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35화 (35/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0-1.                        관련자료:없음  [55551]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7-02 00:38  조회:9747

눈물을 마시는 새.

10. 침수(侵水) - 1

지배자, 상인, … 등 …의 권능을 소원하는 많은  이들이 분명히

…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용인들 중에는 영웅이나 위인은커녕 이

름이 좀 알려진 …조차  없다. 용인의 권능은 타인을  지배하거나

타인이 소유한 정보를 얻어내는 데 …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

려 …에게 지배당할 위험에 노출되게 만드는 것이  용인의 능력이

다.

…들은, 둔감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는 이 사실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

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많은 부분들이 훼손되어 안타

까움을 일으키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카시다 암각문> 중 일부.

사흘을 퍼붓던 비는 기력을 소진한 듯  간헐적인 헐떡임으로 바뀌어 있

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빗줄기는 정오가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끈질긴 빗줄기  아래로 광대한 엔거  평원은 축축하고

질척하고 찰박거렸다. 종아리에  닿을락말락하는 엷은  안개층이 평원의

지면을 뒤덮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재와 뒤섞인 보기 흉한 진흙이 끝없

이 펼쳐져 있었다.

평원 한 귀퉁이, 언덕 위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앉아있던 괄하이드 규리

하는 무심한 손길로 이마를 닦아내었다.  날씨는 온화했다. 비를 쏟아붓

는 것과 동시에 적들은 엔거 평원의  기온을 상당히 높여놓았다. 그들로

서는 키보렌과 비슷한 온도까지 올려놓고 싶었겠지만, 그런 고온을 실현

하기 위해서는 비를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온은 피아 모

두에게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에 머물렀다.

괄하이드는 대도에 씌워둔  덮개를 만지작거렸다. 널리  쓰이는 작살검

대신 괄하이드는 자신의 대도를 고집했고, 아무도 노무사의 고집에 이의

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대도는 작살검 수십  자루가 해낼 일을 홀로 해

내곤 했기 때문이다.

덮개 아래로 느껴지는 대도의 믿음직한 감촉이 노무사에게 향수와도 같

고 설레임과도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

는 감정이다. 괄하이드는 씩 웃었다.

"녀석. 보채지 마라. 오늘도 포식할 거다."

언덕 위에 있던 다른 장수들도 난폭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괄하

이드의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재치있는 말  한 마디를 보태는 등의 행동

을 하는 자는 없었다.  괄하이드는 그 사실에  만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릿한 슬픔을 느꼈다. 밝은 청년들, 젊음의 단점이자 특권이기도 한 밝

은 성품을 주체하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너무 많이 사라졌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괄하이드는 그의 골칫거리였던 그  사랑스러운 젊은이들의 이

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사마귀 페서다, 난폭자 그리몰스, 상사병자

디구르, 난쟁이 고하, 자러 나온 귀하츠….

귀하츠의 별명을 되새긴 괄하이드는 우수 어린 미소를 지었다.

'자러 나온 귀하츠라.'

슈라도스에서 온 귀하츠 신뷰레는 독특한  전쟁관을 피력하곤 했다. 그

잘생긴 젊은이는 침대가  자신의 전장(戰場)이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전장에는 모자란 잠을  보충하러 나온다고 설명하여  전우들을 당황하게

했다. 진격 나팔 소리를 들으며 '취침 나팔이 울렸군. 달콤한 꿈의 시간

인가.' 라고 중얼거리던 귀하츠의 모습은  뻣뻣하게 긴장해있던 동료 장

수들을 웃게 만들었고 다가올 공포에  위축되어 있던 병사들을 감탄하게

했다. 전장에서 쓰러뜨린 적보다 침대에서 상대한 여자가 더 많은 것 아

니냐는 짓궂은 질문에 대해 귀하츠가 확실한 대답을 한 적은 없었다. 그

리고 그 대답은 절대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귀하츠는 그의 표현대로

자러 나온 전장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하지만 괄하이드는 귀하츠가 침대를 전장이라고 부른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 생각 깊은 귀하츠는 살을 파먹고  뼈를 부수는 것 같은 악몽

때문에 제대로 잘 수 없음을 고백하느니 막돼먹은 호색한으로 남는 쪽을

택했다. 그 편이 부하들을 안심시키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악몽을 꿀 일은 없겠지. 편히 쉬게. 귀하츠.'

빗줄기를 보며 괄하이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치게 많은 젊

은이들이 죽었다. 탐스러운 열매를 보장할 아름다운 꽃들이 참혹한 폭우

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무덤 앞에 살아남은 노병이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긴 시간 동안 괄하이드의 능력은 위대한 승리의

쟁취보다는 몰살을 전력 도주로  바꾸는 쪽에서 주로  발휘되고 있었다.

물론 살아서 도망친 자들에겐 그것은 무엇보다 고마운 재능이었다. 하지

만 괄하이드 규리하는 페서다, 그리몰스,  디구르, 고하, 그리고 귀하츠

가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 감히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지키지 못한 도시들도.

슈라도스의 아름다움은 이제 옛노래 속에서나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보로의 전설적인 성벽은 끝내  그 시민들의 신뢰를  배신하고 말았다.

상고토(上古土)의 위대한 도시들 중에서도 으뜸이던 판사이의 육형제 탑

이 영원히 수면 아래로 잠겨버렸을 때  베미온 마립간은 미쳐버렸다. 그

는 지금까지도 탑들이 익사하며 내지르는 비명을 듣고 있었고, 레콘보다

더 심한 공수증을 보이고 있었다.

'나를 용서해다오. 위대한 도시들이여.'

고통스러운 회한에 빠져있던 괄하이드의 눈에  빗줄기 저편에서 언덕을

달려올라오는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찰박거리며 달려오는 병사를 보며 괄하이드는  우려를 느꼈다. '저렇게

달리다간 넘어지고 말 텐데.' 아니나 다를까,  달려오던 병사는 보기 좋

게 미끄러졌다. 안개층에 얼굴을 들이박는 병사를 보며 괄하이드는 혀를

찼다. 하지만 병사는 곧 씩씩하게 일어나 괄하이드를 향해 달려왔다. 괄

하이드의 앞에 멈춰선 병사는 우렁차게 외쳤다.

"원수부로부터의 전갈을 가지고 왔습니다! 대장군님!"

"얼굴이나 좀 닦고 말하게."

병사는 얼굴에서 1 킬로그램은 됨직한 진흙을 닦아내었고 그러자 그 아

래에서 빨갛게 변한 소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쓰디쓴  추억에 빠져있던

괄하이드 대장군도 부지불식간에 미소를 짓고  말았다. 대장군의 미소를

본 소녀 병사는 외워온 말을 떠올리기 위해 그렇잖아도 붉은 두 뺨을 더

욱 빨갛게 물들였다.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아니었는데도.

"기상이 곧 변할  겁니다! 대장군님! 곧  사열이 있을  겁니다! 대장군

님!"

"알았다. 그리고 데오늬. 땅이 이 모양일 때는  좀 천천히 달리는 편이

어떨까."

"천천히 달리겠습니다! 대장군님!"

"자네만 있다면 내가 대장군이라는  거 잊어먹을 일은  없겠군. 돌아가

봐."

"돌아가겠습니다! 대장군님!"

데오늬 달비는 몸을 돌렸고, 천천히 달려갔다. 너무 천천히 달렸다. 결

과적으로 데오늬는 중심을 잃고 요란한  동작으로 진흙탕에 처박히고 말

았다. 하지만 괄하이드가 예상하고 그 광경을  본 모든 사람이 그러리라

짐작했던 것처럼 데오늬 달비는 벌떡 일어나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 씩씩하게 달려갔다. 데오늬 달비에 대한  중론은 그녀가 곰굴에 던져

져도 난처하다는 듯 얼굴만 조금 붉힌 다음 씩씩하게 달려나올 것이라는

쪽에 쏠려 있다. 그리고  당황한 곰이 그녀를 따라  영문도 모르고 달릴

거라는,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어낸  부연도 따른다. 괄하이드는 헛웃음

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괄하이드는 빗줄기 저편을 노려보았다.

'사라져간 영웅들이여. 무너진 도시들이여. 그대들을 위해 슬퍼하지만,

그러나 미래는 저 데오늬 달비의 것이겠구나.'

노무사는 다시 대도의 덮개를 만지작거렸다.  상대방의 살을 파헤치는,

가장 극단적인 친선의 도구. 괄하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당신들 곁으로 가 함께 웃고 함께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희

망 속에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겠다. 그 때까지,  나는 저 무릎 성할 날

이 없는 소녀를 위해 싸우겠다.'

장수들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 괄하이드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리

고 회한에 젖어있지도 않았다. 싸워야 할  이유가 있었고, 싸워야 할 적

도 있었다.

싸워야 할 시간이다.

건물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느낀  바우 머리돌은 고개를 그쪽

으로 돌렸고, 다음 순간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진흙 마귀다!" 하지

만 라수 규리하는 들여다보던 지도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말했다.

"아니, 그건 데오늬 달비요."

곧 명쾌한 동의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렇습니다! 상장군님! 명령을 전달하고 돌아왔습니다! 상장군님!"

우렁찬 고함에 생각의 가닥을  놓쳐버린 라수 규리하는  결국 지도에서

눈을 들어 데오늬 달비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고 기겁했다. 바우 머리

돌 성주의 표현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라수 규리하는 문가에 서서

진흙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그 기괴한 생명체가  자신이 보낸 전령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전령 노릇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 거냐? 아니, 됐어. 대답

하지 않아도 좋다. 나가보거라."

"알겠습니다! 상장군님!"

데오늬가 씩씩한 동작으로 달려나가자 바우와 라수는 자신도 모르게 한

숨을 내쉬었다. 다시 지도를 들여다볼 생각이 사라져버린 라수 규리하는

바우 머리돌에게 말했다.

"그래, 시우쇠님은 좀 어떻습니까?"

"많이 지쳐있소."

"예? 넉 달 가까이 쉬었잖습니까?"

"휴식에 지쳐있다는 거요. 지금 기세가 어찌나 살벌하고 악랄한지 나도

가까이 가기 어렵군요."

라수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요. 그렇다면 오늘 대활약을 기대해도 되겠군요."

바우 머리돌은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그는 라수가 말하는 대활약이 무

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호가니 군단 쪽에서 당신  예상대로 준비하고 있다면야.  물론 당신

예상은 틀린 적이 없지만."

"틀림없을 겁니다. 지난 넉 달 동안 우리는  다섯 번 대패했습니다. 저

놈들은 절대로 시우쇠님이 여기 있다는 생각을  못할 겁니다. 포위를 갖

춰 우리를 이곳에 몰아넣은 것만 봐도 확실합니다."

"다섯 번 대패하면서 몇 명이 죽었소?"

"글쎄요. 만오천 명 쯤 될 겁니다."

바우 머리돌은 눈을 붉게 물들였다. 흥분 때문이었다.

"나는 때론 나가들보다 당신이 더 무섭소. 그 만오천 명은 당신 자신이

죽인 셈 아니오?"

라수 규리하는 상대방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

지만 전투 직전의 이런 상황에서 완벽히 쓸모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는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우 머리돌은 도깨비였다. 라수 규

리하는, 혐오하는 행위였지만 변명을 할 필요를 느꼈다.

"예.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만오천 명을 죽였다고 생각하느니 다

른 사만 명을 살렸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 전투에서 이긴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이길 겁니다. 상장군."

바우 상장군은 비딱한 시선으로 라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

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륜 페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탁자를 내려

다보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지금 륜  페이는 사방 수 킬로미

터 내에서 이루어지는 물의 움직임을 모두  추적하고 있었다. 조만간 비

가 그칠 거라고 예상한  것 또한 륜이었다. 륜이  추적하고 있는 범위를

생각한 바우 상장군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것은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적

인 범위였는데, 왜냐 하면 륜은 직경 수  킬로미터의 지면과 그 위쪽 수

킬로미터 상공, 그리고 지하 수 킬로미터까지 - 언젠가 적들이 지하수를

용출시켜 기병들을 공격한 이후로 륜은  지표면 아래쪽까지도 자신의 감

시 범위에 포함시켰다. -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륜의 감시

범위는 직경 수 킬로미터의 거대한 구(球)였다.

륜 페이가 말했다.

"곧 떠나셔야겠습니다. 바우 상장군님."

바우는 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륜 페이는 여전히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바우를 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아는 가

장 기괴한 자를 찾아보라면 바우는 주저없이  륜을 꼽았을 것이다. 어쨌

든 바우 머리돌은 상대방의 체액까지 포착하여 눈 감고도 상대를 '보는'

자를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다른 나가들마저 경악하는

능력이었다. 포로로 붙잡힌 적들은 륜의 그런  능력을 절대로 믿으려 하

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공포 속에 격렬히 부정한다 해도 륜은

그럴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얼마 있지 않아 하늘이 갤 겁니다. 수호자들은 이미 엔거 평원의 날씨

를 바꿔놓았습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개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것입니

다. 다가오는 전투에 대비해서 힘을 아껴두려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

러니 도깨비들을 데리고 떠나십시오."

"알았소. 공작."

공작이라는 말에 륜은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물론 륜이  공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위대한 아라짓의 왕령을 따른다면  륜 페이는 존엄한 하텐

그라쥬공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륜의 정체에 대한  바람직한 해답으로 받아들였다. 널

리 알려진 사실들을 따른다면, 륜은 하텐그라쥬에서 발생한 공작 계승의

투쟁에서 밀려나 북부로 도망쳐와서는 때마침  북쪽에 돌아온 왕을 돕고

있는 망명 귀족인 것이다. 나가 사회에 대해 아는 자들이 있었다면 실소

를 금할 수 없는 설명이었겠지만  보통의 북부인들에게 그것은 친숙함을

불러일으키는 설명이 되었다.

자신의 정체에 대한 황당하기까지 한 설명을 떠올리며 륜은 자신들에게

허위가 너무도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그 허위의 정점은

북부인들을 지배하는 왕의 정체일  것이다. 륜은 고개를  들었다. 2층에

있는 사람을, 륜은 시각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능력으로  볼 수는 있었

다.

바우 머리돌은 의자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 다음 물러갔다. 그는 이곳을

나가는 것이 행복한 듯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괄하이드와 병사들이 있

는 들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2층짜리 농가의 1층이었다. 다른 사

람들은 적절한 위치에 있는 그 건물에 크게 기꺼워했지만 바우만큼은 그

건물을 달가워할 수 없었다.  살해당한 농부 가족들의  시체는 없었지만

벽과 바닥에 핏자국은 선명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핏자국

을 모두 지운 후에야 바우 머리돌은 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승낙했고,

그리고 건물 안에 있는 동안 내내 언짢아했다.

륜은 문득 의문을 느꼈다.

"이 집을 왜 남겨둔 걸까요?"

"무슨 말이시오, 공작?"

"그들은 우리와 싸울 장소로 이곳 엔거  평원을 택했습니다. 계속된 추

격으로 우리를 이 땅으로 몰아넣었고, 우리가  이곳의 작물을 이용할 수

없도록 주변의 농토를 모두 불질러버렸습니다. 나가인 제가 확실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곡물이라지만 식물을  불지른 그 행위는 대단

한 결심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왜 이 집은 남겨둔 걸까요?"

라수는 소름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혹 이 집에 어떤 함정이 있다는…"

"아니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여긴 지대가 높은 편이라 폭우에도 문제

가 없고요."

"그러면 집까지 부술 시간은 없었나 보지요.  하긴 곡물을 태우는 것과

는 다르지요. 그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작정으로 집을 부순다면 그것

은 노동력의 낭비지요."

륜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이상 반론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적당한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륜은  농가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륜은 무심히 말했다.

"코네도 교위와 그의 아들들이 오는군요."

말을 끝낸 륜은 라수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이 또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

달았다. 라수 규리하는, 어느 쪽이냐  하면 냉소적 합리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인간보다는 오히려 나가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라수조차도

건물 바깥에 있는 사람을 눈으로 보듯이  말하는 륜의 태도에 완전히 익

숙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라수는 그 이상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자제

했고 빌파 삼부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완벽히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어서 오게. 이리 가까이."

삼부자는 륜에게 목례를 하며 탁자 가까이 다가왔다.

세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륜은 코네도 빌파의 오른손을 - 혹은 오

른손이 있던 자리를 -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그의 오른팔에 매달려

있는 것은 7번 손, 그러니까 흉측한 가시가 돋은 철퇴였다. 그들이 탁자

옆에 멈춰섰을 때 륜은 코네도의 허리춤에 5번 손과 6번 손도 매달려 있

음을 확인했다. 코네도 빌파로서는 완전 무장을 하고 온 셈이었다. 라수

역시 코네도의 무장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던 장난감이 도착했네."

코네도와 그룸, 그리고 토카리의 얼굴이 밝게  변했다. 라수는 탁자 한

쪽에 있던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고는 그 안에서 감투 세 개를 꺼내었다.

라수가 감투들을 내려놓자 코네도는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재치있게 감투를 들어 머리에 얹었다.

코네도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미 몇 번 본 일이기에 그룸과 토카리, 그리고 라수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륜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코네도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제가 보입니까?"

륜은 한 동안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세  남자 - 보이지 않는 사람까

지 따지면 네 남자는 초조하게 륜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륜이 말했

다.

"보이지 않습니다."

네 사람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룸과 토카리는 더 참지  못하고 감투를

썼다. 라수는 세 남자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흡

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때 륜이 말했다.

"토카리 부위. 멈추십시오. 그러다가 코네도  교위에게 부딪힙니다. 감

투 망가지겠어요."

륜의 지적이 내포한 뜻을 이해한 라수는 곧  실망을 느꼈다. 그리고 차

례로 나타난 토카리와 그룸도 실망이 역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지

막으로 감투를 벗은 코네도 빌파가 탁자에 그것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잖습니까?"

"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몸 속엔 물이 있습니다."

어리둥절해하던 코네도와 그룸과는 달리 토카리는 당장 륜의 말을 알아

들었다.

"아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럼 역시 다른 나가에겐 안 보이

는 겁니까?"

"예. 드디어 성공이군요. 체온까지 감춰버리다니, 대단합니다."

라수와 토카리는 안도했다. 그리고 토카리는  형과 아버지를 위해 설명

을 했다.

"이건 나가의 눈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는 지하수까

지 간파하시는 능력으로 우리 몸 속의 물을 보신 겁니다. 음, 그럼 공작

님. 혹 적들이, 물론 공작님만한 능력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만, 공작님

보다 좀 못한 능력으로도 우리를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갈로텍 대장군  이외에 저와 비슷한 능

력을 가진 자가 등장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만에 하나 저

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자가 출현했다  하더라도 전쟁터 같이 사람이 많

은 곳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할 겁니다."

그룸과 코네도도 마침내 희희낙낙한 얼굴이 되었다. 코네도는 왼손으로

오른손의 철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오늘 이 놈을 한 번 신나게 써먹을 수 있겠군요."

라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신나게 써먹는 건 자제하게. 적들도  우리가 도깨비 감투를 개량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꼭 필요할 때만- 이런, 발케네 남자들에게

쓸데없는 주의를 주고 있었군."

코네도, 그룸, 그리고 토카리는 사나운 미소로 라수의 실수를 용서해주

었다. 발케네 남자들은 그들은 당연히  참을성을 가지고 있었다. 도둑의

필요 자질이기 때문이다. 그 때 그룸이 계단 쪽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저, 보늬인지 나늬인지 알려면 두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확실

히 안 보이는지 알려면 폐하께서 확인해주시는 것이…"

그룸은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륜을 제외한 세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

으로 그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라수 규리하는  말도 하기 싫다는 표정

으로 코네도를 바라보았고 코네도는 라수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다음 첫

째 아들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그룸은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붙잡았다. 그런 그의 정수리를 향해 코네도의 불호령이 쏟아졌다.

"이 멍청한 녀석아, 폐하께서 어떻게 확인하시냐!"

그룸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 아니죠! 절대로 확인하실 수 없습니다!"

"그럼 조금 전의 그건 무슨 소리냐?"

"제가 잠시 미쳤나 봅니다!"

라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는 미치지 말게. 그룸 부위." 그룸 빌

파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라수는 저  용맹하지만 주의력은 좀 부족

한 사내를 전선에서 떼어놔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잠시 해보

았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을 거두고 간단한 주의만 주기로 했다. "그리

고 코네도 교위와 토카리 부위는 그룸  부위가 또 미치지 않도록 애정으

로 보살피게." 그룸은 아버지와 동생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 농가

의 바닥을 노려보아야 했다.

라수 규리하는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자네들은 출발하도록 하게. 알고  있겠지만 모두 충분한  거리를 두고

흩어져야 해. 우리들도 자네들을  볼 수 없으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빌파 삼부자는 물론이라고 대답한 다음  떠났다. 라수는 륜을 돌아보았

다.

"공작님. 폐하께서 사열을 하셔야 하는데, 제가 갈까요?"

"제가 가겠습니다."

륜은 계단을 올라 2층에 도달했다. 왼쪽 방으로 다가간 륜은 방문을 두

드렸다. 반복된 연습으로 이제는 익숙해진,  그리고 완전히 무의미한 동

작이었다.

[륜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방 안에서도 익숙한 대답이 돌아왔다.

"누구인가?"

"륜 페이입니다."

"들어오시오. 공작."

방 안은 휑뎅그렁했다. 간소한 침대 하나와  옷장이 전부였다. 사모 페

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미 갑옷을 갖춰 입고 있었고 손

에는 가면을 든 채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륜은 잠시 제자리에 서서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가면을 내려다보며 닐렀다.

[준비가 끝난 거야?]

[그렇습니다. 라수 상장군이 어떻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는지 모르겠

습니다.]

[넉 달 동안 일만오천 명을 죽이며 오늘을 준비해온 사람이니까.]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는 천장 쪽을 잠시 바라보다가 닐렀다.

[그 동안 적들은 얼마나 죽었지?]

[이백 명 쯤 될 겁니다.]

사모는 침묵했다.

[우리 병사들이 사기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기적 같구나.]

[대장군과 장수들의 노력이 컸습니다.]

사모는 또 침묵했다가 닐렀다.

[자러 나온 귀하츠, 기억나니?]

[악몽을 꾸던 청년 말씀이십니까?]

[요즘 내가 그렇구나.]

[네?]

[요즘 계속해서 꿈 때문에 잠을 설치곤 해.  며칠에 한 번씩은 꼭 꾸는

것 같은데, 형태는 매번  조금씩 달라. 하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아. 나

는, 어떤 이유에서인가 내 병사들 앞에 서게  돼. 사열, 연설, 추모, 포

상… 이유는 매번 달라. 어쨌든 나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지.

그 때 누군가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  그게 누군지 모르겠어. 아는 사람

인지 모르는 사람인지조차도  모르는 어떤 사람이야.  아니,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그 자는 내게 다가와  내 가면을 벗겨버리지. 그럴 거

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매번 막지 못해. 그리고 내 얼굴이 장병들

앞에 드러나게 되는 거지.]

사모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다음이 정말 궁금해. 꼭 그 지점에서 깨어나거든.]

[가면의 부담감 때문에 그런 꿈을 꾸시는 것이겠지요.]

[륜. 침대에 누워봐.]

[네?]

[여기, 침대에 누워봐.]

륜은 어리둥절해 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사모는 침대에서 일어난 다음

옆으로 비켜섰다. 륜은 그다지 매끄럽지 못한 동작으로 침대에 누웠다.

륜은 탄성을 질렀다.

천장에 글이 적혀 있었다. 침대에 누웠을 때만 보이도록 서까래들의 특

별한 위치에 먹을 발라서  이루어진 글이었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닐렀다.

[그래. 저 자들은 이  집을 비워두면 우리가 들어오리라는  것, 그리고

이 방에 내가 묵을 거라는 것을 짐작했지. 그냥 서신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위협적이고 충격적인 방법이잖아?]

륜은 사모의 니름에 동감하며 글을 읽었다. 기상천외한 내용이 있는 것

은 아니었다. 항복을 권하는 간단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조건이 예사

롭지 않았다. 륜은 일어나 침대 옆에 섰다.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면 자치 지역을 내주겠다는 건가요? 라수 상장

군이 보면 좋아하겠군요. 우리가 저런 조건을 받아들일 만큼 약화되었다

고 판단한 것일 테니까.]

[불신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오십 년 쯤  후에 한 번에 몰살하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 주의를 끄는 것은,  저것이 나가 뿐만 아니라 불신

자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자가 생각해낼  법한 제안이라는 거야. 역시

그들에게 협력하는 불신자가 있는 걸까?  그렇잖으면, 나가들은 이제 불

신자들에 대해 익숙해진 걸까?]

사모는 잠시 멈췄다가 닐렀다.

[그들이 불신자들에게 익숙해진 거라면, 이제  불신자들도 나가에 대해

익숙해져 있을까?]

[…그래도 나가가 자신의 왕이라는 것을 알면 경악할 겁니다.]

사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겠지.]

륜은 씁쓸한 표정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모호한 방향을 향해

웃은 다음 가면을 썼다.

아름다우면서도 무시무시한 가면이었다.

구름이 서서히 흩어져 맑은  하늘이 그 틈에서 드러났다.  엔거 평원을

뒤덮고 있던 안개도 사라져 흙탕물로 뒤덮인 땅이 지평선까지 펼쳐졌다.

륜은 평원 곳곳을 덮고 있는 그 물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적들은, 이

왕이면 강이나 거대한 호수를 낀 지역을  선택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

만 라수 규리하는 그런 지역으로 절대  다가가지 않았다. 그러자 적들은

예상 전장으로 지목된 엔거 평원에 구름을  끌어모아 사흘 동안 비를 퍼

부었다. 전장 전체를 '적셔두는' 그 행동에 라수 상장군은 감탄했다. 그

리고 라수는 '전투 역시  일종의 사회관계 -  대단히 극단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 이고 따라서 서로간의 양보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 정도

의 요구는 들어주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적들이 전장을 충분히

적시기를 기다리며 그곳에 머물렀다.

사흘이 지난 지금, 마침내 적들은 비를 물러가게 했다. 전투 시작을 통

고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생각의 그 지점에서  륜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연의 힘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적들과의 오랜 투쟁의 결과로,

그 즈음 '자연스럽다'는 표현은 냉소적 농담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기병 오천, 그리고 보병  삼만오천 명이 도열해 있었지만  엔거 평원은

고요했다. 그래서 바위를 향해 걸어오는 대호의  발소리가 잘 들릴 정도

였다.

왕은 언제나처럼 대호 마루나래에 올라탄 채 금군과 함께 걸어왔다.

왕을 보호하는 금군을 인간이나 레콘들로  구성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은 끊이지 않고 제기되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의견 제시에 머물고 말

았다. 나가와의 전투를 평생 숙원으로 천명하고 종군하고 있는 레콘들은

왕의 주위를 지키느니 최전선에서 싸우기를 원했고, 원수부는 왕의 주위

에 인간을 두는 것을 탐탁치 않아 했다. 그래서 왕은 언제나처럼 스물두

명의 두억시니들로 이루어진 금군의 호위를 받으며 바위로 향했다. 그리

고 금군의 모습을 본 인간들은  원수부의 결정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신체 곳곳이 흉기나 다름없는  그 두억시니들은 열성적인 대장

장이들의 도움으로 그들에게 적합한 여러  개성적인 장비들을 갖추어 더

욱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되태어났다.

왕을 보며 륜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감각을 최대한 확장시켰다. 거의 십

킬로미터 이상 감각을 확장시킨 륜은 이미  몇 번씩 확인한 결론을 다시

얻었다. 왕을 겨냥한 불순한 물의 움직임은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의

심스러운 움직임이 발생하면 취할 조처들을  꼼꼼히 되새기며 륜은 왕을

쳐다보았다.

바위에 도달한 마루나래는 가볍게  그 위로 뛰어올랐다. 대호  위에 탄

왕은 상당한 높이에서 병사들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왕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 유명한 가면은 장병들로 하여금  왕이 모든 방향을 동시에 바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했다.

왕이 자리를 잡자 레콘 한 명이 바위  앞으로 다가가서는 왕과 같은 방

향을 향해 섰다. 왕에게 등을 보이는 무례는 이 경우 불가피한 것이기에

용납될 수 있다. 레콘이 똑바로 선 것을  확인한 왕은 천천히 말을 시작

했다.

"짐의 말을 들어라."

"짐의 말을 들어라."

레콘이 왕의 말을 따라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덕분에 그곳에 모인 사

만 명 모두가 왕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별 필요 없는 배려일

지도 모른다. 왕이 하는 말은 언제나 똑같았으니까.

"지고 돌아오는 것은 백 번이라도 용서하겠지만, 이기고 죽어버리는 것

은 용서하지 않겠다."

륜 페이는 라수 규리하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목격했다. 라수 상장군은

단 한 번만이라도 '짐을 사랑한다면 나가서 적을 도륙하라!'라고 말해달

라고 왕에게 졸랐지만 왕은 요지부동이었다. 언젠가 왕은 라수 규리하를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까지 몰아넣은 다음 진지하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짐이 자네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텐가?' 라수는 코방귀를 뀌었다.

'왕보다는 제 목숨을 더 사랑한다고 대답할  겁니다.' 륜과 다른 이들은

라수의 뻔뻔함에 질려버렸지만 왕은 싱긋  웃으며 라수의 무례를 용서했

다. 그리고 라수의 요청도 묵살했다.

륜도 왕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의 예기(銳

氣)를 북돋자는 라수 상장군의 요청은 륜에게도 당연한 상식으로 생각되

었다. 하지만 왕은  '승리'도, '명예와 자존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말하지 않았다.  왕은 언제나 '살아  돌아오라'는 말만 했

다.

'그걸 원하지 않는 병사가 어디 있다고?'

륜이 잠시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왕은 바위에서 내려와 금군과 함께 물

러났다. 전투 배치 신호가 울렸고 장군들은 자신의 군단을 움직였다. 군

기들이 움직이고 나팔과 호각  소리가 소란을 떨었다.  교위들의 함성이

들려왔고 그보다 더 난폭한 부위들의 욕지거리들도 들려왔다.

전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비록 왕이  맥빠지는 소리를 했지만, 병

사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휘관들은 그들을 죽음

과 삶을 가르는 가느다란 선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추하고 희미한, 비정함으로 가득한 선이었다.

지난 사흘 동안 엔거 평원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마침내 소멸했다. 그

사이로 드러난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마호가니 군단의 군단장 그로스는

자신이 이룩한 일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해했다.

사실, 그가 해낸 일이다.

그로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더욱 자신만만해졌다.  저 멀리 있는 코끼리

부대의 모습이 특히 그를 즐겁게 했다.  나가 보병들을 짓밟아대는 적군

기병들에 대한 대비책으로 제안된 코끼리  부대는 예상을 뛰어넘는 맹활

약을 보여주었다. 빼어난 정신억압자 수디 가리브를 주축으로 한 정신억

압자 무리는 이제 자신들의 코끼리와 완전히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있

었고, 실제로 다른 병사들 또한 그것을  나가의 두뇌와 코끼리의 육체가

결합된 하나의 생물로 여기고 있었다.  실로 파괴적인 생물이었다. 그로

스는 지난번 전투에서 적 기병의 말을  짓밟고 그 기수를 코끼리의 상아

에 꿴 채 전장을 누비고 다니던  수디 가리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이만에 달하는 마호가니 군단의 보병들의 모습 또한 장려했다. 비록 그

로스의 야심찬 계획, 즉 적군의 작살검에  대비하여 군단병 전원을 중장

갑으로 무장시킨다는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폐기되었지만

- 나가에겐 좋은 대장장이들이  부족했다. - 사이커를  움켜쥔 보병들의

위엄있는 모습은 그런 약점 따위를 잊게 만들었다.

흡족해하고 있는 그로스에게 부관이 다가왔다.

[군단장님. 마지막으로 닐러드리겠습니다. 정말  전투를 시작하실 생각

이십니까?]

그로스는 좋던 기분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부관을 돌아보았다. 하

지만 그로스는 곧 자신을 회복했다. 어쨌든 그의 부관은 여자였다. 그리

고 남자 지휘관들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게 된 여인들도 남자들의 지휘

에 대해 트집을 잡을 권리까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로스는 부관을 설

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부관. 전투를 시작할 생각이네. 대호왕(大虎王)은 내 항복 권고

를 거부했어.]

[사흘만 더 비를 뿌리시며 기다리면  갈로텍 대장군께서 도착하실 텐데

요.]

[그리고 우리 수호장군들은 지쳐빠지겠지. 무의미한 일이야.]

[하지만 대장군께서는 자신의 도착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전투에 참여하려는 대장군의 그런 태도 때문에 전선의 확장이 늦

어지고 있어. 가끔은 믿고 군단장들에게  맡겨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지. 그리고 대장군의 그런 태도는 당연해. 모든 장군들이 실수를 무서

워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거부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대장군 혼자 이 넓

은 전선을 감당할 수는 없어. 이제는 우리 능력을 보여줘야 해.]

[니름 옳습니다만 저곳에는 그들의 왕이 있잖습니까? 게다가 륜 페이도

있습니다. 군단장님께서는 우리  군단의 수호장군들만으로도  륜 페이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하셨고 저 또한 그  판단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 병사들은 수호장군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적군들과

상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륙할 걸세. 기병은 수디가  제거할 테고 우리 보병들

은 홀로 불신자 열 명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어. 뭐가 문제인가?]

부관은 솔직히 문제를 제시할 수 없었다. 그들의  군단은 이만 명의 보

병과 오백 기의 코끼리병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숫자는 확실히 사만의

적병을 제압할 수 있는 숫자였다. 하지만  부관은 꺼림찍한 기분을 느꼈

다. 그리고 오랜 시간의 전투 경험이  그 느낌을 지지하고 있었다. 좋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기분을 설명할 니름을 떠올리기 전에 그로스가 준엄하게

닐렀다.

[나는 그들의 왕에게 항복을 제안했고 그들은 살아날 기회를 포기했어.

이제 우리는 그들을 도륙하기만 하면 되네. 부관.]

부관은 마지막 갈등을 느꼈다. 결정을 내릴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하지만 제가 이  전투를 반대했다는 것을 분명

히 해두고 싶습니다.]

그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고집을!'  그로스는 날카롭게 닐렀

다.

[좋아. 자네는 반대했어. 비아스 마케로우!]

[감사합니다.]

비아스는 완전히 무감각한 니름으로 대꾸한  다음 뒤로 물러났다. 그로

스는 그녀를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그로스는 진격을

명령했다.

횃불이 크게 움직였다. 코끼리들과 병사들은 전장을 향해 걸어갔다.

전쟁터에 도달한 그로스는 엔거 평원의 북쪽을 바라보았고 적군이 이미

배치를 끝냈음을 깨달았다. 그로스는 그것이 누구의 솜씨인지 알고 있었

고, 그래서 괄하이드 대장군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었다. 하지만

그로스는 서두르지 않고 진형을 갖추었다. 괄하이드는 기다려줄 것이다.

과거 나가들이 진형을 갖추느라 어수선한  척하며 괄하이드를 유인한 적

이 있었다. 돌격해온 괄하이드는 지하수의 분출과 강력한 진눈깨비에 노

출되고 말았다. 륜 페이가 나서지 않았다면  괄하이드는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당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괄하이드  규리하는 경의를 가지고 나

가들이 진형을 다 갖추기를 기다렸다. 그로스는 그런 괄하이드를 자극하

기 위해 일부러 늑장을 부리리라 마음먹었다.

잠시 후, 그로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불신자들의 부대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스는 그 사실에 놀

랐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로스가  보내는 강력한 니름에  의해 전선

곳곳에 펼쳐져 있는 수호장군들은 준비를 갖추었다. 다른 장수들이 수력

을 통제할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을 확인한 그로스는 적군을 관찰하며 태

연하게 병력 배치를 계속했다.

그로스의 예상대로 적군은 돌격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전방에 배치된

보병들이 좌우로 갈라설 뿐이었다. 그로스는 북부군이 왜 그런 움직임을

취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좌우로 움직이는 보병들은 결과적으로 기병들의

앞을 가로막게 되었고, 그 때문에 기병들은 당장은 돌진할 수 없게 되었

다. 왜 저런 쓸모없는 짓을?

문득 불길한 예감이 그로스를 엄습했다.  그로스는 적군을 뚫어지게 관

찰했다. 그 때 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던 듯 곁에 있던 비아스가 닐렀다.

[도깨비불은 아니군요. 진짜  병사들입니다. 왜 저런  움직임을 취하는

걸까요?]

그로스는 짧게 고민했다.

[뭔가 새로운 진형을 시험해볼 것인지를  놓고 조금 전까지 고민하다가

방금 결심했나 보군. 괄하이드답지 않은  일인데. 필사적인 심경인 모양

이군.]

[괄하이드는 노련한 전략가입니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그로스는 비아스의 니름에 대해 뭔가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곧 그 대

답을 잊어먹고 말았다.

좌우로 갈라진 보병 사이로 걸어나온 것을 본 순간 그로스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왜 괄하이드가 기다려주지 않았는지,  왜 보병들이 좌우로 갈

라졌는지.

그리고 왜 그들이 항복하지 않았는지.

그것은 도깨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존재들보

다는 도깨비를 더 닮아있다는  뜻이다. 그 피부는  달아오른 쇳덩이처럼

빛나고 있었고 관절 부위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은 있었지만

눈알은 없었으며, 이마 아래에 있는 그 두 개의 구멍에서 볼 수 있는 것

이라고는 작렬하는 화염뿐이었다. 똑같은 화염이 콧구멍에서도, 입 안에

서도, 그리고 온몸의 털이 나있어야 하는 곳마다 솟구치고 있었다. 그것

은 실로 백열하는 불덩이에 도깨비의 피부를 씌워놓은 존재였으며, 대파

멸의 요구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 그로스는  비늘을 부딪히며

절규했다.

[시우쇠!]

시우쇠는 거대한 두 팔을 좌우로  펼쳤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머리카락

이 거칠게 휘날리며 불똥을 흩날렸다. 화염의  화신은 산더미 같은 불덩

이를 토했다. 그리고 자신이 내뿜은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다. 불꽃은 그

대로 그의 몸에 엉겨붙었다. 시우쇠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러자

그의 몸에 엉겨붙은 불꽃은  수십 미터에 달하는  망토처럼 그의 뒤에서

춤췄다.

자신을 죽이는 신의 화신은 나가들을 향해 달렸다.

병력 배치 따위는 더 이상 그로스의 고민 거리가 될 수 없었다. 그로스

의 다급한 지시에 따라  평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수호장군들이 각자의

신명을 닐렀다. 그리고 그들은 다가오는 시우쇠를 향해 수력을 집중시켰

다.

사흘 동안의 비로 충분히 적셔져 있던 평원에서 물이 형체 없는 유령처

럼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파도가 되었다.

광대한 평원 전체에서  물이 파도치듯 일어나는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우묵한 곳마다 괴어있던 물을 게걸스럽게  삼키며 거대해지던 파도는 마

침내 수십 미터의 높이로 치솟아올랐다. 그 거대한 파도는 한 지점을 향

해 거세게 돌진했고 그곳에는 시우쇠가 있었다. 시우쇠는 사방에서 몰려

오는 육상의 파도를 보며 으르릉거렸다.

부글거리는 물거품을 머리에 인  파도가 산더미 같은  기세로 시우쇠를

강타했다.

수증기가 폭발하며 용솟음쳤다.

화염의 화신과 육상의 파도가 격돌한 곳에서부터 불어나온 열풍이 헐벗

은 평원을 치달렸다. 지독히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고개를 돌려 외

면했던 그로스는 잠시 후에야  충돌 지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그

때까지도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수증기 뒤편에서 가공할 열이  번득였다. 그리고 수증기가 회오

리치며 솟구쳤다. 비늘을 곤두세운  채 열을 바라보던  그로스는 정신적

비명을 질렀다.

수백 미터의 거리가 있었지만, 그리고  시우쇠에겐 눈동자 따위도 없었

지만, 그로스는 시우쇠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음을 깨달았다. 시우쇠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몸에서 불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불길은 수증기

를 불살라먹고 주위의 흙탕물을 끓어오르게 했다.  영이 빠져나갈 것 같

은 공포 속에서 그로스가 굳어있는 동안 시우쇠는 천천히 무릎을 폈다.

똑바로 일어난 시우쇠는 이전보다 두 배나 큰 불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로스는 후퇴해야 한다는 절박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병력 배치는

방금 시작되고 있었고 따라서 당장은 빼돌릴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무

지막지한 혼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  때 비아스가 군단장의 정신

을 혼통 흔들어놓을 정도로 강력한 니름을 보내어왔다.

[후퇴해야 합니다!]

[뭐라고?]

[후퇴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았습니다. 이곳에 시우쇠가 있다면 싸움은

불필요합니다!]

조금 전 그런 결정에 기울어 있었지만, 그로스는 부관의 참견에 격분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멀었나! 이런 상태에서  후퇴를 명령하면 시우쇠는  혼란에 빠진

아군을 깡그리 불태울  것이다. 아킨스로우 협곡을  기억해라. 돌격해야

해!]

비아스는 욕설을 니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로스는 그런 비

아스의 속마음을 꿰뚫어본다는 듯 경멸에 찬 눈으로 부관을 노려본 다음

강력하게 닐렀다.

[돌격하라! 돌격! 접근하면 시우쇠는 불을 쓸 수 없다!]

나가들은 그로스의 니름을 이해했다. 그로스의 지적처럼 북부군과 밀착

하는 것만이 시우쇠가 무작정 불을 일으키는 것을 저지하는 유일한 방법

이었다. 나가들은 살기 위해 적군을 향해 돌격했다.

당황 때문에 그로스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갑작스러운 개전(開戰)

때문에 나가들은 소드락 복용 시점을 놓친 채 돌격하고 말았다.

북부군의 병사들 뒤편에서 맑고 거대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장수들

은 각자의 무기를 높이 들어올려 신호를  보내었다. 보병들은 전진을 시

작했다. 하지만 거센 돌격을  개시한 나가들과 달리  북부군의 보병들은

천천히 걸음을 뗐다. 각자  고르고 고른 첫 번째  작살검을 오른손에 쥔

병사들은 교위들의 명령에 따라 열을 맞추어 저벅저벅 걸었다.

땅의 감촉은 기묘했다. 사흘  동안 젖어있던 땅은 갑자기  물기를 뺏겨

기묘한 모습으로 메말라 있었고 병사들의  발 아래에서 퍼석거리며 부서

졌다. 기분 나쁜 땅이었다.  하지만 교위들은 주의  깊게 그들을 인도했

다.

보병들의 진군 속도는 조금씩 달랐다.  중앙부의 속도가 다른 부분들보

다 상대적으로 느렸다. 마침내 삼만 오천에  달하는 북부군 보병들은 양

익이 앞쪽으로 돌출한 쐐기 모양을 형성했다.

쐐기의 오목한 부분 앞쪽에서 시우쇠는 무시무시하게 불타며 달리고 있

었다. 시우쇠에게 닿으려면 아직 먼 시점에서  나가 보병들은 자신의 옷

이 불타는 것을 깨닫고 공포에 질려버렸다.  그런 나가들을 향해 시우쇠

는 담백하기 그지없는 돌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나가들의 뒤편에 있던  수호장군들은 이미 물을  끌어모은 후였

다. 불과 100 미터라는, 도저히 비나 눈이  형성될 수 없는 높이에서 물

이 응결되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본  시우쇠는 난폭하게 으르릉거리

며 몸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일으켰다. 그 순간 수십 명의 수호장군들이

일으킨 진눈깨비가 시우쇠를 향해 폭포처럼 쏟아졌다.

시우쇠와 수호장군들의 진눈깨비가 격돌하는 지점에서 굉음과 수증기가

뿜어졌다.

나가들은 그 충돌 지점에 뛰어들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돌진하던 나가 보병대의 선두는 가위가 천을 가르는 형상으로 좌

우로 갈라졌다. 그런 식으로 시우쇠를 우회한  나가들은 그 뒤편의 북부

군을 향해 돌격을 계속했다.

격분한 나가들의 모습이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북부군의 진군 속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땅이 사정없이 울렸다. 코끼리들의 포효가  허공을 갈랐다. 나가들에겐

없는 심장이 북부군 병사들의 가슴 속에서 요동쳤다. 확대된 동공, 그러

나 발걸음은 여전히 자제력 속에 단속된다. 다가오는, 다가오는, 다가오

는. 너무 가깝다. 지나치게 가깝다. 이대로  죽는가? 저 사이커가 내 목

을 노리며 날아오고 있는데 이런 바보  같은 병정놀이를 계속해야 하나?

보병들은 그들의 지휘관들이 갑자기 벙어리가  되지 않았나 격렬하게 의

심해 보았다. 그 순간 양익을 지휘하고 있던 세미쿼 장군과 무핀토 장군

이 거의 동시에 외쳤다.

"찢어발겨!"

작살검과 사이커가 살을 탐내며 뛰쳐나갔다.

북부군의 보병들은 모두 세 자루씩의  작살검을 휴대하고 있었다. 나가

들을 상대하기 위해 고안된 흉측한 병기인  작살검은 한 번 몸에 박히면

잘 빠지지 않으며, 지속적인 고통을 줌과  동시에 나가들의 움직임을 방

해한다. 미처 소드락을 복용할  틈이 없었던 나가들은  작살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가들에게 작살검은 이미 익

숙한 병기였다. 나가들은 몸을 헤집는  격통을 견뎌내었다. 그리고 작살

검을 몸에 꽂은 채 북부군을 향해 사이커를 휘둘렀다.

참혹한 비명이 피의 분출과 어우러져 전장을 물들였다.

살인이 집단살육으로, 그리고 다시 전투행위로 바뀌어갔다. 혐오스러운

도덕의 파괴가 무미건조한 역사적 사건으로  변모되는 속도는 가공할 정

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 순간을 적시는 유혈은 뜨거웠다. 습기를 강탈당

해 푸석푸석해진 땅은 욕심껏 피를 들이켰다.  쓰러지는 시체를 위해 유

혈의 널이 제공되었다. 언젠가 그 음부에서  꺼내어 건네준 강철의 대가

로, 대지는 냉정하게 시체를 수령하고 있었다. 차가운 정산.

바쁘고 소란스럽고,

구슬프다.

칼릭 미소레스는 판사이에서  온 청년이다. 물려받은  가산도 없는데다

중병을 앓는 어머니를 모시느라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고 어느

정도 포기한지도 오래였다. 효자라는 입에 발린  소리 대신 딸을 내주면

어떻겠냐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셀 수 없이 느꼈지만,  끝내 그런 험한

말을 꺼내지 못하고 대신  겸손하게 웃어버리며 39  년의 세월을 살아온

청년은, 눈 앞의 나가를 향해 작살검을 내찔렀다. 탁월한 솜씨였다.

곤두선 비늘 사이로 매끄럽게 파고드는 작살검이 짐보리 투나의 근육을

찢고 뼈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비스그라쥬에서 온  짐보리 투나는 2년

전까지만 해도 5살짜리 딸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 어린 것이 발코니에

서 추락하여 죽은 후 짐보리는 그 끔찍한 집을 떠나와 성전에 종군했다.

작살검이 몸을 파고드는 고통은 짧은 순간  그녀에게 알을 낳을 때의 느

낌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추락사한 딸과 달리  작살검은 그 어미의 몸을

찢는 고약한 딸이었다. 작살검이  흔들릴 때마다 잔혹한  고통이 육체를

불살랐다. 짐보리는 미쳐버렸다. 분노와 슬픔 속에서 짐보리는 사이커를

휘둘렀다.

다음 작살검을 미처 빼들지 못한 칼릭  미소레스의 턱에 강렬한 충격이

찾아들었다. 자신이 입은 손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칼릭은 어깨로 눈

앞의 나가를 밀쳐버렸다.  짐보리 투나는 휘청하다가  쓰러졌다. 칼릭은

가까스로 뽑아낸 두 번째 작살검으로 짐보리의 배를 내찔렀다. 짐보리는

땅에 꿰었다. 니름을 듣지 못하는 칼릭은  당연히 짐보리의 비명을 들을

수 없었다. 쓰러진 적수에게 욕설을  퍼부어주려던 칼릭은, 그제야 자신

의 아랫턱이 떨어져나갔음을 깨달았다. 턱을  만지려던 손길로 입천장을

만지게 된 칼릭은 피와 침이 뒤섞인 괴이한 비명을 내질렀다.

칼릭은 단검을 뽑아들며 짐보리의 가슴에  쓰러졌다. 마치 서로를 애무

하는 연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짐보리  투나의 입술에 날아든 것

은 단검이었다. 짐보리의 입에 단검을 쑤셔넣은  칼릭은 악착같이 그 아

래턱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짐보리는 정신적  비명을 내지르며 사이커로

칼릭의 옆구리를 난도질했다. 하지만 아래턱을  도려내는 단검의 움직임

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등 위로 코끼리의 거대한  앞발이 떨어졌다. 대지의 종

기가 터지듯 피와 체액이 비산했다.

코끼리에겐 이름이 없었다. 켄테롭 평야에서 16 년을 살아오는 동안 이

름이 없어서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그  거수가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은

코를 휘둘러 아카시아 가지를 휘감던 기억이었다. 아카시아 가지는 의외

로 단단했고 코끼리는 더 힘을 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끝.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물론 코끼리는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두 앞발로 적들을 짓밟고 코를 휘둘러

주위를 텅 비워버리는 그  순간에도 코끼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모두

알면서 그 상황과 자신  사이의 관련성은 느끼지  못했다. 객관성이라는

말은 그 코끼리를 위해 발명된 것 같았다.

카시다에서 온 주라타는  낙천적인 사내였다. 조부모는  있으되 부모는

없는 아이라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한번

도 변하지 않은 그 낙천성은 언제나 주라타의 최고 재산이었다. 눈물 짓

는 것을 손자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조부모를 보면서도 주라타는 슬

퍼하지 않았다. '젠장. 근친상간을 벌이고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죽은 남

매의 자식이라는 것이 어쨌다고?  썅이다!' 작살검을 거꾸로  쥐고 미친

듯이 날뛰는 코끼리를 향해 달려들 때도 주라타는 한없이 낙천적이었다.

"요 덩치 큰 바보야, 즈믄누리제 가시 하나 꽂아주마!"

코끼리의 등 위에 있던 수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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