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23화 (23/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6-3.                         관련자료:없음  [53450]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28 00:55  조회:10930

눈물을 마시는 새.

6. 여신의 신랑 - 3

새벽녘, 철혈암의 마당에서 가볍게 몸을  움직이던 티나한은 방에서 걸

어나오는 케이건을 보고는 공포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티나한은 케이건

이 분명히 방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케이건은 조용히 그 말이 맞다고 대

답한 다음 세수하러 걸어가버렸다.  티나한은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

다. '생각하지 말자. 운동이나 하자.' 결국 티나한은 비형이 술이 덜 깬

얼굴로 기어나와 항의할 때까지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넘었다. 쿵, 쿵,

쿵. 차라리 하마가 공중제비를 넘는 편이 훨씬 고요했을 것이다. 비형은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북 삼아 두드리고 있는 듯한 그 소음을 견딜 수

없었다. 티나한이 그 짓을 그만두자마자 비형은  마루에 엎어진 채 다시

잠들었다. 가장 늦게 일어난 륜은 마루로  나오다가 비형에 걸려 넘어졌

다.

산사의 음식다운 음식으로 아침 공양을 마친  일행 앞에서 티나한은 자

신이 대사원에 체류할 것임을 선언했다.

"일은 끝났지만, 아무래도 이 일이 레콘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만큼

사태의 추이를 봐야겠다. 케이건 너는?"

"남을 거요. 그 암살자를 잡아주기로 약속했으니."

티나한은 비형에게 거취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비형은 그 때까지도 마

루에 엎어진 채 가사 상태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정오가 지난 다음에

야 겨우 일어난 비형은 티나한과 케이건이 남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자신은 즈믄누리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운신이 비교적 자유로운

두 사람과 달리 비형은 바우 성주의 아랫사람이었다.

오레놀이 군불을 때어 방  안을 훈훈하게 만든 다음  비형은 륜의 몸에

걸려있던 도깨비불을 제거했다.  엄습하는 싸늘함에  비늘을 부딪혔지만

륜은 짐짓 허리를 펴며 말했다.

"아무래도 문밖까지 전송하지는 못하겠군요.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비

형. 편히 돌아가길 바랍니다."

"항상 좋은 꿈 꾸길 바래요, 륜.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그리고 비형은 일어났다. 하지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  전 비형은

몸을 돌려 륜을 바라보았다. 비형은 무릎을 구부려 륜의 앞에 앉은 다음

커다란 두 팔로 륜을 끌어안았다. 륜은 당황하여 말했다.

"비형?"

비형은 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은 사람이에요. 그렇죠?"

"비형, 도대체 무슨 말을…"

"그렇죠?"

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형이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

문이다. 대신 륜은 자신이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기를 바라며 비형을 마

주 안았다. 한 번 더 힘주어 륜을 포옹한  다음, 비형은 일어나 방을 나

갔다.

마당에는 나늬와 케이건,  티나한, 그리고 오레놀이  기다리고 있었다.

티나한은 불쑥 손을 내밀었고 비형은 두 손으로 그 손을 마주 쥐었다.

"사과하겠습니다, 티나한.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두억시니들의 피라미드를 빠져나온 이후로 비형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

지 않았고, 그 때문에 큰 실망도 느끼지  않았던 티나한은 가슴 한 구석

이 약간 켕기는 기분을 느꼈다. 티나한은 그 기분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

다가 그만 대답할 순간을 놓쳤다. 비형은  그의 손을 놓아주며 오레놀에

게 걸어갔다.

오레놀은 무거워 보이는 금편 주머니를 내밀었다.

"수고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성주님께도 안부  인사 전해주시길 바

랍니다."

비형은 그것을 받아 품 속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비형은 케이건을 바라

보았다. 케이건은 짤막하게 말했다.

"잘 가시오."

비형은 심호흡 하듯 숨을 크게 쉰 다음 낮게 말했다.

"케이건.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제게 당신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다면

죽이려 시도하라고 말했지요. 기억합니까?"

"기억하오."

오레놀은 평안히 오가는 대화의 험악한 내용에 놀랐다. 티나한은 두 사

람을 동시에 바라보며 부리를 꽉 다물었다. 비형은 차분하게 말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함께 여행하면서 저는 당신을  용납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 방법은 뭔지 고민해봤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당신을 절대

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실망하셨나요?"

"아니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아마도 납득하든 납득하지 않든 상관없을

것 같은데, 맞나요?"

"맞소."

비형은 빙긋 웃었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케이건. 세상에서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해도 되나요?"

오레놀은 소리 없이 웃었고 티나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이건은 비

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게 뭐요?"

"저는 당신을 죽이지 않겠어요. 저 대신 당신이 당신을 죽여줄 수 있겠

어요?"

"…확실히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군."

비형은 씩 웃었다. 그리고는 케이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나늬에

올라탔다. 케이건은 뒤로 슬쩍 물러났고 티나한과 오레놀도 당황하여 날

개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거리까지 뒷걸음질 쳤다. 비형은 그들을 향해 가

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늬는 마당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

다.

딱정벌레는 눈이 아프도록 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즈믄누리를 향해 날아

갔다.

마루나래의 줄무늬가 보호색 효과를 발휘하길 바라며  그 배 아래에 숨

어있던 사모는 딱정벌레가 완전히 지나간 것을 확인한 후 머리를 내밀었

다. 근처의 억새밭 속에서 두억시니들도  서서히 일어났다. 그들은 말없

이 딱정벌레가 작아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딱정벌레가 지평선 저편으

로 사라진 다음 사모는 고개를 돌렸다.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도깨비."

"갔다."

"그래. 도깨비가 떠난 것 같군.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

우를 대비해서 아무래도 계획을 바꿔야겠군."

"레콘."

"인간."

사모는 턱을 감싸쥔 채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사모는 내키지 않는 투

로 말했다.

"인간으로 하자. 아무래도 레콘은  물로 협박하면 도망쳐버릴  테니 뭘

물어볼 수는 없을 것 같아. 레콘을  쫓아내고나서 그 케이건에게 물어보

자. 도깨비만큼 입이 가볍지는 않겠지만."

"대답,"

"안하면?"

"그러면 승려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그  자들도 모르지는 않을 테니.

어쨌든, 너의 의심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해치지 않기로 한 약속

은 지켜야 해."

"약속."

"지킨다."

사모는 두억시니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곤  다시 마루나래에 뛰어올

랐다. 마루나래가 파름산을 향해 달리자 두억시니들도  그 뒤를 따라 성

큼성큼 달렸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달리던 무리는, 그러나 파름산이 한 눈에 들

어오는 장소에 도달하자 난감함을 느끼며 멈춰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사

모 페이는 별 이유 없이 하인샤  대사원이 심장탑처럼 높지 않을까 하고

추측했다. 그리고 두억시니는 건물들이 모여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지 않

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하인샤  대사원은 위로 솟지도  않았고 삼각뿔을

이루고 있지도 않았다. 대신 파름산의 중턱 곳곳에 산재하고 있었다. 터

무니없이 넓은 사원을 목격한  사모와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는 난처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언덕 뒤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사모는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는 두  배로 머리가 아프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말했다.

"어디에 있을지 도무지 짐작이 안 되는군.  저건 거의 도시처럼 보이는

데."

"돌격."

"하자."

사모는 반사적으로 반대하려 했지만 곧 그 말을 삼켰다. 두억시니가 내

놓은 의견은 단순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조금 고민하던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승려들은 그렇게 위험한 상대가 아닐 거야. 그렇다면 레콘과 케

이건뿐일 테니 우리 인원이 훨씬 많아. 하지만 그 전에 약속 하나 더 해

줘야겠어. 내 지휘를 따라줘."

"지휘."

"따른다."

"좋아.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너들 중 특별히 밤눈이 안 좋은 네가

있나?"

비형이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륜은 자신이  방 안에 갇힌 꼴이 되었음

을 알게 되었다. 파름산의 기온은 도깨비불이  없이는 방 밖으로 나가기

힘들 정도였다. 오레놀은 그런  륜을 동정하여 책들을  가져왔지만 그가

가져온 책은 모두 나가의 눈으로 읽기 힘들 글씨로 이루어져 있었다. 케

이건은 말없이 웃옷을 벗은 다음 방바닥에 바라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조용히 책을 읽었다. 륜은 반대편 벽에 등을 기댄 채

케이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스화리탈은 륜의 무릎에 앉

은 채 책 읽는 소리를 이해하는 척했다.

독서에 별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깃털로 뒤덮여 있다는 특징

때문에 티나한은 도저히 군불을  때고 있는 방 안에  앉아 있지 못했다.

오레놀이 열성적으로 불을 지폈기에 방안의  온도는 키보렌에 돌아온 것

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케이건이 책을 읽는 것을 끝내면 하늘치를 끌

어내리는 일에 대해 물어볼 작정을 하고  있던 티나한은 결국 부리를 내

두르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오레놀에게 간 티나한

은 도대체 며칠이나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다. 오레놀은  어깨를 으쓱였

다.

"저쪽에서도 당신들의 도착 여부를  알 수 없으니 충분히  여유를 두고

연락해올 겁니다. 언제 연락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티나한은 오레놀이 부러뜨리려 애쓰는 땔감을  뺏아들고는 그걸 분질러

아궁이에 밀어넣었다.

"꼭 저쪽에서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그냥 우리끼리 발자

국 없는 여신을 불러도 될 것 같은데. 불러야 할 장소도 여기고 부를 사

람도 여기 있잖아. 그리고 여신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라 대처방안을 강

구할 사람도 우리들인 것 같고."

오레놀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아궁이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여신은 저들의 여신입니다."

"음. 그래서?"

"발자국 없는 여신께서 잠시 이곳에 임하게 되시면 잠시 동안이지만 여

신은 다른 나가들에게 신경을 쓸 수 없겠지요."

"신경을 쓸 수 없다?"

"예. 비록 그녀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신랑인  륜이 여기에 있지만, 이

곳은 그녀의 집이 아닙니다.  이 사원은 어디에도  없는 신의 집이지요.

여신께서는 신랑의 부름을 받고 이 사원에 손님으로서 찾아오게 되는 것

이고 그래서 잠깐 동안이지만 나가들은 여신의 관심권 밖에 놓이게 됩니

다."

"어어? 그럼 나가들이 신을 잃는 거야?"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륜  또한 나가니까, 여신이  륜과 대화하고

있다면 그건 나가와 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러니  그런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수호자들이 자신의 신부가 사라졌다

는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점이죠."

"오-호?"

"우리는 잘 알 수 없고 실감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수호자들과 발자국

없는 여신의 관계는 밀접합니다. 부부  관계로 표현될 정도니까요. 발자

국 없는 여신이 잠시 이곳에 찾아드시면 수호자들은 이상한 낌새를 느낄

지도 모릅니다. 자칫하면 저쪽에 있는 우리  동지들에게 위험한 일이 발

생할지도 모르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군. 그래서 저쪽에서 동태를  살펴 신호를 줄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신랑 신부야?"

"예?"

"왜 신랑 신부냐고. 남편과 아내가 아니고."

"아, 나가들의 수호자들은 신명을 받았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를, 그러

니까 평생을 기나긴 결혼식이라고 여기는  듯합니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결혼식이 끝났을 때, 여신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남편

과 아내가 되는 거죠."

"그럴 듯하군. 함께 살아야 부부란 말이지."

티나한의 담백한 해석에 오레놀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티나한은 부엌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런데 너희 대선사는 어디에 있는 거지?"

오레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대선사님께서는 석굴에서 참선하시는  중입니다. 그  분은 두억시니를

살육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 때문에 몹시 상심하셨지요."

"신을 잃어버린 것들이야. 그렇게까지  우울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

데."

오레놀은 큰 용기를 끌어내어 말했다.

"티나한. 만약 나가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당신들도  신을 잃게 될 겁

니다. 그 때 누군가가 신을 잃어버린  자들이니 상관없다 말하며 당신들

을 학살한다면 뭐라 하시겠습니까?"

티나한은 부리를 꽉 닫았다. 티나한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에 대해 죄책

감을 느낀 오레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티나한. 바쁘지 않으시면 저와 함께 좀 가주시겠습니까?"

"어딜 가는데?"

"산 뒤편에 밀렵꾼들을 만나러 갑니다. 륜 페이가 먹을 산 동물이 필요

해서요. 아무래도 흉악한 자들인지라  당신이 함께 가준다면  든든할 것

같군요."

티나한은 오레놀을 따라 일어났다. 두 사람은 케이건에게 다녀오겠노라

말한 다음 산 뒤편으로 떠났다.

오후 내내 케이건은 가끔 불을 살피는 시간을 제외하면 한결 같은 목소

리로 책을 읽었다. 온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문과 문을 모두 닫아둔

방안은 무덥고 답답했다. 케이건의  옷은 땀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었고

그 머릿결은 덩이져 얼굴에 달라붙었다.보다 못한 륜은 책 읽는 것은 그

만해도 된다고 권했지만 케이건은 거절했다.

"사모 페이는 결국 네게 올 거다. 륜."

오후 내내 케이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던 륜은 그 감정이 싹 달

아나는 것을 느꼈다. 케이건이 책을 읽으며  앉아있는 것은 륜이 지루해

할까봐가 아니라 사모  페이를 기다리기 위해서임이  확실해졌기 때문이

다. 그러나 륜은 곧 그런 마음을 먹은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

모 페이를 저지하지 않으면  목을 잃게 되는 것은  륜이다. 륜은 무릎에

앉아있는 아스화리탈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렇다면 책 대신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당신 땀이 그 책을

더럽히는 것 같은데요."

케이건은 책을 내려놓았다.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나."

"요스비에 대한 이야기라면?"

"거절이다."

륜은 상심하지 않았다. 거절할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수호자들이 벌이고 있다는 그 살신계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게 가능한 일일까요?"

"그건 네가 여신에게 물어봐야  할 문제이지 않느냐.  여신이 대답해줄

거다."

"저는 확실히 신명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여신을 부른다느니 하는 일은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그 분은 너의 신부다."

륜은 신부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

지만 나가의 문화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문득 륜은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당신에겐 아내가 없나요?"

"아내?"

"예. 당신이 유일하게 헌신하고 당신에게만  유일하게 헌신하는 여인이

요. 그런 거 맞죠?"

케이건은 묵묵히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그  어린 용은 마치 사람이

나 된 것처럼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륜의  무릎 위에 드러누워 있었고 그

꼬리는 치렁하게 늘어져 있었다. 용이 조금 커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케

이건은 무심히 말했다.

"있었다."

"과거형으로 말씀하시는군요. 헤어지셨나요?"

"죽었어."

륜은 놀라서 케이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벌써?'라고 물으려 했던 륜

은 인간의 경우 사고나 질병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아, 이런. 죄송해요. 무슨 사고였나 보군요?"

"나가가 죽였어."

륜은 비늘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경련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케

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여전히 그의 무릎만  볼뿐 아무런 표정 변

화가 없었다. 한참 후에야 륜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부인께서 한계선 이남으로 내려오셨던가요?"

"응."

"어떻게 사과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케이건."

케이건은 눈을 들어 륜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입을 열었을 때 케이건의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았다.

"몰라도 화내지 않겠어."

"예?"

"사과할 방법을 몰라도 화내지  않겠다고 말했어. 남편이  보는 앞에서

그 부인을 뜯어먹은 것에 대해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

겠군."

륜의 비늘이 다시 세차게 일어나며  벽과 바닥을 때렸다. 아스화리탈이

깜짝 놀라 깨어나서는 어리둥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륜은 떨리는

손을 서로 맞잡았다. 그의 뇌리에 화리트의 니름이 떠올랐다.

'추적하고, 죽이지. 그리고 먹힐 수도 있어.'

나가들이 비에나가를 그렇게 처리한다면 인간  여인을 못잡아먹을 이유

는 없다. 하지만 륜은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정말 그렇게 했습니까?"

"서른 명이었어. 서른  명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뜯어먹었지. 남김없이

먹어치웠더군. 가까스로 그녀들을 물리치고나서 아내의 유해를 돌려받았

지."

공포에 떨면서도 륜은 케이건의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가

가 먹어버린 아내를 어떻게 돌려받았다는 것일까?  그러나 륜은 곧 그것

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륜은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한 채 케이건

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른 명의 배를  모조리 갈라 아내를 꺼낸  다음 그걸 짜맞추었

다."

륜은 신음을 흘리며 기절했다.

아스화리탈은 걱정스러운 듯 쓰러진 륜의  얼굴 앞을 오락가락했다. 날

개를 퍼득거리기도 하고 조그마한 머리로 륜의 어깨를 툭툭 치기도 하던

아스화리탈은 등 뒤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는 몸을 돌렸다.

케이건이 일어나 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손에는 바라기가 움켜쥐어져 있었다.

아스화리탈은 날개를 접으며 케이건을 올려다보았다. 용의 배가 부풀어

오르며 그 꼬리는 세차게 진동했다. 여차하면 불을 뿜을 기세였다. 케이

건은 그런 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드라카. 바지로이 범그루말 어이리. 님자를 베퍼나게 한 이언만…"

아스화리탈은 케이건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진동하던  용의 꼬리가

위로 치솟아 둥글게 말렸다. 당장이라도  얼굴 앞으로 내려올 기세였다.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위크놋다. 드라카."

케이건은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서쪽 하늘이 선혈과도 같은  붉은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황금의 땅

위로 사물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마루에 걸터앉은 케이건은 바람

이 몸을 식히도록 내버려둔 채 눈을 감았다.

케이건은 모든 것을 기억했다. 나무에 묶인 채 울부짖던 그녀, 제발 오

지 말라고, 도망치라고 외치던 목소리, 격노처럼 나부끼던 잎사귀들, 미

친 듯이 달려들던 나가 여인들. 갑자기  끊어진 비명, 초록의 대지 위로

흘러내리던 빨간 피, 그리고, 끔찍했던 격투.  쓰러진 나가 여인들의 가

슴을 가르고 갈빗대를 들어내고  그 위장을 찢을  때의 소름끼치는 느낌

들. 케이건은 모조리 기억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케이건은 두 손으로 얼굴

을 감싸쥐었다.

케이건은 그녀가 좋아하던 꽃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

은 케이건에게 무시무시한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한 시간 후, 사모와 두억시니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집채만한 대호에 탄 채 꿈에서도 보기  어려울 괴물들을 인솔하며 대사

원의 경내를 치닫는 사모의 모습은 승려들로  하여금 눈을 뜬 채 악몽을

꾸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무도한 해를 끼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사모는 마루나래를 울부짖게 하여 승려들을

물러나게 하는 것에 만족했다. 공격이 시작된 후 10여분 동안 다친 사람

은 하나도 없었고, 따라서 그것은  공격이라 하기도 어려웠다.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는 자를 찾고  있던 사모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자는 특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자일 테고 그런 자에겐 쓸

만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사모는 계획을 수정해야 할 필

요를 느꼈다.

사모는 한 승려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인간을 통채로 삼킬 듯한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다가오는 마루나래 앞에  승려는 기절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승려가 소망을 달성하기 전, 천상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

닌가 싶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레콘, 나가로 이루어진 무리 어디에 있나."

승려는 넋이 빠진 얼굴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재차 질문했고,

거기에 덧붙여 두억시니들이 무서운 기세로  다가섰다. 승려는 다급하게

말했다.

"철혈암에 있습니다."

"철혈암은 어디에 있지?"

승려는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사모는 그 쪽을 바라보았지만 도대체 길

을 알아볼 수 없는 숲과 계곡이 보였을 뿐이었다. 사모는 언짢은 표정으

로 말했다.

"너무 놀라지마."

승려가 되물을 사이도 없었다. 마루나래는 승려를 곧장 물어올렸다. 승

려는 죽는 소리를 외쳐대었지만 사모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했다.

"길을 안내해. 다치게 하진 않을 테니."

승려는 한참 더 비명을  지르다가 겨우 사모의 말을  이해했다. 승려의

안내를 받아가며 사모와 두억시니들은 철혈암을 향해 달려올라갔다.

철혈암에 도달한 사모는 마당 한가운데 서있는 인간을 발견하고는 걸음

을 멈췄다. 마루나래는 승려를 놓아주었고,  그러자 승려는 부리나케 도

망쳤다.

케이건이었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두 손으로 쥐고 있었고 그 칼끝은 땅

에 닿아 있었다. 두억시니들은 케이건을  보자마자 사납게 돌변했다. 다

리가 넷 달린 두억시니는 그 발 모두로 땅을  긁었고 입이 다섯 개나 달

린 두억시니는 그 입 전부로 소름끼치는 포효를 토해내었다. 우두머리인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의 두 팔에서는 예의 뿔이 한껏 튀어나왔다.

"하늘치 공격했다!"

"우리 공격했다!"

사모는 길을 안내하던 승려를 놓아준 다음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를 향

해 외쳤다.

"내 지휘를 따르겠다고 했지?"

두 개의 머리 중 하나가 사모를 향했다.  나머지 머리는 여전히 케이건

을 쏘아보고 있었다. 사모는 한 번 더 외쳤다.

"내 지휘를 따라! 두억시니!"

뿔이 팔 속으로 사라졌다.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는 두 개의 얼굴로 억

울한 표정과 분노한 표정을 동시에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두억

시니를 향해 노성을 질렀다. 두억시니들은  겨우 진정했다. 그 동안에도

케이건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사모를  응시했다. 사모는 모든 두억시니

가 진정한 것을 확인한 다음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다시 만났군. 케이건."

"그렇군. 페이."

사모는 분노를 참지는 않았다. "하늘치를 다루는 솜씨가 고명하더군."

"두억시니를 구출한 것은 용감했다."

"이 자들에게 사과하겠어?"

"사과할 거면 하지도 않았어."

"도대체 왜 그랬어? 무엇 때문에 그 무수한 생명을 죽이는 선택밖에 없

었던 거야?"

"먼저 오해한 것은 그 무수한 생명 쪽이다.  페이. 그들이 우리에게 살

신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쫓아왔다."

사모는 가까스로 그 질문을 상기했다.

"너희들은 정말 그 혐의와는 관련이 없는 건가?"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사모는 긴장하며  비늘을 곤두세웠

다. 케이건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곳에 와서 알게 되었는데, 관련이 없지는 않다."

"없지는 않다고?"

"그래."

"그렇다면 정말 신을 죽일 작정인가?"

"그 반대다."

"반대라니?"

"네 동생, 륜 페이는 살신을 저지르려는 자를 막기 위해 이곳에 왔다."

"뭐라고?"

"살신을 저지한다고 했어. 저 두억시니는 '신을 죽이는 것을 막아야 한

다'라는 기억에서 뒷부분은 읽지  못하고 '신을 죽인다'는  부분만 읽은

모양이야. 그래서 오해했지."

"도대체 무슨 소리냐! 륜은 너희들이 나가의  적과 싸우려 한다고 닐렀

어! 그 적이 심장탑에 있다느니 하는 가당찮은 니름이었지만, 어쨌든 지

금 네가 하는 말과는 완전히 다른…?"

사모는 충격 속에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에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케이건은 그런 사모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사모는 입밖

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을 억지로 꺼냈다.

"그렇다면, 심장탑의 수호자들이 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이냐?"

"그래."

"도대체 왜!"

"그걸 말해줘도 되는지 모르겠군."

"모르다니?"

"나는 네 동생을 이곳까지 데려오는 임무를 맡은 자일뿐이다."

사모는 답답함을 느꼈다. 문득 사모는  케이건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분노와 미소가 동시에 떠올랐다.

"케이건. 너 지금 시간을 끌고 있군. 내가 질문을 꺼내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만 감질날 정도로 조금씩 하면서 말이야."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하지만 내 말은 사실이다."

"그만둬! 더 이상 그런 장난에는 속지 않겠다. 심장탑의 수호자들이 왜

신을 죽인단 말인가! 그건 절대로 말이 되지 않는…"

"그렇잖다면 네 동생이 여신을 만나기 위해서 심장탑이 아닌 다른 사원

을 찾아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일 거라 생각하나."

"여신을 만난다고?"

"정리해주지. 페이. 심장탑의 수호자들이 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 그것

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떻게 신을  죽일 작정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신명을 가진  자는 신에게 그것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심장탑에서는 신을 부를  수 없다. 수호자들이

있으니까. 따라서 다른 사원이어야 한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사원

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즈믄누리의 마지막 방은 성주와 어르신만

이 찾아갈 수 있다. 따라서 남는 것은 이곳뿐이다. 그래서, 신명을 가진

수련자 화리트가 이곳으로 올 계획이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네 동

생 륜 페이가 오게 된 것이다. 네 동생 륜 페이는 비록 수련자가 아니지

만 신명을 가지고 있으니 자격은 충분한  셈이다. 페이. 이 이야기가 급

히 지어낸 거라 의심할 수 있는지 묻고 싶군."

그렇게 의심하기 어려웠다. 사모는 경악을  감추기 위해 애썼지만 그녀

의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비늘들이 부딪히는 소리에 두억시니

들이 당황할 지경이었다.

케이건이 들려준 이야기는 사모가 지금껏  단편적으로 들었던 이야기들

에 모두 부합하고 있었다. 카루는  '륜이 하려 하는 그  일은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고 닐렀다. 륜은 '인간들과  힘을 합쳐 나가의 적

을 물리쳐야' 한다고 닐렀다. 그리고  륜은 '나가의 적이 수호자'라고도

닐렀다. 두억시니 또한 '신을 죽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호자들이… 수호자들이 여신을 죽인단 말이냐? 그들의 신부를? 그래

서 모든 나가를 두억시니 꼴로 만든다는 말이냐?"

사모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비록  륜이 수호자들 가운데 '나가들을

증오하고 불만과 증오로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

라고 말했지만 사모는 종족적  자살을 선택할 만큼  분노에 찬 수호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잘못 겨냥된  것이었다.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신은 한 분이 아니다. 페이."

"뭐라고? 발자국 없는 여신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느 신을?"

"아무도 그 사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여신. 그래서 제를 올리는 이

조차 하나 없는 여신."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

사모의 외침이 아니었다. 케이건이 지금껏  시간을 끌며 기다려온 티나

한이 마침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리며 내지른 고함이었다.

하늘에서 뛰어내린 것이 아닌가 싶은 모습으로 나타난 티나한은 내려서

자마자 철창을 한 바퀴 돌렸다. 사모는 얼굴을 덮치는 바람에 질리는 기

분을 느꼈다. 철창을 똑바로 쥔 티나한은 케이건에게 짧게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많이 기다렸지?"

케이건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두억시니들은 레콘의 등장에 불편한

심기를 느꼈고 마루나래 또한 낮게 으르릉거렸다.

하지만 사모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발자국 없는 여신이 아니라 모든 이

보다 낮은 여신이 목표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침착함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 레콘에게 사과하며 사모는 말했다.

"그렇다면 수호자들이 레콘들을 두억시니처럼 만들려 한다는 말이군."

티나한이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그렇다! 감히 그런 흉계를 꾸미다니, 용서할 수 없는 놈들이야!"

되찾은 침착 때문에 사모는 그 이야기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

다.

"이상하군. 레콘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왜 수호자들이

레콘들을 그런 비참한 지경에 빠트린다는 거지?"

케이건이 차분하게 말했다.

"레콘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확실히 가학적 취미의 만족 외엔 이득

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레콘을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건가?"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게 된 케이건은 요점만을 빠르게 말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대로라면  세 명의

신은 한 명의 신을 상대한다. 현재 발자국 없는 여신을 다른 세 신이 상

대하기에 이 지상에는 한계선이 설정되어 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한계선은 나가가 활동하기 어려울만큼 기온

이 낮아지는 지점일 뿐이야."

"기온은 신의 섭리가 아닐 거라 믿나. 페이?"

"그렇다면?"

"너희 수호자들은 발자국 없는 여신을 상대하던 세  신 중 하나가 없어

지면 발자국 없는 여신의 세력이 강화되어  세상이 더 더워질 거라 믿고

있다."

사모는 크게 놀라  케이건과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더워진다

고?' 사모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당장 깨달을 수 있었다. 한계선의 북

진, 키보렌의 확장, 대확장 전쟁의 재개.

"발자국 없는 여신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과 기온의 상승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거지, 케이건?"

"나는 모른다. 하지만  너희 수호자들은 연관성이  있다고 믿는  것 같

다."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군."

사모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긍정처럼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알겠어. 어떤 수호자들이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제거함으로써 세상

의 기온을 바꾸려 하고  있는 것이군. 하지만 그것은  확실한 일이 아니

야. 레콘들만이 괜히 멸망해버리는 것일 수도 있어. 그래서 또다른 나가

들이 그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급히  여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수련자를

이곳에 보내어 여신과 대화하게 하려는  것이었군." 사모는 카루를 떠올

렸다. "그것이 계획이었군."

케이건은 바라기를 옆으로 약간 치우며 말했다.

"그렇다. 사모. 그렇다면 네 동생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달았을

거라 믿는다. 그런데도 네 동생을 죽일 텐가?"

사모 대신 티나한이 열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 없지! 아무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사모는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후 사모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륜은 어디에 있지?"

"저 방 안에."

사모는 고개를 들어 케이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그 눈빛을

읽으려 했지만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케이건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

모는 마루나래에게 개념을 보내었다.

마루나래가 엎드렸다. 사모는 그 등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두억시

니들은 당황하여 사모를 바라보았고 그 중  몇몇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

들을 꽥꽥거렸다. 하지만 사모는 침착하게 말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케이건."

철혈암으로 올라오는 길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승려

들이 몰려오고 있는 듯했다. 케이건은 횃불이 움직이는 것도 볼 수 있었

다. 사모가 쉬크톨을 옆으로 뿌렸다.

"두억시니."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의 머리 하나가 사모를 향했다. 사모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 인간과 레콘을 붙잡아!"

케이건의 눈 주위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헐레벌떡 달려올라오던 승려들은  철혈암에서 터져나온  괴성에 질겁했

다. 울먹거리며 도무지 발을 떼지 못하는  어린 행자들을 다그치며 수좌

들은 모범을 보이듯 손에 든 무기를  꼬나쥐었다. 하지만 수좌들의 손에

들린 것은 지게작대기나 홍두깨, 절구공이 등  무기라는 이름이 퍽 부담

스러운 것들 뿐이다. 그 중에는 죽비를  들고 나선 수좌도 있었으니, 아

마도 두억시니 퇴치와 참선수행 지도를 좀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

만 다른 수좌들도 그게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무기값을 못하는  무기들만이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군데군데

날이 새파란 장검이나 긴  창, 육중한 철퇴에 기세가  장중한 철편 같은

중한 병기들도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몰려와 대사원에서 기숙하며 공부

하던 유학생들이 자신의 무기를 움켜쥐고 뛰쳐나온 탓이다. 하지만 속세

에서는 꽤나 난폭하게 살았고 거친 경험담으로 순진한 승려들의 넋을 빼

는 것으로 산중생활의 낙을 찾던 이들 유학생들도 밤하늘을 찢는 괴성에

겁을 집어먹는 것은 승려들과 다름없었다.

그렇듯 철혈암에 이르는 오솔길 중간에서 무리가 머뭇거리고 있자 그들

가운데서 노승이 뛰쳐나왔다.

대사원의 주지 라샤린 선사였다. 겁을  집어먹고 손에 잡히는대로 들고

뛰쳐나온 다른 승려들에 비해 라샤린 선사는 손에 익은 석장(錫杖)을 들

고 나올 정도의 침착은 유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살이 붙지 못하는 체질

로 태어난 데다 검박한 산중의 식생활을  오랜 세월 계속해온 탓에 선사

의 몸은 보기 안쓰러울 만큼 깡말라 있었다. 키가 좀 작았다면 좋으련만

대나무인 양 길기만 하니 그 모습이 부실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죽비를

휘두를 때만큼은 그 눈빛을  본 승려들이 선사의  흉중에 살심이 가득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망측한 의심을 품을  정도로 용맹했다. 라샤린 선사는

바로 그런 용맹무쌍한 눈빛으로 석장을  높이 들어올리며 크게 갈(喝)했

다.

승려들과 유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라샤린 선사는 석장

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흰수염을 휘날리며  급경사의 길을 뛰어올랐

다. 큰스님이 그토록 달리는  모습을 보자 다른 무리도  황망히 그 뒤를

쫓았다.

철혈암 앞에 도달한 라샤린 선사는 눈앞의 광경에 신음을 토했다. 그곳

에는 형언키 어려운 무서운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모습의 괴수들 -  두억시니들이 케이건과 티나한을 몰

아붙이려 험악하게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런 형태의 적수에

게 익숙하다는 듯이 교묘한  움직임으로 포위를 계속  벗어나고 있었다.

팔이 달려있는 위치, 숫자, 혹은 팔이나  다리가 아닌 다른 공격 수단의

존재 등 두억시니의 공격은 인간이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

지만 케이건은 그들과 함께 자라왔다는  듯이 정확하고 절제된 움직임으

로 두억시니들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게다가 민첩하기만 한 것이 아니

라 실로 산 같은 기개마저 뿜어내고 있었다. 팔도, 어깨도, 허리도 아닌

온몸으로 뿌리는 쌍신검의 기세는 살을 뜯어내고  뼈를 부술 것 같았다.

비록 회피에 바빠서 자주 공격을 시도하진 못했지만.

반면 티나한의 모습은 공격하느라  너무 바빠서 회피에는  신경을 별로

못쓰고 있는 것 같았다. 바위를 깰 듯한 기세로 내뻗은 철창이 팔 넷 달

린 두억시니에게 붙잡히자 티나한은 벼슬을  곤두세웠다. 결코 당황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 놈, 더러운 손을 어디!" 다음 순간 티나한은 두억

시니를 매단 채 철창을 위로 치켜올렸다. 투석기와 다름이 없었다. 적어

도 반 톤 가까이 될 것 같은 두억시니는 끌려올라가는 기세에 그만 철창

을 놓치고 가공할 기세로 날아가버렸다.  철창을 치켜올리느라 티나한의

가슴이 비게 되자 악어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닌가 싶은 턱을 가진 두억

시니가 달려들어 그 가슴을 물어뜯으려 했다.  티나한은 지체 없이 창을

놓으며 두억시니의 머리를 팔꿈치로 내려찍었다. 강제로 입을 다물게 된

두억시니는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티나한은  우아하게 위에서 떨어지는

철창을 붙잡으며 발로는 두억시니를 걷어찼다.

케이건과 티나한이 그럭저럭 잘 싸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라샤린 선

사는 대선사의 안위를 걱정하며 건물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사는 다

시 경악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대호와 나가 여인이 마루를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대호는 몰려온 무리를 보며  으르릉거리며 경계했다. 나가는 대

호의 움직임에 사람들이 몰려온 것을 깨닫고는 라샤린 선사를 똑바로 바

라보았다. 라샤린 선사는 크게 외쳤다.

"모두들 하던 짓들을 멈추시오!"

나가는 아무 말 없이 선사를 응시했다. 문득  나가의 손이 대호의 머리

에 얹혀졌다. 그러자 대호는  훌쩍 뛰어 무리  앞으로 다가왔다. 승려와

유학생들은 기겁하며 물러났지만 라샤린 선사는 석장을 쥔 두 손을 앞으

로 내밀었다.

대호는 달려들지 않았다. 어깨의 털을  빳빳하게 곤두세운 채 사람들을

쏘아볼 뿐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라샤린 선사는 대호가 자신들을

억류시킬 작정임을 깨달았다. 선사는 다시 마루쪽을 보았고 나가가 방문

을 여는 것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문을 열자마자 나가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방 안에서 화염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마루에서 마당으로 뛰어내린 사모는  땅 위를 몇 바퀴  구른 다음 한쪽

무릎을 세웠다. 방 안에서 뛰쳐나온 용은 허공에  뜬 채 두 눈을 이글이

글 불태우며 사모를  내려다보았다. 뒤이어 륜이  방안에서 걸어나왔다.

륜은 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사모의  모습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스화리탈은 륜의 머리 위로 날아와 부드럽게 멈췄다.

[사모?]

사모는 쉬크톨을 눈 높이로 들어올린 채 닐렀다.

[륜. 사이커를 뽑아라.]

[저 두억시니들은 도대체… 케이건! 티나한!]

케이건은 스무 마리의 고양이를  상대로 움직이는 쥐처럼  날뛰고 있었

다. 다행히 숫자가 너무 많고 생김새가  주위의 동료들에게도 피해가 되

는 그 고양이들은 서로를 해치지 않기  위해 쩔쩔매고 있었고 그 덕분에

쥐는 가끔 날카로운 앞니로 고양이의 꼬리 쯤은 물어뜯을 수 있었다. 그

리고 티나한은 스무 마리의 고양이를 상대로  싸우는 덩치 큰 맹견과 같

은 형국이었다. 두 사람은  잘 싸우고 있었지만,  그러나 고양이는 너무

많았다.

륜은 사이커를 뽑아든 채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사모가 바람처럼 달려와 륜의 앞을  막아섰다. 륜은 놀라 뒷걸음질쳤고

아스화리탈은 그의 이마 앞쪽으로 날아들며  꼬리를 진동시켰다. 사모는

용의 모습에 비늘을 부딪혔다. 그러자 마루나래 또한 고개를 돌렸다. 마

루나래는 승려들을 향해 간담이  서늘해질 만한 포효를  내뿜은 다음 휙

몸을 날렸다. 그러자 륜과 사모 사이를 가로막은 존재는 둘로 늘어났다.

신화적인 장벽들에 가로막힌 채 사모는 차분하게 닐렀다.

[그 용을 치워. 륜.]

[이 용은 정신억압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마음대로 다룰 수 없습

니다.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해볼까.]

륜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사모는 아스화리탈을 향해 정신억압을 시도

했다.

다음 순간 사모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사모는 우수한 정신억압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스화리탈의 정신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려 한 순간 사모는 자신이 손바닥으로 홍수를 막으

려드는 것과 같은 시도를 하고 있음을  당장 깨달았다. 사모가 비틀거리

자 마루나래는 성난 기세로 아스화리탈을 향해 들리지 않는 포효를 내뿜

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려 하던 승려들과  격렬하게 싸우던 두억시니들

중 몇몇도 흠칫하며 대호를 쳐다보았지만  아스화리탈은 꿈쩍도 하지 않

았다. 사모는 겨우 균형과 위엄을 되찾으며 닐렀다.

[역시 안되는군.]

[저 두억시니들이 누님 말을 따른다면,  저들에게 물러나라고 말해주십

시오. 누님!]

사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쇼자인-테-쉬크톨이야. 륜.]

[누님!]

륜의 니름에 대답하는 대신 사모는 마루나래에게 개념을 투사하기 시작

했다. 마루나래는 일순 몸을 낮추었다.  다음 순간 마루나래는 아스화리

탈을 향해 도약했다. 륜은 기겁하며  얼굴을 가렸다. 아스화리탈이 그의

이마 앞쪽에 떠있었기에 마루나래는 그의 머리를 향해 뛰어오른 것과 마

찬가지였다.

아스화리탈은 하늘로 몸을 피했고  그러자 마루나래는 륜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뛰어넘어 그 등 뒤에 내려앉았다.

륜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쉬크톨이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륜은 간발의 차이로  쉬크톨을 튕겨내었다. 아스화리탈은  륜을 구하기

위해 날아들었지만 마루나래가 다시 뛰어오르며 용을 저지했다. 다시 몸

을 피한 용은 사태가 꽤 곤란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륜과 사모가

이미 얽혀 싸우고 있었기에 화염을 뿜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륜과 사모

사이에 조금이라도 거리가 생기면 여지없이 대호가 뛰어올랐다.

라샤린 선사가 격분하여 달려왔다. 몸으로라도  싸움을 말릴 기세였다.

하지만 마루나래는 싸움판에 끼여드는 자는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을 작

정이었다. 마루나래가 선사의  두개골을 박살내기 전,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뛰어든 승려들이 가까스로 선사의  팔다리를 끌어당겼다. 승려들에

게 의해 끌려나가면서도 선사는 발을 구르며 고함을 질렀다.

"그만두시오! 그만두라고!"

마루나래는 아스화리탈을 견제하기 위해 사모와  륜에게서 정도 이상으

로 떨어지지 않았다. 라샤린 선사와 승려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인 듯했다. 유학생들이  승려들의 주위를 둘러쌌지만  그들은 그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선사는 그들의 가운데 붙잡힌 채 싸움을 그

만두라고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오레놀이 허겁지겁 달려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티나한은 수상한 소리

를 듣자마자 한껏 달려왔기에 오레놀은 그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오레

놀은 승려들과 유학생들의 옆을 지나쳐 걸어가서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만두십시오, 암살자! 륜을 죽이면 안 됩니다! 륜을 죽이면…"

"그걸 알아!"

케이건의 외침에 오레놀이 시선을 돌렸다. 두억시니의, 정확히 어떤 부

위라고 딱히 지칭하기 힘든 부위를 피해  땅 위를 구르며 케이건은 타오

르는 눈길로 사모를 쏘아보았다.

"다 말했어! 그리고 그 때문에 륜을 죽이려 하고 있는 거다!"

오레놀은 기겁하여 사모에게 외쳤다.

"아, 안돼요! 세상이 더워진다는 것은 가설일 뿐입니다!"

몰려든 사람들은 오레놀의 기괴한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

고 오레놀은 그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제발 그만두세요! 륜을 죽여서 그들을  도울 생각입니까? 그게 나가에

게 이득이 될 거라고 믿는 겁니까?  하지만 그건 가설입니다! 그렇게 된

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요!"

두억시니들과 싸우던 티나한의 벼슬이 뻣뻣하게 곤두섰다. 지나치게 가

까이 다가온 두억시니의 이마를 호되게 쪼아준 다음 티나한은 고함을 내

질렀다.

"그렇다면 네년이 우리 레콘을 멸망시키는 짓거리를 도-우-려-고!"

티나한의 앞쪽에 있던 두억시니 세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티나한은

그들을 짓밟으며 뛰어올랐다. 그러나 철창을 휘둘러 사모의 머리를 깨버

리려는 그 무서운 일격은  공중에서 저지당했다. 무서운  힘으로 밀쳐진

철창을 따라 티나한의 몸이 한 바퀴  돌았다. 티나한은 가까스로 쓰러지

지 않은 채 공격이 다가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티나한은 벼슬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너, 쌍대가리. 내 창을 쳐? 앞으로 베개 하나만 쓰게 해주마!"

티나한은 꽤 집중력이 높은 성격이었다. 사모에 대한 분노를 잠시 잊은

채 티나한은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매섭게 날아드는 쉬크톨을 가까스로 피하며, 그리고 간혹 머리 위로 날

아 다니는 대호에 움찔하며 륜은 닐렀다.  격렬한 움직임 중에도 호흡에

무리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나가의 특권이었다. 물론 주의가 산만

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누님! 안 됩니다. 나가는 이미 세상의 반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나머지 반은 가지지 못했지.]

[그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저를 죽이려는 겁니까?]

[쇼자인-테-쉬크톨이야. 륜. 너를  죽이면 나가가 세상의  나머지 반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뜻밖의 소득이고.]

륜은 이 니름을 믿을 수 없었다. 사모는 쉬크톨을 자신만만하게 휘두르

며 닐렀다.

[네가 죽으면 이 자들은 수호자들의 살신을  저지할 수 없겠지. 그러면

기온이 올라가고, 끝내 차지하지 못했던 세계의  반이 나가의 수중에 떨

어지게 된다는 것이지. 바람직한 일이야.]

[사모!]

[이 북쪽 땅에서 내가 발견한 덕목은 하나도 없어. 여기엔 광기와 증오

와 살육밖에 없어. 너는 이런 땅을  정말 좋아하나? 이런 땅에서 살기를

원하나? 내 눈엔 이미 네 몸이 식어가는 것이 보이는군.]

사모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더운 방 안에서 데워졌던  륜의 몸은 방 밖

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케이건  또한 그 사실을

짐작했기에 두억시니의 공격을 막아내며 힘겹게 외쳤다.

"아스화리탈!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 륜 근처에 대고 불을 뿜어!"

그러나 아스화리탈은 케이건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스화리탈은 어

떻게든 사모를 향해 불을 뿜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마루나래는 그

런 아스화리탈을 철저히 견제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어떻게든 몸을 빼낼

기회를 만들어보려 애썼지만 그 자신의 몸이 절단되지 않도록 하는 것만

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오레놀 대덕은 바로 그것을 깨달았다.

"두억시니들을 물리칩시다!"

오레놀은 옆의 승려가 쥐고 있던  부젓가락을 뺏어들었다. 형편없는 무

기지만, 어차피 천하 없는 명검이 쥐어진다 해도 소용없기는 마찬가지기

에 오레놀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레놀은 라샤린 선사를 향해 외쳤다.

"주지 스님!"

"그렇다! 모두 저 분들을 구출하라!"

승려들이 함성을 지르며 두억시니를 향해 달려들었다면 참으로 가슴 벅

찬 장면이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주저주저하며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라샤린 선사는 그런 미적지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

지 않는다는 듯 석장을 높이 들고 달려갔다. 그리곤 다른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두억시니의 어깨를 호되게 때렸다.

"이 놈! 감히 사원에서 이런 행패더냐!"

두억시니는 어이 없다는 듯이 선사를 바라보다가 성난 기세로 달려들었

다. 그러나 오레놀이 재치있게 두억시니의 다리를 걸었고 덕분에 두억시

니는 땅에 호되게 얼굴을  부딪히며 쓰러졌다. 오레놀은  괴성을 지르며

쓰러진 두억시니의 등을 부젓가락으로 때렸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덩

달아 두억시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공격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특히 유학생들은 사원에서 지내느라 어쩔 수 없이 그들 속에 갈무리해두

어야 했던 폭력성이 다시 눈뜨는 것을 느꼈다. 이 위대한 대가람에서 학

문과 정신을 수양하기를 바랬던 그들의  부모나 후견인들이 보았다면 개

탄을 금할 수 없었겠지만 유학생들은  용맹하게 두억시니들을 향해 달려

들었다.

덕분에 케이건은 가까스로 몸을 빼낼 기회를 얻었다. 그는 주저없이 티

나한과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고 그러자 그의  앞이 탁 트였다. 케이건

은 사모를 향해 쇄도했다. 륜과 사모의  격투를 수호하고 있던 마루나래

는 호승심 가득한 포효를 내지르며 케이건을 응시했다. 그러나 마루나래

는 깜짝 놀랄 만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케이건은 달려들며 왼손으로 바라기의 검신 하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쥔 바라기를 오른쪽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마루나래가 케이

건의 의도를 깨달은 순간, 케이건은 대호를 향해 있는 힘껏 바라기를 집

어던졌다.

"으르릉!" 마루나래는 낮게 날아오는 바라기를 고개를 조금 틀며 확 물

었다. 가소롭기 짝이 없는 공격이라 생각하며 마루나래는 케이건을 바라

보았다. 그런데 케이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마루나래가 고

개를 돌릴 때 갑자기 무엇인가가 그의  머리통을 꽝 소리 나도록 짓밟았

다. 마루나래가 머리를 짓밟힌  것에 대해 격분했을 때  두 번째 충격이

등을 강타했다.

"맙소사!"

오레놀은 케이건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던지자마자

높이 뛰어올라 대호의 머리를  짓밟았다. 그것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바라기를 낮게 던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케이건은 대호의 등 위를 달

렸다.  대호의 엉덩이에서 마지막으로 높이 뛰어오른 케이건은 온몸으로

사모에게 떨어졌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사모는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케이건은 사모의 옆

을 지나쳐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쳤다. 관성을 제어하지  못한 케이건은

그대로 몇 바퀴를 굴러간 다음 간신히 한쪽 무릎을 세우며 멈춰섰다. 그

리고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케이건의 오른손에는 흑사자 모피가 출렁이고 있었다.

사모는 엄습하는 냉기에 비늘을 곤두세웠다.

대호는 격분하여 바라기를 내뱉었다. "우루루룽!"  대호는 그대로 케이

건에게 달려들었다. 케이건은 흑사자 모피를 두  손으로 움켜쥐어 쫙 벌

렸다. "덤벼!" 케이건의 팔이 부풀어 소매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마루나

래와 충돌하려는 순간 케이건은 위로 훌쩍 뛰어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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