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45화 (45/62)

눈물을 마시는 새.

12. 파국으로의 수렴 - 3

보트린의 정신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비아스가  이야기하는 15년

전이 아니었다. 보트린은 10년 전의 기억에 도달했다.

그 날, 샤나가가 달 뒤로 숨는 날, 두려움과  기대, 흥분 등 스물두 살

이 된 나가에게 볼 수 있는 보편적인 - 그리고 도깨비 같은 - 감정을 주

위에 잔뜩 퍼뜨리며 심장탑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젊은 나가들 가운데서,

카린돌의 모습은 까불거리는 대나무숲 가운데  한 그루 물푸레나무 같았

다.

물푸레나무는 그 가지를 물에 담그면 물이 푸르게 변하기에 물푸레나무

라 한다. 불신자들에게 푸르게 보이는 그  물빛은 나가에겐 물보다 짙은

물빛이라는 묘한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빛깔이다. 그 고요함,

침착함, 무관심함으로 오인될 법한 차가움.  보트린은 그 첫인상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보트린은 이제 그  날의 카린돌이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심장 파괴에 대해 알면서도 찾아왔다고?'

죽으러 온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녀가  어떻게 주위의 얼간이들처럼 불

사의 생명을 얻는다는 착각에 흥분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 보트린은 젊은이들의 순서를 정하고 그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행운을  십분 즐길 수  있었다. 카린돌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보트린이 그녀를 얼마나 훔쳐보았는지는 그조차도 제대

로 알지 못했다. 두려움 속에서 보트린은  그것을 정념이라고 불러야 할

지 고민했다. 그리고 보트린은 자신의  불운을 슬퍼했다. 보트린은 여신

의 신랑이었다. 살아있는 여인의 침대에 그의 자리는 없는 것이다. 보트

린의 곁에는 심장 적출을 기다리고 있는  무수한 청년들이 있었다. 그리

고 그 중에는 그가 들 수 없는 침대에  들어갈 청년도 틀림없이 있을 것

이다. 수많은 청년을 보며,  보트린은 폭력적인 충동을  느꼈다. 그들을

노려보는 보트린의 시선은 신부 강탈자를 노려보는 신랑의 눈빛이었다.

카린돌은 그의 레졸디였다. 분명히.

그가 혼란에서 헤어나온 것은  카린돌이 적출을 받을  차례가 다가왔을

때였다. 카린돌이 그의 곁을 떠날 시점이  다가옴에 따라 보트린은 초조

함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보트린은 이제 그의 여신인  처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면 보트린은 카린돌에

게 다가가 니름을 걸고 말았을 것이다. 문득 보트린은 그렇게 해서 안될

게 뭐냐는 광포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적출을 기다리는 처녀에게 수호

자가 건넬 만한 니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의 머리가 차가워지고, 그 때문에 놀랄 만한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바

로 그 때였다.

보트린은 충격 속에서 카린돌을 바라보았다.  그가 착각한 것이 아니었

다. 카린돌은 '정말로' 그의 신부 레졸디였다.

카린돌에게서 느껴지는 느낌은 세페린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과 똑같

았다. 그리고 보트린은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신체를 감지하

는 그의 감각이 자극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보트린은 자신의 감각을 믿

을 수 없었다. 카린돌은 신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체는 륜 페이여야

했다. 보트린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느낌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  카린돌은 사라진 후였다. 적출을  받기 위해

떠난 것이다. 보트린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남아있는 젊은이들을 통

제했다. 어떤 결론도 조심스러웠기에 보트린은  카린돌이 적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한번 더 확인하리라  결심했다. 그런 확인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보트린은 가지고 있지 않은 재능까지 끌어모았다. 그는 계략

을 꾸몄다. 사실 계략이라 말하기도  뭣한 유치한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보트린은 특수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을  꺼내왔다. 책을 꼭 쥔 보트린

은 통로에 숨어있다가 적출을 마치고 약간  피로한 표정을 한 채 걸어나

오는 카린돌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혹 마케로우님 아니십니까?]

카린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트린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요.]

아마도 정념이 부린 조화겠지만 보트린에게 그 니름은 정신을 후벼파는

회오리처럼 느껴졌다. '제발, 졸도하지 않게  해주세요!' 보트린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성급하게 쥐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카린돌은 물끄러미

책을 바라보다가 다시 보트린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닐렀다.

[책.]

[네?]

[그건 책이라고요. 다음에는 뭘 꺼내실  거죠? 이름을 기억하는지는 물

어보셨으니, 오늘이 몇 일인지 물으실 건가요? 저는 심장을 뽑았지 두뇌

를 뽑지는 않았습니다만.]

카린돌의 니름에 섞여있던 약간의 짜증스러움이  보트린에겐 격노에 찬

질책처럼 들렸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보트린은 가까스로 준비했

던 니름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저, 수련자 화리트에게 이것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수

련자에게 큰 도움이 될  책입니다. 저는 그가 이것을  읽고 내용 요약을

해오길 바랍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여담이지만 화리트는 상당한 학식을 쌓은 고위 수호자들이나 읽을 불신

자 가이너 카쉬냅의 저 악몽  같은 책을 받아들고 죽을  고생을 했다 한

다. 보트린은 급한 마음에 들고 나온  책이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다. 카린돌은 그 책을 받아든 다음 예의바르게 닐렀다.

[동생에게 베풀어주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성함이?]

[수호자 보트린입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카린돌은 떠났다. 그리고 보트린은 확신했다. 그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

다. 그 사실은 그에게 복잡한 감정을 선사했다.

결국 보트린은 그 일을 세리스마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조용히, 끈질기

게 조사했고 결국 5년 전의 요스비 살해가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낳았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획의 변경은 불가피했다.

보트린의 정신은 다시 이동했다. 이번에는 4년 전의 과거였다. 그는 마

케로우 저택에 있었고 카린돌을 납치하기 위한  준비를 갖춘 채 그 사실

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정리하려 애쓰고  있었다. 화리트 마케로우가 죽

었을 때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  뻔했지만, 엉뚱하게도 륜 페이가

화리트 마케로우의 임무를 대신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고무시키

는 행운이었고 보트린 또한  다른 수호자들과 마찬가지로  즐거워 했다.

노기 하수언이 설계하고 페니나 시에도가 제작한 냉동 장치 또한 완벽하

게 작동했다. 이제 냉동장치에  집어넣을 여자만 납치하면  되는 상태였

고, 그래서 보트린은 다른 세 명의 수호자들과 함께 비아스의 방으로 간

그로스가 보내올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획의 가장 중요한 일원이었지만 음모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보트린이

카린돌 납치에 나선 것은 그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보트린은 동료

들이 그의 신부 레졸디를 거칠게 다루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보트

린은 떼를 쓰다시피 하여 다른 세  명의 수호자들과 함께 그로스를 따라

왔다.

약속된 신호가 왔다. 고요한 마케로우  저택 어디선가에서 목소리가 들

려왔다. 보트린은 그 목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잠자리를

뛰쳐나왔다. 그의 신부 레졸디를 정중하게 모실 수 있도록, 보트린은 다

른 수호자들보다 먼저 레졸디에게 도달하고  싶었다. 바람대로 보트린은

가장 먼저 비아스의 방 앞에 도달했다. 하지만 비아스의 방 앞에 도달했

을 때 보트린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내가 얼마나 필사적인지 알고 싶어?"

뒤늦게 도착한 다른 수호자들도  뜻하지 않은 목소리에  놀라 보트린을

바라보았다. 보트린은 조심스럽게 방 안을 훔쳐보았다. 하마터면 보트린

은 들고 있던 철퇴를 놓칠 뻔했다. 카린돌이  등을 보인 모습으로 방 안

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그로스가 난처한 표정을 한 채 서있었

다.

"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기름과 불과 칼을  들고 오신 지금의 모습

만 보아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로스의 말은 신호였다. 수호자 하나가  사이커를 움켜쥐며 앞으로 나

섰다. 보트린은 무의식 중에 그를  밀쳐냈다. 수호자는 어리둥절하여 보

트린을 바라보았다. 보트린은 황급히 자신의 철퇴를 가리켰다. 동료들은

보트린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생각했다. 카린돌이 말했다.

"그게 뭔데?"

사이커보다는 철퇴가 기절시키기 좋은 무기라고  생각한 동료들은 보트

린에게 길을 내주었다. 물론  보트린의 의도는 동료들의  추측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다른 자들이 내 신부를 공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보

트린은 철퇴를 움켜쥐었다. 그로스 또한 보트린이  나서는 것을 보며 말

했다.

"예를 들자면, 지금 당신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는 철퇴 같은 것."

보트린은 기겁했다. 그는 그로스가 좀 더  시간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카린돌이 뒤를 돌아볼 거라 생각한 보트린은 뭔가 다른 생각을 해 볼 겨

를도 없이 철퇴를 휘둘렀다. 동작을 완료한  후에야 보트린은 자신이 저

지르는 일에 기겁했다. '안돼! 내가 무슨  짓을?' 하지만 철구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카린돌의 머리에 충돌했고 카린돌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보

트린은 넋이 나간 채 카린돌을 내려다보았다.

"제기랄, 좀 더 빨리 올 수 없었나? 시간 끄느라고 미치는 줄 알았어."

그로스의 투덜거림이 있었지만 보트린은 듣지 못했다. 보트린은 철퇴를

통해 전달된 느낌의 여운에 비늘을 부딪쳤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경악했

다. 다른 수호자들 또한 눈 앞에서 여자가 그렇게 쓰러지는 모습에 당황

했기에 보트린의 경악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때 그로스가 다가와 보트

린의 어깨를 툭 쳤다. 보트린은  움찔하며 그로스를 쳐다보았다. 경악에

사로잡힌 신랑은 사라졌고 그 자리엔 비겁한 보트린이 남았다.

'나는 네 편이야. 그로스. 나는 몇 번이라도 더 이렇게 할 수 있어. 나

를 의심하지마…'

"잘했어. 고마워, 보트린."

보트린은 격한 자기혐오에 빠졌다. 하지만  그의 입매는 미소를 지었고

보트린은 자신의 귀에도 기이하게 들리는 말을 꺼냈다.

"이 여자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따라오

긴 했지만, 공격해야 된다고  결정한 이후로 이 여자가  하는 말은 거의

듣지 않았어."

신부를 공격한 신랑은 슬퍼할 수  없었다. 패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보트린은 현재로 돌아왔다.

수호자 보트린은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비아스는 조금 전까지의 살기등

등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트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보트린은 자신의 두 볼이 축축하다는 것을 느꼈다.

"울기는 왜 우는 거냐?"

"접니다."

"뭐야?"

"접니다. 당신이 말한 그 예민한 나가는 접니다."

비아스는 환호를 지르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보트린의 말은 아직 끝

난 것이 아니었다.

"세페린, 요스비, 카린돌. 그들을 알아본 것은 접니다."

비아스는 세페린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질문

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요스비를 죽여서라도  륜 페이를 신체로 만들려고  한 거

지? 그냥 요스비를 곧장 냉동시키면 되는 것 아닌가? 왜 15년 전에 요스

비를 냉동시키는 대신 죽인 거지?"

"세페린 때문입니다. 갈로텍이 그것을 원했습니다."

다시 세페린인가. 결국 비아스는 그게 누구냐고 질문했다. 보트린은 흐

느끼며 말했다.

"갈로텍의 누이입니다."

태양이 키보렌에 쏟아붓는 충만한 열기는 대나무 군단병들의 몸에도 넘

치도록 흘러들어갔다. 지난 한 달 가까이  계속된 지독한 질주 동안에도

그들은 비슷한 온도 속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키보렌의

열기 속에 있었고 그것은 어떤 수호장군도 줄 수 없는 고향의 열기였다.

군단병들은 한 달 동안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을 느꼈다. 특히 북부군

의 포로로 붙잡혀 있던 대수호자 키베인과  다른 네 명의 수호자들이 느

끼는 감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시구리아트 관문 요새의  낙성 당시에는

너무나 다급하고 충격적인 사건의 연속이었기에 자유를 되찾았다는 느낌

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직후 이어진 숨가쁜 남진은 그들

을 두렵게 만들었다. 정신없는 행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아직 누군

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키보렌의 열기는 다른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자유의 감각을 일깨

워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침내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즐거

워하는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즐거워하며 농담을 나누었고 한

가지 농담이 끝날 때마다 반드시 폭발적인 정신적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니름을 듣지 못하는 바르사 돌 교위와 데오늬 달비 부위는 나가

들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걷

고 있던 키베인은 나가들이 즐거워하고 있으니 그렇게 주눅들어 있을 필

요는 없다고 세심하게 설명해주었다. 바르사는  주눅들었다는 말에 왈칵

화를 내었고 데오늬 달비는 나가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사실인지 알아보

려 애썼다. 키베인은 머쓱하게 웃었다.

시구리아트 관문 요새의 전투 당시 바르사  돌 교위는 도깨비와 어르신

들을 모두 즈믄누리로 보냈다. 전쟁터에 도깨비를  두어서 좋을 것이 없

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르사는 그 도깨비들  편에 포로들을 보내려고 했

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바르사는 그 결정을 번복했다. 포로들이 인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바르사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

더라면 지금쯤 키베인과 다른 네  명의 수호장군들은 도깨비들의 농담을

들어가며 즈믄누리에서 빠져나오려 애쓰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곳이 그

렇게까지 비늘 서는 곳은 아니다. 도무지 믿기 힘든 소문에 따르면 도깨

비들은 즈믄누리 안에 포로들을 풀어놓은  다음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내

버려둔다고 한다. 절대로 빠져나가는 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

만 도깨비들이 아무리 친절하다 한들  키베인은 즈믄누리와 키보렌을 바

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번복 때문에,  또한 북부군이 그들에게

보여준 경의와 존중 때문에 키베인은 입장이  바뀌자 그 또한 경의와 존

중으로 그들을 대하기로 결심했다. 쇠투구에  도깨비불을 담아서 가져온

데오늬의 행동을 잊을 수 없었던 다른 네 수호장군들도 대수호자의 의지

에 동의했다. 그래서 그들은 대나무 군단이 유료도로당의 당원들을 학살

하고 북부군마저 학살하려 왔을 때 목숨을  걸고 그들을 지켜주었다. 대

나무 군단 또한 다른 나가의 군단과 마찬가지로 포로라는 개념을 그다지

알지 못했지만 그들 중에는 - 갈로텍까지 포함하여 - 대수호자의 의지를

거스르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키베인은 대수호자라고 불리게  된 이후

처음으로 그 지위에 고마워했다.

정신 없는 한달 동안의  질주 이후 대나무 군단은  더 이상 포로들에게

특별히 적개심을 품지 않았다. 언제나 대수호자와 다른 네 수호장군들이

포로들 곁에 있었기 때문에 적개심을 표현할래야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

다. 게다가 그들은  데오늬 달비에게 감탄했다.  키베인조차도 당황하며

질문했다.

"달비 부위. 도대체 당신은 언제 지칩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대수호자님.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대수

호자님?"

"글쎄요. 물론 당신에겐 무기도 없고 짐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모두가

지쳐있는 지금도 당신은 조금도 지쳐보이지 않는군요. 당신은 마치 몸에

서 소드락이 샘솟는 나가 같습니다."

데오늬 곁에서 걷고 있던 바르사는 키베인의 말에 어깨를 폈다. 씩씩하

게 걸으려 애쓰는 교위의 모습을 보며  키베인은 싱긋 웃었다. 데오늬는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소드락이 샘솟는 나가도 있습니까? 대수호자님?"

"예? 아, 그건 그냥 비유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대수호자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대수호자님은 분명히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몸에서 소드락이 샘솟는

나가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키베인은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 논법인지 질문하지 않

았다. 질문했다가는 더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베인은 그냥 웃으며 말했다.

"저도 이 전쟁 이전에는 대수호자라는 니름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대

수호자라는 지위는 최근에 생긴 겁니다. 보통  주의 깊은 사람들은 최신

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요. 저 같이 주의력 없는 사람이나 그런 지위에

오르는 겁니다."

"대수호자는 무엇입니까, 대수호자님?"

"굳이 말하자면 모든 수호자들의 대표입니다."

가볍게 말하던 키베인은 바르사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바르사는 혀를 차며 말했다.

"당신 정말 중요한 나가였군?"

"그 때는 정말 놀랐습니다. 돌 교위."

데오늬는 반색하며 바르사에게 뭔가를 잘 맞춘 경험이 없었냐고 질문했

다. 바르사는 그런 질문들에  대충 대답해서 데오늬로  하여금 경애하는

교위가 사실은 마법사였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준 다음  다시 키베인에게

말했다.

"그럼, 왕이오? 나가의 왕?"

"글쎄요. 저는 아닙니다.  제 다음 대수호자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만."

"다음 대수호자?"

"예. 아마 빨리 정해질 것 같습니다. 신명이 묶인 수호자가 더 이상 대

수호자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키베인은 쾌활하게 말했다. 바르사는 조금  생각한 후에야 키베인이 무

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래서  키베인의 쾌활함이 이상하게 느껴

졌다. 그러나 바르사는 키베인의 입장에 대해 질문할 틈이 없었다. 키베

인은 어느새 앞쪽으로 한참 달려가버린 데오늬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달비 부위, 달비 부위! 제발 천천히 걸어요!"

대나무 군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갈로텍 대장군 또한 키보렌

에 돌아온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의 경우에는 더 이상 기온을 조절할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군단의 지휘를 보라크  군단장에게 맡긴

채 갈로텍은 말 위에서 대금을 불었다.

대나무 군단은 자신들의 군단명과 같은 나무로  만들어진 그 악기에 어

떤 행운을 부르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나가들이라면

의아해하거나 심지어 불쾌해할 그 모습에도  괘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연주를  듣기까지 하는 나가는 없었

다. 그래서 갈로텍의 연주를  듣는 청중은 항상 그랬듯이  한 명 뿐이었

다.

군령의 지식을 통해 갈로텍은 지음(知音)이라는 말을 알고 있었지만 나

가들에게 썩 어울리는 단어라 하긴 어려웠기에  그 상황에 그 단어를 적

용하지는 않았다. 사실, 갈로텍은 자신의  연주를 들어주는 자를 친구라

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결국  갈로텍은 대금을 입에서  뗐다. 그의 입이

다른 자의 의도를 담아 움직였다.

"계속해, 갈로텍."

"몇 시간 동안 했습니다. 이제 그만하렵니다."

"이제 키보렌에 들어왔으니 기온 조절할 필요도 없잖아. 연주해."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연주하면서 말해."

갈로텍은 기가 막혔다.

"당신은 나가가 아니잖습니까! 상대가 나가라면 연주하면서 니를 수 있

지만, 주퀘도 당신에게 말하려면 연주는 중단해야 합니다."

그의 입이 한참 후에 움직였다.

"나가가 아니다. 맞아. 나는 나가가 아니야."

갈로텍은 비늘을 거세게 부딪쳤다. 시구리아트  산맥을 떠나온 이후 주

퀘도는 갑자기 바보가 된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무엇에도 무관심했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포기해버린 듯했다. 일체의 사고 활동을 거

부하는 주퀘도가 원하는 것은 오직 대금  연주를 듣는 것뿐이었다. 그러

나 갈로텍은 그나마도 귀기울여 듣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갈로텍

은 애써 화를 참으며 말했다.

"주퀘도. 뱀단지에 따르면 현재 북부군은 악타그라쥬 앞에서 아군의 여

섯 개 군단과 대치  중입니다. 선인장 군단의  세키리 군단장 아시지요?

그가 여섯 개 군단의 수호장군 전원이 시우쇠를 봉쇄하고 군단들이 매일

번갈아가며 북부군을 공격한다는  계책을 세워 그들의  전진을 묶어놓고

있습니다."

주퀘도는 한숨처럼 말했다.

"뇌룡공은?"

"뇌룡공은 레콘들을 위해 비를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온을 나가에게

곤란한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있고요."

"그런가. 잘하고 있군.  이제 네가  도착해서 그들을  밀어버리면 되겠

군."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대호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가."

"그런가가 아닙니다! 세키리 군단장은 대호왕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에 꽤 신경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기만 전술이 아닐까요? 우리

가 알지 못하는 군세가  어딘가에 있어서 대호왕이  그 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만약 그것이 기만  전술이라면 대호왕은 북부군이 우

리의 주의를 끌어주는 틈을 타서 그  미지의 병력과 함께 하텐그라쥬 근

방에 도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아스에게 뭔가 지시를

보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군."

갈로텍은 결국 주퀘도의 무기력한 태도를 참지 못했다.

"주퀘도!"

"응? 왜?"

"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녹슬게 하고  있는 겁니까. 당신이 그렇

게 원하던 것처럼 유료도로당을 파괴했잖습니까!  장례식도 치뤄주지 못

하고 나무들을 학살한 것 때문에  병사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

니다. 대수호자를 구출한다는 명분이  있어서 겨우 불만을  무마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은 누구도 정

복할 수 없었던, 심지어 당신 자신도 정복할 수 없었던 것을 정복했습니

다! 그런데 왜 그런 얼간이 같은 꼴을 하고 있는 겁니까?"

"내가 그랬지?"

"당신은 시구리아트 관문 요새를 무너뜨렸습니다."

"그게 나인가?"

"무슨 말입니까?"

"그게 난가? 아니면 너인가? 그라쉐인가?  화리트인가? 노기인가? 모르

겠어. 그걸 내가 한 거야?"

"당신입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것을 원한 것은 당신입니다."

주퀘도는 침묵했다. 갈로텍은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 때 주퀘

도가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예?"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로 돌아가자."

갈로텍은 기가 막혀 고함을 빽 질렀다.

"주퀘도! 돌아가서 뭘 어쩌자는 겁니까!"

"사과해야 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거

였어."

"이런 어이가 없는 소릴! 도대체  누구에게 사과한다는 겁니까, 당원들

은 다 죽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남아있을 거야."

"그런 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 생존자는 이미 그곳

을 떠났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 그 놈들은 떠나지 않아. 내 사과를 받아야 하니까. 떠나

지 않을 거야. 분명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갈로텍. 돌아가자."

갈로텍은 넌더리를 내며 입의 권리를  주퀘도에게서 박탈했다. 그 결과

는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못되었다. 주퀘도는  격분하여 그의 몸 여기저

기를 움직였다. 그 때문에 갈로텍은 갑자기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오른

손이라든가 알지 못하는 새 호흡을  중단해버려 숨막히게 만드는 호흡기

등에 의해 난처한 지경을 겪에 되었다.  보라크 군단장과 대나무 군단의

병사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경애하는 대장군을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비

늘이 뽑힐 만큼 긴장한 채 온몸을 통제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다음에

갈로텍은 겨우 노력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주퀘도를 잠잠하게 만들고나서, 갈로텍은 난폭해지는 기분을 가누기 위

해 한동안 애써야 했다. 보라크 군단장과 병사들이 궁금함을 견딜 수 없

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갈로텍은 험악한  표정으로 그 시선의 방향들을

바꿔놓았다.

갈로텍은 주퀘도를 포기해야 되는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이제 나가

들은 주퀘도가 없이도 군대를  만들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대부분의

기술을 익혔다. 실상 주퀘도가 가장 큰 도움을  준 부분은 바로 그런 부

분들이었다. 전략가로서의 주퀘도를 폄하할 수는 없지만 그 즈음 갈로텍

은 자신이 언제나 주퀘도를 따라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주퀘도를 어딘가로 파견하려면  갈로텍 또한 그곳으로  가야 했

다. 물론 거꾸로 말한다면 주퀘도는 언제라도 그를 보조해줄 수 있는 참

모라 할 수 있지만, 갈로텍은 주퀘도보다 좀 능력이 부족한 자라도 그와

별개로 움직일  수 있는 수하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선인장 군단의 세키리  같은 경우가 그렇다.  세키리에겐 갈로텍도

주퀘도도 없었지만 그 자신의 창의력으로 륜 페이와 시우쇠가 함께 있는

북부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 부하가 있다면 갈로텍은 그들에게 전쟁

의 많은 부분들을 맡겨 놓고 자신의 일을 처리할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이다. 갈로텍은 짙은 아쉬움 속에서 자신이 아직 착수조차 하지 못한 일

에 대해 생각했다.

전쟁이 4년째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갈로텍은 아직도 세페린의 목을 자

른 나가살육자의 희미한 단서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비아스는 비웃음 섞인 말투로 말했다.

"갈로텍의 누이라면, 나가살육자에게 목이 잘렸다는? 그런데 그 여자가

왜?"

"세페린은 신체였습니다."

"뭐? 요스비가 아니고?"

"세피린은 요스비의 선대 신체였습니다. 제가 파악하고 있는 신체는 모

두 세 명이었습니다. 처음이 갈로텍의 누이  세페린, 그리고 요스비, 그

리고 카린돌 마케로우입니다. 마케로우. 당신은  우리의 계획이 15년 전

에 시작되었을 거라고 말했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거냐?"

보트린은 설명했다.

보트린이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심장탑으로 갈로텍을

만나러온 세페린을 보았을 때였다. 당시 정찰대에 들어가게 된 세페린은

하텐그라쥬를 떠나기 전 인사를 나누기  위해 심장탑으로 갈로텍을 찾아

왔다. 심장은 적출했지만 아직  수호자가 되지 못했던  수련자 보트린은

그녀를 갈로텍에게 안내해주게 되었다.  그 때 보트린은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것이 사악한 정념 같은  것이 아닌가 하고 겁을 집

어먹었지만 그것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세페린이 하텐그

라쥬를 떠난 뒤, 며칠 동안 고민하던 보트린은 결국 그의 스승이었던 세

리스마를 찾았다. 세리스마는 보트린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고, 그의

경험과 인상을 세심하게 표현하도록  했다. 그 결과로  보트린은 자신이

신체를 찾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아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계획이 시작되었나?"

"그렇습니다."

"갈로텍은 반대하지 않았나? 자기 누이를 냉동시켜야 되는 거잖아."

갈로텍은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성적으로  나섰다. 수호자들은 갈

로텍이 누이에 대해 비뚤어진 소유욕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갈

로텍은 세페린의 영을 자신에게 합류시키기를 원했다.

"그래서 요스비가 북쪽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스바치와 카루를 기억

하십니까?"

보트린의 뒤쪽에 있던 쥬어는 수호자의  말에 흠칫했다. 보트린의 말에

집중하고 있던 비아스는 그런 쥬어의 반응을 깨닫지 못했다.

"요스비는, 말하자면 스바치와 카루의 선배 쯤 되는 자입니다. 그는 쾌

활한 모험가였고 놀라운 정신억압자였습니다. 세리스마는  그를 속여 뱀

단지를 하인샤 대사원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게 했습니다. 요스비는 그것

이 한계선으로 나뉘어진 두  집단 사이에 대화의  장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었지요."

"심장탑의 늙은 뱀이 속인 자가 도대체 몇 명인지 짐작도 안 되는군."

"수도 없습니다. 인간들의 하인샤 대사원 또한 세리스마에게 속았지요.

이야기가 앞서 가는군요. 그 이야기는  좀 천천히 하겠습니다. 요스비는

뱀단지를 가지고 용감하게 한계선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요스비는 세페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가살육자에게

공격당해 죽어가던 세페린을 발견한 것이지요."

"나가살육자? 그 전설 말이야?"

보트린은 갑자기 비늘을 세웠다.

"그것은 전설이 아닙니다.  나가살육자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당시 그

나가살육자는 추위에 느려진 정찰대를 모조리 살해하고 마지막으로 세페

린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요스비가  도착하여 본 것은  그런 광경이었지

요. 요스비를 본 나가살육자는 세페린의  목을 가지고 도망쳤습니다. 요

스비는 잠시 고민하다가 뱀단지를 꺼내었지요.  그리고 하텐그라쥬로 연

락했습니다. 요스비는 세페린이 갈로텍의 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까요."

"그래서 갈로텍은 목이 잘린 누이의 시체를 하텐그라쥬로 가져올 수 있

었던 것이군."

"그렇습니다. 갈로텍에게 연락한 다음 요스비는  다시 나가살육자를 추

적했습니다. 한편 우리들은 큰 낭패에  빠졌습니다. 신체가 죽었으니 여

신이 누구에게 전령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지요. 우리는 요스비를 돌아

오게 할까 했습니다. 하지만  뱀단지를 하인샤 대사원에  놓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  때문에 요스비를 계속  가게 놔두었습니다.

요스비는 그  일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텐그라쥬로 돌아왔을

때, 저는 요스비가 신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페린이 죽었을 때 여신은 그 곁을 지나던 요스비에게 전령하신 것이

로군."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그대로 요스비를 냉동시키지 않았지?"

"갈로텍이 의심을 제기했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나가살육자는 정찰대를

모두 죽였습니다. 그런데 왜 요스비는  죽이지 않았을까요? 물론 요스비

는 상당한 수준의 정신억압자이고 칼솜씨도  만만찮았습니다. 하지만 정

찰대를 전멸시킨 나가살육자가 왜 요스비  한 명에게 놀라 도망쳐야겠습

니까?"

비아스는 그 의심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군. 어떻게 된 거지?"

"요스비와 나가살육자는 서로 아는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친구

였죠."

"뭐라고?"

비아스는 놀란 나머지 입을 벌렸다. 보트린은 침울하게 설명했다.

"요스비는 뱀단지를 가지고 하텐그라쥬를 떠나기  몇 년 전에 나가살육

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건 아마도 세페린이 죽기 3년 전 쯤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3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였고, 그 자리에서 나가살

육자는 친구의 동족을  살해하고 있었습니다.  나가살육자는 요스비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것에 당황하여 도망쳐버린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

시 만났고, 나가살육자는 요스비가 하인샤  대사원에 도달하도록 도와주

었습니다. 그런 도움이 있었기에 요스비는 임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거

지요."

"나가살육자는 도대체 뭐야, 두억시니야?"

"아니오. 인간인 것 같습니다."

"인간?"

"그렇습니다."

"나가와 인간이 친구라. 그 요스비라는 녀석은  확실히 미친 놈인가 보

군."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계속 말할까요?"

"계속해."

"갈로텍은 그런 요스비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여신을 감금하기 위해

선 군령자가 꼭 필요했고, 우리에게 군령자는 갈로텍뿐이었습니다. 그런

데 갈로텍은 절대로 요스비를 자기  속에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주장했습

니다. 갈로텍은 세페린을 죽인 나가살육자와 그것을 방조한 요스비를 자

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스비를

죽여 륜 페이에게 여신을 전령시킨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말씀하신대

로 륜 페이는 수련자였기에 우리가 다루기  훨씬 쉽다고 생각했지요. 세

페린에게서 요스비에게로 전령된  전례를 보아 가까이에  있는 나가에게

전령될 거라는 확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스비를 죽였습니다.

갈로텍이 직접 요스비의 심장병을 파괴했습니다."

보트린은 피로한 표정으로 긴 설명을 끝마쳤다.

"그 다음은, 당신이 말한대로입니다. 이제  갈로텍에겐 죽여야 할 원수

가 한 명 남았지요. 그는 반드시  나가살육자를 없앨 겁니다. 전쟁 때문

에 아직 그 일에 착수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원한을 갚을 겁

니다."

밤이 깊었지만 하텐그라쥬의  밤은 나가들을 얼어붙게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비아스 마케로우는 사고 활동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육체적 어려

움이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짧은 시간  동안 과도한 정보를 받아들이

게 되었기에 비아스에게는 그것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비아

스는 눈앞에 여신의 힘을 자유로이 다루는 위험한 적을 앉혀둔 상황이었

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 정보들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비아스의 당면  과제에는 큰 도움이 되

지 않는 것들이었다. 비아스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신체를 감지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미  드러났다. 그녀의 앞에 묶여

있는 보트린이 바로 그 자였다. 하지만  비아스는 4년 전 카린돌의 비망

록을 수중에 넣었을 때의 경험을 잊지 않았다. 당시 비아스는 그 비망록

이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비망록이

고발하는 사건, 즉 카린돌 마케로우가 륜  페이와 함께 요스비의 기묘한

죽음을 목격했다는 정보는 결국 그녀에게  보트린에게 이르는 길을 찾아

내게 해주었다. 4년 동안의 맹렬한 추리의  결과로 얻어낸 그 정보는 분

명히 그녀에게 유익한 기회를 부여했다. 그래서 비아스는 보트린에게 들

었던 사건들을 시간순서대로,  그리고 인과관계대로 정리해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꽤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비아스의 침묵이 길어지자 쥬어

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나도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당신들은  정말 지독하

군. 그 긴 시간을 통해 당신들은 사람을  마구 죽이고 여신을 여기서 저

기로 옮긴 끝에 끝내 그 분을 가두었다는 말이군? 당신들의 무도함에 놀

라야 할지 지독한 인내심에 놀라야 할지 결정하기 어렵군."

보트린은 가시 돋친 말투로 말했다.

"쥬어. 당신 말이 틀렸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  말을 내 앞에 있는

이 씩씩한 여자에게도 나눠주지 않겠나? 우리에겐 그래도 희생을 감수할

만한 목적이, 물론 그 희생이 정말 감수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

이 많겠지만, 어쨌든 목적이라는 것이 있었어.  하지만 내 앞의 이 여자

는 어떤 줄 아나? 자기에게 아이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해서 남동생을 죽

이고 그 일에 방해가 된다 해서 수호자를  죽인 여자야. 그 정도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이력이잖은가."

쥬어는 놀란 표정으로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비아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보트린을 노려보았다. 보트린은  주눅이 들었지만, 다시 용기를

끌어모아 말했다.

"쥬어 당신에게도 아마 목적이 있겠지? 마케로우가 당신에게 무엇을 약

속했지? 뭔가 대단한 것을  약속했으니 수호자를 공격하는  것에 동의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정말 지불될  거라고 생각하나? 나는 회의적이

야. 저 여자에게 말려든 것을 후회하는 날이 올 거야. 쥬어."

비아스는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말했다.

"쥬어. 쳐."

쥬어는 쇠망치를 들어올렸다. 보트린이 고함질렀다.

"그러지마, 쥬어! 뭘 몰랐으니까  실수한 거야. 하지만  끝까지 실수할

필요는 없어! 나를 풀어주고 함께 저 여자를 상대하자구. 하텐그라쥬 방

어를 맡아야 할 저 여자가 수호자를  감금하고 고문하는 이유가 뭐겠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건 무서운 이유야. 내 말 들어, 쥬어!"

쥬어는 움찔했다. 비아스는 냉혹한 표정으로 외쳤다.

"쥬어!"

쥬어는 눈을 질끈 감으며 보트린의  머리를 내려쳤다. 보트린은 의자와

함께 쓰러져 기절했다.

눈을 뜬 쥬어는 쇠망치에 묻은 피와 비늘을  보며 비늘을 세웠다. 그리

고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비아스를 쳐다보았다. 비아스는 고개

를 조금 가로저었다.

"좀 늦군, 쥬어."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제 어쩌실 겁니까? 아까도 닐러드렸다시피 보

트린이 돌아가지 않으면 심장탑에서는 의아하게 생각할 텐데요."

"보트린은 살아있어서는 안돼."

"예?"

"이 녀석은 살아있어서는 안돼. 우리는 수호자들에게서 힘을 도로 뺏을

거야. 여신을 풀어주는 거지."

거기까지는 카루와 스바치의 요구와 똑같았다. 하지만 카루와 스바치는

대가문들과 함께 심장탑의 수호자들을 압박하여  그들 스스로 여신을 풀

어주게끔 유도하자고 닐렀다. 목적이 비슷했지만, 비아스의 수단은 정반

대였다.

"오늘 우리는 심장탑의 수호자들을 체포한다. 4년 전 그 놈들이 야밤에

우리에게 했던 것처럼."

"체포한다고요!"

"그래. 그리고 여신을 풀어주는 거야. 하지만 보트린 같은 자가 있다면

수호자들은 언젠가 또다시 여신의 신체를 찾아낼 거야. 바로 이 자의 존

재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어. 한 번은 괜찮아. 덕분에 우리는 불신

자들을 혼내줬고 우리의 재산을 불렸으니까. 하지만  두 번 일어날 필요

는 없어. 또다시 수호자들에게 굽신거릴 필요는 없다고."

쥬어는 쓰러진 보트린을  내려다보았다. 비아스의 말이  암시하는 바가

그를 질리게 했다. 비아스는 웃었다.

"음. 미안하지만 그 영광은 내 것이야. 나는  언제나 이 날을 기다려왔

어." 그것은 사실이었다. 비아스는 수호자라는 이름을 가진 자를 처리하

는 방식의 세부 계획을 짜며  4년을 보냈다.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니

연습도 끝낸 셈이야. 보고 싶다면 보고, 그러기 싫으면 천막을 나가."

"보트린을… 수호자 보트린을 죽일 겁니까?"

"쥬어 센. 밖으로 나가."

'센'이라는 말은 쥬어에게 마법의 언어처럼  들렸다. 쥬어는 거의 의식

하지 못하는 새 몸을 움직였다. 쥬어가 비아스의 곁을 지나칠 때 그녀는

말했다.

"밖에서 누가 오는지 망을 봐."

쥬어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곁을 지나쳐

천막 밖으로 나왔다. 천막의 휘장을 내릴  때 쥬어는 비아스가 사이커를

꼬나쥔 채 보트린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비늘을 부딪치며, 쥬어는 휘장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시구리아트 관문 요새의 통로를 메우던  통곡이 사라졌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보좌관은 케이건과 티나한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걸어갔다. 케이

건이 그를 불렀다.

"어쩔 거요, 보좌관?"

보좌관은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몸을 돌린 보좌관은 뒤엉킨 머리를 쓸

어넘겨 붉게 충혈된 눈을 드러냈다. 보좌관은  그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

보며 말했다.

"어쩔 거냐니, 무슨 말이오?"

"당은 사라졌소. 이곳에 혼자 남아있기는  어려울 거요. 원한다면 산맥

아래까지 동행해도 좋소. 산을 내려간다 한들 나가의 공격으로 피폐해진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이곳보다는 견디기 쉬울 거요."

"나는 남을 거요."

"…그렇소?"

"그래요. 나는 남을 거요. 당은 사라지지 않았소. 아직 내가 살아있소.

당은 길을 준비하오. 길은 여행자를 따라가지 않소. 나는 남을 거요."

"뭔가 도움이 될 것이 없겠소?"

보좌관은 입을 다문 채 케이건을  쏘아보았다. 티나한은 그것이 경멸이

라는 것을 깨닫고는 어리둥절해졌다. 보좌관은 말하기 힘들다는 투로 말

했다.

"당주님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오?"

"기억하오."

"그 말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는 거요?"

케이건은 입을 다물었다. 보좌관은 깡마른  주먹을 힘껏 움켜쥐며 말했

다.

"정말 아무런 느낌도 없습니까?  당신에겐 몇 번이나  경험해서 별다른

특별함도 없는 권태로운 경험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어머님은 그것을

평생 동안 기억했습니다. 저는 차라리 그  분이 저를 당신의 모조품으로

대해주기를 바랐습니다. 흔히들 과부가  유복자에게 그러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저는 어머님께 그 분이 당신에게  받지 못한 것을 드리려 했습니

다. 사랑 말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당신의  모조품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 분은 다시 태어나  당신을 찾아가겠노라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습

니다. 결국 저는 당신의 대신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씀에 아무런 느

낌이 없는 겁니까, 아버지!"

티나한은 질겁했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놀라움에 티나한의 깃털이

사정없이 부풀어올랐다. 그 때문에 아기는 깃털에 파묻혀버렸다. 티나한

은 그 큰 머리를 휙휙 움직이며  보좌관과 케이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꼼작도  하지 않았다. 문득 티나한은

케이건이 늙으면 보좌관과 비슷한 얼굴이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

다. 그리고 그 느낌에 소스라쳤다.

무표정한 얼굴로 보좌관을 바라보던 케이건이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케이. 그렇게 기억하는데, 그 이름이 맞지?"

보좌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무너진 벽을 돌아보았

다가 다시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것을 원하는 것 같지만, 나는 사과하지 않겠다."

보좌관의 어깨가 진동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작별 인사조차 없이 걸어갔다.

홀로 남게 된 티나한은 어쩔 줄 모르며 케이건과 보좌관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보좌관은 갑자기 주저앉았다. 그는  무너진 틈을 바라보며 꼼짝

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티나한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되었다. 티나

한은 몇 걸음을 달려서 케이건의 뒤에  따라붙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미

관문 요새의 모습은 조그마하게 변해 있었다. 티나한은 가까스로 보좌관

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같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 꼼짝도 하

지 않았다.

케이건의 뒤를 따라가며 티나한은  질문이 끊임없이 샘솟는  것을 느꼈

다. 어떤 질문부터 해야 하는지부터 묻고 싶을 정도로 많은 질문에 티나

한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티나한은 겨우 질문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어엿븐 소드락이가 무슨 뜻이야?"

자신의 질문을 들은 티나한은  도대체 자신이 왜 그런  질문을 한 건지

황당해졌다. 케이건은 묵묵히 발만  옮길 뿐 티나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티나한의 등뒤에 있던 아기가 부리를 열어 말했다.

"티나한. 그건 아라짓어란다."

"아라짓어요?"

"그래. '어엿브다'는 것은 불쌍하다, 가엾다는 뜻이야. 그리고 '소드락

이'는 '소드락질' 하는  사람을 말하지. 그리고  '소드락질'이라는 것은

도둑질을 말하지."

"그러면, 어, 가엾은 도둑놈이라는 말입니까?"

"맞아."

케이건은 고개를 돌리지도,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채 말했다.

"여신님. 그만해 주십시오."

아기는 부리를 닫았다. 등 뒤에 있는 아기를  돌아볼 수 없었던 티나한

은 불만을 느끼며 케이건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봐, 정말 궁금한데, 도대체 저 늙은 인간이  왜 너를 아버지라고 부

르는 거야? 의붓아버지라도 이렇게 나이 차가 나는 경우는 없겠다. 어떻

게 된 거야? 네가 정말 저 늙은이의 아버지야?"

케이건은 말없이 발만 놀렸다. 티나한은  하루 반나절을 기다릴 것인지

그냥 대답 듣는 것을 포기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케이건이 다시 입

을 연 것은 티나한이 둘 다 선택하기 싫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였다.

"나가에게는 아버지가 없소."

티나한은 긴장했다. 그러나 조금 후  티나한은 그것이 완전히 무의미한

대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불만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케이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후에 케이건은 다시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 아니오?"

티나한은 그만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무지 문장들이 어떤

통일된 의미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정말 약오르게도 케이

건이 세 번째로 꺼낸 말 또한 앞의 두  문장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말이

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티나한에게 약간 관련된 말이었다.

"저기 비형이 있소."

티나한은 고개를 들었고, 그들이 어느새 산을 넘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

었다. 비형은 나늬와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형을 향해 걸어가

며 케이건은 나직이 속삭였다.

"티나한. 다 잊어주시오."

"잊으라고?"

"그래주시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그리고  더 이상 길잡이와 대적자,

요술쟁이가 함께 있을 필요가 없게 되면,  나는 당신들을 영원히 떠나겠

소. 아마도 당신들이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요. 그러

니 그 때 말해주겠소. 지금은 그냥 잊어주시오."

티나한은 그것이 만족스러운 거래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형

과의 거리가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고 더  이상 도깨비의 귀를 피해 속삭

이기도 어려웠다. 티나한은 짧게 말했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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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2-4.                        관련자료:없음  [56415]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7-21 01:22  조회:7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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