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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5-4. 관련자료:없음 [53189]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21 01:09 조회:11396
눈물을 마시는 새.
5. 길을 준비하는 자 - 4
마루나래는 방바닥에 옆구리를 대고 두 다리는 제멋대로 뻗은 채 잠들
어 있었다. 거대한 코끼리 무리를 추적하는 꿈이라도 꾸는 건지, 마루나
래는 계속해서 그르릉거리고 이를 갈고 앞발을 꿈틀거렸다. 꿈 속 세계
에서는 코끼리의 두개골을 깨어버리는 일격일 것이 분명한 그 앞발의 꿈
틀거림도 현실의 사모에겐 별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사모 페이는
두 팔로 머리를 받치고 흑사자 모피로 하반신을 덮은 채 마루나래의 옆
구리에 누워있으면서도 불안은 느끼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살벌한 침대에 누운 채 사모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밖
의 광경도 만만찮게 살벌했다. 새벽이 다가옴에 따라 조금씩 밝아오는
하늘은 이따금씩 쇠뇌로 절단되곤 했다. 빠른 속력의 쇠뇌는 공기와의
마찰로 달아올랐기 때문에 사모에겐 뚜렷하게 보였다. 사모는 그 쇠뇌들
이 어디에 꽂힐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 반대방향에서 날아오르
는 돌멩이들이 보였을 때 사모는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사모는 지금껏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바보 같이 다리는 왜 만들어주었을까.'
사모는 허무에 봉헌된 의식 같은 그 무의미한 노동을 견딜 수 없었다.
한 때 지성이 있었고 아름다움을 느꼈고 도덕이 무엇일지 고민했을 자들
이 자신의 가치를 무한히 전락시키고 있는 모습은 그녀에게 참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사모가 자신의 고통을 베어내듯 나무를 베었기에 두억시니들은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도로를 만드는 인간들과 격심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물론 밤새도록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은 쇠뇌와 돌멩이였고 그나
마도 지금은 충분한 거리를 둔 채 상대편의 의지를 시험하듯 간헐적으로
쇠뇌와 돌멩이를 주고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모에겐 생전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사모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은 유료도로
당의 사람을 보는 관점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모든 요소가 무시되고 있
었다. 여행자의 품성과 지성과 감성 따위는 유료도로당에게 조금도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로지 여행자가 통행료를 지불하느냐 지불하지 않
느냐의 이분법만이 존재했다. 사람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일 수 있는 그
장면에서, 그러나 사모는 동시에 정반대의 의미도 발견했다. 여행자의
외모와 종족과 고향 같은, 어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
지만 본질적으로 사람다움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들 또한 유료도로당의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보좌관은 말했다. '저 두억시니들은 통행료 안 냈다.'
사모는 그 말을 뒤집어 보았다. '통행료를 내면 저들은 여행자다.'
케이건의 제안에 놀란 것은 그의 동료들뿐만이 아니었다. 당원들 또한
이 대담한 제안에 경악하여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좌관은 고개
를 가로저었다.
"그건 제안이 될 수 없소."
보좌관의 말에 당원들은 당황했다. 보좌관은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용감한 제안이라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소.
그건 우리로 하여금 도로 사용자의 안전을 무시하라는 말이잖소."
"우리가 산맥 반대편에 도달한 것이 분명한 시점에 관문을 개방하면 되
잖소?"
"도로를 떠난 다음에?"
"그렇소. 그 시점에선 우리는 더 이상 도로 사용자가 아니지요. 설마
도로를 떠난 다음에도 우리를 보호해야 하는 건 아닐 텐데."
"물론 그렇소. 당신들이 도로를 떠난다면 그 다음엔 당신들에 대해 우
리가 신경쓸 것은 아무 것도 없소. 그렇더라도 문제는 남아있소."
"어떤 문제요?"
"우리가 그냥 관문을 열어준다면 두억시니들에게 도로의 무임사용을 허
용하는 것이 되오."
"두억시니들은 요금 징수의 대상이 될 수 없소. 보좌관."
"우리 도로를 이용하는데?"
"당신들이 지금도 당신들의 도로 위를 흐르고 있는 빗물에게 통행료를
징수하는 건 아니잖소."
탁자 주위의 당원들이 낮은 탄성을 질렀다. 부리를 꽉 다문 채 대화를
듣고 있던 티나한 또한 케이건을 거들고 나섰다.
"케이건의 말이 옳다."
당원들은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은 수염볏을 쓰다듬으며 진지하
게 말했다.
"우리는, 아니, 최소한 나는 내 고민거리를 당신들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아. 그 두억시니들이 나를 쫓아온 거라면 그건 나와 내 철창이 해결해
야 할 문제다. 당신들이 통행료를 받은 것 때문에 우리를 보호하고 싶다
면, 케이건의 말대로 우리가 도로를 떠날 때까지 보호하면 되겠지. 그
다음에 두억시니를 통과시켜."
티나한의 말이 끝나자 비형 또한 말했다.
"그러세요. 보좌관님. 조금 전에 케이건이 빗물에게는 통행료를 징수하
지는 않는다고 말했는데, 제 생각도 그래요. 저렇게 규칙이 없는 자들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쏟아지는 빗물과 마찬가지잖아요. 두억시니들이 통
행료를 내지 않고 지나간다 해서 당신들의 규칙이 침해되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당원들의 눈이 자연스럽게 륜에게 옮겨왔다. 마치 당신이 말할 차례 아
니냐는 듯이 바라보는 당원들의 눈에 륜은 잠시 당황했다. 왼팔에 감긴
아스화리탈의 꼬리를 쓰다듬으며 륜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좌관님. 두억시니들은 신을 잃었지요. 그 자들에게는 규칙도 법칙도
없습니다. 저 두억시니들을 공격한다고 해서 저들이 대가를 지불하고 도
로를 이용한다는 당신들의 규칙을 이해하게 될 것 같지도 않군요. 나쁜
짓을 한 어린이를 체벌하는 건, 그게 나쁜 짓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
해서지요. 하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때릴 필
요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케이건은 그런 뜻에서 빗물이라고 말한 것 같
군요. 빗물에게 여기 내려라, 저기로 흘러라 하는 식으로 규칙을 가르칠
수는 없잖습니까."
탁자 주위의 고위당원들은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처
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분들의 말이 옳은 듯합니다. 이 분들은 지금 훌륭한 처신을 보여주
고 계십니다.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시
면서도 우리가 우리의 규칙을 포기할 필요도 없도록 하셨지요. 우리가
그 제안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 분들의 자존심과 배려의 마음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보좌관은 고위당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칠푼디."
"예. 보좌관님."
"나는 이토록 오만한 자들의 자존심을 별로 존중하고 싶진 않소."
탁자 주위로 당황과 놀람, 그리고 분노가 차례로 지나갔다. 비형은 어
리둥절한 표정이 되었고 티나한은 벼슬을 꼿꼿이 세운 채 보좌관을 노려
보았다. 그 눈초리의 예리함이라는 것이 시선으로 보좌관을 찔러죽일 것
같았다. 당원들도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거나 놀란 표정으로 보좌관을 바
라보았다. 칠푼디라 불린 당원은 약간 더듬거리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자들에게는 누구를 통행료 징수 대상으로 보고 누구를 징수 면제
대상으로 봐야 하는지 우리에게 지시할 권한 같은 것이 없소. 칠푼디."
칠푼디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은 정확히 케이건 일행을 향하고 있
었다. 케이건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보좌관을 응시했다. 보좌관은 단호
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여행자란 여행자 같이 생긴 자들이 아니오. 칠푼디. 여행자
가 무엇인지 말해주겠소?"
칠푼디의 얼굴에 당혹의 기색이 떠올랐다. 보좌관은 그런 그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칠푼디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이 차례로 다른 당원
들의 얼굴에도 떠올랐다. 그것은 자각의 표정이었다.
칠푼디가 말했다.
"여행자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그럼 우리 유료도로당은 무엇인지 말해주겠소?"
"우리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를 위해?"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보좌관은 천천히 케이건에게 고개를 돌렸다.
"케이건 드라카. 저 두억시니들은 목적없이 쏟아져 아무렇게나 흐르는
흙탕물이 아니오. 당신들을 쫓는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소. 그리
고 우리는 자신의 목적을 찾아 길을 걷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위해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이오. 그 목적이 무엇이든 상관없소. 우리는 그들의 목
적이나 꿈을 평가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
의지를 통행료로 확인하오. 통행료를 내지 않으면 우리가 준비한 길을
걸을 수 없소. 그들은 다른 길을 찾아야할 거요. 이건 말이오, 케이건.
완전히 저 두억시니들과 우리의 문제요. 저 두억시니들이 당신들을 쫓는
다고 해서 마치 크게 배려해준다는 듯이 그냥 통과시키느니 말라느니 말
할 권리가 당신네들에겐 없소. 그것은 참견이오. 그것도 오만한."
케이건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제안할 것이 없소."
결국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사모는 일출을 맞이했다. 남동쪽을 향하고
있는 그녀의 방 창문을 통해 사모는 왼쪽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바뀌어가
는 것을 보았다. 피로감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던 사모는 문득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비가 그쳤어?'
사모는 마루나래의 옆구리에서 내려왔다. 창가로 걸어간 사모는 비가
그쳤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사모는 두억시니들이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음도 확인했다. 이제 더 이상 쇠뇌와 돌멩이의 교환도 일어나지 않았
다. 어떤 치명적인 공격을 준비한 채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두 검객처
럼 유료도로당과 두억시니들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
보던 사모는 문득 륜을 생각했다.
'비가 그쳤다면 륜은 이곳을 떠날까? 아직까지 전투 상황이니 륜도 방
안에 갇혀 있는 걸까?'
사모는 선반에 둔 쉬크톨을 끌어내어 뽑아들었다.
잠시 후 사모는 륜이 요새를 떠나고 있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이런, 망할 놈들이!]
선반에서 옷을 끌어내린 사모는 그것을 황급히 걸쳤다. 손으론 옷을 졸
라매며 사모는 동시에 발가락으로 마루나래의 코를 간지럽혔다. 마루나
래는 거창한 재채기를 했지만 사모의 바람대로 일어나는 대신 반대쪽으
로 돌아누웠다. 사모는 화를 내며 마루나래의 머리 속에 백 개의 쉬크톨
과 백 개의 차돌을 집어넣은 다음 그것을 동시에 부딪혔다. "꺄옹!" 마
루나래는 기겁하여 일어나서는 사방을 경계했다. 수염을 꼿꼿이 세운 채
주위를 둘러보던 마루나래는 신발을 꿰어신는 사모를 보며 투덜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문을 부술까?' 사모는 잠시 고민했지만 전투 상황이면 감시자가 배치
되어 있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사모는 문을 쾅쾅
두드렸다. 잠시 후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는 더 크게 말하라고
외쳤다.
"왜 문을 두드리는 거냐고 했습니다!"
"네 종족으로 이루어진 패거리 떠났나?"
"조금 전에 떠났습니다."
"나도 가겠어! 문 열어!"
밖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다. 사모는 모포를 뒤
집어쓰고는 마루나래의 목에 매달리듯 대호를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몸의 온도를 높이려 애쓰며 사모는 문을 응시했다.
사모가 문을 부수려는 유혹을 느끼게 될 무렵 문이 열렸다. 그대로 문
으로 걸어가던 사모는 하마터면 안으로 들어오던 자와 부딪힐 뻔했다.
사모는 쉬크톨을 움켜쥐며 뒤로 훌쩍 뛰었다. 들어오던 자는 비무장이라
는 것을 보이려는 듯 재빨리 두 손을 들어보였다. 보좌관이었다.
사모는 쉬크톨을 놓으며 똑바로 섰다. 보좌관의 뒤쪽엔 몇 명의 당원들
이 더 있었다. 보좌관은 두 손을 든 채 방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들
어가도 되겠소?" 사모는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보좌관은 사모의 발을 보며 말했다.
"신발을 벗으셔야겠는데."
사모는 자신이 신발을 신은 채 돗자리를 밟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을 벗는 대신 보좌관에게 말했다.
"곧 나갈 거야."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좀 있소. 그러니 아무래도 신발은 벗으셔야겠
소."
"당신하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
사모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보좌관의 등 뒤에서 문이 다시 닫혔다. 문
을 잠그는 소리를 들은 사모는 보좌관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보좌관은
신을 벗은 다음 돗자리 위에 올라와 앉았다. 비무장인 노인이 바닥에 앉
기까지 하자 사모는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려웠다.
사모는 신을 벗어 노인의 신 옆에 놓고는 바닥에 앉았다. 그녀의 곁에
엎드리는 마루나래를 보던 보좌관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들은 땅의 냉기를 피하기 위해서 침대를 쓴다고 알고 있소. 방바
닥에서 자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으셨소?"
사모는 엄지손가락으로 마루나래를 가리켰다. 보좌관은 의아해다가 곧
탄성을 질렀다.
"대호를 침대로 쓰셨다는 거요?"
"푹신해.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당신을 우리 회의장에 부르고 싶었지만 우리 회의장은 저 대호가 올라
오기 힘든 곳이오. 계단이 좀 작아서. 당신이 저 대호를 통제하는 것 같
으니 대호와 당신을 떼어놓을 수도 없었소. 그래서 내가 온 거요."
"그래서?"
"저 두억시니들에 대해 아는 것을 설명해주기를 바라오. 우리가 저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저 두억시니들을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
보좌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인간에게 완전히 익숙하다 하기 힘든
사모가 깨닫기 힘든 정도의 작은 변화였다.
"이 도로에서 쫓아내는 것을 최선의 해결책으로 생각하오."
"최악의 해결책은?"
"전원 사살."
사모는 언짢은 기색을 띄었다.
"너희들이 날리던 꼬챙이로 두억시니를 전부 사살할 수 있어?"
"방침이 전원 사살로 정해진다면 우리는 그에 적합한 수단을 사용할 것
이오."
"여기엔 300 명의 당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저 두억시니는 3천 명이고.
열 배나 되는 인원을 어떻게 사살하겠다는 거지?"
"그건 우리가 염려할 문제고, 우리는 별로 염려하지 않소. 두억시니와
인간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일만 명의 적을 사살
한 적도 있소. 그 때도 우리 숫자는 300여명이었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군?"
"할 수 있소."
보좌관은 특별히 강조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사모는 보좌관을 바라보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만약 누군가가 그들을 대신하여 통행료를 지불한다면?"
보좌관의 눈에 다시 이채가 번졌다. 그러나 보좌관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그렇다면 그들을 통과시키겠소."
"통과시킨다고?"
"그렇소. 통행료를 받았는데 통과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소."
"두억시니들의 통행료가 얼마지?"
"은편 서른 닢."
"…뭐라고?"
"두억시니 하나 당 동편 한 닢. 모두 삼천이니 은편 서른 닢이오."
"두억시니의 통행료는 왜 그렇게 싼 거지?"
"신을 잃었기 때문이오."
"신을 잃었기 때문에?"
보좌관은 창쪽을 잠시 돌아보며 말했다.
"저 두억시니들은 목적을 가지고 우리 도로를 걸어가는 자들이니 여행
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소. 하지만 가장 귀중한 것을 잃은 자들에게 더
이상의 돈을 지불하라고 요구할 수 없소. 그래서 동편 한 닢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군."
사모는 침묵했다. 보좌관은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사모가 다시 말
했다.
"내가 받을 거스름돈이 은편 스물 다섯 닢이었지. 그렇다면 내가 은편
다섯 개만 더 주면 그들의 통행료가 되는 건가?"
"더 주실 필요는 없소."
"왜지?"
"당신들의 금편은 우리 것보다 조금 무겁더군. 계산해봤더니 당신에게
내어드릴 거스름돈은 은편 서른 닢이었소."
사모는 실소하고 말았다. 웃음을 거둔 사모는 보좌관을 바라보며 말했
다.
"그런데, 물어보지 않는 거야?"
"무엇을 물어봐야 하오?"
"왜 두억시니들의 통행료를 대신 지불하는 건지."
"내가 알 바 아니오. 사모 페이. 우리는 길을 준비할 뿐이오. 길은 평
등하오. 존경받는 성자에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자에게까지."
하텐그라쥬에 이슬처럼 가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을 돌아본 주퀘도는 하텐그라쥬의 지붕들 위로 자욱이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볼 수 있었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주퀘도의 뺨을 스쳤다.
그가 깃든 나가의 몸은 창가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고 있었지만 주퀘도
는 그것을 무시했다. 대신 창턱에 팔을 괴며 말했다.
"그 요새를 타고 앉으면 시구리아트 산맥 남서부를 거의 장악할 수 있
어. 그런 기막힌 곳에 그런 천혜의 요새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하는 일
이라곤 고작 여행자들에게 통행료나 받는 일이라니, 얼빠진 것들."
주퀘도의 말이 잠시 멈춘 틈을 타 갈로텍은 그 입을 움직였다.
"그렇다면 왜 은편 열 닢은 지불했지요?"
주퀘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갈로텍은 다시 질문했다.
"그냥 물러나도 되었잖아요. 왜 통행료를 지불하고 그 관문을 통과했
죠? 결국 오기 아니었던가요? 그 요새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통과하고
말겠다는 이유없는 오기였을 겁니다. 그렇지요?"
"너희들이 오기라는 것이 뭔지 알기는 하냐?"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죠. 그래서 이미 진 다음에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도록 눈을 가려버리는 감정이지요. 결국 그게 더 크게 지게 되는 일이
라는 것도 모르게 되죠. 지성인이라면 그런 감정 따위를 자신에게 허락
할 필요가 없어요."
"정말이지 피가 차가운 짐승들하곤 이야기를 못하겠군."
주퀘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갈로텍은 그 시점에서 전면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주퀘도는 그것을 거부했다. 저항에 부딪힌 갈로텍
은 짜증을 내며 강제로 전면에 나서볼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갈
로텍은 그러지 않았다. 일반인도 그렇지만, 군령자 또한 자기 자신과 원
만하게 지내야 하는 법이다.
비와 밀림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한없이 아스라한 선을 바라보던 주퀘
도가 말했다.
"그건 작동할 거다."
"예?"
"노기가 그려준 것. 작동할 거라고 생각된다. 믿어도 돼."
"믿어도 된다고요? 노기도 확신하지 못했어요."
"하나를 상대하려면 셋이 필요하지만 보늬인지 나늬인지 알아보려면 둘
만 있으면 되잖아. 노기와 내가 긍정했으니 그건 나늬일 거다."
"어떤 사람들은 나늬가 네 명의 동명이인이라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각
자 나가, 레콘, 도깨비, 인간이었던 네 명의 나늬들이 있었다는 거죠."
갈로텍은 혀를 찼다.
"그런 형편없는 소릴! 역시 피가 차가운 것들이 할만한 말이군."
"글쎄요. 그게 형편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모든 종족들의 눈에 똑
같이 아름답게 보였다는 한 명의 신비한 미녀를 상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받아들이기 쉬운 가설이긴 한데요."
"내가 듣기엔 네 명의 동명이인이 있었다는 말이 훨씬 황당하게 들린
다."
"그렇다면 나늬는 레콘이었을 겁니다. 힘을 써서 강제로 상대방에게 아
름답다는 평가를 얻어낸 거죠."
주퀘도는 갈로텍의 농담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듯한 가설이군."
"정말 저게 보늬가 아니라 나늬일 거라고 확신해요? 작동할 거라고 믿
는 겁니까?"
"내가 옛날에 비슷한 걸 구상해봐서 확신하는 거야."
"예? 어디에 쓰려고요?"
"정신을 좀먹는 음료 보관하려고 그랬다, 왜? 그건 그렇고 몸이 차가워
지는군. 네 몸은 정말 골치아파. 다음엔 레콘을 고려해보라고 했던 것,
유념해봐. 그만 내려가련다."
주퀘도는 의식의 뒤로 사라졌다. 잠시도 영이 부재할 수는 없기에 뒤에
서 기다리던 갈로텍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오게 되었다. 다시 몸을 움
직일 수 있게 된 갈로텍은 황급히 창가에서 떨어지며 비늘을 약간 부딪
혔다.
탁자로 돌아온 갈로텍은 다시 도면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환
상적인 난해함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힐 뿐이었다. 갈로텍은 도면을 들여
다보는 것을 포기하고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주퀘도의 말처럼, 보늬인지
나늬인지 알아보려면 둘이면 충분하다. 두 사람이 긍정했으니 받아들이
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아스는 승리감을 만끽했다. 갈로텍은 약속을 지켰다. 마케로우 가문
에 남자들이 찾아든 것이다. 카린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남자들을
바라보다가 그들이 비아스하고만 어울리려 드는 것을 알게 되자 차츰 포
악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게 되었다. 덕분에 처신이 곤란해진 것은 스바
치였다. 카린돌은 그에게 소메로를 임신시키라고 강요했다. 심지어 협박
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녀의 협박 수단은 전율스럽게도 심장 파괴에 대
한 사실을 고발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되신 거 아닙니까? 그걸 고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시잖
습니까!]
[내 절실함을 이해해준 것 같아서 고맙군. 스바치. 심장 파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첨부된 내 유언장이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닐러주면 더욱 도움이 될 것 같군.]
스바치는 결국 카린돌을 안심시키기 위해 카루에게 구원요청을 할 수밖
에 없었다. 소메로 마케로우는 저돌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적극적
으로 다가오는 두 명의 남자에게 완전히 당황해버렸다. 최연장자인데다
가주의 깊은 신임을 얻고 있는 그녀가 자손까지 가지게 된다면 비아스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의 입지를 굳히게 될 것이 자명했지만, 그러나 당
황한 소메로는 스바치와 카루를 멀리했다.
기가 막힌 카린돌은 소메로가 두 남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암시
하기 위해 애썼다. '언니의 아기를 보고 싶다'는 식의 가벼운 것에서부
터 시작된 암시는 결국 '가주 계승을 생각할 나이가 되기 전에 아이를
장성시켜 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직설적인 것으로까지 발달했다. 하
지만 소메로는 화리트를 잃은 카린돌에게 더욱 자녀가 필요할 거라 니르
며 그녀에게 남자를 양보하려 했다. 소메로는 아직까지도 남동생과 어울
려 노는 것을 좋아하던 '셋째누나 카린돌'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래서
카린돌의 상심이 크리라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카린돌로서는 심히 어
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덕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멍청이! 저러다 비아스가 임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카린돌은 격노하여 닐렀다. 스바치는 엷게 웃었다.
[아마도 그 임신을 축하해주며 조카들의 이름을 고민하지 않을까 추측
되는군요.]
[듣자마자 동조하고 싶어지는 전망 같은 것 들려주지마. 그런 생각 안
하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제기랄, 저 비아스 추종자들은 도대체 뭐지?]
[그렇게 답답하시다면 당신 자신이 임신하시는 편은 어떻겠습니까?]
[너 나한테 안기고 싶나?]
스바치의 비늘들이 듣기 거북한 소리를 냈다.
[꼭 그런 니름을 하셔야겠습니까? 전 그냥 제안을 해본 겁니다.]
[남자나 낼 법한 멍청한 제안이니까 고마워하고 싶지도 않잖아! 지금
시점에서 내가 임신을 하면 비아스와 나 사이엔 전면전이 벌어질 거야.
가주께서 나와 비아스 중 하나를 정찰대로 보내버려야겠다고 판단할 만
큼 거친 대립이 일어날 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정찰대에 가게 되는
건 나야! 비아스는 자신이 잘나신 약술사라서 하텐그라쥬에서 연구 활동
을 계속해야 된다는, 나는 할 수 없는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이다!]
[그렇군요. 소견머리 없는 제안을 용서하세요.]
[소메로가 임신해야 돼. 젠장. 좀 더 잘 할 수 없겠어, 스바치?]
[어떻게 잘 하라는 건가요. 그 분께서 저를 침실에 들이지 않으시는데.
그리고 이건 제 문제가 아닙니다. 소메로 마케로우님은 카루도 거절하고
계시잖아요.]
카린돌은 비늘을 곤두세운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케로우 저택의 정
원에는 비에 씻긴 풀들이 솜씨 없는 직조공이 격심한 자기혐오에 빠진
채 짜낸 천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제멋대로 자라나 있었다. 좀 다듬는
편이 좋겠지만, 나가들은 자르지 않는 쪽을 더 선호한다. 혼란스러운 분
노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풀을 쥐어뜯는 카린돌을 보며 스바치는 비늘을
조금 부딪혔다. 스바치가 그만 뜯으라고 권하려 했을 때 카린돌은 갑자
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갈라지고 찢어진 풀잎을 내려다보
며 닐렀다.
[너 수련자였다고 했지, 스바치.]
[스승님의 우환거리였던 불민한 제자였지요.]
[어쨌든 너는 아직까지 수호자들에게 접촉할 방법은 가지고 있을 거야.
그렇지?]
[찾아가면 좋은 낯으로 맞이해주시진 않겠지만, 예. 그렇습니다만?]
카린돌은 손에 쥐고 있던 풀잎을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스바치는 왜 카
린돌이 그런 니름을 꺼내는지 추측해 보았지만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
다. 한 가지, 그가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추측이 있긴 했지만. 그
러나 카린돌은 스바치가 부정하고 싶었던 바로 그 추측을 닐렀다.
[만약 어떤 나가가 심장 파괴 청부를 부탁한다면, 수호자들은 뭐라고
할까?]
스바치는 기가 막힌 눈으로 카린돌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수호자들은 암살자가 아닙니다!]
[최소한 한 번은 했을걸. 내가 목격자야. 그러니 절대로 그런 짓을 하
지 않는다는 식의 순진한 니름은 그만둬.]
[세상엔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는, 눈물 젖은 손으로 행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존재한다는 것 쯤은 아시잖습니까. 당신이 우연히 목격하게 된
그 건도 틀림없이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남매들의 증오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심장 파괴를 사용한다는 것은 니름도 안 됩니다!]
카린돌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스바치는 그녀의 손 안에서 풀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네가 평균적인 지성만 가지고 있다면 이미 내 니름들에서 화리트와 수
호자 유벡스의 살해자가 누군지 짐작해냈을 것이다. 스바치. 그 죄에 대
한 처벌이 아직껏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식으로 생각해볼 수 없나?]
대답하려던 스바치는 카린돌의 손이 입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카린돌은 짓이겨진 풀을 삼켰다. 스바치의 온몸에서 비늘이 곤두섰다.
카린돌은 풀을 씹으며 닐렀다.
[그렇잖아, 스바치?]
스바치는 정신적으로 몇 번 더듬거린 다음에야 닐렀다.
[당신이… 정의감에서 그런 니름을 하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아, 물론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야. 그저 수호자들이 발견해낼 수
있는 정의를 알려주는 것일뿐. 그리고 그 정의가 내 부탁을 들어주는 수
호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를 바랄 뿐이야.]
[수호자들은 그런 부탁을 무시하실 겁니다.]
[그러는지 알아봐야겠어.]
[무슨 니름이십니까.]
[심장탑에 가서, 영향력 있는 수호자를 찾아. 수련자였으니 쉽겠지. 그
리고 그에게 내 니름을 그대로 전해. 유언장에 그 전모를 상세히 기록해
둘 만큼 심장 파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어떤 여인이 모 여인에게 그 비
밀스러운 의식이 시행되는 것을 참관하길 원한다고. 거기에 네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자유야. 하지만 내 니름은 그대로 전해져야 해. 알겠나?]
[수호자들은 절대로 그런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수호자들은 내 유언장이 공개될 때 내 작문능력 이외에 다른
것도 확인할 수 있을걸.]
스바치는 공포 속에서 닐렀다.
[그런 유언장 따위가 있을 리 없어요! 공증인이 없을 테니까! 당신이
설마 그런 내용을 다른 자들에게 보여줬을 리가 없어요.]
카린돌은 웃었다.
[제법이군, 스바치. 아주 명쾌한 지적이야. 그런데 어떡하지? 품위있는
나가의 방식대로 세 명의 공증인이 내 유언장에 인장을 찍었는데.]
[도대체 누가…]
[두세나 마케로우, 소메로 마케로우, 비아스 마케로우.]
스바치는 경악한 얼굴로 카린돌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스바치는 사태
를 깨달았다.
[인장을 훔쳤군요!]
[내 소박한 취미 중엔 열쇠 수집이라는, 수집가의 즐거움과 더불어 유
용성까지 갖춘 취미가 있지. 스바치. 물론 세 사람은 자신들의 인장이
도용되었다고 주장하겠지만, 상관없어. 그 때는 이미 내 유언장이 공개
된 후일 테니까. 그리고 내 유언장은 공개되기만 하면 충분할 뿐 집행될
필요는 없는 종류지.]
스바치는 더 이상 니를 수 없었다. 카린돌은 씹던 풀을 삼키며 닐렀다.
[가서, 내 니름을 전해. 스바치. 반드시 그런 수단밖에 없다고 생각하
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당장 사용할 수 있으면서 확실한 수단을 강
구해둬야 해. 그럴 때 수호자들은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거야. 그 때 나
는 안전을 획득하고 수호자들은 정의의 실현을 얻게 될 테지.]
두려움 속에서 스바치는 생각했다. 카린돌이 심장 파괴에 대해 알면서
도 침묵한 것은, 침묵하는 것이 나가들에게 이롭다는 이성적 판단에 의
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카린돌이 그것을 몸소 이용하려는 생각에
서 침묵한 채 기다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스바치를 비늘 서게 만
들었다.
갈로텍은 자신 속으로 깊이 내려갔다. 기억들이 희미해지고 왜곡되는
경계 바로 앞에 도착한 갈로텍은 주의깊게 기억들을 점검했다. 그 중에
선 그 자신의 기억이 아닌 다른 기억들도 있기에 갈로텍은 꼼꼼하게 확
인해야 했다. 이 지점은, 그렇게 위험하다.
기억들 속에 자신을 고정시킨 갈로텍은 화리트를 불렀다.
[아스화리탈 세파빌 마케로우. 내가 왔어.]
[아, 뒈지셨나?]
먼곳에서 전달되어온 화리트의 니름에 갈로텍은 고소를 머금었다.
[아니. 다른 영에게 잠시 자리를 맡겨두고 들어온 거야.]
[함부로 그래도 될까? 수호자가 말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수
련자들이 기겁할 텐데.]
[걱정해줘서 고맙군. 그런 곤란한 경우를 대비해서 평소에 기행을 많이
저질러둔다고 말해주면 자네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군. 자네는 지내는
게 어때?]
[이렇게 행복했던 때나 있었나 싶을 정도로 행복해.]
[그것 참 다행이군.]
갈로텍은 누군가가 잊어버린 기억 하나를 끌어와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화리트가 숨어있는 숲을 향해 닐렀다.
[그렇게 화를 내는 걸 좀 그만뒀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우린 지금 한
몸을 쓰고 있어. 사이좋게 지내도 되잖아? 나는 전령 없이 보통의 죽음
을 맞이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 그 때가 되면 넌 나와 함께 여신께 갈
수 있을 거야. 결국, 좀 늦어질 뿐이야. 때이른 죽음을 맞이해서 삶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한 너에겐 오히려 좋은 이야기잖아?]
[아, 여신께 가고 싶어 안달하지는 않아. 갈로텍.]
[뭐라고!]
[왜냐 하면 여신께 갈 필요가 없거든. 여신은 여기에 계시지.]
갈로텍은 화리트의 니름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갈로텍은 모든 정신으로 전율했다.
[설마?]
[모르고 있었나. 갈로텍?]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신체(神體)일 리가…]
어두운 숲 속에서 폭발적인 웃음-정신의 흔들림-무한한 희롱이 터져나
왔다. 갈로텍은 어리둥절하여 그 숲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금 후 갈로
텍은 격노했다.
[너!]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신체일 리가… 하하하!]
화리트는 갈로텍의 니름을 흉내내며 다시 웃었다. 갈로텍은 분노를 참
느라 한 동안 정신을 거의 폐쇄해야 할 지경이었다.
[멋지게 속았다는 것은 인정해야겠군.]
화리트는 정신으로 낄낄거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갈로텍은 스
스로를 추스리며 닐렀다.
[진심으로 니르는 사람에게 농담은 관둬, 화리트. 나는 전령 없이 죽을
거야.]
[진심으로 니른다고?]
[내 진심을 의심하는 건가.]
[나는 여기서 많은 기억을 보았어. 갈로텍. 전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
던 자들이 넘쳐나더군. 하지만 죽음의 순간에 그들 모두는 전령을 시도
했어.]
[나는 그냥 죽을 거야. 맹세하지.]
[맹세한 자들도 넘치던데?]
갈로텍은 주퀘도의 이죽거림을 떠올리며 불쾌한 심정이 되었다. 잊혀진
숲 속에서 다시 화리트의 니름이 들려왔다.
[남다른 척하지 마, 갈로텍. 너도 틀림없이 전령을 시도할 거야. 발자
국 없는 여신께 가는 것보다 군령의 일원이 되어 영원히 지상을 방랑하
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될 거라고. 그 날이 왔을 때, 친구. 그다지
착하지 못한 내가 너무 심하게 비웃더라도 참아주길 바래.]
[그럴 기회는 없을 거야.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두지. 내가 질문했던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나?]
화리트는 갈로텍에게 그 질문을 들은 이후로 계속 그 생각만 해왔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닐렀다.
[도대체 그걸 알아서 뭘 하려는 거지?]
[그건 대답해주기 곤란한데.]
[그렇다면 나도 같은 대답을 돌려줘야겠군.]
[이봐. 화리트. 네가 아니라도 그걸 알아낼 방법은 있어. 나는 네게 나
가들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주려는 거야. 살아있을 적 너는 실수만 저질
렀어. 죽은 다음이니 좀 늦긴 하지만, 이제라도 네 실수를 바로잡을 생
각이 없어? 수련자로서 너는 발자국 없는 여신의 영광을 빛낼 의무가 있
어. 자, 화리트. 마지막 기회야. 그녀의 이름이 뭐지?]
화리트는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 침중하게 닐렀다.
[그녀의 이름은 나늬야.]
갈로텍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화리트는 다시 말했다.
[아니, 잠깐. 보늬던가? 이런, 헷갈리는데.]
갈로텍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화리트의 발랄한 웃음
소리가 그의 등을 때렸다.
[가기 전에 하나만 묻지, 갈로텍!]
[대답하고 싶지 않아.]
화리트는 갈로텍의 니름을 무시했다.
[네가 신체일 리가 없다는 건 무슨 뜻이지?]
갈로텍은 잠시 주저했다. 그리고 화리트는 그 주저를 놓치지 않았다.
[이상한 대답이었어, 갈로텍. '내가 신체였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내
가 신체일 리가 없어!'라니. 대단히 이상하잖아? 물론 가능성이 적은 일
이긴 하지만 그런 강한 부정은 무슨 의미지?]
[네겐 고민거리가 필요하겠어. 화리트. 심심해 보이니까. 그러니, 그건
네 고민거리로 남겨두지.]
[고마운 배려군. 갈로텍.]
갈로텍은 넌더리를 내며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며칠 동안 내린 비는 시구리아트 산맥의 무른 표면을 씻어내렸다. 흐르
는 진흙은 계곡물을 온통 흐려놓았다. 가인의 손수건을 허공에 흔들면
바람의 눈물이 배어날 것 같은 습기찬 공기 속에서 산개구리는 황홀경을
느끼며 꽉꽉댄다. 그 울음소리가 젖은 나뭇잎들이 켜켜히 쌓인 계곡을
요란하게 울린다.
아마도 그 개구리는 갑자기 날아온 두억시니의 손에 붙잡힐 때까지 황
홀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두억시니는 개구리를 삼키려 했다.
약간의 문제가 없었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입
대신 코로 개구리를 삼키려 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같은. 숨이
콱 막힌 두억시니는 요란하게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코에서 튀어나온
개구리는 계곡의 흙탕물 속에 빠졌다. 퐁당.
두억시니는 자신의 개구리를 뺏아먹은 흙탕물에 대해 격분했다.
"기름칠 한 평화! 애국자 잡탕 딸국질!"
분노를 더 참을 수 없었던 두억시니는 두 팔을 위로 치켜올렸다. 손가
락은 모두 열 개였으며 동시에 쉰 개였다. 거대한 손에 달린 손가락들이
모두 팔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직하게도 오른손에는 다섯 개의 오른팔들
이, 왼손에는 다섯 개의 왼팔들이 달려있었다. 두 손(혹은 열 개의 손)
을 높이 든 두억시니는 그것으로 계곡물을 후려쳤다. 흙탕물이 요란하게
튀어올라 두억시니를 덮쳤다. 엉겁결에 눈을 감았지만 미처 감지 못한
세 개의 눈에 물이 스며들었다. 기겁한 두억시니는 켁켁거리며 계곡 위
로 줄행랑쳤다.
동료 두억시니들에게 개구리를 훔쳐먹고 화가 나면 상대방의 눈을 핥는
혐오스러운 괴수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전달하려던 그 두억시니는, 다른
두억시니들이 모두 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억시니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동료들과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독
립심이 강한 두억시니였거나 전후관계에 대한 개념이 약간 민망한 수준
인 두억시니였던 듯하다. 그 방면에서 별로 신통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두억시니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시구리아트 관문요새의 철문이 열리고 있었다.
쪽문이 아닌, 거대한 철문 자체가 열렸다. 두억시니들은 긴장한 채 드
러난 거대한 동굴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 안의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걸어나왔다. 눈이 상당히 좋은 두억시니가 그것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
했다. "여보!" 어떤 두억시니도 그 말에 신경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관
문을 걸어나온 자도 별로 신경쓰진 않았다. 잠깐 웃기는 했지만.
웃음을 멈춘 사모 페이는 마루나래의 목털을 움켜쥔 채 두억시니들을
바라보았다. 도로와 그 양쪽의 땅을 다 뒤덮다시피 하고 있었고 뒤쪽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루나래는 가볍게 긴장한 듯 어깨털을 곤두
세웠다. 사모는 마루나래를 달래듯 그 뻣뻣하게 선 털을 어루만졌다.
하늘이 푸르렀다.
마루나래가 갑자기 온 산맥을 쩌르릉 울리게 하는 포효를 토해내었다.
두억시니들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 아닌 말들을 외쳐대었다. 메
아리로 변한 포효도 사그라들 무렵, 마루나래는 갑자기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관문을 향해 줄달음질쳤다. 그 순간 두억시니들은 괴성을 지르며
마루나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어젯밤 내내 날아오던 쇠뇌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것이 분명했다.
쇠뇌는 날아오지 않았다.
관문을 통과한 두억시니들은 반대편 관문이 열려있음을 깨달았다. 관성
이 그들을 내몰았고 두억시니들은 주저없이 동굴을 빠져나갔다. 반대편
문으로 나온 두억시니들은 저 아래쪽 길을 달려가고 있는 마루나래를 발
견했다. 어쩐지 신이 난 것 같은 괴성을 지르며 두억시니들은 계속 마루
나래의 뒤를 따라 달렸다. 삼천의 두억시니가 동굴을 지나가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 통로는 계속 열려 있었다. 마침내 육중한
몸에 비해 다리가 좀 짧아서 달음박질이 느린 두억시니가 마지막으로 관
문을 통과한 다음 철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의 당주보좌관은
당 일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모 페이는 두억시니들의 통행료를 지불한 다음 그들을 유인하며 관
문을 통과하였다. 신을 잃은 그들 두억시니들에게 신의 가호를 바랄 수
는 없으니, 나는 사모 페이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어진 마음이 저
가엾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길 바란다.'
붓을 내려놓은 보좌관은 일지가 마르도록 그것을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휘장을 향해 걸어갔다. 휘장 너머로 건너간 보좌관은 보늬
당주를 내려다보았다. 보늬 당주는 조그마한 몸을 의자에 파묻듯이 한
채 잠들어 있었다. 그 감긴 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보좌관은 목소리를
들었다.
"갔나?"
보늬 당주는 눈을 감은 채 말하고 있었다. 보좌관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갔습니다."
보좌관은 사모 페이와 두억시니들이 떠났다는 의미로 대답했다. 하지만
당주의 질문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겠지."
보좌관은 당주가 말한 것이 다른 사람임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보늬 당주는 침묵했다. 보좌관은 가만히 기다렸다.
"만약, 내가 군령의 일부가 된다면…"
"소용이 없을 겁니다. 당주님."
보늬 당주는 눈을 떠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보좌관은 무거운 얼굴로 당
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절대로 소용이 없습니다. 당주님."
"그럴까?"
"길은 방랑자가 흘렸던 눈물을 기억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방랑자를 따
라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길을 준비한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케이. 속상하지 않니?"
보좌관은 웃었다. 잔잔한 웃음이었다.
"어머니. 제 나이 이제 일흔 여덟입니다. 열여덟 살 시절은 60년 전에
지나갔습니다."
보늬 당주는 놀란 표정으로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당주는 가냘
픈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렇구나. 내가 백 살이라는 걸 까먹다 보니 네 나이마저도 잊
어먹었구나. 하지만 그래도 묻고 싶구나. 어미란 그렇게 미련한 것이다.
누구보다도 자식 속을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꼭 자식 속을 물어보고 확
인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 또한 어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물어보는 것
을 용서하거라. 정말 괜찮은 거니?"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어머니."
"네 아버지는 절대로 나와 너를 버린 것이 아니란다."
"예. 그는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어머니. 그는 어머니와 저를 가졌던 적이 없습니다. 가지지 않은 것은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는 유료도로당의 규칙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더군요. 우리들이 두억시니와의 투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뻔한데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보늬 당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비가 그친 하늘에서는 푸른 빛이 쏟
아져들어오고 있었다.
보늬 당주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케이 보좌관은 모포를 끌어당겨 어머
니의 몸을 덮었다. 그가 몸을 돌리기 전 당주가 낮게 말했다.
"두억시니들에 대한 공격 준비는 어떻게 되었느냐?"
흔들리던 감정의 흔적은 사라지고 보늬 당주는 다시 시구리아트 유료도
로당의 당주로 돌아와 있었다. 당의 문제를 묻는 그녀에게 보좌관은 간
결하게 보고했다.
"공격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두억시니는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말씀드렸던 나가 아가씨 기억하십니까? 대호를 탄 아가씨 말입니다.
그녀가 두억시니들의 통행료를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두억시니들을 유인
하며 이곳을 지나갔습니다."
보늬 당주는 눈을 떠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놀람이 가득
서려 있었다.
"설마 네가 그것을 제안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그녀 자신이 그
것을 제안했다는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놀라운 여인이구나."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늬 같은 여인이었습니다."
당주는 놀란 미소를 지으며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네가 나가의 미모를 구별할 수 있느냐? 네 말대로 정말 나늬처럼 아름
답다면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보좌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어머니도 수십 년만에 처음 보는
미소를 지어보여 당주를 다시금 놀라게 했다.
산들의 우수가 감도는 높은 땅에서부터 뻗어내려온 유료도로는 어느새
목향이 코를 간지럽히는 보다 낮은 지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불어난 계
곡의 물은 상당히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물가의 진 땅에는 앵초 군락이
분홍빛 연무처럼 피어있었고 곳곳에 자라난 나무들은 여행자들에게 다가
오는 숲을 예고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빗줄기에 떨어진 꽃잎들
이 진흙과 범벅이 되어 산야를 악취미한 빛깔로 물들여놓고 있었다.
요새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유료도로당은 이곳까지도 평탄한
도로를 만들어놓았다. 조금 경사진 곳에는 어김없이 돌계단이 나타났고
작은 개울에도 돌다리가 등장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티나한은 돌부리에
발이 걸릴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열여덟 번째
아니면 열아홉 번째일 것이다. 생각에 잠겨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던
륜은 티나한의 등에 부딪히고 말았다.
티나한은 륜을 부축하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정말 신경쓰이는군. 이봐, 케이건."
앞쪽에서 걸어가던 케이건이 뒤를 돌아보았다. 티나한은 수염볏을 비틀
며 말했다.
"정말 이렇게 그 자들에게 두억시니 맡기고 떠나도 되는 걸까? 비겁한
행동인 것 같아."
"그 사람들이 그걸 원했잖소. 티나한."
"그렇다면 최소한 같이 싸우기라도 했어야 되는 거 아닐까? 그 자들이
두억시니를 퇴치하는 것을 도와주기는 했어야 도리에 맞는 일인 것 같은
데 말이야."
케이건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말을 고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
지 시간이 얼마쯤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늘에서는 며칠 전 그들에
게 목격되었던 하늘치가 조용히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황혼이 하늘치의 등에서 유적을 빛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조만간
산지의 이른 밤이 다가올 거라 판단한 케이건은 걸음을 재촉해봐야 의미
가 없다 판단했다.
"우리에겐 임무가 있소. 티나한. 그리고 그들의 요새는 우리들의 도움
이 필요없을 정도로 강고하오. 주퀘도 사르마크는 일만 명의 병사를 소
모하고도 저 요새에 어떤 결정적 타격도 주지 못했소. 그들은 두억시니
를 잘 처리할 수 있을 거요."
"그 주퀘도 사르마크가 도대체 누구지?"
"250년 쯤 전의 제왕병자요. 영웅왕에 비견될 만한 걸물이었소. 그가
왕이 되지 못한 건 그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키탈저 사냥
꾼의 저주 때문이라고 설명될 정도로. 거의 국가 비슷한 것까지 만들었
지. 하지만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의 요새를 탐내는 실수를 저질렀소.
오 개월 동안 일만 명의 병사를 죽이는 대공세를 펼쳤지만, 성공하지 못
했소."
비형은 넋을 잃은 채 케이건의 이야기에 심취했다. 케이건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결국 항복 선언을 한 다음 은편 열 닢을 지불하고 그 관문을 홀로 걸
어서 지나갔소. 오기를 충족시키는 세련되지 못한 방법이지만, 당시에
그 자는 세련미를 추구할 만한 정신상태는 아니었을 거라는 변호가 가능
할 듯하오. 이 산맥을 떠난 다음 그 행방이 묘연해졌소. 반쯤 완성되어
있던 국가는 사분오열했고."
"그러면 되는군요!"
일행들은 놀라서 륜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고함을 질렀던 륜은 흥
분하여 말했다.
"그렇군요, 그러면 되는군요!"
비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 생각은 좀 다른데요. 륜. 그러면 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과연 그 방법밖에 없을까요?"
륜은 발을 구르며 외쳤다.
"비형!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그 주퀘도라는 사람처럼 하면 되는 거예
요. 통행료를 지불하는 거죠!"
"통행료는 이미 지불했는데요?"
"아니오. 두억시니들의 통행료 말입니다!"
티나한과 비형, 심지어 케이건까지도 얼빠진 얼굴이 되어 륜을 바라보
았다. 륜은 그들이 넘어온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 사람들은 두억시니가 통행료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싸우기로 한
거죠. 그렇다면, 그들은 두억시니를 통행료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생각
하는 거예요. 예! 목적을 가지고 길을 걷는 자는 다 여행자라고 했던가
요? 그러면 그렇게 해주면 되는 거예요! 두억시니의 통행료를 지불해주
는 거죠. 그렇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두억시니와 싸울 필요가 없어
요. 그리고 어차피 우리를 추적하는 것이 분명한 그 두억시니들도 그 사
람들과 싸우지는 않을 테고요."
케이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두억시니에겐 규칙이 없어. 반드시 그냥 지나쳐온다고는…"
"자보로와 슈라도스를 그냥 지나쳐왔다면서요?"
케이건은 입을 다물었다. 륜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한 비형과 티나한은
기대감이 담긴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케이건은
다른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돌아갈지 말지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케이건은 보좌관에 대해 생각했다.
'그 녀석이 나를 시험했군.'
케이건은 왜 보좌관이 두억시니들을 여행자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그렇
게 강조했느지 깨달았다. 그리고 륜이 떠올린 해결책을 자신 또한 당연
히 떠올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케이건은 자신이 왜 그토
록 당연한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했는지도 깨달았다. 케이건은 길잡이였
다.
그리고 케이건은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길잡이였다.
"그 두억시니는 우리에게 방해가 될 거다. 륜. 그것도 아주 위험한 종
류의 방해지. 이대로 놔두면 유료도로당이 그 두억시니들을 해결해줄 거
다. 굳이 돈을 주고 우리 고민거리를 구입할 필요는 없다."
[이 철혈!]
다행히 니름이었다. 말로 바꿔 입밖에 꺼내기 직전, 륜은 자보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케이건은 아스화리탈을 위엄왕에게 건네는 것이
어떠냐는 말로 륜을 시험했었다. 륜은 이것 또한 시험일 거라 짐작했다.
무슨 시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륜은 단호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
다.
"돈을 지불해가며 고민거리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 양심을 구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겁니다.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그 자들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은 제 양심에 위배됩니다. 제가 가진 돈도
많습니다. 제가 그 자들의 통행료를 지불하겠습니다."
케이건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비형."
"예?"
"곧 해가 질 거요. 당신이 날아가는 것이 가장 좋겠소. 돌아가서, 두억
시니의 통행료를 우리가 대납해도 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요금이
얼마나 될지 물어보시오."
비형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나늬 위에 올라탔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