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7. '열독(熱毒)' 편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7-2. 관련자료:없음 [53663]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5-04 00:50 조회:9975
눈물을 마시는 새.
7. 열독(熱毒) - 2
티나한은 넌더리를 내며 무학당으로 향하는 길을 달렸다. 한밤중이었기
에 티나한은 발소리를 좀 줄이려 시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쾅쾅거
리는 소리가 울렸다. 결국 티나한은 뛰는 대신 빠르게 걷기로 했다. 워
낙 신장이 크다보니 그런다고 해서 특별히 늦어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달빛 또한 휘황하여 걷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무학당에 도달한 티나한은 여전히 원무를 추고 있는 두억시니와 그 가
운데 오도카니 앉아있는 륜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염화당에
앉아있는 동안 티나한이 계속 생각했던 것은 오레놀이 강조했던 삶의 바
른 목표와 베풀며 사는 삶의 아름다움 따위가 아니었다. 그의 뇌를 꽉
채우고 있는 것은 "식전 운동 끝, 식사 시작!"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늘
어놓는 두억시니의 모습이었다. 티나한은 안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마당 한켠에 앉아 그를 향해 손짓하는 오레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레
놀은 걸어오는 티나한을 향해 미소지었다.
"꽤 늦으셨군요."
티나한은 으르릉거리며 철창을 나무에 기대어놓았다.
"그 잡아먹을 놈의 대족장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도통 눈치가 없더군!
하품을 하고 눈을 비비는 것으로 모자라 꾸벅꾸벅 조는 시늉까지 해보였
는데 계속 이야기만 늘어놓더라고. 젠장. 역사상 최고의 도둑이 누군지
내가 알 게 뭐야?"
"사상 최고의 도둑이오?"
"녀석이 계속 중얼거린 이야기야. 정신이 여기 팔려 있다 보니 제대로
듣지도 못했지만."
설명하던 티나한은 오레놀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티나
한은 바닥에 앉으며 묻는 시선을 보내었다.
"죄송하지만 대족장도 당신과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군요. 티나한.
아무리 레콘이라지만 이렇게 눈치가 없냐고 말입니다. 아마 오해에서 비
롯된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무슨 소리야?"
"대족장이 한 이야기는 발케네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발케네에는
영웅왕의 왕국 아라짓을 훔친 도둑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지요."
"그게 무슨 말이야? 영웅왕의 왕국은 나가들이 점령한 거잖아."
"음. 발케네 사람들은 어떤 도둑이 나가들의 의뢰를 받고 영웅왕의 왕
국을 훔쳤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오레놀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왕국
아라짓의 몰락을 어떻게든 설명해보려는 여러 가지 시도 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축에 속하는 걸 겁니다. 어떤 자들은 바라기가 사라져서 왕국이
몰락했다고도 말하지요. 어떤 자들은 나늬 때문에 왕국이 망했다고 말하
기도 합니다. 모든 종족의 눈에 미인으로 보였던 그 여자 때문에 왕국
내의 종족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멋진 도둑이 되기
를 바라는 발케네 사내들은 어떤 신화적 도둑이 아라짓을 훔쳤다고 말하
는 거지요."
"거 참. 황당해서. 그런데 내가 눈치가 없다는 건 무슨 말이야?"
"음. 아마도 대족장께서는 그 도둑 이야기를 함으로써 당신에게 함께
세상을 훔쳐볼 마음이 없느냐고 넌지시 떠본 걸 겁니다. 딴에는 세련된
방법을 구사하신 것일 테지만, 자기네들 이외에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
는 이야기를 은유랍시고 사용했으니 그 세련됨도 빛을 잃는군요."
티나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식이 정말 왕이 되려는 생각일까?"
"세평에 의하면 코네도 대족장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 생각을 하
고 있다고 하더군요. 첫째 아들은 군사 부분을 맡게 하고 둘째 아들은
내정을 맡게 할 계획이지요. 형제이니 그보다 확실한 동업자 관계도 없
겠지요. 그리고…"
오레놀이 뭔가 더 해석을 덧붙이려 했을 때 륜이 갑자기 일어났다.
티나한의 행동은 놀라울 정도였다. 대덕이 뭔가 바람이 일어났다고 생
각했을 때 티나한은 이미 일어나 철창을 꼬나쥐고 돌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대덕은 감탄하면서도 더불어 긴장하며 일어났다. 하지만 두억시
니들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티나한과 오레놀은 고개를 갸웃하며 서
로를 바라보았다.
륜은 갑자기 들려온 니름에 경악했다.
[상황을 설명해주길 바란다.]
[당신은 누구죠?]
어떤 영상이 그의 머리 속에 그려졌다. 륜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 피라미드의!]
[그렇다.]
[어떻게? 어떻게 제게 니르시는 거죠?]
유해의 폭포는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륜의 머리속으로 유해의 폭포
와 사모가 니름을 나눴던 상황에 대한 기억이 전해졌다. 그 기억의 시각
적인 부분은 빙글빙글 돌고 있는 두억시니들의 눈에 비친 것이라 혼란스
러웠지만 륜은 그 대화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륜은 놀라움 속에서
생각했다. 이건 마치 사어 같군.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모 페이는 어떻게 되었나?]
륜은 유해의 폭포와 똑같은 방식을 사용했다. 륜은 사모가 쓰러졌던 때
의 기억을 - 슬픔 속에서 - 유해의 폭포에게 보내었다. 유해의 폭포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을 것이다. 륜은
그렇게 생각한 다음 제안했다.
[괜찮다면 더 많은 니름을 보내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다오.]
륜은 지난 몇 달 동안의 기억을 모조리 보내었다. 그것이 야기한 결과
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두억시니들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티나한은
다시 깃털을 곤두세웠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이 충직한 동료를 향
해 륜은 손을 조금 들어보였다. '괜찮아요.' 티나한의 깃털이 다시 수그
러드는 것을 확인한 륜은 유해의 폭포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대답은 꽤 늦게 찾아왔다.
[대단히 복잡하군.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봐다오.]
[예.]
[어떤 나가들이 레콘의 여신을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읽었던 '신
을 죽이는' 계획은 바로 그것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 계획을 알아챈
어떤 수호자는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들에게 사절을 파견
하기로 결심했다. 그 사절은 화리트 마케로우. 하지만 화리트는 그를 싫
어하는 누나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 시점에서 화리트를 발견한 너는 그
임무를 위탁받았고, 그 임무를 위해 북부까지 여행했다. 지금 너는 살신
을 저지하기 위해 여신께 그 계획의 전모를 물어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
다. 한편 너의 잠적 때문에 너는 화리트 살해의 누명을 쓰게 되었고 네
누나가 그 처벌을 담당하게 되었다. 네 누나는 그 임무를 받아들였지만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것이 너를 살릴 수 있는 방법도 되기
때문이다. 결국 네 누나는 그것에 성공했고 지금 네가 목을 잘라주길 기
다리며 가사 상태에 빠져 있다.]
유해의 폭포가 건넨 니름의 마지막 부분에 륜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
을 느꼈다. 륜은 가까스로 닐렀다.
[틀린 부분은 없습니다.]
[오해가 너무 많군. 사람들은 네가 화리트를 죽였다고 오해했고, 너희
들은 사모가 너를 정말 죽일 작정이라고 오해했군. 그 두 가지는 각자
비아스 마케로우와 사모 페이라는 여인들이 일부러 조장해낸 오해이지
만, 내 경우에는 할 니름이 없군. 터무니없는 오해로 너희들을 추적한
것이군.]
[살신이라는 니름을 들으셨으니… 터무니없지는 않습니다.]
[사과해야겠군. 살신자들을 저지한다는 대의 앞에서 너와 나는 같은 입
장이다. 깊이 사과한다. 륜 페이. 그리고 네 불행에 대해 진심으로 애석
하게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유해의 폭포는 잠시 침묵했다. 륜은 그 침묵이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유해의 폭포가 할 니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꺼내기
어려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륜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유해의 폭포는
다시 닐렀다.
[그런데 말이야, 륜 페이.]
[네.]
[그럼 너는 발자국 없는 여신을 만나겠군. 그렇지?]
[예.]
[그리고, 그 살신자들이 어떻게 신을 죽일지 물어볼 테고?]
륜은 깨달았다. 륜은 빙글빙글 돌고 있는 두억시니들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두억시니들이 왜 신을 잃은 건지도 여쭤보겠습니다. 혹, 신을
되찾을 수 있는 건지도.]
[고맙다! 정말 고마워!]
그리고도 유해의 폭포는 감사의 니름을 한참 쏟아내었다. 륜은 유해의
폭포가 이제는 그가 니를 수 있도록 해줘야한다는 것을 자각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닐렀다.
[별 말씀을. 그런데 왜 그렇게 어려워 하셨습니까?]
[나는 너희들을 오해했고 삼천이나 되는 나들을 보내어 너희들을 추적
했다. 결코 너희들이 감사하기는 어려운 짓을 저질렀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저희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 오히려 피해를 입은 것은 나였다. 하지만 내 의도가 고약한 것
이었음은 분명하다. 나는 너희들을 살신자로 오해했고 기회가 된다면 너
희들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래서 네게 뭔가를 부탁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뭐라고? 무슨 부탁이지?]
[사모 페이가 살아서 하텐그라쥬로 돌아갈 방법에 대해 생각해 주십시
오.]
조금 전 륜의 최근 기억을 거의 모두 전달받은 유해의 폭포는 륜이 케
이건에게도 똑같은 요구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해의 폭포는 당
혹 속에서 정신을 닫았다가 잠시 후에야 대답했다.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네가 만약 두억시니가 신
을 되찾을 방법을 알아낸다면 너는 나의 가장 큰 은인이 될 것이다. 나
는 너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 그런데, 너는 케이건에게도 그것을 요구
하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모든 자에게 요구할 겁니다.]
[모든 자에게?]
륜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니르며 외쳤다. 그랬기에 그것은 멀리 떨어져
있던 티나한과 오레놀에게도 들렸다.
"[만약 필요하다면, 나는 산과 광야와 바다에게 요구하겠습니다. 신과
우주와 전세계를 향해 요구하겠습니다. 사모 페이가 하텐그라쥬로 돌아
가게 하라고!]"
새벽이 밤과 교대식을 갖는 하늘을 바라보며 케이건은 눈가를 비볐다.
바위는 차고 숲은 새벽잠 속에 옹알이를 반복하고 있다. 풀잎 끝에서
결로가 일어나고 있고 바람은 없다. 고매한 어둠이 낯을 붉히는 시간.
그림자들이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부푸는 시간.
사냥하기 좋은 시간이다.
케이건은 세운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하인샤 대사원을 둘러싼 숲을 내려
다보았다. 대선사의 석굴이 뒤에 있었지만 대선사는 그곳에 없었다. 케
이건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가올 강신을 대비하기 위해 쥬타
기 대선사는 아래로 내려갔다. 하여, 케이건은 그 곳을 독점한 채 며칠
을 보낼 수 있었다.
사모를 하텐그라쥬로 돌려보낼 방법을 모색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
었지만 케이건은 대부분의 시간을 엉뚱한 것에 할애하고 있었다. 케이건
은 오로지 한 꽃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목적을 위해
며칠 동안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특히
륜이 안다면 분개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케이건은 괘념치 않았다.
분명히 작고 소박한 꽃이었다. 화분이나 정원에 안주하는 도발적이고
풍성한 꽃과는 종류가 다른 야생화였다. 케이건은 그 꽃잎의 모습과 색
깔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떠올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케이건은 혼란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케이건은 자신이 왜 그런
혼란을 일으키는지 알고 있었다.
케이건은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 두려웠다. 시간이라는 그 무엇보다
도 확실한 덮개가 감추고 있던 것이 사라지고 마침내 모든 사실을 기억
하게 되었을 때 케이건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멀리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눈을 비볐을 때 케이건은 산비탈을 뛰어올라오는 커다란 그림자를
발견했다. 케이건은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티나한이 산길을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그 레콘은 비탈진 길을 걸어올
라오느니 한 걸음에 수십 미터씩 성큼성큼 뛰어오르는 편이 훨씬 편하다
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다섯 번째 수족 같은 철창을 어깨에 걸어 두
팔로 붙잡은 채 티나한은 쿵쿵거리며 올라왔다. 크게 도약한 다음 케이
건을 발견한 티나한은 허공에서 잠깐 한 손을 흔드는 재주까지 보였다.
쿵! 다시 땅에 내려선 티나한은 마지막 도약으로 바위 위에 뛰어올랐다.
"산사태 나겠소. 티나한."
"이런 산에서 무슨 산사태가. 며칠 동안 여기 있었는데 괜찮은 거야?"
"괜찮소."
티나한은 어깨에 건 철창의 창촉 부분을 아래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지금 하계에서는 난리도 아냐. 네가 여기서 유유작작하게 달을 연모하
고 바람과 노니는 동안 나는 별의별 향기롭지 못한 것들의 뒤치닥거리를
하고 있었다고."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티나한은 케이건 옆에 주저앉으며 철
창을 무릎에 얹었다.
"그 동안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주지. 륜은 두억시니들을 통해 유해의
폭포와 이야기를 나눴어. 그거 참 신기하던데." 티나한은 두억시니들이
사용한 수단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그 유해의 폭포는 자기가 오해했다
는 것을 인정하고 륜에게 사과했어. 그리고 륜은 발자국 없는 여신을 만
나게 되면 두억시니들이 왜 신을 잃었는지, 그리고 신을 되찾을 수는 있
는지 물어봐주기로 했지. 그 다음이 기가 막힌데, 륜은 그걸 물어봐주는
대신 유해의 폭포에게 사모를 하텐그라쥬로 돌려보낼 방도를 궁리해보라
고 요청했지."
케이건은 짧게 신음했다. 티나한은 덩달아 신음을 토하며 말했다.
"륜은 내버려두면 지금 사원을 찾아온 잡것들에게도 그걸 생각해보라고
요구할 것 같더군. 오레놀과 내가 겨우 말렸어. 그리고 그 잡것들 말인
데, 생각보다는 호호탕탕한 걸물들이 많다는 건 인정하겠어. 하지만 그
자들은 지금 무학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내려고 눈이 벌개져 있어.
내가 가끔 그 놈들을 상대해주며 온갖 해괴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는 헛
소리들을 조금씩 떨궈주고 있지."
티나한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말했고 케이건은 오레놀의
생각이 아니냐고 묻지는 않았다. 티나한은 신이 나서 말했다.
"그 놈들 중엔 지금 하인샤 대사원에서 사제왕을 만들 계획이 아닌가
의심하는 놈들도 있어. 어제는 말이야, 어떤 녀석이 내게 접근하더니 더
없이 진지한 투로 자신을 사제왕의 오른팔로 써달라고 간청하더라고."
케이건은 티나한이 그것을 원할 거라 생각했기에 피식 웃는 시늉을 해
보였다. 티나한은 그 웃음에 만족하며 더 크게 웃었다.
"웃기지? 그렇지?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줬어. 아마 그 녀석은 자기 추측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겠지. 무
슨 추장인가였는데, 젠장.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군."
"수고하셨소. 그렇다면 그 자들은 아직 자세한 내막을 모르겠군. 하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오. 누가 신을 죽이려 하고 다른 누가 그것을
막으려 한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어떤 이야깃꾼의 재능으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겠지."
"그래. 그 놈들은 그걸 몰라. 그리고 말이야. 오늘이 약속한 엿새째야.
하텐그라쥬에서 연락이 올 거야. 그러니 너도 내려와서 입회해야지?"
"그러겠소."
"그런데, 흠흠." 티나한은 헛기침을 한 다음 주의깊게 질문했다. "오랫
동안 여기 있었는데, 뭐 좋은 생각 같은 것 떠올렸어?"
어떤 꽃 이름을 떠올리려고, 혹은 그것이 떠오르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었소. 라고 대답하는 대신 케이건은 그냥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나한
은 되려 케이건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너무 괴로워하지마. 어차피 쉬운 일이 아니야. 오레놀이 말해줬는데
그 지랄 같은 쇼자인-테-쉬크톨은 절대로 번복될 수가 없다더군.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거라도 말이야. 그 빌어먹을 놈들은 그런 위험한 것을
왜 함부로 쓰는 거지?"
"나가들도 거의 쓰지 않소. 쓰지 않다보니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잊
어버리고 비아스에게 휘둘린 것이겠지. 그리고, 륜이 남자라는 것 때문
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오해든 뭐든 남자가
죽는 건 크게 상관없다는 걸 거요."
티나한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쳇. 나는 가끔 나가 남자들이 정말 즐거운 자들이라고 생각했어. 결혼
이 없으니까, 거꾸로 말하면 세상의 모든 여자가 자기 아내인 거나 마찬
가지잖아. 게다가 우리처럼 아내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필
요도 없지. 하지만 역시 의무가 없으면 권리도 없는 것이군. 오해로 죽
게 되어도 상관하지 않는다니, 끔찍하군.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자랑
으로 여겨야겠어."
말을 끝낸 티나한은 케이건이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깨달았다. 티나한은 그게 무슨 표정이냐는 듯이 마주보았다. 케이건은
질문을 꺼냈다.
"당신, 신부 탐색을 할 생각이오?"
"응."
"이상하군. 보통 레콘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걸로 아는데. 신부 탐
색을 하든가 평생 숙원에 매달리든가. 당신은 하늘치 유적 발굴을 평생
숙원으로 선택한 거 아니오?"
티나한은 문득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케이건의 속을 보고 싶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티나한은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말했다.
"내가 왜 하늘치 등에 올라가려는 줄 알아?"
"왜 그러는 거요?"
"물론 그 유적이 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내 소망은 그보다 좀 더
나아간 곳에 있지."
"얼마나 더 나아간 곳이오?"
"나는 그 유적들 사이에 내 가정을 꾸밀 거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집
이 될 것 같지 않아?"
케이건은 잠시 말을 잊은 채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기나긴 시간들을 관류하여 온 케이건조차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소망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낯설음은 케이건을 꽤 당황하게
했다. 한참 동안 케이건은 비형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환호작약했을
거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티나한이 초조해하기 시작할 무렵 케이
건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했다.
"확실히 좋은 점은 있겠군. 전망은 분명히 최고일 테고, 아내를 빼앗으
려 덤비는 귀찮은 젊은 도전자도 피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그 위에 흙
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당신과 당신 부인들은 그
위에서 굶어죽을 텐데?"
"아, 그건 다 계획해두었어. 하늘치 등의 면적을 고려해본 결과 그 위
에 쏟아지는 빗물만으로도 식수는 충분해. 유적이 있으니까 집을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다. 그리고 일단 올라가기만 하면 권양기를
설치하든 줄사다리를 매달든 해서 물자 보급도 가능할 거야. 어쩌면 그
등 위에 흙을 깔 수 있을지도 몰라. 생각해봐! 하늘치 등 위의 집이야.
전 세계에서 내 집, 혹은 하늘치 등 위를 구경하려고 찾아올걸? 그 자들
에게 돈을 받고 하늘치 등 위를 구경시켜주면 돼. 나는 부인들과 함께
그 자들을 상대로 여관업을 하면 되고. 쳇, 정 어려우면 도로 내려오면
그만이야.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무궁하잖아."
케이건은 고개를 내저었다. 겨우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아직도
당황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잘 모르겠소. 당신을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낭만적인 사람으로 분
류해야 할지, 아니면 가장 미친 사람으로 분류해야 할지. 어쩌면 둘 다
해당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를 어느 쪽으로 분류하든 상관없어. 한 가지만 약속해줘. 이건 절대
로 비밀이야. 이 기막힌 계획을 다른 놈이 채가는 꼴은 절대로 못봐."
케이건은 온 세상에 대고 알려도 그런 정신 나간 계획을 탐낼 자는 없
을 거라고 말하려다가 곧 그 생각을 철회했다. 세상은 넓은 것이다. 어
쨌든 신을 죽이려드는 작자들도 있으니.
"비밀은 지키겠소. 하늘치 등 위를 오르고 다시 신부 탐색도 하려면 시
간이 많이 부족하시겠소?"
티나한은 씩 웃었다.
"평생 할 만한 사업이지."
그리고 케이건은 잠시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 일출이
시작되며 동쪽으로부터 뿜어져온 광선이 티나한을 찬란한 광휘로 물들였
다. 황당하리만큼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완전히 경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케이건은 억지로 티나한에게서 시선을 돌린 다음 말했다.
"알겠소. 꼭 나늬 같은 아내들과 함께 하늘치 등 위에 당신의 가정을
꾸미길 기원하겠소 당신의 그 경탄스러울 정도로 도전적인 소망을 듣고
나니 지나치게 칙칙한 일들에 둘러싸여 지낸 지난 며칠 동안의 어두운
기분이 싹 가셨다는 것을 고백해야겠군. 그만 내려갑시다."
티나한은 케이건의 덕담에 한껏 고무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은 새벽의 산길을 걸어내려갔다. 주위를 둘러보던 티나한이 말했다.
"여름이 다가오는 모양이군. 원추리가 피었어."
무심히 말하던 티나한은 케이건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 것에 의아해했
다. 케이건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라고 했소?"
"원추리가 피었다고."
티나한은 손을 뻗어 가리키며 말했다. 티나한의 손을 따라간 케이건은
그곳에 자라나 있는 산꽃을 발견했다. 1 미터 남짓한 길이로 자라난 줄
기를 풍성한 잎사귀가 감싸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꽃줄기가 자라나고 있
었다. 그 끝에는 앙증맞지만 강인한 꽃들이 덩이져 매달려 있었다.
케이건은 무의식적으로 티나한의 말을 반복했다.
"원추리."
"저 꽃 좋아해?"
티나한의 질문에 케이건은 고개를 돌렸다. 티나한을 한 번 바라보았지
만 케이건은 그 질문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조금
후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했던 사람을 알고 있소."
그리고 케이건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날 오후, 뱀단지에서 뱀들이 요동쳤다.
륜은 무학당에 남아있기를 원했기에 사어를 읽기 위해 모여든 사람은
엿새 전과 똑같았다. 오레놀이 방바닥에 뱀들을 풀어놓자마자 뱀들은 기
다렸다는 듯이 사어를 이루었다. 쥬타기 대선사는 그 속도에 놀라며 사
어를 읽었다.
"준비는 끝났소? 끝났다면 뱀을 집어넣으시오."
케이건은 오레놀이 고개를 끄덕인 것을 확인한 다음 뱀 한 마리를 붙잡
아 집어넣었다. 뱀들의 속도가 조금 줄어들었다.
"다행이군! 좋다. 이곳과 그곳의 시간차를 고려해본 결과 우리는 당신
들이 내일 일몰 후 한 시간 무렵에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결
론을 내렸다. 그 때 쯤이면 이곳은 한밤중일 것이다. 수호자들이 모두
잠든다면 신부가 잠시 사라진 것을 깨달을 가능성이 적다. 내일 해질 무
렵에 실행할 수 있다면 뱀을 집어넣어라."
케이건은 다시 뱀을 집어넣었다. 축약된 사어가 그들의 행운을 바라며
말을 맺었다. 오레놀은 뱀단지 안에 뱀을 모두 수거했다. 뱀단지의 뚜껑
을 막은 오레놀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륜에게 가서 알리겠습니다. 내일 일몰 무렵에 시작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대선사는 문득 티나한과 케이건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티나한, 케이건. 왜 그러시오? 뭐가 잘못 되었소?"
티나한이 먼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가 일몰이면 하텐그라쥬는 한밤중이라니?"
"아, 하텐그라쥬는 우리가 있는 곳보다 더 동쪽에 있소. 그래서 일출도
우리보다 빠르고 일몰도 빠르지."
티나한은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쥬타기 대선사는 설
마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하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
건은 뱀단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래서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하지?"
"그 수호자의 말대로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이 모두 잠든다면 우리들이
잠시 여신을 불러내더라도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에게 탄로날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수호자는 한계선 이남에 무수한 나가의 도시들
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군요. 하텐그라쥬는 밤이라도 다른 나가의
도시는 아직 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들처럼 보다 서쪽에 있는 도시
들의 경우가 그렇지요."
쥬타기 대선사는 당황했다.
"아뿔사, 그렇군! 세리스마는 하텐그라쥬를 위주로 생각한 거야."
"그 수호자의 이름이 세리스마입니까?"
"그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 우리는 그들에게 말을 걸 방법이 없
어."
오레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전세계의 나가 수호자들이 잠들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시
간대가 다르니까요. 어느 시간을 선택하더라도 똑같으니 세리스마께서는
이왕이면 저 침묵의 도시의 수호자들이 잠드는 시간이 낫다고 결정하신
것 아닐까요?"
오레놀의 말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들은 잠시 후 그것이 적절한 대답이
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화리트와 륜은 - 그리고 별로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사모 페이도 - 모두 하텐그라쥬 출신이다. 따라서 다른 어느
곳보다 하텐그라쥬에 있는 자들이 의심을 품을 가능성도 가장 높다. 쥬
타기 대선사는 안도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일몰 때로 합시다. 원래 계획은 비운암의 방 안에서 하
는 것이었소. 륜이 추위를 견디기 어려울 테니까. 하지만 륜에겐 이제
흑사자 모피가 있으니 마당에서 해도 무방할 것 같소."
"방과 마당의 차이는 뭡니까."
케이건의 질문에 대선사는 미소를 지었다.
"케이건. 이건 금세기에 다시 있을지 의심스러운 대사건일세. 신의 강
림이니까! 따라서 사원의 학승들은 그것을 완벽히 관찰하기를 원하네.
그래서 내일은 몇몇 학식 높으신 스님들과 행자들이 참석할 걸세. 그러
려면 마당이 좋겠지. 그 때문에 한 가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
"방문자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이군요."
"맞아. 그것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상상도 할 수 없어. 하지만 방문자
들이 괜한 방해가 될지도 모르지. 비운암에서의 준비는 오레놀이 맡겠지
만 그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줄 사람이 필요하네."
티나한은 약간 걱정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그 또한 신의 강림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케이건이 말했다.
"그건 제가 맡겠습니다."
티나한은 안도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
"음. 케이건. 너는 그거 보고 싶지 않아? 여신이 강림하는 건데."
"나는 그 자리에 없는 편이 더 좋을 거요. 티나한."
"응? 왜?"
"나가의 여신을 내가 죽이려들지도 모르니까."
티나한은 당황했고 쥬타기 대선사와 오레놀 대덕은 그제야 자신들이 얼
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당연히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나
가들을 증오하는 남자에 대해 고민했어야 했다. 대선사와 대덕, 그리고
티나한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차분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칼로 찌른다고 해서 여신이 죽을 리는
없으니까."
케이건의 말에도 불구하고 쥬타기 대선사는 안심할 수 없었다. 대선사
는 케이건의 눈빛을 읽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케이건. 우리는 내일 신을 죽이는 방법을 물어볼 거야. 어딘가에 숨어
서 그 방법을 듣고 있다가 곧장 시험해보려드는 사람이 있다면 곤란할
것 같은데."
"재미있는 생각이군요." 라고 말하는 케이건의 얼굴은 조금도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다. 오레놀은 방문자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보다
케이건을 억류하는 것을 선행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느끼며 주먹
을 움켜쥐었다. 케이건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손에서 힘 빼시오. 오레놀. 어울리지 않소. 격투라도 벌일 생각이오?"
"필요하다면 해야지요. 필요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필요하지 않소."
"믿어도 됩니까, 케이건? 당신의 증오는 압니다. 그렇지만 당신에겐 나
가들을 멸망시킬 권리가…"
"권리라고 했소?"
케이건은 고개를 돌려 오레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레놀은 꺼내려던
말을 삼켰다. 젊은 대덕을 바라보며 케이건은 거의 부드럽다 할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오레놀. 나에게는 나가를 멸종시킬 권리가 있소. 발자국 없는 여신이
라 하더라도 나보다 더 분명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소. 조금 전 산에
서 내려오며 나는 그것을 깨달았소."
오레놀은 질린 얼굴로 쥬타기 대선사를 돌아보았다. 대선사는 눈을 몹
시 찌푸리고 있었다. 티나한이 뭐라 말하려 할 때 케이건은 담담하게 선
언했다.
"하지만 나는 내일 그 권리를 쓰지 않겠소."
"…진심이십니까?"
"그렇소."
의논이 끝난 다음 오레놀과 케이건, 그리고 티나한은 대선사의 방을 나
왔다. 오레놀은 륜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먼저 떠났다. 케이건은 마
당에 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서있었다. 파름산의 산봉우리에 걸
쳐진 오후의 하늘은 케이건으로 하여금 먼 옛날의 어떤 하늘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티나한이 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케이건. 물어볼 것이 있는데."
"뭐요?"
"네게 나가를 멸종시킬 권리가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이야? 누구에게도
그런 권리는 없어. 저 나가들이 우리 레콘들을 그렇게 만들 권리가 없는
것처럼."
케이건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마당에 누워있는 티나한의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알고 싶소?"
"그래. 알고 싶군."
케이건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케이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나가들은 나에게 어떤 제안을 한 적이 있소. 그 제안 자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나 또한 바라마지 않던 제안이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다행히도 내겐 당장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이 남아있었소. 나는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었소. 그들은 모든 나
가의 생명을 걸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보장했소."
"그렇다면…"
"그 제안은 속임수였소. 나는 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소. 아니, 한
가지는 얻었다고 할 수 있겠군. 내게는 모든 나가의 생명을 좌우할 권리
가 생겼소."
티나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케이건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모든 것을 잃은 나에게 한 여인
이 다가왔소. 그녀를 사랑했소. 그 무엇보다도 더. 그녀는 내 생에 의미
를 돌려주었소. 그녀는 내게 생명을 되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소. 그
러나 그녀는 나에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주려 했소. 이미 나를 부활시
킨 거나 다름없는데도, 그녀는 더 주길 원했던 거요. 나는 그녀가 주려
했던 것의 백분의 일도 주지 못했는데. 결국 그녀는 나가의 제안을 받게
되었소."
"제안이라고?"
"그렇소. 내가 그토록 원했던 제안, 그러나 결국 나를 파멸시키고 말았
던 그 제안이 그녀에게 건네어졌던 거요. 그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소.
두 가지 이유에서지. 첫 번째 이유는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오. 두 번째 이유는 보다 흥미로우면서도… 참신하지는 않은 거
요. 나가들은 그녀에게 모든 나가의 생명을 걸고 그 제안의 사실성을 보
장했소."
티나한의 벼슬이 꼿꼿하게 곤두섰다. 케이건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젖기
시작했다.
"그 이유 때문에 그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소. 그녀는 나에게 말하지
않고 홀로 나가들에게 갔고… 기다리고 있던 나가들은 그녀를 잡아먹었
소. 사려깊게도 그들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
린 다음 내 눈 앞에서 그녀를 찢었소. 그렇소. 그들은 나를 유인하기 위
해 그녀를 유인한 거였소. 그녀의 죄는 나를 사랑했던 것, 그리고 나가
를 신뢰했던 것뿐이었소. 그녀는 그 죄가 그렇게 큰 것인 줄 몰랐지."
티나한은 가슴 한 구석이 무섭도록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케이건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그 후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던 권리를 종신으로 연장받게 된
셈이오."
티나한은 더 이상 케이건에게 나가를 멸망시킬 권리가 없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흑사자와 용의 이름을 가진 그 사내는 그 이름 그대로의 사내
였다.
"티나한."
티나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케이건 또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이런 것이 충고가 될 수는 없을 거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니까. 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두고 싶소. 신부들을 찾게 되면 그녀들을 아
끼고 사랑하시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사랑하려 애쓰고, 내일은 오늘보
다 더 사랑하려 마음먹으시오.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너무도 짧소.
그리고 그녀의 무덤에 바칠 일만 송이의 꽃은 그녀의 작은 미소보다 무
가치하오."
티나한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부리가 잘 열리지 않았고, 그것을 몇 번
을 부딪혔다. 그 때 케이건이 발걸음을 뗐다. 티나한은 갑작스레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원추리를 꺾으러 가오."
"원추리를?"
"더 이상 아내의 미소를 볼 수 없는 남편은, 그것이 무의미한 줄 알면
서도, 아내가 사랑하던 꽃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찾아보려 애쓸 수밖에
없소. 티나한."
티나한은 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밤이 충분히 깊은 것을 깨달은 카린돌은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에 놓아둔 점화통을 집어든 카린돌은 그대로 침대 옆으로 내려
섰다. 카린돌은 허리를 숙인 채 잠시 바닥을 더듬었다. 잠시 후 어둠 속
에서 그녀의 손자국이 드러났다. 차가운 금속 화로에 그녀의 손이 닿자
마자 미약한 열에 의해 손자국이 남았던 것이다. 화로를 어루만져 뚜렷
해지게 만든 카린돌은 점화통을 집어들었다.
잠시 후 화로에 불이 붙었다. 카린돌은 화로에 몸을 가까이 한 채 참을
성 있게 체온이 상승되기를 기다렸다.
체온이 충분히 상승했다고 판단한 다음에도 카린돌은 더 기다렸다. 잠
시 후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복도를 가로질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소드락도 훔쳐둘걸.' 카린돌은 아쉬워하면서 몸이 뜨
거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몸이 뜨거워졌을 때 카린돌은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의 공기는 이제 뜨거워져 있었다. 카린돌은 사이커를 허리에 찼
다. 그리고 기름병과 따로 골라둔 열쇠를 집어든 다음 방문을 나섰다.
그녀의 예상대로 복도는 차갑고 어두웠다. 카린돌은 자신의 몸에서 일
어나는 미약한 열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남는 그녀의 뜨거운
발자국도. 그것은 그녀가 지금부터 저지르려는 범죄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처럼 보였다. 두려워하던 카린돌은 자신도 모르게 배를 어루만졌다.
다음 순간 카린돌은 복도를 내달렸다.
누가 소리를 듣고 깨어나랴! 카린돌은 광기에 가까운 환희를 느꼈다.
그녀가 태어난 이래로 죽 살아온 집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카린돌은 몇
번 모퉁이에 부딪혔다. 하지만 카린돌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카린돌
은 고함을 내지르고 싶은 욕망까지도 느꼈다. 살인귀를 태워 죽이려 지
금 내가 달려가고 있다!
숨가쁠 정도의 질주가 끝나고 카린돌은 비아스의 방문 앞에 도달했다.
카린돌은 멈춰서서 잠시 호흡을 가누려 애썼다. 호흡이 정상으로 되돌
아옴에 따라 잠시 잊었던 공포도 되돌아왔다. 카린돌은 열쇠를 꽂아넣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열쇠를 꽂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그 뒤편에
서 차갑게 웃는 비아스가 나타나…
'그 얼굴에 기름을 뿌려주지!'
카린돌은 열쇠를 찔러넣었다. 비아스는 이미 열쇠를 바꾸었지만 그런
것은 카린돌에게 상관이 없었다. 그 멍청한 비아스는 카린돌이 집밖에서
남자만 찾는 줄 믿고 있었지만, 밖에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전적으
로 카린돌의 자유였다. 그리고 카린돌은 비아스가 열쇠를 주문했던 열쇠
장이의 집을 방문하는 데도 그 자유를 할애했다. 열쇠는 매끄럽게 돌아
갔다.
문이 열렸다.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카린돌에게는 심장이 없으
니까. 하지만 정신적으로 그와 동일한 긴장감이 카린돌을 굳어버리게 만
들었다.
일곱 번 심호흡을 한 다음 카린돌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비아스의 침대가 어디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
자 왼쪽으로 몸을 돌린 채 일곱 걸음,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돌
려 세 걸음. 비아스가 늘어놓은 실험도구를 피하려면 그런 식으로 걸어
가야 했다. 걸음을 멈춘 카린돌은 아래를 주의깊게 내려다보았다.
변온동물이 주위의 온도와 완전히 똑같은 체온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 내부에서는 생명 활동이 유지되고 있고 따라서 주위와는 작은 온도차
가 있게 마련이다. 카린돌은 별 어려움 없이 비아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누워있는 어떤 남자도.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카린돌은 남자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 남자는 비아스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함께 불타 죽게 되는 것이
다. 남자 한 명 따위 죽어도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지만 두 눈으로 직
접 자신이 태워죽일 남자를 바라보는 것은 카린돌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일 아침에 눈을 뜰 것을 의심
치 않으며 잠들었을 저 남자를 그녀의 생존을 위한 번제물로 삼아도 되
는 걸까? 어쩌면 지금 그녀의 배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아기도 남자일지
모른다.
카린돌의 몸에서 비늘이 곤두섰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의 방으로
돌아가버리고 싶었다. 기름병과 점화통을 도로 숨겨놓고 그녀의 침대에
들어가 쉴 수 있다면, 그저 조용히 잠들 수 있다면 카린돌은 감히 행복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린돌은 입술을 깨문 채 생각했다.
너는 죽어야 해. 비아스. 너는 죽어야 해. 비아스. 너는 죽어야 해. 비
아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다.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처럼 계속 되뇌이던 카린돌은 마침내 기름병의 마
개를 뽑아내었다.
카린돌은 침대에 기름을 직접 뿌리지는 않았다. 침대가 젖은 것을 느낀
비아스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린돌은 계획했던 대로
침대 주위를 돌며 기름을 뿌렸다. 비아스가 혹 열기에 깨어나더라도 그
때는 이미 침대가 불구덩이로 바뀌어있도록 주의깊게 고려하며, 카린돌
은 한 병의 기름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그것은 꽤 많은 양이었고 카린돌
은 하마터면 기름을 밟고 미끄러질 뻔했다. 침대를 짚을 뻔했던 카린돌
은 자신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간신히 균형을 회복했다. 뻣뻣하게 변한
근육은 뼈보다 더 단단한, 그리고 생기 없는 것으로 바뀐 듯했고 그 때
문에 팔 속에서 뼈가 춤추는 것 같았다. 카린돌은 단단한 원통 속에 든
가느다란 막대기가 흔들거리며 원통을 두드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
의 팔다리가 그 지경이었다.
눈앞이 환해졌다. 카린돌은 어떤 초현실적인 시간의 가속에 의해 벌써
새벽이 다가온 건 줄 알고 기겁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열류 때문
에 공기가 뜨거워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카린돌이 정신적 비명을
내지르기 직전의 일이었다. 카린돌은 이를 악물며 점화통을 부여잡았다.
"그러면 곤란합니다. 카린돌 마케로우."
니름 그대로 심장이 멎을 뻔했다. 카린돌은 심장탑에 보관되어 있는 자
신의 심장이 멎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비현실적 공포 속에 카린돌은 침대를 응시했다.
남자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비아스가 깨어나지 않도록 주
의하는 모습이었다. 남자가 침대에서 내려서 침대 주위를 돌아 그녀에게
걸어올 때까지 카린돌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같은 말을 반복했
다.
"그러면 곤란합니다. 카린돌 마케로우."
"어,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온 것을 알아차렸느냐는 질문이십니까? 당신은 굉장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더군요. 저는 소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왜, 왜?"
"그건 당장은 설명드리기 곤란하군요. 저를 무시하려 애쓰셨으니 제 이
름도 모르실 거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일단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그로스라고 합니다."
그로스의 침착한 태도에 카린돌 또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카린돌
은 허리를 펴며 강압적으로 말했다.
"여기서 나가라. 그로스. 나가서, 본 것을 모두 잊어라."
그로스는 그 말에 즉시 복종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비아스를 내려다보
았다.
"제가 나가면 비아스님을 불태울 생각이십니까?"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 말씀은 좀 납득하기 어렵군요. 사람이 사람을 태워죽이려는 데 상
관하지 말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이십니다."
카린돌은 비늘을 부딪히며 그로스를 쏘아보았다. 그로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카린돌에겐 지금 그를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그로스의
입을 막아놓고 돌아가는 것이 최선책이긴 했지만 기름을 이미 뿌린 후인
지라 그것 또한 곤란했다. 침대에 기름 얼룩이 잔뜩 남아있는 것을 본
비아스가 무슨 생각을 할지 카린돌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카린돌은 사이커를 잡아뽑았다. 그로스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마케로우."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라. 여기서 목이 잘린 다음 비아스와 함께
타죽든, 그렇잖으면 네 몸을 온전히 가지고 나가든. 네 선택은 어느 쪽
이지?"
"쓸데없는 협박이십니다.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비아스를 깨울 수 있습
니다."
"시험해보겠어? 네가 비아스를 깨우는 것과 내가 네 목을 자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빠를지. 내가 비록 고명한 검법가는 아니지만 사이커는 예
리하지. 몸이 차가워져 있는 너는 피하지 못할걸."
그로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카린돌의 몸을 살폈다. 그 몸은 자신의 몸보
다 훨씬 뜨거웠다.
"네게 운이 있어 비아스를 깨운다 해도 상황이 바뀌진 않아. 나는 비아
스도 벨 테니까! 자, 선택해보시지?"
"사람의 목을 일격에 자르는 건 사이커로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카린
돌."
"그래서?"
"당신은 저를 상처입히는 것이 고작일 겁니다."
"내가 얼마나 필사적인지 알고 싶어?"
"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기름과 불과 칼을 들고 오신 지금의 모습
만 보아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예를 들자면, 지금 당신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는 철퇴 같은 것."
카린돌은 기절했다.
두개골이 으스러질 정도로 내려친 철퇴에는 카린돌의 살점과 비늘이 묻
어났다. 그것을 쥔 남자는 헐떡거리며 그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로스 역
시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분 나쁘게도 그로스의 손에는 기
름이 묻었다. 그로스는 그 감각에 진저리를 쳤다.
"제기랄, 좀 더 빨리 올 수 없었나? 시간 끄느라고 미치는 줄 알았어."
철퇴를 내려친 남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여자를 공격했다는
사실 때문에 받은 정신적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
는 멍한 표정으로 카린돌의 뒤통수만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른 세
남자들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정을 깨달은 그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철퇴를 든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잘했어. 고마워, 보트린."
보트린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껌뻑거리다가 겨우 미소를 지었
다.
"이 여자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따라오
긴 했지만, 공격해야 된다고 결정한 이후로 이 여자가 하는 말은 거의
듣지 않았어."
"카린돌은 비아스를 사형(私刑)할 생각이었어. 침대 주위에 기름을 뿌
리고 불을 지를 참이었지. 정말 박력 넘치는 여자야. 그 끔찍한 점화통
부터 치워. 지금 내 몸은 기름투성이야. 나는 그걸 줍기도 싫군."
남자들 중 한 명이 카린돌의 손에서 점화통을 집어들었고 곧이어 보트
린이 사이커를 집어들었다. 보트린은 그것을 그로스에게 넘겼다. 사이커
를 받아든 그로스는 카린돌을 내려다보았다.
"행운이었어. 이 여자는 우리가 목소리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지. 우리가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면 카린돌이 들었을지도 몰
라."
다섯 남자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카린돌과 비아스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그 중 한 명이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카린돌이 온 것을 보니 스바치와 함께 자고 있던 것은 아닌 모양이
군."
"맞아. 스바치는 오늘 혼자 자고 있어."
"카린돌이 이 거사를 위해 스바치를 쫓아보낸 모양이군."
"그 녀석과 카루를 붙잡자. 그리고 카린돌과 함께 데리고 간다."
"카린돌과 스바치와 카루를 함께?"
"그래. 스바치와 카루가 카린돌을 납치한 거지."
"이봐. 스바치와 카루가 왜 카린돌을 납치할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 설
명해주겠어? 그게 설명되지 않으면 엉성하게 급조된 계획이라는 평을 피
하기 어려울 텐데."
"이건 어떨까. 마케로우 가문에서 살아남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카린돌
이 스바치와 카루와 함께 자기 가문을 만들려고 키보렌 숲 어딘가로 도
망쳤다."
"솔직히 그건 더 엉성하군. 그냥 납치로 하지."
"그렇다면 이유는?"
"사람들은 비아스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지."
"흐음. 비아스가 남자들을 시켜 경쟁자인 동생을 납치하게 한 것이군.
그건 괜찮은데."
"그래. 납치자가 둘이니 계획적인 것으로 보이겠군. 그렇다면 증거는
뭐로 하지?"
"카루와 스바치의 방에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비아스.'라고 쓰여진 양
피지를 남겨두면?"
"농담하지마. 보트린. 특별히 증거를 남기지 않아도 돼. 조만간 사람들
은 우리들의 말을 무시할 수 없게 될 테니."
"아니, 잠깐.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그 말을 꺼낸 것은 그로스였다. 나머지 네 사내는 그로스를 응시했다.
"일단 지금부터 전부 소드락을 복용한다. 그리고 넌 지금 카린돌을 데
리고 심장탑으로 가라. 그리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스바치와 카루를 잡
으러 간다."
"그 다음에는?"
그로스는 계획을 설명했다. 나머지 네 사람은 그 계획에 만족했다. 잠
시 후 급가속된 나가들이 다섯 줄기의 바람처럼 움직였다.
이튿날 아침, 비아스는 격분하여 손에 잡히는 것을 모조리 박살내었다.
침대 주변에 뿌려진 기름은 그 때까지도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비아스는 탁자 위에 놓인 실험도구를 모조리 탁자 아래로 밀어버린 다음
겨우 호흡을 고르고서는 난장판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
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그로스!]
[불을 붙이기 직전에 제가 카린돌 마케로우님에게 덤벼들었습니다. 하
지만 카린돌 마케로우님은 사이커를 가지고 계셨고 저는 맨몸이었지요.
카린돌 마케로우님은 제 가슴을 벤 다음] 그로스는 가슴의 베인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동료가 베어준 상처라는 사실은 니르지 않았
다. [도망쳤습니다. 저는 그녀의 뒤를 쫓았습니다. 당신을 깨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걱정이 더 컸습니
다.]
[그래, 잘했어! 그 미친 년은 어쩌면 이 집을 태워버렸을지도 몰라!]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녀는 스바치와 카루와 함께 저택을 빠
져나갔습니다. 저는 그녀가 어디로 도망치는지 알아둬야겠다는 생각에
그들의 뒤를 추적했습니다. 그들은 심장탑으로 도망쳤습니다.]
[심장탑이라고!]
[그렇습니다.]
비아스는 창밖의 심장탑을 돌아보았다.
[그 년이 수호자들에게 보호를 요청할 생각이군. 그래서 그 놈들도 데
려간 거야. 어림없는 짓을!]
어느 가문에도 소속되지 못한 나가 남자들이 범죄에 휘말리거나 할 경
우,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는 그 남자들을 위해 심장탑이 나서서 보
호자 노릇을 맡곤 한다. 수호자들이 남자를 보호하고 변호하는 일을 맡
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의 경우에는 가문에 소속되어 있기에 그런 보호
를 할 필요도, 권리도 없다. 비아스는 카린돌이 수호자들의 보호를 요청
하기 위해 남자인 카루와 스바치를 내세웠다고 판단했다.
[그로스!]
[예. 마케로우.]
[당장 심장탑으로 가거라. 내 서신을 가지고.]
그로스는 이해력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비아스가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방 안으로 뒤져 재빨리 양피지와 필기구를 찾아내었다. 그로스가
벼루에 먹을 가는 동안에도 비아스는 분노를 참지 못하며 몇 개의 물건
을 더 박살내었다. 그로스가 간신히 먹을 다 갈아놓자 비아스는 한 달음
에 달려와 붓을 집어들었다.
비아스는 카린돌 마케로우가 방화 기도자이며 살인미수범임을 강력히
주장한 다음 두 남자에 대해서는 알 바 아니지만 카린돌은 마케로우 가
문의 방식으로 처벌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양피지 위에 써놓은 글씨는
그녀 자신의 분노를 담아 거칠었고 그 난폭한 글씨는 다시 비아스를 분
노하게 했다. 비아스는 양피지를 그로스의 얼굴에 팽개치며 말했다.
[가서 카린돌을 잡아와라! 한번 놓친 걸로 충분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주었는데 또 놓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로스는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할 것을 요청하지는 않았다. 속
으로 씁쓸하게 웃으며 그로스는 머리를 조아렸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몇 시간 후, 비아스는 그로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를 넘어
서 기막힌 기분까지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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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가락이 빛나고 있다! 샤이닝- 타이핑!
시리얼이여, 내가 돌아왔다!
이것이 올드 타이핑이라는 것인가.
타자가 왜 이럴까요… 흠흠.
모 님께서 '돌로메네 압실링거 이야기' 의 감상이나 독후감에 해당하는
것을 밝혀주시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만 솔직히 그런 것을 말하기
가 좀 어려운 것이 타자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