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18화 (18/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5-2.                         관련자료:없음  [5309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19 01:11  조회:10511

눈물을 마시는 새.

5. 길을 준비하는 자 - 2

보늬 당주가 다시 잠든 후에야 보좌관은 휘장 너머로 돌아왔다. 보좌관

은 케이건이 휘장 너머를 볼 수  없도록 주의하며 나왔지만 케이건은 어

차피 그 쪽을 보지 않았기에 그것은 별로 필요없는 주의가 되고 말았다.

의자에 앉아 깍지낀 두 주먹으로 이마를 받치고 있는 케이건에게 걸어온

보좌관은 나직한 어투로 말했다.

"은편 열 닢이오."

케이건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나가에 대한 통행료는 은편 열 닢이오. 인간과 같지."

"용은?"

"그 용의 통행료는 면제하겠소.  도로를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니."

케이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보좌관을  향해 목례한 다음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보좌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도."

케이건은 멈춰서서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보좌관은 붓을 들어 도깨비지 위에  글을 써내려갔다. 케이건은 보좌관

이 쓰는 글을 읽었다. 그것은 케이건에  대한 통행료를 면제한다는 내용

이었다. 보좌관은 종이가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도장을 찍은 다음 그

것을 케이건에게 건네었다.

"이것을 가지고 내려가서 보여주시오. 가지고  있다가 다음에도 통과할

일이 있거든 보여주도록 하시오."

케이건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이런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은 아니었는데."

"물론 아니오. 우리는 그렇게 규칙을  제멋대로 다루는 사람이 아니오.

이건 엄연한 대요금표의 적용이오."

"내게 면제사유가 있소?"

보좌관은 대요금표의 금속판들을 힘겹게 넘긴 다음 한 부분을 가리켜보

였다. 보좌관이 가리킨 부분을 읽은 케이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군."

"그렇소."

케이건은 보좌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던

보좌관은 케이건이 입을 열려  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케이건은 입을

다물었다. 보좌관은 지필묵을 수습하며 케이건을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

다.

"가보시오."

케이건은 도깨비불을 집어든 다음 그 방을 나왔다.

긴 계단을 내려가면서, 케이건은 11년만에 알게 된 요스비의 죽음과 보

늬 성주와의 예기치 않았던 재회, 그리고 그에 대해 알면서도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보좌관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았다.  케이건은 비가 쉬 그치

지 않을 테니 요새의  여행자 숙소를 이용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고,

산맥을 넘은 이후의 여정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길잡이였다.

케이건 드라카는 길잡이였다.

문득 케이건은 손이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오른손을 눈앞

으로 들어올렸다. 그것은 허옇게 변할 정도로 주먹 쥐어져 있었고, 손가

락을 펴자 손톱에 찔린 손바닥이 나타났다.  상처들 중에는 작은 핏방울

이 배어 있는 것도  있었다. 상처 입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케이건은

잠시 후 핏방울을 핥았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아르히를 과음한 끝에 기절하다시피 한 티나한과 징수소의 창문을 통해

딱정벌레 나늬에게 "미녀니까 한  닢만 받겠습니다! 어?  이름만 같다고

요?" 등의 주사를 늘어놓고 있는 비형의  모습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

는 케이건은 언제나와 같은 길잡이 케이건이었다. 징수소의 한쪽 구석에

서서 침묵한 채 바라보던 륜은 그 사실을 너무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

었다. 륜은 침묵했다.

징수원들은 케이건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 통행료를 합산해서 제시했다.

케이건은 산양을 건네줌으로써  지불을 끝낸 다음  징수원들에게 여행자

숙소로 안내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케이건은 거의  괴력에 가까운

힘으로 비형을 부축했다. 하지만 티나한은  도저히 들어올릴 수 없었고,

그래서 모든 이들의 암묵적 합의 하에  징수소 바닥에 방치되고 말았다.

티나한은 그 날 밤 늦게야 벼슬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두통을 호소하며

여행자 숙소의 일행에게 합류했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밤이 되었을 때도 비는 계속 내렸다.

바위 위에서, 마루나래는 사모 페이의 등에 몸을 붙인 채 앉아 있었다.

사모 페이는 모아쥔 두  무릎을 가슴에 당겨붙인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지만 사모 페이는 두억시니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들은 여섯 시간 동안 계속해온 일을 아직도  하고 있었다. 벌써 몇십 명

(사모는 주저하면서도 '명'이라는 단위를 사용하고 있었다.)의 두억시니

가 과로로 쓰러져 사망했고 그보다 많은 수가 범람하는 계곡물, 혹은 뒤

에서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다른 두억시니에게  떠밀려 격류에 휩쓸려 내

려갔다. 두억시니들이 퍼낸 강물  때문에 그들이 서있는  곳은 수렁처럼

바뀌어 있었다. 진흙과 빗물 속에서 광기  어린 헛수고가 영원처럼 계속

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사모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사실,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했다.

사모에게 필요한 것은 결단이었다.

그녀의 손으로 베푸는 죽음에 대한 결단.

사모는 결단을 내렸다.

사모는 일어났다. 흑사자 모피 속으로까지  파고든 빗물 때문에 그녀의

동작은 느렸지만 마루나래는 긴장하며 일어났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턱

을 쓰다듬어준 다음 그 등에 올라탔다.  사모의 의지를 받은 마루나래는

가벼운 동작으로 산비탈을 뛰어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시퍼런 안광을 번득이며 내려오는 대호를 보며 두억시니들

은 하던 동작을 멈추었다.  뒤로 조금씩 물러난  두억시니들은 쏟아지는

비 속에서 침묵한 채 마루나래와 사모를 바라보았다.

마루나래의 등에 앉은 사모는 격류 건너편,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두억

시니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모는 다시 마루나래에게 개념을 전달했다. 그 개념에 따라 마

루나래는 강폭이 가장 좁아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두억시니들

의 눈, 혹은 다른 것들이 마루나래의 움직임을 쫓았다.

강폭이 가장 좁아지는 곳에는 강물 또한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귀가

울릴 정도의 굉음이었지만 사모에겐 큰 불편을  주지 않았다. 사모는 마

루나래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쉬크톨을 뽑아들었다.

사모는 쉬크톨을 두 손으로 쥔 채 높이 들어올렸다.

잠시 그렇게 서있던 사모는 쉬크톨을 사정없이 옆으로 휘둘렀다.

거대한 나무에 쉬크톨이 박혔다. 사모는  힘겹게 쉬크톨을 뽑아든 다음

다시 휘둘렀다. 물소리마저 잠재울 듯한 나무의 비명과 함께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사모는 얼굴을 때리는 나뭇조각에도 고개를 돌

리지 않았다. 몇 번 더 쉬크톨을 휘두른 사모는 쉬크톨의 칼날이 단단히

박히자 허리를 굽혀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돌멩이로 쉬크톨의

칼등을 내려쳤다.

나무와 쇠가 처절한 비명을 토했다.

사모는 계속해서 돌멩이를 휘둘렀다. 불꽃이 튀어오를 때마다 쉬크톨의

날이 나무 속살을 가르며 나무 내부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녀 자신의 몸

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어느새 고인 은루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

지만 돌멩이를 휘두르는 사모의  손은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쉬크톨이

나무의 중심부까지 파고들자 사모는 돌멩이를  팽개쳤다. 땅바닥을 구르

는 돌멩이에는 사모의 살점이  묻어 있었다. 사모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쥔 채 사납게 외쳤다.

"마루나래!"

"어루루루룽!"

산맥을 진동시키는 포효와  함께 마루나래가 뒷발로  일어섰다. 그리고

거대한 두 개의 앞발로 나무를 밀었다. 3톤이 넘는 마루나래의 체중으로

두어 번 밀어붙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무는 허리가  부러지며 쓰러졌

다.

강 건너편에 호되게 부딪힌 나무가 몇 번 더 진동했다. 비탈을 따라 조

금 구르던 나무는 곧 튀어나온 바위에 걸리며 고정되었다.

사모는 튕겨져나간 쉬크톨을 떨리는  손으로 집어들었다. 두억시니들은

아직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이 될 수 없는 말을 나누고 있었다. 사

모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루나래를 엎드리게  한 다음 사모는 그

등에 올라탔다.

"가자!"

마루나래는 빗줄기를 꿰뚫으며 바람처럼 산비탈을 타고 올랐다. 마루나

래가 산정상 가까이 뛰어오를 무렵 저 아래쪽에서는 두억시니들이 '외나

무다리'라는 개념을 힘겹게 시험하고 있었다.

정상에 오른 다음, 사모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때리

는 빗줄기 속을 향해 그녀가 살해한 나무에 대한 사과의 니름을 닐렀다.

먼 곳의 산봉우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고 있었다.

륜은 잠을 깼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레 소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륜은 잠자리가 기묘하게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침대가 그리워진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본 것이 벌써  몇 달 전이었다.

륜은 자신이 노숙 생활과  방바닥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믿었다. 그래서

륜은 무엇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어나 앉은 륜은 요새의  두꺼운 벽에 뚫린 작은  창문을 통해 바깥에

무시무시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여행자 숙소의 가장 큰 방에 배정되었

는데, 그것은 오직 티나한의 철창 때문이었다. 가장 큰 방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철창은 바닥에 대각선으로 놓을 수밖에 없었다. 티나한은 술냄새

를 풀풀 풍기며 그  옆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비형은 티나한의 다리를

벤 채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티나한을  마굿간에 있을 나늬라고 생각하

는 모양이다. 케이건이 있던 자리를 보던 륜은 그가 자리에 없음을 깨달

았다. 륜은 의아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여행자 숙소의 구조는 단순했다. 문 앞의 약간  낮은 곳은 신발을 놓게

되어 있었고 그외의 부분은 돌 위에 짚으로 만든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물품을 올려놓을 수 있는  선반들이 몇 개 부착되어 있었

다. 온돌 같은 시설은 없었다. 암벽  속에 만들어진 공간인지라 그런 것

을 만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비형은 륜에게 씌워둔 도깨비불을

없애지 않았다. 비형이 푹 쉴 수 없다는  것에 미안해 하며 륜은 자리에

서 일어났다.

케이건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륜은 창문으로  다가갔다. 암벽을

뚫어 만든 사각형의  조그마한 창은 창문이라기보다는  환기구처럼 보였

다. 거의 50 센티미터가 넘는 암벽을 관통하여 만들어져 있기에 그런 인

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륜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몽환적인 폭풍우가 산맥을 휩쓸고 있었다.

그 밤하늘은 결코 섬광에 물든 암흑이 아니었다. 벼락이 작열할 때마다

공기는 순식간에 가열되어 열류를 퍼뜨렸다. 니름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온갖 색채들이 밤하늘의 패권을 놓고  대회전을 벌이고 있었고 휘몰아치

는 광풍은 그 열류에 물들어 하늘을 질주하는 불가해한 짐승들의 모습으

로 변모했다. 그곳에서는 작열하는 암흑과 칠흑의  빛이 가장 결백한 색

채였다.

그 광경에 매혹되어 있던 륜은 조금 후에야 시선을 돌려보았다. 하지만

창이 워낙 깊은지라 볼  수 있는 영역은 제한되어  있었다. 륜은 창문에

머리를 밀어넣어 시야를 확장하려 애썼다.

그 때 륜은 케이건을 보았다.

잠깐 동안 륜은 공포에 빠진 채 케이건을  보았다. 그의 눈에 케이건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밤하늘에  떠서 폭풍우 치는 시구리아트

산맥을 내려다보고 있는 케이건의 모습은  심장이 멎을 만큼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륜이 보다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시간이 꽤

지난 후의 일이었다.

케이건은 암반에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간  선반 같은 위치에 서있었다.

하지만 아래쪽에서는 그런 구조가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없는 듯했다.

실제로 그날 오후 아래쪽에 있었던  륜은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륜은 그것이 혹 있을지도 모르는 요새에 대한 공격 시에 감시나

비밀스러운 공격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임을 깨달았다. 혹, 징수소

의 경고문대로 뛰어오르려는 레콘에게 물을  끼얹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

물일지도 모른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해보던  륜은 갑자기 케이건이 그런

비밀스러운 장소를 알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륜은 당주의

방에서 목격했던 일을 떠올렸다. 케이건과 당주와의 친분이 그렇게 두터

운 것일까? 요새의 비밀 장소를 케이건이 알고 있을 만큼?

케이건이 있는 선반은 창문에서 볼 때 왼쪽  조금 아래였다. 따라서 륜

은 케이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지만  륜은 쉽게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는 케이건을  아직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케이건이 륜에게 '아버지의 친구'라는 관계를 허락치 않음은 분명했다.

케이건은 요스비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륜과 공유하는 것마저도 거절했

다. 케이건이 륜에게 허락치 않은 것에는  '친구'나 '동료' 또한 포함되

어 있는 듯했다. 자보로를 구하기 위해 비형의 목을 따버리려 했다는 말

을 들은 이후로 륜은 케이건에게 동료애라는 것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륜은 언젠가 들었던 '머리와 몸  정도만 가져가도 성공'이라는 케이건의

말을 떠올리며 비늘을 잔뜩 곤두세웠다.

[살아있는 고깃덩이 취급인가. 그러면  얼마 있지 않아  자신도 그렇게

취급될 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닐 텐데.]

심장도 적출하지 않은 애송이지만 륜은  사람들간의 관계가 상호적이라

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상대방을 단 하나의 가치나 목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 또한 그렇게 되고 만다. 케이건이 륜을 '친구의 아들'

로 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륜  또한 케이건을 '아버지의 친구'로 생각

할 수 없었다. 케이건이  허락하고 있는 하나의 의미만이  륜이 가질 수

있는 케이건의 의미였다. 케이건은 그들의 길잡이였다.

[만약 케이건이 죽는다면, 우리는  길잡이가 없어진 것에  짜증을 느낄

까, 친구가 없어진 것에 대해 슬퍼할까?]

케이건이 떠났을 때 그들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케이건이 다시 돌

아오자 기쁨을 느꼈다. 륜은 그것이 친구가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인지

수완 좋은 길잡이가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인지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비형이나 티나한 또한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복잡한 고민 속에서 케이건을 바라보던 륜은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케이건은 그냥 서있는 것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케이건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륜은 청각에 주의를 집중했다.

륜의 몸이 굳었다.

시구리아트 산맥과 그보다 더  거대한 폭풍우를 향해  케이건이 외치고

있는 것은, 목이 찢어져라 비탄 속에서 외치고 있는 것은 요스비의 이름

이었다. 그러나 륜의 몸이  굳은 것은 그 처절한  외침 때문만은 아니었

다.

케이건은 요스비를 죽인 나가에 대한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저주가 기이했다.

케이건은 아버지의 목숨값을 받아내겠노라고 포효하고 있었다.

폭풍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간혹 숨을 돌리듯 폭풍이  멈췄을 때도

비는 계속 쏟아졌다. 케이건은 거의 아무런 유감도 없는 목소리로 "비가

그칠 때까지 머물겠소." 라고 말했고  티나한은 케이건이 막심한 유감을

느낀다고 말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불쌍한 티나한은 그만 의기소침

해진 채 숙소에 틀어박혔고 케이건이 매일의 숙박비를 지불할 때마다 더

욱 의기소침해졌다.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이토록  우울해 하는

모습은 유료도로당의 당원들 중 감수성 예민한 자들의 동정심을 불러 일

으켰다. 결국 숙소에서는 거의 매일밤 당원들과 티나한이 벌이는 술판이

벌어지고 말았다. 첫날 워낙 호되게 당한  티나한은 당원들의 도움을 받

아 아르히를 적절히 마시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술판부

터는 혼수상태가 된 당원들 사이에서 홀로 유유히 아르히를 마시는 티나

한의 그림 같은 모습이 목격되었다.

당원들은 그들에게 매 끼니마다 네 사람분의 식사를 가져다주었지만 륜

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 계속된 음주 때문에 입맛이 별로 없는 티나한도

거절했기에 륜 몫의 식사는 언제나 비형의  차지가 되었다. 든든한 배를

꺼트릴 방법을 찾기 위해  요새 안을 어슬렁거리던  비형은 거대한 실내

씨름판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쳤다. "자신을

죽이는 신이여, 사랑해요!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죠?" 비형과 죽이 맞은

것은 음주보다 몸을 단련하는  것을 좋아하는 당원들이었고,  그 때부터

당원들은 굴욕적인 패배기록을 쌓기 시작했다.  눈두덩이가 퍼렇게 멍들

거나 다리를 절룩거리는 당원들은 요새 안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를 향해

악쓰듯 외쳤다. "제발 한번만!" 뒤에  생략된 말은 물론 '이겨보자!'다.

하지만 그것은 꽤나 그 달성이 요원한 소망일 듯했다. 가장 큰 당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격에 정통 도깨비 씨름을 구사하는 비형 앞에서 당

원들은 모래와 친해지는 법을 강제로 배워야 했다.

각자의 취미에 매진하느라 티나한과 비형은  케이건이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륜은 케이건이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알고 있었다. 륜은 얼굴을 가린 채 케이건을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케이

건은 륜이 따라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륜은 케이건과  함께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이  축적해온 장구한

역사를 구경했다.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이 처음 생긴 것은 1400여년 전이다. 대확장 전

쟁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이지. 그래서 이렇게 책이 많다."

요새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케이건은 륜이 읽을 만한 것이 없어 지루

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일개 요새의 도서관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나가가 볼 수  있는 책은 거의 없었다. 거의

모든 책들의 글씨체가 나가가 보기엔 너무 가늘었다.

륜은 케이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대확장 전쟁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모르지는 않을 텐데."

륜은 두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북쪽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요."

케이건은 읽던 책을 조용히 덮고는 특유의  감정 없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확장 전쟁 자체는 영웅왕의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기의 전쟁은 국소적인 형태를 띄고 있었고 전면전이라 하기

는 어려웠다. 영웅왕과 그의 아라짓  전사들은 강력했다. 그리고 영웅왕

이 죽은 후에도 아라짓  전사들의 강력함은 무디어지지  않았고. 실제로

많은 역사가들은 영웅왕 사후 80년 쯤을 본격적인 대확장 전쟁의 개시로

보고 있다. 그 시기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너희 나가들은 심장적출

법을 완전히 터득했고 만민회의는 처음으로  파행되었다. 사람들이 영웅

왕보다 나을 수 없고 그만큼도 될 수 없는 후대의 왕들에 실망한 것이었

지. 그리고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의 첫 번째  당주가 산맥을 넘는 길을

찾아낸 것도 그 시기였다. 그리고 공세가 시작되었다."

"긴 전쟁이었지요."

"그래. 긴 전쟁이었다. 결과는 자명했지. 전사자나 부상자들이 거의 생

기지 않는 나가들과 다치면 몇  달 동안, 심한 경우 몇  년 동안 전쟁에

복귀할 수 없는 인간들간의 전쟁이었으니. 그  전쟁이 그토록 길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라짓 전사들의 용맹함 외에  다른 이유로는 설명할 수 없

다. 그러나 그런 불세출의 용맹도 죽지 않는 자들과의 전쟁에 무한히 소

모될 수는 없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지."

"결정적인 사건?"

"바라기가 사라졌다."

륜은 고개를 조금 들어 케이건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도서관에서도 케

이건은 등 뒤에 바라기를 걸고 있었다.

"그래. 이 칼. 이 칼은 영웅왕의 검이었고 아라짓 전사들은 이 검의 계

승자인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걸  뭐라고 부를까. 그것은 영웅왕의

귄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단지 검 한 자루일 뿐이지만, 아라짓 전사들

에겐 하나의 신앙의 대상이었던  검이었다. 그 왕의  검이 사라진 거지.

아라짓 전사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왜 바라기도 가지지  않은 왕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너무 미신적이군요."

"옛날 사람들이다. 그리고, 죽지도 않는 괴물들과 매일 싸워야 했던 자

들이고. 지금 사람들이야  너희들의 생태에 대해 익숙하지만 그 때의 사

람들은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겠냐."

"그 칼은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된 건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도난당했다면 어딘가에서 나

타나기라도 했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어. 게다가 누가  이것을 훔치겠느

냐. 지금은 내 손에 들어와 있지만. 역사가들은 그것을 '바라기의 실종'

이라 부르며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한다. 아라짓 전사들은 거듭되는 전쟁

때문에 결국 쓰러지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왕국은 나가들을 상대로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해서 멸망한 것일 수도  있고. 나가들이 대확장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소드락과 심장적출법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

든 사건을 한꺼번에 설명하기  위해선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바라기의

실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바라기에 대한 말도 안되는 전설들이

마구 생겨난 것도 그  때였다. 이름도 수십 가지고  형태도 수십 가지인

검의 탄생이었다. 너는 들어보지 못했겠지만 이곳 북부에서는 대단하지.

너는 이 땅에서 어쩌면 번개처럼  구부러진 칼 '날벼락'이라든지 휘두르

면 폭풍이 일어난다는 '폭풍의 검', 선택된  영웅만이 들 수 있다는 '영

웅검', 그 이름을 부른  자를 죽이고 말기에 이름을  잊어버린 검 '실명

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전부 영웅왕의 검

과 그에 얽힌 기괴망측한 전설을 가리키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은 내

가 이 칼을 보여줘도 이것이 영웅왕의  검 바라기라는 것을 아무도 못알

아볼 정도가 되었다. 나는 예전에 진지한  태도로 영웅왕의 검은 무게가

1톤이었을 거라고 말하는 자를 만난 적도 있다."

륜은 웃을 수 없었다. 케이건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

이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그래. 염원이 너무 컸고  상실감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런 전설들이

생겨난 거지. 잃은 것이 더 크게  느껴지는 간단한 이치다. 영웅왕의 검

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겐  영웅왕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

미했지."

"당신들에게 영웅왕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였군요."

"이 북쪽에서라면, 너는 영웅왕이 밤하늘에 별을 배치하는 신들의 작업

을 지도했다고 말하더라도 상당수의 동조자를 얻을 수 있을 거다."

"…도깨비와 레콘들은 그 당시에 무엇을 하고 있었죠?"

"도깨비들은 대부분 전투보다는  나가에게 땅을 내어주는  편을 선택했

다. 물론 가끔 도깨비가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던 일이 없었던 것

은 아니지만 그건 드문 예였지. 그 중  가장 끔찍했던 사건은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아킨스로우 협곡. 십만 명 몰살 사건이죠."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

다.

"'너무 뜨거워 형체조차 없는 불이 협곡을 격류처럼 치달았다. 저 심장

없는 괴물들이 선 채로 재가 되어버린 자리에 녹은 바위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 후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사람들은 밤이면 협곡에서 솟

아오르는 열기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용암처럼 변한 바위들이 내뿜는

빛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했던 사람이 남긴  말이야. 그건 나가의 실수

였다. 놔뒀으면 그냥 물러났을 도깨비들을  너무 잔혹하게 도발했다. 그

도발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도깨비도, 그리고  목격자들도 말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제가 듣기로는 미친 도깨비가 나가의 부대를 습격했다고 하던데요."

"너는 비형을 봤다. 그가 아무 이유 없이 미칠 것 같더냐?"

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건도 더 이상 다그치지는 않았다.

"레콘은 지금이나 그 때나 똑같았다.  신부를 찾아다니거나, 혹은 티나

한처럼 자기 할 일만  했지. 물론 자신의 가정이나  자신의 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섭게 싸웠지만, 그런 일인전쟁은 전설은 많이 남겼지만 영향

력 있는 역사적 흔적은 남기지 못했지."

"셋이 하나가 되지 못했군요."

륜의 정리에 케이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머지 셋이 모여서  나가를 상대했다면 대확장  전쟁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와는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깨비는 싸우는 것

을 거부했고 레콘은 혼자 싸웠다. 나가들을 막은 건 날씨였지."

"키탈저 사냥꾼이 아니고요?"

"키탈저 사냥꾼들의 모습이 너희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모르겠다

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한 행동은  무장투쟁도 전쟁도 아닌 사냥이었다.

나가를 대상으로 한 사냥이었지. 만약 저  우둔한 권능왕이 도움이 되기

위해 찾아온 자를 정성껏 맞이하는 극히 간단한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키탈저 사냥꾼들도 전사가 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만,  권능왕은 그런

상식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고, 결국 키탈저 사냥꾼들은 레콘처럼 단독으

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확장  전쟁을 승리했다고 믿었던 너희

들에겐 느닷없이 몰아쳐온 맹공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우리의 옛이야기에서는 아라짓  전사보다 키탈저 사냥꾼을  더 끔찍한

존재로 여기는 것 같더군요."

"아라짓 전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키탈저 사냥꾼들과는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맞닥뜨려야 했을 테니."

"날씨군요."

"날씨야."

륜은 침묵했다. 케이건이 다시 책장을 들어올릴까 고민하고 있을 때 도

서관의 궁륭 천장을 바라보던 륜이 나직이 말했다.

"제 아버님이 정말 이곳까지 오셨나요? 이렇게 추운 땅까지?"

케이건은 륜이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서  지금껏 말을 이어오고 있었

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거절뿐이었다.

"요스비에 대한 이야기라면 하고 싶지 않다."

"저는 그 분의 아들이에요."

"상관없어."

"제기랄, 왜 상관이 없어요!  제가 요스비의 아들이에요.  당신이 아니

라!"

륜은 책상을 밀어붙이며 일어났다. 튕겨져나간  의자가 다른 책상에 부

딪혀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내었다. 케이건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륜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제가 요스비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합쳐봐야 몇 개월도 되지

않아요! 요스비는 가끔 페이 가문을  방문했던 방문자였을 뿐이에요. 기

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함께 있었던 날은 며칠 되지도 않아

요! 그리고 그 얼마 안 되는 시간들에서도 요스비는 다른 방문자와 똑같

은 방문자였을 뿐이고! 당신은 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아버님과

함께 보냈겠죠. 이 무서운 북쪽을  함께 여행했겠지요. 당신이 아버님께

노래를 가르쳐줬고, 아버님은 당신에게 팔을 먹였죠! 하지만!"

륜은 얼굴을 가린 천을 아래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보세요! 이 나가의 얼굴을 봐요! 제가 그 분의 아들이에요. 당신이 아

니라! 당신에겐 요스비의 죽음에 대해 복수할 권리가 없어요. 설령 있다

해도 저보다 더 크지 않아요!"

"너는 도망쳤다."

륜은 현기증을 느끼며 책상을 짚었다. 그의 눈 앞에서 책상이 기묘하게

꿈틀거렸다. 케이건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그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너는 심장적출식에서 도망쳤고, 하텐그라쥬에서 도망쳤고, 나가들에게

서 도망쳤다. 그것도 11년이나 걸려서 겨우 내린 결정이었지. 네 권한이

라는 것이 뭔지 모르겠지만, 설령 그런 게 있다 해도 그건 이미 오래 전

에 고사(枯死)했을 것 같군."

륜은 눈물을 고이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처

참한 기분이었다. 그 때 케이건이 다시 말했다.

"그러니 그런 쓸데없는 것을 되살리려 하지 마라. 륜."

륜은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요스비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네게 있지도 않은 복수의 의무

따위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복수니 뭐니  하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

너는 네 동족들에게서 도망쳐온  것을 부끄럽게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낸 지금 너는 부끄러워 하고 있다. 왜 네게 있지도 않은 복수

의 의무를 억지로 네 자신에게 뒤집어씌운 다음 그것을 실천하지 못했다

는 사실을 수치스러워 하는 거지? 단지  요스비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

해? 그걸 위해서라면, 네 말처럼 네 모습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네 믿음

이면 충분하고."

"복수의 의무가… 없다고요? 아들인데?"

"요스비의 아들은 어쩌면 수십 명일지도 모른다. 요스비가 페이 가문만

방문한 것은 아닐 테니."

륜은 허탈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의 말대로였다. 더

할 나위 없이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륜은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케

이건은 간단히 륜의 위치를 요스비의 무수한 아들들 중의 하나로 전락시

켜버린 것이다.

"수십 명이나 될지도 모르는 아들들 중의 하나이니 특별히 제게 복수의

의무가 있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까? 하지만 그 임종을 본 아들은 저뿐입

니다. 그리고 자신이 요스비의 아들임을 알고 있는 아들도."

"그래. 그렇겠지. 원한다면 그걸 기억해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나가에게 아버지라는 건 없다. 네가 나가에게 있지도 않은 부

자 관계를 그토록 인정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너만 납득하는

관계를 빌미로 그걸 납득할 수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을 징벌할 수 있을

까? 그건 불가능하다. 티나한은 자신이  물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세상의

조선공들을 다 찔러 죽이려들지는 않아. 비형은 자신이 피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양피지를 만드는 자들을 태워버리지도 않고. 티나한은 그저 물을

피하고 비형은 그의 선조들이 창안해낸 도깨비지를 쓸뿐이지. 만약 내가

티나한과 비형을 위해 조선공들과 제지공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말하면 티

나한과 비형은 황당해하겠지. 마찬가지다. 요스비는, 네가 그를 위해 복

수하겠다고 니르면 어이없어 할 테지."

"아버님은 저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닐렀습니다!"

"그랬겠지.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복수해줄,  마치 인간의 아들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다. 쓸데없는  일에 너무 신경쓰지 말거라.

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지 않아도 너는 그의 아들이다."

륜은 넘어졌던 의자를 바로 세워 거기에 앉았다. 머리 속이 어지러웠고

무언가 비참한 기분을 들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해방된 듯한 기분도

느꼈다. 륜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케이건은 사모 페이도 인정하지  않았던 부자 관계를 담담하게

인정해주었다. 사모 페이를 제외하면 요스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그가.

시구리아트 관문요새의 징수소장이 격렬한 공복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은 아니다. 그리고 갑자기  보편성을 한참 뛰어넘는  특기할만한 미각을

개발하게 된 것도 아니다. 징수소장이 요금표를 씹어먹고 싶어졌던 이유

는 단지 그가 매우 분노했기 때문이다. 씨근거리며 다시 한 번 요금표를

바라본 징수소장은 자신이 찾던 항목이 거기 없다는 우울한 현실만을 재

확인했다. 징수소장은 낙심하며 도로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징수소장으로 하여금 매우  특이한 충동을 야기시켰던 그것은,

징수소장의 애타는 소망에도 불구하고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뚜렷해진 모

습으로 관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징수소장은 징수원들 전부를 붙잡

고 애원하고 싶어졌다. 제발, 누가 저건 검은 모피로 몸을 가린 채 대호

를 타고 다가오고 있는 여행자가 아니라고 말해줘.

그러나 내리는 빗속을 조용히 걸어오고 있는 것은 검은 모피로 몸을 가

린 채 대호를 타고 다가오고 있는 여행자였다.

갑자기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징수소장은 옆을 바라보았고 징

수원 한 명이 징수소의  문을 잠그는 것을  발견했다. '좋은 생각이군.'

징수소장은 칭찬하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그  생각을 해내지 못했기 때

문이다.

마침내 관문 앞에 도달한  대호는 걸음을 멈췄다. 창문의  높이 때문에

대호 위에 타고 있는  여행자를 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징수소장은 감히

머리를 내밀지 못했다. 다행히도 대호가 몸을 숙여 그 무서운 기수를 아

래로 내려주었다. 기수는 대호의 갈기를 가볍게  붙잡은 채 창문을 통해

징수소장을 바라보았다.

"여길 통과할 생각입니까?"

"그래."

징수소장은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기막힌 목소리였다. 며칠 전

부터 요새에 머물고 있던 여자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목

소리에 징수소장은 몽롱한 기분까지도 느꼈다.  징수소장은 잠시 후에야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목 졸린 까마귀나 낼

법한 소리라는 사실에 슬퍼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대호에 대한 통행료를 잘 모르겠습니다. 좀 기다

려주시겠습니까? 위쪽에 문의를 해봐야겠습니다."

징수소장은 그렇게 말하며 등 뒤로는 재빨리 징수원에게 손짓을 보내었

다. 징수원 하나가 위로 달려갔다.

"통행료? 여길 통과하려면 돈을 내야 하나?"

"예? 잘 모르시나 보군요. 당신이 걸어온 길은  전부 우리가 만들고 관

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대가로 이  길을 이용하는 여행자들에게 돈

을 받습니다."

검은 모피로 몸을 가린 여자는 잠시 침묵한  채 서있었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서있는 그녀를 보던 징수원들은 옆에 있는 대호만 아니라면 당장

달려나가 그녀를 안으로 데려오고픈 충동을 느꼈다.  여자는 조금 후 말

했다.

"하긴, 길이 잘 정돈되어 있더군. 그렇다면 지불하는  것이 옳을 것 같

군. 알겠어. 얼마지?"

징수소장은 하대를 하는 여인에게  좀 이상한 기분을  느꼈지만 특별히

화를 낼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통행자들은 통행료 앞에 평등하다.

그 말은 특별히 공경하지도, 천대하지도  않는다는 의미다. 게다가 징수

소장은 그토록 아름다운 목소리의 여인이라면 하대를 듣는 것 쯤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대호에 대한 통행료를  잘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승용물이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저런 무서운 생물

을 타고 있으신 겁니까?"

여자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꺼내었다.

"그 통행료라는 것이 일률적이지 않고 세분화되어 있나 보군?"

"예. 인간과 레콘과 도깨비, 모두 다릅니다. 레콘이 제일 비싸지요. 몸

무게가 무거운 편이고 달리기라도 하면 도로를 손상시킬 위험도 커서."

"그렇다면 나가에게도 다른 요금을 받겠군?"

"예? 나가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나가들이야 저 한계선 남쪽에 있으

니 저희들로선 별로 고려할 일이 없지요."

"꼭 그렇지는 않을 거야."

여자는 그렇게 말한 다음 모피를 벗어보였다. 다음 순간 징수소장은 왜

여자가 통행료라는, 누구나 다 아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비형은 웃옷을 벗은 모습으로 방 안에 뛰어들어 륜을 꽤 당황하게 하며

외쳤다.

"그녀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들으셨습니까?"

케이건은 바라기를 손질하던 손을 멈춘 채 비형을 바라보았다.

"그녀라니, 암살자?"

"예! 지금 관문 앞에 있다고 합니다! 안 믿어지시죠?"

다음 순간 륜과 티나한이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일반적인 상황하에

서는 두 사람의 키 차이 때문에 결코 일어날 리 없는 경우였지만, 두 사

람은 같은 창문을 향해 머리를 디밀었기  때문에 그런 황당한 꼴을 겪게

되었다. 티나한은 머리를 쓸어만질 겨를도 없이 휘청거리는 륜을 황급히

붙잡아야 했다. 그래서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  수 있었던 것은 케이건이

었다.

케이건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구겼다.

"정말이군. 그녀야."

짧게 관찰을 끝낸 케이건은 륜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며 뒤로 물러났다.

비형은 입을 틈도 없어서 손에 들고  달려온 웃옷을 다시 입으며 질문했

다.

"어떻게 하죠?"

"난감하오. 모든 유료도로당의  규칙은 똑같소. 통행자는  통행료 앞에

평등하오. 그 규칙에 예외가 되는 것은  전염병 환자 정도일 거요. 따라

서 그녀는 적합한 통행료를 지불하면 얼마든지  요새로 들어설 수 있소.

그런데 아직 바깥에는 비가 오고 있군." 티나한이 갑자기 천장을 쏘아보

기 시작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티나한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게다가 한 가지 규칙이 더 있는데, 도로에서는 여행자들끼리 싸워선 안

되오. 이러니 그녀를 습격할 수도 없군."

창밖을 내다보던 륜은 그 말에 질린 표정으로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

이건은 도로 자리에 앉은 다음 바라기를 쥐어올리며 말했다.

"비가 그친 다음 산맥 반대편에서 아무래도 그녀와 결판을 봐야겠소."

륜은 비늘을 부딪히며 말했다.

"결판을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이죠?"

"죽이는 건 반대할 테지?"

"당연하죠! 만일 결판이라는 것이 그런 거라면…"

"다리를 자른 다음 보늬 당주에게 맡겨놓고  가겠다. 너를 하인샤 대사

원으로 데려다 줄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거다."

비형은 당황했고, 륜이 안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욱 당황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가장 당황하고 있는 사람은 비형이 아니었다. 대요

금표를 조회하기 위해  올라갔던 징수원을 애타게  기다리던 징수소장은

사모 페이가 꺼내놓은 말에 완전히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두억시니라고 했습니까?"

"그래. 두억시니에겐 통행료를 얼마나 받지?"

"…당신 두억시니입니까?"

"그건 아냐. 하지만 내 뒤를 따라 삼천  명 쯤 되는 두억시니들이 오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걸 알아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

뜻 모를 소리를 내지르는 징수소장을 보며 사모는 잠시 그의 핏줄에 두

억시니의 혈통이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보았다.

잠시 후 대요금표를 조회하러 갔던  징수원이 돌아왔다. 놀랍게도 징수

원은 대호와 나가의 요금을 알아왔다. 징수소장은 그 사실에 감사하면서

도 도대체 대요금표에 없는 것이 뭔지  의심했다. 그러나 징수소장은 사

모 페이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징수소장은 엄숙하게 보이려 애쓰면

서 말했다.

"당신이 나가이기에 통과시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두억시니들이

당신을 쫓는 거라면, 당신은 다른 통행인들에게  위험이 될 지도 모릅니

다. 따라서 당신과 그 두억시니들과의 관계를  명확히 해주지 않는 이상

은 당신을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네 말은 옳군. 그 두억시니들은 확실히 나를  뒤쫓는 것 같아. 하지만

그 두억시니들은 두 개의 도시를 그냥  지나쳤어. 이제와서 다른 자들에

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은데."

"확신할 수 있습니까?"

물론 사모는 두억시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군."

"그렇다면 당신의 통과를 허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도로를 이용

하는 것 또한 불허합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십시오."

"그럴 수 없다면?"

"이 요새에는 300 명의 당원들이 있습니다. 당신의 그 대호라도 300 명

의 당원들에게 당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모는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확신할 수 있어?"

안타깝게도 징수소장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300 명의 당원들 중에서

대호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을 사람을 찾아내기도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

징수소장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행히도 사모는 징수소장을 더 이상 괴

롭히지 않았다.

"너희들의 도로 이외에 다른 부분 중에서 대호가  산맥을 넘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그 정도는 가르쳐줘도 좋을 것 같은데."

"그 대호는 얼마나 높이 뛸 수 있습니까?"

"남쪽에 큰 담을 가진 도시가 있었어. 그 도시의 인간들은 대호가 절대

로 자신들의 담을 넘을 수 없다고 주장하던데."

징수소장은 경악했다.

"그, 그 대호가 자보로 성벽을 넘었단 말입니까?"

"내가 도와줘서 넘었어. 혼자서는 넘지 못했을 거야. 좀 부족하던데."

징수소장은 도대체 어떻게 대호의 도약을 도왔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묻는 것은  포기했다. 징수소장은 도로왕의  옛길이 있던

곳을 몇 군데 가르쳐주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 길들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곳곳이 무너지고 길

이 끊어져서 그렇습니다. 레콘들도 지나가길 꺼리는 곳이니 그 대호에게

도 좀 버거울 거라 생각됩니다만."

"레콘도 지나갈 수 없단 말이야? 그렇다면 곤란한데.  혹 이 근처에 왕

독수리가 살아?"

"왕독수리요? 그런 건 없습니다."

마루나래를 돌려보내고 왕독수리를 정신억압할까 했던  사모는 그 생각

을 포기해야 했다.

"산맥을 옆으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리지?"

"두 달은 걸릴 겁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유료도로로 장사할 수 있는 거

죠."

사모는 난감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마루나래가 빨리 달려준다

하더라도 두 달이나 뒤쳐져서는 륜을 따라잡는 것이 대단히 힘들어질 것

이다.

'그 도깨비가 륜에게 계속 불을 붙여준다면 륜은 추위에 고통받지는 않

겠지. 좀 더 시간을 두고 쫓아가도 륜을  고통 속에 방치하는 일은 아닐

거야. 그렇다면 천천히 추적할까? 그러나 그 도깨비가 계속 륜을 보살펴

줄까?'

사모는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문득  사모는 륜이 이곳을 지나갔다면

징수소장이 보았을 테고, 그러면 륜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보았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계속 물어봐서 미안한데, 내 앞에 다른 나가가 지나갔지?"

"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당황하던 사모는 곧 륜이 모습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

올렸다.

"잘 생각해봐. 얼굴을 감추고… 그래. 나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던 자가

없었어?"

징수소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며칠  동안 그들의 요새에 머

물고 있던 미성(美聲)의 여인을 떠올렸다.  여자라고 믿었을 뿐, 얼굴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징수소장의 말을 들은 사모는 놀라며 외쳤다.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그, 그런데요."

사모는 쉬크톨을 뽑아들었다.

징수소장과 징수원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사모는 그들에

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쉬크톨을 위로 들어올렸다. 요새를 겨냥한 사

모는 분명한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륜은 그곳에 있었다.

사모는 쉬크톨을 아래로 내렸다.

"나오라고 해."

"예?"

"그 자를 밖으로 나오라고  전해! 나는 그를 추적해서  이곳까지 왔어.

빨리!"

징수소장은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입을 열기 전, 징수

소장은 유료도로당의 당원이 준수해야 할 의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부

하 징수원에게 명령을 내리기 전 징수소장은 창문 너머로 사모를 바라보

았다.

"그녀가 누구라 하더라도 적절한 통행료를  지불한 이상 그녀는 우리의

손님입니다. 당신의 말은 전하겠지만,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우

리는 그녀를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녀가 아니라 그야. 그는 내 남동생이야."

"남동생…이오? 그렇다면 그 자도…"

"그래. 나가야."

사모의 말에 징수소장은 더 이상 입 섞어 말하기도 싫다는 기분을 느꼈

다. 징수소장은 급히 부하에게 명령했다.

사모의 말을 전해들은 륜은 비늘을  곤두세운 채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징수원에게 조금  있다가 대답해주겠다고 말한  다음 징수원을

돌려보냈다. 륜을 흘끔거리던 징수원은 다른  일행에게도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를 보낸 다음 방을 떠났다. 징수원이 떠나자마자 륜은 케이건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하죠?"

"곤란하군. 지금 나가서 그녀의 다리를  썰어버리면 간단한 일이지만,"

비형과 륜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이곳에서 싸움을 일으키면 당원들이

우리를 용납하지 않을 텐데. 비 오는 산속으로 쫓겨나갈 수는 없고."

티나한이 가볍게 부풀어올랐다. 륜은 불평하듯 말했다.

"케이건. 당신 우리 누님을 너무 얕보는 거  아닙니까? 마치 우리 누님

이 다리를 베어가도록 협조하기라도 할 것처럼-"

"비형이 여기서 보고 있다가  대호와 네 누나의 눈에  불을 붙이면 돼.

그 다음에 눈이 먼 그녀의 다리를 썰면 되지."

륜은 할말이 없다는 심정이 되었고 비형은  계속되는 '썬다'는 말에 얼

굴이 노랗게 변했다. 케이건은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무리 대호가 있다 해도 이  요새를 상대로 어떻게 할  수는 없을 테

니, 일단은 그냥 이곳에서 버티자. 당은 통행료를 지불한 손님인 우리를

보호해줄 거다."

케이건의 판단은 옳았다. 그의 말을  전해들은 징수소장은 사모에게 륜

을 내어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사모는 쉬크톨을 움켜쥔 채 징수소 안으

로 난입할 방법이 없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하나뿐인 창문은 너무 작았

고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그리고 철문은 성난 레콘이라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사모는 마루나래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만약 이곳에 통행자들이 많다

면, 언젠가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태의 추이는 사모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며칠 전부

터 맹위를 떨치고 있는 폭풍 때문에 시구리아트 산맥을 넘으려는 여행자

는 아무도 없었다. 밤이 될 때까지 관문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사모는 어

떤 여행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를  쫓아내기 위해 당원들이 나오지

도 않았다. 대호 때문에 밖으로 나오려는  당원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

다.

한 사람과 한 요새의 그런 침묵의 대치는 한밤중이 되었을 때 느닷없이

해소되었다.

한밤중, 허기를 느낀 사모는 마루나래 또한 배가 고플 거라 생각하고는

사냥을 명령했다. 마루나래는 시구리아트 산맥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사

냥을 한 다음 사모를 위해 살아있는 동물 하나를 잡아왔다. 그런데 사모

가 막 그것을 삼키려 했을 때  요새 쪽에서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들려왔

다.

"그만둬!"

사모는 깜짝 놀라며 손에 쥐었던 산양을 내려놓았다. 그 산양은 마루나

래가 다리를 으스러뜨렸기 때문에 반항하지도 못했다. 사모는 요새를 멍

하니 바라보았고 요새에선 다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산양인가!"

"어, 그런데?"

"안 돼! 먹지마! 제발 그러지마!"

사모는 완전히 당황해버렸다. 그리고  몇 분 후 자다가  일어난 케이건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산양 인질극이라고?"

케이건은 졸음을 쫓아내기 위해 눈  주위를 문지르며 말했다. 당원들은

문밖에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렇소!"

문 앞은 티나한이 막고 있었기에 아무도 방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 케

이건은 일단 사태가 다급하지는 않다는 판단 하에 천천히 옷을 챙겨입으

며 말했다.

"당신들이 산양을 숭상하는 것은  알지만, 당신들 또한  산양을 먹기도

하잖소."

"산 채로 먹지는 않소! 우리 눈 앞에서  그런 끔찍한 꼴을 용납할 수는

없소! 만일 그대로 놔두면 산양의 저주가 우리에게 내릴 거요!"

책임자인 듯한 당원의 외침에 다른 당원들  또한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

다. 물론 티나한 때문에 케이건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옷을 다 입은

케이건은 우울한 표정으로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창문 밖 먼 곳에 있는 사모를, 케이건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귀를 기

울이자 빗줄기 사이로 구슬픈 산양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요새의

다른 사람들도 그 울음소리로 산양을 판별했을 것이다. 케이건은 사모가

어디 쯤에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 동안에도 문

밖의 당원들은 흥분한 투로  외쳤다. 멋모르고 산양을  사냥했던 당원이

갑자기 벼랑에서 실족사 했다느니, 삵에게 공격당하는 산양을 구하지 않

았던 당원이 벼락에 맞아죽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두서없이 오가고 있

는 듯했다. 케이건은 거론되는 재난들이 산맥 위에 그 터전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맞닥뜨릴 수 있는  것들이라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소용이 없을 것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케이건은 계속  사모를 찾아보며

말했다.

"산양이 저주를 내린다면, 당신들이  아니라 저 나가에게  내리지 않겠

소?"

"그렇지 않소! 산양은 뻔히 보면서도 구하지 않은 우리의 죄를 물을 거

요! 안 봤으면 모르지만 본 이상은 구해야 돼!"

케이건은 결국 포기했다.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사모를 찾아내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케이건은 손짓으로 륜을 불렀다.

"네 누나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인지 말해다오."

륜은 창가로 걸어가 말했다.

"큰 것은 대호일 테고  둥그스름한 것은… 모피를  입으신 누님이군요.

그 앞에 놓여있는 건  산양일 테고. 그런데  이상하군요. 그냥 누워있을

뿐 도망치지를 않는군요?  정신억압이라도… 아, 다리를  다친 모양입니

다."

케이건은 방 바깥까지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저 산양은 이미 구하기 어렵소. 대호가  산양의 다리를 부수어 가져온

모양이오. 하긴 그래야만 산 채로 가져올 수 있었겠지."

문밖의 소음이 약간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곧이어 더 큰 소리가 들려왔

다.

"그럼 제대로 장례를 치러줘야 해! 그래야 화를  피할 수 있어! 나가의

뱃속에 들어가면 장례를 치러줄 수 없어!"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고 륜은  이 요새로 오기 전에  자신도 산양 한

마리를 삼켰음을 고백했다간 맞아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륜은 빗줄기 사이로 멀리 보이는 열들을 발견했다. 륜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빗줄기 사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륜은 경악했다. 산비탈을 따라 올라오고 있는  열은 수천 개였다. 륜은

다급하게 외쳤다.

"케이건! 뭔가 아주아주 많은 숫자의 열들이 다가오고 있는데요?"

"뭐라고 생각되는데?"

"아직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

요."

케이건은 고민하다가 비형에게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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