세리도 의장의 니름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비아
스가 데려온 병사들 중에는 남자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다. 비아스는 아
세리도 의장이 병사들을 데리고 입장한 것을 탓하는 대신 남자를 데려온
것을 탓하는 것이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글쎄요. 의장님. 군단에서 남자들에게 지휘를 받아온 저는 의장님의
니름을 이해하기 어렵군요.]
[그들은 수호자들이잖은가! 여신의 신랑들이야!]
[여신의 간수지요.]
[뭐라고?]
[여신의 간수라고 했습니다. 여신의 납치자라는 호칭 또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의원들은 당황의 니름들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벽에 붙어있던 병사들
또한 엄격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비아스의 니름에 놀란 표정까지
는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몇몇 의원들은 놀라는 대신 긴장된 표정으로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비아스는 그들 가운데서 콘수마 발텐의 모습을 발
견할 수 있었다. 콘수마는 비아스의 요구대로 몇몇 의원들을 회유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의원들의 반응을 확인한 비아스는 웃으며 의장석을
돌아보았다. 아세리도 의장은 비아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비아스는
닐렀다.
[제 언니를 통해 의회 개회를 요청한 것은 바로 그런 사실들을 설명드
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실종에 대한 알려
지지 않은 사실들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아스는 의장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연단에 올랐다. 최초의
혼란이 사라진 지금 아세리도 의장은 이미 비아스를 저지하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병사들이 사이커를 든 채 평의회장을 장
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허락을 받고 연설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웃음거
리가 되는 것을 자초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의원들 또한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비아스가 니른 심상치 않은 니름들 또한 그
녀들을 제자리에 앉아있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아세리도 의장과 의원들
은 비늘을 눕히려 애쓰며 비아스의 니름에 주의를 기울였다.
모든 청중들의 주의가 집중되었지만 비아스는 쉽게 니를 수 없었다. 그
녀는 그것이 너무도 좋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만을 바라보며 그녀의
니름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그녀를 무한히 행복하게 했다. 생각 같아
서는 그 상황을 끝없이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비아스는 심장탑 근처에
서 기다리고 있을 쥬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석한 마음을 억누
르며 비아스는 빠르게 닐렀다.
비아스의 설명이 끝나자 의원들은, 그리고 병사들은 모두 합의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을 닫아버렸다. 아세리도 의장을 비롯하여 모든 의원들은
그 경악할 만한 내용이 던져준 충격에 그런 대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소메로 마케로우만은 비아스에게 계속 눈길을 보내며 니름을 걸려 애썼
다. 하지만 그녀의 니름이 뻔한 것이리라 생가한 비아스는 언니의 시선
을 무시했다. 의원들과 병사들이 모두 사태를 이해했다고 생각한 비아스
는 천천히 닐렀다.
[우리들이 그토록 찾아헤맸던 여신께서는 바로 우리 곁에 갇혀 계셨던
겁니다. 그 분이 우리들의 눈 어두움을 얼마나 탓하셨을까요. 따라서 우
리가 취할 행동은 자명합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저들 간특하고 어
리석은 수호자들이 스스로의 분수를 모르고 일으킨 끔찍한 사태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비아스는 열렬한 찬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이미 콘수마 발텐의 반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가주들과 그녀의 대리인
들은 군대가 북부로부터 거둬들이는 부의 감소를 생각하며 걱정스러운
낯빛을 지어보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비아스는 준비했던 미소를 보내주
었다.
[물론 지금 당장 여신을 풀어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의원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가공할 충격이 평의
회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충격의 진원지에서 비아스는 모의자의 미소
를 지어보였다.
[우리는 여신께서 수호자들에게 억류되어 있는 사태를 시정해야 합니
다. 하지만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당장 여신의 힘을 포기하는 것은 절
대로 현명한 결정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북부군이 이곳을 향해 진격해오
는 상황에서 우리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기까지
합니다.]
의원들 가운데서 콘수마 발텐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기다리고 있
던 일이지만 비아스는 마치 기대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콘수마를 바라
보았다.
[그렇다면, 마케로우. 당신이 니르고자 하는 바는 뭡니까?]
[심장탑을 점거해야 합니다.]
[여신을 풀어드리지 않을 거라면 심장탑을 왜 점거해야 합니까?]
[그곳에는 심장병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호자들의 심장병 또한 보관되
어 있지요. 우리는 수호자들에게 보다 나은 통찰력을 받아들일 수 있도
록 강제할 수단을 얻어야 합니다.]
의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아스는 빠르고 단
호하게 닐렀다.
[여러분들은 심장 파괴라는 니름을 들어보셨습니까?]
비아스의 두 번째 설명은 훨씬 빠르게 끝났다. 그리고 두 번째 설명이
야기한 혼란과 충격은 먼젓번과는 비교도 하기 힘든 것이었다. 의원들은
발자국 없는 여신이 수호자들에게 감금되었다는 사실보다 자신들의 목숨
이 수호자들에게 좌지우지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
은 것이다. 병사들 또한 심장을 적출한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의원들과
분노를 공유할 수 있었다. 비아스는 그들이 통제하기 힘들 정도의 혼란
을 일으키기 직전에 단호하게 닐렀다.
차츰 의원들은 비아스의 니름을 이해했다. 비아스의 계획은 단순했다.
비아스는, 다른 자들이 그렇게 오해하도록 유도했지만, 결코 여신을 풀
어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심장탑을 점거함으로써 심장 파괴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의
원들 모두에게 분명했다. 심장병을 손에 넣었음으로써 그들은 수호자들,
여신의 힘을 자유로이 사용하는 수호자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다. 마침내 그녀들의 얼굴에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콘수마 발텐은 완전
히 매혹된 표정을 지어보이며 닐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비아스 마케로우?]
[여러분들이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미 병사들을 준비해두었습
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동의와 허락을 얻고자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의원들이 당혹과 불쾌감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콘수마 발텐이 비아스
의 준비성과 겸손함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었고 그 찬사는 다른
자들의 동의를 요구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모든 의원들이 콘수마의 예를
본받았다.
다만 소메로 마케로우만은 불안한 표정으로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그녀
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덕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평을 받는 여
인이지만 소메로는 그곳에서 비아스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소메로는 비아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꿰뚫어보았다.
'그러니까, 비아스. 내 동생아.'
연단에 선 비아스는 실로 빛나고 있었다. 소메로는 한없이 어두운 심정
으로 생각했다.
'심장 파괴는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지? 네가 가지게 되는 것이
지? 그리고 저 여자들이 그것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렇게 찾아와
서 그들을 오해하도록 만드는 거지? 네가 자의대로 심장탑을 공격했다면
저 여인들이 가만있지 않았겠지. 하지만 이제 그녀들은 심장 파괴를 가
지게 되었다고, 수호자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고 착각하며
너에게 칭찬을 보내는구나. 정말 무섭구나.'
자매끼리 통하는 감각 같은 것이었을까. 비아스는 짧은 순간 소메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때 소메로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비아스는 그
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언니의 안색을 살필 여유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비아스는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찬사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소메로는 고개를 떨군 채 카린돌과 죽은 것
이 뻔한 어머니 두세나에 대해 생각했다. 참을 수 없는 서러움이 왈칵
일어났다. 그러나 소메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아스를 성토하지 못했다.
카린돌이었다면, 혹 화리트였다면 그렇게 행동했겠지만 소메로는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의 성격이었다. 소메로는 다만 짙은 슬픔 속에서
생각했다.
'예전부터 너는 칭찬을 너무 좋아했지.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야 없겠지
만, 네 경우엔 심했어. 너는 너를 칭찬하지 않거나 반대로 경멸하는 사
람은 죽여버릴 만큼 싫어했지. 지금 빛나고 있구나. 동생아. 순진하게
즐거워하고 있구나. 그것을 되도록 즐기길 바래. 나는 우리가, 마케로우
가 파국으로 수렴되고 있다는 느낌밖에 받을 수 없으니.'
공회당 쪽에서 달려오는 병사를 보자마자, 쥬어는 그것이 기다리던 신
호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쥬어는 병사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쇠
망치를 뽑아들었다. 그와 흥정을 하며 상대를 거의 녹여버렸다고 자신하
던 방물장수는 기겁하며 물건 값을 깎아주겠노라고 닐렀다. 물론 쥬어는
그 호의에 대해 아무런 감사 표시도 하지 않았다. 다른 손으로 소드락을
꺼내어들며 쥬어는 강력한 니름을 토했다.
사방의 골목길과 대로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심장탑을 향
해 돌진했다.
하텐그라쥬 시민들은 당혹할 겨를도 없었다. 병사들은 소드락을 복용하
고 돌격했다. 따라서 극히 짧은 시간이 지났을 때 심장탑은 병사들에 의
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쥬어는 특별히 선별해둔 돌격조와 함께 심장탑의
정문 앞에 도달했다. 쥬어는 신호를 보냈고 그 즉시 돌격조는 심장탑 안
으로 뛰어들었다.
심장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쥬어는 약간 당황했지만 주저없이 계단
을 뛰어올랐다. 길고 지긋지긋한 계단임을 알고 있기에 쥬어와 돌격조는
모두 소드락의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수호자들을 모두 체포해버릴 생각
이었다. 10층에 오를 때까지 쥬어는 자신이 여신을 구출해내는 영웅이라
는 가엾은 믿음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쥬어는 비아스의 당부를 무
시할 계획이었다. 비아스는 그녀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냉동장치를 함부
로 건드리지 말라고 그에게 닐렀다.
'당신이 영웅이 되고 싶은 거지? 흥. 그럴 거라면 왜 평의회 따위에 간
거냐? 여자들끼리 다 해먹겠다는 수작이겠지만, 비아스. 그렇게는 안될
걸.'
쥬어는 가슴 가득히 치밀어오르는 통쾌함에 비늘을 부딪쳤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쥬어는 탑이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좀 늦게 깨달았다. 12
층에 도달했을 때 쥬어는 마침내 그 진동을 깨달았다. 돌격조의 다른 나
가가 그를 붙잡아 세웠기 때문이다.
[이상합니다. 탑이 진동하고 있습니다.]
소드락의 효과 지속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지만 쥬어는 어쩔 수 없이 걸
음을 멈췄다. 벽에 손을 짚어본 쥬어는 그 니름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장탑은 기묘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쥬어는 청력에 집중
해보았다.
쥬어의 온몸에서 비늘이 솟구쳤다.
[내려가! 내려가!]
쥬어의 니름이 끝나자마자 다른 돌격조원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 심장
탑 저 높은 곳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아래로 치달아오고 있었다. 몸을
돌리기 직전,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의 정체를 목격했다.
실로 교묘한 솜씨였다. 심장병이 보관된 벽감을 강타할 정도로 높지는
않았지만 계단을 걸어올라오는 나가들을 휩쓸어버리기에는 충분한 크기
의 파도가 계단을 타고 쇄도해오고 있었다. 쥬어는 이미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쥬어는 심장탑의 저 까마
득한 꼭대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밖에
서 들려오는 아스라한 니름이 그의 추측을 뒷받침했다.
200 미터라는 무시무시한 높이에 고독하게 서서, 수호자 세리스마는 사
방팔방의 습기를 다 끌어모으고 있었다. 구름이 그에게 호응하여 움직였
고 하텐그라쥬의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었다. 살아 꿈틀거리며 몰려드는
구름의 모습에 하텐그라쥬의 시민들은 넋을 잃거나 공포의 니름을 토했
다.
세리스마는 그 구름에서 비를 뽑아내어 심장탑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 비는 그대로 200 미터의 높이를 타고 흘러내려 계단의 나가를 쓸어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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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2. '파국으로의 수렴' 편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3-1. 관련자료:없음 [56639]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7-26 00:35 조회:7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