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27화 (27/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7-4.                         관련자료:없음  [5372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5-06 00:48  조회:10507

눈물을 마시는 새.

7. 열독(熱毒) - 4

륜은 눈을 감은 채 사모를 생각했다.

오레놀의 요청대로 륜은 여신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하지는 않았다. 그리

고 그것은 륜에겐 극히 힘든 일이었다. 륜은  세상의 모든 것을 향해 사

모 페이가 하텐그라쥬로 돌아갈 방도를  찾아내라고 요구하기를 원했다.

당연히 륜은 자신의 신부에게도 같은 요구를 하고 싶었다.

륜에게 그 요구는 레콘의 멸망 저지, 두억시니들이 신을 잃은 이유, 그

리고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암살 저지보다 중요했다.

미망이었다. 륜은 오레놀에게 감사했다. 륜은 어떤 논리로도 자신의 요

구가 다른 세 요구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

을 거부했었다.

그랬기에 륜은 만다라 가운데서 사모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생각

했다.

'나는 사모에게 그런 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오레놀은 륜에게 자신을 신에게 맞추라고  권했다. 그래서 륜은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나라는 것이 없었다면  사모는 누구  못지않게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

다.'

소박한 것이지만 그것은 '나'가  사라진 우주에 대한  인식의 시작이었

다. 내가 있어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세상에 내가 있

음을 깨닫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자기 부정도, 자기 비하도 아

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나'의 결여는 여전히

큰 문제였다. 왜냐 하면 세상은 모두 '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륜은 그것에 거창한  '몰아(沒我)'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륜은 소박하게 생각했다.

'당신에게, 그리고 사모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어요.'

그 순간, 시간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의 어느 순간들은 다른 순간들보다  훨씬 날카롭고, 그곳을 관통하

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매서운 상처를 남긴다.  바로 그런 감각이 무학

당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휘감았다. 티나한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포효하

고픈 욕망을 느꼈고 대선사는 무릎이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두억시니

들 또한 긴장하여 사지를 잔뜩 움츠렸다.  여차하면 펴기 위한 움츠림이

었다. 그리고 마루나래는 사모가  누워있는 방과 륜을  번갈아 쳐다보았

다.

공간이 확장되었다.

오레놀은 갑자기 륜이 수십 킬로미터 저편에  있다는 느낌을 받고 기겁

했다. 다시 눈을 비빈 오레놀은 륜의 크기가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망막에 맺히는 륜의 크기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인

상은 여전히 륜이 저 먼 곳, 고함을 질러도 들리지 않을만큼 먼 곳에 있

다고 고집했다. 오레놀은 다른 사람들도 그런  느낌인지 묻기 위해 고개

를 돌렸다. 그리고 대덕은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티나한과 쥬타

기 대선사는 그로부터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보다 행동적인 티나한은 거의 반사적으로  오레놀에게 달려가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걸음을 떼기  직전 티나한은 그  계획을 재고했다. 그의

이성은 계속해서 오레놀이 수십 킬로미터  저편에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

었지만 눈에 보이는 오레놀의 크기는 그대로였다. 만약 '실제로' 오레놀

이 겨우 몇십 센티미터  저편에 있는 거라면  티나한의 돌격은 오레놀의

등뼈를 부러뜨리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티나한은 그 시점에서 과

연 무엇이 '실제'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티나한은  고민하다가 자신의

철창을 떠올렸다. 그것은 7  미터였고 그곳에 있는  거의 모든 승려들의

몸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그러니까, 약 10분 전에는 그랬다는

의미다. 티나한은 철창을 조심스럽게  수평으로 든 다음  그것을 천천히

옆으로 돌려보았다.

시각적 이해는 티나한에게 철창이 곧 오레놀의  가슴에 닿을 거라고 가

르쳐주고 있었다. 그리고 티나한의 이성은 그런 웃기는 생각 좀 하지 말

라고 책망하고 있었다. 티나한이 팔이 더 움직였을 때 승자는 그의 이성

으로 밝혀졌다.

철창은 닿지 않았다.

티나한이 하는 일을 보고 있던 오레놀 또한  그 사실에 당황했다. 티나

한은 다시 여러 승려를 향해 철창을  뻗었고 어느 승려의 몸에도 철창은

닿지 않았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점점 대담해진 티나한은 싸

움터에서나 용납될 매서운 동작으로 창춤을 췄다. 승려들의 얼굴이 새파

랗게 질렸고 몇몇은 비명까지 질렀다. 당장이라도 사제들의 목이 날아가

고 살이 뭉개지며 피보라가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러나 철창이 일으키고

있을 것이 분명한 매서운 바람조차 승려들에게  닿지 않았다. 한바탕 멋

진 창춤을 춰보인 티나한은 다시 창을  꼿꼿이 세워들고는 조금 전의 상

황에 대해 고민하며 륜을 바라보았다. '제발 던질 생각만은 말아다오'라

고 빌고 있던 승려들은 그 모습에 안도했다.

륜은 눈을 떴다.

갈로텍과 수호자들은 긴장한 시선으로 한 수호자를 바라보았다. 보트린

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수호자는  동료들에게 '특별한' 예민함으로 유명

했다. 어쩌면 그 특별함이야말로 이 모든 일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공평

함을 선호하는 우주의 어떤 의지는 보트린에게 그 특별한 예민함을 부여

하는 대신 다른 종류의 둔감함도 아울러  선사한 것이 분명했고, 따라서

보트린은 음모나 계획, 속임수 따위에 무지하다 할 정도로 둔감했다. 하

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실제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운용하는 자들에

게 그런 감각은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 보트린이 환희에 찬 니름을 닐렀다.

[좋아, 됐어!]

그로스가 갈로텍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양피지를 받아든 갈로텍은 빙긋

웃었다. 그는 갑자기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스바치와  카루를 돌아보았

다. 스바치는 카린돌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카루는  사나운 시선을

보내어오고 있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갈로텍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든 양피지를 펄럭이며

닐렀다.

[이게 뭔지 알아?]

[그게 뭔데?]

[카린돌 마케로우가 너희 두 명을 데리고 심장탑에 보호를 요청한 것에

격분한 비아스가 보낸 항의장이지.]

[뭐? 보호?]

되묻던 카루는 곧 갈로텍의 니름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갈로텍은 카

루의 얼굴을 보며 그가 상황을 완전히  깨닫기를 기다렸다. 카루의 얼굴

이 험악하게 바뀌었을 때 갈로텍은 양피지를 내려다보며 닐렀다.

[약술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비아스로선 훌륭한 결정이야.  이 끔찍한

문재라니, 세련미라고는 아첨을 바치려고 해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군.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어휘들 중 하나는 매우 마음에 드는군.]

갈로텍은 그것이 무슨 어휘냐고 묻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카루는 그렇

게 해주었다.

[무슨 어휘인데?]

카루의 예상대로 갈로텍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루는, 어울리지는 않지

만 갈로텍에게 순박하다는 평을 하는 것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갈로

텍은 양피지를 차분히  들여다보고는 그것을 도로  그로스에게 돌려주었

다.

그리고 갈로텍은 카린돌 앞으로 다가섰다.

냉동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냉기는 이제 견딜 수 없는 지경이었다. 수호

자들은 몸을 움츠렸고 스바치와 카루 또한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당황했다. 하지만 갈로텍은 그들을 놀라게  했다. 갈로텍은 갑자기 외투

앞자락을 확 열어젖혔다.

그리고 갈로텍은  비아스의 항의서에 적혀있던 카린돌의 이름을 강력하

게 닐렀다.

[베카린도렌 마케로우!]

스바치와 카루는 공포  속에서 카린돌을 바라보았다.  카린돌의 정신이

미약하게 푸들거렸다.

륜은 날카로워진 시간과 확장된 공간  가운데서 외롭게 앉아있었다. 모

든 객체들이 한없이 먼 곳에 있었다. 오직 그의 품에 안겨있는 아스화리

탈만이 륜과 정상적인 - 도대체 무엇이  정상적인지 따지지 않기로 한다

면 -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품  속에 있는 아스화리탈이 수십 킬로미

터 저편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이상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

던 륜은 그 사실에 감사하며 용을 어루만졌다. 용은 꼬리로 륜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여신이 있었다.

모든 곳에 여신이 있었다.

몰려드는 이슬들, 춤추는 빛, 도치가 궁극의 화법이 되는, 한없이 많고

많은 대화들.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만다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누

구의 몸도 젖지 않았다. 누군가의 몸에  닿기에는 빗줄기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넓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억수  같은 빗줄기였다. 긴장한 승

려들이 토해놓는 뜨거운 숨이 현란한 색채로 그들을 물들였다. 뜨거워진

그들의 몸에서 피어나는 열류들을 보며 륜은 미소지었다. 륜은 안심하라

고 말해주고 싶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륜은 안심해도 좋다고 생각했

다. 다만, 륜은 수십 킬로미터 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는 것

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륜은  아쉬워하며 그것을 포기했다.

륜은 천천히 일어났다.

접촉이나 애호(혹은 증오)의 대상이 되기에도 너무 멀기에 그저 관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세계 가운데 륜은  똑바로 섰다. 여신은 모든 곳

에 있었다. 그래서 륜은  위-아래-왼쪽-오른쪽-앞-뒤-겉-안으로 향해 닐

렀다.

[라르간드. 나의 신부.]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나의 신랑.]

여신이 대답했다.

케이건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뭔가를 목격한 것은 아니었

다. 무학당이 있는 쪽의 풍경에는 변화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

만 케이건은 그 곳이 지나치게 멀다는 느낌을 받았다. 산의 정상에 똑바

로 누운 채 바라보는 하늘처럼 막막하고  멀었다. 그리고 그것으로서 케

이건은 알 수 있었다.

괄하이드는 케이건이 어딘가를 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곳을 돌아보

지는 않았다. 괄하이드는 그것이 상대의 시선, 혹은 부주의한 공격을 유

도하는 전통적인 속임수가 아닌지 우려했다. 엉망진창이 된 대도를 세차

게 움켜쥐며 괄하이드는 케이건을 향해 말했다.

"정말 왕이 될 생각이오?"

케이건은 다시 괄하이드를 내려다보았다. 여신과의 접촉이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할지 알 수 없는  이상 케이건은 되도록 오랫동안 이들을

붙잡아놓고 있어야 했다. 케이건은 모호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나는 지금 이 싸움에 만족하고 있소."

"그래서?"

"이것부터 결판을 내고 싶소. 괄하이드 변경백."

괄하이드는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몸이  그를 배신했다.

팔은 무거웠고 다리는 아예 땅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괄하이드

는 더 싸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 것도 걸려있지 않은, 단지 두

사람의 목숨만이 별 대수롭지 않은 전리품으로 걸려 있는 싸움을 계속해

야 할 이유를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대도의 거칠어진 날

을 다시 뒤로 끌어당겼다.

"나 역시 그걸 바란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소.  케이건. 이런 싸움을 흐

지부지 끝낸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요."

그러나 변경백은 그대로 돌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있을 때 당신에게 해둘  말이 있소. 이 싸움이 끝

났을 때 내가 가슴이 터져 죽거나  기절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

거든."

"해보시오."

괄하이드는 호흡을 고른 다음 말했다.

"내 가문에 대한 난잡한 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래, 그냥 툭

털어놓고 말하지. 제왕병에 걸렸지만 왕이 될 배짱은 없었기에 변경백이

된 자의 후손이라고 말하더군! 그 표현이 내게 일으키는 분노와 별개로,

나는 그 말의 진실성을 일부 인정하오. 현재의 규리하 가문이 진짜 규리

하 가문의 적손은 아니라는 점 말이오."

케이건은 염증을 느꼈다. 노무사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겠지

만 케이건은 다른 자들의 가문사 - 그것도 복잡하게 뒤틀려 있고 꼬여있

는 - 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경의가  아닌, 그것이 시간을 충분히 소

모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케이건은 잠자코 괄하이드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생각해보시오. 왕들이 있었을 때 규리하는 변경백을 두어 다스

릴 수밖에 없었던 험지였소.  지금 그 땅이  어떻게 되어있소? 지러쿼터

산맥 동쪽의 오만한 족속들이 꿈에도 탐내는 복토가 되어 있소. 누가 그

렇게 만들었소? 왕도, 왕의 변경백도 아니오.  과텔 규리하와 케나린 규

리하가 그렇게 만들었소. 왕이 그들을 도와줬소? 그들이 왕의 위엄을 빌

려 그 일을 이룩했소? 왕은 없었소. 케이건. 그래, 좋소. 과텔과 케나린

이 왕에게 받지 않은 변경백의 이름을 사용했소. 하지만 그들이 그 이름

의 덕을 보았소? 왕은 없었소! 변경백의 지위는, 그렇게 값진 것이 아니

었소!"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소.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것 아닌 것을 가졌다

는 원칙적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소."

"알고 있소! 나는 단지 그들이 무가치한  호칭을 불법적으로 취득한 것

때문에 그들이 이룩한 모든 것을 부정하지는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거요.

과텔과 케나린을 경의로 대해주시오. 그들은 왕의 것을 훔쳤다는 말에는

승복하겠소. 하지만 왕이 존재하지 않을 때 왕의 것을 훔쳤다면, 그것은

임자 없는 것을 가졌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잖소?"

"임자 없는 것?"

"왕이 없었잖소! 아니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도 좋소. 나와 규리하는

왕이 돌아오기를 바라니까. 하지만  과텔과 케나린의 시대에는  왕은 이

땅에 없었소. 그들은 임자 없는 것을 가졌을 뿐이오!"

케이건은 소름끼치는 기분을 맛봤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겁니다.

한 분의 신을 잃으면 이 세상이 두억시니 꼴이 된다는 말이군.

하지만, 세상이 좀 더 더워지면 어떨까?

그들은 임자 없는 것을 가졌을 뿐이오!

케이건은 다시 무학당을 바라보았다. 모든  의혹이 사라지며 사태는 한

가지 결론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케이건을 경악하고 격

분하게 했다. 괄하이드는 갑자기  불타오르는 케이건의 눈빛에  놀랐다.

케이건이 외쳤다.

"이 싸움을 그만둡시다. 괄하이드!"

"무슨 말이오?"

"나는 지금 이런 놀이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소."

케이건이 격분한 나머지 저지른 실수였다. 괄하이드에게 그것은 놀이가

아니었다. 괄하이드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차갑게 대답했다.

"당신은 어디로도 갈 수 없소. 케이건. 가려거든 나를 굴복시키시오!"

케이건은 하마터면 그렇게 할 뻔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럴 경우 괄하

이드의 부하들이 달려들게 될 거라는 사실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케이건

은 한번 더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괄하이드 변경백. 지금 설명할 시간은 없지만…"

그리고 케이건은 뒤로 훌쩍 뛰어야 했다. 괄하이드의 대도가 난폭한 기

세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케이건은 분노하여  바라기를 휘둘렀고 그것을

대비하고 있던 괄하이드는 가볍게 피했다.  괄하이드는 수염을 흩날리며

외쳤다.

"비록 레콘은 아니지만, 나는 철로 대화하자고 제안하고 싶소!"

케이건은 으르릉거리며 바라기를 고쳐쥐었다.  무용으로써 사태를 해결

하려는 욕구는 케이건에겐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케이

건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바라기가 소리없는 포효를 발한 순간 괄하이드의 대도가 박살났다.

강력한 충격은 대도의 자루를 지나 괄하이드의 팔과 어깨, 허리까지 전

달되었다. 괄하이드는 볼썽사납게  쓰러졌다. 땅에 쓰러진  채 변경백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이미 바라기를

등 뒤에 걸고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괄하이드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달려갔다. 괄하이드의 부하들이 주춤거리며 그 앞을 막아섰다. 케이건은

난폭하게 외쳤다.

"비키지 않으면 다 베겠다!"

병사들은 무기를 들어  케이건을 겨냥했다. 괄하이드가  가까스로 외쳤

다.

"모두 비켜라!"

병사들은 괄하이드를 돌아보았고 케이건 역시 짧은 순간 괄하이드를 바

라보았다. 괄하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 병사가 필요하시오?"

케이건은 빠르게 생각했다. "어쩌면."

"좋소. 너희들은 그 분을 따라가서 그 분을 도와드려라."

병사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케이건은 이미  그들 사이를 지나 대사원으

로 달려올라가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괄하이드를

바라보았다. 괄하이드는 무섭게 외쳤다.

"당장 따라가라! 나도 곧 뒤를 따르겠다!"

병사들은 그제야 케이건을 따라  달렸다. 그리고 사람들 또한  그 쪽의

일이 더 중요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우르르 몰려갔다.  홀로 남게 된

괄하이드는 몸을 일으켰다. 부러진 대도를 주워든 괄하이드는 한숨을 내

쉬었다.

"정말 놀이였군."

그리고 괄하이드 역시  오솔길을 달려올라갔다. 그에겐  패배의 쓰라림

도, 놀림당했다는 분노도 없었다.  늙은 변경백의 마음  속에는 한 가지

욕구밖에 없었다.

그는 케이건이 무슨 일을 할 건지 반드시 확인하고 싶었다.

무학당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멀고 높았다. 대사원의  경내를 질풍처럼

가로지르며 케이건은 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경사진 길을 따라 달려올

라가는 그의 뒤로 병사들과 사람들은 차츰 뒤쳐지기 시작했다. 케이건도

눈앞이 하얗게 바뀌는 기분을 몇 번 느껴야 했다. 불과 얼마 전 전설 속

에나 나올 법한 대호와 온몸으로 부딪혔고 그런 몸으로 방금 이 시대 최

고의 효웅들 중 하나와 두 시간 동안 싸운 직후였다. 기절하는 것은, 어

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케이건은 기절한 채로도 달리겠다는 각오로 달렸

다.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탈진 상태가 되어 케이건은 가까스로 무학당

에 도달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좌절감을 맛보았다.

너무 멀었다.

눈으로 보이는 모습은 겨우  몇십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그곳에 륜이

서있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곳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사실을 인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케이건은 탈력감에 무릎을 꿇거나 그 자

리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등의 사치를 거부했다. 케이건은 노호하며 확장

된 공간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케이건은 무한히 달렸다.

두 시간 동안 괄하이드와 싸우고 다시 하인샤 대사원의 넓은 경내를 달

려올라온 후 달리는 것이다.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

마다 허파 속에서 녹은 쇳물이 출렁이는  것 같았고 팔다리의 감각은 사

라져버렸다. 하지만 케이건은 계속 달렸다.

어떤 레콘다운 감각에 의해 티나한은  옆을 돌아보았고, 케이건을 발견

했다.

티나한은 케이건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그 표정도 볼 수 있었다. 시각

적인 거리는 그토록 가까웠다. 케이건의 얼굴은 분노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티나한은 놀라며 철창을 움켜쥐었다.  그다지 급한 동작은 아니

었다. 그도 그럴 것이, 케이건은 어떤  위험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먼 곳

에 있었다. 티나한은 위험보다는 걱정을  느꼈다. 케이건은 수백년 동안

이라도 달리겠다는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티나한은 계명성을 내질렀다.

"케-이-건-! 무-슨-일-이-야!"

티나한이 무의식중에 염려했던 것처럼 그의 계명성은 확장된 공간 안에

삼켜져 스러지고 말았다. 케이건이 그의  목소리를 들은 기색은 없었다.

대신 티나한은 케이건이 입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티나한은

케이건이 자신과 똑같은 문제를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목청

껏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티나한에게 닿지 않았다. 너무 멀

기 때문이다.

케이건이 쓰러졌다.

티나한은 움찔하며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도  걷지 않아

티나한은 격분했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티나한은 분노 속에서  전

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나 거리는 야속하리만큼 줄어들지 않았다.

케이건은 땅을 짚으며 일어났다. 가슴 속이 그대로  타버릴 것 같은 감

각에 케이건은 몸서리를 쳤다. 온몸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땀 때문에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케이건은 억지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시각마저 흐릿했지만, 케이건은 티나한이 그를 향해 가공할 속도로 달려

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 공간에서 그

들은 완전히 유리되어 있었다. 케이건은 더  이상 뛰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케이건은 목청껏 외쳤다.

"티나한! 제발 륜을, 륜을 멈추게 하시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결론을 내린  티나한도 달리기를 멈췄다. 티나한

은 케이건의 입 모양을 읽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케이건은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게다가 호흡마저 고르지 않아서  그 입 모양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티나한은 자신의 부리와 인간의 입 사이의 차

이를 완전히 해소할 수 없었다.  케이건 또한 그 문제를 깨달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움직여 손짓을 보내었다.

케이건은 오른손으로 힘겹게 륜을 가리켰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티나한은 륜을 죽이라는 의미인 줄 알고 깜

짝 놀랐다. 그러나 케이건이  유사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손짓을 몇

가지나 반복한 후에 티나한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케이건은 륜을 제지할 것을 원하고 있었다. 티나한은 그 의미에 당황했

다.

"저걸 멈추면 우리의 여신이 죽는데?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죽는 것

을 막을 수 없잖아?"

티나한은 그것을 어떻게 하면  손짓으로 전달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

다. 하지만 티나한은 그것을 시도했다.  케이건은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기분 속에서도 겨우 티나한의  괴상한 손짓을 읽어냈다. 그대로

기절하고픈 충동을 애써 물리치며 케이건은 고함을 지르며 손짓했다.

"놈들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야!"

갈로텍은 카린돌의 의식이 조금씩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득의만만한 니

름을 보내었다.

[우리가 왜 여신을 죽인단 말인가. 스바치, 카루.]

스바치와 카루는 경악했다.

[뭐라고? 하지만 너희들은 사원을…]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우리들 또한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사원

이 어디 있는지 몰라. 하지만 설령 어디 있는지 알았더라도 여신을 죽이

지는 않아. 맙소사.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사라지면 이 세상이 무슨

꼴이 될지 누가 안단 말인가?]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들을 저지하려고 했던  카루와 스바치는 기가 막

혀 니름이 나오지 않았다. 카루가 격한  호흡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닐렀

다.

[우리를 속인 건가?]

[아니. 자네들과 하인샤 대사원의 땡초들까지 속였지.]

[그렇다면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뭐냐?]

갈로텍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카린돌이 정신을 열기 시작했

기 때문이다. 일부러 외투를  열어젖혀 냉기를 가득  받아들인 갈로텍은

고통스러운 정신으로 카린돌에게 다가섰다.

카린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눈을 뜨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기에 카린돌은 눈앞에 보이는 암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다시 니름이 들려왔다.

[베카린도렌 마케로우!]

저것은 나의 이름이다. 카린돌은 이름이 무엇인지도 잘  알 수 없는 기

분이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익숙함과 안온함이 느껴졌다. 카린돌

은 자신의 이름을 반복했다.

[베카린도렌 마케로우.]

그러자 상대방도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베카린도렌 마케로우.]

[너는 누구지?]

[친구다.]

카린돌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베카린도렌 마케로우라

고 부르고 있는 상대방은 당연히 친구일 것이다. 그것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카린돌은  자신의 이름이 카린돌이라는  것도 알

수 없었지만 그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카린돌은 상대방의 니름을 반복

했다.

[친구.]

[그래. 친구다. 지금 어떻지?]

카린돌은 자신이 어떤지 생각했다.

[춥다. 어둡다. 무섭다.]

[계속 그렇게 있겠어?]

카린돌은 모든 정신으로 거부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가?]

[벗어나고 싶다.]

[그럴 줄 알았어.]

카린돌은 그럴 줄 알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니름은 고통에 차

있었다. 상대방은 그녀의 고통에 대해 슬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왔다.]

[그래서 네가 왔어.]

[그곳을 벗어나, 나에게 오겠어?]

[이곳을 벗어나, 너에게 가겠다.]

[내게로 와.]

카린돌은 움찔했다. 무엇 때문에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카린돌은 자신

이 느낀 것이 불안이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닐렀다.

[그런데 너는 누구지?]

[베카린도렌 마케로우의 친구야.]

카린돌은 동의했다.

[너는 베카린도렌 마케로우의 친구야.]

[그래. 내게로 오겠어?]

[네게 가겠다.]

카린돌은 그렇게 했다.

티나한은 케이건에게 부딪힐 뻔했다.

단지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실제로는 도저히 부딪힐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없이 확대되어 있던 공간이  갑자기 축소되며 정상적인 거리가

되는 순간 티나한은 케이건이 '날아오듯이'  가까워진다고 느꼈다. 티나

한은 엉겁결에 케이건을 받아내려  했다. 물론 케이건이  그에게 날아와

부딪히지는 않았다.

승려들은 당황하여 웅성거렸다. 티나한은 재빨리  륜의 상태를 살폈다.

륜은 여전히 만다라 가운데 서있었다. 티나한은  륜에게 별 이상이 없음

을 확인한 다음 케이건에게로 달려갔다. 한번 껑충 뛴 다음 티나한은 케

이건 옆에 무릎을 꿇었다.

"케이건?"

땅을 향해 헐떡이고 있던 케이건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

를 들었다. 너무 급하게  머리를 든 것 때문에  다시 현기증이 찾아왔고

케이건은 구토할 뻔했다. 티나한은 온몸의 깃털을 곤두세웠지만, 다행히

케이건은 구토하지는 않았다. 케이건을 만지려던 티나한은 그 몸이 땀에

젖어있는 것을 깨닫고는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 때 케이건이 말했다.

"륜을 막으시오…"

"왜지? 왜 륜을 막으라는 거야? 저 나가들이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어떻게 죽일지 알아내어야 하잖아?"

케이건은 분노했다. 그러나 자신이 깨달은  사실을 다른 사람도 깨닫지

는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케이건

은 앞으로 쓰러졌고, 그리고 땅에 등을 대고 누웠다. 좀 쉽게 말하기 위

해서였다.

"티나한. 그들이… 여신을 죽일 리가 없소."

"뭐라고!"

"그들도 아오. 그 수호자들도 알고 있소. 그  자들도… 모든 이보다 낮

은 여신이 사라지면 세상이 반드시 더워질 거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믿지 않소."

티나한은 더할 나위 없이 당황하여 더듬거렸다.

"그, 그렇다면 여신은 안전한 거야?"

"아니오."

"무슨 소리야!"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은 안전하오. 하지만  발자국 없는 여신의 경우

는 그렇지 않소."

"나, 나가의 여신 말이야?"

"그렇소. 그들이 노리는 것은… 나가의 여신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둬! 놈들이 왜 자기들의 여신을 죽이려 한다

는 거야!"

케이건은 입 속에서 쇠맛이 나는 것을 느끼며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죽이려는 것이 아니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신체요."

"신체? 신체라니?"

"발자국 없는 여신은 륜을 만나러 이곳에 오기 때문에  하텐그라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소.  그들은 여신의 관심이  이곳에 쏠린

틈을 타 신체를 장악할 거요.  그리고, 아마도 신체에서 영을 빼버릴 거

요. 그들에게 군령자가 있다면 가능한 일이지."

티나한은  오레놀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경악 속에서 벼슬을

떨었다. 케이건은 힘겹게 말했다.

"그렇소.  그렇게 할 거요.  육 없는 영은 존재할 수 있소. 도깨비들의

어르신처럼. 하지만 영 없는 육은 존재할 수 없소.  살아있는 육에는 잠

시도 영이 부재할 수 없소.  신체에서 영이 빠져나가면,  여신은 강제로

그 육으로 소환될 거요. 그리고 그 육 안에 갇히게 될 거요."

"여신을… 가둔다고? 왜?"

케이건은 가슴을 쥐어짜듯 외쳤다.

"그들은  여신을 가둬두고 여신의 힘을 마음대로 쓸 작정이오! 왕이 없

는 이 땅에서 온갖 놈들이  왕의 이름이나 그 재산을 제멋대로 이용하는

것처럼!"

다음 순간 티나한은 륜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티나한은 필요하다면 륜의 머리를 내리쳐 기절시킬  각오까지 한 채 륜

앞에 내려섰다. 하지만 티나한은 위로 치켜든 주먹을 내리지 못했다. 륜

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나한은 공포 속에서

질문했다.

"륜. 여신과 대화 중이야?"

"아니오. 여신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  때문에 거리가 정상으로 돌

아왔습니다."

난처한 듯 말하던 륜은 티나한의 얼굴을 보곤 당황했다. 티나한은 벼슬

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렇다면 벌써…!"

[문을 닫아!]

갈로텍이 튕기듯 뒤로 물러나며 닐렀다.  그러나 수호자들이 문을 붙잡

기도 전에 카린돌의 몸에서 니름이 흘러나왔다.

[나의 신랑이여. 이게 무슨 짓인가!]

스바치와 카루는 비늘을 곤두세웠다. 생전  처음 듣는 니름이었지만 그

들은 그것이 누구의 니름인지 알 수 있었다. 여신이 아니고선 그런 니름

을 발할 수 없었다. 그 권위와 힘에 사람들은 몸이 오그라드는 기분마저

느꼈다. 하지만 갈로텍은 으르릉거리며 한쪽 문을 향해 달려갔다.

[문을 닫아, 이 멍청아!]

그리고 갈로텍은 문을 밀어붙였다. 다른쪽에  있던 수호자도 퍼뜩 제정

신을 되찾아 문을 닫았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잠근 갈로텍은 비늘을 부

딪히며 금속 입방체에서 떨어졌다.

금속 입방체는 고요했다. 갈로텍은 비늘을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에는 보트린이 넋을 잃은 채 서있었

다.

[보트린!]

[뭐, 어? 왜?]

[보트린, 대답해! 어떻게 되었지?]

보트린은 당황하며 감각을 집중시켰다.  다른 수호자들에게는 수백년처

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나서 보트린은 공포에 젖은 니름을 보내었다.

[저기… 계셔.]

[저기 계신다고?]

[저 안에 계셔. 카린돌의 몸에 갇혀계셔. 오오,  이럴 수가. 우리가 성

공했어!]

그것은 기쁨의 외침이 아니었다. 보트린은 자신들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수호자들  또한 두려움에 찬 눈으로

냉동장치를 바라보았다.

잠시도 영이 부재할 수는  없다. 카린돌의 영이 갈로텍에게  전령된 순

간,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 육은 바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육에는

하나의 영이 더 있었다.  발자국 없는 여신이다.  머나먼 북쪽에 가있던

발자국 없는 여신은 카린돌의 영이  빠져나가자마자 강제로 육으로 돌아

오게 되었다.

그리고 여신은 카린돌의 몸에 갇혀버렸다. 카린돌의 몸은 살아있다. 비

록 얼어붙어 있는 것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심장을 적출한 카린돌의 몸

은 그런 상태에서도 죽지 않았다. 살아있는  몸에서 영은 잠시도 부재할

수 없다.

만약 여신이 카린돌의 몸을 죽이려는 결정을 내린다면 그녀는 카린돌에

게서 빠져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체는 신이 가호자들의 특성

을 느끼기 위한 존재다. 그 말은 역으로 신체의 특성은 신에게도 전달된

다는 의미다. 카린돌의  몸은 냉동장치 속에서  얼어붙어있었고, 조만간

여신은 잠들게 될 것이다. 그녀는 빠져나올 수 없다.

그것을 기쁨으로 느낀 것은 갈로텍 뿐이었다.

[해냈어!]

갈로텍의 니름에 수호자들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갈로텍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한 번 더  닐렀다. [해냈어! 마침내 해냈어!]

그러자 마침내 수호자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아왔다. 아직 계획의 전모

를 알지 못하는 카루와 스바치는 다만 여신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경악하

고 있을 뿐이었다.

갈로텍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카린돌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 카린

돌은 냉동 장치 속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쉴 곳을 찾아 저 아래

로 내려가 있었다. 당분간 그녀가 말썽을 부릴 일은 없다고 생각한 갈로

텍은 바쁘게 지시를 내렸다.

[보트린, 잘했어! 네가 신체를 느낄 정도로 예민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

은 시작도 할 수 없었을 거야. 계속 저  냉동 장치를 관찰해. 그리고 그

로스, 시작해봐!]

그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로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은 기쁨을 잠

시 가라앉히고는 긴장한 채 그로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로스는 차

분해지기 위해 애쓴 다음 계획해둔 대로 여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수

호자였고, 신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륜이 하인샤 대사원에서 했던 것

과 똑같은 일을 시도했다.

륜의 경우와는 달리 여신은 그로스에게 오지 않았다. 카린돌의 몸 안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대신 여신의 힘이 그로스에게 왔다.

그로스는 팔에 비늘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계획의 다음 단계를 시도

했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쏴아아아… 느닷없이 쏟아진 비는 물안개를  피워 하텐그라쥬의 첨탑과

기념물과 건물들을 뒤덮었다. 그 모습을 보던  그로스는 환희에 차서 고

개를 돌렸다. 갈로텍은 흥분을 억누르려 애쓰며 주의깊게 질문했다.

[저건 자네가 불러낸 건가?]

[그래! 내가 불러냈어! 내가 하텐그라쥬에 비를 내리게 했어!]

수호자들은 감격하여 그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갈로텍을 바라보았

다. 갈로텍은 그로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이젠 내 차례군.]

그로스는 경의를 표하며  창가에서 물러났다. 갈로텍은  그로스가 섰던

자리에 섰다. 그리고 그로스와 똑같은 시도를 했다. 다만 마지막 단계에

서 갈로텍이 원한 것은 그로스와 정반대였다.

비가 멎었다.

카루와 스바치는 이 기적에 넋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수호자들

은 기쁨의 니름을 토해내었다.  그들은 차례로 그로스와  갈로텍이 했던

일을 시도했고, 똑같이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나선 보트린은 믿을 수 없

게도 하텐그라쥬의 하늘에 눈이  내리게 만들었다. 똑같은  일을 시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호자들은 보트린이 이루어낸  기적에 압도되었

다. 그들은 다투며 창가에 몰려서서는  난생 처음 보는 눈보라의 모습에

비늘을 곤두세웠다. 마치 순진한 어린애들 같은 모습이었다.

가장 먼저 침착을 되찾은 것은 역시 갈로텍이었다. 갈로텍은 황급히 그

눈보라를 없앴다. 수호자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저건 안 돼. 비가 오는 것 정도야 괜찮지만 눈이 오는 모습을 보면 다

른 나가들이 놀랄 거야. 지금 이 시간에 깨어있는 나가들이 있을지도 몰

라. 우리는 아직 할 일이 많아.]

수호자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갈로텍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갈로텍은 보

트린에게 다시 냉동 장치를 감시하라고 명령한 다음 그로스에게 닐렀다.

[자네는 지금 세리스마에게 가서 성공을 보고하게.]

그로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카루가 경악 속에서 닐렀다.

[누, 누구에게?]

갈로텍은 그 니름에 잠시 놀랐다가 그제야  카루와 스바치가 아직 방바

닥에 쓰러져 있음을 깨닫고는 미소지었다.

[세리스마에게 보고하라고 했다네, 친구.]

[그, 그, 그렇다면…!]

[보고할 필요는 없네.]

낯익은 니름에 카루와 스바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갈로텍과 수

호자들도 몸을 돌려 그들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방문 앞에

는 수호자 세리스마가 있었다. 스바치와 카루는  심장탑 55층이 아닌 곳

에서 세리스마를 처음 본 셈이었다.

세리스마는 부드럽게 닐렀다.

[조금 전 비가 쏟아졌을  때 성공한 것을 깨달았네.  그래서 내려온 거

야.]

카루는 온몸의 비늘을 부딪히며 혐오감에 차서 세리스마를 바라보았다.

그 때 갈로텍과 수호자들이 세리스마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세리스마는

빙긋 웃었다. 스바치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닐렀다.

[그렇다면 바로 당신이…!]

[그래. 내가 바로 이 모든 계획을 짜낸  사람이지. 음모가와 그를 저지

하려는 양심가의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일은 정말 재미있었어.

자칫 정신적 피로로 지쳐버릴 수 있는  그런 어려운 일을 재미있게 수행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자네들  덕분이야. 스바치. 그리고 카루.

자네들이 열성적인 조력자였음은 잊지 않겠네.]

카루와 스바치는 폭언을 토해내었다. 세리스마는  그 니름을 듣다가 갈

로텍에게 닐렀다.

[저 냉동 장치 안에 저 두 친구도 넣을 수 있나?]

[아니오. 공간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거 안됐군.]

[심장을 터뜨리면 어떨까요?]

[아냐. 저 친구들은  수완가들이야. 얼마나 일을  잘해줬는지는 자네도

알 것 아닌가. 천천히 설득해봐야지. 어쨌든,  마지막 단계는 언제 시작

할 생각인가?]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갈로텍은 자신 속을 향해 외쳤다.

"주퀘도! 주퀘도 사르마크!"

주퀘도는 그 외침을 들었지만 일부러 늑장을  부리며 천천히 의식의 표

면으로 부상했다. 갈로텍은 의아하여 말했다.

"왜 이렇게 천천히 올라오는 거예요?"

"주인공은 천천히 등장하는 걸세, 친구.  대관식장에서 달리는 왕을 상

상할 수 있겠나? 아, 이건 물론 지금부터 나의 시간이라는 전제 하에 하

는 말인데, 내 전제가 틀렸나?"

갈로텍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 전제가 맞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전투를 시작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대상과 목표를 알려주시지. 내가 도대체 어떤 잡것들의

자존심과 명예와 목숨에 심대한 타격을 입혀-"

"그만, 됐어요. 우리 목표는 하텐그라쥬의 대가문들입니다."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두 사람은 갈로텍의 말에 당황했다. 주퀘도 또한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가문들? 그걸 어쩌라는 거야?"

"우리는 지금부터 대가문을 습격하여 가주들을 생포해올 생각입니다."

"너 정말 야심만만하구나. 그 대가문들의 방비는 상당할 텐데?"

"그래서 사상 최고의 전투 지휘관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당신

이 반길 것이 분명한 지원도 있습니다."

"삼가 그 지원이라는 것이 뭔지 묻고 싶군."

"우리는, 만약 필요하다면 누구든지 단숨에 죽일 수 있습니다."

주퀘도는 기막혀 하며 말했다.

"이봐. 지금 앞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든 죽이겠다는 굳센 용기를 말하

는 거라면, 그건 유사 이래의 모든 전투에서  가장 필요한 보급품인 양

오인되었지만 실제론 별로…"

"아니오, 주퀘도. 나는 말 그대로의 의미로 말한 겁니다."

주퀘도는 부연설명을 요구했다. 갈로텍은 그에게 심장 파괴에 대해 설

명했다. 주퀘도는 그 개념에 매료되었다.

"그거 굉장한 일이군! 그렇다면 분명 대단한 지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게 뭔데?"

"우리는 하텐그라쥬에 눈보라가 내리게 할 수 있습니다."

주퀘도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갈로텍은 조바심을  내며 말했

다.

"주퀘도?"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원한다면 우리는 눈보라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

리고 그것은 나가들을 얼어붙게 만들 겁니다.  하지만 그런 걸 아무렇게

나 사용한다면 우리 또한  얼어붙겠지요. 어쨌든 우리는  전투 전문가는

아니잖습니까. 그러니 당신이 우리를 지휘해  주십시오. 그리고 어느 곳

에 어떻게 눈보라를, 혹은 비를, 혹은 홍수를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주십

시오."

"농담으로 치부해버리기엔 태도가 너무 진지한데."

"농담이 아닙니다. 당신은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평생이 전투로 얼룩

진 당신도 아마 이런 종류의 지원은 생각도 못했겠지요?"

주퀘도는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다.

센 가문의 가주이자 하텐그라쥬 가문 평의회의  의장인 라토 센은 정신

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는 잠자리에서 갑자기  끌려나왔고, 그런 일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만약 인간들의  지배자라면 그런 습격에 훨씬

능동적이고 민첩하게 대처했겠지만 나가들의  사회는 인간들처럼 난폭하

지 않다. 대가문의 가주다운 침착성 때문에 공포에 울부짖지는 않았지만

라토 센은 혼란 속에서 질질 끌려갔다.

홀 가운데서  라토 센은 겨우 그 고통스러운 포박에서 풀려났다.  라토

센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녀의 자매와 딸들, 그리고  손녀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끌려나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라토보다는 훨씬 겁에 질려

있었고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라토는 어린 손녀를 끌으안으며

습격자의 지휘자를 찾아보려 애썼다.  하지만 습격자들은 정신없이 움직

이고 있었고 누가 지휘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한 사람이 그녀의  앞쪽으로 걸어왔다.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었고 몸은 검은 옷으로 감싸고  있었지만 라토 센은 상대가 남자

임을 알 수 있었다. 라토는 분노를 느꼈다. 남자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생각한 라토는 손녀를 안은 채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사

이커를 그녀의 목에 겨누었다.

[앉아있으시오. 라토 센.]

[너는 누구냐! 너희들이 어떤  부랑자이기에 감히 센  가문을 습격했느

냐!]

사이커를 쥔 남자, 즉 갈로텍은 자신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당

황했다. 주퀘도가 그 손을 움직인 것이다. 주퀘도는 사이커를 옆으로 돌

려 칼날 옆부분으로 라토의 뺨을 후려갈겼다.  센 가문의 여인들이 기겁

했고 갈로텍 또한 이 존경스러운 여인을  때렸다는 사실에 덜컥 겁을 집

어먹었다. 하지만 주퀘도는 빠르게 말했다.

"멍청이, 정신차려라!  무슨 니름을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저 년의 태도

를 보니 대충 짐작이 간다.  그런 반항은 최초에 확실히 뭉개놔야 한다.

저 년이 좀 더 나불대게 놔두면  주위의 다른 년들도 들고  일어날 거란

말이다."

갈로텍의 입은 가면에 가려져 있었고 센  가문의 여자들은 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 말하고 혼자 듣는 갈로텍의 기괴한 모

습을 깨닫지 못했다. 갈로텍은 겨우 사나운 니름을 꺼내놓았다.

[질문은 내가 한다.] 갈로텍은 용기를 짜냈다. [이 할망구야!]

센 가문 사람들은 이  폭언에 기가 막혔다. 상상하기도  힘든 무도함은

그녀들을 얼어붙게 했고 공포를 가중시켰다.  주퀘도가 바라던대로 되었

음을 깨달은 갈로텍은 주퀘도가 없었다면  정말 곤란했을 거라는 생각을

되새겼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주퀘도가 말했다.

"이제 달래라. 말 잘 들으면 안 다칠 수 있다는 식으로. 젠장. 이런 것

까지 가르쳐야 하나?"

[내가 하라는대로 하면 그런 험한 꼴은 당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또다

시 내 심사를 건드리면 호된 맛을 볼 거다.]

라토 센은 분노보다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뜬 채  갈로텍을 올려다보았

다. 그리고 갈로텍은 태어난 이래로 지켜온  도덕 관념의 혼란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갈로텍은 혼란에 휘둘리게 되기 전에 빠르게

해치우기로 했다.

[일어나! 라토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간다. 나머지는 집에 있도록.]

[나를…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냐?]

질문하는 라토의 니름에는 드디어 공포가  엿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갈

로텍을 흥분시켰다. 자신보다 약한 것을 만났을 때의 잔혹한 우월감. 갈

로텍은 그 기분이 좋았다. 지독하게 좋았다.

[어디로 가냐고? 궁금한가?]

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로텍은 사납게 닐렀다.

[심장탑이다.]

[심장탑?]

갈로텍은 가면을 확  벗었다. 주퀘도는 어이가  없었지만 내버려두기로

했다. 갈로텍은 사이커를 무시무시하게 흔들며 닐렀다.

[그래, 이 년아! 나는 너희들이 버러지처럼 생각하는 남자일 뿐만 아니

라 수호자다! 하텐그라쥬는, 아니, 나가는 앞으로 우리가 지배한다!]

라토는 기가 막혀 닐렀다.

[너희들이… 권력에 미쳐서…]

갈로텍은 다시 라토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번에는 주퀘도의 의지가 아

니었다. 어처구니없어하던 주퀘도는 자신이 깃들어있는 개망나니를 꾸짖

어줄까 하다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전투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도 않

아서 그 예기를 꺾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퀘도는 상황이 일

단락된 뒤에 갈로텍에게 몇 마디 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갈로텍은 자신감에 차서 닐렀다.

[니름 조심해! 너희 년들이 800년 전에 실패한 일을 마무리지어주는 사

람에게 사용할 니름이 아니다!]

라토는 겁에 질린 채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환희에 차서 닐렀

다.

[우리가 너희들의 권력 따위를  노리는 줄 알아? 천만에.  그런 사소한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물론 그것도 가질  테지만 우리의 눈은 더 멀

리 내다보고 있다. 우리는 전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전세계라고?]

[그래. 우리는 대확장 전쟁을 재개할 것이다!]

케이건은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움직일 생각도 없었다.

케이건은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빨리 말을  끝내려 애썼다. 그의 주위에

몰려든 승려들과 륜, 그리고  티나한은 케이건의 설명을  들으며 공포에

사로잡혔다.

쥬타기 대선사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증거가, 증거가 있나?"

"여신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  증거입니다. 여신께서 왜  신랑의 부름에

나타났다가 대화도 하지 않고 사라졌겠습니까? 아마 지금쯤 여신은 자기

신랑들의 손에 억류되셨을 겁니다."

"자신들의 신부를…!"

"그렇습니다."

티나한은 자신이 륜과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티나한은 모

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죽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했지만 륜의 신

부가 억류되었다는 것에는 동정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나한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 놈들이 여신의 힘을 가져서 뭘 하겠다는 거지?"

"대확장 전쟁을 재개할 거요."

"어떻게? 놈들은 한계선을 넘을 수 없어."

"세상이 더워지면 가능하오."

티나한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고 그것은  륜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

명할 기력이 없었던 케이건은 쥬타기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대선사님. 설명하십시오."

대선사는 모든 이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입술을 깨물던 대선사는 빠르

게 설명했다.

"간단히 설명하겠소. 발자국 없는 여신의 힘은 물이오."

티나한은 물이라는 말에 질겁했다. 학식이  높은 승려들 몇몇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승려들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

다는 표정을 지었다. 쥬타기 대선사는 다시 말했다.

"물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소."

티나한은 그게 무슨 설명이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륜이 먼저 당황

하여 말했다.

"그럼 다른 신들께서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힘은 땅이오. 그 이름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요. 도깨비들을 가호하시는 자신을 죽이는 신의 힘은 불이지. 탈

수록 더 많은 연료를 필요로 하며 결국  자신을 죽여가는 불 말이오. 그

리고, 어디에도 없는 신의 힘은 바람이오.  바람은 어디에도 없소. 이곳

에서 저곳으로 움직일 뿐이지. 이해하시겠소?"

티나한과 륜은 이해할 듯  말 듯한 표정으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쥬타기 대선사의 설명을 계속 듣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현재 나가들은 물의 힘을 손에 넣은 것이오. 그런데 물은 열

을 흡수하오. 륜 자네가 잘 알겠지."

"예. 그런데요?"

"물이 열을 흡수한다는 것은, 바꿔 말한다면  물이 열을 보관한다는 의

미도 되오. 사막이 왜 밤에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추운지 아시오? 사막

에는 물이 없소. 그래서 사막은 낮의 열을 보관해두지 못하기 때문에 밤

에 그렇게 추운 거요. 대체적으로 더운  지방은 곧 물이 많은 지방이오.

메마른 곳은 춥지."

륜은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선사는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깨물다

가 다시 외쳤다.

"그 자들은 키보렌에 있소! 그 자들은 키보렌의 열을 물 속에 보관시켜

한계선 너머로  보내어올 수 있소. 아니, 단순히 이 북쪽을 습기찬 곳으

로 만들어도 북쪽의 기온은 상승할 거요. 세계가 더워지는 거지! 그리고

그들은 의미가 없어진 한계선을 넘어올 거요. 비와  눈보라와 홍수 등의

자연력을 마음대로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채!"

대선사는 격노를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남쪽을 바라보며 비탄

을 토했다.

"내가 그들에게 속았다. 그래서 세계가 그들이  일으킨 열독 속에 신음

하도록 만들었어!"

격노하던 대선사는 문득 당황하여 케이건을 쳐다보았다. 케이건의 얼굴

은 어두웠다. 그리고 쥬타기 대선사는 자신이 더 큰 불행 앞에서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는 꼴을 보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선사는 불과 얼마 전

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나가를 믿지 않아.  그것들이 약한 척,  아픈 척, 죽은 척한다고

해서 칼을 칼집에 꽂아넣는 것은 미련한 짓이야. 나는 그런 속임수에 너

무 많이 당했어.'

==================================================================

챕터 7. '열독(熱毒)' 편 끝났습니다.

음. 나가들의 필기수단은 두 가지가 등장했습니다. 먹과 붓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것, 그리고 금속판에 철필로 긋고 물을 발라가며 읽

는 것이지요.

전자의 방법을 사용하는 장면은 두 번인가 나왔을 겁니다. 륜의 꿈속에

서 화리트가 쥐고 있던 건 붓이었지요. 그리고 비아스가 항의장을 쓸 때

사용한 것도 먹과 붓이었습니다.  후자는 노기 하수언이 냉동 장치를 설

계할 때 사용했지요.

전자는 검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