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19화 (19/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5-3.                         관련자료:없음  [53140]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20 01:19  조회:10558

눈물을 마시는 새.

5. 길을 준비하는 자 - 3

요새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도깨비불을 바라보며  사모는 몸을 긴장시켰

다. 하지만 그 도깨비불은 그녀와 마루나래의  머리를 지나쳐 그대로 도

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사모는 의아해하며  그 도깨비불을 쫓았고, 도

로 아래쪽에서 다가오는 수천의 열원을 발견했다. 사모의 몸에서 비늘이

맹렬하게 부딪혔다.

사모는 재빨리 발 아래에 놓여있던  산양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마루나

래의 등 위에 올라탔다. 거의 순식간에 철문 앞에 도달한 사모는 요새를

향해 외쳤다.

"열어줘! 두억시니들이 오고 있어!"

"그 두억시니가 너를 쫓아온 거라면, 들여보내줄 수 없다!"

사모는 분노하며 두 손으로 산양을 높이 치켜들었다.

"열지 않으면 이 산양의 목을 따서 그 피를 너희 철문에 뿌리며 저주하

겠다!"

협박을 하면서도 사모는 과연  이런 허튼소리가 소용이  있을지 의심했

다. 그러나 요새에서는 반가운 대답이 들려왔다.

"안돼! 그러지마!"

사모는 반가워해야 할지  측은심을 느껴야 될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대답은 바로 튀어나왔다.

"그럼 문 열어!"

요새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음들이 들려왔다. 사모는 짐작하지 못했지만

신비감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는 유료도로당의 당원들에게  그 목소리에

의해 내려지는 저주는 반드시  실현되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었

다. 결국 잠시 후 소란스러운 외침과 거부의 고함 속에서도 철문이 천천

히 열렸다.

마루나래는 그대로 동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긴 동굴 안쪽은 벽에 걸려있는 여러 개의  횃불에 의해 밝혀져 있었다.

사모는 그 횃불에 언짢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마루나래는 창을 든 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십 명의 당원을 발견했다.

포위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마루나래는 큰  몸을 흔들어 물을 털어냈다.

당원들은 갑자기 물벼락을 맞고는 성난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곧 그들

의 얼굴이 굳었다. 마루나래가 들리지 않는  울음을 울기 시작했기 때문

이다.

당원들은 왜 갑자기 몸이 아플 정도로 떨리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당황

하며 허리를 뒤로 뺐다.  마루나래는 거의 마귀 같은  얼굴이 되어 한층

낮고 사납게 울었다. 결국 몇몇 당원들이 오줌을 지리기 시작했다. 그러

나 그 자신이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사

모는 바지를 적시는 뜨거운 열을 볼 수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은 채 말했

다.

"문을 닫아야 할 텐데."

당원들 중 몇몇이 화들짝 놀라며  철문을 바라보았다. 마루나래가 뛰어

들자 놀란 당원들은 문을 열어둔 채  물러났었다. 사모는 마루나래를 조

금 걸어가게 했고 그러자 용기 있는  당원들 몇몇이 그녀의 뒤에서 문을

닫았다.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사모는 갇혔다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주

위의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원들도 이 사태를 호전시킬 - 혹은

악화시킬 -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사모는 꽤 오랜 시간 동

안 침묵의 창날에 포위당해 있어야 했다. 결국 사모가 입을 열었다.

"두억시니들을 퇴치할 거야?"

당원들을 지휘하고 있던 우두머리는 사모의 말에 갑자기 자신들이 이렇

게 침묵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산양을 내놔!"

"너희들이 산양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

건 내 친구가 잡은 건데. 어째서 사냥꾼의 전리품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

지?"

"이곳은 우리 도로다!"

"너희들이 관리하는 도로에는 너희들의 책임과 권리가 있겠지만, 이 산

전체에도 그런 권리가 있는 거야? 분명  마루나래는 도로에서 산양을 잡

아온 것은 아닌데."

우두머리는 마루나래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때 당원들의 등

뒤에서 약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마루의 나래면, 산의 흰 날개. 산운(山雲)이군. 상당히 푹신한 이름

이군."

당원들은 그 해석에 감탄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

이 바라보는 곳을 본 사모는 동굴 좌우로 몇 개의 통로가 있음을 깨달았

다. 그것들은 모두 위쪽을 향하는 계단이었다. 그리고 그 중 한 계단 앞

쪽에서 사모는 인간과 도깨비의 모습을 발견했다. 사모는 인간의 얼굴을

보기에 앞서 등에 있는 괴상한 쌍신검만  보고도 이미 상대가 누군지 깨

달았다.

"실제로 푹신해. 달릴 땐 구름 탄 기분이야.  하지만 산운은 우레와 번

개라는 두 개의 송곳니를 품고 있지. 나가살육자."

"그럴 듯하군. 암살자."

"륜은 어디에 있지, 나가살육자?"

"위쪽에 레콘 티나한과 함께  있다. 그 두억시니들은 어떻게  된 거지,

암살자?"

"사모 페이."

"케이건 드라카."

"전에 만났던 그 높은  담을 가진 도시 외곽에서  두억시니들을 발견했

어. 케이건."

"그 도시라면 자보로라고 한다. 페이."

사모와 케이건은 똑같은 판단을 내렸다. 즉, 수천의 두억시니들이 들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가 더 화를 낼 수 있는가를 견주는 행위는 무

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창을 든 당원들과 비형,

그리고 사모를 태우고 있는 마루나래까지도  담담하면서도 신속한 두 사

람의 대화에 당황했다.

"자보로라는 그 도시에 경고를 해 준 다음 그곳을 지나쳐 또 하나의 도

시를 지나쳤어. 그 도시에도 경고를  해줄까 했어. 그런데 두억시니들은

계속 나만 따라오더군."

"그 피라미드에서부터 따라온 것인가. 두억시니들에게 뭔가 화 날 일을

했나?"

"내가 오히려 그렇게 묻고 싶은데. 내가 발견했을 때 너희들은 그 기괴

한 괴물과 싸우고 있었어."

케이건은 비형을 살짝 돌아보았고 비형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

이건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너를 쫓아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쫓아온 것일 수도 있군. 니

름을 나눌 수 있었나?"

"전혀."

"의도를 확인할 방법은 몸으로  부딪혀보는 수단밖에 없는  것이군. 비

형. 쪽문을 열고 몇 사람 내보내시오."

사모와 케이건의, 거의 최면효과까지도 일으키는 담담한 대화에 빠져들

어 있던 비형은 조금 후에야 깜짝 놀라며 말했다.

"몇 사람을 내보내라니오?"

"환영을 만들어보란 말이오. 킴을 제외한 세 명의 선민 종족, 대호, 딱

정벌레. 모두 다섯."

"대호는 제외해도 돼. 그 피라미드에서는 없었으니까."

케이건의 명령과 그에 덧붙여진 사모의 부연은 너무도 자연스럽다는 이

유로 비형을 꽤나 혼란스럽게 했다. 물론 당원들도 그러했다. 그리고 그

들 중에는 말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이 연인이거나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눈에 보이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가설을 나누는  자들마저 있었다.

비형 또한 그런 가설에 참여해서 종족 개념을 붕궤시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일조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자제력을 되찾은  다음 도깨비불을

만들어내었다.

비형이 만들어낸 도깨비불은 그 모습이  석양빛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도깨비와 나가, 레콘, 그리고  나늬와 매우 흡사했다.  당원들은 감탄했

다. 하지만 사모는 체온이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케이건은 그 색깔

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환영을 다듬을 시간은 없었

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뽑아든 다음 비형에게 말했다.

"내 주위를 따르게 하시오."

비형은 질문할 기회를 잃었다. 사모가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함께 나갈 생각이야? 위험할 텐데."

"괜찮아. 다만, 내가 나간 다음 난동을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주면 좋

겠는데. 페이. 이곳에서는  여행자의 안전을 위해  무력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사모는 잠시 케이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금지조항이 아닌 명예를 위해 약속하지. 케이건."

케이건은 두 번 확인하지도 않고 쪽문을 향해 걸어갔다. 비형은 황급히

도깨비불을 걸어가게 했다. 당원들은 자신들의  요새에서 주도권을 완전

히 잃어버리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수 없었고, 그럴 의지도 별로 생기

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구경꾼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케이건은 도깨비불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두억시니들은 이미 요새에서 500 미터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케이건

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한 번 찬 다음  달리기 시작했다. 쪽문을

열어둔 채 바라보던 비형은 황급히 도깨비불들을  달리게 했다. 그 동작

은 제법 훌륭했지만, 발 아래에서 물을  튕겨올리며 달리는 케이건과 달

리 도깨비불은 아무런 물방울도 튕기지 못했다.

두억시니들은 앞쪽에서 달려오는  도깨비불과 케이건을  보자 걸어오는

속도를 늦추었다. 케이건은 적당한 거리에 도달하자 역시 걸음을 늦추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좌우를 둘러본 케이건은 불로 이루어진 레

콘과 도깨비, 나가, 딱정벌레가 자신을 잘  따르고 있음을 확인했다. 젖

은 도로 위에 그들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기묘하게 비치고 있었다. 케이

건은 입속으로 무의미한 말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어둠 속의 밝은 그림

자.

케이건과 두억시니들은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비형이 조금 전에 던져둔 도깨비불은 그들의 머리 위에 떠서 빛을 뿌리

고 있었다. 그 빛을 받아 빗물에 젖은 두억시니들이 번들거렸다. 어깨와

이마를 때리는 빗줄기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뜬 케이건은 두억시니들의 모

습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케이건은 사모가  연민 때문에 깨닫지 못

했던 두억시니들의 특징을 냉정하게 찾아내었다.

'기능적인 모습들이군.'

많은 두억시니들이, 비록 그 형태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지만 대칭형

을 이루고 있었다. 대칭형은 모든 활동에 있어 비대칭보다 유리하다. 케

이건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때 거의 티나한에 필적할 만한 거대한 체구의 두억시니가 앞으로 걸

어나왔다.

두억시니의 머리는 두 개였고 양쪽 어깨에 달려 있었다. 목 위, 일반적

으로 머리가 있어야 할  위치에는 오른손이 하나  붙어있었다. 케이건은

보통 생식기가 있어야 할 부분에서 왼손을 찾아내었다. 두 개의 팔 끝에

는 머리카락처럼 생긴 털이 잔뜩 나있어 마치 붓처럼 보였고 두 개의 다

리는 새처럼 역관절을 이루며 뒤로 꺾여  있었다. 발끝에는 발가락이 있

었지만, 그것은 불가사리처럼 사방으로 뻗어있었다.

두억시니의 양쪽 머리 중 왼쪽 머리가 먼저 말했다. "나가."

뒤이어 오른쪽 머리가 말했다. "도깨비."

다시 왼쪽 머리. "레콘."

오른쪽 머리. "딱정벌레."

'인간도 있는데.'라고 말해주는 대신 케이건은 빗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머리 둘 달린 두억시니는 확인이라도 하듯 말했

다.

"나가."

"도깨비."

"레콘."

"딱정벌레."

두억시니의 두 머리는 서로를  돌아보고는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

다. 꽤 정신 사나운  장면이라 생각하며 케이건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긍정하는군.

다음 순간 두억시니의 오른팔이 위로 치솟았다.

잠깐 동안 케이건은 사태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빗물이 엉뚱한

방향에서 날아와 얼굴을 때리자 케이건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

다. 두억시니는 오른팔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있는 힘껏  올려쳤던 것이

다. 그리고 갑자기 늘어난 그 오른손은 케이건의 왼쪽에 있던 레콘 모양

의 도깨비불을 아래에서부터 자른 다음 원래 길이로 줄어들며 위로 치솟

았던 것이다.

케이건은 그것을 하나도 볼 수 없었다. 땅에  고여있던 물이 그 공격에

휘말려 솟아오르지 않았다면  케이건은 두억시니가 그냥  팔을 들어올린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케이건은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바라기

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두억시니는 다시 두 개의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리고 두억시니는 두 팔을 동시에 휘둘렀다.

긴장하고 있던 케이건은 가까스로  자신의 가설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잔영뿐이었지만 두억시니의 두 팔은 분

명히 순간적으로 늘어나며 케이건의 왼쪽에  있는 레콘과 오른쪽에 있는

나가를 휩쓸고 돌아갔다. 마치 늘어나는  채찍 같았다. 그리고 케이건은

그것이 완전히 돌아가기 직전 붓처럼 생긴  털들 사이로 오릭스의 뿔 같

이 생긴 것이 안으로 사라지는 것도 목격했다.

'팔이 늘어나는 것이 아냐.  팔 안쪽에 들어있던 긴  뿔이 팔을 휘두를

때마다 튀어나왔다가 들어가는 거다.'

요새 쪽에서 비명 같은 것이 들려왔다. 좀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은 케

이건보다 더 잘 볼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케이건은 누가 가장 정

확하게 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

"도-망-쳐-케-이-건!"

하지만 케이건은 도망치지 않았다. 두 번의 공격이 모두 무위로 돌아간

상황에 대해 두억시니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려고 결심했기 때문

이다. 케이건은 머릿속으로 두억시니들이 분명  '인간'에 대해서는 말하

지 않았다는 것을 되새겼다.

그러나 케이건은 곧 그  결심을 포기했다. 두억시니의 두  개의 머리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냄새."

"맡자."

오른쪽 머리가 대답을 끝냈을 때 케이건은  이미 요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는  도주였다. 케이건은 '나가와 도

깨비와 레콘과 딱정벌레'의 냄새가 어디서 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후 두억시니도 그 냄새가 어디서  나는지 알게 되었다. 멀

어지는 냄새를 향해 두억시니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 삼천

의 두억시니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렸다.

"사랑은 착한 뼈다귀!"

케이건은 제 때 쪽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케이건이 뛰어들자마자 비형

과 당원들은 황급히 문을 걸어잠궜다. 그리고  그들은 철문 뒤에서 숨소

리까지 죽인 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철문을 두드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들의 예상을

훨씬 뒤어넘는 수준이었고 동굴 안에 있는 터라 대단한 진동음이 사람들

을 강타했다. 사람들은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심지어 사모 페이까지도

황당한 표정으로 귀를 막았다. 굉음 속에서 케이건은 악쓰듯이 말했다.

"비형! 문을 가열하시오!"

"네? 뭐라고요?"

"문을 가열하라고!"

"어, 그러면 다칠 텐데요?"

케이건은 손 대자마자 타죽을 정도로 가열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는 않

았다. 그것이 비인도적이어서가 아니라 비형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기 때

문이다.

"물이 끓을 정도로! 그  정도면 손을 댈 엄두는  못내겠지. 철문이니까

쉽잖소!"

비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몇 개의 뜨거운  도깨비불을 만들어 철문에 붙

였다. 사모는 철문의 색채가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밖에서

비명이 들려오며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귀를 막

고 있던 손을 떼며 한숨을 내쉬었고 비형은 철문에 붙여두었던 도깨비불

을 얼른 없애버렸다.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비형을 질타하지는 않

았다.

"좀 있다 식으면 다시 붙이시오."

그리고 당원들을 돌아본 케이건은 그들이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어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계속되는 비일상적인 상황들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던 당원들은 상황이

조금 진정되자 비로소 그곳이 그들의 요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깨

달았다. 케이건이 요새를 보호하고 있음은  분명했지만, 그 과정에서 케

이건은 당의 양해나 협조를  조금도 구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행동했

다.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을 지휘하고 있던 우두

머리는 그런 자신의 심사를 명확하게 반영하는 표정을 지은 채 케이건에

게 말했다.

"이제와서야 소개한다는 것이 좀 우습긴 하지만, 나는 하르체 도빈이라

고 하오. 어쩌실 작정이오?"

케이건은 조용히 되물었다.

"케이건 드라카요. 어쩔 작정이냐니, 무슨 말이오?"

"당신이 모든 상황을 다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니 묻는 거요. 설마 이제

와서 '여긴 당신들 요새니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지는 않으시겠죠?

바깥의 두억시니들은 어떻게 처리하고 저 산양을 쥐고 있는 나가는 어떻

게 대해야 하는지 좀 지시해주겠소?"

케이건은 무표정하게 하르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르체는 케이건이

자신의 말 속에 숨어있는 뼈를  못알아들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때 케이건은 하르체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

런 표정도 없이 하르체를 바라보며, 케이건은 그 말에 대해 어떻게 대답

해야 하는지 고심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나는 길잡이인데.

케이건은 길잡이였다. 그리고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에 체류중인 여행

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후자까지  고려하고 있지는 않았다. 상

황이 급박하게 전개될 때, 케이건은 '다른 것을 모두 거부하면서 자신에

게 규정해두었던 길잡이의  역할'만을 충실히 수행했다.  케이건은 그런

자신의 행동이 이곳의 주인인 당원들을  소외시키는 것이었음을 아주 힘

들게 깨달았다. 무표정한 얼굴 뒤에서 케이건은 비명을 질렀다.

'한 번에 하나씩만 요구해, 제발! 둘, 셋은 안 돼. 생각해두지 않았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해  두지 않은 역할은 할  수 없어! 길잡이로

행동하면서 동시에 너희들의 손님으로 행동하라고? 불가능해!'

"하르체."

갑자기 들려온 신비로운 목소리에 모든  이의 시선이 돌아갔다. 마루나

래의 등 위에서 사모는 차분하게 말했다.

"부탁받지도 않고서 도와준 이에게 왜 도와줬냐고 따질 것까진 없지 않

을까. 물론 그것을 참견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도와준 것까지 참견이라고 하지는 않을 텐데."

비형은 그것을 그 날 저녁 일어난 가장  놀라운 사건으로 꼽았다. 두억

시니의 출몰조차도 사모 페이가 케이건을 거든 것에 비하면 시시한 사건

으로 여겨졌다. 케이건 또한 놀란  눈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하르체는

사모의 목소리에 약간 몽롱한 기분까지도  느꼈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

며 말했다.

"당신은 조용히 하시지! 지금 당신의 입장은 분명히 불법 침입자야."

"당신들이 문을 열어주었지."

"그 산양으로 협박했잖아! 그리고 저 두억시니들을  끌고 온 것도 당신

이고!"

당원들은 그 말에 새로이 분노를  불태우며 사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두억시니들이 누구를 쫓아왔는지는 조금 전에 확실해진 것 같은데.

공격하기 전, 그 괴상한 두억시니는 도깨비불을 관찰하는 것 같더군. 그

리고 뭐라고 말도 하는 것 같던데, 나는 듣지 못했어. 그 두억시니가 뭐

라고 했는지 말해줄 사람 없어?"

케이건이 무의식 중에 대답했다.

"나가, 도깨비, 레콘, 딱정벌레."

사모와 비형, 그리고 당원들이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다시 말

했다.

"나가, 도깨비, 레콘, 딱정벌레라고 말했다. 그리고 공격했다."

"그랬나. 그렇다면 저  두억시니들이 나가, 도깨비,  레콘, 딱정벌레로

구성된 일행을 추적해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나치게 대담한 추리일까?"

케이건의 고개가 홱 돌았다.  갑자기 케이건의 시선을 받게  된 비형은

당황했다.

"말하시오. 그들과 싸운 이유가 뭐라고 했소?"

"예? 어, 말씀드렸잖습니까? 그  유해의 뱀은 우리가  두억시니의 신을

죽였다고 말했, 아니, 닐렀습니다. 어, 그러고보니 그 정도 이유라면 이

곳까지 쫓아올 정도의 이유가 되긴 하겠군요?"

사모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곳에 있었고, 비슷한 니름을 들었어.  그 괴수는 '너희들이 또

신을 죽이게 내버려두진 않겠다'고 닐렀어."

케이건은 비형과 사모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전대미문의 누명이로군. 살신누명이라니."

당주 보좌관은 웃지도 않으며 말했다.

"정리하겠으니 들어주시오. 당신들은 두억시니로부터 그들의 신을 죽였

다는 혐의를 받았소. 그리고 그 때문에  화가 난 두억시니들이 이곳까지

당신들을 추적한 거요. 그렇다면, 이제  내가 당신들에게 정말로 두억시

니의 신을 죽였냐고 물어야 되는 거요?"

불행히도 비형은 보좌관의 질문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지하

게 대답했다.

"발뺌하려는 건 아닌데요, 보좌관님. 그  때는 밤이었고 너무 어두워서

확신할 수가 없군요. 우리는 보통 밤에  신을 죽이거든요. 낮에는 좀 뭣

하잖아요?"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고 사모는 미소를 지었다. 보좌관은 덩치 큰 도

깨비를 날카롭게 쏘아보다가 다시  철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부터 그

철문은 고요했다. 두억시니들은 철문이 쉽게 식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

은 것 같았다. 보좌관은 케이건을 보며 말했다.

"당신들의 용은 저 두억시니들을 쫓아버릴 수 있을 거요. 불을 토할 줄

알 테니. 그렇지요?"

"당신도 이미 봐서 알겠지만 그 용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오. 성격은 어

린애 같고. 륜이 위험에  처하면 도우려고 나서지만,  그런 식의 명령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소."

"시도해주시면 고맙겠소."

케이건은 사모를 흘끔 바라보고는 말했다.

"저 나가가 있는 곳에 륜을 내려오게 할 수는 없소. 하르체. 당신들 중

한 명을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하르체는 그렇게 했다. 당원 한 명이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사모는 그

당원이 어느 계단으로 올라가는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때 보좌관이

사모에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당신. 그 산양을 계속 들고 있을 거요?"

"나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게 내 안전의  담보물인 것 같아

서."

"뭣하러 그걸 잡았소?"

"먹으려고."

"그럼 드시오."

하르체와 다른 당원들이  분노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보좌관은

차분하게 말했다.

"곧 죽을 것 같군. 당신들은 산것만 먹지 않소?"

사모는 고개를 약간 갸웃한 채 보좌관을 보다가 말했다.

"이걸 먹은 후에도 내 안전을 보장할 거야?"

"은편 일흔다섯 닢 내면."

"…뭐라고?"

"두억시니가 당신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면, 당신을 도로 통행자로 인정

하는 것에 대한 문제는 한 가지 밖에  없소. 아직 통행료가 수령되지 않

았다는 거지. 대요금표에 따르면 나가의 통행료는 은편 열 닢이오. 그리

고 대호는 열다섯 닢."

"그런데 왜 일흔다섯 닢이지?"

"우리 도로에서 무단으로 사냥했을  경우의 벌금이 쉰  닢이오. 덫이나

활 등의 수렵도구가 여행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으므로 사냥은 금지되

어 있소."

사모는 미소지으며 금편 하나를 내밀었다.  북쪽에서 사용되는 것과 형

태가 약간 다른 금편을 본  보좌관은 무게를 재어보고나서 거슬러주겠다

고 말했다. 사모는 불만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저없이 산

양을 집어삼켰다. 당원들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고 비형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보좌관은 산양 한  마리가 그대로 입으로 들어가

는 광경을 보면서도 태연하게 말했다.

"차후에 이 도로를 이용할 때는 미리  길양식을 준비하도록 하시오. 벌

금을 내고 사냥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하오."

당원들이 불평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감히 입밖으로 내어 말하지 못하

는 것을 본 사모는 보좌관의 권위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상당한 높

을 거라 생각했다.

"주의하지. 이제 나는 당신들에게 보호받을 수 있는 손님이야?"

"그렇소. 그리고 손님답게 무력사용은 삼가시오."

"아차. 그런 책임도 있나 보군."

사모는 당했다는 몸짓을 과장되게 취해보였다. 하지만 보좌관은 여전히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소. 당신네들 사이에 어떤 불편한 관계가 있나 본데, 그게 무엇인

지 모르겠지만 그 관계는 이 도로를 떠난 다음 해소하시오. 그것은 유료

도로당의 규칙이고, 고대의 왕들도 그 규칙은 존중했소. 그래서 왕의 죄

인이라도 유료도로 상에서는 무력으로 체포하지 못했소."

사모는 고대의 왕들이 그 규칙을 존중했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

만 보좌관의 사리에 맞는 언동은 존중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비형이 엉뚱한 말을 꺼내었다.

"왕들도 못하는 게 많았군요?"

케이건은 비형을 돌아보았다. 비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보로에서 당신이 그러셨죠. 고대의 왕들도  사원의 봉문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그리고 보좌관님은 왕들이 유료도로에서  죄인을 무력으로 체

포할 수 없었다고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왕이 못하는 일이 꽤 많았나 보

군요? 왕은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 아닌가요?"

"제왕병 환자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선지자나 키타타 자보

로 같은 이들이 뭐든 제멋대로 하려는  망나니를 그렇게 원할 것 같지는

않소. 비형."

비형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당원의 말을 전해들은 륜은 난감한 표정으로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도깨비불 하나로 아스화리탈을 마음대로 조종했지만 륜은 그런

기지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팔짱을 낀  채 바라보는 티나한의 눈초리를

거북하게 느끼며 륜은 아스화리탈을 들어올렸다.  아스화리탈은 륜의 두

손에 몸을 맡긴 채 긴 머리와 네 다리, 그리고 꼬리와 날개까지 축 늘어

뜨렸다.

"죽은 척은 관두고 내  말 좀 들어봐.  저 두억시니들을 쫓아낼  수 있

어?"

아스화리탈은 륜의 목소리에 반응했지만 무슨  말인지는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좌우로 까딱거리는 어린  용을 보며 륜은 답답해지

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티나한이 결국 참견하고 나섰다.

륜은 티나한이 내놓은 의견에 거의 울고 싶은 기분까지도 느꼈지만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그 의견을 따랐다. 그리하여, 마침

내, 아스화리탈은 멍한 눈으로  티나한의 혼신을 다한  두억시니 연기와

륜의 처절하기까지 한 용 연기를 감상해야 했다.

"나는 사나운 두억시니다. 우워어어. 나는 정말 사납다."

"내 불을 받아라.  후우우우. 내 불을…"  '잠깐. 저는  꼬리가 없는데

요?'

'발이라도 올려.'

륜은 울먹거릴 듯한 얼굴로 왼발을 얼굴 앞에  올렸다. 두 팔을 날개처

럼 펼친 채 오른발로만 서서 비틀거리는  륜의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륜은 처참한 기분 속에서 자신의 왼발에 입김을 불었다.

"자. 내 불을 받아라. 후우우우. 정말 뜨겁지?"

"으아아, 뜨겁다. 너무너무 뜨겁다."

티나한이 방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으로  장대한 연기는 대단

원의 막을 내렸다. 륜과 티나한은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넋

이 나간 듯한 아스화리탈의 모습을 보고는 작게 속삭였다.

'통하는 것 같지?'

'솔직히 대답해도 돼요?'

'하지마. 한번 더 해보자.' "나는 진짜진짜 사나운 두억시니다…"

두 사람이 두 번 더 같은 연기를  반복한 후에도 아스화리탈은 멍한 눈

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티나한은 최소한 관심을  잃지는 않은 것을 보니

뭔가 감동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고 륜은 아스화리탈이 너무 기

가 막혀 그러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싶

은 생각은 없었기에 륜은 아스화리탈을 안아올린 다음 창가로 걸어갔다.

"제발 우리가 했던 대로 해줘. 부탁이야!"

그리고 륜은 창밖으로 아스화리탈을 던지듯 날려보냈다.

두 사람이 아스화리탈에게 뭔가 감동을 준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

면 아스화리탈이 불에 타며 괴로워하는 티나한의 박력 넘치는 연기를 그

대로 재연해보였을 리는 없으니까.

륜과 티나한의 활약을 전해들은 케이건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고 사모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비형은 배를 붙잡고 웃었다. 보좌관은 그런 도깨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케이건에게 말했다.

"혹 저 두억시니들을 퇴거시킬만한 다른 수단을 제안하실 수 있겠소?"

"떠오르는 바가 없소."

"그렇다면 지금 시간부터 상황은 당이 맡도록  하겠소. 당의 통제를 따

라주길 바라오."

"좋으실대로."

보좌관은 사모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통제를 따르지."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몸을 돌려 하르체를 바라보았다.

"당은 지금부터 관문  바깥의 두억시니를 적으로  규정하고 전투상황에

돌입한다."

"적입니까? 하지만 저 두억시니들은 여기 있는  이 자들을 추적해온 것

아닙니까."

"이 자들에게는 이미 통행료를 받았다. 그리고 숙박비도 꼬박꼬박 지불

했고. 애초에 도로 사용이나 숙박을 거절했으면  모르되 이미 허락한 이

상은 우리 손님으로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두억시니들과 이 자들의 문제입니다. 우리

가 왜 싸워야 하지요?"

"저 두억시니들은 통행료 안 냈다."

하르체와 당원들은 가슴 벅찬 표정으로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설명을 납득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보좌관은  당원들의 표정에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말했다.

"너희들이 그걸 잊어먹지 않았기를 바라며, 전투  배치에 임할 것을 명

령한다."

하르체와 당원들은 그제야 당황했다. "내  전투 배치가 어디지요, 하르

체?", "젠장, 네 당원패를 보면 알 거  아냐!", "당원패에 그런 것도 있

어요? 어, 진짜네?" 당원들은 품 속에서 꺼낸 조그마한 나무패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자신들의 위치를 찾아 허둥지둥 달려갔다. 당원들이 모두 떠

나자 동굴 안에는 케이건과 비형, 사모 페이와 대호, 그리고 보좌관만이

남게 되었다. 보좌관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곳에는 곧 돌격대원들과 관문봉쇄조가 배치될 거요. 그러니 빨리 움

직여야겠소. 당신 두 사람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나오지 마시오."

보좌관은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쪽에서 온 여인. 관문을 통과하

겠소, 아니면 여행자 숙소에 머물겠소?"

사모는 케이건과 비형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숙소에 머물지."

케이건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모의 시선을 받아내었다. 보좌관은 대호를

보며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하루 동안은 무료요. 그  다음부터는 숙박비를 내야 하고.  그런데 그

대호와 함께 방을 쓰겠소, 아니면 마굿간을 이용하겠소? 난 전자를 권하

고 싶소만. 말들이 겁을 먹을 테니."

"함께 쓰겠어."

"따라오시오."

사모는 보좌관을 따라가다가 문득 케이건과 비형이 반대쪽 벽으로 걸어

가는 것을 깨달았다. 사모는  보좌관이 그들을 떼어놓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통제를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에 사모는 반대하지 않

았다. 커다란 계단을 올라간 보좌관은 사모에게  빈 방 하나를 내어주고

는 전투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방 밖으로 나오지 말  것을 명령한 다음

떠났다. 문을 밀어본 사모는 그것이 밖에서 잠겼음을 깨닫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사모는 쉬크톨을 뽑아 륜이  건물 어디쯤에 있는지 방향

을 감지해본 다음 옷을 벗었다.

케이건과 비형 또한 방으로 돌아온 다음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를 들

었다. 륜은 케이건을 보자마자 질문했다.

"누님은 어떻게 됐죠?"

"여행자 숙소에 머물기로 했다.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모르고, 또한 지

금은 만나볼 수 없을 거다. 이 요새는 두억시니들과의 전투 상황에 돌입

했고 그 때문에 손님들은 얌전히 방 안에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비형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 위엄왕의 엉터리 병사들보다는 이  요새의 당원들이 훨씬 병사답더

군요. 뭔가 대단히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렇잖아

요?"

"1400 여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자들이니까."

티나한은 벽에 팔꿈치를 괸 채 창밖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더라도 저런 것을 막아낼 수 있을까? 저  놈들, 자세히 보니 피라

미드에서 만났던 그 엉터리 같은 두억시니와는 좀 달라 보이는데. 그 유

해의 뱀이 특별히 신경써서 골라 보낸 것 같아."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저 놈들이 예삿것들은 아니라고 판단했소. 하지만 시구리아트 유

료도로당도 호락호락한 자들은 아니오. 어쨌든  주퀘도 사르마크로 하여

금 결국 은편 열 닢을 내게 만든 자들이니까."

티나한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 때 요새 전체를

울리는 거대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나팔소리는 빗줄기 사이로 한없이

울려퍼졌고 잠시 후 산봉우리들이  그 나팔소리를 되돌려  보냈다. 산맥

전체가 폭풍의 밤하늘을 향해 떨쳐 일어나는 것 같았다.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이 신을 잃은 자들을 상대로 전투를 선언한 것이

다.

노기 하수언은 우수한 도깨비  대장장이였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하수언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나이 열다섯이  되었을 때 이미 하수언 지

방 최고의 대장장이로 손꼽혔다. 노기가 특히  장기로 삼았던 것은 기계

장치 분야였다. 그는 자신의 재주로 동료  도깨비들을 즐겁게 할 움직이

는 인형이나 장난감 등을 만들어내었다. 노기가 만들어낸 걸작들 중에서

는 특히 강철 딱정벌레가  유명하다. 그 딱정벌레는,  비록 그의 야심찬

시도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딱정벌레는 볼품

사납게 걸어다녔고 사람들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으며  한밤중에 죽은

자라도 일어날 것 같은 괴성을 질러 귀 먹은 도깨비를 제외한 모든 도깨

비들을 잠자리에서 뛰쳐나오게  만드는 등의 사랑스러운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수천 개의  톱니바퀴와 지렛대, 도르레,  그리고 노기가

불어넣은 도깨비불 몇 개가 이루어낸 기적이었다. 그 누구도 그 작동 원

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도 질문할 생각을 못했지만 노기 자신

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 증거로 노기는 무수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딱정벌레를 만들지 않았다. 물론 도깨비들은  우연의 주관 하에 어

쩌다가 만들어낸 작품이라 해서 그 딱정벌레를 폄하하지는 않았다. 도깨

비들의 속담을 따르자면 '길에서 돈을 주우려면  최소한 발 아래는 살펴

야 하는' 것이다. 같은 속담이 노기에게  적용된다면 '우연히 강철 딱정

벌레를 만들어내었다면 최소한 뭔가를 만들어낼 생각은 했어야 하는' 것

이다.

그렇게 노기는 그만이 '우연히' 만들어낼 수 있는 재미있는 창작품들을

남기다가 나이 예순이 되었을 때 생에 작별을 고했다. 그가 죽은 이후로

도깨비들은 결코 그런 '우연의 장난감'들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도깨비

들이 옳았던 것이다. 행운도 그걸 찾아 다니는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다.

뒤집어 말한다면, 행운이 노력하는 자의  위대함을 깎아내리지는 않는다

는 말도 된다. 그래서 도깨비들은 노기의  강철 딱정벌레를 우연의 소치

로 치부해 폄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알고 있던 갈로텍은, 그래서 눈 앞에 놓인 도면을 보며 머

리를 싸매어야 했다. 갈로텍은  노기 하수언이 "나는 할  바를 다 했어.

어쩌면 우연히 작동할지도 모르지." 라고 말한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

었다.

갈로텍은 자신 속에서 노기를 불러내어 확인하고 싶었지만 워낙 오래간

만에 의식의 전면으로 나섰던 그 도깨비 대장장이는 피로감 때문인지 깊

은 잠에 빠져들어 갈로텍의 계속된 소환에 불응했다. 물론 갈로텍에게는

복잡한 기계의 설계도를 쉽게 읽어내는 능력  같은 것은 없었다. 도면을

바라보며 고심하던 갈로텍은, 결국 소용이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다시

노기를 불렀다.

소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상황이 더 나빠졌다. 갈로텍의 부름에 대답

한 것은 그가 전혀 달가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게 뭐야? 무슨 설계도 같은데?"

"주퀘도. 당신을 부르지는 않았는데요."

주퀘도는 갈로텍의 항의를 무시하며 갈로텍의 입술을 움직였다.

"노기 하수언이 그린 건가? 그에게 뭘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당신이 알 바 아니잖습니까."

"노기도 짜증스러웠겠군. 금속판에 철필로 도면을 그려야 했으니. 게다

가 너희들처럼 불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자들도 만들 수 있게 설계하

려면 몇 배나 힘들었을 텐데."

갈로텍은 놀랐다. 주퀘도가 말한 것은  노기가 투덜거렸던 말 그대로였

다. 문득 갈로텍은 주퀘도가  생전에 거장으로 불렸던  사람임을 떠올렸

다. 비록 성격이 전혀 다른 분야의  거장이긴 했지만, 어쩌면 거장은 다

른 거장의 솜씨를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갈로텍을 흥분하게 했다.

갈로텍은 주퀘도가 신경쓰지 않던 왼손을  움직여 탁자에 있던 물그릇을

들어 금속판 위에 부었다.

주퀘도는 갈로텍이 무슨 짓을 하는지 보겠다는  듯이 뒤로 물러나 몸을

쓰게 해주었다. 갈로텍은 수건을 들어  금속판을 닦았다. 그러자 예리한

철필에 의해 그어진 부분에 물기가 남았다. 물은 열을 삼킨다. 주퀘도는

나가의 시력을 통해 금속판 위에 선명한  도면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갈로텍은 다시 뒤로 물러나며 주퀘도를 앞에 내세웠다.

"주퀘도. 보입니까?"

"이런, 멍청한 질문을. 눈은  네 거잖아. 네가 보이면  나도 당연히 볼

수 있어. 재미있는 도면이군."

"이게 제대로 작동하겠습니까?"

"오오!"

"예? 왜 그러시죠?"

"작동하는 거였구나."

갈로텍은 주퀘도를 한 대 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기 자

신을 때리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분을 억눌러야

했지만. 주퀘도는 갈로텍이 싫어하는 웃음소리를 몇  번 터뜨린 다음 말

했다.

"상당히 복잡한데. 너희 대장장이들이 이걸 만들 수 있을까? 인간 대장

장이들도 도깨비 방식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어. 아마 최후의 대장장

이도 도깨비 방식으로는 못만들걸."

"불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는 사람도 만들 수 있게 설계해달라고 몇 번

이나 당부했습니다. 노기도 알아들었고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런데 이건 도대체  뭐지. …이러면 내부의 온도

가 떨어지는 건가?"

갈로텍은 깜짝 놀랐다.

"주, 주퀘도! 이 도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기 노기가 끄적거려놓았는데. 두 기체가 혼합되면 내부 온도가 하강

한다."

갈로텍은 자신의 얼굴을 한 대 때리는  행위에 대해 심사숙고하기 시작

했다. 그런 갈로텍의 고민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주퀘도는 흥미롭다

는 듯이 도면을 들여다보았다.

"대충 보건대 대단한 물건인가 보군.  나야 도저히 이치를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이건 내부를 차갑게 만드는 장치인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이런

복잡한 물건이 필요하지? 뭔가를  차갑게 만들려면 그냥  커다란 물통과

그 속에 가득 든 물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당신 고향을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여긴 하텐그라쥬입니다. 금속

통에 넣어둔 물은 금방 뜨뜻해집니다."

"그러면 서늘한 동굴 속에 넣어두거나 땅 속에 묻으면 되잖아."

"그럴 수 있으면 저도 그랬을 겁니다. 그런  방법을 쓸 수가 없기 때문

에 이런 걸 부탁한 거죠."

"너희들 수호자들이 여자들 몰래 마실 찬 술을 보관해두려는 건가?"

"우리에겐 그 술이라는 정신을 좀먹는 음료가 없어요. 젠장. 도와줄 것

이 없다면 좀 내려가시죠? 죽은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왜 그렇게 활기

찬 거죠?"

"자고 싶지 않아. 갈로텍."

"왜 자고 싶지 않은데요?"

"못된 꿈을 꿨어. 잠들기보다는, 네가 말하는 그 정신을 좀먹는 음료를

마시고 싶군."

어이없어 하던 갈로텍은 문득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담고

있는 불편한 심리를 깨달았다. 갈로텍은 조심스럽게 입을 움직였다.

"무슨 꿈을 꿨습니까?"

"전투의 꿈이었어."

"전투야 당신의 인생이었잖습니까."

"특별했던 전투가 하나 있지."

갈로텍은 이해했다. 거장의 자존심에 남겨진 그 무서운 상처는 평생 그

를 괴롭힌 것으로도 모자라 죽은 후에도 거장을 괴롭히고 있었다.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과의 전투군요."

주퀘도는 침묵했다. 갈로텍은 잠시 입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리

를 획득했지만 그걸 이용해서 꺼낼 만한  말은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래

서 갈로텍은 잠시 후 주퀘도가 갑자기  입을 움직였을 때 차라리 안도감

을 느꼈다.

"5개월 동안 죽어간 병사가  일만 명이었어! 일만 명이  죽었는데도 난

그 빌어먹을 요새에 어떤 결정적인 타격도 줄  수 없었어. 결국 은편 열

개를 내야 했지. 그게 내 자존심의  값이었어. 그리고 내가 지불해야 했

던 전쟁배상금이었고. 제기랄, 그 악당들은  차라리 내 목을 요구했어야

했어! 은편 열 닢이라니, 사악하기 짝이 없는 놈들 같으니!"

갈로텍은 주퀘도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정신적인 한

숨을 내쉰 다음, 갈로텍은 의식의 배후로 조금 물러나 자리잡았다. 그리

고 왕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제왕병자,  혹은 죽음의 거장이라 불렸던

인간의 추억을 경청했다. 수십번째 듣는다는 내색은 하지 않은 채.

우레 소리를 닮은 '쿠르르르'  하는 소리에 티나한은  천장을 바라보았

다. 그것은 분명 무거운  물체가 빠른 속력으로  구르고 있는 소리였다.

그리고 잠시 후 창밖으로  시구리아트 산맥의 폭풍보다  더 거센 기세로

돌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티나한은 재빨리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두억시니들의 머리 바로 위로 떨어진 돌들은 두억시니의 살점을 으깨고

뼈를 부수었다. 소름끼치는 비명과 함께 두억시니들은 뒤로 물러나려 발

버둥쳤다. 하지만 삼천이나 되는 대규모의 인원이 밀집하여 있었기 때문

에 뒤로 물러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시  묵직한 소리가 울린 다음 허

둥거리는 두억시니들의 머리  위로 또다시 돌멩이의  벼락이 쏟아져내렸

다. 티나한은 감탄했다.

"위쪽에 투석구들이 배치되어 있군!"

티나한의 추측대로였다. 요새 상층부에는 바깥과  완전히 격리된 긴 방

이 있었다. 그 안에서는 투석수라 불리는 자들이 방의 벽면에 있는 구멍

들을 통해 방 안에 쌓여있던 돌들을 굴려넣고 있었다. 궤도를 따라 가속

하며 굴러내린 돌들은 허공에 해방되자마자 가공할 살육 무기가 되어 두

억시니의 머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두억시니들은 악다구니를 쓰며 가까스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낙석은

겨우 시작신호에 불과했다. 두억시니들이 낙석의 궤도에서 물러나자마자

무수한 쇠뇌들이 요새에서 뿜어져나왔다. 바깥에서 요새를 본 적이 있는

티나한은 도대체 어느 구멍에서 그 많은 쇠뇌들이 발사되는 건지 의아하

게 여겼다. 포악한 화살들이  두억시니들의 무리를 덮치자  거친 비명과

말을 이룰 수 없는 함성들이 산맥을  진동시켰다. 티나한은 한껏 흥분하

여 방 안을 돌아보았다. 전사의  고양된 투쟁심을 표현하려던 티나한은,

그러나 동료들의 우울한 얼굴을 보며 움찔했다.

륜은 사모 페이에 대한 생각을 하며  멍하니 아스화리탈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리고 비형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비명들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의 귀를 틀어막은 채 창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케이

건은 손에 모포를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티나한의 눈을 마주보며 케이

건은 모포를 살짝 들어올려 보였다.

"창문을 막고 싶은데. 더 볼 거요?"

"창문을 왜?"

케이건은 턱으로 비형의 등을 가리켜보였다.  티나한은 창문 앞에서 비

켜섰고 그러자 케이건은 모포를 뭉쳐 창문을 틀어막았다. 바깥에서 들려

오는 날카롭고 처절한 소리가 한결 줄어들었다.  비형은 고개를 돌려 케

이건 쪽을 보고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문 앞으로 걸어

가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모두들 자도록 하시오."

"너는 안 잘 거야?"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고, 게다가 암살자가 이 요새 안에 있소.

그녀는 이 안에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데  동의했지만 조심해두는

쪽이 좋을 것 같소."

무섭고도 소름끼치는 밤이었다. 시구리아트  관문요새는 도로 여행자들

에겐 든든한 쉼터일지 모르지만 적으로  규정한 상대에게는 흉포하기 짝

이 없는 돌의 야수였다. 그러나 두억시니들 또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

다. 그 때문에 전투는  관문요새의 초반 우위에도  불구하고 장기전으로

바뀌었다. 케이건은 밤새도록 통로를 뛰어 다니는 당원들의 발소리를 들

을 수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왔을 때 케이건은 또다른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두억

시니들이 돌을 집어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쇠뇌의 사거리 바깥에서 던지

는 것이라 위협적일 정도로 큰 돌은  던지지 못하는 듯했지만 돌이 요새

와 부딪히며 일으키는 진동음은 바위 속에 있는 그들을 불안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티나한은  흉한 욕짓거리를 중얼거리며

창가로 다가가 모포를 잡아뽑았다. 빗소리와 함께 전투의 소음이 방안으

로 밀려들어왔다. 티나한은 부리를 딱 부딪힌 다음 말했다.

"자갈을 던지고 있군, 제기랄 것들!"

투덜거리던 티나한은 갑자기  손을 얼굴 앞으로  들어올렸다. 케이건은

창문을 통해 날아든 것이 티나한의 손아귀에  붙잡히는 것을 보았다. 아

울러 '퍽!'하는 소리도. 티나한은 손바닥을  폈고 거기엔 돌멩이가 붙잡

혀 있었다. 케이건은 인간의 주먹만한 돌을  보고는 자갈이라기엔 좀 크

다고 생각했다. 티나한은 벼슬을 곤두세웠다.

"얼씨구!"

그리고 티나한은 두억시니들에게 돌을 도로  던지려 했다. 그러나 창문

은 그런 짓을 하기엔 너무 좁았다. 티나한은 씨근거리며 돌을 그냥 창밖

에 내버린 다음 모포로 창을 틀어막았다.

"젠장. 잠 깼다. 케이건. 내가 망을 볼 테니 자도록 해."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케이건은 쉴 팔자가  되지 못했다. 하늘빛이 보다  밝아져올 때

밖에서 잠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티나한이 깨우기도 전에 케이

건은 일어나 앉았고 바라기까지 당겨쥐었다. 티나한도 긴장하며 문을 바

라보았다. 문이 열리며 나타난 것은 한  손에 검을, 다른 손에는 등롱을

든 당원이었다.

"케이건 드라카. 당주님께서 당신들을 부르셨습니다."

"당신들? 우리 모두 말이오?"

"그렇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그리고 두 사람은 비형과 륜을 깨웠다. 이미 륜이 나가임이 밝혀졌지만

케이건은 륜에게 방풍복과 천을 착용하도록 명령했다. 긴장하고 있을 것

이 뻔한 요새 내의 당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간을

조금 소비한 다음, 그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당원의 안내를 받아 걸

어갔다.

요새 내를 걸어가며 일행은 전투 중이라는 분위기를 분명히 느낄 수 있

었다. 곳곳에서 당원들이 다급한 얼굴을 한 채 달리고 있었고 쇠뇌나 음

식, 혹은 돌상자 등을 나르는 인원들도 볼 수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

이 분명한 투구를 자꾸만 매만지는 손길,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채 주위

의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얼굴들.  전투의 열기는 후끈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형은 그 굳어있는 얼굴들에서 요새에 대한 그들의 신뢰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륜은 온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당원들이 자꾸만 흘끔

거리는 것을 느끼며 불안해 했다. 하지만 비형은 그들이 륜의 어깨에 앉

아있는 아스화리탈을 바라보는 것임을 설명해주었다.

당주의 방 앞에도 무장한 당원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일행을 안내한

당원은 그들에게 일행을 인계한 다음 돌아갔다. 무장경비병들은 문을 열

어주기 전 일행의 무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내놓고 들어가셔야겠습니다."

티나한은 부리를 부딪혔지만 케이건은 그런  시간조차도 낭비하지 않았

다. 문을 벌컥 밀어버리는  케이건의 모습에 경비병들은  당황하여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케이건은 그들 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안쪽을

향해 말했다.

"내 검과 함께 들어갈 수 없다면 돌아가겠소."

방 안에서 보좌관의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함께 들어오시오. 어차피 레콘은 무기가 있으나 마나 위험하긴 마찬가

지겠지."

케이건은 경비병들에게 '들었지?'하는 표정을  지어주는 일까지도 생략

했다. 그냥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케이건의 모습을 보며 경비병들은 얼굴

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티나한은 그런  표정을 지었고, 그래서 경비병

들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마지막으로 들어선 비형이 문을 닫았다. 전에 이곳에  와 본 륜은 자신

들이 가운데 있는 커다란  문으로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행은

탁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몇 명의 고위당원들과  함께 보좌관이

앉아 있었다. 휘장이 쳐진 것을 본 륜은  그 뒤에 보늬 당주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가까이 있던 고위당원 하나가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손짓

을 했다. 일행은 의자에 앉았다. 물론 티나한은 그냥 바닥에 앉았다.

아무도 자기 소개를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리고 보좌관 역시 그럴

마음은 없는 듯 곧장 케이건에게 말했다.

"상황이 상황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을  용서하시오. 여러분들이

저 두억시니에 대해 아는 것을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소. 상대하는 데 도

움이 될 수 있도록."

케이건은 보좌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젯밤 전투 시작시에 물어봤다면 모르겠지만, 왜 이런 이상한 시간에

묻는 거요?"

"비가 그치고 있소."

티나한은 그 말에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하품을  하던 비형은

의아한 표정으로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보좌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해가 뜰 때 쯤엔 완전히 멎을 것 같소. 그럼 당신들은 떠나겠지. 그래

서 떠나기 전에 묻기 위해 이런 이상한 시간에 당신을 불러온 거요."

비형과 륜은 깜짝 놀랐다. 비형이 먼저 말했다.

"어, 떠나도 되는 겁니까?"

"무슨 말이오?"

"그러니까, 어,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들을 쫓아

온 두억시니들을 당신들에게 떠넘기고 그냥 떠나도 되는 겁니까?"

비형의 질문에 몇몇  당원들이 얼굴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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