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8. 북부의 왕 - 1
빗나갔어! 다시 찔러! 내 심장은 여기 있다. 볼 수 없나! 이렇게
불타고 있는데! - 어느 아라짓 전사의 외침.
냉혹의 도시에 냉혹한 햇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비아스 마케로우는 피부에 떨어지는 햇빛에 감미로워하지 않기 위해 애
썼다. 날씨가 맑은 것은 수호자들이 비를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
이다. 그리고 비아스는 그들이 주는 것에는 감사하고 싶지 않았다. 갑자
기 치민 분노 때문에 몸 곳곳에서 비늘이 일어났지만 겉으로 드러난 피
부는 평온했다. 심장탑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낼
수는 없다. 자신을 억제하려 애쓰며 비아스는 심장탑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비아스는 남자들의 표정에 만족했다.
비아스가 100 미터 저편에 있을 때부터 죽 관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
고 남자들 모두는 그제서야 비아스를 발견한 듯한 시늉을 해보였다. 속
아넘어가주는 것이 모욕이라 생각될 만큼 엉성한 모습이었고, 그래서 비
아스는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이 남자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휘자인 듯한 남자
는 자신의 악운이 단순한 전조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 현실이 되었음에
슬퍼하며 겨우 닐렀다.
[좋은 날씨죠?]
비아스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지휘자를 바라보았다. 지휘자는 자기 자
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표정을 지으며 좀 더 경비자다운 니름을 꺼내었
다.
[볼일이 있으시오?]
[나는 비아스 마케로우다.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 두세나 마케로우님을
뵈러 왔다. 분명 면회가 허락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휘자는 변명하고 싶었다. 면회는 허락되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는 않
았으며, 그래서 자신 또한 여자에게 고압적으로 말해야 하는 난처한 상
황을 아직 겪지 못했다고. 정정. 이제 처음 겪는 거라고. 지휘자는 간신
히 자신이 들었던 지시를 떠올릴 수 있었고, 비아스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건 뭡니까?]
비아스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는 그 덮개를 벗겼다. 철망으로
된 상자가 드러나며 그 속에서 영리하게 생긴 수달이 경계심 가득한 표
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위문품이지.]
위엄 있는 경비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자들은 모두 우리 옆으로
몰려와서는 순박하게 감탄했다. 부하들과 함께 수달을 손짓하며 수다를
떨던 지휘자는 문득 비아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비아스가 경멸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을 깨닫고는 부끄러움에 비늘을 곤두세웠다. 지휘
자는 부하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 놈들, 제자리로 돌아가!]
부하들이 투덜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간 다음 지휘자는 비아스를 위아래
로 훑어보는 시늉을 했다. 나가들에겐 그 이상의 조사가 불필요하다. 품
에 숨길 수 있는 단검 같은 것은 나가들에겐 별로 유용한 무기가 아니
다. 그래서 지휘자는 비아스에게 대형 병기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
중 하나에게 손짓했다.
[너, 어, 그러니까,]
[맥포리.]
[아, 그래. 맥포리. 비아스 마케로우를 안으로 안내해라. 간수장에게
안내하고 돌아오면 된다.]
맥포리는 비아스를 안내하여 심장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심장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비아스는 맥포리에게 말했다.
[수호자 갈로텍은 어디에 있지?]
[예?]
[수호자 갈로텍에게 안내해.]
[당신은 가주를 만나러 왔다고…]
[수호자를 만나고 난 다음에 만나겠어.]
맥포리는 별 생각없이 비아스를 갈로텍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 때
문에 맥포리는 갈로텍에게 무시무시한 꾸지람을 듣고서 목을 움츠린 채
물러나야 했다. 모른 체하며 벽장을 바라보던 비아스는 갈로텍이 다가왔
을 때에야 닐렀다.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그 자를 너무 탓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그 자는
남자가 여자의 면담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할 겁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겠지요. 이제는 아닙니다.]
[혁명가들은 사회적 관성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
지요.]
갈로텍은 '당신이 혁명가에 대해 뭘 아느냐'고 따지지는 않았다. 그 자
신도 자신이 혁명가라는 것 이외엔 혁명가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며,
갈로텍은 비아스가 바로 그것을 지적해서 그에게 망신을 줄 작정임을 충
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이 사회적 관성에 의해 당신 멋대로 저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
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저는 그것을 거절하겠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저를 만나고 싶다면 사전에 허가를 요청하도록 하십시
오.]
허가라는 말에 비아스는 발끈했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앞으로 영원히.]
[니름도 안 되는… 남자들이 그렇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 밖
의 경비자들은 제가 다가오는 것을 겁내고 있더군요. 걸어오는 저를 멈
춰세우고 용건을 묻는 것 자체를 무서워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백 미터밖에서부터 비늘을 곤두세운 채 제가 다가오는 걸 훔쳐보더군요.
똑바로 볼 용기도 없었던 거죠.]
갈로텍은 비아스의 니름을 믿었다. 그래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비아스는 득의만만하게 닐렀다.
[앞으로 영원히? 어림 없는 니름입니다. 지금 당장 밖으로 달려나가서
당신이 경비자랍시고 세워놓은 것들에게 한 번 당신을 공격하라는 명령
을 내려볼까요? 그 자들이 누구의 명령을 따를지 한 번 시험해보겠습니
까?]
갈로텍은 비아스가 원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불안을 표시하는 대신,
수호자는 차갑게 웃었다.
[그렇게 해보시지요.]
[네?]
갈로텍은 의자에 앉았다. 두 손끝을 서로 붙인 갈로텍은 그것을 입에
붙인 채 차분하게 닐렀다.
[아직도 자신이 남자의 머리 위에 있다는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했군요.
얼마든지 해보시죠. 아니, 제발 그렇게 해주기를 진심으로 간청하고 싶
군요. 그 자들을 구슬려서 저를 공격해보시죠. 그러면 저는 눈보라를 불
러와 당신들을 얼어붙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심장병을 가져와
모두 깨트리겠습니다. 그 다음, 당신들의 눈 앞에서 그 심장을 밟아 터
뜨리겠습니다. 당연하지만, 반만 죽이고 나머지 반은 살려둘 겁니다. 그
러면 살아남은 반수는 하텐그라쥬에 진실을 전할 수 있게 되겠지요. 누
가 질서를 정하며 질서 위에 있고, 누가 규칙을 수호하며 규칙 위에 있
는지를. 바닥에 흩어진 심장들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테니, 당신
이 어느 쪽 반수에 속할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용감한 여자일 테니, 비아스 마케로우. 제발 조금 전에 했던 니름대로
해줬으면 좋겠군요.]
비아스는 생기 없는 눈으로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공포도, 분노도 드러
내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비아스는 차
분하게 닐렀다.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쉽군요. 이제 돌아가시죠.]
[그 전에 제가 가져온 선물을 보여드릴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비아스는 갈로텍이 뭐라 니르기도 전에 들고 왔던 우리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덮개를 치웠다. 갈로텍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에겐 있지만 나가들에겐 없는 직업들 중에는 요리사 또한
당연히 포함된다. 산 것을 그대로 먹는 나가들은 요리의 맛에 큰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나가들도 특별히 선호하는 음식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맛
이 좋은 음식과 희소성이 높은 음식을 귀한 음식으로 치는 것과 마찬가
지로 나가들도 향이 좋거나 성질이 온순하다는 식으로 '먹는 행위를 즐
겁게 하는' 음식과 구하기 힘들기에 '먹었다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는'
음식을 귀한 음식으로 분류한다. 수달은 그 중 후자에 해당한다. 수중
생활을 하는 이 작고 민첩한 짐승은 나가들에게는 대단히 까다로운 사냥
감이다.
청빈한 생활을 해 온 수호자 갈로텍은 당연히 구경도 해 본 적이 없는
짐승이었다. 갈로텍은 눈을 빛냈다.
[제게 가져온 선물이라고요?]
비아스는 '가주님께 갖다드리라'고 닐렀던 소메로 마케로우의 초췌한
얼굴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렇습니다.]
[고마운 니름이시군요. 잘 받겠습니다.]
갈로텍이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비아스는 약
간 아쉬움을 느꼈다. 갈로텍의 침착한 태도는 그녀를 불만스럽게 했다.
덮개를 도로 씌워놓은 비아스는 머뭇거리는 시선으로 갈로텍을 바라보았
다.
갈로텍은 웃었다.
[좋습니다. 앉아서 닐러보시죠.]
비아스는 굴욕감을 삼키며 갈로텍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갈로텍은
그 이상 그녀에게 뭔가를 베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차분히 바라보는 갈
로텍의 시선에 비아스는 오기를 느꼈다.
[저도 덧셈, 뺄셈은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갈로텍. 당신이 보내준 그
다섯 명은 마케로우 가문을 떠난 다음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리
고 카린돌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 시점에서 저는 스바치와 카루를 붙잡
기 위해 그 다섯 명을 파견했다는 당신의 니름을 계속 신뢰해야 할 필요
를 느낄 수 없더군요. 당신이 노렸던 것은 스바치와 카루가 아니지요.
카린돌이었을 겁니다.]
[계속해보시지요.]
[그리고 카린돌을 손에 넣은 직후 당신들은 기적이라고 할만한 능력을
발휘하며 하텐그라쥬를 장악했습니다. 도무지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 두
사건 사이에 인과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의심을 느끼게 되는군
요.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제가 왜 그래야 하지요?]
비아스는 다시 비늘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옷 속에
서 몸을 움츠렸다.
[당신의 잠재적 동맹자에게 주는 선물로써.]
[흐음. 마케로우. 당신이 내게 큰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
다.]
그보다 더한 모욕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비아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제가 당신이라면 하텐그라쥬의 여자들을 달
래고 그녀들에게 당신들의 뜻을 대변해줄 '여자' 동맹자를 가장 먼저 찾
아낼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주들을 데리고 있습니다. 가주가 될 가능성도 부족한
어떤 여자보다는 대변자로서 낫다고 생각되는데요.]
비아스는 생각했다. '멋대로 희롱해라. 하지만 이 니름엔 놀랄 거다.'
[물론 가주들 중에서 당신들의 뜻에 동조해줄 사람들을 찾아낼 수도 있
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녀들은 이미
공포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고 소드락을 복용한 다음 당신들을 일거
에 제거하자는 이야기까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갈로텍은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니름은 심리적 동요로
약간 느렸다.
[…당신에게 그런 제안이 들어왔습니까?]
[제가 순도 높은 소드락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약술사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갈로텍은 팔짱을 끼며 얼굴을 조금 숙였다. 당황한 기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병기의 생산과 보관을 확실히 파악해두라는 지시를 내렸던
주퀘도 사르마크도 나가의 진정한 무기인 소드락에 대해서는 떠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갈로텍은 그 때문에 주퀘도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나가
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그 자신이 그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당신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비아스. 소드락의 생산을
통제할 방법에 대해 알려줄 수 있습니까?]
비아스는 갈로텍이 '마케로우'라고 하는 대신 '비아스'라고 닐렀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겉으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척했다.
[제 요구가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만. 카린돌과 당신들이 획득
한 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갈로텍은 두 손을 조금 펼쳐보였다.
[만약 그것이 당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비밀이라도 듣고 싶습니
까?]
[어차피 제 생명은 당신들의 손에 있잖습니까. 제 심장을 가지고 있으
니.]
갈로텍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설명하지요.]
갈로텍의 설명이 끝나자 비아스는 혼란스러운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한참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갈로텍은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비아스는 닐렀다.
[카린돌의 몸에 여신을 가뒀단 말이군요. 그런데 갇혀있는 여신의 힘을
당신들이 어떻게 쓸 수 있는 겁니까?]
[갇힌 것은 여신이지 여신의 힘이 아닙니다. 그 힘은 지금도 다른 세
신의 힘과 함께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니르면 어떨까요.
마케로우 가문의 주인은 두세나 마케로우 가주입니다. 그리고 마케로우
가문은 다른 가문과 함께 하텐그라쥬를 구성하고 있지요. 하지만 두세나
가주를 감금한다고 해서 마케로우 가문이나 그 가문의 재산이 어디로 사
라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무슨 니름인지 알겠군요.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여신의 힘은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있고, 그 정당한 주인인 여신을 가두고 있는 당신들은 주
인 없는 그 힘을 무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군요.]
[피상적으로, 그렇습니다.]
[여신의 신랑들만이 그 힘을 쓸 수 있는 겁니까?]
[신명을 가진 자들만이. 그러니 당신은 불가능합니다.]
[여자는 수호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보세요. 수호자는 여신의 신랑입니다. 여자는 안됩니다.]
비아스는 경멸감을 담아 닐렀다.
[저는 그 신랑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신부를 가둬두고
그 지참금을 탕진하는 것이 신랑이 하는 일이라면 꼭 남자가 아니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갈로텍은 화가 났고, 그래서 화를 냈다.
[비아스. 당신에게서 그런 비난을 듣고 싶지는 않군요. 우리는 모든 일
이 끝난 다음 우리의 신부를 다시 풀어드릴 겁니다.]
[다시 풀어드린다고요? 그럼 여신께서 당신들을…]
[벌은 우리가 받습니다.]
비아스는 잠시 정신을 닫았다가 다시 닐렀다.
[그 모든 일이란 무엇을 말하지요?]
[지상에서 모든 불신자를 말살하고 저 라호친까지 나가의 숲을 만들고
전세계에 심장탑을 건설하는 일입니다.]
비아스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미 세상의 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충분하리만큼 큽니다. 왜 위험을 무릅쓰며 나머지를 모두 차지해야 하는
겁니까?]
[여자들이란… 모두 똑같군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더 가질 필요가
없다. 전부 다 지금밖에 볼 줄 모르는군요! 저 불신자들이 언제까지 우
리를 내버려둘 것 같습니까?]
[그래서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그건 설득력이 없군요. 그
들이 위험한 존재가 될 거라는 징조는 어디에도 없고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없다고요? 당신은 정신을 닫은 채 살아왔습니까? 나가살육자라는 니름
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는 니름입니까?]
비아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저는 어린애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혹은 철없는 남자들이 수다의
즐거움을 즐기기 위해 만들어낸 미신과 이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미신이라고 했습니까?]
[그렇다면 그걸 불신자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들어낸
우화라고 니르실 생각입니까?]
[그건 어린애들을 겁주는 미신도, 불신자들에 대한 우리의 경각심을 고
취시키기 위한 우화도 아닙니다. 그건 사실을 가리키는 니름입니다. 나
가살육자는 실존합니다.]
[증거가 있습니까?]
갈로텍은 온몸의 비늘을 부딪히며 환멸스럽다는 듯이 닐렀다.
[증거요? 제 누이의 잘린 목이 증거입니다!]
비아스는 입을 조금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무슨 니름이십니까?]
[더 이상 니르고 싶지 않습니다.]
비아스는 갈로텍의 얼굴과 정신 양쪽을 탐사했다. 수호자의 얼굴은 비
늘이 거칠게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얼굴보다 더 거칠었다.
비아스는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나가살육자의 존재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나가에 대한 불신
자들의 공세의 증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에겐 심장
적출법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어떻게 우리를 공격하겠습니까?]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700년 전 어쩔 수 없이 멈춰야 했던 대확장 전쟁의 재개입니다. 선조들
께서는 멈춰서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기온의 한계에 부딪힐 때까지 계
속 전진했습니다. 이제 기온의 한계를 뛰어넘을 방도가 생겼는데 왜 멈
춰있어야 한단 니름입니까?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비아스는 갈로텍의 니름에 찬성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갈로텍이 이
음모에 참여하고 있는, 혹은 지휘하고 있는 - 비아스는 갈로텍의 정확한
위치를 짐작할 수 없었다. -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비아스는 갈로텍과 논쟁을 벌이거나 그의 개인적 욕망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그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것들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비아스 마케로우가 돌아간 다음 갈로텍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
었다. 비아스가 원하는 것을 니른 적은 없었지만 갈로텍은 그녀가 무엇
을 원하는지 눈으로 보듯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갈로텍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 - 그녀에게 많은 것이 돌아가는 - 을 원하고 있었다. 그 목적을 위
해 비아스는 갈로텍이 그녀를 이용했음을 시사하는 니름을 몇 마디 거론
했다. 갈로텍은 그녀를 이용하여 다섯 명의 수호자를 마케로우 가문에
잠입시켰다. 그리고 비아스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카린돌의 이름 또한
비아스를 통해 알아내었다. 그리고 갈로텍은 그런 이용에 대해 조금도
미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
'비아스, 이 천치 같으니! 너를 가장 증오하는 두 사람이 곧 나라는 것
을 모르고!'
하지만 갈로텍은 비아스가 언급한 다른 니름에 대해서는 깊이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아스는 '왜'라는 질문을 제시했다. '왜 세상의 나머지 반을 얻어야
하는가. 지금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갈로텍은 그것이 다른 여
자들 모두의 생각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자기들이 노력해서 세상의 반을 손에 넣은 것처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얻기 위해 그녀들이 한 일이라고는 태어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들은 단지 존재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들여
서 뭔가를 얻는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아스처럼 야심찬
여자마저도. 그런 것은 존재가 아니다. 주위로 흐르는 시간을 무시하며
꾸는 백일몽일뿐. 갈로텍은 왜 이다지도 가주들을 설득하는 일이 어려운
것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분노 속에서 갈로텍은 최근에 터득한 기술을
사용해보았다.
잠시 후 그로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
다.
[이봐, 갈로텍. 아무래도 자네가 나를 불렀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랬어.]
[그러니까, 자네가 내 방 벽에 글씨 모양의 젖은 얼룩을 만들어내었다
는 것이군?]
[내가 만들었어.]
그로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단하군. 나는 그런 걸 상상도 못했어. 자네는 우리들보다 그 힘의
운용에 훨씬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군. 아마도 군령자이기
때문인 것 같군.]
갈로텍은 노닥거리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로스의 니름이 그의 주
의를 끌었다.
[군령자이기 때문에? 무슨 뜻이지?]
[자네는 원래 자네 것이 아닌 기억이나 경험을 자기 것처럼 생각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느냐고 한 니름이야.]
갈로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로
스의 지적은 그럴 듯했다.
[그렇군. 확실히 나는 이질감을 느끼지 않아. 사실 자네가 닐러줘서 떠
오른 건데, 나는 어떻게 해서 자네 방의 벽을 젖게 만들었는지 모르겠
군. 내 팔을 움직이거나 다리를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렇게 해야
겠다고 생각한 순간 그렇게 되었어.]
[그런가? 그러면 그 재주를 가르쳐달라고 해도 그럴 수가 없겠군?]
[맞아.]
[안됐군. 스스로 터득해야 하나. 어쨌든, 왜 부른 거지?]
[지금 가주들에 대한 설득 작업이 원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로스의 얼굴에 경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갈로텍은 고개를 가로저었
다.
[자네를 문책하려는 것이 아니야. 나 또한 어떻게 해야 할지 짐작도 가
지 않아서 결국 가주들에 대한 면회를 허락한다는 포고를 내리는데 동의
했잖아. 가족들의 얼굴을 보면 가주들의 마음이 약해질지도 모른다는 바
람으로.]
그로스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닐렀다.
[하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어.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
[이제는 알게 되었어.]
[응?]
[조금 전 비아스 마케로우가 찾아왔어. 그녀와 회담하던 중 다른 여자
들이 왜 찾아오지 않는 건지 대충 깨닫게 되었어. 아무래도 우린 여자들
의 사고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첫째, 그녀들은 이곳에 와
서 남자들에게 굽실거리고 싶지 않은 거야. 비아스는 경비자들이 쩔쩔
매는 꼴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더군. 굴욕을 각오하고 왔다가 겁먹은
상대를 발견하곤 즐거워진 거지.]
[웃기는군. 그렇다면 둘째는 뭐지?]
[우리의 허락을 받는 대신 자기들의 무력으로 우리를 물리치고 가주를
되찾아갈 생각을 하고 있어. 그게 여자다운 일이라는 거지.]
그로스는 정신적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녀들이 만약 상상하는 즐거움을 누리는데 만족하지 않고 그 웃기는
계획을 실행하는 결단력까지 보여줄 작정이라면, 나는 그 여자다움이라
는 것이 10분도 못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망발이 될 거라 예언할 수밖에
없겠군.]
갈로텍은 빙긋 웃었다. 그로스만큼 즐거운 웃음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소드락을 잔뜩 복용하고 달려들 생각을 하고 있어.]
[상관없어! 아무리 소드락이라도 눈보라 속에서라면 어쩔 수 없을걸.
그리고 필요하다면 심장병을 몇 개 부숴주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방
법도 있지.]
[좋은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질 것 같군. 우리는
지금 대통합을 이루어야 해. 한계선 이남을 모두 아우르는 대통합 말이
야. 지금 상황에서 우리끼리 싸우는 것은, 아무리 우리가 쉽게 죽지 않
는다고 해도 시간 낭비야.]
[그렇다면 대안은?]
[역시 가주들을 설득해야 하지. 나는 조금 전 비아스와 노닥거리다가
괜찮은 생각 하나를 떠올렸어. 그것에 대해 자네, 그리고 주퀘도와 의논
하고 싶군.]
쥬타기 대선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방 가운데 앉았다. 그를 위해 방석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대선사는 고집스럽게 방석을 옆으로 밀어버리고는 바
닥에 무릎을 꿇었다. 좌우로 도열해 있던 승려들의 얼굴에 걱정이 떠올
랐다. 대선사의 앞쪽에 좌탁을 놓고 앉아있던 고위승려들은 황감한 표정
까지 지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라샤린 선사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
다.
"쥬타기 대선사. 방석에 편히 앉으십시오."
"이대로도 좋습니다."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종단의 최고위자를 그런 모습으로 무릎 꿇려놓고 마음이 편할 리 없었
지만, 라샤린 선사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자리는 종규
해석소(宗規解析所)다.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 이름과 달리 종규
해석소는 일종의 재판정이다. 필요하다면 - 종단의 역사에서 한번도 없
었던 일이지만 - 대선사에게 파문을 내릴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장소인
것이다.
그러나 종규해석소의 진행 방식은 평범한 토론장과 비슷하다. 즉, 대선
사의 좌우로 늘어서 있는 스무 명의 승려들은 자유롭게 대선사에게 질문
을 할 수 있으며 그 질문에 대해 대선사를 옹호하는 대답을 할 수도 있
다. 대선사의 정면에 앉은 세 명의 고위승려들의 임무 또한 토론장의 의
사진행자와 비슷하다.
자칫 산만하게 바뀔 수도 있는 느슨한 체제이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종규해석에는 시간 제한이 없으며, 해당사건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내려져야 한다. 그 말은 이들 스물네 명은 해당사건에 대
한 종단의 대응방침이 결정될 때까지 종규해석소를 퇴장할 수 없다는 뜻
이 된다. 그 때문에 라샤린 선사는 시작을 선포하는 것이 두려웠다. 하
지만 지체할 수는 없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의 가호를 바라며 제 294 차 종규해석을 시작하겠습
니다."
다른 승려들 또한 그 말에 긴장했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라샤린 선사
자신이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의 무게감에 당황하던 선사는 문득 대선사
의 차분한 거동을 보고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침착을 되찾으려 애쓰면서
선사는 승려들의 출석을 불렀다. 물론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전부 볼 수
있으므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지만, 참석자 개개인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효과는 분명하다.
출석확인을 끝낸 선사는 호규원장 듀케리 대사를 바라보았다.
"호규원장 듀케리 대사는 쥬타기 대선사가 종단의 안위를 침해하고 종
단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음을 들어 쥬타기 대선사의 멸적(滅籍)을 요
구했습니다. 듀케리 대사. 고발장을 낭독해주십시오."
승려들 사이에서 숨막힌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호규원장 듀케리
대사는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대선사를 멸적하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
다. 하지만 누군가는 대선사를 고발해야 했고, 그것은 당연히 종규의 수
호 책임을 맡고 있는 호규원장의 몫이었다.
호규원장은 라샤린 선사가 당황할 거라 예상하며 강급이 어떻겠냐고 제
안했다. 대선사의 법계를 깎자는 제안은 분명히 라샤린 선사를 놀라게
할 거라는 것이 호규원장의 나무랄 수 없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라샤린
선사는 태연히 멸적을 제안함으로써 호규원장을 기겁하게 했다. 호규원
장은 강급을 제안했던 것도 잊은 채 어떻게 종단의 최고위자에게 멸적이
라는 망발을 사용할 수 있느냐며 항의했지만 라샤린 선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듀케리 대사는 스물 두 명의 동료들 앞에서 대선사의 승
적을 말소하고 사원 바깥으로 추방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실로
괴기스럽기까지 한 역할을 받아들여야 했다.
고발장을 집어든 듀케리 대사는 그에게 그런 짐을 지운 라샤린 선사를
한번 흘겨보고는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티나한은 벼슬을 빳빳하게 세운 채 으르릉거렸다.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는군! 대선사는 속은 거야. 지금 지금 가장 속
쓰린 사람일 텐데, 위로해줘도 모자랄 판에 왜 붙잡아다 놓고 괴롭히는
거냐? 엉?"
오레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말이야?"
"지금 종규해석소의 심판에 참여 중인 스님들의 의견은 거의 완전히 일
치합니다. 아마 면직이나, 어쩌면 심한 경우 강급이라는 이야기까지 나
올지도 모르지만," 오레놀도 종규해석소에서 감히 대선사를 상대로 멸적
을 논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오늘 내로 쥬타기 대선사에
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결정이 나올 겁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더
라도 나가들의 계략에 속아넘어간 부주의를 탓하여 견책 처분이 있는 정
도일 겁니다. 그것도 아마 문서 견책이 아니라 구두 견책 정도겠지요."
"뭐야? 이런, 썩을. 용서할 거면 그냥 용서할 거지, 왜 그런 장난 같은
짓거리를 하는 거야?"
"장래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혹 누군가가 나가들에게
속아넘어간 대선사님의 과오를 탓하며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을 방
지하기 위해서지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잖습니까. 종규해석보다 더
높은 권위의 심판은 없고, 이미 종규해석의 심판을 받았다면 또 받을 일
도 없지요."
티나한은 오레놀의 설명에 대해 약간 생각해야 했다.
"으흠. 그러니까, 앞으로 투덜거릴 녀석들이 나타나는 것을 아예 원천
봉쇄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가장 높은 권위로 대선사를 용서
한다는 뜻을 분명히 해버린다는 것이군?"
"정확하십니다."
"말해줘야겠는데, 너희들 일 정말 더럽게 복잡하게 한다, 젠장."
오레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잡하더라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조만간 우리는 여신의 힘을 손에
넣은 나가들에 대항해 싸워야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단의 모든
힘이 결집되어야 합니다. 그런 결집을 이루려면 우리들 사이에 어떤 분
쟁의 소지도 남아있어서는 안됩니다. 과거는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정리
한 다음 앞으로 다가올 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티나한은 그 설명에 깊은 감명을 느꼈다.
"어, 그런 거냐? 더럽게 복잡하다느니 하는 말은 취소하겠어. 무슨 뜻
인지 알겠군."
오레놀은 감사하다는 듯 목례하고는 말했다.
"그러니 대선사님에 대해서는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케
이건이 걱정입니다. 지금 어떠시지요?"
"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오레놀은 의아한 얼굴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은 수염볏을 비틀
며 느리게 말했다.
"일단, 차분해. 몇 달 전 마지막 주막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말
이야."
"다행이군요."
"그런데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녀석이 화를 내고 있다면 차라리 안심하겠단 말이다. 지금, 글쎄. 뭐
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벌겋게 타오르는 쇳물에는 아무도 손을 안
대지. 보면 위험하다는 것 알 수 있고, 놔두면 식지. 하지만 꽝꽝 얼어
붙은 쇠는? 나가가 아닌 이상이야 눈으로 봐도 그게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지. 그런 것에 멋모르고 손을 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살이 달라붙지요."
"그래. 쇠가 살점을 뜯어먹지. 그런데 케이건이 차분하게 있는 꼴을 보
니 나는 꼭 그런 쇠가 생각난단 말이야. 꽁꽁 얼어붙어 있는 강철 말이
야."
오레놀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염볏을 지나치게 비튼 티나한은 그것이
조금 아프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케이건은 자기에게 모든 나가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했어."
"그런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티나한."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그렇게 말해줬고. 그런데 말이야. 그
친구의 대답을 듣고 생각을 좀 해봤는데, 음. 그 권리라는 거, 상당히
모호한 말이더라구."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게 하늘치의 등에 올라갈 권리가 있나?"
오레놀은 당황하여 티나한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야에 티나한은 뾰족
한 부리로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치의 등에요? 글쎄요. 당신은 그러려고 하고 있고, 거기에 당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있지요. 그러니 당신은 모든 것을 다 걸고 있는 도전
하는 자의 권리는 가지고 있을 겁니다."
"케이건도 모든 걸 다 걸고 그렇게 하는 걸 텐데. 오레놀."
오레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나한. 권리라는 것은 결국 '양해'라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누구
도 고양이에게 쥐를 잡아먹을 권리가 있는지 따지지는 않아요. 고양이는
쥐에게 양해를 구할 능력이 없으니 그건 과도한 요구지요. 하지만 우리
사람들은 상대방의 양해를 구할 수 있어요. 그러니 그렇게 해야지요. 타
인의 양해를 얻었을 때 권리라는 것도 생기는 겁니다. 당신은 하늘치에
게 양해를 구할 수 없어요. 서로 의사 소통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만
일 하늘치와 당신이 의사 소통이 된다면, 당신은 그 등에 오르기 전에
하늘치에게 올라가도 되냐고 물어보고 양해를 구해야 할 겁니다."
티나한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케이건은 양해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예?"
"내가 알기로, 나가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 삼아 케이건에게 무슨 약
속을 한 것 같더군. 그리고 그 약속을 어겼고. 그 순간 나가들은 자신의
목숨을 케이건의 손에 맡긴 것 아냐?"
"…그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응."
"그 나가들은 담보로 걸 수 없는 것을 걸었습니다. 티나한. 아시잖습니
까."
"글쎄. 아는지 잘 모르겠어."
티나한은 두 손을 드는 시늉을 해보였다.
"내 솔직한 생각을 말해볼까? 나는 그 놈들이 아주 고약한 잡것들이라
고 생각해. 나가들의 장례식을 주관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지만, 누가
나에게 추모사를 맡기면 아주 난감해할 거야. 별로 추모하고 싶지 않으
니까. 그리고 그 잡것들이 여신의 힘을 휘두르면서 쳐들어온다면, 나는
내게 놈들을 죽일 권리가 있는지 따위를 고민하지는 않을 거야. 피를 흘
리느냐 피를 묻히느냐 둘 중 하나라면 나는 일단 피를 묻히는 쪽이야."
오레놀은 그 말에 반대하고 싶었지만 당장은 나가들을 옹호하고픈 생각
도 들지 않았다. 나가들이 자신들의 여신을 억류한 사실에서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혐오감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다른 길로 샜는데, 왜 찾아오신 거죠?"
티나한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자신이 볼일이 있어 쥬타기 대선사
를 찾아왔고, 대선사가 종법해석에 참석하고 있느라 오레놀을 상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난 이제 떠날 건데, 약속했던 발굴 지원금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
보려고."
"예? 떠나실 겁니까?"
"그래.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내 일
에 신경 써야지."
오레놀은 왈칵 화를 내고 싶었다. 지금 대확장 전쟁이 재개될 판국인데
그깟 하늘치 유적 발굴이 중요하냐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레놀은 지
난번 대확장 전쟁 - 그렇게 말하니 퍽 근래의 일인 것 같았다. - 에서
레콘들이 한 일들은 모두 자신의 일을 지키려는 시도뿐이었음을 떠올렸
다.
오레놀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수는 당신들을 가리켜 숙원을 걸머지고 오만하게 걸어가는 거인들이
라고 했지요. 알겠습니다. 발굴 지원금은 이미 당신의 동료인 롭스가 수
령했습니다. 영수증을 보여드릴까요?"
"아, 그래? 그렇다면 됐어."
"그럼 이대로 떠나실 겁니까?"
티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타 중대사는 수심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최악의 상황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쩌면 그 나가들은 이 보잘 것
없는 북쪽땅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서 그저 자기들끼리의 세력 다툼에만
그 힘을 사용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여러분들 중 남쪽에 근거를 두신
분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방비 태세를 재정비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
습니다."
지코마 성주가 손을 들었다. 그의 땅 칼리도는 한계선 가까운 곳에 위
치하고 있다.
"중대사님. 염려해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이왕이면 나가들이 손에
넣었다는 그 '힘'이 무엇인지를 말씀해주시면 더 도움이 되겠습니다. 적
을 알아야 대비를 할 수 있잖습니까."
다른 군웅들도 웅성거리며 지코마 성주의 말에 찬성하는 기색을 보였
다. 중대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지금 말씀드리기에는 지나치게 미묘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
린 것에서 여러분들이 추측하실 수 있는 것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나
가들이 한계선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제 우려에서 여러분들은 그 힘의 성
격을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머리는 좋지만 자제력은 좀 부족한 편인 무핀토 추장이 질문했다.
"그 힘은 기온을 바꿀 수 있는 힘입니까?"
지배자들은 당황했다. 무핀토 추장의 앙숙인 세미쿼 추장은 얼굴에 새
긴 문신을 온통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뒤죽박죽인 머리 속에서 나올 법한 기괴한 생각이군."
무핀토 추장은 눈을 불태우며 세미쿼 추장을 노려보았다. 조타 중대사
는 그들 사이에서 '우정을 의미한다'던 속어가 오가는 것을 들으며 이맛
살을 찌푸렸다. 다른 지배자들도 그 두 추장의 말다툼에 신물이 난다는
표정이 되었고 결국 그 중 한 명이 두 추장에게 '제발 닥쳐주면 우리 모
두 행복하지 않을까요'에 해당하는 제안을 꺼냈다. 두 추장은 잠잠해지
기는커녕 '끼여드는 재주를 아무데서나 발휘하지 말라'고 대꾸했고, 그
러자 상황은 점점 험악해졌다. 당황한 조타 중대사는 어떻게든 사태를
중재해 보려 했지만 그곳에 있는 자들은 머리 깎은 산승 한 명이 통제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라샤린 선사라면 혹 가능할지 모르지만 선사
는 지금 종규해석소에 출석한 상태였다.
중대사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무의미하게 손을 흔들고 있을 때 무
리 가운데서 낮지만 강한 목소리가 주위를 압도하며 터져나왔다.
"예를 생각하시오. 소중한 조언을 주시려 우리를 불러주신 분 앞에서
무슨 망발들이오?"
사람들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고 그것이 괄하이드 규리하라는
것을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관록에서든 무력에서든 연장자에 대한 예의
에서든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
완전히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 때 큼직한 머리 위에 뿔관을 얹은
코네도 빌파가 거들 듯이 말했다.
"변경백의 말씀이 옳소. 중대사님의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변경백의 표정은 복잡했다. 코네도 대족장이 자신을 거든 것에 고마워
하고 싶었지만, 괄하이드 변경백 또한 발케네의 지배자가 두 아들을 주
체로 하는 모종의 계획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라짓의 마지
막 신하임을 자부하는 변경백의 입장에서 대족장의 계획은 용납하기 어
려운 것이다. 결국 변경백은 모호한 목례를 하는 정도로만 감사 표시를
했다.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조타 중대사는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무핀토 추장께서 조금 전 기온을 바꿀 수 있는 힘이지 않
냐고 말씀하셨는데, 예, 우리는 그런 상황까지 가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
씀드려야겠습니다."
지배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중대사는 황급히 말했다.
"물론 그것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지배자들
의 귀에 그 말은 유일한 상황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런 일이 쉽게 일
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지코마 성주가 다시 손을 들었다.
"예, 지코마 성주?"
"중대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걱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이곳에
계신 여러 영웅들의 영용한 모습에서 제가 위안을 얻을 수도 있을 겁니
다. 하지만 저는 이곳에 한 분이 빠져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즈믄누리의 성주 바우 머리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그 분께 이 사안에 대한 의견을 구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옛말에 나가
잡는 건 도깨비라고 했습니다. 스님들께서는 즈믄누리와의 연락을 위한
딱정벌레를 소유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탐탁찮은 투로 말했다.
"대확장 전쟁 때도 도깨비들은 물러나기만 했소. 지코마 성주."
"하지만 아킨스로우 협곡에서 십만의 나가를 태워죽이기도 했습니다."
"그건 인상적인 일이긴 하지만 본질은 정신 나간 자의 실수였소. 도깨
비들 전체의 뜻이 아니었소."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즈믄누리의 성주에겐 대대로 몇 가
지 특권이 있습니다. 혹자는 놀라운 직관력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다섯
째 딸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능력도 그 중 하나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즈믄누리의 성주는 즈믄누리 안에 있을 때는 항상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께 우리의 행동 방침에 대한 조언을 구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배자들은 놀란 표정으로 지코마 성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타 중
대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코마 성주.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유쾌하게 수용할
수 있는 제안도 아닙니다. 예. 말씀하신대로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린 결
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도깨비는 없습니다. 그리고 도깨비들은 결국
그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그들의
자유입니다만, 우리는 거기에서 논리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
성주들이 대부분의 경우 옳은 결정만 내려온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린 다음 번 결정이 맞을지 틀릴지 여전히
알 수 없는 겁니다. 게다가, 혹 그 믿기 힘든 능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건 도깨비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도깨비가 아닙니다. 한
집단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결정이 다른 집단에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재난인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가들은 대확장 전쟁이 꼭 필
요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대확장 전쟁은 어떤 결과
를 가져왔습니까? 세상의 반을 뺏겼고, 그리고 왕도 잃었습니다."
'왕'이라는 말에 코네도 대족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때 대족장은 자
신을 쏘아보는 눈길을 느꼈고, 고개를 돌려 괄하이드 변경백을 보게 되
었다. 변경백은 대족장의 가슴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코네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괄하이드의 시선을 외면했다.
지코마 성주는 다시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저는 즈믄누리의 성주가 가진 그 의사결정 능력을
이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 능력은 최소한
도깨비라는 한 집단을 긴 세월 동안 올바르게 이끈 능력이라고. 그렇다
면 거기에는 상황을 파악하고 최선의 결정을 도출하는 데 꼭 필요한 명
철함이 내포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명철함을 참고할 수 있을 겁
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분께 조언을 청하는 것 자체는 해될 것이 없다
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곳에 딱정벌레가 있습니다. 그 분의 조언을 들
은 다음 그것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차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
다."
"알겠습니다. 대사원의 딱정벌레를 바우 성주에게 보내겠습니다. 작금
의 사태를 설명하고 고견을 요청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쭐 것이 있는데, 무학당에 계신 손
님들은 언제 보여주시겠습니까?"
지배자들의 얼굴이 대번에 바뀌었다. 중대사는 우물쭈물하며 지코마 성
주를 바라보았다. 지코마 성주는 변경백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분들 중 한 분이 괄하이드 변경백과 겨룬 수백 합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괄하이드 변경백. 각자가 가진 무기의 차이가 없었다면
그 격투의 결과는 누구도-"
"내가 졌소."
괄하이드는 지코마 성주가 건넨 선물 - 무기의 성능차이라는 변명 - 을
받지 않았다. 지코마 성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야 할 시간이었다. 패
배를 인정하더라도 잃을 명예가 적은 젊은이의 선언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나를 가지고 놀았소. 그것이 추잡한 악취미의 발
현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오. 내가 추측하기로 그는 우리들의
시선을 무학당에서 떨어뜨려두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오. 만약 그것이
저질스러운 희롱이었다면 나는 그 자, 그리고 나 자신을 참아내기 어려
웠을 거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소."
군웅들은 존경심을 담아 괄하이드 변경백을 바라본 다음 다시 조타 중
대사를 돌아보았다. 지코마 성주가 다시 말했다.
"조금 전 존경하는 변경백께서 확인해주신 바와 같이 그 분들이 예사분
들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곳에서 나가와 두억시니들, 그
리고 대호와, 믿기 어렵습니다만 용까지 목격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
니다. 여염집의 마당에서 볼 수 있는 조합은 아닙니다. 사실, 한 세기에
한 번 목격할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조합이군요. 그 놀라운 조합이
왜 하인샤 대사원의 무학당에서 목격되는 겁니까? 그 분들은 도대체 누
구입니까? 그리고 그 분들과 나가들이 기온을 바꿀 수도 있는 엄청난 힘
을 획득한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겁니까? 중대사님. 저도 그렇
고 다른 분들도 그러리라 생각됩니다만, '도깨비 지나가자 불이 났다'는
식의 대답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조타 중대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 안된다고 생각했고, 생각과는 정
반대로 행동해버렸다. 지배자들은 실로 의심스럽다는 듯이 중대사를 쏘
아보았다. 중대사는 한참 후에야 겨우 할 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여러분들의 의혹과 호기심은 당연합니다." 중대사는 침을 삼켰다. "하
지만 그 분들의 동의 없이는 그 분들에 대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
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그 분들은 나가의 책략을 저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집된 분들입니다. 그리고 괄하이드 변경백의 대도
가 부러진 날, 우리는 그것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나가의 교활한 속임
수에 의해 우리는 실패했고, 그 때문에 나가들은 제가 말씀드린 것 같은
'힘'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분들과 우리는 과오를 바
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열성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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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8. '북부의 왕' 편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8-2. 관련자료:없음 [5396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5-12 01:03 조회:9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