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11. 땅의 울음 - 4
사모 페이는 천천히 가면을 붙잡았다. 가면 없이 개방된 장소에 섰던
것이 오래간만이었기에 사모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가면을 손에
든 그녀는 자신이 충분히 침착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의 주
위에 있던 두억시니들은 각자 편한 자세로 앉거나 눕거나 접은 채 기다
렸다.
사모는 눈을 떴다.
아찔할 정도로 반가운 열기가 그녀의 맨얼굴에 와닿았다. 태양이 뿌리
는 찬란한 축복 속에 그녀는 키보렌을 보았다.
눈 높이 이상의 공간에는 자신을 체념해버린 듯한 잎들이 나뭇가지에
가당찮은 부담을 주며 관능적으로 늘어져 있다. 그러나 물기가 잔뜩 오
른 그 싱그러움을 보지 않더라도 길 잃은 바람이 실수로 다가올 냥이면
어김없이 몸을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모습은 참으로 생기가 넘친다. 말라
바스러진 후에도 땅에 닿지 못한 채 숲의 머리에 널브러진 나뭇잎들은
조그마한 바람에도 호들갑스러워진다. 비가 올 모양이야! 그러나 요괴처
럼 빛나며 이글거리는 태양 때문에 오히려 검푸르게 보이는 하늘 어디에
도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일사병에 걸린 바람이라면 잔뜩
있다. 나뭇잎을 희롱하는 것으로 모자라 바람은 재를 퍼올렸다.
날아든 재가 사모와 마루나래, 그리고 두억시니들을 휘감아돌다가 사라
졌다. 사모는 시선을 눈 높이 아래로 낮추었다.
잿더미와 그을린 돌, 그리고 가차없이 녹아내려 원래 무엇이었을지 짐
작키도 어려운, 혹은 짐작하고 싶지 않은 물체들이 혼돈스럽게 쌓여있었
다. 그 모든 것들은 아직껏 뜨거웠다.
사모 페이는 죽은 페로그라쥬를 밟고 서있었다.
돌무더기 사이에서 살을 뚫고 튀어나온 뼈처럼 불쑥 솟은 목재 끝에서
는 조그마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불의 꽃잎을 피운 한떨기 꽃처
럼 보였다. 일반적으로 횃불과 같이 특별히 처리된 경우가 아니라면 그
런 목재가 끝에 불을 달고 있을 수는 없지만, 그 목재는 기괴하고 복잡
한 재난의 순간들을 거쳐 자연스러운 횃불로 바뀌어 있었다. 즉, 반쯤
탄화된 목재는 돌무더기에 파묻힌 아래쪽으로부터 연료를 그 머리부분에
서 타오르는 불에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들기름을 빨아올려 불을 태우
는 등잔의 심지와 같은 원리다. 사모는 돌무더기에 감춰져 있는 연료가
무엇일지 상상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사모의 눈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뜯어먹고 있는 쥐 한 마리
가 들어왔다. 불에 타 무너진 사육장에서 뛰쳐나온 것임이 분명한 그 쥐
도 페로그라쥬를 덮친 재앙에서 나름의 전상(戰傷)을 얻은 모양이었다.
등의 털이 타버려 분홍빛 살갗이 드러나 있었다. 상처에서 진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쥐가 열심히 뜯어먹고 있는 것은
새카맣게 타버린 쥐였다. 사모는 비늘을 부딪쳤고 쥐는 못마땅하다는 듯
사모를 쏘아보고는 곧 어딘가로 달려갔다. 사모는 고개를 돌렸다.
페로그라쥬의 심장탑이 어디 있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 높이 때문이 아니다. 무너진 심장탑은 언덕과 같은 돌무더
기로 바뀌어 있었다. 다만 돌의 양이 워낙 많기에 무너진 후에도 인상적
인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풍겨나오는 고기 굽는 냄새는 마
루나래를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모는 마루나래를 엄격하게 제지했
다. 그녀는 페로그라쥬 사람들의 심장이 불타버렸던 장소에 다가가고 싶
지 않았다. 사모는 도시 외곽에서 보았던 시체들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는 분명했다. 불타는 도시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
들도 심장탑이 무너진 순간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것이다. 그
때문에 사모는 생존자에 대한 기대를 거의 하지 않았다. 적출을 하지 않
은 어린 나가라면 심장탑의 붕괴에서도 안전했겠지만 자기 집 밖으로 별
로 나와보지 못했을 그런 어린 나가들이 도시를 덮친 미증유의 환란에서
살아남았으리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예상대로 어디에서도 니름은
들려오지 않았다. 소음에 묻혀버리는 비명과 달리 니름을 방해하는 것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나무가 많이 나기에 고급 서판을 생산해내던 페로그라쥬의 마지막
모습 앞에서, 사모는 질문을 던졌다.
[륜. 이것이 북부인들에게 저지른 나가의 죄에 대해 네가 집행한 징벌
이니?]
사모는 서글픔을 느꼈다. 페로그라쥬의 처참한 마지막 모습 때문에 그
런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북부에서 보낸 4년 동안 그녀는 나가의
손에 자행된 처참한 살육을 수도 없이 보았다. 낭자한 유혈과 피냄새로
뒤범벅이 된 그런 광경에 비해 소각된 페로그라쥬의 모습에는 불이 가져
다주는 묘한 깨끗함이 있었다. 사모가 느낀 서글픔은 그 폐허의 모든 곳
에 남겨져 있는 무감각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집행은 네가 했지만 판결을 내린 것은 네가 아니겠지. 륜. 나는 누가
이 참상을 원했는지 알고 있어. 베미온 굴도하, 키타타 자보로, 그리고
귀하츠 신뷰레가 이것을 원한 것이겠지. 너는 그들의 도구야. 하지만,
하지만 너는 생각할 수 있는 도구야. 그런데 이 무감각함은 뭐지? 저주
받을 용인의 감각 같으니! 너무도 예민하게 주위를 느끼는 네겐 더 이상
너 자신을 느낄 힘이 남아있지 않아.]
사모는 마루나래의 갈기를 움켜쥐었다. 마루나래는 떨리는 그녀의 손길
에 불안함을 느낀 듯 사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을 위해 죽는 것은 왕인 나의 일이야. 네가 아니야! 너는 케이건
드라카가 되어선 안돼.]
사모는 가면을 다시 착용했다. 마루나래에 오른 사모는 금군들이 일어
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놔두지 않겠어.]
마루나래가 걸음을 뗐다. 두억시니들은 서서히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페로그라쥬의 잔혹한 폐허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사모는 그 안으로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뒤로 돌아서 지금이라도 도시를 우회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비로소 사모는 페로그라쥬를 벗어
났다. 도시에 지나치게 가까웠기에 숲의 청신함은 부족했지만 사모는 최
악의 악몽 같은 도시를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남쪽을 향해 달렸다.
수호자 세리스마는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호자 보트린은 조심
스럽게 닐렀다.
[갈로텍은 곧 그 관문 요새를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세리스마는 침울하게 닐렀다.
[그렇게 상황이 녹록치 않아. 갈로텍은 그 높은 곳의 날씨를 바꾸는 것
에 힘을 다 소모하고 있어. 휘하의 수호장군들이 일으키는 폭풍은 관문
요새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해. 그곳은 원래 날씨가 험악한 곳이니까.
게다가 갈로텍이 그곳의 수력을 거의 다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수호장군
들은 다른 곳에서 폭풍을 만들어와야 하지. 또한 그 폭풍은 갈로텍의 날
씨 조절을 방해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결국 병사 대 병사의 싸움이잖습니까? 그곳에는 주퀘도 사르
마크도 있습니다. 그 자는 전쟁의 달인이잖습니까.]
[그런데 관문요새는 그 달인을 거꾸러뜨린 유일한 상대지. 아무래도 통
행료를 보내주는 방법을 생각해봐야겠군.]
보트린은 비늘을 약간 세웠다. 세리스마의 제안은 처음 나온 것이 아니
었다. 갈로텍이 시구리아트 유료도로에 묶여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을
때 세리스마는 곧 그들에게 통행료로 쓸 대금을 보내줄 방도를 궁리했
다.
하지만 그들에게 접근하여 통행료를 건네줄 수 있는 부대들은 모두 남
진 중인 북부군을 막기 위해 급히 회군 중이었다. 통행료를 전달하는 데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있는 위치가 몇 명의
수호장군들이 기온을 조절하지 않는 이상 접근하기도 힘든 추운 지방이
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런데 남진하는 북부군을 상대하기 위해 가장 필
요한 것이 바로 수호장군이었다. 시우쇠와 뇌룡공을 저지할 수호장군이
없다면 병사가 수십 명이든 수십만 명이든 별 차이가 없다. 세리스마가
내놓은 해결책은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을 모조리 모아 통행료 수송 부
대를 꾸린다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호자들이 수호장군이 되
어 떠났기 때문에 하텐그라쥬에는 수호자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하텐
그라쥬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보트린은 그 의견에 반대했
다.
[얼마 남지 않은 수호자들까지 이곳을 떠난다면 도시는 누가 지킵니까?
지도그라쥬가 이 도시를 보호해주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세리스마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텐그라쥬에 대한 지도그라쥬의 영향
력이 커진다면 차기 대수호자의 자리가 누구에게 돌아갈지는 분명했다.
세리스마는 지도그라쥬의 오라기를 떠올리며 비늘을 부딪쳤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투자하여 이 모든 일을 준비하고 실행해온 그는 도저히 그
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리스마는 단호하게 닐렀다.
[수호자들을 보내지는 않아.]
[그러면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북부에 대해 우리보다 잘 아는 자가 필요해. 우리는 이곳을 떠난 적이
없어. 하지만 지금 이 도시에는 북부에 가 본 나가들이 많이 들어와 있
잖아? 그 중엔 우리보다 더 나은 생각을 해낼 수 있는 자가 있을 거야.]
보트린은 안도했다. 할 니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쥬어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센 가문에서 태어난 남자인데, 그 가문의
가주 자리를 원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무슨 니름인가?]
[그는 모험가라고 불러야 할 만한 사람입니다.]
보트린은 쥬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닐렀다. 세리스마는 의아해
했다.
[그 녀석은 어떻게 북부를 돌아다닌 거지?]
[군단을 따라다닌 거죠. 나가들로부터 불신자를 지켜주려는 척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즉 나가의 공격이 임박한 장소에서 주로 활동했
다는 니름이지요.]
[그렇군. 공격하기 위해 수호장군들이 기후를 바꿔놓은 곳이군. 하지만
그러려면 재주가 비상해야겠군.]
[그렇습니다. 군단과 항상 적당한 거리를 두는 재주가 있어야 하지요.
자칫 잘못하면 차가운 지역에 고립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녀석이 좋겠군. 그렇게 비상한 자라면 뭔가 괜찮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 자를 만나봐. 보트린.]
[알겠습니다.]
보트린은 세리스마에게 인사한 다음 그의 방에서 물러났다.
계단을 내려오던 보트린은 어느 층계참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곳
은 심장탑의 특별한 부분이었다. 내려가는 계단과 옆을 번갈아 보며 고
민하던 보트린은 결국 몸을 돌렸다.
문 앞에는 두 명의 수련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련자들은 그
곳의 책임자를 알아보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보트린은 간단히 화답한
다음 열쇠를 꺼내었다. 잠긴 문을 연 보트린은 안으로 들어가 빗장을 질
렀다.
방 저편에는 거대한 금속 상자가 차갑게 번득이고 있었다. 카린돌 마케
로우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냉동 장치였다. 보트린은 냉동 장치의 한쪽
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만 보고서도 그 장치가 이상 없이 움직이고 있음
을 확인했다. 무수한 시간 동안 이미 익숙해진 동작으로 보트린은 일상
적인 점검을 시작했다. 냉동 장치의 냉기가 새는 부분이 없는지 조사하
는 것은 나가의 눈에는 간단한 일이었다. 줄어든 약품을 보충하고 모든
것이 정상임을 확인하자 점검은 완료되었다.
하지만 보트린은 점검이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돌려 빗
장을 확인한 보트린은 다시 냉동 장치를 바라보았다. 우물거릴 시간은
없었다. 밖에서 지키고 있는 수련자들은 일상적인 점검에 필요한 시간을
잘 알고 있었다. 보트린은 결심을 굳히고는 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걸
려있는 털옷을 걸친 보트린은 다시 냉동 장치로 돌아가 그 문을 붙잡았
다. 그리고 주저없이 열었다.
냉기가 그를 엄습했다. 보트린은 털옷을 단단히 여미면서 어두운 내부
를 들여다보았다. 점차 윤곽과 빛깔이 뚜렷해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경험한 일이었지만 보트린은 언제나처럼 흥분과 긴장을 느꼈다.
보트린은 자신의 신부를 바라보았다.
'왜 그들은 여신을 민감하게 느끼는 내 능력을 단지 쓸모있는 능력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도 이 분의 신랑들인데!'
보트린은 왜 그런지 알고 있었다. 신랑이니 신부니 하고 니르지만, 그
것은 나가의 세계와 무관한 명칭이었다. 그들의 세계에는 남녀의 항구적
인 결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트린은 공상에 빠져들었다. 불신자들의 풍습인 결혼이 그 공상의 주
된 내용이었다. 결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 보트린은 나가들이 가
지고 있지 않은 이국적인 풍습에 자신과 여신을 대입했다. 어처구니 없
지만, 그렇기에 매혹적인 상상이었다. 그는 여신을 느꼈다. 그랬기에 여
신을 동정했다.
그는 여신을 사랑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은 보트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냉동 장치 안의 냉기가 희미해져 있었다. 보트린은 황급히 문을 움켜쥐
었다. 그러나 그것을 닫는 대신 보트린은 멍한 표정으로 카린돌 마케로
우를 바라보았다. 냉기가 사라지자 그 모습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그
눈꺼풀은 금방이라도 열려 보트린을 바라볼 것 같았다.
가까스로 보트린은 문을 닫았다.
뒤로 물러나 털옷을 벗으면서 보트린은 비늘을 곤두세웠다. 채 가시지
않은 흥분과 공상의 즐거움, 그리고 다음 번에는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텐그라쥬 외곽의 공터에서, 쥬어의 의용군들은 한 자리에 모여앉아
자신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해 고민했다.
처음 자신들이 마호가니 군단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북부의 경험이 풍부한 그 자들은 군단
과 그들의 행동에 커다란 차이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차이를
둔다면 군단은 불신자들을 죽이고나서 전리품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알
아보지만 그들은 전리품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알아본 다음에 죽인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오히려 군단에 편입된다는 사실을
반기기까지 했다. 그 사실을 반기는 자들은 쥬어가 사업을 그만두고 센
가문인지 뭔지를 계승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자들로서, 그런 축들은 군단에 들어갔으니 다시 북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아스는 하텐그라쥬를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들은 이제
동료가 된 군단병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자신들이 하텐그라쥬 방어를 담
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어리둥절해졌다. '하텐그라쥬를 방어
하다니, 지도그라쥬가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런 추리는 그들
을 질겁하게 했다. 마음껏 쳐죽일 수 있는 불신자들과 나가는 분명히 다
른 상대였다. 군단을 따라다녔기에 그들은 수호장군들의 능력과 군단의
힘을 충분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 자들을 적으로 두게 된다는 것은
도저히 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한 반응으로서 그들은 쥬어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서로 가는 길이
달라도 함께 했던 나날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다면 그 어찌 아름다운 일
이 아니겠느냐는 취지의 니름을 전달했다. 떠날 테니 북부에서 얻은 보
물을 나눠달라고 니른 것이다. 하지만 무섭도록 추운 북쪽에 있다가 따
뜻한 남쪽으로 돌아오자 정신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인지 쥬어는 그들
을 몹시 당혹시키는 대답을 했다. 그들은 탈영하는 자는 사형이라는 니
름에 동의했지만 그것이 자신들에게 해당하는 니름이라는 사실은 이해하
기 힘들어했다. 결국 그들은 실망하고 의기소침해져서 모였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번잡하고 황당한 니름들이 오가는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들
의 니름에 별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누워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의용군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의용군의 사업에 별 애정이 없었
고, 따라서 군단에 편입되는 것에도 별다른 거부감은 없는 듯했다. 의용
군들은 그들도 논의에 포함시켜야 되지 않나 생각했지만 두 사람은 지도
그라쥬와 싸우든 누구와 싸우든 배만 곯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무신경한
태도로 다른 자들의 호의를 거부했다. 그들이 태평하게 잠든 모습을 보
자 다른 자들은 호의를 베풀 마음도 없어졌다.
만약 그들 중 청력에 주의를 기울인 자가 있었다면 두 사람이 옆으로
돌아누운 채 육성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기묘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는 없었고, 그래서 두 사람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카루. 정말 지도그라쥬가 여길 공격하려는 것일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아. 스바치. 마호가니 군단에는 가장 많은 수호
장군이 있지. 만약 지도그라쥬가 내습한다면 수호장군들이 절실하게 필
요해. 하지만 저 꼴을 봐. 병사들의 숫자도 부족하지만, 무엇보다도 수
호장군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지휘를 맡고 있는 것은 비아스 마케로
우였어."
"제기랄, 비아스라니. 우리를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스바치는 비늘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입 모양이 보이지 않도록 돌아
누워 있었지만 비늘이 움직인다면 다른 자들이 의아해할 것이기 때문에
스바치는 자신을 억누르려 애썼다. 쉽진 않았다. 카루는 우울하게 대답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여신을 해방시켜야지. 이 웃기는 패거리들
덕분에 하텐그라쥬에 돌아오는 데는 성공했어. 이젠 우리가 미루어두었
던 그 마지막 단계를 생각해봐야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지?"
스바치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약간 떠오른 것이 있어. 만약 이곳에 대한 공격이,
그게 어떤 세력에 의한 공격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격이 일어난다면
심장탑의 방어가 약해질 거야. 수호자들도 모두 방어에 나설지도 모르니
까."
"그 틈에 심장탑에 잠입한다?"
"바로 그래."
"그렇다면 여기를 떠나야겠군. 이곳에 계속 있는다면 바로 그 방어에
끌려나가게 될 테니까. 하지만 쥬어가 우리를 떠나게 해줄까? 그 악독한
녀석은 오랫동안 함께 했던 동료들의 요청도 거절한 것 같은데."
"몰래 떠나는, 그러니까 도망치는 것은 어떨까? 밀림에 숨어있는다
면…"
"그러면 전투가 벌어졌을 때 잠입하기 쉽지 않을 거야. 그 시점에 우리
는 심장탑 가까이에 있어야 해."
"그렇다면 도시 쪽으로 도망쳐서 아무 가문이나 방문한다면? 여기는 하
텐그라쥬야. 이렇게 큰 도시에서 우리가 어느 집을 방문 중인지 어떻게
찾아내겠어?"
카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쉽지 않아. 하텐그라쥬가 지나치게 소란스러워졌어. 사람들은
집밖으로 너무 자주 나오더군. 우리는 여자들을 호위하기 위해 계속 밖
으로 나와야 할 걸. 그러면 발각될 가능성이 높지. 출입을 별로 하지 않
는 가문을 알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어. 자네 혹시 그런 가문 아나?"
스바치는 특별히 떠오르는 가문이 없다고 대답했다. 카루 역시 마찬가
지였기에 그들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잠시 후 카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쥬어에게 비밀을 알려주면 어떨까?"
"비아스가 화리트를 죽였다는 것? 물론 쥬어가 그 비밀을 알면 비아스
를 조종하는데 쓸 수 있으니 좋아하겠지. 하지만 증거가 없어.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 뿐이고."
"아니, 내가 말한 것은 그것이 아냐. 수호자들이 여신을 구속하고 있다
는 비밀 말이야."
"음? 그걸?"
"그래. 우리가 나서서 니르는 것은 소용이 없겠지. 수호자들은 당장 우
리를 눌러죽일 테니까. 하지만 쥬어는 대가문들에게 호의를 얻으려 애쓰
고 있어.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기도 하고. 잠깐. 생각 좀 해보자. 뭔
가 계획이 될 것도 같아."
카루와 스바치는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차츰, 그들의 머리 속
에 모호하나마 어떤 계획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티나한은 격분하여 외쳤다.
"이리줘! 내가 해보겠다!"
"그러시오."
케이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를 내밀었다. 티나한은 그것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철창을 처음 쥐었을 때 그랬
을까 싶은 신중한 동작이었다. 티나한은 허리를 숙여 접시를 바닥에 내
려놓았다. 그는 신중하게 접시를 오른쪽으로 약간 돌렸다가, 다시 왼쪽
으로 조금 돌렸다. 마침내 만족할 만한 상태가 되었는지 티나한은 똑바
로 일어섰다. 그는 제자리에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티나한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티나한은 위로 뛰어
올랐다. 삽시간에 티나한은 수십 미터 높이로 솟구쳤다. 비형이 감탄하
며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케이건이 그의 손을 나꿔챘다. "비형. 이리
로."
티나한은 정점에서 우레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온몸이 세 배로 부풀어
올랐고 그 눈은 전의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티나한은 바닥에 놓인 접시
를 향해 똑바로 내려떨어졌다.
충돌의 순간 굉음과 함께 바닥의 석판들이 박살이 났다. 미리 대피했던
케이건과 비형은 최후의 대장장이의 등 뒤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티나
한은 박살난 바닥 옆에서 오른쪽 다리를 움켜쥔 채 한쪽 발로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꽤나 아픈 듯했지만, 두 명의 수탐자들은 무정하게도 티나
한 대신 접시가 있던 쪽을 바라보았다. 티나한도 바닥에 주저앉아 발목
을 주무르며 그 쪽을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피어난 먼지가 사라진 곳에
서는 접시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잠시 후 접시는 회전을 멈추었다.
티나한은 비명을 질렀다. 접시는 잔금 하나 없이 깨끗했다.
손에서 놓아도, 집어던져도, 발로 짓밟아도 깨지지 않았던 접시는 분노
한 레콘의 혼이 담긴 일격마저 견뎌내었다. 최후의 대장장이는 떨떠름하
게 말했다.
"저걸 무기로 써도 되겠군. 대단한 강도인데. 도대체 앞의 두 번은 어
떻게 깬 거냐?"
"가슴 높이에 들고 있다가 놓는 방법으로."
"그럼, 이번에는 왜?"
"그렇게 물을 줄 알았소."
최후의 대장장이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모르겠다는 말이군."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편에서는 티나한이 비형에게 접시를 강제로 쥐어주
고 있었다. 비형은 영문을 모른 채 티나한이 시키는대로 접시를 머리 위
에 들어올렸다. 그러나 곧 도깨비는 사색이 되었다. 티나한은 수십 걸음
정도 물러난 후 철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간다!"
비형은 접시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그 이후로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다. 한가하다는 이유로 구경을 하던 단
도장 시루가 약이 올라 앞으로 나섰다가 자신의 모루를 두 개 깨버리고
는, 뒤늦게야 대장장이에게 가장 불길한 일을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저질렀다는 사실에 질겁하여 '대장장이의 모루가 깨졌을 경우 취해야 하
는 비방'을 물어보기 위해 동료 대장장이들에게 달려간 다음, 케이건은
그 소동을 중단시켰다.
"소용이 없소. 그만둡시다."
티나한은 헐떡거리며 접시를 노려보았다. 아무도 만지고 싶어하지 않았
기에 그것은 여전히 깨진 모루 위에 놓여있었다.
"도대체 왜 안 깨지는 거지? 전에는 퍼석퍼석 잘만 깨지더니."
"어디에도 없는 신은 어디에도 없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푸념을 내뱉은 비형은 동료 수탐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끼곤 당황했다. 도깨비는 농담이라고 말했고 잠시 생각하던 케이건 역
시 고개를 가로질렀다.
"어디에도 없는 신께서는 어디에도 없을지 몰라도, 그 신체는 어딘가에
있긴 있어야 할 거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소. 사실 지
금 같은 상황에서 뭐가 합리적인지 말하긴 어렵지만."
"저게 깨지지 않는 이상 어디에도 없는 신의 신체를 찾아나설 수 없는
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케이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별 도리 없다는 듯이 말했다.
"가이너 카쉬냅은 신이 전일 근무 가능한 무보수 만능 하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기왕 근처에 계신 신을 모른 체할 필요도 없을 것 같소. 아기에
게 갑시다."
아기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최후의 대장장이가 그 이름을 지어야겠지만
그녀는 여신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꼈다. 혹은 사람들이
괴로움 속에 추측하는 것처럼 아기를 자신의 딸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추측을 질문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출산
할 때 느꼈던 고통의 앙금이 아직껏 몸 곳곳에 엉겨있을 테지만 최후의
대장장이는 의연하게 행동했다. 아기가 누워있는 요람을 가리키며 "저
요람을 만들면서 제단을 만들고 있는 거라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라고
말한 것이 그녀의 유일한 감정 표현이었다. 비형의 동정 어린 눈빛을 외
면하며 최후의 대장장이는 요람으로 허리를 숙였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일어나소서."
아기는 눈을 떴다. 그녀는 눈을 크게 꿈뻑거리다가 부리를 좍 벌려 하
품했다. 그 모습은 보통의 어린 레콘이었다. 하지만 솜털에 뒤덮인 몸을
꿈틀거리던 아기는 케이건들을 발견하고는 말을 했다.
"수탐자들이 왔구나. 앉혀주겠니?"
비형과 케이건은 머리가 울린다고 생각했다. 아기의 목소리는 보통으로
말할 때조차 지나치게 크고 울리는 목소리였다. 대장장이는 아기를 앉혔
다. 땅이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는 실로 놀라운 능력을 제외한다면
아기는 보살핌이 필요한 보통의 아기였다. 불덩이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시우쇠를 기억하는 비형과 티나한은 아기에게 가시적인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 퍽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기는 노란 색 솜털뭉치 같은 머리를 여기저기로 돌리다가 누구 한 사
람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벽이 흔들거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접시를 깼느냐?"
"깨지지 않았습니다."
아기는 의아해하며 설명을 요구했다. 케이건은 별의별 짓을 다해보았지
만 접시가 깨지지 않았음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아기는 여전히 누
구에게도 시선을 맞추지 않는 그 묘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럴 수도 있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는 빠른 것을 좋아하니까. 나와는 반대로. 나는 느린 쪽을 선호하
지."
잠시 고민해본 케이건은 어렵지 않게 '그'가 자신을 죽이는 신을 가리
키는 말임을 깨달았다. 접시는 즈믄누리의 마지막 방에서 나왔다. 케이
건은 아기가 땅처럼 태평하다면 그것도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아
기가 한 말은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케이건이나 다른 수탐
자들의 조바심과 상관없이 아기는 단조로운 태도로 흥얼거리듯이 말했
다.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몇십만 년쯤 써서 철을 만들어내면 그는 당장 그걸 칼로 바꿔서 녹을
잔뜩 슬게 한 다음 내게 돌려주지. 심할 경우 몇 년만에 그 지경으로 만
들어서 돌려주더군. 왜 그렇게 성격이 급한지. 그러니 어떻게 내 아이들
에게 줄 철에 그가 손 댈 수 있도록 하겠어."
수탐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때 최후의 대
장장이가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그 순간 케이건도 깨달았다.
별빛로에는 불이 없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철은 불이 아닌 별빛으로 제
련된다. 별철이 무기로 태어날 때는 불이 사용되지만 최초의 광석이 선
철로 바뀌는 과정에는 불이 관련되지 않는다. 문득 케이건은 한 가지 사
실을 더 떠올렸다.
"당신은 무기를 주시는 겁니까?"
아기는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
"그렇다면 발자국 없는 여신은…?"
"짐작하는 것 같은데, 말해보지?"
"이름입니까?"
"잘 맞췄구나."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무엇입니까?"
아기는 잠시 침묵한 다음 다시 방을 흔들었다.
"네가 이미 아는 것을 말해줄 수는 있지만 내가 먼저 가르쳐주긴 어렵
구나. 그것은 그의 일이기 때문에."
케이건은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접시가 깨지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해결해야겠습니
까? 그건 저희들이 알지 못합니다."
"시우쇠에게 가자."
"네?"
"그 접시를 만든 시우쇠에게 가자. 최후의 대장장이야."
최후의 대장장이는 주춤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아기는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말했다.
"저 티나한이라는 아이가 등에 맬 수 있는 물건을 하나 만들거라. 저
아이가 나를 업어야겠다. 하지만 저 아이가 팔을 쓸 수 있어야 될 테니
적절한 장치가 필요하겠구나. 만들 수 있겠지?"
티나한은 기겁했다. 그는 그 모습이 자신의 전사적 풍모를 심히 훼손시
킬 것임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뭐라 항의하기도 전에
아기는 다시 잠들고 말았다. 아기가 잠든 것을 확인한 최후의 대장장이
는 똑바로 서더니 꽤 의미 깊어 보이는 웃음으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은 그만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비형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것은 그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티나한의 결사적인 반대 때문에 대장장이들은 안장에 딸랑이를 부착하
는 것을 포기했다. 티나한은 안장이라는 이름조차 반대했지만 그보다 더
적당한 이름이 없었기에 그냥 그 이름으로 확정되고 말았다. 제작된 '안
장'은 티나한의 어깨에 걸릴 멜빵과 허리에 묶일 허리띠가 달린 질통 비
슷한 모양이 되었다. 보통의 질통과 달리 바람이 잘 통하도록 뼈대만으
로 구성된 점이 달랐지만. 비형은 착용감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한번 메
어보라고 열성적으로 권했지만 티나한은 때가 되면 메겠다고 극구 사양
했다. 물론 그 때가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들의 출
발을 지체시키고 있는 폭풍이 멈추면 티나한은 안장을 메어야 할 것이
다.
그랬기에 비형은 티나한을 자폐 증상으로 몰아가는 것을 그만두고 케이
건에게 찾아갔다.
케이건은 두터운 털옷을 입은 채 대장간의 입구에 서서 폭풍의 추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형은 폭풍이 그치더
라도 오늘은 출발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지만 케이건의 의견은 달랐다.
"대장장이들의 말을 들어보니 맑은 기간이 점점 줄어들 거라더군. 그러
니 날씨만 좋으면 밤이라도 출발해야 할 것 같소. 티나한이 좋아하겠군.
이곳을 방문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테니."
"대장장이들이 아기를 참 좋아하는 것 같죠?"
"여기선 어린 아기를 볼 일이 없으니까."
"그렇겠군요. 아, 그런데 아기와 나눈 이야기 중에서 이해하기 힘든 말
이 있었습니다. 무기를 준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이름을 준다
고도 하셨는데?"
케이건은 잠시 침묵했다. 설명할 말을 찾아내는 것이리라 생각하며 비
형은 가만히 기다렸다. 사정없이 질타하는 폭풍이 어두워지는 하늘의 빛
깔을 기괴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밤의 도움으로 쌓인 거성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비형은 밤이 그토록 다채로운 색깔로 자신을 치장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케이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우쇠님의 능력이 보통의 도깨비와 같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좀
묘한 생각을 하게 되었소."
"예? 무슨 말씀입니까?"
"도깨비들은 이미 자신을 죽이는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소. 그렇
다면 자신을 죽이는 신은 도깨비들에게 불을 준 거라 가정할 수 있을 거
요. 한편 나가들의 수호자를 생각해보면 그들 또한 발자국 없는 여신에
게 받는 것이 있소. 여신의 신랑이라는 지위요. 그것은 그들이 받는 이
름, 즉 신명에 포함되어 있소. 두 신이 각자 자신이 보살피는 선민종족
에게 불과 이름을 주었다면 다른 신들도 뭔가를 주었을 거라는 가정 또
한 가능하오."
비형은 놀란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손을 움직여 대장
간을 가리키듯 하며 말했다.
"이곳 최후의 대장간에서 레콘들은 무기를 받소. 나가들은 쉬크톨이라
는 위대한 검을 만들어내고 도깨비 대장장이들은 다른 종족들이 감히 상
상하는 것조차 두려운 방식으로 철을 다룰 수 있소. 하지만 레콘은 최후
의 대장간으로 와서 자신의 무기를 받소."
"그렇다면?"
"무기요. 비형.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그녀의 아이들, 선민종족 레
콘에게 주는 것은 별빛으로 제련된 철로 만들어진 무기였소. 그것은 불
로 만들어졌기에 곧 녹스는 도깨비들의 무기와도 다르고 히참마에 의해
부러지는 쉬크톨과도 다르오. 시험해볼 수는 없지만, 아마 히참마로도
별철은 파괴할 수 없을 거라 생각되오. 그것은 여신이 그녀의 선민종족
에게 주는 것이니까."
케이건은 옆의 기둥에 손을 짚었다. 얼음산에 부딪힌 거센 폭풍이 갈가
리 찢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사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 하
지만 나는 이제 알 것 같소. 그 분이 자신의 선민종족에게 무기를 만들
어 주시는 곳. 이곳 최후의 대장간이 바로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사
원이었소. 그리고 이곳에 있는 대장장이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지만
여신의 사제들이었던 거요."
비형은 주위를 빙글 둘러보았다. 그리고 경외감에 빠져 외쳤다.
"그렇군요! 그럴 듯합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여신의 사원에 있는 것
이었군요! 이럴 수가. 왜 아무도 깨닫지 못했던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요. 어, 그런데…?"
케이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비형은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허둥거렸다. 케이
건이 그를 도와주었다.
"그렇소. 그런 사실들을 놓고 본다면, 그것이 궁금해지는 것이 당연하
오. 하지만 여신은 내가 알아내어야 한다고 하셨소. 그런데, 아무리 생
각해 보아도 나는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이 되지 않소."
비형은 약간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
다. 도깨비는 깊이 생각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이 킴들에게 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티나한의 간절한 희망이 하늘에 닿았는지 폭풍은 새벽 쯤에 수그러들었
다. 하지만 젊은 레콘들은 위대한 수탐의 길을 떠나는 수탐자들을 전송
하는 영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 때문에 티나한은 차
마 '이 잡것들아, 구경났냐! 잠이나 자라!'고 외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시루가 엄숙한 동작으로 안장을 들고 왔다. 티나한은 수염볏을
벌겋게 물들인 채 등을 돌렸고 시루는 그 어깨에 안장을 메도록 도와주
었다. 젊은 레콘들 사이로 그다지 예의 바르다고는 보기 힘든 미소들이
번졌다. 그 미소들이 소음을 동반하기 시작할 때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
은 최후의 대장장이가 걸어나왔다. 젊은 레콘들은 침묵했다.
최후의 대장장이는 티나한의 안장에 아기를 넣고 고정시켰다. 비형이
앞으로 나서 안장에 도깨비불을 붙였다. 이제 안장은 매서운 추위에서도
아기를 보호할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대장장이는 안심이 되지 않는 듯
안장을 손으로 쓸어만졌다.
그 때 아기가 말했다.
"고마워요. 어머니."
티나한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눈이 안장에 집중되었다. 그것은 쾅쾅
울리는 여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최후의 대장장이는 안장을 꽉 움켜쥔
채 떨리는 눈으로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
도 모두 두렵다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그렇게 서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부리가 열렸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여신이여."
아기는 빙긋 웃었다.
"대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머니의 딸이에요. 물론 지금 이렇
게 조리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여신의 도움 덕분입니다만."
다른 대장장이들과 달리 불이 없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최후의 대장장이
에겐 풍성한 깃털이 돋아나 있었다. 그 깃털들이 곤두서 최후의 대장장
이의 몸이 부풀어올랐다.
"정말… 정말 네가 내 딸이냐?"
"그래요. 어머니.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저는 어머니에게 돌아올 거
예요."
"돌-아-온-다-고-!"
예상치 못한 계명성에 비형은 뒤로 쓰러질 뻔했다. 아기는 다시 웃었
다.
"네. 신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까요? 난감한
일들이 많겠지요. 그래서 이 모든 혼란이 종식되고 모든 일들이 끝나면
여신께서는 제 몸에서 벗어나 다른 레콘에게로 전령하실 생각이십니다.
저는 보통의 레콘으로 돌아올 수 있겠지요."
수탐자들은 왜 아기의 모습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훗
날 그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케이건이 질문했다.
"잠깐, 죄송합니다. 그러면 시우쇠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의 몸은
불덩이로 변해서…"
질문하던 케이건은 곧 그것이 쓸데없는 질문임을 깨달았다. 시우쇠, 그
러니까 도깨비 시우쇠의 육은 불로 변했지만 그 영은 다른 도깨비들과
함께 화신과 함께 했던 추억들을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은 육의 죽음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비형의 얼굴을 본 케이건은 자신
의 추측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홀에 있던 거인들은 반가운 표정으로
최후의 대장장이를 바라보았다. 아기가 말했다.
"그 때가 되면, 제게 이름을 주세요. 어머니."
최후의 대장장이는 가슴이 벅차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그녀가 겨우 부리를 열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아기가 잠든 후였다.
최후의 대장장이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솜털로 덮인 아기의 머리를 쓰
다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강보로 그 머리를 덮었다. 강보를 단단히
여민 최후의 대장장이는 갑자기 번개처럼 몸을 움직였다.
티나한은 갑자기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나타난 최후의 대장장이를 보
고 깜짝 놀랐다. 최후의 대장장이는 희열에 찬 표정으로, 그러나 여차하
면 티나한의 수염볏이라도 잡아당길 듯한 기세로 말했다.
"잘 들었냐?"
"예?"
"잘 들었냐? 이 아이는 내 딸이다. 네 목숨을 걸고 보호해라! 상처 하
나만 냈단 봐라. '물'에 빠트려 죽이겠다!"
기절에서 깨어난 다음 티나한은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약속의 진실성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수탐자들은 각자의 자리에 섰다. 케이건은 개썰매에 올라
탔고 비형은 나늬의 등에 앉았다. 하지만 티나한은 떠날 준비를 갖추
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최후의 대장간에 있던 대장장이들과 젊은 레
콘들이 모두 그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육아의 어려
움에 대해 몇 마디를 꺼내어 티나한을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트릴 뻔한
자들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의 레콘들은 그들의 행운을 빌었다. 티나한이
겨우 그들에게서 풀려나자 케이건은 별 말 없이 출발했다. 채찍이 휘둘
러지고 라호친가히들이 얼음을 박찼다.
수탐자들은 남쪽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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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1. '땅의 울음' 편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2-1. 관련자료:없음 [5627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7-18 00:57 조회:7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