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39화 (39/62)

눈물을 마시는 새.

11. 땅의 울음 - 1

네 이웃을 사랑하라. -  사람들 사이를 끝없이 떠도는  케케묵은

충고들 중 가장 무가치한 충고가 무엇이냐는 토론이  벌어지던 중

의견을 요청받은 우슬라 사르마크 부인이 한 대답.

다스도는 마지막 언덕을 올라섰다. 언덕이  가로막고 있던 차가운 바람

이 일순 다스도를 덮쳤다. 살을 후벼파는 듯한 삭풍이었다. 엉겁결에 눈

을 찌푸린 다스도는, 그러나 곧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환호성을 내질렀

다.

그토록 긴 여정의 끝에서 마침내 다스도는  두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다스도의 눈 앞에는 그가  지난 닷새 동안 보아온  것과 똑같은 황량한

빙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다스도가 서있는 언덕에서  200 미터 쯤

떨어진 곳에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수평적인 풍경에  익숙해진 다스도의

눈에 거의 기적으로까지 보이는 구조물이 있었다. 빙원 한가운데 돋아난

뿔처럼 서 있는 두  개의 구조물은 거대한  돌기둥들이었다. 기둥뿌리는

눈과 얼음에 뒤덮여 확인할 수 없었고  기둥의 본체에는 금강석 같은 얼

음 가루가 두껍게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기둥머리에는 얼어붙은

눈덩이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상인방도  없고 문짝도 없고  담도 없는

문이었다.

두 개의 돌기둥 뒤로는 다시 아무 것도 없는 빙원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난 얼음산이 빙원을 집어삼켰다.

얼음산의 크기는 추측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빙원 한가

운데 외로이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음산은 지평선을 거의 감추고 있

었다. 그랬기에 다스도는 오래 전부터 그  산을 보며 걸어올 수 있었다.

다스도의 환호는, 따라서 산의 발견에 의해 촉발된 것은 아니다. 다스도

가 보낸 환호의 대상은  산자락 아래 거대한  얼음덩이 사이에 자리잡은

웅장한 건물이었다.

높은 지붕과 거대한 열주들, 그리고 넓은 계단은  모두 희미한 얼룩 무

늬가 들어가 있는 흰 빛이었다. 보다  번잡한 색깔들의 세계에서라면 눈

에 들어오지도 않을 그 줄무늬들은  이곳 백색의 세계에서는 호랑이처럼

찬연하게 두드러지고 있었다. 그 얼룩 무늬야말로 레콘인 다스도에겐 그

어떤 깃발도 필요 없는 확실한 표식이었다.

다스도는 또다시 환호를 내질렀다. 이번의 환호는 그 자신을 향한 것이

었다. 위축되었던 근육이 팽창하며 얼어붙은 깃털들이 일시에 일어났다.

다스도의 몸에서 얼음가루가 폭발했다. 다스도는  자신이 만든 눈폭풍에

서 뛰쳐나왔고, 다음 순간 빙원을 달리고 있었다.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지만 다스도는 두 개의 돌기둥과 그 뒤의 건물을

잇는 직선의 연장선을 벗어나지  않았다. 두 돌기둥이 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실제로 그 기둥 사이가 아닌 다른  장소로는 이동할 수 없기 때

문이다. 육안으로 보면 똑같은 빙원이지만  언덕과 돌기둥, 그리고 건물

을 잇는 직선을 벗어나면 그곳은 땅이 아니라 얼음에 뒤덮인 바다다. 물

론 혹독한 추위 때문에 얼음은  두꺼웠지만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말하긴

힘들며, 특히나 흥분하여 정신없이 달리는 레콘의 발 아래에서라면 얼음

이나 양피지나 큰 차이가 없다. 다스도의  연모의 대상인 건물이 안겨있

는 거대한 얼음산은 산이라기보다는 바다  한가운데 솟아있는 섬에 가깝

다. 그리고 다스도가 올랐던  언덕 역시 일종의 만이라고  해야 할 것이

다.

옛날, 레콘들이 얼음 위에서 반미치광이가 된 채 기다시피 걸어가야 했

던 시절도 있다고 한다. 극연왕의 4대  경이 중 하나가 이곳에 건설되지

않았다면 다스도 또한 매순간 물에 빠져죽는 악몽에 시달리며 빙판 위를

기어가야 했을 것이다. 고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기꺼워

하던 다스도는, 건물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열주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화살인 양 뛰쳐나왔다.

그것은 다스도를 향해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다스도는 깜짝 놀라서 속

도를 늦추고는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를  향해 달려오는 것은 어

떤 레콘이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는  길다란 쇠창이 들려 있었다. 다

스도는 그 쇠창이 꽤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왜 정신

없이 달려오는지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얼굴 가득히 축하의 표정을

떠올린 채 다스도는 가까이 다가온 상대방에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그게 당신이 받은 무기인가요?"

그러나 대답을 듣기 전부터 다스도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달려

오는 레콘은 다스도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울

리지 않는 일이었다. 다스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스도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을 목격했다.

거의 10초가 지난 후에야 다스도는 자신이 철창을 들고 있던 레콘의 어

깨에 얹힌 채 건물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스도가 뭔

가 반항을 시도해보려 했을 때는 이미 건물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은 다스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스도는  헐떡이며 어이없는 표

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콘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

신 어딘가를 향해 사납게 외쳤다.

"빨리 와!"

화를 내기에 앞서 다스도는 레콘과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경

악했다.

그들이 서있는 곳은 열주들이 아름답게  늘어서 있는 거대한 홀이었다.

몇 명의 레콘이 기둥 사이로 오가고 있었고 그 중 어떤 레콘들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스도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을 향해 달려오

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것은 이 거인들의 세계에서 턱없이 작아보이는 도깨비와 인간이었다.

그들 모두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종족이었다. 다스도는 자신을 낚아채

온 레콘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레콘은 자

기 성질을 이기지 못한 모습으로 외쳤다.

"빨리 오라니까!"

다스도는 도깨비와 인간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레콘에게도 꽤 거대한

그 홀은 도깨비와 인간에겐 전력질주로  달려도 레콘의 조급증을 달래기

어려운 넓이였다. 게다가 그들은 두꺼운 털옷을 입고 있었다. 깃털이 없

는 그들이었기에 그런 옷이 없으면 이곳에서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도

깨비와 인간은 기진맥진하여 도착했다. 인간은 무릎을  짚은 채 거친 숨

을 몰아쉬었다. 다스도는 그가  무슨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움푹 들어간 뺨은 창백했고  다리도 단지 달려온  것 때문이라고 보기엔

좀 지나치리만큼 떨리고 있었다. 도깨비  역시 꽤 피로한 모습이었지만,

인간보다는 좀 나은 듯 들고 온 물건을 내놓았다.

그것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였다. 도깨비는 심호흡을  하여 호흡을

평온하게 한 다음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레콘 역시 더 이상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그는 부리를  꽉 다문 채  도깨비의 동작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긴장된 모습에 다스도는  감히 항의나 질문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참으로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상자의 내용물을 꺼낸 도깨비는 그것을 바

닥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조그만 비단 꾸러미였다.  도깨비는 꾸러미의

매듭을 풀었다. 레콘은 이제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그리고 인간은

빛나는 눈빛으로 꾸러미와 다스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스도는 이해

하기 어려울 만큼 엄숙하고 중요한 일이  벌어진 곳에 잘못 들어선 불청

객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마침내 꾸러미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무더기의 사금파리가

나타났다.

다스도는 자신의 기분을 뭐라고 정의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눈을 비벼보았다.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나서 다스도는 자신의 속물 근성을  탓해보았다. '한 무더기의 사

금파리에도 뭔가 귀중한 의미가 있을지 몰라.'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그저 깨진 그릇 조각들일 뿐이었다. 다스도는  그것이 아마도 깨진 접시

조각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발견 역시 그를 만족시키지는 못했

다. 차츰 다스도는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혹 정신 나간 자

들에게 붙잡혀 온 것 아닐까? 저 자들은  이제부터 맛있는 과일 좀 드시

라고 말하며 저 사금파리들을 권하려는 것 아닐까?

그런 황당한 제안을 하는 대신,  도깨비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레콘을

바라보았다.

병색을 띈 인간 역시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뭔가 실

망감 같은 것으로 바뀐 듯했다. 다스도는  자신이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

준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드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 때 레콘이 벼락처럼 외쳤다.

"붙어!"

레콘의 고함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사금파리들이  움직였다. 다스도는 다

시 긴장하며 사금파리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

음, 다스도는 의심에 찬 눈으로 레콘과 도깨비,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았

다. 그 파편들의 움직임은 레콘이 악에 받혀 내뿜은 계명성 때문에 조금

흔들거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도깨비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닌가 본데요?"

레콘은 수염볏을 부르르 떨며 접시  파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

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가."

사금파리들이 어딘가로 가지 않을까 기대하던 다스도는 조금 후에야 그

것이 자신에게 건네어진 말임을 깨달았다. 다스도는 불쾌함에 볏을 뻣뻣

하게 세웠다.

"도대체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가라고."

"이거 보세요. 설명을 해야…"

"나는 티나한이고! 저기 도깨비는 비형  스라블이다! 저 인간은 케이건

드라카야! 알겠어? 티나한! 비형 스라블!  케이건 드라카! 알겠냐고! 그

런데, 그런데 말이야, 너는, 너는, 어, 이런 제기랄! 너, 너, 도대체 너

누구냐!"

다스도는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다스도라고 합니다만."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너 다스도지!  다스도일 수밖에 없어! 제기랄,

내가 네 녀석 이름을 알게  뭐야? 다스도? 좋아. 잘  들어. 너는 다스도

야. 다스도일 뿐이라고! 왜 다스도인 거냐!  접시가 안 붙잖아! 그러니,

부탁하겠어. 제발 그 덜 여문  수염볏 내 눈 앞에서  당장 치워. 그러지

않으면 때려죽일 테다! 이 다스도 같은 애송아!"

그보다 덜 폭력적인 존재라 해도 참기 어려운 상황에서 다스도 같은 레

콘이 참을 리 없었다. 다스도는 깃털을  잔뜩 곤두세우며 티나한을 노려

보았다. 그러나 다스도가 티나한의 부리를 그 머리 속으로 쑤셔넣어주려

마음 먹었을 때 두 명의 레콘이 갑자기 다가왔다. 그 두 명의 레콘은 다

스도와 티나한 사이에 끼여들 듯이 섰다.  다스도는 그 레콘들이 자신과

비슷한 정도의 연배임을 알아보았다. 그 중 한 명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피고트라고 합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

습니까?"

"저 작자 손 좀 봐주고 그럽시다!"

피고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전에 이야기부터 나눠야 합니다. 이리로."

그리고 피고트와 또다른 젊은 레콘은 다스도의 어깨를 감싸안고 허리를

감았다. 다스도는 그들을 뿌리치려 했지만 두  명이나 되는 레콘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정중했지만  완강했다. 또한 다스도는 레콘에

게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힘든  행동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을 말리는 레콘이라니? 다스도는  결국 포기한 채  그들에게 끌려갔

다. 다스도는 끌려가면서도 티나한을 노려보았지만  티나한은 이미 다스

도에 대해 잊은 듯 바닥에 있는 접시  조각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

정은 꽤 침통했다. 그리고 비형이라는 도깨비와 케이건이라는 인간도 도

저히 행복해 보인다고는 하기 힘든 표정으로 접시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피고트와 젊은 레콘은 몇 개의 기둥을 지나쳐 홀 반대편에 도달한 후에

야 다스도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많이 놀랐지요?"

"안 그럴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저 정신  나간 작자는 뭡니까? 그리고

어떻게 인간과 도깨비가 여기에 있는 겁니까?"

또다른 젊은 레콘은 빙긋 웃으며 피고트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설명해줘. 나는 이만 가보겠어."

"알았어. 고마워, 헤치카."

헤치카라 불린 레콘은 다스도에게 목례한  다음 떠났다. 그리고 피고트

는, 그런 일을 여러번 겪은 사람처럼 능숙하고 빠르게 말을 꺼냈다.

"다스도라고 했지요? 저 사람들에 대해 설명해주겠습니다. 저 사람들은

어떤 레콘을 찾아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찾는 레콘이 누

군지 모릅니다만, 만약 그들이 올바른 사람을  찾아내면 저 접시가 도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다스도는 놀랐다.

"지금 농담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한 번 그렇게 했습니다. 저 접시는 즈믄누리의

성주 바우 머리돌이 즈믄누리의 마지막 방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입니다.

그들은 즈믄누리에서 저 접시를 깨트렸습니다. 그  파편들 중 하나가 사

라졌지요. 그들은 남은 파편을 주워모은 다음 1년 동안이나 사라진 파편

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사라진  파편을 찾아내었을 때  그들은 그곳에서

어떤 도깨비를 만났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그 도깨비의 이름은 시우쇠였지요."

다스도는 경악했다. 그는 그 유명한 이름을 알고 있었다.

"시우쇠? 그렇다면 저 사람들이 바로…"

피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화신의 수탐자들입니다."

다스도는 조금 전과 다른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피고트는 안쓰

럽다는 표정을 지은 채 그와 함께 수탐자들을 보며 말했다.

"시우쇠님을 찾아내었을 때 깨진 접시는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

고 그들은 두 번째 화신을 찾기  위해 다시 접시를 깨트렸습니다. 2년이

지난 후 그들은 이곳에서 겨우 사라진  파편을 발견했지요. 하지만 이곳

은 좀 문제가 있는 지점입니다."

다스도는 왜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피고트는 안됐다는 듯이 말

했다.

"이곳에는 레콘들밖에 없고, 그것도 세상의 모든 레콘이 한번씩 방문하

는 곳이지요. 그들은 이곳에서 두 번째 화신을 찾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끝내 접시는 하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대장간을 찾아오는

레콘들마다 붙잡고 화신인지 확인하려 애쓰고 있는 겁니다. 나도 이곳에

처음 도달했을 때 당신과 똑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사정을 알게

된 다음 저 자를 용서했습니다. 당신은 어쩌겠습니까?"

다스도는 피고트와 똑같은 결정을 내렸다.  그와 피고트는 안타까운 표

정으로 수탐자들을 바라보았다.

긴 시간이 지난 후, 비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주워담아야지요?"

티나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무릎을 꿇고는 천 가장자리

를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비형이 상자 뚜껑을 열었고 케이건은 꾸러미

를 그 안에 집어넣었다.  상자 뚜껑을 닫은 비형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

다.

"언젠가는 그 분이 오겠지요, 티나한. 방으로 돌아갈까요?"

"으-아-아-아-!"

메아리가 사라진 다음, 비형은 귀 언저리를 몇 번 두드리고 말했다.

"그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군요. 동의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

요?"

"언젠가는 올 거라고? 그  언제가 도대체 언제냐! 북부인들이  다 죽은

후에? 즈믄누리와 최후의 대장간마저 파괴된 후에? 세상의 모든 경치 좋

은 땅에 심장탑이 건설된 후에?"

"여기 오는 레콘들의 말로는 시우쇠님이  나가들의 북진을 상당히 저지

하는 것 같더군요. 지나치게 비관적인  생각은 피하도록 하지요. 낙관적

인 편이 좋잖아요?"

티나한은 깃털을 부풀렸다 눕혔다 하며 바라보는  비형을 꽤 정신 사납

게 만들었다. 그리고 티나한은 지난 1년  동안 그들 사이에서 몇백 번이

나 거론되었던 주제를 다시 꺼내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다. 우리는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1년

전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 사금파리는  이곳에 있었어. 그렇다면 이곳에

있던 레콘 중 한 명이야. 이곳으로 올 레콘이 아니고! 우리는 그 레콘을

놓친 것이 분명해!"

지겹도록 반복된 이야기에 비형과 케이건은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

푸렸다.

티나한의 지적은 타당했다. 즈믄누리에서 사라진 파편은 시우쇠가 사는

마을에 나타났었다. 그 마을에 있는  도깨비라곤 시우쇠뿐이었기에 수탐

자들은 시우쇠가 자신을 죽이는 신의 신체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

다면, 같은 논리에 의해 두 번째로 사라진 파편은 그들의 희망대로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신체가 있는 근방에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1년 전 최후의 대장간에 도달했을  때, 인간과 도깨비가 최후의

대장간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당황하는 레콘들  중에서, 수탐자들은 신체

를 찾아내지 못했다. 최후의 대장간에 있는  모든 레콘을 상대로 실험해

보았지만 접시는 하나로 결합하지 않았다. 그  때 레콘이라면 누구나 평

생에 한 번은 최후의 대장간에 온다는 사실을 떠올린 수탐자들은 자신들

이 조금 일찍 도착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그 '조금'은 1년으로 늘어나 있었다.  티나한은 그들이 조금 빨

리 온 것이 아니라 조금 늦게 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금파리를 찾는데 2년이나 걸렸다.  그 2년 사이에 이곳에

왔던 신체는 자기 무기를 받아서 이곳을 떠난 거야! 신체가 떠나고 사금

파리만 남아있는 곳에 우리가 도착한 거라고!"

케이건이 실망과 피로감 모두를 지우지 않은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말했

다.

"하지만 확인할 방도가 없소. 티나한.  신체를 찾아내려면 접시를 깨는

방법뿐인데, 복구되지 않은 접시는 깰 수가  없는 거 아니오. 그 때문에

우리는 건너뛸 수도 없고."

티나한은 다시 비명인지 포효인지 딱히 구분지어 말하기 어려운 계명성

을 내뿜었다. 그들이 무려 1년 동안이나 최후의 대장간에 주저앉아 있어

야 했던 것은, 언젠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신체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신체에 대한 수탐

을 잠시 접어두고 어디에도 없는 신의  신체를 찾아나설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티나한은 바우  성주가 왜 접시 세  개를 내주지 않은

거냐는 결과론적인 불평을 터뜨렸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주어진 접시는

하나뿐이었고 그것이 복구되지  않았기에 '건너뛰는'  것은 불가능했다.

티나한이 즈믄누리로 돌아가서 접시 하나를  새로 받아오자고 강변할 때

누군가가 티나한을 불렀다. 수탐자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들 곁에 늙은 레콘이 다가와 있었다.  모습이 퍽이나 특이했다. 물에

젖은 레콘만큼이나 비참하게 보이는 레콘이  있다면 깃털이 빠진 레콘일

진데, 수탐자들 곁에 다가와  있는 레콘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특히

두 팔뚝은 인간과 비슷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볼품없는 모습에 무례

한 미소를 짓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팔뚝은 평생 동안 불을 다루고

얻은 관록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티나한을 부르며 말했다.

"티나한. 또 찾아오는 젊은이를 무례하게 대하는 모습을 봤네."

"죄송합니다. 시루."

"자네가 그렇게 뛰쳐나가서 과부 보쌈 하듯이 끌고  오지 않아도 그 젊

은이들은 어차피 이곳으로 오네. 이곳에 오기  위해 먼 길을 걸어왔으니

까. 그러니, 내가 자네에게  그냥 여기 앉아서  그들의 도착을 기다리는

인내력과 도착한 그들에게 간단한  실험 좀 해봐도  되냐고 물어볼 만한

예의를 함양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부당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티나한은 과부 보쌈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의미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송구스러워 하며 말했다.

"저,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던데요."

"내가 보기엔 자네가 그들의 기분에 무관심한  것 같은데. 주위에 무관

심한 자들이 보통 주위가 자신을 이해한다고 믿지."

티나한과 시루의 대화는 케이건이나 비형이 참여하기엔 꽤 거북할 정도

로 높은 곳에서 이루어졌다.  어차피 케이건과 비형에겐  참여할 권한도

없었다. 인간과 도깨비는 - 물론, 나가도 - 최후의 대장간에 올 수 없으

며, 따라서 그들 두 사람의 체류는 무시되는 방법으로 허용받고 있었다.

시루는 두 사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자네도 그랬을 거라고 믿지만, 이곳에 도착하는  그 순간은 그들의 인

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순간이야.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못 잊을지도 모

르지. 그러니, 그 젊은이들을 좀 더  존중하고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그

순간을 보다 위엄 있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길 바라네. 알겠나?"

티나한은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 사과했다. 시루는  다른 두 사람 쪽

은 쳐다보지 않은 채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났다. 티나한은 시무룩한 얼굴

로 동료들을 돌아보며 방에 돌아갈 것을 제의했다.

두어 걸음을 뗀 다음 티나한과 비형은  케이건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을 깨달았다. 비형은 그에게 다가갔다.

케이건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움켜쥔 채 바닥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서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키가 작은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숙이기만 해

도 그의 얼굴을 완전히 감출 수 있었다.  비형이 허리를 숙이려 했을 때

케이건은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들 가시오. 나는 잠시 나갔다 와야겠소."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요?"

"그렇소."

비형과 티나한은 놀라기보다 걱정을 느꼈다. 상식적으로는 놀라는 쪽이

적절할 것이다. 최후의 대장간 바깥은 빙원이며, 동시에 빙원밖에 없다.

어떤 용무를 지닐 만한 장소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케이건은 이곳에 머

문 1년 동안 아무도 나가지 않는 그 빙원에  간혹 나가곤 했다. 때론 며

칠 후에야 돌아오기도 했다.  보편적인 레콘으로서 티나한은  발 아래가

바다인 그 빙원으로 나가는 것에 큰 우려를 느꼈다. 그리고 티나한과 다

른 이유에서 비형 역시 걱정을 느꼈다. 여름은 끝나고 있었고 길고 길었

던 백야의 시절 또한 끝난 후였다. 그랬기에 비형은 거절당할 것을 알면

서도 질문했다.

"함께 나갈까요?"

"혼자 가겠소."

"곧 밤이 될 겁니다. 요 며칠 날씨가 좋긴 했지만 혹 눈이라도 오면 길

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이곳에서 길을 잃는다면 대단히 위험하지 않겠습

니까?"

케이건은 간단히 대답했다.

"나는 길잡이요."

잠시 후 케이건은 개썰매에 탄 채 최후의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케이건은 레콘들을 질리게 만드는 얼음 위로 몰아갔다. 그 아래가 깊이

를 알 수 없는 바다라는 사실은 케이건에게  별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

리고 썰매를 끄는 라호친가히들에게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

리 영민한 라호친가히라 하더라도 발 디디고 있는 얼음바닥 아래의 바다

를 상상할 능력은 없다. 따라서 라호친가히들은  아무런 거부 없이 빙판

에 접어들었다. 빙판 위에 올라선  다음부터 케이건이 라호친가히들에게

보낸 것은 달리라는 지시뿐이었다. 방향은  어디라도 좋았다. 그런 목적

없는 질주를 이미 몇 번 경험했기에  우두머리 개는 당황하지 않고 다른

개들을 인도했다.

비형의 우려처럼 밤이 빠르게 다가왔다.

케이건은 썰매를 멈췄다. 비참한 석양이 하늘을 엷게 물들이는 짧은 시

간 동안, 라호친가히들은 붉은 암흑 속에서  헐떡이는 그림자가 되어 케

이건을 응시했다. 케이건은 왼손으로 얼어붙은  고깃덩이를 꺼내어 개들

에게 던져주었다. 개들이 난폭하게 고기를 물어뜯는 동안 케이건은 등롱

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왼손 하나만을 사용했기에 그 동작은 좀 불안했

다. 케이건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썰매 앞쪽에 등롱을 매단

케이건은 개들의 식사가 끝나길 기다려 다시 출발을 지시했다. 썰매날이

다시 얼음 위로 미끄러졌다.

밤이 찾아들었다.

혼란, 매혹, 감금, 은닉, 꿈.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별들이 불타올랐다.

한없이 펼쳐져 있던 지면이 등롱의 미약한 빛이 닿는 제한적인 영역 안

으로 황급히 축소되었다. 그리고 그 너머 암흑 속에서 무수히 많은 별들

이 번득였다. 날지 못하는  동물의 영원한 기준점인  지면이라는 준거는

무성의한 거짓말처럼 별들 사이의 암흑으로 후퇴했다. 케이건과 열두 마

리의 라호친가히들은 거짓이 된  땅 위를 달리기보다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를 달렸다.

일순, 극야의 침정함 가운데로 하늘이 파랗게 불타올랐다.

하늘 한 자락을 찢으며 나타난 푸른  불기운은 별들을 닥치는대로 집어

삼키며 팽창했다. 뒤이어 초록과 노랑,  보랏빛의 불기운들이 나타났다.

소리 없으나 사나운 불기운들은 밤을 무참하게 불살랐고 상처 입은 밤의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뜨겁게  달아올라 녹아내리는 밤. 극

광이 사위를 뒤덮었다.

썰매는 고요히 달렸다.

썰매의 진행방향 왼쪽 하늘에서 하늘치 한 마리가 나타났다.

실로 거대하고 터무니없이 늙은  놈이었다. 수천 개의 눈  중 대다수는

이미 시력을 상실한 듯 생기를 잃고 검게  물들어 있었다. 한 때 폭풍을

쳐부수고 벼락을 희롱했을  그 가슴지느러미는 갈가리  찢어져 볼품없이

나부꼈다. 멀어버린 눈으로 꿈을  보며 별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퇴락. 그가 밤이 녹아내리는 곳으로 접어들었다.

눈 먼 거수는 갑자기 시간을 거슬러올랐다. 멀어버린 눈에 극광이 닿자

검게 물든 눈이 하나둘씩 깨어났다. 기묘한  성좌를 이루던 눈들이 차츰

불타는 성운으로 변모했고, 어른거리는 극광은 빛의 휘파람이 되어 거대

한 몸 위로 미끄러졌다. 극야를 녹여낸 빛으로 몸을 두른 하늘치는 모든

것에 태초의 잔광이 남아있던 시절 하늘을  치닫던 그 강대하고 위엄 있

는 생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늘치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래를 내려

다보았다. 그 순간 케이건의  개썰매와 하늘치는 서로  가로지르고 있었

다.

케이건은 고개를 들었다.

그것도 인사일까? 바위나 산 같은 무정물이나 사용할  수 있을 시간 단

위를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황량한 시간의 방랑자들끼리 주고 받

은 시선은?

'오래간만이군.'

'그렇군.'

케이건은 다시 고개를  숙였고, 라호친가히들이 이끄는  세계로 돌아갔

다. 하늘치 역시 장엄한  극광을 벗어났다. 그들은  자신의 궤도를 다시

나아갔다.

3 킬로미터를 더 나아갔을 때, 케이건은 썰매를 멈춰서게 했다.

육리한 극광은 사라졌다. 주위는 완벽한  암흑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어

디에서도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토록  찬란하던 별빛마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등롱의 조그만  불빛만이 세계의 마지막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직경 5 미터  정도의 구체로 축소된 세계.  그 너머로는 가혹한

거짓말들 뿐이다. 케이건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은 채 무의미한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두었다.

라호친가히들의 으르릉거림에 케이건은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았다. 라

호친가히들은 자신과 주인의 관계를 재설정할 정도로 영특한 몇 안 되는

가축들 중 하나다. 그들은 동사한 주인을 뜯어먹는다. 소란을 부리는 다

른 개들과 달리 우두머리 개는 어둠 속에서 케이건을 물끄러미 노려보았

다. 그것은 관계 재설정을 시작해도  되겠냐는 점잖은 질문이었고, 케이

건은 어떻게든 그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케이건은 왼손으로 바라기를 뽑아 썰매 옆의 빙판을 찍었다. 그리고 그

것을 지팡이 삼아 천천히 일어났다. 라호친가히들은 약간 미심쩍다는 눈

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썰매 옆에 서서  다시 고깃덩이를

집어들었다. 팔이 쇳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지만  케이건은 고깃덩이를

집어 던져줄 수 있었다. 라호친가히들은 그것으로써 자신의 태도를 정립

했다. 게걸스러운 식사가 시작되었고  케이건은 겨우 한숨  돌릴 여유를

얻었다. 케이건은 썰매에 걸터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바라기를 무릎

에 얹어놓은 케이건은 왼손으로 다시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고통스러웠지만, 너무 강하게 움켜쥘 수 없었다. 그렇게 했다간 오른쪽

어깨가 뭉개져버릴 테니까.

항상 징후는 오른쪽 어깨부터  나타났다. 감히 옷을 벗고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케이건은 지금 자신의  오른쪽 어깨가 어떤  모습인지 잘 알고

있었다. 윤기와 탄력을 모두 잃은 살은 희게  변해 있을 것이고 세게 누

르기라도 하면 싸락눈처럼 뿌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함몰될 것이다. 그

렇게 살이 결정화되는 것과 반대로 뼈는 흐물흐물해진다. 필요한 조처를

취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몸은 모조리 결정화된 다음 더 이상 신체를 지

탱할 수 없게 된 뼈와 함께 무너져내릴 것이다.

라호친가히들이 얼어붙은 고기를 깨트리고 뼈를  바숴먹는 소리 때문에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긴 수월했다.

케이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왼손을 썰매로 옮겼다. 포장을 묶은 밧줄

을 풀어낸 케이건은 등롱의 희미한 빛에  의지한 채 커다란 자루를 찾아

내었다. 케이건이 라호친에서 개썰매를 구입한 까닭은, 도보로 감당하기

엔 지나치게 가혹한 환경에 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보다 본질적

은 목적은 그 자루를 운반하는 데 있었다. 케이건은 자루의 주둥이를 벌

린 다음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그의 손에 붙잡힌 큼직한

물체가 끌려나왔다. 왼손 하나만으로는 다루기  힘든 무게였기에 케이건

은 그것을 겨우 썰매  위에 내려놓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가 가져왔던

것 중 남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손 하나로는 그것을 들어올릴 수 없다는

사실이 케이건을 곤란하게 했다. 케이건은 고개를 돌려 개들을 바라보았

다. 사납게 고기를 물어뜯는 개들을 보던  케이건은 상황을 타개할 방법

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고마워."

케이건은 허리를 숙였다. 왼손으론 자루에서  꺼낸 나가의 머리를 단단

히 누른 채 케이건은 개처럼 그것을 물어뜯었다.

혀가 찢어지고 이가 뽑혀나갈  것 같은 반 시간  가량의 악전고투 끝에

케이건은 비늘 두 장과 살점 몇 조각을  얻는 데 성공했다. 케이건은 화

내지 않았다. 겨우 얻은 그 노획물들을 입  안에 넣은 채 케이건은 그것

이 흐늘흐늘해지길 기다렸다. 얼어붙은 비늘에 할퀸 케이건의 입과 볼엔

상처가 가득했고 그곳에서  배어나온 피는 그대로  얼어붙어 케이건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다. 케이건은 눈만 내놓은 모습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입 안에 있는 것들을 계속 혀로 굴리고 잘근잘근 씹었다.

썰매 주위의 땅에는 심하게 부식된 철판에서 떨어진 것 같은 검붉은 가

루가 가득했다. 피와 침이 뒤섞여 얼어붙은 가루였다.

입 안에 든 것이 어느 정도 부드러워졌다.  케이건은 목이 찢어지는 고

통을 느끼며 그것을 삼켰다. 그리고 온몸을 떨며 다시 허리를 숙였다.

식사를 끝낸 라호친가히들이 그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깊은 밤, 최후의 대장간은 고요했다. 세계에서 몰려온 레콘들이 아무리

많아도 날림으로 무기를 만들지 않는 대장장이들은 일정 시간 이상 작업

하지 않는다. 따라서 밤을  불사르는 용광로의 화광이나  망치질 소리는

최후의 대장간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무기를 받기 위해 기다리

는 젊은 레콘들 또한 성급하게 만든 무기를 받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

었기에 대장장이들을 재촉하진 않는다. 하지만 밤은 지루했고 레콘을 즐

겁게 할 만한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점이 없으니 탁자 다리를 이용한

사교 활동에 매진할 수도 없고 맹수가  없으니 동물 애호의 적성을 드러

낼 수도 없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적수가 없으니 존재 증명 또한

힘들 지경이었다. 어쨌든 그곳에 레콘이 즐겨  심취할 만한 일거리는 거

의 없었다. 그러나 관심을 둘 일은  꼭 필요했다. 빙판에 둘러싸여 있다

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엄연히 섬이었고  유쾌한 기분으로 그 사실을 상

기할 수 있는 레콘은 드물었다. 그래서 그들은 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

었다. 그날 밤의 회동은 수탐자들이 있는 방에서 이루어졌고 이야깃꾼의

소임을 맡은 자는 그날  낮에 도착한 다스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수탐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전쟁에  관한 것이었고 다스도는 아

는 대로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는 두 명의 수탐자

들의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비형은 탄복하여 외쳤다.

"용인이 되었다고요? 륜 페이가?"

"그래. 그렇다. 그런데 하텐그라쥬 공작을 잘 아나?"

대답하려는 비형에게 눈짓을 준 다음 티나한은 케이건의 부재를 아쉬워

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 좀 알아. 우리가 그를…"

"아, 참. 그렇군요. 당신들이 그 분의 망명을 도왔지요? 이제 기억납니

다. 여러분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그 분의  망명을 도왔고, 그리고

왕의 명령에 따라 화신의  수탐이라는 두 번째  임무에 착수하신 것이지

요?"

티나한과 비형은 그 말에 동의했다. 그 외엔 할 일도 없었다. 다스도는

수염볏을 좀 과장된 동작으로 쓰다듬었다. 자신을  무기를 쥘 준비가 된

성인으로 봐달라는 시늉이 분명했지만 불행하게도 티나한은 그렇게 예민

하지 못했다.

"아스화리탈이 포자를 뿌렸단 말이지. 그런데 그 용근이 발화했어?"

다스도는 수염볏을 쓰다듬는 것을 포기하고 말했다.

"나가들에게 뺏은 소드락을 뿌리며 성장을 촉진했지만 그 중 단 하나가

발화했습니다. 하텐그라쥬 공작은 그것을 왕에게  진상했지만 왕은 거절

했지요. 그래서 공작이 그것을 먹었답니다."

비형은 4년 전 륜과 헤어지던 날을  떠올렸다. 비형은 자신이 기억나는

륜과 용인의 관념을  결부시켜보려 했고, 실패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 도깨비의 감상이었다. 티나한 또한 목 깃털을 벅벅 긁으며 말했

다.

"음. 그, 하텐그라쥬 공작이라고? 그 자가 용인이 되었다는 말이지. 사

람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초인이 되었다고. 전쟁터에선 쓸만하겠군."

"그렇지 않습니다. 티나한."

"뭐?"

"그렇지 않습니다. 하텐그라쥬 공작은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루지 않습

니다."

"무슨 소리야? 용인이 되었다면서?"

"글쎄요.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하텐그라쥬 공작은 그렇게 하

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런 능력이 없어도 전쟁터에서 활약을 펼칠 수 있

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하텐그라쥬 공작은 나가 수호자들의 물

다루는 기술을 용인의 수준에서 사용합니다. 도깨비의 불 다루는 기술은

상대도 안 될 수준인 것 같습니다."

"허!"

티나한은 그 이상의 감상을 말하기 어려웠다. 비형 또한 눈이 동그래져

다스도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방문한  다른 레콘들 또한 긴

장하여 수근거렸다. 다스도는 이야깃꾼의 쾌감을 만끽하며 말했다.

"그리고 공작에겐 아스화리탈도 있잖습니까? 그  뇌룡은 하늘치를 구워

먹습니다."

레콘들은 더 큰 감탄과 관심을 보였지만  티나한과 비형은 그러지 않았

다. 풍문의 숙명인 과장이 섞인 이야기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아스화리탈에게 혹 그럴 능력이 생겼다 하더라도,  두 사람은 식물에 속

한 용이 동물의 고기를 먹는 모습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티나한

과 비형이 기억하고 있는 아스화리탈에겐 입도 없었다. 하지만 티나한과

비형은 륜이 용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에는 진실성이  있으리라고 생각했

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 깊은 우려를 - 티나한의 경우엔 분

노를 - 느꼈다. 나가들의 골통을 부수어주는 것에서 생의 의미를 찾겠다

고 서원하고 무기를 얻게 되자마자  전쟁터로 달려나가겠다는 청년 다스

도는 신이 나서 말했다.

"우리는 이길 겁니다. 모든 것이  기막힐 정도입니다. 나가들이 한계선

을 넘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

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  왕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텐그

라쥬 공작은 이미 사라졌다고 믿은 용과 함께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 뿐

만이 아닙니다! 그 다음은 바로 이곳에 계신 수탐자들의 차례겠지요."

비형과 티나한은 놀란 표정으로 다스도를 바라보았다. 다스도는 환하게

웃었다.

"이 분들은 이미 시우쇠님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이미

나가들은 시우쇠님의 이름에 오줌을  지릴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분들은 곧 다른 두 화신도 찾아내시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겁니다!"

두 사람은 약간 당혹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일이 위대한

승리의 열쇠가 된다는 식의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보낸 지난 1년은 슬픔보다는  짜증을 유발시키는 것이었다.  그 때 무리

중 누군가가 조용히 말했다.

"신은 무보수 만능 하인은 아니지."

단도장(短刀匠) 시루였다. 최후의 대장간에서는  가장 한가한 장인이기

도 하다. 기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시루는 의심할 필요 없이

우수한 단도를 만들어내지만, 단지  부리로 쪼는 것으로도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을 수 있기에  평생의 동반자로 단도를  선택하는 레콘은 별로

없다. 어쨌든 일거리가 별로 없었기에 단도장은 최후의 대장간을 방문하

는 젊은이들을 상대하는 일에 쓸 시간이 충분했다. 또한 낮의 피로가 없

었기에 밤의 담소에 참가할 여유도 있었다.  단도장 시루는 자신을 바라

보는 무리를 못 본 척하며 말했다.

"무보수 용병이라 해도 마찬가지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군."

다스도는 부리를 조금 벌린 채 멍하니 시루를 바라보았다. 그 때 이 거

인들의 세계에서 꽤나 조그맣게 보이는 비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우쇠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시지 않으십니까?"

보다 공적인 자리에라면 무시했을 테지만 시루  또한 이런 사적인 소모

임에서는 비형의 질문에 선선히 대답했다.

"아니. 너희가 아닌 북부군을 위해 싸우지. 재미있지 않나?"

"재미있다니오?"

시루는 비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우쇠님은 너희 도깨비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란 거야."

"도깨비도 북부군에 속해 있는데요? 무기를 제작하고 군량을 대고 포로

를 수용하고…"

"싸우지는 않지. 도깨비에겐 어울리는 일도 아니야. 하지만 시우쇠님은

싸우고 있지. 그 분을 용병이라고 말한다면  도깨비의 용병이 아닌 북부

군의 용병이겠지."

비형은 시루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시루는 그것을 명확하게 말

했다.

"자신을 죽이는 신께서 도깨비들을 가호한다면, 내  생각에 그 분의 화

신인 시우쇠님의 행동은 싸움 자체를 중단시키는 것에 집중되어야 할 것

같군. 싸움을 원하지 않는 너희 도깨비들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그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아. 하지만 그 분은 활발하게 싸우고 있지."

비형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단도장께서 하시는  말씀은 자신을 죽이는  신께서 도깨비를

가호하지 않으신다는 겁니까?"

"글쎄. 비형. 나는 그렇게, 혹은 그 반대로  말하지는 않겠어. 나는 다

만 자네들이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화신을 찾아내었을 때 그 분의 모

습이 어떠할지 몹시 궁금하군. 우리 레콘들은 싸움으로 해결해. 나는 그

것이 옳다거나 그르다고도 말하지 않겠어. 그저 우리가 그런 종족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런데,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화신께서도 그러실까?

다스도. 나는 자네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두 분의 화신이 무조건 북부군

의 주력병력이 되어주실 거라고 믿는  것은 그야말로 레콘다운 생각이라

고 말해주고 싶군."

흔들거리던 등롱의 불이 사그라들었다.

케이건은 썰매 위에 쓰러져 있었다. 왼팔과 오른쪽 다리는 썰매 바깥으

로 내민 볼품없는 자세였다. 그런 모습으로 케이건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썰매 앞쪽에 앉아있던 개들 중 한 마리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개는 썰

매 바깥으로 내밀어진 케이건의 오른쪽 다리를 주둥이로 툭 건드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개는  한 번 더 케이건의  다리를 건드렸다. 그

행동은 반드시 우려와 애정에 기인한 것은 아닌 듯했다. 썰매 앞쪽에 앉

아있던 개들 중 몇 마리가 더 합류했다.  몸을 부딪힌 개들은 서로를 향

해 으르릉거렸다. 서열 낮은 놈의 목을 깨무는 놈도 있었다. 우두머리는

원래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지만 다른 개들은 모두 썰매 주위로 몰려들

었다. 개들의 소란이 꽤 요란해졌지만 썰매  위에 쓰러진 케이건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개들은 차츰 대담해졌다.  그 중 어떤 놈이 마침

내 이를 드러낸 채 썰매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케이건의 가슴에 내려서기 직전, 개는 턱이 돌아갈 뻔한 일격을 선물받

았다.

호되게 나가떨어진 개는  등부터 빙판에 떨어졌다.  당황하여 썰매에서

물러난 개들은 어깨를 낮춘  채 케이건의 왼손을  응시했다.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라호친가히의 턱을 후려친 그 왼손은 서서히 원래 자리로 돌아

가고 있었다. 그 때  앞쪽에 있던 우두머리 개가  벌떡 일어서더니 짧고

날카로운 소리로 짖었다. 개들은 도로 썰매 앞쪽으로 돌아갔다. 맞은 개

는 침을 흘리며 약간 비틀거리는 동작으로 돌아갔다.

별들의 기묘한 운행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케이건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똑바로 떴다. 날카로운 별빛이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을 아프게 했다. 케이건은  왼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오

른쪽 어깨를 만졌다. 기대하고 있던 감각이 느껴졌다. 어깨를 만지던 케

이건의 손이 배 위로 옮겨졌다. 오른손  또한 그 뒤를 따랐다. 케이건은

두 손으로 배 위에 놓아두었던 물건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얼굴 가까이

로 가져왔다.

살점이 벗겨진 나가의 머리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 얼굴은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케이건은 그 나가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태어난 곳이 어딘지, 어떤 날

씨를 좋아했는지, 어떤 이야기를 즐겼는지도  알지 못했다. 누구를 좋아

했고 누구를 싫어했고 어떤  소망을 가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케이건이

그 나가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세 가지뿐이었다. 그 나

가가 여자라는 것, 소드락을 먹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극야의 밤 속

에서 살점이 다 벗겨진 얼굴로 웃음 아닌 웃음을 웃어야 하는 최후를 맞

이할 거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케이건은 머리를 다시 배 위에 올려놓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극광이 다

시 번득였다. 보기 드문 진홍색 극광이  케이건의 시야 가운데서 서서히

피어났다. 그것은 어떤 뚜렷한 의지를  지닌 것처럼 번져나갔다. 케이건

은 극광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대하게 퍼져나간 극광은 수

백 킬로미터짜리 얼굴이  되었다. 아는 얼굴이었기에,  케이건은 조용히

그 이름을 불렀다.

"아젤키버."

살아났구나.

"천년 묵은 시체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너는 시체가 아니다. 너는 살아있다. 그리고 살아야 한다.

"제 초상화를 보여드릴까요?"

케이건은 배 위에 놓아두었던 나가의 머리를 집어들어 하늘로 향해보였

다. 살점이 떨어져나간 그 얼굴을 들이대며 케이건은 복화술사처럼 말했

다.

"안녕하십니까? 케이건 드라카라고 합니다.  부디 얼간이라고 부르지는

말아 주십시오.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이래뵈도 유명인이랍니

다. 변변찮습니다만  제 주요한 업적 두어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왕국 아

라짓을 멸망시킨 것, 그리고 키탈저 사냥꾼들을  멸망시킨 것 정도가 있

습니다."

그런 건 개에게나 던져줘라.

그것은 수사법이 아니었다. 케이건은 들고  있던 머리를 개들에게 던졌

다. 개들은 갑자기 날아온 머리에 당황하다가 곧 검사를 시작했다. 케이

건은 거칠게 말했다.

"제가 당신들을 멸망시켰습니다."

키탈저 사냥꾼은 멸망하지 않았다. 네가 있으니까. 그리고 네가 있기에

흑사자의 나라도 멸망하지 않았다.

"멸망했습니다."

멸망하지 않았다. 멸망시키지 마라. 멸망했다고  선언하면 복수의 의무

에서도 해방되겠지.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복수는 계속되어야 한다.

케이건은 입을 다문 채 일렁거리는 진홍빛 극광을 바라보았다.

너는 네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의식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네 문제는 피로다. 너는 지친 것이다.  그래서 너는 나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니, 말해주겠다. 너는 살아있다. 그리고 네가 살아있기에 복수 또한

계속되어야 한다.

"꺼져라. 기만하는 기억아."

극광은 사라졌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케이건은 몸을 일으켰다. 개들은 아직까지도  머리를 검사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거칠게 그들을 불렀다. 개들을 다시 준비시킨 케이건은 썰매를

뒤돌아서게 했다. 그리고 최후의 대장간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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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1. '땅의 울음' 편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1-2.                        관련자료:없음  [55890]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7-11 00:42  조회:7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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