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12. 파국으로의 수렴 - 1
하나는 셋을 부른다. - 알려지지 않은 해묵은 금언.
강철의 날개를 활짝 편 전투도끼가 유혈의 파도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핏방울이 포말처럼 번져나가지만, 도끼의 비상은 가볍다. 도끼는 열기와
피비린내 사이로 유유히 날았다.
즈라더의 오른손에서 도끼가 벗어났을 때 상대방은 그가 도끼를 놓쳤다
고 판단했다. 애석한 오해였다. 즈라더는 자유로워진 주먹으로 도끼로
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나가의 얼굴을 으깨버렸다. 한편, 그
의 머리 위를 날아 넘어간 도끼는 기다리고 있던 왼손과 협력하여 쇄도
해오던 나가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즈라더는 양손잡이였던 것이다. 그리
고 세 번째 나가는 세손잡이를 상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즈라더
의 세 번째 상대는 장닭과 조우한 지렁이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했다.
주위의 나가 셋을 단숨에 쓰러뜨리는 묘기를 본 나가들은 비늘을 세우
며 주춤 물러났다. 즈라더는 나가들을 비웃으며 기이한 짓을 했다. 그는
왼쪽 손목을 도낏날 아래에 걸었다. 그리고는 손목만으로 도끼를 빙글빙
글 돌리며 오른손 검지를 까딱거렸다.
"뜨겁게 덤벼봐!"
나가들은 그 외침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 방자한 동작은 똑똑히 보았다.
비늘을 부딪치는 나가들을 보며 즈라더는 부리를 딱 부딪쳤다.
"염통은 빼냈더라도 혼은 남아있을 것 아닌가! 혼으로 덤벼!"
나가들은 듣지 못한 요청에 호응했다. 즈라더는 계명성을 내질렀다.
무핀토 장군은 쓰러진 나가의 턱을 짓밟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상기된
얼굴에서 문신이 검게 불타올랐다. 작살검이 살을 헤치며 뽑혀나오자 장
군은 주저없이 몸을 돌려 그것을 집어던졌다. 회전하며 날아간 작살검
손잡이가 나가의 목을 때렸고 달려들던 나가는 다리를 하늘로 향하며 나
가떨어졌다. 튕겨져나온 작살검을 움켜쥔 무핀토 장군은 쓰러진 나가의
오금에 작살검을 꽂아넣고 비틀었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비명은 없다.
비명이 있었다면 움찔했을까?
상대의 고통을 실감하며 죄책감이라는 낯선 감정을 느끼게 될까?
무핀토가 확신을 가지고 답할 수 있는 것은, 4년 동안 그 질문에 대답
이 제시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 뿐이다.
상대의 무릎 관절에 미늘이 얽힌 것을 느낀 무핀토는 나가의 턱을 걷어
차준 다음 허리를 굽혔다. 돌을 집어든 장군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날아
드는 사이커를 받아흘렸다. 세 자루의 작살검을 모조리 소모해버린 북부
군의 맹장은 손에 잡히는대로 쥐어들어 싸우고 있었고, 기능성이 충족되
는 한 무엇에도 불평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은 퍽이나 마
음에 들지 않는 무기였다. 무핀토는 버럭 화를 내며 돌을 뒤로 잡아당겼
다. 비어버린 그의 얼굴을 향해 사이커가 날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무핀
토는 왼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언젠가 어떤 나가가 사용하는 것을
보고 한 번 쯤 사용해보리라 마음먹었던 기술이었다.
사이커의 예리한 날은 손바닥을 손쉽게 관통했다. 정신이 찢어질 것 같
은 고통에 진저리치면서도 무핀토는 끌어당겼던 돌을 휘둘렀다. 사이커
가 봉쇄되어 당황하고 있던 나가는 으깨진 얼굴을 감싸쥔 채 쓰러졌다.
장군은 한 번 호흡을 고른 다음 왼손바닥에 꽂힌 사이커를 잡아당겨 뽑
았다. 그의 목에서 피끓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상대방의 가슴을 내찌른 순간 세미쿼 장군은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
다. 작살검은 갈비뼈에 걸렸고 상대는 쓰러지지 않는 대신 사이커를 휘
둘렀다. 목이 날아가기 직전, 세미쿼는 왼손에 든 가위로 상대방의 사이
커를 쳐냈다. 그 어울리지 않는 보조무기에 당황한 상대를 향해 세미쿼
는 가위의 양날을 벌렸다. 수없이 반복된 연습에 의해 가윗날은 정확한
간격으로 벌어졌고 세미쿼는 주저없이 가위를 내뻗었다. 양쪽 눈이 파괴
된 나가는 비늘을 처절하게 부딪쳤다.
세미쿼 장군의 왼손에 쥐어있는 가위는 방패이자 비수였으며 안구파괴
기였다. 오른손의 작살검과 왼손의 가위를 놀랄 만큼 효과적으로 사용하
며 세미쿼는 다가오는 모든 나가를 전투불능 상태에 빠트렸다. 또 한 명
의 불운한 나가를 암흑으로 보낼 때 세미쿼 장군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
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까이 있다.'
세미쿼 장군은 가위를 당겨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약간 떨어진 곳에
서 땅에 쓰러진 북부군 병사를 난도질하고 있는 나가의 모습이 그의 눈
에 들어왔다. 두드러지는 어떤 특징도 없었지만 세미쿼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자였다. 세미쿼를 죽일 자였다. 그런 결말을 피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내가 먼저 죽인다!'
세미쿼는 작살검과 가위를 단단히 움켜쥔 채 돌진했다. 그의 접근을 알
아차린 나가가 시체에서 사이커를 뽑았지만, 너무 늦었다. 날아오는 사
이커는 좌절과 실망을 담아 서툰 직선을 그렸고 세미쿼는 여유있게 가위
를 벌려 사이커를 낚아챘다. 그 순간 작살검이 상대방의 목을 파고들었
다.
나가는 목을 움켜쥔 채 빙글 돌아 쓰러졌다. 상대의 사이커를 주워든
세미쿼는 쓰러진 상대의 척추를 후려쳤다. 몇 번이고 내려치자 마침내
등이 쩍 갈라지며 척추가 끊어졌다. 세미쿼는 가위를 쥔 손등으로 이마
의 땀을 닦았다.
이제 오늘 전투에서 그가 죽을 일은 없다. 세미쿼는 완벽하게 확신했
고, 다음 상대를 향해 돌진하면서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악타그라쥬 공방전에서 나가들이 들고 나온 것은 여섯 개 군단 연환공
격이었다. 악타그라쥬를 지근거리에 둔 시점에서 북부군은 벚나무, 끈끈
이주걱, 선인장, 고무나무, 듀리언, 바나나의 여섯 개 군단을 맞닥뜨리
게 되었다. 여섯 개 군단에서 동원된 스물두 명의 수호장군은 시우쇠를
효과적으로 봉쇄했다. 그리고 매일 하나의 군단이 북부군을 공격했다.
여섯 개 군단이 일시에 공격하는 수단은 밀림에서는 사용하기 힘들고 한
꺼번에 격퇴당할 위험도 있지만 모든 군단이 5일씩 휴식하며 공격하는
방법은 충분한 활동성과 함께 최악의 경우에도 전체 병력의 1/6 밖에 소
모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리고 경이적인 재생 능력에 의해 나
가들은 닷새만에 상당한 군세를 회복한 채 전선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
지만 북부군은 닷새는커녕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설령 쉴 틈이 있었다
하더라도 닷새만에 경미한 부상은 깨끗이 회복해버리는 나가의 흉내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 패주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 북부군이 14 일째 버티고 있
었던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런 기적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크게 세
가지다. 그 첫 번째 요인은 군단의 중심부에 앉아 수호장군들이 비를 뿌
리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륜 페이였다. 레콘들이 싸울 수 있도록 륜
은 비를 용납하지 않았다. 시우쇠를 상대하고 있던 수호장군들은 그런
륜의 방해를 돌파할 수 없었다.
신명의 힘으로 수호장군을 방해하는 것과 동시에, 륜은 용인의 힘으로
라수를 보조했다. 륜은 땅바닥에 거칠게 그려진 그림을 가리키며 중얼거
렸다.
"64 명이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연락선을 끊어버릴 생각인가 봅
니다."
라수 규리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다음 옆에
있는 레콘을 돌아보았다.
"순다리와 그룸 빌파가 왼쪽의 언덕으로 이동, 매복했다가 다가오는 나
가 분견대를 되도록 조용히 처리. 소시아 교위와 나세 교위의 부대는 반
킬로미터 쯤 후퇴. 코네도 빌파는 현 위치에서 지시를 기다리며 대기.
지시가 있을 시 곧장 오른쪽으로 이동. 조우하는 첫 번째 나가를 되도록
잔인하게 처리. 혼란을 일으킨다. 즈라더, 그 시점에서 혼란 지점으로
이동해서 합류. 소시아와 나세에게 경고한다. 재정비할 시간을 지난 번
처럼 어이없게 소모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다리가 부러진 덕에 사령부에 앉아있던 레콘은 쩌렁쩌렁 울리는 계명성
으로 라수 규리하의 작전을 전달했다. 전황 전체를 정확하고 빠르게 파
악할 수 있는 능력은 지휘관의 능력에 따라 수천의 병력에 값한다. 그리
고 륜 페이와 라수 규리하는 그것을 수만의 능력으로 증폭시킬 수 있는
조합이었다. 륜의 감각과 라수의 판단, 그리고 나가들은 별로 듣지 않는
계명성의 지휘에 따라 북부군 전체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끊임
없이 형태를 바꾸고 그 파괴력 - 혹은 약점 - 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도
하기 힘든 맹수였다. 더군다나 그 야수는 레콘이라는 강력한 이빨과 빌
파 삼부자라는 보이지 않는 발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륜은 라수가 북부군을 승리시키기 위해, 최소한 궤멸적인 패배를 피하
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북부군 전
체의 움직임을 꿰뚫어볼 수 있는 그에게 그 움직임은 기묘하게 보였다.
륜은 의아한 듯 말했다.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이군요."
"이해해줄 필요는 없소. 뇌룡공. 움직임이나 알려주시오."
퉁명스러운 대답이었지만 륜은 당황하지 않았다. 라수의 입이 열렸을
때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륜은 이기기 위한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는 라수의 긴장된 정신을 느꼈다. 륜은 라수를 믿고 죽음의 땅에
들어온 북부군에 대해 그가 느끼는 책임감과 부담감을 알았다.
그리고 륜은 나가에 대해 라수의 순결한 증오를 보았다.
"이곳에서 물러나고 있습니다. 157 명입니다."
라수는 생각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빠르게 말했다. 잠시 후 륜
이 지적한 지점으로 매서운 공격이 가해졌다. 라수는 그런 행동으로써
추격에 동원할 만큼 예비대가 충분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도무지
중요한 지점이라 볼 수 없는 곳에서 북부군이 돌출하는 것을 목격한 나
가는 불안과 의심을 느꼈다.
결국 라수는 기적을 하루 더 연장시키는데 성공했다. 악타그라쥬 공방
전 14 일째의 전투는 또다시 나가들의 후퇴로 끝났다. 그러나 후퇴하는
끈끈이주걱 군단의 나가들은 자신들이 이기고 있는 도중이라고 생각했
다. 그리고 라수에겐 그런 생각을 반박할 만한 수단이 없었다. 이가 갈
리는 일이었다.
부상병들의 신음 속에 밤이 찾아들었다.
다음 날의 일출을 보지 못할 것임을 직감하며 떨고 있는 그들 사이로
륜은 고개를 떨군 채 걸음을 뗐다. 피냄새 흠뻑 배인 바람이 그를 어루
만지고 사라졌다. 용인의 감각은 날카롭다. 륜은 부상병들의 신음과 절
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자신이 죽지 않는지 설명하는
세미쿼 장군의 호호탕탕한 목소리를 들었다.
"적이 수십만 명이 있다 하더라도 그 중에 나를 죽일 녀석은 하나 뿐이
야. 설마 두 녀석이 나를 죽이겠나? 내가 두 번 죽나? 분명히 한 놈이
야. 그 한 놈만 찾아서 먼저 처치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어떤 전쟁터에
서도 절대로 죽을 일이 없지. 그리고 나는 그 한 놈을 찾아내는 육감을
가지고 있지. 그래서 나는 죽지 않아."
그 말에 논리는 없었다.
어차피 논리는 사선에 선 전사가 선택할 무기는 아니다.
약간 으슥한 언덕을 넘어선 륜은 그의 등장에 당황하는 병사들을 목격
했다. 모닥불 주위에 모여앉아 있던 병사들은 무엇인가를 구워먹고 있는
듯했다. 륜을 발견한 병사들의 얼굴에는 경계와 적대감, 그리고 비참한
간구가 차례로 떠올랐다. 륜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필요한 것은 다
'보였다.'
륜은 모닥불 위의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사냥을 할
시간이 있었냐고도 묻지 않았다. 전리품 위에 군림하는 것은 승자의 논
리뿐이다.
륜은 말없이 그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등 뒤에서 간구가 경멸로 바뀌는 것을 보지 않고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화를 낼까? 동포의 살을 구워먹는 당신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까? 몸에 있는 모든 구멍으로 물을 뿜어내고 바싹 마른 미라가 되어
쓰러지게 할까?
그것은 잘 구워진 내 동포들에게 바치는 경의가 될까?
보다 조용한 곳에 도달한 륜은 나무 밑둥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전
장의 날씨를 냉각시켰다. 키보렌에서는 작열하는 태양이 없는 밤이 기온
조절에 더 유리하다. 륜은 여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가 느끼는
광대한 영역 내부의 습기에 접근했다.
키보렌이 습기 짙은 한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풀잎 끝에서, 거미줄의 복잡한 통로들에서, 타버린 나무 우듬지에서 습
기가 뿜어져나왔다. 유혈을 머금은 땅이 습기를 잃어 딱딱해졌다. 키보
렌은 열을 상실했다. 물 묻은 살갗에 입김을 부는 것과 비슷하다. 물은
증발하기 위해 열을 삼킨다. 륜은 거리낌없이 물을 증발시켰다. 노호하
여 물을 꾸짖고 거부를 허용치 않으며 습기를 추방했다. 키보렌의 축축
한 한숨이 하늘을 어지럽혔다.
그것은 지난 보름 동안 북부군이 가까스로 유지해온 기적의 마지막 요
건이다. 시우쇠를 상대하느라 륜의 방해를 돌파할 수 없는 수호장군들은
키보렌의 기온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일도 태양에게 맡겨둘 수밖에 없었
다. 그리고 밀림의 기온이 회복되는 것은 언제나 늦은 오후였다. 륜이
높은 하늘로 추방해버린 습기들이 쏟아지는 태양열을 중간에서 가로채기
때문이다. 매몰차게 습기를 추방하며 륜은 다가오는 자의 이름을 불렀
다.
"베미온."
주인의 부름을 받은 충견인 양 베미온 굴도하가 빠르게 달려왔다. 베미
온은 그의 옆에 주저앉았고 그것으로써 모든 것에 만족했다. 륜은 본능
처럼 베미온의 발을 보았다. 그 발이 말라있음을 확인한 륜은 다시 나무
에 등을 기댔다.
"베미온 마립간."
베미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판사이의 육형제 탑 사이를 뛰
놀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있었다. 륜은 상관하지 않았다.
"저는 당신을 죽여야 할까요?"
륜은 시우쇠를 떠올렸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내벽을 타고 흐르던 유해
의 폭포를 생각했다.
"이 전쟁의 끝에서 제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없다면 당신은 죽을 겁니다. 혹 나가들의 손을 피해 어딘가로 달아
난다고 해도 물을 마시지 않으니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저는 나가들
에게 도륙당하거나 목이 말라 죽는 것보다는 더 편안한 죽음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렇게 해야 할까요?"
베미온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륜은 갑자기 격정에 사로잡혀
베미온의 어깨를 붙잡았다. 베미온의 시커먼 얼굴 가득히 당혹감이 떠올
랐다.
"베미온 마립간!"
"왜 그러세요? 놔줘요."
"베미온 굴도하! 제 말을 들어요. 당신은 상고토의 맹주입니다! 판사이
의 위대한 마립간이었고 육형제탑의 여섯 열쇠 모두를 소환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자입니다! 당신은 제가 말한 것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야 합니
다!"
"놔줘요. 아파요."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지금의 당신은 당신이 아니에요! 누님을 생각하는 것만으
로도 저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저는, 제기랄, 당신까지 간수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죽여.
"그래야 합니까? 누님을 살리려는 륜 페이를 유지하기 위해 저는 당신
을 파괴해야 합니까? 당신을 먹어야 합니까!"
그러라구. 먹어.
"그것이 생명이니까…"
그래. 맞아.
륜은 손을 놓았다. 그의 몸에서 비늘이 정신없이 부딪혔다. 그는 자신
의 손을 질린 듯이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기 전, 륜은 이미 베미온이
도망쳐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베미온을 불러들이는 대신 륜은 어둠 속을
향해 사납게 닐렀다.
[시우쇠!]
파괴해.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이외의 것을 파괴하는 것은 생명의
본성이야. 베미온도 그것을 원해.
[저는 싫어요.]
네가 죽으면 베미온도 어차피 죽어. 잔혹하게 죽도록 내버려두겠다는
것이군.
[그렇게 니르지 않았어요! 저는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대답이 없었다.
륜은 어둠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시우쇠의 열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
리고 륜은 그를 추적할 수도 없었다. 륜은 허리를 꺾으며 땅에 얼굴을
묻었다. 두 손을 은루로 적신 채 륜은 숨이 막히도록 울었다.
하텐그라쥬의 기록보관소장 콘수마 발텐의 몸 어디에서도 전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전사가 어루만지며 전투의 추억을 되새겨볼 만한 상처는,
재생 능력을 가진 나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니름이다. 그리고 콘수마의
정신에서도 바뀐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비아스 마케로우는 몇
년 전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의 콘수마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저주받을 요새에서 물러날 때는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더군
요. 하지만 우리는 군단장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군단장께서도 추위에
고통받는 병사들 때문에 그런 힘든 결정을 내리신 것이 분명하니까요.]
달라진 점이 있기는 했다. 교위로 예편한 콘수마는 장군인 비아스에게
하대를 하라고 강권했다. 비아스는 그렇게 했다.
[그것은 절대로 야자수 군단의 불명예가 아니야. 발텐 교위. 오동나무
군단 또한 결국 물러나야 했지.]
[그렇습니다. 군단장님. 오동나무 군단은 대단한 군단이지요. 저희들은
자보로 공격에서 함께 싸운 적이 있습니다. 마호가니 군단은 그 때 슈라
도스에 있었지요? 그곳의 전투도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군단장님.
자보로의 성벽은 정말 악몽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투 사흘
째…]
콘수마 발텐이 전상 대신 전우와 함께 전선의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한
다는 것은 분명했다. 비아스는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도록 애쓰
며 콘수마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녀는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콘수마가 불쾌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충분한 확신이 있은 후에야 비아스
는 조심스럽게 용건을 꺼내었다.
비아스가 꺼낸 니름은 콘수마를, 그러니까 기록보관소장이 아닌 늙고
충직한 전사인 콘수마를 경악시켰다.
[발자국 없는 여신께서 한계선 남쪽에 계시다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발텐 교위.]
[마케로우 장군님. 물론 전쟁터는 참혹합니다…]
[그만. 교위. 나는 전쟁의 충격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으로 취급
당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다. 생각해 봐. 수호장군들은 왜 저런 기
적과도 같은 능력을 얻게 되었지?]
[네? 그거야 불신자들이 여신을 감금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인을
잃은 힘이 여신의 신랑들에게 복종하는 것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불신자들은 왜 여신을 풀어주지 않는 걸까?]
[네?]
[수호장군들이 여신의 힘을 이용해서 그들의 땅을 짓밟고 있는데 왜 불
신자들은 여신을 풀어주지 않는 걸까? 여신을 풀어준다면 수호장군들이
힘을 잃게 될 것이 뻔하잖아.]
콘수마는 기절할 것 같았다. 비아스의 설명은 합리적이었다.
[그, 그, 그렇다면…]
[맞아.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까닭은, 여신을 감금하고 있는 것이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야. 나는 하텐그라쥬 방어를 위해 돌아왔다고 닐렀
지.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에도 급급한 불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하텐그라
쥬로 오고 있단 니름이야. 그리고 나는 조금 전 불신자들에겐 여신을 풀
어줘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다고 닐렀어. 자, 이 두 사실을 놓고 생각해
본다면 뭔가 불쾌한 결론이 떠오르지 않나?]
콘수마는 대답할 수 없었다. 비아스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래. 여신은 하텐그라쥬에 감금되어 있어. 수호자들이 여신을 감금하
고 신부의 힘을 강탈하여 사용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불신자들은, 여신
의 힘을 여신에게 돌려주는 것만이 그들이 살아날 방법이기에 목숨을 걸
고 하텐그라쥬로 오고 있는 거야!]
콘수마의 첫 번째 반응은,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었다.
비아스는 당황했다. 니름으로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거의 그에 준하는
정신적 경향으로써, 콘수마는 수호장군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
었다. 비아스가 분개하여 니르려 할 때 콘수마가 닐렀다.
[그렇게 된 것이군요.]
[자네 반응이 좀 묘하다고 생각되는군. 발텐 교위.]
[무슨 니름이신지 알겠습니다. 마케로우 장군님. 수호자들이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군요. 하지만, 장군님. 그 때문에 우리들은 대확장 전쟁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잖습니까? 수호장군들의 힘이 있었기에 우리는 감히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해본 적이 없던 저 북부의 땅을 밟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전쟁의 결과로 하텐그라쥬가 누리는 풍족이 어느 정
도인지 아십니까?]
[나도 눈이 있어. 발텐 교위. 이곳에 와서 다 보았어. 그 때문에 남자
가 가문을 계승하려드는 황당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
콘수마는 미소지었다.
[쥬어 니름이시군요. 별일도 다 있지요. 하지만 저는 그것이 유쾌한 부
작용이라고 생각됩니다.]
[유쾌한 부작용이라고?]
[장군님. 이 전쟁은 부를 낳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선택할 길
을 하나 더 열어주었습니다. 지금껏 가주를 계승할 수 없었던 여자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이모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야 했지요. 그것이 싫다면
정찰대원이 되어 떠나는 방법이 고작이었습니다. 물론 대장간에 들어가
는 방법 같은 것은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 이후 여자들의
선택이 하나 더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풍요로 가득한 길이지요.
여자들은 북부에서 무엇이든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레콘을 만난다거나
하는 고약한 일도 생기긴 합니다만, 대부분의 적은 별 것이 아닌 인간들
입니다. 저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문득 비아스는 콘수마의 의복을 살폈다. 그리고 비아스는 기록보관소장
의 옷이 동사(銅絲)가 삽입된 호사스러운 것임을 깨달았다. 물론 그것을
못 본 것은 아니지만 비아스는 현역 장군의 방문 예고를 받은 예비역 교
위가 예의를 갖추기 위해 고급 옷을 입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 옷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으로 다가왔다.
몇 년 전, 성전에 종군하기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고 강변하던 전사
는 그곳에 없었다. 북부에서 충분한 피를 마시고 넘치는 부를 얻은 콘수
마는 더 이상 비아스가 기대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둘 중 어느 것이 변
화의 보다 직접적인 이유일까? 비아스는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는 것을 깨달았다. 피의 제전이 콘수마를 변화시킨 것이라면 그녀는 여
신을 빼앗긴 분노를 피로 씻어낸 것이다. 따라서 분노는 더 이상 존재하
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북부에서 획득한 부가 원인이라면 분노는 여전
히 콘수마의 내부에 존재할 것이다. 감춰지고 기만되고 변형된 형태로나
마. 비아스는 조심스럽게 닐렀다.
[자네 니름대로라면 여신은 계속 갇혀있을수록 좋겠군.]
비아스는 정신이 어지러워질만큼 집중하여 콘수마의 정신을 살폈다. 콘
수마는 약간 지체한 다음 닐렀다.
[그렇게 니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로 들었는데. 여신이 풀려나면 나가들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게 될 거야. 북부로 가는 길이 막히는 거지. 그렇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콘수마는 니름을 잇지 않은 채 정신을 닫았다. 비아스는 자신이 사람을
억압할 수 있는 정신억압자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닐렀다.
[갇혀있는 여신은 어쩌면 우리를 포기하게 될지도 몰라. 그런 일이 일
어난다면 저 두억시니의 운명이 꼭 남의 일은 아니게 될 텐데.]
콘수마는 기겁하여 닐렀다.
[그런 일까지 생길까요?]
비아스는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까마득한 바위 표면에서 석양이 미끄러졌다.
바위는 거대했다. 억겁의 세월 동안 바람과 비는 바위를 침식했다. 하
지만 바위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려면 바람과 비는 지금껏 투자한 시간의
몇 배에 해당하는 시간을 소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비바람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억겁의 시간 동안 바위를 쪼고 깨트릴 것이
다. 최후의 승자가 자신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 승자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패배가 그 숙명임에도 불구하고 바위의 자존심
은 드높아 보였다. 하늘을 떠받치는 그 오만한 이마는, 언제까지라도 비
바람에 맞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물론 그
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위는 그 순간 고고했다.
바위 앞쪽에는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세 그림자가 있었다. 그 중 한 그
림자의 주인이었던 케이건은 고개를 돌려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티나한은 질문했다.
"왜?"
"당신이 아니라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보고 있었소."
"이봐, 케, 케이건, 너, 너, 그러니까 말이야! 내 말은!"
"보모와 관련된 농담을 할 생각은 없었소. 티나한."
케이건이 비형의 악습을 답습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우려했던 티나한
은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비형은 왜 갑자기 여신을 쳐다보는 거냐고
질문했다. 케이건은 다시 바위를 돌아보았다.
"저 바위가 보이오?"
티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바위 중간 쯤에 음각으로 된 글자들
이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억겁의 시간을 포기의 조건으로 삼는 바
위와 달리 바위보다 훨씬 젊은 나이일 것이 분명한 사람의 창조물은 바
위보다 훨씬 비참한 모습으로 풍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고인들이 바위에
새겨서라도 전하고 싶었던 뜻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려웠다. 비형
이 그 글자들을 읽어보려 애쓰는 동안 티나한이 말했다.
"그래. 카시다에도 저런 것이 있다고 하던데.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케이건은 약간 짓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봤소."
"뭐?"
"당신은 카시다를 봤소. 여기가 카시다니까. 그리고 저건 카시다 암각
문이고."
"그럴 리가 있나?"
"동감이오."
"진짜야?"
"저것이 카시다 암각문이라는 것도, 그리고 동감이라는 것도."
티나한과 비형은 놀란 표정으로 바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들 또한
도착하려면 몇 달은 걸어와야 할 곳에 자신들이 서 있다는 사실을 설명
할 방법이 없었다. 그 때 케이건이 다시 말했다.
"혹 내가 언제부터 걷고 있었는지 기억하시오?"
"예? 무슨 말씀입니까?"
케이건은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최후의 대장간을 출발했을 때 나는 개썰매에 타고 있었소. 그런데 나
는 지금 걷고 있소. 개썰매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도대체 내
가 언제부터 걷고 있었던 거요? 어처구니없게 들리겠지만, 나는 기억나
지 않소."
비형과 티나한은 질겁했다. 그들은 케이건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은 황급히 서로의 기억을 대조해보았다. 그런 대조의 결론은 그들
을 경악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이 최후의 대장간을 떠난 것이 얼마 전인
지 알 수 없었다. 비형은 황급히 나늬를 찾았고 그의 다리 옆에 앉아있
는 나늬의 모습에 안도했다. 하지만 비형은 언제부터 자신이 나늬에서
내려 걸어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비형은 수화로 나늬에게 질문했지만
나늬의 대답 또한 신통치 않았다. 그들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최후의
대장간을 떠난 것이 최근의 일이라는 느낌 뿐이었다. 그들은 당황했다.
그래서 다른 두 사람에게 비형이 내놓은 질문은 꽤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기가 카시다라면, 우리는 즈믄누리로 가는 길에서 한참 멀어진 거잖
아요? 즈믄누리로 가야만 북부군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어
떻게 해야 하죠?"
케이건과 티나한은 비형의 미래지향적인 질문에 잠시 혼란스러워하다가
겨우 그런 질문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케이건은 티나한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현재의 이 기막힌 상황은 여신께서 일으킨 일이라고 믿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여신께서 기침하시면 그 때 여쭈어보도록 합시다. 혹 일출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지만, 아무래도 저건 황혼인 것
같으니, 걸음을 멈추고 여기서 잠자리를 폅시다."
더 나은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기에 수탐자들은 벼랑 앞에 잠자리를 마
련했다. 잠자리라고 해봐야 그다지 대단한 것은 없었다. 비형이 도깨비
불을 피워놓고 케이건은 방풍복을 꺼내어 몸에 감았다. 그것으로써 하늘
을 천장 삼은 훌륭한 침실이 만들어졌다. 그들이 유일하게 신경을 쓴 부
분은 강보를 내려놓을 자리였다. 케이건은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그 위에
풀잎과 이끼를 깔았다. 그리고 티나한은 조심스럽게 강보를 그 위에 내
려놓았다. 이로써 사원 또한 완성되었다.
뭔가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티나한은 배낭을 열어보았고 그
안에 식량이 가득 들어있음을 발견했다. 티나한은 별로 소비되지 않은
식량을 놓고 볼 때 최후의 대장간을 떠난 것이 그리 오래전이 아님은 확
실하다고 말했다. 케이건과 비형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또다시
강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신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 때 케이건이 자
리에서 일어났다.
"아기가 먹을 것을 구해와야겠군."
"응? 무슨 말이야?"
"시우쇠님의 경우엔 불덩이로 바뀌었기에 음식이 필요치 않았지만, 모
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깃든 저 이름없는 아기는 보통의 레콘 아기잖소.
저 아기가 우리가 가진 식량을 먹기는 힘들 것 같소."
다른 수탐자들은 케이건의 말을 이해했다.
"그럼 어디서 구해올 거야?"
"예전에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소. 카시다 암각문이 여기 있다면 카시다
가 어디 쯤 있을지 짐작이 가오. 그곳에 가면 뭔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그러면 모두 함께 가지. 가까운 곳에 도시가 있다면 밖에서 잘 필요는
없잖아."
케이건은 반대했다.
"아니오. 이곳에 있으시오. 카시다가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소. 기온
이 그다지 높지 않은 걸로 보아 이 근처에 나가들이 있을 것 같지는 않
소만, 만약 그곳이 전쟁을 경험했다면 당신들에게 위험한 곳이 되어 있
을지도 모르오. 그러니 혼자 다녀오겠소."
물바다, 혹은 피바다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에 두 사람은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그대로 야영지를 떠났다. 그의 확고한
발걸음을 본 수탐자들은 케이건이 근방의 지리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믿으며 두 사람은 케이건의 암
시를 뇌리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애썼다.
카시다 암각문이 있는 바위에서 2 킬로미터 쯤 걸어온 케이건은 잠시
제자리에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케이건은 어렵지 않게 옛기억
속의 길을 찾아내었다. 케이건은 길을 따라 카시다로 향했다.
얼마 후 카시다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불빛이 없었기에 그것은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케이건은 도
시의 불빛이 없다는 사실이 나타내는 바를 마음 속에 새겨두었다. 그랬
기에 케이건은 길 한가운데 쓰러진 인간을 보았을 때 그를 고주망태가
되어 쓰러진 신세 좋은 술꾼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케이
건은 별 감흥 없이 드러난 갈비뼈 위로 넘어갔다.
달이 떠올랐다. 핏내음과 암흑으로 그 불운한 종말을 증거하던 카시다
가 오래간만에 나타난 비(非) 나가 방문자에게 그 참상을 드러내어 보였
다.
염세주의자의 낙원이었다.
부패한 시체에서 뿜어져나오는 독기가 폐허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
다. 케이건은 말뚝에 매달린 시체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나가들은 약간
의 오락을 즐겼던 듯하다. 골목 안쪽에서는 상반신만 남은 시체가 밤하
늘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죽은 후에까지
주장하는 그 숭고한 선언의 정체는 시체의 입 안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
들이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구더기들의 모습은 끊임없이 움직이
는 치아처럼 보였다. 케이건은 가죽이 벗겨진 젊은 처녀의 곁을 지나쳤
다. 어쩌면 그녀의 자랑거리였을지도 모르는 그 피부는 지금 쯤 사이커
칼집 정도로 바뀌어있을 것이다. 그 재활용 정신이 풍부한 나가는 허물
벗기와 인간의 피부를 벗기는 일의 차이를 고찰하며 지적 흥분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케이건은 한 소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소년은, 보통은 장점으로 분류되지 않지만 그 시점의 카시다에서는 장
점이라 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케이건은 소년에게 말
을 걸었다.
"살아있는 건 너뿐이냐?"
열두어 살 쯤 되어보이는 소년이었다. 머리는 굳은 피 때문에 기이한
모습으로 뻗쳐 있었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아직껏 몸에 걸쳐져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드러난 팔다리는 뼈마디가 툭툭 불거져 있었고
살갗에는 피딱지가 잔뜩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케이건은 파헤쳐진 돌무
더기를 발견하고는 소년의 상처가 왜 생겼는지 알게 되었다. 아마도 소
년의 부모는 땅 속의 은신처에 소년을 숨겼을 것이다. 그 직후 건물이
무너져 은신처의 입구를 뒤덮은 것이다. 나가들이 그런 사실을 알았다
해도 돌무더기를 치우는 수고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긴 시간
동안 은신처에 숨어있던 소년은 마침내 굶어죽을 지경이 되자 돌무더기
를 헤치고 나왔다. 나가들은 들어갈 수 없었지만, 굶주림 때문에 깡마른
소년은 돌무더기의 틈을 헤치고 나올 수 있었다.
케이건은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다. 하지만 소년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담벼락에 기대어 앉은 자세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초점이 맞지 않
는 눈 또한 꼼짝도 하지 않았기에 그 눈은 케이건의 무릎을 향해 있었
다. 케이건의 말을 들은 기색이 없었다.
케이건은 허리 춤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구부렸
다.
케이건은 소년의 발 앞에 단검을 내려놓았다.
"사냥을 하겠다는 황당한 생각은 소용없다. 사냥감이 너를 죽일 거다.
자고 있는 난민의 음식을 노려라. 물론 레콘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
리고 혼자 있는 자도 안 된다. 그쪽이 쉬울 것 같지만, 별로 그렇지 않
다. 도와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덤
빈다. 그보다는 가족을 데리고 있는 남자가 좋다. 그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너를 쫓아오지 않을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 있는 자를 노
려야할 때도 있을 거다."
케이건은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목에 닿았지만 소년은 여전히 움직이
지 않았다.
"여기를 찔러라. 깊이 찔러야 된다. 그리고 도망쳐라. 칼을 도로 뽑으
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깊이 찌른 칼은 뽑기 어려우니 그냥 놓고 도망
쳐도 된다. 혹 쫓아온다 해도 얼마 못가 죽을 거다. 여자들은 죽이지 마
라." 케이건은 신사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네가 만날 때까지
살아있는 여자들이라면 틀림없이 먹을 것을 가지고 있을 거다. 여자들은
항상 그렇지. 가지고 있는 것을 계산하는 좋은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도와주겠다는 식으로 잘 말하면 가진 것 내놓을 거다. 그것들을 챙긴 다
음 밤에 도망치면 된다. 간단한 방법이 있으니 굳이 힘들게 죽일 필요는
없다."
소년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무릎을 펴 일어났다.
"그리고, 명심해라. 세상에 완전히 믿어도 되는 사람은 죽은 사람뿐이
다."
케이건은 몸을 돌렸다. 그 때 등 뒤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도 살아있는데?"
케이건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나?"
대답은 없었다. 케이건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집 두어 채를 지날 때
쯤 케이건은 더 이상 소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 후 케이건은 적당한 곳간을 가진 집을 발견했다. 물론 곳간은 비
어있었다. 곡물에 별 관심이 없는 나가들이지만 그들이 식용으로 데리고
다니는 동물들을 먹이기 위해 가져간 것이다. 하지만 케이건은 빗자루를
찾아내어 곳간 바닥을 쓸었고 얼마 후 몇 됫박은 되는 낱알을 모을 수
있었다. 케이건은 그것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쥐똥과 썩은 것들을 골
라낸 케이건은 그것을 깨끗이 씻은 다음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죽 비슷한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불을 살피던 케이건은 마당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발견했다.
"저리 가라."
케이건의 말을 따르는 대신 소년은 부엌 입구에 섰다. 소년이 쥔 단검
에 달빛이 기묘하게 반짝였다. 소년이 말했다.
"저를 데려가 주세요."
"실습으로는 좋지 않은 시작이다. 우선, 나는 여자가 아니다. 그리고
접근해서 목을 딸 생각이라면 단검은 숨기는 편이 좋다. 무엇보다도, 혼
자 있는 상대는 노리지 말라고 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데려가 주세요."
"싫어."
"데려가 주지 않으면 여기서 죽어버릴 거에요."
케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부젓가락으로 아궁이를 헤집었다. 소
년이 앙칼지게 외쳤다.
"죽어버릴 거라고요!"
"들었다."
소년은 침묵했다. 케이건은 일어나 솥 안에 숟가락을 담아 저었다. 한
동안 숟가락이 솥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소년이 힘겹게 말했다.
"당신은 평생 죄책감을 느낄 거예요."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아."
"그럴 거예요."
"그렇지 않아. 네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지? 전혀 그렇지 않아. 넌
살아서도 별 볼 일 없는 보통 꼬마야. 그리고 죽은 다음에도 특별한 시
체 같은 건 될 수 없어. 별 볼 일 없는 보통 시체가 될 뿐이다."
"제가, 제가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면 단검은 왜 준 거에요!"
"나가의 작품을 망치기 위해서다. 네가 굶어죽게 되면 그것은 이 도시
를 파괴한 나가의 의도를 만족시키는 것이 되겠지. 나는 그런 나가들의
의도에 작은 파괴를 일으킨 것이다.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유다."
만약 그 자리에 다른 수탐자들이 있었다면 케이건이 언제나처럼 '친절
하게' 대답하고 있다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 내용엔 경악했겠지만. 소
년은 입을 다물었다. 죽이 끓고 있는 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케이건은
소년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당한 그릇을 찾아 죽을 옮겨담은 케이건은 새끼줄로 그릇 뚜껑을 잘
묶은 다음 허리춤에 매달았다. 마당으로 나왔을 때 케이건은 보이지 않
는 누군가가 실망하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빈 공간을 향해 중얼거
렸다.
"그래. 두 손으로 솥을 쥐면 손이 자유롭지 않게 되지. 좋은 발상이었
다."
대답은 없었다. 케이건은 달빛을 밟으며 그 집을 빠져나왔다.
케이건이 야영지로 돌아왔을 때 여신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리고 비
형 또한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다. 불침번을 서던 티나한에 목례한 다음
케이건은 아기가 깨어나면 먹이기로 하고 솥을 불 옆에 내려놓았다. 도
깨비불 옆에 앉은 케이건은, 티나한이 자신을 훔쳐보고 있음을 깨달았
다.
비형이 잠들었기에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티나한은 케이건에게 물어봐
야 확인될 수 있는 질문을 하나 떠올려놓고 있었다. 그 질문은 케이건에
게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티나한이라도 꺼내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티나한은 한동안 케이건의 눈치를 살폈다.
실눈을 뜬 채 도깨비불을 바라보던 케이건이 나직이 말했다.
"질문하시오."
"독심술이냐!"
"당신이 풍부한 표정을 가지고 있는 거요."
"그런가? 으음. 여기 앉아있다 보니 별 생각을 다했어. 그러다가 좀 이
상한 사실 하나를 떠올렸어. 어,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네 아
내에 대한 이야기야. 괜찮을까?"
케이건은 고개를 들었다. 티나한은 긴장했지만 케이건의 얼굴은 평온했
다.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소만."
"말을 잘못했다. 그러니까 네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너에 대한
질문인데."
"해보시오."
"음, 음. 너는 아라짓 전사라고 했지? 그것 때문에 나가들에 대해 복수
하지. 그리고 너는 키탈저 사냥꾼이기도 하다고 했지. 그것도 네 복수의
이유고. 그리고, 어, 음. 네 아내가…"
티나한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허둥거렸다. 케이건이 짧게
말했다.
"다 맞소. 그런데?"
"아라짓 전사인 네가 어떻게 아내를 얻은 거지?"
케이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티나한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라짓 전사는 왕의 허락 없이 자식을 얻을 수 없다고 했잖아. 젠장,
최후의 대장장이께서는 결혼하지 않고도 자식을 얻었지. 좋아. 그런 경
우는 인정하겠어. 그렇지만 그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자식을 얻지 않으
면서 결혼하는 것은? 그건 불가능하겠지."
"결혼하고도 자식을 얻지 못하는 부부도 많소."
"그야 그렇지. 하지만 결혼하기 전부터 그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할 수
는 없는 거 아냐. 그렇다면, 아라짓 전사는 왕의 허락 없이 자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아라짓 전사는 왕의 허락 없이 결혼할 수
없다는 말도 되는 거지. 맞지?"
"맞소."
"그래. 그런데, 대호왕이 즉위한 건 4년 전의 일이야. 그 전에는 왕이
없었지. 그렇다면, 네가 800 살이 넘지 않은 바에야 왕의 허락을 받을
수는 없어. 그렇지? 그러면 너는 상처한 다음에 아라짓 전사가 된 거
야?"
잠깐 침묵하던 케이건은 어둠 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티나한.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소."
"아, 괜찮아. 그냥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서 의아해진 거야. 대답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그 질문하다가 보니 떠오른 것이 있어. 아라짓 전사
의 전통은 어떻게 이어진 거야?"
"전통?"
"그래. 인간들은 부모가 자식에게 직업이나 재산 같은 것을 물려주곤
하지. 어, 비웃는 것은 아냐. 너희들은 약하니까 혼자서 뭔가를 시작하
는 것이 어려울 거야. 그러니까 부모가 만들어놓은 걸 자식이 이어받으
면 좀 편하겠지. 너희들이 약하다는 것은 불가항력에 해당하는 거니까
비웃을 필요는 없지. 하지만 아라짓 전사들은 그럴 수 없을 텐데? 800년
동안 왕이 없었으니까 아라짓 전사들은 전사의 지위를 물려줄 자식을 만
들 수 없었을 거 아냐. 그런데 너에게까지 전통이 이어졌잖아.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거야? 도제야?"
"역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오. 티나한."
"그러냐? 이거 오늘은 내가 곤란한 질문만 떠올리는 날인 모양이군."
티나한은 머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타고난 개인주의자라고 한다면 그
것은 레콘일 가능성이 높으며 평범한 레콘인 티나한은 상대방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캐묻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티나한은 케이건
이 불침번을 서겠다고 말했을 때 별 반대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도깨비불을 바라보며 케이건은 생각에 잠겼다. 여러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그 중에 이름 모를 소년에 대한 것은 없었다.
케이건에게 그 소년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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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2. '파국으로의 수렴' 편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2-2. 관련자료:없음 [56330]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7-19 00:36 조회:7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