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22화 (22/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6-2.                         관련자료:없음  [53418]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27 00:38  조회:10420

눈물을 마시는 새.

6. 여신의 신랑 - 2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하인샤 대사원의 거룩한 승려들은 신과 우주

와 모든 종류의 '본질'이라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관심이 많았지만 무

기에 대해서는 도통 아는 것이 없었다.  벽월암에 보관된 이주무 선사의

무구들을 본 티나한은 처음에는 부리를 부딪히다가, 차츰 얼굴을 일그러

뜨렸고, 마침내 온몸을 부풀린 채 유품 보관을 책임지고 있는 페라 대선

(大選)과 그의 조수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들 승려들이 고승의 유품을 함부로 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극한 정성으로 보관해왔으나, 다만 무지에서  비롯된 정성이 무기에겐

고문이 되었을 따름이다. 곰팡이를 제거하기 위해 열심히 물걸레질을 했

노라고 변명하는 승려들 앞에서 티나한은 말도 꺼내기 싫어졌다.

"쇠칼날에는 물을 대는 게 아니다. 건포로 닦고 동백기름을 발라라. 젠

장."

페라 대선과 그의 조수들은 또 하나의 지식을 얻었노라며 희희낙낙했지

만 티나한은 수염볏을 비틀며 케이건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케이건. 이건 무기가 아니야. 이걸  무기라고 부르려면 지나치게 많은

극기가 요구된다구."

케이건은 별말없이 화살을 살펴보고 있었다.  전통 또한 승려들이 가죽

이 벗겨질 정도로 닦아대어 그 원래  형상을 짐작키 어려운 장엄한 몰골

로 변해 있는지라 케이건은 조심스럽게 화살을  뽑아야 했다. 쓸만한 화

살들을 추려낸 케이건은 활을 집어들며 말했다.

"이걸로 됐소. 이걸 좀 쓰겠소. 페라 대선."

페라 대선은 지금부터 당신을 겁탈하겠다는 선언을  들은 것 같은 표정

을 지었다.

"그건 사원의 보물입니다!"

케이건은 말없이 오레놀을  바라보았다. 오레놀은 페라  대선을 설득했

다.

"페라 대선. 미안하지만 지금  이 분께서는 급히 활이  필요하신 것 같

군. 이 사원 전체를 뒤져봐도 활이라곤 이것 뿐이잖아. 어쩔 수 없네."

"활이 필요하다면 유학생들이…"

"활을 가지고 있는 유학생은 없네."

"그렇다면 산 뒤편의 저 흉악한 밀렵꾼들에게 가면…"

"밀렵꾼들은 활을 쓰지 않아. 활은 밀렵에  쓰기엔 너무 고급스러운 무

기이고 익히기도 어려워. 그 자들은 활재주  익힐 시간이 있으면 덫이라

도 하나 더 놓으려 할 걸."

무심히 설명하던 오레놀 대덕은 문득 페라  대선과 행자들이 묘한 표정

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제야 대덕은 자신이 밀렵꾼들에

대한 박식함을 지나치게 많이 드러내었음을 깨달았다. 대덕은 얼굴을 딱

딱하게 굳혔다.

"이미 말했듯이 지금 사태가 여간 심각하지  않네. 저 무기들로 사원을

지키셨던 이주무 선사께서는 같은 목적으로  저 무구들이 사용되는 것에

반대하시지 않으실 걸세. 그리고 이것은 대선사께서 전부 허락하신 일일

세."

결국 케이건은 이주무 선사의 활과 화살, 깍지를 들고 나올 수 있었다.

좀 지나치게 손상된 전통 대신 케이건은 허리춤에 화살들을 꽂아넣었다.

티나한은 '새총만도 못한 활 가지고 유난을 떤다'는 의미로 부리를 부딪

히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걸로 뭘 어쩔 건데?"

케이건은 비형을 쳐다보았다.

"비형. 당신이 나를 좀 도와줘야겠소. 급히 파름 평원으로 날아가야 하

오."

비형은 나늬에게 손짓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나늬에 올라타는 대신 비

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비형. 분명히 경고해두어야겠소. 당신은 지독한 모습을 보게 될 거요.

내가 무슨 일을 하러 가는 건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시오. 그리고 당

신은 단순히 나를 그곳까지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오. 당신

은 그 일에 일조하게 될 거요."

비형은 사색이 되었다.

"제, 제게 안 그러신다고 하셨잖아요?"

"물론 아니오. 하지만 내게는 당신의 딱정벌레가 필요하오."

"나늬가 필요하시다고요?"

"그렇소. 당신이 나늬를 조종해주면 좋겠소.  하지만 당신이 도저히 견

딜 수 없을 것 같으면 언젠가 티나한이 그랬던 것처럼 나 혼자서 나늬를

타고 가겠소. 그 때처럼  당신이 나늬에게 상세한  명령을 내려줘야겠지

만."

"비행이 필요하신 것이군요. 그건 복잡한 비행입니까?"

"대단히 복잡한 비행이 될 거요."

비형은 주먹을 꼭 쥔 채 말했다.

"가겠습니다." 케이건은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비형은 주저없이 말했다. "견딜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에요. 만일 제가 견

디지 못하면, 저를 어르신으로 만들어주세요. 그럴 수 있지요?"

케이건은 비형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게 하겠소."

비형은 굳은 얼굴로 나늬에  올라탔다. 케이건은 오레놀과  티나한, 륜

등을 차례로 바라보고는 말없이 비형의 등 뒤에 탔다. 나늬는 그대로 날

아올랐다.

파름산의 하늘로 날아오른 나늬는 하인샤 대사원의  하늘을 빙글 돈 다

음 곧장 평원을 향해 날아갔다. 두어 시간  쯤 날아갔을 때 비형은 지평

선을 뒤덮은 먼지구름을 발견했다. 비형은 뒤를 돌아보았고 케이건은 손

짓으로 내려갈 것을 명령했다. 아래를 살핀  다음 비형은 조그마한 소택

지 옆의 언덕에 나늬를  착륙시켰다. 억새가 잔뜩 우거져  몸을 감출 수

있으면서도 지대가 다른 곳보다 높은 장소였다. 나늬에서 내린 케이건은

두억시니들의 방향을 잠시 바라보고는 주위의 억새를 꺾기 시작했다.

바닥에 억새를 깔아놓은 케이건은 그  위에 주저앉았다. 오른다리를 펴

고 왼발로 오른쪽 허벅지를 받친 케이건은  시위를 얹기 시작했다. 오랫

동안 부려놓은 활이라 잘 얹혀지지 않는 듯했지만 케이건은 침착하고 끈

기있게 시위를 얹었다. 양쪽  고자에 시위가 걸리자  케이건은 비형에게

도깨비불을 요구했다. 비형이 땅바닥에 도깨비불을 만들어주자 케이건은

느긋한 동작으로 불 보이기를 했다.

할 일이 없었던 비형은 가끔 남쪽을 바라보았고, 그 때마다 두억시니들

이 일으키는 먼지구름이 더욱 커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케이건은

두억시니 방향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느린  동작으로 활을 불에 쬐고 발

로 밟았다. 비형은 초조감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활의 모든 부분에 불 보이기를  한 다음 케이건은 현을  몇 번 당겼다.

만족할 만큼 얹혀졌다고 판단한 듯 케이건은 깍지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비형의 바람대로 다음  행동에 들어가기는커녕 케이건은  활을 내버려둔

채 그보다 더 한가롭기도 어려울 만큼 편안한 동작으로 깍지를 만지작거

렸다. 비형이 참다 못해 재촉했지만 케이건은  "활이 식어야 할 것 아니

오."라고 일축한 채  두억시니들이 다가오든가 말든가  상관없다는 듯이

기다렸다. 비형은 그제야 케이건이 말한 한  시간이라는 것이 활을 얹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다른 준비는 더 필요없다는

말인가?

비형이 다시 두억시니들을 돌아보았을 때 케이건이  활을 쥔 채 부스스

일어났다. 비형은 반가운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지만 케이건은 두

억시니 쪽을 슬쩍 보고는 도로 앉았다. 비형은 어이가 없었다.

"기다려야겠소."

비형은 나늬에 걸터앉았다. 케이건은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앉아있었다. 어쨌든 삼천 마리의 두억시니가  정면에서 돌격해오고 있는

시점에서 취하기 매우 어려운 거동이라 할  것이다. 인내심을 잃고 공포

를 느끼기 시작한 비형이 다시 재촉했을  때 케이건은 또 자리에서 일어

났다. 비형은 반색하며 일어났으나 케이건은 또다시 두억시니 방향만 흘

깃 쳐다보고는 도로 앉았다.

"좀 더 기다려야겠소."

마침내 다가오는 두억시니들의 발소리를 느낀  나늬가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땅이 울리고 있었고 황야에는  기괴한 바람이 불었다. 아스라

하지만 오싹오싹한 두억시니의 괴성이 그 바람을 타고 비형을 엄습했다.

케이건이 또다시 일어났을 때, 비형은 쉰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더 기다려야겠지요?"

"아니오."

비형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케이건은 두억시니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비형은 케이건의 옆에 가서 그와 시선

을 맞춰보려 시도했고, 케이건이 하늘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의깊

게 하늘을 보던 비형은 곧 숨막히는 소리를 냈다.

케이건은 활과 화살을 챙겨들며 나늬에게로 걸어갔다.

"저 하늘치에게로 날아갑시다."

두억시니들의 뒤편 하늘에서,  거대한 구름을 찢어발기며  하늘치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구리아트 산맥에서부터  일행과 같은 방향

으로 날아오던 그 하늘치였다.  비형은 나늬에 올라타는  케이건을 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나늬는 하늘치에게 다가가지 않으려 할 텐데요?"

"300 미터까지는 접근하잖소?"

"그런데요?"

"그 정도면 충분하오. 눈이 많으니까."

"예? 눈이 많다니오?"

"하늘치 말이오. 하늘치에겐 눈이 많소."

케이건의 손에 들린 활과  하늘치를 번갈아 쳐다보던  비형은 얼어붙고

말았다.

그날 오후, 하인샤 대사원 경내의 모든 승려들은 강력한 지진에 경악했

다.

높은 곳에 있던 물건들과 벽에 걸려있던 물건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서

까래들이 지붕 속에서 몸을 뒤틀며 신음했고  그릇들이 춤을 추었다. 파

름산의 나무들이 기울었고  비탈에서 굴러떨어진 돌이  지붕을 박살내며

방 안으로 뛰어들어 승려들을  기겁하게 했다. 경내  일부에서는 쓰러진

촛대 때문에 화재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가장  슬퍼했던 사람이 페라 대

선임은 분명했지만, 기뻐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쥬타기 대선사는

두억시니들에 대한 처치 명령을 내린 후 침통한 표정으로 자신의 암자로

돌아가버렸기에 철혈암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티나한과 륜, 그리고

그들의 수발을 들기 위해 남은 오레놀이었다.  그들은 질린 표정으로 남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륜이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케이건이 일으킨 일일까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건이 날아간 후 지진이 일어났으니 그 추

리는 합리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비합리적이기도 했

다. 티나한이 침통하게 말했다.

"나는 케이건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겠어. 제발 그 자신은

그걸 좀 잘 알고 있으면 좋겠군."

대지의 경련은 끝없이 계속되는 듯했다.  륜은 그것이 아무래도 지진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진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연속적이었다.

하지만 지진이 아닌 무엇인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륜은 아스화리

탈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스화리탈은  나무 위로 날아올라서

는 가지에 앉은 채 계속 남쪽 하늘을  응시했다. 용은 지진이 끝난 후에

도 내려오지 않았다.

땅거미가 으슥하게 내릴 무렵 비형과 케이건은 대사원으로 돌아왔다.

철혈암에서 기다리던 자들은 비형이  사색이 된 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늬에서 내려올 때까지 그럭저럭 번듯한 모습이던 비형은

마당에 서자마자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키며 풀썩 쓰러져 졸도했다. 티나

한이 황급히 그를 들어올려 마루에 눕혔다.

케이건은 그를 향해 쏟아지는 묻는 시선들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

은 채 마루로 걸어갔다. 활을 다시  부려놓은 케이건은 그것을 오레놀에

게 건네었다.

"페라 대선에게 돌려주시오. 미안하지만 화살은  다 썼소. 그리고 경내

의 승려들에게 전할 말이 있소. 당분간  어린 행자들이나 심약한 승려분

들은 파름 평원 쪽으로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오레놀은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동시에 대답을 듣는 것도 두

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레놀은 활과 현, 깍지 등을 받아들고는 황망

하게 사라졌다. 티나한이 어두운 낯빛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었지?"

"이곳은 안전하오."

"…더 할 말은 없어?"

"두억시니들이 다 죽지는 않았소."

"다 죽지 않았다고?"

"그렇소. 일부는 살아났지." 그리고 케이건은  륜을 돌아보았다. "사모

페이가 그곳에 있었다."

륜은 경악하며 외쳤다.

"어, 어떻게 됐습니까! 설마 누님이 어떻게 된 건…"

"그녀가 두억시니들을 일부 구해내었다."

"네?"

"한 스무 마리 정도 구한 것 같다. 현명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

겠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판국이었으니. 어쨌든, 그녀는 그 두

억시니들과 함께 달아났다. 아마 돌아오겠지만 당장은 아니겠지. 그러니

좀 쉬어야겠다. 피곤하다. 네 누나를 사로잡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후에

이야기하자."

그리고 케이건은 마루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는 것을

본 티나한과 륜은 마루에  누워있는 비형을 쳐다보았다.  문득 티나한은

자신의 손이 젖은 것을 깨닫고는 질겁했다. 손바닥이 까져라 마룻바닥에

손을 문지르며 티나한은 걱정스럽게 비형을 내려다보았다.

비형의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어디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숨 죽인 목소리와

불안한 눈빛들이 이야기의 전달을 맡았고  무궁한 상상력은 윤색을 담당

했을 것이다. 최초의 시작이  그저 짧게 스쳐지나가는  무의미한 탄성에

불과했더라도, 어떤 단계가 지나면 이야기는 생명력을 얻고 스스로를 증

거하기 시작한다. 페라 대선에게  활을 돌려주러 갔던  오레놀이 발견한

것은 이미 힘차게 맥동하고 있는 이야기였다. 오레놀은 그것을 철혈암으

로 가지고 돌아왔고 그것은 티나한을 흥분하게 했다.

"그게 정말이야?"

"글쎄요. 그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깨어난 비형은 넋나간 표정으로 주위를 바라보다가  미친 듯이 웃기 시

작했다. 곧 사람들은 그것이 정상적인 웃음이 아님을 깨달았다. 숨이 끊

어지도록 웃던 비형은 결국 탈진하여 다시  쓰러졌다. 두어 시간이 지났

을 때 밤은 이미 산사의 지붕들을 뒤덮고 있었고 낮 동안의 흥분과 공포

마저도 그 넓은 자락으로 감싸안고 있었다.  암자를 밝히고 있는 외로운

등불은 명주실 같은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비형은 한결 안

정된 모습으로 깨어났다.  오레놀이 식사를 권했지만  비형은 거절했다.

그리고 티나한은 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봐, 비형. 지금 이 절 안에 이상한 이야기가 오가는데."

"아마 머리를 깎고 싶은 것 아닐까요? 그  '이상한 이야기'라는 분. 사

원 안에서 할 일 없이  오가고 있다면 그런 이유  외엔 떠오르지 않는데

요?"

"…하늘치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비형은 입을 다물었다. 티나한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야기가 두서가 없어. 하지만 항상  똑같은 이름이 반복되는데, 하늘

치야. 도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말 좀 해봐."

"번개가 창백해진 까닭은 진실이 날아가는  속도를 보고 질려버렸기 때

문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진실이 너무 빨라서  모든 사람들의 눈에 흐릿

하게 보인다는 점 아닐까요?"

"그러니 흐릿한 거 말고 또렷한 거 좀 내놔봐. 무슨 일이 있었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요?"

"젠장. 그럼 이것만 확인해줘. 정말  케이건이 마법으로 하늘치를 불러

낸 거야?"

어이없다는 눈으로 티나한을 바라보던 비형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

했다.

"마법사 같은 건 없소. 티나한." 그리고  비형은 폭소를 터뜨렸다. "제

흉내 비슷해요?"

다른 경우라면 티나한은 말 하고 싶지  않다는 비형의 의사를 존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치라는 단어는 집념에 찬  하늘치 유적 발굴자의 정

신을 완전히 지배해버렸다. 륜은 비형이 쉴  수 있게 해주라고 권했지만

티나한은 냉혹하게 말했다.

"오레놀. 곡차 한 동이만 가져다줘."

비형은 기겁했다.

"오, 이토록 감미로운 고문이라니?"

그러나 비형은 그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레놀이 동이를 가지고 돌

아오자 비형은 허겁지겁 사발을 동이에 담갔다.  급하게 마신 술은 비형

을 대취하게 만들었다. 비형의  얼굴이 시뻘개진 것을  확인한 티나한은

은근하게 질문했다.

"정말 하늘치였어?"

비형은 빈 사발을 휘두르며 기세좋게 외쳤다.

"물론이죠! 하늘치 아니면 뭐겠어요?"

사모 페이는 무릎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녀의 망토를 우쭐거리게 하던  밤바람이 무례하게 그녀의  턱과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장난스러운 바람에는,  그러나 피비린내가 가득 끼

여 있었다. 뺨을 스치고 지나가면 피가  묻어날 것 같은 바람이었다. 사

모는 언짢은 듯 머리를 내젓고는 주위의 두억시니들을 바라보았다.

두억시니들은 몇 시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와 마루나래를 중심

에 둔 채 스물두 명의 두억시니는 거의 완전한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

고 있었다. 마치 원무(圓舞)를 추는 것  같았다. 그런 춤판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사모는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가

보낸 몸짓이 정중한 요청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두억시니들은 정중했다.

사모가 시험삼아 몇 발자국 옆으로  걸어갔을 때 두억시니들은 당황하면

서도 그녀를 따라 움직이며  원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는 간절한 동작으로 그녀에게 앉아있을 것을 요구

했다. 거기엔 분명 적대감은 없었다. 그래서 사모는 그들이 주위를 돌도

록 내버려두었다.

그녀의 눈 앞을 지나가던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가  고개를 든 사모를

발견하고는 손짓을 보내었다. 사모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

지만 그냥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모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는 안도하며 다시

원무에 열중했다.

두억시니들의 속도는 일정했다. 그  모습을 보며 사모는 몇  시간 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때도 사모는 그녀에게  신경쓰지 않는 두억시니들  사이에서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마루나래는 결국 두억시니들 사이에서 달리는 것

이 그렇게 위험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두억시니들은 그들에

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두억시니들은 시구리아트 관문요새에

서 그들을 추적했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게다가 공평하게도

두억시니들은 사모가 그들에게 다리를 만들어준  일 또한 잊어버린 듯했

다. 사모는 그들의 목적이 단 한  가지일 거라 추측했다. 나가, 도깨비,

레콘, 딱정벌레로 이루어진 무리를 추적하는  것. 두억시니들은 그 외의

다른 모든 일들에 대해 기본적인 관심조차 가질 수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두억시니들의 움직임이 불규칙하게 바뀌었다.

마루나래의 갈기를 움켜쥔 채  사모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억시니들 또한 당황한 듯 단어들을 쏟아내며 주위

를 둘러보고 있었다. 문득 사모의 눈에  위를 쳐다보고 있는 두억시니가

들어왔다. 사모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장 거대한 구름보다 더 큰 하늘치가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

다.

잠시 압도되었던 사모는 그것이 시구리아트  산맥에서부터 그들을 따라

온 하늘치임을 깨달았다. 보다 낮은 지대로 내려왔으니 하늘치와의 거리

는 더 멀어진 것이 분명하지만 하늘치는  산맥에서 볼 때보다 더욱 커보

였다. 사모는 그런 감각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건지 의아했다. 잠시

후 사모는 하늘치와 비교될 산들이 없기에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구리아트 산맥에서부터 하늘치를 보았던 두억시니들이 구태여 지금에

와서 당황한다는 것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사모는 다시 하늘치를 관찰했다. 그 때 사모는 하늘치의 거대한 체구 때

문에 마치 모기처럼 보이는 것이 하늘치  머리 주위를 날아 다니는 것을

깨달았다. 사모는 두 손으로 눈 주위를 감싸며 더욱 주의깊게 그것을 바

라보았다.

그 때 하늘치의 눈  주위에서 뜨거운 열이 번득이는  것이 사모의 눈에

들어왔다. 사모는 어리둥절하여 그것을 바라보았다.  열은 조금 후 사라

졌다. 그리고 한참이 지났을 때 하늘에서 떨어진 액체가 주위에 있는 두

억시니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것은 피였다.

"처음 몇 대는 맞고 튕겨나온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만두자고 외치고

싶었어요. 그토록 고상하고 위대한 생물의 눈을 쏜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케이건은  도저히 말릴 수

없는 기세로 화살을 쏘아대더군요. 그러다가, 그러다가 기어코 몇 대 제

대로 맞았나 봐요. 케이건이 재빨리 제  턱을 붙잡아 옆으로 밀어붙였습

니다. 하늘치 반대 방향이었지요. 예. 저는 넋을 잃은 채 그걸 바라보고

있었던 겁니다. 보석 같은 눈이 박살나며 뭔가가 쏟아져나오는… 끝까지

보지는 못했지요. 그리고 다시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어떻게 그런

걸 보겠어요?"

티나한은 나라면 봤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동이에 사발을 담갔

다. 륜은 비늘이 곤두선 팔을 쓸어만지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비형은 입을 다물었다. 조금 후 비형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세요. 보통 하늘을 날 때 주위는  완전히 비어 있습니다. 허

공이라고요. 하지만 하늘치 근처를  날면, 오오, 파리들은  정말 대단해

요. 당장이라도 부딪혀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장애물이 있는 겁니다.

그것도 절벽처럼 고정된  것도 아니에요. 움직이고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물체지요. 상상이 되세요?"

솔직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륜은 그저 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형은 넌더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겼고 그러자 그의 손에서 모기만한 도

깨비불이 뛰쳐나왔다. 티나한과  륜, 그리고 오레놀은  그것이 딱정벌레

모양을 하고 있음을 간신히 알아보았다. 도깨비불 딱정벌레는 비형의 몸

주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것을 바라보던 비형이 갑자기 왼손을 높

이 들었다. 도깨비의 큼직한 손가락은 쫙  펼쳐져 있었고 거기에 응축된

힘 때문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비형의  입에서 기괴한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오오오오오!"

비형은 왼손을 서서히 움직여 도깨비불을  향해 움직여 갔다. 도깨비불

에 비해 상대적으로 턱없이 거대한 비형의 왼손이 그 위를 덮자 짙은 그

림자가 도깨비불을 감쌌다. 그들은 숨조차 죽인 채 그 손을 바라보았다.

하늘치가 움직임을 바꿨을 때 사모는 호흡을 멈췄다.

하늘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짙어지는  그림자. 거대한 크기 때문

에 하늘치의 움직임은 놀랄  정도로 완만하게 보였다.  그러나 하늘치의

앞쪽에서 도망치고 있는 딱정벌레는 무서운 속도로 날고 있었다. 사모는

딱정벌레의 날개뿌리 근처의 온도가 급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리고 딱정벌레의 날개에 마찰된 공기가  광포한 열류의 소용돌이를 만들

며 무한히 퍼져가는 것도. 딱정벌레는 이제  불타오르는 유성이 되고 있

었다. 그리고 그 뒤로,  유성을 추적하는 불가해한  괴수가 암반을 쪼갤

것 같은 가슴 지느러미를 펼친 채 쇄도하고 있었다. 하늘치의 가슴 지느

러미 앞에서 구름들이 발기발기 찢어졌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밤 같은

낮 속의, 작열하는 별을 향해 입을  벌리는 초월적인 야수. 공기가 무겁

게 꿈틀대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바람은 없었다. 정지된 두억시니

들. 흙과 초목은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새벽의  빛과 황혼의 빛깔, 청명

한 날의 색깔과 비 오는 날의 색조가 뒤범벅되어 맥동했다.

마루나래가 구슬프게 울었다. 대지가 감내해야  할 고통을 직감하듯 대

호는 목을 놓아 울부짖었다.

사모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격렬한 기침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비늘을 세차게 부딪히며 사

모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억시니들은 조각처럼 멈춰있었다.

"도망쳐!"

사모는 마루나래의 갈기를 움켜쥐며 외쳤다. 그러나 두억시니들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사모는 대호의 등에서

뛰어내려 가까이 있는 두억시니를 붙잡고 흔들었다.

"도망쳐! 도망치라고!"

"잃어버린, 줄무늬 의표… 다움이 너무 많은, 모레."

사모가 흔드는대로 흔들리며 두억시니는 중얼거렸다. 사모의 의도가 전

달된 것 같지는 않았다.  사모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하늘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모든 곳이 하늘치의 모습에 뒤덮여 있었

다. 하늘치의 눈들 사이에서 사모는 피의 흐름을 발견했다. 수없이 많은

눈들 가운데 몇 개였지만 그것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어 또렷이 보였다.

그 외의 다른 눈들은 분노에 불타고 있었다.

사모는 마루나래에 뛰어올랐다.

도망치려던 마루나래는 사모가 보내어오는 개념에 당황했다. 사모는 머

리 둘 달린 두억시니를 향해 달릴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비형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 자신의 왼손을 움직여갔다. 그의 손이 만들

어내는 그림자 안에서 도깨비불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얼굴이 찢어질 것 같았어요. 추락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아래로 날아

갔지요. 그렇게 빨리 날아본 건 처음이었어요. 하지만 등 뒤로는, 흐으,

오싹오싹할 정도로 질량감이 커지고 있었지요. 머리 속에서 돌풍이 불어

닥치는 것 같더군요. 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그 때 얼핏

두억시니들 사이에서 사모 페이가  보였어요. 그녀가 뭘  하고 있었는지

짐작되세요?"

륜 페이는 긴장하며 비형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이 질문했다.

"뭘 하고 있었는데?"

"그 두억시니 기억나세요? 시구리아트 유료도로에서  케이건 앞에 나섰

던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 사모 페이는 대호에 탄 채 그 두억시니를 향

해 달리고 있었어요. 대호가  휙 난다 싶더니 다음  순간에는 이미 땅에

쓰러진 두억시니 위에 올라타 있더군요.  그리고나서 대호는 두억시니의

다리 하나를 물었어요. 나는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대호가 그대로 두억시니를 끌면서 달리더라고요.  그 두억시니는 버둥거

리며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어요. 그러자 넋을 잃고 있던 두억시니들 중

몇몇이 그 쪽을 보더군요.  그리고는 대호와 사모  쪽으로 달려가더라고

요. 사모가 두억시니들을 유인하기 위해 그랬던  거라 추측할 수 있겠지

요?"

사모 페이는 추측했고, 행동했다.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가  언제나 앞에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두억시니들과 달리, 단편적이나마 정확한 단어들을 구사했다. 그러

나 마지막 순간에 결심을 내렸을 때 사모는 논리보다는 직감으로 행동했

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했다.

마루나래가 그 거센 힘으로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를 끌고 달리자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는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몇몇  두억시니들이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파국을 피한 두억시니는 너무도 적었다.

딱정벌레는 땅에 충돌하기 직전  몸이 부서질 정도의  급선회를 감행했

다. 그리고 하늘치의 눈이 없는 배 부분을 통해 꼬리 지느러미쪽으로 빠

져나갔다. 흡사 천장 바로 아래를  날아가는 파리처럼 보였다. 하늘치는

그 정도의 민첩성을 도저히 발휘할 수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는 것 같

았다. 피눈물을 흘리는 거대한 물고기는  온몸으로 두억시니들을 깔아뭉

갰다.

폭풍과 굉음이 사모와 두억시니들을 가랑잎처럼 날려버렸다.

"우리는 평야 한 구석의 억새밭에 납작 엎드려 숨어 있었어요. 뭘 봤을

것 같아요? 아무 것도 못봤어요. 케이건이 내 뒤통수를 누르고 있었거든

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제가 알고  있는 건 하나뿐이에요. 그 손은,

그 손은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았어요.  나는 그 손이 없어지는 것이

더 두려웠어요. 그리고 그  손에 감사했고. 그런데  도대체 몇 시간이었

죠?"

륜이 대답했다.

"한 시간입니다. 땅이 울린 건 한 시간 정도였어요."

비형은 놀라서 외쳤다.

"정말입니까? 겨우 한 시간이라고요?"

"예. 한 시간 정도 울리다가 진동이 멈췄어요."

하늘치로부터 10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모는 자신이 땅에 엎드려 있는 건지  난동을 부리는 동물의 등에 올라

타 있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늘치의  지느러미가 땅을 때릴 때마

다 대지가 수십만 년에 걸쳐 조심스럽게 가꿔온 형상은 간단하게 변경되

었다. 광분하여 치솟아오른 대지의 핏물 같은  흙먼지는 그 안에 들어선

생물이 무엇이든 질식사시켜버릴 것 같다. 놀랍게도 하늘치의 몸이 가려

질 지경이다. 땅을 향해 분화하는 하늘의 화산, 몸부림 치는 산맥, 노호

하여 격투하는 형체 없는  제신, 불가지론에 대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증언… 문득 사모는 자신이 무의미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의 지식에는 그런 광경을 묘사할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사

모는 그 지형변경적 폭력과 믿기 어려운 아둔함이 빚어내는 불일치에 분

노를 느꼈다.

[수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데도 누구에게 화를 내어야 하는지도 모르

느냐!]

하늘치가 하늘로 돌아가고 대지의 흐느낌이 잦아들고도 한참 후에야 사

모는 겨우 일어나 설  수 있었다. 그리고 사모는  대지에 남겨진 자취에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곳엔 더 이상 구릉이  없었다. 지반이 내려앉아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덩이가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사모는  그 구덩이 바닥에 무엇

이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증오에 찬 눈으로 하늘을 바라본 사모

는 하늘치의 등에 남아있는 유적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런 충

격에도 유적이 건재한 것일까?

마루나래가 낮게 으르릉거렸다.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사모는 마루나래에 몸을  붙이고 있었기에

그 진동을 느꼈다. 사모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조금 전 그녀와 함께 도망

쳤던 두억시니들이 사방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사모는 쉬크톨을 뽑아들었다. 그녀가 막 대호에 올라타려 했을 때 앞쪽

에서 걸어오던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가 말했다.

"칼."

"아니다."

사모는 고개를 갸웃한 채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를 바라보았다. 두억시

니는 다시 말했다.

"칼."

"아니다."

사모는 자신의 쉬크톨을 내려다보고는 다시 두억시니를 바라보았다. 두

억시니들은 이제 그녀와 마루나래를 둘러싼 채 정지해 있었다. 마루나래

는 당장이라도 가까이 있는 두억시니를 가루로 만들겠다는 듯 어깨를 긴

장시키고 있었다. 마루나래의 갈기를 조금  쓸어만진 다음, 사모는 조심

스럽게 말했다.

"칼을 쓸 일이 아니다? 싸우지 말자는 거야?"

"칼."

"아니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가 되는 일을  즐길 필요는 없지만,  그걸 무서워할  필요도 없겠

지."

사모는 쉬크톨을 도로 꽂아넣었다.

사모는 두억시니들이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녀의 행동이

잘못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위를 돌기 시

작하는 두억시니를 보았을 때 사모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다 행

동지향적인 마루나래는 곧바로 두억시니들을 시험했다. 마루나래는 위협

적으로 그 원무의 한귀퉁이로 다가갔다. 하지만 두억시니는 원을 흐트러

뜨리지 않았다. 마루나래는 포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억시니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루나래는 앞발  하나를 들어올렸

다. 하지만 마루나래가 두억시니의 다리를 걸기  전에 사모는 그 꼬리를

잡아당겼다. 마루나래는 투덜거리며 땅에 앉았다.

그리고 깊은 밤이 될 때까지 두억시니들은 쉼없이 돌았다. 사모가 이대

로 잠들어도 되는 건지,  그렇잖으면 마루나래와 함께  이들을 뿌리치고

오늘 밤을 보내기에 보다  안전한 장소를 찾아볼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

다.

[용서하겠다.]

사모는 칼자루를 움켜쥐며 벌떡 일어나 쉬크톨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마루나래는 그런 사모의 모습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별다른 것

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모는 오른손으로 그대로  칼을 쥔 채 일어나려는

마루나래의 머리를 왼손으로 눌러주며 닐렀다.

[누구지?]

[내겐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내가 누군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모의 머리 속으로 어둠에 쌓인 영상이 스며들어왔다. 깊고 차갑고 어

두운 암흑 속에서 사체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모는 놀라며 닐렀다.

[그 피라미드의 괴수로군! 근처에 있나?]

[나의 일부를 통해 니르고 있다.]

사모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사모는 빙글빙글 도는 두억시니들의

모습이 흘러내렸다가 다시 위로 모여드는  유해의 폭포를 닮았음을 깨달

았다.

[대단하군.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여전히  너의 일부라니. 그렇다면 너

는 그곳에 있으면서 세상의 곳곳을 보고 들을 수 있겠군.]

[그렇군! 그럴 수도 있겠군!]

[…처음 해 본 거야?]

[그렇다. 흥미로운 개념이다. 당장이라도 시험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겠군. 나의 일부들 중 많은 수가 줄어들었다.]

[애석하게 생각해. 그런데, 용서하겠다는 건 무슨 뜻이지?]

[너는 그 칼로 나를 찔렀다. 나는 그 사실을 용서한다.]

[정말 살아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그리고 네  모습은 도저히

호의적이라고 니르기는 어려웠고. 하지만  대화 없이 공격부터  한 것에

대해서 사과하겠어.]

[나는 이미 용서했다. 그러니 사과할 필요는 없다. 그것보다는 내 감사

를 받기 바란다. 너는 오늘 나들을 구해내었다.]

[나들? 군령자나 할 법한 니름이군. 그거라면 별로  감사 받고 싶지 않

아. 전부 다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못했어. 나는 머리 둘

달린 저 친구, 아니, 저 너가 가장 머리가 좋으리라 생각했어.]

[그러하다. 나는 그 나로 하여금 다른 나들을 지휘하게끔 계획했다.]

[그렇군. 그래서 저 너에게  다른 너들을 구해달라고  외치게끔 하려고

했어. 하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야.]

[나는 나를 구하려 했던 네 의도에 감사하는 것이다. 물론 네 행동에도

감사한다. 지금 네 주위를 돌고 있는 나들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투

자하여 만든 나들이다. 다른 나들은 그 나들이 만들었다.]

사모는 전부 일인칭으로 통일되어버리는  - 그것도 '우리'가  아닌 '나

들'이라고 표현하는 - 두억시니의 니름에 약간 혼란을 느끼며 닐렀다.

[내게 고마워하고 있다면 질문 하나 쯤에는 대답해줄 수 있겠군. 왜 이

곳까지-] 사모는 륜 페이와 불신자들에 대한 기억을 잠시 떠올렸다. [그

들을 추적해온 거지?]

[그들이 또 신을 죽이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서다!]

[도대체 그 신을 죽인다는 것이 무슨 니름이지? 신을 죽일 수는 없어.]

[잃을 수는 있는데 죽일 수는 없다고 할 텐가?]

[…기분 나쁘게도 네 니름에  약간의 공감이 느껴지는군.  어째서 그런

혐의를 느끼게 되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어?]

[나는 그 때 나가의 기억을 읽었다. 그 중 어떤 기억에서 나는 신을 죽

이는 내용을 읽어내었다.]

[어떻게 죽이지?]

[그런 내용은 없었다. 단지  '신을 죽인다'는 것 뿐이었다.  그 기억을

통해 나는 신을 죽일 수 있음을  깨닫고 두억시니의 신 또한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 폭력의 피해자로서  나는 나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그래서 특별한 두억시니를 만든 다음 피라미드 밖으로 내보낸 것이군.

'신을 죽인다'는, 단지 두  개의 단어만으로 너무 큰  추론의 도약을 한

것 아닐까? 그건 어쩌면 불신자들이 륜에게 들려준 농담의 일종이었는지

도 몰라. 내가 만났을 때 그 불신자들은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의심에 대

해 어이없어 하더군.]

[어이없어 했다고?]

[그래. 거의 나만큼 당황하는 것 같던데. 너는 그것이 거짓이었다고 니

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아.]

[어제까지라면 나는 그들의 잔인성을 내 추론의 증거로 제시할 수는 없

었을 거야.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있을 것  같군. 아무리 신을 잃은 자

라지만, 그래서 동정을 받을 가치도 없다지만, 벌레가 가진 것만큼의 고

귀함도 가지지 못한 나지만! 저 하늘을  떠도는 공포를 끌어내려 그토록

무참하게 나를 짓밟았어야 했나?]

사모는 정신을 닫았다. 그녀 또한 케이건이 구사한 폭력에 상당한 반감

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구리아트 관문요새

에서 짧게 마주쳤던 케이건을  떠올렸다. 그녀의 눈에  케이건은 흉포한

살육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모는  케이건이 나가살육자임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딱정벌레를 조종했던 것은 도깨비였겠지만 활을  쏜 건 틀림없이 인간

이겠지. 레콘은 같이 타기엔 너무  무겁고 륜은 활을 쏠  줄 모르니. 그

인간은 자기가 나가살육자라고 인정했어. 그래. 네 니름처럼 그 인간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대단히 잔인해질 수 있는 자일 거

야.]

'빌어먹을, 그런 인간이 륜의 곁에 있다니!'  사모는 분노했지만 곧 분

노보다 더 큰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륜이 나가살육자와 자신을 죽이려

드는 누나 중에서 누구를 더 혐오하고 증오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인간은 나가살육자며 하늘치마저도 거리낌없이  공격할 수 있는 자

였으며 삼천 명의 두억시니를 학살한  자이지만… 그래도 신을 죽인다는

것은 문제가 달라. 그건 잔인성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야. 그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

[그가 아니라면 다른 자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

으면 그들 네 명이 함께 있을 때 그런 능력이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지.

그러고보니 그들에겐 모든 종족이 다 포함되어  있군. 그들은 무엇 때문

에 그런 독특한 집단을 이룬 거지?]

[그들은 나가의 적과 싸우려고 륜을 데리고 가는 거라더군.]

[나가의 적이 신인가?]

[천만에. 니름도 안돼. 나가는 다른  종족들보다 오히려 신과의 관계가

밀접해.]

어이없어 하며 니르던 사모의 뇌리 속으로  문득 기묘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그 생각에 겁을 집어먹었지만  생각 자체를 멈출 수는

없었다.

륜은 심장탑에 있는 나가의 적과 싸우겠다고 했다. 심장탑에 있는 것은

수호자다. 여신의 신랑들. 사모는 여신의  신랑들과 싸우겠다는 말이 여

신을 죽이겠다는 말과 비슷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다.

비형은 결국 졸도하다시피 한 모습으로  잠들었다. 빈 동이가 다섯이었

고 최소한 비형이 네 동이는 해치운  듯했다. 오레놀은 뒤치닥거리를 했

고 륜은 비형의 잠자리를 보살폈다. 하지만  티나한은 불만에 찬 표정으

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티나한은  자신이 만족할 만큼 이야기

를 듣지 못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늘치를 격노하게 한다? 그래서 땅 아래로 내려오게 한다?'

티나한은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숙원에 대한 놀라운 해법이기도 했다.  올라가려 애쓰는 대신 하늘

치를 내려오게 한다는, 상식을 뒤집는  방법. 하지만 비형의 증언대로라

면 내려오게 할 수는 있어도 근처에 접근할 수는 없는 듯했다.

"분노하게 하면 내려오게 할 수 있지만, 분노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

다는 말이군. 거 참 지랄 같군."

티나한은 격노한 하늘치가 어느 정도의  폭력을 구사하는지 알아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목격자에게 물

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비형은 중요한 시간  동안 땅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었고 게다가 지금은 대취하여 잠들어 있었다.  티나한은 그 계획을 생

각해내고 몸소 실현시킨 케이건에게 질문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몸을 일

으켰다.

그러나 케이건이 들어간 방에 대고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보던 티나한은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본 티나한은 방 안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 시각 케이건은 산을 오르고 있었다.

별빛이 묽었다. 낮에 파름 평원에서  피어오른 흙먼지가 이제야 파름산

에 도달한 듯했다. 얼룩덜룩하게  번진 별빛들의 말없는  주시를 받으며

케이건은 산을 올랐다. 잠시 걸음을 멈춘  케이건은 고개를 들어 목표했

던 바위를 바라보았다. 거리는 가까웠다. 케이건은 거의 호흡을 하지 않

은 채 바위 위까지 달려올라갔다.

허공을 향해 내뻗어진 바위  위에 올라선 케이건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깊은 잠에 취한 파름 평원이 밤의 뿌리를 향해 넘실대고 있었다.

한참을 주의깊게 살핀  후에야 케이건은 하늘치를  발견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곳에서 별빛이 사라지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것은 지평선

끄트머리에 걸쳐 있었다. 이미 먼 거리까지 날아간 듯했다.

하늘치를 바라보던 케이건은 잠시 후 몸을 돌렸다.

바위 뒤에는 조그마한 석굴이 있었다. 그리 깊지 않은 석굴이었지만 안

은 캄캄했다. 케이건은 석굴 입구에  정좌했다. 그리고 어둠을 바라보았

다. 잠시 후,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부싯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호롱불 빛이 어둠을 걷어내자 쥬타기  대선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대선

사는 바람이 닿지 않도록 호롱을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불빛이 충분히

살아나자 대선사는 그것을 바람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굴밖에 있는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여기 있겠다."

"천지가 울리더군요."

"하늘치를 불러내렸다."

"하늘치를 어떻게?"

"딱정벌레에 탄 다음 화살을 쐈다. 눈이 몇 개 깨졌지. 화를 내면서 쫓

아오더군. 그대로 두억시니에게 보냈다."

대선사는 신음했다.

"제 죄가 이루 말할 수가 없군요. 그  하늘치가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아

셨기에 할 수 있다고 하셨던 것이군요."

"시구리아트 유료도로에서부터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를 지나오셨으면, 케이를 만나보셨습니까?"

"케이?"

"당신의 아들 말입니다. 도대체 몇번째  아들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만."

"내게 충격을 줄 작정이라면, 관둬라. 쥬타기.  그 애는 내 아들이지만

동시에 내 내손일 수도 있다."

"네?"

"그 어머니 보늬가 내 현손녀일 가능성이 꽤 높으니까."

충격을 주려다가 거꾸로 충격을 받은  쥬타기는 입을 다물었다. 케이건

이 담담하게 말했다.

"산사에서 수도하는 승려에겐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던가."

"보늬 당주도 알고 있습니까?"

"모른다. 혹 의심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증거는  가지고 있지

않다. 나처럼."

"자신의 자손일지도 모르는 여인을 어떻게 안을 수 있었습니까?"

"변명을 해야 하나?"

"해주십시오."

"쥬타기. 나는 200 년쯤 전에 한 여인을  만나 사랑했다. 내 기억이 정

확하다면 그건 아흐레 동안의  만남이었다. 열흘째 우리는  헤어졌고 그

이후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지. 그리고 120 년쯤 지났을 때, 시구리

아트 산맥에서 나는 또다른 여인을 만났다.  200 년 전에 만났던 여인과

비슷하게 생긴 여자였다. 그녀가 내 현손녀일지도 모르지만, 그 이유 때

문에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쥬타기 대선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변명을 더 해야 하나?"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쥬타기 대선사는 생각했다. 거대한 시간의  단위에서 본다면 지상의 모

든 인간 중에 혈육이  아닌 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케이건은

바로 그런 거대한 시간의 단위를 이용하는  사람이다. 서로 사용하는 잣

대의 길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면 어느 한 쪽의 잣대를 다른 쪽에 가져다

대는 것은 무의미하다.

케이건은 말했다.

"조금 전 눈을 떴을 때 나는 사원을 떠나려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무래

도 네가 내게 요구할 것이 남아있다는 느낌이 들더군. 내 느낌이 맞나?"

"그렇습니다."

"살신을 저지하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륜 페이를 통해 살신의 수단을 알아내면 그것을 저지해야

합니다."

"너는 발자국 없는 여신을 상대하던 세 신  중 하나가 사라지면 세상이

더욱 더워질 거라고 말했지. 그건 확실한 건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케이건은 매서운 눈으로  석굴 안쪽을 쏘아보았다.  대선사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케이건. 저는 어떤 양심적인  수호자가 이 일의  전모를 알려주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한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그 양심적인  수호자가 상당한 고뇌를  느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군. 레콘이 어떻게 되든  신경쓰지 않고 가만히 있으

면 나가가 온세상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수호자는 아무런 고뇌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확실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수호자는 동료 수호자들이

뭘 제대로 알고 행동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케이건은 생각했다. 그리고 질문했다.

"오히려 세상이 추워질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정확하게 말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수호자는 두억시니가 신을 잃고 그  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

니다. 그리고 그 수호자는 두억시니에 세상을 대입해 보았습니다."

케이건은 짧게 신음했다.

"한 분의 신을 잃으면 이 세상이 두억시니 꼴이 된다는 말이군."

"두억시니에게는 아무런 법칙이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지만  다른 수호자들은 무조건 세상

이 더워질 거라 확신하고 있지요."

"그래서 그 수호자는 황급히 대사원의 승려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군. 위

험한 장난을 치며 날뛰는 동료 수호자들을 저지해달라고."

"그리고 우리는 돕기로 결정했지요."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 등불의 빛이 그의 눈을 약간 피로하게

했다. 현재가 아닌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에 케이건은

눈을 감았다.

"쥬타기."

"예."

"나는 숲에서 사지가 잘린  채 눈을 감고 누워있는  나가를 만나면, 그

나가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대신 그 나가가 배가 고파서 자기 팔다

리를 잘라 먹고는 포만감에 잠들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테지. 맹

세코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높으니까."

대선사는 웃지 않았다. 그것은 우스운 말이 아니었다. 케이건은 나직이

말했다.

"나는 나가를 믿지 않아.  그것들이 약한 척, 아픈  척, 죽은 척한다고

해서 칼을 칼집에 꽂아넣는 것은 미련한 짓이야. 나는 그런 속임수에 너

무 많이 당했어."

"하나도 믿지 않으십니까?"

"내가 삶아먹은 나가는 믿는다.  그 외에는, 설령 목이  잘린 나가라도

믿지 않아. 실제로 목을 재생시켜서 돌아온 것을 목격했으니까."

대선사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슬픔에 찬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예전에 한 명의  나가를 신뢰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어떤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과 15년 전이었습니다. 그를 신뢰했

기에-"

"그만해."

"당신은 마침내 나가에 대한 증오를 잊고-"

"그만하라고 말했어."

대선사는 말을 멈췄다. 석굴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케이건은 호랑이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선사는 그 얼굴

이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케이

건이 입을 열었다.

"이 사원에서 발자국 없는 여신을 불러낼 수 있는 건가?"

"당신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철혈암에 필요한  조처를 취해두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에게서 연락이 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륜

페이의 누나라는 그 암살자를 회유할 수  있다면 우리가 먼저 연락을 보

낼 수도 있겠지요."

케이건은 바위에서 일어났다.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았기 때문이다. 대

선사는 사라지는 케이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등불에  얼굴을 가져가

입김을 불었다. 등불이 꺼졌다.

갈로텍은 심장탑의 32층에 있는 자신의 방  창턱에 걸터앉아 냉혹의 도

시에 쏟아지는 밤을 바라보았다.

지상에서 100 미터 이상 되는, 심장을  적출한 나가라 하더라도 비늘이

설만한 높이였지만 갈로텍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남달리 굵은

신경을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대금 연주에 모든 주의를 기

울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금 위로 그의 손가락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갈로텍은 인간들이 하텐그라쥬를 침묵의 도시라 부르는 것도 그렇게 틀

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건물과 광장, 기념비들

사이로 대금의 장엄하고 풍부한 소리가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소리에 신

경을 쓰는 괴벽을 가진 나가가 있었다면 심장탑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기

겁했겠지만 갈로텍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도깨비 감투를 쓴 것과

비슷한 기분이라 생각하며 갈로텍은 힘껏 역취했다.

갈로텍이 연주를 끝내자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좋은 연주였다. 갈로텍. 귀머거리의 연주에  이런 찬사가 어울릴지 모

르겠지만."

"귀머거리는 아닙니다. 주퀘도."

"나는 생전에 귀가 밝은 걸로 유명했지. 그런 내 기준엔 귀머거리야."

갈로텍은 주퀘도가 군령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혹  자신의 이야기를

더 떠벌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은 아닌가 의심했다.

"당신 말대로 피가 차갑고  귀도 어두운 제가 이렇게  열심히 연주했으

니, 이제 제 이야기 좀 들어주겠습니까?"

"한 곡 더 들려주고나서 들으면 안 될까?"

갈로텍은 머리를 내저었고 주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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