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11. 땅의 울음 - 2
소메로 마케로우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하텐그라쥬의 그런 모습
을 본 적이 없었다.
냉혹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텐그라쥬는 차가움마저 느껴질 정도
로 고요한 도시였다. 하지만 지금 소메로가 바라보는 하텐그라쥬의 도시
는 그 구성원들만 제외하고 본다면 불신자들의 도시나 다름없었다. 비록
소메로는 불신자의 도시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가 받은 인상은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수레와 군중, 그리고 상인들. 도시는 모욕
적일 만큼 활기에 넘쳐 있었다. 도시에 막대한 부가 밀려들고 있음은 눈
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가의 군대가 북쪽에서 긁어모은 부였다. 그리
고 이곳에는 인간들의 군대가 일으키는 부작용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시
무시했던 전쟁터의 기억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꼴이 되어 돌아와서는
술에 진탕 취했다가 숙취와 두려움에 떨며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는, 그
런 종류의 병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병사들은 호의적이었고 유쾌했
다. 그들은 지니고 온 부를 도시에 풀어놓는 바쁜 작업 중에서도 틈틈이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쟁터의 아름다운 추억 - 농가를 파괴하고 농
부의 아들딸을 도륙한 것 따위 - 을 자상하게 들려주거나 인간의 손가락
으로 만들어진 소박한 목걸이를 수줍게 내보이곤 했지만, 사고는 저지르
지 않았다. 부작용 없는 깨끗한 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부의 막대
한 유입은 하텐그라쥬에게 일종의 정신착란을 선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감히 소리를 들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소메로는 자신과 같은 구
식 여자에겐 지나치게 번잡한 시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시대에 마냥
즐거워할 수 없는 자신을 책망했다.
소메로는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그 니름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남자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소메로에겐 낯
선 모습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행위는 동조자를 확인하는 것이다. 하
지만, 남자들이 수백 명씩 동의한다 해서 그것이 어쨌다는 것일까? 소메
로는 화를 내고 싶은 것을 억누른 채 자상하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쥬어가 원하는 것과 같은 일은 가주님의 의지가 필요한 일이야. 하지
만 현재 가주님께서는 부재중이시다.]
[소메로 마케로우님께서 가문의 책임자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나 나는 가주가 아니야. 물론 현재 나는 가문 내부의 일을
결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외부에 대해 가문을 대표할 수는 없어. 그런
데 쥬어가 원하는 것은 마케로우 가문의 의향을 표명해달라는 것 아니
냐? 그런 것은 외부에 대해 가문을 대표할 수 있는 가주님, 혹은 그 대
리인의 일이다. 나는 그럴 수 없어. 따라서 너희들의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남자들 중 하나가 약간 주저하듯이 닐렀다.
[소메로 마케로우. 쥬어는 이미 많은 유력한 가문의 내락을 받았습니
다.]
[그러냐? 그에겐 참 다행스러운 일이구나.]
진심으로 기뻐해주기로 마음먹었던 소메로는 남자들의 반응에서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들은 약간 미심쩍은 표정으로 소메로
를 바라보았다.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소메로는 곧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옷 아래에서 비늘이 부딪혔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력한 동
조자가 많다는 것을 내보인 다음 적이 될 것인지 같은 편이 될 것인지를
명확히 하라고 니른 것이었다. 자신이 영리하다고 믿지는 않는 소메로라
하더라도 만약 니른 상대가 여자였다면 별 어려움 없이 그 속뜻을 이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메로는 남자가 자신에게 협박을 하는 상황을 상
상할 수 없었다.
소메로는 분노에 차서 남자들을 쏘아보았다. 감히 여자, 비록 가주가
아니라 하더라도 한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여자에게 협박을 감행할 수
있었던 그 남자들도 여자의 그런 분노에는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
다. 남자들의 불안해하는 모습에 소메로는 겨우 자신을 추슬렀다.
[많은 가문이 쥬어의 뜻에 동의한다면 쥬어는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겠군. 우리 가문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에 너무 애석해하지 말라고 전해주길 바란다.]
남자들은 구태의연한 니름을 몇 마디 중얼거렸다. 소메로는 화를 내기
전에 그들을 쫓아버리려 마음먹었다. 그 때 누군가가 문밖에서 닐렀다.
[소메로 마케로우님?]
[들어오거라. 무슨 일이냐?]
하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소메로는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인에
게 남자들을 배웅하라고 니를 작정을 하던 소메로는 하인의 얼굴이 지나
치게 밝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아해하던 소메로에게 하인은 기쁨에 찬
니름을 보내었다.
[소메로 마케로우님. 가주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가주님께서!]
[그렇습니다.]
소메로는 반가움에 당장 달려나가려 했다. 그러나 남자들이 있다는 것
을 깨달은 소메로는 잠시 멈춰섰다.
[들으신대로 가주님께서 돌아오셨구나. 어쩌겠느냐? 며칠 내에 다시 방
문해주겠느냐? 가주님께 너희들의 요청을 전해드리겠다.]
남자들은 감사를 표했다. 소메로는 하인에게 남자들을 배웅하라고 니른
다음 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바쁘게 달려가는 하인들과 사용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또한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소메로에게 축하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소메로는 그들에게 웃음으로 화답하며 황급히 현관으로 통하는
계단을 달려내려갔다. 그 때 한 여인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소메로는 반
가움에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소메로를 올
려다본 순간 소메로는 계단 중간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깨의 먼지를 떨어내며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나가는 비아스 마케로
우였다.
비아스 마케로우는 소메로의 화난 모습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야 하
는 귀찮은 일이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소메로는, 과장없이, 미친 듯
이 화를 내었다.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는 두세나 마케로우'라는 선언은
하인들의 악몽이 될 것 같았다. 하인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나마 물러
가는 모습을 보며 비아스는 전투에 대비했다. 소메로는 화가 덜 풀렸다
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표정으로 닐렀다.
[돌아와서 반갑구나. 전쟁터에서 고생한 너를 좀 더 따뜻하게 맞아줬어
야 하는데, 어리석은 하인 때문에 못 볼 꼴을 보이게 되어 정말 미안하
게 생각해.]
그 때까지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던 비아스는 결국 언니에게 기회를 주
기로 결정했다. 소메로를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다. 영악한 하인들이 이
미 깨닫고 있는 사실을 소메로로 하여금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도
즐거울 거라는 생각과, 마케로우 가문에 여인들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실수지만,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은 알게 되었군.
가주님께서는 아직 돌아오시지 않은 것이군? 나를 가주로 착각하는 걸
보니.]
소메로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닐러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야. 수호자들은 가주님과 카린돌이 어느
군단에 계신지도 가르쳐주지 않아. 비밀이라고. 하지만, 세상에 나가의
니름을 들을 수 있는 불신자가 있어? 난 도무지 이해가 안돼. 이 전쟁에
서 절대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 있다면 첩자가 아닌가 싶어. 넌 혹
시 가주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니? 그리고 카린돌은?]
비아스는 소메로를 외면하며 닐렀다.
[수호장군들이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나도 가르쳐줄 수 없어. 난 여자고
수호자가 아니잖아. 그리고 첩자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들의 걱정이 맞을
지도 몰라. 뇌룡공의 이야기 못 들어봤어?]
[그 용인 니름이니?]
[그래. 그 녀석은 포로에게서 뭐든 짜내.]
[나도 그런 이야기는 들었어. 전쟁터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전부 시우쇠와 용인, 그리고 그의 용 이야기니까. 그 사람들은 그 용이
한번 화가 나면 세상의 모습까지도 바꿔버린다는 식으로들 니르더라. 하
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까지 비밀로 해야 해? 전쟁터에서 이렇게 멀
리 떨어진 이곳까지 용인이 나를 잡으러 올 리도 없잖아.]
[확신하지 않는 쪽이 좋을걸.]
소메로는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니름이야?]
[그건 천천히 이야기하지.] 비아스는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아까 나
와 스쳐지나가면서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던 그 남자들은 누구야? 방문자
인가?]
소메로는 다시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족들만 있는 자리였
기에 소메로는 분노를 여과없이 표출했다. 비아스는 언니의 장황한 설명
을 들으며 그 남자들이 실로 건방지고 오만하고 무례하며 무서운 것을
모르는 뻔뻔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군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고, 그래서 비아스는 언니의 설명 - 이라기보다는 성
토를 중단시켰다.
[정말 못된 놈들이군. 그런데 누군데?]
[내가 지금껏 설명하…지 않았나? 이런, 미안해. 너무 화가 나서. 그
놈들은 쥬어라는 남자의 하수인들이야. 쥬어라는 녀석이 하려는 일에 대
해 가문의 양해와 지지를 얻으려고 돌아다니고 있어. 이 집에 온 것도
우리 가문의 동의를 얻으려고 온 거야.]
[그 쥬어라는 자가 남자라고?]
[그래.]
[남자가 하려는 일에 가문의 양해와 지지가 필요하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
소메로는 격노를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놀라는 동생을
향해 닐렀다.
[가문을 계승하고 싶다는 거야. 남자 주제에!]
비아스는 분노보다는 흥미를 느꼈다. 소메로는 그런 동생에 대해 어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비아스는 자신이 얼마 전까지 남자인 수
호장군을 모시던 부관이었음을 닐러주며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소메로는 폭언을 남용하며 설명했다.
쥬어의 어릴 적 이름은 쥬어 센이었다. 그를 낳은 여인은 저 유명한 센
가문의 최연장자 수이신 센이었다. 스물 두 살이 되었을 때 쥬어는 심장
을 적출했고, 그 다음 하텐그라쥬를 떠났다. 그런데 그 쥬어가 얼마 전
하텐그라쥬로 돌아와서는 센 가문의 계승을 조심스럽게 주장함으로써 하
텐그라쥬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요청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첫째, 센 가문의 거
의 모든 여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했다는 것. 둘째, 현재 센 가문
에 남아있는 여인들 중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라디올 센뿐이
라는 것. - 비아스는 그 부분에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셋
째, 쥬어에게는 아마도 북부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막대한 재산이
있으며 그 재산을 대가문들에게 바치는 선물로 바꾸는 것에 막대한 열정
을 소비하고 있다는 점 등이었다. 비아스는 동정심 없이 닐렀다.
[가엾은 라디올에겐 더없이 황당한 일이겠군.]
[쥬어는 교활해. 그 영악한 녀석이 내세우는 것은 센 가문을 다시 부흥
시킨다는 명분이야. 사실 지금 센 가문의 꼴은 니름이 아니야. 라디올
센은 센 가문의 재산을 그 황당한 예술에 다 퍼부어댄 끝에 꽤 난처한
재정난에 처해 있거든. 쥬어는 유서 깊은 센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단
한 번만 남자의 계승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어.]
[출가외인의 신분에서는 가문을 도울 수 없으니까?]
[정확해. 지금 상태에서는 가문 근처에도 갈 수 없지. 아무리 많은 재
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걸 건네줄 수 없는 거야. 쥬어는 자신이
가문을 맡아 재건한 다음 라디올 센의 딸에게 가문을 넘겨주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 그러니까 차기 계승자의 후견인이 되겠다는 거야. 하지
만 그런 주장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어. 우선, 라디올에겐 아직 딸이 없
어. 그리고 또 한 가지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문제가 있지.]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는 문제군. 전례를 만든다는 거지?]
[그래. 실제로 센 가문 같은 유서 깊은 가문이 사라지는 것을 탐탁해하
지 않는 여자들도 그런 전례를 만든다는 것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어. 남
자들이 걸핏하면 후견인이니 뭐니 하면서 가문의 일에 끼여들게 되는 빌
미를 만들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쥬어는 북부에서 가져온 귀한 물
건들을 닥치는대로 대가문에 보내고 자기를 따르는 남자들을 풀어 가문
을 회유하고 있어. 괘씸하게도 그런 작업에 어느 정도 성과를 얻긴 했나
봐. 감히 협박 비슷한 니름까지 할 정도인 걸 보니.]
[정말 재미있는 남자로군. 그런데 수하의 남자들이 많다고?]
[주로 남자들이고, 여자도 좀 있어. 대장장이 같은 자들.]
[대장장이?]
[그래. 아무리 천한 것들이라지만 그렇게 수치를 모르다니, 어이가 없
을 지경이야. 페니나 같은 자는 아예 충복이라고 불러야 될 것 같아.
아, 그런데 너 피곤하겠구나.]
소메로는 쉬어야 할 사람에게 마음 어지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에
대해 사과하며 그녀에게 쉬라고 권했다. 비아스는 소메로에게 나올 때까
지 깨우지 말라고 부탁한 다음 자신의 방으로 갔다.
방 안의 묵은 공기는 비아스를 언짢게 했다. 미리 연락을 취했다면 소
메로는 방을 깨끗이 치워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아스는 잠시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달려와야 했다. 병력이라고 니르기도 민망한 그녀의 군대는
며칠 후에야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페로그라쥬의 파괴 소식도.
갑옷과 사이커를 벗은 비아스는 침대에 쓰러졌다.
발칵 뒤집힌 하텐그라쥬를 예상하고 왔던 비아스는 평온하기 짝이 없는
도시의 모습과 한가롭게 불평을 늘어놓는 소메로의 모습에서 페로그라쥬
의 수호자들이 뱀단지를 통해 연락할 겨를도 없이 당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비아스는 슬픈 소식을 전하는 전령의 역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불안과 혼란에 빠졌을 때 나
서고 싶었다. 비아스는 그럼으로써 하텐그라쥬 사람들을 단숨에 휘어잡
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텐그라쥬를 방어하기 위해선 시민들의 적
극적인 협력이 필요할 테니…
비아스는 벌떡 일어났다.
침대에 앉은 채 비아스는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내가 왜 수호자들을 위해 머리를 쓰고 있는 거지?'
비아스는 그런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런 기억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수호자는 그녀의 적이었다. 그들은 카린돌을 납치하
기 위해서 그녀를 이용했었고 비아스에게 있어 그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짧은 순간 비아스는 자신이 단지 동생 살해를 위해 필요
하다는 이유로 수호자 유벡스를 난도질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했지
만, 그 사실에 영향을 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비아스가 유벡스를 떠올
린 것은 그것이 갈로텍에게 주어야 하는 교훈의 좋은 모범이라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그다지 윤리적이라고 보긴 힘든 일련의 사고의 결과로서 비아스는 자신
의 상황을 재평가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수호자의 명령에
의해 하텐그라쥬 방어를 맡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
자 상황은 전혀 다른 의미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텐그라쥬가 내 손에 들어와 있단 니름이지.'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은 군권의 대부분을 움켜쥐고 있다. 그것은 뒤집
어 닐러서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 대다수가 도시를 떠나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모든 수호자들의 힘의 원천은 카린돌 마케로우에게 있다.
그 카린돌은 냉동장치 안에 있으며, 그 냉동장치는 심장탑에 있다. 그리
고 그 심장탑은 하텐그라쥬에 있다.
비아스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쥬어 센은 공정당당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탁받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
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나가 군대로부터의 보호을 애원하는 불신자들에
게 돈을 받고 그들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아간 틈을 타 그들을 살해한
쥬어의 사업도 그런 그의 성격으로 설명된다.
[그것이 불신자들과 맺은 약속이라도 저는 반드시 지켰습니다. 이제 아
무도 그들을 죽일 수 없게 되었지요.]
비아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가벼운 농담이었다.
[그런 식으로 돈을 모으셨군. 그런데 겨우 그 정도로 하텐그라쥬의 선
량한 여인들을 놀라게 할 만한 치부가 가능했다는 건가?]
[그건 시작이었지요. 그 돈으로 무기와 장비를 사서 의용군을 조직했습
니다.]
[의용군이라고?]
[저도 이 위대한 전쟁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실제로 한 일은?]
[원래 하던 사업을 대규모로 확장했지요.]
비아스는 알 것 같았다. 불신자들은 인본주의자로 태어난 것 같은 나가
들의 등장에 감동했을 것이다. 무의미한 학살을 막기 위해 당신들과 함
께 싸우겠노라고, 정의와 양심을 위해 동족의 가슴에 칼을 겨누겠노라고
강변하는 고매한 나가들에게 자기 고향의 방비를 맡긴 불신자들은 그들
의 성벽과 울타리 안에서 신속하게 살해되었다. 낭만적인 이야기를 지나
치게 좋아했던 것이 그들의 문제였다.
[약속을 지킨 것이군.]
[아무도 그들의 마을을 침범할 수 없게 되었지요.]
[불신자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절대로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멍청한 이야기를 정말 믿는다는 말
이야?]
[아, 모르십니까? 그들에게 우리의 목소리는 꽤 인상적으로 들립니다.]
[무슨 니름인지 알겠군.]
쥬어는 빙긋 웃었다. 비아스는 주위를 한번 쓱 둘러보았다.
[그런 사업으로 이 모든 재산을 다 모았나?]
[그 외에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비아스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 쥬어의 재산을 가늠할 수 있
었다. 쥬어는 어느 가문을 방문하는 대신 자신의 거처를 만들었다. 물론
그가 하텐그라쥬에 자신의 집을 짓는다면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오만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렇기에 쥬어는 하텐그라쥬 외곽의 공터에 야영지를 만
들었다. 말이 야영지였지, 바깥 생활의 불편함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웬만한 집 한 채를 덮을 수 있는 크기의 천막이 쥬어
의 거처였고 그 주위로도 무수히 많은 천막이 쥬어의 '의용군'이라는 패
거리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은 모두 풍족해 보였다. 하텐그
라쥬의 다른 여인들은 아마도 그 모습에서 '남자 주제에 하인을 많이 데
리고 있다'는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몇 년을 보낸
덕분에 비아스는 다른 여인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사실을 간파할
수 있었다. 쥬어는 그 시점에서 하텐그라쥬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패거리들은 분명히 실전 경험이 풍부할 것이
라는 판단은 비아스에게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일을 했는데?]
[글쎄요. 마케로우. 상당히 많은 일을 했다고만 닐러드리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을 많이 얻었겠군. 내게 흥미있을 만한 것도 있을까?]
쥬어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쥬어는 소메로 마케로우가 겪어야 했던
갈등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쥬어는 마케로우 가문의 실
제적인 가주를 향해 닐렀다.
[제 보잘 것 없는 수집품을 보아주신다면 더없이 영광이겠습니다.]
쥬어는 몇 사람을 시켜 그의 천막에서 상자를 들고 나오게 했다. 상자
는 크고 묵직한 것이었다. 쥬어는 직접 상자를 열었다.
휘황찬란한 광경이 펼쳐졌다.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상자 안에 가득했
다. 비아스는 특별히 고른 물건들로 내용물을 채웠음을 짐작했다. 모두
가볍게 집어갈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쥬어는 그녀의 짐작대로 닐렀다.
[마음에 드시는 것이 있으시면 가지십시오.]
비아스는 쥬어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래도 되나?]
[물론입니다.]
비아스는 다시 미소지었다. 쥬어는 보물을 하나씩 들어보이며 그것을
어디에서 가져왔다는 둥의 이야기를 꺼냈고 비아스는 매우 관심이 동한
다는 표정으로 그 설명을 들었다. 선물용으로 준비된 물건들이 이 정도
이니 쥬어의 실제 보물은 몇 배로 막대할 것이다. 비아스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그리고 유창하게 이어지던 쥬어의 설명이 갑자기 중단되었을
때는 더욱 만족스러웠다.
쥬어는 당황하여 야영지 저편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무장한 나가들이
야영지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저분한 의복에 지친 모습들이었지만,
숫자가 많았다. 야영지 곳곳에서 쥬어의 패거리들이 당황하여 일어서거
나 무기를 집어들었지만 병사들은 그쪽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쥬어는
비아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침착하게 앉아있는 비아스를 보며 뭔가를
깨달았다.
[저 자들은 누굽니까, 마케로우?]
[저건 내 군단이다.]
[당신의 군단이오?]
[음. 닐러주지 않았던가? 나는 마호가니 군단의 군단장이다. 쥬어. 하
텐그라쥬 방어를 위해 돌아왔지.]
쥬어는 허를 찔린 표정으로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비아스는 쥬어의 보
물 상자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어 바라보았다. 용의 모습으로 도안된 손
잡이에 그 머리의 뿔이 칼날을 이루고 있었다. 닮은 점이 거의 없었지만
그 모습은 비아스에게 아스화리탈을 상기시켰다.
[재미있게 생긴 물건이군.]
[저들은 도대체 무슨 일로…]
[이 전쟁에서 일익을 담당하게 된 자네에게 축하를 보내지. 쥬어.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여기 다 있군. 자네 야영지를 징발하고 자네의 의용군
을 내 군단에 편입시키겠다. 자네 부하들 중 쓸만한 자들을 추려주게.
그리고 자넨 내 부관으로 삼겠다.]
[마케로우. 저는…]
[센 가문에는 분명히 기지와 추진력을 갖춘 가주가 필요하겠지.]
예상치 못한 일을 맞아 준비된 대응이 없을 땐 보통 그러듯이, 쥬어는
정신을 닫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쥬어가
취할 수 있는 대응은 제한적이었다. 쥬어는 비늘을 눕히려 애쓰며 닐렀
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마케로우.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비아스는, 비록 근엄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쥬어의 충성 선언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텐그라쥬의 여인들은 건방진 남자를 다루는 비아스
의 솜씨에 감명을 받을 것이다. 언젠가 사모 페이를 추방했을 때와 같은
찬사가 돌아올 것을 예상하며 비아스는 흥겨운 기분마저 느꼈다. 비아스
는 그런 찬사가 정말 좋았다.
빙원 어디에서도 닭 우는 소리는 없었지만 해는 떠올랐다. 모진 추위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것 같은 태양이다. 지평선에서는 몇 개의 폭풍이 자
라나고 있었기에 한낮의 날씨는 그렇게 좋지 못할 듯했다.
최후의 대장간에 스며든 햇빛은 꽤 진귀한 손님의 눈꺼풀에 가까스로
이르렀다. 비형은 눈꺼풀이 제발 얼어붙지 않았기를 바라며 눈을 떴다.
채 씻겨지지 않은 밤의 잔재들이 방안 곳곳에 묻어있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비형은 방을 둘러보았다. 케이건이 방 가운데 있었다.
"케이건! 좋은 꿈 꾸셨습니까? 언제 돌아왔습니까?"
"새벽 쯤에 돌아왔소."
비형은 활기차게 이부자리에서 뛰쳐나온 다음 케이건의 부러움을 불어
일으킬 만한 세수를 했다. 도깨비는 손에 불을 일으켜 얼굴을 가볍게 쓸
어만졌다. 레콘들을 위한 건물인 이 건물에는 세면 시설 같은 것은 없었
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이곳의 추위에서 세면은 꽤나 위험한 모험이 되
어버리지만, 도깨비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형은 말쑥해진 얼굴로
케이건 앞에 앉았다.
"그럼 아직 자지 않은 겁니까? 피곤하실 텐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소. 그건 그렇고, 돌아오는 길에 먼 곳의 불빛을 보았소. 오늘도
방문자가 한 명 있을 것 같소. 티나한에겐 알려주지 마시오."
별 소용은 없었다. 지평선을 노려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곤 하는 티나
한은 사납게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도 접근하는 레콘을 알아차렸다. 그리
고 또다시 단도장 시루의 우려를 살 만한 마중을 나가버렸다. 티나한의
마중을 당한 것은 티나한과 비슷한 연배의 여인이었고, 신체가 아님이
밝혀지고 모든 사태를 이해하게 되자 티나한의 따귀를 보기 좋게 올려붙
였다. 그녀가 이해심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다음 방문자
를 위해 티나한에게 교훈을 남겨줄 작정이었으니 오히려 사려 깊다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망과 분노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티나한은 그
런 교훈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일으킨
무지스러운 소란은 비형을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게 만들고 시루의 근심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결국 수십 명의 젊은 레콘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떼어놓았지만 두 사람은 몸을 억류당한 채 서로에게 육두문자를 계명성
으로 뿜어대었다. '녹은 얼음을 뒤집어 쓸 놈아!'라든가 '붕어 저택에
빠져죽을 년아!' 같은 특정 액체를 우회적으로 거론하는 욕설의 방식들
은 숨어서 듣고 있던 비형의 흥미를 제법 자극했다. 결국 더 참을 수 없
게 된 시루가 수탐자의 방으로 찾아왔다.
피투성이가 된 티나한 - 도깨비나 인간 기준으로는 험악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지만 레콘 기준으로는 그저 몇 군데 긁힌 것에 불과한 -
에게 비형이 접근하는 것을 거부했기에 치료는 케이건이 맡아야 했다.
케이건은 앉아있는 티나한의 거대한 몸 주위를 선 채로 돌아다니며 피를
닦아내고 깃털이 빠진 부위에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시루는 티나한의
앞쪽에 앉아 사나운 시선으로 티나한을 주눅들게 했다. 바깥의 폭풍 소
리를 듣는 시늉을 하며 딴청을 피우던 티나한은 더 견디지 못하고 항복
했다.
"잘못했습니다."
시루는 팔짱을 꼈다.
"나는 지금 자네들의 퇴거를 요청할까 고민 중일세. 티나한."
티나한은 기겁하며 몸을 움직여 케이건의 눈꼬리가 올라가게 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는 신체를 찾아야 합니다. 사금파리는 여기 있
었습니다!"
"그건 알아.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자네들이 하는 일에 특별히 숙련된 기
술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던데."
티나한은 어리둥절했다. 한쪽 발로 티나한의 등을 밟은 채 붕대를 잡아
당기던 케이건이 대신 질문했다.
"말씀하시는대로 신체를 확인하는 것은 접시요. 우리야 접시 조각을 들
고 왔다갔다 하는 것뿐이지. 그런데 그 질문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
오?"
피를 보지 않기 위해 뒤돌아 앉아있던 비형도 꽤 관심이 동한다는 몸짓
을 해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시루는 조금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그 확인을 내가 대신할 수도 있겠군?"
"대신?"
"내가 그 접시 조각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방문하는 젊은이들 앞에 내보
이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신체를 찾아내면 자네들에게 연락해주면…"
"연락이라면, 그 동안 떠나 있으라는 말씀이시오?"
시루는 말을 돌리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래."
수탐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으로 며칠 거리 내에 인가라
고는 최후의 대장간뿐이니, 결국 시루는 그들에게 라호친으로 떠나있으
라고 말하는 셈이었다.
"물론 티나한이 손님다운 거동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나도 인정하겠소.
주인은 그런 손님에게 떠나라고 명령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빙판과 설
원을 넘어 열흘 가까이 달려가야 하는 곳으로 우리를 쫓아내는 대신 우
리의 사과와 경거망동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 쪽을 택하실 생각은 없
으시오?"
"나도 그렇게 냉담한 사람은 아닐세. 자네가 손님의 예의를 말하는데,
나도 주인의 예는 알고 있네. 그렇게 쫓아내는 것은 좀 너무하지. 하지
만 우리에게 문제가 좀 있다네."
"어떤 문제요?"
"자네들 요즘 최후의 대장장이님을 뵌 적 있나?"
티나한과 비형은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가만히 생
각해 보았다. 최후의 대장간에 도착했을 때 모든 레콘을 조사하는 과정
에서 수탐자들은 최후의 대장장이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최후의 대
장장이 또한 신체가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기에 그들은 그 이후로는 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최근에는 뵌 적이 없는 것 같소. 용무도 없는 저희들이 바
쁘신 그 분을 방해할 필요는 없으니까."
시루는 약간 주저하며 말했다.
"그 분께서 요즘 좀 편찮으시다네."
"몸이 많이 안 좋으시오?"
"아니, 곧 나으실 거야. 하지만 지금은 좀 거동이 불편하시지. 그래서
대장간에도 나오지 못하고 계셔. 뭐 꼭 탓하고 싶진 않지만, 티나한이
일으키는 소란이 그 분께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아."
집 안에 환자가 있으니 떠들지 말고 나가달라는 요청이었다. 티나한은
그 붕어 저택에 빠져죽을 년 때문에 쫓겨나게 생겼노라고 투덜거렸고 아
무도 그 투덜거림에 신경쓰지 않았다. 씁쓸해하는 수탐자들을 달래듯 시
루는 말을 덧붙였다.
"화신을 찾는 즉시 그 분을 라호친으로 보내겠네. 그러면 자네들은 거
기서 그 분을 만나뵌 다음 곧장 어디에도 없는 신의 화신을 찾아 떠나면
되지 않겠나? 그리고 내 생각에 케이건 자네나 비형에겐 이곳보다는 라
호친이 여러 모로 더 편리할 것 같아. 거기엔 인간들이 사니까."
케이건은 그런 요청에 대해 거절할 명분을 떠올릴 수 없었다. 다른 자
들도 마찬가지였기에 케이건은 폭풍이 그치는대로 떠나겠노라고, 그리고
최후의 대장장이의 조속한 쾌유를 바라노라고 대답했다. 시루는 고마워
하며 떠났다. 시루가 떠나고나자 티나한은 더욱 열성적으로 예의 여인을
헐뜯었다. 듣다 지친 비형이 끼여들었다.
"티나한. 아무리 레콘이라지만, 여자와 그렇게 싸워야 되는 겁니까?"
"성질머리 지랄 같잖아. 그런 성질머리를 가지고 있으니 그 나이 되도
록 결혼도 못하는 거지."
비형은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결혼도 못하다니, 그 여자분을 아세요?"
"알게 뭐냐? 오늘 처음 봤는데."
"그런데 어떻게 결혼을 못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거지요?"
"무기 받으러 왔잖아? 보나마나 웃기는 것임이 분명한 무슨 숙원이 있
으신 것이겠지. 결혼한 여자에게 무기가 뭐가 필요하냐? 신랑 탐색이라
는 것도 있냐? 아, 아니지. 그 여자 아마도 남편을 암살하려고 무기 받
으러 온 건지도 몰라. 그래! 분명해! 눈빛이 이상하지 않았어?"
비형은 좀 점잖은 단어를 떠올려보려다가 실패하고는 그냥 티나한이
'삐쳤다'고 판단했다. 치료가 끝난 케이건은 비형에게 돌아앉아도 된다
고 알려주고서 말했다.
"폭풍이 더 심해지는 것 같소. 아무래도 이런 폭풍을 뚫고 누가 올 것
같지는 않고, 티나한 당신 또한 몸조리를 좀 하는 편이 좋을 테니 그냥
잠이나 자둡시다. 이곳을 떠나면 꽤 오랫 동안 제대로 자긴 어려울 테
니."
비형은 동의했다. 티나한 역시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잠드
는 대신 티나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이부자리를 정돈하던 케이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티나한. 나는 그 여인의 눈빛이 남편 암살할 눈빛이라고는 생각지 않
소."
"응? 그거 말고, 시루가 말한 것."
"뭐가 말씀이오?"
"왜 아프다는 걸 인정하는 거지? 아프다는 것이 자랑인가?"
케이건은 티나한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단도장의 성격이 솔직해서 그런 것 아니겠소? 그렇잖으면 우리를 존중
한다는 뜻일 수도 있을 테고."
"존중하다니?"
"그도 레콘이니 약한 소리 하는 것 싫겠지만 우리를 존중해서 사실대로
말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거요."
티나한은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폭풍은 다음 날 그쳤고, 수탐자들은 단도장 시루의 배웅을 받으며 최후
의 대장간을 떠났다. 티나한은 걸었고 비형은 나늬에 올라탔다. 그리고
케이건은 라호친가히들이 끄는 썰매에 탔다. 도깨비불로 주위를 감싼 비
형이 가장 빠르게 날아갔다. 그는 라호친에 먼저 도착한 다음 중간에 두
번 식량과 연료 등을 수송했다. 티나한은 걷는 것이 지겨워지면 간혹 썰
매에 걸터앉았지만 라호친가히들의 원성 때문에 자주 그러지는 않았다.
아흐레가 지났을 때 티나한과 케이건은 별다른 문제 없이 라호친에 도
달했다. 먼저 도착했던 비형은 묵을 곳을 잡아둔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
었다. 그리고 비형이 준비해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케이건
은, 티나한이 차라리 팔을 베어줄지언정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행위, 즉 목욕을 할 수 있었다. 몇 번인가 눈(雪)을 집어 얼굴에 문지른
경험을 제외한다면 1년 만의 목욕이었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 때문에 목욕통에 들어가 있는 것은 빗속을 거니는
것과 비슷했다. 무럭무럭 피어난 김은 차가운 천장에 닿자마자 응결되어
후두둑 떨어졌다. 레콘에게 그 목욕탕은 고문실일 것이다. 그다지 쓸 일
이 없어 부드러워진 근육을 쓸어만지던 케이건은 오른팔을 내려다보았
다.
인간의 몸은 바라기 같은 무거운 검을 다룰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다.
케이건은 아직까지 자신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건지 의문스러웠지만 그
의 오른팔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쓰면 쓸수록
단련되는 몸의 신화는, 그야말로 신화일 뿐이다. 어쨌든 말과 같은 허파
를 얻는 광부는 없다. 케이건에게 일어나는 일도 그와 같다. 자연이 그
의 오른팔에 허용해둔 것 이상의 충격이 수백만 번이나 되풀이해서 가해
진 끝에 그의 오른팔은 파괴되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리고 케이건은 그 사실에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흩어져 먼지가 될 것이다.
칼을 휘두르며 피를 찾아 걷고 또 걷는 사이
깨지고 부서진 넋, 바람에 맡긴다.
쓰러져 죽는 대신, 걸으며 먼지가 될 것이다.
"아라짓 전사의 노래군."
륜 페이는 고개를 돌렸다. 시우쇠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우쇠를
바라보던 륜은 문득 화염의 화신 어깨 너머로 가늘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목격했다. 륜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연기는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우쇠는 불꽃의 눈동자로 륜을 응시했다.
"고목에 기대어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던 전사는 마침내 쓰러져 죽기를
거부하고 일어난다. 썩어들어가는 수족을 흩뿌리며 세상을 방랑하기로
한다. 도무지 나가에게 어울리는 노래라고 할 수 없어. 노래를 부른다는
것부터가 나가다운 일은 아니지만."
"제가 아는 노래라곤 그것뿐입니다."
륜은 베미온을 가리켰다. 베미온은 륜의 무릎을 벤 채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시우쇠는 싱긋 웃었다.
"자장가로도 어울리진 않아. 그런데 뭣 때문에 보자고 했지?"
"저와 함께 어디를 좀 가주셨으면 해서입니다. 이 근처에 두억시니의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그 질질 흐르는 녀석? 그렇군. 태워줘야겠군."
시우쇠는 그렇게 말하며 륜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륜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시우쇠를 쏘아보았다. 시우쇠는 귀찮다는 어투로 말했다.
"뭐냐?"
"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유해의 폭포는 당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지금까지 기다려왔습니다. 두억시니가 왜 신을 잃었는지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 당신은 직접 말해야 되는 거라고 하면서 지금까
지 그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습니까."
"내 대답이 바로 저거야."
시우쇠는 엄지손가락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시우쇠가 페로그라쥬
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를 가리킨 것임을 깨달은 륜은 고개를 홱 돌
렸다. 그는 비늘을 곤두세운 채 베미온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살육 현장을 나타내는 알림판이었고 페로그라쥬가 스스로를 태
워 키보렌의 하늘에 써보이는 고발이었다. 차마 눈을 뜰 수 없었기에 륜
은 살려달라는 니름이 가장 거세게 들려오는 곳을 겨냥했다. 그리고 죽
어가는 모든 나가를 느꼈다. 아이를 끌어안으며 몸을 구부리는 어머니를
느꼈고 물항아리에 뛰어들었다가 그 혹한에 정신을 잃어가는 나가를 느
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륜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 어떤 늙은 여인이었다. 하
늘에 용이 나타나 불을 뿜어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차분하게
화로를 들고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에 화로를 내려놓은 여인은 륜을 올
려다보았다. 그녀의 모든 것을 느끼고 있던 륜은 여인의 다음 행동에 자
신도 모르게 눈을 뜨고 말았다. 여인은 물그릇에 손을 담궜다가 화로에
물방울을 던졌다. 충격 때문에 륜이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 아스화리탈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륜은 황급히 아스화리탈을 멈추려 했지만 이미
여인은 뿜어져나간 불의 격류에 휩쓸린 후였다.
그 모든 기억이 륜을 뒤흔들었고 륜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
다. 갑자기 시우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직접 만나야 된다고 한 거지."
"예?"
"태우려면 직접 만나야 된다고."
륜은 한동안 시우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그것을 이해했
을 때 륜은 분노했다.
"왜 태워야 한다는 겁니까!"
륜의 고함에 베미온은 깜짝 놀랐다. 공포스러운 경외감으로 이 대화를
훔쳐보던 북부군 병사들도 황급히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륜은 놀란 베
미온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시우쇠를 노려보았다. 시우쇠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화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용인의 감각으로도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마침내 시우쇠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륜을 경악시켰다.
"네가 관련된 이유가 좋겠군. 대호왕 때문에."
륜은 놀라서 말도 꺼내지 못했다. 시우쇠는 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
다.
"그 변태 두억시니는 대답을 듣고나면 분노할 거다. 나를 어떻게 할 수
는 없겠지만, 그 녀석과 연결되어 있는 스물 두 명의 두억시니가 있지.
금군 말이야. 그 두억시니들이 대호왕을 공격할 거다. 이제 알겠나, 갇
힌 여신의 신랑?"
겨우 륜의 말문이 트였다.
"왜 분노한다는 거죠? 두억시니들이 신을 잃은 것이 범죄와 연관되어
있는 겁니까?"
"범죄라. 모호한 표현이로군. 페로그라쥬가 불탄 것은 아스화리탈의 범
죄냐? 그렇잖다면 아스화리탈에게 그런 명령을 한 네 범죄냐?"
륜은 다시 화로와, 거기 던져진 물방울을 떠올렸다. 볼 수 없는 거리였
지만 륜에겐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륜은 베미온을 내려다보며 힘겹게
말했다.
"먼저 전쟁을 일으킨 것은 한계선 이남의 나가들입니다. 설마 피가 차
가운 제 동족들이 적은 죽고 자신은 죽지 않는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하
지는 않았을 겁니다. 전쟁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들은 그런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또 이것 저것 끼워맞추는군."
"뭐라고요?"
"불은 네 거다. 그리고 네가 그러고 싶어서 태운 거지. '불 탈 만한 짓
을 했다. 그렇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너절해. 집어치우라고. 그냥 속
시원하게 '이유 따위 묻지 마라, 불을 가진 것은 나다'라고 외치며 태워
줄 수는 없나? 칼을 가진 사람은 찔러죽이고 불을 가진 사람은 태워죽이
는 거다. 갇힌 여신의 신랑. 이빨 달린 놈이 물어뜯고 발톱 달린 놈이
할퀴듯이. 그것 뿐이야."
"불은 무엇이든 삼키지요. 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맹수들이 물고 할
퀴는 것에는 배를 채운다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가 필요없다는
식의 그런 말씀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인정하지 않겠다고?"
"예."
"우리가 너희들을 그렇게 만들었는데?"
륜은 소스라치게 놀라 시우쇠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륜은 그가 느끼고
있는 것처럼 그저 대책없이 유쾌하기만 한 도깨비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을 상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륜은 비늘을 부딪히며 말했다.
"당신들께서… 우리를 이유 없이 살육하는 생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
까?"
"그렇지는 않다. 이유는 있지. 하지만 네가 말하는 것 같은 너절한 이
유는 아니야."
"그럼 어떤 이유입니까?"
"우리는 너희들을 먹어야 하는 존재로 만들었지."
"먹는다고요?"
"그래. 먹는 것. 그게 너희야. 그게 생명이지. 모든 동물들이, 식물들
이, 생명이라는 생명은 모두 먹는다. 먹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지. 우리
가 만든 것은 그런 것이다. 너희들이 벌이는 모든 짓거리의 경계엔 큰
글씨로 뚜렷하게 적혀있지. <일단, 먹고 나서>"
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우쇠를 바라보았다. 그와 반대로 시우쇠의
목소리는 점점 차분해졌다.
"산다는 것은 먹는다는 것이지. 일단 먹어야 살아있는 것이 저지르는
모든 웃기는 일이 가능해지지. 먹지 못하면 소용없어."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이야기를…"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이야기야. 륜 페이. 먹는다는
것은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외의 것을 파괴한다는 것이지. 그렇기
에 바위를 뚫는 낙수는 바위를 먹는 것이 아니야. 바위가 낙수를 유지시
켜주는 것은 아니니까. 나무를 찍는 도끼도 나무를 먹는 것이 아니야.
도끼의 유지에 나무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니까. 그것이 먹는 파괴
와 보통의 파괴의 차이점이지. 하지만 둘 다 파괴야. 알겠냐? 우리는 너
희들을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파괴하는 것으로 만들었어. 하지만
생명은 파괴를 일으켜서 자신을 유지하지. 그런 것을 가리켜 '먹는다'고
하는 거야. 무생물은 그렇지 못하지. 낙수가, 파도가, 태풍이 아무리 파
괴를 일으켜도 그것은 자신의 유지와는 상관없어. 그것들은 먹는다고 하
지 않아. 파괴한다고 할뿐이지."
"우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그래서 태우고 찌르고 들이받
으라는 식으로 말씀하신 겁니까?"
시우쇠는 미소지었다. 하지만 륜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범죄 같은 것은 없다. 륜. 두억시니가 신을 잃은 것도 범죄와는 관련
없어. 하지만 그 질질 흐르는 녀석은 화를 낼 거다. 그게 싫으면 네가
그걸 먹어야 해. 그걸 먹어서 네 누나의 모습을 유지시켜주라구. 하지만
먹기 싫은 것, 먹으면 안 되는 것은 다른 사람 먹이는 방법도 있지. 그
러니 입 다물고 안내나 해라. 그 피라미드엔 네 아스화리탈이 들어갈 수
없을 테니 내가 먹어주지. 네 말마따나 뭐든 삼키는 불인 내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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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1-3. 관련자료:없음 [55950]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7-12 00:32 조회:8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