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30화 (30/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8-3.                         관련자료:없음  [54003]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5-13 01:47  조회:9273

눈물을 마시는 새.

8. 북부의 왕 - 3

하텐그라쥬에 기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나가들을 당황하게 했고 단순히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자

신이 멍청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만큼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거짓말

은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더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진리는 나

가들에게도 통용되는 진리였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였기에 나

가들은 오히려 그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제정신이라면 그런  니름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런 이야기가 돈다면, 그것은

그 이야기가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연하잖은가?

그래서 하텐그라쥬의 나가들은, 수호자 갈로텍이 비탄에 잠긴 표정으로

불신자들이 나가의 여신을 납치했다고 선언했을 때, 웃음을 터뜨리는 대

신 공포의 니름을 토해내었다.

비아스 마케로우는 주위의 반응을 보며  어처구니 없는 기분을 느꼈다.

갈로텍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광장에 모여든 나가들을 완전히

휘어잡은 채 불신자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니름도 안 되는 이

야기는 나가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비아스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렇습니다! 두억시니들은 바로 그런  추악한 음모의 희생자였습니다.

수천년 전, 그들의 신의 가호 속에  번영하던 두억시니들을 시기하던 불

신자들은 두억시니의 신을 납치했습니다. 그런 잔혹하고 비늘 서는 범죄

가 두억시니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는지는 닐러드리지 않아도 될

겁니다. 저는 니르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이 더 이상 그들

만의 불행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갈로텍은 극적인 동작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손이 기묘하게 움직

였을 때 하늘에서 황당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억수처럼 쏟

아졌지만, 나가들의 머리에 닿기 전에 사라졌다. 나가들은 이 엄청난 기

적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경배하십시오. 이것은 발자국 없는 여신의 힘입니다. 그리고 슬퍼하십

시오! 여신의 신랑인 저는 지금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왜 그

런지 아십니까? 이 힘의 주인인 여신께서 불신자들에게 유괴당했기 때문

입니다! 주인을 잃은 그 힘은 지금 자기 주인의 신랑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끔찍한 공포의 니름들이 터져나왔다. 갈로텍은 비를 사라지게 했다.

[제가 기쁘냐고요? 힘을 얻었기에 도취되었을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저는 두렵습니다. 숨이 끊어지도록 두렵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꼴이 될

지 예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거론하기조차 비늘 서는 두억시니가

바로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군중은 완전히 겁에 질렸다. 비아스는  갈로텍의 장단을 맞춰주고 싶었

지만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켜둘 필요도 느꼈다. 그랬기에 비아스

는 날카로운 니름을 발했다.

[그렇다면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수호자 갈로텍.]

갈로텍은 질문자가 비아스임을 깨닫고는 경계심을 느꼈다. 그 경계심을

겁에 질린 다른 나가들이 깨달을 수  없는 수준으로 억제시켜둔 채 갈로

텍은 모종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 준비가 완료되는 데는 거의 시간이 필

요치 않았다.

[예, 질문하십시오. 마케로우.]

[그렇다면 우리는 불신자의 손에서 여신을 되찾아야겠군요.]

[존경하는 학자이신 당신의 니름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 힘을 사용하여 존경하는 가주님들을 납치한 것인지 설

명해주십시오. 그것은 여신 구출 계획 - 이런 니름이 적당한지는 모르겠

습니다. - 과 관련이 있는 일입니까?]

갈로텍은 웃고 싶었다. 비아스가 그에게 협력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적

절한 사전 협의도 없는 상태에서 이렇듯 재치있는 협조를 보내어오는 비

아스를 보며 갈로텍은 그녀가 원하는  관계 설정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봐

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하십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원인이 관련되어 있으며…

지금 그것은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최초의 공격

은 몇몇 참을성이 없는 수호자들에 의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갑자

기 공포를 느꼈고, 그래서  재빨리 가주들을 불러들여  사태를 의논해야

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겁을 먹었기에 손에  들어온 힘을

마구 사용하여 가주들을 강제로 불러들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

니다. 공포와 절박함이 그들로 하여금 잠시 적절한 절차를 잊게 만든 것

이지요.]

다른 사회에서라면 이런 태도는  지도자의 태도로 적절하지  않을 것이

다. 하지만 갈로텍은 나가 여자들에게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는 남자의,

그러니까 여자의 적절한 지도를 필요로 하는 미숙한 남자의 모습을 부각

시켰다. 그것은 여자들을 만족시켰다. 특히나  조금 전 남자가 제멋대로

기적을 사용하는 모습을 본 직후였기에 그런 나약한 태도는 놀랄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그들이 일으킨 경악할 만한 일이 실제로 필요

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한계선을 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갈로텍의 니름이 나가들에게 일으킨 심리적 효과는 엄청났다. 그녀들은

완전히 압도되었고 그 중 몇몇은 심하게  고개를 가로젓기까지 했다. 갈

로텍은 여운을 정확히 측정한 다음 조금 더 기다렸다. 마침내 군중 사이

에서 불신과 의혹, 의문의 니름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기다

리고 있던 갈로텍은 지체없이 닐렀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확장 전쟁을 재개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북쪽

으로 넘어가지 않는 이상 여신을 구출할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항의의 니름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녀들은 놀란 표정으로 수호자를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준엄하게 닐렀다.

[그들이 신을 가두고 있는 장소가 정확하게  어딜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우리는 저 무시무시한 빙하까지 진격해야 할지도 모릅니

다. 만년설이 뒤덮인 추악한  산들을 올라야 할지도  모릅니다.] 군중은

갈로텍의 니름만으로도 몸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는

여신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북쪽의 저  동토를 1평방미터씩 수색하는 한

이 있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은 두억시니의 운명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우리는 가주님들을 모

셔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가주님들을  아시잖습니까? 그

분들은 물론 지혜롭고 강인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련된 불간섭

의 원칙 때문에 가문내의 일이 아닌,  초가문적인 문제에 대해서 가주님

들은 가문 평의회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결정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초가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능력입니다. 그것도 한시가 급했습니다! 자, 비아스 마케로우! 우리

가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이미 일어난 일을 활용하는 것이 좋았을  겁니다. 가주님들에 대한 납

치가 기왕의 사실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그대로 이용하여 가문 평의회보

다 더 강력하고 의사결정이 빠른 기구를 만들어야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가주님들은 나가들의 모든 도시

를 아우르는 대통합을 준비 중이십니다. 그  분들이 마침내 우리들의 뜻

에 찬성하셨기에 얼마 전 면회를 허락할 수 있었습니다.]

갈로텍은 '하지만 아무도  찾아오시지 않더군요'라는  쓸데없는 니름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중은 그런 니름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들이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 갈로텍은 그들에게 환호할 기회를 주었다.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보다 넓은 밀림을  위해 대확장 전쟁을 벌였습

니다. 그들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우

리는 여신을 구출하기 위해 그것을 재개해야  합니다! 생존 자체를 위해

서!]

갈로텍은 만족했다. 군중은 여신 구출을  다짐하는 니름을 거세게 내뿜

었다.

조금 전 황당한 비가  쏟아졌던 하텐그라쥬의 하늘이  다시 찌푸려지고

있었다. 그들이 할말을 모두 전달했기 때문에 수호자들은 군중이 집으로

돌아가길 원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비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군중은 황급히 흩어졌다. 갈로텍은 창밖을 내다보며 웃었다.

[편의성의 극한을 치닫는다고나 할까요.]

갈로텍의 쾌활한 니름에 비아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상당하시더군요. 급조된 계획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퀘도는 저를 잡아먹을 듯이 화를 내더군요.]

[주퀘도?]

[제 속에 있는 군령들 중 하나이며 제  고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

쪽에서 꽤 이름을 날렸던 전투 전문가입니다.  가주만 설득하면 될 거라

고 생각했다는 것을 그 자에게 고백했더니  제 지성을 곤충 수준으로 비

하하더군요.]

비아스 또한 나가였고, 그래서 주퀘도가 왜  비난했는지 알 수 없었다.

갈로텍은 설명했다.

[우리는, 따지고 보면  상당히 단순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자들은

모두 가문에 매어 가주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남자들은 어디에

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주는 가문을  다스리며, 가문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고 관심을 둘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

사회에 사는 우리였기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느니 그 우두머리

들인 가주만 설득하면 모든 나가들을 우리  뜻대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됩니다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주들이야말로 우리의 통합에  가장 큰 장애물이

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한 가문의 독재적  지배자였습니다. 그런데

통합된 나가 사회의 일부분으로, 더 큰 권위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존재

로 격하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탐내지도 않

는 세계를 위해서 그럴 필요는 더욱 없었지요.]

비아스는 이해했다. 갈로텍은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내며 닐렀다.

[예. 최악의 장애물을 모아놓고 달리려 했으니 제대로 달릴 수 없는 것

은 당연했습니다. 주퀘도는 그들을 모아둔  다음 잊어버리라고 말해주었

습니다.]

[말? 아, 인간이라고 하셨죠.]

[예. 주퀘도는 가주들에 대한 처리는 그녀들을  모두 체포한 것에서 끝

난 것이며,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것은  지도자를 잃고 주춤거리고 있는

대중이라고 가르쳐주더군요. 그리고 대중에겐 가장 큰 거짓말이 가장 훌

륭한 설득 도구라는 것도 가르쳐주었습니다. 대중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

다던가요. 우리는 반신반의하며 그대로 했지요.  그 효과에는 저도 놀랐

습니다.]

비아스는 씁쓸하게 닐렀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는 그 가주님들을 뵐 수 없겠군요.]

[두세나 마케로우는 보기 힘들 겁니다.]

비아스는 흠칫하며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부드럽게 닐렀다.

[우리 계획에 대해 찬동하는 가주들은 돌려보낼 겁니다. 하지만 두세나

마케로우는 돌려보내고 싶지 않군요.]

비아스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갈로텍은 그녀에게 마케로우

가문을 주겠다고 니르는 것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가주님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를 도우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저는 동업자가 되는 겁니까?]

갈로텍은 싸늘하게 웃었다.

[비아스. 왜 아까 당신이 마음대로 니를 수 있게 내버려둔 건지 아십니

까?]

[제가 당신을 도울 거라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이유도 있었습니다만, 만약 당신이 부적절한 니름을 꺼내면 당신

몸 속의 물을 모두 끓어오르게 만들 준비를 갖춰두었기 때문입니다.]

비아스는 비늘을 곤두세웠다.

[그렇게 많은 군중 앞에서 저를 죽일 수는 없었을 텐데요.]

[아니오. 그럴 수 있었습니다. 약간의  부연설명이면 충분하지요. 저는

당신이 드디어 두억시니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닐렀을 겁니다. 여신을 잃

은 사건의 증후군이 나타났다는 거죠. 좋은  연출이 되었을 거라 생각합

니다.]

비아스는 더 이상 니를 수 없었다. 그녀는  굴욕감과 두려움 속에서 수

호자를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관대한 듯이 닐렀다.

[원한다면 당신이 제 동업자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저 또한 당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마시길 바랍니

다.]

비아스는 '당분간은'이라는 말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참기 어려

웠다. 그런 그녀의 분노를 즐기며 갈로텍은 차분하게 닐렀다.

[그럼 당신을 여기로 부른 이유를 니르겠습니다. 당신은 소드락의 생산

을 통제할 방법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과 동시에 카린돌의 유언장

을 찾아야 합니다.]

[유언장이라고요?]

[예. 그녀는 심장 파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기록된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습니다. 그 유언장이 실재하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어쩌면 단순히

협박하기 위해 거짓니름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공개되더

라도 다룰 수 없을 정도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재한다면 우리 손에 들어와  있는 편이 좋습니다. 그것

을 찾아주십시오.]

[저를 완전히 아랫사람 취급하시는군요.]

[저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는 겁니다.]

[기회?]

갈로텍은 웃음을 지웠다. 그는 사나운 눈초리로 비아스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저지른 과오를 속죄할 기회 말입니다.]

비아스는 유벡스 사서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 속에 유벡스의

모습이 떠오르자마자 갈로텍은 그것을 부정했다.

[아니오. 화리트 마케로우를 죽인 것 말입니다. 당신이 그런 짓을 저질

렀기에 지금 우리는 우리와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마

음대로 다룰 수 없는 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륜 페이!]

[그렇습니다. 그는 신명을 가지고 있으며  심장도 가지고 있습니다. 따

라서 그에게는 심장 파괴를 쓸 수 없습니다.]

비아스는 만약 화리트였다면 일이 끝난 후  심장 파괴를 쓸 작정이었음

을 깨달았다. 갈로텍은 아쉽다는 듯이 닐렀다.

[사모 페이가 그를 제대로 암살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실패

한다면 륜 페이는 향후 우리의 최대 걸림돌이 될지도 모릅니다.]

머나먼 남부에서 하늘은 날씨에 대한 권리를 강탈당하고 있었지만 북쪽

에서는 그 권리가 그대로 존중되고 있었다. 계절은 여름이었고 보수주의

자일 수밖에 없는 하늘은  폭염이 적절한 의상이라고  생각했다. 잔학한

저주처럼 쏟아지는 햇살은 고가람의 지붕과 처마, 기둥을 불살랐고 댓돌

과 축대를 달구었다. 열기가 춤추는  마당은 물결치는 유체처럼 보였다.

무학당에서는 마루나래가 진저리를 치며 마루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두

억시니들은 절규하며 그늘로 찾아들었다. 문제는,  그들이 찾아낼 수 있

는 유일한 그늘이 케이건이 앉아있는 돗자리 주위였다는 사실이다. 두억

시니들은 주저하며 다가왔다. 하지만 케이건은 완벽한 무시로 그들을 환

대했다. 두억시니들은 안도하며 케이건 주위의  땅에 주저앉았다. 그 중

한 놈이 세상을 부정하는  듯한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마당을 파헤치고

시원한 땅에 배를 가져다댄 채 드러누웠다.  잠시 후 그것은 두억시니들

의 최신 유행이 되고 말았다. 두억시니들은  모두 땅을 파헤치고 그곳에

몸 일부를 가져다대었다. 그들의 몸에  달린 무시무시한 부속지(附屬肢)

들은 그런 노동에 적합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도움은 되었다. 주위에

서 살벌한 발톱과 뿔 등이 휘둘러지며  땅이 파헤쳐지는 것에 대해 케이

건이 보인 유일한 반응은 하품이었다.

두억시니들이 잠잠해지자 케이건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억시

니들이 졸린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마당 저편으로 걸어간 케이건은 그

곳에 있는 샘터에서 물을 길었다. 방풍복을  꺼내어 물에 적신 케이건은

그것을 들고 돌아왔다. 다시 돗자리에 앉은  케이건은 물을 흠뻑 머금은

방풍복을 머리 위에서부터 덮어썼다.  뭔가 분한 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두억시니들은 잠시 후 꽥꽥거리며  샘터로 쇄도했다. 그들은  손이나 입

등에 물을 머금은 채 돌아왔고, 파헤친  땅에 물을 뿌렸다. 그리고 그곳

에 다시 몸을 가져다대었다.  모두 행복해졌다. 마루  위에서 혀를 빼문

채 쓰러져있던 마루나래는 그 모습을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

루 아래로 내려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기에 불타는 마당을 경멸하는 눈으

로 바라본 다음 마루 위에서 몸을 뒤채며 헐떡거리는 짓을 계속했다.

세계의 보다 쌀쌀한 곳에서 온 방문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계곡으로 돌

격했고 물 속에 몸을 누인  채 인간은 원래 수중  생물이지 않을까 하는

출생에 얽힌 고민에 잠겨들었다. 좀 더운  지방에서 온 방문자들도 그다

지 쾌적한 표정을 짓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비록 더위에는 단련되어 있

었지만 야자술이나 바나나술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은 감당키 어려웠

기 때문이다. 착한 승려들은  그들을 위해 비장의  위문품들을 내놓았고

그것은 대단한 호평을 불러일으켰다. 방문자들은  수박과 참외를 씹으며

고향에 대한 애처로운 향수를  달랬다. 매미들은 실성한  듯이 광포하게

울어젖혔고 바람은 일사병에 걸려 비틀대고 있었다. 대사원의 여름 오후

였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사내는 녹아흘러내리는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느닷없이 나타났다.

옷가지는 물론이거니와 얼굴을 감싸매고 있는 천  또한 피에 물들어 있

었다. 얼굴에 커다란 부상을 입은  듯했다. 피투성이 사내는 비틀거리며

대사원에 들어섰다. 폭염에 넋이 나가있던 사람들은 잠시 그것이 더위가

만들어낸 환각인지 실제의 현상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승려들

과 방문자들은 놀라서 사내에게 달려갔다. 사내는 자신이 발케네에서 왔

다고 말했고 그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코네도 빌파가 발케네 사람들을 거

느린 채 달려왔다. 피투성이 사내는 코네도의  손을 움켜쥔 채 헐떡이며

말했다.

"대족장님. 파카시 족장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이라고!"

"그렇습니다. 대족장님이 떠나자마자  파카시 족장이  뿔관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나섰습니다."

지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케네의 도둑들은 어쨌든 공평무쌍한 도

둑들이다. 그들은 서로간에도 훔치는 것이다.  코네도 빌파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내 권속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살해당하거나 도망쳤습니다.  저도 가까스로  도망쳐왔습니다. 파카시

족장은 대족장님이 뿔관을 훔쳐 대사원으로 도망친 도둑이라고 선언했습

니다."

코네도 대족장은 폭언을 내쏟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가까이 있던 승려

한 명에게 외쳤다.

"나는 돌아가야겠소!"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 분은 저희들이 보살피겠-"

"아니오! 데려가겠소."

"예? 하지만 이런 상태이신데요?"

"이 놈에게 들어야 할  정보가 있소. 이곳까지 왔다면  돌아갈 수도 있

어! 일어나라!"

피투성이 사내는 놀랍게도 벌떡 일어났다. 대사원의 방문자들은 발케네

사내들의 용맹함에 감탄했다. 코네도는 그 사내를 끌어안아준 다음 밖으

로 달려나갔다. 코네도 빌파는 대사원에서  유학중이던 둘째 아들에게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고 토카리  빌파는 배신자들을 저주하며 짐

을 챙겼다. 발케네에서 온 방문자들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대사원을

떠났다.

발케네 사람들이 질풍처럼 대사원을  떠난 사건은 폭서  속에 정체되어

있던 대사원에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군웅들은  자신들이 고향을 비워둔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다고 자위했다. 미약한 정보에 입각하여 이곳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그들은 대부분 빈틈없는 사람들이었고 믿을 만한 자들

을 남겨두고 오는 대비까지 철저하게 해두었다.  지배자들은 오직 저 발

케네의 도둑들만이 이토록 빨리 뻔뻔함을 드러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

다. 하지만, 불안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들은 보다 짙은 향수를 느

꼈다. 그리움보다는 걱정에 가까운.

오후가 불안의 지꺼기와 숨막히는 열기만  남겨놓고 사그라들 무렵, 쥬

타기 대선사는 종규해석소에서 퇴장했다.

철야로 이루어진 종규해석 때문에 대선사는  초췌해진 모습으로 걸어나

와 오레놀 대덕을 슬프게 만들었다. 오레놀  대덕은 서둘러 음식과 이부

자리를 준비했다. 대선사는 오레놀이 억지로  떠먹이다시피 하는 음식을

조금씩 삼키며 말했다.

"종규해석소는 내게 구두 견책을 내렸다."

"그러리라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호규원장이 요구한  것이 멸적이었다는 것은  짐작하지 못했겠

지."

그릇에 물을 따르던 오레놀은 그만 손에 물을 엎지르고 말았다. 오레놀

은 그걸 닦으면서도 어이 없는 표정으로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대선사는

심로에 지친 얼굴을 힘들게 펴며 말했다.

"네가 레콘이 아니라 다행이구나."

"멸적이라니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종단의 우두머리를 파문하겠

다는 겁니까?"

"아마도 라샤린이 꾸민 일일 거다. 그는 확실히 투사지."

"그, 그렇다면 라샤린 선사가 대선사님의 지위를 노리고-"

"오오, 박복한 내 신세 같으니. 이  놈아! 이야깃꾼이나 들먹일 황당무

계한 소리는 치우거라. 선사 또한 종규해석의  결과가 구두 견책으로 끝

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멸적이라는  말로 겁을 주고 싶었던 것

은 내가 아니라 다른 스님들이었다."

"다른 스님들이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이겠지. 지금 이 순간이 자칫 잘못하

면 종단 전체의 파멸로 치닫게 될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순간임을 알리

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나는 라샤린의 그런  판단에 동의한다. 우리는

지금 위험하기 짝이 없는 낭떠러지 위에 서있는 셈이다."

오레놀도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낭떠러지를 슬기롭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

엇입니까?"

"몇 가지가 결정되기는 했다. 일단, 사모 페이가 깨어나야 한다."

"사모 페이요?"

"그래. 그녀는 정신억압자이니 뱀들을 억압할 수 있을 거다. 우리는 일

단 저쪽과 이야기를 해봐야  해. 그러려면 그녀가  필요하지. 그녀는 좀

어떠냐?"

"케이건님에게 들은 바로는 륜 페이가 여신의 힘을 사용하여 그녀를 깨

우려 애쓰고 있다 합니다."

이번에는 쥬타기 대선사가 놀랄 차례였다.

"그가 '정말로' 여신의 힘을 쓰고 있느냐?"

"예. 이것으로 우리는 케이건님의 추리에  대한 증거를 얻은 셈입니다.

신명을 가진 수호자들은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륜은 자신이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신합니다만 그걸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사 상태인 사모와 몇 번  접촉하기는 한 모양입니다만 의사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제게도 조언을  구했습니다만, 저

또한 신이 아니잖습니까? 신의 힘을 이렇게  저렇게 쓰라고 조언해줄 수

는 없었습니다."

대선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신이 아닌 누구도 조언해줄 수 없겠구나."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륜이 신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다면 저 남

쪽의 수호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지 않겠습니

까?"

"그건 그렇지 않다. 수호자들은 여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이다. 하지만 륜은 중도  포기한 수련자라고 하지  않더냐? 그는 여신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지를 뒤흔드는 것보다 한

사람의 의지를 흔드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다. 륜은 지금 대단히 어려

운 일에 여신의 힘을 쓰려고 하고 있으니 시행 착오가 많을 거다."

오레놀은 이해했다. 대선사는 식욕이 가신 듯 음식을 물리며 말했다.

"그녀가 동생의 간청을 받아들여 깨어나면 좋겠구나. 어쨌든 우리가 결

정한 다른 몇 가지 문제도 있다."

"무엇입니까?"

"발자국 없는 여신께서 다른 신체로 전령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지."

오레놀은 그 말을 생각해보다가 그만 소름이 돋고 말았다.

"그, 그 말씀은 그러니까… 누군가가 하텐그라쥬로 가서 억류된 신체를

구출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꼭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오레놀. 다른 신체로 전령하실  수 있는

방도를 찾는다고 했지."

"하지만 그런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쥬타기 대선사는 침울하게 동의했다.

"현재로선 나 역시 그 외에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

해야겠구나. 하지만 머리를 짜내어 생각해봐야지."

오레놀은 회의적인 생각이 자신을 잠식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그 때 대선사가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은 이것이다. 우리는 왕을 되찾아야 한다."

"왕을…"

"그렇다. 만약 나가들이 대확장  전쟁을 재개한다면 우리는  그에 앞서

북부의 왕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왕의 이름 아래 북부의 대통합을 이

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가들의 공세에  저항할 엄두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오레놀은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 분은 전혀 그럴 의사가 없으시잖습니까."

대선사는 무거운 신음을 토했다.

"그 분도 이런 상황에서 거절하실 수는 없으실 거다."

"대선사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에게 이 상황은 지독히도 무서운 것이지만,  우리보다 턱없이 긴 시간을

사용하시는 그 분께는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

다."

대선사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니까, 예닐곱 살짜리  꼬마애가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이야!'라고

외치는 꼴과 비슷할 거라는 거냐?"

"비유적으로, 그렇습니다. 어쨌든 그 분께  이토록 위험한 상황이니 왕

이 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던 사람은 결코  우리가 처음이 아닐 것 같습니

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요청해야지. 우리보다  앞서 요청했던

그 많은 사람들처럼."

대선사는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오

레놀은 대선사가 일단  자야한다고 권고했다. 그것은  옳은 명령이었다.

종규해석의 팽팽한 긴장감과 닥쳐올 앞날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철야했

던 대선사는 그대로 잠들어버려도  할말이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 결국

대선사는 오레놀이 펴준 이부자리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기절하듯 잠들

었다.

티나한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의 잠자리는 바람이 매섭게 불어닥치는  산등성이였지만 거창한 깃털

로 덮여있는 티나한은 이불에 싸여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티

나한이 숙면에 들지 못하는  것은 잠자리가 불편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정신없이 잠들 만큼 낮에 많이 걷지 않았다. 레콘의 기준이 아니라 인간

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 날 낮  동안 티나한이 이동한 거리는 어기적거렸

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였다. 완전히 소모되지 않은 힘은 그의 몸 속에

서 꿈틀거리며 그의 안면을  방해하고 있었다. 티나한은  부리를 부딪힌

다음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은 구름에 덮여  있었지만 이따금 구름이 갈

라질 때마다 달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키보렌의 밀림에서 보던 기묘할  정도로 커다란 열대의  달을 떠올리며

티나한은 부리 사이로 새는 웃음소리를 냈다. 추적당하면 소란을 일으키

며 느리게 움직이라고? 발자국은  얼마든지 남겨도 좋지만  발의 체온은

남기면 안된다고? 티나한은 그 경험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

했다. 당연한 일이다. 상식의 역전 속에서 보낸 몇 달이었다.

다시 그런 경험들을 할 수 있을까?

티나한은 스스로에게 던진 그 질문에 부정적인 대답을 보내었다.

티나한은 피라미드 속에서의 끔찍했던 몇  시간을 떠올렸다. 몸에 붙은

도깨비불에 의지한 채 길도 알 수  없는 미로를 헤매며 혐오스러운 두억

시니들의 맹공을 버텨내야 했던 시간들. 그리고 티나한은 무적왕을 떠올

렸고 불에 타죽은 선지자를 떠올렸고 지그림 자보로를 떠올렸다. 유쾌하

면서도 살벌한 추억들이었다. 티나한은 그 때  사람들이 지었던 표정 하

나하나까지도 떠올릴 수 있었다.

티나한은 그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동시에 케이건의

말도 떠올랐다.

'잔치가 끝났으면 집으로 돌아가야지.'

아직 티나한에겐 집이 없다.  바이소 계곡의 오두막은 발굴  본부일 뿐

집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집은 하늘치의 등에 새워질 것이다. 티

나한은 아직 건설되지 않은 자신의 집과  아직 얻지 못한 자신의 신부들

을 생각했다. 그것이 미래의 일이라는 사실은 티나한을 주눅들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래의 일을 떠올리는  것은 티나한으로 하여금  케이건의 미래

또한 생각하게 했다. 홀로 키보렌으로 떠난  케이건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를 예견해보는 것은 티나한을 괴롭혔다. 티나한은 그 생각을 떨쳐버

리려고 주의를 바깥으로 돌렸다.

티나한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지평선 쪽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티나한은 누운 채 그것에

주의를 집중했다. 지평선에서부터 날아오는 그것은 그의 앞쪽 하늘을 지

나쳐갈 것 같았다. 몇 분 정도 더  관찰한 티나한은 자신의 예측이 옳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티나한은 인간이나 도깨비들의 부러움을 받는 시력

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캄캄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날아

가고 있는 그 물체에 쏟아지고 있는 것은 달빛 뿐이었다. 티나한이 확실

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하늘치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티나한은 태평하게 누운 채 그것을 바라보며 다시 케이건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 혼자 갈 생각일까.'

티나한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티나한은 승려들이 케이건을 사

지로 몰아넣으려들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해보았다. 하

지만, 그렇다면 승려들은 여신의 힘을 손에  넣은 나가들을 어떻게 상대

할 것인가? 티나한은 골치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티나한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하늘을 날아오던 것은 충분

히 커져 있었다. 티나한은 그것이 딱정벌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사

원의 연락에 대해 즈믄누리가 보내는 답장인 건가?' 티나한은 그 딱정벌

레가 날아가는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하인샤 대사원의 방향이었다. 티나

한은 자신의 추리가 옳았음을 깨닫고는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티나한은 눈을 번쩍 떴다.

딱정벌레는 누군가를 태우고 있었다. 때마침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 딱

정벌레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것은 도깨비였다.  당연한 일이다. 딱정벌

레에 타고 있는 자는 도깨비일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 그러나 티나한

은 그 이상의 사실을 발견했고, 그것에 놀랐다.

그것은 나늬와 비형이었다.

티나한은 벌떡 일어났다. 눈을 비빈  티나한은 다시 딱정벌레를 바라보

았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티나한은 반가움에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

가 있는 곳은 어두운 산등성이였고 게다가  하필이면 달이 다시 구름 속

으로 사라졌다. 티나한은 고함을 지를까 생각해보았지만 곧 비형이 딱정

벌레의 날개 소리 때문에 아무 것도 듣지 못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계명성이라면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티나한은 갑자기 비형을

불러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형은  아마도 바우 머리돌 성

주의 답변을 가지고 대사원으로  가는 것이리라. 그것은  대단히 화급한

일일지도 모른다. 티나한이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비형과 나늬는

이미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 빠른 속도를 본 티나한은 바우 성주

의 답변이 정말 급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비형과 나늬가 산 저편으로 넘

어간 것을 확인한 티나한은 아쉬움을 느끼며 도로 누웠다.

나무에 기대어놓은 철창에 바람이 부딪혀 흐느꼈다.

5분 후, 티나한은 갑자기 튕기듯 일어났다.

"에라이, 썅!"

티나한은 배낭과 철창을 한 동작에 집어들었다. 다음 순간 배낭은 그의

등에 걸려있었고 철창은 어깨  위에 걸렸다. 티나한은  껑충 뛰어올랐고

땅에 닿자마자 그가 지금껏 떠나오던 방향을 향해 거꾸로 달리기 시작했

다. 티나한이 바위 하나를 짓밟은 순간 그 바위는 수만년 동안 지켜왔던

자신의 중심을 잃고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티나한은 반대 방

향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산봉우리들이  발 아래로 쑥  내려가는 느낌에

황홀해하며 티나한은 부리가 떨어져나가도록 외쳤다.

"요술쟁이가 돌아왔다! 잔치 아직 안 끝났어!"

파름산의 북사면에서 기묘한 모습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의 어둠 속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은 허리를  낮춘 채 어둠 속을 빠

르게 걸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모기들이 탐욕스럽게 피를 빨았음에도 불

구하고 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관찰자가 본다면 별 주

저없이 그들이 나가일 거라 주장했겠지만 그들은 인간이다.

대단한 극기심을 발휘하며 산을 오른 인간 무리는 잠시 후 파름산의 정

상 조금 못미치는 곳에서 남사면으로 돌아들어갔다. 그들은 잠시 그곳에

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하인샤 대사원의 정경이 발 아래에 무질서하게 펼쳐져 있었다.

몇 군데에서 비치는 불빛을 제외하면 대사원의 모습은 달빛에 포근하게

안겨 있듯 고요해 보였다. 깊은 밤이었고  대부분의 승려들이 잠들어 있

을 시간이었다. 대사원을 내려다보던 사람들은 잠시  후 한 군데로 모여

들었다. 소리를 낮춘 속삭임이 빠르게 오갔고  곧 그들은 아래쪽으로 걸

어내려갔다. 북사면에서보다 더욱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다. 약간 열성이

지나친 일부 모기들은 그곳까지  그들을 따라와 흡혈의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다른 곤충들은 울음소리를 멈춘  채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

다.

절벽을 돌고 바위를 넘어  그들은 곧 아래로 통하는  소로를 발견했다.

그곳부터는 하인샤 대사원의 경내에 속하는  부분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어들었다. 무기에는 재가 묻어있어 빛을 반사시키지 않았다.

경내로 들어왔기에 그들은 발소리까지 유념하며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그런 주의 깊은 행동은 완전히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소

로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들은 행자 한 명과 정통으로 맞닥뜨렸다.

양쪽 모두 너무 놀라 잠시 아무 말도 못한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행자는 상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두 열 명 남짓한 숫자였고 한

결 같이 얼굴에 복면을 하고 있었다.  겁이 난다기보다는 어쩐지 우스꽝

스럽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꼼짝도 못한 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더

욱 그런 인상을 자극했다. 잠시 후 행자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한 것

인지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행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초보냐?"

조금씩 당황에서 헤어나오고 있던 복면 사내들은  행자의 말에 다시 당

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행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초보티 무진장 내는구나. 이 웃기는 복면은 뭐야? 동물들이 너희

얼굴 봐뒀다가 복수할까봐?"

남자들은 당황한 듯 자신의 복면을 만졌다. 행자는 딱하기 그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밀렵질이 처음이라 길을 잃은 것까지는  이해하더라도, 이쪽으로 넘어

오는 얼간이가 어디 있냐? 눈은 뒀다  뭐하려고? 너희들 소굴은 산 반대

쪽이다."

복면 사내들이 약간 덜 당황했다면 행자의  말에서 어떤 오해가 일어나

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나치게 당황

하고 있었다. 심리적 공황 속에서 복면  사내들은 행자가 제발 비명이라

도 질러줬으면 좋겠다고 - 정말 그런다면  곤란하겠지만 - 생각했다. 그

때 행자가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무기를 발견했다.

"손에 든 그건 뭐야?"

복면 사내들은 당황하여 손에 든 칼을 뒤로  치웠다. 행자는 눈을 부릅

떴다.

"이 놈들! 뭘 잡은 거지? 내놔봐!"

지적을 받은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행자

는 그 움직임이 좀 빠르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행자는 배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고통과 경악으로 행자는 눈을  부릅떴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행자는 곧 허리를 숙였다. 들고 있던 검으로 행자의 배를 찔

렀던 남자는 쓰러지려는 행자를 부축했다. 그제야 사태를 깨달은 남자들

가운데서 숨막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 스님을 죽이다니…!"

행자를 찔렀던 남자는 그를 조심스럽게 눕힌 다음 검을 뽑았다. 세심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행자는 끔찍한 고통에 진저리를  친 다음 정신을 잃

었다. 고함을 질렀던 남자가 다시 말했다.

"어, 어쩔 생각입니까! 스님을 죽이다니오!"

"시끄러워! 죽을 자리는 아니었어. 치료가 잘 되면 살 수도 있어."

"혹 살아난다 해도 군웅들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멍청이! 이 녀석이 하던 말 생각 안나? 이 녀석은 우리가 밀렵꾼인 줄

알고 있어. 아마 살아나도 밀렵꾼들이 자기를 공격했다고 말할 거야."

사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행자를 찔렀던 남자는 다시 말했다.

"흐음. 덕분에 좋은 것 알았다. 밀렵꾼인 척하면 되겠군. 가자!"

한 명이 쓰러진 행자를 가리켰다.

"이 친구는 어떻게 하죠?"

"상처를 지혈하고 잘 보이는 곳에 눕혀둬. 그 다음은 그 녀석의 재수가

좋기를 바라야지.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너도 처리가 끝나면 곧 따라

와. 어디로 와야 하는지 알지?"

남자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행자의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

다. 다른 남자들은 소리를 죽인 채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들은 무학당이 보이는 절벽에 도달했다.

무학당으로 들어서는 오솔길은 여전히 몇몇 행자들에 의해 감시되고 있

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어둠 속에서 거친  산등성이를 타고 돌아와야 했

다. 소리를 내지 않고 그런 일을 하느라 몹시 지쳤지만 그들은 가까스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무학당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들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대호는 마루에 잠들어 있었고 두억시니들  또한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주위를 꼼꼼하게 살피던 남자  하나가 곧 케이건을  발견했다. 케이건은

무학당 맞은편의 나무 그늘 아래에 돗자리를  깐 채 앉아있었다. 남자들

은 케이건이 앉아있는 모습에 경악했다. 하지만  얼마 후 충격이 가시자

그들은 케이건이 앉은 채  잠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쌍신검을

바닥에 찌르고 그 고동으로 어깨를 받친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언제 깨

어날지도 모르는 위험한 모습이었다. 남자들은  긴장감에 숨소리를 낮추

었다.

"여차하면 깨어날 것 같은데요."

"…바쁘게 만들어줘야지. 시작하자."

그들은 주위의 나무에 밧줄을 묶었다. 하지만 밧줄을 아래로 던지는 대

신 그 자리에 사려두고는 허리춤에서 도자기병을 꺼내었다. 주병처럼 생

긴 그 병들은 볼록한 배와 가느다란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고 그 주둥이

는 굵은 심지로 틀어박혀  있었다. 남자들 중 한  명이 점화통을 꺼내어

불을 피웠다. 곧 부시에 불이 옮겨  붙었고, 그러자 사내들은 황급히 병

을 불에 가져갔다.

심지에 불이 옮겨붙었다. 사내들은 무학당의  지붕을 향해 화염병을 집

어던졌다.

첫 번째 화염병이 지붕에 부딪혀 쨍그랑 하는 소리를 내자 케이건의 손

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뱀처럼 움직인 케이건의 손은 바라기의 칼자루

를 움켜쥐었고 그대로 바라기를 밀었다. 땅을  밀어내는 효과에 의해 케

이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케이건은  그대로 스르르 몸을 돌려

오솔길을 겨냥했다.

그리고 케이건은 잠에서 깨어났다.

케이건은 눈을 뜨고 오솔길을 주의깊게 살폈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케이건은  약간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또다시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아낸 케이건

은 눈을 부릅떴다.

무학당의 지붕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루나래가 마당으로 뛰쳐나와 어깨털을  곤두세웠다. 두억시니들도 당

황하여 일어났다. 그 때 케이건은 하늘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

낌을 받았다. 눈을 가늘게 뜬 케이건은 곧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화

염병을 발견했다. 케이건은 어떤 식으로 불이 일어났는지 깨닫고는 고함

을 내지르려 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밀렵꾼들이다! 밀렵꾼들이 공격한다!"

케이건은 주춤했다. 그 외침은 절벽  위쪽에서 들려왔다. '뭐하려는 수

작이지?' 케이건은 그 외침에 다른 승려들이 깨어날 거라 판단하고는 주

저없이 무학당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두억시니들이 케이건을 막아섰다.

케이건은 얼굴을 찌푸리며 두억시니들을 노려보았다. 마루나래 또한 그

들 앞으로 달려나와서는 어깨털을 꼿꼿이 세운 채 케이건을 쏘아보았다.

케이건은 손을 들어 지붕을 가리켰다.

"불을 꺼야 해! 륜과 사모를 깨워야 한다고!"

안타깝게도 마루나래와 두억시니들은 케이건의 말을 깨닫지 못했다. 케

이건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라기를 높이 들어올렸

다. 마루나래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발톱을 곤두세웠다.

하늘에서 불줄기가 쏟아졌다.

화염은 마루나래와 케이건 사이의 공간을  맹렬하게 훑고 지나갔다. 마

루나래는 뒤로 훌쩍 뛰었고 케이건 또한 바라기로 얼굴을 가리며 물러났

다. 다시 하늘을 본 케이건은 꼬리를 격렬하게 진동시키고 있는 용의 모

습을 발견했다.

"아스화리탈!"

용은 케이건을 흘깃  바라보고는 다시 대호를  쏘아보았다. 마루나래는

아스화리탈을 향해 사납게 포효했지만 공중에  떠있는 용을 어떻게 하지

는 못했다. 아스화리탈은 그런 대호를 냉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케이건은

불에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무학당을 보며 이를 갈았다.

아스화리탈이 다시 날아들었다.

아스화리탈은 대호가 절대로 뛰어오를 수 없는 높이에서 불을 토해내며

서서히 날아들었다. 케이건은 눈썹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물러나

야 했다. 눈을 가늘게 뜬 케이건은  아스화리탈이 대호와 두억시니를 몰

아붙이고 있음을 발견했다. 마루나래는 으르릉거리며 이리저리 뛰었지만

아스화리탈은 폭포수 같은  불길을 토해내어 거침없이  대호를 밀어붙였

다. 케이건은 아스화리탈의 뜻을  깨닫고는 용의 뒤편으로  돌아 달려갔

다. 마루나래가 포효하며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용이  그 앞을 막아섰

다.

케이건은 방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모는 처음에 무학당에 데려다 눕혔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

었다. 륜은 그녀의 곁에 기절한 듯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케이건은

순식간에 사태를 깨달았다. 어떻게 써야할지도 모르는 여신의 힘을 하루

종일 무리하게 사용한 끝에 륜은 지쳐빠진  채로 잠들어 있었다. 케이건

은 륜에게 다가가 뺨을 두드렸다. 그  와중에도 지붕 위쪽에서는 우지끈

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 뺨을 토닥이던 케이건은 그래도  륜이 일어나지 않자 인정사정없

이 후려갈겼다. 륜은 기겁하며 눈을 떴고 그  순간 눈이 멀어버릴 것 같

은 기분에 도로 눈을 감았다. 천장의 온도가 급상승하고 있었다.

"일어나, 륜!"

"케, 케이건?"

"불이 났어! 어서 일어나!"

륜은 눈을 감은 채  케이건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일어났다. 케이건은

한 손으로 륜을 끌어안 듯이  하고 바라기를 쥔 다른  손으로 얼굴 앞을

가린 채 다시 문 밖으로 달려나왔다.  마루까지 순식간에 뛰쳐나온 케이

건은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륜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기겁하여 외쳤다.

"사모! 사모는 어디 있어요?"

케이건은 입술을 깨물며 무학당을 바라보았다. 이제 무학당은 불구덩이

로 바뀌고 있었다. 케이건은 륜을 팽개치듯  내려놓고는 다른 손의 바라

기도 집어던졌다. 그것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쥐고 있기 힘들 정도였

다. 그리고 케이건은 다시 마루 위로 뛰어올랐다.

도로 불 속으로 뛰어드는 케이건을 보던 륜은 그제야 사모가 안에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륜은 공포에 질려 케이건을 따라 달려가려 했다. 그러

나 그 때 아스화리탈이 그에게 날아와  앞을 가로막았다. 그냥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얼굴에 달라붙어버렸다. 륜은  비틀거리다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 순간 충격과  착상에 관련된 해묵은  농담이 현실이 되었다.

땅에 부딪히자마자 륜은 자신이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머리 속에 떠오른 착상으로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얼굴에 올라

탄 채 날개를 푸드덕거리고 있는 용을 옆으로 치워야 했다. 륜은 헐떡거

리며 외쳤다.

"아스화리탈, 아스화리탈! 비켜!"

마구 휘두른 손이 아스화리탈에게 부딪혔다. 아스화리탈은 훌쩍 날아올

랐고 허공에 뜬 채 걱정스러운 기세로  륜을 내려다보았다. 륜이 또다시

불 속으로 뛰어들면 어쩌나 하는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륜은 아스화리

탈에게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륜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닐렀다.

[라르간드!]

이제는 익숙해진 느낌이 륜을 에워쌌다. 륜은 여신의 힘이 자신에게 깃

드는 것을 느끼며 간절히 소망했다.

[당신의 힘은 물이지요. 제발 도와주세요! 폭우를!]

하늘이 천둥으로 포효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케이건은 사모를 붙잡았다. 벽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위에서는 불티가 후두둑 떨어졌다. 악전고투 끝에 사모를 안아들

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케이건은 연기를  잔뜩 들이마시게 되었다. 케이

건은 쿨럭거리며 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때 불길을 이기

지 못한 서까래가 케이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케이건은 사모와 함께

우당탕 쓰러졌다. 케이건은 신음을 토하며  다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헐떡이는 바람에 더 많은 연기를 들이마셨고 케이건은 허파를 통째로 토

해낼 듯한 격한 기침을 하게 됐다. 입으로 피리 소리 같은 것을 내며 케

이건은 사모가 어떤지 돌아보려 했다. 그  순간 케이건의 눈앞이 캄캄하

게 바뀌었다. 케이건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를, 폭우를!]

륜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계속해서 닐렀다.  빗줄기가 그의 머리와 어깨

를 사정없이 때렸지만 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폭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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