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32화 (32/62)

눈물을 마시는 새.

9. 출발하는 수탐자들 - 1

즈믄누리에 살던 한 도깨비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도깨비는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도깨비는  자신의 옆에 앉

아서 자신이 깰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이 깨어났

고, 그래서 도깨비는 자신에게 무슨 꿈을 꾸었냐고  질문했다. 그

러자 자신이 대답했다. 꿈 속에서 그는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의 모

습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옆에 앉아서 자신이  깰 때까지 기다렸

다.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이 깨어났고,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무슨

꿈을 꾸었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자신이 대답했다. 꿈  속에서 그

는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옆에 앉아

서 자신이 깰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이 깨어났고,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무슨 꿈을 꾸었냐고 질문했다…

그 도깨비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다른 자들에게  들려주었고, 사

흘 뒤 즈믄누리에는 철학자가 넘쳐나게 되었다.  즈믄누리의 성주

는 왜 도깨비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노상  이야기만 나누는 건

지 의아하게 여겨 조사를 실시했다. 상황을 알게  된 성주는 격분

하여 꿈을 꾼 도깨비를 불러들였다. 도깨비는 격분한 성주를 보곤

겁에 질렸다. 한 동안 도깨비를 쏘아보던 성주는 주위 사람들에게

외쳤다.

"저 자식에게 이부자리 가져다줘! 야,  이 자식아, 빨리 자!  그

끝이 궁금하단 말이다!" - 라수의 <꿈꾸는 도깨비>

하인샤 대사원에서 가장  호평받는 정신  활동은 고민이다.(참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참선은 정신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영육이 동시

에 참여하는 활동이다.)  물론 승려들의 최종목표는  지자(知者)가 아닌

각자(覺者)이며, 각자는 고민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자유로워진 사람이

다. 각자가 되기 위해 승려들이 애호하는 수단이 끝없는 지적 탐구와 무

한한 고민이라는 사실은, 승려들에게 도착적 즐거움을 주는 것 외에, 그

것에 대해 깊이 캐물었을 경우 승려들을 방어적으로 만드는 일탈이 분명

하지만, 어쨌든 승려들은 고민한다. 사실  산사보다 고민하기 좋은 장소

도 별로 없다.

많은 승려들이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모처에 모여 앉

은 고승들 또한 다른 승려들처럼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즐거움 속

에서 고민하는 다른 승려들과 달리 그  고승들은 두통과 흉통과 복통 등

심인성이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질병 속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에 지친 그들은 간혹 고개를  들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

지만, 상대방의 얼굴에서도 별 신통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다시 고

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들 중 하나가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정리하면 어떨까요. 그 분은 언제나처럼 우리의 주문을 수용한

겁니다. 우리는 왕을 원했고, 그래서  케이건님은 우리에게 왕을 주셨습

니다."

"비늘이 덮인 것을 주문한 기억은 없군요."

누군가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한숨들이 흘러나왔다. 다른 누군가가 분위

기를 호전시키고 싶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 그 나가에 대해  좀 알고 싶군요. 케이건님이  추천한 분 말입니

다."

"오레놀 대덕, 들려주시겠습니까?"

오레놀은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곳의  구성원들은 법계와는 무관한 요

건에 의해 선출된 자들이며,  실제로 그곳에는 오레놀보다  법계가 낮은

승려도 있었다. 하지만 종단의  최연소 대덕인 오레놀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격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오레놀이 그곳에 참석할 수 있

었던 것은 쥬타기 대선사를 보좌하며 계획의 실무를 담당했다는 이유 때

문이다. 따라서 오레놀은 다른 고승들의 묵인  하에 참석하고 있는 것이

며, 그 행운에 대해  즐거워하기보다는 끔찍한 실수나  저지르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륜 페이의 누나입니다. 침묵의 도시에서 도망쳤을  때 륜 페이는 일종

의 누명을 뒤집어썼습니다. 나가들은 륜이 저지른 것으로 오해한 범죄에

대해 쇼자인-테-쉬크톨이라는 처벌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범죄자의 친족

한 명에게 범죄자의 추적과  살해를 일임하는 처벌입니다.  사모 페이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이곳까지  륜 페이를 추적해왔습니다.  도중에 예의

흑사자 모피를 손에 넣었기에 한계선을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실로 필사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군요. 그것은 정의 실현에 대한 의지

였습니까? 그렇잖으면 가문에 대한 의무감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필사적인 추적에는 실은 뜻밖의 이유가 있었습니

다. 사모 페이는 륜 페이에게 살해되기를 원했습니다."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승려들 중 일부에서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무슨 말입니까?"

"쇼자인-테-쉬크톨은 암살자와 범죄자  중 한 명이  죽음으로써 끝나게

됩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가문의 구성원이니,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가문에 부과된 처벌이 완료되는 겁니다. 사모  페이는 그 점을 이용하여

륜 페이를 살려주려 한  것입니다. 륜 페이가 아닌  사모 페이가 죽어도

죄값은 지불되므로, 사모 페이가 살해되면 거꾸로 륜 페이는 자동적으로

살 권리를 얻게 되는 겁니다."

고승들은 가벼운 탄성을 지르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의 목숨도 보존하고 그들의 규칙도 보호하는, 실로 무서운 방법을

찾아낸 것이군요."

또다른 사람이 질문했다.

"인상적인 수호수(守護獸)를 데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마루나래라는 이름의 대호입니다. 사모 페이는 여행 도중 그 대호

와 우연히 조우했고 본인도 뚜렷이 말할  수 없는 이유에서 함께 행동하

고 있습니다. 케이건님은 그 대호가 왕의 수호수라고 판단하는 모양입니

다만. 그리고 또 스물두 명의 두억시니들도 데리고 있습니다. 그 두억시

니들은 우연히 살신 계획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것을 저지한다는 목적으

로 구출대를 추적해왔습니다. 사모 페이 또한  같은 자를 추적하고 있었

기에 그 둘은 서로 손을 잡았으며, 둘의 목적이 모두 무의미해진 지금까

지도 그 동맹은 유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억시니들은 자신들이 우

연히 관련되게 된 이 일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고 더 많은 역할을 하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 두억시니들에 대해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오레놀은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설명했다. 승려들은 그 이야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한참 후 한 승려가 입을 열었다.

"범상한 인물이 아님은 분명하군요."

"범상한 '나가'가 아니지요."

누군가가 거의 구슬프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덧붙이자 승려들은 다

시 몸 곳곳의 질환을 느끼며 신음했다. 긴 침묵 후 누군가가 말했다.

"침묵은 많은 경우 미덕이  될 수 있습니다만,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의

대용이 되는 경우에는 곤란한 악덕일 뿐입니다. 사태를 직시하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케이건 드라카님은 왕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사모 페이를

내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종단은 그 분의  추대를 진지하게 검토한 후

만민들 앞에서 그녀를 지지할지, 그렇잖으면  그녀를 거부할지를 결정해

야 합니다. 말하기 괴롭더라도, 의견을 말씀해주십시오."

"지금 숨 쉬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 분을  제외한다면 왕을 보거나

가져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왕은 이래야 한다, 혹은 저래야

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하지만 저는 거위가 닭들

의 우두머리가 되는 경우나 소가 말 무리를 이끄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

습니다."

"우리는 짐승이 아닙니다.  영웅왕은 레콘이었지만  인간이나 도깨비도

그를 섬겼습니다. 오히려 레콘들이 왕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지요. 그 시

절에도 레콘들은 그들이나 도전할 법한  기상천외한 일에 도전하거나 신

부를 찾기 바빴으니까요.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는 결점이  되지 못합니

다."

"나가가 우리와 같은 선민 종족임은 인정할 수 있지만, 이 세계에서 나

가가 점하고 있는 특수한  위치를 무시하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대확장 전쟁을 벌인 이후로 나가는 다른  세 종족을 적으로 규정한 것이

나 다름없습니다."

"대확장 전쟁은 나가들 자신도 실감을 느낄 수  없는 과거사로 여길 겁

니다. 도당을 이루고 전쟁을 벌이는 일이라면  오히려 우리 인간들의 전

문 분야 아니던가요?"

"나가 아닌 누군가가 한계선 이남으로 내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해당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왕위를  주어 떠받들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대화가 지지부진해진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뚜렷했고, 그래서 승려들은

거의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오레놀은 겨우 입을  열 용기를 짜낼 수 있

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스님들.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간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뭐죠?"

"사모 페이 자신에게 왕이 될 생각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승려들은 당황하여 오레놀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사모는 그냥 아무렇게나 말해버

렸다.

"잔치를 파탄 내는 가장 극적인 방법이었어."

케이건은 그 자신의 땀으로 흠뻑 젖은  마당 위에서 바라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젖은 웃옷도 벗어버려 땡볕은 그의  살갗을 직접 난타하고 있었

다. 케이건은 회복을 촉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사모가 보기엔 다

시 쓰러지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를 학대하듯 쌍신검을 휘두르며 케이건 역시 아무렇게 말을 시작

했다.

"당분간은 외부에 공표할 수 없다. 대관식 같은 것도 불가능하고. 섭정

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을  거야. 내 생각엔 괄하이드  규리하가 좋을 것

같군. 그리고 즈믄누리의  도움을 요청하도록. 즈믄누리의  바우 성주는

한 번 웃은 다음 -  아마도 자신의 판단력을 좀  자랑하고나서 - 너에게

협조할 거다. 도깨비들은  딱정벌레와 도깨비불을 가지고  있고, 재미를

볼 일이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  그들에게 피만 요구하지 않는

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도움을 줄 거야."

"케이건."

"규리하, 카시다, 칼리도, 엔거, 자보로,  슈라도스를 우선적으로 포섭

해. 이것은 중요성과 포섭 가능성, 그리고 다른 요소들도 모두 고려하여

도출한 목록이다. 규리하를  제외하면 모두 남쪽이지.  그리고 규리하는

북부를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대족장 코네도 빌파와 협상하도록.

발케네의 물산은 보잘 것 없지만 그  인재는 발케네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특산품이지. 천하에 둘도  없는 잡것들이고 절대로  옆방에서 재울

수는 없는 자들이지만, 그건 칼도 마찬가지야.  칼과 함께 자면 몸이 베

일 뿐이지. 하지만 싸움터에선 덕이나 용기보다 칼이 더 소중하지."

"케이건."

콱! 하는 소리와 함께 바라기가 땅에  꽂혔다. 케이건은 칼자루를 놓았

고 바라기는 옆으로 조금 기울다가 그대로  멈췄다. 그 비스듬한 모습이

사모를 잠깐 심란하게 했다. 사모 페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우습지만, 나는 나가야."

"그 사실이 불만인가?"

"나는 자신이 나가라는 사실에 불만이 없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렇지 않을 텐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가가  불신자들의 왕이 된다는 것

은 허튼소리야."

케이건은 의식을 잃은 동안 다듬지 않아  제멋대로 자라난 수염을 쓸어

내렸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묻어났고, 케이건은 옆으로 손을 뿌렸다.

날아간 땀방울이 땅에 부딪혔다.  사모는 그것이 화로에  던져진 물방울

같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속으로 조금 웃었다. 케이건은 마루나래를 바라

보며 말했다.

"마루나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사모 역시 마루나래를 잠시 돌아보았다. 그 대호는 마루에 벌렁 드러누

워 여름의 태양을 저주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모는 다시 속으로 웃었

다.

"네가 잘못봤어. 물론 나는 마루나래를  정신억압하고 있지 않아. 하지

만 나는 우리 둘의 관계를 설명할 말로 더 괜찮은 것을 가지고 있어. 우

정이라는 이름의."

"키탈저 사냥꾼들은 대호를 가리켜 산노인이라고  불렀지. 산노인은 비

정하고 교활하고 난폭하며, 우정을 몰라. 그런 그가 우정을 느낀다면 상

대의 격이 자신에게 어울려야 하겠지."

"나는 너를 잘 모르겠어.  케이건. 때론 차갑다 싶을  정도로 논리적인

데, 어떨 때는  터무니없이 미신적이고 신비주의적이군.  어떻게 그렇게

상반된 정신이 한 몸에  공존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하긴, 너는 아라짓

전사이며 동시에 키탈저 사냥꾼이라는 믿기 힘든  자기 소개를 할 수 있

다고 했지. 그리고, 네가 가진 또다른 정체는…"

"나가살육자를 말하려는 건가."

사모는 비늘을 조금 부딪혔다.

"륜은 그것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워 하고 있어."

"잡아먹힐 뻔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괜한  생각이라고 전해. 나는 그

때 길잡이였어."

"그런 게 아니잖아. 케이건. 륜은 너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

데 알고 보니 그 친구가 동족들을 잡아먹는 괴수였던 거야."

"동족?"

케이건은 메마른 어조로  반문했다. 사모는 눈살을  찌푸리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나에 대해서라면 어떻게 생각해도 좋지만, 나가를 동족으로 여기는 것

은 삼가는 편이 륜에게 좋을걸. 나가들은 누나를 보내어 그를 죽이려 했

고 속임수를 통해 그의 신부를 감금했다. 만약 륜이 한계선 이남으로 돌

아간다면 나가들은 그를 비에나가라 니르며 잡아먹을 테지. 그런 동족이

라면 타인보다 못한 것 같은데."

사모는 비늘을 부딪히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그녀의 비늘

이 누그러들었다.

"륜도 알아.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운 거야. 지금 륜은 나가와 단절되어

있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너를 용납하면 단절이 아니라 적이 되는 거

지. 너는 나가의 적이지?"

"그래."

"그런 네가 어떻게 나가인 나를 왕으로 추대한  거지? 내가 왜 왕이 되

어야 하는지 설명해봐."

"너는 왕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어."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자질이 뭐지? 흑사자 모피를 가지고 있다거나 대

호가 따른다는 따위의 말을 정말로 믿으라는 거야?"

"그건 그런 것을 좋아하는 자들을 위한 설명이지."

"역시 그렇군. 그럼 네 이유는 뭐지?"

"너는 죽을 뻔한 나가다."

"기묘한 대답이군."

"심장을 적출한 나가들은 쉽게  죽지 않아. 나를 만나지  않는 이상은.

나는 나가의 최종 선고다. 내 앞에서는 어떤 나가도 자신의 불사성을 자

랑할 수 없어. 나는  죽이고, 먹고, 소화시켜  없애버리지. 그러나 너는

달라. 내 앞에까지 도달했지만, 내가 아닌  네 의지로 죽음을 선택했지.

그것은 나가에겐 보기 드문 일이야. 그것은 네가 눈물을 마실 줄 안다는

증거가 되지. 나가로서는 유일한 존재이며… 어쩌면 세상에서 유일한 존

재일지도 모르지."

사모는 얼굴을 약간 기울인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바라기

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북부에는 곧 많은 눈물이 흐르게 될 거야. 그걸 마실 자가 필요해. 나

가가 그들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할 테니 또다른 나가가 그 눈물을 마셔

야 된다는 식으로 생각해줄 수 없겠나?"

"눈물을 마신다는 것은  도대체 뭘 말하는  거지? 동정심을  말하는 거

야?"

"아니. 동정심은 함께 눈물 흘리는 것을 말하지.  예를 들어 비형이 그

렇지. 그 착한 도깨비는 아마 앞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될 거다. 하지

만 함께 우는 자는 왕으로서 필요없어.  눈물만 더 많아질 뿐이니까. 왕

은 눈물을 마셔야 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케이건."

"차차 알게 될 거야."

"그 말은 아마 내가 왕이 되었을 경우 그렇다는 말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너는 왕이 되기 위해 이곳에 왔어."

"나는 죽기 위해 온 거야."

"같은 말이야."

"같다고?"

"죽기 위해 북부로 온 너는 북부의 왕이야. 의심할 필요도 없이."

사모는 두 손 들었다는 심정이 되었다. 케이건의 말을 납득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들려준 네 설명은 결국 너 자신만 만족시킬 뿐이야. 나를 조

금도 납득시키지 못해. 나는 거절하겠어."

"네게도 유리한 제안인데. 사모 페이."

"나는 불신자들을 지배하고픈 욕망이 없어."

"권력이나 지배욕의 충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너는 네 사회를 수호

자들에게 맡겨둘 건가? 신을 모독한 사제들에게?"

"…그건 나가가 해결할 문제야."

"꼭 그렇지는 않아. 그들이 침략을 시작한다면  북부는 어차피 그에 맞

서 싸워야 한다. 너와 북부는 같은 자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지. 이건 나

가만의 문제가 아니야."

사모는 당황하여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물끄러미 내

려다보다가 기울어있는 칼날의 아래쪽으로 무릎을 가져가며 손으로 칼자

루를 세게 내려쳤다. 바라기는 회전하며 튕겨져 올랐고 현란한 반사광이

사모의 눈을 아프게 했다. 케이건은 솟아오른  바라기를 그 정점에서 붙

잡아 머리 위에서 두  번 돌린 다음 뒤로  휘둘러내렸다. 바람이 공간을

베었다.

사모는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

"왜 네가 왕이 되면  안 되는 거지? 불신자들도  나가보다는 인간 쪽이

받아들이기 쉬울 텐데. 내 생각엔 그 쪽이 훨씬 상식적인 것 같아."

"나는 왕이 될 수 없어."

"왜? 너는 영웅왕의 검도 가지고 있고 아라짓 전사이기도 하다면서?"

"나는 눈물을 마실 줄 몰라."

사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대화에서 형이상학적  철학은 잠시 배제하면  안될까. 케이건.

내가 보기에 그런 것은 조금도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이건 지배와 피

지배라는 현실적인 이야기 아니었나?"

"나는 네가 나가라는 극복하기 힘든  심리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극

히 현실적인 이유에서 네가 왕이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굳

이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로 한정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너는 지배자

에게 꼭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 피지배자들을 억압할 강력한 힘 말이

다. 너에겐 여신의 힘을 자유로이 사용하며,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원조

자가 있지."

사모는 비늘을 곤두세웠다.

"케이건. 나는 내 동생을 수단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현실적인 관점을 요구한 것은 그쪽이야."

"나에게 네 동족을 억압하라고 권하는 것은  현실적인 거야? 너는 륜이

홍수를 일으켜 내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인간들을 쓸어버리는 것을

원하는 거야?"

케이건은 다시 머리 위로 바라기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과녁을 겨냥하며 말했다.

"너는 왕에 대해 모르겠군. 왕에게는 그럴 권한이 있지."

"권한이 있다고?"

"슬퍼 비명을 지르며 그렇게 할 권한이 있지."

"나가에게 우리의 생명과 자유를 좌우할 권한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

니까?"

지코마 성주의 질문을 뚜렷이 들었지만,  괄하이드 규리하는 침묵한 채

망치만 내려쳤다. 특별히 주문했던 쇠가 도착한 지금 변경백은 대사원의

대장간에서 손수 자신의 대도를  복구하고 있었다. 대장간의  일을 맡고

있는 행자들은 그런 제안에 별 제지를  가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나다가

한두 가지씩 조언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조언도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한참 망치질을 하던 변경백은 두드리던 쇳덩이를  노 속에 집어넣은 다

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럴 의도가 아니시라 믿소만, 편협한 말씀이시오. 지코마 성주."

"알고 있습니다. 저는 사모 페이에게 그럴 권리를 줄 수 있느냐고 물었

어야 하지요. 하지만 그녀는 이 땅에서 호의를 바라기 힘든 겉모습을 가

진 채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는 우리의 고매함을 보여주는 일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우리  대다수가 그렇게 고매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겠지요.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최소한 저는 그렇지 못

합니다."

괄하이드는 입가를 조금 올렸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소."

지코마 성주는 잡동사니가 담겨 있는 통을 비운 다음 그것을 뒤집었다.

그리고 그 위에 걸터앉아 변경백을 바라보았다.

"케이건 드라카라는 그 인물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가혹한 요구

를 한 것일까요."

"아, 케이건 드라카. 그는 그런 요구를 할 만한 자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변경백은 붉게 타오르는 노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과 벗은 상체가 붉게

물들었다.

"그는 아라짓 전사의 후예이며 마지막 키탈저 사냥꾼이라고 말했소. 어

떤 사람이 그런 내력을  가질 수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소만, 대사원의

주지까지 그 주장의 사실성을 보장하니  일단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보도

록 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숙명을 걸머진  사람이오. 죽을 때까지 나가

와 싸워야 되는 거지. 하지만 상대는 세계의 반을 지배하고 있는 불사의

괴물들이오. 그런 자들과 싸우는 것이  그의 숙명이었소. 나라면 숙명을

무시해버렸을 거요."

지코마 성주는 부정했다.

"하지만 변경백. 당신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도 왕이 돌아올 때

까지 규리하를 지키는 숙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나에게는 과텔과 케나린이 남겨준 변경백령과  강력한 군대가 있었소.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아라짓 전사도, 키탈저 사냥꾼도 존재하지 않

는 이 현재에서 그는  고립무원일 수밖에 없었소.  하지만 그는, 자신이

혼자라는 것도, 상대가 키보렌의  죽지 않는 지배자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받아들였소. 그의 무력함과 그의 적수의 강력함을

비교해보시오. 어떤 사내가 그런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괄하이드 규리하는 달아오른 쇳덩이를 꺼내어  다시 모루 위에 놓았다.

망치를 내려치기 직전, 변경백은 잠깐 지나가듯 말했다.

"그런 사내이니 나가를 왕으로 섬기라는 무리한 요구도 할 수 있겠지."

가열히 내려쳐지는 망치와 비산하는 불똥을 보며 지코마 성주는 불안한

듯 말했다.

"묘한 의심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군요. 케이건 드라카라는 그 인물의

정신 상태에 어떤 결함이 있는 것  아닐까요? 나가를 잡아먹고 살았다지

않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정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해왔다고

는 말하기 어려울 텐데요."

거센 망치질을 끝낸 변경백은 그것을 들어 노 속에 쑤셔넣었다. 열기와

불티가 흩날렸다.

"글쎄. 그걸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소."

"네?"

"모르겠소? 승려들이 이미 다 말해주지 않았소. 우리는 더 이상 대확장

전쟁을 학자들의 관심거리로나  유용한 과거사로  남겨둘 수  없단 말이

오."

지코마 성주는 소름끼치는 깨달음에 몸을 떨었다. 노 변경백은 노를 노

려보았다.

"편안한 나날은 다 갔소. 피와 눈물의 시대가 올 거요. 나는 지금 그것

을 대비하고 있소." 지코마 성주는 흠칫하며 노를 바라보았다. 쇳덩이가

불을 마시며 작열하고 있었다. "내 자존심과  내 생명과 내 열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탁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오."

지코마 성주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성주는 수치를

느꼈다. 그는 무의식 중에  다가올 공포를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앞에 있는 노인은 어제까지의 나날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라는 보

편적인 - 그리고 즐거운 - 망상을 거부했다. 그 노인은, 그 노령에도 불

구하고 다가올 시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괄하이드는 달궈진 쇳덩이를 꺼내어 모루 위에 놓았다. 그리고 문득 생

각난 것처럼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성주. 내 작은 소망 하

나를 들려주고 싶소."

"무엇입니까?"

"내가 만들고 있는 이 대도가 왕을 위해  휘둘러질 대도가 되었으면 좋

겠소."

지코마 성주는 실로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입밖에 꺼내

어 말하는 대신 그는 작열하는 쇳덩이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대사원의 법당은 고요했다.  티나한은 본능적으로 이  장소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이 고요하고 경건한 장소를 견뎌

하지 못했다. 서른여섯 번째로 법당을 둘러본  티나한은 좌절 섞인 눈으

로 비형을 바라보았다. 그의 왼쪽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비형은 여

전히 정좌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티나한은 불편한 신음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했다.

그들의 앞쪽에는 륜이 삼각형의 세  번째 꼭지점을 이루며 앉아있었다.

앞쪽에 놓인 제단을 바라보고 있는 륜의  등은 꼿꼿했다. 그리고 아스화

리탈은 륜의 다리 옆에 엎드린 채 그 머리를 륜의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

다. 향로에서 흩어지는 향기가 고요한 법당을 휘감았다.

그들이 그곳에 모여앉은지 한 시간만에 륜의 입이 열렸다.

"이제 알겠군요."

비형과 티나한은 의아한 표정으로 륜의  등을 쳐다보았다. 륜은 스스로

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케이건은 누님을 죽일 작정이에요."

"네? 무슨 말입니까, 륜?"

"왕은 눈물을 마시는 새라지요. 눈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아름다운 노

래를 부르고, 가장 빨리 죽는다고도 했지요. 케이건은 북부를 위해서 누

님을 죽이기로 결심한 거에요. 아마 저를 위해 죽으려 했던 누님의 모습

에서 착상한 것이겠지요."

티나한과 비형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상대방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티나한이 먼저 정신을 수습하여 말했다.

"륜. 케이건은 바우 성주의 조언에 따라 왕의 상징인 흑사자 모피를 가

지고 있는 네 누나를…"

"티나한. 그건 바보를 위한 각주에 불과해요. 진짜 의미는 행간에 있어

요. 케이건은 누님이 제게 해주었던 일을 북부의 불신자들에게도 해주기

를 바라는 거에요. 불신자들을 위해 죽으라는 거지요."

티나한은 부리를 닫았다. 그리고 수염볏을  비틀며 륜의 이야기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비형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륜. 당신 예언도 할 수 있게 된 겁니까?"

"뭐라고요?"

"당신은, 어, 그러니까, 여신의 힘을 이용해서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겁니까?"

티나한은 질겁하여 깃털을  부풀렸다. 그는 비형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의혹에 빠진 눈으로 륜의 등을 바라보았다. 륜은 그들에게 등을 보인 채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건 추정인가요?"

"예."

비형은 안도했다.

"그렇다면 륜. 당신의 추정은 틀렸습니다.  다가올 위험한 시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우리들에게는 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만일 왕이 죽는다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보다 더 큰 혼란을 겪게 되겠지요. 그러니 당신 누님

이 왕이 될 경우, 당신과 당신 누님은 가장 강력한 보호를 받게 될 겁니

다. 그게 당연하잖습니까?"

티나한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륜은 어떤 보호도 소용이

없는 심장 파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비형과 티나한이 걱정 외에는 -

물론 고마운 일이지만 -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비형은 계속 말했다.

"무엇보다도 사모 페이가 아직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어요. 지금 케이건

을 만나러 가셨으니 곧 결정이 나겠지요.  아무리 케이건이 추대했다 하

더라도 당신 누님이 거절하면 소용없는 일이잖습니까?"

"왜 그가 나가살육자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비형은 찔끔한 얼굴로 티나한을 돌아보았고,  그리고 배신감을 느꼈다.

티나한은 자신이 건축가이기나 하다는 듯이 법당의 천장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륜. 그게 말하기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

겠지요? 어쨌든 우리는  당신의 구출대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들을 믿지

못하게… 아니, 혐오한다고 하죠. 그렇게  되면 구출이고 뭐고 불가능했

을 겁니다. 아니, 아니. 이건 다  핑계입니다. 저는 케이건 자신이 말해

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륜. 제가 말해주는 편이 더 좋았겠습니까?"

륜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떠나겠습니다."

"예?"

륜은 몸을 돌렸다. 비형과  티나한은 긴장하여 그  나가를 바라보았다.

륜은 그들 중간쯤의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님이 돌아오면 저희들은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경악한 비형은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사모는 북부의 왕으로 추대되었는데요?"

"그 왕좌에 앉는 순간 누님은 죽습니다. 저는 그걸 절대로 용납하지 않

겠습니다."

"륜, 정말로 케이건이 사모를 죽일 거라고…"

"케이건이 손수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하

며 제 누님을 왕좌에 앉히는 겁니다. 왜 누님이 죽으면 북부의 사람들이

살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케이건만이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이유가

있겠지요. 저는 그 이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누님을 죽게 내버

려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떠나겠습니다."

"어디로, 어디로 떠난다는 말입니까?"

"하텐그라쥬로 돌아가서 여신을 구출할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일입

니다."

"하지만 당신들 두 사람의 힘으로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더군다나 하

텐그라쥬로 돌아가면 쇼자인-테-쉬크톨 때문에 당신과  사모 중 한 사람

은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륜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전 세계가 우리 남매에겐 죽음의 땅이군요."

그 날 저녁, 사모와 륜은 무학당의 그들 방에 모여 앉았다.

마루나래는 마당에서 두억시니들과 함께 선선한  밤바람 속에 잠들기를

원했고 아스화리탈 또한 지붕 위에 앉아있기를 원했기에 그 둘은 오붓하

게 앉아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주고받는 니름은 그다지 오붓한 것이 되

지 못했다.

사모는 륜이 들려주는 니름을 들으며 무심히  쉬크톨의 칼몸 위로 손가

락을 움직였다. 인간 검법가라면 질색을 하며 싫어할 동작이었지만 사모

는 쉬크톨의 견고함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륜은 차가운 금

속 위에 불꽃 같은 열이 드러났다가 곧  식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모는 칼몸을 누르는 손가락의 압력과 각도,  그리고 움직이는 속도 등

을 자유로이 변화시키면서 온갖  온도로 칼몸을 번득이게  했다. 게다가

사모는 그것이 식는 속도까지 면밀히 계산했다.  어느 한 부분이 오랫동

안 식어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어김없이  그곳에는 손가락 끝을 비스듬히

세워 누름으로써 만들어진 강렬한 획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가에겐 그림이 없었지만, 사모가 그리는  것은 '춤추는 그림'이었다.

물론 어떤 자연물도 닮아있지 않았고 굳이 따지자면 수학적인 문양의 반

복이었다. 수식을 시간과 면적,  그리고 온도로 표현한  것 같은 춤추는

문양들. 륜은 사모가 고명한 무용가였음을 떠올렸다. 무용가는 무의식적

으로 율동한다. 그것은 나가이며 무용가인 자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었다. 그린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래서 사모는 륜이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무심히 멈춰버렸다. 륜은 상

실감을 느끼며 사모의 니름을 기다렸다.

[케이건이 나를 왕으로 만든 다음 죽게 내버려둘 거라는 니름이구나?]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이 말하는 식으로 니른다면, 누님이 북부의  눈물을 다 마신 다

음 그 독기에 죽어버리도록 내버려둘 작정인 겁니다.]

사모는 또다시 듣게 된 눈물을 마신다는 이야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러나 그녀는 동생의 니름과 케이건의 말에 공통적으로 함의되어 있는 묘

한 의미를 지나치지는 않았다.  케이건은 '죽기 위해  북부로 온 당신은

북부의 왕'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바꿔  말하자면 북부의 왕은 북부에

서 죽어야 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된다.

탐탁치 않았지만 사모는 그 논리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케이건의 논리대로라면 나는 왕이 된 다음 죽어야 되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그는 나가살육자에요. 가장 화려한 방법으로 누님을 죽일

계획에 착수한 거죠.]

[단지 나를 죽이기 위한 목적만으로 내게 무릎 꿇고 경배했다는 거야?]

[동시에 북부를 살린다는 목적도 있었겠지요. 케이건은 저를 위해 죽으

려 했던 누님의 모습을 보고 그 생각을 떠올린 것이 분명합니다. 누님이

북부의 왕이 된 다음  그들의 눈물을 다 마시고  죽으면, 그들은 살아날

수 있을 겁니다.]

사모는 눈살을 조금 찡그렸다.

[지나치게 추상적이잖아. 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정도까지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누

님이 죽으면 북부가 살아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모는 쉬크톨을 칼집에 꽂아넣으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그 칼날을 내

려다보며 닐렀다.

[이곳에 오면서… 그러니까 길을 만드는 인간들이 있던 곳이었어.]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 니름이십니까?]

[응? 아, 그래. 그곳에 도달하기 직전, 그  산맥에 비가 참 많이 왔지.

그 때 나는 내 뒤를 쫓던 두억시니들이 불어난 계곡물 때문에 계곡을 넘

지 못하는 것을 보았어. 나는 그들을  관찰했고, 결국 그들이 퍽이나 야

심찬 건축학적 위업에 도전하는 광경을 목격했지. 그들은 손으로 계곡물

을 퍼내기 시작했어.]

사모가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륜은 그것을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실소하고 말았다. 하지만 사모는 웃지 않았다.

[나는 우습지 않았어.]

[아, 그러셨나요.]

[그래. 그래서 나무를 잘랐지.]

륜의 몸에서 비늘이 섰다. [네?]

[내가 있는 쪽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 그것을  베어서 계곡에 걸쳐

다리를 만들어주었지. 나뭇꾼 일은 처음  해 보는 것이었지만, 쉬크톨과

마루나래가 있어서 그럭저럭 할 수 있었어.]

[두억시니를 위해 나무를 죽이셨단 말입니까?]

[응.]

륜은 불안한 눈빛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냥 그 이야기가 떠오르는군.]

[누님.]

사모의 손에 쉬크톨이 한 바퀴 회전했다. 그것이 칼집 안으로 사라졌을

때 사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륜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사모는

벽에 걸어둔 흑사자 모피를 내리며 닐렀다.

[먼저 자거라.]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사모는 대답하지 않았다.  륜은 그녀를 따라가겠다는  듯이 일어났지만

사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륜은  도로 바닥에

앉았다. 사모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마루 가운데 선 사모는 잠시 그곳에서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축대 아래

쪽에 멀리 열덩어리가 누워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더 먼 곳,

엉겨있는 거대한 열덩어리들도 있었다. 사모는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하루 종일 쾌청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당은 젖어있었다. 젖은 흙

을 밟으며 걸어간 사모는 곧 마당  한가운데 도달했다. 그곳엔 케이건이

상의를 벗은 채 땅에  똑바로 누워있었다. 사지를 모두  펴고 허리 옆의

땅에 바라기를 꽂아두어 얼핏  보면 배에 칼을  맞고 쓰러져있는 시체로

착각하고 기겁할 모습이었지만, 체온을 볼 수  있는 사모는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안 추워?"

"시원해."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케이건은 계속해서  먹고 쉬지 않고 칼을 휘둘

렀다. 땀에 젖어 행동이 불편해질 때마다 샘터에서 물을 뒤집어쓰고, 그

리고 또 칼을 휘둘렀다. 긴 여름의 낮을 고려해본 사모는 케이건이 적어

도 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고 판단했다. 그 때문에 마당

은 물과 땀 때문에 젖어있었고, 무학당으로  돌아온 티나한은 화를 내며

마당을 건너 뛰어야 했다.

마당 저편에 누워있던 마루나래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마루나래는 몇

걸음만에 사모에게 도달했다. 사모는  그 갈기를 잡아  힘껏 흔들어주었

다. 두억시니들도 일부 일어났다. 사모는  그들을 향해 앉아있으라는 손

짓을 하고는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여전히 누운  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허리를 붙잡아 억지로 앉힌  다음 그 등에 올라앉았

다. 케이건과의 거리가 그냥 서서 내려다보는 것보다 더 멀어졌고, 그래

서 사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땅에 내려섰다.  사모는 마루나래를

밀어서 옆으로 눕히려 했다. 마루나래는  그것을 장난이라고 생각하고는

자꾸 일어서려 했다. 사모는 한참 후에야 마루나래를 눕힌 다음 그 허리

에 앉아 케이건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케이건은 별을 바라보며 안쓰럽

다는 듯이 조용히 말했다.

"참 말 안 듣는 방석이군."

사모는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크기에 비해 휴대는 간편해."

"젖은 바닥에 앉기 싫은 거라면, 저쪽에 내 돗자리 있어."

사모는 속으로 악담을 잠깐  중얼거린 다음 마루나래의  등에서 내려왔

다. 잠시 후 사모는 허리에 돗자리를 끼고 돌아와서는 케이건 옆에 그것

을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케이건을 내려다보았다.

"회담 준비하기 힘들군. 일어나 앉아."

"힘들어."

"사람들이 그러지 말라고 하는 말도 듣지 않고  하루 종일 칼 휘둘렀으

니 그건 네 책임이야. 일어나서 예의를 갖춰."

"싫어."

"마루나래. 깔고 앉아버려."

케이건의 상체가 스르륵  일어났다. 케이건은 흙먼지와  땀으로 뒤엉킨

머리카락을 붙잡아 뒤통수로  쓸어넘기고는 사모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사모는 돗자리 뒤편에 드러누운 마루나래에게 등을 기댄 채 그런 케이건

을 마주보며 웃었다. 케이건은 말했다.

"그쪽이 편해보이는군."

"원하면 너도 이리와서 기대어 앉아."

케이건은 마루나래의 문짝 만한 머리를 흘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사양하겠어." 상체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낸 케이건은 사모를 똑

바로 바라보았다. "회담 주제는 뭐지?"

"케이건 드라카는 사모 페이를 죽일 작정인가."

"그건 이미 말했던 건데."

사모는 케이건의 머리 한쪽에 붙어있는 커다란 흙덩이를 보며 말했다.

"나는 '죽기 위해 북부로 온 자는 북부의 왕이다'라는 말이 '북부의 왕

은 북부에 와서 죽어야 한다'는 말로 도치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그건 네 책임이지."

사모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케이건의 머리에  붙은 흙덩어리를

떼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혹 인간에게도 니름을 전할 수 있을까? [케

이건. 왼쪽 머리를 털어봐.] 케이건의 왼손이  머리 옆으로 올라갔을 때

사모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케이건은 왼손을 주먹  쥐어 턱을 받쳤다.

한숨을 쉰 다음, 사모는 손으로 케이건의 왼쪽 머리를 가리켰다. 흙덩이

를 털어내는 케이건을 보며 사모는 말했다.

"내가 왕이 된 다음에 죽으면, 그게 북부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거

지? 처음부터 없었던 것보다 더 나쁠 것 같은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이미 했는데."

"어느 거지?"

"차차."

"아아, 차차 알게 될 거라는 대답 말이군. 그렇다면 이걸 물어보지. 네

가 나를 죽일 건가?"

"나는 아라짓 전사다. 왕을 죽일 수는 없어."

"그러면 내가 어떻게 죽게 되는 거지?"

"아마 심장 파괴겠지."

"그게 뭔데?"

케이건은 사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심장  파괴에 대해 설명했다. 사

모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다가  곧 비늘을 부딪혔다.  케이건이 설명을

끝냈을 때 사모는 충격으로 굳은 얼굴을 한 채 인간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야?"

"륜에게 물어봐."

사모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케이건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절대적

확신의 대상이 거짓으로 판명되는 것에서 오는  충격은 끔찍하다. 그 절

대적 확신의 대상이 자신의  불멸성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모는

한참 동안 낯선 것을 보는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대충 어떤 전개가 되는 건지 알겠군. 내가 왕위에 오

르고, 북부인들을 지휘하여 내 동족들과 싸우고, 그리고 내 동족들은 배

신자인 내 존재를 깨달은 다음, 심장탑에 보관된 내 심장을 파괴하는 것

이군. 그리고 나는 죽는 것이군."

"그렇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지."

"어떻게 죽으라는 이야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거지? 지나치게 뻔

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조금도. 나는 상황 속에 내포된  조건들을 조합해보았을 뿐이야. 너는

흑사자 모피를 걸친 채 북부로 왔어. 대호는 너를 따르지. 그리고 네 심

장은 하텐그라쥬에 보관되어 있고. 결론은 명확해. 너는 북부의 왕이 되

기 위해 왔고 북부의 왕으로서 죽어야 하지. 그리고 남은 우리는 아마도

네게 추모를 보낸 다음, 북부를 지키고 여신을 구출할 수 있을 거야. 어

쩌면 륜 페이를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사모는 어이없는 얼굴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내가 왕으로서 죽는 것만으로 그 모든 일이 가능해질 거라는 거야?"

케이건은 팔의 소금기를 털어내며 대답했다.

"너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한 번 시도해본 일이잖

아. 너는 스스로 죽음으로써 륜 페이가 살 수 있게 하려 했지."

"그건 쇼자인-테-쉬크톨이라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야."

"모든 사소한 규칙들은 그 속에 더 거대한 규칙의 일부를 담고 있지."

"그 거대한 규칙이 뭔지 삼가 묻고 싶은데."

케이건은 입을 다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든 듯한 모습이었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털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렸다.

케이건은 갑작스럽게 질문했다.

"단풍에 대해서 아나?"

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는 봤어. 날씨가 추워지면 나뭇잎의 색깔이 변한다는 이야기 말이

지?"

"그래. 너희들의 밀림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지. 그리고 직접 보게 되더

라도 우리들만큼 그 색깔에 큰 감동을 받기는 어려울 거야. 이 파름산도

가을이 되면 퍽 훌륭한 단풍이 들지.  그리고나서 나무들은 낙엽을 떨어

뜨리고 헐벗게 되지. 동물과 식물의  재미있는 차이야. 동물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더 길고 두툼한  털을 가지게 되는 놈들이  많지. 혹은 음식을

잔뜩 섭취해서 체중을 불리거나 하지. 그런데 나무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오히려 헐벗지."

"그야 나무들은 체온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 하지만 나무들은 그 잎으로  태양빛을 마시지. 그렇다면 햇빛이

부족한 겨울에는 더 많은 나뭇잎이 필요한 것  아닐까? 그 편이 더 많은

햇빛을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왜 나무들은 반대로 행동하는 거지?"

"나뭇잎을 늘여서 얻게 되는 이득보다 나뭇잎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양분

을 아끼는 쪽의 이득이 더 크기 때문이겠지."

"정확해.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지. 위기라고  할 수 있는 겨울

이 왔을 때 나무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확장하는 대신 자신의 일부

를 죽이는 선택을 하지. 그런데,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집단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야. 사람들의 집단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일

부를 죽일 수밖에 없어. 다른 모든 구성원들을 살리기 위해 죽어야 하는

이 개인은 놀랍게도 모욕과  혐오, 심지어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

왜 그런가 하면, 집단의 구성원들이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 집단이  와해되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서로

공격하는 대신 만장일치하에 한 명을 공격하지. 이것을 희생양이라고 부

르지. 다시 나무로 돌아가볼까.  겨울이 왔을 때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서로 공격한다면 나무는 죽고 말 거야. 그래서 뿌리와 줄기와 가지

는 만장일치하에 잎을 공격해서 떨어뜨리는 거야. 잎의 희생으로 나무는

살아남게 되지. 사람들의 집단도 마찬가지야.  희생양이 죽었을 때 집단

의 다른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공포와  증오를 가지지 않아.

그 공포와 증오는 희생양이 죽었을 때 같이 죽었으니까."

사모는 멍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레콘들의 경우가 바로 극단적인 예지. 그토록 강하고 호전적인 자들은

모이면 매일 같이 그  내부에서 위기가 오게 되지.  그럴 때마다 자신의

일부를 죽인다면 레콘은 오래 전에 멸망했을  거야. 그래서 레콘은 아예

집단을 이루지 않아. 그리고 너희 나가들의 경우도 레콘만큼이나 인상적

인 극단이지. 너희들은 너희들 중의 일부를  죽이는 대신 모든 구성원이

한번씩 죽음을 경험하지."

"심장 적출?"

"맞았어. 그래서 너희들에게는  왕이 필요없어. 나무로  친다면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뿐만 아니라 심지어  꽃까지도 조금씩 희생하여 겨울에

도 꽃이 만발한 나무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된 것과 비슷하지."

"정말 독특한 관점이군."

"무엇보다도 독특하며 신기한 것은 증오의  대상이어야 하는 그 희생양

이 어느 순간부터 존경과 애정, 숭배의 대상으로 바뀐다는 점이지."

"어째서 그렇지?"

"조금 전 희생양이 죽었을 때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공포와 증오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어. 질서와  평화가 도래하는

거지. 이것은 집단에겐 신비롭기까지 한  경험이야. 구성원들이 서로 공

격하면 무질서와 혼란이 오는데, 그 희생양을 공격하니까 질서와 평화가

온 거지. 그런 놀라운 차이는 집단을 당황하게  하고 결국 집단은 그 희

생양에게는 다른 자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고  믿게 되지. 그래서 집단

은 그런 희생양에게 특별한 숭배를 바치고 다른 자들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잎이 가장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야. 나

무의 경우 그건 단풍이라고  부르지. 집단의 경우에는  뭐라고 불리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왕이라 부르는군."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말했다.

"옛이야기 하나 하지.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의 마지

막 왕은 권능왕이라는 작자였다. 최악의  왕이었지. 만약 네가 권능왕에

대한 평을 목록화할 생각이 있다면 '호평'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할애

할 필요가 없다. 그의 무수한 악덕들 중에서, 사람들은 주로 만민회의장

을 찾아온 키탈저 사냥꾼들을  모욕한 사건을 그의  최고의 악덕으로 꼽

지. 하지만 점잖은 자리에선 차마 거론하기 난처한 악덕도 있는데, 그가

남색가였고 동시에  근친상간자라는 점이  그렇지. 그는  아들을 사랑했

어."

마루나래는 움찔했다. 사모가 그 털을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모는 곧 그 털을 놓아주고는 똑바로 앉아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혐오스러운 이야기군."

"그래. 권능왕은 여자는 죽이고 남자는 겁탈했던 아라짓 전사의 이야기

를 즐겨 거론하곤 했지. 하지만 그도 자신의 남색 경력을 자랑하거나 하

기는 힘든 시대에 살고 있었어. 더군다나 상대가 그 아들이니 이중의 죄

악이지. 하지만 나는 그것도 그의 최악의 악덕은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생각하기에 권능왕이 저지른 최악의 죄는 행방불명되었다는 거야."

"행방불명이 최악의 죄라고?"

"나는 그것이 다시 없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아라짓 전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키탈저  사냥꾼들은 다른 북부인들과  손잡기를 거부하고

돌아갔지. 북부에는 어떤 희망도 없었어. 그런  암울했던 시절, 그는 북

부의 유일무이한 희망이었지."

"그런 파렴치한 자가 어떻게 북부의 희망이…"

"그런 파렴치한 자였기에 그렇다. 사람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거의 모

든 악덕을 저지른 권능왕은 쳐죽여 마땅한 인물이 되었지. 그는 그의 죄

와 함께 살해당했어야 했다. 혐오와 증오의 만장일치 속에 사람들로부터

공격당하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키탈저 사냥꾼들을 쫓아

버림으로써 자신의 어리석음을 과시했던 그 자는  북부의 마지막 희망마

저도 앗아가버렸지."

케이건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

"만약 그가 행방불명되지 않았다면, 왕의 자리에서 살해당했다면, 그랬

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왕의 죽음을 경험한 북부는 부활의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왕으로서 죽으면 북부는 살아날 수 있다는 이야기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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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9. '출발하는 수탐자들' 편 시작합니다.

예. 아시겠지만 르네 지라르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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