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7-1. 관련자료:없음 [53624]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5-03 01:39 조회:10250
눈물을 마시는 새.
7. 열독(熱毒) - 1
마침내 키탈저 사냥꾼들은 자보로에 대호 별비를 바칠 수 있었
다. 하지만 별비를 받아야 할 무라 마립간은 이미 타계한지 오래
였다. 키탈저 사냥꾼들이 3대에 걸쳐 별비에게 도전하는 동안 자
보로의 마립간 역시 두 번 바뀌었다. 그들이 별비를 바쳤을 때 자
보로를 지배하고 있는 자는 하모리 마립간이었다. 하모리 마립간
은 별비를 바치러 온 사냥꾼들이 소년소녀들을 대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 했다. 그리고 마립간은 별비의 파헤쳐진 복부를 보
며 더욱 놀랐다. "무라 마립간께서는 그대들에게 별비를 요구했
다. 하지만 이건 완전한 별비가 아니군. 속에 있던 것은 어떻게
되었지?" 사냥꾼들의 우두머리는 대답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습
니다." "그곳이 어디지?" 그러자 우두머리는 말없이 데리고 온 소
년소녀를 가리켰다. "저들의 배속에 있습니다." 하모리 마립간은
겨우 키탈저 사냥꾼들의 복수를 떠올렸다. 하지만 마립간은 소녀
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저 소녀도 별비의 간을 씹
어먹었단 말인가?" 우두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 애는 우
리 모두의 딸입니다." - 펜조일의 <별비와 키탈저 사냥꾼>
"뱀을 풀어놓겠습니다."
오레놀은 뱀단지를 조심스럽게 기울였다. 단지 안에서부터 요동을 치고
있던 뱀들은 빠르게 방바닥에 쏟아졌다. 티나한은 팔짱을 낀 채 뱀이 움
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뱀들은 곧 부자연스러운, 작위적인 선을 그리기 시
작했다. 그 발 없는 몸들이 저 먼 곳 냉혹의 도시에서 보내어진 의미를
움직임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쥬타기 대선사가 그것을 읽었다.
"간절히 희망하며 묻겠습니다. 륜 페이가 귀측에 도달했습니까? 만약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긍정이라면 뱀 한 마리를 붙잡아 단지 안에 집어
넣으시오. 만일 부정이라면 뱀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오."
티나한이 뱀 한 마리를 향해 무심히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케이건이 그 손을 툭 쳤다. 티나한은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그건 독사요."
티나한은 당황하여 손을 잡아당겼고 엉덩이도 조금 잡아당겼다. 케이건
은 바닥을 잘 살핀 다음 독사가 아닌 뱀을 조심스럽게 집어들어 단지 안
에 집어넣었다. 뱀들이 다시 꿈틀거렸다.
"도착했나. 축하한다. 륜 페이에게 감사를. 구출대에게도. 준비는 끝났
나? 대답이 긍정이라면 뱀 한 마리를 단지 안에 집어넣어라."
티나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말투가 바뀌냐?"
"뱀 한 마리가 줄어서 그렇소."
케이건은 뱀을 집어들지 않았다. 일찍이 륜이 발자국 없는 여신을 부를
장소로 준비해두었던 철혈암이 마루나래와 케이건의 싸움에 의해 박살이
났기에 다시 처음부터 준비를 해야 했다. 그 외에도 그들이 거론하고 싶
지 않은 문제가 몇 가지 더 있었다. 한참 후 뱀들이 사어를 그렸다.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 사흘 내로 준비가 끝날 수 있다면 뱀을 넣어
라. 사흘 후 다시 연락하겠다. 대답이 부정이라면 엿새 후에 연락하겠
다."
사어를 읽던 대선사는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팔짱을 낀 채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던 누구도 준비가 사흘 안에 끝날 거라
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뱀들이 다시 빠르게 움
직였다.
"혹 계획이 완전히 실패했나?"
케이건은 뱀 한 마리를 집어들어 단지 안에 집어넣었다. 덕분에 사어는
더욱 축약되었다.
"다행. 이해. 문제 해결 희망. 엿새 후 재연락. 최선 노력 경주 요망.
반복. 최선 노력 경주 요망."
오레놀이 단지를 기울였다. 뱀들이 비늘을 땅에 부딪히며 단지 안으로
들어가자 오레놀은 그 뚜껑을 단단히 닫았다. 그리고 네 사람은 조금 전
에 들었던 말을 생각해 보며 잠시 침묵했다. 오레놀이 그 침묵을 부담스
러워 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쪽에서 초조해하는 것 같군요."
오레놀이 원한 것이 침묵의 배제였다면 그것은 실패했다. 다른 세 사람
은 더 큰 침묵을 만들어내며 눈을 내리깔았다. 대선사가 침통한 표정으
로 말했다.
"철혈암이 파괴되어 유감이군. 케이건. 상심이 크겠군."
티나한은 어리둥절하여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케이건이 대선사
에게 해야 할 말이었다. 티나한의 의문을 깨달은 대선사는 짤막하게 설
명했다.
"철혈암은 케이건이 사원에 시주한 거요."
티나한은 놀라며 마음 속으로 '케이건 갑부설'을 되새겼다. 케이건은
무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원한 건물은 없습니다. 어쨌든 다른 장소가 필요한데, 준비는 어떻
게 되고 있습니까?"
오레놀이 대답했다.
"장소를 준비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습니다. 앞서 철혈암을 준비했던
행자들이 비운암(飛雲庵)에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비운암은 철혈암만
큼 외진 곳에 있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조용한 곳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이겠지요."
케이건의 말에 오레놀과 쥬타기 대선사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티나한은
벼슬을 뻣뻣하게 세웠다. 티나한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 놈들 어떻게 할 수 없어, 대선사?"
"티나한. 하인샤 대사원에 찾아드는 손님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문제
는 전적으로 주지인 라샤린 선사가 결정할 문제요."
"이 사원의 주지야 그 라샤린이라는 중인지 모르겠지만 중들 중에서 제
일 높은 건 너잖아? 네가 라샤린에게 좀 제안할 수 있는 문제 아니야?"
쥬타기 대선사는 그냥 웃었다. 티나한의 언사가 무례함이 아닌 순진함
에서 나온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레놀 대덕이 대선사를 대신하여 알
기 쉽게 설명했다.
"말씀하신대로 종단의 대표자인 대선사님께서는 종단에 관련된 문제라
면 그런 제안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들은 종단 외부의 분
들입니다. 따라서 그 자들에 대한 처리는 완전히 이 사원의 대표자인 라
샤린 선사의 권한입니다. 그리고, 제안을 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라샤
린 선사께서도 그 자들에 대해 언짢아 하시는 눈치인 것 같더군요."
"그럼 라샤린은 그 자들을 쫓아내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봉문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사원은 오가는 이를 막거나 붙잡거나 하지
않습니다. 고작해야 승려들의 수행 생활을 방해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
정도가 가능할까요. 지금 그 자들이 무학당(舞鶴堂) 쪽으로 접근하는 것
을 삼가는 것도 쥬타기 선사님이 모든 영향력을 다 동원하신 덕분에 가
능한 일입니다. 혹은 선사님이 즐기시는 거친 표현법을 따른다면 머리를
물어뜯을 듯이 화를 낸 덕분이라고 할까요."
오레놀은 승려가 그런 표현을 쓰니 재미있지 않냐는 듯이 웃으며 케이
건과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웃음을 감추었다. 그의 앞에 있는
두 남자 중 한 명은 레콘이었고 다른 한 명은 대호와 맞선 인간이었다.
그들은 정말 '거친' 자들이었고, 오레놀이 쓴 표현에 별로 감동받지도
않았다. 오레놀의 무안함을 무마시키려는 듯 쥬타기 대선사가 가볍게 맞
장구를 쳤다.
"라샤린 선사는 정말 투사지. 산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제왕병자가 되
어 세상을 휩쓸고 돌아다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 들 정도요. 라샤
린 선사는 그 자들이 무학당에 한 발도 못 디디도록 할 거요. 어떻게든
빨리 륜을 설득해주길 부탁하겠소. 여러분들은 그와 고락을 같이하신 분
들이니 나나 오레놀보다 나을 거요."
티나한은 한숨을 내쉬었고 케이건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오레놀과 케이건, 그리고 티나한은 대선사의 방을 나왔다. 오레놀은 뱀
단지를 보관해두러 갔고 티나한은 툇마루에 기대어두었던 철창을 집어들
었다. 케이건은 텃밭쪽으로 걸어갔다. 텃밭 끄트머리에 선 케이건은 묵
묵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곁으로 다가선 티나한은 케이건이 보는
방향을 보고는 부리를 딱! 소리나게 부딪혔다.
계곡의 깨끗한 물 주위로 차일이 쳐 있었다. 차일 아래에 무엇이 있는
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로 보아 보지 않아도 뻔
했다. 차일 앞쪽에는 넓은 풀밭이 있었고 그곳에는 수십 명의 인간들이
몰려서 씨름판을 벌이고 있었다.
승려들의 수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경내에서 떨어진 곳에 씨
름판을 벌인 것은 일견 갸륵한 정성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있는 계곡은 무학당에 인접한 장소였다. 케이건과
티나한이 바라보는 가운데도 몇몇 행자들과 수좌들이 분개한 듯 차일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티나한은 벼슬을 딱딱하게 치켜세웠다.
"내 저것들을 그냥!"
티나한은 당장이라도 계곡을 향해 뛰어내려갈 기세였다. 케이건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놔두시오. 저 자들과 싸움이라도 벌이면 대선사에게 면목이 없소."
"저 자식들이 무학당 훔쳐보려고 저기에 판 벌인 것이 뻔하잖아!"
"거기에 대해서는 좋은 해결책이 있소."
잠시 후, 계곡에서 씨름을 즐기던 이들은 갑자기 그것을 중단해야겠다
고 결정했다. 그들이 씨름을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고 느
닷없이 들려온 대호의 포효에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어느쪽
이 더 중요한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황망히 차일과 음식을 챙
겨 계곡을 떠났다.
마루나래를 울부짖게 하기 위해 위협적으로 다가섰던 티나한은 뒤로 훌
쩍 뛰어 빠져나왔다. 마루나래는 머리를 잔뜩 낮추고 어깨털을 빳빳하게
곤두세운 채 티나한을 노려보았다. 티나한은 웃으며 두 손을 내저었고,
마음 속으로는 자신이 꽤 호의적으로 보일 거라 믿었다. 그러나 다른 사
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고, 마루나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마루나래는 티나한이 무학당의 마당 반대편까지 물러난 다음에
야 겨우 긴장을 조금 풀었다.
마당 반대편으로 물러난 티나한은 마루나래의 뒤편에 있는 두억시니들
을 향해 외쳤다.
"야, 쌍대가리. 그 고양이 겁 안 나냐?"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가 티나한을 돌아보았다.
"대호 사모 친구."
"사모 우리 지휘자."
두억시니들에게 사모는 아직도 그들의 지휘자였다. 사모가 마지막으로
내린 명령은 '저 인간과 레콘을 붙잡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억시니
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사모의 다음 지시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모는 다음 지시를 내려줄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두
억시니들은 사모가 무학당에 옮겨진 이래로 계속 다음 지시를 내려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모가 아무런 지시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티나한은 두억시니들이 영원히 무학당 앞을 지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의
심하며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마당 한편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선 채 조용히 무학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철옹성이라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무학당의 축대 앞은 거대한
대호가 수문장이나 된다는 듯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축대 위에는 여러 군
데가 상했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두억시니들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지
붕 위에는 아스화리탈이 걸터앉아 있었다. 케이건은 접근하는 자들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것
은 그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아스화리탈을 제외한다면 케이건
은 무학당을 지키고 있는 자들 전부와 악연을 가지고 있다. 물론 마루나
래가 자신의 찢어진 귀를 들이댄다면 케이건은 지금도 몸을 움직일 때마
다 머리끝이 곤두서게 만드는 등의 상처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
지만 두억시니들은 하늘치를 유인하여 그들을 깔아뭉갠 케이건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케이건은 그 행위에 대해
변호할 말도, 그럴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륜과 사모는 바로 그런 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무학당 안에 있었다. 그
놀라운 경비자들을 둘러보던 티나한은 문득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저 대호 말이야. 사모가 정신을 잃었는데 아직도 사모를 지키
고 있네? 정신억압이라는 건 반 죽은 상태가 되어도 통하는 거야?"
케이건은 잠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제야 그걸 깨달은 거냐
고 물어도 될 법하지만, 케이건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차분하게 설명했
다.
"마루나래는 정신억압 때문에 사모를 따르는 것이 아닐 거요. 륜은 키
보렌에서 사모가 대단찮은 정신억압자라고 했소. 대호를 억압할 정도는
되지 못할 거요."
"그러면 어떻게 된 거야?"
"대호 스스로가 원해서 사모를 따른 걸 거요."
"뭣 때문에?"
"그건 알 수 없소."
티나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호를 바라보았다.
그 때 방문이 열리며 륜이 걸어나왔다.
케이건과 티나한은 긴장하며 륜을 바라보았다. 그날 밤 사모와 륜을 황
급히 무학당에 옮겨놓은 후로 그들은 거의 보름 만에 륜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륜은 사모의 흑사자 모피를 걸치고 있었다. 마루 가운데 선
륜은 잠깐 동안 공황에 빠진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이곳이 어디
인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륜
은 곧 케이건과 티나한을 목격했고 정신을 차린 듯했다. 륜은 축대로 내
려왔다.
지붕 위에 있던 아스화리탈이 륜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두억시니들
과 마루나래는 륜을 흘끔 바라보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더 이상 움직임
을 보여주지 않았다. 륜이 케이건을 향해 걸어오는 동안 그를 따라온 것
은 아스화리탈뿐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티나한은 누가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 대충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온 륜의 모습은 초췌했다. 인간처럼 땀을 흘린다면 지금쯤
말도 못할 악취를 풍기고 있었을 것이다. 륜은 힘없이 케이건을 바라보
았다.
"마루나래가 울기에 누가 온 건 줄 알았습니다."
"소리에 신경 쓰고 있었나?"
"며칠 전부터."
"왜?"
"눈이 좀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누님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려고."
케이건은 륜이 이토록 힘들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격심
한 심적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청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니
신경이 끊어질 지경일 것이다.
"시력이 이상할 정도라면 뭘 좀 먹고 쉬어야하지 않겠나."
"며칠 전 밤에 먹었습니다. 누가 마당에 염소를 가져다놓았더군요."
승려들은 마루나래와 륜을 위해 염소 몇 마리를 가져다놓았다. 승려들
은 두억시니들에게도 뭔가를 가져다주고 싶어했지만 두억시니들은 마루
나래가 먹고 남긴 찌꺼기만 주워먹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그들의
놀랄 만한 소식(小食)은 사제들을 당황하게 했지만 케이건은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유해의 폭포가 생각이 있다면 대식(大食)하는 두억시
니를 삼천 마리나 만들어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케이건은 방문 쪽을 흘끔 바라보고 말했다.
"사모는 어떤가."
"상처는 다 아물었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전히 가사 상태입니다."
케이건은 냉정한 눈으로 륜을 바라보았다. 결국 케이건은 흉중의 말을
꺼내놓았다.
"그녀가 그걸 원하는 것 아닐까. 륜."
륜은 비늘을 부딪히며 케이건을 쏘아보았다. 살기 어린 눈빛이었고, 그
래서 케이건은 륜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하지만 륜은 질문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처음부터 죽을 생각으로 쉬크톨을 받았을 거다. 그리고 믿기
어려운 집념과 실행력으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어. 네 손에 쓰러지는
것."
륜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케이건의 말은 멈추
지 않았다.
"쇼자인-테-쉬크톨이 완수되었지. 그녀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고 싶
다. 너에게 죽여달라고 요구한 적조차 없으니 어떤 나가도 꼬투리를 잡
을 수 없는 완벽한 형태로 완성되었다. 륜 페이. 그녀가 왜 눈을 떠서
자신이 이룩한 이 놀라운 위업의 결말을 스스로 망쳐야 하지? 그녀는 그
러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사모의 의지는 확고하다. 더운 방에 눕히든, 상처가 다 낫든, 네가 옆
에 앉아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든 그녀에겐 무의미할 거야. 그녀는 절대로
깨어나지 않을 거다. 네가 그녀의 목을 자를 때까지."
륜은 케이건의 멱살을 와락 움켜쥐었다.
티나한이 놀라 다가섰고 아스화리탈의 비행은 빨라졌다. 아스화리탈은
륜과 케이건의 머리 위를 정신없이 돌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격분을 참지 못해 케이건의 옷깃을 움켜쥐기는 했지만 그것은 륜의 성
격에 어울리는 일이라곤 할 수 없었다. 륜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의 손과 케이건의 턱을 번갈아 바라보던 륜은 겨
우 한 마디를 꺼내놓았다.
"제게, 제게 그런 걸 요구하지 말아요!"
케이건은 천천히 손을 올려 륜의 손을 덮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래로
밀어내렸다. 잠시 저항할까 하던 륜은 곧 그것을 포기했다. 륜의 손을
밀어낸 케이건은 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가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사모 페이가 요구한 거다. 륜."
륜은 무릎을 꿇었다.
아스화리탈이 당황하여 날아들었다. 아스화리탈은 륜의 어깨에 앉으려
했지만 그것은 여의치 못했다. 륜의 옆, 땅바닥에 앉는 아스화리탈을 보
며 티나한은 용이 확실히 자라났음을 깨달았다. 아스화리탈은 륜의 어깨
에 머리를 비볐다. 그것을 내버려둔 채 륜은 힘겹게 말했다.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케이건."
"…하텐그라쥬에서 연락이 왔다."
륜은 고개를 조금 들어 케이건을 올려다보았다.
"사어를 통해 온 연락이었다. 그들은 준비가 되었는지 알고 싶어하더
군. 우리는 뱀을 단지 안에 한 마리씩 집어넣거나 넣지 않는 방식을 통
해 긍정이나 부정을 표시할 수 있었고, 그래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고 대답했다. 엿새 후에 다시 연락하겠다더군. 서둘러주길 바라는 눈치
였다."
"긍정과 부정만 가능한 겁니까?"
"그래."
"그렇다면 더욱 누님은 살아나셔야 합니다. 저는 제가 하려는 일에 대
해 정확히 알기 전에는 시도할 수 없어요. 수호자들의 확언을 들어야 해
요. 그걸 물어보려면 누님이 필요합니다."
"너는 지금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 륜. 너는 이미 필요한 정보
는 거의 다 가지고 있다. 굳이 정보가 부족하다면 네 신부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너는 사모를 살려낼 빌미를 원하고 있을 뿐이야. 하지만 억지로
살려낸다고 해봐야 네 누나를 더 괴롭게 하는 일이다. 네 누나는 자신이
바라던 것과 조금도 일치하지 않는 상황을 보고 또다시 네 손을 이용한
자살을 시도하겠지. 그녀에게 같은 고통을 두 번 주는 일이 될 거다.
륜."
"저는 두 번 다시 그녀를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네가 그럴 결심인 것을 알 테니 네 누나도 절대로 깨어나지 않을 거
다."
륜은 견딜 수 없다는 듯 처연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올려다보았다. 아스
화리탈의 목을 끌어안은 륜은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그러면 제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케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륜이 이미 대답을 알기 때문이다.
사모의 목을 자르는 수밖에 없다. 머지 않아 사모는 굶어죽게 될 것이
다. 어쩌면 그녀의 입을 통해 억지로 동물을 우겨넣으며 시간을 연장시
킬 수도 있겠지만, 본인이 살아나려 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무익한 헛수
고가 될 뿐이리라.
케이건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을 잘라라. 륜. 그녀가 원하는 것이…"
"당신의 부인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케이건의 얼굴이 굳었다. 티나한은 놀란 표정으로 케이건과 륜을 번갈
아 쳐다보았다. 차마 눈을 들어 케이건을 볼 용기가 없었던 륜은 땅을
바라보며 외쳤다.
"당신의 부인이 무엇을 원했겠습니까? 썩어없어질 시체를 되찾기 위해
당신이 서른 명의 나가를 공격하길 원했겠습니까? 당신이 목숨을 걸고
그렇게 해주기를 원했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죠. 그럴 리가 없어요! 그
분은 당신이 그러지 말기를 원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했습
니까?"
케이건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 귀 아래에는 굵은 주름들이 드러났
다. 어금니가 바스러지도록 깨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륜의 지적은, 가혹하리만큼 사실적이었다.
케이건에게 비명을 들려주기 위해 나가들은 의도적으로 그녀를 산 채로
뜯어먹었다. 나가들이 소리를 이용할 생각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복수심의 증거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가들의 의도대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의 비명이 아니었다. 나가들은 위대한 별비
의 정복자가 어떤 여자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3대째에 남은 것이 한 명의 딸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키탈저 사냥꾼
들은 죽은 이의 아들을 살아남은 이들 모두의 아들로 받아들여 함께 복
수하던 전통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운 의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모든 키탈저 사냥꾼의 딸이라 주장했고, 결국 가
장 완고한 사냥꾼마저도 그 주장을 받아들이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지독한 폭풍이 치던 날, 그녀는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다른 아들들
과 함께 빗속에서 별비의 배를 가르고 김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대호의
생간을 꺼내어 씹었다. 아무도 그녀가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유
로 그녀의 권리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별비의 정복자라는 칭호
또한 나눠주었다. 그녀는 그런 여인이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내지른 비명은 도망치라는 것이었다.
케이건이 무수한 추억을 떠올리는데 필요한 시간은 찰라였다. 다시 현
실을 보고 듣게 되었을 때 케이건은 거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
았다. 륜은 아스화리탈의 목을 더욱 세차게 끌어안으며 외쳤다.
"당신은 되살아날 수도 없는 부인을 위해 목숨을 걸었어요. 하지만 제
누님은 살아날 수 있어요! 나는 누님을 포기할 수 없어요! 부인의 유해
도 포기할 수 없었던 당신이라면 누구보다도 제 마음을 잘 알 거 아니에
요!"
케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몇 달 전 마지막 주막에
서 비형을 만났던 이후,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케이건은 잊었던
것들을 너무 많이 떠올렸다. 요스비, 케이, 보늬. 마침내 그는 800 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갈 것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기억들로 얼룩진 시간이
케이건을 숨막히게 했고 범람하는 시간의 격류 위를 표류하는 무수한 사
상(事象)이 그를 짓눌렀다.
"저는 사모를 살려낼 겁니다."
"그러면 너는 키보렌으로 돌아갈 유일한 방법을 잃게 된다. 그녀가 원
하지 않는 결과일 텐데."
케이건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 기분으로 자신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듯 자신을 평가했다. '이 녀석은 길잡이군.'
티나한이나 륜은 케이건의 혼란을 깨닫지 못했다. 륜은 무릎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십시오."
케이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륜은 아스화리탈을 안아들며 말했다.
"누님의 말씀처럼 저는 나가를 배신했습니다. 물론 그 말은 누님이 저
를 도발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십니다만, 최소한 살신을 준비하고 있는
자들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제가 나가의 배신자라고. 상관없습
니다. 저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가를
요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대가?"
"엿새 후라고 했습니까? 좋습니다. 승려들의 요구대로 하겠습니다. 그
대가로, 제 누님이 하텐그라쥬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십시오."
티나한은 어이가 없었다. 사모 페이는 나가들의 규칙에 의해 쇼자인-테
-쉬크톨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나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들이 그
의무를 해소하거나 할 수는 없다.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생각하며 티나
한은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물끄러미 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케이건을 향해, 륜은 비늘을 곤두세우며 외쳤다.
"반드시 찾아내십시오!"
그리고 륜은 몸을 돌렸다. 무학당으로 되돌아가는 륜의 뒷모습을 보던
티나한은 난감한 표정으로 아랫부리를 긁적거렸다.
두억시니들이 갑자기 움직였다.
두억시니들은 륜을 둘러싸듯 포위했다. 티나한과 케이건은 깜짝 놀라
무기를 뽑아들었고 아스화리탈은 륜의 품에서 화라락 날아올랐다. 아스
화리탈은 두억시니 모두를 경계하듯 륜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륜은 겁먹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마루나래는 별
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듯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티나한과 케이건이 달려들 때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가 외쳤다.
"싸움."
"아니다."
티나한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 철창을 뒤로 크게 잡아당겼다. 그러나 케
이건은 걸음을 멈추었다.
"싸움이 아니라고?"
"싸움."
"아니다."
케이건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두억시니들이 륜을 공격하려 했다면
이미 그럴 시간은 충분했을 것이다. 어쨌든 보름 동안이나 함께 있었으
니 이제 와서 륜을 공격할 이유는 없다. 티나한도 조금 늦게 그런 결론
에 도달하여 철창 끝을 조금 낮추었다. 륜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짓이지?"
"기다려달라."
"사모도 기다렸다."
륜은 '사모'라는 말에 놀라 두억시니를 바라보다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
덕였다.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는 안심한 표정을 짓고는 옆으로 움직이
기 시작했다.
두억시니들은 륜을 중심으로 원무를 추기 시작했다.
라샤린 선사는 폭언을 내뱉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향로를 받아
들었다.
"귀한 선물에 감사하오. 그런데, 지코마 성주. 이 가벼운 물건을 가져
오기 위해 저 많은 사람이 필요하셨소?"
"세상에는 이런 물건을 단지 값진 보물로밖에 보지 않는 무도한 자들도
많으니까요. 그래서 경비병들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선사는 한숨을 내쉬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칼리도의 성주 지코마
는 다른 자들보다는 훨씬 예의에 밝은 인물이었다. 무작정 부하들을 이
끌고 찾아와서 사원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는 자들이 부지기수인 판국
에 '귀한 선물을 운송하기 위해 많은 부하를 데리고 왔다'는 핑계를 만
들고자 적지 않은 금편을 쓴 지코마 성주의 태도는 오히려 감동적이기까
지 하다. 그랬기에 선사는 폭언을 참으며 지코마 성주와 그 부하들의 숙
소를 내어드리라고 말했다. 지코마 성주는 '사원에 이상한 일이 있다던
데요'라고 묻지 않을 정도의 조심성까지 발휘하여 선사를 다시 감동하게
한 다음 물러갔다.
선사는 지긋지긋한 얼굴로 조타 중대사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끝난 건가?"
"오늘 방문자는 다 만나셨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선사님이 만
나셔야 할 방문자는 다 만나셨다고 해야겠군요."
라샤린 선사는 신음을 흘렸고 불경스러운 말 - 교양인들의 자리에서라
면 괴짜로 취급될 각오를 하지 않으면 꺼낼 수 없는 - 까지 몇 마디 중
얼거렸다. 조타 중대사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척하며 말했다.
"큰일입니다. 이 이상 방문자들이 찾아들면 사원에 숙식시킬 방도가 없
습니다."
"행자들을 시켜 그 놈들에게 싸움을 걸라고 하게. 소란을 핑계로 모조
리 쫓아버리도록."
"매혹적인 의견입니다." 중대사는 살짝 웃었다. "사실, 그런 일이 일어
날 것 같기도 합니다. 몰려온 방문자들 중에는 유서 깊은 원수지간도 몇
몇 있습니다. 세미쿼 추장과 무핀토 추장은 서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칼
을 움켜쥐더군요."
"맙소사! 어떻게 되었나?"
"다행히 그 추장들은 대사원의 권위를 존중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들
은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속어를 이용해서 서로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
는지 확인한 다음 헤어졌습니다. 그들은 그 속어가 우정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만, 그게 사실이라면 우정을 표현하는 가장 거친 방법이 아
닐까 의심스럽습니다."
"정말 미치겠군. 그 잡놈들 중 한두 놈이 싸움이라도 벌인다면 대사원
은 쑥대밭이 될 걸세."
"하지만 쫓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한결같이 한 가락 하는 인물들이다
보니 전부들 핑계는 완벽하게 준비해서 왔습니다."
라샤린 선사는 다시 신음을 토했다.
철혈암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 많은 유학생들에게 목격되었다. 그리고
이 먼 곳까지 보내어진 그 유학생들은 모두 가문의 최고 계승자이거나,
차기 마립간이거나, 당주 후보자이거나, 추장의 둘째 아들(첫째는 보통
전사 수업을 하므로) 쯤 되는 똑똑한 인물들이었고, 그 중 많은 수가 재
빨리 고향에 연락을 취할 만한 기지도 가지고 있었다. '대사원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 용, 대호, 나가, 두억시니들이 출현. 하늘
치를 부리는 괴인도 있는 듯함. 승려들은 이들과 공모하여 뭔가 향후 세
계의 판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엄청난 일을 준비중인 듯함.'이라는 내
용을 서신을 품은 비둘기나 전령들이 세계 곳곳으로 떠나갔다. 그 다음
세계 곳곳에서 목에 힘을 잔뜩 줄 수 있으면서도 역사의 급한 물굽이가
벌어지는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파악할 줄 아는 군웅들이 부
하를 이끌고 대사원으로 하나둘씩 찾아드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이미 말했던 것이지만 다시 말하겠네. 사제들의 입을 철저히 단속하
게. 지금 이곳을 방문한 자들은 모두 교활하고 수완 좋은 것들이야. 수
행밖에 모르는 멍청한 산승 한둘쯤은 간단히 찜쪄먹을 놈들이란 말이지.
특히 비운암에서 작업 중인 행자들은, 필요하다면 그곳에 격리시키도록
하게."
조타 중대사는 이맛살을 약간 찡그렸다.
"차라리 모두 공개하고 협조를 구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대
사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일은 북부의 사람들 개개인의 이해에 영향을 끼
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면, 뭔가 한몫 잡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자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러 돌아가는 편이 낫다는 결정을 내
릴지도 모릅니다. 가장 우수한 부하들을 골라뽑아서 직접 왔으니 모두들
자기 땅이 걱정될 겁니다."
"그 자들이 한몫 볼 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로서는 짐작해낼 수 없
어. 중대사. 우리가 생각도 못해낼 방도를 궁리해낼지도 모르니. 뭐 한
두 가지 정도는 나도 짐작할 수 있겠군. 그들이 살신저지계획에서 아무
런 이득을 보지 못한다 해도 그 계획을 수행하는 사람들 자체에선 이득
을 찾을 수 있겠지. 일단 용이 있네. 제대로 자라나면 지상에서 그를 상
대할 자가 아무도 없는. 제대로 자라나지 않으면 어때? 포자를 뿌릴 때
까지만 키우면 엄청난 용근을 얻을 수 있네. 그리고 대호가 있어. 대호
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나가가 그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는 생각도 하기
싫군. 그리고 케이건 드라카님이 있어."
조타 중대사는 얕은 탄성을 지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저 자들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걱정이 더 커지는군요."
"물러나지 않겠다면 마음대로 산사의 생활을 즐겨보라고 해. 그 성정의
정화에 도움이 될 테니. 하지만 절대로 무학당과 비운암에는 접근할 수
없어. 절대로!"
그 때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지 스님! 주지 스님!"
"들어오거라. 무슨 일이냐?"
안으로 들어선 것은 숨이 턱에 닿은 젊은 승려였다. 승려는 황급히 외
쳤다.
"코네도 대족장이 무학당에 쳐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인샤 대사원의 주지 라샤린 선사는 또다시 폭언을 내뱉었다. 이번 것
은 교양인들의 자리에서 몰매를 맞고 추방당할 만한 것이었다.
지러쿼터 산맥과 라호친 사이에 자리잡은 발케네 지방은 강인한 사내의
전통으로 이름이 높다. 이것은 발케네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발케
네 지방 이외에 사람들은 그곳을 도둑놈의 소굴로서 유서 깊다고 말한
다. 물론 언제나 그러하듯 이런 현격한 시각의 차이를 불러온 것은 사소
한 가치관의 차이다. 발케네의 사내들은 타인의 소유물을 수단방법을 가
리지 않고 자신의 손에 넣는 행위를 사내의 대담함의 증거로 여긴다. 물
건의 소유자에게 구타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당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
기 때문이라는 것이 - 보다 정상적인 사람들을 한숨짓게 만드는 - 발케
네 사내들의 대답이다. 그러나 이들을 구제불능의 도둑놈으로 보는 자들
도 발케네 사내들의 용맹무쌍함에 대해서는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다.
그리고 코네도 빌파는 발케네의 군소부족들의 족장들 중 최고의 위치에
오른 자다. 그가 그 위치에 오르기 위해 참살한 족장의 수를 세려면 두
손으로도 부족할 판국이다. 코네도 빌파는 적의 집에 불을 지르고 상대
방의 우물에 독을 풀고 항의하러온 적수의 아들의 혀를 뽑아 돌려보내는
등의 '사내다움'을 보여주었고 그에 감동한 발케네의 족장들은 코네도의
머리에 대족장의 뿔관을 얹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족장들은, 따라서 코네도가 자신의 둘째 아들 토카리를 하인샤 대
사원에 보내어 공부를 시키겠다는 결심을 말했을 때 몹시 놀랐다. 족장
들은 '자식 교육에 대해 참견하고 싶지는 않지만 둘째 아들을 완전히 못
쓰게 만들어놓을 작정인가'라며 대족장에게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코
네도를 보다 잘 아는, 그러니까 코네도에게 가장 많은 물건을 도둑질당
한 친구들은 코네도가 정말 엄청난 도둑질을 준비중임을 직감했다. 코네
도 빌파는, 그러니까 일종의 제왕병자였다. 그가 다른 제왕병자들과 조
금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아들 대에 왕이 나오길 바란다는 점이었다.
코네도는 왕으로 점찍고 있는 첫째 아들 그룸을 몸소 가르쳤지만, 왕에
게는 폭넓은 유대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둘째 아들 토카리를 유력자의
자손들이 모이는 곳에 보냈다. 코네도 빌파는 자신의 두 아들을 이용하
여 세상을 도둑질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토카리는 코네도를 만족시킬 만큼 영리하고 민첩했다. 둘째 아
들의 급보를 받자마자 코네도는 그룸을 대동한 채 하인샤 대사원으로 달
려왔다. 하인샤 대사원과 발케네는 도보로 두 달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코네도는 말을 가차없이 죽여가며 여드레만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착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승려들에겐 들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중요한 인물들이 무학당에 있다는 것, 그리고 승려들이 그들을 무학
당에 보내주지 않을 작정이라는 것을 파악하고는 실력 행사를 시작했다.
무턱대고 무학당을 향해 걸어가는 코네도와 그의 부하들을 가로막으며
승려들은 분개하여 외쳤다.
"이러지 마십시오. 대족장님.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
다. 사원을 방문하셨으면 사원의 규칙을 지켜주십시오!"
코네도는 큰사슴의 뿔로 만들어진 자신의 뿔관을 가리켰다.
"이봐, 민머리. 뿔은 들이받으라고 있는 거다."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코네도는 모피 망토를 옆으로 확 치우며 허리에 찬 큰 검을 붙잡았고
그의 전사들 또한 눈을 치켜뜨며 살벌한 병기들을 앞으로 내밀었다. 승
려들은 사색이 되었다. 다행히 코네도의 둘째아들 토카리가 긴장한 대족
장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싸우자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님."
"아니라고?"
"아닙니다."
그리고 토카리는 앞을 가로막은 승려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제님들. 발케네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협박이니 경고니 하는 말을
사용해선 안됩니다. 칼이 날아옵니다."
승려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들은 보다 말이 통하는 것 같은 토카리를
향해 애원했다.
"토카리. 춘부장께 말씀 좀 드려주십시오. 이곳에 들어가시면 안 됩니
다."
승려들의 실수였다. 다른 때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토카리는 아버지와
형이 보는 가운데 '나약한' 민머리 중들과 친한 척할 수가 없었다. 토카
리는 친하게 지내던 승려들이 당황할 만큼 무서운 얼굴을 하며 외쳤다.
"누가 발케네의 대족장이 가는 길을 막는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당신들
의 보물을 빼앗거나 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당신들이 무학당에 모
시고 있는 손님들을 만나 이야기 좀 나누겠다는 거 아닙니까! 당장 비키
지 않는다면, 나 또한 발케네 사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코네도는 만족한 듯 토카리를 바라보았고 그룸의 경우엔 형답게 '발케
네의 명예를 잊지 않는 것은 장하지만 동문수학하던 자들을 그렇게 겁
줄 필요는 없다'고 동생을 달랬다. 코네도는 기가 막혀 말을 잃은 승려
들을 무시하며 그 옆을 지나쳤다.
그러나 코네도는 승려들의 경고를 받아들이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무
학당으로 돌아들어가는 오솔길로 들어섰을 때 코네도와 그의 전사들은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발견했다. 정확히 7 미터짜리 장애물이었
다.
티나한은 철창을 움켜쥔 채 발케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뭐냐?"
코네도는 잠시 기가 막히다는 듯이 철창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 창이오, 기둥이오?"
티나한은 부리를 딱 부딪혔다.
"화살이다. 너무 멀리 쏴서 주우러 온 거지."
티나한은 농담을 한 것이었고 발케네 사람들 또한 그것이 농담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중에는 '그런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자
들도 있었다. 토카리를 잠시 돌아본 코네도 대족장은 둘째 아들이 고개
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웃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발케네의 대족장 코네도 빌파요. 이 사원을 방문 중인데, 무학당
에 계신 손님들의 소문을 듣고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 없
어서 이렇게 왔소."
"나는 티나한이다. 미안하지만 지금 좀 바빠서 안되겠는데."
코네도는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레콘을 자극하지 않을 정도로.
"잠시도 안 되겠단 말이오?"
"어렵겠군. 하지만 오늘 저녁에 염화당에서 오레놀 대덕의 설법이 있는
데, 나는 거기에 참석할 생각이다. 그곳에서 만나면 되지 않을까? 훌륭
한 설법이 될 것 같은데, 너도 참석하면 좋을 거야."
코네도 대족장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놓고 짧게 고민했다. 하지만
레콘을 화나게 하는 것과 레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중 어느 것이 현
명한 처사인지는 처음부터 자명했다.
"좋은 설법도 듣고 귀인도 만나게 된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겠군. 나도
그곳에 참석하겠소."
코네도와 그의 전사들은 몸을 돌렸다. 그들이 오솔길 저편으로 사라지
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티나한은 부리를 한 번 부딪힌 다음 무학당
으로 돌아왔다. 무학당의 마당 입구에는 오레놀이 기다리고 있었다. 티
나한은 수염볏을 쓸어만지며 말했다.
"시킨대로 말했어. 그런데 뭣하러 그런 걸 시킨 거야?"
"무조건 막기만 하면 우리들과 저 방문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사소한 충돌이라도 일어난다면 흉한 일이 많을 테지요. 하지
만 여러분들이 얼굴을 조금씩 보여준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소문
이 퍼진다면 다른 자들도 일단 오늘 밤까지 참아줄 테지요."
"하지만 놈들이 꼬치꼬치 캐물으면?"
"특별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군요. 할 수 없지요. 제가 설법을 좀 길
게 할 테니 졸리다는 핑계를 대고 돌아와버리십시오."
티나한은 한숨을 내쉬며 무학당의 마당을 바라보았다.
륜은 땅바닥에 앉아있었다. 사모의 흑사자 모피를 걸치고 있었기에망정
이지 그렇잖았다면 오래 전에 기절했을 것이다. 두억시니는 속도를 조금
도 바꾸지 않은 채 계속 그 주위를 돌았다. 겉으로 보기에 그토록 무의
미해보이는 모습도 드문 판국이었지만, 그 진지함 또한 보기 드문 것이
라는 점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구라도 그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
각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랬기에 륜은, 그리고 티나한도 그것
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 원무를 보며 티나한은 수염볏을 긁적거렸다.
"그렇잖아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은데 별 파리들이 다 꼬이니 귀찮아
죽겠군."
티나한과 같은 방향을 보던 오레놀이 달래듯 말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륜이 드디어 결심을 했으니
까."
"음. 그건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케이건은 어디로 가신 겁니까?"
"륜의 요구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다고 말하고 어디로 가버렸어. 아, 참.
그러고보니 케이건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예? 뭡니까?"
티나한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케이건이 부자냐?"
웃음을 터뜨릴 수 있을 만한 질문이었지만 오레놀은 그러지 않았다. 대
신 오레놀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티나한은 실망했다. "아니야?"
"예. 그 분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분입니다."
티나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오레놀을 바라보다가 그 말에 대한 설명
을 요구했다. 하지만 오레놀은 설법 준비를 해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총
총히 걸어가버렸다.
카린돌 마케로우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카린돌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앞으로 뻗었
다. 침대 위에 반짝이고 있는 '그것'을 집어든 카린돌은 눈 앞으로 그것
을 가져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 속에 반짝이고 있는 그것은 비늘이었다.
카린돌은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두 다리를 벌렸다.
다리 사이로 비늘을 가져간 카린돌은 그것을 몸에 붙이려 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카린돌은 그 순간 절대로 이성적일 수 없
었다. 그녀를 위한 변호가 가능하다면 그녀 또한 자신의 재생력을 신뢰
하는 나가라는 점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떨어져나간 비
늘이 다시 붙지는 않았다.
그러나 카린돌은 자신의 몸이 출산 준비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무시하려
애썼다.
'임신이라니!'
생식기 주위의 비늘은 이미 윤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보다 강인하면서
도 유연한 비늘이 새로 돋아나올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그 비늘들은
이제 카린돌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카린돌이 발견한 것은 그
중 가장 먼저 떨어져나온 것이었다. 그것을 도로 붙이려는 속절없는 시
도를 계속하던 카린돌은 마침내 이를 악물며 비늘을 내동댕이쳤다.
'지금은 안돼. 지금은 안 된다고!'
카린돌은 자신의 복부를 공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남자
들!' 단지 비아스를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카린돌은 임신을 피하고 있었
고 자신의 예방책에 자신감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흥분과 갈
등, 공포 때문에 가임기가 지나치게 빨리 찾아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
지 못했다. 카린돌의 냉정한 정신은 그 와중에도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있었다. 목숨의 위험을 감지한 그녀의 몸은 한시라도 빨리 후
손을 만들어놓기를 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내 자식이라고?'
그녀의 첫아기였다.
'내가 어머니가 된다는 건가? 나처럼 니르고 나처럼 행동하게 될 어떤
존재의?'
실로 황당하기까지 한 일이다.
'기쁨이어야 할 네가 저주스러운 공포가 되고 말았구나.'
비아스 때문이었다.
"비아스, 비아스 마케로우! 변태, 미치광이, 살인마 같으니라고!"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배 위에 누른 채 카린돌은 비아스의 방이 있는
쪽을 향해 고함질렀다. 문득 배 속의 아기를 보호하고 있는 듯한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카린돌은 그 손을 치우려 했다. 하지만 손을 뗄 수 없었
다. 오히려 자신의 배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기 위해 카린돌은 허리를 숙
였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아날 수 있을까?'
카린돌은 몸을 떨었다. 자신이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 그
녀를 그토록 놀라게 했다. 그녀는 그런 표현에 익숙치 못했고 익숙하려
애쓴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 표현을 사용한 순간 카린돌은 자신이 선택
할 수 있는 수단을 크게 제한해버렸음을 깨달았다. 낙태라는 해결책을
떠올렸을 때 그녀는 강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쉽지도
않은 일이었다. 나가의 세계에서 낙태 수단은 상당히 미신적인 - 당연히
실효가 의심되는 - 것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가의 여인들은 낙태를
고려해야 할 경우가 거의 없다. 변태, 미치광이, 살인마의 취향을 가진
손윗자매를 가진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것을 왜 고려하겠는가.
카린돌은 불행하게도 그런 희귀한 경우에 속해 있었다.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면서도 카린돌은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고심했다. 그 중에는 비아
스에게 항복하고 그녀가 가주가 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굴욕적인 것까지
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식까지 비아스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해결책이 그녀의 자존심에 입히는 상처는 둘
째치더라도 비아스가 받아들일지 의심스러웠다. 비록 지금은 어디서 나
타난 건지 알 수 없는 다섯 명의 숭배자들 때문에 잠시 분노를 감추고
있지만, 비아스는 카린돌이 자신을 희롱했던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
다. 카린돌이 잠시라도 주의를 잃는 순간 그녀는 치명적인 방식으로 무
참하게 카린돌을 공격할 것이다. 적출식 날 남동생을 죽였던 것처럼.
그럴 수는 없었다. 카린돌은 비아스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타협이나 해
결책은 없음을 다시금 확신했다. 카린돌은 자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내 아가. 내가 너를 가진 것을 알게 된 날 네 이모를 제거할 결심을
되새기고 있었다는 것을 닐러준다면, 네가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하구
나.'
어느새 고인 은루가 그녀의 무릎 위에 떨어졌다. 그러나 카린돌은 눈을
훔치지 않았다. 대신 온몸의 비늘을 부딪히며 외쳤다.
"너를 위해서!"
카린돌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팽개쳤던 비늘을 찾아낸 카린돌은 그것
을 집어들었다. 그것을 어떻게 처치할까 고민하며 카린돌은 주위를 두리
번거렸다. 극히 감상적인 이유에서 초산 전에 떨어져나오게 되는 그 비
늘들을 보관해두는 여자들도 있다. 하지만 카린돌은 그런 감상적인 이유
에는 관심이 없었고 더군다나 위험을 부르게 될 것이 뻔한 물건을 보관
해둔다는 행위는 몰상식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카린돌은 입을
연 다음 그것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카린돌은 벽장을 열었다. 무릎을 꿇은 카린돌은 벽장 바닥에 손
바닥을 댄 채 살살 잡아당겼다. 그러자 벽장 바닥 부분이 앞쪽으로 미끄
러지며 그 아래쪽의 공간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있었다. 카린돌의 보물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카린돌은 비아스의 사이커도 이곳에 넣어두고 싶었지만 그러
기엔 공간이 충분치 않았다. 잡동사니를 뒤지던 카린돌은 잠시 후 도기
병 하나와 기묘한 물건을 꺼냈다.
카린돌이 꺼내든 물건은 한계선 북쪽에선 어디에 놓여 있더라도 눈길을
끌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한계선 남쪽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어쨌
든 '난방'이나 '요리', 혹은 '조명'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는, 혹은 그다
지 절실하지 않은 나가들의 사회에서는 점화통은 그렇게 흔한 물건은 아
니다. 하지만 희귀하기까지 한 물건도 아니다. 화로에 불을 붙일 때 같
은 제한적인 이유로 사용되기는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안에 약술사가
있다면 점화통은 더욱 구하기 쉬운 물건이 된다.
카린돌은 약간 겁을 내며 점화통의 부속장치인 철편을 부싯돌에 튕겨보
았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다고 생각했지만 카린돌은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섬광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린돌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두
번째로 철편을 튕겼다. 다시 섬광이 일어났고 이번에는 부시에 불이 붙
었다. 카린돌은 황급히 입김을 불어 불을 껐다.
점화통의 성능에 만족한 카린돌은 도자기 병을 들어올렸다. 병 주둥이
를 단단히 막고 있는 마개를 뽑아낸 카린돌은 그 냄새를 맡았다. 역겨운
기름 냄새에 카린돌은 속이 뒤집히는 기분을 느꼈다. 다시 마개를 막은
카린돌은 그 두 물건을 놔둔 채 다시 벽장 바닥을 끼워넣었다.
점화통과 기름병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카린돌은 침대 아래에서 사이커
를 꺼내었다. 먼저 놓았던 두 물건 옆에 사이커를 내려놓은 카린돌은 혐
오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너는 이미 한 번 마케로우의 피를 마셨지. 그 피가 마음에 들었기를
바래. 어쩌면 너는 한번 더 그 피를 마셔야할지도 모르니까."
카린돌은 그 옆의 두 물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고통스러운 깨달
음이 그녀를 엄습했다. 카린돌은 비아스가 지나치게 빨리 불을 끌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택이 전소될 것을 걱정했다. 어쨌든 나가
에겐 화재에 맞서 싸운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다.
문득 카린돌은 깨달았다. '저택이 전소되면 어때?' 그러자 카린돌은 침
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건물은 건물일 뿐이다. 전소되면 다시 지으면
그만이다. 카린돌은 드디어 미소를 지었다.
카린돌은 더없이 차분한 마음으로 기름병과 점화통을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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