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5-1. 관련자료:없음 [53069]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18 00:58 조회:11216
눈물을 마시는 새.
5. 길을 준비하는 자 - 1
우리는 길을 준비한다. - 유료도로당원의 맹세.
화리트 마케로우는 닐렀다.
[어두워, 어두워, 어두워.]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정신이 그에게 다가왔다. 폭력에 노출된 연약한
짐승처럼 화리트의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화리트에게 다가온 자는 친절
하게 권했다.
[그러면 밖으로 나오면 되잖나.]
[꺼져. 갈로텍.]
[그곳이 마음에 들지는 않을 텐데.]
[좋아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화리트는 숲속에 갇혀 있었다. 그 숲의 나무들은 긴 이름을 가지고 있
었다. '기억이 기억을 덮어 만들어낸 음영', '경험했지만 인지하지 못했
던 경험', '자신을 망각해버린 망각', 기타 등등. 그 속에서 화리트는
무한히 떠돌았다. 화리트가 나무들을 스칠 때마다 왜곡된 추억들이 이슬
처럼 떨어져내렸다.
갈로텍이 닐렀다.
[고난이 없다면 노력도 값을 잃겠지. 이건 어때? 라호친 지방에 살았던
인간의 기억이야.]
[라호친이 뭐지?]
[아, 날이 충분히 맑으면 세계의 북쪽 끝도 볼 수 있다는 농담이 따라
다니는 북녘땅이야. 잔인한 눈보라와 거대한 빙하로 유명하지.]
이제 더 이상 비늘이 없었지만 화리트는 비늘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
다. 잠시 후 매서운 추위의 기억이 화리트의 숲속으로 몰아쳤다. 화리트
는 괴로워하다가 기절했다.
사실, 기절했다고 느꼈을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기절은 적극적이
다. 그것을 알기에 갈로텍은 크게 웃으며 닐렀다.
[오, 화리트. 웃기는 형제여.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건 기절이 아니라
기만이야.]
화리트도 그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화리트는 다른 것도 깨달았다.
[이건 어떠냐?]
화리트는 자신이 죽었던 순간을 기억해낸 다음 그것을 사방으로 퍼뜨렸
다. 갈로텍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화리트는 맹포하게 닐렀다.
[너는 죽어본 적이 없겠지! 이것이 죽음이다!]
그러나 화리트는 곧 엄청난 후회를 맛보아야 했다. 갈로텍은 군령자다.
그 속엔 수많은 죽은 자들이 있다. 갈로텍은 그 사망의 기억들을 다 끌
어모아 화리트를 후려쳤다.
화리트는 절규하며 숲의 가장 어두운 부분으로 도망쳤다.
화리트를 제압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때문에 갈로텍도 수많은 죽음을
직시해야 했다. 갈로텍은 더 이상 그 기억들을 다룰 수 없었다. 그래서
갈로텍은 그 기억들을 영들에게 돌려준 다음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전면에 나서있던 영과 자리를 바꾸며 갈로텍은 생각했다.
'맙소사. 군령자들이 왜 이 짓을 계속하는 건지 알겠군.'
그리고 갈로텍은 자신 또한 그 짓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 했지만 그런 의도적인 사고가 더욱 갈로텍
으로 하여금 그 생각에 달라붙게 만들었다. 그 때 그의 내부에서 어떤
영이 그의 입술을 움직였다.
"그럴 수도 있지. 갈로텍."
갈로텍은 잠시 그 말투가 누구의 것인지 고민했다. 곧 어떤 이름이 떠
올랐다.
"주퀘도? 오래간만이군요. 꽤 오랫동안 잠들어 계셨죠."
"그랬지. 아까 그 꼬마는 뭐지? 죽은 과거들 사이에 숨어있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꽤 어린 애였던 것 같던데."
"최근에 죽은 나가입니다. 제가 그 영을 받아들였죠."
"그런가. 그런데 그 애를 왜 겁주고 있었지? 한번 죽었던 애니까 그런
짓을 당해도 견딜 수 있었지만, 만일 똑같은 일을 내가 너에게 한다
면…"
"관둬요!"
갈로텍이 소스라치며 외쳤다. 주퀘도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갈로텍."
"예?"
"갈로텍."
"왜 그래요?"
"그 날이 오면, 너도 결국 다음 사람을 찾게 될 거야."
"천만에! 당신들을 받아들일 때 분명히 말했듯이, 죽을 때가 되면 나는
죽을 겁니다. 당신들은 거기에 동의했어요."
"아, 그 맹세. 자주 들어봤지. 너도 했었나?"
이 노골적인 야유에 갈로텍은 비늘 부딪히는 소리를 내었다. 주퀘도는
낄낄 웃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그 괴상한 소리에 갈로텍은 불쾌감
을 느꼈다. 웃는 것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주퀘도가 그의 목을 이용하여
내는 웃음소리는 끔찍했다.
"부탁인데 웃는 걸 좀 자제해주면 안 되겠어요? 난 그 소리가 싫어요."
"나도 싫어. 나가의 몸으론 웃기가 힘들어. 그라쉐의 몸이 좋았는데."
"그라쉐?"
"그 친구는 같은 레콘도 감탄할 정도로 큰 레콘이었어. 만나본 적 없
나?"
"없어요. 우리 안에 확실히 있습니까?"
"있어. 그라쉐도 비슷한 말을 했지. 우리가 들어가도 되겠냐고 물었더
니, 자기는 죽을 때가 되면 그냥 죽을 텐데 그래도 좋다면 들어오라고
대답하더군. 우리는 좋을대로 하라고 했지. 그라쉐의 몸에 있을 때 우리
는 참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 그 무지막지한 녀석의 무기는 50
킬로그램짜리 철추가 달린 철퇴였지. 그걸로 진짜 소를 한번 내려친 적
이 있는데 가죽만 남더군. 뼈는 몸 속에서 가루가 되다시피 했어. 정말
멋진 나날이었지. 그 녀석의 몸으로 웃을 때는 정말 돌개바람이 일어날
정도였어."
주퀘도는 레콘의 몸에 있을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잠시 침묵했다. 갈로
텍은 잠자코 기다렸다. 주퀘도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그 강하고 멋진 그라쉐가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어떻게
했는 줄 알아? 그 우악스러운 철퇴로 인간 한 명을 협박해서 강제로 전
령(傳靈)했지. 그걸 가리켜 영적 강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인간의 몸은 그라쉐를 짜증나게 했지. 요즘들어 잠만 자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르지. 이봐. 갈로텍. 그 친구를 위해 다음 몸으로는 레콘을
골라보면 어떨까?"
"주퀘도.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그냥 죽을 겁니다. 여신께 갈 거라고
요. 나는 신명을 받은 수호자입니다."
갈로텍은 엄숙하게 선언했지만 주퀘도는 그를 비웃었다.
"아, 우리들 중엔 스님도 한 분 있지. 소개시켜줄까?"
"그만하고 내려가세요!"
주퀘도는 다시 낄낄거리더니 의식의 아래로 내려갔다. 갈로텍은 의자에
몸을 길게 누인 채 불쾌감을 억누르려 애썼다.
갈로텍은 평생 동안 노력해도 얻기 힘든 지식을 단번에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군령자를 받아들인 자신의 결정에 후회를 가진 적이 없었다. 하
지만 자신이 받아들일 영들 중에 주퀘도라는 저 괴팍한 인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갈로텍은 한 번 더 생각해 봤을지도 모른다. 주
퀘도의 말은, 진실이었기에 더욱 불쾌한 종류의 것이었다. 갈로텍은 자
신의 영과 다른 군령들을 받아들일 자를 찾아 헤매는 늙은 자신의 모습
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었다.
[결코 그렇게 되진 않아!]
갈로텍은 불가능이라는 이름의 야수에게 자신의 의지를 먹잇감으로 던
져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이들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목
이 잘린 누이의 식도에 살아있는 동물을 쑤셔넣으며 2년만에 그녀의 머
리를 재생시킨 이후로, 갈로텍은 불가능을 결코 인정해 본 적이 없었다.
되살아난 누이가 자신의 목을 잘랐던 인간에 대한 증오밖에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갈로텍에게 슬픔은 주었지만
좌절은 주지 않았다.
[다시 그 녀석을 만나봐야겠군.]
갈로텍은 화리트를 찾아 자신 속으로 가라앉았다.
과거, 험준한 시구리아트 산맥에는 남북을 잇는 많은 통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스스로를 극과 극을 연결하는 자라 불렀지만 사람들에
게는 도로왕이라 불릴 때가 더 많았던 극연왕의 4대 경이(驚異) 중 하나
로 꼽힐 만큼 훌륭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그 통로
들은 보살피는 세심한 손길이 사라지자 모두 잡초와 낙석, 흙더미 아래
로 사라졌다. 시구리아트 산맥을 휘감아도는 폭풍은 모든 인위적인 것들
에겐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 모든 길이 사라진 오늘날, 시구리아트 산맥을 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시구리아트 유료도로가 그것이다.
륜은 단지 거기에 있는 땅을 걸어가는 것에 대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개념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산적이나 강도 아니에요?"
"산적과는 다르죠. 산적은 돈을 내지 않으면 죽이고서라도 돈을 받지만
유료도로당(有料道路黨)은 돈을 내지 않으면 통과시키지 않을뿐이죠. 다
르잖아요?"
"같은 것 같은데요."
"예? 뭐가 같죠?"
"돈을 내면 통과한다는 것이 똑같잖아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냥 있는 땅을 가지고 불로소득을 버는 건 마찬가지…"
"아, 이런. 그걸 설명하지 않았군요. 산적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유료도로당은 일을 해요. 길 주변에 우물도 파고 위험한 동물도 쫓아내
고 환자가 생기거나 하면 관문요새에서 치료를 받을 수도 있어요. 그리
고 숙박비를 내면 음식과 잠자리도 제공하고. 물론 길이 망가지거나 하
면 보수하는 건 당연하겠지요?"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군요. 하지만 왜 저런 통행료를… 참… 맛있어
보이는."
풀을 뜯는 산양을 보며 말하던 륜은 그만 이상하게 말을 맺고 말았다.
바위 위에 드러누워 있던 케이건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이건 안 된다. 륜."
"아, 배고프다는 거 아니에요. 그냥 맛있어 보인다고요."
케이건은 슈라도스에서 산양 세 마리를 구입했다. 티나한은 그 막대한
지출에 또다시 놀랐지만 케이건은 시구리아트 유료도로에서는 사냥을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시구리아트 산맥 안으로 들어선 후 그들은
두 마리의 산양을 먹어치웠다. 륜이 한 마리를 삼켰고 나머지 세 사람이
한 마리를 구워먹웠다. 케이건은 남은 한 마리가 통행료라고 설명했고
지금 그 산양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초지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산양 한 마리면 우리들의 통행료가 대충 해결될 거다. 물론 희망사항
이긴 하지만."
"돈으로 지불하면 안 되나요?"
"그래도 되지만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원들은 산양 연모자지. 용의 통
행료를 정확히 책정할 수 없더라도 산양을 보면 좋아하며 통과시켜줄 가
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산양고기를 좋아하는 정도로 연모자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
건 무슨 뜻이죠?"
"산양을 숭배하거든."
"예?"
"진부한 전설이야. 그 당원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산맥 건너편에서
산양을 치고 있던 제 1 대 당주가 어느 날 잃어버린 산양을 따라가다가
산맥을 넘는 길을 우연히 발견했다더군. 그래서 그들은 산양을 숭배해.
내 생각엔 그냥 이 높은 지역에서 키울 수 있는 드문 짐승이라서 좋아하
는 것 같기도 하지만."
륜은 높은 지역이라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끈질긴 나무가 그
옹고집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비틀리고 메마른 모습으로 멈춰버린 곳
보다 더 높은 곳에서, 회록색 풀잎들은 열린 하늘을 바라보며 가냘프게
서 있었다. 산비탈을 타고 바람이 치솟을 때마다 풀잎은 성품 어진 짐승
의 털처럼 물결쳤다. 풀들이 갈라질 때마다 드러나는 백악질의 바위. 저
산비탈 아래에서 휘감아도는, 구름이 되다만 것 같은 농무. 그곳은 산들
이 그들만의 심원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이었다. 키보렌의 밀림에 익
숙한 륜의 눈에 그것은 퍽이나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그 때 하늘 저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비형과 륜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바위 위에 누워있던 케이건이 만류했다.
"앉아있으시오. 비탈이 급하오."
그래서 두 사람은 도로 앉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 저편에서부터
날아온 것은 나늬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세 배로 부푼 티나한이 앉아
있었다. 물론 털이 부풀었을 뿐 무게가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륜
과 비형의 눈에는 나늬가 대단히 힘겨워 보였다. 나늬가 가까이 옴에 따
라 날개바람이 산비탈을 사정없이 때렸다. 비형과 륜은 케이건이 왜 앉
아있으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늬는 풀잎과 먼지를 잔뜩 날려올리며 내려앉았다. 티나한은 진저리를
치며 내려서서는 나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바람이 좀 잦아든 것을 확
인한 비형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말했다.
"역시 안되던가요?"
티나한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나늬만을 쏘아보았다. 비형이 한
번 더 질문하자 티나한은 뒤로 홱 돌아섰다.
"비형! 제대로 명령한 거 맞아?"
"물론이고 틀림없고 확실한데, 왜 그런 의심을 하시죠?"
"젠장. 300 미터 남겨놓고 돌아왔단 말이다!"
륜은 어슬프게 웃으며 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구리아트 산맥의 준
령들을 스치듯 하며 날아가는 - 그러나 실제 고도는 훨씬 높을 것이다.
-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하늘치였다.
먼 하늘을 날아가는 하늘치의 장대한 모습을 보자마자 '딱정벌레 타는
법을 속성교육하라'고 강요하기 시작한 티나한을 위해 비형은 나늬에게
수화를 건네었다. 나늬는 다른 모든 딱정벌레와 마찬가지로 하늘치에게
다가가는 것을 거부했다. 비형은 그 사실을 티나한에게 전달했다. 하지
만 티나한은 '긴 동행의 나날이 있었으니 어쩌면 저 겁쟁이 딱정벌레의
가슴에도 나의 뜨거운 용기가 전달되었을지 모른다. 혹은 오늘이 나늬
미치는 날일지도'라는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려 비형을 포기하게 만들었
다. 나늬는 비형의 지시에 따라 티나한을 태우고 날아올랐다.
그러나 나늬는 300 미터까지 접근한 다음, 티나한의 모든 협박과 애원
에도 불구하고 그냥 돌아와 버렸다. 자신의 비행 과정을 설명한 티나한
은 씨근거리며 외쳤다.
"젠장. 내 말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 같더군. 그 수화로 다시 지시
해!"
"그래도 안 될 텐데요?"
"아냐. 300 미터가 저 녀석의 한계라면, 이번에는 하늘치의 등 위쪽
300 미터 상공까지 접근하라고 해! 뛰어내리겠어!"
"…뭐, 케이건이 그랬던 것처럼 겉날개 접고 활공하면 뛰어내릴 수 있
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쇳덩이 같은 당신이라도 300 미터에서 추락하
면 몸이 성키 어려울 텐데요?"
"죽어도 하늘치의 등에서 죽겠다!"
륜이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비형과 티나한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륜
을 돌아보았다. 륜은 당황하여 두 손을 슬그머니 등 뒤로 돌렸다.
"저, 당신들은 뭔가 감동적인 일을 보면 이렇게 하지 않나요?"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티나한은 비형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비형은 웃고 있지 않았다. 륜과
티나한은 그 사실에 의아해하다가 문득 등골이 오싹해지는(륜의 경우에
는 비늘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끼며 조금 떨어진 바위 위를 돌아보았다.
케이건이 웃고 있었다.
세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딱정벌레 나늬와 륜의 어깨에 앉아있던 아스화
리탈까지도 현실의 갈피 사이로 우주적 공포가 얼핏 드러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다른 일행을 깨닫지 못한
채 케이건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요스비. 당신 정말 재미있는…"
말꼬리가 사그라들었다.
케이건은 지금까지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비형과 티나한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륜은 기대감 어린 어투로 말했다.
"제 아버님을 생각하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당신 같은 철혈도 아버지에
겐 웃음을 보였던 겁니까?"
케이건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쎄. 이만 출발합시다."
케이건의 말에 륜은 다시 불만을 느꼈지만 비형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
다.
비형의 불길한 예감은 안타깝게도 정확하게 현실로 나타났다. 케이건은
하루하고 반나절을 걸었다. 험준한 산맥 위에서의 휴식 없는 장시간 행
군. 실로 살인적이었다. 티나한이 철창을 땅에 질질 끌게 되고, 놀랍게
도 그 사실에 별로 신경쓰지 않게 될 정도로. 마침내 멀리 시구리아트
관문요새가 나타났을 때 일행은 선 채로 졸도할 지경이 되어 있었다. 후
들거리는 무릎에 손을 짚은 채 헐떡이고 있는 륜에게 걸어온 케이건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응."
륜은 살의라는 것이 그토록 쉽게 형성되는 감정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케이건이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생각해보려는 목적만으로 그런
살인적인 행군을 감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항의할 여력이 있던 티
나한이 벼슬을 떨며 말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걸은 거야? 응? 내 말은 그러니까…"
"하늘을 보니 폭풍우가 닥칠 것 같았소. 그래서 걸음을 서두르는 편이
좋을 거라 판단했소."
"…더 빨리 걸었어야 했다는 거야!"
티나한은 그렇게 얼버무렸고 륜은 살의를 잊었고 비형은 개방된 산 위
에서 폭풍우에 노출된 레콘을 못 보게 된 것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일행
은, 그 때부터는 티나한의 재촉을 받아가며 관문요새를 향해 걸어갔다.
시구리아트 관문요새의 관문은 형태상 관문이라기보다는 수평동굴에 가
깝다. 그것은 높이가 수십 미터, 폭이 100 미터에 가까운 자연암벽을 관
통하여 만들어진 동굴이었다. 동굴의 양쪽 입구는 각자 육중한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동굴의 위쪽, 자연암벽 윗부분에 요새가 건설되어 있었다.
시구리아트 유료도로의 최악의 난관이라 할 수 있는 이 거대한 암벽을
해결하기 위해 최초의 당주가 사용한 방법은 줄사다리였다. 그 때 당주
의 요새는 석벽 위에 있는 오두막이었고, 당주는 돈을 받은 다음 여행자
들에게 줄사다리를 내려주었다. 그런 식으로 돈을 번 다음 당주는 승강
기를 만들었고, 마침내 암벽을 뚫었다. 그리고 동굴 양쪽 입구에 통행료
를 받기 위한 징수소를 설치했다. 그 안에서 징수원들이 그들의 당주로
부터 받은 요금표에 의거하여 여행자들에게 통행료를 받았다. 정확한 요
금표가 있었기에 여행자들과 징수원들 사이에 언쟁이 일어나는 일은 별
로 없었고, 따라서 징수원들은 그 임무에 대체적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멀리서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는 그 날 오후, 징수원들은 처음으
로 자신의 임무에 대한 회의를 느껴야 했다.
"빨랑빨랑 통과시키지 못하겠냐!"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티나한의 성질은 더욱 날카로와
졌다. 징수소의 우두머리인 징수소장은 창문을 통해 창백해진 얼굴로 말
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들이 가진 요금표로는 도
저히… 이런 예외적인 상황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요
새로 질문하러 올라갔던 사람이 돌아올 것입니다."
징수소장은 정말이지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간과 레콘의 통행료는
그의 요금표에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징수소장은 평소에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 부분에서 고맙게도 도깨비에 대한 항목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딱정벌레에 대해 명시하고 있는 부분은 어디에도 없었
다. 하물며 용이라니? 만약 어깨에 용을 앉히고 있는 자가 인간이 아니
라 나가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징수소장은 정말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륜은 방풍복으로 몸을 가리고 얼굴 또한 천으로 감추고 있었다.
그 목소리와 체구 때문에 징수소장과 징수원들은 륜이 인간 여자일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징수소 바깥벽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 레콘을 겨냥한 것이 분명
한 경고문 - 등반 적발시 살수(撒水)함. - 을 읽던 비형이 의아해하며
질문했다.
"도깨비는 있는데 왜 딱정벌레는 없는 거죠?"
징수소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보세요. 딱정벌레가 없다면 도깨비도 걸어서 여기를 통과해야겠지
만, 딱정벌레가 있다면 당연히 날아서 산맥을 넘지 않겠습니까? 내가 오
히려 묻고 싶군요. 당신은 딱정벌레가 있는데 왜 걸어서 넘으려는 거
죠?"
"아, 일행들 중에 날 수 없는 자가 있어서요. 그럼 아마도 말에 대한
항목은 있겠군요? 말과 같은 요금을 받으면 안 됩니까?"
"그걸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징수소장의 간곡한 부탁은 티나한의 맹렬한 호통에 지워지고 말았다.
"젠장, 폭풍이 오고 있잖아! 기다리라는 소리는 저 폭풍에게 해!"
티나한의 외침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결국 보다 못한
케이건이 징수소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면 안되겠냐고 제안했다. 징수소
안에 통행료가 보관되어 있기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징수소장은 어쩔 수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바깥에서 본 징수소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안쪽은 꽤 넓었다. 방 전
체 공간의 반이 바위를 파내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
게 큰 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티나한의 철창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
다. 결국 티나한은 철창을 밖에 세워두어야 했다. 그리고 비형 또한 나
늬를 밖에 놔두었다.
징수소 안에는 징수소장과 징수원들이 일하는 탁자와 의자들이 몇 놓여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티나한에게 맞는 의자는 없었다. 티나한은 비를 피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케이건은 간단한 눈짓을 보내어 티나한을 조금 움직이게 했다.
케이건의 의도를 깨달은 티나한은 륜 앞으로 움직여 징수원들의 눈으로
부터 륜을 가렸다. 한편 비형은 벽에 붙어있는 커다란 요금표를 들여다
보며 재미있어 했다.
"오! 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건지 알겠군요. 노새와 말과 나귀
도 각자 다른 요금을 받는군요? 이렇게 꼼꼼하게 만들어져 있는 요금표
에 왜 딱정벌레가 없는 거죠?"
"어제까지 나는 그걸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소. 하지만 지금은 나 역시
대단히 궁금하군. 아마 요새에 있는 대요금표에는 있을지도 모르겠소.
그런데 저 용은 도대체 어디서 발견한 겁니까? 저거 진짜 용입니까?"
비형은 허둥거리며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그 때 케이건이 예견했던 비
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백만 개의 낟알을 한꺼번에 까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물안개가 자
욱하게 피어올랐다. 먼 곳의 산봉우리들은 물의 장막에 지워졌고 가까운
곳에 있던 산마루들만이 희미한 윤곽으로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던 륜은 아예 어디 있
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마자 티나한이 깃털
을 사정없이 부풀렸기 때문이다. 징수소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호흡
이 곤란해지는 기분까지도 느꼈다.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징수소 안이 어두워졌다. 징수원 한 명이 등잔
을 꺼내놓자 비형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비형의 손에서 불로 이루
어진 나비가 나타나 나풀거리며 등잔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호
흡까지 멈춘 채 바라보는 가운데 나비는 등잔에 내려앉아 조용히 날개를
접었다. 다음 순간 접힌 날개는 그대로 불꽃이 되었다. 징수소장과 징수
원들은 감탄사를 토했다.
창문 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던 케이건은 탁자 한 켠에 있는 주전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좀 마셔도 되겠소?"
"그건 물이나 차가 아닙니다."
"뭔지 알고 있소."
징수소장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라고 했다. 케이건은 옆에 있던 넓
적한 대접에 주전자의 내용물을 따랐다. 맑고 은근한 빛을 띠는 액체가
콸콸 쏟아졌다. 케이건은 대접 가득히 따른 다음 그것을 한 모금 마시고
는 티나한에게 건네었다.
"마시고 비형에게 돌리시오. 륜에겐 주지 말고."
티나한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부리를 열고 한 모금 정도를 흘려넣었다.
곧 티나한은 그것이 부드러운 맛의 술임을 깨달았다. 티나한이 쩝쩝거리
며 그것을 마시는 동안 케이건은 징수소장에게 말했다.
"통행자들은 통행료 앞에 평등하지 않소? 이제는 옛날 일이지만, 당신
들은 왕이라도 통행료를 내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게 했잖소. 나는 당신
들이 저 권능왕에 대해 '인간 성인 남자, 은편 열 닢'이라고 말해주었다
는 것을 알고 있소. 주퀘도 사르마크도 당신들의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
었고."
징수소장은 자신들의 역사를 들으며 기쁜 표정을 지어보였다. 케이건은
부드럽게 말을 맺었다.
"우리는 저 용에 대해 당신들이 제시하는 통행료를 지불할 뜻을 이미
밝혔고, 따라서 저 용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들
에게 결례는 되지 않을 거라 믿소."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물론 우리는 통행료만 지불
한다면 당신들이 누구든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건 마음에 드십
니까?"
"좋은 아르히군요."
케이건의 말에 티나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게 아르히군! 말젖으로 만드는 거 아냐?"
"염소젖이나 양젖으로 만들지. …그런데 돌리라고 하지 않았소?"
티나한은 눈을 끔뻑거리며 대접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비어 있었고
비형은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티나한이 겸연쩍은 투로 뭐라 말
하기 전에 징수소장이 또다른 대접에 아르히를 따라서 비형에게 건네었
다.
"아르히를 아신다면 당연히 대접해야지요. 그런데 저 분은 술을 안 드
십니까?"
징수소장이 가리킨 것은 티나한 뒤에 있는 륜이었다.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 결례를 용서하시오. 그리고 티나한. 그거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요. 자리에 앉을 땐 어린 소녀도 마실 수 있는 술이지만 자
리에서 일어날 땐 판막음 장사의 다리도 잡아채는 술이오."
티나한은 케이건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주전자에 손을 뻗었다.
"술에 취하는 레콘 봤냐?"
케이건은 그저 고개만 약간 갸웃해 보였다. 그 때 바위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그리고 조금 전 요새에 질문하러 갔던 징수원이 손에 등롱을 든
채 나타났다. 징수원은 일행이 징수소 안에 들어와 있는 모습을 보고 약
간 놀란 듯했지만 곧 징수소장에게 보고했다.
"용을 직접 보시고 통행료를 책정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징수소장은 당황하여 말했다.
"대요금표에도 없었단 말이냐?"
"대요금표는 보지 못했습니다. 보좌관께서 왜 대요금표를 열람하려는
건지 물으시기에 대답해 드렸더니 그 용을 볼 수 있겠냐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크기가 작으니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데리고 올라오라고
하시더군요."
징수소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
건은 가볍게 목례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올라가 봐야겠군."
그러나 간단한 건축학적 문제가 그들의 보좌관 접견을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징수소에서 요새로 통하는 통로는 인간에겐 별 무리가
없는 높이였지만 비형에겐 머리를 숙이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는 높이
였다. 당연히 티나한은 들어갈 수도 없었다. (티나한에겐 계단 크기도
맞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비형과 티나한은 징수소에 남게 되었다. 비
형은 징수원의 등롱을 보더니 고개를 약간 가로젓고는 작은 도깨비불 하
나를 만들어 케이건에게 건네었다. 케이건은 그것을 왼쪽 어깨의 보호대
에 붙였다.
그리고 케이건과 륜은 징수원의 안내를 받아 요새로 향하는 계단을 올
라갔다.
중간중간 옆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그것들은 요새의 창고나 다른 공
간으로 통하는 듯했다. 하지만 징수원은 멈춤 없이 올가가기만 했다. 바
깥에선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암벽 속을 걸어가는 그들은 아무 소리
도 들을 수 없었다. 가끔 통풍구나 창문 같은 것이 나타났을 때만이 바
깥의 빗소리가 성큼 다가왔다. 케이건은 시구리아트 산맥의 산폭풍이 본
격적으로 거세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한없이 어둠 속을 걸어가던 그들 앞에서 갑작스럽게 계단이 끝
났다. 그 곳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그들을 안내했던 징수원은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한 다음 계단을 도로
내려갔다. 륜은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륜의 어깨에 앉아있는
아스화리탈을 한번 쳐다보고는 커다란 문을 밀었다.
밝은 빛과 빗소리가 갑작스럽게 그들에게 밀려왔다.
륜은 자신들이 넓은 방 안으로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방은 폭이 10 미
터, 길이가 20 미터 쯤 되는 직사각형 모양이었고 그들이 들어선 문 왼
쪽으로 두 개의 문이 더 있었다. 가운데 있는 문은 대단히 커서 레콘이
나 도깨비도 통과할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좌우의 벽에도 몇 개의 문
이 있었다. 그들의 맞은편, 직사각형의 끝부분에는 발코니 같은 것이 있
는 듯했다. 확신할 수 없는 것이, 거대한 휘장이 방 가운데를 가로지르
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륜은 휘장 너머에서 쏟아지는 빛을 보고 그
곳이 밖으로 노출된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륜은 휘장 아래로 보이는 계
단을 보고는 휘장 너머의 공간이 방의 다른 부분보다 약간 높으리라고
생각했다.
방 가운데는 긴 탁자가 놓여 있었다. 꽤 많은 의자들이 있었지만 지금
그곳에는 머리가 약간 벗겨진, 보좌관일 거라 짐작되는 노인 한 명만이
탁자 왼쪽에 앉아 있었다. 케이건은 탁자를 향해 걸어갔고 약간 늦게 륜
또한 걸어갔다. 노인은 케이건의 어깨에 붙은 도깨비불을 보고는 흥미롭
다는 듯이 웃고는 탁자의 오른쪽을 가리켜보였다. 의미가 분명한 손짓이
었기에 륜과 케이건은 노인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륜과 케이건이 자리를 잡자 남자는 다시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륜은 그
곳에 있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 탁자 위에는 가로 세로가 모두 1 미
터는 됨직한 금속판들이 몇 장씩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금속판의 가장자
리에는 가죽이 덧대어져 있었고 그 넓은 면에는 음각된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륜은 그것이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책임을 깨달았다. 케이건과
륜이 말없이 바라보는 가운데 남자는 거대한, 그리고 무거울 것이 분명
한 금속판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책장은 쇠고리에 의해 고정되어 있었고
노인이 힘겹게 책장을 넘기자 가죽 테두리에도 불구하고 꽤 요란한 소리
가 났다. 하지만 노인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채 그 넓은 책장에 빼곡하
게 적혀 있는 글씨들을 읽어내려갔다.
긴 시간이 지난 후, 노인은 다시 책장을 넘겼다. 와장창!
케이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끈기있게 기다렸지만 륜은 주의가 산만
해지는 것을 느꼈다. 탁자 위를 둘러보던 륜은 금속책 옆에 놓여있는 필
기도구와 겹쳐 쌓인 천을 연상시키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 그것을 바라
보던 륜은 곧 그것이 니름으로만 듣던 도깨비지(紙)임을 깨닫고는 언짢
은 기분을 느꼈다. 마치 나무의 시체를 보는 기분이 들었기에 륜은 고개
를 돌려 휘장을 바라보았다.
륜의 눈에 뭔가 뜨거운 것이 들어왔다. 륜은 주의깊게 휘장 너머를 바
라보았다. 곧 륜은 어떤 더운 피의 사람이 의자에 반쯤 누운 자세로 옆
모습을 보이며 앉아있음을 깨달았다. 비 오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걸까?
하지만 한없이 우울하기만 한 그런 광경을 뭣하러? 륜이 불신자들의 눈
에는 비 오는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시간이 조금 지
난 후였다.
그 때 노인이 입을 열었다.
"여기 있군."
왜소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륜은 노인을 돌아보았
다. 노인은 금속판 한 부분을 가리켰다. 글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
다른 책장들에 비해 노인이 가리킨 책장에는 글자가 몇 개 되지 않았다.
노인은 그 글을 소리내어 읽었다.
"딱정벌레. 은편 열다섯 닢을 받는다."
케이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용은?"
"기다리시오."
그리고 노인은 다시 금속판을 넘기기 시작했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륜이 다시 주의력을 잃어갈 때 쯤 노인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군."
륜은 엉겁결에 자세를 바로했다. 노인은 륜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용. 배를 끌며 이동하고 성질이 고약한 것에 대해서는 금편 열 닢을
받는다. 땅을 파헤치며 이동하고 유쾌한 것에 대해서는 금편 백 닢을 받
는다."
륜이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케이건이 담담하게 말했다.
"전반적으로 비싸군요."
"배를 끌거나 땅을 파헤치며 이동하면 도로가 손상되니까."
"그렇다면 날아 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거기에 대해서는 이 대요금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리고 만약
당신이 말하는대로 그 용이 날 수 있다면 적절한 통행료를 책정한 다음
새로운 항목을 기입할 거요. 이 대요금표는 그런 식으로 작성되어 왔으
니까. 그 용은 날 수 있소?"
노인의 설명을 들으며 륜은 지금껏 배를 끌며 이동하는 용과 땅을 파헤
치며 이동하는 용이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를 통과했나 보다고 생각했다.
케이건은 륜을 돌아보며 말했다.
"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려."
륜은 자신의 왼팔에 감긴 아스화리탈의 꼬리를 떼어냈다. 하지만 아스
화리탈은 그런 동작을 귀찮아 했고, 오히려 륜의 오른손까지 감아버렸
다. 륜은 아스화리탈의 꼬리에 포박된 채 한동안 쩔쩔매다가 겨우 아스
화리탈의 몸을 두 손으로 쥘 수 있었다. 아스화리탈은 내키지 않는 듯
륜의 손 안에서 버둥거렸다. 륜은 될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아스화리탈을
위로 집어던졌다.
아스화리탈은 고집스럽게 날개를 펴지 않았다. 용은 던져진 자세 그대
로 아래로 떨어졌고 륜은 기겁하며 아스화리탈을 받아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노인이 무뚝뚝한 어투로 말했다.
"산맥 건너편까지 던질 수 있다면 비행으로 인정하겠소."
륜은 비늘이 떨어져나갈 만큼 부끄럽다고 생각하며 아스화리탈을 사납
게 노려보았다. 아스화리탈은 륜의 품에 누운 채 긴 꼬리로 륜의 상체를
감으며 놀고 있었다. 케이건은 그런 아스화리탈을 보다가 왼쪽 어깨로
손을 가져갔다.
케이건은 왼쪽 어깨에 붙여두었던 도깨비불을 떼어냈다. 그것을 오른손
에 쥔 케이건은 아스화리탈의 눈 앞에서 천천히 흔들었다. 잠시 후, 륜
은 아스화리탈이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그 도깨비불을 따라 눈동자를 굴
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도깨비불을 흔들던 케이건은 갑자기 그것
을 위로 휙 집어던졌다.
아스화리탈이 위로 화라락 날아올랐다.
아스화리탈은 네 다리를 이용하여 도깨비불을 움켜쥐고는 자랑스럽게
방 안을 날아다녔다. 대단히 빠른 속도였고 그래서 아스화리탈을 바라보
던 륜과 노인은 목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케이건은 담담하게 말했다.
"날고 있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요금표 옆에 있는 도깨비지와 붓을 집어들
었다. 노인은 도깨비지 위에 글을 쓰며 근엄하게 말했다.
"용. 날 수 있으며 하는 짓이 새끼고양이만큼이나 유치한 경우."
륜은 다시 비늘이 떨어져나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노인은 거기까지 써
놓은 다음 붓을 벼루에 내려놓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당주님께서 통행료를 책정하실 거요. 대요금표에 새 항목을 더하는 것
은 참 오래간만의 일이군."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보좌관이었군요."
"그렇소. 잠시 기다리시오."
륜은 휘장 너머에 있는 사람이 당주일 거라 짐작했다. 그의 짐작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보좌관은 휘장을 들어올리고는 그 뒤로 걸어갔다. 케이
건과 륜은 잠시 기다렸다. 그 동안 아스화리탈은 다시 륜의 품으로 날아
왔다. 륜은 도깨비불을 케이건에게 돌려주려 했지만 아스화리탈이 내놓
지 않았다. 케이건은 내버려두라는 눈짓을 했다.
휘장 너머에서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빗소리와 휘장 때문에
케이건도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금 후 케이건이 알
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주님! 일어나십시오!"
케이건은 당주가 낮잠을 자고 있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휘장 너
머를 볼 수 있었던 륜은 반쯤 누워있던 사람이 일어나 앉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잠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다가 휘장이 걷혀졌다.
륜의 예상대로 휘장 너머는 밖을 향해 노출된 발코니였다. 몇 개의 기
둥으로 천장을 받치고 있을 뿐 외풍이 그대로 들이닥치는 구조였지만 바
람은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외풍이 없는 위치에 만든 발코니인
듯했다. 폭우처럼 퍼붓는 비 또한 안으로 들이치지는 않았다. 아마도 발
코니 위쪽에 돌출된 부분이 있는 듯했다.
발코니 가운데는 옆으로 놓인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는 조그마한 노부
인이 앉아 있었다. 무릎에는 모포 같은 것을 덮고 있었고 조그마한 몸은
의자에 파묻히다시피 했다. 노부인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쏟아지는 빗줄
기를 보고 있었기에 케이건과 륜은 그 뒤통수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후 노부인은 고개를 방 안쪽을 향해 돌렸다.
상대적으로 밝은 위치에 있었기에 노부인은 방 안을 잘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륜의 품에 안긴 채 도깨비불을 가지고 노는 아스화리탈의 모습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노부인은 노인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 용이군. 어린 용이야."
륜은 노부인의 목소리가 왜 떨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가답게 늙은 여
인에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러나 곧 자신이 나
가가 아닌 인간으로 행세하고 있음을 떠올리며 멈칫했다. 노부인은 자글
자글한 눈주름을 더욱 깊게 만들며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가까이 오너라. 좀 자세히 봐야겠구나."
륜은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의자에서 일어나 발코니를 향해
걸어갔다. 륜은 아스화리탈을 안아올리며 그를 따랐다. 두 사람이 계단
앞에 서자 노부인은 다시 말했다.
"계단을 올라오거라."
륜과 케이건은 발코니에 올라서서 노부인을 내려다보았다. 노부인은 아
스화리탈을 보며 감탄했다.
"놀라워. 정말 신기하게 생겼구나. 나도 이 나이 먹도록 한 번도 용을
본 적이 없단다. 아직까지 세상에 용이 남아있었다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야."
보좌관보다는 훨씬 정서적인 반응을 보이는 노부인을 보며 륜은 얼굴을
가린 천 뒤에서 미소지었다. 가까이서 본 노부인은 이가 모두 빠져 턱부
분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노부인이 속삭이듯 말하는 것도 아마 시원찮
은 발음을 감춰보기 위해서인 듯했다. 정수리에서 대충 묶여있는 거미줄
같은 머리카락 또한 윤기를 잃은지 오래였다. 다만 쪼글쪼글한 얼굴 가
운데 눈만은 묘하게도 풍부한 감정을 담아보이고 있었다. 그토록 나이를
먹은 사람이 아직까지도 넘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이하게 느
껴질 정도로.
노부인이 륜의 얼굴로 고개를 옮겼다.
"그런데 너는 왜 얼굴을 가리고 있느냐?"
륜은 당황하며 말했다.
"저, 얼굴이 너무 흉해서 그렇습니다."
"오호. 정말 예쁜 목소리로 지저귀는구나. 그 억양은 도무지 어느 지방
의 것인지 모르겠네. 어쩐지 낯설지는 않지만. 그런데 얼굴이 흉하다고?
상처라도 입은 모양이구나. 정말 안됐다. 하지만 그 용이 너를 따른다면
용 또한 예쁘게 자랄 테지. 정말 긴 세월만에 발견된 용이니 꼭 예쁘게
키워야 한다. 그런데 네 이름은 뭐지?"
"륜 페이라고 합니다."
"여자애 이름으론 조금 이상하구나. 나는 보늬라고 한단다. 나늬의 언
니 말이야. 내 아버지가 그런 거창한 이름을 지어줄 때는, 아무리 귀여
운 딸네미라도 백 살을 먹으면 이렇게 폭삭 늙을 거라는, 정말 당연한
생각을 못했던 걸 게야. 그러니 듣는 사람조차 부끄러워지는 이름은 관
두고 그냥 당주님이라고 부르거라."
륜은 다시 미소지었다. 보늬 당주 또한 웃으며 케이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케이건을 바라보던 당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너는 낯이 익구나? 내가 알던 아이가 아닌지 모르겠구나. 이름
이 뭐지?"
륜은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케이건의 표정이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얼굴은 비통한 듯하기도 하고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보는 케이건의 그런 얼굴에 륜은 꽤 놀랐다. 케이건은 나직
하게 말했다.
"케이건 드라카입니다."
보늬 당주는 그 이름을 몇 번 되뇌었다.
갑자기 당주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당주는 마치
발작이라도 일으킬 듯 몸을 떨었고 그러자 무표정하게 서있던 보좌관이
당황하며 허리를 숙였다. "당주님?" 그러나 당주는 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이 케이건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당주는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내려가!"
그 조그맣고 늙은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친 목소리였다. 당주는 의자 위에서 몸을 들썩거리며 외쳤다. "내려
가!" 케이건은 묵묵히 몸을 돌려 발코니에서 내려왔다. 어쩔 줄 몰라하
던 륜이 황급히 케이건을 따라 내려가자 당주는 보좌관을 향해 외쳤다.
"휘장을 쳐!"
보좌관은 황급히 휘장을 쳤다. 그 모습을 보던 륜은 케이건을 돌아보았
다. 케이건은 의자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케이건은 륜을 향
해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륜은 의자에 앉았다. 그는 케이건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지만 케이건은
깍지낀 두 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륜은 아스화리탈을 꼭 끌어안으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스화리탈 또한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 도깨비불을
내려놓은 채 얌전히 륜의 무릎에 앉았다. 륜은 그 도깨비불을 집어 탁자
위에 놓았다.
꽤 긴 시간이 지난 다음 휘장 너머에서 가냘픈 당주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오래간만이군. 케이건."
보늬 당주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순히 나이를 먹은 것
때문이 아니라 격렬한 흥분 때문임이 분명했다. 케이건은 깍지 낀 두 손
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휘장을 향해 말했다.
"그렇군요."
"왜 미리 말하지 않은 거지? 나를 놀래주려고 한 거야?"
"아니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살아계신 것을 보니 기쁘군요."
"아아, 그래. 너무 오래 살았구나. 백 살이라니. 오히려 내 잘못이구
나. 용을 데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미리 짐작했어야 하는 건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파름산의 그 땡초들이 이번엔 너에게 용을 찾아오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것 아니냐? 그리고 너는 언제나처럼 그 말도 안되는 임무를
성공시켰고."
"그렇지 않습니다. 이 용은 여기 있는 륜이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쥬타기 대선사가 제게 요청한 것은 륜을 대사원으로 데려다 줄 길잡이의
일이었습니다."
"그 애가 용인이냐? 아직까지 용인이 남아있었던가?"
"군령자가 아니라면 세상에 용인은 더 없을 겁니다. 륜은 개화한 용화
를 우연히 발견한 겁니다."
"놀라운 일이구나."
그리고 당주는 침묵했다. 휘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빗소리 뿐이었
다. 케이건은 잠자코 기다렸다.
다시 긴 시간이 지난 후 보늬 당주가 말했다.
"네가 길잡이라고 했더냐?"
"그렇습니다."
"그럼 요술쟁이와 대적자도 있는 것이냐? 그 도깨비불을 보니 그럴 법
도 하다만."
"그렇습니다. 도깨비와 레콘이 있습니다. 체구가 커서 올라오진 못했습
니다만."
"셋이 하나를 상대하니, 그렇다면 그 륜이라는 애는 나가겠구나."
륜은 놀라며 케이건을 보았다. 케이건은 별 어조의 변화 없이 말했다.
"예."
"나가들은 목소리가 참 예쁘지. 그 요스비라는 애도 그랬어."
요스비의 이름이 들린 순간 륜은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륜은 케이건
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에겐 눈길 한 번 주지않은
채 휘장만 바라보았다. 륜은 청력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휘장 쪽을
돌아보았다. 보늬 당주는 계속 말했다.
"네가 요스비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던 것이 기억나는구나. 가장 호의적
으로 평가하더라도 요스비는 겨우 음치 소리를 면할 정도였지. 하지만
목소리는 정말 예뻤어.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애의 노래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
륜은 더 참지 못하고 외쳤다.
"제 아버님을 아십니까, 당주님?"
케이건이 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휘장 뒤에서는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라고? 네가 요스비의 딸이냐? 하지만 나가는 아버지를 모를 텐
데."
륜은 케이건이 자신을 제지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긴장시켰
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를 지긋이 바라볼 뿐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하
지 않았다. 륜은 휘장을 향해 말했다.
"저는 아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주님은
정말 제 아버님을 아십니까?"
"아들이라. 놀랍구나. 네가 말하는 사람과 내가 아는 사람이 같은 사람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한 번 만났다. 과거 내 요새에 온 적이 있지.
객기도 그런 객기가 없었다. 추위 때문에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 케이
건에게 업힌 채 여기까지 왔단다. 나는 그 애가 꼭 죽는 줄 알았어. 하
지만 케이건이 나가는 쉽게 죽지 않는다고 가르쳐줬지. 그러고보니 너는
불편해보이지 않는구나? 혹 나가가 드디어 날씨까지도 정복했느냐?"
"아니오. 도깨비가 제 몸에 불을 붙여주었습니다. 빛은 없고 열만 있는
그런 불입니다. 그런데 제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었느냐? 마치 요스비가 과거의 인물인 것처럼 말
하는구나."
보늬 당주의 질문에 케이건은 움찔하며 륜을 바라보았다. 륜은 아스화
리탈을 안은 채 일어났다. 얼굴을 가리는 천을 거칠게 잡아당겨 얼굴을
드러낸 륜은 케이건을 바라보며 당주의 질문에 대답했다.
"제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11년 전, 제가 11살이었을 때."
빗줄기가 바위를 때리며 사방으로 암흑을 뿌렸다. 물론 사모 페이가 가
진 나가의 눈에 보이는 광경이다.
물은 열을 삼킨다. 비통하기까지 한 불투명을 바라보며 사모 페이는 한
숨을 내쉬었다. 마루나래의 옆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는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고, 정신적으로는 곤혹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
다. 그녀는 산비탈 아래쪽, 급류 저편에 있는 두억시니들을 보며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인간들의 도시들을 지나쳐왔구나.]
불신자들은 슈라도스라 부르지만 사모에겐 그저 인간들의 도시인 곳을
지나칠 무렵, 사모는 두억시니의 무리들이 자신을 추적하고 있음을 깨달
았다. 두억시니들은 자보로도, 슈라도스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경악
한 인간들의 눈 앞을 지나쳐왔을 뿐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민하던 사모는 그냥 안도하기로 했다. 불신자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
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모는 인간과 두억시니를 놓고 볼 땐 인간
에게로 감정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키탈저 사냥꾼들이 멸망하기 전에도
이미 대확장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것은 나가가 승리
한 전쟁이었다. 수백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사모는 인간에 대한 증오를
느끼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모는 두억시니들에 대해서도 증오를 느낄 수 없었다.
[하늘 아래에 그 처참한 모습을 보여야 할 만큼 중요한 이유가 있었더
냐?]
두억시니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비 때문에 갑자기 불어
난 계곡물을 건너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산비탈에서 튀어나온 바위 위
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사모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첫 번째로 물에 뛰
어든 두억시니들이 급류에 휩쓸려 간 이후로 두억시니들은 물에 뛰어드
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두억시니들은 강물을 갈라서 길을 내려 하고 있었다.
의미 없는 노성을 토하며 두억시니들은 끊임없이 두 손으로, 혹 손이
없을 경우에는 입으로 물을 머금어 강물을 '파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같은 부피의 흙에 대해서라면 소용이 있었을 그 방법도 거세게 흐르는
급류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두억시니들은 아무리 퍼
내어도 줄어들지 않는 강물에 난처해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두억시니는 그 짓을 멈추지 않았다. 수백의 두억시니가 강변에
몰려서서 강물을 퍼내고 있었고 그보다 많은 두억시니들이 그들의 배후
에서 의미를 빚지 못하는 단어들로 주위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무익한 목적에 바쳐진 과도한 노고가 자아내는 것은 웃음이나 슬픔뿐이
다. 사모의 경우에는 슬픔이었다. 사모는 쇼자인-테-쉬크톨에 묶여있는
그들 남매의 운명도 저 두억시니들의 모습 앞에서는 비탄을 논할 수 없
다고 생각했다. 결국 사모는 모든 정신을 열어젖히며 닐렀다.
[제발 그 짓 그만둬!]
그러나 두억시니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모는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니름을 토해내던 그 유해의 뱀과 달리 두억시니들은 그녀의
니름을 듣지 못했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갈기를 움켜쥐며 개념을 전달했
다.
마루나래가 포효했다.
거대한 야수의 호통에 산맥이 전율했다. 그리고 사모는 기대했던 광경
을 보게 되었다. 두억시니들은 강물을 퍼내는 동작을 중단한 채 건너편
산비탈을 올려다보았다. 사모는 목청껏 외쳤다.
"그 짓을 멈춰라! 제발! 그쯤이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만하지
않느냐!"
쏟아지는 비 속에서 두억시니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녀를 올
려다보았다. 사모는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것을 들었
다.
침묵한 채 바라보던 두억시니들이 갑자기 비명처럼 외치기 시작했다.
"크낙새 뿌리 무침? 파란 냄새 삼각형!"
"팔짝 뛰는 토끼색 칠한 재채기 세 쌍만 던져!"
그리고 두억시니들은 더욱 처절한 열정으로 강물을 퍼내었다.
사모는 결국 그 슬픈 모습에서 몸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사모는 오른손
으로 마루나래의 갈기를 움켜쥔 채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요스비가 죽었다고 했느냐?"
케이건의 질문에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다시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