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31화 (31/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8-4.                         관련자료:없음  [54038]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5-14 00:37  조회:10353

눈물을 마시는 새.

8. 북부의 왕 - 4

"여신이여!"

티나한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산 정상에 서있었다. 파름산은 그의 앞쪽에 있었고 그의 왼편으로

는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는 파름 평원이 있었다. 하지만 티나한은 그 중

어느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구름이 광분하여 치닫고 있었다.

동서남북의 사방에서 짙은 먹구름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 낮은 곳에

서 바라봄에도 불구하고 구름의 속도는 엄청났다. 상공에서의 실제 속도

가 어떨지 추측한 티나한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 구름들은 그 경악할 만한 속도  이외의 요소들에서도 도무지 자연적

이지가 못했다. 연기처럼  짙었고 그 내부에서부터  보라색으로 빛났다.

게다가 생명의 의지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결코 자연물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의지는 격노였다. 그렇게 사방의 지평선으로부터 살아있는 생명

처럼 쇄도해온 구름들은 파름산 위에서  격돌하며 소름끼치는 비명을 내

질렀다.

천둥이 천둥에 귀먹고 번개가 번개에 타버리는 충돌이었다.

그곳에서 억수 같은 비가 파름산을 허물어뜨릴 듯이 쏟아져내렸다.

그것은 이미 비가 아니라 폭포수였다. 그 초자연적인 비 아래에 파름산

은 개미탑 만큼이나 불안해 보였다. 피어오른  물안개 때문에 산의 모습

은 흐릿하고 혼돈스러웠다. 티나한은 자신이 죽어도 저곳에 가까이 다가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티나한은 철창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절대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것을 바라보

는 것만으로도 혼이 빠져나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때 티나한은 비형을 발견했다.

비형은 파름산 주위의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압도적인 비의 장막

때문에 비형의 모습은 마치 대폭포의 언저리를 날아 다니는 작은 모기처

럼 보였다. 애처로울 정도로 연약한 모습. 티나한은 비형이 단숨에 빗줄

기에 휘말려 으스러질 거라 생각하며 깃털을 곤두세웠다. 티나한은 비형

이 왜 그렇게 맴돌고 있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비형이 빗줄기 사이로 뚫

고 들어갈 틈을 찾아보려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 생각만으로도 티나한은

견딜 수 없었고, 그래서 고함을 내질렀다. 계명성이었다. 하지만 비형은

듣지 못했다. 나늬의 날개 소리뿐만 아니라  파름산의 상공에서 숨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벼락과 천둥 때문에 비형은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소

용 없음을 깨달았지만,  티나한은 계속 계명성을  내질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오레놀은 기어코 쓰러지고 말았다. 땅을  짚으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졌

고, 그래서 오레놀은 다시 진흙탕에  얼굴을 들이박고 말았다. 사문살이

동안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험악한 말들을 중얼거린 오레놀은 잠시 자

신에 대해 부끄러워 하며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하늘이 구멍난 듯이 쏟

아지는 폭우에 놀라워했다.

"내 생전 이런 비는 처음이군!"

누군가가 잘 들리지도 않는  고함을 질렀다. 오레놀은 그  쪽을 보았고

누군가가 미끄러운 진흙탕 길을 걸어올라오려 악전고투하고 있음을 깨달

았다. 진흙도 진흙이었지만 길을 따라 쏟아져내려오는 빗물은 그들로 하

여금 범람하는 강을 가로지르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가공할 정도로 쏟

아지는 빗물에 나뭇가지들이 사정없이 부러졌고 산은 미처 그 빗물을 흡

수하지 못한 채 겉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오레놀은 토사와 함께 쓸려

내려오는 나뭇가지들과 돌멩이에 아연함을 느꼈다. 그 때 그의 뒤편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던 누군가가 다가서며 외쳤다.

"맙소사! 여기 여름 날씨는 원래 이 모양이오?"

오레놀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수염과  머리카락을 온통 진흙으로 물

들인 괄하이드 변경백이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니오. 장마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닌… 우왁!"

괄하이드 변경백이 갑자기 오레놀을 끌어안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변경

백 자신도 제대로 서있을 수 없었으니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리

고 오레놀은 조금 전 그가 있던  자리를 강타하며 지나가는 바위를 보며

소름이 좍 돋는 것을 느꼈다. 바위는 물보라를 요란하게 일으켰고 그 흙

탕물을 정통으로 뒤집어쓴 오레놀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 때 누군가

가 필사적으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오레놀은 자신이 변경백을 익사시키

려 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괄하이드는 겨우 흙

탕물 속에서 머리를 내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었고 두 사람이 간신히 일어났을 때는 조금

전보다 훨씬 산 아래쪽으로  내려와 있었다. 괄하이드  변경백은 얼굴을

훔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물이 무릎까지  찬다는 사실에 황당함을 느

꼈다. 평야도 아닌 산등성이에서 이런  물이라니? 괄하이드는 그 상황에

서의 좋은 점을 한 가지 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불은 꺼졌겠군!"

"예, 예."

"뭐라고?"

"꺼졌을 거라고요!" 오레놀은  빗소리에 지워지지 않기  위해서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 없는  비라는 것은…  설마? 륜

이?"

오레놀은 깜짝 놀라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산 위에서 쓸려내려와 흙탕

물 속에 숨어있던 나뭇가지는 그런  오레놀의 발을 잡아채었고 오레놀은

사지를 집어던지며 나가떨어져야 했다. 풍덩! 괄하이드는 오레놀을 붙잡

으려 했지만 그 때 밀어닥친 파도가 -  변경백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

만, 그것은 파도였다. - 두 사람을  붙잡아 아래로 밀고 내려갔다. 거칠

게 휩쓸려 내려가며 오레놀은  공포를 느꼈다. 하인샤  대사원이 모조리

쓸려내려가는 것 아닐까?

케이건은 왈칵 물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늦었으면 익사했을

것이다.

케이건은 무릎과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폭포 속에 던져진 것이 아닌가 했다.  그의 두 손과 무릎은 물속

에 잠겨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둠 뿐이었다. 위를 올려다본 케

이건은 곧 눈을 감았다.

화재에 의해 구멍난 지붕에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케이건조차도 겪어보지 못한  끔찍한 폭우였다. 케이건은  놀라움 속에

다시 눈을 떴다. 그 동안에도 물은  계속 차오르고 있었다. 케이건은 황

급히 일어났고, 그리고 사모를 떠올렸다. 케이건은 다시 허리를 굽혀 닥

치는대로 물 속을 뒤졌다. 잠시 후 그의  손에 비늘이 덮인 팔이 만져졌

다. 케이건은 물 속에서 사모를 붙잡아 힘껏 들어올렸다.

사모는 축 늘어진 채 끌려올라왔다.  그녀를 끌어안은 케이건은 사모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곧 자신이 말도 안되는  짓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장을 적출한 사모는 맥박이  없다. 케이건은 자꾸 미끄러지

는 사모를 힘겹게 다시 끌어올리며 왜  이토록 방에 물이 차오르는 건지

이해하려 애썼다.

아무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에 케이건은 눈으로  보기보다는 거의

추리에 의해 사태를 짐작했다. 불길에 의해  무너졌던 벽과 서까래가 문

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 안에 있던 얼마 안 되는 가구들도 그

곳으로 쓸려가 장애물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이 새어나갈 틈은 있

었지만, 새어나가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비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

다. 자신이 물이 쏟아지는 항아리에 갇혀있는 쥐와 다름없다는 것을  깨

달은 케이건은 물을 가르며 문쪽으로 걸어가려 애썼다.  하지만 문이 어

느쪽인지 알 수 없었다.

케이건은 잠시 호흡을 고르며 몸으로 물이 흘러나가는 방향을 느껴보려

애썼다. 얼마 후 케이건은 그다지 확신하지는  못하는 상태에서 한쪽 방

향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머리 위로 계속 들이붓듯이  비가 쏟아졌고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게다가 정신이 없는 나가를 안고 있는 처지였다. 불

과 2 미터를 걸어가기  위해 케이건은 거의 숨이  끊어질 정도로 체력을

소모해야 했다. 가까스로 문에 도달한 케이건은 손으로 더듬어보고는 자

신의 추리가 맞았음을 깨달았다. 무너진  잔해가 문을 틀어막고 있었다.

케이건은 그것을 걷어차려 했다. 하지만 물의  저항 때문에 다리에 속도

가 붙지 않았다. 게다가 케이건은 강대한 수압을 버티고 있는 그 잔해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떠올렸다.

어느새 물은 가슴 높이까지 차올랐다. 케이건은 물이 천장까지 찰 때까

지 기다렸다가 지붕으로 나가는 방법을  고려해보았지만 사모를 안은 채

그 때까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때 케이건은 수위가 더 이상 높아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잠시 고민

하며 방 안의 구조를 생각해 보던 케이건은  곧 탄성을 내질렀다. 그 방

에는 창문이 있었다. 물이 그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도무지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여건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케이건

은 창문이 있으리라 생각되는 방향을 결정한 다음 그곳을 향해 헤엄치듯

걸어갔다. 눈 앞이 하얗게  바뀌는 경험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확신에 찬 결론을 되풀이해서  내린 다음, 케이건은 겨우

창문에 도달했다. 수십 년이 지나간 것 같았다.

창문을 더듬어 위치를 확인한 케이건은 두 다리에 힘을 주며 사모의 허

리를 붙잡아올렸다. 밖으로 떨어지면서 목을  부러뜨릴지도 모르지만 어

쩔 수 없었다. 나가의 재생력을 믿으며  케이건은 사모를 창밖으로 밀어

내었다.

"어흐흥!"

마루나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케이건은 창문을 붙잡으며 몸을 솟구쳤

다. 지금껏 그의 몸을 끌어당기며 고난으로  작용했던 물이 그 때만큼은

케이건을 도와주었다. 부력과 밖으로 쏟아져나가는 격류의 힘에 의해 케

이건은 단숨에 창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케이건은 자신이 잠깐 동안 날았

다고 생각했다.

창문을 통해 튕겨져나오듯 밖으로 나온 케이건은 물보라를 잔뜩 일으키

며 땅에 부딪혔다. 바깥이라고 해서  특별히 뽀송뽀송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축축하고 습기차며 잔뜩 젖어있었지만, 최소한 가슴까지 물에 차

오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케이건은 안도했다. 케이건은 일어났다.

비는 아프리만큼 사납게 몸을 때리고 있었다.

산사의 모습은 암흑과 물의 장막 저편으로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케이

건은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뜯어내며 사모의 모습을 찾았다. 그대로 놔두

면 익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케이건은 폭우와  암흑 때문에 아무 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벼락이 세상을 하얗게 변화시켰을 때 케이건은 두억시니들이 사

모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벼락은 곧  사라졌지만 케이건의

망막에는 잔상이 남았다.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가 두 팔로 조심스럽게

사모를 안아들고 있었고 다른 두억시니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마루나래는 그 앞에 서있었다.  하지만 마루나래는 케이건도, 사

모도 아닌 엉뚱한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케이건은 잔상 속의 마루나

래가 바라보던 방향을 대충  가늠한 다음 그쪽을  바라보며 다시 벼락이

치기를 기다렸다.

다시 벼락이 쳤다. 케이건은 땅을 박차며 달렸다.

케이건의 눈 속에 남아있는 정지된 장면은  조금도 유쾌하지 못한 모습

이었다. 한 남자가 축 늘어진 륜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다른 남자가 손에 바라기를 든 채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몇몇 남자들이 더 있었다. 그들 또한 폭우와 암흑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철벅거리며 달려가던 케이건은 조금  전 사내들이 있었던  지점 근처에

도달했다고 판단했을 때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되도록 많은 부분을 시

야에 넣으려 애쓰며 또다시  벼락이 치기를 기다렸다.  어김없이 벼락이

쳤다. 정지된 그림.

조금 전의 모습에서 어느 정도 이동한 사내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장면 한 부분에서 애처롭게 날고 있는 아스화리탈의 모

습도 보였다. 그 장면을 면밀히 검토한  케이건은 아스화리탈이 불을 뿜

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스화리탈이 내뿜는  발화성 기체가 폭포수 같

은 빗물에 모두 씻겨내려가고 있었다. 조금  남아있는 기체조차도 비 때

문에 점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스화리탈은 완전히 무력한 모습이

었다. 케이건은 눈 앞의 장면 속에  남아있던 사내들의 모습을 검토하며

적절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다시, 번개.

예상대로 케이건은 한 명의 왼쪽에  도달해 있었다. 케이건은 주의깊게

주먹을 휘둘렀다. 눈에 보이는 장면이 아닌, 그 장면에서의 남자의 움직

임을 예측하여 뻗은 주먹이었다. 망막 속에  남아있는 잔상 때문에 케이

건은 남자의 턱에서 한참 떨어진 허공을 때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

지만 그의 주먹에는 확실한 느낌이 왔다. 비명이 터져나왔다.

"뭐냐? 누구야?"

"누가 나를 때렸어!"

젖은 암흑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들으며 케이건은 침울하게 생각했

다. '주먹질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야.'  케이건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번개가 쳤을 때 케이건은 어떤 남자와 정면으로 얼굴이 마주쳤다. 케이

건은 그 남자가 바라기를 들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자들과의 거리가 좀 멀었다. 남자들이 제멋대로 움직였기 때

문이다. 케이건은 그 중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 모습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 모습이 자신의 옆을 지나칠  때 쯤을 노려 주먹을 뻗어보았

다. 주먹은 맞지 않았다. 조금 빨랐던  모양이다. 케이건은 누군가가 내

뻗은 자신의 팔에 목이 걸려 넘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나쁘지 않

지.'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케이건의 몸을 뒤덮었다.

"뭐, 뭐가 내 목을, 콜록! 걸었어! 목을 걸었어!"

"그 남자다. 케이건! 근처에 있다!"

'저 녀석은 나와 얼굴이 마주쳤던 녀석인가 보군.' 케이건은 팔에 걸렸

던 남자가 쓰러졌을 법한 장소를 향해  다리를 내뻗으며 생각했다. 제대

로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케이건은 자신이 누군가의  턱을 부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케이건은 암흑과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잔상들로 이루

어진, 지루하고 혼란스럽고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싸움을 계속했다.

케이건이 깨버린 것은 사실은 코네도의  코뼈였다. 한껏 흥분해 있었던

코네도 빌파는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났다. 빗물을 타고 흘러

내린 코피가 입 안으로 스며든 후에야 코네도는 코를 만져보였고 기절할

것 같은 고통에 신음했다.  그러나 코네도는 곧  신음을 그쳤다. 소리를

노출시키면 케이건의 주의를 끌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얼굴 앞쪽

이 통째로 뜯겨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코네도는 도대체

왜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불은 잘 옮겨붙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케이건은 바라기를 밖에 놔

둔 채 뛰어들어갔다. 그들은 밧줄을 타고  순식간에 절벽 아래로 뛰어내

렸다. 방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나가 한 명뿐이었지만, 전해오는 이야

기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지 나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바라기를 집어들고 도망치려 했다. 이미 떠났던 발케네의 대족장

이 되돌아왔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테고 의심은 자연히 밀렵꾼들에

게 돌아갈 것이다. 일의 그 시점에서, 상황은 지극히 쾌조였다.

그 말도 안 되는 폭우만 아니었다면.

폭우는 불을 꺼버렸을 뿐만 아니라 주변을 암흑 속에 감춰버렸다. 달빛

도, 별빛도 없는 완전한 밤. 게다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인간의 눈

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그

때 누군가가 외쳤다. 코네도는 그것이 토카리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그 나가를 붙잡아!"

"왜?"

"제길, 바로 이게 나가가 얻었다는 힘이야! 그 놈을 잡아! 기절시켜!"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고나서 한 사내가 비늘  달린 몸을 만지는 데 성

공했다. 그는 칼자루로 륜의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켰다. 하지만 비는 그

치지 않았다. 코네도는 둘째아들을 향해 폭언을 내뱉었다. 젖은 암흑 저

편에서 토카리의 숨막히는 변명이 들려왔다.

"아, 이런! 그 녀석이 너무 많은 구름을 끌어모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이 비는 녀석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녀석이 모아둔 구름에서 떨어

지는 겁니다. 어,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비인 셈입니다."

코네도는 화를 가라앉히며 비의 양을 느껴보려고 했고 조금 후 둘째 아

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을 깨부술  것 같던 비는 이제 보통

의 폭우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보통의 폭우조차 버거웠다.

"젠장. 그 놈이 비를 내리게 했다면 그칠  수도 있겠지! 나가를 붙잡은

녀석이 누구야? 그 녀석을 깨워! 이걸 멈추라고 해!"

그러나 그 사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륜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가 기절

시키기 전부터 륜은 반쯤 기절한 상태였다. 륜은 흑사자 모피를 챙길 틈

도 없이 밖으로 나왔고 그 상태에서 폭우를 뒤집어써서 이미 그 몸이 싸

늘하게 얼어있었다. 그런 영문을  알지 못하는 코네도는  도대체 어떻게

기절시켰기에 깨어나지 못하냐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 사내는 어찌할 바

를 모른 채 륜을 깨어나게 하려 애썼다.

그리고 케이건이 그들에게 들이닥쳤다.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잔영 뿐임

에도 불구하고 케이건은 계속해서 비명을 만들어내었다. 결국 분노를 더

참지 못한 코네도가 악을 쓰다시피 외쳤다.

"케이건, 멈춰! 계속 우리를 공격하면 나가를 죽이겠다!"

암흑 속에서 폭우를 맞고 있으면서도 토카리는 부끄러움에 머리 끝까지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가는 죽일  수 없다. 토카리는 케이건의 비

웃음이 들려올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소리는 들

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비명도 더 이상  없었다. 토카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케이건은 무지는 죄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충 동의하

는 쪽이었다. 비형이나 티나한, 그리고  륜은 무한한 참을성으로 동료의

무지를 견뎌내었던 케이건에 대해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

간에도 케이건은 코네도 빌파의 무지함을 증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무지가 이끌어낸 상황은 증오하고 있었다.

코네도 빌파가 조금이라도 나가에 대해 알고 있다면 나가를 죽이겠다는

식의 협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협박을 했다. 그

시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륜이 실제로 쉽게 죽일  수 있는 나가라는

점이었다.

케이건은 결국 주먹을 거두었다. 그리고  목소리에 의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누구냐."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암흑 속에서  발케네 남자들은 긴장했다. 그러나

조금 후 그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조금 전과 다른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

려왔다.

"누구냐고 물었다."

코네도는 부서진 코뼈를 움켜쥔 채 불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알아서 뭣하려고?"

또다시 벼락이 쳤다. 케이건은 잔영을 염두에 둔  채 걷는 방향을 조금

바꾸며 말했다.

"여기서 도망칠 수는 없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잖은가."

코네도는 케이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밧줄이 어디에  있을지 고민했

다. 코네도는 한쪽 방향을 결정한 다음 번개가 치기를 기다렸다. 케이건

이 다시 말했다.

"포기해라. 지금 포기한다면 살려주겠다.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다."

번개가 쳤다. 그리고 코네도는 기절할 만큼  놀랐다. 케이건이 그를 똑

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코네도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케이건

또한 예상치 못한 조우에 약간 당황하여 뒤로 물러났다.

"코가 꽤 볼썽사납군. 하지만 용과 대호가  너희들을 뒤쫓게 되면 코가

으스러진 것 쯤은 신경쓸 거리도 되지 못할걸."

코네도는 거칠어지는 호흡을 가누며 다른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 때 저

편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용과 대호가 뒤를 쫓는다고?  마치 저 괴수들이 네것인  양 말하는군.

허튼 수작이야! 나는 다 봤어. 그 대호는  여자 나가의 편이야! 너는 대

호와 싸웠어!"

"그걸 봤다면 유학생이군. 역시 밀렵꾼이 아니군."

케이건의 담담한 대답에 고함을 내질렀던 사내, 즉 토카리 빌파는 움찔

하며 입을 다물었다. 케이건은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그러고보니 아까 오후에 어떤 방문자들이 대사원을 떠나는 것 같더군.

의심을 피하기 위해 떠났다가 되돌아온  것이겠지. 승려들에게 물어보면

그게 어디서 온 자들인지 알 수 있겠군."

코네도는 둘째 아들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지인들의 말대로 '아들

을 완전히 못쓰게' 만들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다 들 지경이었

다. 똑똑한 도둑이라면 상대방이 무슨 소리를  하건 대꾸하지 않았을 것

이다. 하지만 지적 허영을  알게 된 그의 둘째  아들은 상대방의 말에서

찾아낸 빈틈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결국 코네도는 케이건을 죽여야겠다

고 결정했다.

케이건은 빗방울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번개도 더 이상 치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여러  명의 적 사이를 걸어 다니

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하려면 움직일 수밖에 없

었다. 케이건은 누군가에게 부딪힐 것을 각오하며 계속 걸었다.

"대사원에 불을 지른 너희들의 행위는  용서되지 않을 거다. 포기해라.

지금 포기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변호하겠다."

암흑 속에서 갑자기 불꽃이 튕겼다.

케이건은 손을 들어올려 눈을 가렸다.  코네도는 케이건의 모습을 확인

하자마자 손에 든 점화통을 집어던지고는 달려들었다. 케이건은 있는 힘

껏 몸을 옆으로 던졌지만  코네도의 장검은 이미  내려떨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그날 밤 케이건은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그의 동작은 느

렸다.

케이건은 옆구리를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케이건은 물 위에 쓰러졌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황

급히 다가온 발이 그의 몸에 닿았다. 케이건을  발견한 그 발은 곧 케이

건의 복부를 밟았다. 케이건은 이를 악물며 두 번째 공격에 대비했다.

검이 복부를 꿰뚫었다.

케이건의 눈 앞으로 과거가 번갯불처럼 스쳐지나갔다.

케이건은 마침내 완성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동일시간 내에 두

가지가 될 수 있었다. 아니, 세 가지, 네  가지, 그 이상의 의미로 존재

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과거를 모두 받아들였다. 단지 과거를 아는 것

에 그치는 것이 아닌, 완전한 수용이었다. 케이건은 그 때까지 거부했던

그 모든 과거를 향해 사과했다.

코네도의 검이 비틀리며 뽑혀나갔다. 머리속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

서도 케이건은 생각했다. 괜찮은 마무리군.

코네도는 케이건이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단번에

절명한 것일까?' 그러나 그는 주도면밀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허리를 굽

혀 케이건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코네도는 케이건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암흑 속에서 코네도는 미소를 지었다.

"대단한 자제력이군. 케이건. 비명을  참다니. 죽은 척하면  내가 떠날

거라고 믿었나 보지? 괜찮은 생각이었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케이건은 웃고 싶었다. 그가 비명을 지르지 않은 까닭은 자신이 마침내

모든 과거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이건은 설명하고 싶은 생각

이 없었다. 코네도는 장검을 꽂아넣고는 멱을  따기 위한 단검을 뽑아들

었다. 왼손으로 케이건의 얼굴을 확인한 코네도는 차갑게 웃었다.

"자네 검은 잘 쓰겠네. 케이건."

코네도는 단검을 케이건의 목으로 가져갔다.

검이 살을 꿰뚫는 잔인한 소리가 울렸다.

"으아아악!"

코네도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만져본 코네도는

그것이 통채로 떨어져나갔음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그 때  암흑 속에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무장인 상대를 공격하고 쓰러진 상대의 목을 따는 데나 사용되는 그

런 팔은, 없어져도 그렇게 섭섭하지 않겠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코네도는 고통을  잊었다. 그 지독히 아름다운

목소리는 거의 마성(魔聲)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였다. 물론 짧은 시

간일 뿐, 코네도는 다시 지독한 고통을 느끼며 황급히 일어났다. 코네도

는 덜덜 떨리는 왼손으로 장검을 뽑아들었다.  어둠 속에서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그런 태도에 약간 감명을 받은 듯했다.

"용감한 태도지만, 관두는 것이 좋겠어."

무엇인가가 그의 장검을 후려쳤다. 고통 때문에 검을 제대로 쥐지 못했

던 코네도는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코네도는  상대방이 어떻게

그 장검을 볼 수 있었는지에 더 놀랐다. 이 목소리는 도대체 누구지? 이

끔찍하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 때 저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나가를 내려놔."

륜을 붙잡고 있던 사내는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겁했다. 그

는 황급히 단검을 뽑아들려 했다. 하지만  그 손은 곧 멈춰졌다. 날카로

운 검날이 그의 목젖을 눌렀기 때문이다.  사내는 코네도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공포를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보고 있는 거지?

"죽이고 싶진 않아. 내려놔."

사내는 륜을 놓았다. 륜은 그대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물보라가 일어

났다.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제, 돌아가."

누군가가 점화통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빗줄기 속인지라 쉽지는 않았

지만 결국 그는 짧은 순간 동안 불빛으로 마당을 밝히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발케네 사내들은 흑사자 모피를 몸에  두른 여자 나가의 모습을

목격했다.

케이건은 희미해지는 시선 속에서 그녀, 사모 페이를 바라보았다. 사모

는 쓰러진 륜을 안아일으키고 있었다. 코네도  빌파는 두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 때 케이건은 그  중 한 명이 바라기를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외치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도통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고함을 내지르려던 케이건

은 목소리 대신 피를 토하고 말았다. 륜을 부축하던 사모는 그런 케이건

의 모습에 놀라며 달려왔다. 케이건은 손을  들어 발케네 사내들을 가리

켰다. 생각으로만 그렇게 했을 뿐이다.  케이건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

지 못했다. 사모는 걱정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케이건?"

가슴이 저미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며 케이건은 정신을 잃었다.

갈로텍은 하텐그라쥬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닐렀다.

[용이라도 한 마리 날아올 것 같은 으스스한 밤이군요.]

세리스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기분을 느낀다는 거지, 갈로텍? 내가 보기엔 맑은 하늘인데.]

[글쎄요. 제가 흥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밤하늘

인데도 불구하고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군요.]

세리스마는 부드럽게 웃었다.

[왜 흥분했다는 것인지 설명해주게.]

[가주들이 저희들의 설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그녀들은 여신을 되

찾기 위해 대확장 전쟁을 재개하자는 데 완전히 동의했습니다!]

세리스마는 감탄했다.

[잘됐군! 그 이야기는  정말 기가  막혀. 주퀘도  사르마크의 제안이었

지?]

[그렇습니다. 세리스마. 정말 약삭빠른 사내지요.]

[그런 기쁜 일이 있는데 왜 용이 날아올 것 같다느니 하는 불길한 니름

을 한 건가?]

세리스마의 질문에 갈로텍은 머쓱한 정신을 보였다.

[일이 놀랄 정도로 잘 진행되다 보니 오히려  불안한 기분이 느껴진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화리트 마케로우가 죽었을 때 저는 모든 계

획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륜  페이가 그 자리에 있

었고 화리트의 유지를 받아들였습니다. 륜 페이는 우리가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존재였습니다. 니름 그대로 행운이었지요!  그런데 그 망할 비아

스가 사모 페이를 암살자로 지명했습니다. 그  년은 우리 일을 망치기로

작정한 듯해 보였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그  때 비아스의 심장병을 깨버

리고 싶었습니다.]

세리스마는 빙긋 웃었다.

[자네가 극기심을 발휘해주어서 정말 고맙군. 갈로텍.]

[지금에서야 편한 마음으로 니를 수 있게 되었는데,  왜 그 때 사모 페

이의 심장병을 깨지 않으신 겁니까? 그것이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었다면

카루를 보내는 대신 저나  그로스를 보내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하는 카루를 보내신 것은 너무 위험했습니다.]

세리스마는 탁자 위에 놓인 양피지를 만지작거리며 닐렀다.

[우선, 카루는 내가 보낸 것이 아니야. 카루 자신이 가겠다고 했어. 카

루가 사모 곁에 있는 이상 심장 파괴를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네. 그

리고 륜은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지. 륜

페이가 안전하게 북부로 넘어간  것을 카루가 보고했을  때 나는 사모가

륜을 죽일 수 있는 확률이 훨씬 낮아졌음을 깨달았네. 그래서 나는 사모

를 제거해서 륜을 돕기보다는 만약의 경우 그를 제거할 자로서 남겨두는

쪽이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실제로 지금 그렇게 되지 않았나? 우리

에게 있어 륜을 제거할 무기는 사모밖에 남지 않았어.]

[예. 니르신대로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사모가 지나치게 빨리 암살에

성공하면 어쩌실 생각이었습니까?]

[그랬다면 다시 기다려야지.]

[네?]

[1년을 더 기다렸다가, 다른 수련자 한 명을 보내면 되는 문제였어. 갈

로텍. 카린돌은 하텐그라쥬에 있었어.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지. 의심

받을 꼬투리를 만드느니 완벽한  기회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편이

더 낫지.]

갈로텍은 이해했다. 그는 의자에 앉으며 닐렀다.

[그 니름이 옳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다리지 않아도  되어서 행복하군

요. 만약 1년을 더 기다렸다면 저는  온몸의 비늘이 다 빠져버렸을 겁니

다. 이미 12년을 기다렸습니다.]

[12년을 기다렸으니 1년 더 기다릴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나 역시 1

년 더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세리스마와 갈로텍은 마주보며 웃었다. 세리스마는 창밖을 돌아보며 닐

렀다.

[그래, 우리는 성공했어! 이제 우리는  용이 부활해서 날아오더라도 물

리칠 수 있어. 우리는 얼마든지 그 불을 꺼버릴 수 있어. 하지만 북부의

불신자들을 모두 물리치는 것은 역시 전쟁을  통해야 하겠지. 그런 점에

서 묻겠는데, 군대 창설 계획은 어떻게 되고 있지?]

[그건 주퀘도 본인에게 들으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주퀘도는 불사의 군

대를 몰아 북부를 친다는 생각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 자를 위로 올라

오게 하겠습니다. 그 동안 저는 아래로  내려가서 누구를 좀 만나야겠습

니다. 그렇잖아도 만나고  싶었는데, 그동안은 바빠서  만나지 못했습니

다.]

[노기 하수언에게 감사라도 할 생각인가?]

[아니오. 화리트와 카린돌을 만날 생각입니다.]

[그 남매를?]

갈로텍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그 남매를 가지고 노는 것이 정말 재미있습니다.]

케이건은 악몽을 보았다. 행복했다.  악몽 속의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

다.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살아날지, 죽을지."

내가 도와주지. 나는 죽었어.

악몽은 주로 추억을 이용하지만 시간  순서대로 내어놓지는 않는다. 케

이건은 마음이 상하고, 그래서 감정을  뒤섞어 내보인다. 엉뚱한 감정들

과 부딪힌 추억들이 퐁, 퐁 하는 소리를 내며 터진다.

"너는 용의 자손이다. 언제나 그걸 잊지마라."

아젤키버.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잊지  않았지만, 용이 나를 잊어버렸

습니다.

잊기 싫은 추억들이 가장 희미하고 잊고  싶은 추억들은 지독하게 뚜렷

하다. 케이건은 그것들을  바라보길 거부하고, 그래서  추억들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들어간다.

"열은 내렸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내부에 화농이 괴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친애하는 오레놀. 너는 돌팔이로군. 내 속엔  진득한 화농이 괴어 있는

데.

친했던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려 해도  주위의 사람들이 그 친구

를 역사 속에 나오는 인물로서, 즉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만 감정이나 대화가 통할 수 없는  무정물처럼 취급하는 모습을 보면 이

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싹 사라진다.  억지로 이야기를 나눠봐도, 수백년

전에 죽은 사람을 어제 만난 사람인 양 이야기하는 케이건에게 사람들은

당혹한다. 케이건과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오해하게 된다. 케이건은 이

야기를 관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자, 덤벼봐! 정말 도깨비를 상대로 판막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바우 성주. 호미걸이를 써야겠소. 앞으로 20여년  쯤 후에 비형 스라블

이라는 도깨비가 그건 호미걸이였다고  주장할 테니까, 어쩔  도리가 없

소.

전설처럼 이야기 하는 법. 자신의  살아있는 추억을 터무니없는 옛이야

기로 만드는 법. 장식을 몇 개 달고, 왜곡을 덧붙이고, 뚜렷한 기억일수

록 모호하게 표현한다.  고어체를 이용할  때는 주의깊게.  그 고어체는

'옛날에 쓰였던 말'이 아니라 '옛날 이야기를  할 때 쓰이는 말'을 의미

한다. 케이건은 점점 자신이 무정물로 바뀌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의 자

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지게 된 경험의 총합이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것을 왜곡한다.

"케이건 드라카. 당신은 정말 북부의 왕이오?"

괄하이드 변경백. 왕이 북부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소? 그 믿음을 잘

생각해 보시오.

현재도 과거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에 홀로 남겨진다. 그 시간을 표현할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껏 케이건 이외에 그 말을 필요로 하는 사람

은 없었다. 과거라는 무게추를 잘라버리는 수밖에. 현재로 부상한다. 케

이건은 자신의 모습에 전율한다.

"사실 맛은 별로 기억나지  않아요. 뭔가 기막힌 복수의  맛 같은 것이

날 줄 알았는데, 집에서 늘상 먹던 것이랑 다름없었어요. 시시했지요."

별비가 섭섭해하겠는데, 내 여름.

한 가지 모습만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를 구성하는 무수한 거미

줄 모두와 일일이 가공의 연결점을 만들기는  너무 어렵다. 그들은 과거

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케이건도 과거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제발 살아나십시오. 케이건. 지금처럼 왕이  필요할 때 당신이 죽어선

안됩니다."

그래. 북부에 눈물을 흘릴 일이 많겠구나. 쥬타기. 누군가가 그 눈물을

마셔야겠군.

"좋은 꿈 꾸셨습니까?"

"그다지 좋지는 못했소."

케이건은 눈을 떴다.

주위에서 환호가 터져나왔다. 케이건은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주

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어딘가의 방 안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

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 있었다. 케이건은  그들이 정말 현재의 인물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여러 시간대에 있었던  여러 인물의 모습을 한 자

리에 모아놓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면면을 조심스럽

게 관찰한 케이건은 그들이 모두  같은 시간대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시간대는  '현재'였다. 아직 그들이 누군지를

알 수 없다뿐, 현재임은 분명했다. 케이건은 그들이 누구인지 천천히 떠

오를 거라 생각했다.

"깨어났군! 정말 다행이네!"

쥬타기 대선사가 달려들 듯이 다가와 말했다. 케이건은 누운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제가 며칠만에 깨어난 겁니까?"

"엿새만이야. 대사원에 온 이후로,  아니, 그 이전 몇  달 동안 자네는

너무 많은 일들을 했어. 상처도 상처지만 피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

던 거야."

모두들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말했다.

"그래서 배가 고픈 것이군요."

"곧 드실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케이건은 발쪽에서 들려오는 오레놀의 목소리와  방문을 열어젖히며 후

다닥 달려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짧은 한숨을  내쉰 다음 케이건은 질문

했다.

"여기 도깨비가 있습니까? 좋은 꿈 꿨냐고 묻던데."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도 맞출 수 있습니까?"

"비형."

케이건의 얼굴 옆으로 비형의 얼굴이  다가왔다. 비형은 큼직한 웃음을

얼굴에 건 채 따스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우 성주님의 전언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길

동무도 한 명 데려왔고요. 그 분의 이름도 맞출 수 있겠습니까?"

"티나한도 돌아왔소?"

반대쪽에서 티나한의 큼직한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티나한은 큼직한

눈 주위의 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외치다시피 말했다.

"너무 늦게 살아났잖아!"

"미안하오."

티나한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케이건의 손

을 꼭 붙잡았다. 케이건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사모 페이와 륜 페이 중 하나가 죽었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데."

방 한쪽에서 아름다운 이중창이 들려왔다.

"살아있어요!" "살아있어."

비형 쪽에서 나가의 얼굴 두 개가 나타났다.  비형은 웃으며 옆으로 비

켜주었고 륜과 사모는 걱정 반, 기쁨  반의 얼굴로 케이건을 내려다보았

다. 사모가 먼저 말했다.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묻고 싶은데."

"되살아난 당신이 쇼자인-테-쉬크톨을 주장했을지도 모르니까."

"이제 그건 주장하지 않아."

"왜 그런지 설명해주겠나?"

사모는 턱을 가슴에 묻은 채 생각에 잠겼다.

"케이건. 네가 지금  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상태일지 의심스러운

데."

"괜찮아."

사모는 륜을 돌아보았다. 륜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사모는 빠르게

이야기했다.

"최대한 간단히 이야기하지. 륜은 여신의 힘을 이용해서 나를 깨우려고

했어. 륜은 그것이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성공했어. 나

는 거의 되살아나기 직전이었어. 하지만 목이 잘리길 원했기에 살아나기

직전의 상태에서 버티고 있었지. 그러면서 륜이 사용하는 힘이 무엇일지

고민해보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 더 이상  죽어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

더군."

"그건 언제였지?"

"륜이 나쁜 놈들에게 붙잡혀 있고 너는 칼꽂이가 되려는 순간이었어."

"음."

"나는 휩쓸려나온 흑사자 모피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입었어. 뜨거우니

까 쉽게 찾을 수 있지. 쉬크톨은  바로 근처에 있더군. 그리고나서 나쁜

놈들을 쫓아버렸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륜이  어떻게 해서 그 힘을

얻게 되었는지 들었어.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하텐그라쥬는 현재로선 힘

들여 돌아갈 필요가 없는 도시지.  당분간은. 그래서 나는 쇼자인-테-쉬

크톨을 주장하지 않아."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고 해야겠군. 하지만 내 바라기를 되찾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네 도움을  폄하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야.  하지만 지금 그 칼이 몹시

필요하군."

사모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반대쪽에  있던 티나한은 화난 기색으

로 말했다.

"케이건! 난 네가 그렇게 시야가 좁은 사람일 줄 몰랐어!"

"티나한.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 칼이 절실히 필요하기에…"

"아니, 넌 정말 시야가 좁아. 어떻게 머리 위에 있는 걸 찾아헤매는 거

야?"

케이건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 때 비형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

의 머리맡에서 무엇인가를 들어올렸다. 케이건은 도깨비의 손에 들린 바

라기를 발견했다.

"어떻게?"

티나한은 킬킬거렸다.

"그 때려죽일 도둑놈들은 말이야, 손해가 막심하지만 그래도 귀한 검을

얻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며 도망치고  있었지. 앞쪽에 뭐가  있는지 잘

살피지도 않으면서 말이야."

케이건은 그제야 사태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7 미터짜리 철제 회초리로 곤란한 도벽을 훈도할 만반의 태

세가 되어있는 레콘 같은 것?"

"정확해! 내가 바라기를 몰라볼 리는 없지. 그 놈들을 자근자근 밟아준

다음 대사원으로 끌고 왔어. 지금 그  놈들은 곳간에 갇혀있지. 정말 훌

륭한 도둑이라면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앞에서 막아서는

사람도 잘 살펴야 한다는 교훈을 되새기면서."

"그렇다면 이제 됐소."

케이건의 단정짓는 듯한 말투에 사람들은  약간 긴장했다. 케이건은 쥬

타기 대선사가 있는 방향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대선사님."

"응? 그래. 말하게."

"하루 더 졸도해 있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대사원에 체류 중인 모

든 사람을 모아주십시오. 법당 앞마당이 좋겠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에게

할말이 있습니다."

대선사는 움찔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케이건은 자신의 선언대로

'졸도'해 있었다. 대선사는 깨워볼까 하는 유혹을 느꼈지만 결국 포기했

다. 케이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휴식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옆에서 벼슬을 빳빳하게 곤두세운 채 노려보고 있는 레콘의 모습도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군웅들과 지배자들, 남보다 우월하다고 믿어지는,  혹은 믿어지기를 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승려들이  '좀 행차해주십시오'라는

단순한 말을 하면서 지어보인 놀랄 만큼  긴장된 표정에 깊은 인상을 받

았다. 중대 발표가 있을 것임은 분명했고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하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임을 각오했다. 그들  대부분은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무릇 지배자는

현실주의자다. 하지만 이레 전 파름산을 습격한 폭우는 절대로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현실주의자라는 것은 어쨌든 현실로 드러난 것마

저 무시한 채 자신의  현실 속에 안주하기를  고집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법당 앞쪽의 마당은 넓었다. 승려들은  그곳에 돗자리들을 펴놓고 곡차

동이와 간단한 주안상까지 차려놓았다. 군웅들은  약간 당황했지만 승려

들이 좀 밝은 분위기의 발표를 원하고 있음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지배

자들도 그에 호응했다. 전통적인 우호관계나  개인적 친분, 혹은 대사원

에서 머무는 동안 배포가  맞은 사람들끼리 무리지어  돗자리 위에 앉았

다. 가볍게 곡차가 몇 순배 돌았고,  사람들은 긴장을 풀었다. 사람들은

세미쿼 추장과 무핀토 추장마저도 '우정을  나누는' 일을 삼가고 있다는

것에 감동했다.

그러나 조금 늦게 도착한 일행이 따로 비워져 있는 돗자리에 앉았을 때

그들은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뜻밖의, 하지만 기대했던 것만

큼 충격적인 손님들이었다. 무핀토 추장은 다른  사람도 아닌 세미쿼 추

장에게 질문했다.

"용이 맞다고 생각해? 저기, 나가에게 안겨있는 것."

"그런 것 같아. 이런 빌어먹을. 아무래도 오늘이  예삿날은 아닌 것 같

군."

지코마 성주 또한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서  대호와 두억시니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칼을 뽑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군요. 변경백."

"승려들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낸 이유를 알겠소."

괄하이드 변경백의 말에 성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도깨

비, 레콘, 두 명의 나가, 대호와 용과 딱정벌레, 그리고 스무 명 정도의

두억시니들은 다른 자들에게 별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돗자리에 앉았

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렸다. 정신이 번쩍 든 지배자들이 긴장하고 있을

때 대사원의 주지 라샤린 선사가 법당 앞쪽에 마련된 단 위에 올랐다.

라샤린 선사는 이 시대의 존경할 만한 인사들이 대사원을 찾아주셨으니

조촐하나마 환영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  당연한데도 근래 사원에 우환이

많아 그 준비가 너무 늦었음을 사과했다.  사람들은 '우환이 많다'는 부

분에 주목했다. 선사는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도 뭔가  중대한 이야기를

할 것임을 분명하게 시사한 셈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기다렸다.

라샤린 선사는 심호흡을 한 다음 말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들으셨겠지만 근래 저 남쪽의 형제들에게 특기할 만

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선사의 설명은 군웅들을 창백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라샤린 선사는 거의 모든 것을 담백하게 고백했다. 륜의 하텐

그라쥬 탈출, 구출대의 파견, 살신 계획, 여신의 소환, 그리고 하텐그라

쥬에서 이루어진 여신의 감금. 선사가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

에 승려들까지도 당황했다. 라샤린 선사는 이레 전에 일어났던 초자연적

인 폭우의 경위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선사의 설명이 끝났을 때

군웅들은 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흑사자 모피는 사모에게 돌려주고

비형이 만들어준 도깨비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륜은 불안 속에 비늘을 곤

두세웠다. 그의 무릎 위에 앉아있던 아스화리탈이 꼬리를 뻗어올려 륜의

목을 가볍게 감았다. 앉아있는 마루나래의 등에  몸을 기댄 채 앉아있던

사모는 동생과 용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우  성주님께 조언을 부탁드렸습니다.  비형. 앞으로

나와서 설명해주십시오."

비형은 다른 일행들을 향해 씩 웃고는 일어났다. 티나한은 목소리를 낮

춰 다짐했다.

"부탁이니 농담은 하지마라, 알겠냐?"

비형은 그에게 한쪽 눈을  깜빡여주고는 단 위에 올랐다.  자리에 모인

지배자들을 죽 둘러본 비형은 쾌활하게 말을 시작했다.

"좋은 꿈들 꾸셨습니까!  저는 비형 스라블이라고  합니다. 즈믄누리의

바우 머리돌 성주의 몸종이며, 조금전 존경하는 라샤린 선사께서 말씀하

신 구출대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먼저 선사님께서 들려주신 우리

구출대의 활약상에 대한 보고가 거의 완전히 사실에 부합하지만, 아쉽게

도 약간씩 미진한 구석이 있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수백

년 만에 나가 이외의  선민종족들이 모두 모여  한계선을 넘어갔던 일이

놀라운 모험과 경이적인  사건들로 점철된 것이었음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티나한은 으르릉거리며 속삭였다. "저  놈이 만약 단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아서 그 모든 일을 모조리 이야기하려든다면 가만두지 않겠

어."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며 동의했다. 다행히도 비형은 그 몇 달 동안

의 일을 모조리 들려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그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할 수  있을 겁니다." 티나한은 뜻

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륜과 케이건은 비형이 단지 다른 사람들

을 안달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랬을 거라 생각했다. "저는 여러분들과 우

리 모두에게 건네어진 바우 성주님의 조언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왔

으니까요.  하인샤 대사원에서는 조금 전  여러분들이 들으셨던 바로 그

내용을 그대로 전해주셨습니다. 성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리

치고 즈믄누리의 마지막 방에 들어가서 몇 시간 동안 명상에 잠기셨습니

다. 아, 진짜로 명상에 잠겼는지는 확언드릴 수 없습니다. 그 방에는 어

르신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데, 저는 아직 어르신이 못되었거든요. 옛날,

어르신이 아니면서 즈믄누리의  마지막 방에 들어가려고  시도했던 어떤

도깨비가 있었는데…"

와장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륜과 사모, 케이건은 티나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티나한은 깃털을 곤두세운 채  자신이 '씹어버린' 술잔을 내

려놓았다. 비형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 저건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자꾸  빠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티나

한식 신호입니다. 인상적이지요?"

티나한은 끙 하는 소리를 냈고 군웅들은 미소를 지었다. 비형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렇게 신호를 주시니 본론을  이야기해야겠군요. 몇 시간  후 마지막

방에서 나오신 성주님은 제가 하인샤 대사원에 돌아가서 말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적어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

시겠습니까?"

그리고 비형은 품에서 도깨비지를 꺼내어 펼쳤다.

"나가들이 미증유의 힘을 얻은 지금, 우리들  또한 수백년 동안 사라졌

던 것을 되찾아 우리의 방비를 확고히 하는 것이 마땅하다. 북부의 만민

들은 이제 권능왕이 행방불명된 이후 사라졌던 북부의 왕을 되찾아야 한

다."

군웅들 사이에서 숨막힌 비명이나 신음이 터져나왔다. 비형은 아랑곳하

지 않으며 계속 읽었다.

"내가 판단하기로 우리의 왕은 하인샤 대사원에  있다. 그 사람은 왕의

상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와 모든 도깨비는  그 사람을 지지한다.

부디 현명한 판단으로 왕을 찾아주기를 바란다."

군웅들은 왕이 하인샤 대사원에 있다는 말에 경악하며 서로를 쳐다보았

다. 쥬타기 대선사는 케이건과 그의 등에  매달린 바라기를 재빨리 바라

보았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괄하이드 변경백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비형은 도깨비지를 접어 다시 갈무리했다.

"이상이 바우 성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보내는  조언입니다. 라샤린 선

사님?"

"고맙소. 비형."

비형은 아래로 내려갔고 라샤린 선사가 다시 단 위에 올라왔다. 선사는

잠깐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선사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목이 메어 기묘했다. 선사는 황급히 헛기침을 한 다음 다시

말했다.

"실로 놀라운 조언입니다만 어쩐지 익숙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왕이 사라진 이후 수백 년 동안 우리가 계속해서 들어왔던, 그리고 가끔

우리 입으로도 해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돌아와야 한다."

라샤린 선사는 한 번 더 말했다.

"왕이 돌아와야 한다."

군웅들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륜과 사모는, 불신자들의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정에 담긴  짙은 그리움과 무서운 상실감

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 나가 남매는  북부의 사람들에게 왕이 어떤 존

재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라샤린 선사는 다

시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부모들과 그들의 부모들,  그리고 그 부모의 부모

의 부모들이 수백 년  동안 계속해온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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