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21화 (21/62)

눈물을 마시는 새.

6. 여신의 신랑 - 1

수호자들을 가리키는 '여신의 신랑'이라는 칭호는,  혼인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나가의 사회를 놓고 볼 때 매우  기이한 것임을 깨

달아야 한다. 나가의 여인은 한 명의 남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

지 않는다. 동물과 다름없는 재생산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 나가의

사회에서, 이 '신랑'이라는 혼인 제도를 연상케 하는 단어의 의미

는 무엇일까? 물론 그 의미는  우리의 혼인 제도와 같다.  여신의

신랑이라는 칭호는 그들 수호자들이 다른 여인이 아닌 단 한 명의

여인인 발자국 없는  여신에게만 충실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렇다면 나가 사회에서 이들  수호자 집단은 동물적인  동료들에

비해 고등한 자들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의 혼인 제도가 나가들의  난혼보다 고등

한 방식이라 믿는 것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자기중심적인  태도

다. 때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곤 하는 논리적 탐구는  아쉽게도

우리의 혼인 제도가 나가의 난혼보다 별로 우월할 것이 없음을 증

명해준다.

사람들은 동물보다 훨씬 성장이 느리다. 따라서 사람의 여자들은

성장이 빠른 동물들의 암컷에 비해 육아에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

자해야 한다. 이것이 여자와 미숙한 자손 양자에게 위험한 투자임

은 자명하다. 혼인 제도는 수컷에게 이 위험을  분담하게 하는 제

도다. 즉 먹이를 구해오고 적대적 환경에 맞서  투쟁하는 등의 역

할을 남자가 담당함으로써 보다 안전한 재생산을 꾀하려는 제도가

우리의 혼인 제도다. 이것은 이를 테면 암컷  어미-새끼의 기본적

인 가족 구조에 수컷이 편입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가들의 경우는 수컷이 담당할 역할을 사회적 체계가 대

신하고 있다. 심장적출법에 의해 나가 여자들은 자손을 충분히 보

호할 만큼 강력해졌으며 그들의 땅 한계선 이남에서  나가에게 불

리한 거의 모든 요소를 일소했다. 그 시점에서  나가 남자들은 자

신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가족

의 기본 구조인 암컷  어미-새끼의 관계에 수컷이 끼여들  자리가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역할이 감소되면 권력도  감소되는 것이 당

연하다. 그래서 나가의 사회는 여성이 지배한다. 나는 '여신의 신

랑'이라는 호칭에는 암컷 어미-새끼의 관계에서 추방되자 더 크고

더 위대한 것에 편입되고자 몸부림치는 나가 남자들의  슬픈 소속

욕구가 반영되어 있지 않나 추측한다.

그러니, 이 때려죽이고 싶도록 사랑스러운 손자 녀석아. 네게 있

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그 '남성미'를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면, 우

리 사회가 아직 남자들에게  '남성미에 대한 찬사와  존경'이라는

웃기는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남자들에게 수컷 역할을 맡겨야 할

만큼 원시적이라는 사실에 고마워하도록 해라! - 독설가로 유명했

던 우슬라 사르마크 부인이 혈기방장한 손자에게 들려준  애정 어

린 충고 中.

페니나 시에도가 마침내 설계도를 받아들였지만, 갈로텍은 도무지 안심

할 수 없었다.

나가의 대장장이가 다 그렇듯이 페니나 시에도는 자신의 천직에 한탄하

는 걸로 낮을 보내고 남자들에게 굽실거려야 한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

리며 밤을 소모하는 여자였다. 나가들에게 있어  나무를 태워야 일할 수

있는 대장장이나 그릇장이 등의 일에 대해 장인의 자부심을 논하는 것은

웃음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런  생산 활동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나가는

없지만, 대장장이나 그릇장이 앞에서 흠칫하지 않는  나가 또한 거의 없

는 형편이다.

페니나의 대장장이다운 비굴한  태도는 갈로텍을 언짢게  했다. 절대로

여자답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인데다 '할  바를 다했다. 우연히 되겠지'라

고 말하는 노기 하수언의 당당한 태도에  익숙한 갈로텍은 그 모습을 더

욱 견디기 어려웠다. 자신도 모르게 갈로텍은 딱딱하게 닐렀다.

[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걸 만들 수  있다고 닐러줄 필요는 없습니

다. 저는 이것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시에도.]

페니나는 비늘을 곤두세웠다.

[저를 그 이름으로 니르지 마세요. 신성한 분이여.]

[좋습니다. 페니나.] 갈로텍은 거북함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이걸 만

들 수 없다면 그냥 만들 수 없다고  닐러주면 됩니다. 저로서는 그 편이

더 기쁠 것 같으니까.]

[만들 수 있어요. 신비하기까지 한 물건이지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런데 여신의 신랑께서는… 이런 무례한  질문을 제발 용서해주시길 바랍

니다. 대장장이의 일에 대단한  소질이 있으신 것  같군요. 어떻게 이런

것을 설계하셨지요?]

버럭 화를 내려던 갈로텍은 바로 그것이  페니나 시에도가 원하는 것임

을 깨닫고는 분노를 억눌렀다. 갈로텍은 부드럽게 닐렀다.

[잘 설계되었습니까?]

[네? 예. 수십 년 동안 이 일을 해 온 분의 솜씨 같습니다.]

페니나는 한 번 더 갈로텍을 격동시키려  했지만 갈로텍은 부드럽게 대

처했다.

[초심자의 운이겠지요.]

페니나는 자신의 의도 - 대장간 일 같은 천박한 일에 소질이 있다는 식

의 농으로 여신의 신랑을 격노하게 함으로써 작은 쾌감을 맛보려 했던 -

가 들켰음을 간파했다. 페니나는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허튼 시도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대화는 사무적으로 진행되었다.

페니나는 사흘 내에 물건을 완성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런 다

짐에 놀라지 않는 갈로텍을 잠시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절대로 사흘 내에  만들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설계도가 워낙

완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페니나는 갈로텍이  그런 상황까지 예견할

정도로 기계 설계에 능하거나 설계도의 제작자가 다른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페니나는 둘 중  어느 것이 사실일지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대금에 대한 절충을 시작했다.  대금이 결정된 후 갈로텍

은 선불을 지불했다. 그리고 갈로텍은 방  한쪽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말

했다.

[페니나를 배웅해드리게.]

페니나 시에도를 데려왔던 남자는 천한 대장장이를 위해 32층을 내려갔

다가 다시 올라올 생각은  없었다. 따라서 남자는  계단까지만 페니나를

안내한 다음 다시 갈로텍의 방으로 돌아왔다.  갈로텍은 그럴 줄 알았다

는 듯 빙긋 웃었다.

[그로스. 저렇게 남자 같은 여자가 정말 하텐그라쥬 최고의 대장장이인

가? 굽실거리는 꼴이라니, 발이라도 핥을 것  같더군. 차라리 비아스 마

케로우 쪽이 훨씬 여자답던데.]

그로스는 비늘을 곤두세우며 신음했다.

[그래. 여자답지. 우리를 사랑하는  건지 죽이려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음탕한 니름은 관둬. 그로스.]

[음탕한? 그런 생각 따위 하고 싶지도 않아. 지금 나는 험악한 노동 환

경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는 것일 뿐이야. 그녀는 한 명이고 우리는 다섯

인데, 젠장. 지금 마케로우 가문에서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건 그

녀가 아니라 우리 다섯 명이야. 비아스  마케로우는 우리를 다 죽여서라

도 아기를 가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 같아. 내가  오늘 대장장이 건

때문에 나와야 한다고 닐렀더니 다른 네  사람이 나를 죽일 듯이 쏘아봤

다고 니르면 믿을 수 있겠어?]

[그로스. 충분히 음탕하게 들려. 그만두지 않으면 화를 내겠어.]

[그러면 이렇게 니르지. 언제쯤이면 그 짓을 그만둘 수 있겠나?]

[그런 질문이라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군. 물건이 완성

된 후 설치와 시험, 그리고 조작법에  익숙해질 시간을 생각한다면 대충

대엿새 정도면 충분할 거야.]

그로스는 흥분했다.

[대엿새?]

[그래. 그 이상은 걸리지 않을 거라고 보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군. 대여섯새 후에… 우리가 여신을…]

[제발 부탁이니 흥분은 가라앉혀. 그로스. 비아스는 영리해. 자네들 다

섯 명이 덤벼도 상대가 안 될 만큼.  그러니 그녀에게 어떤 내색도 해선

안돼.]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아니, 자신하지마. 지금부터 내가 내릴  명령을 들으면 그렇게 자신할

수 없을걸. 자네들은 이제 그녀의 이름을 알아내어야 해.]

그로스는 잠깐 놀랐다가 곧 실망한 표정으로 갈로텍의 가슴을 바라보았

다. 물리적으로는 정확한 방향이 아니지만,  상징적으로는 꽤 정확한 방

향이다.

[그 꼬마를 설득하지 못한 모양이군.]

[그러니 명령하는 거잖아.]

[쉬운 일이 아니야.]

[알아.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야.]

그로스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몇 시간 후, 스바치도  어깨를 늘어뜨렸다. 장소는  비슷하지만 고도는

다른 곳에서. 수호자 세리스마는 그런 스바치를 보며 침울하게 닐렀다.

[심장 파괴를 비밀로 해야  하는 이유들 중 가장  질낮은 것이지. 그걸

그렇게 사적인 목적에 사용하려는 사람들도 생길 테니까.]

[카린돌은 필사적입니다. 비아스가 가주가 되는  날이 자신의 사망일이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겉모습은 침착하고 이지적으로 보

이지만, 그 논리는 적출공포증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

러니 어떻게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비아스 마케로우에 대해 자네보

다는 더 잘 아는 것일 수도 있지. 그런 황당한 이유로 남동생을 베어 죽

이고 그 일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수호자를  토막낸 살육광이야. 나는 카

린돌의 심정이 이해되는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장 파괴를 어떻게

그런 일에 쓰겠나.]

[요청이 묵살되면 그녀는 그걸 고발할 텐데요.]

[설득하게. 그녀는 지금 공포 때문에 기본적인 산술을 못하고 있어.]

[무슨 니름이십니까?]

[비아스가 지금 당장 잉태한다 해도 그 자손이 장성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 게다가 그것이 남자라면 어느 정도  자라난 다음 다시 잉태해

야겠지. 비아스가 확고한 가주 계승자로 낙점되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릴

거야. 소메로 마케로우는 그 안에 분명히 잉태할 수 있어.]

스바치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왜 이런 일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살신이 일

어날 판국인데 서로를 죽이려드는 추잡한  자매 사이에 끼여서 꼼짝달싹

할 수 없다니.  제 꼴이 너무  우습습니다. 사람다운 일을  하고 싶습니

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잖나?  남은 건 하인샤 대사원에서 맡

아야 할 부분이야. 자네는 가서 카린돌을 진정시키게. 그것도 대단히 중

요한 일이야. 사람다운 일이고.]

[제가 지금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사람다운  일은 비아스에게 벌을 내

리는 겁니다!]

세리스마는 슬픈 눈으로 스바치를 바라보았다. 스바치는 자신이 카린돌

에게 동의하고 있음을 더 이상 세리스마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숨

기지 못했다.

[카린돌은 핑계거리가 필요하니 닐러준다는  식으로 정의를 거론했지만

그게 사실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비아스의 죄에 대해 어떤 처벌도 내

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녀 때문에 고통받은  자들이 몇입니까? 목숨을 잃

은 화리트와 수호자 유벡스, 누명을 뒤집어쓴  륜 페이, 그 때문에 동생

을 죽여야할 처지에 빠진 사모 페이, 그 사실을 모두 간파했다는 이유로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카린돌 마케로우.  다섯 명입니다. 비아스가 그렇

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나가라는 숲에서 사악한 연기를 내뿜으며 타고

있는 불씨입니다. 지금 그걸 꺼버리지 않으면  장차 거대한 산불이 숲을

덮칠 겁니다. 그녀의 심장을 파괴하십시오!]

세리스마는 거부의 눈으로 스바치를 바라보며 닐렀다.

[스바치.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야. 심장 파괴 또한 심판의 수단이 아니

고.]

[이건 심판이 아니라 자기구제입니다.  그녀 같은 자가  가주가 된다면

나가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우리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벌레

먹은 부위를 도려내어야 한다고 닐러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살신을 저지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살인은  저지할 수 없는 겁니까? 비아스

를 놔두는 것은 살인 행위입니다!]

[그만하게. 스바치. 내가 자네에게 불필요한 의심을 품게 되기 전에.]

[의심이라니오?]

[나는 자네가 카린돌에게  매료되었음을 지적하는 영광을  누리고 싶지

않군.]

스바치는 비늘을 부딪히며 세리스마를 바라보았다. 세리스마는 그런 스

바치를 바라보며 냉정하게 닐렀다.

[그렇지 않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나는 살인 행위를 저지하기 위해서 살인해야 한다는

식의 그 니름 같지도  않은 논리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측해야

하지?]

스바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리스마는 옷자락을 가다듬으며 닐렀다.

[그녀는 자네를 이용할 뿐이야, 스바치.]

[수호자님과 마찬가지로, 저도  모든 나가들에게  이용당하길 원했기에

지금의 제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 자네가 봉사해야 하는 대상은 모든  나가야. 스바치. 카린돌 마

케로우가 아니야. 그녀를 안심시키는 것이 모든  나가를 위한 올바른 선

택이야. 그녀에게 부화뇌동하여 비아스를 혐오하게 되는 것은 결코 모든

나가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닐세. 가서, 그녀를 설득하게.]

스바치는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대지는 이곳에 이르러 산과 강과 호수 같은 것을 빚어내던 창의성을 모

두 잃어버리고 좌절에 빠져버린 듯하다. 산이나 숲 그 어느 것도 없었지

만 지평선 또한 보이지 않는다. 완만하게  넘실대며 계속되는 구릉 때문

이다. 바람은 턱없이 낮아보이는 하늘에서 구름을 마름질하고 구릉의 사

면을 덮은 억새들을 거슬러 황야의 애가를 노래 부르게 하고 있었다.

구릉 위에 선 케이건은 묵묵히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선 티나한이 땅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고 륜은 아스화리탈의 꼬리

를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 케이건은 그들에게  완전히 쉴 것을 명령

했다.

잠시 후 남쪽 하늘에서 딱정벌레가 나타났다. 굉음과 함께 날아온 딱정

벌레는 억새들을 춤추게 하며  땅에 내려섰다. 나늬의  등에서 뛰어내린

비형은 케이건에게 곧장 걸어왔다. 티나한이 일어나 앉았고 륜은 자리에

서 일어섰다.

"한 시간 쯤 후엔 우리를 따라잡을 것 같군요. 두억시니들은 그보다 좀

뒤쳐져 있지만, 세 시간 안에 이곳까지 도달할 테고요. 어떻게 하죠?"

"두 시간 여유면 충분하오. 매복했다가 사모와 마루나래를 잡도록 합시

다."

비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 그녀가 정말 팔을 잘라서 휘둘러대면 어쩌죠?"

"자기 팔을 자르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소. 게다가 오른손으

로 자를 수 있는 건 왼팔인데, 오른손에  쉬크톨을 쥐고 있다면 잘린 왼

팔을 어느 손으로 주워들겠소? 쉬크톨을 버리고 왼팔을 주워들려고 해도

눈이 가려진 상태이니 역시 불가능한 일이오.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륜이 다가서며 말했다.

"케이건. 분명히 해두어야겠는데요."

"쉬크톨을 쥘 수 없도록 손만 자르겠다.  그리고 하인샤 대사원으로 데

리고 가겠어. 약속한다."

"누님은 눈이 가려져도 쉽지 않은 상대일 거예요."

"싸울 생각은 없다."

"싸우지 않아요?"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티나한. 비형이 사모와 대호의 눈을 가리

면 당신 철창으로 사모의  모피를 벗겨내시오. 7  미터니 거리는 충분하

오. 그 후 사모가 기절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이미 말했던 처치를 한 후

그녀를 싣고 이틀만 걸어가면 하인샤 대사원이오. 흑사자 모피는 륜에게

입히고 비형 당신이 그녀에게 아주 낮은  온도의 도깨비불, 그러니까 간

신히 의식을 유지할 정도의 도깨비불을 붙여주면 이틀 동안 그녀를 호송

하는 것도 크게 어렵지는 않을 거요."

"세 시간 뒤에 도착할 두억시니들은 어떻게 하지요?"

"그들은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소. 하지만  그들이 정말 나가와

도깨비, 레콘, 딱정벌레로 이루어진 무리를  추적하고 있는 거라면 대사

원에서 우리가 해산해버리면 그만일 거요. 그러면  그 불쌍한 자들은 목

표를 상실하게 되는 거지. 그래서 그들이 다시 남쪽으로 돌아가버린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거요."

륜과 티나한, 그리고 비형은 케이건의 계획에서 어떤 위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계획의 완전성과 안전성을 칭찬했다.

그리고 세 시간 후, 그들은 계획을 완전히 포기했다.

사모 페이는 앞쪽 하늘에서 나타나 그녀를 정찰하고 돌아간 딱정벌레를

놓치지 않았다. 사모는 준비된  함정으로 뛰어드는 괴벽을  부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케이건은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할 거라는 것까지 예견

했으나 뒤에서 두억시니들이 추적하고 있으니 속도를 늦추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모는 케이건이 그런 생각을  할 거라는 것까지 예견

한 다음 과감하게 멈춰섰다.

'나가, 도깨비, 레콘, 딱정벌레로 이루어진  무리를 쫓고 있어. 나가와

대호가 아니야.'

마루나래는 그런 사모의 결정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툴툴거

렸고, 두어 시간 후 저 멀리서 두억시니들의 냄새가 다가오자 그런 투덜

거림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사모 또한 쉬크톨을 뽑아들지 않을 수 없었

다.

평원을 뒤덮으며 다가온 두억시니들은 그녀와  마루나래를 발견하자 속

도를 늦추었다. 거리를 백 미터 쯤  남겨둔 곳에서 두억시니들은 완전히

멈춰섰다. 그리고 시구리아트 유료도로에서 나섰던 머리 둘 달린 두억시

니가 앞으로 걸어왔다. 마루나래의 등 위에 앉아있었기에 사모는 두억시

니의 얼굴을 거의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사모는 쉬크톨을 도로 꽂아넣었다.

사모는 두 손으로 마루나래의 머리를 누른  채 두억시니를 조용히 응시

했다. 마루나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앞발의 발톱을 곤두세웠다.

사모는 계속 마루나래를 달래며 두억시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머리가

둘이라 양쪽을 번갈아 보아야 했고, 결국  사모는 가운데 달려있는 오른

손을 바라보기로 했다.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는 사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서로를 돌아보았

다.

"나가 태운 대호."

"대호 탄 나가."

긴장된 순간이었지만 사모는 이 상반된, 하지만 똑같은 해석에 잠시 미

소지었다. 두억시니의 두 머리는  서로를 향해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

다. 그 머리들은 다시 사모를 바라보고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나가 태운 대호!"

"대호 탄 나가!"

사모는 저러다가 싸우겠다는 약간 한가한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싸

운다 해도 어느 팔이 어느 머리의 편을 들지 알 수 없었고, 따라서 한가

한 생각은 곧 복잡한 고민거리로 발전했다.  사모가 그런 불필요한 상념

을 떨쳐버렸을 때 두억시니 또한 그런 토론이 무익하다는 결론에 도달했

다.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는 그녀의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사모는 상당한 긴장감을 맛보며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렸다. 두억시

니들은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사모의 주위를

지나쳐 달렸다. 마루나래는 거리에 들어오는  모든 두억시니를 후려치고

싶어 안달했다. 온힘을 다해 마루나래를 진정시키며 사모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리고 두억시니들 틈에 섞여  달렸다. 두억시니들은 그런 사모

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마루나래도 조금씩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사모와 마루나래는

삼천 명의 두억시니들과 그들이 일으키는 먼지  속에 몸을 감춘 채 달렸

다.

지평선을 뒤덮은 먼지구름이던 것이 두억시니들로  바뀐 시점에 케이건

은 고민을 시작했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거리였지만 탁 트인 평야인지라

실제 거리는 꽤 길었다. 케이건은 두억시니들이  도착할 때까지 반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비형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도망칠까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소."

케이건은 다시 나늬에 올라탔고 륜과 아스화리탈은 티나한의 어깨에 올

라탔다. 두억시니들과의 거리를 벌려놓으며 일행은  파름산을 향해 달렸

다.

이틀 후, 일행은 파름산의 언저리에  도달했다. 두억시니들과의 거리를

반나절 정도로 떨어뜨려두는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일행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비형은 저 유명한 오솔길을  걸어올라가면서도 꾸벅꾸벅 졸았

고 티나한마저 비몽사몽간에 일주문을 박살낼  뻔했다. 하인샤 대사원의

일주문은 꽤 높았지만 티나한의 철창도 지나치게 길었다. 케이건이 제때

철창을 눕히라고 지시하지 않았다면 티나한은  고가람의 유서 깊은 얼굴

에 꽤 큼직한 흉터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륜은 기쁨을 느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기쁨이 아니

라 울창하면서도 독특한 숲을 보는 것이 그를 즐겁게 했다. 본당에 이르

는 삼문 주위로 늘어선 나무들은 장엄했다.  장쾌하게 뻗은 나무들 중에

는 둘레가 세 아름이 되지 않는 나무가 없는  듯했으며 어떤 것은 열 아

름도 넘을 것 같았다. 키보렌의 나무들이 그 자체로 약동하고 있다면 파

름산의 나무들은 꼿꼿하며 엄숙했다. 저 높은  곳에 늘어진 가지들은 햇

빛을 선택적으로 통과시켜  산사를 찾아드는 이들에게  정순하고 고아한

빛을 머금게 했다. 마침내 숲이 갈라지며 마지막 문을 통과했을 때 륜은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기쁨보다 아쉬움을 느꼈다.

경내는 고요했다. 흙이 단단하게 깔린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간 케이건

은 곧장 법당 쪽으로  걸어갔다. 법당 앞에 선  케이건은 합장하며 짧게

목례했다. 고개를 든 케이건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일행들을 발견하

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사찰을 찾는 예의요.  다른 일을 보기 전에  법당에 먼저 인사를

올려야 하오."

비형과 륜이 황망히 합장했다.  티나한은 왜 건물에 대고  절을 하냐고

투덜거렸지만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는 비형의  표정을 견디다 못해 마지

못한 듯 합장 반배했다. 그 때 저쪽에서 짧은 탄성이 들려왔다.

마당 저편에서 승려 한 명이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케이건이 그를

향해 목례할 때 티나한이 반가운 얼굴로 외쳤다.

"야, 너! 잠깐. 이름이 뭐더라."

"오레놀입니다. 드디어 오셨군요, 여러분!"

반갑게 두 손을 내밀던 오레놀은 륜의 어깨를  보곤 크게 당황했다. 거

의 넋이 나간 듯한 그 얼굴을 보며  일행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 후에야

겨우 예의를 생각할 수 있게 된 오레놀은 황급히 말했다.

"오레놀입니다. 당신이 륜 페이지요?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듣던대로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시군요." 거기까지가 오레놀이 가진 인

내심의 한계였다. "그런데 어깨에 얹고 계신 그것… 그것… 정말로?"

"예. 용입니다."

"맙소사!" 오레놀은 경악했다. "맙소사! 그 용을 당신이 발견했군요!"

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오레놀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이 조용히 끼여

들었다.

"오레놀 대덕. 그 용이라는 건 무슨 뜻이오?"

"아, 그러고보니 제 말이 좀 이상하게 들렸겠군요. 용서하십시오. 저는

용이 개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돌아오시면 용의

수탐을 부탁드릴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맙소사. 이렇

게 데려오시는군요."

"어떻게 용의 개화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오?  용인이 있었다는 말은 아

닐 텐데."

"용인이 있었습니다. 선원에서 참선 중이던 사람들 중에 군령자가 하나

있었거든요."

케이건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륜은 아스화리탈의 꼬리를

붙잡으며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오레놀을 바라보았다. 오레놀은 그 모습

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 용은 당신을 따르는군요. 당신이 그 용을 발견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책임지고 그 용을 잘 성장시켜야겠군요."

혹 승려들이 용을 뺏으려드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던 륜은 그제야 안심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레놀은 다시 케이건을 향해 말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정말 저희들을 놀라게  하시는군요. 저희들이 부탁했

던 일을 완수하시고  그에 덧붙여 용까지  데려오시다니. 따라오시지요.

여러분들이 쉬실 암자를 준비해두었습니다."

"고맙소. 오레놀. 그런데 조금 전 내가 당신들을 놀라게 한다고 말했는

데, 그건 정확한 지적이오. 내가 데려온 것이 나가와 용만이 아니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케이건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가 암살자 한 명도 뒤따르고 있소."

"그건 알고 있습니다. 침묵의 도시로부터  전갈을 받았습니다. 사모 페

이지요?" 오레놀은 측은한 얼굴로 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쇼자인-

테-쉬크톨."

륜은 놀라면서도 슬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레놀은 진심이 깃든 목

소리로 말했다.

"저희들이 당신을 보호해드릴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요. 그 나가 암살자는 대호를 타고 올 테니까."

"대, 대호요?"

"그렇소. 그리고 또다른 자들이 반나절 쯤 후엔 여기에 들이닥칠 거요.

삼천 마리의 두억시니요. 우리에게 이상한 길친구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

고 생각해도 좋소."

오레놀은 퍼렇게 질렸다.

철혈암은 본당 뒤편으로 한참 올라간  곳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거대한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넓은 마당을 두어 암자 전체에는 햇빛이 담

뿍 쏟아지고 있었다. 쥬타기 대선사는 철혈암의  마루에 앉아 일행을 기

다리고 있었다. 대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일행을  맞이했지만 그 또한 륜

의 어깨에 앉아있는 아스화리탈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리고 두억시니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일행이 인사를 마치고 마루에 앉자 암자에  딸린 부엌에서 오레놀이 다

과를 내어왔다.

륜은 자신의 앞에 놓여진 쥐를 보고 놀랐다. 놀랍게도 대사원의 승려들

은 살아있는 쥐의 다리를 묶어서 륜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비형을 위한

것이 분명한 구운 감자가  놓여졌으며 커다란 함지에  가득 담긴 곡차도

나왔다. 안타깝게도 그것들이 사찰에서 준비되기  어려운 음식들이며 따

라서 승려들이 극진한 대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케이건

뿐이었다.

대선사는 케이건에게 말했다.

"반나절 뒤에 도달한다고?"

"그렇습니다. 대선사님."

"그들이 너희들을 해칠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냐?"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왜 그런 목적을 가지게 된 거지?"

"우리가 자기들의 신을 죽였다고 오해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신을 잃었다는 거지요."

담담하게 말하던 케이건은 대선사의 낯빛이 확  바뀌는 것을 보곤 약간

놀랐다. 대선사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 자들은 어째서 그런 오해를 한 거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륜의 해석으로는 그  유해의 폭포는 륜의 기

억을 읽고 그런 추측을 한 것 같습니다."

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기억 속에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 피라미드 안에 있던 나가는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 누님도 있었지요.  그 유해의 폭포는 누님의

기억을 읽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는데요.  그 유해의 폭포는 군체이

다 보니 저와 누님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대선사와 오레놀은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륜과  케이건을 쳐다보았다.

그 때 오레놀이 외치듯 말했다.

"그 피라미드 안에 있던 나가가 당신과 당신 누나 뿐이었습니까?"

"글쎄요. 확실하지가 않은데요. 어쩌면 다른 나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

습니다. 누님은 제게 화리트의 동료를 만났던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레놀은 탄성을 터뜨렸고 대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이 조용히

말했다.

"왜 살신이니 어쩌니 하는 기이한  이야기에 신경쓰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 이야기가 끝나면 자네도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일단은 급한

불부터 꺼야겠군. 케이건 드라카. 아무래도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

는 것 같구나."

"삼천 마리의 두억시니들을 저지해야 합니까?"

"그렇다. 할 수 있겠느냐?"

티나한과 비형, 그리고  륜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대선사를 바라보았

다. 하지만 케이건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행은 조금 전 대선사에게  보내었던 표정을 그대로  케이건에게 돌렸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니?  대선사마저도 굴곡 없는 목소리로 긍정하는

케이건에게 당황했다. 케이건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대선사는 조건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조건이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제게는 삼천

마리나 되는 두억시니를 저지할 수  있는 물리력이 없습니다." 티나한은

그 말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진 케이건의 말에

티나한은 부리를 쩍 벌리고  말았다. "그러나, 모두 죽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대선사와 오레놀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모, 모두 죽인다고?"

"그런 조건이라면 시도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들의 눈이 비형에게로 돌아갔다. 비형은 기겁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저, 저, 저, 저를…"

"아니오."

"그, 그러니까, 절대로, 절대로…"

"아니오."

"그런 건, 그런 건 절대로, 견딜 수, 승낙할 수…"

"아니오."

"정말 아닙니까?"

"그렇소."

일행은 케이건의 계획이 '비형을 두억시니들의 앞으로 끌고 간 다음 피

를 한 바가지 뒤집어씌운다'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

건은 다시 한 번 부정했다.

"당신이 추측하는 것 같은 그런 방법은 쓰지 않소. 비형. 나도 죽게 될

테니."

"그럼, 그럼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비형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케이건은 쥬타기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그 조건으로 되겠습니까?"

"이 사찰의 앞마당 같은  곳에서 삼천이나 되는 생명을  학살하는 것을

허락하라는 말이구나."

"저는 그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억시니의 접근을 저지하기 위

해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그것뿐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른

방법은 모르겠습니다."

쥬타기 대선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두 무릎에 얹혀진 그의 주먹이 부르

르 떨렸다. 륜의 눈엔 대선사의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이 뚜렷하게 보

였다. 쥬타기 대선사는 어금니를 깨문 채 말했다.

"그 방법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벽월암(碧月庵)에 모셔졌던 이주무 선사의 무구들은 여전히 잘 보관되

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잘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그거야 선사의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해 보관

하고 있는 것일 뿐 무슨 신이를 부리는 물건은 아니지 않느냐?"

"신기(神器)가 아니라도 신통(神通)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 무구들

은 이 사원에서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무기라기보다는 유

품이지만, 어쨌든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한 시간 내로  준비를 마칠 수

있습니다."

대선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한 시간이라고?"

"예."

"나로선 한 시간 동안 준비하여 삼천 명을 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

지 짐작할 수도 없구나. 하지만 잘됐다.  먼저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겠

구나."

그리고 대선사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모여야 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완수해야 할 사명

에 대해 이야기하겠소이다. 물론 여러분들이 사정을  알고 나서 이 화상

을 대신하여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오. 죄는 이 화상이 이고

갈 거요. 결정은 내가 내릴 거요. 다만, 지금으로선 도저히 결정을 내릴

수가 없소."

비형은 쥬타기 대선사가 수천의 생명을 죽이는  일을 곧장 거절하는 것

이 아니라 '결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 대단히 놀랐다. 그가 알기로

머리를 깎는 킴은 거의 도깨비만큼이나  살생을 싫어하는 킴들이기 때문

이다. 대선사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오. 그럼으로써 결정을 내릴  근거를 찾아보려는 거지. 여러

분들이 원로에 피로하여 곧장 쉬셔야 되지 않다면…"

"륜은 그 일 때문에 이곳까지 왔어. 당장 듣고 싶을 거야."

티나한이 외치다시피 말했다.  륜은 자신의 말을  대신해준 티나한에게

감사의 목례를 보내었다. 비형 또한 빛나는 눈으로 대선사를 바라보았고

케이건도 반대하지 않았다. 대선사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

다. 그리고 대선사는 덩치 큰 레콘을 올려다보았다.

"티나한."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대비하여 함지에 담긴  곡차를 사발로 뜨던 티나

한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응? 왜?"

"그대 종족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소."

티나한은 당황했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과 나가들

이 펼쳐온 비밀스러운 계획이 레콘에  관련된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어쨌든 레콘이라는 종족은 비밀과 음모 등과 연관지어 생각하기

엔 지나치게 담백한 자들이다. 티나한은 사발을 내려놓고는 긴장하여 수

염볏을 비틀었다.

"우리 종족? 레콘이 어쨌다고?"

"티나한. 그대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사원이 어디  있는지 아시

오?"

"모르지. 그게 왜?"

긴장 탓에 곧장 대답한 티나한은 조금 후에야 그게 그렇게 당당하게 말

할 것까지야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스스로 깨달은 것은 아

니다. 쥬타기 대선사가 다시 질문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그걸 궁금하게 여겨본 적은 있소?"

"없는데."

"혹, 다른 레콘들이 궁금하게 여길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있소?"

"그럴 녀석이 있을까?"

"그렇다면, 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대들은 자신들을 돌보

아주시는 여신의 사원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별  관심이 없는  거요. 맞

소?"

티나한은 벼슬을 붉히며 말했다.

"어, 굳이 그렇게 말하겠다면… 하지만 아무도 모르니 어쩔 수 없잖아.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나도 가끔 찾아가보려는 생각 쯤 할 수 있을

지 몰라. 그래. 그렇지. 사원에 가서 여신께 하늘치의 등에 올라가는 방

법이라도 알려달라고 기도했을지 모르지.  나는 정말 그러고  싶을 때가

있어. 하지만 누구한테 물어봐도 모르는걸.  우리가 여신께 관심이 없는

게 아냐. 누구한테 물어봐도 모르니까 묻는 걸 그만둔 거지. 잠깐. 너는

그럼 그게 어디 있는지 아냐?"

대선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오."

"거봐! 아무도 모른다니까."

"하지만, 몇몇 나가들이 알게 되었소."

"뭐?"

"나가들이 키보렌의 모처에서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사원을 발견했

소."

티나한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게 키보렌에 있었군! 그래서 아무도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거야!"

"아마 그런 것 같소.  그런데 그 사원을 발견한  나가들이 실로 엄청난

일을 생각해냈소."

"엄청난 일?"

"어떤 레콘도 찾아들지 않아 거의 버려진 듯한  그 사원을 보며 나가들

은 신도를 잃은 신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었을 거요. 그런데, 그 말을

뒤집어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자들이 떠오르오. 신을 잃은 자, 두억

시니 말이오. 간단히 말해서, 나가들은  레콘들을 두억시니처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낸 거지."

경악 때문에 티나한은 말을 잃었다. 비형과  륜, 그리고 케이건도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쥬타기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대선사의  얼굴은 사납고

거칠게 바뀌어 있었다. 그는 불을 토해내는  듯한 고통스러운 얼굴로 외

쳤다.

"그렇소. 이 자들의 대담무쌍함에 갈채를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 드는구려. 그들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죽일 계획을 짜고

있소!"

철혈암이 거세게 울렸다.

티나한이 주먹으로 마루를 내리치자  그 주먹은 그대로  마루를 꿰뚫고

아래로 쑥 들어갔다. 함지에  담겨있던 곡차가 거세게  출렁이고 사람들

또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티나한은 마루에서 주먹을 뽑아내

며 외쳤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믿으라는 거냐!"

"나도 믿기 어려웠소. 티나한. 어떤 양심적인 수호자가 그 소식을 내게

알려주었을 때, 나는 그 수호자가 불쌍하게도  돌아버린 것이 아닌가 의

심했소."

수호자라는 말에 륜의 눈이 번득였다. 대선사는 진중하게 말했다.

"그렇소. 이 모든 일은 하텐그라쥬의 어떤  양심적인 수호자의 손에 의

해 이루어진 일이오. 동료들의 무서운  계획을 간파했지만, 그는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소. 그래서 그는  외부에서 조력을 찾아내기로 결심했지.

그것이 바로 우리였소."

또다시 마루를 내리치려던 티나한은 케이건의  시선에 가까스로 주먹을

멈췄다. 티나한은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목깃털을 잔뜩 움켜쥐

며 외쳤다.

"어떻게 신을 죽이냐!"

"바로 그걸 알아내야 하오."

"뭐? 무슨 소리야!"

"그 수호자는 동료들의 계획을 간파했지만 정확한 방법은 알지 못했소.

그래서 우리가 그들이 사용할 방법을 알아내어야  하오. 그것을 막기 위

해서. 그런데, 신을 죽일 방법을 알아내려면 누구에게 물어봐야겠소?"

"신 자신, 혹은 신체."

사람들은 케이건을 쳐다보았다. 케이건은 곡차를 떠올리며 말했다.

"논리적 귀결은 신 자신 혹은 신체입니다."

쥬타기 대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의 말대로요. 하지만 신체는 찾아낼 수 없소. 그러니 우리는 신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오."

비형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신체가 뭡니까?"

한 때 수련자였던 륜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신체는 화신을 일컫는 다른 말입니다. 아니, 화신 이전 단계라고 해야

겠군요. 비형."

"화신 이전 단계요?"

"예. 신체에는 그 자신의  영과 신이 머물러 있습니다.  군령자와 같지

요. 다만 군령자와 달리 신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신께서 겉으로 드러났을 경우에 화신이 됩니다."

"어, 신께서 사람 속에 계신다고요? 저 천상이나 초차원이 아니라?"

"글쎄요. 봄은 새싹 속에  있습니까? 새싹 속엔 분명히  봄이 있습니다

만."

륜의 대답은 비형을 만족시켰다. 륜은 계속 말했다.

"신체를 통해 신께서는 자신이 보살피는 종족들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

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겠군요. 비형  당신에게 딱정벌레들을 잘 키우

고 싶은 소망이 있다고 치죠.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딱정벌레보다 고등

하다고 해도 바로 그  고등성 때문에 딱정벌레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딱정벌레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 자신이 딱정벌레

가 되어보는 것일 겁니다. 그러면 딱정벌레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싫

어하는지 간단히 알 수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보다 한없이 우월한

신께서는 바로 그 우월성 때문에  우리가 저지르는 황당무계하고 어이없

는 일을 용납하시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체에 머물러 우리

를 살피시는 겁니다."

비형은 감탄했다. 륜은 대선사를 잠깐 보고 말했다.

"누가 신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자신도 알지  못하니까요. 마치

자신이 군령자라는 것을 모르는 군령자라고 할까요. 제가 알기로 군령자

의 시작도 바로 이 신체에서 비롯된 거라는 설이 있습니다. 하나의 몸에

여럿의 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것을 시험해본 거죠.

그리고 성공한 겁니다."

"하지만 군령자는 죽기 전에 전령하지 않으면 안되잖습니까?"

"예. 신체 또한 전령과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신체가 죽을 때 신께

서는 다른 몸으로 옮겨가십니다. 역시 누군지는 알 수 없지요."

쥬타기 대선사가 말을 받았다.

"륜 페이의 설명에 덧붙일 것은 하나밖에 없을 것 같소. 신체에게 말을

하면 그건 신에게 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하지만 누가 신체인

지 알 도리가 없소. 그러니 신 자신에게 말을 해야 하오."

화를 참지 못한 티나한이 외쳤다.

"그렇다면 물어봐! 너희들의  어디에도 없는 신에게  물어보라고. 신을

죽인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

"어디에도 없는 신께서는  그런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소이다. 티나한.

사실 신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언질을 주시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소.

하지만 단 한 종족, 신과의 관계가 각별한 종족이 있소. 그 종족의 사제

들은 여신의 신랑으로 불리오. 그만큼 각별하다는 거지."

사람들의 눈이 이번엔 륜에게  모였다. 륜은 비늘을 곤두세운  채 말했

다.

"발자국 없는 여신의 이름을 아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

어요. 그렇다면 그게…?"

"그렇다네."

"왜… 왜 제가?"

"우리는 논리적 귀결로서 발자국 없는 여신께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결론

을 얻었네. 신을 부르려면 당연히 사원이어야 하지. 그런데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사원에서는 할 수 없지.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즈믄누리에

서도 할 수 없어. 성주와 어르신들만이  즈믄누리의 마지막 방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심장탑에서도 할 수 없어. 적들이 그것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남는 곳은 이곳뿐이지.  어떤 나가가, 신명을 가

진 나가가 이곳에 와서 여신을 부를 수밖에 없어. 그래서 화리트 마케로

우가 이곳으로 오게 되었지."

화리트의 이름에 륜은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아스화리탈을 끌어안

았다. 아스화리탈의 꼬리가 륜의 목을 감고 올라가 그 뒤통수를 살짝 쓰

다듬었다. 대선사는 선고하듯 말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아는 끔찍한  사태 때문에 자네가 대신  왔네. 륜 페

이. 자네는 화리트 마케로우 대신 이곳에서  발자국 없는 여신을 불러야

해. 그리하여 여신께 신을  죽이는 방법에 대해  물어봐야 하네. 그것을

막기 위해서."

끔찍한 침묵 속에서 찍찍거림이 들려왔다. 륜의 앞에 놓인 쥐가 몸부림

을 치고 있었다.

"이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입가를  훔치며 빈 사발을 내

려놓고 있었다. 사람들을 숨막히게 만들고 있는  흥분도 유독 그만은 비

켜가고 있는 것 같았다. 케이건은 대선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살신이라는 말에 놀라신 건지 알겠군요.  그리고 그 두억시니가 어

떻게 그런 괴상한 오해를 하게 되었는지도.  그 두억시니는 화리트의 동

료라는 자의 기억을 읽은 것이겠군요. 그  화리트의 동료라는 자는 아마

도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죽이려는 계획에 대해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이득이 없는 일입니다."

"이득이 없다니, 무슨 말이냐?"

"한계선 북쪽에 사는  레콘들을 두억시니로 만들어봤자  한계선 남쪽에

있는 나가들에게 어떤 이득이 있습니까?"

티나한은 깃털을 곤두세운 채 케이건을  쏘아보았다. 대선사는 가슴 깊

은 곳에서부터 탄식했다.

"언제나 냉정할 수 있는 네 능력이 정말 부럽구나. 케이건. 이럴 때 손

익을 생각할 수 있을만큼 냉철한 자들은 세상에 나가와 너뿐일 거다."

"사소한 재주입니다. 하지만 쇠붙이 따위보다는 훨씬 유용한 무기지요.

잃을 수도, 뺏길 수도 없는 무기니까."

"그래. 알겠다. 설명해주마. 잠시만. 목이 마르구나."

대선사는 곡차를 떠 한 모금 마셨다. 티나한 또한 목이 탄다는 듯 거푸

곡차를 마셨다. 대선사는 심호흡을 한 다음 설명을 계속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고 하오. 여러분들이야말로 그 이야기를 잘 아실

거요. 우리는 그 옛이야기에 따라 구출대를 구성했소."

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케이건이 설명해줬습니다.  케이건이 길잡이이고  제가 요술쟁이,

그리고 티나한이 대적자일 거라고 하더군요. 맞습니까?"

쥬타기 대선사는 미소지었다.

"정확하오. 여러분들의 모험이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모험에 대해

한 가지 질문을 하겠소. 만약 여러분들  중에 티나한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소?"

티나한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사모 페이가 집어

던진 악어 앞에서 도망쳤던 일, 대피소를  만들고 농성하여 일행의 여행

을 늦추었던 일, 무적왕과 선지자 앞에서 도망쳤던 일 등이 차례로 떠올

랐다. 티나한은 왼팔의 깃털을  비틀며 초조하게 비형과  륜을 바라보았

다.

비형은 씩 웃었다.

"우리는 그 피라미드에서 죽었을 겁니다. 그렇잖아요, 륜?"

"그렇습니다. 티나한이 없었다면  우리는 두억시니가  되었을 겁니다…

티나한? 설마 우는 겁니까?"

"내 눈빛이 영롱하여 네가 착각한 거다!"

티나한의 말 끝부분은 거의 계명성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륜은 눈 주위

의 체온을 보는 자신이 설마 착각했겠느냐는  말은 꺼내지 않는 편이 신

상에 이롭겠다고 판단했다. 쥬타기 대선사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서로를 도우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어 기쁘오. 여러분들 중 한 명이  없어졌을 때는 지리멸렬하게 된다는

것을 유념해주길 바라오. 셋이 아니면 하나를 상대할 수 없소. 그렇다면

잠시 과거의 이야기를 하겠소. 먼 옛날,  나가들은 다른 세 종족을 상대

로 전쟁을 일으켰소. 나가들은 모든 세상에 그들의 숲을 만들려고 했지.

하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소."

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대확장 전쟁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륜. 셋이 하나를  상대했기에 그 전쟁에서 나가는  이기지 못했

네."

륜은 놀란 얼굴로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

다. 륜은 케이건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대선사님. 솔직히 그건 나가가 이긴 전쟁이었습

니다. 우리는 세상의 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셋이 하나를 상대했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제가 아는 바와는 좀 다르군요. 나가들과 주로 싸웠던

것은 아라짓 전사와 키탈저 사냥꾼 등 주로 인간들이었습니다. 도깨비들

은 전투를 피했고 레콘들은  용맹스럽게 홀로 싸웠습니다.  셋이 하나가

되지 못했기에 나가는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 나가들을 막은 것은 뭐지?"

"나가들을 막은 것은 날씨입니다. 하나가 된 셋이 아니라."

"바로 그거야. 륜 페이."

"예?"

"날씨 말이야. 셋이 하나를 상대했지. 그리고 한계선이 생겨났지."

어리둥절해 하던 륜은 곧 온몸의 비늘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케이

건이 극히 험악한 얼굴로, 하지만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자국 없는 여신을 상대해오던 세 분의 신  중 한 분이 없어지면, 날

씨가 바뀌는 겁니까?"

"그렇다네, 케이건. 세상의 모습이 바뀌게 되지. 레콘을 두억시니로 바

꿔봐야 나가에겐 이득이 없다고 했던가? 그 말이 맞네, 케이건. 하지만,

세상이 좀 더 더워지면 어떨까?"

대선사의 말에 일행은 거꾸로 추위를  느꼈다. 케이건은 대선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한계선에 가로막혀 중단되었던 대확장 전쟁이 재개되겠군요. 700여 년

만에."

"키탈저 사냥꾼들의 전쟁을 뺀다면 800여년  만이겠지만, 그렇다네. 케

이건."

경악과 공포, 분노, 그리고 침통함이 좌중을 가득 채웠다. 티나한은 모

든 자들을 향해 화를 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고 비형은 멍한 얼굴로

마당에 있는 나늬를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팔짱을 낀 채 함지 속의 곡차

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속에 떠오르는 어떤  과거를 보는 것 같은 눈길

이었다. 그 때 륜이 말했다.

"확인해야겠습니다."

대선사와 오레놀이 륜을 쳐다보았다. 륜은 비늘을 곤두세운 채 말했다.

"저는 화리트가 아닙니다. 화리트는 모든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저는 지

금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해야

겠습니다. 대선사님은 그 '양심적인 수호자'와의 연락 수단을 가지고 계

신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륜의 말에 티나한과 비형은  숨통이 약간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

다. 그들도 세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그 말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은 당연하군. 그 말을 확인받고 싶겠지. 그래. 연락 수단을 가

지고 있어. 뱀단지야."

"사어입니까? 그걸 어떻게 가지고 계시죠?"

"어떤 나가가 이곳까지 뱀단지를 가지고  왔지. 그런데 자네, 정신억압

을 할 수 있나?"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렵겠군. 우리는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네. 물론 그걸 고려

해서 저쪽에서는 상세하게 말하긴 하지만, 이쪽에서는  원할 때 말을 걸

수가 없어. 뭘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야."

륜은 신음을 흘렸다. 비형은 사어가 무슨 말인지  알고 싶어 안달난 얼

굴이 되었지만 감히 끼여들지는 못했다. 그  때 륜이 케이건에게로 고개

를 홱 돌렸다. 케이건은 이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륜이 바라볼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그리고 륜은 케이건이 예상했으리라 믿었다.

"케이건."

"말해."

"아시다시피 제 누님, 사모 페이는  정신억압자입니다. 사어는 하실 수

없습니다만 그건 대선사님께서 가르쳐주실 수 있을 겁니다. 연락을 받으

셨으니 사어를 읽을 줄은 아시는 걸 테니까요."

"그렇겠군."

"제 누님을 데려와주십시오."

케이건은 시선을 대선사에게 옮겼다. 대선사는 질문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나, 케이건?"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이곳으로 오고 있을 거라는  것만 확신할 수 있

습니다."

"아무래도 이 또한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군. 할 수 있겠나?"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륜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 떠올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