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26화 (26/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7-3.                         관련자료:없음  [53692]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5-05 01:30  조회:9613

눈물을 마시는 새.

7. 열독(熱毒) - 3

하인샤 대사원의 외관은 원래부터 통일성이나  조화미라는 요소를 결여

하고 있었다. 그 내부에  간직한 위대한 역사와 장대한  전통 덕분에 흠

잡기를 좋아하는 자들의 눈이 외부로 향하는 것을 피하고 있을 뿐. 만약

그런 내부적인 힘에서 눈을 돌려 가장 객관적으로 하인샤 대사원의 외관

을 평가한다면 하인샤 대사원은 '거의 난잡하다.'

불행히도 근래 며칠 동안 행자들과 승려들은  그런 평가가 내부에도 적

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울한 의혹을 느껴야 했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경내를  돌아다녀도 빡빡 깎은 머리 이

외에는 만날 수 없는 것이 산사의 단조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사원은 짧은 머리, 긴 머리, 땋은 머리,  올린 머리, 반만 깎은 머

리 등으로 가득 차 오히려 승려의 빡빡 깎은 머리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

이다. 게다가 그 각종 '머리'들이 들고  다니는 무장들은 어찌나 흉흉한

지 승려들은 자신이 산사에  있는 것인지 전쟁터  한가운데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말투의 다종다양함은 그런 혼란을 가중시켰다. 빠르게 재

재거리는 소리, 느리게 굴러가는 소리, 지금부터 네 모가지를 몸에서 분

리해주겠다는 듯이 울부짖는 소리. 승려들은 그것이 같은 말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언어학이나 수사학을 공부하는 일부 학승들만이 크게 기

꺼워할 뿐 대부분의 승려들은 방문자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을 두려워하

며 땅만 보며 걸어다녔다. 불행히도,  모든 방문자들은 승려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했다.

대사원의 살림을 담당하는 사제들 또한 방문자들에 대해 골머리를 아파

했다. 품위를 아는 많은 수의 방문자들이  사원에 흡족할만한 보시를 하

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대사원의 재정  상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온 방문자들의 다양한  식성이 문제였다. 많은 수

의 방문자들이 사원의 담백하고 소박한 음식에  염증을 냈다. 특히 몇몇

강맹한 수렵부족들은 식사 공양 때마다  노골적으로 분개한 표정을 지어

승려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드러내놓고  불평하는 자는 아

직 없었지만 파름산 뒤편의 밀렵꾼들과  작당하고 몰래 고기를 구워먹다

가 들켜 창피를 당한 방문자는 몇몇 있었다.

방문자들의 존재가 사원의 우환거리로 부상하고  있음은 더없이 분명했

다. 따라서 그날 오후, 승려들은 넋이  나간 듯한 방문자들의 모습을 보

며 작은 쾌감을 느꼈다.

방문자들은 숨소리마저 조심하며 한 곳을  응시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눈, 한껏 부릅뜬 눈, 어떻게든 눈을 맞춰보려 애쓰는 눈 등이 향하

는 곳에는 쌍신검을 소지한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케이건 드라카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조용히  사원의 경내를 걷고 있

었다. 교활하게도 케이건은 가끔 방문자들을  흘끔 바라보고는, 깊이 고

뇌하는 표정을 짓다가, 주저하며 다가서려는  몸짓을 하고는, 고개를 조

금 가로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  일을 반복했다. 케이건이 '무학당의

손님'이라는 것을 전해들은 방문자들은 그런  케이건의 태도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하들의 급한 연락을 받고  체통도 잠시 접어둔 채 부

리나케 달려나온 군웅들은 그런 케이건의 일거수일투족에 호흡이 답답해

지는 기분마저 느꼈다. 하지만 선뜻 다가서서 말을 붙이는 자는 없었다.

케이건의 태도는 냉엄했고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표정

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묘한 대치가 오랫동안 계속될 리는 없었다. 케이건 자신

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방문자들은 모두 세계의  곳곳에서 일가를

이룬 자들이었고 그 중에는  효웅의 이름이 아깝지  않은 걸물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마침내 한 남자가  케이건을 향해 걸어왔다. 사려깊게

도 그는 부하들을 내버려둔 채 홀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케이건은 경내에 작은 정원 앞에 멈춰서서 해당화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해당화가 만발하구려."

"산에는 원추리가 피고 있소."

"신기한 검을 가지고 계시는군. 실용성이  의심되는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멋대로 자라난 백발로 이마의  대부분과 얼굴의 상당  부분을 뒤덮고

있는 덩치 큰 노인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얼굴도 풍성한 흰수염 때문

에 코 아래는 확인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훌륭하다는 이유로 청년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만한 체격은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긴 다리

와 거무튀튀한 얼굴, 그리고 꼿꼿한 자세를  차례로 관찰한 케이건은 마

지막으로 그 오른팔 뒤에 칼날을 감추듯  거꾸로 쥐어져 있는 병기를 보

고는 결론을 내렸다.

"그쪽의 대도(大刀) 또한 상당하군. 그리고 내 것과 달리 그 무기는 이

미 실용성이 충분히 증명된 것으로 알고 있소. 괄하이드 변경백."

노무사 괄하이드 규리하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케이건의 말은 덕담이

아니었다.

"과부와 고아들을 생산해내는 데 탁월하다더군."

괄하이드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하지만  늙은 변경백은 차분한 언성

으로 말했다.

"동의하오. 결국 무기란 놈의 정체는  그런 가증스러운 것이지. 하지만

육십 평생에 수치스러운 칼질은 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오. 귀하의 이름

은?"

"케이건 드라카."

"음? 그건 이름이 아니오. 흑사자와 용이라니."

"키탈저 사냥어를 아시오?"

"어쩌다 줏어들은 몇 개의 단어를 아는 정도요."

"나는 그걸 이름으로 삼고 있소."

"알겠소. 케이건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요?"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규리하 가문은, 그들 자신의 주장을 따른다면 왕국 아라짓의 마지막 신

하다. 왕국이 이미 사라진지 800년이나  지난 현재까지도 고집하고 있는

이 변경백이라는 호칭은 그들의  충성의 대상이 왕임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한다면 그들이 왕께 보내는 것은 충성의 감정 뿐이라는

의미도 된다. 어쨌든 변경백의 권한은 왕에 필적한다. 왕과 변경백이 주

종관계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현실적인 측면만 놓고 본다면 변경백은 하

나의 국가 안에 있는 두 번째 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모든 고찰은 사실과  무관하기에 무의미하다. '진짜' 변경백

의 전통은 800여년 전, 변경의 방비라는 변경백 본연의 사명을 저버리고

나가에 대항한 전투에 참전한 후사린 규리하에서 단절되었다. 현재의 규

리하 가문은 대확장 전쟁이  끝나고 왕국이 사분오열된  이후 '규리하의

거성'을 개축한 과텔이라는 이름의 신흥부자의 후손이다. 과텔은 규리하

의 거성 뿐만이 아니라 그 이름과  지위까지도 승계하기로 결정했다. 그

는 자신이 규리하 가문의 적손이라고는 감히 주장하지 못했지만 대신 방

계로 이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과텔 '규리하'의 설명을

믿지 않았지만 구태여 반대할 의무도 느끼지  못했다. 어떤 부자가 규리

하의 거성에서 살며 서신 아래에 '변경백'이라는 서명을 넣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국그릇을 뺏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규리하의  거성이 있는

지러쿼터 산맥 서부 지역은 일찍이 왕들조차도 변경백을 둘 수밖에 없었

던 거칠고 야만스러운 곳이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런 땅에서 어떤 미

치광이가 우스꽝스러운 호칭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것은 누구에게도

해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떤 사람들은 과텔 규리하

가 규리하의 거성에 걸려있는 전투도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

명하고 또다른 사람들은 규리하의 거성에 살고 있는 후사린 규리하의 망

령이 과텔에게 씌였다고 설명하기도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과텔 규

리하가 '상무 정신'을 강조하기 시작했을 때 규리하 부인은 남편이 미친

줄 알았다. 그렇잖아도 험준하고 볼 것 없는  땅에 살게 된 것에 불만을

잔뜩 품고 있던 규리하 부인은 이혼을  선언한 다음 지러쿼터 산맥 동쪽

으로 도망쳐버렸다. 과텔 규리하는 만년에 맞이한 이혼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 때 과텔 규리하는 자신이 정말 위대한 규리하 가문의 후손이

라고 믿고 있었고 충성을 바칠 왕이 돌아왔을 때 변경백으로서의 책무를

다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섯 살 난 딸에게 군사 훈련을 시켰다는  악의 어린 소문도 있지만 그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보다 양식  있는 사람들은 옛이야기를 조르는

딸의 잠자리 곁에 앉아서 왕의 이야기와  아라짓 전사의 이야기, 그리고

변경백의 이야기 등을 들려주는 자상한 아버지 과텔의 모습을 보다 현실

성 높은 추측으로 받아들인다. 과텔이 만년에  이룩한 일은 절대로 광인

의 소치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텔은 과감하고 현명한 정책들을

통해 황폐하기 짝이 없던 지러쿼터 산맥 서부에 몇 개 도시가 부럽지 않

은 변경백령을 만들었다. 더 이상 그곳을 지러쿼터 산맥 서부라는, 마치

지리학 용어를 연상케 하는 이름으로  부르기 쑥스럽다고 생각한 사람들

은 그곳을 규리하 지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과텔은 사람들이 자신의

땅을 규리하 변경백령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랐지만  그 소망은 그의 생전

에는 달성되지 못했다.

규리하 지방은 날로 번창했다. 마침내  규리하 사람들은 과텔에게 왕위

에 오르라고 졸랐다. 과텔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왕국의 방패

인 변경백이며 왕위에 오르는 것은 반역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람들의 요

청을 완강히 거절했다. 물론 왕국도, 왕도 존재하지도 않는데 반역을 논

하는 과텔의 대답은 도무지 논리적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규리하 사

람들은 과텔의 의도를 존중했고 마침내  과텔 규리하를 변경백이라고 불

렀다.

과텔이 사망했을 때 한 때 괴소문의 주인공이었던 그의 딸 케나린 규리

하는 20세의 꽃다운 처녀로 자라나 있었다.  그러나 케나린 규리하는 그

녀를 '금편 백만 닢의 지참금을 가진  신부'로 보는 사람들을 당혹케 만

들었다. 아버지의 교육이 지나치게 훌륭했던 것인지, 그렇잖으면 자신과

아버지를 버린 어머니에 대한  반발 심리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케나린 규리하는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자신이 변경백의 지위

를 계승한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날아오는  구혼을 모두

뿌리친 다음 과텔 규리하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훌륭한 무인이었

던 젊은 장수와 결혼해버렸다. 머리가 좀  차가운 사람들은 케나린이 경

망스러운 사람들에 의해 금편  백만 닢의 가치가  있다고 판정된 규리하

지방을 다른 자에게 내주기 싫었기에 그렇게 행동했다고 설명했다. 하지

만 변경백의 지위를 계승한 그녀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은 머리보다는 심

장으로 생각하는 자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케나린 규리하는 행정체제

와 군사체제를 일원화시킨 체제로 규리하 지방을 정비했고 그 결과로 상

시 동원 가능한 일만의 군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지러쿼터 산맥 동쪽의

토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케나린의

의도를 떠보기 위한  사절들이 지러쿼터  산맥을 무수히  넘나들게 되었

다.(그리고, 무수한 사절들이 지러쿼터 산맥의  험악한 기후에 희생당했

다.) 그러나 케나린의 대답은 더할 수 없이 단순했다. '변경백은 변경백

령을 지킴으로써 왕국의 방패가 될 뿐이다.  변경백은 왕국의 심장을 겨

누는 단검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 불침 선언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케나린의 대답을 '왕국이 아닌  토호들의 땅은 언제든 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케나린은 절대

로 지러쿼터 산맥 동쪽을 넘보지 않았다. 마침내 사람들은 이 고집센 부

녀의 뜻을 존중하여 그 땅을 규리하  변경백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어쩌

면 그런 칭호의 내면에는 변경백으로서 지러쿼터 산맥을 넘지 말라는 무

언의 요청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케나린 규리하는  그런 내면의

요구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녀의 땅을 변경백령으로 불러

준 사실에는 기뻐했다.

어쩌면 과텔 규리하와 케나린 규리하는 조금 변형된 형태의 제왕병자였

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부녀는 훌

륭한 지배자들이었다. 지금까지도 규리하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지배자를 변경백이라 부르고 '상무 정신'을  강조하는 것을 보며 사람들

이 웃을 수 없는 이유도 그에 기인한다.  물론 이 전설적인 부녀의 이야

기는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이라고 생각한 야심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

다. 하지만 규리하를 지배한 변경백들은  지러쿼터 산맥 동쪽으로부터의

도전을 언제나 무참하게 분쇄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제왕병자들에게 규

리하 변경백령은 악몽의 땅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미치광이나 어릿광

대 정도로 취급되는 제왕병자들은 규리하 변경백령에서만큼은 참살을 당

해도 할 말이 없는 무도한 반역자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지금 케이건의 앞에  서있는 노무사 괄하이드  규리하는 평생에

걸쳐 다섯 번이나 지러쿼터 산맥  동쪽으로부터의 도전을 격파하여 산맥

서쪽에 과텔 규리하와 케나린 규리하의  전설이 새파랗게 살아있음을 증

명해보인 자였다. 그가 그토록 많은 전쟁을  치뤄야 했던 것은 지러쿼터

산맥 동쪽의 인구가 늘어남으로써 서진의 동기가 유발된 때문이다. 하지

만 괄하이드 규리하를 보며 케이건은 당분간은 지러쿼터 산맥 동쪽 사람

들이 좀 참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괄하이드 변경백은 보석을 감정하는 듯한  눈으로, 하지만 자신이 감정

하는 것이 보석인지 돌멩이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변경백이오. 변경백이 무엇인지 아시오?"

"왕의 재산을 갈취한 자들 중 가장 속 편한 자요."

괄하이드는 이 도전적인 대답에 눈썹을 곤두세웠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주면 좋겠군."

"왕이 돌아온다면 현재 왕의 재산을  타고 앉아있는 자들은 불법점유자

들이 될 거요. 하지만  변경백의 경우엔 상관이  없지. 변경백의 동의가

없다면 왕도 변경백령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까."

케이건은 그래서 다른 자들보다 속 편하게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한 셈이었다. 물론 왕의 귀환을 기다리며 왕

의 국경을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괄하이드 변경백에게는 기분 나쁜 해

석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기 유쾌한 언사는 아니군. 케이건 드라카."

"기분을 맞춰달라는 요청은 들은 적이 없소."

"그렇다면 요청하겠소."

"거절하겠소."

괄하이드 변경백은 '요놈 봐라?'하는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화

가 난 기색은 없었고, 그래서 케이건은 실망했다. 그는 괄하이드 변경백

이 광분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노무사는 바위 같은 인물이었다.

케이건은 사람들이 괄하이드 변경백에 대해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유감스럽지만 할 수 없지. 어쨌든 당신은 내가 왕의 귀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음을 이해할 거라 생각하오."

"이해하오."

"나는 얼마 전, 대사원의 존경하는 사제들이 매우 심상치 않은 일을 진

행중이라는 정보를 전달받았소. 내게  그것을 알려준 것은  이 사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 사촌동생이오."

케이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괄하이드의 사촌동생이면 나이가  꽤 많을

것이다.

"만학도이신가 보군."

"그는 만년을 이곳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대사원에 들어왔소. 그래

서 나는 대사원에 약간의 전답을 기증했소."

기나긴 세월 동안 그런 보시를 받아왔으니  대사원의 땅을 모두 합치면

광대하다는 말도 모자랄 지경일 것이다.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괄

하이드 변경백은 계속 말했다.

"나는 몇몇 수하들과 함께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어제  간신히 이곳에

도달했소. 도착해보니 장관도 이런  장관이 없군. 세상의  토호나 효웅,

군웅들은 모조리 다 몰려든 것 같소.  옛적의 만민회의장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나 싶을 지경이오. 늦게  도착한 덕분에 아직  아는 것이 적지만,

나는 당신이 그 일에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전해듣게

되었소."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당신과 승려들이 행하는 일은 왕의 귀환과 관

련이 있는 일이오?"

"왕의 귀환?"

"더 쉽게 풀어 말하길 원하는 거요? 이렇게  묻겠소. 당신과 하인샤 대

사원의 승려들은 현재, 혹은 가까운 장래에 왕을 찾아내거나, 혹은 키탈

저 사냥꾼들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내거나,  혹은 영웅왕의 검을 찾아

낼 생각이오? 그도저도 아니라면 왕을  만들어낼 생각이오? 당신이 괜찮

다면 나는 당신이 왕이 될 자인지도 확인하고 싶군."

"만일 내 대답이 그 질문들 중 하나에 대한 긍정이라면 어떻게 할 작정

이오?"

"나는 왕의 귀환을 바라오. 당신들이 합당하며 의심할 수 없는 왕을 나

에게 보여준다면, 나는 그 왕에게 그의 방패를 보여주겠소."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자들 중 일부는 우리가 왕을 만들 생각이면 자기 자신이 바

로 그 재목이라고 믿는 것 같던데. 만약 내가  여기 있는 자들 중 한 명

에게 하인샤 대사원의 추대라는 망토를  입혀 왕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에

게 내놓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케이건의 말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자들에게도 들렸고,  그 자들은

귀가 번쩍 열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들은 숨죽인 채 변경백의 대답을 기

다렸다. 변경백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가 아라짓 왕국의 정통성을 이을 수 있는  자라면 규리하는 그를 지

지할 거요."

일부 - 극히 일부였다. - 못난 인사들은  속으로 환호를 올렸다. 그 못

난 인사들은 규리하의 막강한 힘이 자신을 지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망

상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대다수 쟁쟁한  자들은 변경백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었기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건

또한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들의 말이 맞군."

"무슨 뜻이오?"

"사람들은 괄하이드 규리하가 산에게 부동심(不動心)을 가르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하더군."

변경백은 피식 웃었다.

"부풀려 말하길 좋아하는 자들의 허언일 뿐이오."

"당신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소. 당신이 평가하기에 아라짓의 정통성과

상관이 없는 자라면, 그 자가 아무리 하인샤 대사원의 위광을 등에 업은

자라도 무시하겠다는 말이로군. 그리고 필요하다면  하인샤 대사원과 정

면으로 대치하는 일이라도 감수할 테고."

"정확하오."

조금 전 속으로 환호했던 못난 인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괄하이드 변경

백은 이제 사나운 무인의 자세를 뚜렷이 드러내며 말했다.

"잘 아시겠소? 당신들이 혹  왕을 찾아낸다면 규리하와  나는 진심으로

감사할 거요. 하지만 당신과  승려들이 어처구니없는 장난을  치고 있는

거라면 규리하와 나는 절대로 그것을 좌시하지  않을 거요! 자, 이제 당

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말해주시오."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돌렸다.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 시간 후면

의식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케이건은 -  광분까지는 아니더라도 - 괄

하이드 변경백이 상당한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은 벌써 열리고 있었다.

"나를 시험하시오."

"뭐라 했소?"

"당신은 조금 전 내 칼의 실용성이 의심된다고 했소. 과연 그런지 시험

해보라는 거요."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오?"

"내가 왕이 될만한 자인지 알아볼 기회를 주는 거요."

괄하이드 변경백의 눈에서 섬광이 번득였다.

"승려들은 당신을 왕으로 만들 생각이오?  그렇잖다면 당신은 승려들이

찾아낸 왕이오?"

"당신은 이미 하인샤 대사원의 판단은 신경쓰지 않겠다고 말했소. 당신

자신의 팔과 그 대도로  시험해보시오. 나 또한  당신을 시험해봐야겠거

든."

"나를 시험한다고?"

"당신에게 규리하를 맡겨둬도 될지, 그렇잖다면 당신과 당신 가문의 모

든 사람을 추방하고 규리하를 내 영토로 삼아야 할지 결정해야겠소."

괄하이드의 팔이 경련했다. 케이건의 말은 지독하게 무례했다.

"당신이 '진짜' 왕이라 하더라도 변경백령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시오?"

"당신이 '진짜' 변경백이라면 그렇겠지."

케이건의 말은 괄하이드의 가장 아픈  부분을 잔인하게 찌른 셈이었다.

괄하이드 규리하는 수염을 푸들푸들 떨며  케이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케이건은 끝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신은 진짜 변경백이  아니오. '내' 변경백의  땅에 제멋대로

눌러앉은 정신 나간 제왕병 부녀의 후손일 뿐이지."

"감히… 감히 과텔과 케나린을 그렇게 부른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

닌 내 앞에서?"

"한번 더 말해 줄 수도 있소."

괄하이드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거꾸로 쥐고 있던 대도가 섬뜩한 빛

을 뿌리며 날아왔다.

"용서하지 않겠다!"

륜은 마당으로 내려섰다.

지붕 위에 있던 아스화리탈이 날아들었다.  륜은 아스화리탈을 받아 안

은 채 두억시니들의 사이로 걸어갔다.  마루나래는 두억시니들을 지휘하

는 듯한 위치에 앉아있었다. 잠시 륜을 돌아보았지만 마루나래는 오랫동

안 바라보지는 않았다. 지금 그 대호는 마당 반대편에 서있는 승려들 때

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물론 어느쪽 신경이 더 곤두서 있는지

를 겨룬다면 당연히 승려들 쪽의  우세다. 승려들은 두억시니들과, 그리

고 대호와 대치하는 듯한 모습으로 서있는 자신들의 모습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억시니들 앞에 앉아있는 마루나래처럼 승려들  앞쪽에는 쥬타기 대선

사와 오레놀, 그리고 티나한이 서있었다. 오레놀은 륜을 향해 웃으며 손

을 흔들어보였다. 긴장하고 있을 것이 뻔한  륜을 위한 의도된 몸짓이었

다. 륜은 고맙게 웃었다. 쥬타기 대선사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입 모양

으로 말했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대선사는 그  무거운 침묵을 감히

깨지는 못했다. 그 침묵은 긴장감과 흥분의  권능이었고 누구도 그 권능

에 대항하지 못했다. 심지어 티나한까지도.

륜은 마당 가운데로 걸어갔다.

오레놀과 행자들이 죽편을 참고해가며 마당  가운데 그려놓은 만다라는

복잡했다. 만다라를 그리기에 앞서 오레놀과 행자들은 땅 위를 기다시피

하며 마당의 편평도를 검사했고 몇 동이나  되는 피를 부었고 다시 일곱

군데의 샘에서 떠온 물로 그것을 씻어내었다. 그리고 그 젖은 땅에 모래

를 뿌려가며 만다라를 그렸다. 만다라를 완성하는  데는 이틀 밤낮이 꼬

박 소요되었다.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계속  물로 적시며 그린 만다라

는 마침내 완성되었지만, 지금 그 물기는  마르고 있었고 그래서 오레놀

과 행자들은 옆사람의 입김에도  기겁했다. 다행히 산의  공기는 고요했

다. 바람이 없는 것에 감사하며 쥬타기 대선사는 륜을 바라보았다.

륜은 만다라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륜이

아스화리탈을 놓아주지 않는 것을 보며 승려들은 조바심을 느꼈다. 용의

존재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륜은 아스

화리탈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만다라의 중심에 선 륜은 오레놀을 잠시 바라보았다.

오레놀은 륜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만다라는 겉치레일뿐입니다." 그토

록 고생하며 그린 만다라를 간단히  폄하해버리는 오레놀의 태도에 륜은

당황했다. 오레놀은 설명했다.

"이건 굳이 따진다면 예의 문제입니다. 조야하게 비유한다면 귀한 분을

만나기 앞서 의복을 정갈히 하는 태도에 해당할까요. 예. 만다라가 당신

이 하려는 일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영향은 끼치지 않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의지입니다."

오레놀은 륜의 의지라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리고 만다라 중심

에서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를 미리 결정해두라고 권고했다. 륜은 그 권

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생각이라니오? 당연히 여신을 부르겠다는 생각 아닙니까?"

"그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일 자체는 지금 현재에도 수백 명, 어쩌

면 수천 명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세요. 지금 이 순간

에도 세상의 어느 구석에서는 생명의 위험에  처한 누군가가, 혹은 다른

어떤 위기 때문에 두려움과 슬픔, 어쩌면 분노 속에서 신을 부르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 겁니다. 단지 신을 부른다는  것뿐이라면 당신과 그들 사

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  중에는 당신보다 훨씬 절

실한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그런

사람들 앞에 펑! 하고 신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고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가이너 카쉬냅은 그런 태도를 비꼬아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

가 신을 신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전일  근무 가능한 무보수 만능 하인>

이라는 본명이 부르기 지나치게 번거롭기 때문이다'라고."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그들은 신이 자기에게 맞추어지기를 바라지요.

당신은 그 반대로 해야 합니다. 당신을 신에게 맞추세요."

"알 듯 모를 듯한 말이군요."

"더 이상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이 다음

부터는 당신과 당신의 신부 사이의 일입니다."

"제 신부요?"

"네. 당신의 신부. 발자국 없는 여신은 이곳이 사원이고 저희들이 정성

껏 만다라를 그렸기 때문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들이 필요

한 것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신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만다라 가운데서

기다리고 있는 당신을 만나러 오는 겁니다. 그걸 유념하세요. 그리고 그

가운데서 무슨 생각을 할지 결정해두세요."

륜은 오레놀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는 한번 더  오레놀을 바라보고,

그 옆에 서서 초조감을 감추지 못한  채 수염볏을 비틀고 있는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륜은 만다라의 중심에 앉았다.

스바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꽤 이상한 상황에 처해있음을 깨달

았다. 그다지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생애를 살아왔지만 스바치는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잠에서 깨어난 경험이 없었다.

몸을 뒤채보려던 스바치는 뒤통수에서 엄습하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굳이 말로 바꿔본다면 "으아악!"에 해당하는  니름이었다. 그 니름을 들

은 누군가가 니름을 걸어왔다.

[스바치, 일어났나?]

스바치는 고통을 참으며 겨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처럼 밧줄

에 꽁꽁 묶인 카루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난 자네가 깨어나면 바로 그걸 질문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그렇

다면 우리는 현재로선 몸도 마음도 같은 처지라는 의미군.]

[여기가 어디지?]

[심장탑 안쪽이라는 느낌이 들어.]

스바치는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돌로  이루어진 바닥과 벽이 차례

로 눈에 들어왔다. 둥그스름한 벽을 확인한  스바치는 카루의 니름이 맞

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장탑이  아니라면 저런 둥그스름한  벽이 필요한

곳은 거의 없다. 고통을 참으며 계속 관찰하던 스바치는 이상한 것을 목

격했다.

그것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옷장처럼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옷

장을 만드는 가구공이 그 니름을 들었다면 화를 낼 것이다. 그것이 옷장

과 닮은 점은 대충 입방체 비슷하게 생겼다는  점, 그리고 앞쪽에 두 개

의 여닫이문이 달려있다는 점뿐이었다. 거기에는  온갖 괴상한 돌출물들

이 달려 있어  완전한 입방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기묘한 모습의 금속

관들이 도대체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구부러

져 입방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한쪽에는 혹처럼 생긴 작은 금속 상

자가 돌출해 있었다. 그 속에는 아무리 보아도  도기제 항아리처럼 보이

는 것의 일부가 보였다. 금속 상자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기에 도기의 정

확한 모양은 알 수 없었다.  그 외에도 금속 입방체의 인상을 괴이한 것

으로 만드는 온갖 부속기관들이 붙어  있었다. 카루는 스바치가  관찰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닐렀다.

[괴상한 물건이지? 나는 지금까지 저것을 관찰했지만 도대체 무엇에 쓰

는 물건인지 짐작도 되지 않아. 내가 알아낸  건 저 물건의 한쪽이 이상

하게 뜨겁다는 사실 뿐이야.]

[뜨겁다고?]

[자네가 있는 쪽에서는 보이지 않겠군. 하지만 내쪽에서는 볼 수 있어.

저 물건의 한쪽 면에서 계속 열이 나오고 있어.]

[정말 괴상한 물건이군. 심장탑 안에 저런  물건이 있다는 니름은 듣지

못했는데. 그러면 여기는 심장탑이 아닌가?  그리고 도대체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지?]

[앞쪽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하겠지만, 뒤쪽  것은 뻔하다고 생각하는

데.]

스바치 또한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신자들이군!]

[그렇게 생각해야겠지.]

[도대체 어떻게 우리 정체를 알게 된 걸까? 그리고 마케로우 가문에 있

는 우리를 어떻게 잡아온 거지?]

[함께 마케로우 가문에 있었으니까.]

스바치는 카루의 니름을  이해하지 못했다. 머리가  아파서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스바치를 위해 카루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비아스 숭배자들 기억나나?]

[아!]

[그래.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 벌써 의심했어야  했어. 갑자기 그런 숭

배자들이 나타날 리가 없다는 것을. 그 놈들은 우리를 붙잡을 기회를 노

리기 위해 마케로우 가문에 들어온 거였어.]

스바치는 비늘을 부딪혔다. 카루의 말대로였다. 당연히 그런 이상한 방

문자들에 대해 신경썼어야 했다. 하지만 요  근래 스바치는 카린돌에 대

한 고민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있었고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스바

치가 그 사실에 대해 분개하려 할 때 카루가 닐렀다.

[누가 온다.]

스바치는 누군가의 정신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카루와 스바치는 머

리를 움직였다.

방문이 열리며 몇 명의 남자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 중 몇 명은 낯익

은 얼굴이었다. 마케로우 가문에서  본 적이 있는  비아스 숭배자들이었

다.

하지만 스바치와 카루는 그들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경악 때문이었

다.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들은 모두  수호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들이 어처구니없어 하는 것을 본 수호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일어났군, 스바치. 카루.]

[다, 당신들… 왜 그런 옷을?]

[수호자가 수호자의 옷을 입는 것이 이상한  일인가? 너희들의 적이 수

호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텐데.]

물론 카루와 스바치는 살신을 계획하는 자들이 어떤 수호자들이라는 것

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비아스에게 파견한 자들까지 수호자이리

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카루가 사납게 닐렀다.

[당신들은 여신의 신랑이잖아! 어떻게 여신이 아닌 다른 여인에게 몸을

준 거냐!]

수호자들은 그런 비난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카루와 스바치를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그랬잖아?]

[우리는 수호자가 아니야!]

수호자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들 중 한 명이 닐렀다.

[저 녀석들의 니름이 맞아. 저 놈들은 수호자가 아니야. 수련자였을 때

지위를 반납했지. 장차 비밀스러운 임무를, 그러니까 여자들에게 접근해

야 할지도 모르는 임무를  수행할 자들로 세리스마가  따로 뽑아두었지.

저들은 세리스마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호자의  길도 포기했고. 독종들이

야.]

수호자들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루와 스바치는

세리스마라는 이름에 경악했다.  '저 자들이 세리스마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나?' 그들의 정체에 대해 설명했던  수호자가 그들의 의문을 짐작한

다는 듯이 닐렀다.

[그래. 나는 너희들뿐만이 아니라 세리스마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

스바치와 카루는 격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수호자 세리스마에 대해서도

안다면 그들의 모든 것이 들킨 셈이다. 그러나 카루는 쉽게 패배를 선언

하지 않았다.

[우리들에 대해 다 알고 있군. 하지만 너희들은 늦었어!]

다른 자들은 카루의 니름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금속 입방체 주위로

걸어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카루와 스바치

가 무시당한 것은 아니었다. 갈로텍이 의자를  가져와 앉아서 카루와 스

바치를 내려다보았기 때문이다. 바빠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갈로텍

은 여유있는 표정으로 닐렀다.

[내 이름은 갈로텍이야. 그런데 늦었다고 했나?]

[그렇다, 갈로텍! 이미 신명을  가진 자가 대사원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는 여신께 너희들의 계획을 물어볼 테고,  그리고 너희들의 계획을 분

쇄할 거다!]

[신명을 가진 자라고 하지 말고 륜 페이라고 닐러도 돼.]

[제기랄, 모르는 것이 없군. 그렇지만  너희들이 늦었다는 사실에는 변

함이 없어. 오히려 잘된 일이군.]

[잘됐다고?]

스바치 또한 뭐가 잘됐냐는 듯이  카루를 바라보았다. 카루는 득의만만

한 미소를 지으며 닐렀다.

[너희들은 륜을 제지할 수  없어! 만약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화리트가

심장을 적출하고 떠났겠지. 그러면 너희들은, 이렇게 빨리 모든 것을 간

파한 너희들은 화리트의 심장을 파괴했겠지. 하지만 륜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 너희들은 저 먼  북부에 있을 륜을  제지할 방법이 아무  것도 없

어!]

스바치는 탄성을 내질렀다. 카루의 니름대로였다.  하지만 갈로텍은 실

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닐렀다.

[네 니름대로군. 하지만 륜은 심장뿐만이 아니라 그를 죽이기로 맹세한

암살자도 가지고 있는데?]

카루는 비늘을 부딪혔다. 그는 사모와 헤어졌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갈로텍은 그런 카루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군, 카루.]

[…암살자는 실패할 거다.  갈로텍. 북쪽에서 그녀는  활기차게 움직일

수 없어. 반면 륜의 주위에는 불신자들이  있지. 그들이 사모를 막을 거

야.]

[음. 타당한 추리군.]

[그래. 너희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거다. 지금이라도 그 허무맹랑

한 계획을 포기해라. 너희들이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려고 하는 것을 모

르나?]

갈로텍은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막 대답하려  할 때 금속 입방체

주위에 있던 수호자들이 닐렀다.

[갈로텍. 준비됐어.]

갈로텍은 그쪽을 흘끔 바라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금속 입방체를 향해

걸어가며 갈로텍은 카루에게 닐렀다.

[카루. 내 생각에는  위험에 빠지는  것은 세계가  아니야. 불신자들이

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죽는다고 해서 세상이 더워진다는 보장은 어

디에도 없어!]

갈로텍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관대함을 가지고 상대해주던

것에도 질려버린 듯한 태도였다. 갈로텍이 금속  입방체 앞에 서자 어떤

수호자가 이상한 옷을 건네었다. 그것은  털가죽으로 만들어진 외투였고

키보렌에서는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두껍고  커다란 그

옷은 추운 지방에 사는 더운 피의  불신자에게나 유용할 듯한 옷이었다.

갈로텍은 그 이상한 옷을 입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두 명의 수호

자가 좌우에서 금속 입방체의 여닫이 문을 열었다.

금속 입방체 안에서 거대한 암흑이 흘러나왔다.

스바치와 카루는 흠칫하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틀림없이 냉기였다. 그것도 그들이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지

독한 냉기였다. 가장 깊은 물도 그토록  차가운 어둠으로 물들어 있지는

않았다. 스바치는 더듬거렸다.

[물보다 차갑…다? 어떻게?]

갈로텍은 돌아보지 않았다. 두터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갈로텍은 냉기

를 피하느라 몇 발자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카루는 그 입방체가 내부

의 온도를 떨어뜨리는 장치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카루는 왜 입방체 한

쪽에서 열기가 흘러나오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입방체 내부에서 강제로

꺼낸 열이었다. 그렇게 계속 열을 퍼내기에  내부는 차가워질 수밖에 없

었다. 하지만 카루는 도대체 어떤 기술이 그런 마법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 때 스바치가 고통스러운 니름을 토했다.

[카린돌!]

카루는 깜짝 놀라 스바치를 바라보았다. 스바치는 그 기괴한 입방체 내

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카루는 눈을 돌렸고 그 내부에 사람 비

슷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간신히 깨달았다. 조금 더 주의깊게 바라본 카루

는 꽁꽁 얼어붙다시피한 카린돌 마케로우를  발견했다. 카루는 헛바람을

삼켰다.

마당 가운데 앉아있는 륜을 보던 티나한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행자

하나가 무학당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행자는 쥬타기  대선사의 옆에

도달해서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대선사가 질문했다.

"어떻게 되고 있느냐?"

"일주문 근처까지 내려갔습니다."

"누가 다치지는 않았고?"

"예. 여전히 호각지세입니다. 케이건 님도 대단하시지만 괄하이드 변경

백께서는 그 연세에 어떻게 그런 용력을 발휘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구

경하는 자들이 모두 혀를 내두르고 있습니다."

케이건은 괄하이드를 상대하며 천천히 하인샤  대사원을 내려가고 있었

다. 지금껏 한 시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싸우고 있는 셈이다. 오레놀

은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자고 그런 무모한 방법을 선택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티나한? 당

신이 내려가서 양자가 다치지 않도록 말리면 안 되겠습니까?"

티나한 또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티나한은 고개를 세로젓

지 않았다.

"케이건은 나에게 여기를 지키고  있으라고 했어. 혹  자신이 실패해서

사람들이 여기로 몰려오게 되면 내가 그들을 막으라고 했어."

"하지만 이대로 두면 두 사람 중 한  명은 크게 다칠지도 모릅니다. 어

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이런 방법을 쓰려고 그렇게 말한 것 같아."

"예?"

"케이건은 그 놈들을 바쁘게 만들어주겠지만 자신 또한 꽤 바빠질 생각

이라고 했어. 시간이 남게 되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발자국 없는 여신을  죽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  같은 거 말이

야."

오레놀은 신음했다. 티나한은 미간을 찡그렸다.

"내 생각에, 지금 다른 자들을 막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케이건을 막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 지금 내려가서  싸움을 말리면 케이건은 이곳으로

올라올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물론 그 친구가 여신을 죽일 수 있을 거

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만약의 경우라는 것을 무시하지 못하겠

어."

오레놀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말은 꺼내지

못했다. 어떤 승려가 숨막힌 목소리로 외쳤기 때문이다.

"시작되었습니다!"

오레놀과 티나한, 그리고 쥬타기 대선사는 륜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정

말로 뭔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싸움이 시작된 이후로 거의 두 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케이건과

괄하이드의 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내지르는  공격의 신속함은

두 시간 전과 마찬가지였다.

괄하이드 규리하는 이미 최초의 분노를 잊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두려

움에 자신을 내어주지는 않았다. 두 시간째  적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했으니 두려워해야 마땅하지만 괄하이드는 공포를 느낄 수 없었다. 공

포를 느낄 겨를도 없을 정도로 바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케이건의 검

이 춤추는 모습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 또한 중요한 이유였다.

변경백은 그 투박하고 괴상한 검이 그토록이나 우아하고 날렵하게 움직

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괄하이드가 찌를 것이라고 예측했

을 때 베어들어오고 벨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 찔러들어오는 모습은

그에게 거의 환희에 가까운  놀라움을 선사했다. 그것은  거장의 묘기를

목도하게 된 애호가의 환희였다. 괄하이드는 기대감 속에서 다음에는 어

떤 의외의 공격이 들어올지 기다렸고 케이건은 매번 그를 실망시키지 않

았다. 목숨이 걸려있으니 흥분은 더욱  진했다. 괄하이드 변경백은 케이

건을 왕으로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기분마저 느꼈다. 물론 산에게 부동심

을 가르칠 수 있다는 평을 받는  노무사는 좋은 칼솜씨는 칼잡이의 자질

이지 왕의 자질이 아니라고 자신을 꾸짖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은 일주문을 내려가고 있었다.

변경백의 부하들이 횃불을 가져왔고 다른 구경꾼들 또한 손에 횃불이나

등롱을 든 채 그들을 따라 오솔길을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진한 흥분감

을 맛보고 있는 것은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자도 그렇게 싸

울 수 없다. 케이건과 괄하이드가 사용하는  병기는 가벼운 것도 아니었

다. 무기에 꽤 익숙하다 자부하는 자라도  쉰 번 휘두르기 힘들 거병(巨

兵)을 수백 번 이상 휘두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육신을 망가뜨리는 일에

가깝다.

하지만 두 사내의 몸이 망가지는 기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망가진다면, 그것은 무기였다.

사람들은 차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혹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

람의 무기를 바라보았다.  케이건의 쌍신검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하지만 괄하이드의 대도에는 섬뜩한 자국들이  남아있었다. 이해하기 힘

든 일이었다. 칼날 하나만의  중량과 두께를 따진다면  괄하이드의 대도

쪽이 훨씬 무겁고 두꺼울 것이다. 하지만  부딪힐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파편을 떨어뜨리고 마는  것은 괄하이드의 대도였다.  사람들은, 그리고

괄하이드는 케이건의 쌍신검이 그 모양만 특이한 검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하나하나의 날은 저 전설적인 쉬크톨에 버금갈 만큼 예리하고 단단했

다. 괄하이드가 사용하는 무기가 폭이  넓은 대도였기에망정이지 그렇잖

았다면 괄하이드는 이미 오래 전에 무기를 잃었을 것이다.

다시 호된 부딪힘이 일어난 다음  두 검사는 약 5  미터 정도 떨어져서

서로를 응시했다. 두 시간만에 처음으로  괄하이드가 입을 열었다. 어쨌

든 그도 사람이었다. 먼저 입을 여는 쪽이 자신의 피로감을 드러내는 것

이 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군. 케이건 드라카."

"그쪽이야말로. 20년 전에 만났다면 어땠을지 상상하기 무섭소."

"아마도 20년 정도 경험이 부족한 무사를 만났을 거요."

사람들은 노무사의 자존심이 멋지게 표현된  괄하이드의 말에 미소지었

다.

하지만 케이건은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았다. 괄하이드에게 건넨 말은

그저 격식에 맞게 말하기 위한 것일 뿐, 케이건은 두 시간 동안 싸운 상

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케이건이 원한 것은  두 가지였다. 모든

방문자들의 이목을 이곳에 집중시키는 것, 그리고 자신조차도 이곳에 매

이게 될 것. 괄하이드는  그런 케이건의 목적에  부합하는 상대였다. 두

시간 동안 모든 실력을  쏟아내어 상대한 적수에  대한 평가로는 지독한

모욕이 되겠지만 케이건이 괄하이드에게 느끼는  감정은 고작 그 정도였

다. '잘 골랐군.'

그런 케이건의 속마음을 짐작할 리 없는  괄하이드는 다시 진중하게 말

했다.

"하인샤 대사원에서 당신을 왕의 재목으로 골랐다면, 적어도 아무나 고

른 거라는 평은 면할 수 있겠군. 하지만  나는 아직 당신을 왕으로 인정

할 수 없소."

"당신이 만난지 두 시간도 되지 않은 자를  왕으로 인정한다면 나는 당

신에 대한 세평을 비웃었을 거요. 이해하오."

"정말 당신은 왕이 될 생각이오?"

그런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고  말하는 대신 케이건은  무학당이 있는

쪽의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쥬타기  대선사와 오레놀은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짐작할 수 없다고 말했고 케이건 또한 그것에 동의했다. 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건은 그쪽의 하늘을 보았다.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광선이나 신비한 깃털옷을 걸친 미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케이건은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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