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38화 (38/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0-4.                        관련자료:없음  [55669]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7-05 01:10  조회:9433

눈물을 마시는 새.

10. 침수(侵水) - 4

탄실 구마리는 어르신이었다. 따라서 나가들의  군단 한 가운데로 날아

드는 그녀를 보면서도 나가들은 그녀가 도깨비불을 휘두를까봐 걱정하지

는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성을 내었고, 어떤  자들은 쓸모없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사이커를 휘둘렀다. 탄실은  웃으며 사이커를 휘두른

나가에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나가는 질겁했다.  물론 입술이 닿는 일은

없었다. 탄실은 소리 높이 웃으며 몸을 뒤집었다.

발바닥을 하늘로 향한 모습으로  날아가던 탄실은 곧  목표했던 지점에

도달했다.

도깨비들을 좌절로 몰아넣고 있는 수호장군이 거기 있었다. 도깨비들은

딱정벌레에 탄 채 엔거 평원의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들의 상상력이 가득

담긴 환영들을 펼쳐보이고 있었지만, 그 수호장군은 환영의 취약점을 용

케 찾아내어 그곳에 수력을 집중시키는 효율적이면서도 간단한 방법으로

환영을 쳐부수고 있었다. 그리고 알려진 나가들  중에서 그 정도의 수력

통제력을 발휘하는 나가는 하텐그라쥬 공작 륜  페이 이외에 오직 한 사

람, 대장군 갈로텍뿐이다.

탄실이 그를 발견했을 때도 갈로텍은 평원에 출현한 머리 셋 달린 용을

쳐부수고 있었다. 갈로텍이 파괴하기 전까지  환상적인 삼중창을 부르고

있던 그 용은 실로 대단한 작품이었고, 그 때문에 탄실은 예술품의 소멸

을 보는 듯한 아쉬움마저 느꼈다. 그리고  탄실은 갈로텍의 능력에 새삼

경탄을 느꼈다. 탄실 구마리는 언젠가 하텐그라쥬 공작이 갈로텍에 대해

내놓은 가설을 떠올렸다. 륜 페이는 그에  버금가는 수력 통제력을 갖춘

갈로텍이 혹 용인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륜 페이는 곧 그럴 가능성

이 없다고 말했다. 갈로텍이  용인이 되려면 용근을  먹었어야 할 텐데,

용화가 피어났다면 용인인 륜이 당연히 느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회한 탄실은 노련하게  말을 다루는 갈로텍의  모습에서 어떤

의심을 느꼈다.

전쟁은 4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따라서  갈로텍에겐 말이라는 동물에

게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 4년 정도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

깨비들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물론 도깨비의 어르신이 노회하긴 하지만,

그런 노회함도 도깨비다운 비약을 기반으로 한  채 구현된다. 따라서 뒤

집힌 모습으로 날아가던 탄실은  갈로텍의 얼굴 바로  앞쪽에 거꾸로 된

얼굴을 내밀며 크게 외쳤다. "이봐! 거기 도깨비는 없냐?"

깜짝 놀란 갈로텍은 노기 하수언이 겉으로  뛰쳐나오는 것을 미처 막지

못했다.

"예. 어르신. 노기 하수언이라고 합니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어! 군령자였구나! 말 탈 줄  아는 것 보고 짐작했

지. 그런데 노기라고? 대장장이 노기 하수언?"

"제가 말을 타고 있어요?"

노기는 기겁하며 곧장 뒤편으로 사라졌다. 갈로텍은 분노하여 허리춤을

움켜쥐려 했지만 손을 담당하고 있던 주퀘도가  그 시도를 거부했다. 그

리고 주퀘도는 갈로텍에게 다른 자를 전면에 내세우게끔 했다. 갈로텍의

요청에 의해 레콘 그라쉐가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그라쉐는 해묵은 고

사(古事)를 재연해 보였다.

"꺼-져-라-!"

그 옛날 수수깨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탄실  구마리는 태풍에 휘말린 낙

엽 마냥 날아가버렸다. 갈로텍은 기뻐하며 그라쉐와 자리를 바꿔 앞으로

나섰다. 물론 말을 다루는 몸의 움직임은 주퀘도에게 맡겨둔 채. 그러나

극연왕의 부탁을 받아 수수깨비 퇴치에  나섰던 레누카와 갈로텍의 부탁

에 의해 나선 그라쉐 사이에는 기나긴 시간 이외에도 어쩔 수 없는 차이

가 있었다. 탄실 구마리는 다시 날아들며 말했다.

"이런, 이런. 반사적으로 도망쳐버리고 말았단 말이야. 나가의 목을 통

해 나온 계명성이라 별 볼 일 없는 것인데도."

갈로텍은 비늘을 부딪혔고 주퀘도는 아쉬움을 삼켰다. 탄실은 웃으며 -

이번에는 옆으로 누운 모습으로 날며 - 말을 걸었다.

"어르신 놀라게 하는 법도 알고 있군. 꽤 해묵은 군령인가 본데."

갈로텍은 결국 입을 열어 말했다.

"계속 귀찮게 굴면 두 번째 구축법(驅逐法)을 쓰겠다."

탄실은 갈로텍의 허리춤을 보고는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

만 갈로텍은 탄실이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탄실은 몸을 없애

버리고 머리만 남겨둔 모습으로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무서워서 몸이

오그라들 지경이네!" 갈로텍은 결국 상대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 탄

실은 갈로텍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리고 그 의도를

무시했다. 여전히 머리만 남겨둔 모습으로 날아다니며 탄실은 말했다.

"도깨비도 있고, 말 타는 법을 아니 킴도  있는 것이고, 게다가 레콘도

있군. 그런 자네가 어떻게 북부인을 다 죽이려고 들 수 있는 건가? 대답

을 해봐."

이미 어르신을 물러나게 하는 세 번째  구축법을 쓰기로 결심하고 있던

갈로텍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탄실은 씩 웃고는 말의 눈으로 날아

들었다. 기겁한 말은 껑충 뛰어올랐고 낙마할  뻔한 갈로텍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서 외쳤다.

"제기랄, 저리 꺼져!"

"대답해주게. 젊은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어째서 자네 속에 있는

군령들은 동족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는데도 잠잠한 거지?"

"멍청한 도깨비 같으니, 그걸 질문이라고! 노새의 동족은 누구냐!"

탄실은 탄성을 질렀다.

"오호, 너는 영적 잡종인 게로구나!"

갈로텍은 탄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마음대로 떠들 수 있을  정도로 네게 허용된 시간이  길다고 착각하나

본데, 슬슬 도깨비의 육이 그립지 않으냐?"

갈로텍의 지적은 정확했다. 탄실은 장황한  고별사를 남긴 다음 자신의

모습을 불덩이로 바꿨다. 하늘로 치솟듯 사라지는 어르신의 모습을 보던

갈로텍은 복잡해진 심사를 가누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지나치게 현실적

이어서 무미건조하기까지 한 평원의 풍경을  눈이 휘둥그레질 몽환의 전

시장으로 바꾸어놓는 도깨비들의  시도는 계속되었고,  그래서 갈로텍은

분노 속에서 그 예술을 규탄하고 핍박했다.

그가 한꺼번에 다섯 개의 환영을 터뜨려버렸을  때 결국 주퀘도가 말을

걸어왔다.

"이봐. 갈로텍. 힘을 너무 빼는 것 아닌가? 저 환영들은 그냥 지나쳐도

무방한 것들인데."

"불덩이를 어떻게 그냥 지나칩니까!"

"물론 상당히 뜨겁긴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도깨비들은 틀림없이 없

애버릴 거야. 자기 도깨비불로 누군가를 태워죽일  정도로 배짱 좋은 도

깨비는 아무도 없어. 물론 시우쇠는 그럴 수 있지만 그는 화신이니 논외

지."

그 자신이 생각해냈어야 하는 것이었기에 갈로텍은  더 큰 분노를 느꼈

다. 가까스로 자신을 가다듬은 갈로텍은 강렬한 니름을 토해내었다.

[저 도깨비들은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군. 무시하고 진군한다!]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반감이 돌아왔다. 사람을 태워죽일 정도로

배짱 좋은 도깨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 앞에 있는 불에 몸을 던질

정도로 강단이 있는 사람 또한 드물 것이다. 대나무 군단의 군단장 보라

크가 황급히 다가오려는 몸짓을 보였지만  갈로텍은 손을 내저으며 닐렀

다.

[우리에겐 심장이 없다! 하지만 저  얼간이 도깨비들에겐 그것이 있다.

그 심장을 얼어붙게 해주자!]

갈로텍의 니름을 이해한 나가들은 탐탁찮은 표정으로 행군했다.

주퀘도의 예상대로였다. 엔거의 하늘을  날아다니던 도깨비들은 나가들

이 무작정 걸어오자 황급히 도깨비불을 소멸시켰다.  그 중 어떤 도깨비

는 환영을 유지한 채  온도를 낮추어 나가들을  속여보려는 시도를 했지

만, 열을 보는 나가의  눈에는 그 낮은 온도의  도깨비불이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이  뚜렷했다. 나가들은 점점  대담하게 도깨비불을

향해 진군했다.

도깨비들은 낭패한 심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수화를  나누었다. 잠시

후 평원의 도깨비불이  모두 사라졌고 하늘에서는  딱정벌레들이 물러났

다. 나가들은 환호를 - 물론 소리는  없었다. - 올리며 활기차게 진군했

다.

그러나 분노의 대상을 잃은 갈로텍은 그다지 즐겁지 못했다.

"잠시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주퀘도."

주퀘도는 갈로텍의 요구에 응했다. 의식의  뒤로 물러난 갈로텍은 잠시

아래로 가라앉았다.

인식의 날개를 떼어낸 갈로텍은 의식의 무게가  이끄는 대로 정신의 늪

속으로 가라앉았다. 기억이 뒤섞이는 곳.  자의식의 등롱으로 비춰본 경

험의 동굴은 욕망의 분출이 남긴 찌꺼기로  뒤덮여 있다. 등롱의 불빛을

받은 찌꺼기들이 시간을 거슬러, 혹은  그저 순서를 왜곡하며 명멸한다.

퇴폐적 반딧불이의 숲. 지나치게 깊이 내려온  것을 깨달은 갈로텍은 인

식을 펼쳤다.

나-여기-지금-그게 무엇이든 간에.

갈로텍은 멈췄다.

[이게 누구야, 갈로텍?]

'맙소사, 이곳까지 내려왔나?' 갈로텍은 비늘을  부딪히며 고개를 돌렸

다.

화리트가 그에게 등을 보인 모습으로  서있었다. 갈로텍은 그렇게 느꼈

다. 하지만 동시에 갈로텍은 화리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 또한 깨달

았다. 화리트는 전후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바꿔놓았다. 그래서 갈로텍은

화리트의 등을 보면서도 그가 빙긋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사다망하실 텐데 어인 일로 오셨는지?]

[잠시 방해 좀 하려고 온 거야. 그러니 생각하지 말아줘.]

니름을 끝낸 후에야 갈로텍은 자신의 니름에서 '방해'와 '생각'의 위치

가 바뀌어 있음을 깨달았다. 화리트는  어순까지도 혼란스럽게 만들어놓

았다. 갈로텍은 화를 냈다.

[이런 우습지도 않은 짓거리 집어치우지, 그래?]

[미안. 고정된 힘과 방향이라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

갈로텍은 화리트가 왜 시간과 공간이라고 니르지 않고 힘과 방향이라고

니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화리트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흐릿해지다가

다시 명확해졌다가, 결국 절충적인  모습이 된 화리트는  어깨를 으쓱였

다.

[위쪽 소식은 좀 어때?]

[방해하지 말라고 했어.]

[방해한 건 그쪽이야. 갈로텍.]

갈로텍은 눈을 가늘게 떴다. 화리트는 이 지점의 점유권을 주장하고 있

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갈로텍에겐 그 주장을  무시할 만한 수단이 없

었다. 거북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갈로텍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가 둘러보는 곳마다 화리트가 있었다. 화리트는 차갑게 웃었다.

[그 도깨비의 말이 신경쓰이나 보군.]

갈로텍은 움찔했다.

[이곳에 있으면서 어떻게?]

[네가 가르쳐줬어. 아니, 가르쳐줄 거야.]

갈로텍은 멍한 얼굴로 화리트를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화리트가 시간의

순서마저 혼란스럽게 해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로텍은 화리트가 도

대체 무엇이 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화리트는 장난스럽게 닐

렀다.

[오, 이런.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이상하다, 정말 이상해. 화가

나서 노새가 어쩌니 하는 말을 해주긴 했지만, 그건 그냥 해 본 말에 불

과해. 왜 내 속에 있는 인간이나  도깨비, 레콘은 자기 동족들이 학살당

하고 있는데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걸까?]

[…답을 아나?]

[아주 간단한 문제지만, 네가 아직 죽어본 적이 없다는 또 하나의 간단

한 문제가 결합됨으로써 대단히 대답하기 복잡한 문제가 되는군.]

[죽은 자에겐 동족이고 뭐고가 없다는 건가?]

[지나친 단순화야. 갈로텍. 하지만 친구가  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죽은 친구까지 계산하지는 않는  것을 니르는 거라면,  그럭저럭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 추리야.]

갈로텍은 화리트의 니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무슨 니름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갈로텍은 확신할 수 없었다.

[청춘은 젊은이의 것이고 삶은 산 자의 것이고 역사는 절대로 역사가의

것이 아니라는 니름이 있지. 그렇다면 군령자는 왜 이 짓을 계속하는 거

지?]

[나에게 묻는 거야? 갈로텍. 나는 군령자가 되려  한 적 없어. 네가 납

치했잖아. 주퀘도에게 물어보지, 그래?]

[그렇다면 네가 바라는 것은 뭐지?]

[여신을 해방시켜. 그리고 모든 나가를  한계선 이남으로 물러나게 해.

그 다음 깔끔하게 죽어.]

[거절할 것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어. 자, 이제 도깨비가 네게 던진  질문이나 말해주고 빨리 도

망쳐.]

[도망치라니?]

[그녀가 오고 있거든.]

갈로텍은 비늘을 곤두세웠다. 그는 무작정 도망치려 했지만 그 순간 자

신이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뿐이었다. 갈로텍은

도깨비 탄실과의 대화를  화리트에게 들려주지 않고서는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화리트가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심각하게 왜곡된 논리에

대해 화를 내는 대신,  갈로텍은 황급하게 화리트에게  탄실과의 대화를

들려주었다.

니름을 끝내고 그곳을 떠날 수 있게 되었을 때 갈로텍은 누군가가 다가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난 하늘치 같은 기세로 카린돌 마케로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호수 같았다. 크기가  그렇다는 니름이다. 산을 뒤덮는

구름 같은 상반신 뒤로 하반신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바야흐로 카린

돌은 가장 거대한 하늘치보다  더 거대한 모습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 갈증으로 대양을 비워버릴 것 같은 초월적인 괴수의 모습으로 날아오

는 카린돌을 보며 갈로텍은  질려버리고 말았다. 화리트가  빠르게 닐렀

다.

[그녀를 향해 날아가.]

[미쳤나!]

[도와주겠어. 그녀를 향해 날아가. 젠장. 네가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든

저 팔의 길이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에게 날아가!]

화리트의 니름이 옳았다. 갈로텍은 카린돌의 손가락이 심장탑보다 작다

고 니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존재를 태워버릴 것 같은 공포 속에

서 갈로텍은 카린돌을 향해 날아갔다. 갈로텍의 모습을 굳이 묘사한다면

하늘치를 향해 돌진하는 파리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다. 갈로텍은 되지도

않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갈로텍은 자신과 카린돌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았

다.

카린돌은 격노하여 손을 휘저었다. 그  손은 갈로텍을 가루로 만들어버

릴 수 있는 방향과 각도로 날아들었지만, 그에게 닿지 않았다. 화리트가

공간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갈로텍은 그런 간단한 추

리도 하기 힘든 상태였다. 갈로텍은  혼란 속에서 카린돌에게 돌진했다.

카린돌은 울부짖었다.

[화리트! 그만둬! 죽일 테야! 죽이고 말 테야!]

갈로텍은 그 절규에 담겨있는 증오에  비늘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화리

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씁쓸하게 갈로텍에게 닐렀다.

[갈로텍. 너 외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도와주는 거

야. 그녀가 얼마나 커졌는지  봤지? 카린돌은 위로  향하는 길을 찾아낼

수 없기에 자신을 무작정 키우고 있어. 좀 무식한 방법이지만 확실한 방

법이기도 하지. 거대한 증오나 거대한 욕망 같은 것은 결국 겉으로 드러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 그녀도  조만간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거야. 그 때가 되면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저지할 수 없어.]

혼란 속에서도 갈로텍은 충격을 받았다.

[네가 그녀를 저지하고 있었나?]

[그래. 길을 감추고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어. 그녀가 너에게

향하기 전에 여신을 해방시키고 나가들을 남쪽으로 돌아가게 해.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

[화리트! 그녀는 언제쯤 겉으로 드러날 것 같나?]

화리트는 대답했지만 이미 거리가 너무  멀었다. 갈로텍은 화리트의 대

답을 듣지 못한 채 수면으로 치솟는 물고기처럼 의식의 전면으로 솟구쳤

다. 갈로텍에겐 되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는 헐떡거리며 주퀘도를 불

렀다.

"주퀘도!"

주퀘도는 반갑게 대답했다.

"오래간만이군.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오래간만? 무슨 말입니까?"

갈로텍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조금 전까지 달리고 있

던 평원이 아니었다. 주위로는 산봉우리들이 펼쳐져 있었고 머리 위로는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말은 산등성이에 난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갈로텍이 황당해하자 주퀘도는 미심쩍은 투로 말했다.

"열흘만에 보는 거라면 오래간만이라고 해도 되잖아?"

"열흘이라고? 10분이 아니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갈로텍은 의식의 세계에서 화리트가 일으킨 혼란이 실제 세계와의 불가

사의한 시간차를 만들어내었음을 깨달았다. 설명하기가 난감했기에 갈로

텍은 질문을 던졌다.

"좀 혼란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입니까?"

주퀘도는 어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여기는 시구리아트 산맥이야. 자네가 저

아래에 있는 동안 여기까지 그들을  추적해왔지. 젠장. 도깨비들이 새로

운 방법을 사용했어. 대호왕처럼 보이는 도깨비불을 만들어서 우리를 여

기저기로 끌고 다녔어. 그런 곤란한 상황인데, 네가 없으니 부하들 다루

기도 쉽지 않아서 문제가 정말 많았어. 저 바보들은 내가 고함을 질러도

명령을 듣지 않아. 어깨를 두드리고 청력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가르쳐줘

야 겨우 알아들으니, 제기랄!"

주퀘도는 꽤 화가 나있는  듯했다. 그런데 갈로텍은 분노  이외에 다른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초조함 비슷한 것이었다. 갈로텍은 그것이

무엇인지 추측해보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 시구리아트 산맥이라고 했습니까?  그렇다면 여기가 시구리아트

유료도로입니까?"

"그래. 맞아."

주퀘도는 뭔가 켕기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서야 갈로텍은 자

신이 느낀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죽음을 뛰어넘어 자신을 좌절시켰던 장소에 되돌아온 죽음의 거

장이 느끼는 흥분이었다.

사모 페이는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에서 북부를 초토화시키는 무시무시

한 전쟁의 흔적을 읽을 수 없었다.

관문요새는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산의 정수리를 타고 앉아 있었

다. 그리고 징수소장은 몇  년 전 그녀가 이곳을  지나갔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심지어 탁자 위에 놓여있는 아르히 주전자까지 똑

같았다. 몇 년 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 뿐이었는데, 징수소장은 더 이상

여행객의 통행료를 알 수 없어 난처해하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 병사들

과 나가 수호장군들과 마루나래와 두억시니의 통행료를 척척 불렀다. 그

가 잠시나마 지체했던 것은 바르사 돌 교위의 얼굴을 보았을 때였다.

"실례합니다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예순 둘이오만."

"그렇다면 당신은 면제입니다."

바르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노인공경이오?"

"예. 예순이 넘은 인간은 면제됩니다."

징수소장의 설명에 데오늬가 흥미를 느낀  듯했다. 데오늬는 고개를 갸

웃했다.

"징수소장님! 그렇다면 도깨비나 레콘의  노인들은 면제되지 않습니까?

왜 그렇지요?"

징수소장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다른 종족들의 노인들에게도 면제 사유가  있긴 합니다만 나이는 아닙

니다. 도깨비는 어르신이 되었을 때, 레콘은  무기를 들 수 없을 때입니

다."

데오늬는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 때 대호왕이 질문했다.

"나가는?"

징수소장은 대호왕을 바라보다가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나가의 면제사유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이 도로를 이용한 나가

노인이 없었으니까요."

대호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통행료가 책정되었고, 바르사 돌 교위는 미리 준비해간 산양 열 마리를

내보였다. 징수소장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산양은 식량

으로서의 가치가 있었지만 유료도로당은 산양에게도 통과세를 물렸기 때

문에 차라리 산양을 내어주는 편이 나았다. 징수소장은 관문을 열었다.

거대한 철문이 열리자 그 안으로 무장한  당원들이 좌우로 서있는 모습

이 보였다. 바르사는 당황하며 검을 움켜쥐었지만 징수소장이 먼저 설명

했다.

"괜찮습니다. 그대로 지나가신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겁니다."

"왜 병사들을 배치한 거요?"

"혹 우리의 관문요새를 점거하여 전쟁에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을지 모

르기 때문에 배치한 것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하지만, 이보시오. 당신들이 우리를 붙잡아서 적

에게 넘겨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징수소장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적? 유료도로당의 적은 무임이용자 뿐입니다.  그 경우에도 퇴거의 대

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적이라 부르기도 어렵습니다. 당신들의 적과 우리

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가들은 북부인을 가리지  않고 죽이는데?  당신들이 유료도로당이건

뭐건 그 전에 인간이잖소. 나가들은 당신들도 공격할 거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생각을

존중할 의무는 없습니다."

바르사는 다시 항의하려 했다. 그 때 마루나래에 탄 대호왕이 말했다.

"돌 교위. 우리는 이곳을 지나가지 않는다."

"예?"

"여기서 머물도록 하자. 그들은 통행자들이 원하면 침식을 제공해야 하

지. 여기서 잠시 쉬도록 하자."

"하지만 폐하. 적들이 뒤통수에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에 머물자는  것이다. 이곳을  점거해서 그들을  물리쳐보

자."

바르사 돌 교위는  물론이거니와 징수소장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가면에 가려진 대호왕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기에 징수소장은 미심쩍은

어투로 말했다.

"조금 전 그 말씀 진심이십니까?"

"그래. 다만 창검이 아닌 혀로 점거할  생각이다. 징수소장. 짐은 보좌

관에게 회동을 요구한다."

징수소장의 질문에 보좌관은  승낙을 보내어왔다. 그래서  잠시 복잡한

일들이 일어났다.

유료도로당의 당원들은 무장한 병력  수백 명이 요새에  들어오는 것을

탐탁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병력들이 절대로 한 곳에

집결될 수 없도록 여러 군데에 분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자 바르

사 돌 교위가 항의했다. 바르사는 왕을  보호해야 하는 병사들이 그렇게

흩어져서는 곤란하다고 응수했다. 결국  그들은 모두 관문  통로에 앉게

되었다. 200 명이 넘는 인원에 보통  인간보다 훨씬 체구가 큰 두억시니

들과 마루나래까지 있었지만 가까스로 통로 전체에  앉을 수 있었다. 보

좌관은 아래로 내려와서 대화하는 것에 동의했다.

대호왕과 보좌관은 중간 지점이라 할 수  있는 계단에서 서로를 마주보

며 섰다.

보좌관의 뒤로는 당원들이, 그리고 대호왕의 뒤편으로는 북부군 병사들

이 긴장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보좌관은 사모가 잘 기억하

고 있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관인이 상당히 많군요. 폐하."

"오래간만이군."

"네. 하실 말씀은?"

"이 요새를 빌리려면 얼마나 지불하면 되겠나?"

보좌관은 대호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요새는 임대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최초의 경우라는 것에  그다지 거부감이 없는  걸로 아는데.

난생 처음 보는 여행객이라도 당신들은  차분하게 통행료를 결정한 다음

징수하잖아. 당신 요새를 빌리려는 사람이  처음이겠지만, 그래도 한 번

고려해봐. 임대료로 얼마나 지불하면 되겠나?"

"폐하.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우리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는 길을 걷는 사람에게  봉사합니다. 폐하께서 이곳에  머물러 누군가와

싸우는 것은 길을 걷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우리의 도

로에서 전투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냥 통

과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를 사."

"예?"

"우리를 사란 말이다. 우리 뒤로는 나가들이 쫓아오고 있다. 그들은 북

부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있고, 너희들이라고  해서 특별 취급하지는 않

을 거다. 그들과 싸워야 할 텐데, 그렇다면 우리 병력이 도움이 되지 않

겠나?"

보좌관은 기묘한 얼굴로 대호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이곳이 나가의 공격을 한번도 받지 않

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모는 놀랐다. 관문요새의 변함없는 모습  때문에 사모는 이곳이 한번

도 공격당하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너희들에게도 그들이 왔었나? 어떻게 싸운 거지? 너희들에겐 수호장군

을 상대할 병력이 없을 텐데."

"우리의 위치가 우리의 병력입니다. 이런 고산 지대에서 나가들의 수호

장군들은 싸울 수 있는 기온을 형성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모양이더군요.

기껏 작은 폭풍 몇 개를 일으킨 자는 있었습니다만 원래 이 지역엔 폭풍

이 많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 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수호장군

들의 힘이 없으면 나가들은 그저 귀찮은  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들

을 물리쳤습니다."

"그랬군.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그들에겐 갈로텍 대장군이 있다.

판사이를 수장시킨 자 말이다."

"그가 있습니까?"

"그래. 어르신들이 확인했다."

보좌관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당주님과 의논해봐야겠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사모의 뒤쪽에 있던 바르사  돌이 불편한 헛기침 소리를  냈다. 하지만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함께 가지." 그리고 사모는 바르사가  불평할 것을 생각해서 말

했다. "마루나래를 데려가겠다."

하지만 바르사는 만족하지 못했다.

"폐하. 올라가시면 안됩니다. 그들의 당주에게 내려오라고 하십시오."

보좌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 당주님께서는 팔십 세가 넘으신 이후로 내려오신 적이 없습니다.

이십 년 전의 일이지요."

"그렇다면 금군이나 병사들을 대동하십시오. 제가  병사들과 함께 폐하

를 수행하겠습니다."

"자네는 이 병력을 지휘해야 해. 마루나래. 어서 와."

마루나래는 거대한 몸을 가볍게 일으켰다. 바르사는 한 번 더 반대하려

했지만 그 때 보좌관이 말했다.

"당신들에게 열 명의 당원을 맡기겠습니다.  그들의 신병을 구속하십시

오. 그러면 되겠습니까?"

인질을 맡기겠다는 제안에 바르사는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다. 보좌관

의 명령에 따라 열 명의 당원들이  무장을 해제하고 북부군 가운데로 걸

어들어갔다. 대호왕은 보좌관에게 감사한 다음  마루나래와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마루나래의 거대한 몸을  고려하여 보좌관은 가장  넓은 길을

통해 그들을 인도했다.

잠시 후 그들은 관문요새의  높은 곳에 위치한 당주의  방 앞에 도달했

다.

방 안으로 들어선 대호왕이 처음 느낀 것은 적막이었다. 그것은 나가인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사모는 그 적막감이 단순히

소리의 부재가 아닌 다른 것에 기인할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추측을 확

인해주듯 보좌관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십시오. 당주님은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사모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자에 앉았다.  보좌관은 탁자 건너편으로 돌

아가 사모를 마주보는 자세로 섰다.

"이곳은 당주님의 거처입니다만, 당주님의 건강이  나빠지셔서 보다 조

용한 곳으로 옮겼습니다. 폐하를  이곳으로 모신 이유는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보좌관은 목례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사모는  이토록 깨끗한 의자에 앉

아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마루나래는

자신의 발에서 흙덩이가 떨어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루나래가

사모의 뒤편에 앉았을 때 보좌관은 청소할 일이 꽤 심각하겠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대호왕의 가면으로  시선을 옮긴 보좌관은 그

가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떻게 지내시냐고 묻는 것은 좀 우스울 것 같군요."

"동감이야."

"폐하. 잠시 옛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몇 년 전 폐하께서는 이곳을 지나

가셨습니다. 그 때 폐하께서는 뒤를 쫓는 두억시니들의 통행료를 대납하

셨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은 이곳을  빌리셔서라도 추적자들과 싸우시려

는 겁니까?"

사모는 대답했다.

"그 때 나는 북쪽으로 가야 했어. 하지만  이번에는 방향이 달라. 나는

남쪽으로 가야해. 하지만 저 추적자들이 남쪽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어.

그래서 나는 저들을 이끌며 이곳으로 왔다.  이 요새에서라면 저들을 물

리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지."

사모는 '짐'이라는 말 대신 '나'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

인지 짐작했지만 보좌관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이곳으로 유인해온 거라는 말씀이군요."

"그래."

보좌관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판사이를 수장시킨 자가 쫓아온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뇌룡공이라 불리는 그 용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당신을 보호한다

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사모는 조금 지체한 후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하텐그라쥬를 공략하기 위해 남쪽으로 갔어."

보좌관은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사모의 설명을 들었다. 사모의 설명이

끝나자 보좌관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수 규리하는 가까스로 모아들인 북부군을 모조리 소모하는 공격으로

건곤일척에 나섰다는 것이군요. 그는 역시  학자군요. 학자가 전쟁을 하

면 그렇게 되는 법이지요."

"무슨 말이지?"

"별 의미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폐하께서는 왜 그들을 뒤쫓아가려

는 겁니까? 그들의 희망대로 즈믄누리로 가시는 대신?"

"나는 그런 자살 공격에 동의한 적이 없어.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말했

어. 지고 돌아오는 것은 백  번이라도 용서하겠지만, 이기고 죽어버리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그 자들은  이기고 죽어버리려 하고 있

어. 그런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러신가요. 하지만  굳이 폐하께서  뒤따라가셔야겠습니까? 어르신을

보내어 그들을 소환하면 되잖습니까?"

"그렇게 해서 돌아올 거라면 애당초 나를 내버려두고 몰래 떠나지도 않

았겠지. 내가 가서 직접 데려와야 해."

"하긴 그렇군요. 그들을 되돌아오게 한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른 대안이 있으십니까?"

"그건 몰라. 하지만 방법은 찾아내면 되는 거야."

"군사를 더 모을 수 있습니까? 즈믄누리가 더 이상의 군량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근거지 없는 군대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혹 군사를 더 모

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근거지도  없는 북부군이 더 이상  커질 수 있을까

요?"

"셋이 하나를 상대해!"

사모는 분노하여 외쳤다. 그리고 보좌관은 분노한 목소리마저 아름답다

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사모는 가면을 벗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맨얼굴로 보좌관을 바라보며 사모는 날카롭게 외쳤다.

"이미 수탐자들은 자신을 죽이는 신의 화신을 찾아내었어. 그들이 다른

두 화신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리면 돼.  그러면 그들이 여신을 구출해낼

거야!"

"기약이 있습니까, 페이?"

가면마저 사라지자 보좌관은 마침내 '폐하'가 아닌 '페이'로 사모를 지

칭했다. 사모는 비늘을 부딪혔다. 보좌관은 준엄하게 말했다.

"그들이 다른 두  화신을 언제 찾아낼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잖습니

까?"

탁자 위에 놓인 사모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보좌관은 한층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약 없는 구원이 현존하는 고통의 대가가 될 수 있습니까? 고통을 받

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신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너는 내 부하들에게 찬성한다는 거냐?"

"사모 페이. 유료도로당원은 여행자의 목적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따라

서 저는 그들이 잘한다, 혹은 못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 저는 앉아서 신의 도래를 기다리느니 목적지가 죽음이

라도 일단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느낍니다.  어차피 모든 생의 종

착이 죽음이라면 그들이 유달리 특별한 선택을 한 것도 아닙니다."

사모는 위장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빠졌고 앉아있

는 의자를 느끼기도 어려웠다. 보좌관은 담담하게 말을 맺었다.

"즈믄누리로 가십시오. 사모 페이. 그곳에  가서 두 화신을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당신에게 우리의 요새를  제공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갈

로텍 대장군 또한 우리에게 통행료를 지불하든, 우리와 싸우든 둘 중 하

나를 선택해야 할 겁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긴 침묵 후에, 사모는 나즈막하게 말했다.

"내 동생이 거기 있어."

보좌관은 아무런 말 없이  북부의 왕을 바라보았다. 사모는  탁자 위에

놓인 가면을 바라보았다.

"나는 륜이 용근을 먹는 것도 말릴 수 없었고 아스화리탈을 살인괴수로

키워내는 것도 말릴 수 없었어. 륜은 용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이용하여 스스로 나가의 악몽으로  탈바꿈해갔어. 그 애는  그렇지 않았

어. 그런 아이가 아니었어. 그런데,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고만 있었어.

말리지 않았어. 가면을 쓴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내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었어. 왕이라는 것은 이상해. 너무 이상해."

가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모는 갑자기 깨달은 것처럼 말했다.

"그래선 안돼."

"뭐가 안된다는 겁니까?"

"죽어야 한다면, 그건 나야. 내가 왕이니까. 륜이 아냐. 그래. 알겠어.

륜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어. 예전의 내  동생이었던 륜 페이라는 나가

는 거의 사라져버렸어. 지금 륜의 겉모습 뒤에 남아있는 것은 나가를 죽

이는 괴물, 나가살육자, 또 한 명의 케이건 드라카야."

베미온에게 물이 접근하는 것을 느낀  륜은 감각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그 물이 한 인간임을 느낀 륜은 긴장을 풀면서 고개를 돌렸다.

베미온은 땅바닥에 앉아 흙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리고 키타타 자보로

가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자보로 장군은  베미온에게 흙을 먹지 말라

고 말리고 있었다. 베미온은 별 불평 없이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베

미온의 손에서 흙을 털어내어  준 키타타는 륜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것  같은 얼굴로 서있던 키타타

는 곧 결심을 한 듯 륜에게 걸어왔다. 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잠시 신경을 못 쓰고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물기가 별로 없는 흙이더군요."

"예. 나가를 학살할 겁니다."

키타타는 륜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륜은 키타타

가 말하지 않은 것을 들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아니오. 우월함이 열등함에게  미안함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공작

님.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다음 키타타는 입을 다물었다. 륜은 고소를 머금었다.

"끝까지 말씀하십시오. 듣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규리하 상장군의 계획은 나가에게 참혹한 것입니다."

물론 규리하 상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그럴 경우 괄하이

드와 혼동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북부군은 라수 상장군, 괄하이드 대장군

으로 부르고 있었다. 빌파 삼부자 또한 그런 규칙에 따라 불리워지고 있

었다. 그러나 키타타 자보로는 규리하  대장군, 규리하 상장군이라는 호

칭을 고집했으며 빌파 삼부자의 경우 빌파 교위와 빌파 부위, 빌파 부위

라고 불러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리고  키타타 자보로가

그런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대충 짐작하는 사람들은 그를 키타타 장군이

라 부르지 않도록 조심했다. 예민한 륜은 당연히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

았다.

"자보로 장군. 저는 그 계획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규리하 상장군은 나가 병력의 대회군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 심장탑을

파괴해서라도 그들을 유인할 생각이십니다.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은 공격

할 수 없겠지요. 폐하의 심장이 그곳에  보관되어 있을 테니. 하지만 페

로그라쥬와 악타그라쥬, 시모그라쥬의 심장탑은 분명한  공격 목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유인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전술적 견지에서

그보다 더 적절한 공격 목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일거에 적 거점 내의

모든 전투가능한 병력을 제거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잔인한 방법입니다."

륜은 손을 들어 베미온을 가리켰다.

"판사이의 육형제를 익사시킬 때 그들은  잔인함에 대한 고려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키타타는 륜의 손을 따라 베미온을 돌아보았다. 베미온은 눈을 감고 태

양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햇빛을 마시는  모습이었다. 륜은 계속

말했다.

"그는 아직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베미온의 몸 속으로 수

분을 이동시켜줍니다. 베미온이 물의  공포를 물리칠 기회를  뺏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갈증에 목이  타들어가면서도 한사코 물을 거부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곤 합니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 자보로의 모든 씨족을 다 죽였을 때도, 그들은 잔

인함에 대해 고려하지는 않았지요. 공작님.  저는 그들의 슬픔에 아무런

동정도 보내지 않을 겁니다. 심장탑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저는 환희

를 느낄 겁니다. 그리고 무너지는 자보로 성벽에 깔려죽은 제 씨족의 비

명을 잊을 겁니다. 그들이 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저는 이것을

준비했습니다."

키타타 자보로는 자신의 방패를 들어보였다.  륜은 그곳에 무엇이 있는

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륜은 키타타가 보아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느

꼈기에 그것을 보았다. '자보로, 복수.' 나무  방패에 구리로 된 글자를

박아넣어 만들어진 그 선언은  나가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키타타는

이마에 구리선을 박아넣어 금속  문신을 만들고 싶어했지만,  그럴 만한

기술이 있는 유일한 자들인 도깨비 대장장이들이 그것을 거부했다. 대장

장이들이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은 반응을 보였기에 키타

타 자보로는 하는 수 없이 방패로 만족해야 했다.

"그들은 제 저주를 듣지 못할 테니 죽어가는  그들의 면전에 이것을 보

여줄 겁니다. 저는 잔인함에 대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

고 싶은 것은 당신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되어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물론 심장 적출

을 하지 않은 당신을 동족 취급도 하지 않을 테고 당신의 혈육으로 하여

금 당신을 죽이게 획책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당신은 그런 이유

로 대학살에 나설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제 이유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는?"

"예. 이해합니다."

"예?"

"나가 녀석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키타타 자보로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하지만 그는 용인을 상대로 거짓

말을 늘어놓거나 화를 내어 자신의  졸렬함을 강조해보일 정도로 아둔하

지는 않았다.

"그 나가 녀석을 믿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공작님."

륜은 베미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베미온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

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도 아니고 글자도 아닌, 추상적인 선들이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누님 때문입니다."

키타타 자보로는 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륜은  베미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님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께서 병에 걸릴 리도 없는데…"

"당신들이 누님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케이건 드라카가 예언한

대로."

키타타는 입을 다물었다. 륜의 눈가에서 은빛이 빠르게 명멸했다.

"누님은 더 이상 제가 알던 누님이 아닙니다. 가면을 쓴 이후로, 그 분

은 제 누님은커녕 나가도 아닌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병사들은 그 분

의 용모를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분의 음성은 듣지요. 그리고 그들

은 저의 음성, 기회가 자주 있지는 않지만 다른 나가의 음성도 들어왔습

니다. 하지만 그들은 누님의 목소리가 나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습

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분명히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들의 주관이 객관을 구축한 거죠. 보

늬인지 나늬인지 알려면 두 사람이면 충분하지요.  하지만 두 사람이 보

늬라고 우기면 나늬도 보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병사들이… 감히 폐하가 나가일 거라는 상상을 하긴 어렵겠지요. 하지

만 죽어간다는 것은…"

"누님은 자멸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누님은 꿈을 꾸십니다. 병사들 앞에서 누군지  모를 자에 의해 가면이

벗겨지는 꿈이지요."

키타타는 그런 꿈 쯤이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가면을  쓴 채

사람을 대해야 하는 자라면 그 답답함 때문에 그 가면을 벗어버리는, 특

히 타의에 의해 벗겨지는 꿈을 꾸는 것 쯤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그런 말을 하려하자마자 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를 상상해 보세요."

"실제로?"

"예. 실제로 병사들 앞에서  누님의 가면이 갑자기  벗겨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병사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당신이 4년  동안 함께 싸운 저

를 믿을 수 없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차라리 존경스러운 자제력입니

다. 저는 그런 당신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느닷없이 눈 앞에

나타난 나가를 어떻게 대할까요?"

키타타는 당황했다. 그런데 륜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마귀의 준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예?"

"예전에 이곳에서 어떤 광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왕병자였던 그는

제 목소리만 듣고는 저를 왕비감으로 삼고 싶어했지요. 결국 저 탑 안으

로 들어가 그 안에 있던 저를 목격하게 된  그 광인은 상황을 그렇게 설

명하더군요. 어떤 고약한 마귀가 왕비에게 마법을 걸었다고."

륜 페이는 그렇게 말하며 베미온이 기대어 앉아있는 높새바람탑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을 거부하는 방법이 환상을 조장하는 온건

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직접적이고 파괴적인  방법도 있지

요."

키타타는 그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

이다. 륜은 말했다.

"나가들은 저 같은 나가를 비에나가라고 니릅니다. 병신이라는 말로 바

꾸면 의미는 통하겠지만, 그 니름이 담고  있는 독특한 색조까지 전달하

긴 어려울 겁니다. 많은 나가들이 비에나가라는 니름은 '도깨비의 나가'

라는 니름에서 파생되었다고 믿지요. 병신이라는  말이 사람으로서 많이

모자라다는 의미라면, 비에나가는 나가가 아닌데 나가 모습을 하고 있다

는 의미 정도가 될 겁니다. 도깨비불처럼 말입니다. 적들이 물러나고 있

습니다."

키타타는 흠칫했다. 륜은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높새바람탑을 바

라보며 말했다.

"흑단 군단이 이제야 결심을 내렸군요. 그들이 보유한 수호장군은 다섯

명. 시우쇠님 한 분도 상대하기 힘든  숫자입니다. 게다가 이 메마른 땅

에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키타타는 부지불식간에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래봐야 평원 저편에 있는

흑단 군단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키타타는 그럴 수밖에 없

었다. 륜은 그런 키타타에게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

"저는 나가가 아니라 비에나가입니다. 저들과 동족이 아닙니다. 하지만

누님은 저들과 같은 나가입니다. 저는 누님이 왕의 가면을 쓴 채 당신들

을 위해 죽는 것이 싫습니다. 북부의 왕으로서 죽는 대신, 그 분은 키보

렌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들의 증오는 저주받을  용인 륜 페이가 받

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할 겁니다. 지금 당장."

"당장?"

"흑단 군단이 물러나는 방향이  인상적이군요. 아마도 남쪽  저 멀리에

또다른 군단이 북진 중인 모양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지나가게 한 다음

그 정체 모를 군단과 함께 전후 포위를  펼칠 작정인 것 같습니다. 뱀단

지를 이용하면 작전 범위  50 킬로미터 정도에서  그렇게 시간을 맞추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키타타는 기막힌 기분을 느꼈다. 나가들이 거의 묘기라 불러야 할 작전

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분명했다. 50 킬로미터 떨어진 두 지

점에서 동시에 출발한 군단이 정해진  지점에서 정해진 시간에 만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빗나간다면 각개격파를 당

하게 되므로 두 군단은 반드시 동시에 전장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나

가들은 그것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키타타는 긴장하며 말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흑단 군단의 수호장군 다섯 명은 제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들

과 맞서는 동안 아스화리탈이 할 일이  있을 겁니다. 대장군께 전하십시

오. 남진 속도를 약간  늦추라고.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베미온 굴도하가 시우쇠님 근처에 가지 못하도록 좀 돌봐주십시오."

키타타가 대답하기도 전에 륜은 아스화리탈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아

스화리탈이 고개를 숙이자 키타타는  뒤로 조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륜은 아스화리탈의 가슴에 있는 뿔들을 붙잡으며 민첩하게 그 목으로 올

라갔다. 잠시 후 아스화리탈은 하늘로 뛰어올랐다. 아스화리탈이 날개를

펼침과 동시에 벼락과 돌풍이 뿜어나왔다. 얼굴을 가렸던 키타타가 간신

히 팔을 내렸을 때 아스화리탈은 이미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익숙해지기 어려운 기적에 한숨을 내쉬며 키타타는 돌풍과 벼락에 겁을

집어먹은 판사이의 마립간이 어디에 숨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높새

바람탑 안쪽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케이 보좌관은 탁자 위에 놓아둔 두 손을 깍지끼며 말했다.

"동생분이 왜 나가를 그렇게 미워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주위에 나가를 증오하는 사람밖에 없으니까."

"동생분이 주위에 휩쓸렸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그 애가 줏대없는 성격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야! 그 애는 용인

이야. 용인이 뭔지는 알지?"

"물처럼 예리해진 사람이지요."

사모는 케이 보좌관을 쳐다보았다. 보좌관은 설명을 덧붙였다.

"물은 어디든지 스며듭니다."

"어디든지… 그래, 맞아. 그 애는 나가를 증오하는 북부군들과 너무 오

랫동안 함께 있었어. 내 동생이 그  예민함으로 무엇을 느꼈을지는 여신

만이 알아. 가장 소중한 것들을 나가에게  뺏긴 자들 가운데서 4년을 보

냈어. 그 중 2년은 용인으로서."

"어디든 스며드는 물은 무엇으로든 변하지요. 피가 섞이면 핏물이 되고

독이 섞이면 독물로 변합니다. 동생분이 증오에 휩싸인 북부군들의 마음

속에 스며들어 그 스스로 증오로 바뀌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보좌관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생각에는 그럴 것 같지 않군요. 또  한 명의 케이건 드라카가 겨우

4년만에 만들어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케이건 드라카를 잘 알아?"

"그 분을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사모는 보좌관의 말투에 섞여있는 이상한 음색을 느꼈다. 하지만 그 정

체는 알 수 없었다. 그 때 보좌관이 말했다.

"어쨌든, 당신과 당신의 동생에 관한 일은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 당이 당신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도로와 숙식입니다. 요새를 전

투용으로 제공할 수는 없습니다."

사모는 애타는 표정으로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제발 재고해줄 수 없겠어?"

"재고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제공하는 것만을  이용해야 합니

다."

사모는 다시 한 번 애원하려 했다. 그러나 그 때 사모는 보좌관이 또다

시 기묘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좌관은  거절을 말하는

대신 '우리가 제공하는 것만을 이용하라'고 말했다. 사모는 황급히 보좌

관의 표정을 살폈고, 그리고 깨달았다.

하늘이 열린 이래 처음으로, 시구리아트  산맥의 고산준령은 더위를 느

꼈다.

물은 열을 흡수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과도하게 압축되면 열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대지에 떨어지는 햇빛으로부터  욕심껏 열을 훔쳐왔

던 물은 과도하게 집중되자 풍성한 열을 내놓았다. 하여, 시구리아트 산

맥은 미증유의 더위에 헐떡이게 되었다. 습기는 나무줄기를 따라 흐르는

땀이 되었고 산들이 두르고 있던 안개는 농밀해지다 못해 나가들의 팔다

리를 붙잡는 장애물이 되었다. 수영의 경험이 있을 리 없는 나가들은 마

치 물 속을 헤엄치는 듯한 그 느낌에 몹시 당혹했다.

그 기상천외한 천재지변은 한  수호장군의 명령에 의해  일어나고 있었

다. 대장군 갈로텍은 보다 낮은 땅에서  닥치는대로 습기를 끌어모아 산

맥 위에 쌓아올렸다. 아쉽게도  나가들에게 쾌적할 정도의  온도는 이룰

수 없었지만, 갈로텍은 일반적인 경우라면 정신을  잃어야 할 곳에서 나

가들이 불편함 없이 움직일 수 있게끔 하는데 성공했다.

자신이 이룩한 위업에 기쁨을 느껴도 되련만 안타깝게도 갈로텍에겐 그

런 즐거움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요구에  화를 내고 있었다.

군령자에겐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다. 갈로텍은 주퀘도의 요구에 분노를

느낄 지경이었다.

"말도 안됩니다! 유료도로당은 통행료만 지불하면  누가 지나가건 신경

쓰지 않는다면서요?"

"물론 그래. 음. 그들은 그렇게 하지."

"그렇다면 우리는 통행료를 지불하고 이곳을 지나갈 겁니다. 왜 전투를

벌이자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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