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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0-2. 관련자료:없음 [55592]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7-03 00:41 조회:8375
눈물을 마시는 새.
10. 침수(侵水) - 2
코네도 빌파는 자신의 행동에 해학을 부여하는 감각이 부족한 사내였
다. 하지만 해학에 관한 한 둘째 가라면 웃어버릴 도깨비들의 작품은 코
네도 빌파 같은 사납고 잔인한 사내에게서도 희극적 감각을 이끌어내었
다. 어쨌든 코네도는 상대방의 정면에 서서 오른손을 흔들어대며 "지금
부터 네 면상을 이걸로 쓰다듬어 주겠다." 라고 말해줄 수 있다는 것이
대단히 즐거웠다.
모처럼 고무된 희극적 감각은 코네도로 하여금 한 마디 말을 덧붙이게
끔 했다. "대답이 없으면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다." 물론 상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코네도는 경의 어린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수호자의 턱을 겨냥하여 오른손을 세심하게 날렸다.
수호자의 얼굴이 단박에 으스러졌다.
코네도는 휘파람을 불며 왼손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약간 떨어진 곳
에서는 그의 장남 그룸 빌파가 도살장의 돼지와 접전이 예상되는 목소리
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신부를 감금한 신랑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개
새끼야." 어쩌고 하는 퇴폐적이고 몰지각하기 짝이 없는 노래였다. 또다
른 방향에서 코네도의 차남 토카리 빌파가 형의 소름끼치는 노래 실력에
대해 야유를 보내었다. 빌파 삼부자는 그렇게 제멋대로 떠들며 수호자들
의 얼굴을 뭉개어놓았다. 서로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
가 있긴 했지만, 삼부자가 그렇게 떠들어대는 것에는 책임질 필요가 없
는 악담을 즐기는 못된 성벽이 더 크게 작용하는 듯했다. 정면에서 혀를
낼름거려도 보지 못하고, 턱을 빠개어주겠노라고 외쳐주어도 듣지 못하
고, 잘 죽지 않기 때문에 사정도 볼 필요가 없는 자들을 대상으로 한 폭
력이었다. 폭력의 강도를 낮출 수 있는 완충 기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혹 있다 하더라도 삼부자는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허리춤에서 쇠못을 꺼낸 코네도는 쓰러진 수호자를 내려다보며 잔인하
게 웃었다. 그의 오른손은 망치를 쥘 수 없었지만, 그 자체로도 망치가
부럽지 않았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우쇠에게 쏟아지고 있던 진눈깨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시우쇠가 뿜어올리는 불길이 진눈깨비를 꿰뚫고 치솟아올랐다. 그로스
는 기겁하며 다른 수호장군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당황해버렸다. 어처
구니 없게도 수호장군들은 땅에 누워있었다.
[프리앗! 키베인! 맙소사, 그루이스! 도대체 어떻게들 된 거야! 이봐,
코키타!]
100 미터 쯤 떨어져 있는 곳에 있던 수호장군 코키타가 당황하여 그로
스를 돌아보았다. 그로스는 손짓을 하며 수호장군들이 왜 땅에 누워있는
지 물어보았다. 코키타 또한 당황이 역력한 기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그로스는 비늘 서는 장면을 보았다.
코키타의 얼굴이 갑자기 뭉개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망치가 그의 얼
굴을 후려친 것 같았다. 코키타는 허공으로 떠올랐고 기절한 다음에 땅
에 떨어졌다. 그로스는 입을 쩍 벌린 채 코키타를 바라보았다.
그 때 코키타의 복부 근처의 허공에서 불꽃이 튕겨져나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불꽃이 튄 허공에서 쇠못이 출현했다. 그 쇠못은 코키
타의 복부를 관통하여 땅에 꽂혀 있었다. 그로스는 다시 땅에 누워있는
수호장군들을 돌아보았고, 그제야 그들의 뭉개진 얼굴과 복부를 꿰뚫고
있는 쇠못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로스가 가진 나가의 정신은 미신적 공포를 이겨낼 만큼 냉정했다. 그
래서 그로스는 불가해한 공포에 휩싸이는 대신 분노하여 닐렀다.
[도깨비 감투! 그렇게 발달했나!]
그의 곁에 있던 비아스 또한 비늘을 부딪히며 닐렀다.
[후퇴해야 합니다!]
그로스는 비아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닐렀다.
[너는 그 니름밖에 할 줄 모르나! 비아스 마케로우! 지금 병사들을 후
퇴시키면 시우쇠가 병사들을 다 불태울 거다!]
비아스는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그로스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로스
는 이곳에 감투를 쓴 암살자들이 있는 이상 시우쇠가 함부로 불을 사용
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로스의 등을 노려보던 비
아스는 곧 주저없이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비아스의 모습은 언덕 위에서
사라졌다.
보병들을 전선에 먼저 보낸 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기병들의 앞쪽
에서, 괄하이드 규리하는 시우쇠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는 진눈깨비를
유심히 관찰했다. 진눈깨비의 기세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음을 확인한 대
장군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나왔다. 기병들은 환호를 지르며 창
을 똑바로 세워들었다.
대장군의 두 번째 명령이 떨어지자 전선 전체에서 놀랍도록 장대한 움
직임이 펼쳐졌다.
시우쇠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 참고 기다려왔다는 듯
이 맹폭한 동작으로 두 팔을 좌우로 펼쳤다. 그러자 그의 팔을 따라 난
폭한 불의 벽이 일어났다. 땅에서 솟아오르듯 형성된 불의 벽은 번개 같
은 속도로 동서 방향을 향해 뻗어나갔다. 불길에 휘말린 나가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닫지도 못한 채 탄화되고 말았다.
거대한 불의 벽이 엔거 평원을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순간 나가의
군대는 남북으로 동강났다.
불의 벽 남쪽에는 시우쇠와 나가 보병대의 절반이 남게 되었다. 시우쇠
를 억제할 수호장군들이 모두 공격을 당한 이후인지라 보병대는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런 나가들을 상대로 시우쇠는 만행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폭력을 휘둘렀다. 그저 달리기만 해도 주위가 불타버렸
지만, 시우쇠는 거기에 덧붙여 화염의 검으로 나가들을 자르고 화염의
채찍으로 그들을 후려쳐 쓰러뜨린 다음 화염의 수의를 입혀주었다. 그러
나 도망을 선택할 수 있었던 남쪽의 나가들은 차라리 형편이 나은 편이
었다.
전장 북쪽의 형편은 끔찍했다. 먼저, 거꾸로 된 쐐기 모양이던 북부군
의 보병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둘로 나뉜 보병들은 동서 방향에서 나가
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자 보병들이 좌우로 갈라진 틈에서 저수지가
무너진 형상으로 나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지점을 향해 기병들이 장
려한 나팔소리와 함께 돌격해 들어갔다. 기병들을 상대해야 할 코끼리들
은 이미 레콘에 의해 처리된 후였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기병들을
가로막을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의 벽에 의해 구분된 전장 북쪽에서, 동강난 마호가니 군단의 일만
명 남짓한 부대는 사만에 달하는 북부군에게 완전 포위되고 말았다. 남
쪽에는 불의 벽이 퇴로를 막고 있었고 동쪽과 서쪽에서는 보병대가 그들
을 압박했다. 그리고 북쪽에서는 기병들이 나가 병사들을 짓밟고 들어왔
다. 동서남북 어디로도 도망칠 길은 없었다.
물론 그럴 능력도 없었지만, 그들은 위쪽으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용이 날아온다!"
동쪽 보병대를 지휘하고 있던 무핀토 장군이 먼저 기성을 올렸다. 그러
자 서쪽에 있던 세미쿼 장군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이 외쳤다. "용이 날
아온다!" 뒤이어 보병들도 환호를 올렸다. 전쟁터 전체에서 희열에 들뜬
외침이 폭발처럼 일어났다.
"뇌룡공(雷龍公)이 온다!"
라수 규리하가 구상한 포위 작전의 마지막 병력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라수 규리하는 극한의 상황에 처한 나가들이 갑자기 비상의 재주를 터득
할지도 모른다는 기우를 한 것은 아니다. 하늘에서부터 등장한 북부군의
다섯 번째 병력은 포위보다는 소각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이 한 자리에 억류된 나가들은 공포에 미쳐버릴 것 같은 눈
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쪽 하늘에서 나타난 아스화리탈이 포위된 나가의 머리 위로 날아들고
있었다. 그 목에 저 저주스러운 용인 륜 페이를 태운 채.
길지만 강력한 힘에 의해 뻗은 아스화리탈의 목은 천공의 극점을 가리
키는 지남철 같다. 가슴에서 마치 터럭인 양 뻗어 나온 무수한 뿔은 그
길이와 크기가 천차만별이지만 모두 앞쪽을 향해 굽어 있었다. 길고 거
대한 날개의 모양은 뚜렷하지 않다. 날개 가닥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
개가 으르릉거리고 있었기에 차라리 번개로 이루어진 날개인 듯하다. 동
체 뒤편에서 춤추는 다섯 가닥의 꼬리 끝에서도, 그리고 등에서 수직으
로 돋아 있는 세 번째 날개에서도 규모가 조금 작지만 형태는 유사한 번
개를 찾아볼 수 있었다.
갑자기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로 번갯불을 흩뿌리며 날아든 아스화리탈
은 나가의 머리 위에서 천천히 선회했다. 나가들은 모두 아스화리탈의
목에 타고 있는 륜 페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륜은 아래를 내려다보
지 않으려 애쓰며 아스화리탈의 목을 두드렸다. 그러자 아스화리탈은 가
볍게 번개를 뿌리며 허공에 멈췄다. 아스화리탈의 양쪽 뺨 - 다른 적당
한 이름이 없기에 그렇게 부를 수 밖에 없는 - 에는 상어의 아가미를 연
상시키는 다섯 줄의 홈이 비스듬하게 나 있었다. 하지만 뒤를 향해 열리
는 상어의 아가미와 달리 그것들은 앞으로 열렸으며, 상어보다 훨씬 넓
게 벌어졌다.
륜의 어깨에 앉기를 좋아하던 조그맣던 시절 아스화리탈은 꼬리를 이용
하여 자신이 뿜어낸 기체에 불을 붙이곤 했다. 하지만 그 점화 기제는
이제 아스화리탈의 뺨 속으로 옮겨져 있었다. 따라서 다음 순간, 도합
열 개의 홈에서 쏟아져나온 것은 열 줄기의 불꽃이었다.
폭발적으로 커지는 불길이 눈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오는 순간 거의 모
든 나가들은 눈을 감았다. 그 중 많은 수의 나가들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키베인은 전투가 끝난 시점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 전투는 끝났다고 니르기 어려웠다. 키베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전투 후의 씁쓸함이나 비장함, 시체들 사이를 맴도는 음습한
슬픔 따위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복부를 관통하고 있는 70 센티미터 길이의 쇠못 같은 요소는 배제되는
편이 적절하다.
피는 그다지 배어나오지 않았다. 못이 빠르게 관통했기 때문이다. 땅이
부드러운 탓도 있겠지만 쇠못을 때려박은 자의 완력이 상당했다. 보이지
않는 상대는 단 네 번의 못질로 못대가리를 키베인의 배에 밀착시켰다.
그 때문에 조직의 파괴가 적었고 피의 유출이 적은 것 또한 그 때문이었
다. 키베인은 그 쇠못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이미 오래 전에 포기했다.
못대가리와 자신의 배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만으로도 키베인은
머리 속이 불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 했다.
'이건 별로 재미없군.'
키베인은 수호자였다. 다른 신분도 가지고 있었지만 마호가니 군단 내
에서 그의 위치는 수호장군이었고 다른 수호장군들과 똑같이 행동했다.
그 말은 그가 언제나 전선 뒤쪽의 비교적 조용한 위치에 머문 채 전장의
습기를 통제해왔다는 의미다. 그것이 수호장군 키베인의 전투였다. 그리
고 키베인은 별 생각 없이 자신의 전투가 몸에 이미 작살검을 꽂은 채
두 번째 작살검을 꽂아넣으려 광분하는 상대에게 사이커를 내찔러야 하
는 보병의 전투와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특별히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
만, 키베인 또한 때가 오면 자신 또한 작살검을 몸에 꽂은 채 영광에 찬
전투를 벌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오후의 대기를 물씬 적시는 피내음을 맡으며 키베인은 그것이 자기 과
신이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좀 다른 방법으로 확인되었어도 좋았을 텐데.'
재가 거대한 까마귀 떼처럼 날아올랐다. 하늘은 분명 맑을 테지만 키베
인의 눈에 들어오는 하늘은 끔찍했다. 나가의 눈이 아닌 다른 눈으로 하
늘을 보는 사람들도 그 하늘을 마음에 들어하긴 어려울 것이다. 연기로
뒤덮인 하늘 아래로 재와 흙먼지가 우울하게 부유했다.
[예. 저도 이 풍경이 마음에 들진 않는군요.]
누군가가 니름을 보내어왔다. 키베인은 살아있다는 사실에 고통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떤 나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키베인은 그 나가보다 그
뒤에 있는 초월적 존재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용이 그를 내려
다보고 있었다. 낭떠러지를 올려다보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모습에 키베
인은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지독하게 크군.' 용은 날개를 접고 번개의
성장(盛裝) 또한 흩어버린 모습이었지만 그 크기만으로도 점유하고 있는
공간 내에서 현실성을 추방하기에 충분했다.
키베인은 힘겹게 눈길을 내렸다.
용 때문에 터무니없이 작게 보이는 젊은 나가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름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고, 그래서 키베인은 다른 질문을 던
졌다.
[소문대로 정신을 읽는 건가?]
[그냥 날카로운 감각을 가졌을 뿐입니다. 당신도 꼭 물어보거나 독심술
을 하지 않아도 친구의 기분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요. 남달리 눈치가
좋은 사람에 대해서도 들어보셨을 테고. 그것과 비슷한 겁니다.]
[용인은 눈치의 달인이라는 니름인가, 뇌룡공?]
[물론 당신에게 현재의 풍경이 만족스럽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짐작하는
데는 용인의 예민함까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만. 이름이 뭡니까?]
키베인은 감히 지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상대방의 날카로움은 비늘
설 정도였다. 그래서 키베인은 곧장 닐렀다.
[키베인.]
키베인은 안도했다. 용인은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아직 북
부군에는 키베인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륜
은 담담하게 닐렀다.
[항복하겠습니까, 키베인?]
[항복하면 어떤 이점이 있지?]
[항복한 것을 후회할 권리를 얻으실 겁니다.]
[실로 매력적인 제안이군. 륜 페이.]
키베인의 니름은 비꼼이 아니었다. 예민한 륜은 그것을 잘 알 수 있었
다. 키베인은 담담하게 감탄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마운 제안이군. 하지만 모래로 밧줄을 꼴 수는 없는 법이야. 나를
묶을 다른 밧줄은 없나?]
[스스로 꼬아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럴 각오도 되어 있으신 것 같은
데.]
[역시 날카로운 용인이군.]
륜은 씁쓸한 미소에 해당하는 니름을 보내었다.
[부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키베인. 기회가 된다면 당신에게 어느
정도의 둔감함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가르쳐드리고 싶군요. 꼭 알고 싶
지 않은데도 사람들의 기분이나 심리를 바로 깨달아버린다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도.]
키베인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륜의 등
뒤에 있는 거대한 재앙을 바라보며 키베인은 힘겹게 닐렀다.
[한 가지 더 물어보지.]
[용이 나가를 태운다는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 나가가 용을
싫어한다는 사실에 대해 용이 신경쓸 거라고 믿는 것은 나가의 오만입니
다. 그리고 용근에 대해서는, 용은 큰 관심이 없습니다. 씨를 보호하는
식물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용근 또한 먹히는 것이 싫었다면 발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용근은 저에게 먹히길 수락하고 발아한 거죠.]
키베인은 정신을 닫았다. 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날카로운 것일 뿐입니다.]
[쳇. 그렇게 날카롭다면 내가 니르기도-]
[-전에 당신 질문에 대답해버리는 것이 당신을 당혹시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과 비슷한
곤경에 빠져 있는 다른 수호자들에게도 찾아가봐야 합니다. 그러니 당신
자신과 당신 동료들을 위해 대화를 좀 빠르게 진행시켰으면 합니다. 어
쩌실 겁니까?]
[역시-]
[-항복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정신을 여세요.]
[뭐?]
[정신을 여세요. 키베인. 당신 속에서 당신의 신명을 결박해야 하니
까.]
키베인은 비늘을 부딪혔다. 그리고 곧 그것을 후회했다. 미칠 것 같은
고통이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복부를 부여잡은 채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키베인을 내려다보며 륜은 담담하게 닐렀다.
[이해할 수 있으실 겁니다. 키베인. 신명을 가지고 있게 놔둘 수는 없
잖습니까. 저는 당신의 신명을 지울 수도 있습니다.]
[신명-]
[-도 지울 수 있습니다. 완전히 잊어버린 기억 같은 것을 생각해 보세
요.]
[그런-]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당신의 신명을 잠시 묶어두겠
다는 겁니다. 예. 저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제 친구가 제게
그렇게 했지요. 그는 제 마음 속에서 제 죄책감을 묶어버렸습니다. 저는
그의 모든 추억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제 친구는 그것을 풀어줄 수도 없습니
다.]
[내가-]
[-잃는 것은 신명을 통해 구현되는 수력의 통제력 뿐입니다. 여신에 대
한 사랑이나 존경심 같은 것을 잃지는 않습니다. 아니, 믿어도 됩니다.
제 니름은 사실입니다. 속일 이유가 없지요. 굳이 당신을 속여서 신명을
지워버릴 바엔 제 등 뒤에 있는 친구에게 당신을 건네주는 편이 훨씬 속
편한 방법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키베인은 그것이 훨씬 끔찍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때가 되면, 여건이 되면 저는 당신 정신 속의 결박을 풀고 신명을 돌
려드리겠습니다.]
합리적인 나가답게 키베인은 륜의 제안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는 사실
을 인정했다. 의견 조정을 시도할만한 여건은 아니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키베인은 한 가지 약속에 만족하기로 했다. 물론 륜은 그가 니
르기도 전에 대답했다.
[여신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런데 뭘 잃는 것에 당황하는
겁니까?]
[뭐?]
[당신은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있군요. 여신의 이름을 잃을지도 모른다
는 것에 대해서. 그런데 그 외에 또다른 무엇인가를 상실할지도 모른다
고 생각하고 있군요? 그게 무엇입니까?]
키베인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그가 뭔가 변명이나 설명을 하기
도 전에 륜이 닐렀다.
[니르고 싶지 않다면, 됐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잃는 것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군요. 그러니 저도 구태여 묻지 않겠습니다. 당
신의 신명을 결박해도 되겠습니까?]
[묶어.]
고통 속에서 키베인은 륜을 향해 정신을 열었다. 그리고 상실의 공포를
억누르려 애썼다. 륜은 키베인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역시 나가군요.]
[무슨 니름이지?]
[아니, 아닙니다.]
륜의 정신이 부드럽게 키베인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무지막지한 고통이나 정신을 뒤흔드는 혼란 같은 것은 없었다. 인식할
수 있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키베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륜을 바라보
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키베인은 자신의 신명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
실을 깨달았다. 키베인은 신명을 알 수 없었다. 지나치게 오래전에 보았
던 책의 뒤표지처럼, 혹은 그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처음 맡았던 냄새처
럼. 륜은 차분하게 닐렀다.
[묶었습니다. 아니, 연상은 소용이 없습니다. 우회한다고 해서 그걸 떠
올리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기꺼이 그 못을 뽑아드릴 겁니다. 저는 다른 분께 가봐야 하니 저기
오는 불신자들이 그 못을 뽑아줄 겁니다. 그들의 명령을 따르십시오. 청
각에 집중하십시오.]
륜은 어디론가로 손짓을 보낸 다음 몸을 돌렸다. 그러자 아스화리탈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청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키베인은 아스
화리탈이 일으키는 엄청난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현실감각을 앗아가는
용의 뒷모습을 보느니 쇠못을 뽑아줄 구원자를 보는 쪽이 낫겠다는 판단
을 내린 키베인은 륜이 손짓을 보낸 방향을 돌아보았다.
몇 명의 불신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불신자들은 쇠못을 뽑아낼 도구
같은 것은 가져오지 않았다. 그리고 키베인은 그 사실에 낙담하지 않았
다. 선두에 있는 자가 레콘이었기 때문이다. 큼직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레콘의 뒤로는 인간 사내 몇 명이 따르고 있었다.
레콘은 키베인의 곁에 도달하자 장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못을 뽑을 테니 서툰 짓은 하지마."
"하지 않을 테니 빨리 뽑으시죠."
불신자들 중 일부가 뚜렷한 동요를 보였다. 의아해하고 있는 키베인을
무시하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말했다.
"내 말이 맞지?"
"뭐?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저 정도면 똑같잖아?"
"똑같긴 뭐가 똑같아. 우리 폐하의 옥음에 비하면 저건 변비 걸린 까마
귀 힘주는 소리구먼. 완전히 달라."
"야야, 까마귀는 좀 심했다. 멋진 목소리잖아."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 의미야."
"음. 뇌룡공의 목소리와 비슷한 것 같은데."
"그건 당연하잖아! 같은 나가니까."
키베인은 불신자들이 목소리에 관련된 어떤 토론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는 깨달았지만 그 이상은 알고 싶지 않았다. 수호자는 약간 언성을 높였
다.
"이봐요들. 보편 상식의 이름으로 요구하겠는데, 배에 못을 꽂고 있는
자를 앞에 두고 토론을 벌이는 짓은 좀 삼가주면 안되겠습니까? 정 어렵
다면 못을 제거한 다음으로 연기해주는 것으로도 만족하겠습니다."
사내들은 키베인을 돌아보더니 낄낄거렸다. 키베인의 예상대로 레콘이
가까이 다가왔다. 거북할 정도로 거대한 신장을 구부린 레콘은 키베인의
옆에 무릎을 꿇고는 못을 움켜쥐었다.
"각오 단단히 하라구. 나가."
"저는 심장도 뽑았습니다.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닌 그까짓 못 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죠."
불신자들은 다시 사나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레콘은 못을 쑥 잡아뽑았
다.
북부군 병사들은 키베인이 어떤 비명도, 심지어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
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그리고 키베인은 자신이 머리가 터져라 정신적
비명을 내질렀다는 사실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륜은 모두 다섯 명의 수호장군들을 구할 수 있었다. 빌파 삼부자는 그
보다 더 많은 수의 수호장군들을 못박았지만 도주하던 나가 병사들이 구
출해가거나 불운하게도 시우쇠와 맞닥뜨린 수호장군들도 많았기에 포로
로 잡을 수 있었던 숫자는 그 정도였다.
그리고 그 다섯 명은 모두 륜의 제안에 동의했다.
완전히 탄화된 여섯 번째 수호장군을 내려다보던 륜은 가까이 다가오는
시우쇠를 느꼈다. 여신의 힘으로 느낀 것은 아니었다. 시우쇠는 그 몸에
물기라곤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엔거 평원에 있는 자들 중 륜이
제대로 추적하기 힘든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용인의 날카로운
감각은 시우쇠의 접근에 따라 뜨거워지는 온도를 느꼈다.
고개를 돌린 륜은 그를 내려다보는 화염의 눈을 발견했다. 시우쇠는 아
스화리탈을 흘끔 올려다보곤 말했다.
"몇이나 구웠어?"
륜은 울컥하는 기분을 억누르며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굽는다고 하셨습니까? 제 친구 중에 사람을 대상으로 썬다느니 하는
말을 사용하는 이가 있었지요. 그 자의 어투와 비슷하시군요."
"그래서, 얼마나 구웠냐고?"
"모르겠습니다. 족히 몇천 명은 될 것 같군요."
"흐음. 나도 그 정도 구운 것 같군."
륜은 더 참지 못했다. "제 동족입니다. 시우쇠님."
시우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봐. 갇힌 여신의 신랑. 골육상쟁의 비극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강
조하고 싶은 거냐? 태우기로 작정했으면 그런 건 집어치우지 그래?"
"당신은 독자(獨者)의 화신이지만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잔학한 운명
때문에 동족을 땔감 삼아 희망의 불을 지펴야 하는 처지에 빠져있지만,
그것에 무감각해지기는 어렵습니다."
용인의 예민함으로도 시우쇠의 다음 말을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상대는
사람의 예민함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시우쇠는 빙긋 웃더니
발을 뒤로 당겼다.
그리고 탄화된 수호장군을 걷어찼다.
먼지와 재가 뒤섞여 작은 구름이 일어났다. 륜은 입을 가리며 뒤로 물
러났다. 하지만 시우쇠는 물러나지 않았다. 사체의 재구름 속에서 시우
쇠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려운 것 아니야."
"예?"
"너절한 단어로 처지 골치 아프게 만들지 말라고. 가로막으니까 태우는
거야. 살을 지지고 뼈를 녹이고 골수가 끓어오를 때까지 태워버려. 잿더
미 위에 네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 그러면 돼."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겸허함을 알게 되지."
"네?"
시우쇠는 반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연하지도 않았다. 시우쇠는 그대
로 륜과 아스화리탈을 남겨둔 채 그 언덕을 떠났다. 화신은 떠나며 말했
다.
"대호왕에게 전해라. 이 주위에 숨어 있는 놈들 몇 명 더 태우고 돌아
가겠다고."
떠올랐던 재와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화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용과 용인은 잠시 후 몸을 돌려 화신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원수부에서는 모처럼의 대승에 고무된 장수들이 열기를 잔뜩 뿜어대고
있었다. 평소 륜이 근처에 다가오는 것조차 꺼림칙해하던 많은 장수들이
반갑게 륜을 맞이했다. 물론 그들 중 몇 명은 나가 앞에서 무수한 나가
를 살해한 일을 즐거워해도 되는 건가 의심했다. 륜은 눈치 빠르게 그것
을 깨달았고 웃음으로써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 양쪽을
괴롭히는 대신 필요한 말만 전달한 다음 조용히 원수부를 떠나왔다.
원수부를 떠나온 륜은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와 갑옷을 벗었다. 그의 천
막 옆에는 아스화리탈이 거대한 몸을 누이고 있었고, 따라서 북부군의
진지 전체에서 가장 한적한 곳이기도 했다. 륜은 의자 하나를 가지고 천
막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스화리탈의 머리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해는 기울고 있었고 진지 곳곳에서 불이 켜지고 있었다. 륜의 천막 주
위는 승전 후의 진지를 채우고 있는 흥분된 기류에서도 자유로왔다.
어두운 하늘로 잔인한 새들이 날고 있었다. 유사 이래 모든 전투의 승
리자들인, 사체의 내장을 탐내는 새들이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륜
은 그 활기찬 불덩이 같은 뜨거운 새들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땅
위를 오가는 온기들을 보던 륜은 갑자기 구토할 뻔했다.
가까스로 메슥거림을 억누른 륜은 등 뒤에 있는 자를 향해 말했다.
"그래. 와도 된다. 베미온."
륜의 등 뒤 어둠 속에서 한 인간 남자가 걸어나왔다.
머리카락은 뒤엉킨 철사 같고 뻣뻣한 수염은 고슴도치에 필적할 지경이
다. 그나마 체모가 적은 눈 아래나 이마 같은 부분도 시커먼 땟국물에
덮여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는 그 때까지 쌓아온 고통을 암시했고 기이
하게 떨리는 팔다리의 움직임은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할 공포를 드러내
고 있다. 남자라는 대명사보다는 수컷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아니, 생명
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품위조차 잃어버려 차라리 한 물체라 불러야 할
'그것'에겐 놀랍게도 지성의 흔적을 읽을 수 있는 두 눈이 달려 있었다.
그 눈이 륜을 바라보았다.
"저, 젖었어요."
륜은 억지로 미소지으며 그 남자의 발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남자의
발에 묻어있던 물기가 주위의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남자는 몇 번이나
바닥을 만져본 다음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칭얼거렸다.
"나, 나를, 나를 씻기려고 해."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륜은 질문했다.
"누가?"
"데오늬. 데오늬 달비."
륜은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애가 물을 튀기며 달렸나 보구나."
"씻기려고 했어요! 혼내줘요!"
륜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 착한 소녀에게 베미온의 고발을 전해주면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 당연히 - 어딘가로 달려갈 것이다. 하지만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내줄게."
베미온 굴도하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륜을 놀라게 했다.
"너무 혼내지는 마. 착한 아이야. 내 딸의 친구가 될 수 있을 텐데…"
륜은 가까스로 자신을 억눌렀다. 놀란 나머지 급히 대응하는 바람에 몇
번이나 상황을 악화시켰던 기억이 충동적으로 움직이려는 그의 몸을 붙
잡았다. 호흡을 고른 다음, 륜은 베미온 굴도하가 당황하지 않도록 천천
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베미온 마립간?"
베미온은 바닥을 보며 뭐라 중얼거렸다. 륜의 말을 알아들은 기색은 없
었다. 륜은 조심스럽게 한 번 더 불렀다.
"베미온 마립간?"
베미온 굴도하의 상체가 기이하게 움직였다.
다음 순간 베미온은 땅에 얼굴을 부딪히며 통곡했다. 륜은 황급히 의자
에서 일어나 베미온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베미온은 놀라운 힘으
로 륜을 뿌리치며 계속 땅에 이마를 부딪혔다.
"탑이 빠져죽는다! 탑이 빠져죽는다!"
륜은 베미온의 팔을 잡아뽑듯이 잡아당겼다. 그래서 베미온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들이받는 기세로 안겨왔을 땐 륜은 숨이 막힐 뻔했다. 륜은
가까스로 함께 쓰러지는 대신 베미온을 끌어안았다. 베미온은 륜에게 안
긴 채 목을 놓아 울었다.
상고토의 맹주이자 판사이의 마립간이었던 사내는 짐승 같은 소리로 통
곡했다. 그를 끌어안은 채 다독이던 륜의 눈에서도 어느새 은루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우라고. 륜 페이."
륜은 비늘을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저편에서 황혼을 등진 채 시우쇠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스화리탈이 고개를 들었고 그 간단한 동작 끝에 용
은 무려 15 미터 높이에서 시우쇠를 쏘아보게 되었다. 시우쇠는 용에게
도, 나가에게도, 정신 나간 인간에게도 적합한 기묘한 거리에 멈춰서서
는 팔짱을 낀 채 륜을 바라보았다.
"태워. 그렇게 해줘."
륜은 비늘을 사납게 부딪혔다.
"이 분은 나으실 겁니다."
"넌 그 녀석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너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
군."
"네?"
어떤 암흑 속에서도 놓칠 수 없는 시우쇠의 시선이 륜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베미온이 왜 너를 따른다고 생각하나? 아마도 용인인 네가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풀 수 있을 정도의 예민함으로 그를 보살필 수 있기 때문이
라고 착각하고 있겠지? 그렇지 않아. 베미온은 정신이 나갔지만 생물의
마지막 감각은 잃지 않았어. 죽음을 찾아내는 감각 말이야. 북부군 전체
를 통틀어 가장 죽음에 가까운 것은 너와 나 뿐이지. 호흡과도 같은 자
연스러움으로 죽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은 우리 둘 뿐이라고."
륜은 흠칫했다. 시우쇠의 눈에서 불길이 앞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 베미온은 너를 따르는 거야. 우두머리 코끼리가 대호를
향해 걸어가는 그 감각으로 그는 네게 다가가는 거지. 그를 왕으로 만들
어줘. 륜 페이. 가장 가련한 자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재탄생하게 해
줘."
"재탄생? 재탄생은 없습니다. 잿더미가 남을 뿐이죠!"
"신의 제안을 무시하려는 건가?"
"당신은 신이 아니라 화신입니다!"
"발음의 차이 외의 다른 차이를 지적해보겠나?"
륜은 침묵했다. 그리고 두 팔로는 베미온 굴도하를 더욱 세차게 끌어안
았다. 시우쇠는 빙긋 웃었다.
자신을 죽이는 신의 화신은 작별 인사 없이 떠났다.
시우쇠의 모습이 충분히 멀어진 다음에야 륜은 베미온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베미온 마립간의 검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물
로 젖어있는 얼굴을 본 륜은 베미온이 그것을 깨닫기 전에 재빨리 물기
를 증발시켰다.
"베미온. 너는 살고 싶지?"
베미온은 콧소리를 심하게 내며 말했다.
"탑이 빠져죽고 있어."
"그래. 너는 나을 거야."
"탑이 빠져죽고 있어."
"나는 오늘 육천 명을 태워죽였어."
"탑이 빠져죽고 있어."
"손 한 번 놀려서 그렇게 했어. 용인의 예민함 따위 도깨비나 줘버리라
지. 평원 저편의 풀잎 위로 이슬 한 방울이 구르는 것까지 깨달을 수 있
는 예민함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저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제기랄! 이 예민함이라는 것이 칼로 도려낼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게 뼈 속에 있는 것이라도 주저없이 도려내었
을 거야. 나는 알고 있어. 그게 6,217 명이라는 것을!"
승전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승패는 우애 깊은 쌍둥이며, 승전의 밤인 그 밤은 당연하게도 패전의
밤이기도 했다. 엔거 평원에서 지리적으로 상당히 먼 곳, 그러나 패전의
잔존자들에겐 심리적으로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나가들은 고통과 공
포의 타협점을 찾아내느라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나가들은 거의 울지 않는다. 패배에 서러워 하며 우는 나가의 모습이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공포는 전혀 다른 문제다. 심장이 없는 생물을 죽
이기 위해 동원되어야 하는 수단이 초현실적인 것이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수단을 간단히 동원할 수 있는 존재 둘과 맞닥뜨려야 했다
는 것은, 불사에 가까운 그들 냉혹한 존재들에게도 떨칠 수 없는 충격을
선사했다. 발 딛고 있는 것이 굳건한 반석이 아닌 쓰레기 언덕임이 밝혀
졌을 때 느끼게 되는 당황은 말할 나위 없이 거대하다. 하물며 그것이
자신의 불사성과 관련된 문제라면 심적 충격은 간단히 몇 배로 늘어난
다. 위엄을 갉아먹고 자긍심을 내동댕이치게 하고 주위의 모든 곳에 초
점을 맞추게 하는, 하지만 아무 것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감정,
두려움.
그들은 모든 생명체에게 익숙하지만 도깨비와 나가들에게만은 낯선 필
멸의 공포라는 감정을 가혹한 대가를 치르며 체득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그 계곡에 모인 나가들 중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나가
는 둘 뿐인 듯했다. 그 특별한 두 사람 중 한 명인 갈로텍 대장군은 가
눌 길 없는 분노에 비늘을 부딪히고 있었다. 갈로텍은 방금 들었던 니름
을 반복했다.
[1만 8천 명이라고?]
[예. 대부분은 시우쇠와 륜 페이가 해치운 숫자입니다.]
[수호장군들은 어떻게 되었나, 마케로우 장군?]
[돌아온 분은 없습니다. 전원 사망하거나 체포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갈로텍은 의미가 될 수 없는 광포한 니름을 토해내며 주위를 둘러보았
다.
계곡에는 2천 명 남짓한 나가들이 지쳐 쓰러져 있었다. 마호가니 군단
의 잔존자들인 그들 가운데서 약간의 위엄이라도 유지하고 있는 자는 찾
아보기 어려웠다. 아직껏 몸에 작살검을 한두 자루씩 꽂고 있는 자들이
많았고 비늘이 홀랑 타버려 개구리 같은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나가들도 많았다. 그나마 그런 자들은 오히려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사
지가 제대로 달린 자들 중 많은 수가 그 번듯한 사지를 흔들며 발작하고
있었다. 전투 전에 복용하지 못한 소드락을 도망치는데 사용했기 때문이
다. 일인 지참량인 세 정을 한꺼번에 복용하는 것이 정신 나간 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나가는 없었지만, 시우쇠와 륜 페이의 동시 등장은 나가의
이성마저 태워버릴 불꽃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그 끔찍한 괴물들에게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고통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괴물의 먹잇감이 되어 신음하고 있
었다. 고통과 분노, 비탄의 니름들 때문에 그곳은 니름을 들을 수 있는
자들에겐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아수라장이었다. 갈로텍은 주먹을 움켜
쥐었다.
그 때 비아스가 질문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도착하셨습니까?]
[뭐라고?]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 있으셨던 건지 질문했습니다. 사흘 후
에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시우쇠가 엔거 쪽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혼자 말을 타고
왔다.]
[말? 아, 네. 승마술을 가진 분이 있으신가 보군요. 아쉽군요. 몇 시간
만 기다렸으면 좋았을 텐데.]
갈로텍은 믿을 수 없었다.
[잠깐. 아쉽다고 했나, 마케로우 장군?]
[네.]
[그걸 니름이라고 하는 건가! 1만 8천 명이 학살당했는데 하는 니름이
고작 아쉽다는 건가!]
비아스 마케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의미가 되기 직전
의 무의미들을 연속적으로 흘려보냈다. 갈로텍은 비아스가 니르고 싶은
바를 간단히 깨달았다. 갈로텍은 분노했다.
[내가 뭘 놓치고 있다는 건지 닐러보겠나?]
[닐러드려도 되겠습니까?]
[닐러!]
[지금껏 적들은 시우쇠의 정확한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북
부의 불신자들을 보호해왔습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우리는 시우쇠가
있는 곳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곳에 시우쇠가 있도록 하
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탓에 북부군과 우리는 지루한 심리전을 벌여
왔습니다. 우리가 한 지역을 공격하면 그들은 일단 판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공격이 진짜 공격인지, 그렇지 않으면 시우쇠를 유인해놓고 다른
곳을 치기 위한 위장공격인지.]
갈로텍은 어이 없다는 듯이 닐렀다.
[전략의 창안자에게 전략의 개요를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죄송합니다만 제가 원하는 방법으로 닐러드리도록 해주십시오.]
[계속해.]
[그런 유인은 성공할 때도 있었고 실패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건 우리가 항상 이기는 계책입니다. 시우쇠가 우리의 유인에 넘어오면
그를 내버려두고 다른 지역을 공격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넘어오지 않으
면 그냥 물러나면 됩니다. 가장 나쁜 경우라고 해봐야 우리가 진짜 공격
하려고 마음먹고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킨 장소에 시우쇠가 나타나는 경
우입니다만, 이 경우에도 우리는 수호자들로 하여금 시우쇠를 묶어두게
하고는 도망치면 그만이었습니다. 오늘 그로스 군단장은 그렇게 하지 못
했습니다만.]
[지금 생사가 불확실한 자네 상관을 헐뜯으려는 건가?]
[아닙니다. 그들이 시우쇠를 노출시킬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
습니다. 그들은 시우쇠를 노출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다
른 지역을 공격하니까.]
[무슨 니름인가?]
[오늘, 그들은 시우쇠를 노출시켰습니다. 그 덕분에 그들은 1만 8천명
이나 되는 아군을 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족하기엔 적
은 숫자가 아닐까요? 제가 그 숫자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갈로텍은 정신적 신음을 흘렸다. 그는 비아스가 무슨 니름을 하는 건지
깨달았다.
[예. 시우쇠가 이곳에 나타난 이상 우리는 내일이나 모레 쯤 이곳에서
먼 지역에서 불신자들을 18만 명이라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들은 시우쇠를 노출시켰을까요?]
농가의 내부는 환희로 가득했다. 피와 땀을 채 닦아내지 못한 험상궂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지만 북부군의 장수들은 승리에 배불러 있었고, 완벽
하게 만족한 얼굴로 라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라수가 꺼내
놓은 서두는 그들을 더욱 만족시켰다. 라수 규리하는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곳으로 쫓겨오긴 했습니다만, 그것은 저들의 착각과 달리 우
리의 선택입니다."
괄하이드 규리하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입소문이나 짐작으로 약간씩
알고 있던, 하지만 아직은 그 전모를 깨닫지는 못했던 전략에 대한 설명
에 북부군의 다른 장수들은 집중했다. 라수는 벽에 붙여놓은 지도를 가
리키며 말했다.
"지난 몇 달 동안의 패배를 통해 우리는 나가 수뇌부로 하여금 이곳에
시우쇠님이 없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나가들은 다른 어딘가에 있을 시
우쇠님을 감지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고 그 동안 우리는 이곳까지 큰
경계를 받지 않고 다가올 수 있었습니다. 적들이 엔거 평원을 전장으로
선택하리라는 것은 자명했습니다. 그들은 폐하와 우리를 한꺼번에 붙잡
길 원할 것이고, 이곳으로 우리를 몰아넣으면 흑단 군단, 마호가니 군
단, 대나무 군단의 3개 군단이 우리를 대포위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마호가니 군단이 나설 것 또한 분명했습니다. 어르신들의 보고를 따른다
면 마호가니 군단이 보유한 수호자가 가장 많고, 따라서 하텐그라쥬 공
작을 상대하기 위한 최적의 부대였습니다."
라수는 잠깐 멈춘 다음 말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마침내 마호가니 군단을 패주시켰습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승전의 흥취에 자제력을 잃은 젊은 장수들에게서 짧
은 함성이 터져나왔다. 라수는 엄격한 얼굴로 그들을 침묵시키고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의 즐거움은 이해합니다만 승리는 패배할 기회를 한 번 더 얻
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조해두고 싶습니다. 예. 우리는 오늘 마호
가니 군단을 패퇴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짓밟혔던 슈라도스 사람들의 복수
를 달성했습니다. 적들은 꽤 화가 났겠지요. 하지만 그 이성적인 나가들
은 곧 이 지점에서 우리가 시우쇠님을 노출시켰다는 사실에 의아해할 겁
니다. 왜냐 하면 시우쇠님의 모습이 확실히 노출된 지금, 그들은 북부의
다른 지역을 초토화할 수 있으니까요."
장수들은 창백해졌다. 북부군 최고의 지략가가 내놓은 예측은 정확했
다. 나가들이 전장을 북부 전체로 넓히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북부군
이 시우쇠의 위치를 계속 모호하게 유지해왔다는 것에 기인한다. 시우쇠
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기에 나가의 수호자들은 기후 조절에 마냥
매달릴 수 없었고, 기후가 바뀌지 않기에 나가들은 어느 정도 이상 북진
할 수 없었으며, 나가들이 북진할 수 없기에 시우쇠는 전선 배후의 넓은
북부 지역을 통해 쉽게 이동하며 이곳 저곳에 출몰했다. 나가들에겐 분
통 터지는 악순환이었다.
그러나 북부군이 가진 가장 빠른 연락 수단인 어르신 전령도 동시 대화
가 가능한 나가들의 뱀단지에 비하면 도저히 빠르다 할 수 없었다. 나가
들은 시우쇠가 출현할 때마다 수백 킬로미터 저편에서 기온을 대규모로
변화시켜 북진하곤 했다. 그 때문에 북부군 또한 시우쇠의 모습을 함부
로 노출시킬 수 없었다. 장수들은 걱정에 잠겨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래
도 라수 규리하라면 뭔가 생각이 있었을 거라 믿는 눈으로 북부군의 두
뇌를 바라보았다.
라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갑자기 엉뚱한 말을 꺼냈다.
"햇수로 4 년째입니다."
장수들은 어리둥절했다. 그에 상관하지 않은 채 라수는 회상하는 어조
로 말했다.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3 년 전의 세퀴라도 공방전을 기억하시겠지요.
저는 그 날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바로 그 날 시우쇠님께
서 우리에게 오셨지요. 하지만 그 분이 도착하기 직전 우리들은 이미 패
배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예. 24 일 밤낮에 걸친 공방전의 마지막
날, 싸우다 죽기 위해 성문을 열고 돌격하기로 결정하셨던 여러분들의
곁에, 대호왕 폐하와 하텐그라쥬 공작, 아스화리탈, 그리고 두억시니들
까지 있었지만, 저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괄하이드 대장군은 여러분들이
저를 비난하지 않았다고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고백
합니다만 저는 그 때 성벽 위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몸에 기름을 붓고
있었지요."
세퀴라도에 있었던 장수들 중 일부가 신음을 흘렸다. 라수는 싱긋 웃었
다.
"여러분과 같은 무용이 없는 저로서는 돌격을 시도해봤자 적 한 놈 잡
지 못하고 죽을 것이 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건 섭섭하더군요. 어차
피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했지만 적 한 놈 잡지 못하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더군요. 예. 저도 별 볼 일 없는 규리하 사내였던 모
양입니다. 그래서 기름통을 들고 성벽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가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면, 어느 놈이 지휘자인지 알아낸 다음 몸에 불을 붙이고
뛰어내릴 작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뜨겁게 안아줄 계획이었지요."
지코마 상장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물에 숨어 있었던 거라는 말씀은…?"
라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시우쇠님 앞에 나가려면 기름은 일단 씻어야 했으니까요. 그 분 근처
에 가면 타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대충 씻어내고서야 나
설 수 있었던 겁니다."
"하긴 좀 의심스러웠습니다. 아무리 당황하셨다 하더라도 우물 속에 숨
거나 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면 왜 숨었던 거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글쎄요. 그런 분신특공을 하려 했다고 말하려니 좀 부끄럽더군요. 그
리고 그 때 그렇게 말했다면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
렇게 말했습니다."
오래된 오해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장수들은 한숨과 웃음을 지어보였
다. 라수는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3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 또한 변명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 날 그 성벽 위에
서, 몸에서 나는 지독한 기름 냄새마저 잊은 채 제가 했던 생각을 들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날 저
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화신을 바라보면서 이제 살았다고 생각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죽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도깨비의 영처
럼 말입니다."
라수는 갑자기 불타는 눈으로 장수들을 바라보았다.
"시우쇠님께서 우리에게 오신지 3 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나
가들을 기만하며 그들의 북진을 늦추어왔고 그 파상적인 공격에서 간신
히 건져낸 자투리 병력들을 조금씩 규합하여 겨우 여왕 폐하의 군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엔거에서 마침내 4 년만에 대승까지
거뒀습니다."
장수들이 다시 기뻐할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라수는 빠르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제게 속으셨습니다."
장수들이 당황했다. 세미쿼 장군이 외치듯 말했다.
"속다니오? 무슨 말이오, 라수 상장군님?"
"오늘의 승리를 기뻐하시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가
슴 아픕니다만, 이 승리에 의해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습
니다."
이번엔 무핀토 장군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돌아갈 수 없다니, 무슨 말이오? 우리가 돌아갈 곳이라도 있었소? 즈
믄누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니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오늘 시우쇠님은 이곳 엔거에서 노출되
었습니다. 저는 조금 전 이곳을 선택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엔거에서
남쪽으로 뭐가 있는지 아십니까? 차례로 말씀드리면 페로그라쥬, 악타그
라쥬, 시모그라쥬가 나옵니다. 익숙지 않은 지명이겠지만 뭔가 연상되는
것은 있으시겠지요. 예. 나가들의 도시입니다. 그 다음에는 뭐가 나오는
지 아십니까?"
라수는 갑자기 몸을 돌려 지도를 짚었다. 그 손가락 끝은 상당히 남쪽
에 있었고 그 위치가 시사하는 바를 깨달은 장수들은 전율을 느꼈다. 라
수는 지도에 쓰여있는 글자를 음미하듯 말했다.
"하텐그라쥬. 침묵의 도시. 우리는 그곳으로 진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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