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44화 (44/62)

눈물을 마시는 새.

12. 파국으로의 수렴 - 2

아기가 깨어난 것은 한밤중이었다. 케이건은  죽을 데웠고 아기는 그것

을 바라보지 않았다. 케이건이 끓인 죽을  숟가락으로 떠 후후 불어가며

아기에게 먹일 때도 아기는  숟가락을 바라보지 않았다.  결국 케이건은

마음 속에 있던 의심을 질문했다.

"혹 앞이 보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시선을 맞추시는 것을 본 적이 없군

요."

아기는 죽을 삼키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 다 보이니까 시선을 맞출 필요가  없는 거지. 나는 모든

이보다 낮아. 내게는 다 보이지. 너도  네 어깨와 팔과 손가락들을 모두

보면서 그 죽을 뜨지는 않잖아?"

"숟가락과 솥은 봅니다. 당신 부리도 보아야 하고."

"네가 말한 것들은 너보다 낮아질 수  있는 것들이지. 그러면 내려다봐

야겠지. 하지만 나는 모든 이보다 낮아.  굳이 애쓰지 않아도 내게는 다

보여."

케이건은 입을 다문 채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죽이 바닥났을 때 케이

건은 아기의 말을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솥을 치운

케이건은 아기의 요청에 따라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그 등을 두드리며

궁금해하던 것을 질문했다. 그는 자신들의 여행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방

법으로 빨라져 있음을 설명하고 그 현상의 원인이 여신인지를 질문했다.

여신은 간단히 긍정했다.  아기의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케이건은

말했다.

"당신은 느린 쪽을 선호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음? 아아, 나는 움직이지 않았어."

케이건은 잠깐 고민했다.

"그렇군요. 최후의 대장간도, 카시다도  모두 땅 위에  있는 것이군요.

움직이지 않으신 것이군요."

"그래."

"덕분에 저희는 놀라운 속도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제 개썰매는 어떻

게 된 것입니까?"

"그 개들은 전 주인에게 돌아갔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시우쇠님을 찾아

내려면 즈믄누리로 가야 합니다. 북부군의 현재  위치를 아는 것은 도깨

비들이니까요."

"그리고 시우쇠가 딛고  있는 땅이 아마  알겠지. 시우쇠가  어디 있는

지."

케이건은 졌다는 심정이 되었다. 아기가  트림을 하자 케이건은 아기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강보를 매만진 케이건은 확인했다.

"그러면 저희는 그냥 걸어가면 되겠습니까?"

"그냥 걸어가."

"알겠습니다."

"뭐가 불만인 거지?"

"불만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이제  길잡이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

습니다. 그냥 걸어가기만 하는 거라면 길잡이의 일은 없지요."

"그렇게 확신하지마. 너는 여전히 길잡이야.  그 아이에게 그랬던 것처

럼."

"그 아이?"

"카시다에서 아이를 만났지?"

케이건의 반응은 조금 늦었다. 기억을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예. 그러고보니 그건 땅 위에서 일어난 일이군요."

"훔치고 속이고 죽이라고 했었지?"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훔치고 속이고 죽이기 시작하게 되는 것을 원하

니?"

"그 아이에게 그렇게 말해준 것은 그런 방법들이 먹거리를 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만인에  대해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모두 보신다면, 땅  위에서 일어난 제

모든 과거도 아시겠군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나는 오래전의 너를 안다."

"제 발 아래엔 항상 당신이 있었겠군요."

"그래. 그 때 너에겐 만인에 대해 원하는 것이 있었어."

"…그런 기억이 납니다."

"너에겐 신념과 소망이 있었다. 케이건."

"그만하십시오. 당신은 자부심을 소중히 여기는  어떤 전사를 지나치게

괴롭히고 계십니다."

아기는 티나한을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렇게 했고, 잠자

리에 누워있는 티나한이 움찔하는 것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당신의 목소리는 너무 큽니다. 누군가로 하여금 잠든 척하며 이야기를

엿들을 것인지, 그렇잖으면 깨어났음을 정직하게  고백할 것인지 고민하

게 할 정도로."

"젠장, 미안하다, 미안해! 그런  생각 좀 했었다! 하지만  나를 엿듣는

놈으로 몰아붙이려는 거라면! 엉? 만약 그러려는 거라면!"

"안 그러겠소. 주무시오, 티나한."

티나한은 투덜거리며 다시 누웠다. 케이건은  아기를 돌아보았다. 아기

는 눈을 감은 채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길잡이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의 일은 대충 알아두고 싶습

니다. 저희들은 얼마쯤 후에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내일이라고 불러야 할  시간 쯤에는 너희들이  시구리아트라고 부르는

산맥에 도달할 거다. 그리고 이틀 정도가  지나면 너희들이 엔거라고 부

르는 평원에 도달하게 될 거다."

거리를 가늠해본 케이건은 그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번개 같은 속도였다. 그 때 여신이 다시 말했다.

"시구리아트에 너를 찾는 사람이 있구나. 거기서 잠시 머물러야겠다."

"저를 찾는 사람이오?"

대답은 없었다. 아기답게 여신은  다시 잠들었다. 케이건은  강보를 한

번 더 매만진 다음 도깨비불 옆의 자리로 돌아왔다.

카시다의 마지막 시민인 이름  모를 소년은 덤불 아래에  몸을 숨긴 채

바위 아래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해하기 힘든 모습의 일행

이었다. 도깨비와 인간, 레콘이 있었고 딱정벌레가 있었으며 레콘은, 분

명히 남자로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등에 레콘  아기를 업고 있었다. 소년

은 아마도 레콘의 아내가 죽었기 때문에  아이의 새엄마가 될 여자를 탐

색하려는 것이리라 추측했다. 그렇다면 그  레콘에겐 동정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그렇기를 원했다. 그는 그 일행에 합류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년은 어젯밤에 만났던 무서운  사내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소년은 일행이 출발하면 그 뒤를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따라다니다

가 그들에게 받아들여질 기회를 얻는  것이 소년의 계획이었다. 어쩌면,

그 무서운 남자 외에 다른 일행들은 부모 잃은 소년을 불쌍히 여겨 거두

어줄지도 모른다. 무서운 남자는 소년이  특별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소

년은 모든 가족을 잃고 세상에 홀로  내몰린 남자애만큼 특별한 것이 있

는지 의심스러웠다. 동정과 사랑은  그런 자에게 보내어져야  하지 않는

가?

일행이 걸음을 뗐다. 소년은 그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곧 소년은 덤불을 박차고 나왔다.

실망과 좌절, 그리고 혼란에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그 일행은 분명히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번개 같은 속도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소년은

앞으로 달렸다. 하지만 굶주림 때문에 후들거리는 소년의 다리가 소년을

배신했고 소년은 요란하게 쓰러졌다. 눈  앞이 새하얗게 바뀌었다. 입술

이 터졌는지 혀 끝에 짭짤한 피맛이  느껴졌다. 허둥거리던 소년은 간신

히 눈을 떠 일행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미 일행은 지평선을 넘

어서고 있었다.

소년은 어이가 없었다. 누가 버린 쓰레기마냥 팽개쳐진 모습으로 땅 위

에 엎드린 소년은, 지독한 장난에 말려든 것 같은 억울함에 울음을 터뜨

렸다.

한참을 울던 소년이 다시 땅을 짚고 일어섰을 때, 그 얼굴에는 덤불 속

에 숨어있을 때와는 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결국, 소년은 특별하지 않았다.

일어서는 것마저 힘들었기에 소년은 바위에  등을 기댔다. 소년은 걸어

갈 자신이 없었다. 한참 동안 바위에 기대어있던 소년은 결국 바위를 짚

었다. 그의 손바닥에 음각된 글씨의  일부가 만져졌다. 소년에겐 익숙한

글자들이었다. 글자를 배우던 시절 소년은 카시다 암각문을 하나씩 읽어

나갈 수 있게 되었을 때 흥분을 느꼈다.  그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

다. 그 때 소년에게는 이름을 불러주는  부모와 유치한 별명을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소년은 단검을 뽑아들었다.

카시다 암각문이 새겨진 바위는 오랜 세월  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독

특한 침식을 경험하게 되었다. 소년의 단검은  결국 끌과 망치에 필적할

수 없었지만, 소년은 손톱  아래에서 피가 배어나오도록  거칠게 단검을

내리찍었다. 겨우 한 단어를 새겨넣는 동안 소년은 몇 번이나 손을 허벅

지 사이에 끼운 채 휴식해야 했다.

마침내 목적을 달성한 소년은 비틀거리며  바위를 떠났다. 소년이 떠난

바위에는 새로 새겨진 암각문이 다가올  풍화의 세월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이 새겨넣은 단어는 '미움'이었다.  그 단어는 암벽에 있던

글자들과 어울려 완전한 문장을 이루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미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안개가 티나한을 기분 나쁘게 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는

손에 만져질 듯했고, 티나한에게 마치 물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은 깃털

부푸는 느낌을 선사했다. 티나한은 그곳이  싫었다. 하지만 티나한이 탈

경우 딱정벌레에는 한 사람밖에  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티나한은

케이건의 뒤를 따라 걸었다.

"도대체 이 황당한 안개는 뭐야?"

"아무래도 나가들이 기온을 높이기 위해  이곳에 뭔가를 지나치게 모아

놓은 모양이오."

티나한은 그 '뭔가'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원망스러운 눈

빛으로 케이건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그 말을 잊으려  애썼다. 케이건은

티나한의 고충에 신경쓰지 않은 채 발 앞의 폐허를 가로질렀다.

폐허의 규모는 놀라웠다.  시구리아트 유료도로 위에는  돌들이 무수히

쌓여있었다. 비탈진 산의 경사 때문에 굴러내린  거석들은 수백 미터 이

상 되는 넓은 범위에  걸쳐 흩어져 있었다. 케이건은  안개 속에서 마치

괴물의 뼈대처럼 보이는 공성병기들을 바라보았다.

한 때 폭풍 같은 기세로 거석들을  날려보냈을 그 공성병기들은 무관심

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그 중 어떤 것은  단지 튼튼한 지지력을 위해 땅

에 뿌리를 박은 나무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어진  초대형의 것도 있었

다. 처음부터 가지고 떠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나가들이 사용하고

버린 것임이 분명했지만, 그것은 케이건의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티나한조차도 나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제작된  그 대형 병기들의 모

습에 놀랐다.

"나가들이 미친 걸까?"

"모르겠소."

길을 가로막는 거석의 크기가 차츰 거대해졌다. 무게 때문에 아래로 굴

러내릴 수 없는 거석들이 길 위에  내팽개쳐져 두 사람의 걸음을 방해했

다. 자욱한 안개와 거대한 돌더미 때문에 두 사람은 우윳빛 미로를 헤매

는 느낌을 받았다. 케이건은 가까스로 길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길이 완

전히 막혔을 때는 티나한이 괴력을 발휘하여 바위를 밀었다.

악전고투 끝에 그들은 관문요새에 도달했다.  최소한, 관문요새가 있던

자리에는 도달했다. 두 사람은 말을 잃은 채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바라

보았다.

자연암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관문요새는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 등과는

달리 완전히 무너져내리지 않았다. 바위를 관통하는 통로 또한 그대로였

다. 하지만 그 때문에 관문요새는 자신의 참상을  폐허 속에 숨길 수 없

었다. 두 사람의 머리 속에서 시구리아트  관문요새가 겪어야 했던 일이

선명하게 재구성되었다.

투석기에서 날아든 거석들은 암벽을 수백, 수천 번 이상 강타했을 것이

다. 그런 무참한 공격에 그토록 단단한 암벽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굵은 금이 간 바위들이 깨진 얼굴 마냥 흉측한 모습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래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을 투석구들은 흉하게 드

러나 있었다. 그 중 어떤 투석구에는 인간의  머리와 팔 하나가 삐죽 튀

어나와 있었다. 꽉 끼여있는 그 유해는 그가 경험해야 했던 무서운 사건

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내부로 침입한 적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투석수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그리고 설령  빠져나왔다 하더라도

추락사할 그 구멍으로 자신의 몸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머리와 팔 하나

를 꺼내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투석수는  그런 무시무시한 높이에서 아래

를 내려다보며 굶어죽었다.

통로를 메우고 있는 안개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티나한은 흠칫하며 철창을 꼬나쥐었다. 그러나  케이건은 가만히 선 채

상대를 기다렸다. 나가가  움직일 기온이 아니었다.  케이건의 예상대로

안개 속에서 나타난 것은 나가가 아니었다.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나타난 인간은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행색이 말이 아니게 초라했기에 두 사람은 눈 앞의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그 인간이 입을 열었다.

"은편 열다섯 닢 내시오."

티나한은 신음을 흘렸다.  케이건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보좌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좌관은 설명을 덧붙였다.

"당신과 그 아기는 면제요. 그러니 레콘의 통행료만 지불하면 되겠습니

다. 도깨비도 있었는데, 그는 어떻게 된 겁니까?"

"…안개 속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기에 딱정벌레에 태워 산맥 건너편으

로 날아가게 했소.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소."

"잘 생각하셨군요."

그리고 보좌관은 손을 내밀었다. 완전히  무감각한 그 동작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은편 대신 질문을 꺼냈다.

"당주님은 어떻게 되었소?"

"지불하시오."

케이건은 말없이 은편을 꺼내어 보좌관에게 쥐어주었다. 보좌관은 더러

운 옷가지 사이에 그것을 챙겨넣고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케이건과 티

나한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통로 안으로 들어온 보좌관은 걸음을  멈추었다. 케이건과 티나한은 다

시 충격을 받았다.

통로 안쪽에는 단 하나의 횃불만이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횃불걸이의

반대쪽 벽 일부는 무너져 있었다. 그 때문에  벽에 길다란 틈이 나 있었

다. 그 틈은 보좌관의 무릎 높이 쯤에서  가장 넓게 벌어져 있었는데 수

탐자들은 그 뒤쪽에서 노파의  얼굴을 발견했다. 거미줄  같은 가느다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 있는 얼굴은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의 보늬 당

주의 얼굴이었다.

케이 보좌관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목이 메어 말했다.

"저 방은 비밀 방이었소. 당주님을 저곳에 숨겨두었는데, 그만 방이 무

너지고 말았소. 당주께서는 저 안에 선  채로 파묻혀 계시는 거요. 간신

히 이런 틈이 있어 제가 먹을 것을  드리고 있소. 망치로 벽을 깨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저 방 안에서 붕괴가 일어날까봐 그렇게 할 수 없

었소."

티나한이 깃털을 부풀린 채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는 벽을 쓰다듬고

흠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내부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티나한은 다시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무릎을 꿇고 갈

라진 부분 안쪽을 바라보았다. 보늬 당주는  기절한 것인지 잠든 것인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케이건은  그녀의 코 아래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갔다.

당주는 숨을 쉬고 있었다. 티나한은 뒤를 돌아보려 애쓰며 말했다.

"저 방 안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저희들이  당주를 구출할 방도가 있을

까요?"

케이 보좌관은 멍한 표정으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아기가 부리를 열

어 말했을 때, 그 속마음이야 어쨌는지 알 수 없지만 보좌관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아기는 말했다.

"글쎄. 티나한.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당주가 재채기만 좀 심하게 하

더라도 깔려죽고 말 거라는 사실뿐이군."

"이런, 빌어먹을! …당신에게 한 말은 아닙니다."

아기는 웃으며 노란 머리를 다시 강보에 파묻었다. 케이건은 당주의 얼

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산적과 제왕병자와 각종 악당들의  공격을 버텨온

이 요새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거요?"

"갈로텍 대장군이 왔소."

"갈로텍이?"

"예. 놀랍게도 그 자는  군령자더군요. 오면서 투석기들을  봤을 거요.

나가들이 그런 것을 만들  수는 없소. 하지만 군령자인  그 자는 그렇게

하더군. 그 자는 그걸로 이 요새를  공격하여 쇠뇌 배출구와 투석구, 기

타 이 요새의 공격수단을 초토화시켰소."

"하지만 250년 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소. 주퀘도 사르마크가 이곳을

공격했을 때 그 또한 비슷한 방법을 썼소. 그 때 당신들은 그 공격을 버

텼소."

"그 자였소."

"그 자라니?"

"죽음의 거장. 군령자 갈로텍의  군령 중에는 주퀘도  사르마크의 영도

있었소."

케이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의아하게 여겨왔던 것이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케이건은 어떻게

전쟁 경험이 없는 나가들이 그토록 훌륭한  작전 수행 능력을 보여준 것

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용인이 아닌 갈로텍이 어떻게 륜 페이에게 필

적하는 수력 통제력을 발휘한 것인지도 깨달았다. 군령자는 타인의 지식

과 기억을 이용하는 것에 익숙하다. 갈로텍은 다른 이보다 훨씬 쉽게 여

신의 힘에 적응했을 것이다.

"당신들을 잘 아는 적이 온 것이군. 하지만 그 자가 250년 전의 실패에

서 어떤 교훈을 얻은 거였소?"

"그 자의 공격 자체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소. 문제는 수호장군들이

요새 내부의 우물을 마르게 하고 수도관의 위치를 파악해서 오폐수를 역

류시키고 금속 도구에 습기를  몰아넣었다는 점이오. 그들이  주로 힘을

집중시킨 부분은 철문의 돌쩌귀였소."

"녹슬게 한 것이군."

"그렇소. 우리는 긴 시간을 버텼소.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요새를 두

드리는 돌 때문에 많은  당원들이 귀머거리가 되었소.  그들이 우리에게

날려보낸 돌은 거의 산 하나에 필적할 거요.  어느날 철문이 더 이상 견

디지 못하고 무너졌고, 보병들이 요새 안쪽으로 난입했소. 그 다음은 미

친 듯한 살육이었소. 그 다음 그들은 나가 포로를 찾아 떠났소."

"포로?"

"즈믄누리로 호송되던 포로들 중 일부가 이곳에 있었소. 그리고 대호왕

또한."

케이건은 고개를 들어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보좌관은 자신이 알고 있

는 것을 설명했고, 그 설명은 티나한과 케이건을 긴장하게 했다. 티나한

은 벼슬을 빳빳하게 세우며 말했다.

"어, 그렇다면 북부군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하텐그라쥬 공격에 나섰

다는 것이군?"

"그렇소."

"이런 빌어먹을!"

티나한은 주먹을 서로  부딪치며 분해했다. 보좌관은  차분하게 설명을

끝내었다.

"전투가 끝난 후 그들은 포로들과 요새에 남아있던 북부군을 끌고 남쪽

으로 떠났소. 나는 다른 비밀장소에 숨어있다가 나온 것이고."

티나한은 격분하느라 보좌관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케이건은

다시 고개를 숙여 바위틈에 갇혀있는 당주를 바라보았다.

"당주님은 언제부터 이런 모습으로?"

"스무이레째요."

"스무이레?"

"그렇소."

케이건은 놀랐다. 건장한 젊은이라도 꼼짝할 수 없는 이런 모습으로 그

긴 시간을 버틸 수는  없다. 하물며 보늬 당주는  백살이 넘은 노인이었

다. 그 때 케이건은 보좌관이 뜻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케

이건은 보좌관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보좌관은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

했다.

"아마도 당신을 기다리신 것 같소.  어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돌아올 거라 확신하셨던 모양이오."

티나한은 놀란 표정으로 보좌관과 케이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케이건

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땅 속에 파묻힌 당주를 바라보았다.

당주의 쪼글쪼글한 얼굴은 그나마 핏기조차 없어 뭉쳐놓은 걸레처럼 보

였다. 유료도로를 가득 메운 안개에서 흘러내린 이슬들이 그녀의 부서지

기 쉬운 몸을 서른 날 이상 적셔왔고 그 위에 돌가루와 먼지, 그리고 머

리카락들이 뭉쳐져 다시 없이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

건은 당주의 다른 모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케이건은 다른 모습의 그

녀를 부를 때와 같은 목소리로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의 당주를 불렀다.

"보늬."

당주의 몸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케이건은 한 번 더 불렀다.

"보늬."

당주는 눈을 떴다. 티나한은 놀라서 무릎을 굽혔지만 그러자 그의 거대

한 몸 때문에 횃불의  빛이 가려지며 틈 앞에  그림자가 졌다. 티나한은

황급히 다시 일어섰다. 눈이 부신 듯 몇  번 눈꺼풀을 떨던 당주는 가까

스로 케이건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의 함몰된 입술이 힘겹게 움직였

다.

"어엿븐 소드락이요?"

티나한은 어리둥절하여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좌관은 무

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게다가 케이건은 그  기묘한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대답까지 했다.

"그렇습니다."

"너므 너즈러비 오셨소."

"그렇군요."

당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흙먼지

로 뒤덮인 볼에 긴 자국을 남겼다. 보좌관이 그것을 닦아주려 했지만 당

주는 눈짓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보좌관은 다시 물러났다.

소리없이 울던 당주는 겨우 숨을 골라 말했다.

"바라믄 롱호미라 호나 모딘 길헤  뻐러디여 그우니난 곳니픈 엇디호리

오."

"원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용서해달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보좌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용을 알  수 없었던 티나한은 당혹하여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려 애썼다. 바위 틈에  갇혀있는 당주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원치 아니하오."

케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는 것이 힘든 듯  당주는 한참 동안 침

묵했다. 그 동안 세  남자와 여신은 조용히  기다렸다. 당주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했다.

"이 늘근 겨지베 소망은 네와 이졔왜 혼가지요."

케이건은 침묵했다. 당주는 갑자기 또렷하게 말했다.

"어양쓰난 겨지블 어위키 용서하오. 드위힐훠 니르노이다. 다시 태어나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티나한은 갑자기 당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내

용에 놀랐다. 하지만 뒤이어 일어난 일 때문에 그의 놀람은 묻혀지고 말

았다.

당주는 갑자기 머리를 뒤로 힘껏  젖혔다. 보좌관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당주는 다시 한 번  그렇게 했다. 순간 틈이  벌어지다가 다시 함몰되었

다. 틈 저편에서 무엇인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피어오른 흙

먼지가 모든 사람의 눈을  가렸다. 보좌관은 미친  듯이 손을 휘저었다.

가까스로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사람들은 벽의 틈이 흙과 파석으로 완

전히 메워졌음을 발견했다.

보좌관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두 손으로 벽을 짚은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틈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보좌관은  머리를 벽에 부딪쳤다. 머

리를 벽에 댄 채 보좌관은 짐승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하텐그라쥬의 외곽, 마호가니 군단의 군영이 된 곳에서, 쥬어는 의자에

앉은 채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세 사건 중 두 가지

는 각자 어젯밤과 조금 전에 일어났다. 그리고 하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

았다. 각각의 사건들은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쥬어에게 다가왔지만,

그것은 명백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쥬어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세 번째 사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결정해두고 싶었다.

어젯밤 비아스 마케로우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를  당혹시켰다. 쥬어는

솔직히 그 점을 인정했다. 그는 정말  놀랐다. 물론 비아스는 충분히 합

리적인 설명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  노력했다. 어쨌든 쥬어 또

한 불신자들이 여신을 가두고 있는 거라면  왜 자신들이 그렇게 큰 피해

를 입으면서도 여신을 풀어주지 않는 거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없

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음모의 규모가  지나치게 거대했기에

쥬어는 받아들이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쥬어는 비아스의 요구

를 들어주겠노라고 닐렀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 요청을 조금 보류해둔 상

태였다.

그런데 조금 전, 아직 충분히 낯익지 않은 부하 두 명이 쥬어를 찾아왔

다. 자신을 스바치와 카루라고 밝힌 두 사람을, 쥬어는 경계심을 가지고

맞이했다. 쥬어는 그 두 명이 보물을 나눠달라는 요청을 하러 온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용건이 수호자들이 꾸민  어떤 음모에

대한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쥬어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루와 스바치는 비아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비아스가 정

확하게 알지 못하는 세부 사항을 두 사람은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쥬

어는 잠깐 동안 두  사람이 비아스에게 고용되어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떠올렸다.  하지만 스바치와 카루는 비아

스에 대한 끔찍한 혐오감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비아스가 수호자 한 명

을 살해했다는 니름까지 들려주었다. 쥬어는 비늘이 서는 것을 느끼면서

도 그 이야기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카린돌 마케로우라는 여자가 수호자들에게 억류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발자국 없는 여신은 영이 빠져버린 카린돌 마케로우에게

억류되어 있기 때문에 수호자들은 여신의 힘을 마음대로 쓰고 있다는 것

이군?"

비밀 유지를 위해 대화는 육성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스바치는 고개

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쥬어. 물론 당신은 수호장군들  덕분에 북부에서 많은 재

산을 모았지요. 하지만 당신이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행운을 찾아내는

당신의 능력입니다. 수호자들에게 고마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신성

한 여신을 냉혹한 감방의 수인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그것은 더할 수 없

이 끔찍한 배신입니다."

쥬어는 그 주장에 동감했다. 스바치는 열성적으로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만약  수호자들의 저 끔찍한  음모를 폭로한다

면, 대가문들은 당신에게 고마워할 겁니다.  그것은 당신이 대가문의 가

주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일 겁니다."

"글쎄. 스바치.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대가문들은 북부에서 들어오는

부를 사랑해."

"그 말에는 동감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 부가 계속되겠습니까? 그

부는 북부인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몇 년

만에 강탈해왔지요. 이제 북부인들은 그 부를 쌓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여버렸으니까요. 보나마나 북부에서의 수입은  줄어들 겁니다. 당신도

그것을 짐작했기에 하텐그라쥬로 돌아온 것 아닙니까?"

쥬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스바치의 말대로였다.  살육을 목적으로 삼은

군단들과 달리 쥬어의 의용군은 부의 수집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고, 따

라서 수입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보나마나 가문들과 군대 사이의 알력이 시작될 겁니다. 지금껏 그들의

재산을 불려주었기에 대가문들은  저 끔찍한  무장집단을 용인했습니다.

하지만 군단들이 더 이상 재화를 벌어들이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대가문

들은 겁을 낼 겁니다. 지금껏 내전이라는  이야기는 몇 번이나 나왔습니

다. 그것이 실제화될 겁니다. 다만 도시와  도시가 아닌, 군단과 가문의

내전이지요."

"으스스한 말이군. 그래서, 자네가 제안하는  것은? 수호자들의 비밀을

폭로하고 그들에 맞서 전쟁을 벌이자는 건가?"

카루가 말했다.

"천만에요. 수호자 집단은 존속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들은 여신의 힘

을 휘두르는 초인이 아니라 심장병의  관리자 수준으로 되돌아가야 합니

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장탑에 갇혀있는 카린돌 마케로우를 구출해야 합

니다. 그러면 힘은 여신에게 되돌아갈 테고, 수호자들은 힘을 잃을 겁니

다."

"수호장군들이 힘을 잃는다면, 전쟁은?"

"전쟁은 끝내면 됩니다."

"하지만 북부인들은 이 전쟁 때문에 세 가지를 찾아내었어. 시우쇠, 뇌

룡공, 그리고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그들의 왕.  그 정체 모를 대호왕 말

이야. 그 세 가지를 막아내려면 수호자들에게 힘이 있어야 할 텐데."

"아니오. 북부는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수호자들에게 힘이 없을

때도 그들은 감히 키보렌에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약

해졌을 때는 절대로 덤빌 수 없습니다. 그들이  비록 당신이 말한 세 가

지를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북부가 황폐해진 상황에서는 자신

들의 살길을 찾는 것도 벅찰 겁니다. 우리는 그저 물러나기만 하면 됩니

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쥬어는 북부군이 이미  하텐그라쥬로 진격 중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정보를 내놓는다고 해서 자신 또한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럴 듯한 말이군. 수호자들이 힘을 잃어도 문제 될 것은 수호자 자신

들 뿐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대가문들의 호의를 받겠지요."

"그렇다면 너희들은 무엇을 얻는 거지?"

스바치와 카루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스바치가 말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수호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여신을 위해 목

숨을 바치기로 맹세한 자들입니다.  비록 악당에게 속아  그의 수족으로

활동했지만, 우리들의 맹세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 분이 풀려나는 것

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쥬어는 감동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실제로 그의 마음 어디

에서도 감동 비슷한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쥬어는 아무런 감동 없

이 두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겠노라고 맹세할  수도 있었고, 실제로 그렇

게 했다. 두 사람은 만족하며 떠났다.

그리고 쥬어는 홀로 앉아서  다가올 세 번째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고민거리는 비아스의 요청과 카루와  스바치의 요청이 서로 상치된

다는 점이었다. 카루와 스바치는 대가문들에게  수호자들의 음모를 폭로

하고 그들과 협력하여 심장탑에 감금된 여신을 구출하자는 것이었다. 비

아스의 요청도 두 사람의 요청과 비슷했지만, 작은 차이가 있었다. 그리

고 그 작은 차이는 다가올  세 번째 사건에 대한  쥬어의 대응을 완전히

다른 두 가지로 나눠놓았다. 쥬어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가 결정을 내린  것은 세 번째 사건이  천막 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쥬어는 예의바르게 방문자를 받아들였고 겸손하게 닐렀다.

[수호자 보트린. 저 같이 천한 자를 친히  찾아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

겠습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전선을 질타하며 병사들을 부려본 경험이  없는, 그리고 냉동장치 근처

를 떠나본 적도 별로 없는 보트린은 수호자들의 위세가 얼마나 높아졌는

지 실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우쭐해졌다. 보트린은  권위있는 단어를

떠올리려 애쓰며 닐렀다.

[쥬어. 근래 자네의 이름은  심장탑에 고독하게 앉아  세상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나에게까지 들려오더군. 여신에 대한  경애의 마음으로 자네는

몸소 의용군을 조직하여 북부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고 하더군. 참으

로 고맙고 기쁜 일이야.]

쥬어는 어쩔 줄 몰라하며 겸손을 떨었다. 보트린은 만족한 표정으로 닐

렀다.

[자네가 이룩한 업적들에 대해서 나와  모든 수호자들은 진심으로 감사

하네. 그런데 근래 나에겐 북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졌네. 물

론 나는 자네 이상 가는 적임자가 없다는  것을 당장 깨달을 수 있었지.

자네는 한 번 더 여신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어려운 일에 나서

주겠나?]

[그것은 어떤 일입니까? 아니, 잠시만요. 주위에  누가 있는지 좀 봐야

겠습니다.]

보트린은 쥬어가 주의 깊은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쥬

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입구로 향했다.  몸을 내밀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쥬어는 천막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러

는 도중 쥬어는 보트린의 뒤쪽을 지나가게 되었다.

수호자의 뒤를 지나치는 대신, 쥬어는 비아스에 대해 생각했다. 수호자

를 죽일 정도의 여자라면 이런 일을  요청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 그

의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완료되었을 때 그의 손에 쥐어진 쇠망치는 이

미 보트린의 뒤통수에 도달해 있었다.

누군가가 보트린을 불렀다.

'스보트리넌 레졸디 아세리도.'

'내 이름이야. 내 신명은 레졸디. 레졸디는 나의 여신. 나의 신부.'

'스보트리넌.'

'차가운 그곳에 갇혀계신… 오오, 신부여.  내가 어떻게 당신을 그곳에

내버려둘 수 있을까. 당신의 신랑인 내가.'

'보트린.'

'나를 용서하지 말아요. 나는 용서받을 수 없어.'

[보트린!]

완전히 추상적인 세계에서 보트린은 갑자기 구상적인 세계로 떨어졌다-

솟아올랐다-나왔다-들어갔다. 보트린은 눈을 떴다.  무서운 통증이 뒤통

수에서 전해져왔고 보트린은 비늘을 부딪치며 머리를 감싸쥐려 했다. 하

지만 그의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한 보트린은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그는 조금 전과 같은 장소에 있었다. 하지만 약간 다른 점이 있었는데,

튼튼해 보이는 밧줄이 그의 몸을 의자에  단단히 묶어두고 있었다. 보트

린은 경악하여 고개를 들었다. 장군의 옷을  입은 여인이 손에 사이커를

든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아. 육성으로 말하겠어.] "대답해, 보트린. 육성으로."

[당신은… 비아스 마케로우?]

비아스는 주저없이 사이커를 내찔렀다. 허벅지를 찔린 보트린은 정신적

비명을 내질렀다. 비아스는 다시 말했다.

"육성으로. 그러지 않으면 뽑지 않겠다."

보트린은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비아스는 사이커를 뽑았다. 보트린은 그것이  별로 대단한 포상이 아님

을 알 수 있었다. 상처는 여전히  까무라칠 만큼 아팠다. 하지만 비아스

의 냉혹한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여신의 힘을 사용할 생각은 하지 마라.  약간만 의심스러워도 나는 신

호를 보낼 테고, 그러면 네 뒤에 있는 자가 쇠망치로 너를 잠재울 거다.

그리고 다시 깨운 다음,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거야.  별로 내키지 않

지? 나도 그래. 그러니 유벡스를 기억하고 지혜롭게 행동하도록."

허벅지의 통증 때문에 보트린은  비아스의 말을 집중해서  듣기 어려웠

다. 그는 계속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비아스는 사이커를 뻗어

보트린의 턱을 받쳐 올렸다. 보트린은 비늘을 부딪치며 비아스를 바라보

았다.

"자, 보트린. 밤은 짧고 할 이야기는 많아.  그러니 빨리 끝내자구. 누

가 신체를 찾아낸 거지?"

"무슨 말입니까?"

"누군가가 내 여동생이 신체라는 것을 깨달았잖아. 우연히 그렇게 되었

다고 말하지는 마. 너희들은 최소한 15년 전부터 그걸 알았어."

보트린은 통증을 잊었다. 그는 경악하여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말이 목

구멍으로 뛰쳐나오기 전, 보트린은 간신히 그 말을 바꿨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비아스는 격노하며 사이커를 쳐들었다. 보트린은 엉겁결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비아스는  사이커를 휘두르지 않았다.  무서운 눈초리로

보트린을 쏘아보던 비아스는 천천히 사이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까

이 있던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그 위에  앉았다. 무릎을 꼰 비아스는 그

위에 사이커를 쥔 팔을 올려놓은 자세로 말했다.

"좋아. 그럼 15년 전에 죽은 요스비라는  이름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부

터 해볼까."

보트린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비아스는 그런 보

트린의 표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15년 전, 하텐그라쥬에서 이상한 죽음이  발생했어. 페이 가문을 방문

하고 있던 요스비라는 남자가 갑자기 온몸의  피를 뿜으며 죽었지. 당시

가주였던 지커엔 페이는 남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병으로 죽었

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그것이 혹 전염병이 아닐까 의심했지. 그런데 다

른 가문의 가주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지. 그들은 지커엔 페이 가주가 예

의 없는 남자를 제거한 거라 생각했어. 그 남자는 특이하게도 자신이 지

커엔 페이의 아들딸의 아버지라고 주장했거든. 미친  놈이라고 할 수 있

지. 그런 미친 놈 하나 없어져봐야 아무런 문제될 것은 없었기에 가주들

은 지커엔 페이의 니름을 믿는 척하며 그 남자를 불태웠지. 여기까지는,

약간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지."

보트린은 애써 비늘을 억누르며 비아스의  시선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비아스는 보트린이 그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사이커가 다가와 보트

린의 얼굴을 비아스에게  고정시켜놓았다. 보트린은  체념하며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겐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목격자가 남긴  증언이 있지. 내

여동생, 카린돌 마케로우가 그  자리에 있었어. 그리고 또  한 명, 당시

수련자였던 륜 페이가 그곳에 있었어. 요스비는  륜 페이의 어머니의 짝

이었지. 아버지 말이야. 그리고 순진했던  륜 페이는 아버지라는 웃기는

니름을 소중하게 받아들였어. 그런데 그 꼬마의  눈 앞에서 아버지가 괴

상한 모습으로 죽은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 줄 알아? 륜 페이의 정신

이 열려버렸지. 마침 그곳에 있던 카린돌은  륜 페이의 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었어. 그리고 그것이 심장 파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저, 정신이 열렸다고?"

"그래. 내 여동생에 대해 특별히 호감은 없고, 지금 그 멍청한 년의 처

지에 대해서도 한 점 애석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나는 카린돌의 용기에

대해선 보증할 수 있어. 카린돌은 심장  파괴라는 것의 존재를 알면서도

몇 년 후에 심장 적출에 응했지. 대단하지?"

보트린은 냉동 장치 안에 갇혀있는  카린돌을 떠올렸다. 그녀는 보트린

의 여신 레졸디였다. 비아스는 계속 말했다.

"자. 이제 요스비의 살해자가 누군지 밝혀졌어. 정체 모를 전염병도 아

니고 가문의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가주도  아냐. 요스비를 죽인 것

은 너희 수호자들이지. 자, 그런데 왜  너희들이 한 남자를 죽여야 했던

걸까? 그것도 그렇게 이상한 방법으로?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어."

냉동 장치 안에 있는 카린돌을 떠올린 보트린은 용기를 끌어모았다.

"물론 당신이라면 많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겠지요."

비아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기세가 마음에 드는군. 그럼 계속해  볼까. 세월이 흐르고 요스

비의 죽음이 잊혀질 무렵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4년 전, 우리들의 세계

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지. 여신이  사라진 거야. 그건 물론 너희들

이 신체인 카린돌을 감금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부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런데요?"

"그런데 왜 4년 전이고 왜 카린돌일까?"

"무슨 말입니까?"

"4년 전은 륜 페이가 심장을 적출하는 해였지.  물론 륜은 그것을 거부

했지만. 자, 생각해 봐. 4년 전이라는  시간에서 우리는 륜 페이를 떠올

릴 수 있어. 그리고 신체는 카린돌이었어. 그런데 륜 페이와 카린돌에겐

공통점이 있지. 그들은 하나의 사건을 같은  장소에서 함께 목격한 사람

들이라고."

보트린은 입을 벌렸다. 비아스는 그 표정에 기뻐했다.

"마음에 드는 표정이군. 그 표정 되도록  유지해주면 좋겠어. 자, 그들

은 요스비의 죽음을 함께 목격했던 사람들이야.  그들 중 하나가 심장을

적출할 나이가 되었을 때  또 한 명이  너희들에게 감금되었지. 그런데,

그 일은 원래 한 명에게 일어나야 하는  일이야. 뜻하지 않은 사건에 의

해 두 사람에게 각자 따로따로 일어난 거지. 너희들의 그 냉동장치에 처

넣어져도 살아있으려면, 그건 심장을 적출한  나가여야 해. 그렇지 않은

나가를 냉동시키면 죽어버리겠지."

보트린의 등 뒤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비아스의  경고대로 누군가가

쇠망치를 든 채 뒤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보트린은 그것이 쥬어일 거

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비아스의 말에 집중했다.

"너희들은 륜 페이를 냉동시키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륜 페이가 적출

할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렸지. 그 말은, 너희들이 륜 페이가 신체일 거

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지. 어떻게 해서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된 걸까?

그건, 너희들이 륜 페이를  신체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야. 여신을 륜

페이에게 전령시키려 했던 거지. 륜은 여러 가지로 편리하지. 우선 남자

야. 카린돌에게 했던 것처럼 복잡한 납치극  따위 벌이지 않아도 돼. 게

다가 수련자였지. 그러니 륜은 너희들의 통제 아래에 있는 셈이지. 그래

서 너희들은 륜을 신체로 만들려고 했어.  어떻게? 륜 이전의 신체를 륜

앞에서 죽여서 여신이 륜에게 깃들게 하려 했던 거야. 여신이 천천히 전

령을 준비할 수 없도록  급격하게.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전령할 수밖에 없도록. 요스비. 그가 바로 륜 이전의 신체였던 거지!"

보트린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보트린의 상태를  눈치 챈 비아스는 빠르

게 말했다.

"하지만 문제가 몇 가지 생겼지. 먼저, 그 사건에 충격을 받은 륜이 수

련자를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혔어. 그래서 너희들은  륜과 접촉할 수 없

었어.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지. 하지만 별 의심없

이 기다렸지. 그런데 어쩌다 알게 된 거야. 륜이 신체가 아니라는 것을.

너희들이 그걸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 어쨌든 너희들은

황급히 여신이 누구에게 전령했는지 조사했지. 그 결과 요스비가 죽었던

장소에 륜 이외에 다른 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 사람이 바

로 카린돌 마케로우야. 요스비가 죽게 되자  여신은 카린돌에게 깃든 거

지."

비아스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너희들은 카린돌을 죽여서 또  만만한 수련자 한 명에

게 전령시키고 싶었을 거야. 그러려고 하면 방법은 있지. 우리 가문에는

화리트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남자 한 명을  죽이는 것과 여자를 죽이는

것은 다르지. 카린돌이 갑자기 죽게 되면 사건이  걷잡을 수 없게 될 거

야. 너희들은 카린돌이 자연사해서  다른 자에게 전령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어. 심장 적출을 한 카린돌이 죽으려면 몇십 년이나 기다려야 할

테니까. 그래서 너희들은 어쩔  수 없이 카린돌을  냉동시키기로 결심했

어."

비아스는 고개를 돌려 심장탑이 있는  방향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매에 차가운 미소가 흘렀다. 비아스는 다시 보트린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자, 이 모든 가설이 성립되려면 어떤  한 사람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것은 너도 짐작하겠지? 그는 바로 누가 신체인지 알 수 있는 자야. 너희

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어.  누가 신체인지 감지할 수  있는 자 말이야.

그런 사람이 없다면 이 계획은 처음부터 성립이 불가능하지. 그러니, 보

트린. 이제 말해보겠어? 누가 그 예민한 녀석이지?"

보트린의 어지러움이 더욱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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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2-3.                        관련자료:없음  [56386]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7-20 02:40  조회:7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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