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33화 (33/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9-2.                         관련자료:없음  [5426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5-20 01:20  조회:9571

눈물을 마시는 새.

9. 출발하는 수탐자들 - 2

밤하늘의 빛깔이 다르고 불어오는 바람의 향기가 다른 땅에 앉아서, 나

가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거대한 두  적수의 후예라 주장하는 남자의 말

을 들으며, 사모는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의아하게 여겼

다.

"그 거대한 규칙은, 적어도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것은 아닌  것 같군.

하지만 투자된 시간이 논리의  정교함 정도는 담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합성을 담보하지는 못하겠지."

"사모 페이. 이미 말했듯이 왕이 되면 차차 알게  될 거다. 더 이상 들

려줄 말은 없어."

"내가 끝까지 거절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테지?"

케이건은 아무런 어조나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너를 하텐그라쥬로 돌려보낼 방법을 찾겠지."

"뭐?"

"네가 가사 상태로 있을 때, 륜 페이는  여신을 부르는 일을 하는 대신

나에게 너를 하텐그라쥬로 돌려보낼 방법을  찾아내라고 요구했다. 물론

그 일은 결과적으로 수호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간 결과가 되고 말았지만

그건 륜의 책임은 아니다. 륜은 자신에게  요구된 일을 수행했으니 이제

내가 그의 요구를 수행할 차례지."

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방법으로 나를 하텐그라쥬에 돌려보낼 건데?"

"북부의 왕으로 만들어서 군대와 함께 돌려보내겠다."

사모는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다지 우스운 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모는  정신없이 웃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사모는 마루나래의  배에 얼굴을 묻은 채 대호의

털을 꽤 잡아당겼다. 사모가 아픈 배를  움켜쥔 채 케이건을 돌아보았을

때 케이건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모는 겨

우 입을 열어 말했다.

"배가 너무 아파."

"그렇게 웃는 나가는 처음 보는군."

"아아, 그래. 나도 이렇게 웃는 나가는 본 기억이 없어."

"너 때문에 오레놀이 꽤 놀란 것 같군."

사모는 마당 저편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오레놀  대덕이 서 있었다. 대

덕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있었다. 쾌활한  기분이었던 사모는 그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오레놀이 그들을 향해 걸

어왔다. 사모와 케이건은 대덕의 손에  들려있는 단지를 보았다. 하지만

오레놀은 자신이 뭘 들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웃음 소리가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고마워."

사모는 몸을 일으켰다. 케이건  또한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오레놀은

잠시 그를 덮쳤던 환상의 여운에 고개를  내저으며 그들의 뒤를 따라 걸

었다.

티나한과 케이건, 그리고 비형이 머물고 있는 방이 가장 컸기에 사람들

은 모두 그곳으로 모였다. 사모와 함께 마지막에 방에 들어온 륜은 케이

건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사모의 옆에 앉으며 닐렀다.

[왜 그렇게 웃으신 거죠?]

[케이건은 네 요구까지도 내가 왕이  되어야 하는 증거로 만들어버리더

군. 저 인간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정말이지 전세계가 내가 왕이 되길

바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네?]

[내가 하텐그라쥬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라고 케이건에게 요구했었니?]

[예. 그랬습니다만.]

[왕이 되어서 북부의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라더군.]

륜은 비늘을 부딪히며 케이건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사모는 그런 동

생을 보며 부드럽게 닐렀다.

[틀린 말은 아니지. 어떤 무력이 동원되지  않으면 타개하기 힘들 만큼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은 확실하니까.]

[틀린 말입니다. 왕이 되면 누님은 죽습니다!]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자. 오레놀이 기다리고 있으니.]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이  니름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

아차리고는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사모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미안해. 모두들."

오레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작하시겠습니까?"

사모는 다시 깨어난 이래로 오레놀에게 배웠던 사어를 되새기며 대답했

다.

"그래. 뱀을 풀어."

사람들이 벽쪽으로 물러난 다음 오레놀은  뱀단지를 쏟았다. 뱀들은 방

가운데로 쏟아져나와 주위를 경계했고  그 중 어떤  것들은 틈새를 찾아

빠르게 기어갔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사모는 재빨리 그것을 억

압했다. 뱀들은 별 저항없이 사모의 의지를  받아들여 방 가운데로 모였

다.

"예상보다 어렵지 않군."

"이 뱀들은 정신억압 당하는 것에 익숙할 테니까요."

"알았어. 그럼 시작하겠어."

사모는 머리 속으로 검토해두었던 사어를 천천히 뱀들에게 쏟아넣었다.

뱀들은 잠시 전율하다가 곧 의미를 담은 무늬를 그리기 시작했다.

뱀단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은 주퀘도였다. 주퀘도는 어리둥

절하여 말했다.

"이봐, 세리스마. 저게 움직이는데?"

주퀘도의 이야기를 들은 세리스마는 고개를 돌려  선반 위에 놓인 뱀단

지를 보았다.

"누가 사어를 보내는 모양이군. 갈로텍에게  전면으로 나오라고 전해주

겠나?"

주퀘도는 갈로텍과 자리를  바꿨다. 위로 올라온  갈로텍은 세리스마가

뱀단지를 들어올리는 것을 보았다. 갈로텍은 탁자를 옆으로 치웠고 세리

스마는 뱀들을 바닥에 풀어놓았다. 두  사람은 뱀들을 내려다보았다. 잠

시 후 그들은 깜짝 놀라 비늘을 곤두세웠다.

[하인샤 대사원이라고!]

오레놀은 뱀들의 움직임을 소리내어 읽었다.

"거짓니름 하지마라. 너는 누구냐?"

사모는 준비해두었던 말을 시도했다. 오레놀은  사어를 읽지 못하는 사

람들을 위해 충실하게 해석했다.

"저는 륜 페이입니다. 세리스마."

"륜 페이라고! 무슨 소리냐. 너에게는 정신억압 능력이 없다!"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기묘한 힘이 생겼습니다."

륜은 정말 그런 힘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언제든 그

심장을 파괴할 수 있는 사모가 대화를  담당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

다. 먼 남쪽에서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기묘한 일이군. 정신억압 능력이 생기다니."

"예. 도대체 당신들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짐작하는 바가 있느냐?"

"있습니다. 당신들은 저로 하여금 여신을 불러내게  한 다음 여신이 이

곳에 와 계신 동안 신체를 장악했습니다. 그런 방법을 통해 여신을 감금

했으며, 그래서 주인 잃은 그 힘은  주인의 신랑들에게 온 것입니다. 제

추측이 맞습니까?"

"부정하지 않겠다."

"왜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비형은 침을 꼴깍 삼키며 뱀들을  바라보았다. 뱀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그 배가 방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전세계를 나가에게 주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은?"

"말살한다."

사어를 읽는 오레놀의 목소리가 떨렸다.  비형은 신음을 흘렸고 티나한

은 깃털을 곤두세웠다. 륜은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케이건은 무

표정하게 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모는 비늘을 부딪히며 뱀들에게 의지를 쏟아넣었다.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을 왜 말살해야 합니까? 저

희들끼리 살게 내버려두더라도 우리에겐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 그 땅도 곧 우리 것이 될 것이다."

"여신의 힘을 이용해서 말이죠.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에겐 키보렌이

있고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충분합니다."

"충분하다고? 마치 네가 얻은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너 스스로 쟁취

한 것에 대해서만이 충분하다느니  그렇지 않다느니 하는  니름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가 지금  세계의 반이나마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조상들께서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다. 왜 우리 것이 될 수 있는 땅을 저 나무를 베는 추악한 불신자들에게

맡겨둬야 하느냐? 그 땅을 여행했으니 알 것이다. 그들이 나무를 경의로

써 대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자기들이 그 나무들을 키운 것도 아

닌 주제에 제멋대로 나무를 잘라 쓰더군요.  자기들이 태어나길 숲의 주

인으로 태어났기에 숲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믿는 것 같

았습니다."

사어를 읽던 오레놀은 사모를  바라보며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

다. 사모는 나가다운 솔직한 감상을 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약간

씩 불편한 표정을 지었고  륜은 비늘이 일어난  얼굴로 뱀들을 바라보았

다. 사모는 계속 뱀을 움직였다. 오레놀은 뜻밖의 사어에 놀랐다.

"마치 당신들처럼."

"뭐라고?"

"당신들은 태어나길 여신의 주인으로 태어났습니까?  여신을 상대로 무

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믿은 겁니까?  당신들이 한 짓이 여신을 경

의로 대한 것입니까?"

뱀들이 경련하며 멈췄다. 사모는 그 뱀들을 강제로 움직이게 했다.

"그렇잖으면, 당신들이 여신을 쟁취했기에 여신을  마음대로 다뤄도 된

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니름 조심해."

"당신에게는 불신자를 비난할 도덕적 근거가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나

무를 벤다고 비난하지만, 당신은 여신을 감금했습니다. 여신을 풀어주십

시오. 그리고 그녀에게 사과하십시오."

뱀들은 침묵했다. 사모는 머나먼 하텐그라쥬에서 수호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녀가 다시 뱀을  움직일까 생각했을 때 갑작스

럽게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하마."

오레놀은 해석하면서 깜짝 놀랐다. 사모는 재빨리 뱀을 움직였다.

"그렇게 한다고요?"

"그래. 너를 모든 불신자와 함께 죽인 후에  그렇게 하겠다. 너는 나를

여신의 감금자라 비난하겠지만, 그리고 여신은 나를 징벌하겠지만, 후대

의 나가들은 나를 칭송할 거다!"

대답하려던 사모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배를 깐 채 움직이던 뱀들이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다. '공격적'이라는 단어가 사모의 머리 속에 떠올

랐다. 사모는 뱀들을 다시 억압하려 했지만  저 남쪽에서의 억압이 월등

히 강했다. 뱀들은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사모를 향해 쇄도했다.

"안돼!"

비형의 비명과 함께 티나한이 앞으로  돌격했다. 티나한은 거대한 손을

힘껏 휘둘러 뱀을 쳐내었다. 그리고 케이건  또한 황급히 바라기로 뱀을

쳐내었다. 그들 모두 비형을 의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피를 뿌리지 않도

록 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때 사모가 앞으로 나섰다. 사모는 두 손으로

뱀을 덥썩 움켜쥐어 뱀단지 속에 쑤셔넣었다.  성난 뱀들이 그녀의 팔을

물었지만 사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지막 뱀까지 뱀단지 속에 쑤셔넣

은 사모는 그 뚜껑을 밀봉한 후에야 헐떡이며 물러났다. 륜이 황급히 다

가섰다.

"누님!"

"나는 괜찮아."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래. 저 자는 네가 심장을 가지고 있으니 뱀의 공격이 치명적일 거라

생각한 모양이군."

사모가 두 번이나 다짐했지만  륜은 그녀의 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모는 집게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륜의 이마를 밀어준  다음 오레놀을

바라보았다.

"저거 빨리 치우는 편이 좋겠군."

오레놀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뱀단지를 집어들었다.

사모는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너희들을 말살시키겠다는군."

비형은 한숨을 내쉬었고  티나한은 깃털을 부풀렸다.  케이건은 사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왕이 필요해."

"안돼요!"

륜이 비명을 지르다시피 외쳤다. 케이건과 사모는 고개를 돌려 륜을 바

라보았다. 륜은 사모를 가로막듯이 하며 외쳤다.

"누님은 당신들의 왕이 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왜 안된다는 거지?"

"당신은 누님을 왕으로 만든 다음 죽일 작정이잖아요!"

비형과 티나한은 찹찹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쳐다보았다. 케이건은 속마

음을 알기 힘든 표정으로 륜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죽이지 않아."

"죽게 내버려두겠지요! 같은 이야기에요. 당신이, 당신이 그랬어요. 왕

은 눈물을 마시는 새라고.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빨리 죽는다

고. 누님이 왕이 된다면, 그럼 가장 빨리  죽어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몰

라요. 하지만 그런 건 상관 없어!  당신들을 위해 누님을 죽이지는 않아

요!"

그 때 사모가 륜의 어깨를 짚었다.

[륜. 우리 두 사람의 힘만으로 세계의 절반,  그것도 신의 힘을 사용하

는 자들과 싸울 수는 없어.]

[누님!]

륜은 비늘을 곤두세운 채 사모를 돌아보았다. 사모는 동생의 눈을 들여

다보며 닐렀다.

[조금 전의 대화로 뚜렷해졌어. 이 일을 계획한 자들은 병자야. 그들을

설득할 수는 없어. 아니, 그렇게 하려 해도 먼저 그들과 대화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다가가야해.]

[그래서, 이 자들의 왕이 되시겠다는 겁니까?]

사모는 니름 대신 목소리로 말했다.

"한시적인 조건으로. 그러니까 대확장 전쟁을  저지하고 여신을 구출할

때까지의 조건이라면, 이 자들의 왕이 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비형과 티나한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오레놀은 지금도 그가 돌아오

기를 기다리고 있는 고승들에게  가져다 줄 대답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륜은 두 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륜. 이건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야.  다른 나가들을 위한 일이기

도 해. 다른 나가들은 여신의 힘을 자유로이 쓰는 수호자들을 대적할 수

없어."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벌써 핍박이 시작되고 있을지

도 몰라. 수호자들이 대확장 전쟁을 재개하려면  먼저 다른 나가들을 확

실히 통제하고 싶겠지.] "누가 그들을  구하지? 지금 키보렌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야.

륜은 격노하여 비늘을 부딪혔다.

"우리가 그 자들을 왜 신경써줘야 하지요? 우리 둘에게 서로를 죽일 것

을 강요한 자들이에요!"

"그걸 강요한 것은 그들이 아냐."  [비아스 마케로우야.] "그들이 우리

를 특별히 증오해서 그런 것이 아냐. 다만 전통을 지켰을 뿐이지."

"그들에게 그렇게 소중한 전통이라면 그들 스스로 지키라고 해요!"

사모는 얼굴을 조금 굳혔다.

"륜. 네 신부를 구하지 않겠다는 거야?"

"그건 제 힘으로 하겠어요! 누님이 저들을 위해 죽을 필요는 없어요!"

"나는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심장파괴는] "사실입니다!"

"알아. 믿어." [하지만 수호자들은 나가가  북부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북부를 얻는 것이 더 쉬워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럴 가

능성이 상당히 높아. 나를 죽여서 인간이나 레콘, 도깨비가 왕위에 오르

게 하기보다는] "일단 나와 협조하고 싶지 않을까?"

륜은 놀랐다.

"그건… 어, 그건…"

"생각해봐. 오히려" [내가 왕이 된다는 것은  그들이 나를 살려두고 싶

어지는 이유가 될 수도 있지.]

니름과 말을 빠르게 오가며 이루어지는 륜과  사모의 대화는 다른 사람

들을 혼란시켰다. 오레놀 또한 뱀단지를 손에 든 채 멍하게 그들을 바라

보았다. 그 때 그의 손 안에서 뱀단지가 요동쳤다.

와장창! 육성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사모와 륜도 단지가 박살나

는 소리를 들었다. 오레놀은 뒤로 물러나며 깨진 단지를 가리켰다.

"저, 저게 갑자기 움직였어요!"

파편 사이로 뱀들이 스르륵 기어나왔다.  케이건은 잇소리를 내며 바라

기를 거머쥐었고 티나한은 격분하여 외쳤다.

"제기랄, 태워버려! 비형!"

"안돼! 잠깐!"

사모의 외침에 비형은 움찔했다. 사모는 비형을 향해 손바닥을 내민 채

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뱀을 쳐다보았고, 조금 후 그

뱀들이 일정한 무늬를 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눈을 꿈틀했

다. "사어?" 오레놀이 놀라며 그 사어를 읽었다.

"거기 있는 것이 내 아들이냐?"

륜은 깜짝 놀라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 역시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집중했다. 뱀들이 다시 움직였고, 오레놀은  경악 속에서도 그것을 읽었

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지커엔 가주님이십니까?"

비형은 륜을 쳐다보며 물었다.

"지커엔 가주가 누굽니까?"

"페이 가문의 가주… 제 어머님이십니다.  하지만 가주님은 정신억압자

가 아니신데?"

륜이 그렇게 말했을 때 사모 또한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정신억압 능력

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모는 뱀들에게 의지를 불어넣었다.

"지커엔 가주님일 리는 없군요. 가주님은  정신억압을 할 수 없으세요.

당신은 누구죠?"

"너는 륜 페이냐?"

사모는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고

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뱀들은 한동안 움직임 없이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  잠시 후 뱀들이 다

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모와 오레놀은 깜짝 놀랐다. 더 참을 수 없었던

티나한이 자신의 부리를 두드리자 오레놀은 정신을 차려 그 사어를 해독

했다.

"아니.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하지만 느낌은 그럴 듯하군. 너는 누구

지?"

사모는 당황하여 뱀들을 움직였다.

"당신이야말로 누구입니까? 가주님은 정신억압을 할 줄 몰라요. 누구이

기에 저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겁니까?"

"나는 요스비다."

륜은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방바닥에 주저앉은 채, 륜은 죽은 사람이 보내어오는 사어를 멍하니 바

라보았다. 케이건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륜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륜의 귓가로 입을 가져가서는 낮고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스비는 죽었다고 했잖아!"

"죽었어요… 틀림없이 죽었어요. 제 눈 앞에서! 누님?"

사모 페이 또한 경악  때문에 한동안 뱀을 움직이지  못했다. 케이건은

무릎 꿇은 채 주먹으로 방바닥을 쾅  내려쳤다. 소리보다는 울림을 이용

하는 것이며, 사모는 그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사모는 뱀을 향해 의식

을 불어넣었다. 오레놀이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해석했다.

"요스비는 11년 전에 죽었어. 이게 죽은  자가 보내는 사어라고 주장하

지는 않을 텐데. 당신은 누구지?"

"네가 그렇게 믿는 거야 네 자유지만 나는 요스비다."

"증명해봐."

"그 전에 네 정체부터 밝혀줘. 너는 누구지?"

"아니. 그럴 수 없어. 너부터 밝혀. 너는  누구야? 아아, 그렇군. 너는

수호자야. 나를 당황하게 해서 뱀으로 공격할 틈을 만들려고?"

"그런 계획은 없어. 네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내가 요스비

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 요스비가 죽었다고 니르는  걸로 봐서 너는

나를 아는 것 같은데. 네가 누군지 말해주면  내가 자신을 증명할 수 있

지 않겠나?"

사모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자신이 암살을 포기했다는 사실

을 밝혀도 되는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 때 케이건이 긴박한 목소리

로 말했다.

"제일 잘 부르는 노래가 뭔지 물어봐."

사모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노래라니? 우리는 나가야. 케이건."

"물어봐."

사모는 어이없는 기분을  느끼며 뱀들에게 의지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뱀들이 대답했다. 오레놀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거기 케이건 드라카도 있나?"

비형은 "마법입니까!" 하고 외쳤고 티나한은 벼슬을 빳빳하게 곤두세워

천장을 찔렀다. 케이건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뱀들의 움직임을

노려보았다. 오레놀이 더듬거리며 그것을 해석했다.

"이런 질문을 할 사람은 케이건밖에 없지. 케이건. 자네도 알다시피 내

가 부를 줄 아는  노래라곤 한 가지밖에 없지.  사어로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렇게 시작하던가? 남겨진 수명을 헤는 일도 두렵

고 썩어들어가는 수족을 추스리는  짓도 포기한지 오래.  지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목 아래에 걸터앉아 빛나던 이들을 생각한다."

케이건은 떨리는 손을 신경질적으로 입가로 가져가서는 그것을 꽉 깨물

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주먹을 깨문 다음에야 케이건은 겨우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요스비가 맞아. 죽지 않은 건가?"

사모 페이는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었다. 그리고 뱀들을 움직였다.

"나는 사모 페이다."

"아아. 제 따님이군요.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군요. 당신은

정신억압자였지요."

"만일 네가 요스비라면, 너는 내게 검술을 가르쳤어.  내 칼 쓰는 버릇

을 닐러봐."

"없습니다."

사어를 해석하던 오레놀은 당황하여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모와

케이건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더욱 놀랐다.  사모는 뱀들을

움직였다.

"그래. 요스비는 절대로 버릇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지. 상대에게

간파당하게 되는 규칙성은 최악이라고 했어. 하지만 그걸로는 아직 증명

된 것이 아냐. 요스비가 없애려고 노력했던 내 버릇이 뭔지 닐러봐."

"사모 페이. 저는 하단 방어 후 항상  왼쪽으로 도는 당신의 버릇을 이

용해서 당신을 골탕먹인 적이 많습니다. 몇 번인가 자기 다리에 걸려 볼

썽사납게 넘어지게 만들어줬더니 결국  그 버릇을 없애더군요.  물론 그

다음에는 한동안 오른쪽으로 돌아서 저를 즐겁게 해줬지만."

사모는 비늘을 곤두세웠다. 그녀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상에… 진짜 요스비야!"

"누님! 어떻게 살아계신 건지 물어봐요!"

륜의 고함에 사모는 퍼뜩 정신을 차려 뱀들을 움직였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너는 11년 전에 분명히 죽었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제 신분을 증명하느라 제게 허용된 시간

을 너무 많이 소모했어요. 거기에 케이건이  있다면 이야기를 빨리 끝낼

수 있겠군요. 케이건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나가들이 벌이고 있는 일

을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대처할 작정이냐고."

케이건의 얼굴은 당황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빠르고 정확

했다.

"사모 페이를 북부의 왕으로  삼아 북부 전체를 대통합한  다음 나가의

침략에 맞선다. 그리고 여신을 구출한다. 그대로 전해."

륜은 깜짝 놀라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사모는  벌써 뱀을 움직였다. 뱀

들은 곧 대답의 사어를 만들어내었다.

"사모 페이를? 정말 케이건이 생각해낼  법한 재미있는 생각이군요. 페

이. 그것을 수락하십시오."

"아버지!"

륜의 완전히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륜 자신도 뱀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

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뱀들은 계속 움직였다.

"단, 케이건에게 용의 수호를 하겠다는 맹세를 받은 다음에."

"요스비!"

케이건의 고함에 비형과 티나한, 오레놀, 심지어 륜마저도 어처구니 없

는 얼굴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케이건은 얼굴을 조금도 붉히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감동시켰다. 뱀들은 계속  움직였고 그래서 오레놀은

허둥지둥 그것을 해석했다.

"그 맹세를 받은 다음 왕위를 받으십시오. 페이. 하지만 케이건에겐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아아,  이런. 시간이 더  없군요. 이걸 기억하라고

전하십시오! 셋만이 하나를 상대한다! 셋만이…"

뱀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사모는 황급히 뱀들을 움직였지만  뱀들은 그녀의 의지에만  반응할 뿐

대답이라 할 만한 사어를 이루지 않았다.  그래서 사모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고, 그들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얼굴  또한 저렇게 황당한 표정

일까 의심해보았다.

"요스비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고승들의 질문에 오레놀은 쥬타기 대선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대선사

는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기다렸다.  오레놀은 대선사에게 감히 비난하는

눈길을 보낸 다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케이건님의 친구입니다."

승려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오레놀을 바라보았다. 그  중 한 명이 그

런 황당한 말을 꺼내는 것조차 화가 난다는 듯이 말했다.

"나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나가입니다."

승려들은 한참 웅성거리다가 말했다.

"설명해주십시오."

"두 분이 어떻게 서로를 알게 된 건지는 저도 정확하게 모릅니다. 하지

만 대충 15년 전 그 두 분은 서로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케이

건님이 한계선 근처에서 예의 활동 중에  만나게 되신 것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그리고 짐작하기도 힘든 이유를 통해 두 분은 서로 친구가 되었

습니다. 12년 전 쯤, 요스비는 케이건님을 만나기 위해 북부로 올라오셨

습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요. 거의 죽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케이건

님을 만나는데 성공했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그 분은 강력한 정신억압자였습니다. 저는  그 분이 사람을, 그러니까

지능이 좀 부족한 사람을  정신억압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소음이 터져나왔다. 그래서 오레놀은 목소

리를 조금 높여야 했다.

"그 분은 유쾌한 성격이셨고, 철모르는 어린  행자를 놀리는 것을 좋아

하셨습니다. 그 분에게는 어린 행자로 하여금 하늘치를 정신억압해서 타

고 왔다는 둥의 황당무계한 모험담을 믿게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습

니다. 그 때문에 어린 행자는 고통스러운 밤을 겪어야 했지요. 정신억압

당할까봐 무서워서 밤에 해우소로 갈 수가 없더군요."

승려들의 공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미소들이 떠올랐다. 오레놀은 함

께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사람을 정신억압할 수 있다느니  하는 것은 닳고닳은 방랑자가

풋내기 행자를 멋지게 속여넘긴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든 그

분이 케이건님을 만나는 데  사용한 것이 자신의  정신억압 능력인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그렇게 두 분이 만나신  다음, 케이건님은 그 분을 안

내하며 북부를 주유하셨습니다. 그 와중에  대사원에도 잠시 방문하셨습

니다. 그래서 머리 깎은 자리가 아직 파랗던 제가 그 분을 뵐 수 있었지

요. 하지만 북부에서의 체류는  점점 더 그  분에게 무리가 되었습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만  그래도 힘들어하시더군요.

결국 그 분은 남부로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떠나기 전, 그 분은 이곳과

의 연락을 위해 가져오신 뱀단지를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케이건님은 사

어를 모르시므로 이곳에 맡겨두어 케이건님과의 연락 수단으로 삼으시려

하신 겁니다."

"그렇군요. 그 뱀단지가?"

"예. 어느날 그 뱀단지가 움직였을 때  저희들은 요스비가 다시 연락해

온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연락을 해 온 자는 자신을 세리스마라고 밝혔

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지요."

오레놀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물론 잠

시 후 자신의 승려답지 못한 행동에 부끄러워했지만.

다시 한 승려가 질문했다.

"케이건님은 왜 그 분을, 어, 평소의 방식대로  대하지 않고 그런 독특

한 관계를 맺으신 거죠?"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 분을 뵌 건 그 분이 이곳에 체류

하시던 며칠 동안뿐이었습니다. 저도 그 때  그것이 너무 궁금해서 케이

건님에게 졸라봤습니다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제 어린 시절

의 기억에도 그 분은  쾌활하고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분이었습니

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 분에

게 이곳은 쾌활함은 생각하기도 힘든 끔찍한 환경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없으셨지요."

"그 나가의 인품 때문이었을 거라는 말이군요?"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설마 케이건님을  매수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

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죽었다고요?"

오레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가장 이상한 부분입니다. 륜 페이는  자신의 눈 앞에서 사망하

는 요스비를 목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케이건님은  나가의 강력한 재생

력을 거론하며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지만 사모 페이는 요스

비의 사체를 소각했다고 말함으로써  그 가설을 부정했습니다.  그 당시

요스비는 불가사의한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그렇게

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케이건님이 소각하는 것을 직접 봤냐고 물으시

자 사모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요."

한 승려가 상당히 창의적인 질문을 꺼내었다.

"사어에도 필적과 같은 것이 있습니까?"

오레놀은 놀랐다. 비형 스라블이 바로 그런 질문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도 그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저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자신이 요스비라고 주장하던 그 자는 사어를 보며 '륜 페이는 아니지만,

느낌이 아는 사람 같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것은 정확한 통찰

이었습니다. 륜 페이가 아니라 사모 페이니까요. 그리고 그 남매는 모두

요스비의 자녀입니다. 어쩌면 정신억압에  능숙한 자는 깨달을  수 있는

특징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을 모릅니

다."

"그 말은, 그쪽에서는 이쪽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쪽에서는 그럴 수 없

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정체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사모 페이를 왕으로 추대한다

는 계획을 말씀하신 것은  케이건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성급한 일인 것

같군요. 참, 그러고보니 그건 어떻게 되었지요?  사모 페이는 왕위에 오

르는 것에 찬성했습니까?"

오레놀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건부로 찬성했습니다."

"어떤 조건이지요?"

오레놀의 대답을 기대했던 승려들은 갑자기 품 속을 뒤적거리는 오레놀

의 행동에 당황했다. 품 속에서 도깨비지를  꺼낸 오레놀은 그것을 살짝

들어보이며 말했다. "길어서 적어왔습니다." 그리고 오레놀은 그것을 읽

기 시작했다.

"우자는 자신과 화해하려 애쓰고 범자는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고 지자

는 세계를 양해하려 애쓴다.  지자일 리는 없으며,  이 땅에서는 범자라

하기도 힘든 나로서는 자신과 화해하는 것조차  벅차다. 하물며 세계 속

에서의 나의 위치와 내 주위의 존재들과의 관계를 파악하여 가장 올바른

결정을 내릴 자신은 없다.  내 우행의 목록에 새  항목을 추가하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당신들이  실망하고 좌절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나를 두렵게 한다. 부디 내 제안을 가장 준엄한 시각

으로 판단하고 가장 혹독한 비난으로  꾸짖어주되 칭찬과 동의에는 신중

해주길 바란다.

나는 왕이 필요하지 않기에  왕이 없는 세계에서 왔다.  왕을 원하지만

왕이 없는 당신들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왕을 필요

로 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왕에  대한 당신들의 그리움과

절실함은 느낄 수 있다. 만약 당신들이  당신들 모두의 의지로써 요구한

다면, 나는 조건부로 당신들의  왕이 되는 것에  동의하겠다. 내 조건은

이러하다.

첫째, 나는 나가의 적대자들이 아닌  수호자의 적대자들을 이끄는 왕이

되고 싶다. 한계선이 우리를 갈라놓은 후 지나간  그 긴 세월을 놓고 볼

때 당신들이 아직까지 나가들을 증오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

지 않다. 당신들도 용서할 줄 아는 사람들일 테니까. 만약 남쪽으로부터

의 공격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신을 모독한 사제들의 참렬한 범죄일 것이

다. 나는 당신들이 적을 명확히 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했을 때 나는 당

신들의 적에 맞서 내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다.

둘째, 나는 그 수치스럽고 사악한 감금이 종식되고 여신이 구출될 때까

지만 왕좌에 있겠다. 자결권을 가진 당신들에게는 당신들 안에서 당신들

의 지배자를 선출할 확고한 권한이 있다.  비록 시기가 수상하고 화급하

여 내가 당신들의 왕위를 잠시 맡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의 순간이 왔을 때 내가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당신들이 선출한  지도자에게 평화롭게  왕위를 이양하는

것, 그것뿐일 것이다. 당신들이 그 긴  세월 동안 기다려온 왕에게 왕위

를 줄 수 있는 것에서 나는 당신들의 왕위를 맡은 보람을 느낄 것이다.

셋째, 둘째 조건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당신들에게 키보렌을

넘겨주는 왕은 되지 않겠다. 나는 당신들의  정당한 소유물을 지키는 왕

이 되고 싶다. 나는 수호자들의 침략 행위를  - 그것이 발생한다면 - 규

탄할 것이며, 같은 이유에서 당신들이 나가의 것을 노린다면 그 역시 규

탄할 것이다. 물론 전쟁의 규칙과 상황이  요구한다면 나는 한계선 이남

으로의 진격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북부의 명예가  요구한다면 내

동족들에게 두 번 다시 북부에 대한  도발을 삼가도록 교훈을 주는 것에

도 찬성하겠다. 그러나 그곳을 당신들에게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곳은 나무와 나가들의 땅이다.

넷째, 이 모든 조건들과 함께 최후의 아라짓  전사 케이건 드라카가 용

의 수호를 하겠다고 맹세한 경우에 한하여 나는 왕위를 맡겠다."

낭독을 끝낸 오레놀은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준비해두었던 말을

꺼냈다.

"이런 조건 하에 그녀는 그녀의 동족을 상대로  우리와 함께 싸우는 것

에 동의했습니다. 대사원의 높은 스님들께서는 어제 이 조건들을 들으셨

고, 지금 그 조건들을 검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조건을

내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내세운  조건 또한 합리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습니다."

군웅들은 깊은 감명 속에서 침묵했다.  그러나 지코마 성주는 회의적인

얼굴이었다.

"사모 페이는 북부의 명예가 요구한다면  그녀의 동족에게 교훈을 주는

것에도 찬성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그 말의 의미를  알고나 있는

겁니까? 그 '교훈'을 주기 위해서 우리는  그녀의 동족들을 학살하고 키

보렌을 불태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랑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전쟁의 교훈이라는 것이 그런 비정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녀는? 제가 알기로 그녀의 세계에는 왕과  요리사뿐만 아니라 전쟁도 없

습니다. 그녀는 어쩌면 전쟁에 대한 말도 안 되는 환상을 가지고 있을지

도 모릅니다."

오레놀은 기다렸던 질문이기에 여유를 가지고 대답했다.

"그녀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요?"

"예. 그리고 알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녀가 전쟁을 그저

큰 싸움 정도로 알고 있었다면 그런 어휘를 사용하지도 않았겠지요."

"실로 놀라운 일이군요."

지코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실망인지 구분하기 힘든 한숨이었

다. 그리고 지코마는 실제로 그의 적을 상대로 그런 '교훈'을 다섯 번이

나 주었던 남자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변경백?"

괄하이드는 침중한 얼굴로 마루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후 변경

백은 입을 열었다.

"그녀에겐 유리해 보이는 쪽에 붙는 재주가 없다고 생각하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똑똑한 기회주의자라면 불사의 병사들과 신의 힘을 휘두르는 자들에게

붙지, 그 적에게 붙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오.  더군다나 그들이 자신의

동족이라면 더욱 더."

지배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변경백은 선고하듯 말했다.

"내 잠시 예언자의 흉내를 내어보겠소.  나가들의 침략이 시작되면, 그

들에게 부화뇌동하여 나가의 앞잡이 노릇하려  드는 북부인들이 적지 않

을 것이오. 하지만 이 여인은 어떠하오? 그녀가 나가에게 돌아간다 하더

라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녀의 동족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

행위의 부도덕함을 탓하며 우리들의 지배자가 되겠다고 했소. 그저 우리

와 함께 싸운다는 것만으로도 동족의 질타를  받을 것이 뻔한데, 우리의

왕이 된다면 그녀가 동족에게 받게 될 증오와 저주는 언급하기조차 끔찍

할 지경일 것이오. 그녀는 그것을 감수하겠다고 말한 거요."

말의 끄트머리에서 변경백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괜한 일장연설

을 했다고 후회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의 마무리는 퍽 이상한 것이 되었

다.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드오."

지배자들은 이 끝마무리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괄하이드는 헛기

침을 하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화끈해진 얼굴을  숨기려 애쓰는 것이 분

명했다. 지코마 성주 또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녀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수호자들에 대항하여 싸워줄 병사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도 원하는  것이니 꼭 스스로를 비참

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어쨌든 저 수호자들이 우리가 얼마 전에 겪

었던 것과 같은 재해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다면," 지배자들은 얼마

전 파름산을 강타한 폭우를 떠올리고는  전율했다. "우리는 편안히 잠들

기는 글렀습니다. 싸워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녀의 목적과 우리의 목

적은 양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에게 우리의 생명과 자유

를 주는 대신 그녀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뭐지요?"

판사이에서 온 베미온 마립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코마 성주. 무슨 말입니까? 왕은  사람들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은 무조건적으로  통치할 뿐입니다. 우리가 그녀

를 왕으로 추대한다면, 우리는 그녀가 공정하고 현명하게 우리를 지배해

줄 것을 희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게 왕이잖습니까?"

지코마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베미온 마립간.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

의 왕은 우리에게 뭔가를 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모 페이 이외

에 다른 사람도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지배자들의 눈이 번득였다. 오레놀은 겁먹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

다. 그 때 괄하이드 변경백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지코마 성주?"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 변경백.  사람들을 당황시키지 않을  자가 더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가가 우리의 왕이 된다는 사실

에 놀라고 화를 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모 페이가 나가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지금 북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왕입니다. 하지만

가장 불필요한 것은 의심받는 왕입니다. 사모는  후자가 될 가능성이 높

습니다."

"그렇군. 먼저 사과해야겠소.  나는 당신이  왕좌를 탐내는  줄로 알았

소."

지코마 성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오해가 당연하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곳에 왔을 때 제게는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오레놀은 다른 지배자들이 찔끔한 표정을 짓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

신을 인정해줄 왕을 찾길  원하는 괄하이드 변경백  같은 이를 제외한다

면, 남부럽지 않은 통찰력과 놀라운 쾌속으로  달려온 그 군웅들에게 야

심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지코마는 계속 말했다.

"하지만 스님들께서 들려준 이야기를 들은 지금, 저는 더 이상 그런 것

을 원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 변경백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이 시점에서

북부의 왕이 된다는 것은…  불사의 병사들과 신의  힘을 다루는 자들의

표적이 되는 일입니다. 괄하이드 변경백.  나가들의 흉계를 들은 이후로

저는 어쩌면 칼리도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가에게 제 목을 내어줘

야 하는 시간이 다가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사람들은 진저리를 쳤다. 괄하이드는 침울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아마도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이오. 우리를 따르는 자들과 우리의 적

사이에 우리 자신을 둘  수밖에 없는 시간이. 그  무서운 시간이 우리를

시험할 때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결정해두어야 할 것이오."

"그렇습니다. 이제 북부의 왕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졌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도깨비와 레콘 모두를  위해 목을 바칠 각오를

하는 일입니다."

지코마의 말에 오레놀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제야  륜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륜은 케이건에게 외쳤다. '당

신은 누님을 왕으로 만든 다음 죽일 작정이잖아!' 오레놀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미욱했을 수가. 왕이  없는 세계에서 온

륜조차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는데.'

지코마 성주는 계속 말했다.

"비겁하다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제외한 누구라도 왕

이 되어준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무서운 자리에 앉고 싶지 않

으며, 사모 페이가 그  자리에 앉는 것을 수락해준  것에 감사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녀가 나가만  아니라면 그랬을 거라는  말입니다. 나가인

사모 페이는… 사람들을 단합시키는 대신  그들을 혼란스럽게 할 가능성

이 높습니다."

괄하이드는 지코마를 향해 목례했다.

"다시 당신에게 사과하겠소. 성주."

"두 번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변경백."

괄하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두 번째 사과는 다른 이유 때문이오."

"네? 무슨 이유입니까?"

"당신은 사모 페이 이외에  다른 자가 왕이 되길  바라고 있소.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겠소. 사모 페이 이외에  다른 자가 왕이 된다면, 규리

하는 그 자를 적으로 간주할 거라고."

괄하이드 규리하는 말을 마친 다음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경악 어린 침묵

을 조용히 응시했다.

실로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군웅들은  창백한 얼굴로 괄하이드 규

리하를 바라보았고 지코마 성주는 입술을 떨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케이건 드라카가 그녀를 지명했으니까."

무핀토 추장이 노기 어린 표정으로 외쳤다.

"변경백! 그 자가 최후의 아라짓 전사라는 말을 정말로 믿으시는 거요?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그 부랑자에게 정말로  그런 내력이 있을

리가 없소이다! 나는 그 괴상한 검이  정말로 영웅왕의 검인지도 의심스

럽소!"

오레놀은 대사원의 보증이 무시되었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혔다. 분노한

대덕이 그 말에 반박하려 했을 때 괄하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런 내력 같은 것은 상관없소."

두 번째 충격이 군웅들과 오레놀을  강타했다. 지코마 성주마저도 입을

벌린 채 괄하이드를 쳐다볼 뿐이었다. 대덕이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했

다.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남자가 누구든간에 그는 800년  동안 우리가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반쯤은 의식적으로 방기해 왔던 아라짓의 복수를 해온 사람이오. 우리에

게 도와달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서."

지코마 성주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음을 깨달으며 입술을 깨물었

다.

왕의 땅을 지키며 살아온 그 노무사는 케이건에게 동질감을, 심지어 부

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계선에서 턱없이 멀리 떨어진 규리하를 지키고

있었던 변경백은, 자신이 지켜야 하는 그 땅을 노리는 자들이 너무 많았

기에 그 옛날 후사린 규리하가 그랬던 것처럼 그곳을 버리고 한계선으로

진격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괄하이드는 한계선을 넘나들며 나가들

을 대적해온 외로운 복수자에게 빚을 진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

다. 지코마는 고개를 가로젓고 싶었다.  규리하의 사람들은 그들의 지배

자가 800년 전의 복수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탓하지는 않을 것이

다. '아니, 잠깐. 정말 그럴까?' 지코마는  과텔 규리하 이래 규리하 사

람들이 강조해온 상무 정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이 숭

상하며 기르는 무용(武勇)은 돌아올 왕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괄하이드

는 그런 자들의 지배자다.

괄하이드는 불길 같은 눈으로 지배자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왕의 땅을 지켜왔고, 그것을 긍지로 여겼소. 그러나 케이건 드라

카는 외로운 검 한 자루로 왕의 복수를 해왔소. 나는 그가 찾아낸 왕 이

외에 다른 왕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소."

지코마는 유언이라도 남기는 것처럼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자가 지명한 것이 나가입니다. 너무 극단적인 요청입니다."

"극단적이라 하신다면 나는 도로왕의 말씀을 대답으로 삼겠소."

지코마는 입을 다물었다. 도로왕은 극연왕의  별명이다. 극연왕은 어떤

극도 서로 이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륜 페이는 어떤 악의적인 의지가 주의깊게  준비한 혼돈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22년 동안 집안에서만 살았고, 그리고 가까스

로 나가들의 세계를 좀 더 경험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키보렌에서

도망쳐나왔으며, 그렇다고 해서 북부를 사랑하게 된  것도 아닌 그가 의

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사모  페이와 케이건 드라카였다. 자신에게

항상 솔직한 것은 아니었지만, 륜 페이는  케이건 드라카를 의지하고 싶

어하는 자신을 부정할 배짱도 없었다. 케이건은 그의 길잡이였다.

사모 페이가 그의 곁에 왔을 때 륜은  처음으로 길잡이를 거역할 수 있

었다. 길잡이가 없어도 행동과 사고의 바탕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가 하

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케이건이 요구하는  것이 사모의 죽음이라는 받

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그 거역은 더욱  쉬웠다. 하지만 사모는 케

이건의 요구를 수용했고, 그래서 륜은 행동과  사고의 혼란을 겪고 있었

다. 그런 그에게 요스비의 사어는  결정적인 혼란을 부여했다. 요스비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륜의 생애 절반을  구성해온 감정들을 송두리째 무가

치한 것으로 바꿔버리는 일이었다. 륜은 자신이  왜 심장 적출을 겁내고

수호자들을 증오했어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잖아요?"

비형의 친절한 말에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티나한마저도 그 끄덕임이

비형의 말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비형에 대한 예의의 표시임을 알 수 있

었다. 비형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좋은 일일 거라고 믿어요. 티나한. 춘부장께서는 살아계신가요?"

마루 저편에 앉아있던 티나한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응? 몰라."

비형은 자신을 향해 혀를  찼다. 레콘에게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하다

니, 멍청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티나한 또한 다른 레콘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대장간에서 자신의 무기를 쥔 다음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

을 것이다. 하지만 비형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

다. 그의 아버지는 죽었지만 그런 건 도깨비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

으며, 실제로 비형은 지금껏 아버지가  살아있기를 원했던 적이 없었다.

비형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를 떠올렸다.

"아들아! 나쁜 소식이 있다. 나 죽었다!"

"어? 진짜네요? 그럼 씨름 출전자 명단에서 아버지 이름은 삭제할게요.

막 돌아가신 거예요?"

"그래, 젠장! 스라블에 쓸만한 씨름꾼이 하나 줄었다."

"아뇨, 제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 이름을 지우겠다고 했는데요?"

"야, 이 자식아!"

비형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절대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선  안될 거라고

생각했다. 비형은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살아계시니 다시 만날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 있겠군요. 즐거운 일입니다."

"…저, 륜. 하나도 즐거워 보이지 않는데요?"

륜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역시 보통의 나가인가  봅니다. 아무래도 제게 아

버지의 존재가 각별했던 것은 당신께서 제 눈 앞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

때문이었던가 봅니다. 게다가 당신께서 누님에게 왕이 되라고 권했던 것

을 생각하니 그 분이 밉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륜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저는 아직까지 그 분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요. 하지만,

살아계셨다면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저를  만나러 오지 않은 건지 모르겠

습니다! 그 분은 당신이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아야 했던 아들을 조

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잔인한 처사예요! 그것 때문에 제가 얼마

나 무서워해야 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어요? 11년 동안 공포 속에 살아야

했어요!"

"그 분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그러니까 숨어있어야 하는 사

정 같은 것 말입니다. 그 분은 어떤 처벌을 받아서 돌아가셨다고 했잖아

요?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것을 밝힐 수  없었을 수도 있지요. 어제도 그

분은 시간이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잖아요?" 비형은  요스비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

까요?"

"모르겠어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  말은 케이건에게 하신 말이

잖아요. 그러고보니 어제도 저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으셨군

요. 케이건과 누님하고만 추억을 나누었고, 케이건과 사모에게만 지시를

내렸어요."

"춘부장께서는 분명 처음에 '내 아들이냐'고 물으셨잖아요?"

"대화 상대가 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신 이후에도 저를 찾지는 않으셨지

요."

"시간이 없으셔서 그랬을 테지요. 그렇잖았다면 왜 그렇게 이상하게 끝

내셨겠어요? 정말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비형은 어떻게든 륜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 애썼다. 하지만 륜은

퉁명스러운 반응만 보였다.

"아버님 말씀대로라면 그건 케이건이 할 일이지요."

륜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비형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하긴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  전에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용의

수호를 맹세하라고 하셨지요.  케이건이 고함을 질렀는데,  왜 그랬을까

요?"

비형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륜이 아니었다.

"그것이 엄청난 요구이기 때문이오."

비형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고  륜은 비늘을 곤두세웠다. 케

이건은 어느새 방에서 나와 그들 곁에  서있었다. 자신을 외면하는 륜의

뒤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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