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29화 (29/62)

눈물을 마시는 새.

8. 북부의 왕 - 2

의도와 행위 사이의 불일치가  빚어내는 불쾌한 결과를  가리키는 말로

실수라는 것이 있다. 그 말을 따른다면  조타 중대사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티나한은 키준 산맥으로 돌

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을 방법을 열성적으

로 모색하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케이건의 경우에도 여전히 그

설명은 들어맞지 않았다.

케이건 드라카는 찢어지려는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몸 일부분은 앞으로 달려나가 륜의 몸을 산산조각내고 그 피를 몸

에 뒤집어쓰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그런 일부분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며 자리에 앉아  조용히 륜을 바라보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후자의 요구에 따라 케이건은 륜이 그를 속인 나가가 아님을 자

신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전자는 케이건에게 그저 눈을

뜨고 똑바로 바라볼 것을 요구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가의 모

습이었다. 그리고 케이건은 그 나가를 갈기갈기 찢어놓기를 원했다.

원추리, 그녀가 좋아했던 꽃.

다른 것이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좋아했던 노래나 그녀가 좋

아했던 날씨. 그 어떤 것이라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케이건이 닻-덮

개-장애물-접근금지표시로 사용했던 것은 그녀가 좋아했던 꽃이었다. 그

것을 기억하지 않는 이상,  지나치게 두껍게 쌓여있는  시간의 바닥으로

갑자기 끌려내려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바꿔 말한다면 단단한 현재를

디딘 채 계속 '길잡이'로 서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티나한이 그 꽃의 이름을 말했고 기억의 누락이 보충된 순간 케

이건은 그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 침몰은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으며, 내부적으로도 마찬가지였

다. 케이건 자신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잠시  현재를 살며 과거를

살았다. 어리둥절한 상태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가가 그를 세  번째로 속였을 때 케이건은  그 깊은 바닥으로

위로 솟아올랐다. 잊고 있었던 과거와  연결된 상태로. 케이건이 느끼고

있는 몸이 찢어질 듯한 갈등은 바로  그런 부상(浮上)의 여파였다. 과거

의 그가 원하는 것과 현재의 그가  원하는 것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고…

그것은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케이건은  한 번에 두 가지 역할은

수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것을 천천히 시험하고 있었다.

서두르지도, 흥분하지도 않으면서.

돌이킬 수 없이.

케이건은 륜을 바라보았다.

륜은 원무를 추는 두억시니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저 먼  남쪽 밀림

속의 피라미드에 있는 '그것'은  일의 경과에 대해  몹시 실망하고 있는

듯했다. 케이건은 니름을 들을 수 없었지만 두억시니들의 움직임에서 묘

한 실망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니름을 들을 수 있는 륜은 그

실망감을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받을 수 있었다.

[너희 동족은 정말로 괴악하구나. 륜 페이.]

[할 니름이 없습니다.]

[신을 잃고 이렇게 슬퍼하는 나와 나들도  있다. 우리 존재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신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고 그런

흉한 일을 벌이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구나. 신을 억류한다고? 그래

서 무엇을 얻는다는 거냐? 여신의 증오?]

[저는 중도포기한 수련자일 뿐이라서 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

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로, 그들은 물의 힘을 자유

로이 쓸 수 있게 된 듯합니다.]

[설명해다오.]

[물, 불, 바람, 흙은 세상을 이루는 힘의 근원들입니다. 그것들은 서로

엉겨 세상을 이룹니다. 그리고 신들은 그  힘들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의 힘을 통제하는 여신을 억류함으로써 그들은 그 통제권을

훔칠 수 있게 된 듯합니다.]

[어떻게 해서?]

[신명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오직 발자국 없는 여신만이 신명을 허락하

셨습니다. 그 때문에 이런 끔찍한 배신이 일어난 것이겠지요.]

[너도 신명을 가지고 있잖아.]

[네?]

륜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도는  두억시니들을 바라보았다. 유해의 폭포

는 다시 닐렀다.

[너 또한 신명을 가지고 있다고 닐렀다. 그렇다면 너도 네 신부의 힘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니름이 맞군요. 하지만 그건… 여신을  배신한 다른 신랑들의 행위

에 동참하는 일이 되는 것 같군요. 그 힘의 주인은 제 신부입니다.]

유해의 폭포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닐렀다.

[미안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해줬으면 좋겠다. 너희 나가들 중에 여신과

가장 가까운 것은 신명을 받은 너희 신랑들이라고 생각되는데, 맞는가?]

[협의적으로, 맞습니다.]

[그렇다면 너 이외에 누가 신부의 것을 사용할 수 있지?]

[아무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 힘의 주인은 여신입니다. 신명을 받은

저희들이 비록 여신에 대해 보다 가까운  관계를 주장할 수 있을지는 몰

라도…? 설마?]

[륜. 그렇다. 나는 네가 여신의 힘을 이용해서 두억시니의 신에게 일어

난 일을 확인해주었으면 하는데.]

안타깝게도 륜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륜은 두억시니들을 향해 닐

렀다.

[죄송합니다! 우선 제가 먼저 시도해볼  일이 있습니다. 대화는 다음에

하면 안 되겠습니까?]

륜은 유해의 폭포가 보내어오는 정신에서 뚜렷한  아쉬움을 읽을 수 있

었다. 하지만 천년의 세월을 흘러내린 그 폭포가 함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미덕은 참을성이었을 것이다.  유해의 폭포는 주저하지  않고 접촉을

끊었다. 두억시니들의 원무가 멈췄다.

그리고 륜은 두억시니들 사이를 빠져나가 마루 위로 뛰어올랐다.

축대 위에 엎드려 있던 마루나래가 흠칫하며 일어났고 처마에 앉아있던

아스화리탈 또한 고개를 홱 들었다. 케이건은 손을 등 뒤로 돌려 바라기

의 자루를 움켜쥐며 일어났다. 하지만 두억시니들을 관찰하고 주위를 둘

러본 케이건은 어디에서도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마루나래와 아스화리

탈 또한 같은 결론에 도달한 듯 경계 태세를 풀었고 케이건은 고개를 갸

웃한 채 륜이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았다.

륜은 사모 페이가 누워있는 방에 뛰어들었다.

그 자신이 만든 상처는 이미 아물어 있었다.  하지만 사모 페이는 살아

있지 않았다. 륜이 보내는 어떤 니름에도 대답하지 않는 그 정신은 엄격

하게 닫혀 있었다. 그 곁에서 륜이 보내어야 했던 시간들은 황폐하고 어

둡고 차가웠다. 하지만 이제 륜은 그런  시간들을 부정하며 사모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륜은 뚜렷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는 잘 알고 있었다. 륜은 침착해지려  애썼다. 마침내 만족할 만한 정신

상태에 도달했을 때 륜은 차분하게 닐렀다.

[라르간드.]

륜은 불과 조금 전 유해의 폭포에게 '힘은 여신의 것'이라고 닐렀던 것

을 잊지는 않았다. 륜은 자신을 합리화해보려 했다. 여신의 힘은 무엇인

가, 여신의 의지는? 신들은 자신의 선민  종족들을 보살핀다. 발자국 없

는 여신이 원하는 것은 나가의 복지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모두 헛니름이다.

륜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 시도하는 자기 합리화는 니름도 안 되

는 웃기는 짓거리다. 어쨌든 신은 '전일 근무 가능한 무보수 만능 하인'

이 아니다. 가사 상태에 빠져 있는 누나를 되살린다는 극히 개인적인 욕

구를 위해 여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부도덕하다.

그 힘을 탐내어 여신을 배신한 다른 신랑들만큼이나.

그러나 륜은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의 시야는 계속 축소

되어 마침내 그의 우주 속에 륜과 사모를 제외한 모든 것을 삭제했다.

전 우주에 존재하는 하나의 의미를 향해 륜은 닐렀다.

티나한은 케이건을 보곤 손을 흔들었다.  케이건은 가볍게 목례하는 것

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학당 앞을 지키고 있는 초현실적인 호위병들을

죽 둘러본 티나한은 철창을 나무에 기대어놓고는 케이건 옆에 섰다.

"나 떠날 거야."

"그러시오?"

"응. 대사원에서 받은 임무는 벌써 오래 전에  끝냈고, 모든 이보다 낮

은 여신이 안전하다는 것도  확인했으니 이제 본래  하던 일로 돌아가야

지. 가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어."

"무엇이오?"

"네가 해보였던 하늘치 도발 말이야. 만일  내가 그걸 흉내내서 하늘치

를 땅에 내려오게 한  다음 그 등에 올라타겠다면,  그거 괜찮은 생각일

까?"

"죽을 거요."

자르듯 말하는 케이건의 태도에 티나한은 머쓱한 기분을 느꼈다.

"살아서 그 등에 올라탈 방도가 전혀 없을까?"

"딱정벌레를 타고 있다면 도망치는 것은 가능하오. 나와 비형이 그랬듯

이. 하지만 딱정벌레는 도망치는 것 외에는 다른 도움을 줄 수 없소. 절

대로 접근하지 않으려고 할 테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맨몸으로 요동치는

하늘치에 뛰어오를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건 어떻게 봐도 미친 짓이오.

저들에게 물어보면 아마 확인해줄 수 있겠지."

케이건이 가리킨 것은 두억시니들이었다.  티나한은 아랫부리를 쓸어만

지며 말했다.

"그렇다면 역시 연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인가."

"다른 방법도 있소."

"뭐지?"

"인간의 신체를 찾아서 그 영을 빼버림으로써 어디에도 없는 신을 봉인

해버리는 것. 그러면 승려들은 바람의 힘을  자유로이 쓸 수 있을 거요.

당신은 그들이 일으킨 바람을  타고 영광의 창공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

거요."

티나한은 약간 당황했다.  케이건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조금 생각한 티나한은 그것을 차가운 농담이라고 판

단하기로 했다.

"나가들은 정말 고약한 짓을 했어."

케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티나한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도대체 그렇게까지 해서 세상의 나머지 반을 손에 넣고 싶은 걸까? 지

금도 이미 반을 가지고 있잖아. 그리고 나는 나가들이 영토 부족에 헐떡

인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

케이건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티나한은 부리를  살짝 부딪히고는

말했다.

"네 계획은 뭐야?"

"계획?"

"그래. 너도 일 끝낸 거잖아.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집으로 돌아가서…

그걸 계속할 거야?"

"나가를 잡아먹는 것 말이오?"

티나한은 벼슬을 조금 경직시켰다.

"뭐, 그래."

"여기 있을 거요."

"왜?"

"쥬타기 대선사가 다음에 요청할 것을 짐작하니까."

"그게 뭔데?"

케이건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발자국 없는 여신을 구출하라는 요청을  할 거요. 정확하게 말

한다면 발자국 없는 여신이 갇혀 있는 신체를 구출하는 일이 되겠지만."

티나한은 크게 놀랐다.

"말도 안돼! 그 신체가 어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가들의 도

시 가운데 엄중하게 격리되어 있을걸?"

"아마도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일 거요. 현재로서는 그보다 더 그럴 듯한

장소를 떠올릴 수 없군. 모든 일이 일어난 곳이 그곳이니까."

"그런가? 그렇겠군. 어쨌든 그건  륜을 구출하는 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려운 일이야. 륜은 우리를 만나려고 스스로 찾아왔어. 하지만 그

신체는 하텐그라쥬 가운데 갇혀있을 텐데, 그럼 너는 하텐그라쥬까지 들

어가야 하잖아? 불가능해!"

"그렇겠지."

"그럼 거절할 건가?"

"아니오."

티나한은 격노했다.

"왜! 저 중들의 요청이 있으면 개죽음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제

기랄, 굳이 따지고 보면 이건 그  땡중들이 멍청하게 속아넘어가서 일어

난 일이야. 나가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허겁지겁  신명을 가진 사자를 모

셔오고, 만다라를 그리고, 여신을 불러내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그 놈들이 책임지라고 해! 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

"나는 그렇게 할 거요. 티나한."

"무엇 때문에!"

"그래야만 내가 원하지 않는 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니까."

티나한은 무슨 선문답이냐는 듯이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케이건

이 더 이상 설명할 생각이 없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욕구 불만

을 느낀 티나한이 다시 뭔가를 따져보려 할  때였다. 머리 위로 세찬 날

개소리가 들려왔다.

티나한은 깜짝 놀라 위를 바라보았다. 한 순간 티나한은 비형이 돌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은 나늬에 비

하면 훨씬 작은 딱정벌레였고 사람을 태우고 있지도 않았다. 함께 그 모

습을 올려다본 케이건이 말했다.

"하인샤 대사원의 딱정벌레요."

"대사원의?"

"그렇소. 즈믄누리는 세상의 몇몇 중요한 장소와의 긴밀한 연락을 위해

품종이 좋은 딱정벌레를 파견하곤  하오. 저것도 그  중 하나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도깨비들의 사육 실력을  따를 수 없다 보니 저

런 왜소한 놈으로 키울 수밖에 없는  모양이오. 연락용으로만 쓰이니 사

람을 태울 필요는 없고, 그래서 작아도 상관은 없겠지만."

"사람을 태우지 않으면 어떻게 연락을 한다는 거야?"

"긴 내용이라면 서신을 가지고 있을 테고 짧은 내용이면 수화로 전달하

오."

"아하, 그렇군. 그렇다면 저건 즈믄누리로 날아가는 건가?"

"그럴 거요. 아마도 작금의  사태를 전달하기 위해서  날아가는 것이겠

지. 나가 잡는 것은 도깨비라고 하니, 바우 성주의 조언은 도움이 될 거

요."

"조언보다는 도깨비 수백 명을  보내주는 쪽이 낫지  않을까. 그렇다면

네가 하텐그라쥬로 쳐들어가는 것을 도와줄 수 있을 텐데."

"도깨비들에게는 요청할 수 없는 일이오. 티나한."

"그렇다고 해서 혼자 갈 수는 없잖아."

"사제들이 요청하면 혼자라도 갈 거요."

티나한은 험악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의 견해로 케이건의

말은 '자살하겠다'는 말과 완전히 동의어였다. 나가 도시 한가운데의 인

간이라니, 그보다 눈에 더 잘들어오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케이건은 하

텐그라쥬에 도달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티나한에게 설득의 재능은 언제나  낯선 것이었다. 티나한은 케

이건을 도통 설득할 수 없었다. 결국  티나한은 케이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티나한은 륜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

지만 두억시니들과 마루나래는 티나한이 무학당에 접근하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티나한은 몇 번 고함을 질러보았지만 륜은 나오지 않았다.

케이건은 륜이 청각에 조금도 신경쓰고 있지  않을 거라고 설명했다. 결

국 티나한은 케이건에게 인사를 당부한 다음 떠났다.

그러나 티나한에게 있어 하인샤 대사원을 떠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일주문을 향해 내려가는 티나한에게 다가서는  사람들의 숫자는 엄청났

다. 그들은 티나한에게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어내려고 애썼고 결국 티나

한은 화가 났다는 표시로  깃털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문이 가까워졌을 때 티나한은 괄하이드  변경백에게 걸음을 멈출 것

을 요구당해야 했다.

"케이건 드라카와 동행 맞으시오?"

티나한은 빳빳하게 곤두선 깃털들 사이로  괄하이드 변경백을 내려다보

며 말했다.

"그렇다. 티나한이라고 한다. 너, 케이건과 싸웠다는 그 인간이냐?"

"그렇소. 괄하이드 규리하라 하오. 여기를 떠나는 길이시오?"

"그래."

"괜찮으시다면 산 아래까지 함께 걸어도 되겠소?"

티나한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티나한은  용감한 사내를 존중했고 깃

털을 빳빳하게 곤두세운 레콘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남자는 용감한 사

람임에 틀림없다. 티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대로."

그들은 함께 오솔길을 걸었다.

엄숙한 나무들 사이로 숲내음이 흘러넘쳤다. 희미한 흙냄새는 티나한을

기분 좋게 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힘이 땅이라고?' 티나한은

레콘이 왜 모종의 액체를 싫어하는 건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모

종의 액체는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그보다 더  낮은 것이 있다면

땅이 거기에 해당한다. 조각난 채 오솔길 위에 흩어져 있는 햇빛을 밟으

며 두 사람은 한 동안 침묵한 채 걸었다.

"케이건 드라카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겠소?"

괄하이드의 조용한 질문에 티나한은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케이건 드라카에 대해 무엇이 궁금하지?"

"여러 가지. 그는 정말 북부의 왕이 될 작정인 거요? 그렇다면 그는 그

에 합당한 자요? 합당하다면 어떤 점에서 그렇고 합당하지 않다면 그 부

족한 것들은 보완될 수 있는 거요?"

"케이건은 왕이 될 생각이 없어."

"그렇다면 역시 그건 나를 싸움에 끌어들이기 위해 한 말이군."

"아마 그럴 거야."

괄하이드는 조금 침묵했다가 말했다.

"만약 내가 그를 북부의 왕으로 추대한다면, 그건 망령된 짓이겠소?"

티나한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괄하이드는  눈썹을 곤두세운 채 티

나한을 노려보았다. 티나한은 손을 내저었다.

"어, 아냐. 너를 비웃는 것이 아냐. 네가 케이건에게 그렇게 말하면 케

이건이 어떻게 대답할지가 떠올라서 말이야."

"뭐라고 대답할 것 같소?"

"미안하지만 너를 박살낸 다음 이렇게 말할 거야. 잔치는 모두 끝났소.

집으로 돌아가시오."

변경백은 당연히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티나한은 변경백

에게 그들이 여행하는 동안 만났던  제왕병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

었다. 괄하이드는 이해했다.

"그런 시답잖은 작자들에게라면 나  또한 그렇게 말해줬을  거요. 만약

규리하 영지 내에서 그런 자를 만났다면  참살을 명령했을 테고. 하지만

케이건이 그런 시답잖은 자들에 속하는 사람이오?"

티나한은 인간들이 나가 잡아먹는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티나한은 그것을 언급하는 대신 질문을 하기로 했다.

"왕을 그렇게 되찾고 싶은가?"

"그것은 우리 가문의 사명이나  다름없소. 물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왕이 돌아올 때까지 그 땅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오." 괄하이드는

잠시 침묵했다. "어쩌면 나는 지친  것일지도 모르겠소." 괄하이드는 한

숨을 내쉬었다. "왕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왕의 백성이 될 자들을 때려죽

여야 한다는 모순에 말이오."

티나한은 깊은 인상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 그건 모순이군. 키탈저 사냥꾼들의 저주처럼."

변경백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혜로운 분이시군. 내가 알기로 레콘들은 자신의 평생 숙원에 관련이

없는 지식에는 별 관심도 없다던데. 혹 역사학자가 되는 것이 평생 숙원

이시오?"

"아냐. 케이건이 가르쳐줬어."

"그렇군. 어쨌든 그것은 내 평생을 바쳐  이룩한 것을 근본부터 뒤흔드

는 모순이오. 케이건은 내 인생이 '과부와  고아 생산에 바쳐진 인생'임

을 지적했소. 그것은 무사가 당연히 걸머져야 하는 숙명이오. 그러나 내

가 가진 모순은 그보다 더 끔찍하오. 나는 지러쿼터 산맥을 넘어오는 왕

의 백성들을 죽여 그들의 피로 산맥을  물들였소. 물론 그것은 변경백의

권리요. 왕이 변경백의 것을 함부로 할 수 없듯 왕의 백성들도 변경백의

것을 탐할 수 없음은 마찬가지이니. 하지만…  아시겠지만 나는 정통 변

경백이 아니오. 나는 왕에게  평가받고 싶소. 내가  왕에게 돌아갈 것을

지켜온 자인지, 그렇잖으면 왕이 주지 않은  권리를 남용하여 왕의 백성

을 함부로 죽인 자인지 알고 싶소.  어느 쪽이라도 좋소. 하지만 대답을

얻지 못한 채 죽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오."

티나한은 동정심을 느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네가 가치있게 살았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왕밖에 없는 것이군?"

"무가치하게 살았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도 그 분뿐이오. 티나한."

"스스로 만족할 수는 없나?"

"그래보려고 노력했소. 그리고, 죽을 날이 가까운 지금 그런 쪽으로 마

음이 기울어있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내 생전에 영

웅왕의 검이 돌아온 모습을 보고 싶소."

씁쓸히 말했던 괄하이드는 티나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

을 깨달았다. 티나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영웅왕의 검? 그건 이미 봤잖아. 너 케이건과 싸웠다면서."

"음? 무슨 말이오?"

"케이건이 가지고 있는 바라기 말이야. 그게 영웅왕의 검인데."

괄하이드는 육십 년의 세월 동안 그토록 놀란 적이 없었다.

무학당 앞을 지키고 있던 행자들은 울상이 되었다. 늙은 변경백은 수염

을 바르르 떨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런 무장을 가지고 있지 않

았지만 행자들은 괄하이드의 눈빛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행

자들이 조금이나마 안도하게 된 것은 그들의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

을 때였다. 행자들은 뒤를 흘끔 쳐다보았고  케이건이 걸어오고 있는 모

습에 안도했다.

케이건은 행자들의 곁을 지나쳐 괄하이드의 앞으로 걸어왔다.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소?"

괄하이드는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행자들의 모습을 보며  말을 삼켰

다. 그는 케이건에게 약간 떨어진 곳으로  가자는 몸짓을 했고 케이건은

그를 뒤따랐다.

그들은 조그마한 수풀 옆으로 걸어갔다. 행자들에게서 충분히 멀어졌다

고 판단한 괄하이드는 케이건의 등 뒤쪽에서 비죽 솟아있는 바라기의 칼

자루를 보며 말했다.

"케이건 드라카. 그것이 진짜 영웅왕의 검이오? 내 대도는 영웅왕의 검

에 맞아 부러진 거요?"

"…티나한에게 들었소?"

"진짜요?"

케이건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괄하이드는  그대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힘겹게 말했다.

"그걸 증명할 수 있소?"

"증명해야 하오?"

"제발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말아주시오! 그걸 증명할  방법이 있

소?"

케이건은 변경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괄하이

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 검은 최후의 대장간에서  벼려진 검이오. 하지만  최후의 대장간은

레콘들 이외엔 찾아갈 수  없으니 안되겠군. 그러나  하인샤 대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오래된 죽편을  뒤지면 영웅왕 시대의  기록도 찾아볼 수

있을 거요. 그 기록들 중에는 영웅왕의 두 자루 검이 어떻게 해서 한 자

루로 합쳐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소."

"두 자루가 하나로! 그래서 그렇게 생긴 것이군?"

"그렇소."

괄하이드 변경백은 침착하려 애썼다. 그럴 듯한 이야기였다. 꾸며낸 이

야기라면 이토록 기상천외하지는 않을 것이다. 괄하이드는 크게 뜬 눈으

로 바라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소. 그 기록을 찾아보겠소.  그런데 그 전에 묻고  싶군. 당신이 왜

영웅왕의 검을 가지고 있는 거요?"

"손에 들어왔으니 가지고 있는 거요. 과텔과  케나린이 임자 없는 것을

가졌듯이."

"영웅왕의 검은 아라짓 전사의 충성의 대상이오!"

"알고 있소."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당신이 영웅왕의 검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

은 당신의 아라짓 전사를 가질 수 있단 말이오. 아라짓 전사들은 영웅왕

의 검의 계승자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까!"

"아라짓 전사를 가져서 뭘 하라는 거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요?"

"왕이 되라는 말인가 보군. 나는 관심 없소. 그  날 내가 했던 말은 당

신을 충동질하기 위해 꾸며댄 말이오.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겠소."

괄하이드는 수염을 잡아뽑고 싶다는 표정이 되었다.

"우리에겐 왕이 필요하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왕이 없었소. 당신에겐

눈이 없소? 나가처럼 듣지 못하는 거요?  왕을 원하는 저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없고 그 소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거요?  왕은 돌아와야 하

오. 더군다나 나가들이 짐작하기도 힘든 힘을  손에 넣은 지금에 와서는

반드시!"

"그들이 원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내가  왕이 될 생각은

없소."

괄하이드는 무서운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변경백이 말하

기 전 케이건이 먼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소."

"뭐요?"

"이 바라기를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겠소."

괄하이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케이건 드라카!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이 없다면,  왕이 될 재목에게 그

걸 넘기는 것이 정당한 처사잖소!"

"이건 내 소유물이고, 내 소유물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내 재

량이오."

"그건 당신만의 물건이 아니오! 왕을 기다리는 모든 자의 것이오!"

케이건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는 뒤로 한 발자국 물

러났다. 괄하이드는 그런 거리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앞으로 걸어가려 했

지만 케이건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괄하이드는 멈춰섰다.

케이건은 단조롭게 말했다.

"그렇다면 왕을 기다리는 그들 모두에게 권리를 주겠소."

"권리? 무슨?"

"나를 죽이고 바라기를 뺏어갈 권리."

괄하이드는 충격을 받았다. 변경백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케이

건은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 등에 걸려있는 바라기의 모습이 완전히 드

러났다. 괄하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때 케이건이 몸을 돌린 채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시도하지 않기를 바라오. 괄하이드 규리하."

"왜?"

"당신은 이미 왕의 것을 보관하고 있소. 그것도  훌륭히. 더 이상 왕을

위해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오."

괄하이드는 머리 끝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노(老) 변경백

이 그의 왕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케이건이 왕이 아니었음에도 불

구하고 괄하이드는 무엇인가가 충족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바

라기를 가진 자의 말이기 때문일까? 괄하이드가  뭔가 대답의 말을 해보

려 했을 때 케이건은 이미 무학당으로 들어서는 굽이를 돌아들어간 뒤였

다. 괄하이드는 케이건을 볼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변경백은 몸을 돌렸다.

흥분은 가시지 않았고  감정은 조금도 정리되지  않았다. 걸음걸이마저

이상하게 바뀐 듯한 느낌에 변경백은 당혹했다. 괄하이드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걸어내려갔다.

잠시 후 그들이 서있던 곳 옆의 수풀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영리하게 생긴 그 남자는 조금 전 훔쳐들은 대화를 곰곰히 생각하며 변

경백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반 시간  쯤 지났을 때 자신의 아버지

와 형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발케네의  대족장 코네도 빌파는 경

악했다.

"영웅왕의 검이라고!"

토카리 빌파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렇습니다. 대사원의 기록을 조사하면 증명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토카리의 형이자 코네도의 장자인 그룸 빌파는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그거 비싼 물건이겠군요?"

그룸은 아버지와 동생이 자신에게 보내어오는 눈길에 당황했다. 토카리

는 어이없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코네도는 그렇게까지 실망

하지는 않았다. 아들 중 하나를 대사원에서 공부하게 한 것은 정말 훌륭

한 결정이었다고 자찬하며 코네도는 토카리에게 말했다.

"네 형에게 설명해줘라."

"예. 그 옛날 아라짓 전사들은 영웅왕의 검을 계승한 왕에게 충성을 맹

세했습니다. 영웅왕의 검이 사라진  직후 아라짓 전사들이  그 용맹함을

잃고 소작농들을 끌어모아  만든 오합지졸만큼도 못한  존재로 변해버린

것은 바로 그런 사정에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영웅왕의 검을 손에 넣

을 수 있다면 그는 아라짓 전사를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셈입니

다."

"그런가? 하지만 그건  이름일 뿐이잖아. 누군가에게  아라짓 전사라는

이름을 붙여준다고 해서 그  자가 옛날의 진짜  아라짓 전사처럼 훌륭한

전사로 바뀌는 것은 아닐 텐데."

"저 괄하이드 변경백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왕병자들 중에는  꼭 왕이

되고 싶은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왕병자들을 따라 다니는 사람

들의 숫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보다 왕의 전사,

혹은 왕의 신하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수가 훨씬 많습니다. 그들에

게 적법한 권리에 의해 아라짓  전사의 이름을 줄 수  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주퀘도 사르마크는 그 영용함만으로도 무수히 많은 추종자

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왕이 돌아오기를  원하는 자들이 그렇게 많았

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퀘도 사르마크에게 아라짓  전사를 지명할 수 있

는 권한까지 있었다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그룸 빌파는 그제야 동생이  말하고픈 바를 이해했다. 그의  눈이 조금

전과는 다른 광채로 빛났다. 코네도는 두  아들이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

을 확인한 다음 말했다.

"그 검을 가져야겠다. 훗날  거사를 일으킬 때 그  검은 너희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어떻게? 훔칠  방법이 없습니다. 무학당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요. 게다가 밖으로 혹 나온다고 해도  그 녀석, 괄하이드 변경백을 가지

고 놀 정도의 칼잡이인데요."

그룸의 지적에 코네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녀석 스스로 가지고 나오게 해야지."

그날 밤, 대족장을 따라왔던 발케네 사내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대

사원을 떠났다. 깊은 새벽을 틈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말의 발까지 싸맨

다음 떠났기에 아무도 그가 대사원을 떠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발케네 사내가 대사원을 떠나고 있던 시각, 케이건은 방문을 열고 나오

는 륜을 바라보고 있었다.

륜은 마루에 서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있었다. 심사가 사나

운 듯 비늘을 곤두세우던 륜은 문득 마당 저편에 케이건이 있는 것을 발

견했다. 륜은 놀라서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두억시니들도 곤하게 잠들

어 있는 가운데 마루나래만이 잠시 고개를  들었다. 륜은 마당을 가로질

러 케이건에게 걸어갔다.

마당에 돗자리를 깔아둔 채  누워있던 케이건은 륜이  가까이 다가오자

몸을 일으켜 앉았다. 돗자리 앞에 선 륜은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왜 밖에서 주무십니까?"

"여름이다, 륜. 밖에서 자는 것도 괜찮아."

"저를 지키고 계셨던 겁니까? 하지만 이곳에는 마루나래도 있고 두억시

니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스화리탈도 있고…"

그렇게 말하던 륜은 아스화리탈이 아직 날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륜은 지붕 위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아스화리탈이 배를 하늘로 향

한 방만한 자세로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케이건이 조용히 말했다.

"근면성실한 경호자라고 하긴 어렵겠군."

륜은 헛웃음을 지으며 돗자리에 주저앉았다. 여름이라는 케이건의 말을

생각한 륜은 걸치고 있던 흑사자 모피를  조심스럽게 벗었다. 하지만 산

속의 밤은 아직 그에겐 쌀쌀했다. 륜은 모피를 다시 어깨 위로 끌어올렸

다.

"아까 느닷없이 방안으로 달려들어갔지."

"시도해볼 만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뭘 하고 있었는데?"

"누님을 깨워보려고 했습니다."

"여신의 힘으로?"

륜은 깜짝 놀라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두 손으로 돗자리를 짚

은 채 여름의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신명을 가지고 있잖아."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여신이 감금되었을 때부터."

"…저는 아까 낮에 깨달았습니다. 그것도 유해의 폭포가 닐러줘서."

"그랬나. 네 모습을 보아하니 일이 잘 안된 모양이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신의 힘을 가져다 쓸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저는 그 일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낫으로 못을 박고 망

치로 풀을 베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여신의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군."

"예. 간혹 누님의 정신과 접촉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건 제 간절함 때

문에 느낀 착각은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누님의 정신에 닿았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니름을 전할 수도 없었고  제 존재를 깨닫게 할 방

법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는 신이 아니다. 륜."

륜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중도포기한 수련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다 들더군요.

저는 여신의 힘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문제라면 쥬타기 대선사나 오레놀 대덕에게 물어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지금 주무시겠지요?"

"아니."

"예? 왜 안 주무시는 거지요?"

"종규해석이 길어지고 있다. 그래서 대선사는 종규해석소에서 퇴장하지

못하고 있어. 오레놀은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바쁘고."

"왜 길어지는 거지요? 그건 대선사를 용서하기  위한 요식적인 행사 아

니었던가요?"

"용서는 끝났다. 문제는 향후의 대응방향이다. 하지만 지금 승려들에겐

나가에 대한 정보가 지나치게 부족해. 하텐그라쥬와 통하는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던 뱀단지는 이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건 승려들

을 기만하는 수단이었지."

"그걸 가져온 것은 요스비였습니까?"

케이건은 고개를 돌려 륜을 바라보았다.

"어떤 나가가 그 뱀단지를  가져왔다더군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저와

제 누님 이전에 한계선을 넘어온 나가는 제 아버님이었습니다."

"네 아버지가 이 음모에 관련되었을 거라고 의심하는 거냐?"

"그럴 리는 없습니다.  아버님은 11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뱀단지가 북부에 오게 된 건 그보다 전의 일이겠지요."

"그 뱀단지는 요스비가 하인샤 대사원과의  연락을 위해서 가져온 것이

었다. 요스비는 정신억압자였지."

"그렇다면 누님은 아버님의 자질을 이어받은 것이군요."

케이건은 몸을 꿈틀했다. 륜은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예. 누님의 아버지도 요스비였습니다."

"요스비의 제자가 아니라 요스비의 딸이었단 말이냐?"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 둘 다…"

"요스비의 자식입니다."

"그렇군." 케이건은 조금 후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렇군."

"이제 당신이 제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케이건은 륜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빨려들어갈 것 같다고 생

각한 륜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 무학당을 바라보았다.

"누님을 제외하면 당신은 요스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런

데 누님은 저렇게 의식을 잃은 채 누워 계십니다. 이제 요스비를 기억하

는 사람은 당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발 말씀해주십시오. 당

신과 요스비의 관계는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당신이 요스비를 아버지라

고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언제?"

"제가 아버님의 죽음을  알려드린 날, 유료도로당에서.  당신은 기묘한

장소에 서서 폭풍 치는 하늘을 향해  외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핏값

을 받아내겠다고. 물론 저는 나가가 인간을  낳았다는 식의 황당한 이야

기는 믿을 수 없습니다. 왜 요스비를 아버지라고 불렀던 겁니까?"

"그는 내 마지막 아버지였다."

"네?"

케이건은 오른쪽 무릎을 끌어당겨 그 위에 오른팔을 얹었다. 그리고 오

른손등으로 턱을 받친 채 마루나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옆에 있는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다. 내 생애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발톱을 곤두세운 야수였지.  기나긴 도주와 추적이었

다. 그 야수는 몇 번이나 나를 잡아먹을 뻔했다. 하지만 내가 죽음의 위

기에 처했을 때마다 내게 목숨을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두 명의 여자

를 제외하면 모두 남자들이었지. 나는 내게 목숨을 준 그 남자들을 아버

지로 여긴다. 요스비는 내게 목숨을 준 마지막 남자였다."

"요스비가 당신을 살려줬단 말인가요?"

"왼팔을 잘라먹여서."

륜은 비늘을 곤두세웠다.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이야기였다. 륜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두 명의 여자는 어머니로 여깁니까?"

"한 명은 실제로 나를 낳은 어머니다."

"다른 한 명은?"

"내 아내였다. 나가들이 잡아먹은."

또다시 익숙해지기 힘든 이야기였다. 륜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케이건

의 과거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는 것이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

가와 인간은 말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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