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4-4. 관련자료:없음 [52866]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13 00:58 조회:11695
눈물을 마시는 새.
4. 철혈(鐵血) - 4
티나한의 철창은 병사 여섯 명이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잘 들고와 보
관해두었다는 것을 맹세하고, 나늬는 즈믄누리의 딱정벌렛간에야 미치지
못하겠지만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다시 설명한 다음, 혹시나 싶
은 마음에 케이건의 괴상한 쌍신검도 잘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 후에야,
키타타는 마침내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키타타의 이야기는 케
이건이 짐작하던 대로였다. 키타타는 용을 넘기라고 제안했다. 륜은 비
늘을 곤두세웠고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용근이 아니라 용이니 먹어도 용인이 될 수는 없소."
"먹겠다는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용을 원하는 거요? 용은 위험한 생물이오. 도깨
비를 협박했던 당신이 위험에 대한 제대로 된 감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
지는 않지만, 그래도 용의 위험성을 모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용이 우리에게 위험하다면 우리 왕의 적에게도 위험하지 않겠소?"
케이건은 눈살을 찡그렸다. 키타타의 안색을 살피던 케이건은 잠시 후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무슨 말이오?"
"당신도 눈물을 먹일 새가 필요해진 거요?"
비형만이 알 듯 모를 듯하다는 표정을 지었을 뿐, 키타타 자보로를 위
시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케이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로서는
고맙게도 케이건은 알아듣기 쉬운 말을 덧붙였다.
"위엄왕의 무적 병기가 되어줄 용을 원하는 거요? 당신은 당신 조카의
어리석음에 한탄했던 것 같던데. 그건 겉으로만 그런 척한 거요? 그게
아니면 용을 보고는 생각이 바뀐 거요?"
"말을 가려서 하라! 대장군은 짐의 충신이니라!"
날카로운 소리에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다. 홀 한쪽에서 위엄왕 지그림
자보로가 몇 명의 사람들을 대동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키타타 자보로와 병사들은 고개를 숙였고 위엄왕은 그들 앞을 지나쳐
곧장 단 쪽으로 걸어갔다.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있었지만 비형은 그 값
비싸 보이는 옷이 군데군데 그을려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 했다. 단 위에
올라간 위엄왕은 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륜은 그제야 그 돌이 왕좌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륜은 왜 저런 투박한
돌을 왕좌로 삼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 때 케이건이 말했다.
"별비가 할퀸 돌이겠군. 유서 깊은 물건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리 편해
보이진 않는구료."
"왕은 지대한 책무를 지닌 사람이다. 어떤 왕좌도 편할 수 없는 법이
다."
"그 왕좌는 그렇겠군."
위엄왕은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다가 케이건의 말투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비형은 킥! 킥! 하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 폭소를 터뜨렸다. 데굴
데굴 구르고 싶어 보였지만 묶여있는지라 비형은 그냥 온몸을 떨며 웃었
다. 위엄왕은 화를 내며 왜 웃는지 설명하라고 말했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비형이 대답했다.
"폐하. 당신을 앉히고 있으려니 그 의자 기분이 편할 리 없다는 뜻 아
니겠습니까?"
위엄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곧 시뻘겋게 변했다. 위엄왕은 목에 핏
대를 세운 채 케이건을 꾸짖었지만 케이건은 담담히 마주볼 뿐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결국 위엄왕의 꾸중이 정도 이상으로 길어진다고 생각
한 티나한이 짜증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만-해-!"
위엄왕은 그만했다. 모든 사람들의 귓속에서 계명성의 여운이 떠도는
상황에서 케이건이 입을 열었다.
"지그림 자보로."
"언사가 무례하다!"
"조용하시오. 지그림 자보로. 왕의 조건이나 덕목에 대해 말하는 자 많
지만, 나는 밤중에 사람을 납치해오는 강도 같은 왕에 대해서는 듣지 못
했소. 이 상황에 대한 만족할 만한 사과가 있기 전까지 당신은 내게 왕
이 받아야 할 경의는커녕 보편적 인격자가 받아야 할 존경도 받긴 어려
울 거요."
케이건의 차분하면서도 준엄한 지적에 위엄왕은 더욱 분노했다.
"왕은 사과하지 않는다!"
"해야 할 걸."
티나한의 경고에 위엄왕은 찔끔했다. 위엄왕은 티나한과 비형을 연결하
고 있는 쇠사슬을 보다가 키타타 대장군을 쳐다보았다. 키타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도깨비의 팔을 끊지 않고는 풀지 못합니다." 안심한 위
엄왕은 티나한에게 코방귀를 뀌어주곤 륜에게 말했다.
"너, 나가. 저 용을 어떻게 하면 얌전하게 할 수 있는지 설명하라."
륜은 분노를 삼키며 말했다.
"용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지붕 위에 있다. 그토록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생물은 처음 보
았다. 빤히 바라보다가 병사들을 지붕 위로 올려보냈더니 휙 날아오르더
군. 병사들이 없어지면 도로 내려오고. 게다가 짐에게 불을 토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하마터면 왕궁이 불탈 뻔했다."
비형은 위엄왕의 옷이 왜 그 지경인지 깨닫고는 다시 낄낄거렸다. 륜은
아스화리탈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위엄왕은 계속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길 어제 용이 대호에 맞서 너를 보호했다고 하더
구나. 너는 저 용을 다룰 수 있느냐?"
"다룬다는 것이 적합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용을 계속 데리
고 있었지만 눈을 뜬 건 어제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너를 보호한 거지?"
륜이 적절한 대답을 떠올리지 못해 주춤할 때 케이건이 입을 열었다.
"용은 지혜로운 생물이오. 자신을 위협할 존재가 있으면 발아하지 않을
정도로. 당연히 자신을 보호한 자도 알아 보지. 그래서 륜을 보호했을
거요."
"그다지 지혜로운 것 같지는 않던데. 짐은 그 용에게 많은 것을 약속했
다. 하지만 짐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더군."
"지그림 자보로. 어린 아기에게 훌륭하게 자라주면 적절한 보상을 해주
겠다고 약속하는 부모는 없소. 그 용은 이제 눈 뜬지 하루도 되지 않았
소."
위엄왕은 케이건의 호칭에 화가 났지만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는 티나한
의 모습에 억지로 불쾌감을 삼켰다.
"그럼 짐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용에게 유모와 교사라도 붙여줘야
하느냐?"
비형은 그 말이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다시 웃어대었다. 하지만 케이건
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그 용에게 뭘 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용은 당신 것이
아니오."
위엄왕은 당황했다. 흥분 때문에 아직까지 용의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
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위엄왕은 륜을 돌아보며 말했다.
"좋다. 나가. 네가 저 용을 데리고 있는 이유가 뭐냐?"
"이유요? 제가 아스화리탈을 피어나게 했고 제 손으로 그를 캐내었습니
다. 그래서 저는 아스화리탈을 보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스화리탈이라는 이름이군. 보호하다니?"
"용을 싫어하는 나가들과 용근을 탐내는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려고 했습
니다. 그리고 제 능력이 닿는 한, 그리고 아스화리탈이 더 이상 제 보호
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그럴 생각입니다."
"그냥 보호하는 것이 네 목적이라는 말이냐? 용이 성장해서 더 이상 너
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솔직히 지금도 네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것 같
지는 않다만."
"원한다면 떠나가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친구로서 지내겠습니
다."
위엄왕은 반색하며 말했다.
"그런가? 원한다면 보내주겠다고 했지? 그렇다면 만약 그 용이 짐의 곁
에 남겠다면 놓아줄 텐가?"
륜은 위엄왕의 그을린 옷을 쳐다보았다.
"아스화리탈이 그걸 원하는 것 같지는 않군요."
위엄왕은 불쾌한 헛기침을 했다. 잠시 고민하던 위엄왕은 다른 제안을
꺼내놓았다.
"그렇다면 네 친구와 함께 짐을 위해 일할 생각은 없는가? 네게도, 그
리고 아스화리탈에게도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 네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대우일 것이다."
"저는 할 일이 있습니다. 이 분들과 함께 하인샤 대사원에 가야 되죠.
고다인 대덕이 말해주지 않던가요?"
위엄왕은 키타타를 바라보았다. 키타타는 륜에게 말했다.
"고다인 대덕이 이 일에 관련되었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가 고결한 사
제라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내 오랜 죽마고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런
오해는 놔둘 수 없겠소. 륜. 나는 사원에 침입해서 당신들을 잡아온 거
요. 고다인 대덕은 화가 잔뜩 나서 왕궁을 찾아왔소. 자신의 손님들을
구하러 온 거지. 하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갔소."
륜은 다시 케이건을 바라보았고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륜은 위엄
왕을 향해 말했다.
"그럼 말씀드리죠. 저희들은 하인샤 대사원에 가야 합니다."
"너희들 모두가 가야 하는 건가? 아니면 일부는 그냥 길잡이나 동행인
가?"
티나한은 그 말에 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륜이 입을 열었다.
"모두 가야 합니다."
"모두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가야 합니다. 그러니 풀어주십시오."
위엄왕은 눈살을 찡그렸다. 하인샤 대사원의 손님들을 억류했다는 이야
기가 퍼진다면 평판이 말도 못할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위엄왕은 손
에 들어온 용을 놓아줄 수는 없었다.
"그것이 급한 용무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가야 한다는 것만 알뿐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
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짐이 대사원에 너희들을 보호하고 있다
는 서신을 보내겠다. 그렇다면 대사원에서 답신을 보내지 않겠는가? 그
때까지 짐의 보호를 받고 있다가 답신이 도착한 후에 거취를 결정하면
어떻겠는가."
륜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기분을 눈치챈 듯 케
이건이 끼여들었다.
"당신의 제안에 대해 우리끼리 의논 좀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시
겠소?"
"좋다. 나는 다시 그 용에게 가보겠다. 먼저 이 옷부터 갈아입어야겠
군."
위엄왕은 다시 일어나서 홀을 나갔다. 키타타 자보로는 병사들과 함께
남았지만 케이건은 그에게도 나가달라고 요청했다. 키타타는 의심스럽다
는 듯이 바라보았다.
"충분히 떨어져 있을 테니,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면 되잖소."
"조용히 이야기를 하기가 좀 어렵소. 말을 할 줄 알지만, 나가는 귀가
어두워서."
키타타는 케이건의 설명이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키타타는 일행
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점검한 다음 자리를 비켜주었다. 넓은 홀 안에
네 사람만이 남게 되자 륜은 황급히 케이건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케이건은 말없이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그 때 바닥에 엎드린 채 자신
의 신세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티나한이 륜을 향해 말했다.
"뭐 한 가지 물어보자, 륜. 왜 거짓말을 했냐?"
"예? 거짓말이오?"
"그래. 하인샤 대사원에 모두 함께 가야한다는 거. 거기 가야 할 사람
은 너뿐이잖아. 우리는 너를 데려다주기 위해 고용되었을 뿐이고."
티나한의 말에 륜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나는 누구처럼 철혈이 아니에요. 동료들을 팽개칠 수는 없어요."
티나한은 기쁜 듯이 웃었지만 동시에 불안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
았다. 그의 등 위에 묶여 있던 비형 또한 불안한 듯이 케이건의 기색을
살폈다. 케이건이 말했다.
"지그림 자보로를 위해 일하고 싶은 생각이 있나."
륜은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정중하게 요청을 했다 하더라도 될까 말까 한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납치해온 자를 위해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백 번 옳고 한 번 더 옳은 말이다! 륜!"
티나한이 반가워하며 외쳤다. 하지만 케이건의 담담한 얼굴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스화리탈을 그에게 넘길 생각은 있나."
"예?"
"아스화리탈을 지그림 자보로에게 넘기는 것을 고려해보겠느냐고 물었
다. 용을 데리고 다닌다면 이런 일이 계속 발생할 거다. 귀찮은 일이지.
티나한이 지적한대로 목숨의 위협까지 당할 수도 있고. 그러니 아스화리
탈을 지그림에게 넘기고 자유와 보상을 받는 편이 어떠냐고 제안하는 거
다."
"당신은 정말…"
륜은 말을 삼키며 케이건을 쏘아보았다. 케이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
은 채 조용히 륜의 말을 기다렸다. 륜은 억지로 짜내듯이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스화리탈을 제 친구라고 생각하
고 있어요. 저 때문에 발아했고 제 손으로 캐내었어요. 아까 그 인간에
게도 말했지만, 아스화리탈이 저를 원하지 않게 될 때까지는 계속 아스
화리탈을 보호하겠어요."
"용을 키우는 건 쉽지 않아."
"물론 잘 모르니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잘 몰라도 상관 없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처박아놓고 신경
쓰지 않아도 용은 아무 문제 없이 자라나니까. 용을 키우기 어려운 것은
오히려 그 때문이야."
"예? 무슨 말씀입니까?"
"륜, 나가인 네가 식물의 특징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무슨 말씀이시죠"
케이건은 잠깐 생각한 다음 말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지. 지금 아스화리탈에겐 네 개의 다리와 날개가
달려있어. 하지만 네가 땅 속에서 아스화리탈을 키우면 날개는 사라질
걸. 날아다닐 일이 없으니까. 그 대신 앞다리가 두더지처럼 큼직해질 테
지. 네가 사막에서 아스화리탈을 키우면 아스화리탈에게 낙타 같은 물주
머니가 생겨날지도 모르지. 지하 수백 미터까지 내려가 물을 찾아내는
꼬리 따위가 생길지도 모르고. 그리고,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네가 만
약 물 속에서 아스화리탈을 키우면 날개와 다리가 사라지고 대신 지느러
미가 자라날 거다."
비형은 느닷없이 20 센티미터나 솟아올랐다. 물 속이라는 말에 긴장한
티나한이 깃털을 곤두세운 탓이다. 륜은 놀라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상상해보지 못했군요. 용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자라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용은 네가 키우는대로 자라날 거다. 그 성격은 말할 것도 없지. 그래
서 용을 키우는 것은 어려워. 어떤 사람들은 키우는대로 자라나니 얼마
나 쉽냐고 말할지 모르겠다만, 그건 책임의 무거움을 통감해본 적이 없
는 자의 말일 거다. 제멋대로 키우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 괴물을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다 커버린 용은 감당할 수도 없어. 그래서 옛
날, 용이 지금보다 많았던 시절의 현인들은 혹 천우신조로 용화나 용근
을 발견하더라도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떠났다. 자연에게 그 성장을 맡
겨두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전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떠날 수 없었어요. 그랬다간 다른 나가들
이…"
"알아. 용을 캐낸 걸 잘못되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용을 키우는 일
이 어렵다는 걸 이야기한 거지. 그리고 어렵기 때문에 그 일을 맡은 이
상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포기할 수 없다."
"네? 포기할 수 없다고요?"
륜은 반가워하며 말했다.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네 손으로 캐내고 눈까지 뜨게 해주었으니 포기하는 건 곤란하
지. 네가 그러고 싶다면, 끝까지 네가 책임지는 것이 좋다. 지그림에게
아스화리탈을 넘기는 건 책임지는 것이 아닐 거다."
륜은 크게 기뻐하면서도 의아한 듯 말했다.
"그럼 왜 그 자에게 용을 넘기라는 제안을 한 거죠?"
"네가 책임감을 가지고 있나 알아보기 위해서. 네게 그런 것이 없었다
면, 나는 지그림 자보로에게도 용을 넘기지 않겠지만 너에게도 용을 넘
기지는 않았을 거다. 대신 아스화리탈을 자연에 놓아주었겠지."
륜은 감격하여 말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철혈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이라면, 됐다. 나는 철혈이 맞으니까. 다른
누구보다도 그 강도단의 우두머리가 그것을 확인하게 될 거다."
비형은 강도단의 우두머리라는 말에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웃고 있을 수는 없었다. 티나한이 다시 고함을 질렀기 때문이다.
"그렇다!"
티나한의 고함소리에 비형은 온몸이 흔들렸다. 티나한은 자벌레처럼 꿈
틀꿈틀 기어오면서 케이건에게 외쳤다.
"어떤 소리를 하더라도 이런 강도놈들의 말은 들어줄 생각이 없어! 이
놈들은 박살을 내어야 해! 게다가 제왕병 환자 녀석이야. 내가 최근 제
왕병 환자 놈들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지? 그 늙은 놈의
입에서 두 번 다시 왕이라는 말도 못 나오도록 해주겠어! 왕독수리라는
말만 듣고도 자지러지게 해주겠어! 왕파리라는 말에 졸도하게 만들어주
겠어!"
티나한의 용맹한 외침은 그만 비형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말았고 그래서
멀미에 시달리면서도 비형은 왕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단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왕거미, 왕소금, 왕개미, 왕골, 왕벌, 왕수…"
"그만해!"
다시 벽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비형의 입이 닫히자 고개를 내렸다.
"어쨌든 이 곤란한 상황은 타개해야겠소."
"어떻게 타개하지?"
케이건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 그러자 뒤로 묶인
그의 두 팔이 위로 떠올랐다.
케이건은 그 자세에서 팔을 힘껏 바닥에 내려쳤다.
쇠사슬이 돌바닥과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비형과 티나한, 그
리고 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몇
번 더 같은 식으로 손을 바닥에 내려쳤다.
그리고 세 사람은 경악했다.
케이건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손은 더 이상 쇠사슬에 고정되
어 있지 않았다. 티나한은 "껙!" 하는 품위 없는 비명을 질렀고, 륜 또
한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은 니름이었기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비
형은 입을 쩍 벌린 채 말했다.
"역시 그랬군요. 마법사였군요?"
"마법사 같은 건 없소. 비형."
"아, 비밀인가요? 그 비밀 지켜드리죠. 그런데 키보렌에서 당신이 잡아
오곤 했던 동물들에겐 어떤 마법을 쓴 거죠?"
"경험과 끈기와 행운."
그리고 케이건은 오른쪽 주먹을 펼쳐보였다. 일행은 그 손바닥에서 짓
이겨진 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형이 쇠사슬을 풀로 바꾸는 마법 어쩌
고 하는 말을 중얼거릴 때 륜이 비명처럼 외쳤다.
"히참마! 그게 바로 히참마군요!"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묶고 있던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단단한 것도 찾기 어려운 쉬크톨을 부러뜨릴 때 사용하는
풀이지. 그 자들이 딴에는 머리를 쓴다고 쇠사슬을 이용했지만, 오히려
쇠사슬이기 때문에 이런 수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을 알면 꽤 애석해할 듯
하군."
"그 풀은 도대체 언제 구했습니까?"
"그게 어느 왕이더라. 그래. 철권왕이었군. 티나한이 철권왕을 두드려
패던 곳에서 발견하곤 좀 꺾어두었다. 보다시피 쓸모 있는 풀이라서."
케이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을 묶었던 쇠사슬도 풀어내었다.
그리고는 쇠사슬을 주먹에 감기 시작하는 티나한을 깊은 우려가 담긴 눈
으로 바라보았다. 두 손을 쇠사슬로 단단히 감은 티나한은 주먹을 서로
부딪혔다. 쇠사슬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고 맹포한 불꽃이 튀어오르
자 티나한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케이건은 조용히 말했다.
"티나한."
"뭐지, 케이건?"
"부디 상식적인 수준은 지켜주길 바라오."
티나한은 씨익 웃었다. 비형은 그 웃음을 보며 티나한이 케이건의 말을
존중하긴 하겠지만 상당히 폭넓게 해석할 작정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갈로텍은 비아스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비아스 마케로우가 하텐그라
쥬의 심장탑에 들어서자마자 수련자 한 명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비아스
에게 주의를 주었다. [32층을 올라가셔야 됩니다.] 비아스는 놀라지 않
을 수 없었다. 비아스는 갈로텍의 나이가 그렇게 많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이허물이라도 생기지 않는 이상 나가의 외모에서 나이를 추측할 방법
은 드물다. 나이 많은 나가라도 허물을 벗은지 얼마되지 않으면 그 피부
에는 젊음이 넘친다. 나가들은 상대방의 나이를 가늠할 때 주로 정신의
깊이와 사용하는 니름들의 종류를 이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럭저럭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정도의 정확성을 보장한다. 비아스는 갈로텍이 쉰
은 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쉰도 되지 않은 애송이 수호자가
32층에 있을 수는 없다.
32층은 비아스의 예상보다도 높았다. 심장탑의 안쪽 벽면을 가득 채우
고 있는 벽감에 있던 심장병이 사라질 정도로. 비아스는 약간 놀라며 안
내하던 수련자에게 질문했다.
[병이 벌써 없어졌군. 나는 수십억 개 쯤 있을 줄 알았는데?]
수련자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는 심장 보관에 대한 비아
스의 무지를 탓하지는 않았다. 여자들은 보통 남자들의 일에 관심이 없
으며 그런 무관심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심장의 소유자가 사망한 이후에도 심장을 보관하
지는 않으니까요. 간단한 장례식을 치른 다음 파기합니다.]
[어떻게 소유자가 죽은 것을 알지? 소유자가 남자라서 도시에서 먼 곳
에서 죽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심장도 죽습니다. 단번에 알아볼 수 있지요.]
[아, 그렇겠군.]
잠시 후 비아스는 또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비아스는 32층을 걸어올라
간 자신이 꽤나 비참한 모습으로 갈로텍 앞에 서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갈로텍이 비록 그녀의 약점을 알고 있긴 하지만, 비아스는 선처를 바라
는 죄인 같은 후줄근한 꼴로 갈로텍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31
층에 도달했을 때 비아스는 걸음을 멈췄다. 비아스는 수련자가 질문할
거라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수련자는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비아스는 문
득 깨달았다.
'빌어먹을! 내가 여기서 쉴 거라는 것을 짐작했군. 갈로텍이 가르쳐준
걸까, 아니면 이 꼬마가 스스로 짐작한 걸까?'
비아스는 수련자에게 그것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고맙게도 수련자가 먼
저 닐렀다.
[예의에 밝은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갈로텍 수호자님께서는 찾
아오신 분이 힘들어하시는 것을 보며 항상 죄송스러워 하지요. 그래서
제가 여기 쯤에서 내방하신 분께 잠시 쉬실 것을 권하곤 합니다. 그런데
마케로우님께서는 먼저 걸음을 멈추시는군요.]
비아스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춘 것은 갈로텍이 염
려할 것을 배려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유 때문이다. 비아스는
수련자가 아무렇게나 생각하도록 내버려두고는 호흡이 충분히 안정되었
다고 느꼈을 때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32층에 도달하자 비슷하게 생긴 두 개의 문이 나타났다. 수련자는 그
중 왼쪽 문으로 비아스를 안내했다. 비아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호자들은 모두 한 층을 다 쓰는 것 아니었나?]
[50층부터 그렇습니다. 마케로우. 거기서부터는 한 층에 한 분씩 계시
지요. 30층부터 49층까지는 한 층에 두 분의 수호자가 계십니다. 물론
지위나 뭐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높은 곳에 계
시면 오르내리기 힘드니 위쪽에 계신 분이 적은 것이지요.]
수련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비아스는 그것이 분명히 지위의 표상일 거라
생각했다. 그토록 높은 곳에 있는 자는 자신이 오르내리지 않을 것이다.
비아스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올라오게 할 테니. 비아스는 갈
로텍이 어젯밤 이곳을 걸어올라와야 했을 거라는 사실에 심술궂은 즐거
움을 느꼈다.
수련자가 문 건너편을 향해 니르기 전, 비아스는 느닷없이 앞으로 걸어
갔다. 그리고 방문을 두드렸다. 수련자는 놀란 표정으로 비아스를 바라
보았다. 하지만 방문 건너편에서는 침착한 니름이 들렸다.
[들어와요. 비아스 마케로우.]
비아스는 어쩔 줄 몰라하는 수련자를 내버려둔 채 방문을 열고 들어갔
다. 방문을 닫은 비아스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방이었다. 갈로텍
은 창문을 면한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갈로텍은 다른 의자를 가리켰고
비아스는 거기에 앉았다. 비아스가 자리에 앉자 갈로텍은 입을 열었다.
"왕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케로우. 문을 두드리셨으니 다음엔 뭔가
요? 노래? 박수?"
육성으로 말하는 갈로텍을 보며 비아스는 수호자가 '불신자 취급'을 당
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비아스가 문을 두드린 의
도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다는 것도. 비아스는 맥이 풀렸다.
[어제 뵈니 소리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더군요.]
"아, 네.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가지고 있지요."
갈로텍은 그렇게 말하며 책상 위에 있는 막대기를 들어올렸다. 꽤나 큼
직한 막대기였지만 갈로텍이 들어올리는 모습을 본 비아스는 그것이 가
벼울 거라 생각했다. 갈로텍은 그 막대기를 비아스에게 건네었다. 의아
해하면서도 막대기를 받아든 비아스는 그것이 왜 가벼운지 알 수 있었
다. 그것은 대나무였다. 하지만 이상한 색깔이었기에 비아스는 첫눈에
그것이 대나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갈로텍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라고 생각되십니까?"
비아스는 니름을 고집했다.
[대나무군요. 벌레 먹은 구멍이 있고. 아마 벌레 먹은 대나무를 불쌍히
여기셔서 손질한 다음 보관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갈로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아스에게서 다시 대나무를 받아든 갈로
텍은 비아스가 벌레 먹은 구멍이라고 닐렀던 구멍들을 손가락으로 틀어
막았다. 그리고 제일 위쪽의 구멍에 입을 가져갔다. 나무를 먹을 생각인
가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해 보던 비아스는 대나무에서 소리가 흘러나오
자 깜짝 놀랐다.
신화보다 더 늙고 산맥보다 더 거대한 야수의 무거운 숨소리 - 그는 분
명 지혜로운 바보다.
늪지에 뿌려진 별빛을 보며 목마른 짐승은 잠시 갈급함을 잊는다.
바람, 빠르게, 성급하지 않게.
유수에 침식당하는 바위가 내뱉는 한숨, 혹은 가없는 세월 끝에 드디어
유수가 된 바위의 고고성?
한참 후에야 비아스는 그것이 악기라는 사실, 그리고 갈로텍이 지금 연
주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갈로텍은 힘껏 역취(力吹)했다. 단
단한 대나무와 여린 갈대 속청만이 낼 수 있는 소리, 그 섬뜩할 정도로
투명한 소리가 고양감을 한껏 만끽하며 치솟아올랐다.
너무 슬퍼서 슬프지 않은 비명.
꿰뚫는다.
구름을 가르고 달빛을 거슬러오르는
고요한 천둥과 부드러운 벼락.
연주가 끝났다.
갈로텍은 취구에서 입을 뗀 다음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비아스는 매료
된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닐렀다.
[재미있는 취미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벌레 먹은 대나무는 아니군요.]
"대금이라고 합니다. 해일을 가르고 폭풍을 잠재우는 악기죠."
[그 대나무가 마법이라도 부린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갈로텍은 다시 크게 웃었다. 웃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는 듯했다.
"해일을 가르는 힘과 폭풍을 잠재우는 부드러움을 겸비한 악기라는 뜻
입니다. 마법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걸로 부릴 수 있는 마법이라면, 제
마음의 평안을 가져오는 마법 정도입니다.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군
요."
비아스는 그 질문에 대답을 회피했다.
[희귀한 구경거리이긴 하지만 그걸 보여주시려고 저를 만나자 하신 건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만.]
"아, 참. 그렇지요. 당신의 동생 살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지요."
비아스는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갈로텍의 얼굴을 후려갈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갈로텍은 그 모습에 또 웃으며 대금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
다. 그리고는 책상 서랍에서 밧줄을 꺼내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
보는 비아스에게 갈로텍은 밧줄을 건네었다.
"저를 묶어주세요."
[도대체 이 무슨 괴상한…]
"절대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저를 의자에
꽁꽁 묶어주세요. 발자국 없는 여신의 이름에 맹세코, 제 제안에 고마워
하시게 될 겁니다."
비아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신의 이름을 건 맹세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비아스는 수호자를 의자에 꽁꽁 묶었다. 당황과 분노 때문
에 비아스는 매듭을 단단히 묶었지만 수호자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 단단히 묶으라는 수호자의 요구에 비아스는 비늘이 벗겨질 정도로 세
게 묶었다. 다리까지 의자 다리에 고정된 수호자는 몇 번 몸을 뒤채보고
는 만족했다.
"감사합니다. 황당한 제안이었죠?"
[수호자께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자, 이제 뒤로 좀 물러나 주십시오."
비아스는 끝을 봐야겠다는 심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거리가 충분히 떨
어지자 갈로텍은 다시 웃었다.
그리고 갈로텍의 표정이 일순 바뀌었다.
비아스는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몇 발자국 더 물러났
다. 비아스는 지금껏 그토록 살기어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곤두선
비늘들이 서로 부딪혀 흉포한 소리를 일으켰다. 갈로텍은 의자를 뒤흔들
며 닐렀다.
[비아스! 이 저주 받을 살인자야!]
비아스는 그 니름에 거의 기절할 뻔했다.
그것은 화리트 마케로우의 니름이었다.
죽은 동생의 니름에 비아스가 받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혼란과 공
포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비아스가 가까스로 현실 감각을 회복했을 때 갈
로텍은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갈로텍은 턱으로 밧줄을 가
리키며 풀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비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벽에 등
을 기댄 채 비아스는 사납게 닐렀다.
[조금 전의 그것이 무슨 장난인지 설명해주십시오.]
"진짜 장난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텐데요?"
비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갈로텍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좋아요. 설명부터 들으시고 풀어주시죠. 조금 전의 그건 화리트의 영
이었습니다."
비아스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 갈로텍을 똑바로 바라보던 그녀는 스스
로도 믿기 어려운 니름을 보내었다.
[군령자?]
"그렇습니다. 지금은 수호자 갈로텍입니다."
[니름도 안 되는! 나가에겐 군령자가 없습니다!]
"입증되지 않은 가설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학자로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 텐데요. 열린 마음으로 생각해 보시죠. 왜 나가에게 군령자가 없다
는 겁니까?"
[어떤 정신 나간 나가가 불신자의 영들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대가가 충분히 크면 그럴 수 있습니다."
[대가? 영생이오? 그렇게 우매한 짓을!]
"우매하다니오?"
[다른 자들의 영과 뒤섞인 채 몸에서 몸으로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자기
자신도 잊어버리는 것이 무슨 영생입니까! 물론 죽음을 두려워하는 저
불신자들이라면 죽음이 무서워서 그런 바보 짓을 할 수도 있지만, 나가
가 어떻게!]
"당신 니름은 상당히 나가 중심주의적이군요. 하지만 완전히 틀린 니름
은 아닙니다. 나가들은 대개 생에 권태를 느낄 정도로 충분히 늙은 다음
별 두려움 없이 죽지요. 하지만 나가보다 더 죽음에 신경쓰지 않는 도깨
비도 가끔 군령자가 됩니다. 왜 그렇지요?"
비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갈로텍은 스스로 자신의 질문에 대답했다.
"예. 그 착한 도깨비들은 눈 앞에서 군령자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는 동
정심 때문에 그렇게 하곤 하지요. 자신의 영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많
은 영들의 부탁을 차마 뿌리치지 못해서 그렇게 하지요."
[설마 당신이 불신자들에게서 동정심을 느꼈다는…]
"아니오. 영생이 아닌 다른 목적도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받은
대가는 지식입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속엔 300여 년 전 카시
다의 나뭇꾼이었던 자도 있습니다."
나뭇꾼이라는 말에 비아스는 비늘을 곤두세웠다. 갈로텍은 책상 위를
흘깃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저 대금은 200여 년 전의 대금 제작자의 솜씨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40여 년 전에 군령의 일부가 된 대금 연주자에게서 배운 솜씨로 연주한
거죠. 그 자는 음악에 익숙지 않은 나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제가 훌륭
한 수준이라고 말해줬습니다만, 솔직히 그게 칭찬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군요."
[어떻게 군령자를 만났다는 겁니까? 당신이 한계선 이북으로 올라가기
라도 했다는 겁니까?]
"음, 이제 제 과거사를 알고 싶어진 건가요? 이해됩니다만 그건 지금
상황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제가 군령자라는 사실을
당신이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군령자인 제 안에 화리트가 있다는 사실
을 인정하는 겁니다. 특히 후자의 사실을 놓고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 전에 먼저 이 밧줄을 풀어주셨으면 좋겠군
요."
비아스는 한참 동안 갈로텍을 바라보다가 밧줄을 푸는 대신 팔짱을 끼
며 닐렀다.
[진짜 당신 속에 화리트가 있는 겁니까?]
"다시 보여드릴까요?"
[…어떻게 화리트의 영을 받아들인 겁니까?]
"죽어가던 화리트를 발견한 건 접니다. 그 때 그의 영을 받아들였죠."
[화리트가 군령의 일부가 되길 원했다고요?]
"아니오. 여신의 신랑이 되길 원했습니다."
[무슨 말이죠?]
"제 속엔 여자들도 있습니다. 그녀들 중 설득력이 좋은 여자가 나서주
었지요. 그러자 화리트는 저를 그의 여신으로 착각했습니다. 곧장 걸려
들더군요."
갈로텍은 몹시 재미있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속은 것을 알고는 제 속에 틀어박혀서 아무 니름도 하지 않고 있습니
다. 하지만 누가 그를 죽였는지 물어보자 더 이상 침묵하지 못하더군요.
그 감정이 어찌나 강렬한지 거의 제가 살해당한 기분이었습니다. 하긴
제가 살해당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군요."
[제게 뭘 원하는 겁니까?]
"밧줄을 풀어주길 원합니다. 팔이 아픈데요."
[아니, 당신을 죽인 대가로 제게 뭘 원하는 건지 말해보시죠.]
갈로텍은 비아스의 니름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길었고,
비아스는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겨우 웃음을 멈춘 갈로텍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어제 당신의 거사에 대해 만족감과 고취감을 느꼈다고 말한 것,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무슨 뜻이죠?]
"간단히 말씀드리죠. 저를 포함한 어떤 집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
단은 나가의 적과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비아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의 적이라고요?]
"예. 불신자들과 손을 잡고 나가에게 해악을 끼치려는 자들이 있습니
다. 그 배신자들의 계획에는 어떤 나가를 하인샤 대사원으로 파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불측한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파견자를 찾아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
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초조했지요. 그런데 당신이 적출식 날 수호자로
변복하고는 화리트 마케로우를 죽였습니다. 그 직후 우리의 배신자들은
일련의 재미있는 모습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거의 인상적이라 할 정도였
죠.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찾아내어야 할 자가 바로 화리트였음
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로서도 하기 힘든 일을 고맙게도 당
신이 대신해준 것 또한 알게 되었죠."
갈로텍의 설명을 들으며 비아스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화리트가 나가의 배신자였다고요?]
"정확하게 말하면 배신자들의 하수인이지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
셨나요?"
[못 느꼈습니다.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 얼빠진 꼬마가 그런 배
짱 좋은 일을 벌이다니. 솔직히, 당신이 말한 그 배신자들이니 하는 말
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요. 불신자들과 손을 잡은 배신자들이라고요?
증거가 있습니까?]
갈로텍은 웃음을 거뒀다. 그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애석하게도 당신을 납득시킬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그 자들에게 처벌을 내릴 수 있었겠지요. 하지
만 나가를 배신한 나가들은 엄존합니다. 제 속에 있는 화리트를 추궁해
보았지만 화리트는 절대로 대답하지 않더군요."
[당신 스스로 당신을 추궁한다는 말입니까? 모순 같군요.]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갈등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이렇게
도 하고 싶고 저렇게도 하고 싶은 경우 말입니다. 분명히 있겠지요. 그
렇듯, 한 사람의 영도 자기모순적인 상황에 얼마든지 빠져들 수 있습니
다. 저처럼 여러 명의 영을 한 몸에 가지고 있는 군령자의 경우엔 영들
끼리 서로 싸우기도 합니다."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갈로텍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없었다.
"그 배신자들의 무서운 계획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그 자들의 정체를
드러내어 처벌하지 않는 이상 언제 또다시 그런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당신이 말한 그 증거라는 것은 우리도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부른 것입니다."
[이제 본론입니까?]
"예. 배신자의 일원으로 추측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리트가 죽기 전
까지 그에게 붙어다녔고 지금은 카린돌 마케로우의 곁에 붙어 다니는 사
람이 있지요. 아마도 화리트 살해의 실상을 알아내기 위한 목적인 것 같
습니다."
비아스는 경악하며 닐렀다.
[스바치!]
"예. 그 스바치라는 남자와 또 한 사람, 카루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화
리트가 죽기 전 그 두 사람은 마케로우 가문에 머물렀지요. 심지어 다른
남자들이 페이 가문에 잔류했을 때도 화리트와 함께 마케로우 가문으로
돌아왔지요. 기억나십니까?"
비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로텍은 말했다.
"그 스바치라는 자를 조사하면 뭔가 효과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몇 명의 남자들을 마케로우 가문에 보낼 생각
입니다. 스바치를 조사하기 위해서죠.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간단합니
다. 그 남자들을 보살피고 도와주십시오."
'남자들'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비아스는 다른 말들을 모두 잊어버렸
다. 비아스는 애써 관심 없는 듯이 닐렀다.
[몇 명입니까?]
"다섯 명입니다. 유사시에 스바치를 제압할 정도의 인원이어야 하니까
요."
기쁨에 몸이 떨릴 정도였지만 비아스는 냉철한 이성을 잃지 않았다.
[묘하군요. 지금 카린돌이 벌이는 짓거리를 모르는 건 아닐 텐데. 그냥
카린돌 곁을 지나가기만 해도 마케로우 가문에 끌려올 수 있을 정도인데
왜 굳이 제게 부탁하는 겁니까?]
"혹 카린돌 마케로우가 스바치에게 회유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경우 마케로우 가문 내에 카린돌을 상대할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남자
들은 여자를 상대할 수 없죠. 카린돌이 저희가 보낸 남자들을 쫓아버리
려 할 때 앞장서서 그 남자들을 보호할 마케로우의 여인이 필요합니다.
혹 당신의 여동생이 회유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스바치를 체포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가문 내에서 도와줄 사람은 있어야 합니다."
비아스는 당장 그러라고 니르지는 않았다. 대신 못마땅한 듯이 닐렀다.
[확실치도 않은 일로 우리 가문에 음모꾼들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습
니다.]
갈로텍은 다급한 표정이 되었다. 고집스럽게 계속하던 말까지 포기하고
갈로텍은 니름을 보내었다.
[마케로우. 이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나가의 배신자들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비아스는 이 작은 승리에 도취되었지만 그것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 배신자들의 존재 자체가 확실치 않은 거잖습니까?]
[…다섯 명의 남자들이 당신에게 봉사할 겁니다. 그걸로 만족하실 수
없습니까?]
[제가 남자들에게 목을 맨 여자로 보입니까?]
갈로텍은 이 뻔뻔스러움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아스 마케
로우가 서른네 살이 될 때까지 자녀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은 갈로텍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갈로텍은 약간 언짢은 기
분으로 닐렀다.
[저는 화리트의 영을 데리고 있습니다. 마케로우.]
[이젠 협박이군요. 그래서 저를 고발하시겠다고요? 당신이 여신께로 향
하는 제 동생의 영을 납치했다는 것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저를
고발하실 거죠?]
갈로텍의 몸은 여전히 밧줄에 묶여 있었고 이젠 그 정신까지도 결박당
하는 기분을 느꼈다. 갈로텍은 이를 갈았다. 더 이상 웃을 여유가 없는
듯했다.
[마케로우. 우리는 당신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알지 말아야 할 것을
많이 안 것 때문에. 어쨌든 우리들 중엔 당신이 당신 동생 뿐만이 아니
라 수호자 유벡스까지 죽인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
다.]
[해친다? 저는 심장을 적출했습니다. 그 늙은 유벡스가 당한 일을 그대
로 돌려주겠다는 겁니까?]
[천만에! 그런 야만적인 방법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이 심장을 적
출했기에 오히려 사용 가능한 방법도 있습니다!]
비아스는 깜짝 놀랐다다. 화를 참지 못하고 니른 갈로텍은 곧 자신의
니름을 후회하는 듯했다. 비아스는 날카롭게 닐렀다.
[그게 무슨 니름이죠?]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니르셔야 될 것 같군요. 그걸 닐러주면 제가 당신들을 도와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선 더욱 더.]
갈로텍은 의아한 듯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갈로텍은 조심스럽
게 닐렀다.
심장 파괴에 대한 갈로텍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아스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비아스는 되물었다.
[제 심장을 터뜨리면 제가 바로 죽는 겁니까?]
[반드시, 확실히, 돌이킬 수 없이.]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그렇게 협박하지 않았죠?]
[이보세요. 마케로우. 심장 파괴는 전가의 보도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공개되면 사람들
이 우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안전 문제만은 아닙니다. 겁을 집
어먹은 사람들이 심장 적출을 거부할 테니 나가들은 멸망하고 말 겁니
다. 조금 전엔 홧김에 그렇게 닐렀지만, 사실 당신이 거절하면 저는 당
신께 제가 말한 것을 다 잊어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아스는 '전가의 보도'가 무슨 니름인지 궁금했지만 맥락에 비추어 그
의미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군령자이니 나가에겐 있지도 않은 관용
어를 쓸지도 모른다.
비아스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남자들을 보내십시오.]
갈로텍은 반가운 얼굴로 비아스를 올려다보았다. 비아스는 갈로텍을 내
려다보며 싸늘한 표정으로 닐렀다.
[지금은 그냥 넘어가지만, 언젠가 이 건에 대한 대가를 받도록 하지요.
당신들이 제게 줄 수 있는 것이 있겠지요.]
갈로텍은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남동생을 죽이고 심장탑의 수호자
를 죽인 여자가 뻔뻔스럽게 대가를 거론하고 있었다. 그 죄를 들추지 않
는 것을 고마워해야 할 주제에. 게다가 그녀가 가장 바라는 것을 다섯이
나 손에 넣은 주제에. 하지만 갈로텍은 분통을 터뜨리지 않았다. 무익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아스가 그대로 몸을 돌리자 갈로텍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
다.
[마케로우! 가시기 전에 이 밧줄은 풀어주셔야죠.]
갈로텍은 다시 분노가 치솟는 것을 억지로 삭혀야 했다. 비록 갈로텍이
요구한 것이지만 비아스는 계속 갈로텍을 묶어놓은 채 대화했다. 포로나
죄인을 다루는 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갈로텍이 그것을 요구
한 것도 비아스를 위해서였다.
비아스는 거만한 몸짓으로 갈로텍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밧줄에 손을
가져가는 대신 비아스는 엉뚱한 니름을 했다.
[풀어드리기 전에, 화리트를 다시 앞으로 내세워 주시겠습니까?]
갈로텍은 의아해 하면서도 비아스의 요청대로 했다. 그가 앞에서 비켜
나자마자 뒤에서 도사리고 있던 화리트가 성난 하늘치 같은 기세로 의식
의 전면으로 뛰쳐나왔다.
[비아스! 사악한 살인마, 죽이겠어!]
비아스는 수호자의 뺨을 후려쳤다.
옆으로 홱 돌아간 고개를 힘겹게 제자리로 돌린 화리트는 한 동안 니름
도 잊은 채 어이 없다는 듯이 비아스를 올려다보았다. 비아스는 왼손으
로 오른손을 움켜쥔 채 닐렀다.
[죽었는데도 여전히 그 건방진 성격을 못 버렸구나. 두 번 죽여 마땅한
놈.]
화리트는 성난 하늘치처럼 포효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갈로텍이 다시 앞
으로 나섰고 화리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앞으로 나선 갈로텍은 혀를 굴려 입 안을 조사했다. 그의 예상대로 입
안이 터져있었다.
비아스가 밧줄을 다 풀어줄 때까지 갈로텍은 아무 니름도 하지 않았다.
들끓는 분노를 억누르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잔치는 끝났다! 집에 돌아가… 잠깐. 여기가 너희 집이던가?"
지그림 자보로를 쥐고 흔들던 티나한은 잠시 자신의 말에 혼란을 일으
켰다. 그 때문에 지그림은 티나한의 관심에서 잠시 해방되었다. 하지만
지그림은 그 사실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티나한은 지그림의 왼쪽
발목을 움켜쥔 채 흔들고 있었고, 따라서 티나한이 그의 존재를 잊어버
렸다는 것은 지그림이 그대로 떨어졌다간 목뼈에 상당한 무리가 갈 높이
에 거꾸로 매달린 채 방치된다는 뜻이 된다. 지그림의 입장에서는 어쨌
든 지붕 위로 도망치는 모험은 시도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지그림은 상대방의 관심을 끈다는, 보통의 피해자가 선택
하기 힘든 선택을 해야 했다. 지그림의 악쓰는 소리에 티나한은 가까스
로 지그림의 존재를 깨달았다.
"말 실수 했다. 다시 하자. 잔치는 끝났다! 나는 이만 떠나겠다! 아냐,
아냐. 젠장! 이건 근사하지 않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그림은 다시 수십 미터나 되는 높이에 방치되고 말았다. 아래쪽을 바
라보았지만, 그다지 인생의 즐거움을 환기시킬만한 장면은 없었다. 저
아래 왕궁의 마당에서는 여기저기가 심하게 상한 병사들이 심하게 손상
된 무기들 사이에 널브러져 있었다. 케이건과 비형이 그들 사이를 돌아
다니며 '그다지 품위 향상에 도움되는 일이라 할 수 없으니 죽은 척은
그만하고 일어나라'고 권하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절대로 그 말을 따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문득 생각난 듯 지붕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티나한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 허공에서 허
우적거리고 있는 지그림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티나한. 적당히 하고 내려오시오. 잘못해서 놓치기라도 하면 당신은
후대인들에게 상당한 갈등을 던져주게 될 거요."
"갈등?"
"자보로의 후대인들이 별비의 발톱 자국이 남은 돌과 마립간의 머리 자
국이 남은 돌 중 어느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지 고민하게 될지도
모르잖소."
엎어져 있던 병사들 중 몇 명의 등이 들썩거렸다. 확실히 죽은 자는 없
는 듯했다. 티나한은 낄낄거리며 지붕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지그림은
숨이 막히는 비명을 내질렀지만 티나한은 사뿐하게 마당에 내려섰다. 그
리고 티나한은 지그림을 놓아주었다. 불쌍하게도 지그림은 바닥에 주저
앉아 심하게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케이건은 그런 지그림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마당 한
쪽엔 어깨에 아스화리탈을 얹은 륜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키타
타 자보로가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반쯤 녹아내린 검이 떨어져
있었다. 티나한의 압도적인 폭력에서 조카를 구출하기 위해 키타타는 인
질을 잡는다는 시도를 했다. 그가 륜을 목표로 정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만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갑자기 날아든 아스화리탈은
키타타를 좌절시켰다.
한 때는 그의 자존심만큼이나 날카로왔지만 이제는 쇠몽둥이 정도의 치
명성 밖에 발휘할 수 없게 된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키타타는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케이건을 본 키타타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
다.
"나는 조금 전 자연의 크나큰 실수를 발견했소."
"그게 뭐요?"
"레콘 같은 끔찍한 종족을 세상에 낸 것."
륜은 마당을 둘러보며 키타타의 말에 찬성했다. 케이건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도 자연의 실수 한 가지를 발견했소."
"뭔지 말해보시오."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없는 용에 집착하여 레콘 길손을 화나게 만드는
어리석은 자들을 내었다는 것."
키타타는 슬픈 눈으로 케이건을 올려다보았다. 케이건은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좀 더 경의를 가지고 길손을 대접하는 편이 좋을 거요. 대장
군. 손님 방의 불을 빼거나 자는 손님의 머리를 쇠망치로 후려치는 대
신."
"유념할 만한 권고인 것 같군."
의외로 담담한 키타타의 대답에 케이건은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조카이자 마립간의 명령이라서 억지로 한 거였소?"
키타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그들에게
걸어오는 비형의 뒤쪽으로 여전히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지그림 자보로
를 본 케이건은 다시 키타타에게 말했다.
"저 상식 부족한 이에겐 말해봐야 헛수고일 테니 당신에게 말해두겠소.
키타타 자보로. 왕놀음을 하고 싶다면 그건 지그림 자보로의 자유일 거
요. 하지만 수백년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성
취하지 못한 것에 도전할 때는,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더 유익한 일이
있지는 않을까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거요. 자보로는 좋은 땅이
오. 당신 씨족은 항상 훌륭한 마립간들을 배출했고. 좋은 땅과 좋은 마
립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왕놀음 이외에도 많을 거요. 그에게 말해주시
오."
"많은 일이 있지만 왕놀음은 안